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1과
모두에게 선을
김태정 목사갈라디아서 6:1-10약 30분 분량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10절상)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5:16, 25상)이나,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5:18)이나, “성령으로 사는 것”(5:25하)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사도는 이곳에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지침들을 권면의 형식으로 제시함으로써 이들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이들 권면의 대상이 다소 불분명해 보이기는 하지만 대략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 개인적인 책임; (2) 단체적인 책임. 그러나 이들 권면만으로 구체적인 상황을 예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즉 이들 권면이 구체적으로 교회 내의 어떤 실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지 분명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자료와 편집. 따라서 본 단락의 목적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이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자는 이 단락이 <갈라디아서>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권면의 내용이 일반적이며,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과는 직접적으로 연관도 없는 일련의 전통적인 경구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기껏해야 제 삼자가 사도의 원래 서신에 덧붙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갈라디아서>가 그 스타일에 있어 전혀 '유대'적이지 않다고 주장하기까지 하는데, 그 이유는 서신 전체적으로 적어도 30여 군데에서 다른 작가들의 편집적 손길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중 가장 긴 편집에 해당하는 본문이 5:13-6:10의 권면이라는 것입니다.
형식과 구조. 열 개의 절로 이루어진 본문의 구조와 관련해서도 견해가 분분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본문을 이루고 있는 일련의 권면들이 상호 내적인 관련성이나 일관성이 없다는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베츠(Betz)는 5:25-6:10 사이의 본문을 열한 개의 단락으로 세분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권면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서 “형제들아”의 호칭이 시작될 때마다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1:11; 3:15; 4:12; 4:28, 31; 5:11, 13; 6:18), 이곳에서부터 역시 새로운 권면이 시작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권면의 내용은 앞서 언급한 바처럼, 교회 내에서 개인적인 책임 및 단체적인 책임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물론 이들 권면이 어떤 특정 사안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라기보다는 일반적이고 다소 추상적인 면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도 자신은 물론 당시 수신자들에게는 이들 권면이 어떤 상황을 염두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 중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권면은 6절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아마도 이 구절은 독특한 지시사항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별도 취급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마찬가지로 10절 역시 별도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단순히 이 단락(6:1-10)의 결론으로서 뿐만 아니라, 5:13에서 시작한 권면 전체에 대한 결론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거니와, 이 단락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련의 권면들은 그 성격에 있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주로 윤리∙도덕적 경구들로서, 사도는 당시의 관례를 따라 이들을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이 권면 속에 채택하여 도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그는 5:19-23 사이에서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에 대한 예를 제시하기 위하여 당시 회자되고 있던 "악한 행위"와 "선한 행위"를 대표하는 일련의 목록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들 목록은 당시 세속 작가들이 그들의 글 속에 윤리∙도덕에 관한 지침과 대비를 위해서 사용하던 것들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6:1-10) 사도는 당시 세속 작가들이 사용하던 윤리∙도덕에 관한 일반적인 경구들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단락 내에서 적어도 네 곳에서 그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헬라어 성경>에서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 종속절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ㅇ이 모두 그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이기 때문임이라(3절)
(왜냐하면) 각각 자기의 짐을 져야 할 것이기 때문임이라(7절하)
(왜냐하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기 때문임이라(7절하)
(왜냐하면)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기 때문임이라(9절)
누구나 인지하듯이 본문의 형식이나 내용과 관련해서 여전히 확실치 않은 부분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5장 전체의 권면에 덧붙여진 일종의 색인(索引) 정도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현재의 본문이 있는 그 자체로 새로운 일련의 권면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연합적 책임들(1-6절)
사례 1: 실제 생활에서 “성령의 열매”가 “육체의 행위”를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는 무엇일까요? 그 첫 번째 사례가 1절의 권면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로를 향한 책임 사례 1로 보면 될 것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1절)
이 첫 번째 권면은 문장의 구성상 세 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조건절(1절상); (2) 주절(1절중); (3) 양보절(1절하). 이 문장의 조건절은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한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이 문장의 동사 "드러나다"(prolambavnw, 프롤람바노)는 고대 '헬라' 문헌이나, <칠십인 역>, 그리고 고대 '유대' 문헌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미리 취하다"입니다만, 이후 능동형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예기하다" 또는 "예견하다" 등을 의미했으며, 수동형으로 사용될 때에는 "갑자기 사로잡히다", "갇히다" 또는 "부지불식간에 붙잡히다" 등을 의미했습니다. <마가복음>이나 <고린도전서> 등에서는 능동형으로 나타나고 있으며(막 14:8; 고전 11:21), 본문에서는 수동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암시하는 바도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갇히게" 된 경우입니다. 물론 이 문장의 주어 "사람"(a[nqrwpo", 안드로포스)은 단순히 남성 단수로서 교회 내의 한 지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 내의 누군가 피치 못할 범죄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대답은 두 번째 절의 명령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여기서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 “신령한 너희”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 냉소나 비웃는 태도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교회 내에 특별히 영적으로 더 신령한 무리가 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사도는 서신 전체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3:2-5, 14; 4:6, 29; 5:5, 16-18, 22-23, 25; 6:8), 따라서 '갈라디아' 교인 전체를 향해서 그렇게 부르고 있다고 믿을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들 교인들이 “율법주의”나 “방종”의 유혹에 놓여 있긴 하지만, 여전히 “신령한 자”로 불릴 수 있는 것은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을 소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바로 이런 자들에게 그들의 신분과 지위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령한 자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이 단어 역시 고대 '헬라' 문헌에서나 <칠십인 역>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만, <신약>에서 의미하는 바는 대략 세 자기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일반적인 상황에서 “그물을 원래 상태로 고쳐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다”(마 4:21; 막 1:19); (2) 종교적 문맥에서 “믿음을 완성하다” 또는 “온전하게 하다”(소후 13:11; 살전 3:10; 히 13:21); (3) 윤리적 상황에서 “도덕적으로 회복시키다”(고전 1:10). 본문에서는 세 번째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사도는 이곳에서 그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성령에 따라 사는 삶”(5:25)의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고 있는데, 즉 '그리스도'인이 도덕적 해이나 타락에 빠진 동료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이곳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대상은 죄에 빠져 있는 자들이 아니라, “신령한 자들”입니다. 이들이 취해야 할 행동과 태도가 그의 관심사인 것입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유대주의” 외에도 “자유방임주의”에서 오는 교만이나, 오만, 그리고 무관심 등입니다(이런 태도는 오늘날 교회에서도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만). 사도는 앞에서 온갖 형태의 죄악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이러한 태도 또한 악한 것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공공연한 도덕적 해이보다 공동체에 대해서 더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도 있는 것들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그는 “성령의 열매”가 어떻게 “육체의 일”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절의 마지막 구절은 범죄에 빠진 동료를 회복시켜주려는 자가 저지를 수 있는 오류에 대한 경고입니다: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그 오류란 스스로 의로운 자라고 믿는 태도입니다. 사도는 여기서 누구든 자신의 연약함도 인정하라는 경고입니다. 이 문장에서 주어가 갑자기 그동안의 불특정 다수에서 이인칭 단수로 바뀌고 있는 것도 그의 경고를 극대화하기 위한 수사적 장치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례 2: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과 관련해서 가장 핵심적인 사안은 소위 “상호관계성”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개념이 2절 문장의 첫머리에 등장하고 있는 “서로”(ajllhvlwn, 알렐론)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절)
이 문장 속의 명사 "짐"(bavro", 바로스)은 문자적으로는 "무게"를 뜻합니다만, <신약>에서는 상징적으로 "무거운 짐"을 의미합니다(마 20:12; 행 15:28; 살전 2:7; 레 2:24). 이 문장 속에서 이 단어가 일차적으로는 "유혹"과 관련된 부담 내지는 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보다 일반적인 형태의 부담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롬 15:1; 고전 12:26).
“그리스도의 법”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는 관건은 5:13-6:10의 목적과 초점이 무엇인지 파악하는데 있습니다. 만일 이 단락을 “유대주의”나 “명목론”에 대항해서 그동안 사도가 전개해 왔던 일련의 논쟁이나 권면의 연장으로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의 법”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5:13-6:10의 단락이 방종에 대한 경고 내지는 권면으로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의 법”은 사도 자신이 고안해 낸 방종과 관련된 새로운 기독교 윤리의 한 표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짧게 요약하자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것” 내지는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 등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왜 서로 짐을 져야 합니까? 3절이 기능하는 바는 2절에 대한 근거나 이유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문장이 종속접속사 “왜냐하면”(gavr, 가르)으로 시작하고 있는 점을 통해서 이를 알 수 있으며, 동시에 3절은 하나의 경구(警句)로서의 기능을 하게 합니다(이와 동일한 기능을 5, 7, 9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3절)
이 구절을 당시의 '그리스-로마'의 경구로 받아들일 때, 사도는 이를 자신이 2절에서 밝힌 바 있는 “너희가 서로 짐을 서로 지라”는 권고를 지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선언에 도입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인 즉은, 스스로 속이는 행위란 다름 아닌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이런 생각은 다른 사람의 짐을 나누어지려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례 3: 4절의 전반부는 1절이나 2절처럼 형식상 경구나 명령으로 간주할 있을 것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4절상)
이 구절은 구문론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나 3절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이 문장의 주어 “각각”(e{kasto“, 헤가스토스)은 오히려 같은 주어로 시작하고 있는 5절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야 함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5절 설명에서 볼 것입니다). 이 문장의 동사 ”살피다“(dokimavzw, 도키마조)는 고대 '헬라' 문헌이나 <칠십인 역>, 포로기 이후의 고대 '유대' 문헌 및 <신약>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울 서신>에서는 대략 아래 세 가지 상보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시험을 치르다, “조사하다”(고전 3:13; 11:28; 고후 13:5; 살전 5:21; 딤전 3:10); (2) “증명하다”, “증거로 받아들이다”(롬 2:18; 14:22; 살전 2:4; 고후 8:22); (3) “최선으로 생각하다”, “선택하다”(고전 16:3). 이 문장 속에서는 첫 번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살펴야 할 이유는 어디 있습니까?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해야 합니까? 4절 후반이 그 대답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4절하)
바로 이점에서 이 구절은 4절 전반부의 명령이나 지시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로 기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장이 부자 “그리하면”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도 4절 전반과의 상관관계를 잘 드러내주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즉 이 부사가 의미하는 바인즉, “만일 사람이 자신의 행동을 예의 관찰할 때” 그 다음 구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4절하). 이 문장 속의 명사형 단어 “자랑”(kauvchma, 카우케마)은 “자랑 거리”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고대 '헬라' 문헌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바울 서신>에서도 10여 차례 등장하고 있습니다(롬 4:2; 고전 5:6; 9:15; 고후 1:14; 5:12; 9:3; 빌 1:26; 2:16). “자랑할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있지 않다”는 말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업적을 비교 우위에 두고 자만하거나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5절은 3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유나 설명을 제시하는 접속사 “왜냐하면”(gavr, 가르)으로 시작하면서 앞선 4절과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또 하나의 경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각자는)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5절)
이 문장 속에 등장하고 있는 "짐"(fortivon, 포르티온)은 고대 '헬라' 문헌이나 <칠십인 역> 및 포로기 이후 '유대' 문헌 등에서는 흔히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단어는 배에 실은 "화물"을 의미하며(행 27:10), <복음서>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정해놓은 "율법의 짐"을 의미하며(마 23:4; 눅 11:46), 예수님 역시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마 11:30). 사도는 2절에서도 "짐을 서로 지라"는 유사한 권면을 한 바 있는데, 이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 "짐"(bavro", 바로스)은 그 의미는 유사하나 전혀 다른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다른 문맥이긴 하나 왜 사도는 이처럼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만, 어원이 다른 두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가능한 한 가지 설명은 2절은 사도 자신의 권면으로 볼 수 있지만, 5절은 일종의 경구로서, 다른 곳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구가 원래 의미했던 바는, 아마 고대 철학자들이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던 "자존" 내지는 "자립적" 생할 방식에 대한 지지나 옹호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는 이 경구를 인용하면서 4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는 권면에 대한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4절은 5절과 연결되고 있으며, 5절에서 도입하고 있는 경구는 그 기원이 비록 문맥과는 동떨어지긴 하나, 4절에 대한 설명 내지는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례 4: 이 단락의 권면 중에서 6절의 권면은 그 형식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 가장 까다로운 곳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6절)
이 구절은 그 형식에 있어 전후 구절들과 사호 연결이 부자연스럽습니다. 이 권면과 관련될 만 한 어떠한 교훈이나 경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느닷없이 중간에 끼어든 형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7절의 경고는 6절의 권면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이 구절이 사도 자신의 선교 사역을 위한 경제적 지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내용 또한 차이가 있습니다. 즉 그가 다른 곳에서 자신의 선교 사역을 위하서 모금에 대해서 언급할 때는 분명하게 자신의 권리에 대해서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9:3-14; 딤전 5:18). 이곳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바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에게 물질적 지원을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권면마저도 자신에 대해서는 권리를 포기한다고 말할 바 있으며(고전 9:15-18; 살전 2:9; 행 20:33-35), 따라서 그런 지원을 받았을 때 당혹스러워 했던 것 같습니다(빌 4:10-19). 그런 그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행해서는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나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을 위해서 물질적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에서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에 대한 지원을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권면은 그가 다른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재정적 지원과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입장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처럼 이 구절이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전체 문맥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상관없다고 단정지울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이 단락의 첫 두 절(1-2절)이나 마지막 두 절(9-10절)은 모두 상호 협력이나 도움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도나 당시 교인들 외는 정확하게 이 구절이 오해 필요했는지에 대해서 아무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기도 합니다. 다만 몇 가지 확실한 점들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1) '갈라디아' 교회 내에서 적어도 공식적인 기독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2) 교회 내에서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로 불리는 두 계층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3) 교육 내용은 기독교 복음이었을 것이다; (4) 가르치는 일은 아마 전임 사역 내지는 그 정도의 시간을 요하는 일로서 재정적 지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5) 어떤 이유에서든 교회 내에서 가르치는 자들이 충분히 보상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6) 이러한 잘못을 바로잡아 배움을 받는 자들이 재정적 지원을 하는 일이 그들이 져야 할 책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재정적 지원에 관한 이 권면의 역사적 배경이 무엇이든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원리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2. 개인적 책임들(7-9절)
내용 상 주로 개인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이 세절은 경고와 설명에 이어 호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들 각각을 다시 수사적 특징과 더불어 세분해 보면 여러 작은 단위들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 서론적 권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7절상)
(2) 잠언 형식의 경고: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7절중)
(3) 경고를 지지해 줄 전형적인 경구: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7절하)
(4) 육과 영에 관한 사도 자신의 해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8절)
(5) 경고와 해설이 이은 호소: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9절상)
(6) 호소를 지지해 줄 또 하나의 전통적인 경구와 그 호소에 귀 기울였을 때 얻게 될 약속: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9절하)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수동태 형의 명령문은, 당시 '헬라' 문헌에서나 또는 <신약>에서(고전 6:9; 15:33; 약 1:16; 눅 21:8) 흔히 사용하는 관행적 표현으로서, 어떤 엄숙한 경고를 주기 전에 갑자기 발하는 일종의 서론적 감탄사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 등장하고 있는 경고는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 하신다”는 잠언 또는 격언 형태의 선언입니다. 이 문장의 동사 원형 “뮉테리조”(mukthrivzw)는 “비웃다” 또는 “조롱하다”는 의미로서, <칠십인 역>이나 포리기 이후의 '유대' 문헌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신약>에서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이 경구는 사도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이전의 문헌에서 그가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사도가 이런 경구를 이곳에서 도입하고 있는 목적은 8절에서 이 경구에 대한 덧붙이기 전까지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만, 7-8절 두 절을 통해서 요약해 보자면, “누구든 육체로 심고 영생을 기대한다면, 하나님의 공의를 조롱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은 결코 그런 식으로 조롱받을 분이 아니라”는 선언일 것입니다.
이어서 등장하고 있는 또 다른 경구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7절하)는 앞선 경고를 지지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은 이 문장을 접속사 “왜냐하면”(gavr, 가르)으로 시작하고 있어, 앞선 경고에 대한 이유나 설명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 문장이 다른 곳에서 인용해 온 경구임을 드러내 주는 기능 또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 5, 9절에서도 동일한 접속사를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경우는 모두에게 익히 알려진 농사에 관한 경구로서,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칠십인 역>이나 포로기 이후의 '유대' 문헌에서 광범위하게 등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울 서신>이나 <신약>의 여타 책에서도 볼 수 있기도 합니다(고전 9:11; 고후 9:6; 눅 19:21-22; 요 4:35-36). 사도가 이 격언을 통해서 강조하고자 바는 두 가지 정도일 것입니다: (1) 심음과 거둠에는 직접적인 인과 관계가 있으며, 이는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법칙이다; (2) 이처럼 하나님은 스스로 제정해 놓으신 법칙을 되돌리거나 또는 그러한 하나님을 속여 그 법칙을 거스려 작동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인생을 축복으로 끝낼 것인지 또는 저주로 끝낼 것인지는 각자의 책임 소관이다.
“심음과 거둠”에 관한 이 인과응보적인 법칙에 대해서 사도는 8절에서 자신의 신학으로 해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 법칙이란 “육체와 성령”에 관하여 그가 앞에서 전개한 이분법적 논리를 말합니다(팜고 5:16-25):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8절). 사도는 이 해설에서 농사에 관한 경구를 우화(알레고리)의 경지로 변모시키고 있습니다. 즉 농부가 시앗을 마치 두 가지 다른 토양에 심듯이, “육체”와 “성령”을 그 두 가지 토양에 대한 알레고리로 삼고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의 8절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의 육체에 씨를 뿌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에 뿌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리고 두 가지 다른 토양으로부터 두 가지 다른 열매를 내듯이 육체와 성령은 각기 다른 열매 즉 “멸망”과 “영생”을 맺게 된다고 덧붙입니다. 성령과 영생을 연계시키고 있는 것은 “성령에 따라 사는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5;16, 18, 22-25). 반면 육체와 멸망의 관계는 사도가 앞에서 육체에 관하여 언급한 내용(5:16-22)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물론 “육체의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5:21하) 속에 이와 관련된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는 합니다.
육체의 토양에 심는 씨앗은 무엇입니까? 사도가 앞 단락에서 언급한 바 있는 일련의 육체의 행위 즉 방종의 행위들일 것입니다: “투기”; “다툼”; “술수”; “교만”; “상대를 돌아보지 아니함.” 이러한 행위는 단순히 자유를 잘못 사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멸망을 자초하는 행위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경고와 해설에 이은 구체적인 적용 사례가 호소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9절상). 이 문장이 접속사 "그러므로"(de, 데)로 시작하면서, 이 호소가 앞선 경고와 해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달리 번역하자면 "따라서" 또는 "이에 따라" 등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선한 일)은 기독교인이 행해야 할 그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서, "성령의 열매"(5:22-23)나 "성령을 따르는 것"(5:25)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 문맥 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 6:1-6 사이에서 권하고 있는 일련의 명령들일 것입니다: (1) 범죄한 자를 바로 잡아주는 일"(1절); (2) "짐을 서로 지는 일"(2절); (3)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 재정적 후원을 하는 일"(6절).
이 문장의 동사 “낙심하다”(ejgkakevw, 엥카케오)는 고대 문헌이나 <칠십인 역>이나 고대 '유대' 문헌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신약>에서만 여섯 군데 정도 보이고 있습니다(눅 18:1; 고후 4:1, 16; 엡 3:13; 살후 3:13). 사도가 염려하고 있는 바는, '갈라디아' 교회가 처음에 잘 시작하였다가(3:2-5; 5:7), 점차 “성령에 따라 삶”에 대한 열의나 흥미를 잃어버리고, 그 대안으로 “유대주의”로 되돌아가거나 또는 방종으로 마감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방종의 첫 징조는 타인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유익에만 탐닉하는 일일 것입니다. 사도의 호소는 바로 이런 태도를 향한 것입니다.
그의 호소를 보다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사도는 다시 한 번 당시 잘 알려진 경구(격언)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되면 거두리라"(9절하). 이 문장 역시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3, 5, 7절), 이유를 뜻하는 "왜냐하면"의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구는 단순히 그의 호소를 지지해 줄 뿐만 아니라, 희망에 찬 약속을 보장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언젠가는 분명히 올 것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문장의 동사 “거둔다”(qerivzw, 데리조) 역시 7-8절에서 사용한 농사의 이미지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 동사의 시제는 미래형으로서 약속이 이루어질 때가 미래의 불분명한 시점임을 시사해 줍니다. 그러나 사도의 관심사는 그 약속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가 아닙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은 어김없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과 성령의 밭에서 거두어들일 필연적인 결과에 대한 것입니다. 이 문장의 또 다른 동사 “포기하다”(ejgkakevw, 엥카케오)는 고대 '헬라' 문헌에서는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이기는 합니다만, <신약>에서는 주로 수동형으로, “지치다”, “피곤하게 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마 15:32; 막 8:3; 히 12:3, 5). 사도에게 있어 영생의 열매는 단순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자의 대응하는 행위, 즉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행위에 올바르게 대응했을 때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인내라는 성령의 열매가 그 구체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3. 결론(10절)
이 모든 경고와 호소에 이은 마지막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10절)
이 문장은 두 접속사 “이제”(a[ra, 아라)와 “그러므로”(ou+'n, 운)를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결론으로서의 기능을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들 접속사는 사도의 서신 여러 곳에서 동일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롬 5:18; 7:3, 25; 8:12; 9:16, 18; 14:12, 19; 엡 2:19; 살전 5:6; 살후 2:15). 그러나 <개역 성경>이나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에는 이 두 접속사를 구분하지 않고, 단순히 “그러므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6:1-10의 본문에 대한 결론이 될 뿐만 아니라, 방종에 관한 권면 전체 본문(5:13-6:10)의 결론이 되기도 합니다. 동시에 이 구절은 5:13과 함께 전체 권면의 “수미상관”의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5:13)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6:10)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서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단순 지시형으로 인식하여, “우리에게 기회가 있으니”로 해석하는 것이고, 둘째는 가정형으로 인식하여 “우리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떻게 해석하든 결과적으로 큰 차이는 없습니다. 다만 이 문장에서 “기회”로 번역하고 있는 명사 “카이로스”(kairov“)가 의미하는 바는, ”결정적인 순간“(때)”, “하나님이 주신 기회” 또는 “절호의 순간” 등입니다. 이로 미루어 사도에게 있어 성도들의 “선행”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차원이며, 기독교인이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듯합니다.
이 권면의 대상은 일차적으로 전 포괄적이며 보편적입니다: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10절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이 전 인류를 향한 것이라면, 기독교 공동체의 관심사 역시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윤리의 보편성이 있습니다. 즉 기독교인은 민족적, 국가적, 문화적, 사회적, 성적, 신분적, 심지어 종교적 차이마저 뛰어넘는 보편적 사랑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본문 속의 “모두에게”가 의미하는 바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은 다소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10절하). 마치 앞선 선언을 제한하거나 유보하는 것처엄 들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은 정 반대일 것입니다. 인류를 향한 우리의 보편적 관심사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동료 교인들에게는 더욱 많은 관심과 배려를 쏟아야 한다는 권면인 것이지요. 영어 격언에도 “자비는 집에서부터 출발한다”(Charity begins at home)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사도에게 있어 동료 기독교인은 "믿음의 가정"(oivkei'o", 오이케이오스)입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믿음의 공동체 또는 교회에 대한 상징으로서 이처럼 건물의 이미지를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엡 2:19; 고전 3:9-17; 고후 6:14-16; 엡 2:19-22).
교훈과 적용
짐을 서로 나누어지라. ‘마르틴 루터’는 그의 논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완벽하게 모든 만물의 자유로운 주인이며 그 어느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완벽하게 모든 만물의 충성스러운 종이며, 모든 것에 종속된다.” 자유에 관한 역설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말하는 이 자유와 구속은 결국 “성령의 삶”이 보여줄 수 있는 이중적인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든, “성령의 열매를 드러내는 삶”이든, “성령 충만의 삶”이든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 없다면 공허한 신학 용어에 불과하거나 또는 종교적 신비주의로 전락하고 말 것들입니다. 그 현장은 다름 아닌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대원칙은 “짐을 서로 나누어지라”는 것입니다. 이 대원칙을 적용할 구체적인 적용 사례 중에는 혹시 잘못에 빠진 동료 ‘그리스도’인에 대한 태도와 행동에 관한 것이라든지,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 대하여 재정적이고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라든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지 말라는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유와 독립은 모든 사람의 목표입니다. 경제적인 자유, 사상의 자유, 활동의 자유, 등등... 그러나 이 둘은 때로 뜻밖의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고립과 외로움이 그것입니다. 도움이 필요 없게 되니까 동료가 필요 없게 되어 버립니다. 부모가 필요 없고, 친구가 필요 없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필요 없게 되어 버리는 아주 외롭고 고독한 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독립이 낳는 또 다른 뜻밖의 결과는 자립과 자족을 넘어선 자만과 무관심입니다. 자만의 증세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남의 도움을 전혀 받으려 하지 않는 증세와 남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않으려 하는 증세가 그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자칭 의로운 자의 전형으로서 스스로 속이는 행위입니다. 스스로 속인다는 말 속에는 조롱과 해학의 의미도 함축되어 있습니다. 남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속이고 있으며,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그가 속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필자의 학과에 한 동료 교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늘 다른 교수들에게 학과의 화목을 강조합니다. 양보와 상생의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신임 교수를 채용하는 공개적인 발표회장에서까지 응시자들에게 이점을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즉 혹시 채용된다면 학과에서 그가 강조하고 있는 바대로 보조를 맞출 수 있겠느냐고 질문합니다. 그가 종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장 종교적인 메시지를 설파하고 다닌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더욱 기가 찬 아이러니는 바로 이자야말로 그가 속한 학과를 가장 소란하게 하며, 분열과 갈등의 최대의 원인 제공자라는 사실입니다. 주변의 모두가 그렇다고 말하고 있는데도 본인만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화평의 사도인양 생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가 말하는 화평은 결국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며, 여타 교수들의 양보와 침묵을 담보로 자기 뜻대로 학과를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러한 강요된 화평을 말하는 것임을 그는 모르고 있다는 것이지요. 공동체의 화평이니 화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렇게 목을 걸고 있다면 스스로 잘하면 그만인 것이겠지요. 양식과 상식에 입각해서 내가 그렇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혹시 다른 사람이 먼저 모자를 벗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사람은 여전히 그것을 모릅니다. 그의 자유는 방종으로 흘러가 버렸는데, 아무도 그를 제어하거나 제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스승이나 선배 교수님들이 모두 그냥 오냐오냐 하며 넘어왔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근원적인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에게는 “성령”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 것도 되지도 못하면서 된 줄로 착각하며 스스로 속이는 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의 선물이긴 하지만, 동시에 “성령을 따라 삶”에는 인간의 자연적인 반복되는 훈련이라는 차원이 있기도 합니다. 영생의 열매도 단순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자의 대응하는 행위 즉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행위에 올바르게 대응했을 때 맺게 될 것이라고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인내라는 성령의 열매가 그 구체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계속적으로 행하는 일에는 인내와 끈기가 따릅니다. 당연히 피곤함과 실의와 초기에 가졌던 기대와 흥분이 쉽게 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의 목장 모임에서 우리는 이점을 너무 자주 경험하고 있습니다.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기다려도 별 반응이 없습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힘이 빠집니다. 그러나 사도는 우리에게 약속합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거두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자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 어떤 대가도 기대하지 않는 절대적인 자유 말입니다.
결론. 우리는 계속해서 선을 행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운 존재들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관심사는 모든 인류입니다. 단순히 유대인이나 교회만이 아닙니다. 그분의 관심사가 전 인류를 향한 것이라면, 기독교 공동체의 관심사 역시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즉 기독교인은 민족적, 국가적, 문화적, 사회적, 성적, 신분적, 심지어 종교적 차이마저 뛰어넘는 보편적 사랑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슬람’ 교인들이나 불교도를 사랑해야 하며 그들이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도와야 하는가 하고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모든 이에게”라고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모두를 사랑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자유스러운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또한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말합니다. 마치 앞선 선언을 제한하거나 유보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이기적이지 않습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는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가게에서 복권도 함께 팔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은 늘 복권에 가 있습니다. 대박을 터뜨리면 이 지긋지긋한 구멍가게를 그만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도 이런 한 건 주의가 늘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선교하면 늘 해외 선교를 염두에 둡니다. 선행과 나누어주는 일도 아프리카에 있는 빈민들을 대상으로 하고 싶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 ‘아프카니스타니투스’(Afghabistanitus)라고 합니다. 그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도덕적인 질병으로 오염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선하고 관대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하지만 늘 좀 더 가치 있고 극적인 순간을 기다립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도덕 근육은 쇠퇴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은 축소되고 맙니다.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권면이자 모든 권면의 결론에 해당하는 이 구절이 이 질병에 대한 치유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6:10).
이 구절 때문에 때로 ‘그리스도’인들이 이기적이며 자기들 밖에는 모르는 족속들이라는 비난을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매일 친구나 가족을 돌보는 일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이방인들을 돕는 꿈을 꾸는 것입니다. 먼 곳에 있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은 우리 자신도 덜 필요하고, 덜 관여해도 되고, 덜 긍휼을 가져도 됩니다. 아주 말많고 귀찮은 이웃 사람의 짐을 나누어지는 일보다 아프리카의 난민에게 수표 한 장을 끊어주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수표 한 장을 끊어주는 일은 한 번에 끝나는 것이지만, 귀찮은 이웃과는 매일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도 자기 시간의 99%를 이방인이 아니라 동료 유대인을 위하여 사용했습니다. 해외 선교는 국내 선교의 연장인 것이지 국내 선교를 면제 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교회에서 국내∙외 선교비를 보내면서도 정작 공동체 내의 어려운 가족이나 지체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 역시 본말이 전도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이 구절이 강조하는 바는, 인류나 먼 이웃을 향한 우리의 보편적 관심사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동료 교인들에게는 더욱 많은 관심과 배려를 쏟아야 한다는 권면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자신의 가족보다 교회 식구를 더 사랑하는 교인, 같은 교회의 식구들보다 다른 교회 식구들을 더 사랑하는 교인, 가까운 이웃보다 먼 이웃을 더 사랑하는 교인들을 향한 권면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기능은 무엇입니까?
2. 이 단락의 결론은 결국 5:13-6:10 전체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당신 자신의 말로 요약 및 정리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