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제자들의 발을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3:3-5약 8분 분량
나는 세족(洗足)과 관련된 두 구절(4-5절)을 약간의 강조를 달리한 채, 두 번 반복해서 읽을 것을 제안합니다. 세족의 의미를 입체적으로, 그리고 종합적으로 감상하기 위해서 입니다. 각 경우 강조를 위해서 밑줄로 나타냈습니다. 감정을 실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니
이번 묵상은 첫 번째 강조에 관한 것입니다. 근동 지방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예의에 따르면, 손님들이 먼지투성이의 길을 걸어오느라 발이 더러워졌기 때문에 도착하자마자 종들이 손님의 발을 씻어 주어야 했습니다. 이 일은 너무 비천한 것이어서 ‘유대’인 노예들에게는 요구조차 하지 않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무슨 연유인지 알 수는 없으나, 제자들 중 아무도 발을 씻지 못한 채 식사를 하기 시작합니다. 각자 마음속으로 발을 씻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그 일을 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발도 씻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주어야겠다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어느 누구도 동료의 발을 씻기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이 일어나서,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위가 상징하고 있는 바는 무엇일까요?
<창세기>에 ‘아브라함’이 그의 노예 아내 ‘하갈’을 내쫓는 이야기가 있습니다(창 21:14). 이 이야기에 대한 ‘유대’인들의 <미드라쉬>를 보면, ‘아브라함’이 ‘하갈’을 내쫓으면서 이혼 증서와 함께 그녀의 허리에 수건을 둘러매어 줍니다. 이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가 노예 신분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 즉 그 허리에 수건을 동여매는 행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그 의미를 이미 간파한 것입니다. 당연히 ‘베드로’도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의 당황해 하는 모습에서 이를 충분히 확인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는 너무 민망하고 황망합니다. 그의 태도는 뭐 이런 것입니다: “아니, 주님, 당신이 이럴 수가, 오!’ 그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같은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는 정말 겸손하고 예의바릅니다. “내가 어떻게 감히 선생님의 섬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주님과 같거나 더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은 결코 제자처럼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제가 선생님의 발을 씻겨드리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러나 무엇이 문제입니까?
대선 철만 되면 각 후보들은 현직 대통령 깎아 내리기 경쟁에 몰두합니다. 현직 대통령을 향해서 제왕적이다, 독재적이다, 독선적이다 하면서, 만일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의 절대적 권한을 제한하거나, 축소하겠다는 공약도 함께 내놓습니다. 즉 겸손한 대통령이 되겠다는 공약입니다. 실제로 지난 한 정권 초기에 “당신이 곧 대통령입니다”라는 구호까지 등장한 바 있기도 합니다. 아주 매력적인 구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주 민주적이고 대중적으로 들리는 이 구호에 자기 모순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즉 은연중에 대통령이 일반 국민보다 한 등급 위라는 태도가 그것입니다. 진정 민주주의 원칙을 지키기를 소원했다면, 차라리 “대통령도 한 사람의 시민입니다”라고 했어야 옳습니다. 우리는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대통령을 원하지도 않지만, 헌법이 규정해놓은 대통령의 권위와 책임을 독재와 권위주의로 매도하려는 가식적이고, 대중영합적인 대통령도 원치 않습니다.
대통령은 대통령다우면 그만인 것입니다. 대통령이 겸손해야 할 법적 의무는 없습니다. 오히려 추상같은 자기 절제와, 원칙과 규율로 정부를 이끌고, 법의 한도 내에서만 국민을 섬기면 될 것입니다. 대통령은 사도도 아니고, 선교사도 아니고, 목회자도 아닙니다. 그리고 만백성의 대통령, 백퍼센트 대통령은 있을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의 연인은 어느 누구의 연인도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베드로’가 만일 대통령이 되었다면 어떤 유형의 지도자가 되었을까? 선생님을 대하는 모습을 보니 아주 예의바르고, 겸손한 대통령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있을 것입니다.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합니다만, 한 가지 전제 하에서만 그럴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즉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의 선생님이거나, 또는 주님이라는 단서 하에서만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베드로’ 대통령은 절대 일반 백성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의 생각대로 선생이 제자의 자리에 내려올 수 없다면, 대통령 또한 한 사람의 시민이 될 수 없습니다. 일반 백성은 고사하고 부하 장관의 발도 절대 씻겨 줄 수 없을 것입니다. 혹시 모르겠습니다. 자기 아내나 자식들의 발은 씻겨주었을지.
만일 그가 목사가 되었다면 어떤 목사가 되었을까요? 지금 현재의 인식을 그대로 지닌 채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에서 전도사로부터 시작해서 강도사, 그리고 부목사를 거쳐, 목사가 되었다고 가정해 본다면 말입니다. 행여나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을 신분 상승의 수단 정도로 여기지는 않았을까요? 그리하여 담임목사가 되는 순간부터 교회의 제 일인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제부터 소위 평신도와는 다른 사제(司祭), 성직자, 또는 제사장이 되었다고 스스로를 구별하려들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성직자”의 원래 의미가 무엇인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분깃” 내지는 “유업”이라는 뜻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유업입니까? 모든 평신도들입니다!
나는 여기서 굳이 우리가 얼마 전 읽었던 ‘폴 스티븐슨’ 목사님의 저서, <평신도 신학>으로부터 장황하게 인용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 읽어보았을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책의 원제(原題)가 “평신도 없애기”(the abolition of laity)란 점만 상기시켜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여기서 저자가 의미하고 있는 “평신도”란 그야말로 전통적으로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의미로서의 “평신도”를 말합니다. 즉 전문 사역자와 대조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와 같은 “평신도”가 실제 교회 내에서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평신도”(헬라어로 ‘라오스’)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총칭(總稱)일 뿐으로서,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는 “하나의 백성” 즉 “평신도”만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 목사가 이 사실을 모른 채, 소위 말하는 “기독교 사역”을 수행하고 있었다면, “평신도” 즉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양(洋만)이 아니라 자기의 양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이들의 발을 씻겨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럴 필요를 전혀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양들이 그의 발을 씻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문 사역을 받는 대가로 말입니다.
그가 만일 오늘 다락방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더 근원적으로는 성령의 체험이 없었다면, 그는 죽을 때까지 소위 틀에 박힌 목회자로 살아갔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즉 “기독교 사역”에 대한 그의 신학은 지극히 제한되고 편협했을 것이라는 생각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그는 “기독교 사역”을 “교회 사역”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갔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정리를 위해 다시 질문해 봅시다: “과연 기독교 사역이란 무엇일까요?” ‘스티븐슨’ 목사님은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으니, 다시 한 번 그분의 저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아브라함 카이퍼’의 그 유명한 선언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전 우주에서 ‘이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다’라고 선언한 영역은 없다.”
다행히 ‘베드로’는 신학적 거듭남을 체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평신도에 대한 그의 입장 때문입니다. 그는 평신도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 2:9-10).
즉 평신도란 제사장이며, 성직자이며, 왕 같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할 때, 제사장이나, 소위 성직자나, 기타 교회 지도자들의 지위나 권위를 위축시키거나 끌어내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그동안 전혀 엉뚱하게 인식해 왔던 평신도의 지위와 특권을 원래의 위치로 끌어올리고, 확장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존감, 특권의식, 사명감, 책임감, 기독교 사역에 대한 정확하고도 투철한 자의식을 갖추자는 것입니다.
예컨대, <성경>은 우리가 서로의 짐을 나누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갈 6:2).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서로를 향해서 제사장이 되고, 성직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책임지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말이지요. 우리는 모든 인류를 한 결 같이 다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겸손이란 알아도 모른 체, 있어도 없는 체, 할 수 있어도 할 수 없는 것처럼, 그저 머리 숙이고, 슬슬 기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겸손은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즉 서로에게 제사장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어떻게 돌아가든 나의 관심사가 아니라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공동체를 위하여 나눌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세상이나 이웃에 대해서는 더욱 인색하고, 옹졸하며, 폐쇄적인, 한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나 세상도 그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신학과 교훈을 지금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일깨워주고자 하십니다. ‘베드로’가 당황하여, 겸손하고, 예의바르게, 선생님의 발을 씻겨주려 했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자이다”(8절). 여기서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은 “아무런 유업 또는 분깃(mevro", 메로스)이 없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보여야 할 참된 겸손은 그가 선생님이신 그리스도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의 짐을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말입니다. 아내나 남편의 발을, 자식들의 발을, 교회 식구들의 발을, 그리고 이웃의 발을... 이처럼 정말 하찮은 일상의 일들이 내 주위에 널려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거룩한 일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일상의 신비인 것이지요.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