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김태정 목사눅 2:41-45약 8분 분량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유혹
어느 때부터 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성탄절이나 부활절에 전국의 교회나 성당에서 듣게 되는 메시지에서 정작 이날의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주변으로 밀려나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설교의 초점이 그분의 탄생과 생애, 그리고 죽음과 부활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의 이웃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하셨는가 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성탄의 주인공이 어느새 슬그머니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서 우리의 불우한 이웃으로 둔갑해 버렸습니다. ‘마이클 호튼’은 오늘날 교회의 이런 모습을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 부르고 있습니다.
아니, 교회가 성탄절을 맞아 “이웃을 돌아보라”는 설교를 행한 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이란 말입니까? 더 나아가 “예수를 본받자”나 “내 삶을 변화시키자” 등의 설교를 했다고 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이란 말입니까?
문제는 이것이 과연 복음인가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잘못된 것은 아니나 율법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가 오셔서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부모 자격이 없는 부모를, 예수를 대충 믿는 신자들을 죄에서 건지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근사해 보여도, 아무리 측은하고 불쌍해 보여도 나와 내 불우한 이웃은 모두 죄인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는 “예수가 무엇을 하셨는가?”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만을 강조합니다.
유혹의 핵심
왜 교회는 이런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까? 우리가 본래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펠라기우스 주의”를 가지고 태어납니다(‘펠라기우스’는 원죄를 부정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한 사람입니다).
올바른 일련의 지침을 지키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도 스스로 자력으로 살아가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큰 미덕으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필요한 그 모든 것을 다 하셨다는 메시지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줍니다.
이런 문화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착한 사람이 되는 것, 윤리․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 억압과 차별을 없애는 것,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거의 전부가 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복음의 열매는 될지언정 복음은 아닙니다. 내가 복음에 보탤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복음은 오직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 피조 세계의 회복을 위해서 다른 누군가가 이미 성취한 것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에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습니까? 아니면 본문 속의 예수님 부모님처럼 성전에서 큰 일주일 동안이나 유월절 절기를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정작 돌아오는 길에 예수가 곁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고 내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래된 문제
이 문제가 비단 예수님 부모들만의 문제이겠습니까? 당연히 아주 오래되고 되풀이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헬라 인들에게 복음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대 오늘날 그리스도인 대부분이 실은 이들 헬라 인들처럼 살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비 기독교인이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혐오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교인뿐만 아니라 목사와 신학자들마저도 복음을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고, 설득력 있게 변론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작년 미국에서 조사한 한 통계가 이를 여실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답한 미국의 복음주의 개신교인은 대략 47-49%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포함시킨 다른 종교 중에서 ‘유대’교가 전체의 64%, ‘이슬람’이 35%, 힌두교가 33%, 그리고 무신론이 26%에 이릅니다. 그리고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도, 미국인 대다수는 인간의 영혼이 마침내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 해방되어 어딘가 다른 곳으로 날아가거나 환생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진리는 하나로 통한다는 힌두교의 주요 교리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복음의 삶
그렇다면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 이끄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과연 어떤 것입니까? 온갖 첨단 장비를 갖춘 범선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들 장비는 항로를 정해주긴 하지만 범선은 바람이 불어야 움직입니다. 당신은 순풍에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납니다. 그런데 큰 바다 한 가운데서 바람이 그쳐버렸습니다. 배는 꼼짝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 때 라디오에서 태풍이 온다는 뉴스가 들립니다. 그러나 배에 있는 고성능 장비들은 당신을 안전한 항구로 데려다 주지 못합니다. 필요한 건 배를 움직이는 바람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 특히 극적인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은 순풍에 돛을 달고 항구를 떠납니다. 자신을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철석같이 믿으면서 말입니다. 이 복음의 바람이 배를 움직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은 긴급한 명령을 하나 둘 듣기 시작합니다. 어느 뱃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이것저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듣고 읽습니다.
영적 훈련에 관한 지침서를 읽기도 합니다. 목사로부터 기도를 더 많이 하라, 성경을 더 많이 읽으라, 전도를 더 많이 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제 그들은 큰 바다에서 멈춥니다. 배를 움직이는 바람이 그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회심만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아닐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영화롭게 되기까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칼빈’은 말합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믿음이 부족한 자들이기 때문에 매주 복음을 들어야 하고, 성만찬을 해서 그 약속을 확인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기쁜 소식의 알맹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셨고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마르틴 루터’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루터’가 대답했습니다: “죄와 불순종입니다.”
복음은 내가 겪은 회심이 아닙니다. 복음은 나에 관한 그 무엇이 아닙니다. 나에게 일어난 그 무엇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행하는 그 무엇은 더더욱 아닙니다. 복음은 어떤 충고나, 아이디어나, 지침이 아닙니다. 복음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행한 역사적 사건에 관한 증언입니다. 복음은 또한 우리가 “예수를 구세주로 삼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은 <성경>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말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런 저런 하나님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을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님과 구세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가 우리를 실제로 구원하고 해방하셨다는 것이고, 그가 우리의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기쁨이 이끄는 삶
우리는 다시 받는 자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자란 배우고 따르는 자입니다. 따르기 위해서 우리는 듣고, 배워야 합니다. 암탉이 좋은 달걀을 낳기 위해서는 좋은 사료를 섭취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삶은 <목적이 이끄는 삶>이 아닙니다. 나는 미국에서 논픽션 부분 사상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의 가치를 평가절하 하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내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목적이 이끄는 삶>보다 더 시급하고 우선되어야 할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이 이끄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신구약> 전체에 걸쳐 기쁨과 관련한 구절이 얼마나 많은지, 특히 <시편>에서 <사도행전>을 거쳐 <빌립보서>에 이르기까지 “기뻐하라”는 명령이 얼마나 많은지 세어보셨나요? 이 두 책의 중간 수십 군데에서 우리는 기쁨이 이끄는 삶을 살라는 권면을 듣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목적 없는 삶을 문제 삼을지 언정, 기쁨이 없는 삶을 크게 문제 삼지 않습니다. 요즘같이 전 세계적으로 경제공항이다, 빈곤이다, 전쟁이다, 핵 위협이다, 인권 탄압이다 하며 사람들은 절망과 시름에 빠져 있는데, 제 정신을 가진 자라면 기쁨을 논할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모든 재앙을 다 극복하고 난 뒤라면 모를까 지금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 반대가 아닐까요? 우리가 기쁨을 먼저 발견해야 인류의 재앙이 극복될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맞지 않을까요? 복음은 실로 충격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두가 낙관보다는 비관을 말하고, 번영보다는 쇠퇴를 말하고 있는 바로 이 때, 기쁨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분위기는 항상 낯설기만 한 것입니다. 천사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목자들에게도 ‘마리아’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나는 온 백성에게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교회가 성탄을 맞아 이 세상에 해야 할 일도 이 천사가 했던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추구하려고 불철주야 애쓰고 있는 심각한 김 태정 목사가 들어야 할 소식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진지하고 엄숙해진다 해도 세상을 고치지 못합니다. 세상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고치셨고, 이 고침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 동안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어떻게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셨는지 기억해 내는 일입니다. 죽어야만 얻는 것이 생명이긴 하지만, 생명이 핵심이라는 메시지를 그분은 결코 놓지 않으셨습니다. <카라마조프가 형제들>에서 ‘파이시’ 신부는 말합니다: “갈릴리 가나에서 처음 기적을 행하셨어. 아, 그 기적! 아, 즐거운 기적! 그리스도가 찾아가신 것은 슬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기뻐하는 사람들이었어. 그분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려고 처음 기적을 해하셨어.”
진지한 목적? 물론 있어야 합니다. 진지한 고민? 물론 있어야 합니다. 슬퍼해야 할 때가 있고, 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전도서>도 인생이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 많다고 한탄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기쁨을 본바탕으로 삼고, 슬픔을 하찮은 것으로 여길 때 비로소 사람다워지는 것은 아닐까요? 울적함은 잠시여야 하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마음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비관은 반 나절짜리 감상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기쁨이야말로 만물이 살아가는 활력인 것입니다. 내 마음이 찬양으로 고동치게 합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