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그리스도의 증인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8:12-20약 8분 분량
한 번은 기독교 대학생들을 상대로 <구약성경 해석학>에 대해서 한 학기 동안 강의를 한 바 있습니다. 필자가 일반 교인들을 상대로 이런 강의를 하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다분히 학문적이라 딱딱하기도 하고, 또 교인들 대부분이 한 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강의 내내 대부분의 학생들은 본인의 강의를 상당히 어려워하는 눈치였습니다. 심지어는 강의 내용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항의성 질문도 나왔습니다. 그 중에서 그 단체의 지도자라는 간사가 던진 질문은 영 못마땅했습니다. 질문의 요지인 즉은, 교회 회중의 대부분이 그렇게 어려운 내용들을 잘 몰라도 신앙생활 잘 하고 있으며, 교회 교육이나 목사님의 설교도 이런 사람들의 수준에 맞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향평준화 하자는 것이지요.
대개 독재 정권일수록 우민화(愚民化) 정책을 편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너무 똑똑하면 나라를 통치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걱정 때문일 것입니다. 간사의 항의성 질문이 당연히 잘못된 것임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일축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만, 이곳에서 그 모두를 다 설명하기는 시의 적절(時宜適切)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명색이 최고의 지성인을 상대로 선교 활동을 한다는 단체의 학생들이나 그 단체의 지도자가 가진 자세가 어찌나 실망스러운지, 한국 교회의 앞날을 위해서 한 마디 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탁월성”으로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라고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말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탁월성이라 함은 단순히 “영적(靈的) 탁월성” 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적(知的) 탁월성”도 동시에 포함하는 것입니다(사실 이 둘을 구분하는 자체도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만). 그나마 영적 탁월성에 대해서도 이 간사는 무지의 소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성”(靈性) 또는 “성령 충만”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명쾌하게 밝히고 있듯이 성령 충만은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충만하게 열리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말합니다(갈 5:22-23).
다시 말하자면 영적 탁월성은 지극히 상식적인 차원, 즉 윤리적이고 인격적인 탁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큰 소리로 기도를 잘 한다든지, 찬송을 잘 한다든지, 무슨 초월적인 능력이나, 성령의 은사를 나타낸다든지 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결코 성령의 열매를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James Packer). 왜냐하면 성령의 은사는 은혜가 없이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 없는 은사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적 탁월성은 어떻습니까? 누구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순간부터 지적인 목마름이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에 대해서 더 알고 싶고 <성경>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깁니다. 사실 <성경>은 그냥 읽어서는 대부분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우리와 언어가 다르고 문화와 역사와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수천 년 전에 써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냥 믿음으로 “아멘!”하며 읽는다고 저절로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 간사는 자신이 교회 회중의 편에 서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옹호하는 듯이 보이나, 실은 자신의 무지를 감추고 싶거나 또는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나오고 싶은 의지나 의욕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본인의 강의 내내 강의실을 들락날락 전화 받기에 바빴으며, 강의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다른 일 때문에 먼저 떠나버렸습니다. 다른 일이란 그가 속한 교회의 “전도 집회”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만.
우리는 교회에서 이런 유의 지도자들을 자주 만납니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아서 정열적으로 아주 바쁘게 사역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정작 자신의 영혼의 성숙을 위해서는 그렇게 크게 목마름을 느끼지 못합니다. 내 자식의 영혼에는 관심이 많으나 정작 나 자신의 영혼에는 영 관심이 없는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더러 공부 안 한다고 들볶으면서 정작 자신은 집에서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는 부모 말입니다. 그 간사는 학원 선교다, 이단 퇴치 운동이다 해서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의 사무실에 가보면 이런 저런 계획들이 칠판에 가득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러한 사역을 위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지를 깨닫고 있지 못한 것이죠. 학생들을 위해서 이런 저런 주제로 강의를 해 달라고 요청을 하면서도 정작 그러한 것이 자신에게도 필요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신앙인인지 행정가인지 구별이 잘 안 됩니다.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좋지 않은 것들을 먼저 배우고 있는 듯 보여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그 간사를 불러 말했습니다. “내 강의의 일차적인 목적은 일반 학생들이 아니라 자네를 제자 삼는 것이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제대로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작 진리의 빛이 자신에게 비추었을 때 자신은 슬쩍 피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대변자 노릇을 자청하고 있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빛에 대해서 오히려 도전하며 비판하는 자세로 대응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처음 예수님을 대하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빛이 자신들에게 비췄을 때 배척하고 거부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엄청난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 이들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 말대로 최소한의 증인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매사에 증인이 필요하다는 말은 이 세상이 어떠한 모습인지 역설적으로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일에든 구두 계약을 신뢰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즉 진실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있는 이 세상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지요. 만일 모든 사람들이 진실만을 말한다면, 굳이 증인을 동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진리 그 자체시라면 그분께서 이 세상을 향해 말씀하실 때, 굳이 다른 증인을 대동해야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빛이 어둠 가운데 비칠 때, 굳이 빛이라고 선언하지 않더라도 모든 것이 드러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두움 가운데 있다면, 우리가 내리는 결론은 세상의 법칙에 따라서 내리는 결론일 수밖에 없으며, ‘바리새’인들이 원하는 검증이나 증거는 필연적으로 불가능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도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증거가 왜 아무런 증인도 필요치 않은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하지만 그분의 말씀은 이전의 말씀과는 상치됩니다. 즉 그분은 이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5:31). 그러면서 그분은 여러 다른 증인들을 동원한 바 있습니다: “침례 요한”; “기적”; “성부 하나님”; “성경”(참고. 5:33-39). 예수님께서 다른 증인은 몰라도 “침례 요한”의 증거까지 필요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었습니다(5:34).
그런 분이 이번에는 마음을 바꾸셨나요? 아무런 증인도 필요치 않다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어찌되었든 예수님의 증거는 증인 유무에 상관없이 우리로 하여금 결단의 순간, 곧 피할 수 없는 위기의 순간에 서게 합니다.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든지, 또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시하든지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선택이 우리에게 달린 것 같습니다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선택 즉 심판의 위기 앞에 노출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유대’ 당국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이해를 바탕으로 예수님을 판단하고 있습니다(7:454-52). 이것은 예수님의 말대로 “육체에 따른” 판단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유의 판단을 타인에게 내리시지 않습니다(15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들 앞에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심판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심판인 이유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16절).
그러므로 두 명의 증인을 요구하는 율법의 요구조건도 자동적으로 충족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하여 증거해도 그 증거가 참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증거는 곧바로 심판을 수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요약해 봅시다. 만일 예수님이 스스로에 대한 주장을 일삼으면서 자기의 영광만을 구하는 한 인간에 불과하다면, 그분의 증거는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배척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분이 정말 자기 아버지가 보낸 자요, 그 안에 생명과 빛이 있으며 아버지의 영광만을 구하는 자라면, 세상은 세상적인 검증 방법을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확증적인 증거를 요구해서도 안 됩니다. 세상이 할 수 있는 일은 빛으로 나아오든지, 어두움 속으로 돌아가든지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곧 심판입니다.
하지만 기존 질서 속에서 안정을 누리고 있는 자라면, 자신이 속한 세계가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거부하고 배척합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특유의 “오해”로 증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단순한 오해일 뿐만 아니라,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라고 진심으로 묻는 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예수님을 보라”일 것이기 때문인데,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아무도 하나님을 본 자가 없으되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5:37).
그러나 그들은 끝내 빛으로 나오기를 거절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롬 1:28). 이들의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과신(過信), 즉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참고. 롬 1:22).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