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발을 씻기시니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3:4-11약 7분 분량
본인의 아들 달우는 이런 저런 일로 우리 부부에게 부탁을 해 올 때가 많습니다. 자기 하는 일에 대해서 광고 문구를 영어로 작성해 달라든지, 영문 이력서를 만들어달라든지, 음반을 내는데 후원자를 모집해 달라든지, 등등의 부탁입니다. 이럴 때 나는 묻습니다. 그런 일을 해주고 내가 얻는 대가가 무엇인가고 말입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의 효도가 그 대가입니다.”
그는 효도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내가 그의 짐을 덜어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물론 즐거움으로 그 일을 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결과적으로 내가 그를 섬기고 있는 것이지요. 즉 발을 씻겨주고 있는 쪽은 아들이 아니라 아비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서로의 짐을 나누는 것이라 했으니, 나는 적어도 내 아들에 대해서만큼은 지극히 겸손한 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솔직히 우리 부부는 두 아들의 발을 씻겨주는 일에 있어 부끄럽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우리 부부의 섬김이나 봉사를 받고도 당황하거나 놀라는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그가 우리들 발을 씻겨주겠다고 나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매 번 발을 내놓습니다. ‘베드로’와는 전혀 딴 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두 질문은 아주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세족의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세족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제자들의 발”을 강조할 때 자연스럽게 함께 따라오는 수식어들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제자들의 발을”이라든지, “다른 곳도 아닌 발을”, 등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했을 때, 세족은 곧 겸손이나 섬김을 연상시켜줄 것입니다. 교훈인 즉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그렇게 겸손하게 섬겨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섬김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섬기는 것이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특히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베드로’가 당황했던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을 만류하며, 자기가 선생님의 발을 씻겨드리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대응이 의미심장합니다. 그를 겸손하다고 칭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자이다”(8절). 그분은 바야흐로 세족의 태도가 아니라, 세족 자체의 의미를 암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강조는 “제자들의 발”에서 “발을 씻기시니”로 옮아가야 하겠습니다. 기독교 사역의 자세나 태도가 아니라, 그 사역의 내용과 의의(意義)를 드러내고자 하시는 것이지요. 전자가 교회의 사역에 관한 것이라면, 후자는 교회의 본질에 관한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 의미는 그분의 말씀 속에 이미 드러나고 있습니다. “상관”이라는 단어가 그것입니다. 앞에서 한 차례 설명한 바 있습니다만, 여기서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은 “아무런 유업 또는 분깃(mevro", 메로스)이 없다”는 뜻입니다. 즉 세족은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있어 “자기 사람들”임을 확인해주는 의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자기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의 발을 씻겨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온 몸이 아니고 발인가?” 이것이 ‘베드로’가 의아해 했던 부분입니다: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9절). 전형적인 오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오해를 부드럽게 고쳐주십니다: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10절). 왜 그렇습니까? 왜 발만 씻으면 충분하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의 도전입니다.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공동체를 향한 것입니다. 우선 개인적 차원에서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과연 나를 씻기셨는가?” ‘베드로’가 처음 발 씻기를 완강히 거절했던 것처럼, 나 역시 그리스도의 깨끗하게 함이 없이도 그럭저럭 잘 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임금님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임금님이 나누어주는 예복이 아니라, 자신이 마련한 옷을 입고 연회장에 들어가려다 쫓겨난 사람처럼 내 옷을 입고도 연회장 안을 돌아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그 쫓겨난 사람이 입고 있었던 옷은 실은 교만, 즉 자기 의(義)라는 옷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옷을 입고 살아가는 한 나는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 옷을 아무리 깨끗하게 달여 입는다 해도, 아무리 많은 선행과, 종교적 훈련과, 겸손과 봉사의 훈장(勳章)으로, 그 옷을 장식한다 할지라도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옷이 아니라 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피로 온 몸을 목욕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그리스도인이 될 때, 모든 죄가 심판받고 십자가에서 제거됨으로써 나는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씻김을 받습니다. 하지만 내가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때, 죄는 날마다 고개를 내밉니다. 그 죄 역시 날마다 주님에게 내 발을 내놓고 씻겨 주십사 함으로써, 그분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이를 이렇게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따라서 그분께서 내 발을 씻겨주시겠다고 할 때, 기꺼이 발을 내놓는 것은 교만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입니다. 그것은 자기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나는 괜찮으니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주세요”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 하니라”(요일 1:8, 10).
그렇다면 공동체적인 도전은 무엇일까요?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눅 13:26-27).
이 말은 충격적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숙식을 함께 하며, 직접 가르치기까지 했는데도, 자기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여기에 이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사람, 즉 “자기 사람들”이 아닌 한 사람이 태연하게 자리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만, 당시 사도들 중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는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한 사람이 있다고 말했을 때조차도, 서로 돌아보며 그가 누구인지 주님에게 물어볼 정도였습니다. 놀랍게도 해당 본인조차도 모르는 듯합니다. 그가 이렇게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마 25:26). 정말 모르고 묻는 것인지, 알고도 뻔뻔하게 아닌 체 하는 것인지, 궁금할 뿐입니다. 알고도 고의로 모른 체 한 것이라면 그는 적어도 자신에게는 정직하고 충실했던 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만, 정말 자신이 당사자인 줄 몰랐다면 이건 정말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발을 씻겨주신다고 했을 때, 그도 발을 내밀었겠지요.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주님이 발을 씻겨주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겠지요. 그 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 엄숙하고도 침울한 자리에서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지금 이 사람을 밀고(密告)하고 그 대가로 받을 보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베드로’와 이야기를 나누시다 말고, 예수님은 느닷없이 ‘유다’의 배신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립니다. 그는 곧 이어 두 번째 단락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것인데도, 왜 이곳에서 미리 등장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가르침을 받고, 심지어 발 씻음을 받는 등,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요!
그의 위장술(僞裝術)이 하도 교묘해서 공동체의 다른 식구들은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는 동료 사도들과 함께 침례를 받았고, 공동체의 회원이 되었으며, 공동체 예배에 참여했고, 기도와 찬양을 했으며, 지금은 성찬식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를 사이비라 의심할 수 있었겠습니까?
초대교회에도 이와 유사한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입니다. 이들도 여느 교인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전답을 팔아 교회에 상당한 액수의 구제헌금까지 내놓았습니다. 이들 역시 아무도 그들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들을 사이비라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들 또한 예수님이 보실 때, “자기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교회에서 담임 목사가 회중들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진정 그리스도에 의해 온 몸을 씻김을 받았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매일 그분 앞에 당신의 발을 내어놓고 있습니까?” 똑 같은 질문을 나는 오늘 나에게도 던져야 할 것입니다. 나는 진정 “자기 사람들” 속에 속해 있는가? 즉 나는 진정 그리스도께서 내 온 몸을 씻겨주는 체험을 했는가?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내 발을 씻겨주고 있는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중요한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진정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주고 있는가? 즉 관계 맺기를 통해서 내가 받은 것을 나누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자로 내버려두고 우리끼리 만의 세계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는가?”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