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신문(2): 제사장의 법정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18:19-24약 10분 분량
이제 무대는 다시 한 바퀴 돌아 ‘안나스’의 집무실입니다. 곧 새로운 신문(訊問)이 시작될 참입니다. 직전의 무대에서 문지기 여종이 신문자(訊問者)의 역할을 맡았고 ‘베드로’가 피의자(被疑者)였다면, 이번 무대에서는 ‘안나스’와 예수님이 각각 그 역할을 맡게 될 것입니다. 무릇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범죄자나 피의자가 자발적으로 법정(法廷)에 서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만, 이 두 신문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할 것도 없고, ‘베드로’ 또한 스스로 자청(自請)하여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오직 한 가지 위대한 동기(動機)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지금 당장 본인이 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다만 바로 그 동기 때문에 두 사람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점만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같은 동기로 출발했으니, 선택의 결과에 대해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닐 듯합니다. 예컨대, ‘베드로’는 선택의 결과로 쓰라린 실패를 맛보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의 실패를 놓고 왈가왈부(曰可曰否)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럴 자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위대한 동기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이거나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을(乙)의 위치에 있다고 판단되면 억울하다며 법과 정의(正義)를 요구합니다. 세상이 공정하지 못하니 이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불평하고 항의합니다. 사도 ‘바울’조차도 자신에 대한 재판을 ‘유대’ 법정이 아닌 로마 법정에서 받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까. 그가 로마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도 세상을 향하여 정의를 요구했던 것일까요?
아무튼 이와 같은 태도에 대해서 영국의 저명한 신학자 ‘멜컴 무거릿지’(Malcolm Muggeridge)는 아주 냉소적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이 정의롭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사하라 사막에서 냉수 한 그릇을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 동료 인간으로부터 정의를 기대하다니! 우리가 인간으로부터 요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비와 긍휼일 것이다. 그나마도 하나님 덕분인 것을.”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정의를 행할 능력이나 의지가 있다면 법은 과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왜 국회가 필요하며, 검찰이나 경찰은 무슨 소용일 것이며, 법정이나 감옥은 왜 필요하다는 말인가? 결국 정의를 외치는 사람일수록 스스로의 위선(僞善)을 드러낼 뿐이다.”
이것이 왜 위선일까? 을의 위치에서 갑(甲)의 위치로 신분이 바뀌게 되면 태도가 완전히 돌변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제까지 그토록 정의를 부르짖던 자가 타인에 대해서 예사롭게 불의를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세월 호 유가족 대책 위원회 임원들이 모 대리운전 기사를 폭행하며 보여준 태도가 가장 최근의 극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이 일이 있기 직전까지만 해도 세월 호 참사에 대한 성역 없는 철저한 조사와 정의 구현을 요구하며 단식농성까지 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서는 경찰에 나가 조사받는 것조차 회피했습니다.
적어도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무거릿지’의 주장은 하등 새로울 것이 없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즉 법이 많다는 것은 세상이 그만큼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고, 법이 많은 곳에 정의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처벌과 죽음이 늘어간다는 역설 말입니다. 왜 그럴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예수님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그분만큼은 정의를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모든 엉터리 재판 따위는 집어치우란 말이야. 온통 하자(瑕疵)와 불법 투성이 뿐인 이 재판을 말이야!”라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불편부당(不偏不黨)하신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신가!
안나스의 법정. 그렇습니다. 그날 밤 예수님을 체포하는 과정에부터 재판과 선고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습니다. 과정과 절차와 내용 그 모두가 불법이고 위법이었습니다. 우선 체포 장면부터 다시 돌아보기로 하지요. 당시 공회(公會) 법에 따르면, 범법자는 반드시 밤이 아닌 낮에만 체포해야 합니다. 체포도 정당한 법적 절차에 따른 것이 아니라, 밀고자(密告者) 내지는 배신자의 도움을 받아 은밀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체포 당시 체포의 이유, 즉 혐의(嫌疑)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명백한 불법 체포입니다!
체포는 그렇다 치고 ‘안나스’의 행위는 어떠합니까? 그가 과연 신문자로서 자격을 가지고 있었느냐는 논외(論外)로 치더라도, 그가 법을 아는 자라면 그 앞에 서 있는 피의자를 무죄방면(無罪放免) 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불법을 가중(加重)시키고 있습니다. 하기야 ‘안나스’가 주님을 자신의 법정(法廷)에 불러 세운 것은 무슨 거창한 종교적이거나 신학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누려왔던 자신의 기득권(旣得權)을 계속 지키고 싶다는 일념뿐이었기에 그가 무슨 짓을 한들 하등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그가 저지르는 불법은 무엇입니까? 그가 현직 공회(公會) 의장이 아니므로 전혀 재판관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사실은 그냥 넘어가기로 합시다. 그렇다면 최소한 재판 절차 정도는 제대로 지켰어야 했습니다. 즉 이 무자격자가 지금 낮이 아닌 한 밤중에 재판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소리입니다(자격이 없으니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재판 장소는 어떻습니까? 공회, 즉 공공 장소가 아닌 개인 법정입니다. 자신의 집에서 혼자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이겁니다(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불법은 또 있습니다. 피의자로 하여금 그가 받고 있는 혐의(嫌疑)가 무엇인지 스스로 밝히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19절). 재판관은 피의자가 아니라 증인들에게 혐의 사실을 묻고, 들어야 합니다. 당연히 피의자는 묵비권(黙秘權)을 행사할 권리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하든 불리하든 그 어떤 답변도 할 필요도 없고, 또 해서도 안 됩니다.
‘안나스’가 이 법을 몰랐을까요? 예수님이 마치 재판관을 놀리듯 오히려 되묻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21절). 피의자인 나에게 물을 것이 아니라, 증인들에게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누가 불법을 저지르고 있으며, 누가 정의를 행하고 있습니까? 누가 누구를 신문하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 장면은 실로 해학(諧謔)이자 풍자(諷刺)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제사장 ‘안나스’는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로 몰아가려 했던 것 같습니다. 거짓 선지자의 특징은 은밀하게 백성들을 호도하여 배교에 빠뜨리는 것으로서, <신명기>에 따르면 이런 자는 돌로 쳐 죽입니다(신 13:1-10). ‘안나스’의 의도를 알았음인지, 예수님은 자신은 한 번도 은밀하게 가르친 적이고 없고, 성전과 회당에서 공개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20절).
결국 ‘안나스’의 계획은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즉 은밀하게 가르치는 자가 거짓 선지자의 특징이라면, 거짓 제사장의 특징은 은밀하게 재판하는 자라는 등식이 성립할 것인데, ‘안나스’가 이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화자의 해학과 풍자가 돋보이는 대목입니다.
‘안나스’의 호위 무사 하나가 화가 발끈 났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을 대하는 태도가 건방지다는 것이지요: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22절).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대개 논리에 밀리거나 궁색한 자가 먼저 폭력에 의존합니다. 이 호위 무사는 증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선지자 ‘예레미야’를 매질하고 투옥시켰던 대제사장 ‘바스훌’을 연상시켜줍니다.
그를 향해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이 재판이 불의하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즉 정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잘못 말한 것이 있으면 그 증거를 대라”는 것입니다(23절). 그 어떠한 은밀하고도 체제 전복적인 행동을 한 적이 없으니, 공개적인 법정에서 증인들의 참석 하에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려보자는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예수님은 지금 적법한 절차에 따른 공개 재판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회를 열어라”는 요구이자 명령입니다. 결국 ‘안나스’는 굴복하고 맙니다. 비밀 재판은 중단되었고, ‘안나스’의 법정은 결국 불법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가야바의 법정.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요구하셨던 공개 재판, 즉 공회는 과연 적법하게 진행되었을까? ‘가야바’는 과연 정의를 행했을까? 웬 일인지 ‘요한’ 화자는 이 장면을 생략하고 있습니다만(참고. 28절), <공관복음>은 이 재판역시 불법이며, 따라서 판결은 아무런 법적 효력을 지닐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참고. 마 26:59-66; 막 14:55-64; 눅 22:66-71).
아무런 물증(物證)도 없이 심증(心證) 만으로 피의자를 기소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공회가 처한 상황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떤 죄목으로든 혐의를 덮어씌워야 할 텐데, 증인들의 증언이 제 각기라 예수님을 기소할 공적인 혐의 내용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공회의 재판 자체가 아예 성립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재판을 진행했습니다! 이것이 불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재판 절차라도 정당했어야 할 텐데, 그것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공회도 역시 ‘안나스’의 재판처럼 대낮이 아닌 한 밤중에 열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공회가 열린 시기도 문제였습니다. 사형(死刑)과 같은 중대한 재판의 경우, 안식일 전 날이나 다른 중요한 축제일에는 열어서는 안 됩니다. 재판도 일종의 일로 볼 수 있을 것인 즉, 안식일에 일을 할 수 없음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회는 스스로 안식의 법을 어긴 셈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중요한 재판은 절대로 단 한 번의 재판으로 하루 만에 끝내서는 안 됩니다. 첫 번째 투표에서 무죄로 혐의가 벗겨지면 재판은 그것으로 끝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유죄로 인정되면 재판은 다음 날까지 연기하였다가 두 번째 투표를 실시하게 됩니다. 이 두 번째 투표에서도 유죄로 인정되면 사형집행이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재판이 두 번에 걸쳐 진행되었기 때문에 일견 법적으로 아무 하자도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 두 번이란 한 번은 저녁에, 다른 한 번은 다음 날 이른 새벽으로서, 시간 간격이 불과 몇 시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틀로 볼 수가 없습니다.
공회의 재판이 무효가 되는 근거는 또 있습니다. 사형 판결이 증인의 증언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피의자의 고백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침묵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 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이르되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 14:61-62). 무효의 근거는 또 있습니다. 공회의 결정이 만장일치(滿場一致)였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고”(막 14:64후).
여기까지가 절차상의 문제들이었다면, 보다 근본적인 문제 하나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어쩌면 이 문제야말로 재판의 공정성을 담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 재판에서 피의자를 위한 변론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 부활절 전야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온 나라에서 단 한 사람, 그분을 위하여 변론을 해 줄 사람이 없었을까? 이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증언하고 변론해 줄 사람이 진정 하나도 없었을까?
물론 있었다고 해도 공회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변론을 온전히 들어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에 상관없이 공회는 변론의 기회 자체를 아예 없애버렸으니 사실상 직무유기를 저지른 셈이고, 불법을 행한 것입니다. 공회는 다수의 횡포를 자행(恣行)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체포에서 재판과 판결에 이르는 그 모든 과정과 절차 하나하나 마다 제대로 된 것이 없었고,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원천무효입니다. 재판이 원천무효라면 피해보상이 따라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피의자가 죽어버렸으니 보상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억울하고 원통한 일입니다. 정의와는 거리가 먼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불의(不義)를 허용하신 것일까? 여기서 허용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다른 표현을 쓰 보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불의(不義)를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하기만 하신 것일까? 왜 정의와 공법을 바로 세우지 않으셨을까?
정의가 있는 곳에 처벌이 있기 때문입니다. 법은 죽이지만, 살리지는 못합니다. 살리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분의 ‘헤세드’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바로 이 동기 때문에 그는 불의를 참고 견디어낸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정의를 말할 때, 하나님은 자비와 용서를 보이셨습니다. 그것만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