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예수보다 더 큰 일을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4:12-14약 8분 분량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흉내를 낼 수 있을까? 물을 포도주로 바꿀 수 있으며, 38년 된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울 수 있으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으며, 물 위를 걸을 수 있으며, 말 한 마디로 풍랑을 잠잠하게 할 수 있으며,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으며,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사람을 살려낼 수 있을까? 이들 중 단 하나라도 내가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나의 대답은 당연히 “할 수 없다”일 것입니다. 나는 왜 그 일을 할 수 없을까요? 내가 예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 화자는 이 모든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사건들을 단순히 “기적”(tevra", 테라스)으로 부르지 않고, “표적”(shmei'on, 세메이온)이라 칭합니다. 그 말은 예수께서 이들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내가 예수께서 하신 이 같은 일들을 흉내조차 낼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 큰 일. 그런데 어찌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분은 내가 그냥 흉내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크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일도 하리니”(12절중).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잠시 정신 줄을 놓았거나, 아니면 그냥 술김에 한 번 내질러 본 것이겠지요.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이 하도 딱해 보여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이전에도 이처럼 말도 안 되는 호기(豪氣)를 부린 적이 있기는 합니다. 즉 그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5:20).
어떻습니까? 뭐 이런 것입니까? “기적을 일으키는 일, 그거 별거 아니야. 나도 할 수 있는데, 너희라고 왜 못하겠어. 한 번 해봐! 너도 할 수 있어.”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것 같지 않습니까? 실의에 빠진 사람을 격려하고 일으켜 세울 때 우리는 이 같이 말합니다. 이 말은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긍정적인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만, 때로 진실을 회피하게 만드는 역기능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최근 우리 서점가에 소위 “힐링”(healing)에 관한 책들이 넘쳐나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유의 책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대개 아무런 근거 없는 낙관론이나 근거 없는 대책(對策) 없는 자기 긍정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넌 괜찮아. 너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야. 이 사회가 잘못된 거야. 그러므로 스스로를 자책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성경>은 이점에서 독특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런대로 괜찮은 존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말합니다. <성경>은 먼저 솔직하게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나의 죄 문제를 먼저 다룹니다. 사탕발림으로 우리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 않습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약속이 허황되게 들린다는 것입니다.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수표(空手票)로 보인다는 말입니다.
믿는 자는 누구나. 그래서인지 신중한 학자들은 이 약속의 의미를 축소시키거나 제한하려 합니다. 예를 들면, 그분이 지칭하고 있는 “내가 하는 일”이란 것이 문자 그대로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나 “거듭남” 등과 같은 영적 차원의 일이라고 합니다(“중생”은 왜 기적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설령 그 일이 문자적으로 기적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실제 당시 사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는 사도들이 행하는 엄청난 규모의 기적들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해석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을 앞에서 상세하게 밝힌 바 있습니다(참고. 신학과 신학). 즉 여기서 “내가 하는 일”이란 것이 문자 그대로 “기적” 즉 “표적”들을 지칭하는 것이며, 약속의 대상도 사도들을 포함해서 “모든 믿는 자들”입니다(참고. ‘헬라’어 본문의 동사 시제가 미래형임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왜 예수님의 흉내를 낼 수 없는 것일까? 내게 그만한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약하기 때문일까?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자신들은 왜 선생님이 행하시는 것과 같은 기적을 행할 수 없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에게 겨자씨만 한 믿음도 없기 때문이라고 예수님께서 답하신 적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이러했을 진대, 나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약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편에 있었던 것이지요.
매사(每事)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참 편리하고 홀가분해 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겸손하기까지 합니까! 스스로 믿음이 약하다고 인정하고 나서니 말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흔히 “주의 종”이라 자칭하면서 은근히 큰 기도의 능력을 가졌다고 뽐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 않습니까! 대개 이런 사람들이 타인들을 향해서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연약한 성도들을 닦달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과연 그런 식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까? 즉 “나를 열심히 믿는 자”나, 또는 “큰 믿음을 가진 자”는 예수님께서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큰일도 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냥 “나를 믿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분의 제자라면 누구나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큰 믿음을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그냥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근거는 믿음의 분량이나 정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므로. 그렇다면 어디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하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그렇습니다. 그분께서 행하신 일에서 해답을 찾으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다락방 강론의 핵심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재림입니다. 바로 이들 사역이 내가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분께서 이루신 일은 일종의 신용카드와 같다 하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사든, 얼마를 쓰든, 이것으로 결재를 하면 됩니다. 물론 결재 한도 이상은 사용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아직 보혜사 곧 성령 하나님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교회의 탄생과 기독교 선교 사역의 역사적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사도들은 그들의 선생님은 한 번도 가본적도 없는 세계의 심장부 로마까지 이르러 하나님 나라를 전할 수 있었으며, 단 한 번의 설교로 수천 명이 회심하는 역사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적어도 물량적이고 공간적인 면에서 볼 때 이들 사도 이후 교회가 이루어 놓은 업적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하게 된 것은 그분이 계속 ‘팔레스타인’ 땅에 살아계셨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의 능력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벗어나서 역사해왔고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셨다면 이런 일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더 큰 일”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에 대해서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5:20).
여기서 아들이 행한 “더 큰 일”이라는 것이 다름 아닌 아버지가 행하신 모든 일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준 것을 말합니다. 즉 설명하고 해석해 준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제자인 내가 행할 “더 큰일”이란 예수께서 행하신 그 모든 일을 세상에 드러내어 세상으로 하여금 보고 믿도록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표적으로서의 기적, 즉 기적의 목적을 달성하고 성취시키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가 예수님보다 더 많은 기적이나, 더 놀라운 기적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재림이 내가 “더 큰 일”을 행할 수 있는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근거라고 한다면, 체험적이고 실존적인 근거도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기도”입니다(13-14절). 죽음과 부활이 예수님의 몫이었다면, 기도는 제자들의 몫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것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서 “더 큰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두 번에 걸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예수님은 “내게 구하라”라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14절). 그분은 실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입니다( 딤전 2:5).
따라서 여기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점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이 아닙니다. 즉 누가 더 큰 일을 하는가를 비교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죽음과 부활 이전에 시공(時空)의 제한 속에서 제자들과 함께 행하시던 예수님의 지상사역과, 부활 이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제자들을 통해서 행하시는 천상(天上)의 사역입니다. “더 큰 일”은 바로 후자(後者)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더 이상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인류에게 열릴 것이며, 온 세상은 구원과 구속의 은혜 아래 놓이게 될 것이며, 제자들은 능력으로 세상을 향해 사역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능력이라 함은 그들이 조만간 받게 될 “성령”을 뜻합니다.
다시 한 번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더 큰 일”은 제자들의 독자적인 사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서 펼쳐나갈 그분의 지속적인 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들 안에 있는 아버지의 영광도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통해서 드러나고 구현될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기도할 때마다 후렴처럼 사용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황송하게도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하면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14절). 이 약속을 두고 혹자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백지 수표를 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백지 수표란 내가 그 액수를 정하면 됩니다. 얼마를 쓰든지 은행에 가면 그대로 돈으로 교환해 받을 수 있습니다. 실로 엄청난 약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