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빌라도의 법정(2):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9:4약 10분 분량
빌라도를 신문함
(요 18:33-38a)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해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마치 예수님의 죽음이 전적으로 ‘본디오 빌라도’의 책임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듯합니다. ‘가롯 유다’도, ‘유대’ 공회도, 로마 병정도 아닙니다. 오직 ‘본디오 빌라도’가 그 모든 책임을 다 뒤집어써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도대체 그가 무슨 악독한 짓을 했기에 그에게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까?
총독 빌라도. 사실 일반 역사가들이 ‘빌라도’에 대해서 평가한 기록을 보면 과연 그는 잔혹한 냉혈한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시하고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약학자 ‘바클레이’(W. Barclay)는 ‘빌라도’를 악명 높게 만든 세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그가 ‘예루살렘’을 처음 방문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유대’ 지방의 행정 수도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가이사르’였습니다만, 그 지방 총독은 ‘예루살렘’을 수시로 방문했습니다. 그 때마다 일단의 군대가 그를 따랐는데, 모든 전임 총독들은 ‘유대’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군기(軍旗) 끝 부분에 달린 황제의 흉상을 사전에 제거하고 입성했다고 합니다. 신(神)으로 자처하는 황제의 흉상을 ‘유대’인들이 용납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를 무시했습니다. 그들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 흉상을 제거해 달라는 ‘유대’인들의 요청도 거절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이를 요구하자 그는 이들을 원형 경기장에 몰아넣고 모두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만, ‘유대’인들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 일화는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은 늘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새 수로(水路)를 건설하고 싶어 했는데, 문제는 자금이었습니다. 그는 이 자금을 성전에 있는 소위 ‘코르반’이라 부르는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헌금으로 충당했습니다. 모두들 수로를 간절히 원하기는 했습니다만, 하나님에게 드려진 것을 결코 다른 용도로 쓸 수 없다는 것이 ‘유대’의 법, 이에 그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총독은 이를 제압하기 위하여 평복으로 위장한 사병들을 폭도들 사이로 잠입시켜 학살을 감행했습니다. 이 소문은 황제에게까지 알려져 총독 자신의 지위까지 위태로울 지경 이었다 합니다.
세 번째 일화는 더욱 고약합니다. 총독은 ‘예루살렘’에 머물 때에는 ‘헤롯’의 옛 궁전에서 지냈다고 하는데, 이곳에 당시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이 새겨진 일련의 보호벽들을 설치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을 자극했고 분노하게 했습니다. 거룩한 도시에 신으로 자처하는 자의 이름을 새겨놓다니요! 이번에는 그와 가까운 사람들조차 그 설치물을 제거하도록 충고했으나 그는 거절했고, 결국 황제가 직접 그것들을 제거하라고 지시할 정도였습니다.
여기서 ‘빌라도’의 최후가 어떠했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이 세 번째 일화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주후 35년의 일로, 그 해에 ‘사마리아’에 작은 규모의 소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이들을 잔인하게 진압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그동안 ‘로마’의 충성스러운 시민으로 인정받아왔던 터, 인근 ‘시리아’로부터 황제의 사절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개입할 정도였습니다. 그에 관한 평판이 좋지 않자 결국 ‘티베리우스’ 황제는 그를 ‘로마’로 소환했습니다만, 소환 도중 황제가 사망하는 바람에 그는 처벌은 면하게 됩니다. 그 이후 그의 행방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이것이 세속 역사가들이 전해주는 ‘빌라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요한’ 화자의 기록에 따르면, 그를 향한 평가는 일견 과장되었거나 왜곡되어있다는 생각입니다. 재판관으로서 그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공정하며, 관대하기 까지 한 모습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그에게 예수님에 관하여 어떤 정보를 사전에 제공해 주었든 개의치 않고 재판을 새롭게 진행하겠다는 듯한 태도입니다: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29절). 마치 예수님에 관하여 사전에 들은 바가 전혀 없다는 말로 들립니다. 예수님을 그에게 넘긴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상당히 당혹스러웠을 질문임에 틀림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예수님을 처벌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그분을 무죄 방면해 주기 위하여 안간 힘을 쓰고 있는 모습입니다. 재판을 진행할수록 그분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세 번에 걸쳐서 말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38절);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19:4);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19:6).
그러나 ‘유대’인들의 태도는 완강하기만 합니다. ‘빌라도’의 판결에 동의할 수가 없다고 우깁니다. 그를 풀어주면 황제에게 반역을 도모하는 일이 될 것이라며 그를 협박까지 합니다(19:12). 할 수 없이 ‘빌라도’는 일련의 타협안을 내놓습니다. 그가 먼저 시도한 것은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니 ‘헤롯’의 관할에 속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눅 23:6-12). 하지만 웬 일인지 ‘헤롯’은 예수님을 다시 ‘빌라도’에게 되돌려 보냅니다.
‘빌라도’의 두 번째 시도는 ‘바라바’와 예수님을 맞교환 하는 것이었습니다(마 27:15-26; 막 15:6-15; 요 18:39-40). ‘유대’인들이 설마 예수님 대신에 악명 높은 ‘바라바’를 선택하겠느냐는 희망이 깔려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무리의 선택은 그의 기대와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대신에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요구했습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빌라도’는 예수님을 채찍질 하여 그들에게 보여줍니다(19:1-5). 혹시나 피 흘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측은한 생각으로 그를 풀어주라고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빗나갔습니다.
예수님과 빌라도. ‘빌라도’는 왜 이처럼 한사코 예수님을 놓아주기를 원했던 것일까? 그는 정말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었을까? 역사가들이 그를 지나치게 악의적으로 평가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대체적으로 정학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의 진정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아내가 전날 밤에 꾼 꿈 때문이 아니었을까? 재판 당일 아침 그의 아내는 그에게 사람을 통해서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아무 상관도 하지 말라는 기별을 보냅니다(마 27:19). 무슨 꿈이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악몽 비슷한 것이었나 봅니다. 아무리 황당무계한 꿈이라도 듣지 않았다면 몰라도 듣고서야 모른 채 할 수 없었을 터, ‘빌라도’는 처음부터 이 재판을 맡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을 데려다 ‘유대’법에 따라 재판하라고 했습니다(요 18:31).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 싫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결국에는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예수께서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그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바로 여기에 예수님과 관련한 중요한 한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누구든 예수님에 관한 한, 중립지대가 있을 수 없다는 교훈이 그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나는 그와는 상관없노라”라고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결국 그의 편에 서게 되든지, 아니면 그의 반대편에 서게 되든 지 중의 하나입니다.
‘빌라도’의 선택과 관련해서 더 중요한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빌라도’는 왜 그리스도의 편에 설 수 없었을까? 한 마디로 답하자면, 그것은 그의 능력 밖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빌라도’는 자신의 능력이나 권한에 대해서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참고. 19:10). 예수님의 제자 ‘도마’도 같은 착각 속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 하겠노라”(20:25). “믿음”이 나로부터 나오는 그 무엇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이성”(理性; reason)적 탐구나 노력만으로 결코 이를 수 없는 지식이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지식은 오직 그분의 “계시”(啓示; revelation)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의 첫 대면을 통해서도 이 점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견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신문을 받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정 반대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중입니다. 즉 ‘빌라도’가 예수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애에 치명적으로 중요한 계시를 듣고 있는 중입니다.
계시와 초청. 그 계시란 다름 아닌 “내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나라에 대해서 두 번에 걸쳐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 번은 부정적인 진술을 통해서, 그리고 또 한 번은 긍정적인 진술을 통해서입니다. 부정적인 진술이라 함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로마’ 제국과 같은 세상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창과 칼이 지배하는 속성 말입니다. 긍정적인 진술이라 함은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진리가 통치한다는 말이겠지요.
진리란 무엇입니까? 지금 ‘빌라도’도 같은 질문을 하고 있기는 합니다(38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리를 가장 포괄적으로 정의(定義)한 바 있습니다: “내가 곧 진리라”(참고. 14:6). 이 정의에 따르면 진리란 무슨 사상이나 이념이나 교훈이 아니라, 인격 그 자체를 말합니다. 조금 더 풀어 설명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함으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빌라도’가 이 계시를 제대로 체득(體得)했을까요? 그가 기껏 알게 된 지식은 “하나님의 나라”가 ‘로마’ 제국에 별 위해(危害)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가 무죄하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계시의 목적이었을까? 계시는 단순히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초청(招請)을 동반합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단순히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얻는 것에 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는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초청에 아무런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의 진단은 이렇습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37절하).
진리에 속한 자가 보이는 반응은 과연 어떤 것일까? ‘도마’가 보이고 있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가 그렇게도 확인하고 싶어 했던 상처 난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도마’가 보였던 반응은 “아, 과연 주님께서 부활하셨구나. 그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구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0:28). ‘도마’의 이 고백은 연구나 탐색을 통해서 내린 결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의 계시 덕분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빌라도’와 ‘도마’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그렇습니다. ‘빌라도’는 믿음의 선물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그의 비극이 있다 하겠습니다. 일생일대의 중요한 순간을 그냥 지나쳐 버린 것입니다. 굳이 그의 편에서 그 이유를 찾자면, 그는 진리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빌라도’의 재판 전 과정을 대하면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계시가 철저하게 ‘빌라도’ 한 개인에게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 사람 간의 대화가 항상 ‘빌라도’의 관청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유대’인들은 이 자리에서 철저하게 배제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공관복음>의 기록과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요한’ 화자는 그 동안 일관되게 강조해왔던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계시와 초청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빌라도’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재판은 단순히 재판이 아니라, 복음의 계시이자 선포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모두를 향한 복음 말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