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1:16약 12분 분량
왜 사람들은 누군가를 평가함에 있어 그 사람의 업적보다는 실패를 훨씬 더 오래 기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도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각 지도자마다 이루어놓은 훌륭한 업적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 사람들 사이에는 그들의 실패가 더 많이, 그리고 더 오래 회자(膾炙)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칭찬에 인색하며, 비판에 능수능란한 우리네 자화상(自畵像)일 것입니다.
하지만 가까운 중국만 하더라도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천안문 입구에는 모택동(毛澤東)의 초상화가 그가 죽은 이후 지금까지 걸려있습니다. 여전히 중국 정부가 공산정부라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지만, 사실 그가 자신의 동족들에게 저지른 반인륜적인 만행은 문화혁명(文化革命) 하나만으로도 용서받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인민들은 그를 중국 근대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추앙하고 있다 합니다. 그가 남긴 공과(功過) 중에서 과(過)는 잊고 공(功)은 기리고자하는 중국인의 사고 체계가 특이하다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도마’ 사도를 기억하는 우리 교인들의 인식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항상 그를 부를 때마다 그 이름 앞에 수식어를 붙이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가 그것입니다. 천국에서 이를 내려다보고 있을 그분의 기분은 과연 어떨까요? 사람들이 나를 부를 때마다 “의심 많은” 아무개 씨하고 부른다면 내 기분은 어떨까?
사실 이 분이 왜 이런 오명(汚名)을 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부활절 이후 그가 보여준 태도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의 간증, 동료 사도들의 한 결 같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주님의 부활을 결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20:26).
이건 정말 믿기 어려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의 사도가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부활을 가장 먼저 거부하고 부인한 사람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사도였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제 정신을 가진 자라면 부활을 온전히 믿을 수 있을까요? 모든 논리를 뛰어넘는, 모든 과학적 추론을 거부하는 이 사건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사도 ‘도마’는 의심하기 위해서 의심했던 것이 아니라, 믿기 위해서 의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 나는 정말 믿고 싶어.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누가 좀 도와주었으면...”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 ‘도마’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소심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장면에서 만나는 그의 모습은 전혀 딴 판입니다. 과격하고, 무모하며, 결연(決然)한 모습입니다. 의심과 회의(懷疑)는 어디다 두고 온 것일까요? 일단 결심이 선 이상 한 치의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태도입니다. 지금은 생각하고 고민할 때가 아니라 행동할 때라고 믿었던 것일까요? 작고하신 ‘존 스토트’ 목사님의 말대로, “신학은 보수적으로 신앙은 과격하게.” 이것이 그의 신앙 모토였을까?
우리도 가자. 혹자는 이런 그를 두고 자포자기(自暴自棄), 즉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도 아닌 ‘도마’ 사도가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 사도들을 향해서도 동일한 헌신과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지금, “우리도 가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고 싶으면 혼자 가면 될 것을 왜 같이 가자고 할까? 힘든 일이라 혼자 하기 싫었음일까? 아닌 게 아니라 영광은 혼자 누리고 싶고, 고통은 나누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기는 하지요. 칭찬 받을 일은 “내”가 했다고 하고, 비난 받을 일은 “우리”가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일까! 그는 지금 동료 사도들에게 함께 가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이런 태도를 두고 물귀신 작전이라 폄하(貶下)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허나 그가 “우리도 가자”라고 말할 때, 오늘 나도 함께, 그리고 우리 교회도 함께 포함시키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발언이 교회를 향한 권면과 교훈을 담고 있다고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주님도 한 분이시고, 성령도 한 분이시며, 이스라엘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의 시인은 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 우리 하나님”으로 불러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기도문>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가 아닌 것이지요.
이 말은 곧 하나님은 교회의 하나님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 나라의 국회의원 개개인은 그 나라의 입법기관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인 개개인은 곧 교회이자 성전(聖殿)인 것이지요(고전 3:16). ‘아간’이 곧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이 곧 ‘아간’이었듯이 말입니다(참고. 수 7:11). 그래서 한 사람 ‘아담’이 범죄했을 때,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참고. 롬 5:12). 즉 모든 인류가 ‘아담’과 함께 범죄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김 태정의 범죄는 곧 <우리교회>의 범죄입니다. <우리교회>의 영광은 곧 김 태정의 영광이 됩니다. 우리는 이를 인류의 결속성(solidarity)이라 부른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곧 이스라엘이고 교회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스토트’ 목사님이 교회에 대해서 한 유명한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을 교회에 보내지 않고 구원시킨 적이 없고, 구원시키지 않고 교회에 보내신 적이 없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지만 교회는 나가지 않아.” 이 말은 사실일까요? 거짓말입니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 인(一人) 교회는 있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 유명한 미국의 ‘윌로크릭’ 교회는 자신의 사역을 다음 세 문장으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1) 주를 높인다(Exalt the Savior); (2) 성도를 준비시킨다(Equip the saints); (3) 죄인들을 복음화 한다(Evangelize the sinners). 이들 세 문장을 세 개의 단어로 요약하자면, 예배와 교육과 전도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 우리 교회의 <이상과 정신>을 통해서 배웠듯이, “교회의 사역은 관계의 사역”이며, 관계 맺기는 소수 영웅적인 엘리트의 전유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콩가루 집안”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한 집에 살고는 있으나 구성원 각자는 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집안을 말합니다. 이 남하 목사님이 오래 전에 간파했듯이, 교회는 콩가루나 콩알이 아닌 메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끈끈하게 하나로 뭉쳐있는 메주 말입니다.
우리교회가 목장 교회를 지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모두의 사역은 나의 사역이 되기 어려우며, 모든 사람의 친구는 어느 누구의 친구도 되기 어렵지만, 불과 몇 사람만이 모이는 목장에서는 콩가루가 아닌 메주가 되는 일이 비교적 쉽기 때문입니다. 메주의 정체성은 “나”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만남 가운데 관계가 형성되고 영적인 쌍둥이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요한’ 화자는 ‘도마’를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로 칭하고 있습니다(11:16; 20:24). ‘도마’는 ‘히브리’어 이고 ‘디두모’는 헬라어입니다. 둘 다 “쌍둥이”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지금 ‘도마’ 사도는 “우리도 가자”라고 독려하며 자신의 닮은꼴을 만들려 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국 대학이 세계 대학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높은 강단 대와 대형 강의실을 없애야 한다고 세계의 우수 대학교 총장님들이 권고하고 있습니다. 교수가 수백 명의 학생들을 상대로 강단 대 위에서 자신의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하는 방식으로는 학생 개개인의 창의성과 상상력을 자극하고 개발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판단 때문이지요.
교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교회 교육에서 가장 비효과적인 방식이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설교는 일대 다수의 교육이지요. 하지만 다수를 상대로 한 설교는 어느 누구의 설교도 되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청중의 수가 많을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니 모두를 향한 도전이나 권면은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굳이 헌신이니 결단을 위해 설교단 앞으로 나갈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누가 내 대신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저 큰 무리 속에 묻혀 넓은 길을 떠밀려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떠합니까? 솔직히 설교를 듣고 삶의 방식을 바꾸었거나, 한 주 간의 삶의 지표로 삼아본 적이 있습니까? 한 주 동안 살면서 지난 주 설교가 생각이 나서 잘못된 버릇이나 습관을 바꾸어 본 적이 있습니까? 모르긴 해도 거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목장을 하자는 것은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해보자는 것입니다. 모두를 향한 권면과 도전을 나의 것으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설교를 나를 위한 개인적이고 특별한 설교로 삼자는 것입니다. 누가 이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까? 당연히 목자입니다. 목자는 애비이고, 선생이며, 코치이고, 감독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닮은꼴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도마’ 사도가 외쳤듯이, “우리가 가자”라고 강력하게 권고해야 합니다.
목자는 목원(牧員)이 듣기 싫어해도 말해야 합니다.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상대가 듣기 싫어하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계모(繼母)는 전처(前妻) 소생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차라리 없어져주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목자는 양을 위해 울기도 해야지만, 동시에 분노하고, 잔소리도 해야 합니다. 자신의 ‘디두모’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지닌 가장 거룩하고 가장 자랑스러운 특권도 이것입니다. 자신의 분신(分身)을 만드는 것, 즉 교회를 개척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감독이나 집사들은 고함치고 야단쳐야 합니다: “우리도 가자.”
죽으러 가자. 어디를 가자는 것입니까? 단순히 주일 예배에 참석하자는 것입니까? 교회학교 성경공부 하러 가자는 것입니까? 목장 모임에 나오라는 것입니까? 이 모두 시시콜콜한 초청일 뿐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백성이 그까짓 하찮은 일들조차도 힘들고 귀찮아한다면,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정신건강에 훨씬 이로울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스트레스 받을 일 많은 이 세상에서 종교라는 짐을 하나 더 얹어놓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짐을 던져버리고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침례교 정신을 사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유와 책임에 대한 대헌장(大憲章)을 침례교만큼 더 명쾌하게 선언하고 있는 교단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침례 교인이 된다 함은 성숙한 어른이 됨을 의미합니다. 침례도, 교회 회원이 되는 것도 억지가 아닌 자유의사에 의해서 결정합니다. 이모저모 상세하게 따져 본 후에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나 여러분이나 <우리교회> 회원으로 등록하고 헌신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모두 ‘도마’ 즉 쌍둥이가 되겠다는 헌신입니다. 예컨대, 간증 한 번 할 때에도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우리 모두는 한 결 같아야 하며 서로 쌍둥이처럼 비슷해야 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같은 결과는 반복 훈련을 거친 숙달되고 숙련된 자들만이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듣는 이로 하여금, “아, 그 간증 정말 멋져!” 하고 경탄하게 만듭니다.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갑니다. 모두 하나가 되어 어디를 가자는 것입니까? “죽으러 가자”입니다. 아! 결국 올 것이 오고 말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결코 듣고 싶지 않은 초청입니다. 나만은 예외이고 싶은 초청입니다. 그런데 ‘도마’는 혼자 가겠다가 아니라, “우리가 가자”고 말합니다. 열심히 살자가 아니라, “죽으러 가자”고 말합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하고, 먹고, 쉽니다. 그런데 그는 교회는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는 이미 죽었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상)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죽은 자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를 누가 귀찮게 집적대겠습니까? 죽은 자를 누가 유혹하며 지배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를 누가 종으로 삼으려 하겠습니까? ‘사탄’도, 세상도, 죄도 죽은 자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도마’ 사도가 “죽으러가자”고 했을 때, 바로 이런 죽음까지 의미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그는 분명 성숙한 교회가 가야할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성숙한 교회 말입니다. 적어도 한 가정의 가장(家長)이라면, 그가 책임 진 가족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려 합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들은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위해서 죽겠다고 헌신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가족이나 가정을 책임 질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자신만을 돌아보면 됩니다. 자신의 꿈과 비전을 위해서 달려가면 됩니다. 허나 어른은 다릅니다. 자식을 위해서 감히 죽을 각오를 합니다. 그것이 어른의 모습인 것이지요.
자식을 위해 죽겠다는 말은 내가 가진 시간(Time)이나, 재능(Talent)이나, 재물(Treasure)을 기꺼이 바치고 버리겠다는 의미입니다. 그 결과 감사나 칭송이 아니라, 배신과 모욕과 수치가 돌아오더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말입니다. ‘도마’는 어린 아이 즉 초신자(初信者)를 향해서 “죽으러 가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누구였습니까?
나는 어른입니까? 아니면 아직도 어린아이입니까? 이 질문을 달리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나는 목자입니까 아니면 양입니까? 나는 선생입니까 아니면 학생입니까? 나는 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섬김을 받고 있습니까? 젖을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젖을 받아먹고 있습니까?” 일 년이 지나도, 오 년이 되어도, 십년이 지나도, 늘 배우기만 하는 자들로 가득 찬 교회는 유치부 교회이며 실패한 교회입니다.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교회입니다. 아니 교회라기보다는 그냥 사교클럽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목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운 것을 시험해 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생기지 않습니까? 자주 만나는 이웃이나,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이나, 직장 동료나, 가르치는 학생들과 내가 가진 것들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까? 아니면 마치 개나 돼지가 코를 땅에다 대고 늘 킁킁거리며 살아가듯, 나 역시 땅에다 온 소망을 두고 살아가느라 위에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주와 함께. ‘도마’ 사도가 “우리도 죽으러 가자”라고 했을 때, “우리끼리 죽으러 가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과연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했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조금 전에 낮이 열두 시간이라 하셨고, 낮에 다니는 자는 실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도마’ 사도는 부지중에, 교회가 사는 유일한 길은 “주와 함께 죽는 것” 뿐이라고 선언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이번 ‘유대’를 향한 여행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세상을 위한 생명의 여행이 될 것입니다. 교회 역시 이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탄생한 교회도 주님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질 때, 죽음을 정복하는 생명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0)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5)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그와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그와 함께 죽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