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4과
시편의 신학
김태정 목사약 24분 분량
전제와 출발점
기본전제. ‘루이스’(C. S. Lewis)는 <시편>을 대하는 독자의 기본 전제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시편은 시며, 또 시란 어디까지나 노래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따라서 <시편>은 교리적 논문도 아니고 또한 설교도 아니다.
또한 ‘크레이지’(P. C. Craigie)도 <성경>의 자연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이와 유사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은 비록 종교적 상황 속에서 지어진 것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의 창작물로서 이스라엘과 하나님 또는 이스라엘 상호 간의 관계를 서술한 것이다. 즉 <시편>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선민의 응답인 이스라엘의 기도와 노래들을 담고 있다. <시편>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설명하고 있다는 내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성경>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계시 또는 영감 받은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시편>들은 추상적인 신학적 진술이나 철학적 자료들을 지니고 있지 않다.
위 두 견해를 종합해 볼 때, <성경>은 그 기원에 있어 초자연적인 기원과 자연적인 기원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측면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직접적인 현현이나 계시를 통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성경>을 기록하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컨대, <구약>의 경우 <오경>이나 <예언서> 등이 이에 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책들이 이런 방식으로 기록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정 반대의 방식 즉 자연적인 측면,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역사와 체험을 통해서 기도나 노래 등으로 하나님 앞에 상달하는 방식으로 기록한 내용이 <성경> 속에 포함된 것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들 책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창작물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이들 책이 <성경>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크레이지’가 <시편>과 관련해서 위에서 진술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배경 하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발점. 이렇게 볼 때 <시편>을 교육이나 훈계를 위한 교리 또는 신학 논문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은 신학을 드러내고 있다고 ‘트렘퍼 롱맨’(T. Longman III)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시편>의 신학과 관련해서 언급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이 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편>이 비록 무미건조하고 교리적인 서술의 형식을 빌어 신학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편>의 시인들은 분명 자신의 삶속에서 체험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삶의 정황에 가장 직접적으로 적용하면서 신학을 가르치지는 않지만 드러내고는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편>은 가장 힘찬 신학이다. <시편>은 <구약> 안에 있고 <구약>은 <시편> 안에 있다. <시편>은 <구약>의 메시지의 작은 우주이다.
‘루터’(M. Luther)도 “<시편>은 모든 신학의 요약”이라고 말한 바 있으며, ‘앤더슨’(J. Anderson)은 “<시편>에는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종교적 진리가 다 설명되어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편 신학의 배경: 언약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시편> 속의 대부분의 시들은 신학적 진술이나 철학적 사상을 위한 자료들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의 시인들은 자신들의 예배나 찬송, 간구나 원망, 불평과 저주 등을 통해서 아주 강력하고 생생한 신학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지식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인데, 이 모든 지식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다시 말하자면 “언약”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편>의 모든 시들은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국가적인 것이든, 제의적인 것이든 모두 다 언약의 저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모두 이 언약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1. 언약의 정의
언약을 과연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요? 언약에 관한 최근의 연구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저서 중의 하나는 ‘팔머 로벗트슨’(P. Robertson)이 쓴 <계약신학과 그리스도>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언약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습니다: “주권적으로 시행된 피로 맺은 약정”(the bond sovereignly ministered by blood).
우리는 여기서 언약과 관련해서 핵심 세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2. 언약의 내용
언약의 내용적 특징으로 아래 세 가지 정도를 주목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쌍무적인 아닌 일방적 계약이다
(2) 평등 조약이 아닌 불평등 조약이다
(3) 무조건적인 아닌 조건적 조약이다-축복과 저주
3. 언약의 형식
많은 학자들은 언약이 그 형식에 있어 전형적인 고대 근동 조약과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약을 통해서 다음 여섯 가지 요소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약 당사자. 조약 체결 쌍방의 신원을 밝힘.
역사적 서언. 두 국가 간의 관계가 그동안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에 대한 기술로서, 특히 대국의 왕이 속국에 대해서 그동안 얼마나 관대하게 대해왔는가를 강조함. 따라서 조약에 의거 속국이 대국에 감사를 표하도록 의무를 부과함.
법률. 두 국가 간의 미래 관계에 대한 규정. 예컨대 속국의 왕은 대국의 왕이 적의 공격을 받을 때 병력 차출 등의 지원을 해야 하며, 이에 대한 보상으로 대국의 왕은 속국이 적의 공격을 받을 때 그를 보호해 주어야 함.
축복과 저주. 속국의 왕이 이 법을 어길 경우 저주를, 조약에 충실하면 상응하는 보상 즉 축복을 받게 됨.
증인들. 조약문서의 결론으로서, 신들과 백성들과 하늘과 땅까지 조약의 증인으로 참여하도록 요청함.
문서의 보관. 쌍방이 서명 한 후 각자 한 부씩을 보관함.
이러한 형식에 대한 성경적 예는 <오경>이나 <역사서> 등에서 다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여호수아> 24장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래 각 구절들이 위 형식의 어떤 요소와 일치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1) 24:1
(2) 24:2-13
(3) 24:14-15
(4) 24:19-20
(5) 24:22
(6) 24:25-26
4. <시편>의 주제
우리는 이와 유사한 형식을 <출애굽기> 22-24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언약의 핵심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맺어지는 인격적 관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인간은 결코 그렇지 못하며, 따라서 그분과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결론만 간략하게 말하자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계약을 맺을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언약의 법적 대행자요, 대리자이며, 동시에 집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언약의 법률에 따는 축복과 저주도 그분이 집행하고 수행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언약은 파기될 수 없는 영속적인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시편>을 읽을 때, 이 언약의 개념에서 자동적으로 도출되는 두 주제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 (2) 그리스도.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시편>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두 가지 극단적 오류가 있는데, 하나는 <시편>의 원래의 배경을 무시하고 전적으로 ‘메시아’적 (또는 ‘그리스도론’적)으로 읽는 것이며, 또 다른 극단은 <시편>이 예기하고 기대하고 있는 것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시편>의 목적은 주장하거나 설득하거나 납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심원한 사랑과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언약 관계를 배경으로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또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도 그와 똑같이 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시편>의 주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외에 다음 몇 가지가 더 있을 것입니다:
(1) 하나님
(2) 그리스도
(3) 인간
(4) 세상(우주)
(5) 예배
(6) 기타
4. 주제(1): 하나님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시편>의 작가들은 다양한 대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들의 대답을 연구하려면 신학적 틀 안에서 보다는 서정시의 틀 안에서 연구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달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하나님에 관한 자신의 경험과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반응에 관심을 가지고 썼습니다. 하나님을 주제로 몇 편의 서정시를 간추려 보면 아래 송시(頌詩)들이 있습니다. 송시란 고상한 주제를 강한 어조로 다루는 서정시입니다.
1) 송시 1: 시 139편
단락 구분. 이 시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입니다. 이 시의 연쇄적 구조는 명확하고 확고합니다. 이 시를 주제 별로 단락 구분을 해보면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전지(全知)하신 하나님(1-6절)
(2) 무소부재(無所不在)의 하나님(7-12절)
(3) 창조의 하나님(13-18절)
(4) 부정하는 것에 대한 비난(19-24절)
이 시의 초점은 역설적으로 하나님과 화자에게 동시에 맞추어져 있는데, 많은 찬양의 시편에서도 그런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은 여러 가지 형식적 특징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2절과 3절은 일종의 교채대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단락의 주제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으로서, 시인은 7절에서 질문을 통해서 새로운 주제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로 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는 <구약>에서 이러한 형식에 부합하는 여러 예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만, <여호수아>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언약 또한 그 형식에 있어 이런 이러한 형식에 대한 <성경>의 예는 아래 여섯 가지 요소가 바로 그것입니다로 이루어져 있의 형식적 특징과 관련해서 을 과연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요? 언약에 관한 최근의 연구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저서 중의 하나는 ‘팔머 로벗트슨’(P. Robertson)이 쓴 <계약신학과 그리스도>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언약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습니다: “주권적으로 시행된 피로 맺은 약정”(the bond sovereignly ministered by blood).
우리는 여기서 언약과 관련해서 핵심 세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문학과 역사
장르와 양식. 시 19편의 장르를 결정함에 있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이 시의 통일성에 관한 문제일 것입니다. 이 시를 그 주제에 따라 서로 다른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1) 1-6절: 온 우주(코스모스, κοσμος) 특히 해에 대해서 강조하는 찬양 시
(2) 7-14절: 주님의 율법(노모스, νομος) 즉 ‘토라’에 대한 명상을 담고 있는 지혜 시
이 두 부분 사이에는 이처럼 주제의 차이뿐만 아니라, 또 다른 차이점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시는 분명 두 는 분명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을 읽을 때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이 시의 통일성에 관한 것입니다. 예컨대, 첫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엘로힘’(일반적인 신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그리고 두 번째 부분에서는 ‘야훼’(유대인들의 신으로서 구속과 언약의 하나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 후반은 문체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즉 전반은 비교적 긴 행으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에, 후반은 보다 짧은 행, 특히 3+2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차이로 인해서 이 시가 원래 두 편의 다른 시가 모여서 된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를 한 편의 시로 볼 수 있게 하는 통일성도 있습니다. 예로써, 이 시의 목적은 자연이나 율법 그 자체를 찬양하고 즐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입니다. 그러한 점에 있어 이 시는 단순한 서구의 자연에 대한 송시(訟詩)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이 시를 하나로 연결시켜주는 구조적 원리를 발견할 수 있는데, “점진적 압축”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즉 시인의 관심이 처음에는 대우주에서 태양으로, 태양에서 다시 개인으로 옮아가면서 점점 압축되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만일 이 시를 한 편의 통일된 시로 본다면 두 부분의 핵심 주제를 포괄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일종의 “찬양 지혜 시”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배경과 역사. 이 시는 그 제목이 시사하고 있는 바처럼 후대 이스라엘의 예배에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시의 지혜적인 특성을 근거로 해서 포로 기나 그 이후에 쓴 것으로 보고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불충한 형편입니다.
단락과 구조. 이 시는 위에서 장르 구분과 관련해서 언급한 바처럼,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1-6절: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함
(2) 7-14절: 율법을 통해서 야훼를 찬양함
신학과 신앙
1. 코스모스(1-6절)
이 시의 첫 번째 연의 찬양 시(1-6절)는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1-2절; (2) 3-4절; (3) 4-6절. 제 1절은 첫 번째 연의 주제에 대한 개괄적 선언, 즉 이들 세 부분을 결합시켜 주는 공통되는 주제가 드러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1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이 우주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다”는 말은, 계속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진행적이며, 동시에 영속적이라는 사상을 독자들에게 환기시켜 주려는 듯이 보입니다. 이를 위해서 시인은 전형적인 “유사 반복”의 기법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1) 하늘과 궁창; (2) 선포하고 나타내고; (3) 하나님의 영광과 그 손으로 하신 일. 시인의 의도는 단순히 시의 형식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구문을 통해서도 다시 한 번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어 + 타동사 + 직접목적어.
시인은 지금 우주에 대하여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시인 자신의 서정적 표현일 뿐입니다. 그가 보기에 우주는 하나님의 계시이자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습니다. 당연히 아무나 그의 견해에 동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2절에서 또 한 번의 동의적 병행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2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이곳에서 “날과 밤”의 반복은 1절에서 “하늘과 궁창”을 반복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들 짝을 이루는 단어들은 일차적으로 단순히 형식적 반복으로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이중적인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즉 이들은 스스로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식의 전달자로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복되는 선언은 단순한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낮과 밤’, 그리고 ‘말하고 전하니’ 등과 같은 대조되는 일련의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시를 읽는 유쾌한 기분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의 또 다른 특징은 수사학적 비유나 이미지의 도입, 즉 회화적 기법을 도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생물이 말하게 하는 의인화(擬人化)의 기법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말한다’는 동사는 ‘기염을 토해낸다’는 아주 강력하며 격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그림이자 이미지입니다. 자연에 생명을 부여하고 유기체로 다루는 이러한 사상은 다분히 범신론적이거나, 아니면 당시 고대 사고방식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시인은 “낮이 낮에게 말하고 밤이 밤에게 전하는” 행위를 통해서 자연계시의 과정이 영속적으로 순환하고 있음을 또한 알려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구절(1-2절)을 통해서 자연계시의 두 가지 측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한 편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또 한 편으로는 우리에게 지식을 전하는 전달자의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상은 <로마서>에도 충분히 드러나 있습니다(롬 1:18-20).
찬양 시의 두 번째 단락은 대담한 역설입니다:
3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상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즉 처음 두 절(1-2)에서 시인은 온 우주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드러내며”, “말하고”, 또 “전한다”고 해놓고서 이곳에 이르러 갑자기 이 모든 말들을 취소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소리 없는 아우성이랍니다. 그리고 또 한 편으로는 이 세상의 가장 먼 구석까지 스며들고 있다는 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마치 “용각산”이라 불리는 소화제의 선전문구와도 같습니다. 이 무슨 억지 주장입니까? 도대체 말하지 않고 어떻게 가르칩니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낮과 밤”이 모두 계시하지만 침묵 속에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바로 그 점을 기자는 4절 전반부에서 “동의 병행”을 사용하여 또 한 번의 역설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지구 돌아가는 소리를 듣지 않고서도 그 사실을 압니다. 사실 우리가 엄청난 질량을 지는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소리”와 “말씀”은 메시지나 계시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리고 “온 땅”과 “세상 끝”은 그러한 계시가 전 우주적이며 보편적이라서 어느 누구도 그것을 놓칠 수가 없다는 주장에 대한 강력한 ‘모티브’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 시인은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고 있습니다(한자로 이것을 觀音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그는 마치 그림을 듣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그가 관찰하는 바에 따르면 이 우주가 너무나 질서정연하며, 별과 별 사이에 힘이 존재하고 있으며, 우주의 운행이 마구잡이가 아니라, 어떤 일정한 원칙과 규범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태양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4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이제 시인의 관점이 우주 전체에서 창조의 절정인 태양으로 좁아지고 있습니다. 태양을 위해 거처를 마련하셨다니 이 또한 비과학적이고 해괴망측한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태양의 장막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이어지는 5절에서 태양의 규칙적인 운행과 관련한 기막힌 묘사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5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와 같아서
그 대답은 밤입니다. 시인이 바라보는 일출(日出) 현상은 태양이 매일 낮 동안에 운행하다가 밤이라는 휴식처에서 쉬었다가 다시 다음 날 아침에 기지개를 켜며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일출과 관련해서 기막힌 이미지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혼한 신랑”과 “마라톤 경주의 운동선수”입니다. 이 두 그림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기쁨과, 힘과, 그리고 넘치는 정력 바로 그것입니다.
태양의 운행과 관련해서 시인이 그리고 있는 다음과 같은 모습은 오늘날 우주 천문학적 지식에서 보면 아주 원시적이고 비과학적임에 틀림없습니다:
6상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러나 시인은 태양의 운행과 관련해서 무슨 과학적 정보를 제공해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루터’(M. Luther)조차도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지동설을 주장하던 ‘코페르니쿠스’를 면박 주었다는 일화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인의 진정한 의도는 그가 4절 전반부에서 이미 선언했던 하나님의 일반계시의 두 가지 측면, 즉 영속적인 순환성과 보편성의 ‘모티브’를 반복하는데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시인에게 이 우주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입니다. 이는 그것 자체로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자 기쁨입니다.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천체(달과 별과 특히 태양)들은 영원히 그들의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둘째, 우주는 또한 우리를 위한 교사이자 전달자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라는 말입니다. 즉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인간들에게 선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며, 어떠한 이유로도 신격화 될 수가 없습니다.
이쯤 해서 우리는 시인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진정으로 의도했던 바가 무엇인지도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 19편은 고대 근동의 찬양 시들과는 그 격이 다릅니다. 예컨대, 태양신을 노래하고 있는 ‘이집트’의 찬양 시나, ‘아테네’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는 찬양 시 등과는 달리 시인은 결코 자연을 노래하고 있지만, 결코 신격화 하거나 숭배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들은 오히려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을 뿐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시인은 당시 유물론이나 범신론에 기반을 둔 조잡한 원시 창조신화를 멸시하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나 그의 신학에 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2. 노모스(7-14절)
시인은 이제 이 시의 두 번째 주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그 주제는 “작은 우주” 또는 내면의 우주, 즉 “율법”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시 119편을 반영하는 지혜 문학적인 문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주제를 하나로 연결시켜서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갖기 위해서 연결 고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6하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
‘루이스’(C. S. Lewis)는 이 구절이야말로 이 시의 핵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막에서 내려쬐는 태양열은 너무나 순수하고 강렬하고 또 밝아서 어두운 곳에 있는 모든 부패한 것을 다 들추어내어 살균하고 소독하며 정화시켜줍니다. 그 어떠한 것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속성을 지는 것이 태양뿐입니까? 하나님의 율법 즉 ‘토라’도 역시 그렇습니다. 태양이 낮의 하늘을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토라’ 역시 인간의 삶을 지배합니다(적어도 기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습니다). 태양은 또한 지상의 모든 생명체에 빛과 생명을 주어 환영을 받기도 하지만, 그 도가 지나치면 오히려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율법 역시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을 연단하고 정화시키며 깨끗하게 해 줍니다. 태양이 없다면 지구상에 생명체가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율법이 없으면 참된 인생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연법칙이 깨어지면 온 우주가 엉망이 되듯이 토라가 깨어지면 우리의 인생 전체가 엉망이 되어버립니다. 바로 이 점이 이 시편의 두 번째 요소인 통일성입니다. 요컨대 태양과 율법은 하나님의 계시의 상보적인 측면들입니다. 우주가 우리의 머리에 주는 계시라면, 율법은 우리의 가슴에 주는 그의 계시입니다.
시인은 이제 이곳 후반부(7-11절)에서 전반부에서 우주를 노래했던 똑 같은 방식으로 율법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고도의 형식적이고 수사적인 기법이 여섯 번에 걸친 진술을 통해서 아름답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시인이 율법을 어떻게 부르고 있으며, 어떻게 그 성격을 규정하고 있으며, 이를 어떤 수사적 방식으로 이끌어내고 있는지를 감상하는 것도 후반부를 읽는 큰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7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11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우선 후반부의 가장 큰 형식적인 특징은 반복과 순환에 있으며, 그것도 단순한 반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조금씩의 변이를 통해서 시적 즐거움을 더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선 율법의 명칭과 관련해서 나타나는 여섯 번의 반복과 변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율법; 증거; 교훈; 계명; 도; 법. 그리고 율법의 성격과 관련한 여섯 번의 묘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완전하고; 확실하며; 정직하고; 순결하며; 정결하고; 진실하며.
이처럼 매 진술마다 율법에 대한 호칭과 율법의 성격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성격과 그 효과를 노래할 때에는 단순히 형식적인 반복 외에도 ‘모티브’의 반복 또한 드러나고 있습니다. 물론 이곳에서 율법의 호칭이나 속성에 대한 다양한 묘사가 신학적으로는 포괄적인 선언이 될지 모르지만, 시적으로는 모두 동일한 선언입니다.
이 여섯 개의 반복적인 진술 속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사상은 우선 율법은 완전하며 거룩하다는 사실과, 또한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입니다. 한 가지 이 율법과 관련해서 주목할 사실은 ‘엘로힘’ 하나님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엘로힘’ 하나님은 전반부에서 일반 계시와 관련해서 등장했던 이름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이름의 차이는 실로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알 수 있습니까?
‘엘로힘’이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이름이라면, ‘야훼’는 구속과 언약을 통해서 드러나는 이름입니다. 이러한 이름이 등장하는 문헌에 따라 ‘E자료’ 또는 ‘J자료’로 각각 부르고 있습니다만, <창세기>도 창조를 서막(1:1-2:3)과 제 1막(2:4-25)에서 두 번씩 다루면서, 서막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엘로힘’이, 그리고 제 1막에서는 타락과 구속의 하나님으로서 ‘야훼’가 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자연신학”의 한계를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야훼’ 하나님을 자신의 “주”(主)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창조주”가 <성경>의 하나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껏해야 오늘날 유행하는 단어 “설계자”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하나님의 선포나 계시는 그것이 우주이든 율법이든 인간의 감정적 반응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창조주 하나님을 ‘야훼’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우주나 율법은 그에게 아무런 목적이나 의미가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점과 관련해서 율법을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획득해야 할 가장 고귀한 것으로 맛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10-11절).
이 시의 결론은 마지막 세 절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곳에서 어조가 다시 한 번 더 변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간절한 기도와 탄원이 그것입니다:
12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14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우주와 율법에 대한 지식과 찬양을 마친 시인은 갑자기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끼게 된 듯합니다. 이러한 변화는 갑작스러운 것이긴 하지만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는 것으로 시작하였으며, 묵상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자연을 찬양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우주만물의 영광스러운 광경에서 자신에게로 눈을 돌렸을 때, 그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엄청난 우주와 자신의 모습을 대비시켜보았을 때, 자신이 얼마나 하찮고 무가치한 존재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우리는 시 8편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본 바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용서와 죄 사함을 간구합니다. 그리고 교만한 사람들과 그들이 행사할 수 있는 사악한 영향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12-13절).
마지막 구절은 찬양과 기도의 주제들이 함께 어우러져 나타나고 있는 곳입니다. 시인은 서두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우주”라는 언어를 묘사함으로써 시작하였으며, 이제 자신의 “입의 말”이 하나님께 열납되기를 기도함으로써 시를 끝맺고 있습니다. 기막힌 연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늘은 그들의 존재 자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시인 역시 그러한 찬양의 합창에 동참하기를 원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반석”이시며 “구속자”이신 하나님께 자신도 하나님을 찬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루이스’(C. S. Lewis)는 시편 19를 가리켜 성경의 모든 시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의 어떠한 시보다 위대하고 뛰어난 서정시라고 극찬한 바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의 이런 판단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는 가장 아름다운 서정시를 가장 심오한 신학과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크레이지’(P. C. Craigie)는 이 시를 ‘하이든’(Haydn)의 “천지창조”를 배경음악으로 해서 읽어볼 것을 권유하고 있기도 합니다.
시인의 관심은 처음 대우주에서 시작하였다가 소우주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의 절정은 하늘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소우주에 대한 깊은 묵상에 있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지만, 율법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바라보는 거대한 우주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기는 하지만, 인간은 우주 속에 있는 점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은 대우주가 아니라 소우주 즉 하나님의 ‘토라’뿐입니다.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인간에서 자부심을 주거나 우주에 대한 우월성을 주장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위치가 아닙니다. 우리가 거대한 우주를 바라보며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왜소하고 무가치한가를 겸손히 깨닫는 것이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라면,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바는, 우리가 얼마나 죄악 된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시인이 자연이 아니라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노래하자마자 즉각적으로 그로 하여금 용서와 열납을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루이스’가 지적하고 있는 바처럼, 6절은 일종의 경칩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온기에서 숨을 자 없도다.” 이 구절은 이 시의 두 부분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동시에 밀접하게 연결시켜주고 있기도 합니다. 태양이 낮의 하늘을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토라’ 역시 인간의 삶을 지배합니다. 태양이 따뜻함과 생기를 제공해줌으로써 환영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극심한 열기는 오히려 공포를 줄 수 있는 것처럼, ‘토라’도 생명을 줄 수도 있고, 인생을 연단하고 시험하며 정화시키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태양이나 ‘토라’의 이러한 양면성을 모두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태양이 없다면 지구상에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계시인 ‘토라’가 없다면 참된 인생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대로 율법은 죄를 죄로 깨닫게 하며, 죄악을 심히 죄 되게 합니다. 율법이 없다면 죄악이 죄악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게 될 것이며, 우리는 그렇게 철저하게 타락한 채 살아오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늘 죄악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따라서 늘 하나님 앞에 떨림으로 나아가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 율법의 계시이자 교훈이 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시인과 마찬가지로 간구와 탄식으로 다음과 같이 아뢰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제가 율법의 온기에서 숨을 수가 없나이다.” 시인의 이러한 깨달음이 나 자신의 체험이 되기를 나도 기도해 봅니다. 아멘!
연습과 토의
1. 창조와 관련해서 <시편 19>를 교육 내용 중에 포함시킬 수 있는 타당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이 시의 두 주제와 연결시켜 생각해 봅시다.
2. 지혜시의 내용적 특징은 무엇이며, 이 시를 어떤 점에서 지혜 시로 분류할 수 있습니까?
3. 이 시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두 이름을 이 시의 두 주제와 연결시켜 생각해 보고, 두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논의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