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2과
제 12과: 언약의 타협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9:1-27약 31분 분량
언약의 타협
(9:1-27)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9:14-15).
<기브온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라합 이야기>를 돌아보게 하면서 동시에 다음 장(10장)에서 계속될 <정복 이야기>를 예고해주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이스라엘(하나님의 백성)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 항상 이방인들과 함께 섞여 살아 온 것이 역사적 사실이자 현실이었습니다. “출애굽” 당시에도 그랬고(출 12:38),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에도 그랬으며(삿 1:21-36; 수 13:1-7, 13), ‘바벨론’ 포로시대에도 역시 그랬습니다(스 9:1-10). 그렇다면 과연 누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라합’과 같은 참된 신앙고백과 믿음의 행위를 보이는 자만이 이스라엘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기브온’처럼 거짓이나 사기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오늘날 교회의 회원을 구분함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반드시 누가 회원이며, 누가 아닌지를 구별하여 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그렇지 못합니다. 예컨대, 오늘날 “집사”라는 명칭은 마치 교회에 출석하는 모든 교인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서리집사”와 “장립집사” 등등 온갖 이상한 호칭을 갖다 붙여 혼란을 더욱 부추기고 있습니다. “서리”는 무엇이며 “장립”은 무엇입니까? <신약>에는 이런 구분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집사의 자격에 관해서 정확하고도 엄격한 잣대와 표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딤전 3:8-13).
교회 안에서 누가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인지, 누가 아닌지 그 구분이 애매모호하게 되면, 교회 교육이나, 성도 간의 교제나, 그리고 선교의 대상이 누구인지가 분명치 않게 됩니다. 특히 상호간에 끝까지 책임지는 하나님의 가정 안에서 이런 구분이 애매모호하게 되면, 사랑의 책임을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되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권면은 아주 현실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모든 이웃이나 인류에게 다가가 그 믿음의 성장을 도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득이 선별적이며 선택적인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누구나 교회의 회원이 되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회중 앞에서 믿음의 고백과 고백에 합당한 믿음의 행위를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늘 ‘기브온’처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회원이 되는 데에는 두 가지 선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본인의 선택이 그것입니다.
교회 회원과 비회원을 구별하여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한다는 말은 비회원을 차별하거나 배척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같은 질병의 환자라도 그 증세의 경중(輕重)에 따라 처방을 달리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적절한 진단과 올바른 처방이 의사나 약사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역시 필요합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의 리더십이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요구되는 리더십은 무엇입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결코 독단적이거나 즉흥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도자의 결정은 반드시 확고부동한 권위를 가져야 하는데, 그 권위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당한 결정은 반드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소위 초자연적인 은사나 체험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지도자가 <성경>에 근거한 지도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가운데 늘 거하는 자라야 합니다(1:8). 이와 동시에 지도자의 권위는 회중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회중의 갈채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지도자는 그야말로 낙하산 인사에 불과합니다. 신학교를 졸업하였거나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리더십은 초자연적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이기도 합니다. 회중은 이런 자격을 갖춘 지도자를 도와주고, 격려하며, 또한 그에게 순종하기를 즐거워 할 것입니다.
본문의 독서 포인트는 바로 이 두 가지 핵심 주제, 즉 “이스라엘”과 “리더십”에 관한 교훈을 파악하는데 있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무대는 ‘세겜’에서 다시 ‘기브온’으로 옮겨오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본문의 첫 두 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1요단 서편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 해변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이 이 일을 듣고, 2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려 하더라(1-2절)
이 두 절로 미루어 9장은 분명히 새로운 하나의 이야기 단위가 될 것이며, 이야기의 내용은 다시 정복 이야기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이야기는 다시 다른 방향으로 진행하면서, 전쟁 이야기는 10장에 가서야 비로소 등장하고 있습니다. 9장은 별도의 내용으로서 의도하는바 목적도 달라 보입니다: “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로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나무패며, 물 긷는 자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9:27). 마치 ‘기브온’ 족속의 현실에 대하여 원인론적인 설명을 제공해주는데 있어 보입니다. 이렇게 볼 때 9장의 첫 두절은 9장만의 서론으로 보기보다는 더 큰 이야기 단위인 9-10장 전체의 서론으로 봄이 마땅할 것입니다.
9장의 전체적인 내용은 ‘기브온’ 주민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군사 동맹조약을 체결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인근 지역 족속들이 ‘반(反) 이스라엘’ 동맹을 결성하여 전쟁 준비를 하는 동안에 ‘기브온’만 유독 이스라엘에 투항하여 그들의 편에 서서 다른 민족들에 대항하여 싸워주는 조건으로, 이스라엘은 ‘기브온’을 보호해 준다는 조약을 말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주종계약(從主契約)으로서, 당시 근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으며, 계약의 기본 골격은 강자가 약자를 보호해 주는 대신에 약자는 강자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스라엘이 ‘헤렘’과 어떠한 형태로든 언약을 맺는 것이 허용되는 일일까? 그것도 상대방에 속아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언약을 맺는 일이 말입니다! 9장은 이 문제를 두 가지 각도에서 조망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기브온’의 편에서, 또 한 번은 이스라엘의 편에서 입니다. 바로 이 두 관점이 9장을 이루는 구조적 원리가 될 것입니다. 이에 따라 본문을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 전반부(9:1-15)
(2) 후반부(9:16-27)
자료와 편집. 두 이야기는 마치 시적 대조병행처럼 각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주인공 ‘기브온’과 이스라엘에 대한 평가가 지극히 대조적입니다. 두 개의 전승을 병렬시킨 후대의 편집의 손길이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고로 두 이야기에서 무엇이 어떻게 대조되고 있는지 파악해 봅시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기브온’의 뱀 같은 기지와 지혜가 돋보이고 있으며, 화자는 이들의 속임수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이야기는 처음부터 긴장과 서스펜스로 시작되고 있습니다(4-6절상). 화자의 진술은 곧바로 등장인물 간의 대화로 연결되면서 긴장은 절정을 향해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결국 이스라엘이 ‘기브온’에 속아 군사 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마는 장면에 이르러 긴장은 맥없이 풀리고 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어떻게 할지를 물어보지도 않았기에 ‘기브온’에 속고 맙니다(14절). 언약은 체결되었고 ‘기브온’은 생명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15절). 화자는 이 단락에서 ‘기브온’의 행동을 비난하기 보다는 이스라엘을 더 비난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상황이 역전되고 있습니다. ‘기브온’의 사기행각이 드러나고, 이스라엘은 이를 빌미로 계약을 무효 선언하는 동시에 ‘기브온’을 저주하고 노예의 신분으로 강등시켜버립니다. 화자는 이 결정이 당연하고 정당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가 서로 다른 전승에서 유래했다면, 첫 번째 이야기의 배경 즉 “삶의 자리”는 어디일까? 즉 언제 어디서 이 이야기가 필요했을까? 이 질문과 관련해서 <사무엘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삼하 21:1-4).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저희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저희 죽이기를 꾀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물으니라. 다윗이 저희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기브온 사람이 대답하되 사울과 그 집과 우리 사이의 일은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나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 하니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의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삼하 21:1-4).
‘사울’과 ‘다윗’ 왕조 시대에 이르러 ‘기브온’의 후예들은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나 특권을 누릴 정도로 세력이 증대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그 세력이 지나치게 비대하여 국가적으로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던지 ‘사울’ 왕은 이들을 멸족시키려고도 했습니다만, 오히려 이들로부터 그의 가문에 대한 보복만 초래했을 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무엘서>에서 화자는 ‘다윗’ 시대에 3년에 걸쳐 기근이 들게 된 것도 ‘사울’ 왕이 ‘기브온’ 거민들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에 대한 복수가 ‘다윗’ 시대에까지 이르고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기브온’ 지역은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하기 전까지 중요한 성소의 기능을 하기도 했습니다(왕상 3:4-5). ‘다윗’ 왕에 이르러서도 그들의 세력이나 지위는 여전했을 것이며, 따라서 ‘기브온’의 사기 행각을 정당화 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첫 번째 이야기는 필경 현재 이스라엘 왕국 내에서 누리고 있는 사회적인 지위나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져 졌을 개연성이 큽니다. 이야기의 실질적인 기원은 이보다 더 오래 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첫 번째 이야기의 출처는 가칭 <기브온 전승>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 상황도 달라지는 법, ‘솔로몬’ 시대에 이르면 ‘기브온’의 처지는 한낱 노예의 신분으로 돌변하고 맙니다. ‘솔로몬’이 자신의 왕국 내에 사는 모든 이방인들을 노예로 삼아버렸기 때문입니다(왕상 9:20-21; 스 2:43-58; 느 7:46-60). 이렇게 달라진 시대적 상황이 두 번째 이야기의 배경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통치이념이 필요하듯이, 이스라엘은 기존의 <기브온 전승>을 수정 및 보완할 필요를 느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결과가 본문 후반 이야기의 내용 속에 드러나고 있습니다(참고. 16-21절). 그들과 언약을 맺은 후 삼일이 지나서야 그들은 근린에 있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는 자라 함을 들으니라(16절). 이스라엘 자손이 진행하여 제 삼일에 그들의 여러 성읍에 이르렀으니 그 성읍은 기브온과 그비라와 브에롯과 기럇여아림이라(17절). 그러나 회중 족장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한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치지 못한지라 그러므로 회중이 다 족장들을 원망하니(18절), 모든 족장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19절). 우리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을 인하여 진노가 우리에게 임할까 하노니 이렇게 행하여 그들을 살리리라 하고(20절), 무리에게 이르되 그들을 살리라 하니 족장들이 그들에게 이른 대로 그들이 온 회중을 위하여 나무패며 물 긷는 자가 되었더라(21절).
즉 ‘기브온’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는 역사적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지요.
두 번째 이야기에서도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갈등과 긴장이 조성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반전을 예고하는 접속사 “그러나”로 시작하면서(16절상) 곧바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16절하). 이스라엘이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인근 마을을 둘러보는 과정을 통해서 긴장이 고조되면서(17-18절), 이후 이어지는 대화에서 절정을 맞고 있습니다. 회중이 족장들을 원망하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이라 파기할 수도 없다는 점이 딜레마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해결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기브온과 맺은 언약은 지키되, 차제에 이스라엘이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영구히 각인시켜놓는 것이야.” 새로운 전승의 결론은 이 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21절).
그렇다면 이야기에서 남아있는 부분(22-27절)의 출처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일견 두 번째 이야기의 결말을 다시 반복하면서 핵심 주제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만, 두 가지 새로운 강조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신명기 율법
(2) 여호수아 여호수아가 그들을 불러다가 일러 가로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 거주하거늘 어찌하여 우리는 너희에게서 심히 멀다 하여 우리를 속였느냐(22절).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영영히 종이 되어서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패며 물 긷는 자가 되리라(23절).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 모든 거민을 당신들의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을 인하여 우리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 같이 하였나이다(24절). 보소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한지라(25절). 여호수아가 곧 그대로 그들에게 행하여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서 건져서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26절). 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로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나무패며 물 긷는 자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27절).
동일한 내용을 다루면서도 앞선 이야기의 결론에 대한 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기브온’이 영원히 이스라엘의 노예로 살게 될 것인데, 이는 다름 아닌 <신명기>의 법에 근거한 저주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앞의 두 이야기와는 또 다른 배경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이 부분을 기록한 자가 9장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최종 편집했을 것이며, 그는 다름 아닌 <신명기> 기자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C. T. Butler, 100쪽(참고도서 1).
그렇다면 <신명기> 화자는 두 개의 전승을 하나로 결합시켜서 새로운 하나의 주제를 도출해 내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인바, <여호수아서>의 신학적인 세 축(軸) 중의 하나인 ‘리더십’에 관한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조약체결(9:1-15)
첫 번째 이야기의 첫 두 절은 9-10장 전체의 배경에 해당됩니다.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고,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상대가 더 이상 ‘여리고’나 ‘아이 성’처럼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땅에 사는 모든 국가들이 참여하는 연합전선이 구축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요단 서편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 해변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이 이 일을 듣고, 2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려 하더라(1-2절).
이곳에서 화자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항하여 나아오는 왕들이 모두 일심으로 단합되어있다는 점과, 이들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여호수아’에게도 싸움을 걸어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한 번 지도자 ‘여호수아’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반(反) 이스라엘 연합 전선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기세 등등하게 밀려오는 이스라엘의 위협으로부터 피할 방도를 궁리하는 족속도 있었습니다. ‘기브온’ 지역 주민들이 그들입니다. ‘기브온’은 오늘날 ‘엘-집으로 알려져 있는 곳으로서,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으로 9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벤야민’ 족속에 속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수18:25)
이들은 이스라엘과 싸우는 대신에 강화조약을 맺어 살아남기 위하여 교활하게도 책략과 속임수를 사용했다고 화자는 전합니다:
(그러나) 기브온 거민들이 여호수아의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꾀를 내어(3-4절상)
이들의 행동은 분명 이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의 행동을 가리키는 낱말 ‘오르마’(ה)는 구약에서 이중적인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긍정적으로는 슬기로움이나 지혜로움등의 의미를 갖기도 하고(참고, 잠 15:5; 19:25), 부정적으로는 교활함이나 간교함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욥 5:13; 시 83:4).
이들은 과연 교활하게 행동한 것인가, 아니면 현명하게 행동한 것인가? ‘기브온’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취한 선택은 아주 지혜로운 것이며 칭찬 받을 만한 것입니다만, 이스라엘의 편에서 보자면 아주 간교한 거짓 술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화자는 ‘기브온’의 행동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무지하고 완고한 주변 족속들과는 달리 아주 영리하고 똑똑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4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5그 발에는 낡아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예비하고, 6그들이 길갈 진으로 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원방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약조하사이다(4-6절).
이스라엘이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는 말과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의 어떤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지혜를 능가하고 있는지 정리해 보는 것도 무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첫째, 이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아주 멀리서도 익히 들어 알고 있으며, 이에 놀라서 먼 거리도 마다않고 달려왔다고 말함으로써 이스라엘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많은 양식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이 떡은 우리가 당신들에게로 오려고 떠나던 날에 우리들의 집에서 아직도 뜨거운 것을 양식으로 가지고 왔으나 보소서 이제 말랐고 곰팡이가 났으며(12절)
아니나 다를까 이를 보자말자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는지 보면 압니다: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14절상).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들이 달려온 것이 군사적인 보호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도와주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와 약조하사이다”(6절하). 이런 해석에 대해서 해밀턴은 다른 견해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즉 본문에서 계약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은 대등하지 않은 자들, 곧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에 맺는 계약으로서 만약에 ‘기브온’ 족속에게 이것이 허용된다면 계약 조건을 제시할 자는 당연히 이스라엘이지 ‘기브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성경의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데, 포위당한 ‘길르앗 야베스’ 거민은 ‘나하스’와 ‘암몬’ 족속에게 “우리와 조약을 맺자. 그리하면 우리가 당신을 섬기겠다”라고 말합니다(삼상 11:1). ‘기브온’은 ‘여호수아’에게 자기들의 이스라엘의 종임을 반복해서 언급함으로써 자신들의 열등한 지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해밀턴, 60쪽.
전쟁을 앞둔 시점에서 이스라엘도 동맹군이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스스로 도와주겠다는 자를 마다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셋째, 이스라엘을 향해서 최대의 경의를 바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종 이니이다(8절상)
치켜 세워주는데 싫어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넷째, 최근에 ‘여리고’와 ‘아이’ 성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3절), 정작 그 일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먼 과거의 출애굽 사건이나 요단강 도강 이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만 언급함으로써 신뢰를 더욱 높이고 있습니다:
9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인하여 심히 먼 지방에서 왔사오니 이는 우리가 그의 명성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으며, 10또 그가 요단 동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곧 헤스본 왕 시혼과 아스다롯에 있는 바산 왕 옥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음이니이다(9-10절)
다섯째, 자신들을 왕이 보낸 정식 외교사절의 흉내를 냄으로써, 조약의 당사자로 포함시키고 있습니다(4절상, 11절). 이스라엘이 빠져나갈 길을 사전에 차단해 버린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 장로들과 우리 나라의 모든 주민이 우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행할 양식을 손에 가지고 가서 그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당신들의 종들이니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라 하였나이다(11절)
이처럼 치밀하고도 주도면밀한 공작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한 일이란 고작해야 신분 확인을 위해서 물었던 질문 하나밖에 없습니다: “너희는 누구며 어디서 왔느뇨”(8절후). 전쟁 시 상대방으로부터 관동성명과 암호를 대라는 요구를 받을 때는 정확하게 답변해주어야지 어물어물하다가는 사살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기브온’이 보이고 있는 태도는 애매모호하고 두리 뭉실합니다: “심히 먼 지방에서 왔사오니”(9절상). 정확하게 어디서 왔는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제대로 근무수칙을 아는 근무병이라면 이런 자는 사살해 버립니다.
이처럼 긴장이 한껏 고조 된 가운데 남은 질문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과연 ‘기브온’의 계책이 성공을 거둘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이 이를 알아차릴 것인가?” 그러나 이야기는 긴장의 절정에서 맥없이 끝나버립니다:
14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15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14-15절).
영적 싸움은 이스라엘의 참패로 끝나고 맙니다. ‘기브온’이 한 수 위였음이 입증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기브온’의 잘못에 대해서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오히려 이스라엘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아니라 지도자 ‘여호수아’입니다. 화자는 ‘여호수아’가 화친을 선포하고 조약을 체결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비난은 참으로 역설적인 것이, 그가 ‘야훼’ 하나님의 이름으로 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약 당사자에게는 한 마디 상의조차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유일하게 의지했던 것은 ‘기브온’의 설득력 있는 간증과 증거물들이었습니다. 그는 변변한 대답도 들어보지도 않고 대충대충 넘어가 버렸습니다. 철저한 연구조사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경>을 뒤져서 연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족장들 즉 중간 지도자들은 다만 ‘여호수아’의 결정과 지시에 따라 맹세를 한 죄밖에 없습니다.
2. 조약 폐기(9:16-27)
적어도 ‘기브온’의 입장에서 볼 때, 계약 당사자는 이스라엘이라기보다는 최고 지도자 ‘여호수아’일 것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 이야기의 결론에서 이스라엘이 아니라 ‘여호수아’를 궁극적인 책임자로 비난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두 번째 이야기로 넘어오면서 다소 완화되고 균형을 잡으려는 흔적이 보입니다. 즉 비난을 받아야 할 ‘여호수아’가 오히려 ‘기브온’을 정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자가 이스라엘의 편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15절을 다시 한 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15절)
이 구절은 첫 번째 이야기의 결론이면서 동시에 두 번째 이야기를 이어주는 교량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바대로 첫 번째 이야기의 결론은 모든 실패의 책임을 회중이 아니라, 최고 지도자 ‘여호수아’와 중간 지도자가 져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조약체결을 주도했고, 목자들은 서약을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두 번째 이야기에서(16-21절) 이 문제를 계속해서 다루고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16그들과 언약을 맺은 후 삼일이 지나서야 그들은 근린에 있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는 자라 함을 들으니라. 17이스라엘 자손이 진행하여 제 삼일에 그들의 여러 성읍에 이르렀으니 그 성읍은 기브온과 그비라와 브에롯과 기럇여아림이라. 18그러나 회중 족장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한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치지 못한지라 그러므로 회중이 다 족장들을 원망하니, 19모든 족장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 20우리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을 인하여 진노가 우리에게 임할까 하노니 이렇게 행하여 그들을 살리리라 하고, 21무리에게 이르되 그들을 살리라 하니 족장들이 그들에게 이른 대로 그들이 온 회중을 위하여 나무패며 물 긷는 자가 되었더라(16-21절)
그러나 두 번째 이야기에서 제기하고 있는 리더십에 관한 문제는 첫 번째 이야기에서 보여준 입장과는 정반대 편에 서 있는 것을 봅니다. 물론 회중들이 지도자들을 향해서 불평을 하고 있는 점은 광야에서 그들의 선조가 보였던 것과 동일하기는 하나, 이번에는 잘못된 쪽은 회중이 아니라, 지도자들입니다. 이유 있는 불평이자 항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기브온’의 편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가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자면, 16-21절의 본문 역시 <기브온 전승>에 속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점 회중들의 불평에 대해서 ‘여호수아’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보여준 첫 번째 반응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은 결코 파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파기하면 오히려 자신들이 죽음을 초래하기 때문이라고 것인데, 여전히 변명과 핑계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과감한 한 가지 계책을 제시합니다. 이 계책은 ‘기브온’의 그것에 맞먹을 정도로 교활하고 음흉한 것입니다. 즉 ‘기브온’을 다 죽이는 대신에 영원히 노예로 삼아 그들의 사회적 신분을 제한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제안은 회중들에게 먹혀든 것 같습니다(18-20절).
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리더십에 관하여 <오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모세’의 리더십과는 다소 다른 관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지도자는 회중들의 요구와 불만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응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지도자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근거는 당연히 <모세>의 법에 두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던 바처럼, 화자는 리더십에 관하여 지금까지 보여준 것과는 상반되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 주제에 대하여 균형 감각을 유지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의 결론 부분에서 이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22여호수아가 그들을 불러다가 일러 가로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 거주하거늘 어찌하여 우리는 너희에게서 심히 멀다 하여 우리를 속였느냐. 23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영영히 종이 되어서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패며 물 긷는 자가 되리라. 24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모세에게 명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 모든 거민을 당신들의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을 인하여 우리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 같이 하였나이다. 25보소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한지라. 26여호수아가 곧 그대로 그들에게 행하여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서 건져서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27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로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나무패며 물 긷는 자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22-27절)
이곳에서 주제가 급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도자의 잘못은 이제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심판을 하는 쪽은 ‘여호수아’이고 심판을 당하는 쪽은 ‘기브온’입니다. 이들이 ‘여호수아’ 앞에 끌려나와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거짓으로 맺은 조약이므로 마땅히 폐기처분되어야 한다는 선고가 들리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입을 통해서 말입니다(23절상). 23절 후반부의 문제점은 당시 “하나님의 집”이 없었다는 것인데, 이는 후대의 편집적 삽입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판결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항의성 변명을 ‘기브온’의 입을 통해서 들을 수 있기는 합니다만, 이조차도 화자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모티브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즉 ‘기브온’이 “두려워 떨었다”고 하는 고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취한 행동은 두려움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것이, ‘라합’의 행동과 극명하게 대조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라합’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속임수를 써서 잠시 위기를 모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태도는 단호하고 명쾌합니다. 다른 목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구차한 변병으로 자신을 합리화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를 내립니다(26절). 화자는 ‘여호수아’의 결정을 원인론적으로 설명하면서 이야기의 결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화자가 속해 있던 당대에 ‘기브온’의 사회적 지위를 정당화하는 역사적 근거로 삼으려는 의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1. 타협(9:1-15)
수 년 전 프랑스에서 한 결석재판이 열렸습니다. 피고는 나이 87세로 중병이 들어 피고석에 앉을 수도 없는 처지라 재판은 결석으로 열렸습니다. 그의 죄명은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나치 점령군에게 넘겨주는데 협조했다는 것입니다. 이 재판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은 말 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프랑스 시민들조차 지극히 당연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 재판을 미루어 온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려는 이 사람들의 철저함에 경외감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철저하기는 일본도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나라입니다. 보잉사가 제작한 일본 항공사 소속 비행기가 추락 사고를 일으켰을 때, 일본 항공사와 보잉사 간에 사고의 책임을 서로 상대편에게 떠넘기려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고의 원인이 뚜렷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일본 항공사는 국내의 전 항공 기술진을 동원하여 약 4 년간에 걸친 조사와 연구 끝에, 사고의 원인이 비행기의 결함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개가를 올렸습니다. 보잉사의 책임으로 끝이 난 것이지요. 이처럼 자기 국익에는 철저함을 보이는 이들도, 2차 대전 당시 인접 국가들에 대하여 저질렀던 만행에 대해서는 요지부동 입을 다물고 있어 우리는 물론 당시 피해 당사국들의 분노와 불신을 사고 있습니다. 그들의 非行은 남경대학살, 인체실험, 종군위안부,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한 통계 자료에 의하면 최근 수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뇌물수수나 부정부패와 관련해서 기소를 당했던 피의자의 약 90%가 형 집행 정지 또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고 합니다. 특히 선거사범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래서야 과거가 청산될 리가 없습니다. 비리는 계속되고, 적당주의는 민족의 문화와 체질로 자리 잡아 갑니다. 일예로,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에 ‘공동기기실험관’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건물 준공 검사를 받은 지 한 달도 못되어 벽에 금이 가고, 그 사이로 빗물이 흘러들기 시작했습니다. 예는 또 있습니다. 안양에 있는 ‘박달교’가 개통 첫날부터 橋脚이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리는 그 유명한 삼풍백화점사고로 온 나라가 떠들썩할 당시에 시공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고속철의 70%가 부실시공이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기술 부족인가 아니면 인심이 후한 것인가? 원칙과 법규를 무시한 타협의 결과입니다. 자연법칙이든 영적법칙이든 그것을 어기게 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우주만물은 하나의 원리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그 동일한 원리에 의해서 유지되고 보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히 1:1-3). 우리는 이 원리를 ‘이치’ 또는 ‘로고스’로 부릅니다. 당연히 ‘로고스’의 법칙에 위배되는 생각이나 행동은 모두 비이성적인 것이 됩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로고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본주의(humanism)는 이를 왜곡하여 하나님의 생각을 비이성적인 것으로, 그리고 우리의 생각을 이성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인본주의는 그 자체로서 아주 매혹적으로 들립니다. 인간미가 넘쳐나는 ‘박애정신’(humanitarianism)으로 착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잠언서>는 말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 16:25). 인본주의는 말 그대로 인간이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자 모든 가치판단의 주체라는 무신론적인 선언입니다.
이스라엘이 ‘기브온’과 맺은 언약은 이러한 인본주의에 대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브온’과 이스라엘은 각기 나름대로의 계책에 따라 자신들이 보기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삶의 방식을 선택함으로써, 하나님의 이성, 즉 언약의 율법을 포기합니다. 신본주의자가 되기를 거부한 것이지요. ‘여호수아’보다 후대에 사는 특권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과연 하나님의 뜻을 몰랐을까? 이처럼 중요한 순간에 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았을까? 이스라엘의 동기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박애정신의 발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멀리서 달려와 우리 편이 되겠다고 하는데 구태여 적을 만들어 다 죽일 것까지야 없지 않겠는가? 사실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 이러한 태도야 말로 전형적인 인본주의의 전형이 아닐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점에 대해서 여러 차례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가나안’에는 하나님의 친구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호수아’ 역시 지난번의 실패와 성공을 거울삼아 충분히 판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동기는 없었을까요? 지도자의 탐욕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를 암시하는 듯한 화자의 진술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14절상). 이 문장의 동사 “취하다”는 “게걸스럽게 집어삼켜버리다”라는 뜻이 담긴 일종의 언어의 유희입니다. 우리는 식사를 나누는 행위가 언약체결의 한 방법임을 압니다. 즉 이스라엘은 ‘기드온’이 가지고 온 군수물자를 탐내 그것을 “먹어치움”으로써 언약을 “먹어치워버렸다”(언약을 맺었다)는 화자의 조롱 섞인 비난입니다. 이 역시 인본주의의 발로입니다.
우리의 체험 역시 이스라엘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내 뜻을 행하고 싶을 때,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습니다.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내 뜻과는 다른 계시가 내려올까 봐 그럴까요? 그래서 <성경>에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대신 <성경>에는 없지만 혹시 다른 초자연적인 현상(꿈, 환상, 등등)을 통해서 새로운 계시를 알아내려고 안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구와 결혼할까요?”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요?“ 어떤 학교로 가야 할까요?” 혹시 이러한 기도로 날이 새고, 달이 간다면 기도를 새롭게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미 성경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외는 내 마음대로 하면 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성경 속에 다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없는 곳에 무원칙과, 비원칙과, 즉흥적인 결단과, 세속적인 권위주의가 판을 칩니다. 특히 이런 일은 소위 교회의 신령한 지도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수시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런 자들일수록 교인들과 더불어 <성경> 토론을 통해서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기보다는 일방적인 선포로 일을 수습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사이비일 뿐입니다. 사이비는 당연히 회중들의 질타와 원성과 불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직통 계시를 받아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고 하는데도 독단적이고 일방적인 결정으로 인해서 사후 심각한 후유증을 앓게 될 때, 그 책임은 회중 전체가 아니라 그 신령한 지도자가 져야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중은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호수아’ 공동체가 바로 그러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2. 수정(9:16-27)
지도자로서 회중의 불만과 원성을 받는다는 것은 공동체 전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의 결론은 모든 실패의 책임을 회중이 아니라, 최고 지도자 ‘여호수아’와 중간 지도자가 져야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조약체결을 주도했고, 목자들은 서약을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회중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항의를 하는 것에 대해서 하등 잘못된 점이 없습니다. 이처럼 회중들이 지도자들을 향해서 불평을 하고 있는 점은 광야에서 그들의 선조가 보였던 것과 동일하기는 하나, 이번에는 잘못된 쪽은 회중이 아니라, 지도자들입니다. 이유 있는 불평이자 항거입니다.
이에 대해 ‘여호수아’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가 보여준 첫 번째 반응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은 결코 파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일견 변명과 핑계로 일관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로는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하되 원칙을 지키려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과감한 한 가지 계책을 제시합니다. ‘기브온’을 다 죽이는 대신에 영원히 노예로 삼아 그들의 사회적 신분을 제한하자는 제안이 그것입니다. ‘기브온’에게 받은 것을 그대로 되갚아주는 절묘한 제안이기도 합니다. ‘기브온’의 제안이 교활하고 음흉한 것이었다면, ‘여호수아’의 제안 역시 그에 버금가는 것입니다.
그의 제안은 회중들에게 먹혀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에피소드를 통해서 리더십에 관하여 오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모세의 리더십과는 다소 다른 관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지도자는 회중들의 요구와 불만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응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실수로든 또는 지나친 확신으로든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결과를 수습하는 모습 또한 보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 지극히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수습하는 과정에 내려지는 새로운 결정이나 행동에 대해서 <성경>적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경우라면 그의 선임자 ‘모세’의 규례를 도입하면 될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도자는 우선 어느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앞서 행함으로써 회중의 인정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의 가장 우선 되는 권위는 바로 <성경>으로부터 와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할 때 회중의 인정과 승인이 따라옵니다. 지도자의 권위와 관련해서 두 번째로 필요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와 관련해서 본문의 서두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과연 탁월한 지도자 ‘여호수아’는 앞서 저지른 실수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음을 봅니다. 그는 ‘기브온’ 거민들을 끌어내어 그들에게 ‘모세’의 법에 근거하여 회중이 위탁해준 결정을 알려줍니다. ‘여호수아’가 ‘기브온’을 향해서 내리고 있는 저주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브온’은 조약 당사자에서 노예로 그 신분이 격하되고 있습니다. ‘기브온’은 부당하다는 항의를 해보지만, ‘여호수아’의 태도는 단호하고 명쾌합니다. 화자가 전하는 교훈은 한 가지입니다: “굴복한 자들은 살지만, 저항한 자들은 죽는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굴복한 것처럼 위장했지만, 실은 내면적으로는 진정으로 굴복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목숨을 연명하는데 더 관심이 많았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는 분이 아닙니다. 혹시 나는 하나님이나 사람들 앞에 짐짓 순종과 거룩을 가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말입니다. 또한 우리 중에 누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데도 하나님의 가정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며 묵인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구조와 단락을 구분하고, 각 단락의 신학적 주제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2. 교회 공동체 내에서 회원과 비회원을 구별하는 일이 왜 중요합니까? 그리고 이 일이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배치되는 일은 아닙니까?
3. 교회의 리더십과 관련해서 일련의 교훈들을 이끌어내고 토의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