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6과
병중의 기도
김태정 목사시편 6약 18분 분량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2절)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물었던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 답하셨습니까? “네가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질병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니 잘 생각해보게나.” 이것은 '욥'의 세 친구들이 그에게 찾아와 전해준 충고였습니다. 이 두 사례는 질병과 죽음에 관해서 '히브리' 세계관이 보여주고 있는 전형(典型)입니다.
시 6편은 그 장르에 있어 “개인적인 애가”로서, 시인은 이곳에서 질병과 죽음 앞에 두려워 떨면서 하나님께 간구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인에게 당신은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욥'의 친구들과는 어딘가 달라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달라야 한다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야 합니까? 혹시 당신의 생각이 내세나 부활로 무장한 지나친 낙관론은 아닙니까? 그래서 비록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욥'의 친구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고난 받는 자의 아픔을 해결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상처만 더해주는 것은 아닙니까? 이 시를 읽을 때 유념해야 할 독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한편 이 시는 이와 같은 신학적 주제를 묵상함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일련의 문학적 특징들을 감상할 수 있는 훌륭한 사례가 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시를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의 장르는 무엇인가? 이 시를 “그리스도론적”으로 읽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이 시의 즉 형식적 특징, 회화적 특징, 내용적 특징, 그리고 음악적 특징들은 무엇인가?
문학과 역사
양식. 이 시는 그 장르에 있어 대체적으로 “개인적인 애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심신이 병든 사람이 치료를 해달라고 간구하는 내용을 담은 “질병의 시”입니다. 이 시가 처음부터 공식적인 예배나 제의에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한 단서가 없어 단언키는 어렵습니다. 다만 7절과 8절 사이에 급격한 어조의 변화가 시의 배경에 관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는 듯도 합니다. 즉 탄원자가 제사장으로부터 신탁이나 혹은 확신을 심어주는 말을 듣고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성전을 떠났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가 <시편>에 편입될 무렵 이미 이스라엘의 예배용 시가 중의 하나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Craigie에 따르면, 이 시는 처음에는 <제 1 다윗 시집>에 포함되었다가 나중에는 음악 지휘자를 위한 시집에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참고도서 1.
이 시의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반주와 함께 노래로 불렀을 것입니다: “다윗의 시, 영장으로 현악 스미닛에 맞춘 노래.” 초대교회는 이 시를 다른 여섯 개의 시들(시 32, 38, 51, 102, 130, 143편)과 함께 “회개의 시”로 사용하였는데, 전통적으로 “봉재 수요일”에 불렀습니다. “봉재 수요일”(Ash Wednesday)는 사순절(四旬節)의 첫날이며, 옛날부터 이 날에 회개하는 자의 머리 위에 재를 뿌린 관습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비록 이 시가 “회개의 시”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어조는 회개에 알맞은 것입니다. 그리고 2절도 일종의 회개를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2절).
형식과 수사와 내용. 이 시의 가장 두드러진 형식적 특징으로 빈번한 동의 반복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1, 2, 4, 5, 7, 9절 등을 읽어 봅시다). 그러나 시인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그 의미를 발전시켜감으로써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7절과 8절 사이에 급격한 어조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점과 관련해서, 이 시가 두 개의 다른 시가 합쳐진 것으로서 통일성과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시인의 영적 발전 과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서, 시의 통일성 여부와는 무관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시 전체적으로 같은 어근을 지니는 단어들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어, 시의 통일성을 오히려 더하여주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예를 들어, 2절과 9절에서 등장하는 “은혜”(@n“j, 하난)와 ”간구“(hN:jiT, 테힌나)는 ”자비롭다“는 의미의 동일한 어원 '하난'(@n”j)에 파생한 단어들이며, 2-3절과 10절에서 등장하는 “놀래다” 또는 “떨다”는 “흐트러지다”는 의미의 동사 '니브할'(נבהל)에서 파생한 것이며, 그리고 4절과 10절에서 등장하는 “돌아오다” 및 “물러나다”는 '슈브'(שׂוב)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러한 기법들 또한 이 시의 통일성을 유지시켜주는 형식적 특징이기도 합니다.
시의 형식적 특징과 함께 수사학적 특징으로 꼽을 만 한 것은 과장법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 과장법의 사용으로 시의 분위기는 고조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수사적 과장들이 있는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의 내용적 특징, 즉 신학적 주제로 돋보이고 있는 것은 죽음이나 질병과 관련한 히브리 특유의 사고를 읽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시인의 관점이 전통적인 기독교 관점과 어떻게 차이를 보이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이 시를 읽는 또 다른 유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본문 주석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구조. 이 시는 어조(또는 감정)의 변화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1-3절고뇌의 부르짖음
(2) 4-7절간구
(3) 8-10절응답의 확신
신학과 신앙
1. 고뇌의 절규(1-3절)
시의 서두는 시인의 고뇌에 찬 부르짖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1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2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3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그의 고뇌는 이중적인 것입니다: 육체적인 고통과 영적인 고통. 그런데 후자는 전자의 결과로 야기된 것인 듯합니다. 즉 오랜 육체의 질병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혼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습니다: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처음에 무슨 병에 걸렸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은 그는 심신이 다 병에 걸려 있습니다. 육체의 병과 영혼의 병을 묘사하기 위하여 동일한 동사 '니브할'(נבהל)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이점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의 비참한 상태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분노로 자신을 징벌하지 말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1절). 그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두 가지 가능한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질병에 관한 고대 근동 세계관을 이 절에서 엿볼 수 있다는 견해입니다(참고, 요 9:1-2; 시 38편). 즉 시인은 지금 그의 질병과 죄악 간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질병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결과로서, 당연히 질병은 하나님의 징벌일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시인은 그 어디에도 자신의 죄에 대해서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이점에서 이 시는 같은 죄의 고백으로 시작하는 시 38편과는 다릅니다. 이 시에는 죄에 대한 고백도, 회개에 대한 진술도 없습니다. 굳이 설명을 해보자면, 시인은 부지중에 죄를 저질렀고, 따라서 분명하게 회개할 그 무엇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스스로 “고난 받는 의인”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소 궁색한 설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다 만족스러운 설명은 없을까요? 두 번째 설명이 그것입니다. 물론 이 설명 역시 “고난 받는 의인”의 개념과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즉 그가 지금 앓고 있는 질병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에 대해서 불평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행동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인은 고통에 대해서 잠잠하지 않고 이를 하나님께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지 말라는 간구를 드리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분에 넘치는 자비와 긍휼로 대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 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격이나 공로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에 필사적으로 그것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 나머지 그 고통을 말로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힘조차 다 상실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어느 때 까지입니까?”하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과연 얼마나 더 오래 이 고통을 견뎌야 하는가? 얼마나 더 오래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을까?
2. 간구(4-7절)
시인은 겨우 힘을 내어서 하나님에게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4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5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6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7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그는 먼저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와 달라”(4절)고 외침으로써 기도의 다음 단계에 돌입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오, 주여! 다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이 번역이 시사하는 바는, 시인이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미 해주신 일을 이제 또다시 해달라고 간청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vp,n, 네페쉬)을 건시지며”라는 말 속에 함축된 의미는 “나의 생명”을 건져달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의 요청은 온당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시인은 지금 하나님의 “사랑”(dsej, 헤세드) 즉 “언약적 사랑”에 근거해서 구원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은 하나님 자신이 주권적으로 이스라엘과 맺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이런 요청을 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의 행위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시인은 지금 병으로 거의 죽게 되었으면서도,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시인이 시사하고 있는 사망과 내세에 대한 개념은 <구약>에서도 일반적인 사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죽은 사람의 상태는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거기서는 천국과 지옥이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습니다. “음부” 즉 '스올'(l/av)은 일종의 “하계”(下界)로서 죽은 사람의 거처를 말하는데, <헬라어 구약>에서는 '하데스'(ἅση)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스올'에서의 상태는 하나님과 완전한 관게를 가질 수 없는 일종의 “반생반사”(半生半死)의 상태, 즉 안식은 누리지만 기쁨은 누리지 못하는 상태로 인식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망은 당연히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시인 역시 사망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기억할 수도 없고, 하나님에 대한 예배나 찬양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5절). 여기서 “기억”이란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기억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예배나 찬양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억은 미래를 전망하며 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시인은 질병으로 인하여 피로와 불면증까지 맞이하게 되었습니다(6절). “눈물로 침상을 띄운다”는 말은 “침상을 떠다니게 했다”는 의미로서, 일종의 수사적 과장법입니다. 그만큼 많은 눈물을 흘렸다는 뜻이지요. 그의 “요가 젖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불면증은 질병에 수반되는 또 다른 고통입니다. 단순히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영적 고통도 함께 따라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었다는 피해 의식과, 동료 인간들로부터도 소외되고 있다는 절망감 때문일 것입니다. 괴로움에 더하여 외로움이 더해가면서 시인은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낸 것입니다. 아마 이 시의 배경은 아침 기도 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긴 밤에 대한 기적이 아직도 생생한데, 또 다시 돌아올 밤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지는 그런 아침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시는 아침과 저녁 기도와 관계 있는 시 3-5편과 어떤 유사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시인의 “눈이 쇠하고 어두워지는” 것은(7절) 그가 육체적으로 쇠퇴해 가고 있음을 시사해 주는 표현입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다”는 표현은(신 34:7) 그가 나이 120 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강했다는 암시입니다. 이에 반해 시인은 정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적 질병으로 인하여, 정신적 고통으로 인하여, 그리고 그를 괴롭히고 있는 “적들” 때문에(7절), 시인의 눈은 지금 시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적들”은 누구입니까? 병자가 자신의 적으로 간주할 수 있는 자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런 표현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병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경험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히브리 세계관에 따르면 질병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입니다. 병자들을 향한 일반 사람들의 생각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므로 병든 사람의 친구들조차 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욥'의 체험은 분명 이 사실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욥 30:1-15). 그의 세 친구는 적의가 가득했고, 그의 잘못을 드러내 그로 하여금 회개케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요한복음>에서도 이런 사례를 봅니다. 38년 된 앉은뱅이를 향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그가 그렇게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를 묻습니다(요 9:1-2). 병자를 향한 이런 태도는 병자에게 무슨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원수가 되기 십상입니다. 병든 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질병의 원인이나 적대적인 감정이 아니라, 위로와 우정입니다. 건강한 상태라면 어느 정도의 비판이나 적대감을 감수할 수도 있을 일을 심신이 약해져 있을 때에는 그렇지 못합니다. 지금 시인의 영적 상태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는 인격적 바닥상태에 도달해 있는 것입니다.
3. 확신(8-10절)
그런데 시의 분위기가 마지막 세 절에 이르러 갑자기 달라지고 있습니다. 애통과 간구에서 확신으로 돌변하고 있습니다:
8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9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10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어떻게 시인의 어조가 이처럼 갑자기 바뀔 수 있을까요? 두 가지 가능한 대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적인 기도를 통해서일 것입니다. 아마 시인은 기도를 하다가 절망의 바닥에서 믿음과 확신을 찾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초자연적인 기도의 응답을 받았을까요? 아니면 스스로에게 체면을 걸고 있는 중입니까? 뭐라고 할까, 일종의 “인지 부조화”(認知 不調和)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음 글은 “인지 부조화”(認知 不調和) 이론에 대해서 이선민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만물상” 코너에서 쓴 글을 일부 따온 것입니다: “인지 부조화”(認知 不調和) 이론은 인간은 자신이 믿는 것과 실제 일어난 일이 다를 때 “부조화”의 좌절을 겪는데, 그 고통을 줄이고 극복하려면 믿음과 현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지만 현실을 바꾸기가 어렵기 때문에 결국 자기 믿음에 맞춰 합리화 한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은 1950년대 중반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 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가 처음 제안한 이론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종말론 집단에 끼어들었습니다. 이 집단은 지구가 대홍수로 멸망하고 외계 신을 믿는 사람만 구원 받는다고 믿는 집단이었습니다. 예고된 멸망의 시간이 지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교주는 “신이 신자들 열성에 감동해 세상을 구원하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신자들은 예언이 빗나간 데 실망하거나 분노하기는커녕 열광하며 축제를 벌였습니다. '페스팅거'는 이처럼 상식과 어긋난 종말론자들의 심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 이론을 내어놓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군표 전 국세청장의 수뢰사건 공판에서 재판부가 유죄를 선고하면서 이 이론을 다시 한 번 세상에 소개했습니다. 전씨가 부하 직원으로부터 인사청탁과 함께 뇌물을 받은 혐의사실을 끝내 부인하는 것을 두고 “그런 불명예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과거 기억을 스스로 왜곡하고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진술하는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전씨는 100장이 넘는 탄원서를 냈고 법정에서 눈물까지 흘렸습니다(조선일보, 2008년 2월 29일자).
두 번째 가능한 대답, 즉 보다 그럴 듯한 대답은 무엇일까요? 성전에서의 예배를 통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시가 처음부터 제의에 사용한 것이라면, 즉 이 시가 한 개인이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성전에 들어가는 예배자를 전제로 하고 있다면, 이러한 어조의 변화는 다른 누군가가 그에게 해준 행위나 진술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제 삼자는 이를 테면 성전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나 신탁을 선언하는 제사장이나 성전 봉사자일 것입니다. 예컨대, '한나'가 기도하고 통곡하며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제사장 '엘리'로부터 확신의 말을 들었던 경우처럼(삼상 1:17), 이 시의 시인 역시 그와 유사한 메시지를 들었을 것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바로 그 메시지가 그로 하여금 확신과 믿음을 갖도록 해주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확신이 서자, 그가 처음으로 외친 말은 그가 탄식 중에 마지막으로 외쳤던 절규와 동일한 것입니다: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8절). 여기서 “행악자”들은 7절에서 언급한 있는 자들과 동일한 무리로서, 그가 아플 때 이런 저런 말로 그를 괴롭히고 마음 아프게 했던 “원수 같은 무리”들이었습니다. 믿음과 확신이 돌아온 지금 이제 시인은 이들을 자신 있게 물리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그들이 나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하든 개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그들의 말에 흔들렸지만, 이제 “여호와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아무런 위협도 될 수가 없습니다. 확신이 있는 곳에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9절에 나오는 두 동사의 시제는 서로 다릅니다. 첫 번째 동사는 과거에 완료된 동작을 나타내고, 두 번째 동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동작을 말합니다: (1) “야훼께서 들으셨다”; (2) “야훼께서 받으시리로다”. 이런 시제의 변화는 의도적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처음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한 채, 두려움 속에서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확신에 차서 기도를 마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아직 미래에 속하는 일입니다: “받으시리로다”. 시인은 육체의 질병이 아직 낫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영혼의 치유 즉 믿음의 회복이 먼저 일어난 가운데, 자신의 육체적 회복에 대해서 예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절은 자유와 해방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시인의 육신과 영혼이 다 “떨리고” 있었습니다만(2-3절), 이제는 적들이 심히 “떨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동일한 단어가 두 곳에서 등장하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시작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로 “돌아와 달라”고 간청했습니다만, 이제는 적들이 “돌아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다(이번에도 역시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가 확신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실 뿐만 아니라, 그를 괴롭히던 원수들의 죄가 그들에게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질병과 죽음
이 시대를 흔히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들어 가장 인기 있는 분야는 “미래학”이며, 미래학자들의 저서가 서점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알아두어 무엇인가 준비하고 대비해야겠다는 심정의 발로라 여겨집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것이지요. 죽음은 우리 모두를 두렵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나마 건강한 사람은 이것을 알고 죽음에 대한 의식을 지니고 사는 방법을 나름대로 배우지만, 병이 든 사람은 마음에 평정이 깨어지고 사망에 대한 의식이 아주 생생해집니다. 질병은 죽음에 대한 경고이고 예비 절차입니다. 질병에 걸리면 인생은 더 이상 좋은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삶이 고통으로 손상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질병에 걸렸을 때 육체는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며, 사망할 때 그 기능은 완전히 멈추게 됩니다. 그러므로 병상에서 쓴 시들은 깊은 애통과 비애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쓴 것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습니다.
현대적 이해
오늘날 기독교인이나 '유대'교인은 이 시의 시인보다 훨씬 넓은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시각이란 내세에 대한 신념입니다. 이러한 신념으로 질병이나 죽음에 맞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에는 내세에 대한 명백한 교리가 없었습니다. 내세에 대한 교리는 <구약>의 후기 작품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타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보다 완전한 형태로 표현된 것은 기독교 시대 직전의 유대교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도 '사두개'인 집단은 부활이나 내세에 대해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질병의 시들에 대해서 보다 온전히 맛보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나 유대교의 시각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믿음의 시각에서 읽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 인생, 즉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삶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은 사망과 더불어 끝납니다. 그리고 사망 너머에는 '스올'이 있습니다. '스올'은 실제로 알려져 있지도 않고, 어둑하고, 본질이 불완전한 실체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질병은 '스올'의 예비 절차입니다. 왜냐하면 질병 중에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스올'에서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시편>의 독자들은 부활이나 영생에 대한 교리를 알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사망이나 그 이후의 삶을 이해하려합니다. 그러나 이런 시각을 너무나 성급하게 질병의 시들에 적용하려 할 때,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킬 수 있습니다. 이점은 특히 건강한 독자들이 더욱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질병이나 사망 너머에 존재하는 기쁨과 부활에 대한 인식은 사망에 대해서 서투르게 이해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고, 또 사망에 대한 서툰 이해는 질병의 발생 및 죽음의 도래와 더불어 무너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시인에 따르면 이생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이생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으나, 사망 중에는 믿는 자들이 찬양에 동참하는 일은 불가능해 졌습니다. 우리는 질병과 사망이 닥치면 하나님을 믿고 내세를 기대하리라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미숙한 믿음은 실제 일이 닥치게 되면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시인처럼 고통에 찬 고뇌와 하나님과의 분리를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에 대한 자신 있는 믿음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의 고뇌와 고통은 그의 언어 표현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수님 역시 그러한 고뇌와 고통을 체험했습니다(요 12:27).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맥락에서 이 시를 읽을 때 비로소 이 시의 비애를 분명하게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이 시의 장르는 무엇입니까? 형식과 구저적 특징은 무엇입니까?
2. 질병과 죽음에 대한 시인의 생각은 무엇이었습니까?
3. 시인의 대적은 누구입니까? 병자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4. 이 시를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