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주님의 기도 (7):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7:20-23약 11분 분량
일치를 위하여
(17:20-23)
자식들은 어릴 시절에 부모에게 평생 바쳐야 할 효도를 다 드린다고 합니다. 우리 큰 아들 내외가 이제 돌을 갓 지난 자기들 아들 대하는 것을 보면 정말 그렇다는 생각입니다. 아들 하는 짓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웠으면, 퇴근 후 현관문을 들어설 때 우리보다는 자기 아들에게 먼저 시선이 갑니다. 우리가 그들과 늘 한 집에서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한 번씩 방문하는 부모인데, 우리에게 잘 다녀왔다는 인사부터 먼저 하는 것이 도리이거늘, 반갑다고 소리 지르는 자기 아들 안아주느라 우리는 뒷전입니다. 우리는 이게 서운하지요: “우리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허나 그들 하는 모습이 우리 부부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아들 또한 어릴 적에 우리를 얼마나 즐겁고 기쁘게 해주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도 우리 부모님들보다는 늘 아이들이 우선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연히 우리는 이들에 대한 기대로 늘 설렘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언젠가 큰 인물이 되겠거니 하면서 말입니다. 이처럼 부모로 하여금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게 해주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내 자식들은 우리 부부에게 큰 효도를 했다고 인정해야겠습니다. 지금 그들이 장성하여 가정을 가진 후 우리를 어떻게 대하고 있든지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 두 아들이 완전히 실망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 두 아들 내외는 우리를 마음으로부터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저의 아내는 외국에서 살고 있는 작은 아들을 생각하면 늘 눈가에 눈물이 촉촉하게 고입니다. 그리움과 안쓰러움 때문이겠지요. 어머니로 하여금 그리움으로 눈물짓게 하는 아들은 불효자가 아니라, 효자라고 해야겠습니다. 이번 우리 부부의 밴쿠버 방문 길에, 그곳에 사는 작은 아들이 나에게 책을 한 권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인생의 절정에서 새로운 모터를 장착(裝着)하여 열정을 가지고 살기 바란다는 글귀를 덧붙여서 주더군요. 아주 유익하고 흥미로운 책이었습니다. 참 효자라는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들에게 바라는 더 큰 효도가 아직 남아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만큼 받았으면 되었지 또 무엇을 더 바라느냐고 비난받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자식들로부터 마지막으로 바라는 더 큰 효도는 다름 아닌 본인의 부모님께서 생전에 우리 여섯 남매들에게 누누이 부탁하시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얼마나 그것을 간절하게 바라셨으면, 돌아가시기 전에 유산(遺産) 문제까지 깔끔하게 정리를 다 해놓으실 정도였습니다. 사회에 환원할 것과, 자식들에게 남겨줄 것 등에 대해서 유언으로 미리 일러두신 것입니다. 유산 문제로 행여 자식들 간에 다툼이 있을까 염려가 되셨던 것이지요. 우리 형제들은 아버님의 유언 그대로 따랐습니다. 선친께서 자신의 유언을 법률적으로 공증을 받은 문서로 남겨두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 여섯 남매는 유산 문제로 다투어본 적이 없으니, 부모님 사후에도 사이가 갈라질 일도 없었고, 서로를 원망하며 살아갈 일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형제들은 매년 몇 차례 씩 만나 여행을 함께 하기도 하고, 식사를 나누기도 합니다. 부부동반은 물론 자식들까지 함께 모입니다. 부모님의 기일(忌日)에 만나는 것은 물론, 서로의 생일이나 환갑, 심지어 자식들의 결혼과 출산까지 챙겨주기도 합니다. 육 남매가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끊이지 않고 우애(友愛)를 이어가기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어떻게 이 같은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본인의 부모님께서 평소에 이에 대해서 자식들에게 특별히 가르치거나 훈계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삶으로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주셨다는 생각입니다. 저의 아버님은 아홉 남매 중의 막내였습니다. 시절이 시절이었던 만큼, 막내로서 부모에게 응석을 부려보기도 전에 층층시하 형과 누이로부터 순종과 복종을 먼저 익혀야 했던 시절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일찍부터 형들은 해외유학이다, 독립운동이다 하며 집을 떠나버렸고, 자신은 소학교도 겨우 졸업해야 했으며, 시골에 남겨진 부모 공양을 비롯한 집안의 대소사는 혼자의 몫이었습니다. 부모님의 사후 제사 지내는 일도 그 잘나가던 서울의 형들이나 누님들이 아니라, 시골의 못난 막내가 혼자 도맡아 지냈습니다.
그런대도 이분은 자식들 앞에서 단 한 번도 자기 부모님과 형과 누이들을 원망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늘 그분들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했고, 어쩌다 이분들이 고향을 방문할 때면 지극정성으로 대접하였습니다. 방학이 되어 서울에서 공부하던 자기 자식들이 집으로 내려오면 그들을 보기가 무섭게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서울에 사시는 큰 아버님들이나 고모님들께 인사는 하고 왔느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손위 형제 분들을 공경했으면 이렇게까지 하셨겠습니까!
나는 감히 생각해 봅니다. 이와 같은 부모님의 삶이 자식들의 유전인자로 자리하지 않았을까 하고 말입니다. 저와 아내가 우리 두 아들 내외에게 바라는 효도도 바로 이것이라는 말입니다.
일치와 연합. 그것이 무엇일까요? 지금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그분의 교회에 대해서 간절히 바라는 바로 그것입니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아버지 하나님에게 무려 네 번에 걸쳐 자신의 심정을 호소하고 애원하고 있습니다(20-24절). “그들이 하나 되게 해 달라”는 간청이 그것입니다. 즉 연합과 일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누구일까? “교회”입니다: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20절). 여기서 “그들”은 사도(師徒)들일 것이며,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은 신자(信者) 일반, 곧 교회를 지칭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제 주님은 사도들을 위한 기도에서 그들을 통해서 탄생하게 될 교회, 즉 “성도 일반”을 위한 기도로 옮겨 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도들 역시 교회의 주춧돌이 되었다는 점에서 교회의 일부로 보아야 하겠습니다만, 여기서 교회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성도 일반을 의미해야 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우주적 교회”(Catholic Church)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주적 교회란 시대와 지역의 한계를 초월하는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우주적 교회가 하나 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세상의 모든 교회들이 그 모든 차이와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우주적 교회의 일부로 일치와 연합을 이루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어떻게 우주적 교회로 일치와 연합을 이룰 수 있을까? 무엇보다 기구나 조직의 일원화를 통해서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두 지역 교회를 합쳐 하나의 지역교회로 만들거나, 두 지방회를 합쳐 하나의 지방회로, 또는 두 교단이 합쳐 하나의 교단을 만들면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로마 카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와 ‘영국의 국교회’와 세계의 모든 개신교회들이 연합하여 하나의 단일 교회 조직을 이루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교회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과연 기구나 조직을 일원화시키면 교회의 연합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래서 일사불란(一絲不亂)한 모습을 보여줄까? 역사적으로 우리 인류는 하나의 교회 즉 강력한 중앙집권적 기독교 왕국을 가져본 경험이 있습니다. ‘콘스탄틴’ 대제 이후 중세 천 년을 존속했던 ‘로마 카톨릭’ 교회가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간 동안 세상은 물이 바다에 넘침과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찼을까? 하지만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후대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암흑시대”(The Dark Age)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이보다 더한 조롱과 해학(諧謔)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빛이 아니라 어둠이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아니라 온갖 미신과 무지와 폭력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무려 십여 차례에 걸친 십자군 운동도 바로 이 시기에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일부 엘리트 종교인들의 전유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왕국에서 <성경> 문맹율(文盲率)이 거의 백퍼센트에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성경>은 이들 엘리트 집단의 탐욕스러운 지배의 도구가 되어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말하자면, 오히려 기독교 왕국 이전의 수 세대가 훨씬 나았습니다. 여러 지역에 흩어져있던 지역교회들은 조직이나 상호 연결고리는 느슨하고 엉성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고, 배우며, 전하는 일에 있어서 이미 하나가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약성경>, 특히 <서신서>나 <계시록> 등을 통해서 대략이나마 이들 개 교회의 면면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각 지역교회 간에 무슨 연합회니, 지방회니, 교단이니 하는 조직이나 기구가 있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또 하나 경계해야 할 일치와 연합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외적(外的)으로 보이는 조직이나 기구의 일치보다 더 치명적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학이나 신앙의 일치를 말합니다. 신학이나 신앙의 일치는 보다 내적(內的)이며, 비가시적이며, 은밀하기까지 합니다. 성령도 하나이며 교회가 하나이니, 신학이나 신앙도 당연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나름대로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조화나, 일치나, 연합은 아름다운 단어들이 아닙니까!
하지만 신학이나 신앙에서 하나 된 교회가 과연 건강하다 할 수 있을까? 하나 되는 교회를 이루려 하다가 하나 되는 진영이나 집단을 이루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교회가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사상이나 이념 공동체로 전락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런 곳에는 다양성이나 역동성은 찾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획일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진영논리(陣營論理)가 판을 칩니다. 또 다른 암흑시대가 도래한 것이지요. “나치 독일”이 그랬고, 북한 세계가 그러하며, ‘바리새’파와 오늘날의 “구원 파”가 그러합니다. 이들에게는 다양한 견해란 조직에 대한 배신이자 반동으로 처단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성경> 해석도 그렇습니다. 오직 한 가지 해석만이 있을 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네들의 진영논리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려 했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해석 방법을 소개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해석 방식이 수구 보수적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방식은 진보적이며 혁신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해석이 운명론적이고 닫힌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의 해석은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것이었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리새’파가 예수님의 해석을 적대시하고 배척했다면, 예수님은 상대방의 해석을 상당 부분 인정하고 수용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열려 있었으며, 융통성이 있었습니다.
통일성과 다양성. 교회를 비롯한 피조세계는 이상적으로는 <창세기> 1장에서 그리고 있는 천지창조의 모습을 담아내야 합니다. 그 그림은 일치와 연합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그곳에는 통일성과 다양성이 아름답게 공존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은 각기 나름의 방식대로 날자와 사시(四時)와 연한(年限)을 지시하고 알려줍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를 가득 메운 온갖 종(種)의 생명체들은 각기 자신의 방식대로 생육하고 번성하되, 자신의 한계 내에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창조주의 대리인으로서, 피조세상의 왕으로서, 이들 모두를 자유롭게 다스리고 지배하되, 자신의 자유가 무제한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천지창조의 모습을 마치 아무 의미 없는 ‘레고’의 조각 하나하나가 모여,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드러내고 있는 장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통일이 있는 곳에는 체계와 규범이 있고, 질서와 규칙이 있습니다. 결코 깨어지거나 무너질 수 없습니다. 반드시 유지되고 보존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양성이 없는 통일은 획일(劃一)과 전제(專制)만을 보여줄 뿐입니다. 한편 다양성이 있는 곳에는 온갖 종류의 상상과 역동과 창조가 빛을 발합니다. 자유가 춤을 춥니다. 그러나 통일성 없는 다양성은 분열과 혼란으로 끝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삼위일체”의 방식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존재 방식이야말로 통일성과 다양성을 가장 극적으로, 가장 신비한 방식으로 계시하고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이해하며, 사랑하고, 대화하며, 강요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영원히 교제를 이어왔습니다. 이와 같은 존재 방식이 천지창조에서 그 결과로 나타났을 뿐입니다. 그분의 교회 역시 “삼위일체”의 존재 방식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22-23절)라는 기도의 의미도 이런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대로 교회도 상호 간에 그렇게 존재하게 해달라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본인은 지금 교회의 목적이나 “사역”의 방식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 즉 그 본질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주님은 교회는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 가에 관해서 애절하게 기도하고 있는 중이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간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의 사역, 즉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그 다음 문제일 것입니다.
존재의 이미지들. <신약>은 일련의 알기 쉬운 이미지들을 사용해서 교회의 존재 방식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가장 친숙한 이미지는 “가정”입니다. 교회가 가정이라면 성도는 형제와 자매입니다. <서문>에서도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하고 있음을 압니다(1:11). 형제들은 성격이 다르고, 은사와 재능이 다르며, 꿈과 소망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만, 정상적인 가정에서 교육을 받은 자라면 이들 차이로 인해서 반목하거나, 갈등하거나, 시기하거나, 훼방 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의 차이를 기뻐하고 자랑합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교회의 존재 방식에 대한 또 다른 극적인 이미지는 “한 몸”입니다(참고. 고전 12:12-14). 몸이 없이 각 지체만 따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각 지체는 그래서 상호 의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가 같은 일을 하겠다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리고 나 혼자 몸 전체를 움직일 수 있다고 호언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하면 그만입니다. 그것이 크든 작든 말입니다.
우리의 초미니 교회, <늘푸른 교회>의 존재감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우리는 늘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신랑의 일부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자녀이자 백성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 다른 지체의 사역을 따라가야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나 자신 만의, 나 자신에게 주어진 그 일을 하면 될 것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의 방식대로 전투를 수행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만일 그렇게 했더라면 그는 패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우리만의 은사나 재능이나 소명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고 기도하며 물어보아야겠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