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포도나무와 농부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5:1약 11분 분량
우리 부부가 살고 있는 전원주택 단지는 주변이 온통 포도밭으로 둘러 쌓여있습니다. 그리고 포도의 종류도 일반 노지 포도에서부터, 청포도, 그리고 거봉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이들 중에서 맛을 비교하자면 단연 씨 없는 거봉이 으뜸입니다.
특히 근처 교회의 한 장로님이 재배하는 거봉은 전국 유명 백화점에서 판매될 정도로 맛과 품질이 뛰어납니다. 이 포도는 재배자인 장로님의 이름을 따서, “김진수 거봉”으로 불리는데, 국내에서 유명 브랜드로 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젊은 영농 후계자들이 이분의 거봉 재배법을 배우기 위해서 원근 각처에서 모여들고 있습니다. 아마도 무슨 각별한 비법이 있나 봅니다.
그 비법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지 못하나, 이분이 거봉을 수확하기 까지 기울이는 노력이나 정성만큼은 늘 보아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나는 이분의 거봉을 맛보기 전까지는 포도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포도의 독특한 신맛도 그렇고, 껍질과 씨 가려내는 일이 귀찮았기 때문입니다(얄궂게도 포도는 껍질과 씨앗에 좋은 영양소가 다 들어있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분의 거봉은 씨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맛도 아주 달고 좋습니다. 알이 하도 커서 몇 개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여름이면 이분의 포도를 수 킬로 씩 사먹기도 하고, 주변 친지들에게 선물로 사보내기도 합니다. 이 포도를 먹어본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맛있다고 칭찬 일색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택단지 입구 바로 곁에 노지 포도밭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민 중 어느 누구도 이 포도를 사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맛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포도밭 주인이 수시로 농약을 뿌려대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거봉과 노지 포도는 분명 종자부터 달라 맛이 다를 것이라고 기대는 합니다만, 맛의 차이가 단지 종자가 다르기 때문만은 아닌 듯합니다. 두 재배자가 기울이는 노력이나 정성도 큰 몫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노지 포도밭 주인이 밭에서 일하는 것을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한 번 씩 와서는 농약 뿌리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리 “김진수 거봉”이라 해도, 이처럼 주인을 잘못 만나면 필경은 맛없는 노지 포도로 일생을 마감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농부의 일. 묘목이 “김진수 거봉”이라 해서, 그 열매도 무조건 “김진수 거봉”이 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지요. “김진수 거봉”이 다른 거봉들과 맛을 달리하는 것은 농부 김진수 장로님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네 잠언은 이 사실을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습관이나 체질이나 운명을 결정짓는 요인을 놓고 한 때 설왕설래 논란이 많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극단적인 운명론자라면 유전적 요인을 더 중요시 할 것이고, 반대로 극단적인 진화론자라면 환경적 요인을 앞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둘은 결국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 잠언이 설파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구슬은 처음부터 이미 구슬이겠습니다만, 이것이 보배로 빛을 발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암시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바클레이’(W. Barclay)는 단순한 거봉이 “김진수 거봉”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좋은 밭이 필요합니다. 밭은 뿌리가 썩지 않도록 배수 시설을 잘 해주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약간 경사진 곳에 계단식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좋습니다. 포도 순은 옆으로 자라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나무마다 적어도 3미터 간격으로 띄워 심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연한 순들이 아래로 쳐지지 않도록 얼기설기 그물 받침대를 만들어, 순들을 치켜세워 그 위에 걸쳐놓아야 합니다.
또한 나무가 미처 성숙하기도 전에 열매를 맺는 것은 좋지 않으므로, 적어도 처음 삼년은 과감하게 가지들을 잘라주어 성장을 더디게 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삼 년이 지나고 나무가 성숙하여 열매를 맺을 시기가 오면, 12-1월 사이에 가지치기를 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남아있는 가지들이 더욱 풍성하게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때 잘려나가는 가지는 당연히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들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재배 과정을 두 개의 단어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1) “제거하다”(ai[rw, 아이로); (2) “깨끗하게 하다”(kaqaivrw, 카다이로)(참고. 2절).
일견 두 단어는 의미가 서로 다른 듯하지만, 실은 같은 ‘헬라’어 어근(語根)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포도재배와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언어의 유희를 보여주고 계신 것으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 단어 “제거하다”는 문자 그대로 잘라내는 행위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실은 더 풍성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들어 올리다” 또는 “치켜세우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농부의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즉 포도 열매는 속성 상, 가지에 매달려 아래로 향하고 있어야 하는데, 만약 가지가 땅을 향하여 아래로 쳐져 있다면, 경험 많은 농부라면 그 가지를 무조건 잘라낼 것이 아니라, 그것이 위를 향하도록 지지대 등으로 받쳐주어서 어린 줄기가 햇빛이나 공기와 접촉할 수 있도록 해줄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종 병충해의 피해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가지들을 올려주고, 세워주어도 여전히 말라 죽는 가지들이 생겨나게 마련일 것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두 번째 단어, “깨끗하게 하다”가 그 답입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영어 단어 “카타르시스”(catharsis)가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농부의 행위를 쉽게 그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카타르시스”는 말 그대로 일종의 정화(淨化) 내지는 배설(排泄)을 의미합니다. 문학에서는 비극을 통해서 정신이나 정서를 정화하고 상쾌하게 해주는 것을 말하며, 의학에서는 하제(下劑)에 의한 배변 작용으로 사용되기도 하며, 정신의학에서도 억압된 정서를 배출시키는 정신요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포도나무의 성장에 해로운 일체의 장애요인들을 제거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넓게 보면, “가지치기”(prunning)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을 포도나무 또는 포도밭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를 심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과연 어떤 품종이었을까? 거봉이었을까, 아니면 노지 포도였을까? <이사야>는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1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사 5:1-2상)
포도 종자는 말할 것도 없고, 포도밭도 최고등급이었다고 말합니다. 김진수 장로님이 어찌 노지 포도를 키우겠습니까! 당연히 최상급의 포도주가 나와야 할 것이며, 하나님도 그렇게 기대했다고 말합니다. 오죽했으면 술틀까지 미리 다 만들어놓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요행수를 바라고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극상품” 거봉 종자를, “심히 기름진” 밭에 심었으니, 그냥 두어도 극상품의 포도주가 될 것으로 기대하며 무위도식(無爲徒食), 공생도사(空生徒死)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느 농부처럼 “망대를 세워”, 늘어지고 처진 포도 순들을 위로 세워 올리는 등 여름 내내 해야 할 일은 다 하며 기다렸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끊임없이 일으켜 세웠습니다. 자기 백성을 격려하고, 고무시켜, 자신과 더 밀접한 관계 속으로 이끌어 올리는 행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까지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그 유명한 노래, “You raise me up”을 떠올려보면 이 단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정성과 열심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히 1:1).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사야>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 5:2하). 헛농사가 되어버렸다고 말합니다. ‘이사야’도, ‘예레미야’도, ‘호세아’도, ‘에스겔’도, 그리고 하나님마저도 모두 실패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모든 선지자들은 포도나무나 포도밭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하나님의 실패한 농사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4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7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 5:4, 7)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렘 2:21)
네 피의 어머니는 물가에 심겨진 포도나무 같아서 물이 많으므로 열매가 많고 가지가 무성하며(겔 19:10)
최상 등급의 거봉 종자를 심었는데도, 열매는 노지 포도가 되어버렸으니, 이것이 어찌 나무의 잘못이겠습니까! 농부가 농사를 잘못지은 것은 아닐까요? 시인도 본인의 말에 동의하고 있는 듯합니다.
8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9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10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시 80:8-10)
시인의 전언(傳言)에 따르면, 포도밭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고, 뿌리는 그 좋은 땅에 깊이 박혀있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지 맙시다. 가지는 엄청난 “백향목” 같았습니다! 우리가 늘 보는 비비 꼬이고 왜소한 가지가 아니라, 거대한 백향목 말입니다. 아무리 수사라고 하지만 포도나무가 백향목 같았다니요!
그런데 어찌하여 열매는 돌연변이가 태어났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구 잘못입니까?
참 포도나무. 예수님은 지금 어느 누구의 잘못을 따지려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냥 “내가 참 포도나무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덧붙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실패한 농사가 하나님 잘못은 아님을 암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진정한 장인(匠人)은 거봉을 거봉으로 만들 수 있는 자가 아니라, 노지 포도를 거봉으로 만드는 자가 아닐까! 탁월한 교사는 우등생을 받아 우등생으로 졸업시키는 자가 아니라, 열등생을 우등생으로 키워내는 자가 아닐까! 꼴지를 받아 일등으로 만들어내는 교사가 진정 탁월한 교사가 아닐까!
이와 관련해서 ‘이사야’는 아주 흥미로운 노래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그는 지금 이스라엘과 관련해서 <시편>의 시인과는 정 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누구입니까? 많은 학자들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며,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모세’도 이점에 동의한 바 있습니다: “야훼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적으니라”(신 7:7). 선지자 ‘에스겔’은 ‘모세’보다 더욱 냉소적입니다:
2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3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4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5그것이 온전할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하지 아니하였거든 하물며 불에 살라지고 탄 후에 어찌 제조에 합당하겠느냐(겔 15:2-5)
바로 이점이 참 이스라엘의 모습이자 모양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이 노래를 자신에게 적용한다 해서, 전혀 이상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즉 “내가 참 포도나무다”라고 하시는 것은 곧 “내가 참 이스라엘”이다는 선언과 결국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와 같은 포도나무, 즉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며,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포도나무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7:17:5; 막 9:7; 눅 9:35).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며,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노지 포도나무를 이 농부는 왜 좋아하는 것일까? 결과 때문입니다. 그 나무가 거봉을 맺어 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노지 종자(種子)가 거봉을 맺을 수 있다면, 반대로 거봉 종자가 노지 열매로 일생을 마감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두 경우 모두 인생 역전(逆轉)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문학에서 전자(前者)를 비극(悲劇)으로, 후자(後者)를 희극(喜劇)이라 칭합니다. 어떻게 이와 같은 극적 반전이 가능하게 되었을까? 이는 정녕 누구의 책임일까? 전적으로 농부나 작가의 책임일까?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것은 우리의 관심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예수님의 관심사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곳 본문에서는 말입니다. 다만 그분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착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스스로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경고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스스로를 높이지도 말라고 경고하고 있을 뿐입니다. 스스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9:41).
이스라엘도, 교회도 포도나무는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가지일 뿐입니다. 진정한 포도나무, 즉 하나님의 아들은 오직 자신 밖에는 없음을 다시 한 번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 역전의 책임 소재나, 그에 따른 교훈은 이차적인 문제일 것입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