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1과
제 11과: 언약의 재확인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8:30-35약 26분 분량
언약의 재확인
(8:30-35)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의 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8:34-35)
서구의 고고학자들은 ‘팔레스타인’ 땅을 가리켜 양파껍질이라고 합니다. 발굴하는 땅의 깊이에 따라 다른 문화와 역사의 흔적들이 출토되기 때문에 붙인 이름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사시대 이래 현재까지 수많은 민족과 왕들이 번갈아 가며 이 지역을 차지해가면서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꽃피운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지금의 ‘욥바’ 항구에는 중세에 십자군이 세운 거대한 지하 사원과 동굴이 있는데, 이는 원래는 지상 건축물이었습니다만, 십자군을 내쫓고 이슬람 제국이 들어섰을 때 이들은 이 지역을 매몰시키고 그 위에 새로운 이슬람 사원을 세운 바 있습니다. 지금의 ‘예루살렘’ 성벽도 역시 그렇습니다. 성벽의 높이에 따라 돌의 색갈이 다른 것은 성벽을 개축하고 증축했던 시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돌 하나, 깨진 토기, 그릇 파편 하나까지 아주 중요하게 취급합니다. 따라서 이 땅의 각 지명도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동시에 지니게 됩니다. 본문 속에서 ‘여호수아’ 공동체가 서있는 ‘세겜’이라 불리는 지역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이 이름이 <성경>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12장으로서, ‘아브라함’이 우상의 땅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와, 이곳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위한 단을 쌓아 그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새 출발을 다짐하는 제사였습니다. 이후 그의 손자 ‘야곱’이 이곳에서 잠시 살았고, 그리고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우물가에서 ‘사마리아’의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극적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던 곳, 즉 “야곱의 우물”이 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장소에 지금 “여호수아 교회”가 와 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연속적인 것으로 볼 때, 지금 이스라엘은 전쟁을 하다말고 갑자기 ‘여리고’와 ‘아이’ 성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5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으로 이동을 한 셈이 됩니다. 보다 상세한 내용 파악을 위해서 첨부한 지도를 보시기 바랍니다(참고 도서 5).
아무리 하나님의 전쟁이라고 하지만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행위임에 분명합니다. 무슨 전쟁을 이렇게 한가하게 치르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이곳이 이스라엘의 신앙생활에 무슨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까? 본문의 신학적 주제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세겜’에 가면 무엇이 있습니까? 언약의 두 얼굴이 있습니다. 이 땅을 사이에 두고 북으로는 저주의 산 ‘에발’이 있고, 남으로는 축복의 산 ‘그리심’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언약의 두 얼굴을 보기 위해서 두 산으로 둘러 싸여 평평한 원형 경기장 같은 ‘세겜’의 구릉에 와있는 것입니다. 국가적 대장정을 앞두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언약을 재확인할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새롭게 재 헌신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늘 혼돈과 좌절 가운데서 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잠언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 즉 이스라엘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계시, 즉 그분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지금 출발점에 다시 와 있는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본문은 앞선 내용들과는 여러 면에서 연결이 아주 부자연스럽습니다.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지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문학적으로도 부자연스럽기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은 앞선 본문들처럼 그 양식에 있어 이야기(narrative)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신명기>의 규례들을 ‘이야기’의 형식으로 바꾸어놓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인물은 당연히 ‘여호수아’이며, 지도자로서 ‘모세’의 계명을 남김없이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가 취하고 있는 일련의 행동은 네 개의 동사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본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즉 ‘모세’의 규례에 따라, 우선 제단을 건설하여, 희생 제사를 드렸으며, 돌판 위에 ‘모세’의 율법을 기록하여, 백성들을 모아 율법의 축복과 저주를 낭독해 주었습니다.
자료와 편집. 본문의 배경과 출처는 어디일까? 이야기의 흐름이 끊어지는가하면, 장소도 ‘여리고’나 ‘아이’에서 ‘세겜’으로 옮겨왔고, 서술의 내용도 전쟁이 아닌 예배나 제의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서 오는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우선 본문은 ‘모세’의 율법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명기> 기자의 최종 손길이 느껴집니다만, 자료의 출처는 <세겜 전승>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전승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여호수아> 제 24장을 연구한 이후라야 할 것입니다: 버틀러, 90쪽(참고 도서 1).
그러나 본문의 배경과 관련하여 보다 중요한 관심사는 자료의 출처 즉 역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문학적이고도 신학적인 데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본문은 그동안의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놓고 있습니다. 전쟁을 하다말고 예배와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이 그렇고, 본문의 배경 또한 ‘여리고’나 ‘아이’가 아니라 여태 한 번도 이야기 중에 등장한 적이 없는 ‘세겜’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세겜은 아직 이스라엘이 차지하지도 않은 지역입니다. 전쟁을 하다말고 갑자기 이곳으로 옮겨와 제단을 건설한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보아도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본문은 분명 이곳에 있기에는 부적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본문은 그 내용에 있어, 차라리 이 책의 마지막 부분(24장)에 위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리적이고도 연대기적 모순만 무시한다면 설명이 전혀 불가능 한 것만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문학적인 기능을 고려해 본다면, 본문은 1장과 함께 2-7장 사이의 내용을 수미상관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세 가지 선물을 주셨습니다: (1) 그 땅(the Land); (2) 율법(the Law); (3) 지도자(the Leader). 이들은 <여호수아서>의 주제이자, 책 전체를 관통하는 모티브들입니다. 화자는 책의 서두에서(1장) 이들 모두를 등장시켜 강조한 바 있습니다(1:1, 3, 4, 6, 8, 16, 17). 그리고 이어지는 이야기에서(2-7장) 이 세 요소들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 땅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언약의 축복을 통해서입니다. 언약에 대한 순종과 신실함이 핵심 요소입니다. 지도자의 역할은 이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이해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그 자신은 물론 공동체 모두를 상대로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는 지도자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만 그 땅은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율법이 그 땅에 이르게 하는 문이라면, ‘여호수아’는 그 문의 열쇠가 되는 셈입니다.
남아 있는 질문은, “그러나 만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에 불충실해 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입니다. 화자에게 있어 이 질문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라, 다시 한 번 정리하고 다짐을 새롭게 받아두고 싶은 모양입니다. 대답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입니다. 화자에게 있어 새로운 출발을 위한 가장 적절한 장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셨던 ‘세겜’이 되어야 할 것이며, 새 출발의 근거 내지는 원동력은 말할 것도 없이 ‘모세’의 율법 즉 <신명기>입니다. 그리고 새 출발의 다짐은 <신명기>에서 규정하고 있는 일련의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신학적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화자는 이야기의 흐름이나 기타 논리적인 모순에 개의치 않고, 이전의 전승을 이곳에 삽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속한 공동체의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제단을 쌓아라(8:30-31)
새로운 헌신 즉 새로운 시작을 위한 첫 걸음은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단을 쌓았으니(30절).
‘에발’ 산에 제단을 쌓는 행위는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왜 하필 ‘에발’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단을 쌓는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만, 그 장소가 ‘에발’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예배를 위해서 제단을 세운 장소가 ‘에발’이라는 사실은 이곳과 <신명기>에서 세 번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신 11:29; 27:4, 13). 그러나 <신명기>에 의하면 ‘에발’은 축복의 산이 아니라 저주의 산입니다(신 11:2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신 11:29).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제사를 드려야 한다면 당연히 그 장소는 ‘에발’이 아니라 ‘그리심’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실제 <신명기> 27:4에 대한 <사마리아 사본>에서는 ‘에발’을 ‘그리심’으로 바꾸어 놓고 있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보듯이, ‘사마리아’ 인들은 ‘그리심’을 ‘예루살렘’ 성전을 대치할 수 있는 거룩한 예배 장소로 여기고 있었습니다(요 4장). 예배 장소를 놓고 정통 유대인과 ‘사마리아’ 인들 사이에 존재했을 입장의 차이와 그로 인한 갈등 때문에 이처럼 서로 다른 본문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본문이 어떠했든, 화자에게 있어 보다 중요한 문제는 예배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본질 즉 <신명기>에서 규정하고 있는 바에 따라 드리는 합법적인 예배 그 자체였던 것 같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 것과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그 위에 드렸으며(30-31절).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중앙 성소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은 ‘다윗’ 왕 시대 이후부터였으며, 그 이전에는 예배 장소는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음이 <신명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기도 합니다. 위 본문에서도 강조하고 있는 바도 ‘모세’의 율법 그 자체입니다. ‘에발’에 제단을 세우게 된 것은 철저하게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행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한 강조는 또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얼마나 ‘모세’의 율법을 중요시했는가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이 그것입니다: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31절후). 이러한 표현이 의미심장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길갈’에서 그들이 돌로 행한 할례식과 관련해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즉 ‘여호수아’는 당시의 시류(時流)나, 자신의 편의나 지혜에 따른 것이 아니라, 곧이곧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라 제단을 세웠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번제와 화목제에 대한 강조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그 위에 드렸으며”(31절후). 번제란 짐승의 껍질을 벗겨 각을 떠서 통 채로 태우는 제사를 말합니다. 준비하는 과정이 손이 많이 가는 귀찮은 작업일 뿐만 아니라, 피 냄새가 진동하며 살이 타들어가는 아주 끔찍한 제사입니다. 시대나 상황에 따라 예배의 내용도 바뀔 법도 한데, 이 역시 “모세의 규례”를 그대로 따랐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2. 율법을 기록하라(8:32-33)
‘여호수아’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그 율법을 기록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 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대로 함이라(32-33절).
제단을 쌓기 위하여 사용하였던 돌들이 이제는 율법을 기록하기 위한 돌 판으로 그 기능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율법을 기록한 돌 판과 제사를 위하여 제단으로 사용한 돌 판이 같은 것인지 또는 다른 것인지에 관해서는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다른 것으로 보는 편이 더 논리적일 것입니다.
이 구절 역시 ‘모세’의 율법 즉 <신명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을 봅니다. 스스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로 더불어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 찌니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이미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찌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명백히 기록할찌니라(신 27:1-8).
돌과 관련한 ‘모세’의 명령은 “큰 돌들을 세워 율법을 기록하고”(2-4절), “제사를 위하여 제단을 세우라”는 것입니다(5-7절). “큰 돌들을 세워 그 위에 율법을 기록하라”는 명령이 말미에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화자가 강조하고 싶은 바는, 제단이나 제사가 아니라 ‘모세’의 율법을 보존하고 순종하는 ‘여호수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복사하고 있는 ‘여호수아’는 단순한 종요 지도자를 넘어, <신명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왕에 버금가는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 서를 등사하여”(신 17:18). 그는 이 백성의 표본이 될 뿐만 아니라, 이 백성의 선생이기도 합니다.
헌신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입니다. 예배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갖는 특권이자 의무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신명기>는 요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이 예배를 지켜보는 자들 가운데 이방인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이 역시 그들의 예배가 <신명기>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따르고 있음을 암시해 주는 언급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비록 약속의 백성은 아니지만, <신명기>는 여러 곳에서 이들에 대하여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 신 1:16; 5:14; 14:21, 29; 16:11, 14; 24:17, 19-21; 26:12-13; 27:19.
따라서 이방인들이 이 자리에 함께 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각별한 호의와 배려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방인들에 대하여 각별한 배려와 호의를 가지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불순종할 경우에는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의존해서 살아가야하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도 함께 주고 계십니다: (예) 너의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점점 높아져서 네 위에 뛰어나고 너는 점점 낮아질 것이며, 그는 네게 꾸일지라도 너는 그에게 뀌지 못하리니 그는 머리가 되고 너는 꼬리가 될 것이라(신 28:43-44).
이스라엘이 축복의 산 ‘그리심’과 저주의 산 ‘에발’에 나누어 서긴 했지만, 이들 모두에게 처음 들려준 율법의 말씀은 축복이었습니다. 이 역시 <신명기>의 제사 지침에 따른 것입니다:
12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13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신 27:12-13)
그러나 한 가지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신명기>에서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축복에 대한 강조가 우선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아이’ 성에서 범죄하여 언약의 저주 하에 있기는 해도 여전히 이스라엘은 약속의 백성이며, 저주의 말씀보다 약속과 축복의 말씀을 먼저 듣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참고, 33-34절). 화자가 하고 싶은 말은 어느 누구든 범죄한 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여 재 헌신의 예배에 참석하게 되면 용서와 약속의 축복을 다시 얻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3. 율법을 낭독하라(8:34)
그리고 세 번째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여호수아’가 율법을 낭독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후에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34절).
이 역시 <신명기>의 전통을 강조하는 것입니다(신 27장). 다만 모든 축복의 말씀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저주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처음으로 들었던 때는 “출애굽” 이후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였습니다(출 19-20). 이 때 백성들은 순종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헌신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하나님은 40년이 지난 후 ‘요단’ 동편 ‘모압’ 땅에서 다시 한 번 ‘모세’를 통해서 같은 율법을 낭독하게 합니다. 이 때 율법의 축복과 저주를 함께 상기시켜 주셨습니다(신 11:26-28). 이제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서 ‘여호수아’를 통해서 유서 깊은 ‘세겜’ 땅에서 언약을 재확인하고 계십니다. 두 지도자 모세와 여호수아의 상대적인 권위에 대한 화자의 입장은 분명해 보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율법의 말씀을 들려주었다면, 여호수아는 모세의 율법을 간접적으로 들려주었습니다.
율법을 낭독하고 있는 장면을 연상해 보면 아주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두 산 사이의 평평한 구릉지대는 전체적으로 마치 원형경기장의 역할을 하여, 모인 사람들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일찍이 가르쳐 준 바에 따라 (신 27:11-13), 북편 ‘에발’ 산에는 ‘르우벤’, ‘갓’, ‘아셀’, ‘스불론’, ‘납달리’의 다섯 지파가, 남쪽의 ‘그리심’ 산에는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요셉’(‘에브라임’과 ‘므낫세’), ‘베냐민’의 일곱 지파가 모여 지켜보는 가운데 ‘여호수아’가 ‘모세’의 율법을 낭독할 때마다 “아멘!”하며 언약의 축복과 저주에 화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온 회중의 한가운데 위치하여 이들의 언약을 마치 증인처럼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4. 결론(8:35)
마지막으로 화자는 ‘여호수아’의 철저한 순종을 강조함으로써 본문의 결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모세의 명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35절).
다시 한 번 화자는 그의 독자들에게 ‘여호수아’야말로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지도자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강조는 또 있습니다. 공동체의 순종이 그것입니다. 화자에게 있어 이상적인 공동체는 이상적인 지도자 한 사람만으로 이루어 지지 않음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본문 중에 “모두”라는 단어가 이를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말씀을 지도자가 단순히 혼자서 낭독한 것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 회원들이 다 듣는 가운데서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동체 일부가 아니라, 모두가 배우고 따라야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교훈과 적용
출애굽을 기억하라
심신이 피곤할 때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태기에 빠진 연인에게 가장 중요한 충고가 있다면 “첫 사랑을 회복하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출애굽을 기억하라”는 충고는 누구에게 필요한 것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충고는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빠져나와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으로 세월을 보내던 이스라엘 제 1세대에게만 필요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역사의 시계를 ‘여호수아’ 시대로부터 한참을 돌려 이스라엘의 “포로기”로 옮겨 봅시다. 국토와 주권을 빼앗긴 채 ‘바벨론’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만나게 됩니다. 지금 이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혼돈과 무질서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 이들은 옛날 조상들이 살던 고토(故土), 그러나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린 그 땅을 바라보면서 심한 좌절과 실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열방 가운데서 가장 왜소하고 별 볼일 없는 무리가 되어 이방인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파기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이런 비참한 상황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세상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러한 방식대로 살아간다고 해서 특별히 잘못 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편하고 넓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현실에 안주해서 말입니다. 잃어버린 그 땅을 다시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은 사치스러운 꿈일 뿐입니다. 과연 이스라엘의 나음이 무엇이며 특권이 무엇이란 말인가?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이들의 역사적 사명은 무엇이며, 누가 그 사명을 완수하게 해 줄 수 있을까요?
이들의 소명은 고토회복(古土回復) 즉 두 번째 “출애굽”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명은 이방인의 땅에서, 이방인과 더불어, 이방인처럼 사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땅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첫 걸음이 두 번째 “출애굽”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소명을 알려주어야 합니까? 혼돈과 어둠 가운데서 누군가는 목소리를 높여, 길과 빛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가야한다고 소리 높여주어야 합니다. 즉 누군가는 ‘여호수아’ 되기를 자임(自任)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과연 그 시대의 ‘여호수아’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봅시다: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딤전 3:1)
그렇습니다. 그 일을 맡고 싶어 안달이 나는 사람, 즉 스스로 지도자가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여호수아’라고 말합니다. 사도의 말인즉 우리 모두는 이 시대의 ‘여호수아’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교회를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탄식하고, 염려하며, 간구하고, 능력을 공급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감동을 주십니다.
제단을 쌓아라
‘여호수아’가 해야 할 첫 번째 사역은 무엇일까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서 가장 으뜸이 되는 행동 즉 “수신”이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이 돌아가야 할 기본은 무엇입니까? “모세의 율법” 즉 <신명기>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는 “끊어진 관계를 회복하라”, 즉 “하나님을 향한 제단을 쌓아라”고 말합니다(30-31절). 인간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들 중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고 으뜸 되는 것이라면, 예배는 이 관계에 대한 외적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올바른 관계에 대한 증표가 되는 셈입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이 시대의 ‘여호수아’가 되는 것과 관련해서 예배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이 구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나(30-31절),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나 동일한 영적예배입니다. 사도는 여기서 자신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린다는 것의 의미를 두 개의 단어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분리”와 “변화”. 이 두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바는 결국 “거룩”입니다. 물론 이 변화는 자신을 주위나 세상과 동일시하는 방향으로의 변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철저한 자기분리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들 “사랑에 빠지는 것”을 고상하고 숭고한 행위로 칭송합니다. 희생적 사랑도 이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한국의 어머니 상도 자식에 대한 희생적 사랑, 즉 자신의 정체성을 자식에게 투영시켜 자신은 없어지는 그런 사랑입니다. 연인 간이나 부부간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상대를 너무 열렬하게 사랑하여 자신의 존재감마저 상실해 버리는 그런 사랑이 숭고한 것입니까? ‘스콧 펙’(S. Peck) 박사님은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사랑을 하되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충고합니다. 사랑에 빠지게 되면 분리가 안 됩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가 온전히 자신에게 충실하고, 자신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것을 나 자신에게 적용시켜 본다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방식과 관련해서 나름대로의 표지판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6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거두지 말라 이것이 잘될는지, 저것이 잘될는지, 혹 둘이 다 잘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9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전 11:6, 9)
아니 반대로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소위 신령한 표지판이란 없다고 말입니다. 자신이 현재 행하고 있는 일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될 대로 되라”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반대로 그러므로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듯 열심히 해야” 하겠습니까? 성(聖) ‘어거스틴’이야말로 <전도서>의 가르침을 어느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마음대로 하라.”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대 헌장과도 같은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주에서 자유와 책임을 지닌 유일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그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영적 예배 즉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는 행위가 아닐까요?
율법을 낭독하라
그러나 우리가 제단을 세우는 일에만 온전히 헌신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수신(修身)의 단계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여타 종교에서처럼 수도원이나, 기도원이나, 교회 안에 틀어박혀 도(道)를 닦는 자들이 아닙니다. 또는 주변 사람들에게 윤리∙도덕적 삶의 규범을 보여주는 자들도 아닙니다. 특히 종교적 관용이나 다원론적 세계관의 수용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위에서 예를 든 것과 같은 명예의 고립이나 관용의 침묵을 지키는 일은 오히려 훨씬 쉽고도 나은 선택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산다면 적어도 쓸데없는 논쟁이나 갈등에 휘말려 들 소지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주변으로부터 인격적인 종교인으로 칭송을 받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여호수아’는 제단을 쌓는 일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새벽 제단을 쌓는 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하고 한 날 예배만 드리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율법을 “기록”하고, “낭독”했습니다(32-34절). 다시 말하자면 그는 교회로 하여금 성경공부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성전”(聖殿)이 아닌 “학교”로 만들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의 취향에 맞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에서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이들이 보고 배우고 따라야 할 그 모든 행동 지침들은 결국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자신의 행실을 능히 알 수 있겠습니까? 이 시대는 자신의 과오를 먼저 시인하는 자를 패배자로 부릅니다. 큰 소리를 치고 떼를 써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선남선녀(善男善女)들이 과연 무엇으로 자신을 변화시키고, 성장하며,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입니다:
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10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9-10)
그는 말합니다. 그 어떠한 철학도, 사상도, 가르침도, 그리고 과학기술도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죄 많은 인간이(그가 하나님의 백성이든 아니든) 가장 우선적으로 행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일보다 더 우선되는 일이 과연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그것은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 그것을 듣고 행하는 사람의 영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느니라”(히 4:12). 우리의 삶은 실은 매일처럼 죽는 일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살았다 하나 실은 죽은 자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인생이 어떻게 소멸과 죽음이라는 자연법칙을 거역하고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요?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채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매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자는 새로운 생명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신 말씀은 육체적 질병이나 정신적 질병마저 치료할 수가 있습니다. 진위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이차대전 당시 독일군 내에서 신생아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약 6개월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먹을 것만을 주입한 결과 이들 신생아들은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다 죽었다고 합니다. 역시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자라나는 것 같습니다. 비록 제대로 된 의사전달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머니 품안에서 어머니와의 계속적인 대화를 통해서 어린아이는 생명의 전수를 받는 모양입니다. 이처럼 대화를 통해서 생명이 전달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비과학적인 주장 같지만 생명현상은 정말 신비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한 백부장과 예수님의 대화에서도, 말을 통해서 생명이 전달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환자를 직접 만나지 않고 멀리서 단순히 말을 통해서 치료하고 있음을 봅니다. 외국생활에서 오는 가장 큰 불편과 고통은 무엇보다도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된다는 데 있습니다. 이 경우 역시 생명의 전수가 제대로 안 되는데서 오는 일종의 스트레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창조적 능력을 공급받아 삶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역역을 확대하려 합니다. 천지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 진 것이라면, 그 말씀 속에는 오묘하고도 신비한 창조적 지혜가 담겨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과 지혜와 기질이 유전자 속에 들어 있듯이 말입니다.
필자의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보드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창조적 능력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필자는 여러 학문 분야에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는데, 그 모든 동기는 개인적인 성경 공부와 독서를 통해서 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의 영역을 개척하는데 필요한 힘과 용기도 성경을 통해서 였습니다. ‘나자로’는 어떻습니까? 죽은 지 사흘이나 되어 한낱 유기물질로 변해가던 그에게 예수님께서 “나자로야, 일어나라!”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흩어져 제 멋대로 분해되고 와해되어가던 ‘나자로’를 이루던 원자와 분자들이 다시 모여, 반응하여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이 일은 ‘나자로’의 의지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의 창조적 능력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말씀의 창조적 능력은 육체적 현상에만 국한될 수는 없습니다. 정신인격 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영역에서 일하려고 안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는 넓은 길에 들어가려 합니다. 자신의 은사와 취미와 재능이 무엇인지 제대로 연구검토해 보지도 않고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영역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듯합니다. 좁은 오솔길 같아서 잘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과 귀 기울임은 창조적 삶을 위한 훌륭한 통찰력과 용기를 갖게 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시간과 재능과 그리고 재산을 투자하고 두드려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어린이 교회 학교가 아닌 성인 교회 학교가 있습니까? 그리고 모두가 학교에 등록하여 말씀을 배우고, 익히며, 따르고 있습니까? 모두들 가르치거나 아니면 배우고 있습니까? 배우는 자들은 언젠가는 가르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소명을 불태우고 있습니까?
토의와 연습
1. 본문은 그 장르에 있어 이야기라기보다는 <신명기> 율법에 대한 서술 내지는 해설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후 문맥과 비교했을 때 지리적으로나, 연대기적으로나, 이야기의 문학적인 일관성에 있어서나, 현재의 문맥에 있기에는 어색한 곳이 많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 논의해 봅시다.
2. 본문이 굳이 이곳에 있어야 한다면, 그동안의 내용에 대한 신학적인 요약의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핵심 주제는 무엇입니까?
3. 나의 삶 중에서 말씀의 창조적 능력이 드러났던 적이 있었습니까? 있었다면 함께 나누어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