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또 다른 보혜사(3)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5:26-27약 12분 분량
성령님은 그 분(He)이지 그것(It)이 아닙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14:17). 즉 인격적 존재이지, 비인격적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분은 불도 아니고, 능력도 아니며, 세미한 음성도 아니고, 내적인 확신도 아니며, 무슨 환상이나 꿈도 아니며, 희한한 경험이나 신비한 지식이나 깨달음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당연히 흥정을 통해서 사거나 팔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사도들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 마술사 ‘시몬’이 돈을 주고 성령님을 사려했다가 ‘베드로’로부터 혼쭐이 납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함께 망할지어다”(행 8:20).
성령께서 인격적 존재이니 당연히 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기억나게 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4:26). 한 마디로 그분은 교회학교 선생님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교육의 대상과, 교육의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누구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는 점 말입니다. 세상이 아닌 교회를 대상으로, 우주의 모든 지식이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그분의 사역입니다. 나로 하여금 <성경>을 이해하고, 기억나게 하는 것이지, <성경>에 없는 새로운 지식을 추가로 가르치거나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상 두 가지 사실이 그동안의 다락방 강론을 통해서 성령님에 관하여 우리가 배워 알게 된 것들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다락방 강론에서 작정하고 성령님에 관해서 주제 강의를 펼치신 것은 아닙니다만(소위 말하는 성령 부흥회), 그분에 관하여 다섯 번에 걸쳐 여기저기서 성령님의 사역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떠나시고 난 뒤, 교회시대의 주역은 성령님이 될 것이라는 암시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부이자 친구인 교회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므로(14:18), 성령께서 교회와 함께 그리고 교회 안에서 살아가신다는 사실은 약속에 대한 보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나를 증언할 것이요. 이제 이곳에서 세 번째로 성령님에 관한 언급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 번째 언급 역시 문맥의 흐름상 다소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이번에는 세상과 교회의 피할 수 없는 운명에 관한 말씀이 있은 직후에 나온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가 자기에게 속하지 아니 하였으므로 배척하고, 핍박하고, 미워할 것입니다. 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때문입니다. 그 이름만 아니더라도 교회는 핍박받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와 관계된 것이면 무엇이든지 체질적으로 미워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다르게 행동할 수가 없게 되어있습니다. 이와 같은 행동은 마치 기계가 처음 설계된 되로 작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본능이고 운명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도 이 운명에서 예외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바,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하는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25절).
오호 통재라! 이스라엘 역시 세상과 한 편이 되어 그리스도의 신부를 핍박하고 억압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역시 세상에 속해 있다는 선언이자 판결인 것이지요.
바로 이 대목에서 주님은 갑자기 성령님을 언급하십니다. 무슨 의도일까? 박해와 고난 앞에 선 교회, 주님이 떠나고 없는 교회가 과연 이 박해를 견딜 수 있을까? 덩그러니 이름만 남은 교회가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까? 고난은 의심을 부르고, 의심은 배교(背敎)를 낳을 것입니다. 감옥에 갇혔던 침례 ‘요한’이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 우리는 압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는 장면도 등장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 사도들이 혼비백산(魂飛魄散) 뿔뿔이 흩어지는 모습 또한 이제 곧 보게 될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 교회가 이렇게 나약한 것입니까!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했던 그 모든 기억, 그리스도의 그 모든 말씀이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될 수 있다는 말일까!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자연현상일 뿐입니다. 꽃은 지고 풀이 마르듯,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 그리고 여기에다 어려움이 닥치면, 아름답던 기억도, 사랑하던 사람도, 감동적인 설교도, 경천동지(驚天動地)의 기적도 다 연기처럼 사라질 뿐입니다. 내 속에 그것들이 살아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늘 현재 지금 나의 일부로 호흡하고,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지금 내 속에 있는 것만이 나의 일부로 살아있을 뿐입니다. 기억이 나를 움직이지 못하며, 그 때 그 사람이 나를 행동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그 모든 책들이 나를 행동하게 하지 못합니다.
<성경>이라 해서 다를 바 없습니다. <성경> 역시 이 세상의 모든 책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저 세상의 그 모든 책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특별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해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사 이해한다 해도 행동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성경>을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the living word of God)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나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인격적인 성령님께서 내 속에서 살아, 끊임없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하는 성령님의 “내적 증거”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이해와 확신과 헌신. 그분이 우리 속에서 증언하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백내장 수술을 받아 본 사람이라면 이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본인의 아내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수술 전에 그토록 두려워 떨던 사람이 수술 후에 완전히 딴 사람이 된 듯합니다. 흐릿하고 윤곽도 제대로 잡히지 않던 물체들이 또렷하고 선명하게 보이게 되었으니 그 환희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만나는 친구에게 마다 이 놀라운 체험을 자랑스럽게 설명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사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세상이 원래 그렇게 칙칙하고 흐릿한 줄로만 알고 체념하고 살아왔는데, 그게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이 장사꾼들로 난장판이 된 것을 보고, 예수님이 채찍을 만들어 난동(?)을 부린 적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훗날 그분의 행동을 이렇게 회고(回顧)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2:17). 그리고 그 성전을 헐면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제자 중의 한 사람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2:21-22).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고 사라지기 마련인데, 이들 제자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기억의 법칙을 거슬러 살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철들자 환갑”이라는 우리네 농담처럼, 나이가 들어가면서 성숙하고 철이 든 것이었을까? 당시에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던 일들이,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이해가 된다고 하니 말입니다. 당시에는 희미하던 것들이 이제는 또렷하고 확실하게 보인다고 하니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백내장 수술이라도 받은 것일까? 우리는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보혜사의 증언 덕분이었습니다: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26절). 성령께서는 창세 이전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있었으므로, 이분들에 대해서 증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아버지와 아들과 인격적 대화를 나누어왔고, 두 분의 계획과 의도를 알고 있으며, 두 분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 증인으로서의 지식과 자격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즉 그분은 남에게 주워들은 것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본 것을 증언하시는 것입니다.
보혜사가 증언할 내용은 그리스도입니다(참고. 26절). 조금 풀어 쓰자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즉 복음을 말합니다. 보혜사의 증언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다니던 <성경> 즉 <구약>에 대해서 새로운 차원의 “이해”(comprehension)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성경>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백내장 수술로 없던 것이 새롭게 나타나 보이는 것도 아니고, 보이지 않던 것이 새롭게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흐릿하게 보이던 것을 또렷하게 볼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보혜사의 증언 역시 그러합니다. 그분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자기가 본 것을 증언할 뿐입니다. 성령님은 제자들이 가지고 다니던 <성경>에 단지 새로운 차원의 이해를 더하여주었던 것이지, 없는 내용을 더하여 준 것은 아닙니다: “아, 이 구절이 그런 뜻이었구나!”
그리고 “이해”는 단순히 이해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확신”(conviction)으로 나아갑니다. 당연히 <성경>에 대한 확신입니다. 지식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아간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누구나 <성경>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이 책이 과연 거짓 없는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사실을 담고 있구나.” 이런 고백은 무슨 연구나, 노력이나, 묵상이나, 기도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바람에 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그와 같다고 일찍이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강의한 바 있습니다(요. 3:8).
다시 한 번 말합시다. <성경>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이해한 사실을 믿기 위해서,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밤새 씨름한 것처럼(창 32:24), 몸부림칠 필요가 없습니다. 입산수도하여 열심히 기도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치열한 몸싸움은 <성경>을 이해하기 까지 필요한 것이지, 일단 이해가 되었다면 믿음과 확신은 그냥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믿음 즉 확신은 보혜사의 증언, 즉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지 나로부터 나오는 그 무엇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지, 믿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겠습니다.
그 믿음의 창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보이고, 나 자신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가?” 거룩한 하나님이 보이며, 벌레보다 못한 내 모습이 보입니다. ‘모세’도, ‘예레미야’도, ‘이사야’도, ‘베드로’도, ‘도마’도 다 겪었던 체험들입니다. 이들 모두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 두려워 떨었고, 엎드려 회개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무슨 재주로 이처럼 신비하고도, 위대한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세상은 이런 사람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혜사의 증언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보혜사 즉 “진리의 영”을 받아들인 사람은 비록 <성경>의 모든 내용을 충분하고도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아무 의심 없이 <성경>을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보혜사께서 그렇다고 증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보혜사가 그렇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같은 주장과 확신은 참으로 기막힌 순환논리(循環論理)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만 어쩔 수 없습니다. 사실이 그런 것이니까요.
믿음과 확신은 화석(化石)처럼 죽은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서 살아서 파도처럼 요동칩니다. 내 속에 보혜사가 살아 계시다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환상을 보게 하고, 꿈을 꾸게 만듭니다. 그래서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지 않도록 해줍니다. 지금보다 더 풍성한 미래를 갈구하도록 만듭니다. 지식에 목마르게 합니다. 바다에서 표류하는 자가 계속해서 바닷물을 마셔대는 것처럼, 더 깊고 더 넓은 것들을 알고 싶어 안달 나게 합니다. 어렵고, 딱딱하고, 지루하기만 하던 <성경>을 흥미진진하게 만들어놓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을 통해서 우주와 역사, 윤리와 도덕, 학문과 예술의 의미와 목적과 기능에 대해서 새로운 차원의 이해를 하기 시작합니다. 내 속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 보혜사의 증언이 가져다 준 선물이자 은혜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해와 확신은 머리와 가슴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온 혈관을 타고 손과 발끝까지 확산되어갑니다. 손과 발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해하고 확신하는 바가 마침내 온 몸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지식과 믿음은 이제 하나의 생물이 되어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헌신(獻身)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지식과 믿음과 헌신은 결국 기독교 신앙의 삼위일체라 하겠습니다.
너희도 증언하느니라. 무슨 헌신을 말하는 것인가?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여기 ‘예루살렘’ 예배에 참석하였다가 깊은 감명을 받고 다시 근무지 ‘에디오피아’로 돌아가고 있는 한 내시(內侍)가 있습니다(행 8:27). 예배의 감동을 이어가기 위했음인지, 그는 덜커덩거리는 수레 위에 앉아 <성경>을 펼쳐듭니다. 그가 읽은 본문은 그 유명한 <이사야>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53:7-8).
하지만 그는 이 본문을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답답하고, 궁금합니다: “여기서 그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문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며, 찾는 자는 찾을 것이라고 주님은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의 자연법칙과도 같은 것이지요. 과연 성령님은 ‘빌립’을 그에게 보냅니다(행 8:29). ‘빌립’을 맞이하는 내시의 태도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이 장면에서 더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쪽은 성령님이나 ‘빌립’이 아니라 내시인 것처럼 보입니다(참고. 행 9:31, 34).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했으니 이 같은 태도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할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 장면이 더욱 인상적입니다. ‘빌립’의 증거를 통해서 내시는 마침내 본문을 이해했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침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행 8:36). 이것이 헌신입니다! 그는 듣고, 이해한 바를 믿었으며, 믿는 바를 그대로 즉각적으로 행동에 옮겼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해는 되지만 믿음이 안 가. 믿어지기는 하지만 글쎄 그대로 따라 하기는 좀... 다음에 하지 뭐.” 이와 같은 태도는 실은 자기기만이고, 비겁함의 극치일 뿐입니다.
보혜사께서 <이사야> 즉 <성경>을 통해서 ‘빌립’에게 그리스도를 증언했으므로, ‘빌립’ 또한 내시에게 <이사야> 즉 <성경>을 통해서 복음 즉 그리스도를 증언했습니다. 이제 내시의 차례입니다. 내시는 그 후 어떻게 살았을까요?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6).
“되어라”가 아닙니다. “될 것이다”입니다. 성령께서 내 속에 계신다면 말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