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곧 닭이 울더라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8:25-27약 8분 분량
곽 경태 감독이 연출을 맡았던 영화 <친구>에서 동수(장 동건 扮)가 그의 친구 준석(유 오성 扮)이가 보낸 하수인의 칼에 난자(亂刺)를 당하고 죽어가면서 부산 사투리로 내뱉은 유명한 대사가 있습니다: “인자 고만해라. 만이 묵었다 아이가.” ‘베드로’ 역시 똑 같은 심정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는 없으나, 한두 번도 모자라 세 번씩이나 나를 죽이고 있는 이 친구를 향해서 같은 절규를 내뱉을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요한’ 화자는 이 친구를 예수님의 또 다른 제자라고만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든 사람들이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베드로’는 자신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닐까?
‘요한’ 화자가 ‘베드로’의 행동을 다루는 방식은 공평하지 못하며, 따라서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주 억울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공관복음>과는 달리 ‘요한’ 화자는 이 “베드로 재판”을 “예수님 재판”과 거의 동등한 수준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두 재판 모두 ‘안나스’ 집에서, 같은 시각에 진행되고 있는 것을 번갈아 가며 보여주고 있어, 두 피의자의 행동이나 태도를 아주 뚜렷하게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두려움으로 세 번씩이나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있는 ‘베드로’의 모습은 담대하고 당당한 주님의 모습 때문에 더욱 안타깝고 초라해 보이기만 합니다. 이점이 공평하지 못하며, 억울하다는 것이지요. 어디 비교할 대상이 없어 예수님과 비교를 하다니요! 나를 ‘우사인 볼트’와 백 미터 달리기 경주에 나란히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 화자는 과연 우리의 영웅 ‘베드로’를 부관참시라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거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균형 정도는 잡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그리하여 ‘베드로’의 참 모습 정도는 밝히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의 참 모습은 어떤 것이었으며, 참 모습이 아닌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두려워 떨며 자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던 그 모습이 ‘베드로’의 참 모습이었을까? 그렇다면 결단코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그분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들고 설쳐대던 그 모습은 헛되고 과장된 모습이었을까? 오히려 그 반대가 진실일 수 있지 않을까?
만일 우리가 “베드로 에피소드”의 주인공을 ‘베드로’로 삼고자 한다면, 이와 같은 질문들은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그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유사한 상황에서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를 교훈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같은 접근 방식은 과연 적절할까? 잠시 <아브라함 이야기>를 회상해 보기로 하지요.
영웅으로서 ‘아브라함’에게는 두 가지 중요한 영역이 있습니다. <창세기> 화자의 끊임없는 관심은 ‘아브라함’의 영웅적 자질이 본질적으로 영적(靈的)인 것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적 영웅으로서 ‘아브라함’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이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나이 75세에 그동안 누려왔던 그 모든 관계와 기득권을 끊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순종하여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또한 가정적 영웅이기도 합니다. 그는 ‘사래’의 남편이며, ‘롯’의 삼촌이며, ‘이삭’의 아버지이며, 한 민족의 아버지이며, 궁극적으로는 전 인류를 위한 ‘메시아’의 아버지입니다.
이랬던 그가 이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보여주고 있는 바는 놀랍게도 영웅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입니다. 그는 야비하고, 이기적이며, 교활하기까지 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아내를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고, 이방인에게 거짓말을 하여 부(富)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이방인에게 재산상의 손실은 물론 큰 고통까지 안겨줍니다. 아무리 느슨한 기준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그가 영웅이 될 자질은 없습니다. 만일 교회가 이런 사람을 믿음의 영웅으로 치켜세운다면, 세상은 교회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냉소와 야유를 보낼 것이 뻔합니다. 도대체 어떤 모습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모습일까?
사실 ‘아브라함’이 이렇게 된 데에는 그럴 만 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살던 땅에 기근(饑饉)이 몰아 닥쳤기 때문입니다. 그 땅에 가뭄이라니! 있어서는 안 되지요. 그 땅은 그냥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서 살라고 하신 약속의 땅입니다. 사시사철 젖과 꿀이 흘러야 할 땅입니다. 가뭄도 그냥 잠시 스쳐 지나갈 정도의 가벼운 가뭄이 아닙니다. 생존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재난 대비 매뉴얼도 없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겁니다. 마치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이라도 하려는 듯이 말입니다. 과연 이런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가뭄으로 찌든 “약속의 땅”에 남아 온 가족과 가축을 굶겨 죽이느니, 젖과 꿀이 흐르는 ‘이집트’의 ‘나일’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번성하고 번창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나안’에서 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위한 제단을 세우고,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곳에서 해왔던 것보다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 했음 직도 합니다. <시편>에서도 고백하고 있듯이, 음부(陰部)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자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이 내린 선택의 결과로 혹독한 대가를 치루지 않았던가!” 혹자는 이렇게 반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재 반박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닥칠 일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설령 안다고 해도, 그 미래를 바꿀 능력을 가진 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아브라함’이 무슨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아,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가나안’이 아닌 ‘이집트’를 약속의 땅으로 지정해주었더라면, ‘아브라함’이 그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그렇습니다. 결국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아브라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독서의 관점도 위기의 순간에 ‘아브라함’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에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실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그분이 기근을 적극적으로 의도했든 또는 소극적으로 그것을 허용했든,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자신의 약속을 지킬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표면 상 <아브라함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브라함’임에 틀림없습니다만, 무대 뒤의 진정한 주인공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모든 이야기의 저자이자 동시에 등장인물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관점이야말로 비단 <아브라함 이야기>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주제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가련한 ‘베드로’도 같은 심정으로 우리를 향해 읍소(泣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날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신다고 했을 때,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주님을 따를 수 없나이까? 주님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진심으로 말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체포당하시던 그 순간에 내가 칼을 빼들고 ‘말고’의 귀를 잘랐던 것도 진심으로 주님을 보호하기 위한 충정(忠情)이었음을 알아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가지 않아도 될 ‘안나스’의 집까지 따라 들어갔던 것도, 진심으로 주님이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읍소는 이렇게 계속되는 듯합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요? 왜 평소 나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냥 움츠려 들어 나 자신을 세 번씩이나 부정해 버리다니. 평소 나 답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베드로’가 아니었습니다. 이점 주님도 잘 알고 계실 줄로 믿습니다. 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돌변할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내가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베드로’의 고백은 순전히 본인의 상상(想像)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공동체의 유익을 떠올리며 창작해 본 것입니다. 공동체의 유익에 관하여 <시편>은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
‘베드로’는 그날 밤, 잘못된 무리 속에서 불을 쬐다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만일 그가 다른 사도들과 함께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만일 ‘롯’이 ‘아브라함’ 교회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과 맥을 같이 하는 대목입니다.
나는 외로운 늑대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도 혼자가 아닙니다. 늘 삼위(三位)의 교제 가운데서 살아가십니다. “누구나 죽을 때는 혼자”라고 합니다만, 이는 틀린 말입니다. 그날 ‘베드로’가 악인의 무리 속에서 외로운 사투(死鬪)를 벌이고 있을 때, 주님은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바로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서, 그를 위하여 사투를 벌이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당당하게 재판관을 꾸짖고 있었습니다. 재판관의 불의(不義)를 고발하고, 정죄(定罪)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분께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물으셨을 때, 그가 “오직 주님만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한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언약을 인정하고 또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석별의 정”이라는 노래의 제 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일 년 사시가 변하여도, 동서남북이 바뀌어도, 우리 굳게 맺은 언약은 영원토록 변함없으리.”
하지만 이 노래는 ‘베드로’의 노래가 아니라, ‘야훼’ 하나님 그분의 노래라야 할 것입니다. 그분만이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