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빌라도의 법정(4):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9:1-6약 10분 분량
보라, 이 사람을!
(19:1-6)
예수님께서 오직 말씀으로 ‘갈릴리’ 바다의 풍랑을 잠잠하게 하셨을 때, 사람들은 놀라 서로를 향해서 이렇게 묻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하는가?” 과연 이 사람은 누구이며,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비단 당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후 모든 세대를 향해서 던지는 치명적으로 중요한 질문일 것입니다.
바로 이 동일한 사람이 지금 ‘빌라도’ 앞에 서 있습니다.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홍포를 걸치고, 온 몸은 채찍 자국으로 피투성이가 된 채로 말입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그를 이런 모습으로 ‘유대’ 군중들 앞에 내세워 같은 질문을 하려 합니다: “보라, 이 사람을!”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해 보라는 도전과 호소를 하려는 것입니다. 그가 이 사람을 먼저 만나보았을 때 어떤 사람이라는 판단이 섰기에 군중들로 하여금 이 사람을 보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일까?
가시관과 홍포.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이 사람은 지금 “유대의 왕”으로 ‘빌라도’ 앞에 서있습니다. ‘유대’ 공회도 그에게 “유대의 왕”이라는 혐의를 씌워 ‘빌라도’에게 데리고 온 바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사람은 왕으로 부르기에는 너무나 희극적인 형색을 하고 있습니다. 가시나무 관을 쓰고 있고, 홍포를 걸치고 있으니 말입니다. 마치 전쟁에 져서 적국의 포로로 끌려와 있는 모양새입니다. 로마 군병들이 그를 이렇게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물론 ‘빌라도’의 묵인 내지는 승인 하에 그렇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의 왕을 이런 식으로 대할 수는 없습니다. 군인은 군인을 알아보는 법이거늘 ‘빌라도’나 이들 병정들에게는 그만한 안목은 없었나 봅니다. 현대전에서도 전쟁에서 패한 지휘관에게는 그 계급에 상응하는 대우를 해줍니다. 포로라고 해서 데려다 조롱하고 멸시하며 고문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국가 간에 정해놓은 규약입니다. 그러나 이들 군인들은 “유대의 왕”에게 함부로 대했습니다. 조롱하고, 멸시했으며, 채찍으로 때리고 고문했습니다. ‘빌라도’는 왜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다루었던 것일까?
그로부터 무슨 귀중한 정보를 얻어내려 했던 것도 아니고, 그가 특별히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닙니다. 그 스스로도 몇 번이나 실토하였듯이 그로부터 아무런 잘못을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빌라도’만 그 사실을 알아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어떤 식으로든 예수님을 알게 사람들이 한 결 같이 고백하는 바는 그분이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을 배반했던 제자 ‘가롯 유다’조차도 나중에 이렇게 실토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4상).
‘빌라도’의 아내는 어떻습니까? 남편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렇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마 27:19). ‘헤롯’도 마찬가지 입장이었다고 ‘빌라도’가 전해주고 있습니다: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눅 23:15).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과 함께 처형당했던 도둑조차도 죽어가면서 이분의 무죄라는 증거를 후세에 남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눅 23:41).
증인은 또 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이 그 사람입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눅 23:47). 마지막으로 그토록 예수를 처형하라고 외쳐대던 군중들조차도 그날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벌어진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고 두려움에 떨며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 27:54).
바로 이것이야말로 “나사렛 예수”를 가까이서 만나본 사람이라면, 내리게 되는 한 결 같은 증언이고 고백일 것입니다. ‘빌라도’의 고백도 그것입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18:38). 그가 비록 진리에 관심이 없었던 하더라도, 최소한 이 초라한 “유대의 왕”이 로마에 결코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빌라도’에게 이 왕은 혁명가도 정복자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라바’야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혁명분자였습니다. 당연히 그를 처형했어야 마땅합니다.
채찍 대 십자가. 사실이 그러함에도 ‘바라바’를 처형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를 데려다 채찍질을 하고서는 그를 군중들 앞에 내세웁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
우리는 그의 의도를 모르지 않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예수를 풀어놓아주려는 ‘빌라도’의 두 번째 묘안입니다.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사코 예수님을 처벌하고 싶어 하는 ‘유대’인들의 요구도 들어주어야겠기에 새로운 묘수를 짜낸 것입니다. 그가 택한 방식은 처형보다는 훨씬 가벼운 형벌, 즉 <누가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바대로 예수님을 몇 대 때려 훈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눅 23:16). 다시 말하자면 ‘빌라도’는 채찍질로 십자가 처형을 대신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의 행색(行色)은 다시 한 번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이번에는 군중들의 동정심을 기대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금 모습은 충분히 그럴 만 하다는 생각입니다. 가시 면류관을 쓰고, 왕의 홍포를 입었으나 군병들에게 조롱당하고 얻어맞아 머리는 풀어지고 얼굴과 온 몸은 찢기고 선혈이 낭자한 모습은 사람들의 동정을 사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평소 예수님을 익히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지금 그분의 모습은 참으로 충격적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아주 필사적입니다. 그는 지금 흥분한 군중을 향해서 절규하듯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 이래도 이 사람을 잡아 죽여야겠느냐는 것이지요. 지금의 상황은 두 등장인물의 역할이 완전히 반전된 모습입니다. 즉 군중이 비정하고 무지한 재판관으로, ‘빌라도’가 사려 깊고 합리적인 변호인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은 성난 군중 앞에 두려워 떨고 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만. 성난 폭도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재판관, 그리고 그 사이에 속수무책 서 있는 하나님의 아들. 그의 운명이 하나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들 두 당사자 간의 타협에 의해서 판결날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 화자는 바로 직전의 장면에서 로마 병정들에 의하여 조롱받고 멸시받는 하나님의 아들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만, 이 장면에서는 그 아들이 법의 보호는커녕 증오와 폭력 앞에 무기력하게 죽음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자의 일관된 의도인 즉은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 연약하고 불쌍하고 무기력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빌라도’의 계획은 성공했을까요? 그는 다시 한 번 좌절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동정은커녕 더 큰 저항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무리는 더 큰소리로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아우성입니다(6절상). 마침내 그도 자포자기(自暴自棄) 하는 심정으로 무리들을 향해 분노를 드러내고 맙니다. 하고 싶은 하라고 말해버린 것입니다(6절하).
이 말은 물론 예수를 죽여도 좋다는 최종 선고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요구가 하도 집요하고 끈질겨서 환멸과 짜증이 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는 이 사람을 죽일 생각이 전혀 없으니, 정 원한다면 너희들이 데려다 그렇게 하라는 역겨움의 표시입니다.
그의 태도에 무리가 다소 누그러졌을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세등등하여 새로운 혐의를 하나 더 추가하고 있습니다. “유대의 왕”이라는 정치적인 혐의 외에 이번에는 “하나님의 아들”, 즉 신성모독이라는 종교적인 혐의가 그것입니다(7절).
그런데 왜 이 혐의를 이제야 밝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혐의(嫌疑)입니다. 만일 이들이 처음부터 이 대목을 강조했더라면 재판의 성격도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성모독에 관한 혐의는 로마 법정이 아니라 ‘유대’ 법정에서 다루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처벌의 내용도 십자가의 형벌이 아니라, 돌에 맞아죽은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사실 공회가 예수를 죽이겠다고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성모독 때문이 아니었던가요? 하지만 그동안 ‘빌라도’가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혐의는 정치적인 것, 즉 예수께서 스스로 “유대인의 왕”으로 칭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유대’ 공회가 이제 종교적인 것, 즉 “신성모독”이라는 새로운 혐의를 들고 나온다 해서 이전의 혐의를 거두어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죄목을 추가로 덧붙임으로써, ‘빌라도’로 하여금 이 재판을 결코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무언중에 강요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라는 인물은 그냥다루어도 되는 경범죄 수준의 죄인이 아니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다시 한 번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무자비한 본심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수님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본심 말입니다. 예수께서 ‘메시아’로 자처하는 것도 심각한 일이거늘,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까지 했으니 이들이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이래저래 “나사렛 예수”는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에게 큰 거침돌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화평의 역설. 이스라엘이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일이 왜 그토록 어려울까? 하나님께서 그들과 화평을 이루는 방식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적대적인 두 세력 간에 화평을 이루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굴복시키거나, 아니면 강자가 스스로 무장해제하여 약자와 같이 되거나 입니다. 이스라엘이 기대했고 지금도 기대하고 있는 방식은 앞의 것입니다. 당연히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참고. 고전 1:23). 이 사람들은 <이사야>의 노래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했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왜 전능자 하나님께서 굳이 이런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 하시는 것일까? 왜 스스로 약해져서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방식을 택했을까?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3-35).
그의 노래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깊은 신뢰와 경외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섭리를 이루어 가심에 있어, 때로는 우리를 참여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배제시키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어느 경우든 우리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건을 성취하심에 있어 ‘가롯 유다’나, ‘빌라도’나, 로마 병정이나,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필요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개개인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었으니 나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어”라고 항변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소명(召命)과 운명(運命)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소명을 받은 자이지 정해진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소명은 열려있지만 운명은 닫혀있습니다. 소명은 가능성을 말하지만, 운명은 결과를 말합니다. 소명은 역동적이지만 운명은 정체되어있습니다. 소명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에 집중하지만, 운명은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할까?”에 집중합니다. 다섯 달란트나 세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소명을 믿었지만,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운명을 믿었습니다. 소명을 믿었던 사람은 이윤을 남기려 했습니다만, 운명을 믿었던 자는 그것을 땅속에 묻어버렸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사람입니다. 즉 나는 그리스도의 소명을 나의 소명임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군중 속의 개인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군중 속에 있지만 고립된 개인으로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자입니다.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을 걷도록 부름 받은 자입니다.
그날 그 무리 속에 고독한 개인은 아무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분을 위해서 아무도 나서서 변론하는 자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요한’ 화자는 이점을 서막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11)
그런데 나는 어이하여 그 빛 속에 거할 수 있게 된 것일까요? 어찌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된 것일까요? 그래서 나는 정말 행복합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