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마르다의 그리스도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1:17-27약 12분 분량
마침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르다’가 그분을 맞으러 달려 나옵니다. 나는 이 본문을 읽으면서 ‘요한’ 화자가 제시하고 있는 세 가지 표현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나흘”; “많은 유대인”; “위문.”
도대체 이들 표현들이 서로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들을 색깔로 드러낸다면 무슨 색깔일까? 이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어떤 것이 좋을까?
“나흘”이 주는 메시지는 절망일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해 볼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버렸습니다. 사흘 동안은 그래도 일말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사람이 죽은 지 사흘 동안은 그 무덤을 계속 찾아가서 정말 죽었는지 확인해 보고, 또 사흘째 되는 날에는 크게 애곡을 하라고 쓰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날에 소생의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죽은 자의 얼굴이 변색을 하기 시작하면, 그가 정말 죽은 것이니 희망을 포기하라고 쓰고 있습니다. 죽은 지 나흘째가 바로 그러한 시기입니다. 나흘째에는 단순히 죽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패도 함께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그야말로 확실하게 죽었으며, 사망의 권능 아래 사로잡혀 소생의 희망이 완벽하게 사라졌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대결하고 있는 원수가 완전한 권위와 파괴를 휘두르기까지 구원을 보류하신 것입니다. 도전이 클수록 기적도 크며, 그 결과 제자들의 믿음도 더 크게 강화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아버지는 더 큰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물론 그분의 기대는 좌절로 끝나게 될 것이지요.
‘예루살렘’ 근처에서 “많은 조문객”이 찾아 왔다는 언급은 어떻습니까? 이는 당시 그들의 관습에서 볼 때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장례 문화와 아주 흡사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화자의 진정한 의도는 다른 데 있는 듯합니다. 그의 기대 역시 예수님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흐르는 핵심 모티브 하나를 이끌어내기 위함이 아닐까? 다름 아닌 “증거” 말입니다. 한두 사람도 아닌 구름처럼 허다하게 모인 이 무리가 이제 곧 ‘나사로’에게 일어날 그 엄청난 기적의 생생한 증인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허나 그의 기대 또한 허망하게 끝나버릴 것을...
구름처럼 허다한 이들 무리가 두 자매를 찾아와서 무슨 말로 위로를 했을까? ‘바울’ 사도는 이렇게 위로하라고 도움을 줍니다.
13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8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3-14, 18)
하지만 대단히 안타깝게도 이들 무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 자신이 바로 그 소망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이것입니다: “인생이 다 그런 것이지. 누구나 한 번은 다 겪는 일, 참고 이겨내야지.” 우리가 이 장면에서 받는 느낌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무의미”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위로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역설인 것이지요. 이 많은 조문객들의 위로, ‘나사로’를 살려낼 수 없음은 물론, 그의 두 누이의 기분조차 살려낼 수 없었다는 암시일 것입니다.
믿음의 한계. 바로 이 절망의 현장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하지만 때늦은 등장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르다’에게는 그렇습니다. 열정적이고 다정다감하지만, 바로 그 기질 때문에 쉽게 토라지기도 하는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러 달려 나옵니다. ‘마르다’의 절망과 주님의 기대가 만나는 순간입니다. ‘마르다’의 이성과 주님의 계시가 만나려는 순간입니다.
이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마르다’가 먼저 입을 엽니다.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21절). 원망과 투정입니다. 그녀는 지금 심히 기분이 상해있고, 실망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다’의 이성과 믿음은 자신을 이렇게 타이르고 있습니다: “마르다, 그렇다고 함부로 감정을 쏟아내서는 안되지. 너는 사도들조차 부러워하는 믿음의 사람이 아닌가? 주님께서 얼마나 너를 사랑하고 계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니? 여기 모인 사람들을 봐서라도 네가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안 되지.”
그래서 그녀는 속내를 감추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2절). 정말 위대한 믿음의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과연 그녀가 말하는 “무엇이든지”는 그야말로 그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는 것일까? 그 속에는 “죽은 ‘나사로’가 지금 다시 살아나는 것”까지도 다 포함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곧 알게 됩니다. 그녀는 ‘나사로’의 무덤을 여는 것을 반대하고 있습니다(39절). 그러니까 그녀가 말하는 “무엇이든지”는 지금 여기서가 아니라, 내일 그곳에서 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단언하자(23절), ‘마르다’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 주님은 오늘, 여기를 말하고 있는데, ‘마르다’는 내일, 그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님은 성취되고 있는 약속을 말하시는데, 그녀는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현재 진행형을 말하시는데, ‘마르다’는 미래형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물론 애매하게 들리기는 합니다. 그가 지금 당장 살아난다는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 날 부활한다는 것인지가 분명치가 않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마르다’가 이해하고 있는 바는 분명합니다. 당시 ‘사두개’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믿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고백은 실로 위대한 믿음의 고백이긴 하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그녀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새로운 계시. ‘마르다’의 한계를 깨우쳐주기 위함일까요? 주님은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 유명한 선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25-26절).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그의 책 <메시지>에서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풀어 쓰고 있습니다: “마르다야, 네가 부활하기 위하여 마지막 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내가 곧 부활이고 생명이기 때문이다.”
아, 가련한 마르다! 그녀는 자신이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줄을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가 그녀 안에 와 계신 줄을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기를 해방시키고 있는 줄을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참고. 롬 8:2).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인 줄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놀랍고도 새로운 계시이며,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는 선포입니다. ‘마르다’의 고백을 책망하고 고쳐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을 확증해주고 더욱 굳건히 해주는 계시입니다. 그녀의 믿음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계시인 것입니다. 어디 ‘마르다’ 뿐이겠습니까!
“요한 교회”를 향한 화자의 요구이자, 목회적 권면입니다. 지금 이 교회는 유대교의 배척과 핍박으로 극심한 시련을 겪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참고. 서론). 누구나 현실에서 환난을 겪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우리에게 내일이 있지 않는가! 부활 말이야.” 이 같은 믿음은 그 자체로서 현실의 어려움을 이기고,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상당히 긍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허나 교회의 소망이 미래에만 있고, 내세에만 있다면, 그 교회는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현실 도피에다 소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속한 그 모든 것들은 교회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아마 모일 때마다 이런 찬송을 부르겠지요: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교인들이 초대 교회 시절에 많이 있었습니다. 임박한 종말론을 맹신하며, 이원론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던 교인들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랬습니다. 그 교회의 회중들은 늘 천국 갈 준비하느라고 일도 하지 않았고, 모여 기도만 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일도 직장도 가족도 다 내팽개쳐버리고 말이지요. 당장 속은 편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교인들을 향해서,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훈계하고 있습니다(살후 3:10).
하나님은 어제의 하나님도, 내일의 하나님만도 아닙니다. 항상 오늘의 하나님입니다. ‘모세’가 ‘시내’산 중턱에서 불붙는 떨기나무 사이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처음 만나, 그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나는 야훼다”(출 3:14). 무슨 말입니까? 이것을 <칠십인 역>에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 니라”로 번역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이 구절을 “I am who I am”으로 재번역하고 있습니다.
‘야훼’의 정확한 의미는 알 길은 없으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칭하실 때,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의 하나님”이라 하신 것은 “늘 살아계신 하나님”, 즉 “오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요한 교회> 목사님이 자신의 회중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가운데에 이미 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그 능력을 실감하고, 체험하며, 드러내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마땅히 그렇게 살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 이상하고 신기한 기적인 것입니다.
계시의 도전. 계시는 항상 반응을 요구합니다. 예배에서 설교가 항상 헌신과 결단을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계시와 설교는 학교의 강의와는 다릅니다. 강의는 반응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듣고 받아 적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계시와 설교는 반응을 요구합니다.
설교에 대한 반응은 각양각색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좋았어요”라든지, “심금을 울리는 설교였습니다”라든지, “큰 위로가 되었어요”라든지, “정말 기막힌 성경 해석이었습니다” 등등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훌륭한 설교라면 당연히 이 모든 찬사를 받아야 하겠지요.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반응을 원하셨을까? 그분은 설교 후에 ‘마르다’에게 이렇게 묻지 않았습니다: “마르다야, 이제 네 기분이 좀 나아졌느냐? 네 말이 위로가 좀 되었느냐? 이제 좀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회복하게 되었느냐?
그분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분은 ‘마르다’가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녀의 기분이 어떠한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느낌은 어디까지나 느낌일 뿐입니다. 감정이나 느낌만큼 변덕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은 아침 이슬과도 같고, 요동치는 파도와도 같다 하겠습니다. 왔다가는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다시 찾아오고 하지요.
그래서 <시편>의 시인도 “인간을 의뢰하지 말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인식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2:23-25).
그래서 그분은 ‘마르다’의 기분에 대해서 물었던 것이 아니라, “네가 믿느냐?”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도전입니다. “응답하고, 헌신하라”는 도전인 것이지요. 한 쪽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보내도 되는 노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들은 것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고 계속 흘려보내기만 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두 아들을 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마 21:28-30).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말합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 가겠습니다.” 해놓고서 가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작은 아들에게 같은 주문을 합니다. 작은 아들은 “싫습니다.” 했습니다만, 나중에 뉘우치고 갔습니다.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아버지의 설교에 제대로 반응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큰 아들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즉 이스라엘입니다. 오늘로 치자면 교회입니다. 두 아들을 둔 나는 내 자식들이 내말을 듣고 반응하기를 바라는 것이지, 남의 자식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할 수 없지요. 우리 아버지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라는 생각입니다. 그분은 늘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시며, 교회가 그분의 말씀에 반응해 오기를 바라시는 것이지, 이방인들을 향해서 설교하시는 것이 아니며, 이방인들을 향해서 문을 두드리며 열라고 요청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참고. 계 3:20).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 21:31하). 예수께서 교회의 문을 두드렸는데, 실제 듣고 문을 열어준 쪽은 엉뚱한 이방인의 문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씨는 내 밭에 뿌렸는데, 열매는 이웃 사람의 밭에서 열린 것입니다. 이거 정말 통탄할 노릇이지요! 헛농사 한 것입니다.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교회 즉 큰 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무응답, 불순종으로 일관했던 대가가 무엇이었을까? 심판과 지옥이었을까? 그렇습니다. 좀 어려운 말을 빌자면, “실존적 죽음”입니다. ‘아담’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경험해야 했던 바로 그 죽음 말입니다. 단절과, 고독과, 허무와, 무의미의 인생 말입니다.
그저 모든 것들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숙제와 과업으로 다가옵니다. 귀찮고 따분할 뿐입니다. 기도도, 묵상도, 예배도, 나눔도, 봉사도. <성경> 말씀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구원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루라고 했지만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 것이지요. 손자가 할아버지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할아버지 수염을 뽑게 됩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요청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실천을 해 본 적이 없는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왜 실천이 없었을까? 구체적인 적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의 도전은 구체적입니다. 그분은 “네가 믿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을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방금 내가 들려준 그 설교 내용을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내용을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고 실천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성경공부가 지루하고 답답하다. 목장이 늘 그대로다. 할 이야기가 별로 없다. 흥분이나 감격이 없다. 만일 이런 생각이 든다면, 진단은 하나입니다. 새 생명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부부에게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것은 두 가지일 것입니다. 낳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 생명에 대한 강렬한 욕구나 욕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자기들 직장 다니고 돈 벌고 그 일이 즐겁고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자 하는 강렬한 동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안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한 주 무엇을 할 것인가? 이번 달에 목표는 무엇인가? 그리고 올 한 해에 전도나 봉사의 목표가 무엇인가 목장에서 모일 때 마다 전도의 대상이나 봉사의 대상을 정해 놓고 함께 간곡하게 기도하는 습관부터 기릅시다. 함께 하는 기도를, 그것도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한 기도이니 주께서 분명히 응답하시고, 도우러 달려오실 것입니다. 매년, 매달, 그리고 매주, 모일 때마다 기도제목을 정해놓고 시작하기 전이나 또는 마칠 때 정말 애통하게 기도해 봅시다. 구하면 얻을 것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