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나님의 일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6:27-29약 11분 분량
연극이나 영화의 등장인물은 각자가 맡은 역할과 대화가 따로 있습니다. 주인공이 조연 역할을 하지 않으며, 조연이 주인공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조연이 주인공 역할을 하게 되면, 그야말로 KBS <개그콘서트>의 “엑스트라”라는 코너에서 보듯이 완전히 우스개가 되어버립니다.
가정에서도 부모의 일이 있고, 자녀의 일이 다릅니다. 학교에서 선생이 해야 할 일이 있는가 하면, 학생이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며 인간의 일은 무엇입니까? 역할이 뒤바뀌게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믿음과 행함.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 돌아다니는 무리들과의 두 번째 대화에서 이 “역할”에 대해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무리가 자기를 찾는 동기가 순전히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것임을 아시는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27절상).
‘유대’인들이 이 말씀의 의미를 모를 리 없습니다. “썩을 양식”과 “영생의 양식”, 그리고 “일” 말입니다. “영생의 양식”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말씀” 즉 “하나님의 율법”이며, “일”은 하나님의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예수님에게 재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되묻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절).
그들이 몰라서 묻는 질문입니까? 예수님께서 방금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말입니다: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28절). 양식을 그저 값없이 주겠다는 데도 스스로 찾아 나서겠다는 심보는 또 무엇입니까? 신학자 ‘바클레이’(W. Barclay)는 ‘유대’인들의 인류 분류 방식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인간을 세 부류로 나눈다고 합니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그리고 중간 위치에 있는 사람. 처음 두 부류의 사람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만, 세 번째 부류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습니다. 즉 중간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따라 선인이 되거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그들이 정해놓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수행하면 선인이 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인지 <성경> 속의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그 일”에 대해서 알고 싶어하고 질문합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만나 이렇게 묻습니다: “선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눅 18:18) 오순절에 모인 ‘유대’인들도 ‘베드로’ 사도에게 같은 질문을 합니다: “형제여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할꼬?”(행 2:37)
이 질문은 비단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빌립보’ 감옥 간수가 그곳에 갇혀있던 ‘바울’ 사도에게 물었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요?”(행 16:30) 아버지를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고 돌아온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하는 말은 어떻습니까? “아버지여, 나를 아들로 여기지 말고 당신의 종들 중의 하나로 여기소서”(눅 15:19). 그의 이 말속에는 종에 합당한 대우, 즉 그가 행한 일만큼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간청인 것입니다.
이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인과응보(因果應報) 즉 천국이든 극락이든 행함의 대가로 갈 수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이런 태도는 과연 겸손한 것입니까? 책임 있는 자의 태도입니까? 혹시 하나님을 빚쟁이로 몰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내가 이 정도 했으니 그가 나를 구원해 줄 의무가 있다는 식 말입니다. 혹시 내가 하나님을 만족시킬 만 한 완전한 의를 추구할 수 있다고 거만을 떠는 것은 아닌가요?
하나님의 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행위는 어디까지 행위 즉 “사람의 일”일 뿐이라고 말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일”은 “하나님의 일”과는 전혀 다르다고 말하십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빌리보’ 감옥 간수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행 16:31).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 역시 같은 질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이 질문은 애초 잘못된 것입니다. 역할 구분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 없습니다. 주인공이 누구이며 조연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의자와 재판관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예수님의 답변인 즉은 바로 이런 인식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려 하지 말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의 일이다. 너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일을 믿고 받아들일 뿐이다. 그것이 너를 위한 구원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은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내 앞으로 계산하라. 이것을 믿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이스’ 복사님은 <빌레몬서>를 통해서 아주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빌레몬’은 ‘골로새’에서 살았던 한 부자였습니다. 그가 부자라는 사실은 ‘골로새’ 교회가 그의 집에서 모였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점 외에도 그가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의 노예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바울’ 사도의 선교 여행 중에 그를 통해서 회심을 경험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골로새서>에 의하면 정작 ‘바울’ 자신은 ‘골로새’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던 것 같으며, 따라서 ‘빌레몬’이 회심을 경험한 곳은 ‘골로새’가 아닌 다른 도시, 즉 ‘에베소’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는 회심 이후 ‘골로새’로 돌아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가 ‘골로새’로 온지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의 하인 중에 ‘오네시모’라는 자가 도망을 해버렸습니다. ‘빌레몬’이 그를 찾아 나섰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하인이 도망을 쳤다는 사실은 주인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가벼운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법에 따르면 도망친 노예는 잡아 죽이도록 규정하고 있었는데, 도망친 자를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은 심각한 위법 행위가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오네시모’는 그냥 도망친 것이 아니라 주인 ‘빌레몬’의 재산을 훔쳐 달아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아마 ‘오네시모’는 이렇게 훔친 돈으로 ‘골로새’로부터 멀리 ‘로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로마’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훔친 돈으로 흥청망청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대개 쉽게 얻은 재물은 쉽게 써버리기 마련인 것이지요. <누가복음>의 집나간 작은 아들처럼 살았을 것이겠지요. 그리고 당연히 이 기간 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리가 없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계속 지켜보고 계셨으며, ‘바울’을 만나도록 해주셨습니다. 이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복음을 전해주었던 자입니다.
어떻게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날 수 있었을까? 이 역시 알 길이 없습니다. 아마 두 사람은 감옥에서 만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일생에 간여하는 방식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오네시모’는 ‘바울’을 만났으며, 그는 거듭났습니다.
‘오네시모’는 거듭났을 뿐만 아니라, 양육 받고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를 키우고 자라게 해주었을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 그의 영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 시작했으며, 그의 양심은 서서히 되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성경공부 시간에 그는 마침내 그의 가슴 깊숙이 숨겨두었던 고민과 두려움을 털어놓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합니다.
하지만 그의 양심은 이미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양심은 ‘바울’이 말하기도 전에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이전 주인에게 돌아가 용서를 구하고 벌을 달게 받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훔친 돈은 이미 다 탕진해 버렸고, 돌아갈 여비조차 없습니다. 돌아간다 해도 붙잡혀 죽는 일 외는 달리 기대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이제 저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바울’은 과연 무어라고 대답했겠습니까? 그는 ‘오네시모’를 위한 담보가 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 옛날 ‘유다’가 ‘베냐민’을 위한 담보가 되겠다고 자원해 나선 것과 같습니다(참고. 창 43:9). ‘바울’도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보내면서 스스로 담보가 되겠다고 하며, 그를 위해 편지를 써주고 있습니다:
18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몬 18-19상)
‘바울’의 친서를 들고 달려가고 있는 ‘오네시모’를 상상해 봅시다. 그의 기대와, 즐거움과, 기쁨과, 희망으로 벅찬 가슴을 안고 달려가고 있는 그의 모습 말입니다.
한편 ‘빌레몬’은 어떻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숨을 헐떡이며 자기 앞에 나타난 ‘오네시모’를 바라보는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는 상상합니다: “아니 이 자가 누구인가! 왜 다시 돌아왔단 말인가? 훔친 돈이 다 떨어져 내게 더 구걸을 하러 왔단 말인가?”
마침내 마주 선 두 사람. 먼저 ‘빌레몬’이 분노를 삭이며 ‘오네시모’에게 쏘아 붙입니다: “도대체 네가 무슨 낯으로 다시 내 앞에 섰단 말인가? 정말 놀랐는걸.” 그러자 ‘오네시모스’는 자신을 위한 변명 대신에 말없이 도포자락으로부터 두루마리 서신을 꺼내어 주인에게 건네주며 말합니다: “주인님, 잠깐만요. 아무 말씀도 드릴 것이 없습니다. 단지 딱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이 서신을 봐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빌레몬’은 할 수 없이 두루마리를 받아 봉인 된 것을 뜯고 서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서신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로부터.” 그는 놀랍니다. “아니 이럴 수가! 이 편지는 ‘바울’ 사도가 보낸 것 아닌가!” 그리고 ‘빌레몬’에게 묻습니다: “네가 어찌 그를 만났단 말인가?”
‘오네시모스’는 그렇다고 답하면서 고백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분을 로마 감옥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잠깐” 하며, ‘빌레몬’은 편지를 계속 읽어 내려갑니다. 아마 그의 아내 ‘압비아’도 불러 함께 읽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편지 속에는 아내의 이름도 함께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1-2절)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두 사람은 다음 구절에 이르러서는 분노가 의구심으로 바뀝니다: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9-10절)
“아니, 이 자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단 말인가? 하지만 종교를 이용해서 자신의 잘못을 덮고 유야무야하려는 자는 이자가 처음은 아니었지.” 두 사람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계속 읽어내려 갑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11-12절)
여기까지 읽고 ‘빌레몬’은 잠시 편지에서 눈을 떼고는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바울’ 선생이 이 녀석에게 완전히 감동을 먹은 모양이군. 그러나 나는 달라. 선생은 그를 완전 회개한 그리스도인으로 생각하고 있을이지 모르겠다만, 나는 그가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그 빚을 갚기 전에는 결코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할 수 없어.” 이렇게 다짐하며 편지를 다시 읽어 내려갑니다.
18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19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18-19절)
이 부분에 이르러 ‘빌레몬’은 완전히 압도당하고 맙니다. 이제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자신의 죄를 이미 자백했으며, ‘바울’ 선생과 자기와의 확고부동한 관계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의 편지를 가지고 되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선생이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즉 그를 위한 “대속”(代贖)이 되겠다는 것이지요. ‘오네시모’는 이러한 ‘바울’을 철석같이 믿고 ‘빌레몬’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빌레몬’이 그를 용서했을까요? 용서했다면 누구 때문입니까?
그리스도의 대속. <빌레몬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을 이해하기 위한 완벽한 우화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맡은 역할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빌레몬’의 역할은 성부 하나님입니다. 나와 여러분은 ‘오네시모’입니다.
우리가 행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훔친 것은 무엇입니까? ‘아담’이 무엇을 훔쳤습니까? 하나님에게 속한 그 모든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 그분의 이름, 그리고 예배와 순종, 그 모든 것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공동체로부터 더욱 멀리 도망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내 부끄러운 부분을 조금이라도 감추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렇지 않습니다. 허물을 덮기 위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개과선천입니까? 종교적 행위입니까? 전도입니까? 예배입니까? 성경공부입니까?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대답은 당신의 몫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일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일은 나의 일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일은 우리를 대신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서 담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의 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은 바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밖에는 아무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