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0과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김태정 목사갈라디아서 5:19-26약 38분 분량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25절).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사도는 앞 단락(513-18)에서 “육체의 욕심”과 “성령의 행위”가 서로 대적한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제 그는 이 단락에서 “악한 행동”과 “선한 행동”의 목록을 만들어 나란히 대비시키면서 이 주제를 확장 및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이 두 목록을 각기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와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사도가 이 두 목록을 보여주는 목적은 이중적입니다: (1) 첫 번째 목록은 “육체의 일”이 빚어낸 결과로서, 자유를 기회로 삼아 방종으로 흘렀을 때(13절) 어떻게 되는지 부정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2) 두 번째 목록은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했을 때(16절) 어떻게 되는지를 긍정적으로 그리고자 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구조를 통해서 사도가 강조하고자 하는 결론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24절), 따라서 방종의 삶을 살 수 없다; (2) 성령으로 산다면 성령에 따라 행해야 하며(25절), 그의 삶에서 마땅히 성령의 열매를 드러내게 된다. 이 결론에 이어, “서로 노엽게 하거나 투기하지 말지니라”(26절)는 권면으로 이 단락은 끝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본문의 단락을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열거(19-23절)
(2) 결론(24-25절)
(3) 권면(26절)
형식과 구조. 사도가 이처럼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와 관련하여 열거하고 있는 악행(惡行)과 선행(善行)의 목록들은 현대 독자들에게 있어서뿐만 아니라 당시 독자들에게도 아주 친숙한 것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이분법적인 대조 병행의 형식을 통해서 보여주는 방식 또한 고대 ‘그리스’ 문헌에서 접할 수 있기도 합니다. 참고: R. N. Longenecker, 249-250쪽.
그렇다면 사도는 이들 목록을 기존의 ‘그리스’ 전승들에서 참고한 것일까?
흥미롭게도 <구약>에서는 선과 악에 관해서 본문에서처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는 곳은 없습니다. 다만 <구약>에서도 이처럼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여러 곳에서 다소 느슨한 형태로 선과 악에 관해서 이분법적인 구분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 물론 <구약>에서도 이처럼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선과 악에 관한 일련의 목록이 느슨하게나마 있는 것은 사실이며(시 15:1-5; 잠 6:16-19; 8:13-14; 렘 7:5-9; 겔 18:5-17; 호 4:1-2), 두 행위에 관해서 철저하게 이분법적인 입장을 보여주고 있기는 합니다.
이런 경향은 포로기 이후 제 2 성전 시대에서 ‘유대주의’ 작가들이 ‘그리스’ 사상의 특징 즉 사물을 조직화 하고 체계화 하는 방법론의 영향을 받은 이후에 비로소 나타난 결과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가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유대’ 작가로서, 그는 물경 150여 가지에 달하는 선과 악에 관한 목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일단의 유대 문학 작품들 속에 선과 악에 관한 목록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참고: R. N. Longenecker, 250-251쪽.
<신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외에도 <바울 서신>은 물론이고(롬 1:29-31; 13:13; 고전 5:9-11; 6:9-10; 고후 12:20-21; 엡 4:31-32; 5:3-5; 골 3:5-8; 딤전 1:9-10; 딤후 3:2-5; 디 3:3) <복음서>에도 이들 목록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막 7:21-22). 이들 목록이 초대교회에 이어 교부 시대에 이르기까지(2-3세기)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대화와 저서의 한 부분으로 이들을 다루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 목록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기독교인의 윤리∙도덕적 책임과 관련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되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침례 등과 같은 종교 의식을 행할 때에도 교육 내용으로도 포함시켰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가 이들 목록과 관련해서 21절에서 “이전에 그가 가르쳤던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선과 악에 관한 일련의 목록들이 그 기원을 멀리는 고대 ‘그리스’ 문헌에서 비롯하여 가깝게는 ‘헬레니즘’적 윤리 교육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만, 더 가깝게는 철저하게 이분법적 사고를 보여주고 있는 ‘유대’ 전승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상세한 논의는 R. N. Longenecker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251-252쪽.
아무튼 본문의 전승이 무엇이든 사도는 본문에서 “육체의 행위(일)”와 “성령의 열매” 사이에서 철저한 이분법적 사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두 목록(19-23절)
사도는 이전 단락에서(16-18절) “육체”와 “성령”은 상호 적대적인 관계에 있음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제 그는 이곳에서 “육체의 행위(일)”와 “성령의 열매”의 구체적인 예들을 제시해 보임으로써, 이 주제를 보다 심화 및 확대해 가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육체의 행위(일)”를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19절상)
과연 무엇이 분명하다는 말입니까? 연이어 등장하게 될 첫 번째 목록 속에 포함되는 일련의 행위들이 악한 것임을 굳이 “모세의 율법”을 들먹일 필요가 없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곳에서 “육체의 행위(ἔρϒον, 에르곤)”는 사도가 앞에서 “유대주의”의 위협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사용했던 표현 “율법의 행위”(2:16; 3:2, 5)를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추측컨대, 사도는 그가 이전에 “율법의 행위”를 비난했던 만큼이나 “육체의 행위” 또한 같은 강도로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호의를 입으려 하는 태도나, 자신의 자유로 방종의 기회로 삼으려 하는 태도나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겠지요. 둘 다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어서 열다섯 가지에 달하는 악한 행위들을 열거하게 될 텐데, 이들 목록조차도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권면(13절하)을 보다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장치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19하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19하-21절상)
사도가 열거하는 악행의 종류는 구체적으로는 열다섯에 달하지만,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단지 일부에 불과할 뿐입니다. 일부 사본에서는 “우상 숭배”와 “살인”을 목록의 처음과 마지막에 더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과 조화를 이루려 시도하기도 합니다(막 7:21-22). 여러 학자들이 이 목록에 등장하고 있는 행위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해보려 시도했지만, 무슨 특별한 순서가 있거나 체계가 있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목록 속에 포함된 이들 행위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해 보려는 시도 가운데서, Lightfoot나 Burton의 방법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 성적 타락과 관련된 죄악(음행, 더러운 것, 호색); (2) 이방종교와 관련 된 죄악(우상 숭배, 주술); (3)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들(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분당, 분열, 이단, 투기); (4) 술 취함과 결과(술 취함, 방탕).
“음행”(πορνεία, 포르네이아)이 “육체의 행위”의 목록 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랑”(ἀϒάπη, 아가페)이 “성령의 열매”의 목록 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흥미롭습니다. “음행”은 말 그대로 비윤리적이거나 불법적인 성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서, 원래는 “매음 행위”를 의미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창녀”를 뜻하는 단어 ‘πόρνη’(포르네)는 “하녀를 팔다”는 단어 ‘πέρνημι’(페르네미)와 연관되어 있는데, 당시 창녀는 주로 하녀들을 매매해서 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매음행위는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원체 광범위 하게 행해지던 것으로서 과도하지만 않다면 크게 문제 삼지 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도가 바로 이 행위를 목록에서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사롭지 않게 보아야 할 이유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그런 사회에서 순결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 될 정도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ἀκαθαρσία, 아카다르시아)이 의미하는 바는 다소 광범위합니다. 단순히 육체적 더러움을 의미할 수도 있고, 의학적인 관점에서 청결하지 못하다거나, 종교∙의식적으로 불결하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으며, 도덕적으로 순결하지 못하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칠십인 역>의 <레위기>에서는 이 단어가 20여 회 정도 등장하고 있는데 모두 세 번째 의미와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신약>의 다른 곳에서나 사도가 일반적으로 의도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성적 내지는 도덕적인 더러움입니다. 사도가 이 단어를 성적인 타락과 연관시켜 사용하고 있는 용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롬 1:24; 6:19; 고후 12:21; 엡 4:19; 5:3; 골 3:5; 살전 4:7.
이러한 행위는 <구약>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호색”(ἀσέλϒεια, 아셀게이아)은 신학자 ‘바클레이’(W. Barclay)의 정의에 따르면, “무절제의 극치로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나 다른 동료의 평가나 판단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고 죄에 탐닉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 단어는 <칠십인 역>의 정경 속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외경>의 여러 책에는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바울 서신>이나 <신약>의 다른 곳에서 이 단어를 성적인 죄와 연관해서 여러 차례 사용하고 있어 이곳에서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벧전 4:3; 벧후 2:2, 7, 18; 롬 13:13; 고후 12:21; 엡 4:19).
“우상 숭배”(εἰδωλολατρία, 에이돌롤라트레이아)라는 단어는 <칠십인 역>이나 <요세푸스>를 비롯한 다른 작품들 속에는 등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같은 어원을 갖는 단어 ‘εἴδωλον’(에이돌론)은 <칠십인 역>이나 <신약>에서 “하나님의 형상”(행 7:41; 게 9:20)이나 또는 “형상화 한 신”(고전 8:4, 7; 10:19)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 있어 “우상 숭배”는 형상이나 또는 형상화 한 신에게 예배하는 행위 외에도, 보다 넓은 의미로 “탐심”이나 “탐욕”까지도 포함되고 있습니다(3:5).
“주술”(farmakeiva, 파르마케이아)은 “의약”을 뜻하는 영어의 ‘pharmacy’의 어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중립적으로는 단순히 의학적인 목적으로 약을 투여하는 행위입니다만,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약으로 사람을 오염시키는 행위를 뜻하기도 하고, 또는 약을 사용하여 주술이나 주문을 외는 행위를 말하기도 합니다. <칠십인 역>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하여, ‘바로’ 왕의 궁전의 마술사들과 연계해서 사용하고 있는가 하면(출 7:11, 22), ‘바벨론’의 주술사들을 지칭하는데 사용하기도 합니다(사 47:9, 12). <신약>에서 이곳 외에 이 단어를 유일하게 사용하고 있는 곳은 <계시록>에서입니다(계 9:21; 18:23).
“원수 맺는 것”(ἔχθραι, 에크드라이, 복수형)은 <신약> 외에도 <칠십인 역>이나 기타 ‘헬라’ 문헌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서 “적대감”, “증오심” 또는 “미움”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헤롯’과 ‘빌라도’ 사이의 적개심(눅 23:12), 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대적(롬 8:7; 엡 2:14; 약 4:4) 등을 의미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단어와 반대되는 의미의 단어는 ‘아가페’로 볼 수 있습니다.
“분쟁”(ἔρις, 에리스)은 고대 작가들 사이에서는 “다툼”, “불협화음”, “싸움” 등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신약>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아홉 번 모두 <바울 서신>에서만 등장하고 있습니다(롬 1:29; 13:13; 고전 1:11; 3:3; 고후 12:20; 빌 1:15; 딤전 6:4; 디 3:9).
“시기”(zh'lo", 젤로스)는 고전 ‘헬라어’에서 “거룩한 열정” 또는 “시기” 등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칠십인 역>이나 <신약>에서는 세 가지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이나 사람(들) 또한 어떤 사상에 대한 강렬한 헌신(민 25:11상; 왕상 19:10, 14; 시 69:10; 롬 10:2; 고후 7:7; 빌 3:6); (2)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헌신이나 열심 때문에 우러나오는 분노나 분개(민 25:11하; 겔 23:25; 행 5:17; 13:45; 히 10:27); (3) 타인의 행복이나 소유에 대해서 느끼는 질투나 투기심(롬 13:13; 고전 3:3; 약 3:14, 16). 본문에서의 용례는 이것이 “육체의 행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미루어 본다면 위 세 가지 용례 중에서 세 번째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분냄”(qumov“, 뒤모스) 역시 “시기”(zh'lo”, 젤로스)와 마찬가지로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두 가지로 다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칠십인 역>에서 약 70여회, 그리고 <요세푸스>에서 17회 등장하고 있는데, 좋은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용기” 또는 “기질” 등을 의미하며, 나쁜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분노”나 “분노의 발작” 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분노”나 “마귀의 분노”를 의미할 때 동시에 사용하고 있습니다(계 14:10, 19; 15:1, 7; 16:1, 19; 19:15; 12:12).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분노를 의미하는 용례로 사용되고 있으며(눅 4:28; 행 19:28; 히 11:27), 사도 또한 그러한 의미로 본문 외에도 여러 곳에서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고후 12:20; 엡 4:31; 골 3:8). 그는 또한 한 곳에서 “하나님의 분노”를 말할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롬 2:8).
“당 짓는 것”(ejriqeiva, 에리데이아)은 “비열한 본성”이나 “이기주의” 등을 의미하는데 ‘헬라어’ 고전이나 <칠십인 역> 및 <요세푸스> 등에서는 그렇게 자주 나타나지는 않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이 단어는 원래 ‘에리듀오’(ejriqeu'w; 고용되어 일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날품팔이의 일이나 성향과 관련이 있습니다(참고. 사 38:12 LXX). 그후 이 단어는 이익을 얻기 위하여 품위를 떨어뜨리는 이기주의자 또는 창녀 등의 의미로 변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에서 의미하는 바도 이런 것이며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로 2:8; 고후 12:20; 빌 1:17; 2:3; 약 3:14, 16). 사도에게 있어 “당 짓는 것”은 모든 덕목의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모든 죄악의 근원이 되는 사악한 악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분열함”(dicostasiva, 디코스타시아)은 ‘헬라어’ 고전에서 간혹 정치적인 의미의 “분당”이나 “분열” 등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요세푸스>에서는 이 단어는 나타나지 않으나, <칠십인 역>의 <마카비 상>에서는 ‘셀류시드’ 포고령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유대’인 사이에 있었던 분열을 의미할 때 한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이 단어가 이곳 외에 단 한 번 등장하고 있는 곳은 <로마서>(16:17)인데 사도는 여기서 교인들 사이에서 “분열”과 “분당”을 도모하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의 의미하는 바도 아마 이와 유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단”(ai{resi", 하이레시스)은 ‘헬라어’ 고전에서 다음 여러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붙잡기, 취함, 획득, 정복; (2) 선택, 선택의 기회; (3) 열망, ∼에 대한 욕구, 경향, 좋아함; (4) 목적이 있는 결정 또는 결심. <칠십인 역>에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위 중에서 두 번째 것과 가장 가까우며, 후기 고전 작가들 특히 ‘헬레니즘’ 시대의 ‘헬라어’에 있어서 이 단어는 “철학적 경향”, “학파” 등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필로’(Philo)와 특히 ‘요세푸스’의 저서들은 이 명사들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헬라’ 철학파에 기초를 둔 유대주의 내의 모든 종교 집단들, 곧 ‘에세네’파(Essenes), ‘사두개’파, ‘바리새’파들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대주의”에서 ‘히브리’ 동의어는 ‘민’(min)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어떤 종파 그 자체를 나타내기보다는 “종파”의 구성원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이 단어의 의미에는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상당히 일반적으로 ‘유대’교 내의 파벌들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점점 나쁜 의미로 이단 종파를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던 것 같습니다. 주후 100 년경에 있었던 이 변화로 인해 마침내 주후 2세기 말에는 ‘민’(min)은 더 이상 ‘유대’ 사회 내의 집단들을 구별하는 데에 사용되지 않고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이나 영지주의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 것입니다. <신약>에서 “이단”은 9회 등장하고 있는데,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를 지칭하는데 사용하고 있거나(행 5:17; 15:5; 26:5), 또는 ‘유대’인의 관점에서 기독교인들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를 따르는 무리로 보았습니다(행 24:5; 24:14; 28:22).
“투기”(fqovno“, 프도노스)는 “시기”나 “질투” 등을 의미하는데, 종종 젤로스(zh'lo”, 질투)와 함께 사용되지만 여러 고전 작가들은 이 분명한 두개의 동의어를 신중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젤로스’를 타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정의하는데, 반면 ‘프도노스’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빼앗는 것과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칠십인 역>에서 4회, 외경 <마카베오일서>와 <지혜서>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세상에 사망이 오는 것을 악마의 ‘프도노스’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지혜서 2:24; 마카베오일서 8:16; 마카베오삼서 6:7). <신약>에서 이 단어는 9회 등장하고 있으며 대개 “시기”나 “질투” 등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마 27:18; 막 15:10; 롬 1:29; 빌 1:15; 딤전 6:4; 벧전 2:10).
“술 취함”(mevqh, 메데)은 ‘헬라어’에서 주로 취하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플로티누스’(Plotinus)의 저술에서 신주(神酒)를 먹고 취하는 것은 신과의 신비적인 결합 상태를 묘사하는 데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에서 ‘술 취함’은 종종 참된 ‘그노시스’(gnosis)와 반대되는 ‘아그노시아’(agnosia)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칠십인 역>에서 이 단어는 13회 나오며, “술 취함”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사 28:7; 겔 22:33; 잠 20:10 등). ‘필로’의 저술에서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논문 <페리 메데스(peri methes)>에 있습니다. ‘필로’는 ‘메데’를 ‘데미우르고스 카콘’(demiourgos kakon)으로 묘사하며 ‘술 취함’을 대개 물질 세계의 노예인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혜롭게 술을 마심은 가치가 있으니 곧 긴장을 풀어주고 유쾌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술의 효력은 마시는 자에게 달린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이 단어는 여러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대개 ‘술 취함’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눅 21:34; 고전 5:11; 6:10; 엡 5:18; 살전 5:7).
“방탕함”(kw'mo", 코모스)은 ‘헬라’ 문헌에서 원래, ‘바쿠스’(Bacchus-술의 신)나 기타 어떤 신을 기리는 뜻에서 만찬 후 횃불과 음악을 곁들여, 거리를 줄지어 돌아다니며, 남녀 친구들의 집 앞에서 노래하고 노는, 흥에 겨운 친구들끼리의 떠들썩한 야간 행렬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부터 일반적으로 “밤늦게까지 지체하며 취흥을 탐닉하는 연회와 술잔치”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신약>에서도 이와 유사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롬 13:13; 벧전 4:3).
“육체의 행위”에 속하는 열다섯 가지의 목록을 열거한 다음 사도는 이러한 행위에 대한 궁극적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엄중하게 경고함으로써 첫 목록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 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21절하)
이 경고는 또한 예언적인 성격이 강하게 암시되기도 합니다. 즉 그 결과를 미리 예단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이처럼 엄중한 경고는 정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에 대한 경고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이전에도 경고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언제 그가 이런 일들에 대해서 가르친 바 있는지 알 길은 없지만, 불행하게도 같은 일이 다시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엄중한 경고에 이어 사도는 이제 “성령의 열매”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전에도 이에 대해서 가르친 바 있는지는 알 길은 없습니다만, 이 두 목록은 뚜렷한 대비를 보임으로써, “육체의 행위”가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를 더욱 드러나게 하고 있습니다.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절)
사도는 이곳에서 “육체”와 “성령”을 대조시키면서 “일”과 “열매”라는 두 단어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 이러한 구분은 상당히 의도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두 “일”과 “열매”는 나름대로 상징성을 갖고 있기는 합니다. 즉 “일”(행위)은 스스로의 노력을 수반하고 있는 반면, “열매”는 그보다는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성장의 결실 내지는 선물을 연상시켜줍니다. 그래서 “일”이나 “행위”는 “율법의 행위”나 “육체의 행위” 등에서 보듯이 율법이나 육체 등과 더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고, “열매”는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에도 얻을 수 있는 선물 내지는 수확이라는 점에서 “성령의 활동”과 관련해서 더 잘 어울리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 때문에 사도가 두 단어를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심음”이나 “거둠”이나 “열매” 등의 단어들을 “육체의 행위”와 연관시킬 뿐만 아니라 “성령의 행위”와도 연관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갈 6:7-8; 롬 6:21-22; 7:4-5). 반대로, “행위”나 “일” 등의 단어들을 비단 “육체”나 “율법”과 연계해서 사용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행위”와 연계해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갈 5:6; 6:4; 고후 9:8; 빌 2:12; 살전 1:3). 따라서 우리는 “일”과 “열매”의 상징성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그 의미를 구분하거나 해석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앞에서도 강조하였듯이 “성령에 따라 산다”는 것은 단순히 수동적이며 소극적으로 “성령의 인도와 보호 아래 살아간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성령과 함께 걷는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25절). 이 구절의 전반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If we live in the Spirit, let us also walk in the Spirit(RSV). 따라서 우리는 사도가 이곳에서 “(육체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를 의도적으로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두 행위의 결과들일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와 관련하여 소개하고 있는 아홉 개의 덕목들 또한 무슨 순서나 체계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혹자는 셋 씩 군을 이루어 세 개의 군으로 나누어 그 의미와 성격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이런 시도는 어디까지나 인위적일 뿐입니다.
“사랑”(ajgavph, 아가페)은 명사형으로 동사 ‘아가파오’(ajgapavw, 사랑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성경 외의 문헌에서는 단 한번 발견되는데, 여신 ‘이시스’(Isis)에게 ‘아가페’라는 칭호를 붙여주고 있습니다. 명사 아가페는 <칠십인 역>에서 19회 등장하며 ‘아하바’(사랑)에 대한 번역어로 사용되어 “연애”(삼하 13:5), “남녀의 사랑”(렘 2:2)을 의미하고 있으며, <아가서>에서 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아 2:4 이하; 3:5, 10; 5:8; 7:6; 8:4 이하). <칠십인 역>이 의미가 복잡한 ‘에로스’보다는 오히려 단순한 단어인 ‘아가페’를 사용하는 것도, 인간의 모든 사상, 감정, 행위 그리고 예배가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에 대한 하나의 반응으로 보기 때문인 듯합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116회 등장하면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 인간의 사랑; (2) 하나님을 향한 사랑; (3)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4) 하나님과 그리스도 간의 사랑; (5) 교회에서의 친교의 입맞춤. 우리가 알다시피 ‘헬라’어에서 이 단어 외에도 사랑을 뜻하는 다른 단어들이 세 가지 더 있습니다: (1) 필리아(φιλία): 우정; (2) 에로스(ἔρως); 이성 간의 사랑; (3) 스토르게(στορϒή); 가족 간의 사랑.
“희락”(cara, 카라)은 “기쁨” 또는 “즐거움” 등을 의미하는데, <칠십인 역>에서 50 여회 등장하고 있으며, 주로 히브리어 심한(기쁨, 즐거움)와 사손(기쁨, 즐거움)의 역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59회 등장하고 있으며, 그 의미하는 바는 대체적으로 위와 같습니다.
“화평”(eijrhvnh, 에이레네)은 본래 사람들 사이의 관계(relationship)나 태도(attitude)를 의미하지 않고 상태(state), 즉 “평화의 때”, 또는 “평화의 상태”를 의미하며, 처음에는 순전히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상태에서의 한 막간(a interlude)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전쟁에 반대되는 것, 혹은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결과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평화는 복된 번영을 가져오도록 법과 질서가 유지되는 상태입니다. ‘에이레네’는 평화의 상태이며, 평화의 상태에서 땅과 백성을 위한 복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필레몬(Philemon)은 이를 최고의 선(supreme good)으로 격찬하고 있습니다. ‘에이레네’는 또한 평화 조약이나 평화의 타결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란, 소요의 정반대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평화적인(온화한) 태도, 즉 적의가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에픽테투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스토아’ 철학자들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에이레네’는 영적 평안이나 마음의 평안이라는 의미를 띠고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단어는 이들의 저작에 그리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아우구스투’(Augustus)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한 ‘에이레네’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서 “구속”(redemption)을 동경하는 강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이 평화의 상태는 로마 황제가 군대의 힘으로 성취한 법적 또는 정치적 안정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250회 이상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 ‘샬롬’의 역어로 사용된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샬롬’에 대한 의미는 실로 다양한데,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다른 곳에서 참조할 수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생략하기로 합니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92회 사용되고 있으며, <요한 1서>를 제외한 모든 책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25회(마 4회, 막 1회, 눅 14회, 요 6회): <사도행전> 7회; <바울 서신> 47회; <야고보서> 3회; <베드로 서> 5회; <유다서> 1회; <요한 서신> 및 <계시록> 4회. <신약>에서 이 단어의 변화 또는 발전된 의미를 모두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그 형태와 내용에 있어서 <칠십인 역>과 <구약>의 전통을 착실히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랍비’ 문헌의 ‘샬롬’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추가로 고전 ‘헬라’어 문헌에 나타난 의미들이 그 영향을 미치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오래 참음”(makroqumiva, 마크로디미아)은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체념, 감수, 강제적인 수락; (2) 자포자기적인 인내; (3) 지연, 지체, 행동을 연기하거나 미루는 것; (4) 인내, 확고부동, 목적에 도달할 때까지 참음. 그리고 <칠십인 역>에서는 5회 등장하면서 ‘오래 참음’(잠 25:15 렘 15:15), ‘견딤, 확고부동’ 등 특히 고난과 재난을 참는 것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사 57:15; 마카베오일서 8:4). 그리고 <신약>에서는 14회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울 서신> 10회; <히브리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각 1회. 모든 경우 예외 없이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합니다.
“자비”(crhstovth", 크레스토테스)는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정직, 존경할 만함, 훌륭함, 가치 있음; (2) 친절, 우호(우정), 온화함(온유); (3) 통치자들과 공적 인물들을 위한 영예로운 호칭. 또한 <칠십인 역>에서 약 18회 정도 등장하고 있으며, 그 의미하는 바는 ‘선’, ‘의’를 지칭하거나(시 14:1, 3; 53:3), 하나님의 자비 및 친절한 성품과 행위 등입니다(시 25:7이하; 시 31:19 시 65:11 등). <신약>에서는 <비울 서신>에서만 10회 등장하고 있으며,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할 때나(롬 2:4; 11:22; 디 3:4) 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하여 사용할 때(본문, 고후 6:6) 공히 “자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양선”(ajgaqwsuvnh, 아가도쉬네)은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선함”(goodness)을 의미합니다. <칠십인 역>에서 약 16회 정도 등장하고 있는데, “자비”(crhstovth")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비울 서신>에서만 나타나고 있는데(롬 15:14; 엡 5:9; 살후 1:11), 이 경우 역시 “자비”와 유사어 이긴 하지만 “선함”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충성”(pivsti", 피스티스)은 <갈라디아서> 서신 전체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대한 인간의 “믿음” 내지는 “믿음의 반응”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만(갈 2:20; 3:6이하; 5:6), 이곳에서는 보다 윤리적인 의미의 “충성스러움”이라는 뜻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 단어를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신실함”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롬 3:3; 고전 1:9; 10:13; 고후 1:18; 살전 5:24; 살후 3:3).
“온유”(prau?th", 프라위테스)는 고전 ‘헬라어’어 문헌에서 “온유”, “친절”, “겸손”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극단, “과도한 분노”와 “전혀 분노를 모르는 것” 사이의 중용 정도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칠십인 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온유”나 “친절” 등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이 단어의 의미는 보다 발전되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내지는 “순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그러나 또 다른 의미도 역시 발견할 수 있는데, 상대방에 대한 “배려” “젊잖음”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고전 4:21; 고후 10:1; 갈 6:1; 엡 4:2; 골 3:12; 딤후 2:25; 디 3:2; 약 3:13; 벧전 3:15). 본문에서 의미하는 바도 이와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절제”(ejgkravteia, 엥크라테이아)는 ‘헬라어’ 고전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모두 이 단어를 음식이나 성에 대하여 지나치게 추구하는 행위에 대한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에 대해서 길게 설명을 하고 있으며, ‘바울’의 시대에 이르러 이 단어는 ‘헬레니즘’ 윤리의 핵심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단어는 명사형으로든 또는 형용사 형으로든 <칠십인 역>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2 성전 이후 “유대주의” 문학 작품들 속에서는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명사형으로 이곳 외에 세 번 등장하고 있고(행 24:25; 벧후 1:6), 형용사 형으로는 한 번 등장합니다(디 1:8). 이 단어와 관련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단어가 “성령의 열매”의 목록 끝에 등장하고 있으며, “육체의 행위”의 목록 끝에 “방탕함”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성령의 열매”와 관련해서 사도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없을까요? 그는 앞에서 “육체의 행위”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이제 이곳 두 번째 목록에서도 “성령의 열매”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형식적으로 유사한,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반대되는 언급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3절하)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도는 앞에서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5:14)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만, 이곳에서 “성령의 열매”와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의도하는 바는,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율법을 이루는 하나의 조건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수사적 효과를 위해서 당시 회자되고 있던 금언(또는 잠언)을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령의 열매”의 목록 속에 들어 있는 아홉 가지의 덕목은 무슨 새로운 기독교 윤리∙도덕적 책임으로서 이들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도 “덕”을 가리켜 “그런 사람을 이길 법은 없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살펴보았듯이 “육체의 행위”(19-21절)와 “성령의 열매”(20-23절)에 관한 두 목록은 “육체”와 “성령”에 관한 앞의 주제(13-18절)를 보다 확대하고 심화시킨 것입니다. 즉 “육체의 일”은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았을 때 나타나는 참담하고 어두운 결과이며, 반대로 “성령의 열매”는 자유를 사랑으로 남을 섬기는 기회로 삼았을 때 드러나는 긍정적이고 밝은 결과라는 점을 소상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목록이 기능하는 바는 이전의 내용을 발전시키고 심화시키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결론 제시를 위한 배경 또한 마련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24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24-25절)
결론은 이중적입니다. 첫 번째 결론은 24절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과 같은 의미로서, 이것은 두 표현 “그리스도의”(3:29)가 “그리스도 안에서”(3:26, 28)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결론인 즉은 ‘그리스도’인들은 “육체”(단순히 신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까지)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므로 그 육체뿐만 아니라, 그 속에 품고 있던 모든 탐욕들마저 죽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결론은 25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결론은 “성령”에 관한 것입니다. 따라서 25절은 “육체”에 관한 결론을 다루고 있는 24절과 함께 본문 전체의 결론으로서 적절한 대조와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즉 24절은 19-21절에서 다루고 있는 “육체의 행위”에 관한 요약 설명으로 볼 수 있고, 25절은 22-23절 사이의 “성령의 열매”에 관한 요약 설명입니다: 그러나 이런 단락 구분과 관련해서 다른 견해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즉 24절은 이유나 원인을 가리키는 후치사(後置詞) δέ(데, 따라서)를 수반하고 있어, 앞 구절들과 내용면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만, 25절에는 그러한 접속사가 없어 24절과 적절한 연결 고리가 없기 때문에 25-26절을 새로운 단락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19-21절목록 1: 육체의 일
22-23절목록 2: 성령의 열매
24절결론 1: 육체
25절결론 2: 성령
이처럼 주제나 그 내용에 있어 24절과 25절은 각기 19-21절과 22-23절에 대한 한 쌍의 결론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25절은 구문론적인 관점에서 가정법과 명령문이 혼합된 것입니다: (1)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25절상); (2)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25절하). 그리고 이 구절은 형식에 있어 교차대구이며, 내용적으로는 금언의 일종이며, 복음의 사실과 명령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살다”(25절상)는 표현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이와 유사한 표현은 앞에서 한 두 차례 등장한 바 있기는 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다”(16절); “성령의 인도를 받다”(18절). 그리고 전혀 다른 표현이긴 하지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는 표현과 맥을 같이 하고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 서신>에서 신자의 체험과 관련해서 볼 때, 성령이나 ‘그리스도’나 하등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참고. 롬 8:9-11).
“성령으로 산다”는 표현이 다소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면, 이어지는 “성령으로 행하다”(25절하)는 신자 편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구절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기독교 신앙생활의 근원과 동기에 관한 것으로서, “율법주의”나 “자유방임주의”가 아니라 “성령의 삶”이라는 것이지요. 즉 우리는 율법에 따라 살아서도 안 되고, 자신의 육체를 따라 살아서도 안 되며, 오직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체”와 “성령”에 관한 사도의 결론은 이제 다소 엉뚱한 권면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26절)
이 구절 자체만으로 추론해 보건대 당시 교회 안에서는 여러 분파들이 반목하고 갈등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정확히 어떤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자신은 지금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이점 수신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오늘 우리가 이 구절을 통해서 받는 인상은, 이 구절이 단락의 결론으로서 기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권면(6:1-10)에 대한 배경 내지는 서론으로서 역할도 감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이 구절은 이어지는 일련의 세부 권면들에 대한 일반적이거나 총괄적인 선언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필자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음악 시간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것은 필자가 노래하는 것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노래라면 어릴 적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면서 불러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아주 좋아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노래는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가곡이나 명곡이 아니라, 소위 성인 가요 즉 유행가였습니다. 그러니 무슨 계명이나 박자 따위를 알았을 리가 없고, 악보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들어와 음악 시간에 이렇게 신나게 노래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계명으로 노래를 부르라고 하고, 악보 읽는 것에 대해서 필기시험을 치러야 하고, 악보를 읽다가 틀리기만 하면 어김없이 회초리로 손바닥을 맞다 보니 음악 시간은 아주 지겨운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필자의 불만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냥 좋아하는 노래 부르면 그만이지 계명은 왜 필요하며 악보는 왜 필요한가? 왜 우리 선생님은 이렇게 밖에 가르칠 수 없단 말인가?”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필자는 자유를 원했던 듯합니다.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 자유 말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그의 책 <자유>에서 “자유에는 무한한 창조적 상상력과 에너지가 내재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시라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우리 또한 창조자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창조적 상상력은 과학이나 문학이나 예술의 영역에만 필요한 것이 아닌 듯합니다. 신학이나 신앙의 영역에서도 이것은 어김없이, 아니 그 어떤 영역에서보다 더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자유가 갖는 양면성 내지는 이중성 때문입니다. 이중성이라 함은 자유가 가져다주는 기회와 위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민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유를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인가? 자유를 나 자신을 섬기는 일에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으로 타인을 섬기는 일에 사용할 것인가?” 사도는 이 둘을 각기 “육체의 일(행위)”와 “성령의 열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일”과 “열매”는 나름대로 상징성을 갖고 있기는 합니다. 즉 “일”(행위)은 스스로의 노력을 수반하고 있는 반면, “열매”는 그보다는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성장의 결실 내지는 선물을 연상시켜줍니다. 그래서 “일”이나 “행위”는 “율법의 행위”나 “육체의 행위” 등에서 보듯이 율법이나 육체 등과 더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고, “열매”는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에도 얻을 수 있는 선물 내지는 수확이라는 점에서 “성령의 활동”과 관련해서 더 잘 어울리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 때문에 사도가 두 단어를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심음”이나 “거둠”이나 “열매” 등의 단어들을 “육체의 행위”와 연관시킬 뿐만 아니라 “성령의 행위”와도 연관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행위”나 “일” 등의 단어들을 비단 “육체”나 “율법”과 연계해서 사용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행위”와 연계해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강조하였듯이 “성령에 따라 산다”는 것은 단순히 수동적이며 소극적으로 “성령의 인도와 보호 아래 살아간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성령과 함께 걷는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25절). 이 구절의 전반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가 이곳에서 “(육체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를 의도적으로 대조적으로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두 행위의 결과들일 것입니다.
두 목록. 그는 우선 “육체의 행위(일)”가 만들어 내는 참담하고도 어두운 결과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열다섯 가지에 달하는 “악한 행위”의 목록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목록은 무슨 체계나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전체의 일부일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한 순서나 체계도 없이 그냥 나열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도는 이들 목록 끝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덧붙임으로써 이 목록 속에 더 많은 “사악한 행위”들이 포함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들 행위 중에는 단순히 행음이나 우상숭배와 같은 육체적 행위뿐만 아니라, 분쟁, 탐심 등과 같은 영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들도 다수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이든 한 가지 공통점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았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히려 멀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행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점에 있어 “율법의 행위”와 똑 같은 결말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율법의 행위”는 모든 창조적 상상력이 필요 없는 삶입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열심히만 하면 됩니다.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고, 책에서 시킨 대로 하면 됩니다. 이런 삶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모범생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실패할 염려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대로 불구하고 이런 삶의 결말은 “육체의 행위”만큼이나 비참하고 황당한 것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분당과 분리와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그러나 “성령의 행위(열매)”는 무엇입니까?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런 삶을 자신의 충동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상상력이 이끄는 대로 사는 삶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삶은 각본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가 대본을 읽고 리허설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실제 연극에서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노련한 배우라면 정작 무대 위에서 각본대로 하지 않을 경우가 많습니다. 대본에도 없는 일종의 ‘카텐자’를 집어넣어 극적 요소를 더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런 것과 유사하다 할 것입니다. 그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하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향해서 “하나님을 알라”하고 가르칠 필요도 없습니다. 모두가 창조적 상상력을 다 가지고 거듭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창조적 삶에는 재료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재료가 필요합니다. 마치 미술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물감이나 붓이나 캔버스가 필요한 것처럼, 그리도 지휘자가 악기나 악단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그 재료란 다름 아닌 “성령의 열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인재;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그런대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성령의 열매”를 결과로서 이해하게 되면, 우리가 기대하는바 열매는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부; 복음 전도; 사회봉사; 과부나 고아를 돌보기 등등.
우리는 이 아홉 가지 열매가 실생활에 있어 어떻게 구현되는지 소상히 알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들 목록에서 드러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 방향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아홉 가지 재료를 열매로 규정하고 있는 사도의 유비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노력으로 열매를 생산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구입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또한 공로 상패나 메달이나 훈장처럼 무슨 훌륭한 일을 한 대가로 주는 것도 아닙니다. 열매들은 그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때로는 나 자신에게서 그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결과를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경외심과 찬미와 두려움 가운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재료들이 과일과 비슷한 점은 또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부패하기 쉽다는 점에서 과일과 비슷합니다. 그것들은 상합니다. 보기에 싱싱하고 아름답지만 오래 전시해 둘 수 없습니다. 그것은 먹어서 소화시켜야 합니다. 과일은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영양소를 담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역시 창조적 삶에 꼭 필요한 영양소들입니다.
결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입니다. 창조적이지 않은 삶은 정욕과 탐심의 삶이고, 내적인 충동에 사로잡힌 삶이며, 잘 세워 놓은 계획과 예측 가능한 삶을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 하며, 정형화 된 행동을 모방하며, ‘맥도널드’ 회사의 ‘햄버거’처럼 대량 생산이 가능한 문화 속에서 자신을 맞추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창조적인 삶은 이러한 “육체의 소리”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창조적인 삶은 처음에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것, 즉 스스로를 의지하지 않은 것으로 시작합니다. 자신의 내적 충동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성령의 재료” 즉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모험과 위기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사도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25절). 즉 앞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이 구절의 전반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성령에 의하여 이끌리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성령과 함께 걸어가는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지향하는 바가 있다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수동적인 체념에서나 윤리∙도덕적인 책임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재료로 빚어내는 창조적 삶의 결과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기능은 무엇입니까?
2. 본문의 형식과 구조를 요약할 수 있겠습니까?
3. “육체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논의해 봅시다. “성령의 열매”가 창조적 삶의 결과라기보다는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한 재료로 보아야 한다는 설명에 대한 당신의 입장은 어떤 것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