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2과
추신(追伸)
김태정 목사갈라디아서 6:11-18약 30분 분량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11절)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본문은 <갈라디아서>의 “추신”(追伸) 내지는 후기(後記)에 해당합니다. 다른 <바울 서신>의 경우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서신의 본체(本體)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대부분의 <바울 서신>에 대한 연구는 주로 서신의 “인사말”이나 본체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는 서신의 처음과 끝 부분은 주로 수신자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한 목적으로 쓰는 것이니만치 특별히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추신”에 대해서만큼은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특히 <갈라디아서>에서 이 단락의 분량이 많고 길 뿐만 아니라, 담고 있는 내용 또한 단순히 인사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신의 본체의 내용과 직접적으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컨대, <갈라디아서> 연구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라이트풋’(J. B. Lightfoot)은 이 단락의 기능과 관련해서, “다소 서툴고 서로 연결이 잘 안 되긴 하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일련의 문장들이 서신의 본체를 요약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학자들이 그를 따라 이 부분에 대해서 비슷한 결론을 내린 바 있습니다. R. N. Longenecker, 286쪽.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베츠’(H. D. Betz)는 “추신”이 서신의 전체 내용을 요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를 해석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한 바 있기도 합니다. 이 단락이 서신 전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바울’의 주요 관심사와 그의 의도를 이해하고 파악함에 있어 주요 단서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단락에 대한 ‘베츠’의 극찬은 다소 과하다는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서신의 형식이나 구조를 통해서 볼 때 전혀 틀린 말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형식과 구조. 대부분의 <바울서신>에서 “인사말”과 마지막 “추신”은 그 기능하는 바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역순(逆順)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즉 서신의 벽두에 등장하는 “인사와 감사”는 앞으로 전개할 내용을 사전에 예고하고 지시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추신”에서는 앞에서 다룬 내용들을 다시 정리하고 요약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갈라디아서>는 <바울 서신> 중에서 “감사”가 없는 대표적인 서신이긴 합니다. 그러나 굳이 비교해 보자면, 전형적인 인사는 아니지만 서신의 “목적과 동기”(1:6-10)을 “추신”(6:11-18)과 나란히 놓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목적과 동기”에 대한 간략한 진술이 있은 다음 서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책망과 권면”이 뒤따르고 있으며, 다시 “추신”에서 이 내용을 요약 및 정리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바울서신>의 “추신”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일련의 특징들이 있습니다. 이중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은혜의 축도”로서 대부분의 그의 서신의 말미에서 이를 볼 수 있습니다: “은혜가...있을지어다”(롬 16:20절하; 고전 16:23; 고후 13:14; 갈 6:18; 엡 6:24; 빌 4:23; 골 4:18하; 살전 5:28; 살후 3:18; 딤전 6:21하; 딤후 4:22하; 디 3:15하; 몬 25). 이에 못지않게 자주 만나는 표현은 “인사말”로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및 <디모데전서>를 제외한 그의 모든 서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인사말에서 사용하는 상투적인 표현은 “문안하노라”(ajspavzomai, 아스파조마이)로서 그 주어는 일인칭 단수이거나(롬 16:22), 이인칭 복수(롬 16:3-16; 고전 16:20하; 고후 13:12상; 빌 4:21상; 골 4:15; 살전 5:26; 딤후 4:19; 디 3:15), 삼인칭 단수나 복수(롬 16:16하, 21, 23; 고전 16:19-20상; 고후 13:12하; 빌 4:22; 골 4:10-14; 딤후 4:21하; 디 3:15상; 몬 23), 또는 ‘바울’ 자신이 되기도 합니다(고전 16:21; 골 4:18; 살후 3:17).
그의 서신의 “추신”에서 세 번째로 볼 수 있는 특징은 소위 “화평의 축도”로서, 이 역시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평강이...있을지어다”(롬 15:33; 16:20상; 고후 13:11하; 갈 6:16; 엡 6:23; 빌 4:9하; 살전 5:23; 살후 3:16). 그리고 네 번째 특징은 ‘바울’ 자신의 “자필 서명” 내지는 “그가 직접 손으로 쓴 것”에 대한 언급을 들 수 있습니다. 이에 관한 언급은 모두 다섯 번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데, 모두 동일한 표현입니다: “내 손으로”(고전 16:21; 갈 6:11; 골 4:18상; 살후 3:17; 몬 19). 다섯 번째 특징은 “결론적인 권면”으로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서신의 본론에서 다룬 바 있는 내용을 요약한 것일 수도 있고(고전 16:13-19, 22; 고후 13:11상; 갈 6:12-17), 또는 수신자들의 공동체 내에서의 관계에 관한 부수적인 내용들일 수도 있습니다(롬 16:17-19; 빌 4:8-19; 골 4:16-17; 살전 5:27; 딤전 6:17-21상; 딤후 4:21상; 디 3:12-14). 이들 권면 중 세 번에 걸쳐 “기뻐하라”는 권면을 볼 수 있습니다(롬 16:19상; 고전 16:17-18; 빌 4:10-19). 그리고 기도에 대한 부탁(롬 15:30-32; 엡 6:18-20; 골 4:3-4; 살전 5:25; 살후 3:1-2)과 송영(送迎)을 볼 수 있습니다(롬 16:25-27; 빌 4:20; 딤전 6:16; 딤후 4:18). 다만 마지막 두 요소는 <바울 서신>에서 “추신”의 일부로 굳어진 형식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합니다. 물론 <갈라디아서>에서는 이 두 요소가 ““추신”에서는 빠져 있어, 이에 대한 논의는 불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에서 독특하게 볼 수 있는 “추신” 또는 “후기”(後記)의 특징들은 무엇입니까? 우선 “문안 인사”가 빠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본 연구의 서론에서 밝힌 바처럼 사도와 수신자들 간에 현존하는 긴장 때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뻐하라”라든지 기도 요청이라든지 송영도 모두 빠져 있습니다. 사도와 수신자들 사이에 친밀함이나 감사를 전혀 느낄 수 없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에서 <바울서신>의 “추신”이 갖는 전형적인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필 서명”에 관한 언급은 단골 요소라고 소개한 바 있습니다만(고전 16:21; 골 4:18상; 살후 3:17; 몬 19), 특히 이곳에서는 “큰 글자”로 서명했다는 점이 특이하게 보입니다(11절). 그리고 결론적 선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12-15절의 단락에서 앞에서 다룬 바 있는 주요 주제들을 다시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쁨과 감사와 같은 단골 메뉴가 아니라 오히려 경고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합니다. 이 선언의 절정은 축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만(16절), 이 역시 제한적이고 조건적인 것이, 곧바로 이어서 경고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7절).
본문은 다른 <바울 서신>에서 보여주고 있는 “추신”들에 비해서 더 직접적으로 서신의 주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 단락의 특징을 네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자필 서명(11절)
(2) 권면(12-15, 17절)
(3) 축도 1: 평강(16절)
(4) 축도 2: 은혜(18절)
이 네 가지 요소를 통해서 사도가 서신 전체, 특히 1:6-5:12 사이에서 다루고 있는 “유대주의”의 위협과 관련하여, 그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추신”은 서신의 본체(1:6-6:10)의 내용에 무엇인가 관례적으로 더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고대 ‘헬라’ 사회에서 편지의 말미에 “추신”의 형식으로 이런저런 내용들을 첨가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긴 했으나, 이곳에서처럼 특별히 발신자 자신의 주된 관심사나 가르침을 추가하고 있는 경우는 상당히 이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락은 서신의 이전 내용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프리즘 내지는 지침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Betz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이 단락은 ‘바울’ 사도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적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자필 서명(11절)
사도 당시 ‘헬라’ 사회에서 편지는 대개 두 가지 스타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것은 필경사나 비서가 대필을 한 것으로서 아주 정교하고 체계적이며 공식적인 스타일이며, 두 번째 것은 발신자 자신이 추신 또는 추서에 직접 손으로 써넣어 다소 조잡하고 비사무적인 스타일입니다. 대부분의 <바울 서신>들은 전자에 속하지만, 이 때 대필자는 사도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동료 신자들로서 교회 안에서 대필의 소양이나 능력을 갖춘 자들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11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11절)
이 명령문의 동사 “보라”(ei[dw, 에이도)는 특별히 “주목하라”는 의미입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할 이야기를 주목하라는 것이겠지요. 수신자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 그는 이 마지막 단락만큼은 다른 대필자가 아니라, “내 손으로” 즉 사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썼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필체(筆體)가 바뀌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부터 서신의 “추신”(追伸) 또는 “추서”(追書)가 시작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런 구절은 고대 ‘헬라’ 사회의 편지에서는 지극히 이례적인 것으로서, 당연히 당시 수신자들의 주목을 끌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 그가 이런 구절을 집어넣을 필요가 있었을까? 추측컨대, 그의 편지를 받는 교회에서는(그것이 한 교회이든 또는 회람용이든 간에) 회중들 앞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낭독을 했을 것인바(예: 살전 5:27),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곳에서부터 “추신”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릴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교회 내의 모두가 그의 편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입장에 있지는 않았을 터이니 말입니다.
그가 강조하는 “큰 글자”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클레이’(W. Barclay)는 세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W. Barclay, 55-56쪽.
첫째는, 강조를 위해서 이 단락의 글씨체를 마치 인쇄체를 쓰듯 큰 글씨로 기록했다. 두 번째는, 사도 자신의 필체가 별로 좋지 못해서 이처럼 큰 글자로 쓸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는, 사도의 시력이 좋지 못하여 자신이 볼 수 있도록 쓰다 보니 이처럼 큰 글자가 되었다. 이중 첫 번째 설명이 가장 그럴 듯해 보입니다. 강조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지요.
2. 다시 본론으로(12-15, 17절)
그가 끝까지 강조하고 싶은 내용은 과연 무엇입니까? “유대주의”에 대한 반박입니다. 이 주제는 서신의 두 가지 핵심 권면 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12-17절 사이의 내용은 사도가 1:6-5:12 사이에서 사도가 전개해 왔던 그의 모든 “반유대주의”에 대한 변론과 관련된 권면을 요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권면의 나머지 축에 해당하는 “자유방임주의”를 경고하는 권면(5:13-6:10)과 관련해서는 일체의 언급이 없습니다. 전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음일까요?:
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할례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12-13절)
“유대주의”에 대한 그의 공격은 먼저 “유대주의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두 절에서 이들이 누구인지 실명으로 부르는 대신에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 “할례를 받은 그들”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육체의 모양”이나 “육체의 자랑”에서 사도가 의미하는바 “육체”(σάρξ, 사르크)는 분명 “율법주의”나 “명목주의”와 관련해서 그가 앞에서 사용하던 의미와 동일한 것이지(2:20; 4:13, 14, 23, 29; 3:3), “방종”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는 “육체의 일”(5:16, 17, 19, 24; 6:8)과는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 두 절에서 “유대주의자”들의 진정한 동기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이들의 관심사는, 이방인 신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 ‘아브라함’ 언약의 수혜자가 되고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데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들의 진정한 의도는 다른데 있다고 말합니다. 즉 이들은 이방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하여 ‘유대’인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자랑하며, 그것을 통해서 박해로부터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박해를 말하는 것입니까? ‘바울’의 대적자들 즉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이 이방인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함으로써 피할 수 있는 박해란 무엇이며, 누구로부터의 박해를 말하는 것입니까? ‘로마’ 당국의 박해입니까? ‘바클레이’에 따르면, 당시 ‘로마’는 기독교가 아닌 ‘유대’교만을 공인 종교로 인정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박해와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 자신이 ‘유대’교인임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보다 타당한 설명은 동료 ‘유대’인들로부터의 박해를 말하는 것입니다(참고: 살전 2:14-16). 당시 로마 치하에서 “열심당”과 이에 동조하는 비기독교 유대인들의 폐쇄적 민족주의는 로마에 대해서는 물론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이나 동료 ‘유대’인들에 대해서까지 적개심을 품고 있었을 것이며, 처단의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주의자”들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하여 ‘유대’인이 되게 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사도는 13절에서도 “유대주의자”들의 진정한 의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반복하면서, 이들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 한 가지를 더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실이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아니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의미하는 바는, 그들 자신도 율법 전체를 제대로 온전하게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참고: 5:3). 그러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진짜 이유는 이방인들을 ‘유대’인으로 개종시켰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이를 통해서 동료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피하기 위함입니다.
사도는 이들의 의도가 잘못된 것이며,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14절에서 극적인 대조와 반전을 통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절)
극적인 대조는 접속사 “그러나”와 “결코...없으니” 등의 표현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두 가지일 것입니다. 그 첫 번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인식과 관련 된 것으로서, 그가 특별히 강조를 위해서 문장의 첫 부분에 위치시키고 있는 표현 “내게는”입니다. 사도는 다른 서신에서 두어 번 정도 자신과 자신의 생애에 대하여 자전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대단한 자랑거리가 될 만한 것들입니다. 한번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향한 것으로서, 그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의 영적 상태를 자랑하며 분열과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질책하면서, 그가 이룩한 영적 업적에 대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고후 11:21하-29). 그들이 무슨 큰 자랑거리라고 내어놓는 것들이 ‘바울’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에 비하면 지극히 미미하고 보잘 것 없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랑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그리고 또 한 번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것으로서, 이 경우에는 교회 안에서 자신들만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졌다고 자랑을 일삼는 “유대주의자”들의 잘못을 경고하는 가운데 나온 것입니다(빌 3:4-6). 이번에도 역시 그는 자신의 출신 배경과 업적 등에 대해서 일사천리로 자랑하고 있습니다만, 이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를 더 알고 싶다는 말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빌 3:7-14). 결국 이 두 곳에서 볼 수 있듯이, 사도의 관심사는 그가 세상에서 이룩한 업적들에 있지 않습니다. 즉 그가 선교사나 목회자로서 이룩한 성공적인 사역이나, 그가 개척한 교회의 수나 교인들의 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의 고백이 정말 정직한 것이라면, 사도의 유일한 관심사가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바로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14절의 두 번째 강조점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예수님 당시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십자가”의 수치와 공포에 대해서 가졌던 것과 같은 정도의 느낌이나 감정을 가지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혹시 사형수를 위한 전기의자에 앉아 본다든지, 또는 교수형 용 밧줄을 목에 걸어본다든지 함으로써 유사한 기분 정도는 느껴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당시 십자가는 그야말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고전 1:23). 그러나 사도에게 있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죽음”에 대한 수사적 환유(換喩)로서, 사도가 기독교의 “케리그마”(κήρυγμα) 즉 복음 선포를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입니다(고전 1:17-18; 15:3; 빌 2:8; 3:18; 골 1:20; 2:14-15). 그가 앞에서도 이와 관련해서 언급하였듯이(3:1), “그리스도의 죽음”이야말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에도, 사람들이 또 다른 방법이나 길이 있다고 호도하는 사실에 대해서 사도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표현에 더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말함으로써,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비중을 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다”(καυχάομαι, 카우카오마이)는 말은 무엇입니까? 다른 곳에서 그가 이 단어를 사용하는 용례를 통해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롬 5:3하-5, 11; 고전 1:18-31). 모두 “하나님과의 화평”(또는 “칭의”), “하나님과의 화목”, “인내와 연단과 소망”, “구원” 등과 관련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신의 것으로 자랑한다는 말은, 나도 그 십자가 위에서 동일한 처벌과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14절의 나머지 구절이 이에 대한 설명이 될 것입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절하). 세상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힌두교나 불교 등의 동방 종교에서 말하는 “열반”(涅槃)이나 “해탈”(解脫)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세상이나 주변에 대한 무관심이나 소외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나 피조 세계에 대한 더 적극적인 애착과 관심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관심사입니다. “세상”과 “육체”가 지배하던 내 삶이 이제는 “성령”이 지배하는 삶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14절 후반의 언급은 다소 추상적으로 들리는 것 같지만, 다음 구절에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15절)
이 구절은 사도가 이 서신을 쓰게 된 목적이자 동시에 “추신”의 핵심 요점이기도 합니다. 그는 12-13절에서 “유대주의자”들의 동기에 대해서 언급하였고, 14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이들 세상적 유익을 위한 동기에 쐐기를 박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밝힌 바 있습니다. 이 모든 논의를 이제 ‘갈라디아’ 교회의 현 상황에 적용하면서, 경구 형식의 선언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16절에서 이 원리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평화의 축도”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구 형식의 이 선언은 어디서 온 것일까? 초대 교회 공동체 내에서 회자되던 일련의 고백록이나 기타 자료집에서 인용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는 앞에서도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고 입증하기 위한 목적으로 교회 안에서나 또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유포되던 자료들을 이처럼 인용한 바 있습니다(1:4; 3:1, 13, 26, 27-28; 4:4-5; 5:5-6; 6:3, 5, 7, 9). 15절의 경구도 그런 점에서 ‘갈라디아’ 교인들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 경구가 모든 이들이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라면, 사도는 이 경구를 그동안 “유대주의”와 관련한 그의 모든 논쟁(1:6-5:12)에 대한 절정으로 삼으려는 것 같습니다. 이 구절 역시 예의 친숙한 종속 접속사 “왜냐하면”(ϒάρ, 가르)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이 이런 추측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이와 유사한 용례를 3:26, 27-28; 6:3, 5, 7, 9 등에서 익히 본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그 자체로서 5:5-6에서 사도가 이미 결론내린 바 있는 내용을 보강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5:6).
이 구절을 통해서 사도가 요약하고 싶은 바는 무엇인가? 즉 “유대주의자”들의 주장, 즉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상관없이 율법의 규례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그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이런 것입니다. 즉 기독교 신앙이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문화나 관습과 무관할 수만은 없겠지만, 신앙의 내적 상태와는 반드시 일치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중요한 것이 있다면 기독교인은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움에 걸 맞는 생활 방식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에 따라 드러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율법이 “유대주의자”들에게 신앙의 규범이자 규례라고 한다면, 15절의 경구는 새로운 피조물들에게는 새로운 규례이자 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축도(16, 18절)
사도는 이점을 16절에서 선언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내에서 회자되고 있었을 그 전통적인 경구를 이곳에서 하나의 “규례” 내지는 “규범”으로까지 격상시키면서, 이 규례를 따르는 자들에게 축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16절)
이 축도의 일차적인 대상이 “이 규례를 행하는 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그 다음 대상으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애매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문장의 복잡한 형식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에 대한 <헬라어 사본>을 구문에 비교적 충실하게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 그러한 자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 지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도.” 즉 이 문장은 우선 그 형식에 있어, 축도가 문장의 중간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며, 다소 특이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 애매모호한 점은 축도 뒤에 등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문장의 앞 구절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데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질문들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사도가 두 집단의 교인들을 향해서 “은혜”와 “평강”이라는 각기 다른 축도를 전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동일한 한 무리를 향해서 “은혜와 평강”의 축도를 전하고 있는 것인가? 만일 축도의 대상이 서로 다른 두 무리라면, “은혜의 축도”를 받을 대상은 누구이며, “평강의 축도”를 받을 대상은 누구인가? 이 모든 애매모호함의 핵심에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혹시 이방인 기독교인을 지칭하는 말일까?
“평강과 은혜”의 축도에서 이 두 단어가 나타나는 순서 또한 <신약>의 다른 곳에 등장하는 축도와는 다르며 다소 비논리적이기까지 합니다. 대개의 경우 “평강”은 “은혜”의 결과로써 따라오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참고. 딤전 1:2; 딤후 1:2; 요이 3; 유 2). 따라서 “은혜와 평강”이 더 옳은 순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왜 그 순서를 바꾸고 있으며, 두 대상을 거명하고 있는 것일까? 이방인 기독교인을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부를 의도였다면 왜 유독 이곳에서만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혹자는 16절을 문장 내의 구두점들을 달리해서 다음과 같이 이해하려 합니다: “이 규례를 행하는 모든 자에게는 평강이, 그리고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는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해석에 따르면, 평강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그리고 긍휼은 아직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건한 ‘유대’인을 향한 것입니다.
이 축도에서 “은혜와 평강”의 순서가 바뀐 것은 적어도 <바울 서신>에서는 특히 비정상적이긴 하지만(롬 15:33; 16:20; 고전 16:23-24; 고후 13:11, 13; 엡 6:23-24; 빌 4:7, 9, 23; 골 4:18; 살전 5:23, 28; 살후 3:16, 18; 딤전 6:13; 딤후 4:22; 디 3:15; 몬 25),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이 축도가 두 집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을 듯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규례를 행하는 자들”이나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나 결국 동일한 교인들이라는 점입니다. 이점은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서 사도의 관심사는 “누가 과연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인가?”에 관한 것으로서,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지칭하는 것이야말로 서신의 결론으로서 지극히 합당한 논리적 귀결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정통 기독교 신학의 입장도, 사도가 이방 기독교인을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지칭할 때 그가 의미하는 바는 기독교회가 ‘유대’ 국가와 민족을 대체하는 진정한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인 선언(15절)에 이은 축도(16절)로 “추신”은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사도는 다시 새로운 언급을 더하고 있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17절)
이 언급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서, 앞에서도 이와 비슷한 행태를 보인 적이 있기도 합니다. 그의 첫 번째 권면(4:12-5:12)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는 5:5-6 사이에서 신학적 결론에 이어 5:11에서 개인적인 결론으로 권면을 마무리하는 듯하다가, 곧바로 12절에서 엉뚱한 말로 결론을 다소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5:12).
이 발언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긴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이곳에서는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경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고대 사회에서 노예나 종교적 이유 등으로 몸에 문신 즉 “흔적”(στίγμα, 스티그마)을 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관습에 따라 초대 기독교인들이 ‘바울’ 역시 그들의 몸에 종교적 문신을 넣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다수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가 사도로서 겪어야 했던 온갖 종류의 고난이나 박해 등의 결과로 생긴 상처나 신체적 결함과 불구 등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참고. 고후 6:4-6; 11:23-30; 갈 4:13-14).
따라서 이 경고는 강력한 것으로서, 긍정적으로는 ‘바울’ 자신은 “예수님이 점지한 사람”이며 그분의 소유와 보호 하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부정적으로는 누구든 이러한 권위에 반발하거나 도전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심판이나 저주를 받게 될 수도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늘 그러하듯이(롬 16:20하; 고전 16:23; 고후 13:14; 엡 6:24; 빌 4:23; 골 4:18하; 살전 5:28; 살후 3:18; 딤전 6:21하; 딤후 4:22하; 디 3:15하; 몬 25), 서신의 마지막을 “은혜의 축도”로 끝맺는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18절)
이곳 <갈라디아서>에서 유독 다른 표현을 찾아보자면, 우선 “형제들아”의 호칭이 있습니다. 준엄한 경고를 주면서도 교인들을 향한 그의 변함없는 애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멘”을 추가하고 있는 점입니다. 이 또한 다른 서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그의 모든 서신에서 벽두의 인사말과 마지막 축도에서 “은혜”(χάρις, 카리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이곳 <갈라디아서>에서 이 단어는 각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곳에서 “은혜”는 “율법”과 대척점에 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 즉 “칭의”의 근거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2:15;16, 21; 3:1-18), 정상적인 “기독교 신앙생활”의 근거 또한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2:17-21; 3:19-4:11). 특히 이 서신이 사도의 가장 오래 된 목회 서신이라고 할 때, 그가 목회의 출발부터 “율법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해 왔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훈과 적용
자필 서명. 얼마 전 본인은 세 번째 교회 개척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우리에게는 새로운 교회를 시작한다는 벅찬 희망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내려 누르는 두려움이 더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잘 안 되면 어쩌나?” “혹시 다른 사람들이 우리더러 무어라고 평가할까?” 이런 염려와 두려움을 처음부터 극복하지 않고서는 처음부터 교회 개척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서, 그리고 교회 개척과 관련해서 또 한 번의 실패를 할 수 없다는 각오로, 우리는 <갈라디아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서 무어라 생각하든,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무어라 변명하든,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사상이 아니라, “과연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해서 무어라 말씀하시는가?”에 대해서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 이 책입니까? 지금까지 도합 스물한 번에 걸쳐 이 책을 공부하는 동안 우리는 이미 그 해답을 얻었다고 확신합니다. ‘바울’을 가리켜 “자유의 사도”라고 합니다. <신약>의 저자들 중에서 ‘바울’은 “자유”에 관한 한 전문가입니다. <신약>의 다른 서신들에서 이 단어가 나타나는 회수(8회)와 비교해 볼 때, <바울 서신>에서 이 단어가 얼마나 자주 등장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28회). 그리고 이 단어는 특히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10회). 이제 왜 우리가 이 책을 개척 교회의 첫 공부의 대상으로 삼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책을 가리켜 “자유에 관한 분노의 서신”이라고까지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 역시 ‘바울’ 사도나 우리의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느꼈을 자유에 관한 확신을 가지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책의 공부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당신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라면 필요한 무엇이 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유는 선물이자 기술입니다. 자유는 누군가 주는 선물이며, 우리 각자가 주어진 한계 내에서 훈련을 통해서 쌓아가야 하는 기술입니다. 자유를 이해하려면 그것을 배워야 하고, 자유를 얻으려면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무엇이 더 있어야 한다면 바로 이 훈련일 것입니다.
아마 사도 역시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염려가 되었던지 당시의 관례를 따라 편지의 말미에 “추신” 또는 “추서”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것도 대필자로부터 펜을 빼앗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일부러 큰 글자로 써서 독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11절).
다시 처음으로. 그가 이 마지막 부분에서 기독교 복음에 대해서 새삼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12-17절 사이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는 지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가장 먼저 그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에 대해서 큰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자랑하고 영광스러워 하는 것으로 마지막 권면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14절상).
십자가 어디에 자랑이 있고, 영광이 있으며, 자유가 있습니까? 그것은 죽음이고 자유로운 삶의 반대이며 수치입니다. 폭력과 무관심과 배신과 미움이 담긴 죽음입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행위가 다 용해된 결과입니다. 그 속에는 <복음서>에 나오는 온갖 종류의 인간의 행위들이 다 녹아 있습니다. 예컨대, 제자들의 배반이 녹아 있고, ‘가룟 유다’의 탐욕이 녹아 있고, 로마 병정들의 모독이 있고, ‘빌라도’나 ‘헤롯’의 권태와 무관심이 있고, 구경꾼들의 무관심이 있고,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겨운 헌신이 있고, ‘마르다’의 불평이 있으며, 여인들의 눈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는 그 이상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에 자신을 복종시켰다는 사실입니다.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이 선택한 복종입니다. ‘로빈슨’(T. A. Robinson)은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악이 승리를 얻는 유일한 방식은 사람이 악으로 그것을 보복하고, 반응하고, 되돌려주고, 그래서 그 악이 계속해서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악을 흡수하고 그것을 드러내기를 거부하면, 악은 힘을 잃게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악의 힘을 다룬 방식이 이러했다고 믿는다. 결국 그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칠 때까지 순종으로 그들의 공격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사도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기적을 찬양하고 자랑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죽음을 자랑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늘에 계시면서, 우리의 온갖 추함과 부정함과 악독과 절망과 슬픔에는 무관심한 채로 남아계시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호함 속에 직접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셨고, 우리가 겪는 그 죽음을 겪으신 그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이처럼 자유의 삶을 마음껏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이를 수 있었을까요? 그의 간증은 이어집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절하).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유대’의 유산이나 학식이나 지혜를 축적함으로써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홀로 ‘아라비아’ 광야로 물러나 고독과 명상과 기도를 통해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선교지를 돌아다니면서 설교와 강연과 저술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고, 회심자들을 만들고, 주옥같은 <서신>들을 쓸 때 얻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믿음의 도전이나 모순에 사로 잡혔을 때, 파선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모욕당했을 때 자유를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역설인 것이, <닥터 지바고>에서 주인공은 공산주의 사회에서 자유는 강제 수용소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과 같은 역설입니다. 세상이 자기에게 최악을 행하고 있을 때,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 바로 그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발견하고 자유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피터슨’ 목사님도 말합니다: “죽을 자유는 자유의 절정이다.” ‘요한’ 사도도 그렇게 말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그가 누리는 자유에 관한 긴 자랑의 끝에, <갈라디아서> 전체의 핵심어를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15절).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유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적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헬라’적 방식입니다. 이 구절은 바로 이점을 잘 요약해 주고 있는 듯합니다. ‘유대’적 방식이란 무엇입니까? 할례로 대표되는 “유대주의” 즉 “율법주의”와 “명목론”이라고 했습니다. 이 방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즐겁게 살아보려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적인 의식과 규례를 제정하여 그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정작 본인은 그 속에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할례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13절상). 그러면서 자신은 그 안에서 들어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한편 ‘헬라’적 방식은 무엇입니까? 소위 무할례로 상징되는 “자유방임주의”를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인간은 원래 자유롭게 태어난 존재로서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실현하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 두 가지를 다 거부합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인 것 같습니다만, 실은 한 가지 점에서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둘 다 죽음을 다루기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삶을 붙듭니다. 무할례자들은 덧없는 세상에서 탈출하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입니다. 할례자들은 타락한 사회에서 의미를 보존하는데 필사적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배제하기 때문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쪽이 완고한 도덕주의자라면, 다른 한쪽은 쾌락주의자입니다.
그러나 자유는 선하게 되는 것이나, 즐기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안절부절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외모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얼마나 전도했으며 교회를 몇 개나 개척했다고 자랑할 필요도 없게 만듭니다. 숫자와 크기와 전혀 상관없습니다(12-13절).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규칙을 지키고, 깨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규례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 규례를 행하는 자만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분의 형강과 긍휼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16절). 자유의 규례는 “성령에 좇아 사는 삶”을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가 드러나는 삶을 말합니다.
축도. 누가 우리 교회의 이상과 정신에 대하여 물어본다면 “지식과 사랑”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지식이라 함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시작하여 동료 인간들에 대한 지식, <성경>에 관한 지식, 자연과 역사에 관한 지식, 그리고 동료 인간에 관한 지식 등 실로 다양하고 광범위합니다. 사랑이라 함은 동료 인간 특히 믿음의 공동체 식구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안으로 우리는 <교회 학교>와 <교회 목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지식을 습득할 것이고, 목장에서는 사랑을 나눌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심령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쳐나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아멘.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기능은 무엇입니까?
2. 사도는 이곳에서 단순히 이 단락뿐만 아니라 서신 전체의 신학적 주제를 경구의 형식을 빌어 선포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