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5:18-25약 10분 분량
‘야곱’이 자신의 나이를 묻는 ‘이집트’의 ‘바로’ 왕 앞에서, 130 년의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회고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창 47:8). 하나님의 교회가 살아온 지난 이천 년 역시 그러했음을 아무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는 그야말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의 험악한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내우(內憂), 즉 안으로부터의 근심이라 함은 온갖 형태의 이단과 분열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외환(外患), 즉 밖으로부터 오는 근심은 온갖 형태의 억압과 배척과 조롱과 멸시, 그리고 무관심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들 모두에 대해서 세세하게 알려고 하지는 않습니다만(이에 대해서는 교회학교의 <기독교 역사> 시간에 보다 상세하게 배울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자신의 교회가 그와 같은 “험악한 세월”을 살아갈 것임을 예고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께서는 마지막 다락방 강론에서 여러 차례 “평안”을 강조하셨고, 제자들로 하여금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격려하시기도 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그분의 신부(新婦)가 처음부터 평안과는 거리가 먼 생애를 살아가야 할 운명을 지니고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신부가 과연 누구 때문에 이와 같은 고초를 겪어야 했을까? 그것은 순전히 신랑 때문이었습니다. 신랑을 잘못 만났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 11:5).
이 말씀은 역설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때문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일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세상의 끝 날까지 계속 진행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분의 신부인 교회도 예외가 될 수 없었음을 교회사를 통해서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족이 단순히 실족으로 끝나지 않고, 분열과 혼란과 싸움과 전쟁을 불러올 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이 자기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4-36).
이 모두 그리스도 때문에 생기게 될 일입니다. 그는 이 땅에 화평의 전도사로 온 것이 아니라, 실로 분열과 갈등의 전도사로 온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신부는 차라리 신랑 없이 혼자 사는 것이 더 편안한 일생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의 신부가 아니라, 그냥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즉 “그리스도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로 간판을 바꾸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그리스도 없는 교회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냥 하나님으로 남아계셨더라면, 즉 예수님으로 성육신 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은 하나님을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만들어진 신. 사실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신(神), 자신이 만든 하나님을 믿는 일에 있어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것처럼 보입니다. 다신론(多神論)이 지배하던 세상이었으니, 오죽 했으면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신도 있었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신봉(信奉)하고 있는 신의 이름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싸우고 갈등했다는 기록은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설령 내가 믿고 있는 신 때문에 사회적으로 불리한 상황이 발생하겠다 싶으면, 다른 신으로 갈아타면 그만일 테니 크게 걱정할 일도 아니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그리스도가 없이 오히려 더 평화로웠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점은 유일신(唯一神)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즉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수천 년 동안 자신들의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일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자기들 사이에서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일에 있어 굳이 예수님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야훼’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일 필요가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평지풍파를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잔잔하던 물에 돌을 던져 흙탕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러할진대 이방인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요. ‘바울’ 사도는 이들 두 무리의 반응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하나님의 교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이방인들은 그를 조롱하였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지난 이천년 내내 예수님은 늘 신학이나 종교적 논쟁의 한 가운데에 서 계셨습니다. 이 모두 하나님이 성육신하심으로써 자초한 일입니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으니. 과연 하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할 생각이 있기나 했던 것일까? 설령 있었다고 해도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든 방식을 선택하신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방식 말입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넘어진 채로 잠잠히 있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사람들은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최소한 그 돌부리를 다시 한 번 더 걷어차야 직성이 풀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나 세상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렇게 해왔다는 생각입니다. 그분은 미움을 받았고, 배척을 받았으며, 조롱과 멸시도 함께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왜 세상은 그분을 이토록 미워하는 것일까? 그냥 모른 채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것일까? 그리스도가 내편이 아닌 한에 있어 그럴 수는 없습니다(19절). 이 세상에는 중립지대가 없는 듯합니다.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둘 중 하나뿐인 듯이 보입니다. 나에게 동조하는가 여부에 따라 사랑하거나 미워합니다. 세상은 소위 진영논리(陣營論理)에 갇혀있다 하겠습니다. 작금(昨今)의 대한민국처럼 말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가 자기편이 아니기 때문에 적(敵)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잘 모르겠으면 만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분명하게 제시해 보면 됩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대번에 웃음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스스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종교나 사상에 대해서 관용적이며 중립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조차도 태도가 즉각적으로 돌변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가 배운 자이든 못 배운 자이든, 부유한 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기업 총수든 말단 직원이든, 정치 권력자이든 일개 상인이든 상관없습니다. 그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예외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사람의 본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역사를 통해서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그리스도, 즉 복음(福音)이 무슨 일을 하기에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는 것일까? 왜 “좋은 소식”이 그야말로 좋은 소식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왜 듣는 이의 심사(心思)를 뒤틀어놓을까? “좋은 소식” 때문에 자신의 치부(恥部)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누가 이를 좋아하겠습니까! 적어도 문명국가라면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드러내고 헐뜯는 일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근거 없는 글이나, 사실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글을 올렸다간 명예훼손죄로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의 부끄러운 부분을 들추어내는 일에 있어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당당하고 공개적이고 직설적입니다. 에둘러 말하지도 않았고, 은유적으로 표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겸손하고 온유하다고 주장하나(참고. 마 11:29),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분은 오히려 비타협적이었고, 독단적이었고, 거칠었습니다. 그분은 진정 스스로를 완벽하다 믿고 있었던 것일까요? 누가 이런 자를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할 수만 있다면 당(黨)을 지어 이런 자를 몰아내고 핍박합니다.
그가 무엇을 들추어내었기에 사람들이 그토록 그를 미워하는 것일까? 그것은 “죄”였습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 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22절). 그 죄(aJmartiva, 하마르티아)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원래 이 단어가 뜻하는 바는, 화살이 과녁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 함이요”(16:9).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이 드러낸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니라, 세상이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나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나쁜 소식”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물론 하나님의 교회, 즉 이스라엘조차 졸지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無知)한 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를 하고 돌아다녔으니 위선자(僞善者)의 낙인도 함께 받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성경> 해석을 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도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만든 신, 즉 우상을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 기가 찰 노릇이지요.
설상가상 예수님은 말로써 뿐만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도 세상의 분노와 미움을 샀습니다: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그들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으려니와 그들이 나와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24절). 여기서 “아무도 못한 일”이란 표적 즉 기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행하는 기적 하나 하나마다 참 하나님이 아니라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에, 세상은 상대적으로 무기력(無氣力)하고 무능력(無能力)한 자신과 자신의 신을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은 환호했을까요? 우산(雨傘)을 처음 발명한 사람에게 세상은 상을 주었을까? 삼성이 혁신 제품을 내놓을 때마다, ‘LG’나 ‘애플’이 쌍수(雙手)를 들어 환영해줄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지요. 세상은 그리스도의 “표적”을 대할 때마다, 시기하고 질투하며 그를 잡아 죽일 음모(陰謀)롤 꾸미느라 바빴습니다. 나의 무기력과 무능력을 드러낼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의 무지와, 무능력과, 위선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 “나쁜 소식”, 즉 결국 “그리스도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그리스도가 죽도록 미운 것입니다. 달리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25절).
세상에서 택하였으니.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나는 얼마나 엄청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까! ‘유대’인은 그들의 <잠언>에서 “야훼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합니다(잠 1:7). 하지만 이 사람들이 자랑하는 지식은 반쪽짜리 지식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지식을 누리고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 존재입니까! 세상의 거침돌이 되었던 그가 나의 모퉁이 돌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감사라고 자랑해야 할 일입니다!
세상이 어찌 이런 나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내가 보기에는 도리어 초라하고 한심하게 보일 뿐입니다. 대단하게 보이나 실은 빈 껍질뿐입니다. 그야말로 외화내빈(外華內貧)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안경을 쓰고 있는 나에게 세상이 그렇게 보인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나에게 세상을 판단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과, 권세가 주어졌음을 의미합니다(참고.히 9:7). 그러니 세상이 나를 미워하고 핍박합니다. 이는 나 또한 세상에 대해서 거침돌이 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것을 누리며 즐기고 있습니까? 즉 “명예의 고립”을 즐겨 선택하고 있는가 말입니다. 모두들 넓은 길을 가고자 할 때, 나는 좁은 길을 선택합니까? 그렇다면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9절). 나는 이 미움마저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의 신랑이자 친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말입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찬송가 430장)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