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4:27-31약 10분 분량
‘보이스’(J. M. Boice) 목사님은 이 마지막 단락에 관한 설교를 하면서, “평안”(平安)을 주제로 한 미술경연대회에서 있었던 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제에 걸 맞는 많은 작품들이 출품되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고 기대할 수 있는 바대로, 대부분의 작품들이 ‘밀레’의 만종(晩鐘)을 연상시키는 목가적 풍경이나, 아름다운 대자연의 모습 등을 그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최우수작으로 뽑힌 작품은 평안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그림이었습니다. 그 그림을 묘사해 보자면 대충 이런 모습입니다.
거대한 폭포수가 천애(天涯)의 절벽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고, 절벽 중간 어디쯤에 폭포수와 함께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나무 한 그루가 절벽바위 틈새에 뿌리를 박은 채 비스듬하게 누워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 가지 사이로 얼기설기 잔가지들로 이루어진 새 둥지 하나가 있고, 그 안에 새 한 마리가 알을 품고 한가로이 앉아있습니다. 마치 평안을 염원하는 주최 측이나 다른 참가자 모두를 비웃기라도 하듯 말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는데, 이 새는 정녕 그 나무가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것으로 순진하게 믿고 있었던 것일까요?
어떻습니까? 나라면 이 그림을 최우수작으로 선정한 심사위원의 결정에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왜일까? 생각해 보면 그 새는 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나무 가지가 부러지든, 나무가 뿌리가 뽑혀 통째로 절벽 아래로 떨어지든,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품고 있던 알도 발톱 사이에 끼고 날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새에게 있어 평안이란 견고하게 뿌리박고 있는 나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비상(飛上) 능력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가 자신이나 심사위원 모두 이 사실을 간파했던 것일까요?
화평과 평화. 얼마 전 박 근혜 대통령께서 미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우리나라 휴전선 150 킬로 지역을 세계 평화공원으로 조성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반도에서 이 지역만큼 평화로운 곳이 있을까 싶습니다. 인적은 물론 도시의 공해와 소음과도 거리가 먼, 그야말로 별천지입니다. 이곳에서 온갖 종류의 진기한 동식물들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이곳이 주는 고요와 평화를 한껏 즐기고 있을 뿐입니다. 철책 선을 마주하며 눈을 부릅뜨고 주야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는 병사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말입니다. 이 장면 역시 그림으로 그려 출품한다면 우수작으로 선정될 공산이 커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 동물들이 철책 선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다 해도 여전히 이처럼 한가롭게 지낼 수 있을까? 멎었던 총성과 포격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고, 탱크와 군대가 요란하게 들이닥친다 해도 여전히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까? 진정 이들은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 과연 이 장면을 평화라 할 수 있을까? 비록 한시적이긴 하지만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그렇게 보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그대로 유지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이 말은 평화의 조건이 휴전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다는 뜻이겠지요. 평화가 나 아닌 어느 누군가에게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이와 비슷한 그림을 감상해 보기로 하지요. ‘이사야’ 선지자가 소개하고 있는 그림입니다.
6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6-8)
양과 염소와 송아지와 암소는 초식동물입니다. 그리고 이리나 표범이나 사자는 육식동물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지금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현실에서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겠습니다만, 지금 이곳에서는 평화가 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양과 염소와 송아지와 암소가 헌신적으로 노력한 결과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리와 표범과 사자가 본래의 식성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즉 육식성을 버리고 초식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달리 표현하자면, 이리와 표범과 사자는 자신들의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버리고 양과 염소와 송아지와 암소처럼 살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독사도 스스로 이빨을 뽑아버렸거나, 아니면 독을 더 이상 생산하지 않기로 작정했기에, 어린아이가 마음 놓고 독사 굴에 손을 넣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곳에서 양과 염소와 송아지와 암소와 어린 아이가 누리고 있는 평화(平和)와 평안(平安)은 실은 화평(和平)의 결과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두 단어는 두 글자의 순서만 다를 뿐이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실로 차이가 큽니다. 화평은 적대적인 관계를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전쟁에서 서로 무기를 내려놓고 강화(講和)하기로 작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평화는 이렇게 해서, 즉 화평의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초식동물들의 평화와 안식은 그러니까 자신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육식동물들의 선택에 달려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아, 평화란 내 속에 있었던 것도,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내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로구나!
그리스도의 평안. 그런데 이 그림은 어떻습니까? ‘갈릴리’ 호수 한 가운데입니다. 호수가 워낙 커서 당시 사람들은 이를 바다로 불렀다고들 합니다. 호수는 내륙에 위치해 있어 대개 수면이 잔잔하고 고요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만, ‘갈릴리’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풍랑(風浪)이 다반사로 있었으며, 때로는 그 규모가 너무 커서 노련한 어부들조차 두려워 떨게 했던 것 같습니다.
<공관복음>은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마 8:23-27; 막 4:35-41; 눅 8:22-25).
22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 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눅 8:22-25)
에피소드의 주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만, 이 그림을 설교 벽두에 소개한 바 있는 “평화 미술 경연대회”에 출품하면 어떨까요? 칠흑같이 어두운 밤, 몰아치는 비바람, 넘실대는 풍랑, 요동치는 일엽편주(一葉片舟), 여기에 풍랑의 소음(騷音)과 요동(搖動)을 더욱 부채질 하고 있는 제자들의 야단법석, 그리고 그 안에서 태평스럽게 잠을 자고 있는 예수님. 이 그림은 실로 대조(對照)와 해학(諧謔)의 절정을 담아내고 있는 걸작(傑作)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있었으나 없었습니다. 배 안에는 있었으나,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들 곁에는 있었으나, 그들을 감싸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을 감싸고 있었던 것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었습니다(참고. 창 1:2). 빛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해학이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비바람과, 풍랑과, 요동치는 배와 완벽한 공명(共鳴)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같이 춤추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붙잡고 그분과 함께 스텝을 밟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방주 안에서 방주와 함께 흔들리며 홍수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노아’와 같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나는 지금 제자들을 나무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처지가 못 됩니다. 그 배 안에 내 모습도 함께 보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흔들리고, 고함치며, 불평하며,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내 모습 말입니다. “내가 죽게 되었습니다”고 소리치며 예수님을 내려다보니, 더욱 기막힌 장면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잠을 자고 있습니다! 마치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머니 뱃속에 든 아이가 이처럼 평화로울 수가 있을까요? 이 장면을 묘사하기 위하여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단어들을 생각해 보니 이런 것들입니다: 고요; 잠잠; 태연; 평온; 평안. 이와 같은 대조, 즉 예수님의 안과 밖의 대조가 실로 기막히다는 것입니다.
평안이 하는 일.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지금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주겠다고 하는 “나의 평안”이 한 일입니다. 평안의 능력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냥 평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안입니다. 그가 가지고, 누리고 있는 평안입니다. 어느 누구도 만들어낼 수 없는 평안입니다. “평안”, 즉 “평화”(에이레네)는 ‘히브리’어 ‘샬롬’을 ‘헬라’어로 번역한 단어입니다. 이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 즉 “화평”을 뜻하지 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화평이 이루어내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그야말로 완벽한 조화와, 질서와, 안식이 지배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나는 지금 새로운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의 질서가 창조의 결과였듯이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평안”은 현재 있는 상태를 단순히 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새롭게 창조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필요하다면 지배하고, 정복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날 밤, 그 호수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주님은 자신의 평안으로 그 모든 혼돈과, 흑암과, 공허를 잠잠하게 했습니다. 지배하고, 정복했으며, 다 죽여 버렸습니다. 그분은 이와 같은 능력을 사도들에게 주시려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곳에서는 그것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있다 해도 누가 찾아 줄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좋은 것을 내가 갖지 누가 남에게 양도하려 하겠습니까! 세상이? 사탄이? 내 이웃이? 모두들 필사적으로 그것을 찾고 있습니다. 그 ‘샬롬’을 누리려고 말입니다. 그날 사도들도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25절).
‘이사야’ 역시, 양과 염소와 암소와 어린 아이가 해(害)를 당하지 않고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 같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갈라지고, 분열되고, 깨어지고, 원수가 되어 혼돈과, 흑암과, 공허로 가득 차 있던 그 모든 관계들이 원상으로 복구가 된 모습입니다. 재창조인 것이지요. 화평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능력 때문입니다. 평안의 능력 말입니다. 이와 같은 재창조의 능력은 단순히 피조물들 사이에 국한된 것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마음마저 돌려놓았습니다. 즉 나와 하나님의 적대적인 관계마저 화평으로 돌려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성령님의 열매. 화평은 성령님의 열매입니다(갈 5:22). 예수님께서 또 다른 보혜사, 즉 성령님을 언급하신 직후에 화평을 약속하고 있음이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는 것을 기뻐하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28절). 이제 이 말씀의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아들이 자신을 화평의 제물로 아버지에게 드린 후에야,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예언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 역시 아버지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애초에 내 안에 평안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폭포수 절벽의 그 새가 누리고 있는 평안도 실은 평안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유심히 살펴보면 그 새는 한 곳에 앉아 있으면서도, 단 한 순간도 고요하게 앉아있는 법이 없습니다. 온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경계를 늦추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그 안에도, 그 밖에도 자신의 안녕을 보장해 줄 그 어떤 것도 없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절대 독재자일수록 더 불안한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고 있는 사람일수록 왜 더 갖지 못해 안절부절 일까? 그 속에, 그리고 그 밖에 평안이 없다는 증거이겠지요. 받지를 못했으니 말입니다.
그것은 그저 값없이 얻는 선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칼처럼 사용해야 합니다. 물리치고, 베고, 자르고, 정복하고, 죽여야 합니다. 혼돈과, 무질서와, 불안과, 흑암과, 공허를 말입니다. 그 비결은 이것입니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