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유일한 길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4:4-6약 11분 분량
가장 심각한 범죄
최근 미국 판 <Christianity Today>는 재미있는 여론조사 결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미국 사람들이 가장 심각한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비 관용”(非 寬容)이라고 답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비 관용”이라 함은 독단 내지 독선을 의미합니다. 즉 상대의 견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들 미국 사람들의 기준에서 볼 때, 미국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범죄 집단은 누구인지 상상해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다름 아닌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입니다.
한 미국인 작가가 그리고 있는 오늘날 기독교인의 모습은 “편협하고, 비타협적이며, 사사건건 세상과 문화전쟁도 불사하는 코뿔소 같은 족속”입니다. 수 년 전 캐나다에서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동성결혼을 합법화 하는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킨 바 있습니다만, 캐나다의 동성애자들이 바라보는 기독교인에 대한 인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완고하다. 화를 잘 낸다. 무섭다. 증오에 가득 차 있다. 편협하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인터넷을 중심으로 “안티 기독교 클럽”이 결성될 정도로 우리 기독교인들에 대한 감정은 악화일로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사람들 역시 한국 기독교인들의 비타협적인 태도에 대단히 화가 나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에 대한 이러한 반감 내지는 거부감을 충분히 이해할 만합니다. 특히 이념갈등이 첨예화 되어 있는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민주 사회의 최대 덕목이라고 하는 것이 관용과 타협일진대, 사람들이 사탄을 숭배한다고 한들 누가 뭐라고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존 스토트’ 목사님이 잘 간파하고 있는 바대로 현대 사회의 특징이 다원화와 상대화, 그리고 세속화에 있으니 만치, 개인의 종교적 신념은 헌법도 관용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관용은 그 속에 위험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모든 진리에 대한 관용은 역설적으로 어떠한 종교도 배타적 진리 선언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따라서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왕따”가 되고 싶지 않다면, <요한복음>의 이와 같은 선언은 주장하지 않는 것이 상책일 것입니다. 만일 이를 어긴다면 흔히 말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사회적 합의 사항을 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모성애를 거부한다거나, 애국가를 모독하거나, 또는 친일행위를 옹호하는 등의 발언을 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발언으로 스스로 “왕따”를 자처하셨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구절은 그 백미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제가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니 나를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독선도 이만저만 독선이 아니며, 흑백논리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혹시 KBS나 MBC 등에서 누가 이런 발언을 했다면 당장 전국적으로 항의 전화가 빗발치듯 했을 것입니다(제갈성렬 SBS 해설위원).
이런 발언은 심지어 기독교에 대해서 호의적이고 관용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조차도 실망해서 돌아서게 만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로 한 술 더 뜨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우리 사회는 관용에 대해서 병적일 정도의 집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자신을 옹졸하고 편협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일 텐데, 정치적 성향을 묻는 여론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 절대 다수가 자신을 좌도 우도 아닌 중도라고 대답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하겠습니다.
누구든 자신이 믿고 있는 바에 대해서 진지하고 신실하다면 그가 무엇을 믿든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사람들의 이처럼 관용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종교의 영역에서나 그렇지 일상생활의 다른 영역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사람들은 자신을 치료하는 의사가 정확하고 철저하기를 원합니다. 그저 신실하게 치료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내가 타고 가는 택시 운전수가 안전하고 정확하게 운전해 주기를 바라지, 그냥 신실하게 운전해 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내 회계사가 세금 정산과 관련해서 정확무오하게 일해 주기를 바라지, 그냥 신실하게 일하는 것으로 관용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왜 우리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의 영역, 특히 인격적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正確無誤함 대신에 신실함으로 대체하려는 것일까요? 논리의 일관성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동기가 결코 자만심이나 우쭐함 에서가 아니라 관심과 애정에서 그렇게 하셨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우리는 다음의 한 예화를 통해서 예수님의 자기주장이 결코 오만이나 허풍이나 또는 속임수가 아니라 진실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왕의 잔치
<마태복음> 22장에서 예수님께서 아들을 결혼시키는 한 임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왕이 베푸는 잔치답게 그 장소도 규모도 대단하고 화려했습니다. 우리가 당시 팔레스타인의 보통 사람들의 형편이 어떠했는지 짐작한다면 이 결혼은 그야말로 초호화판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가난했지만, 그래도 결혼식만큼은 빚을 내어서라도 성대하게 치렀으며, 그것도 일주일에 걸쳐 연회를 베풀었다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왕의 잔치가 어떠했을 지는 쉽게 짐작해 보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요즘 유명 인사들의 결혼식을 연상해 보면 될 것입니다. 대개 유명 인사의 결혼식에는 누구나 오고 싶어 합니다. 특히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경우라면 어떻게 해서든 와서 눈도장을 찍어두고 싶어 합니다.
이 임금님의 잔치에도 이처럼 모두들 참석하여 눈도장이라도 받아두고 싶어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이를 거절한 것입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유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지요. 유대인이 누구입니까?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메시아’가 태어날 요람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을 잡아 죽이고, 심지어 그분의 아들이 왔을 때에도 그를 잡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임금님은 모두를 초청했습니다. 유대인이고 이방인이고, 가난한 자이든 부자이든 가리지 않았습니다(마 22:8-9). 이처럼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에 초청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실로 황송하고 경이롭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초청의 조건도 없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오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시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11-14절). 그처럼 아량이 한이 없으신 임금님이 한 친구가 복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하면서 식장에서 그를 쫓아내어버린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초청할 정도로 아량이 넓고 관대한 임금님이 어째서 이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을 문제 삼아 내쫓을 수 있습니까?
옷 살 돈이 없어 입던 옷을 그냥 입고 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이 사람은 옷이고 뭐고 아무 것도 준비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지요. 왕도 이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루 생활하기도 어려운데 무슨 파티 복을 준비할 수 있었겠습니까? 임금님이 이를 알고 잔치에 참석하는 모두를 위해서 자비로 그 모든 파티 복을 미리 준비해 두셨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위대한 신학자 ‘성 어거스틴’은 “그렇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잔치에서 쫓겨난 이 사람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왕의 호의를 알면서도 무시한 것입니다. 왕의 아량을 무시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고집대로, 자기 소견에 옳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잔치에 참석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잔치에서 파티 복을 입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됩니다.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 내 구원자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호의를 입을 자격이 없습니다. 왕이 나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분을 거절한 것입니다.
혹자는 모든 종교는 실은 다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맞기만 하다면 어떤 종교를 믿든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진리는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고 말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종교에는 공통적인 진리 선언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일종의 최대공약수 같은 것 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나름대로의 배타적이고 유일한 진리 선언을 포함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기독교를 가장 기독교 답게 해주는 선언은 무엇입니까?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무엇입니까? “예수는 누구인가?”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바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인류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예수야 말로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합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은 곧 하나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그는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느낄 수도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나타나신 분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만이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들은 이에 대해서 다르게 말합니다. 즉 하나님에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하라”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종교가 다르면 구원에 관한 해법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혹은 주문을 외우라고 말합니다. 혹은 일련의 음식 목록을 만들어 이들을 먹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혹은 일정한 방향을 바라보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올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죽음과 환생의 윤회를 거쳐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들 모든 시도들은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한 우리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어느 부자 청년처럼 “내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고 묻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귀 기울입니다. 왕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분께서 마련해 두신 의복을 입고 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헌신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섬기시고 계십니다. 말씀으로, 성례전을 통해서 말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섬깁니까? 아니면 부모가?)
우리는 그저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과 법정 스님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죄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인식입니다.
2010 남아공 월드컵을 석 달 앞두고 대한불교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는 대한축구협회에 “국가대표 축구선수의 종교행위 개선 요청”이라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조계종은 이 공문에서 “국가대표 축구선수는 공인으로서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 표출되는 행위는 타인의 종교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로 최대한 자제해야 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조계종은 또한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SBS 해설위원(제갈성렬)의 종교적 표현으로 물의를 일으키며 화합과 평화의 올림픽 정신에 어긋나는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며 축구협회에 축구 선수들의 기도 세러모니에 대한 의견을 밝혀줄 것과 종교행위 자제를 위한 선수∙실무자 대상 종교차별 예방 교육을 수립하고 시행해 줄 것은 요청했습니다.
이쯤 되면 종교평화위원회가 아니라 종교 갈등위원회로 불러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연아 선수가 ‘카톨릭’의 성호(聖號)를 표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왜 이를 문제 삼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는 혐오의 수준을 넘어 타도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지난 수년 동안 불교계와 로마 카톨릭 교계 사이에 종교 간의 화합 운동이 꾸준히 전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개신교 기독교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특별히 잘못한 짓이라도 했나요? 교회가 무슨 반국가적인 혁명 노선을 부추기기 때문입니까? 개신교가 다른 종교계에 비해서 윤리∙도덕적으로 더 부패했기 때문입니까? 말과 행동이 전혀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까? 무례하고 오만하기 때문입니까? 이웃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자기네들끼리만 어울려 다니기 때문입니까? 가족이 아니라 교회를 먼저 섬기고 우선시하기 때문입니까? 이들 이유 모두 진리의 일단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를 다른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니 다른 데서 찾아내야 합니다. 정당하고, 떳떳하며, 결코 기죽지 않는 기독교 변증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을 예측이라도 하셨다는 듯이 오래 전에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너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19).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제자임을 공공연하게, 아무 거리낌도 없이, 적극적으로, 때로는 도전적으로 증거하고 드러내고 다니기 때문에 싫은 것입니다.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증거하는 복음이 그들에게 거침돌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으나, 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참을 수 없기 때문에 싫은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서막에서 사람들의 이러한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이렇게 진단한 바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3);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을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 하였으나”(1:10-11).
기독교는 정말 다른 종교와의 마찰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까? 우리가 배려와 겸손의 미덕을 잃지 않는다면 전혀 충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혹자는 우리의 태도가 마치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어디 가면 음식을 구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심정이 되면 된다고 말합니다. 환자가 다른 환자에게 어떤 병원이 좋은 병원인지 가리켜 주는 심정이면 족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른 종교를 정죄하거나 비난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정죄는 하나님에게만 속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종교는 하나라든지 동일하다는 세상의 가르침, 즉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는 관용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증거
주님께서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좁은 문 좁은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에 대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분의 은혜의 섬김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렇게 힘든 일입니까?
시리아의 나만 장군이 분노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복음이 너무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