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하늘로부터 온 자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8:21-29약 9분 분량
예수는 누구인가? 우리는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이 질문이 왜 모든 인류에게 치명적으로 중요한지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중요하다 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떤 대답을 가지고 있는 가에 따라서, 지금 살아서 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까지 결정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도 이 질문은 마찬가지로 중요했습니다. 왜 이 질문이 그들에게 그토록 중요했을까요?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흔히 ‘바리새’인 하면 일단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습관이 있지만, 그들은 당시 종교를 종교답게 유지하고 보존하는 책임을 맡은 자들로서, 자신들의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싫어했던 것은 예수님의 답변 방식이었습니다. 항상 자기 자신을 앞세우는 듯한 “에고 에이미”(ejgw eijmi), 즉 <구약>에서 등장하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대답 때문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6:35); “나는 세상의 빛이라”(8:12); “나는 양의 문이라”(10:7); “나는 선한 목자라‘(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11: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14:6); “내가 참 포도나무요”(15“1).
이와 같은 주장들은 누가 보아도 도가 지나친 발언임에 분명합니다. 정상적인 ‘유대’인들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발언입니다. 그들에게는 단 한 분 하나님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가 바로 자기가 그 하나이신 전능자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자신들처럼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동등하거나 경쟁하는 자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자신의 카리스마에 도취된 자가 아니라면 이런 망언(妄言)을 내뱉을 수가 없습니다.
조금 직전에도 그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12절)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들은 가장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이 말로 인해 ‘바리새’인들은 성난 투우처럼 예수님을 향해 돌진해 왔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더 악화되고 있습니다. 분노하기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21절).
예수님은 분명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바리새’인들이 알았을 리 없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전형적인 오해의 질문입니다: “그가 자결하려는가(22절)?” 아무도 갈 수가 없다고 하니 물어보는 질문입니다. 적어도 ‘랍비’들이 이해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이 음부에 갈 수 있는 가능성은 고의로 살인을 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주 희박합니다. 이와 같은 논리는 살인에 대한 <창세기>의 선언에 근거한 것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생명의 피를 찾으리라.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창 9:5). 다시 말하자면 자살에 대해서도 같은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자살 역시 생명의 피를 흘리는 행위이므로 살인죄로 다스릴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얼마 전에도 예수님께서 떠나신다고 했을 때, 그분께서 ‘헬라’인들에게 선교를 하러 가는 것인가 하고 물은 바 있습니다(7:35). 이번의 질문도 그 질문만큼이나 흥미롭고도 심오한 예언적인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역설인가? “누가 예수님을 죽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존 스토트’ 목사님이 아주 통찰력 있게 설명한 바 있듯이, 예수님 스스로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죽노라.” 문자적으로 이 말은 자결(自決)임이 분명하며. 그 점에서 ‘유대’인들의 질문은 역설임에 틀림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진정 음부, 즉 “죽은 자에게 내려”갈 것입니다.
위로부터 온 자. 하지만 그곳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옥을 정복함”으로써, 산 자와 죽은 자 모두가 생명의 가능성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에서도 고백하고 있듯이, 그분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서 위로부터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분은 위로 올라가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원래 위로부터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 스스로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23절상). 이 말씀은 <요한복음> 전체를 흐르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관한 또 다른 방식의 주제 선언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경고이자 예언입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24절).
그런데 여기서 “내가 그”(I am he)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原文)에 따르면 “에고 에이미”(ejgw eijmi)로서, 직역하자면 문법적으로 불완전한 문장 “나는”(I am)입니다. 즉 주어와 동사만 있고 보어(補語)가 없는 문장이 되어버립니다. ‘랍비’들조차도 이 문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습니다: “네가 누구냐(25절상)?”
예수께서 “나는”이라고 했으니, “(네가 말하는 그) 내”가 누구냐고 되묻고 있는 것이지요. 다시 한 번 그들의 분노와 냉소를 읽을 수 있습니다. 문장의 술어가 누구냐는 것이지요. 구체적으로 정의(定義)를 내려달라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술어가 예수님을 기술하기에 적절한 단어가 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분은 이제 더 이상 마치 그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태도입니다. 자신은 “처음부터 그들에게 말하여 온 자”라고 하면서, 질문에 대한 직답을 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대답은 ‘바리새’인들 궁긍즘을 풀어주기에는 썩 만족스럽지가 못합니다. 오히려 더욱 미궁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에고 에이미”(ejgw eijmi), 즉 “나는...이다”의 술어 즉 보어를 알고 싶은데 예수님은 오히려 한 발 빼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을 곰곰이 되씹어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실 이야기가 많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 대해서나, 다가올 심판에 대해서나,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26절). 하지만 ‘유대’인들은 여전히 오리무중(五里霧中)입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 깨닫지 못하더라”(27절).
위로 들려야 함. 그래서 일까요? 예수께서는 “에고 에이미”(ejgw eijmi)의 정체에 대해서 알게 될 그 시간과 그 사건에 대해서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28절). 즉 인자가 십자가 “들린” 후에야 비로소 “에고 에이미”(ejgw eijmi)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들다”(uJyovw, 휩소오)는 동사의 의미에 대해서 좀 더 상세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이 동사가 이곳에서는 능동형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수동형으로 사용되고 있는 용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4-15);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12:31-32).
누가 그를 든다는 말입니까? 이 두 곳에서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즉 “인자의 들림” 즉 그의 죽음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위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유대’인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들림”에 대해서, “나는 스스로 죽노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한 일은 과연 무엇입니까?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협력 사역에 그들이 보탠 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리고 두 번째로, “들다”와 관련해서 떠올려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영화롭게 하다”(doxavzw, 독사조)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12: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13:31-32). 이 구절들은 이미 <이사야>에서 비슷한 의미로 사용한 바 있습니다: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사 52:13). 즉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히 죽음이 아니라 영광에 이르는 길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제 조금 전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이 구절에서 예언하고 있는 바대로, 과연 그분께서 십자가 “들린” 후에 ‘유대’인들이 “에고 에이미”(ejgw eijmi)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을까?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그리고 그의 사역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는가? 우리의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논리적으로 볼 때, “예수를 아는 지식”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들린” 당연한 결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28절).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러한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유대’인들조차도 여전히 예수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해서 무지(無知) 내지는 부인(否認)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사실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예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말씀을 종말론적 예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최후의 심판을 위해서 예수께서 두 번째 오시는 그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가 누구였는지를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날을 <마가복음>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막 14:62).
바로 이날에 ‘유대’인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서 알게 되겠지만, 그 때 얻게 될 지식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때는 모든 것이 끝난 이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 오는 날만 되면 울어대는 청개구리 이야기를 연상케 하는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불신자들의 운명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경고를 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바깥 어두운 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는 비유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이사야>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그 때가 언제입니까? 사도 ‘바울’의 대답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누가 이 은혜를 선포해야 합니까? 교회입니다. 내가 그 교회입니다. 헌신합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