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체 포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8:1-11약 10분 분량
그 운명의 유월절 전날 밤. ‘니산’ 월(오늘날의 3-4월) 14일 자정이 되었을까 말까 한 시점. 갑자기 동산(東山)의 적막(寂寞)이 깨지고, 캄캄하던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소리들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몽둥이와 창과 칼이 부딪히는 소리 등등. 그리고 이 사람들이 들고 오는 등(燈)과 횃불 때문입니다. 이 장면에다 배경음악을 삽입한다면 어떤 곡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베토벤’의 제 5번 교향곡, 특히 그 시작 부분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마침내 운명의 시간이 닥쳐왔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평소에 그렇게 자주 암시하셨던 바로 “그 때”가 지금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란 이제 보니 모든 것이 끝나는 때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제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무기력하게 사로잡혀 갈 것이고, 제자들은 곧 뿔뿔이 흩어질 것이었습니다. 반면 관저(官邸)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대제사장 ‘가야바’는 조만간 예수님의 체포 소식을 듣게 될 것이고, 그리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됐어!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났어.” ‘빌라도’ 역시 차출나간 병사로부터 “상황 종료” 보고를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 체포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성공리에 끝났습니다. 어떠한 인적 물적 피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끝!”입니다.
세인(世人)들의 훗날 평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던 한 이방인 ‘셀수스’(Celsus)는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어느 유대인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아주 악의에 찬 사실의 왜곡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를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듣기로 그는 자신이 선언한 그 어떤 것도 이루어놓지도 못했으며, 우리가 그를 기소하여 처형하려 했을 때에는 자신을 숨겨 도망하려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가 자신의 제자로 부르는 사람들의 배신으로 체포됐다는 사실이 정말 창피한 일이 아닌가! 그가 진정 하나님이었다면 도망하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붙잡히지도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공유했던 제자들, 그를 구세주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이요 사자로 떠받들던 그 제자들이 어떻게 그를 곤경에 내버려두고 달아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요한’ 교회의 설교자는 왜 이따위 이야기를 설교의 본문으로 선택했을까? 자신의 양들에게 무엇을 들려주기를 원했던 것일까? 아니 그보다 먼저 지금 이 교회는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 것일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다리며 굶주림에 지쳐있던 ‘갈릴리’ 해변 가의 무리들과 같은 처지였을까? 아니면 한 밤중 ‘갈릴리’ 바다에서 풍랑 만난 배 안에서 살려달라고 고함치던 제자들처럼 시련과 환난을 통과하고 있던 중이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요한’ 화자가 이날 설교 본문으로 이 에피소드를 끄집어 낸 것은 완전히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교인들에게 희망보다는 오히려 절망을 선사했을 것이 뻔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설교자의 의도는 다른 데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가야바’나 ‘빌라도’가 확신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결말을 들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즉 그날 “동산의 작전”은 어둠의 세력들이 주도한 연합작전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기획하고, 감독하고, 주도하고, 통제한 작품이었다는 점을 말입니다. 과연 그는 문학적 거장(巨匠)다운 솜씨로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그날 동산의 사건을 재조명해주고 있습니다.
어둠의 삼위일체. 먼저 예수님을 잡으러 오는 체포 조의 모습을 눈 여겨 보기로 하지요. 익살스럽기도 하고 바보스럽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체포하기 위해 등과 횃불과, 창과 칼과 몽둥이를 들고 다가오고 있는 이들 모습이 그렇다는 말입니다(3절). 등과 횃불은 왜 필요한 것입니까? 어둡다는 말입니다. 어두워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빛”(1:4; 8:12; 9:5)이신 예수님을 찾으러 오면서 또 다른 빛이 왜 필요했던 것일까요? ‘요한’ 화자 자신이 <복음서> 벽두에서 선언했던 바와 같이, “빛이 어둠에 비취고 있음에도 어둠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참고. 1:5). 설교자는 지금 이들 모두가 어둠 가운데서 헤매고 있음을 해학(諧謔)적으로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지(無智)한 자는 이방인들 즉 로마 병사들만이 아닙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도 그 속에 섞여 있습니다. 대 제사장 ‘가야바’나 그가 보낸 성전 치안 요원들이 그들입니다. 사도 ‘바울’도 동료 ‘유대’인들을 향해 같은 말로 고발한 적이 있습니다(참고. 롬 2:17-29). 그 ‘유대’인 속에 ‘가롯 유다’도 있습니다. 적어도 ‘요한’의 기록에 따르면, ‘유다’는 무리 속에 섞여 단순한 밀고자(密告者)의 역할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자는 그에 관하여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 사람들을 데리고”(3절). 즉 ‘유다’가 이들 체포요원들을 “취하여”(lambavnw), 데리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에 따르면, 이날 ‘유다’는 군대 지휘관 내지는 체포 조의 인솔자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참고로 <마가복음>에 따르면, ‘유다’가 로마 군대와 성전 치안요원들과 함께 그 동산에 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유다’가 체포 조를 따라 온 것이 아니라, 로마 군대와 성전 치안 요원들을 직접 취하여 동산으로 이끌고 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같은 일이 과연 가능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며, 현실적으로도 가능하지 않았을 일입니다. 그리고 ‘요한’ 화자 또한 이 사실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화자의 의도는 오히려 다른 데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은 지금 사실(史實)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탈(脫) 역사화 하고 일반화 하는 방식으로 빛과 어둠의 긴장과 대립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요한’ 화자가 복음서 벽두에서부터 보여 온 이원론(二元論)적 세계관에 따르면, ‘유다’는 여전히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대적하는 어둠의 세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배교(背敎)한 제자로서, 로마 군대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어둠의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세상의 빛에 대항하고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들 세력은 상징적으로 “악의 삼위일체” 행세를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시편>의 노래가 이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1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시 2:1-3)
그렇습니다. 로마와,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의 제자는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셨을까? 그분은 이들의 연합 전선을 어떻게 대하셨을까? 그 옛날 ‘바벨’탑을 쌓던 무리들을 대했던 방식 그대로입니다. 조롱과 무시입니다. 시인은 이들의 역적모의에 대해서 이렇게 조롱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시 2:4-5).
이들은 등과 횃불만 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붙잡기 위해 창과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습니다. ‘요한’은 이 모습 또한 우스꽝스럽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창과 칼과 몽둥이가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이 사람들은 이 무기들이 왜 필요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마 한 바탕 전쟁을 치를 것으로 기대했던 모양입니다. “사람들은 왜 전쟁을 할까?” 이 질문에 대해서 ‘도널드 케이건’(D. Kagan)은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내심으로 두려운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서 두려워 떨고 있다는 말입니다.
죄인이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잡으려 무기를 들고 온 자들이 떨고 있습니다! 혼자서 잡으러 온 것도 아니고 떼를 지어 몰려온 자들이 말입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현상범을 보자 말자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들을 이렇게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6절하). 이들은 지금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단순히 뒤로 물러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땅에 엎드려 벌벌 떨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예수께서 나아가. 그렇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그다”(ejgw eijmi)라고 선포해 버린 것입니다(5절). 이 선언은 <요한복음>의 주제 선언이자,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드러내셨던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나는 야훼 이니라”(출 3:14).
‘유다’나 성전 치안 요원들이 이 선언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로마 병사들조차 벌벌 떨었겠습니까!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현현(顯現) 앞에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8)
내가 그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의 음성을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단 10:9)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행 9:4)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계 1:17)
그러니까 적어도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수난”은 “그리스도에 의한 수난”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받는 수난은 어둠의 세력이 계획하고 주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 자신에게 수난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은 <성경>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그분께서 모든 상황을 주도하고, 통제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둠의 세력이 오기 전에 이미 “동산으로 나가 계셨고”(1절), 자신을 잡으러 오는 무리를 향해서 먼저 주도적으로 나아가서 “누구를 찾느냐고?”고 묻습니다(4절). 이 장면에서 그 유명한 ‘유다’의 “배반의 입맞춤” 따위는 사족(蛇足)일 뿐입니다. ‘요한’은 그 대목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있습니다. ‘유다’ 따위가 하나님의 원대한 섭리에 무슨 역할을 했겠느냐는 암시이겠지요. 같은 맥락에서 무리가 예수님을 향해, “당신을 찾고 있소”라고 답하지 않고 ‘나사렛 예수’를 찾고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 흥미롭습니다. 그들은 ‘유다’의 키스를 통해서 예수님의 신분을 확인했던 것이 아니라는 암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먼저 “내가 그니라”라고 말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분을 알아보았을 뿐입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권위와 주도적인 행위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이들을 가게 하라. 감히 고개도 못 들고 엎드려 벌벌 떨고 있는 무리를 향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7절). 제자들은 그냥 가도록 내버려두라는 말씀입니다. 목자(牧者)로서 양들에 대한 관심과 염려를 보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참고. 10:11). 하지만 이 장면 또한 예사롭지 않습니다. 화자는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 여전히 상황을 주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주님은 무리들에게 사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만, 화자는 이는 <성경>의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한 행동이라는 설명을 빠뜨리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상황을 주도하고 통제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날 밤 사도들은 주님의 말씀과 행동을 제대로 이해했을까?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10-11절).
화자는 ‘말고’의 귀를 벤 자가 ‘베드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만, 그에게 이 사실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어차피 그의 충성스러운(?) 행동은 가증스러운 “유다의 키스”만큼이나 의미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섭리를 이루는 일에 있어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점잖은 꾸짖음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 하겠느냐”는 말씀에서 다시 한 번 <수난 이야기>의 진정한 저자(著者)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시인은 자신이 겪고 있는 수난에 대해서 여러 곳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시 27:2);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 34:4);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시 56:9)
이 확신의 노래는 실은 공동체의 확신이기도 합니다. 회중은 예배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를 위한 교훈도 분명해 보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간섭이 아니라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라면, 오늘 나를 지배하고 주도하려 하는 어둠의 세력 앞에서 내가 보일 수 있는 모습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할지를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