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과
서론적인 지혜 시
김태정 목사시편 1:1약 12분 분량
序 文
복 있는 사람은...(1:1).
인생에서 궁극적으로 가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생에서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초자연적인 선물인가 아니면 자연적인 노력의 결과입니까?
행복에 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무엇이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히브리’ 세계관 속에서나 희랍의 관념 철학에서나, 행복은 어떤 피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편>은 행복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선물, 특히 인간의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볼까요? 아니면 자연적인 노력의 결과로서 획득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보고 있습니까? 굳이 이분법적 논리에 따라 선택한다면 후자(後者)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의 물리 법칙 뿐만 아니라, 도덕법도 주신 분이라면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이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든 나타난 현상은 항상 어떤 원인에 따른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서 <시편>의 세계관은 철저히 “인과응보적”(因果應報的)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컨대, 건강의 축복은 운동의 결과일 것이며, 술 중독은 과음의 결과이며, 과욕은 재앙을 낳으며, 부실공사는 재난의 싹이 됩니다. 시 1편은 인생의 궁극적인 행복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지혜 시로 불러 마땅할 것이며, 그런 점에서 모든 시들의 서문으로 불러 마땅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양식. 시 1편은 그 언어와 내용에 있어 전형적인 “지혜 시”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시에 등장하고 있는 언어들과 교훈이 일반적으로 지혜문학, 특히 잠언의 사상을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잠 2:12-15, 20-22). 이 시는 아마 처음부터 공식적인 예배에 사용하기 위하여 지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이 시를 두 종류의 사람으로 구분하고 각각의 궁극적인 운명을 대조시키기 위한 문학적인 서문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 시의 음악적 특징, 특히 그 운율을 분석하고 연구하는 작업에는 많은 문제점이 따른다고 서론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다만 이 시는 특히 운율이 불규칙하다는 점만 밝히는 것으로 그칩니다. 보다 상세한 연구는 Craigie를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P. C. Craigie, 쪽.
형식과 구조. 이 시에는 아주 다양한 예술적 형태들과 수사적 기법들이 녹아 있습니다. 시의 각 절마다 “유사반복” 또는 “대조반복”을 통해서 전체적으로 두 번의 “교차대구” 형식을 이루어내고 있습니다:
1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유사반복: 부정적 진술)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A) (유사반복: 긍정적 진술)
3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B) (대조반복: 긍정-부정-긍정)
4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B') (대조반복: 부정-긍정)
5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A') (유사반복: 부정적 진술)
6대저 의인의 길은 (A)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B)
악인의 길은 (A')
망하리도다 (B')(대조반복; 교차대구)
이러한 교차와 대조와 반복을 통해서 이 시는 그 맵시나 외형에 있어서 아주 질서 정연하며 아름다운 건축물처럼 보입니다. 이런 형식이나 구조는 선과 악이 이처럼 논리적으로 질서정연하게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인의 예술적 본능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의 구조는 세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단락 1(1-3절): 의인들의 확고한 기초
(2) 단락 2(4-5절): 사악한 자들의 무상함
(3) 단락 3(6절): 궁극적 대조
이러한 구조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 시의 진행적 통일성입니다. 산문도 아닌 시가 흐름이나 진행의 구성을 갖는 것이 흔치는 않겠지만, 이 시에는 분명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즉 1절과 2절은 두 종류 사람의 인격적 특징과 행위에 대해서 묘사하며, 3-4절에서는 직유를 사용하여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한 사람은 만족을 얻으나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함)를 보여주는 것으로 나아가다가, 5-6절에서는 그 최종 운명이 어떻게 판결이 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서 문장의 동사는 현재형에서 미래형으로 바뀌고 있는 것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료와 편집. 이 시는 일차적으로 어떤 역사적인(제의적이든 사회적이든) 배경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문학적인 배경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시는 가장 우선적으로 <시편> 전체에 대한 서문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시편>의 편집자가 이 시를 현재의 위치에 갖다 놓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가 현재의 <성경> 안에서는 한 편의 독립적인 시로 구분되고 있지만, 원래는 시편 2와 함께 결합되어 첫 번째 시로 인정받았던 때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초기 ‘유대’교나 기독교 전승에서 이에 대한 증거들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예컨대, <사도행전>의 13:33에서 저자는 시 2:7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시편>의 첫째 편에서 인용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초기의 <헬라어 사본>과 오늘날의 영어 번역본들은 이를 다시 “시편의 둘째 편”으로 바꾸어놓고 있는데, 그것은 <시편>의 편수와 절의 수가 바뀜에 따라 이루어진 수정 작업의 결과로 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가장 오래 된 <헬라어 사본>에서는 두 개의 시편을 단일한 문학 작품으로 간주했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만일 원래 두 개의 시가 이처럼 한 편의 시로 결합되어 <시편> 전체의 서문 역할을 했다면 그 의도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시 1편은 지혜의 관점에서 서문의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시 2편은 예언적인 관점에서 서문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이 두 개의 시가 아마도 ‘유다’의 마지막 왕들 중의 한 사람의 즉위식 예배를 위하여 하나로 결합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신학과 신앙
1. 의인들의 확고한 기초(1-3절)
이 시에서 “복된 자들”은 “행복한 자들”입니다. 이들의 복된 상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선물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보상 내지는 결과입니다. 여기서 “복 있는 사람은”을 달리 표현하면, “그 사람의 복이여”(아쉬레이 하이쉬)가 됩니다. “이쉬”는 원래 남자를 뜻합니다(창 1:22).
<구약>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복”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바라크’(ךרב)로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창 1:22; 2:3). <칠십인 역>에서는 이 단어를 ‘율로기아’(ευλογια)로 번역하고 있습니다(마 7:13-14). 그리고 또 하나는 ‘아쉬레’(רא)인데 이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차원의 장수, 건강, 재물, 자녀, 명예 등을 포함하며, 이는 어떤 행위에 대한 자연적인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칠십인 역>에서는 이 단어를 ‘마카리오스’(μαχαριος)로 번역하고 있습니다(마 7:13-14). 본문에서의 의미는 후자에 해당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적어도 소극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사악한 자들과의 교제나 거래를 멀리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여기서 세 개의 구문들은 시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모두 의인이 피해야 할 악인들과의 교제를 유사 반복을 통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 각각의 구문들이 모두 동일한 것으로서 의인들이 피해야 할 것들이긴 하지만, 동시에 이들 각각은 인간의 성품과 행위가 타락해 가는 세 단계를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악인”은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를 말하며, “죄인”은 표적을 빗나간 자, 그리고 “오만한 자”는 조롱하고 비웃는 자를 의미합니다.
아무튼 의인들은 사악한 자들의 생활 방식의 모든 면들을 피해야만 하는데, 그렇게 할 때 행복의 원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행복해 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보다 적극적일 필요가 있는데, 율법과 관련된 책임이 그것입니다: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율법은 ‘히브리’어로 ‘토라’입니다. 이것은 율법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며, 넓게는 <오경> 또는 <구약> 전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토라’는 좁게는 우리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교훈에서부터 넓게는 하나님의 계시 전체를 의미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시인은 ‘토라’가 기쁨의 원천이라고 말합니다. 그 기쁨은 ‘토라’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묵상을 함으로써 얻어진다고 말합니다. <신명기>도 왕이 ‘토라’를 계속 묵상함으로써 겸허하고도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신 17:18-20). 왕이 그렇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 시인의 인식입니다. <잠언서>는 ‘토라’는 장수와 번영을 가져다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잠 3:1-2).
3절에서는 의인들의 행복한 상태가 나무에 대한 직유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3절)
나무는 그 위치와 물과의 거리에 따라 무성하게 자랄 수도 있고 말라 죽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른 땅 즉 우기에만 일시적으로 물이 흐르는 “와디”로부터 물리 결코 마르지 않는 “수로” 곁으로 옮긴 나무는 무성하게 자랄 것이며, “시냇가”는 히브리어로 ‘팔라그’ 즉 인공적인 수로를 말합니다.
많은 잎과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이 직유는 의인들의 번영에 대해서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학적 요점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즉 시인에 따르면, 행복은 단순히 어떤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특정한 삶을 선택한 당연한 결과라는 점입니다. 계속적으로 물을 공급받는 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 자연적인 결과이듯이, 악인을 피하고 ‘토라’를 즐거워하며 사는 사람이 번영과 행복을 누리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이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인들이 누리는 번영과 성공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의 지혜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사악한 자들의 무상함(4-5절)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못합니다. 악인은 의인들처럼(3절) 번영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들의 삶은 간단한 직유를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4절)
그들은 겨와 같습니다. 이것은 생생한 비유입니다. 추수기에 농부들은 타작마당에서 쇠갈퀴로 곡식을 공중에 집어 던지는데, 이 때 알맹이가 견실한 곡식은 바닥에 다시 떨어지지만 가벼운 겨나 껍질들은 바람에 날아가 버립니다. 겨는 곡식의 한 부분이긴 하지만 농부가 내버리는 가볍고도 쓸모없는 것입니다. 이 직유를 통해서 시인은 악인들을 가볍고, 쓸모없는 자들, 즉 아무 실질적인 내용도 없는 아주 무익한 자들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어서 5절에서 시인은 악인들의 이러한 “가벼움”과 “무익함”을 보다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5절)
유사병행을 이루고 있는 두 행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사상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즉 악인들은 인간 사회의 중요한 영역에서 아무런 중요한 역할도 영향력도 지니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의인들이 의를 추구하며, 영향력을 미치는 곳에서는 자리를 잡을 수도 없고, 의인들로부터 아무런 인정도 받지 못합니다. 그들은 다만 자신만을 위하여 사는 자들로서, 다른 사람을 위한 일에는 참여하지도 못합니다.
3. 궁극적 운명(6절)
모든 인간은 결국 이러한 두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만일 누구든 의로워진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길을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악해진다면 궁극적인 운명은 파멸일 뿐입니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도다(6절)
그러나 우리는 이 구절을 극단적인 인과응보의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오히려 시인에 따르면 악인들의 파멸은 일차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징벌이 아닙니다. 이것은 행복이 하나님의 보상이나 상급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각자의 운명은 그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의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인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1. 의인과 지혜
‘유대’인들에게 지혜란 하나님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여호와를 경외(존경)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언 1:7)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지혜 문학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는 인간의 행동과 관련해서 이 원칙을 상세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하나님을 늘 가까이 하면서 그에 대한 경외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는 악을 피하고 하나님의 ‘토라’에 따라 사는 법을 배우는데, 그의 지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혜는 먼 미래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현재의 삶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이 시는 미래의 삶에 대한 어떠한 교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시인은 지금 무슨 종말론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들의 파멸이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인들의 번영과 성공도 역시 현재의 삶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산상수훈
의인과 악인의 운명에 관한 대조(1:6)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한층 더 잘 나타나 있습니다(마 7:13-14). “산상수훈”에 따르면, 세상에는 두 길이 있는데 하나는 파멸에 이르는 길이며, 그 입구는 넓은 문을 가졌고, 생명에 이르는 길은 좁은 입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에 나타나 있는 원칙이 바로 이 시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는 최후의 심판이라는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이처럼 현세적인 면과 내세적인 면을 동시에 다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 두 면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유명한 신학 용어로 재 표현해 보자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고 그리고 아직 올 것입니다.”
3. 토라의 목적
이 시의 교훈과 관련해서 또 한 가지를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의인들의 행복과 성공이 ‘토라’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는데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쁨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습니까? 토라에 대한 계속적인 묵상을 통해서라고 시인은 말합니다(2절하). ‘토라’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지침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다른 곳에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라고 노래할 수 있는 것도 ‘토라’에 대한 묵상 덕분입니다. 또 다른 곳에서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기억하시나이까?”하고 겸손하게 노래할 수 있는 것도 ‘토라’에 대한 묵상 덕분입니다.
그러나 자연인에게 자연은 그냥 자연일 뿐입니다. 무슨 의미나 목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주는 영원 전부터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그런 상태로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칼 세이건’(C. Sagan)이 그의 책 <Cosmos>의 서문에서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실로 <성경>은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정 내 존재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 알기를 원한다면, <성경>을 펴서 읽고 또 읽어야 할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이 시의 장르는 무엇입니까? 이 시가 <시편> 전체의 서문으로 적합한 근거는 무엇인지 토의해 봅시다.
2. 이 시의 문학적 특징과 신학적 주제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3. 시인이 생각하는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초자연적인 선물입니까? 아니면 자연적인 노력의 결과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