설교
다섯 번째 기적-물 위를 걸으심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6:16-21약 9분 분량
그 어둡고 바람 불던 밤, 시커먼 파도가 넘실대던 ‘갈릴리’ 호수 위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힘들여 노를 젓고 있었는지, 그렇게 힘들여 ‘가버나움’으로 가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제자들만 타고 있었는지, 그 시간에 예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오천 명에게 떡을 먹이신 예수님이 계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갈릴리’ 호수는 여느 때처럼 폭풍우가 세차게 몰아치고 있고, 하필 그와 같은 때에 제자들끼리 배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밤이 깊이 드리워져 있어(17절), 예수님의 부재(不在)에서 오는 절망스러운 분위기가 더욱 강조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요한’ 화자가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것 같기도 합니다.
<누가>는 이번 이야기를 아예 생략해 버렸습니다만, 흥미롭게도 <마가>와 <마태>는 <요한>에서처럼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 다음에 곧바로 이 이야기를 한 쌍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다와 제자들. 이들 세 복음서 중에서 <마태>가 이번 이야기를 가장 소상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베드로’의 도전과 실패에 대해서 알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 물 위를 걸으려 했으나 이내 물에 빠져버렸고, 이에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면서 질책하십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제자들과 바람은 잠잠해 집니다. 제자들은 한 사람씩 배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진실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마 14:28-33).
하지만 <마가>는 <마태>에 비해서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나 제자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훨씬 더 거칠고 무례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일부 부정확한 서술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호수) 건너편 ‘벳새다’로 향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만, 실은 ‘벳새다’는 건너편이 아니라 멀리 북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람이 나옵니다. 바람이 너무 거세어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시기 전까지 그들은 그 밤의 절반 이상을 노 젓는 데에 소모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의아스러운 점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오신 것이 아니라, 실은 그들을 지나치려 했다는 점입니다(막 6:48).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하고 두려워 큰 소리를 질러 예수님의 주의를 끌게 된 것 뿐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을 안심시키시려고 배에 오르셨는데, 이후 바람이 멈추고, 이에 제자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예수님께 고맙다는 인사조차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분이 누구인지 여전히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의 설명을 들어봅시다: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2)
아니, 무슨 이야기의 결말이 이렇습니까? 영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마태>는 그래도 제자들이 믿음의 고백은 드렸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마가>는 제자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자신도 매우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마가>는 제자들의 심장이 굳어져 있었다고 말합니다. 심경화증을 앓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심장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통로일 텐데 그것이 꽉 막혀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들이 모두 심장질환자가 되어있었을까? 일상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바람과 파도 때문이었을까? 아닙니다. 이들은 학교 선생님이나, 시인이나, 공무원이 아닙니다. 힘든 일에 익숙한 노동자이자 어부(漁夫)입니다. 어지 간 한 육체적인 어려움은 견디고 이겨낼 줄 압니다. 폭풍우 따위는 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어부가 파도를 두려워해서야 무슨 어부가 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그들을 진정시키고,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시고, 바람을 멈추신 이후에도, 여전히 예수님이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람을 잠잠케 하셨을 때, 제자들은 대경실색(大驚失色)을 했는데, 그것은 풍랑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고요함 때문이었습니다. <마가>는 그들이 마음이 둔하여져서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장애가 있었고, 자신들에게 남아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노를 젓고 또 저었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밤을 새워서라도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그날 밤 그들이 전혀 준비하지 않았던 것이 있었다면, 그들이 결코 초청하지도 않았는데, 가장 이상한 방법으로, ‘갈릴리’ 호수 위를 걸으시던 주님을 뵙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오실 것이라고 예고도 하신 적도 없고, 또 그들에게 오실 의향도 없었습니다. 그냥 지나치려 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그분을 보지 못했고, 대신 유령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꽉 막힌 심장으로 볼 수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유령으로, 자신들을 해치려 하는 누군가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 때문에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그냥 지나치려 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두려움에 울부짖었을 때, 즉각 멈추시고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막 6:50; 요 5:20). 그리고 바람은 멈추었습니다(막 6:51). 그리고 배는 곧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요 6:21).
이들은 또 한 번 망연자실(茫然自失)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떡에 대해서도, 바람에 대해서도, 또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심장은 굳어져 있었으나, 주님은 배에 올라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의 심장으로 주님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니, 주님께서 자신의 심장으로 그들을 받아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교회를 하나의 배로 비유하는데 아주 익숙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 화자는 그의 이야기 속에 주님의 임재가 없는 제자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를 비롯해서 오늘날 세계의 많은 교회에 대해서 이보다 더 효과적인 묘사를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에 소수의 무리가 있습니다. 이들은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커다란 문제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이 탄 배는 밖으로는 세속주의, 그리고 안으로는 불확실성의 바람에 흔들려 출발점에서 멀어져, 자기가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르고 분명한 목적지도 없이 떠나가고 있습니다.
그 안에 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들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엇인가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를 저으며 애쓰지만 앞으로는 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그들에게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이 늘 함께 하신다는 분명한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심장은 아주 굳어있으며, “이미 어두운” 것입니다. 늘 곁에서 바라보며 살던 그 호수가 이렇게 두렵고 절망을 느낄 정도로 낯선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제자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바람이나 거친 파도가 아니라 주님이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 역시 하나님이 두려울 때가 많습니다. 마치 그분이 나에게 괴로움을 더하게 하시려고,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실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그런 경험을 한 바 있습니다. 훗날 이곳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고통스럽게 그의 지난 실패를 돌아보도록 하시면서 목자의 사역을 맡기려고 하셨을 때, 그는 두려워 또 한 번 뒤로 물러나고 있습니다(21:15-21).
이 점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게도니아’로 가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음에도, 결국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행 16:9, 24).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위해서이지만, 정작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분열과 갈등이 야기되기도 합니다. 가족 사이에서도 그러합니다(마 10:34-39). 또 환영 받기 보다는 거부당하기도 합니다(15:18-21).
그러나 주님은 나더러 당신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20절). 왜입니까? 그분의 헌신은 무조건적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그분이 보이지 않고, 그분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분에게 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거나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적은 단 한 번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한계가 무엇이든 간에 그분은 결코 교회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 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바다와 주님. 이것이 <요한>이 말하고 싶은 전부일까요? <요한>은 <마태>나 <마가>보다 할 말이 더 많은 듯싶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들어봅시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20절). 이 말씀은 단순히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정도 이상입니다. 그보다 훨씬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음을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표현, “내니”는 원어(原語)로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입니다. 이 표현은 예수님의 신성(神聖)을 드러내는 엄청난 자기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시내’ 산에서 ‘모세’가 들었던 ‘야훼’ 하나님의 이름,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와 같은 표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연과 자연법칙을 통제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에서 노래하고 있듯이, 그분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는”(욥 9:8) 분이십니다. 유월절이라는 배경을 생각해 볼 때, 이 선언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해방과 함께 곧바로 광야에서 방랑하게 되었고, 초자연적인 ‘만나’의 공급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체험들은 홍해를 거친 후,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 그 바다를 가르심으로써 자신의 권능과 능력을 보이신 것을 경험한 후에 맛보게 된 것입니다(출 12-14). 지금 예수님께서 파도와 바다를 다스리시면서 물위를 걸으심으로써, 그 옛날 홍해를 걸으시던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현현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은 “출애굽” 당시 홍해의 기적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 물들이 주를 보고 두려워하며...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고 주의 첩경이 큰물에 있었으나(시 77:16, 19)
그리고 같은 <시편>은 갈릴리 호수의 기적을 마치 예고라도 하듯,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 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 107:29-30)
‘갈릴리’ 호수 건너편에 무사히 도착한 사건 역시 하나의 기적임에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그 배에 들어 오시자마자 제자들은 목적지에 도달해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21절). ‘고데’(F. L. Godet)는 이 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로 우리는,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시는 지극히 장엄하고 위엄 있는 권능을 행사하신 후에, 그 분은 배 안에 가만히 앉아 있고 제자들이 애를 써서 노를 저어 항해를 계속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예수님은 배 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방금 그처럼 멋지게 보여주신, 중력과 공간을 이기고 승리한 힘을 그 배에 전달하셨다.
교회와 주님. 그리스도의 임재는 그 분의 낙담한 교회와 필요한 곳에, 그리고 개인들의 삶에 새로운 소망과 능력을 안겨 줍니다. 세상이 아무리 위협적으로 보인다 해도 결정적인 것은 세상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파도 위로 걸어오시며 교회는 그 분의 임재에 대한 체험을 회복하고 나서, 그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길을 당당히 걸어갈 것이며, 마침내 창조주 주님께서 우리가 가야 할 그 “영원한 해안”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바람과 폭풍 가운데서 들려오는 예수님의 말씀, “내니 두려워 말라”가 그 어떤 비바람과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들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이제 응답합시다. 그리고 감사합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