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주님의 기도 (6):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7:17-19약 10분 분량
거룩을 위하여
(요 17:17-19)
교황이 한 특정 국가를 순방 할 때, 그 나라에서 의례적으로 행하는 의식이 하나 있습니다. “성인”(聖人) 이나 “복자”(福者) 추대식을 말합니다. 과연 누가 이런 영예를 누릴 수 있을까? 대개 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추대를 받는데, 생전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흥에 큰 기여를 했거나, 순교자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 즉 그야말로 거룩하고 탁월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이 같은 영예를 누릴 수 있습니다. 과연 이런 사람들만이 “거룩한 자”, 즉 성인의 호칭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주님은 기도 중에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한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교회를 향해서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 2:9상). “거룩”은 하나님의 여러 속성 가운데 가장 으뜸 되는 속성일 것입니다. 아버지가 거룩하다면 아들도 거룩할 것이며, 아들이 거룩하면 교회도 거룩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위하여 드리는 두 번째 간구의 내용도 그들의 거룩입니다(17-19절).
과연 “거룩”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어떤 지고(至高)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 지극히 순결하고, 지극히 깨끗하며, 윤리․도덕적으로 아무런 흠이 없는 그러한 상태 말입니다. 나는 과연 이런 상태에 도달할 수 있기라도 한 것일까? 있다면 무슨 수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수련이나 훈련을 통해서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정해놓은 일련의 규칙이나 규정을 잘 지키면 되는 것일까? <히브리서>는 이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고 답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썩 고무적이지 못한 말씀 같습니다. 거룩하지 못하면 주님을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거룩과 의.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습니다: “과연 어떻게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을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특히 일부 엘리트 종교 집단은 “거룩함”을 “의로움”과 동일시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거룩함 대신에 의로움을 추구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일련의 기준과 규칙들을 만들어 놓고 그 수준에 이르기 위하여 피눈물 나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과연 성공했을까? 거룩에 이를 수 있었을까?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평가는 아주 통렬합니다. 거룩함 대신에 의로움을 추구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는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이 무슨 아이러니입니까? 하나님의 의(義)에 이르러 보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또 노력했는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의에 대적하고 불순종하게 되었다니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이 같은 일은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하고 좋은 의도로 시작을 했는데, 결과는 정 반대로 끝나버리는 경우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평가를 곰곰이 새겨보니 비극은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사도의 평가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습니다. 이들 <성경> 전문가들은 <성경>에서 “의로움”(qd<x, 체데크)은 기본적으로 “올바른 관계”를 뜻하는 것이지, “윤리․도덕적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행위는 대가를 요구하지만, 관계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관계는 무슨 값을 치르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컨대, 돈을 주고 성(姓) 관계를 갖는 것은 매춘행위이며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를 범법행위로 간주합니다. 같은 원리로 아무도 “하나님의 의”를 무슨 값을 치르고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주야로 <성경>만 연구했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처럼 간단한 사실조차 몰랐던 것일까요? 기초가 부실했던 것일까요? 부실한 기초 위에 무엇을 올려놓든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 대한민국이 속칭 “구원파” 때문에 얼마나 엄청난 폐해를 겪고 있는지 이를 웅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거룩”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도 이와 같은 부실한 기초 위에 이루어진 하나의 돌쌓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카도쉬’(v/dq)로 그리고 ‘헬라’어로는 ‘하기오스’(a{gio") 부르는데, <칠십인역>에서 약 190회 정도 등장한다고 합니다. 의미인 즉은 “따로 구분하다”입니다.
<출애굽기> 40장에서 한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광야에 장막을 짓게 한 후에, 그 안에서 사용할 제단(祭壇)을 비롯한 여타 기구들을 별도로 구별해 넣도록 명하셨습니다. 즉 “거룩하게 하라”고 명하셨다는 말입니다. 단순한 나무나, 철기나, 천에 불과한 이들이 그 순간부터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존재가 된 것이지요. 이들에게 무슨 특별한 내적인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갑자기 이들이 깨끗해졌거나, 광채를 발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쓰임새가 달라졌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으로 쓰려고 구분해 놓았을 뿐입니다.
<신약>에서 말하는 거룩의 의미도 이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성자”(聖者)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그리고 ‘로마’에 있는 교인들을 향해서도 같은 호칭, 즉 “성도”(聖徒)로 부르고 있습니다: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롬 1:7상). 마찬가지로 이곳 다락방에서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19절).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의롭게 하셨다는 말은 자신을 의롭게 만드셨다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스스로를 구별하셨다는 말입니다.
거룩을 위한 기도. 그리고 똑 같은 목적을 위하여 제자 즉 교회도 구별하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대목에서 의문이 한 가지 남습니다. 즉 교회가 이처럼 구별된 즉 거룩한 존재라면, 주님은 왜 지금 다시 이들의 거룩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가 하는 점입니다. 다락방 강론의 벽두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과도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실 때, 베드로가 나서서 자기의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달라고 요청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온 몸이 이미 깨끗하여졌으므로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 너희는 깨끗하다”(13: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치 거룩을 위하여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사실 “구원파”의 주장이 이러합니다. 이미 구원을 받아 거룩하게 되었으니,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들 역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만큼이나 신앙이나 신학의 기초체력이 아주 부실하고 위험천만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씀을 하신 것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거룩을 위해서 기도하시는 것이나, 제자들의 온 몸이 아닌 발을 씻겨주시는 행위는 전혀 모순이 없으며, 지극히 일관된 것입니다.
왜 제자들은 거룩을 위한 주님의 기도가 필요할까? 왜 제자들은 수시로 발씻음이 필요할까? 수시로 거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수시로 거룩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종교적으로 깨끗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일까? 윤리․도덕적으로 깨끗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일까? 거듭 강조하거니와 거룩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어떤 수준이나 상태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은 이런 것이 아니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러워진 발, 씻어야 할 발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까?
<히브리서>는 이에 대해서 한 가지 힌트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 2:1). 여기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대목은 “흘러 떠내려가다”입니다. 이 단어가 주는 이미지는 이것입니다. 즉 항구에 배를 밧줄로 묶어 정박시켜놓았는데, 이 줄이 스르르 풀려 배가 그냥 떠내려 가버리는 상황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 배는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망망대해에서 요동치며 떠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 배와 그 바다는 이제 한 통속이 되고, 한 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교회나 나는 언제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될까? 나와 세상이 한 몸을 이루고 한 통속이 되어 어지러이 살아갈 때가 아닐까? 그리하여 세상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고, 세상의 방식이 내 방식이 되고, 세상의 기준이 나의 기준이 되고 세상의 지식이 나의 지식이 되어,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내가 왜 이 세상에 있는지를 알지 못할 때가 아닐까? 즉 내가 더 이상 구별된 존재가 되지 못할 때가 곧 거룩하지 못할 때가 아닐까! 즉 다시 발을 씻어야 할 때가 아닐까! ‘바울’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분들이 스스로를 거룩하다고 자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목적에 충실하고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거룩은 결국 정체성(正體性)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를 알지 못할 때 나는 거룩하지 못한 존재가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도 결국 이것이었습니다. 정체성에 충실하라는 것 말입니다. 이점에 있어 가장 끔찍한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 중에서 단 한 마디의 칭찬도 받지 못한 교회인데, ‘라오디게아’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의 특징은 차지도, 뜨겁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냉철한 지성도 뜨거운 감성도 없었다는 것이지요. 스스로 “나는 이만하면 됐다”고 아주 만족하며 살아갔던 교회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인생의 목표가 없다고들 합니다. 혹시 ‘라오디게아’에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진리로 거룩함을. 세상은 참으로 영리하고 때로 교활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입니다. 세월호 참사로 수시로 촛불집회다 국민 서명 운동이다 하면서 온 나라가 떠들썩합니다. 마치 이 같은 행사를 주도하지 않거나, 참석하지 않으면 시대의 낙오자나 반역자가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기꺼이 참석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려 합니다. 주장도 다양합니다. 사고의 원인을 밝혀야 한다고 하기도 하고, 관련 책임자를 문책하고 처벌해야 한다고도 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모두들 타당하고 지당한 주장들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누가 책임지고 해야 할까. 당연히 정부가 해야 한다고 합니다. 혹자는 대통령이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주장들 가운데 거짓 목자 유병언과 그 자식들을 빨리 잡아들여 처단하라는 구호가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합니다. 진리를 왜곡시키고, 혹세무민하여 수십만의 양들의 피를 빨아먹은 흡혈귀 유병언을 잡아들이라는 주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대 혼란 중에 거룩한 교회의 목소리, 교회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을 외쳐야 할까? 교회는 무엇으로 그 거룩함을 드러낼 수 있을까? 교회는 무엇으로 매일 발을 씻어야 할까? 교회를 가장 교회답게 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교회의 정체성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 주님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기도로 대신하고 계십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절).
주님의 이 기도가 지금 대한민국에서처럼 더 절실하게 들릴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따라 외칠 수는 없습니다. 안전한 대한민국, 정의로운 대한민국, 부정부패 없는 청정 대한민국, 친환경 대한민국, 에너지 절약 대한민국, 인권 대한민국... 한 번 씩 다 들어보던 구호 아닌가요?
하지만 이들 구호는 교회가 먼저 나서 외쳐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또는 세상이 외친다고 뒤따라 다니며 외쳐야 할 구호도 아닙니다. ‘바울’이 이들 구호를 이방에 전하고 다니라고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오신 것도 교회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오신 것입니다. 즉 복음의 증인 말입니다. 안전이니, 복지니, 인권이니, 환경이니, 정의니, 민주니, 하는 그 모든 것들은 복음의 결과로 나타나야 할 현상일 뿐입니다.
이제 교회와 나는 기본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해져야 합니다. 즉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고, 전하고, 가르치는 일이 그것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