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8과
자유에 굳게 서라
김태정 목사갈라디아서 5:1-12약 25분 분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
이 단락을 마지막으로 “유대주의”에 대한 사도의 논쟁은 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서신의 벽두에서부터 이곳까지 논쟁과 해설과 검증의 방식으로 “유대주의”의 실체와 그 해악에 대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 가르쳐 왔습니다. 이 모든 일의 끝을 권면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것이 권면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단순히 이 단락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서신 전체에 걸쳐 전개해 온 사도의 “자유의 복음”에 대한 요약적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기능을 가진 여러 요소들이 어우러져 본문을 구성하고 있는데, 대략 여섯 가지로 구분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1) 기독교 자유의 복음에 대한 선언과 선포(1절상); (2) 권면과 “유대주의”의 위협에 대한 경고(1절하-4절); (3) 기독교 복음의 요약(5-6절); (4) 상호 연관성이 결여된 일련의 수사적 언급-질문, 역설, 잠언 등(7-11절상); (5) 결론(11절하); (6) 추가 색인-냉소. 이들 요소들이 두 개의 단락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들 각각을 파악해 내고 음미하는 것이 본문의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형식과 기능. <신약>이나 초기 기독교 문헌에서 자주 등장하는 “권고”나 “권면”의 문학적 특징에 대해서 가장 먼저 언급한 학자는 ‘디벨리우스’(Martin Dibelius)라는 사람입니다. 그에 따르면, 이들 “권면”은 윤리∙도덕과 관련한 일련의 주제들을 상호 내적인 연관성도 없이, 그리고 당장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만한 대상도 없이 일반적인 관점에서 다룬 것일 뿐입니다. <바울 서신>만 하드라도 대개 그 구조를 “논증”과 “권면”의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둘은 서로 문체도 다를 뿐만 아니라, “권면” 부분은 당장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보다는 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요구 사항을 다루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들 “권면”은 윤리나 도덕에 관한 “사도의 신학”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바울’에게 독특하게 볼 수 있는 다른 사상과도 별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여러 학자들도 ‘디벨리우스’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 서신>에 등장하고 있는 일련의 “권면”이 그 내용에 있어 다분히 일반적이거나 전통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권면들을 배열함에 있어서도 상호 순서가 뒤바뀌어도 별 문제가 없으며, 이들을 적용함에 있어 당장의 문제들과도 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권면은 사도가 지금까지(1-4장) 전개해 온 전체 논증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사도의 깊은 상심과 염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그가 그동안 전개해 왔던 논증과 권면들이 압축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구조적으로 볼 때, 본문은 서신의 머리말과 함께 일종의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음을 봅니다: <1:6-10>//<5:1-12>. 이 두 본문은 그 억양이나 표현에 있어, “유대주의”의 위협에 대항하여 사도가 그동안 제시한 그 모든 언급들에 대하여 골격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두 본문과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할 만 한 점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두 본문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아주 격앙되어 있고 단호하다는 점; (2) 서로 병행되는 유사한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 (4) 두 본문에서 공히 “다시”를 사용함으로써, 단언적인 분위기를 조성함; (5) 두 본문 모두에서 저주가 등장하고 있음. 이들을 다시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범위와 단락. 본문의 단락은 그 기능적인 측면이나 문장의 분위기로 볼 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단락이 기능하는 바는 사도가 그동안 전개해 왔던 그 모든 논증에 대한 요약 내지 결론이며, 성격 상 선언과 권면 및 경고로 볼 수 있다면, 두 번째 단락이 기능하는 바는 “유대주의”에 대한 공격과 비난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선언/요청/경고(1-6절)
(2) 공격과 비난(7-12절)
첫 번째 단락을 다시 세부적으로 분석해 보면, 위에 구분한 바대로 처음(1절상)과 마지막(5-6절)이 선언과 확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사이에(1절하-4절) “유대주의”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한편 여섯 절로 이루어진 두 번째 단락의 분위기는 공격과 비난으로 일관하고 있는데, 매 절마다 다른 수사적(修辭的) 특징을 지닌 언급들을 어지럽게 짜 맞추어 놓은 듯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신랄하고도 예리한 지적에서 시작하여, 수사적 질문, 금언, 위협, 역설, 그리고 마지막으로 냉소에 가까운 농담으로 공격의 절정에 이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1) 수사적 질문: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못하게 하더냐?”(7절)
(2) 예리한 지적: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8절)
(3) 잠언(금언):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9절)
(4) 위협: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 심판을 받으리라”(10절)
(5) 역설(아이러니):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11절)
(6) 냉소: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는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12절)
본문의 결론은 11절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만, 12절은 일종의 색인(索引)으로서 사도가 결론에 이어 추가하고 있는 최후의 공격이기도 합니다.
신학과 신앙
1. 선언/권면/경고(1-6절)
선언(1절상).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첫 번째 단락은 그 기능에 있어 “선언”과 “요청”과 그리고 “경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선언”은 다름 아닌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 선언과 동일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1절상)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한 ‘헬라어’ 문장은 다소 특이합니다. <헬라어 성경>에서 1절은 앞선 문장과 연결 고리 역할을 해줄 만한 아무런 전이구절이나 접속사도 없이 다소 느닷없이 하나의 독립적인 문장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1절상의 구문(構文)과 관련하여 다양한 본문 변조가 있어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 중 원문에 가장 충실할 것으로 판단되는 <헬라어 사본>을 문자적으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자유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For freedom Christ set us free).
사도는 이곳에서 단순하게 문법적 직설법으로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언급하고 있는 이 “자유”는 실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사라-하갈 알레고리>에서 “자유 있는 여인”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어(4:22, 23, 30, 31), 이후 다루게 될 “자유”의 주제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래서 이 자유에 대한 사상은 4장의 범위를 뛰어넘어 이후 서신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서신의 인사말(1:1-5)에서도 그는 ‘그리스도’를 지칭하면서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내어주신” 자로 그린 바 있습니다. 또한 제 2부의 “해설” 단락(1:11-2:14)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자유”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자유”에 대한 강조는 “해설”에 이어 “검증” 단락(3:1-4:11)으로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그가 강조하고 있는 바는 “율법 아래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새로운 관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자유”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나 세상 앞에서 누리고 상황이나 처지를 대변하는 단어이며, 본 서신 전체의 핵심어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 구절(5:1상)의 기능과 관련하여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과연 이 구절을 앞선 <사라-하갈 이야기>(4:21-31)의 결론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권면의 단락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라면 두 단락을 잇는 전이구절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일련의 어휘나 핵심 사상만을 본다면, 첫 번째 견해 즉 <사라-하갈 이야기>의 결론으로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자유에 관한 선언에 이어 “굳세게 서라”는 권면에 이어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경고에 이르기까지 앞선 이야기에 대한 결론으로 삼기에 충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바대로, 이 구절은 앞선 문장과 연결 고리 역할을 해줄 만한 아무런 전이구절이나 접속사가 없다는 점에서 순수하게 결론으로 삼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5:1과 5:13에서 동일한 표현 “자유를 위하여”가 나란히 등장하고 있어, 이들 구절을 포함하는 각 단락은 새로운 단락의 시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가장 무난한 입장은 세 번째 견해 즉 일종의 전이적 기능을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기능에 관한 입장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선언(5:1상): 1:6-4:31 사이의 모든 논의에 대한 요약과 결론
(2) 권면(5:1하-12절): 결론적인 권면
이 구절과 관련하여 남은 문제는 구문과 관련된 것으로서, “자유를 위하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문법적으로 이 단어는 여격(與格)으로서, “자유에 의하여”(by the freedom) 또는 “자유를 항하여”(for the freedom)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전자(前者)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수단과 방법의 의미를 지니게 되어, 이 구절에 대한 번역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그 자유”(the freedom by which Christ has set us free)가 될 것이며, 만일 후자(後者)의 입장을 취하면 목적과 목표의 의미를 지니게 되어, 그 번역은 5:13에서 보는 바처럼 “그리스도께서 그 자유를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으니”(For the freedom Christ set us free)가 될 것입니다.
권면(1절하). 1절 후반은 문법적으로 명령문으로 요청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절하)
이 구절의 첫 번째 동사 “굳건하게 서다”(στήκω, 스테코)는 <바울 서신>뿐만 아니라 <복음서> 여러 곳에서 권면을 위하여 자주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예: 막 3:31; 11:25; 요 1:26; 롬 14:4; 살후 2:15; 계 12:4; 빌 1:27; 4:1.
두 번째 명령문의 동사 “(멍에를) 메다”는 문법적으로 수동형으로서, “붙잡혀 있지 말라” 내지는 “메어있지 말라” 등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멍에”(ζυϒός, 쥐고스)는 당시 배경에서 “명예로운 책임”과 “강요된 부담”이라는 양면성을 다 지니고 있습니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가족이나 공동체 또는 율법 준행 등에 대한 책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초청의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멍에를 지고 나로부터 배우라...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마 11:29-30). 한편 후자와 관련해서는 “노예 생활”이나 기타 “마음에 내키지 않는 강요 된 행위” 등을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연설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행 15:10).
그리고 “다시”가 의미하는 바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전에도 “율법의 멍에”를 지고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가 뜻하는 바는 “세상의 초등학문”일 것입니다. 즉 이들이 이전의 이교도적인 삶의 방식으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의 입장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주의적 삶”이나 “이교도적인 삶”이나 하등 차이가 없고, 내버려야 할 삶의 방식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은 자유를 포기하고 노예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론적으로 1절에서 사도는 1:6-4:31 사이에서 그가 제시해 온 모든 논증들을 요약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복음의 핵심과 “유대주의”의 위협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절).
경고(1절하-4절). 이어지는 부분에서(1절하-4절) 이 선언은 권면과 경고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2절은 일차적인 경고가 주어지고 있는 곳입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2절)
이곳에서 사도의 경고는 이전에 머리말(1:6-10)에서 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이며, 이처럼 강력한 톤을 본문 끝까지 계속 이어가다가 마지막 12절에서 가슴을 찌르는 듯한 냉소로 그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첫 세 단어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은 아니지만, 강조를 위해서 도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라, 나 바울은.”
2절의 조건 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은 보다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너희가 스스로를 할례를 받도록 허용한다면”이 됩니다. 조건절의 형식은 소위 “제 3급 조건절”로서 그 암시하는 바는 ‘갈라디아’인의 할례 문제는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의 경고는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키는 차원이 아니라, 지금 현재 ‘갈라디아’ 교인들의 겪고 있는 심리 상태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지금 할례를 받을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이런 결정에 대하여 사도가 줄 수 있는 경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조건절에 대한 이 귀결(歸結)의 시제가 미래형인 점을 고려한다면, 이 구절에 대한 보다 정확한 번역은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심판의 날에 도우러 오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종말의 심판에 관한 어떠한 언급이나 암시도 없으며, 4절에서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다”와 “(은혜에서) 떨어지다” 등의 동사들이 완료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리스도가 너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을” 시점은 종말의 날이라기보다는 그들이 할례를 받으려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그 시점 이후부터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이 할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리스도’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도움이나 유익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일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는 “유대인 기독교인”이 할례를 받은 채로 살아간다든지 또는 율법의 규례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참고: 고전 7:17-24). 그가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쫓아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 아니라, 기독교를 “율법주의”로 만드는 것이므로 당연히 이런 방식을 고집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는 아무런 도움도 유익도 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에 대해서 생각지도 말아야 할 이유는 또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3절)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가 그것입니다. 할례는 ‘그리스도’로부터 아무런 도움이나 유익을 받을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율법 전체를 행해야 하는 과중한 부담을 지워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시 증언하다”고 쓰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다시” 증언한다는 말은 이전에 그가 ‘갈라디아’에 있을 때 할례에 대해서 일차 언급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단어를 사용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2절과 3절을 비교해 볼 때 내용 상 반복되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2절에서 언급한 내용을 새삼 강조하기 위하여 “다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이 단어가 필요지 않다는 판단 때문인지 일부 사본에서는 이 단어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3절이 2절의 내용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앞에서 말한 내용을 강조하면서 3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서 “다시 말한다”고 쓸 수는 있을 것입니다(참고: 1:8-9의 두 절에서도 이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전에 사도가 ‘갈라디아’에 있을 때 할례에 대해서 언급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그가 그곳을 떠난 이후에 발생한 상항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증언하다”(μαρτύρμαι, 마르튀로마이)는 원래 “증언”을 뜻하는 “마르튀스”(μάρτυς)에서 유래하였는데, “순교자”(martyr)도 여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왜 할례를 받는 순간 율법의 모든 요구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합니까? “유대주의자”들이 과연 그렇게 말하고 가르쳤을까요? 아마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이방 기독교인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약속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 그들이 행하고 있는 일련의 종교적 관습들을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예컨대, 안식일이나 절기 들을 지키며, 할례를 받는 것 등을 말합니다. 이런 가르침에 ‘갈라디아’ 교인들도 진지하게 반응하면서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할례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들이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한 가지 분명하게 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즉 할례는 단순히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할례를 받는 순간 율법의 모든 요구 조건들을 다 준수하겠다고 선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사도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일부 학자들은 그가 율법을 과도하게 해석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유대교”의 가르침 중에는 분명 모든 율법에 대하여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전승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참고: R. N. Longernecker, 227쪽.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약>의 다른 서신에서도 사도의 이런 주장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따라서 비단 율법뿐만 아니라 모든 규정이나 법령의 세부 조항 하나하나는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든, 길든 짧든, 상호 연관되어 전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느 특정 조항 하나만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3절에서 사도는 율법에 대해서 과도한 해석을 하고 있거나 무리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사도는 3절에 이러 4절에서도 “유대주의”의 가르침을 따르는데 오는 심각한 결과를 또 하나 더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4절)
이 세 번째 경고는 2-3절에서 소개한 바 있는 두 가지 경고보다 훨씬 심각하게 들립니다. 세 경고는 어떤 것입니까? 요약을 위해서 여기서 다시 한 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2절); (2)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져야 한다(3절); (3)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멀어진다(4절). 이 세 번째 경고와 관련해서도 “유대주의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즉 율법의 가르침을 쫓아 산다고 해서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거나 그의 은혜를 버리는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점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반대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칭의”는 율법이나 율법의 삶과는 아무 상관도 없으며, 상호 대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세 번째 경고가 2-3절에서의 경고에 비해서 훨씬 심각하게 들리는 이유는, 주어나 동사의 형태나 시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특정 개인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누구든지”)을 상대로 하고 있으며, 문장 속의 두 동사 모두 완료형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의미를 살려 4절을 다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비록 여러분들이 아직 할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누구든지 할례를 받음으로써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졌고, 은혜에서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사도는 ‘유대’인 기독교인이 할례를 받고 율법에서 가르치는 대로 복음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해서 무어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이방인 기독교인의 태도, 즉 기독교 복음을 율법의 가르침과 혼합시켜 살겠다는 그 태도입니다.
사도가 2-4절에서 할례의 폐해와 그 심각한 결과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이어지는 두 절(5-6절상)에서는 긍정적인 묘사를 통해서 그가 앞에서(2:15-21; 3:1-411) 밝혔던 복음의 진수(眞髓)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5(왜냐하면)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상(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가 효력이 없되(5-6절상)
그가 말하는 상대는 누구입니까? 이곳에서 그가 소개하고 있는 내용은, 두 절의 문장 구문이나 또는 어휘 등을 통해서 볼 때, 새롭다기보다는 이전에 사도 자신이 했던 말들 중에서 요약 및 발췌의 형식으로 정리해 놓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한 가지 특기할 만 한 점은 일인칭 복수형 “우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문 전체를 통해서(1-10절) 대부분 복수 이인칭 “너희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유독 이곳에서만 “우리”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는 것이지요. 이는 물론 사도가 자신을 수신자들과 동일시하고 싶을 때 쓰는 표현으로서, 문맥에서 볼 때 ‘갈라디아’의 이방인 기독교인들보다는 오히려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지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6절 후반의 내용은 5-6절상의 내용에 새롭게 추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중요성이 덜한 것은 아닙니다만, 이 구절은 이전에 그가 말했던바 내용과는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6절하)
이 구절이 새롭게 추가된 것이라고 추측하는 데에는 다음 몇 가지 근거를 댈 수 있을 것입니다: (1)이곳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이 서신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 (2) “사랑”과 “믿음”은 <바울 서신>의 핵심 단어들이긴 하지만 이곳에서처럼 직접적인 관계로 묘사하고 있는 곳은 없다는 점. 따라서 사도가 이 구절을 더하고 있는 이유는 이전에 그가 가르쳤던 내용에 대해서 간략하게 요약을 한 다음 새로운 무엇인가를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인 즉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과 그 속에 필연적으로 내재할 수밖에 없는 역동적인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 주석가의 말대로, 이러한 사랑의 관계가 없다면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필경 비윤리적인 방종으로 흐르고 말 것이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 사도가 이 구절을 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공격과 비난(7-12절)
이 두 번째 단락은 첫 번째와는 달리 구성이나 형식이 다소 자유스럽고 산만합니다. 첫 번째 단락이 “굳세게 서라”는 주제어를 중심으로 잘 정돈된 형식과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면, 두 번째 단락은 신랄한 수사적인 질문, 금언, 역설, 냉소에 가까운 농담 등이 산만하게 뒤섞여 있는 지극히 비형식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단락이 기능하는 바는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공격과 저주에 가까운 비난입니다. “유대주의”의 위협에 대해서 긴 논증과 권면으로 첫 번째 단락을 마친 사도는 이곳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비난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예리한 수사적 질문입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7절)
우리가 알다시피 사도는 종종 신앙생활을 운동장에서 달리기 경주를 하는 선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2:2; 고전 9:24-27; 빌 3:14; 딤후 4:7; 행 20:24). 인생을 운동 경기에 비유하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는 지극히 흔한 것이었습니다. “달음질”과 관련해서 동사의 시제를 미완료형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갈라디아’ 인들이 이전에 복음을 처음 받아들였을 때와 현재의 모습이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참고. 4:13-15).
이들이 현재 달라진 이유는 과거에 누군가가 경주를 “방해했기”(ἐϒκόπτω, 엥콮토) 때문입니다. 이 때 사용하고 있는 동사의 시제는 완료형으로서 과거에 이미 일어난 것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결과 ‘갈라디아’ 교인들이 “순종하지”(πείθεθαι, 페이테스타이) 못하게 된 것이라는 현재형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이 사실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수사적 질문에 이어 사도는 8절에서 스스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다름 아닌 “유대주의자”들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8절)
이들은 분명 자신들의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포장했겠지만 사도의 진단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일 뿐이라는 진단입니다. 사도는 이곳에서 <신약>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등장하는 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권면”(πεισμονή, 페이스모네). 이 단어는 원래 “설득”, “확신”, 또는 “순종” 등과 같이 중립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만, 기독교 진영에서 “공허한 수사” 또는 “아첨” 등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문맥에 비추어 “교묘한 속임수”나 “계산 된 설득” 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유대주의자”들의 “권면”은 하나님의 원래 목적이나 뜻과는 상관없는 자신들의 유익을 위한 설득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이어서 이들 “유대주의자”들의 노력과 관련하여, 이런 일이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아주 골치 아픈 상황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경계를 주기 위해서 금언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9절)
사도는 동일한 금언을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고전 5:6). 이때에는 교회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음행과 관련해서였습니다만, 이곳에서는 잘못된 신학에 대한 경고를 위해서입니다. 이 누룩이 예수님의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나 “천국”의 확산과 관련해서 긍정적으로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마 13:33; 눅 13:21), 대개 부정적인 의미로 부패시키고 오염시키는 원흉으로 다루고 있습니다(막 8:15).
10절에서 사도는 갑자기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긍정과 확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는 두 번째 단락 전체를 지배적인 그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10절상)
그가 진정으로 전하고 싶은 마음을 이런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적어도 나만은 여러분들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이처럼 확신을 갖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주 안에서”입니다. “주 안에서”(ἐν κυρω, 엔 쿠리오)는 <바울 서신> 전체를 통해서 이곳 외에 모두 46회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 표현 외에도 “그리스도 안에서”(ἐν Χριστῷ, 엔 크리스토) 및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ἐν Χριστῷ Ἰησου, 엔 크리스토 예수)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전자(前者)는 <갈라디아서>(1:22; 2:17) 외에 그의 서신에서 24회, 그리고 후자(後者)는 역시 <갈라디아서>(2:4; 3:14, 26, 28; 5:6) 외에 37회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확신하고 있는 바는 교인들이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즉 그가 8-9절에서 언급한 바 있는 내용으로서, 첫째 “유대주의자”들의 권면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둘째 그들의 가르침이 누룩처럼 온 교회를 부패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무슨 근거로 사도가 이처럼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인지는 본문을 통해서는 상세히 알 길이 없고, 다만 그 자신의 언급을 통해서 추측컨대, 현 상황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 안에서” 희망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확신과 희망은 누룩에게는 적용될 수 없습니다. 그가 교인들에 대해서 확신하는 만큼이나, 이들 누룩에 대해서도 똑 같은 정도로 그러나 정 반대의 확신을 가지고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10절하)
교회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헬라어 성경>에 의하면 단수형으로서 특정 개인을 지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1:7이나 5:12에서는 복수형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도 일반적인 “유대주의자”들로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든지”가 지칭하는 바도 특정 개인이 아니라 이들 무리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절에서 사도가 말하는 “심판”은 그 자체로서 “최후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때로 교회의 징계 조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마 사도는 “유대주의자”들 역시 교회의 징계를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종말의 날에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사도는 이제 11절에서 그의 독자들이 미처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새로운 역설적 질문으로 두 번째 단락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11절상)
사도는 아마도 자신의 논증이나 권면이 결론을 향해 나아가면서 무엇인가 더 말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그 자신에 관한 오해와 근거 없는 비방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할례도 그중의 하나로서, 그를 비방하는 자들이 ‘바울’ 역시 할례를 지지하였으며 선교 여행 중에는 이에 관해서 가르치기도 했다고 말했을 법합니다. 이들 “유대주의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디도 사건”(갈 2:1-5)의 진실을 왜곡시켜 사도가 그에게 할례를 받게 했다고 퍼뜨리기도 했을 것이며, 사도 자신도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바 있기도 합니다(행 16:1-3). 그리고 사도 스스로도 할례를 지지하거나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참고. 고전 7:17-20; 9:19-23). “유대주의자”들이 오해하기 십상이었을 것입니다만, 이들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즉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사도는 ‘유대’인 기독교인이 할례를 받거나 ‘유대’ 방식을 좇아 사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까지 자신들의 방식을 강요하거나 고집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11절하)
이 구절은 5:1-11절 사이의 모든 내용에 대한 결론입니다. 또는 더 나아가 1:6-5:11 전체에 대한 결론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권면”(5:13-6:10)은 더 이상 “유대주의”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내리는 결론인 즉은 할례는 철저하게 기독교 복음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며, 이를 무효화 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사도는 마지막 결론에 이은 최후의 일격을 냉소와 조롱으로 그의 공격과 비난의 절정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12절)
‘바울’의 서신을 통 털어 이처럼 비이성적이고 무례한 공격을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가 공격하는 대상은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로서, 서신의 다른 곳에서 “교란하는 자들”(1:7) 또는 “요동하게 하는 자”(5:10하) 등으로 그리고 있는 “유대주의자”들 말합니다. 사도는 이들을 향하여 냉소와 멸시로 다음과 같은 독설을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할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차라리 그것을 잘라내 버려라.” 여기서 “할례”와 “유대주의”에 대한 그의 혐오감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