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8과
생명과 심판의 주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4:43-5:47약 140분 분량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4:21-22).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 하는도다(5:39-40)
<요한복음>의 <서막> (1:1-18)이 “새로운 창조”에 관한 장엄한 선언이라고 한다면, 이어지는 단락 (2:23-4:42)은 “새로운 창조” 내지는 “새로운 질서”와 관련한 일련의 사건과 기적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로운 창조”(21-12); “새로운 성전”(2:13-22); “새로운 탄생”(3:1-9): “새로운 예배”(4:20-24). 이들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도래한 것들이었습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새로운 두 개의 에피소드를 연속적으로 소개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새로운 주제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제는 “생명과 심판의 주-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르긴 해도 화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그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타이틀을 헌정(獻呈)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한 인물이 이처럼 많은 타이틀을 가질 수 있다는 자체가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 알게 해주는 단서가 되기도 합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단락의 주제를 파악하게 하는 핵심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21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시느니라. 22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5:21, 22)
그렇습니다. “생명과 심판”입니다. 그런데 생명과 심판은 상호 반명제(反 命題)의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인격적 특성이 이처럼 일견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게 합니다. 자연계에서 이와 같은 상충적인 두 현상이 동시에 답이 되는 경우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봅시다.
모순을 피하기 위해서 두 개의 대답 중에서 한 가지만을 취하려고 할 때, 오히려 우리 자신이 모순이나 독단에 빠질 위험이 큽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그랬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하나님에 대한 제한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하나님은 <오경>의 하나님이 전부였습니다. <오경>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지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에 관한 제한적인 지식은 당시의 ‘유대’ 인들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유대’ 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수님에 관한 나름대로의 지식만으로 살아간다면, ‘사마리아’ 여인이나 ‘니고데모’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빛이 아니라 어둠 속에 있다 해야 할 것입니다. 편하게 느껴지는 것들만 받아들이려 하고, 믿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생명과 심판이 주는 상충되는 두 주제가 동시에 드러날 때에는 항상 충돌과 긴장이 나타나기 마련일 것입니다. 마치 전기의 음극과 양극이 서로 마주칠 때 ‘스파크’가 일어나듯이 말입니다. 하기야 예수님 스스로도 말씀하신 바 있듯이, 그분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오신 것이 아니기에 이러한 충돌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본문 이야기를 통해서 맛보게 될 충돌이나 긴장은 예수님의 적대 세력, 즉 이 세상에 속한 무리들인 ‘유대’ 인들이 일으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본문에서부터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마치 물이 갈라지듯 양분되고 있으며, 그분에 대한 공공의 적대감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수사학적으로 볼 때, 대중의 시기와 미움이 서서히 “그 때”, 즉 죽음을 향해서 상승곡선을 그려가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빛의 기능은 속성상 생명과 살균의 두 가지 효과를 지니기 때문입니다(시 18). 이와 같은 충돌과 갈등은 실은 <서막>에서도 이미 예고한 바 있습니다. 찾을 수 있겠습니까?
“생명과 심판”에 관한 주제를 위하여 화자는 두 개의 기적 사건을 나란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두 개의 기적 사건을 하나의 표적으로 기능하도록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는 ‘가나’에서의 두 번째 기적이라 칭하고 있는 “왕의 신하를 살리신 기적”이고 나머지 하나는 “베데스다 연못가의 기적”입니다.
참고로, 화자가 첫 번째 에피소드를 ‘가나’에서의 두 번째 기적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 사건은 ‘가나’의 첫 기적과는 원래 쌍둥이 이야기로서 요한공동체 내에서 구전으로 전해져 오던 것을 화자가 분리하여, 이번 단락의 주제를 위하여 소개하고 있다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구조. 전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하여 먼저 본문의 구조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새로운 주제를 소개하는 새로운 단락으로서 본문(4:43-5:47)은 두 개의 “표적 설화”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i) 왕의 신하의 아들이 나음(4:46-54)
(ii) 앉은뱅이가 나음(5:1-9)
이 두 기적은 공히 새 단락의 주제에 걸맞게 “치료와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락의 나머지 부분은 “해설” 내지는 “강론”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앞선 두 “표적 설화”에 대한 주제 강론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구분에 따라 단락은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표>
(1) 첫 번째 소(小) 단락은 일종의 전이 구절로서, 전체 단락에 대한 서론의 기능을 합니다. 앞에서도(2:23-25)에서 우리는 이와 유사한 기능을 이미 본 바가 있습니다. 이 구절 안에 소위 <요한 전승>과는 다소 동떨어진 ‘유대’ 잠언이 하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44절). 사실 이 잠언 구절이 이어지는 내용에 대해서 어떤 암시나 예고를 하고 있는 것인지 분명치는 않아 보입니다.
(2) 두 번째 단락의 기적 1과 관련해서 화자는 이것이 ‘가나’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두 번째 기적이라고 전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 이 둘은 같은 전승에 속해 있었던 쌍둥이 기적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연속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두 기적은 그 규모나 내용에 있어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자연법칙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 그것입니다. 기적을 흔히 자연법칙의 위반으로 이해하지만, 자연법칙 중에서 예외가 없는 보편타당성을 지니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연법칙은 현상이나 사건에 대한 기술(記述, description)의 기능을 할 뿐이지, 윤리∙도덕법처럼 처방(處方, prescription)의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연법칙은 어떤 현상이나 사건에 대한 사전 결정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지금까지(소위 혼돈이론이 등장한 지금에는 다소 수정될 수도 있겠지만) 가장 보편타당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는 두 법칙이 있는데, 흔히 “에너지(질량) 보존의 법칙”과 “무질서의 법칙”이 그것입니다. 이 둘을 각각 “열역학 제 1법칙” 및 “열역학 제 2법칙”이라 부릅니다. <성경>에서 흔히 기적으로 부르는 사건들은 모두 이 두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들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범주에 드는 사건을 “창조의 기적” 또는 “등급 A기적”이라 칭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두 기적은 이 범주에 드는 것들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들 외에도 또 다른 종류의 기적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 규모나 범위가 열역학의 두 법칙에는 딱히 위배되지는 않지만, 그 사건이 지니는 시간적이고도 공간적인 특이성 때문에 기적으로 분류하는 것들입니다. 이들 기적을 흔히 “섭리의 기적” 또는 “등급 B기적”으로 부릅니다. “출애굽”의 열 가지 재앙 중에서 일부가 그러하고, ‘엘리야’가 경험한 가뭄의 기적 등이 이 범주에 든다 하겠습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과학적 설명이 가능하고, 따라서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규정할 필요는 없지만, “왜 하필 그 때에?”라는 질문에는 답하기가 어려운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기적의 서론은 첫 번째 기적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은 가정에 입각해서 두 기적을 연결해서 읽어보면 비교적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아니 하니라...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2:12; 4:43)
그러나 혹자는 두 기적이 일어난 장소에 구애되지 않고, <요한복음>에서 등장하고 있는 일곱 개의 기적 모두가 하나의 기적 자료집에 들어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화자가 이 기적을 두 번째 기적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45절). 전혀 근거 없는 가정은 아닙니다.
이러한 주장과 관련해서 우리는 소위 <Q 자료> (예수님의 언행 모음집으로 알려져 있음)에서 취한 것으로 보이는 유사한 기적 이야기(마 8:5-13; 눅 7:1-10)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핵심적인 질문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이들 기적 이야기가 원래 하나의 전승에 속해있던 동일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별개의 이야기인가 하는 점입니다. 초기 학자들은 두 기사가 별개의 출처에서 유래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만, 최근에 이르러 대부분의 학자들은 두 기사는 모두 한 사건에 대한 다른 기록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먼저 <공관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유사한 기적 이야기를 읽고, 본문의 이야기와 비교 토의해 봅시다.
두 책의 기록에는 이야기의 서술 형식에 있어 유사성과 함께 차이점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이야기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요한복음>과 <마태복음>은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습니다. 즉 기적의 필요성이나 치유에 대한 설명, 그리고 기적의 결과 및 영향 등에서 대해서 모두 이례적으로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죽어가고 있는 아들을 둔 아버지의 간청에 대한 예수님의 퉁명스러운 답변과, 이에 위축되거나 굴하지 않고 재차 요청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 또한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들을 직접 찾아가는 대신에 그냥 그 아들이 치유되었다고 말씀하시는 장면이나(요 4:50; 마 8:13),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눅 7:10; 요 4:51)이나,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 기적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장면 등이 모두 닮았습니다.
그렇다면 두 기록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우선 <마태복음>이 아버지의 요청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봅시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주리라”(마 8:7). 그런데 실은 이 구절은 약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방인 백부장에게 자신이 어떻게 할지를 일러주고 계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질문을 하고 계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런 것이지요: “내가 가서 그를 고쳐달라는 말이지?” 이 질문 속에 담긴 예수님의 의도는 이런 것입니다: “내가 너의 집에 가서 네 아들을 고쳐주는 것은 좋다만,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율법을 어기는 것이라는 사실쯤은 너도 알고는 있겠지?”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 아버지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신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해석을 본문에서 ‘요한’ 화자가 소개하고 있는 예수님의 퉁명스러운 답변, “너희가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 하리라”와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여기서 예수님께서 꾸짖고 계신 상대는 이방인 신하가 아니라, 그를 통해서 불특정 다수의 불신을 꾸짖고 계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생각을 지지해 줄 만 한 한 사례를 <마가복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와 대화중에 “믿음이 없는 세대”에 대해서 한탄하시는데, 이 경우 탄식의 대상은 주변의 서기관들이지 그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참고. 막 9:19). 오히려 주님께서는 이방인 아버지를 일러,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겠노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마 8:10). 결국 이야기의 주제는 “이방인의 믿음”으로 초점이 모아지는데, 이는 <공관복음> 모두의 공통적인 인식이며, 역으로 동일한 <Q 자료>에서 유래한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역시 이방인 아버지의 믿음에 대해서 표현 방식이 약간 다를 뿐, 기본적으로 같은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돌아갔다는 표현이나 나중에 그와 온 집안이 다 예수님을 믿었다는 기록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참고. 49절 이후). 이와 유사한 주제나 ‘모티브’들을 <공관복음>의 다른 이야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막 7:24-30). 일독하고 과연 그러한지 공부해 봅시다.
결국 결론은 화자가 소개하고 있는 ‘가나’의 두 번째 기록 역시 그 원천은 <Q 자료>로서, ‘요한’ 화자가 자신의 상황에 맞게 이곳에 편집해 소개하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3) 한편 기적 2에 대한 묘사는 기적 1과는 전개 양식에 있어 사뭇 차이가 있습니다. 기적의 내용은 다른 복음서에서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치유에 관한 것입니다만, 이곳에서는 다른 많은 경우와는 달리, 환자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먼저 환자를 찾아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럴 경우 대개 안식일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참고. 막 3:1-6; 눅 13:10-17; 14:1-6).
이야기의 형식과 구조는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i) 기적의 배경과 필요성(1-5절)
(ii) 예수님의 방문(참고. 눅 7:13; 13:12)
(iii) 환자를 향한 질문과 기적의 선포- “네가 낫고 싶으냐”; “일어나 걸어라.”
(iv) 기적의 발생-“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하지만 두 기적 이야기에서 화자가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절대적 주권이 그것입니다. 신하의 아들이 살아나는 이야기와 관련해서, <공관복음>이나 <요한복음> 모두 아버지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요한’ 화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아버지의 믿음보다 더 강조하고 싶은 바가 있습니다. “네 아들이 살리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즉 생명을 주는 자의 절대적 권위의 말씀 말입니다. “생명과 심판의 주”로서의 예수님의 주권에 대한 강조는 두 번째 기적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를 맛보기 위해서 두 번째 기적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소감을 적어봅시다.
두 번째 기적 이야기는 “이날은 안식일이라”는 화자의 진술로 끝나고 있습니다. 아마 여기까지가 원래의 전승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화자는 여기에 안식일에 대한 대화를 덧붙이고 있습니다(10-18절). 아마도 그는 이 사건을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종종 있었던 안식일 논쟁의 한 예로 삼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왜 다른 날도 아닌 안식일에 그와 같은 치유의 사역을 하셨는지, 그리고 ‘유대’인들은 왜 그분의 행동에 대해서 반대를 했는지에 대한 이유나 설명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이 “대화” 부분은 이어지는 “강론”에 대한 일종의 사전 정지(整地) 작업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4) 과연 네 번째 단락(19-30절)에서 화자가 소개하고 있는 “강론”의 주제는 “생명과 심판의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거듭 밝히지만 이 강론은 신학적 주제에 있어 앞선 두 번의 기적 이야기나, 뒤 이은 대화의 안식일 논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도 일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밝히신 바 있는데(17절), 이 강론은 그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보다 앞선 두 “표적” 사건에 대한 해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는다는 ‘유대’인들의 비난(18절)에 대한 긍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강론에서 제시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두 가지 증거는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제시하고 있는 두 증거는 하나님과 기적입니다. 침례 ‘요한’에 이어 하나님을 세 번째 증인으로 내세우고 있는 점이 우선 문맥에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표적”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는 점도 화자 자신의 논지와도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표적”을 구하는 세대를 비난까지 한 바 있습니다(48절). 이처럼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강론”에 대해서 혹자는 제 삼자의 편집적 삽입의 손길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이를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배경. 본문에 등장하는 강론의 동기와 목적과 관련해서 당시 “요한 공동체”가 처해 있던 배경, 즉 화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본문의 “설화적 배경”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한 축제로 보입니다. 이와 같은 배경 하에서 화자는 첫 번째 기적 이야기를 이곳에 등장시키고 있는데, 예수님의 강론과 적절하게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만약 이 축제가 “오순절”이라고 한다면, 이 날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수여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 이 역사적인 날에 ‘모세’의 율법이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님의 논점을 지지해 주고 있는 것으로 비췬다면, 그 기적 이야기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요한 공동체”에게는 안식일 논쟁이나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논쟁 등을 포함해서 예수님과 ‘예루살렘’ ‘유대’인들과의 충돌은 매우 중요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본문의 강론은 이러한 배경 하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즉 당시 ‘유대’ 교회와 기독교회 간의 갈등과 충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화자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신학과 신앙
1. 예수께서 갈릴리로 오시다(4:43-45)
이야기의 첫 두 구절은 현대 독자들에게는 두 가지 점에서 다소 난해하게 들립니다:
43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44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43-44절)
우선 44절의 잠언은 본문의 배경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 출처는 ‘유대’인들의 경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선지자가 그의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하며, 의사가 그를 아는 환자는 고치지 않는다.” 하지만 본문 내에서 이 경구가 전후 문맥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신 것은 무슨 새로운 사역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반대의 목적, 즉 오히려 자신을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44절은 4:1-3에서 바로 이어지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참고로 44절은 원인이나 이유를 뜻하는 접속사 gavr(“왜냐하면” 또는 “이는”)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4:1-3)
그리고 44절은 곧바로 이어지는 45절과도 내용적으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 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45절)
적어도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기대했던 바는 ‘수가’ 성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열렬한 환영은 아니었을 텐데, 결과는 정 반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 역시 ‘예루살렘’에서 많은 기적들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이 보여주는 영접이 과연 어떤 성격의 것인지는 아직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만. 그들이 보여주는 영접이 진정한 믿음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기적을 행하는 자에게 불가분 따라다니는 일종의 대중적 환호나 인기에 불과한 것인지는 시험을 통해서 곧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월드컵” 축구대회 때에 우리나라 선수들은 대회 기간 중에 지옥과 천국을 몇 번 씩이나 오간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을 사랑한다는 열렬 팬들 때문에 말입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해당 선수는 물론 그의 아내 미니 홈페이지까지 이들 열렬 족들이 벌떼처럼 공격해서 초토화시키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44절의 잠언은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보여줄 반응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이 앞으로 겪게 될 저항과 배척을 암시해 주는 포괄적인 언급으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유대’에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참고, 2:23) ‘유대’ 땅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분은 ‘사마리아’를 지나 ‘갈릴리’를 향해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갈릴리’는 선지자가 태어날 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습니다(7:52). 한편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많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에 그분을 영접하고 있습니다(45절).
2. 표적 1: 신하의 아들을 살리심(46-54절)
왕의 신하는 아들이 치명적인 병에 걸려 깊은 근심에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도와달라고 간청하러 옵니다.
46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47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46-47절)
이 신하는 예수님이 진짜 기적을 일으키는 분인지 알아보려는 신학적인 의도에서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필요와 예수님이 도우실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찾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화자는 물론 그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이 사람의 간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8절)
이와 관련해서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기록 간의 형식적 연계성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다룬바 있습니다(“문학과 역사” 참고). 즉 두 기록이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이야기 요소 중의 하나가 아버지에 대한 “믿음의 시험”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참고로, <요한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인물은 “왕의 신하”인데 반해, <마태복음>에서는 “백부장”으로 소개하고 있으며(8:5-13), <누가복음>은 이들의 아들이 아니라 “사랑하는 종”이 아픈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7:1-10).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 구절도 ‘요한’ 화자가 <공관복음>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시도로써, 본문의 전후 문맥과는 다소 동떨어진 구절을 다소 무리하게 삽입한 것처럼 보입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 대한 이와 같은 “믿음의 시험”은 다른 이야기에서도 종종 등장하고 있는데, 예컨대,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수로보니게’ 여인을 향해서도 예수님께서는 기절을 베푸시기 전에 먼저 여인의 믿음을 시험해 보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 하니라”(막 7:27). ‘가나’에의 쌍둥이 기적 중의 하나인 “포도주의 기적” 이야기에서는 예수님은 심지어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나이다”(2:4).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집요하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49절)
이 대목 역시 <공관복음>의 의도와 크게 차이가 없는 것이, 그의 믿음을 강조하려는 화자의 의도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남자의 믿음은 시험에서 합격점을 받기에 충분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신하는 아들이 나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집으로 되돌아갔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50절)
하지만 신하의 믿음에 관한 언급은 여기까지입니다. <공관복음>에 따르면, 남자의 끈질긴 요구에 대해서 예수님의 칭찬이 뒤따르고 있습니다만(참고. 8:10), ‘요한’ 화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다루는 화자의 의도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의도인 즉은 이 사건을 “표적”으로 다루고 싶다는 것입니다. 즉 화자에게 있어 이야기의 주인공은 신하가 아니라, “세상의 구주”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방점(傍點)은 이 남자의 믿음이 아니라, 그가 돌아가는 길에 확인하게 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51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52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51-52절)
신하가 확인한 사실은 그의 아들이 나은 시점이 예수님께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고 말씀하시던 바로 시점과 일치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50-51, 53절). 그리고 그가 알게 된 사실은 생명의 주로서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이 기적이 표적으로서 기능하게 될 부분은 아이의 생명이 이어지는 강론의 주제가 될 “영생”(5:24)에 대한 표적이 될 것이며,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에 대한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5:21, 25-26, 28-29).
이야기의 정황으로 볼 때, 그가 표적의 결과로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아니지만, 이 일로 주님을 아는 지식이 더욱 넓어지고 깊어진 것만은 사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표적의 능력은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온 집안 식구들이 다 믿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53절)
결론적으로, 권위 있는 주님의 말씀과 신하의 믿음이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깨닫는 두 요소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3. 표적 2: 38년 된 병자를 일으키심
두 번째 기적 역시 처음 것과 마찬가지로 “표적”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는바, “생명의 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가 핵심 주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두 번째 이야기의 핵심 단어는 동사 “일으키다”(ejgeivrw)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8년 된 앉은뱅이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일어나라”고 명하시자, 그가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생명을 살리시는 주님의 절대적 능력과 권위에 대한 증거이자 표적이 된 것입니다.
이 기적은 병자의 믿음과는 아무 상관없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신하와 같은 믿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오히려 불평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에게 주님은 일어나 걸으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왕의 신하가 보였던 것과 같은 믿음은 전혀 불필요하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물론 앞의 이야기에서도 핵심 주제는 신하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었습니다만, 두 번째 이야기에서 그 주제는 더욱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화자의 배경 설명(1-5절)도 이 주제를 더욱 돋보이도록 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입니다. 뛰어난 사실적 묘사가 그렇고, 독자들이 거의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도입하고 있는 대조적인 이미지의 사용 또한 뛰어납니다: “유대인의 명절”; “‘예루살렘’의 ‘양문’”; “‘베데스다’ 연못”; “다섯 행각”; “삼십팔 년 된 병자”; 등등. 이들 사실적인 표현들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꾸며낸 이야기나 전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섯 행각을 포함한 ‘베데스다’ 연못 등의 유적들은 현재 고고학자들이 이미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바탕 위에 화자는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과 삼십팔 년 동안이나 온 몸이 마비되어 꼼짝없이 누워있을 수밖에 없는 한 사람을 차례로 비추면서 대조의 기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둡고 일면 살벌해 보이는데, 특히 이 한 사람에게 드리운 그림자는 더욱 압도적입니다. 그는 스스로 일어나 그 온천물 속에 들어갈 수가 없으며, 그렇다고 주위에 있는 어느 누군가 그를 도와주기는커녕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고독과 절망”, 이 두 단어가 지금 이 사람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배경 설명은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과 극적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치유의 능력이 발휘되고, 예수님은 생명의 주가 되심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그토록 오래 동안 지속되어 온 이 병자의 필요가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즉각적으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9절상)
사실 이 장면은 엄청난 충격과 환희로 가득 차 있어야 할 것입니다. 대개 이럴 경우 영화에서는 갑자기 모든 음향 효과를 제거해버리고, 동작도 ‘슬로모션’으로 처리합니다. 관객들의 반응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지요. 화자 역시 동일한 기법을 도입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기적을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들은 물론 환자 자신의 반응마저 일체 생략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상하고도 남습니다. 고침을 받은 병자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군중들은 또 어떠했을지 말입니다. 아주 짧은 순간 엄청난 충격으로 정적이 흐르긴 했을 것입니다만, 이내 그 장소는 경탄과 환호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일부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4. 강론 1: 생명과 심판의 주, 그리스도
대화. 이들이 누구일까요? 우리는 화자가 기적 이야기의 끝 부분에 첨가하고 있는 마무리 언급을 통해서 그들이 누구일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날은 안식일이니(9절하)
이 구절이 기능하는 바는 이중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앞 단락을 수미상관적(首尾相關的)으로 마무리해주는 결론으로서의 기능이 그것입니다. 두 번째 기적 이야기의 처음과 마지막 구절이 수미상관적으로 연결되는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1절)
...................................................................................................................................
이 날은 안식일이니(9절하)
‘요한’ 화자는 <서막>에서,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고 선언한바 있습니다만, “빛”의 행위(즉 기적)가 그 빛에 적대적인 “어둠”의 세력에 의하여 에워 쌓인 형국을 보는 듯합니다.
이 구절은 또한 이어지는 단락에 대한 서론의 기능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일차적으로는 안식일에 대한 논쟁을 예고해주고 있으며(참고. 10-18절),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대한 논쟁은 다시 예수님의 긴 강론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강론은 그 내용에 따라 편의상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겠는데, 첫 번째 강론(19-30절)은 앞선 두 번의 기적 사건이 “표적”으로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설입니다. 강론의 주제는 “생명과 심판의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두 단어가 강론 중에 자주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점으 f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식일 논쟁을 먼저 시작한 쪽은 ‘유대’인들입니다. 알다시피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어둠” 또는 “세상” 등과 함께 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전달하는 대표적인 단어입니다.
10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10-12절)
이 질문은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하더라”는 화자의 선언에 대한 케이스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빛을 깨닫지 못하기는 ‘유대’인들 만은 아닙니다. 병 고침을 받은 당사자 역시 모르기는 매 일반입니다.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13절)
놀랍게도 이 사람은 누가 자기 병을 고쳐주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당연히 믿음이 생겼을 리도 만무할 것입니다.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지도 않았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예수님 또한 자신의 신분을 밝히시지도 않았으니, 이 사람에게 믿음이 생겼을 리가 없는 것이지요. 놀랍기는 ‘유대’인들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38년이나 된 병자가 한 순간에 나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이 사람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데 있습니다. 이 사람이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관한 소모적인 논쟁을 피하여 성전을 떠나셨던 예수님께서 얼마 후 다시 성전에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이전에 고침을 받았던 사람을 다시 만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14절)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마치 이 사람의 병이 그가 저지른 죄와 상관이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화자의 의도는 실은 다른데 있습니다. 이점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에 대하여 그 원인을 묻는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참고. 9:1-4).
화자는 지금 이 대화를 통해서 강론의 주제를 확대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이 구절을 이어지는 강론의 주제, 즉 “생명과 심판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질병의 치유를 통해서 자신이 “생명의 주”이심을 선포하신다면, 죄와 죽음을 통해서 “심판의 주”가 되심도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참고. 17-30절).
안식일 논쟁은 그 자체로서도 ‘유대’인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15-16절), 예수님은 마치 불 위에 기름을 붓듯, 더욱 엄청난 논쟁거리를 하나 더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 그것입니다.
1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17-18절)
왜 ‘유대’인들이 이처럼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선언을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닐까요? ‘유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는바 하나님의 “일과 인식”의 기원은 <창세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2:2). 즉 이 구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창조 사역을 마치셨고, 그날 이후 지금까지 안식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속 활동하고 계시다는 <성경>의 기록과 조화를 이루기 위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의 사역은 마치셨지만, 의인과 악인에 대한 보상과 심판의 일은 계속 진행하고 계시다는 설명이 그것입니다.
이와 같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나도 일한다”는 선언은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즉 그 말은 자신과 하나님은 동등하다는 선언과 결국 같은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이해가 바로 그와 같습니다(18절). 그리고 그 때문에 그들은 지금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들은 예수님의 선언을 제대로 이해한 것일까요?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이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에 실패한 것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신분을 파악하는 일에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즉 이들은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예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과 하나님이 동등하다는 의미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즉 “동등함”을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 내지는 독자적인 것으로 이해했을 뿐, 하나님에 대한 의존적인 관계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점에서 그들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부를 때, 두 분 사이의 독특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이와 같은 호칭에는 상호 긴장관계에 있는 이중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즉 한편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절대적인 의존성을 강조하고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한 위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참고. 190-20, 21-22, 26-27, 30절).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부르는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분노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유대’인들 역시 그들 스스로를 신적인 존재로, 신의 자녀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시 82:6)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방인의 왕에 대하여 신적인 존재로 만들었다고 자랑하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출 7:1)
‘바로’가 스스로를 높여 이스라엘 앞에서 신이라 자칭하고 있으니, 실은 그가 ‘모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라는 강한 메시지가 담겨있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생각건대, 하나님께서 이처럼 한 인간을 신적인 존재로 높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스스로를 높여 신이라 칭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야말로 바로 그와 같은 자일 것입니다.
강론. ‘유대’인들과의 대화에서 이미 단락 전체에 대한 주제가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이어지는 예수님의 첫 번째 긴 강론(19-30절)에서 보다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강론의 주제는 물론 “생명과 심판의 주”에 관한 것입니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자신과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에 대해서 먼저 밝히는 것으로 시작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19절)
하지만 이 선언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17절에서 밝힌 바 있는 내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 즉 두 절은 일종의 유사 반복의 관계에 있다 하겠습니다. 이 선언에 대한 ‘유대’인들의 인식과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된다는 말, 즉 동등함을 일종의 경쟁적인 관계에서 하나 됨이라든지, 또는 “제 2의 신(神)”이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독립성과 동등성과는 정반대로 철저하게 자신이 하나님께 의존해 있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이 이를 말합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1:2),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셨으며(1:18), 직접 본 것을 그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다음 구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20절)
즉 19절과 20절은 각기 “보다”와 “보이셨다”의 관계로 짝을 이룬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절에서는 아들이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고 있다면, 20절에서는 아버지가 그 하시는 일을 아들에게 보이시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 예수님과 하나님의 각별하고도 독특한 “영원한 교제”(eternal communion)를 강조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 교제를 가능하게 해주는 원동력은 물론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일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말하는 ‘하나 됨’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과의 동등성”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학자 ‘레슬리 뉴비긴’은 두 분 사이의 관계가 서로 다른 관계, 심지어는 반대 관계라고까지 주장합니다. 좀 어려운 말로 하자면, 두 분의 하나 됨은 존재론적인 하나 됨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 됨입니다. 그리고 인격적인 하나 됨은 자연히 사역에 있어서도 하나 됨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가 하는 일을 아들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성자(聖子) 예수님이 성부(聖父) 하나님에게 철저하게 의존해 있고, 그에게 복종하셨다고 해서 성자의 존재가 위축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만이 하실 수 있는 그 일을 아들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더 큰 일”(20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더 큰 일”은 구체적으로는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친 기적, 즉 생명을 살리는 일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것과 대비를 이루는 또 다른 일도 포함하고 있어야 합니다. 상충(相衝)되면서 동시에 상보(相補)되는 두 가지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어지는 세 절(21-23절)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21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21-23절)
이곳에 등장하는 두 핵심 단어는 무엇입니까? “생명”과 “심판”입니다. 이 두 가지 기능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 고유한 기능입니다. 그리고 그 기능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위임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종말과 함께 시작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종말이라 함은 현재와 미래 모두를 포함하는 이중적인 의미입니다. 종말 즉 새로운 시대는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시작되었고, 그리고 앞으로 올 것이기도 합니다. ‘브루스 밀런’은 종말과 함께 시작된 예수님의 일을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브루스 밀른’, 126-128쪽.
첫째, 종말이 올 때 아들은 죽은 자를 살릴 것입니다(21, 25, 28-29절). 물론 이 일은 성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기도 합니다(21절). 여기서 “일으켜 세우다”(28-29절)는 동사는 38년 된 병자를 “일으켜 세울” 때 한 차례 사용한 바 있는 단어이기도 합니다(8절). “베데스다의 기적”이 표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즉 38년 동안 죽어있던 그 사람의 육체가 다시 살아 난 것처럼, 예수님의 살리시는 일은 미래의 모든 세대에 걸쳐 일어나게 될 것임을 보여주는 표적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살리시는 능력이 이미 나타나고 있고, 또한 미래에 계속해서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어지는 선언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절)
이 선언은 <요한복음>의 핵심 선언 중의 하나입니다(참고. 3:16, 36). 즉 믿는 자는 지금 이곳에서 이미 영생을 누리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심판은 믿지 않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3:18, 36). 그런 점에서 믿는 자는 모두 이미 죽음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나중에 <나자로의 기적> 이야기에서 이 사실은 다시 한 번 입증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놀라운 주장을 다시 한 번, 그러나 보다 광범위한 차원에서 반복 선언하고 계십니다. 이어지는 선언이 바로 그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25절)
이 선언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생명은 생명으로부터 나온다”는 단순한 인과율(因果律)이 그 근거입니다.
26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26-27절)
예수님께서 종말과 함께 시작한 두 번째 일은 무엇입니까? 종말의 때에 아들은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22, 27, 29-30절).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관한 또 다른 중요한 선언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예수님의 두 가지 일은 서로 상충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일은 전혀 모순되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 그 모든 피조물을 멸하거나 심판할 수 있는 권리와 책임을 지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맡으셨다는 선언이 27절의 내용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선언이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믿기가 너무 어렵다는 뜻일까요. 그분께서는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28절)는 충고도 아끼지 않습니다.
28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28-29절)
예수님께서 종말과 함께 “살리고 심판하는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도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지만, 그것은 다만 시작이며 미래에 일어날 일의 서곡일 뿐이라는 선언이 더욱 충격적인 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 미래에는 지금처럼 단순히 병자가 고침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죽은 자들까지 살아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29절이 의미하는 바는 행위에 의한 구원이나 심판이라기보다는 선택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선한 일”과 “악한 일”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거부하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참고. 3:16-21).
예수님의 종말론 강론은 그 시작했던 곳으로 되돌아감으로써 결말을 맞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19절과 30절은 강론을 수미상관으로 감싸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19절)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30절)
이 두 구절은 다시 한 번 강론 전체를 흐르는 핵심 전제, 즉 성자의 성부의 하나 됨과 연합을 강조하고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5. 강론 2: 그리스도의 증인들
예수님의 두 번째 강론은 그리스도의 증인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강론을 하다 말고, 갑자기 강론의 진위 여부를 가려줄 증인들에 관하여 말머리를 돌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추측컨대, 예수님의 엄청난 선언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분노하고 의심하며, 과연 그가 무슨 권세로 그와 같은 행동과 주장을 펴는지를 따져 따졌고, 또한 그에 합당한 증거들을 요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강론의 주제에서 잠시 일탈하여, 강론의 나머지를 그의 증인들에 관해서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장면은 법정에서 원고와 피고가 공방을 벌이고 있는 장면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원고는 ‘유대’당국, 그리고 피고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도는 표면상으로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강론의 끝부분에 이르면 이와 같은 구도가 완전히 역전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피고가 원고의 위치에, 원고가 피고의 자리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에서도 이와 유사한 장면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내용인 즉은 ‘야훼’ 하나님과 열방의 신들 사이에서 진정한 유일신(唯一神)의 정체를 놓고 벌어지는 법정공방이 그것입니다. 이 장면에서도 피고는 ‘야훼’ 하나님이며, 원고는 열방의 신들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결백과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증인을 내세우고 있는 측은 ‘야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야훼’께서 자신을 위하여 변호해 줄 증인으로 이스라엘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 내라.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은들 그들 중에 누가 능히 이 일을 고하며 이전 일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그들로 증인을 세워서 자기의 옳음을 나타내어 듣는 자들로 옳다 말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 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너희 중에 다른 신이 없었나니,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과연 태초부터 나는 그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사 43:9-13).
역설적인 것은 당시 ‘야훼’ 하나님을 변호해 줄 증인으로 지목받았던 ‘유대’인들이 이제는 반대로 원고의 자리에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변호해 줄 증인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세 증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 예수님이 제시하는 첫 번째 증인은 성부 하나님이시며, 나머지 증인들을 보내줄 증인이기도 합니다.
31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32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31-32절)
그런데 이 선언은 다른 곳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과는 다소 상충되는 부분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컨대, 아래 대화가 그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요 8:13-14).
즉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자신의 증언은 그 자체로써 진실인 것이, 그분의 말은 곧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8:16, 28; 12:49). 그러므로 예수님의 증언은 혼자만의 증언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수(複數)의 증언이라는 것입니다: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8:17-18).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님의 일견 상충되어보이는 선언이 아니라, 고발인 즉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증언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성자 하나님의 증거는 곧 성부 하나님 자신의 증언인데도, ‘유대’인들이 이를 분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가분 예수님은 그들의 방식대로 증언에 관한 <신명기>의 원칙을 따르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신 19:15). 즉 상대에게 익숙한 게임의 법칙을 따르겠다는 의사 표시인 것이지요.
침례 요한. 예수님이 제시하는 두 번째 증인은 침례 ‘요한’입니다. 그가 증인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이전에 ‘유대’ 당국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 “오실 자”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1:19-28).
33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34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35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33-35절)
그러나 이곳에서 예수님은 증인으로서의 그의 역할이나 위상에 대해서 그렇게 높이 평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들 ‘유대’인은 그의 증언에 대해서도 한 차례 거부한 적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의 증거가 한 인간의 증거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래도 그를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은 그나마 그를 통해서 사람들이 구원을 받도록 하려는 의도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기적.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세 번째 증인은 그분 스스로 행하시는 기적입니다(참고. 10:25; 2:23-25).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36절)
이 문장에서 “역사”(e[rgon, 에르곤)는 “일” 또는 “행위”를 뜻하는데, 기적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 화자는 기적보다는 “표적”이라는 단어를 선호하고 있습니다만, 이들이 침례 ‘요한’의 증언보다 더 강력하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적은 단순히 그분께서 살아계실 때 행했던 기적만이 아니라, 그의 죽음과 부활을 포함하는 생애 전체를 포함한다 하겠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기적이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만(참고. 눅 7:18-23), 또 다른 이들에게는 오히려 실족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눅 7:23). 오늘날에도 기적은 여전히 하나의 증거로서 무시할 수 없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성경.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네 번째 증인은 <성경>입니다.
37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37-39절)
증인으로서의 <성경>의 역할과 관련해서 처음 두 구절은 각별합니다. 즉 <성경>의 증언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이나 형상과 연관 짓고 있는 점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이 하나님의 모습을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에 준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오늘 우리가 가진 것과 같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을 리가 없으므로, 예수님은 당시 그들이 지닌 <성경> 즉 “율법”이나 “예언서”를 지칭하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이나 “예언서”를 하나님의 음성이나 형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받던 당시 장면을 연상하면 될 것입니다. 이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으며, 천둥과 번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엄을 보았고, 이스라엘은 충격으로 떨고 있었습니다(출 19:16-25; 신 4:11-12, 33).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 그들의 <구약> 즉 그들의 <성경>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음성이자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도 이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예수님도 인정하십니다. 그들 역시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9절하).
무지와 불신. 그러나 예수님의 인정은 거기까지입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열심히 연구는 하지만 <성경>이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왜 <성경>을 열심히 연구는 하는데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하는 것일까? ‘유대’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40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 하는도다. 41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40-44)
예수님의 진단은 삼중적입니다. 첫째,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습니다(38절). 둘째,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40절). 셋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42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는 자를 영접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오는 자는 신뢰하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는 자는 신뢰하지 못하는 무지와 불신을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진단은 진단이라기보다는 피고를 향한 검사의 논고나, 재판장의 판결문에 가깝다 하겠습니다. 어느새 원고와 피고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모습입니다. 이어지는 세 구절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마치 검사가 논고를 하듯, 또는 재판장이 최종 판결문을 읽어내려 가듯 그를 고발하던 ‘유대’인들을 진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45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45-47절)
더욱 충격적이게도, ‘유대’인들이 알아야 할 사실은 그들을 고발하는 자가 예수님이 아니라, ‘모세’라는 점입니다. 자신들의 변호사로 믿고 있었던 사람이 검사로 돌변하여, 그들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고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모세’에 대해서도 잘못 알고 있었다는 진단을 받고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1. 표적 1: 신하의 아들을 살리심
안동 우리 집 교회의 장 전도사님은 교회 식구 중 누군가 경북대학교 병원에 올 일이 있으면 꼭 나에게 연락을 합니다. 대학 병원에 혹시 아는 사람이 없는가 하고 말입니다. 하기야 내가 대학에 근무하고 있으니 병원에 한 두 사람 지인이 없을 리 없고, 그들에게 부탁을 해서 입원 수속이나 기타 치료에 대해서 편의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을 해 준 적이 있기도 합니다. 가장 최근에는 전도사님의 형부이신 최 집사님께서 위급한 상황이 발발하여 안동에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 경북대학 병원에 입원시킬 수 없느냐며 급하게 연락을 해 왔습니다. 이번에도 다행스럽게 병원에 도착 즉시 병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어려운 일을 당한 이웃을 보면 도우는 것이 마땅한 일이나, 이런 부탁을 받을 때마다 실은 난감하고 답답한 것도 사실입니다. 솔직히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대학 병원장이거나 또는 의사나 간호사였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렇다면 급한 사람들이 구태여 다른 사람을 거치지 않고 직접 찾아가 바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우리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의사 한 두 사람 정도 알아두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비단 병원만이 아닙니다. 세상 살아가면서 도움을 받을 일이 어디 병원뿐이겠습니까? 경찰이나 검찰에도 가까운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세무서는 어떻습니까? 관공서 공무원은 어떻습니까? 골프장 사장은 어떻습니까? 이래저래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려면 여러 분야에서 한 두 사람 가까운 사람이 꼭 있어야 합니다.
왕의 신하는 어떻습니까? 아들이 치명적인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어느 누군들 이런 위급한 처지에 놓이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이럴 때 어디 가서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합니까? 누구를 찾아가야 하나요? 군대 상관을 찾아갈까요? 군의관입니까? 아니면 곧바로 왕을 찾아갈까요?
이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어디를 간들, 누구를 찾아간들, 별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습니다.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기에는 모두들 역부족일 뿐입니다. 그는 지금 절망 가운데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진짜 기적을 일으키는 분인지 알아보려는 신학적인 의도에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깊은 인간적인 필요와 예수님이 도우실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여 찾아온 것입니다. 그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아주 냉혹합니다. 이 사람의 간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 하리라”(48절). 예수님은 ‘가나’의 잔치 집에서 심지어는 그분의 어머니에게도 이런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여인이여,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나이다.” 마치 불교의 선문답을 하듯 말입니다. 이와 같은 매정한 태도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를 찾아와 간청했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막 7:27).
예수님은 이 신하가 마치 무슨 표적이라도 구하고 있다는 듯이 그를 꾸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꾸짖음은 그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주변 사람들 즉 ‘유대’ 인들을 향한 것처럼 들립니다. 다시 말하자면 주님은 지금 이 신하가 보여주고 있는 믿음이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다는 믿음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말씀하려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다시 풀어 설명해 보자면 이런 것이겠지요: “보아라, 이 진정한 믿음을! 그런데 너희들은 뭐야? 너희들은 표적이나 기사를 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믿지 않으려 하지?”
표적과 기사를 요구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이 주장하는 바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증거를 제시하라는 일종의 요구사항인 것이지 믿음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태도는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의 상상력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표적을 요구한다는 것은 자신이 궁극적인 주권을 손아귀에 쥐고 있겠다는 의지 표명입니다. 시험 방법을 미리 정해놓고, 그 방법에 따라서 하나님이 스스로를 증명하도록 요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시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안함사건 원인 발표에 대해서도 보는 바지만, 믿음은 증거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압도적인 과학적 증거를 제시한다 해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둠 속에 사는 사람의 특징이자 한계입니다. 증거가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이지요. 정말 불쌍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무리 예수를 믿으려 해도 믿을 수가 없어. <성경>이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아.” 이런 사람 용감한 사람이라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불쌍한 사람이라 해야 합니까? <성경>은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공부를 한다고 해서, 무슨 증거를 산더미처럼 쌓아놓는다고 해서 믿어지는 책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신하를 한 번 주목해 볼까요? 이 사람은 신학자도 아니고 종교적인 인물도 아닙니다. 아주 절박한 상황에 처한 연약한 한 인간일 뿐입니다. 내가 정말 연약하고 불쌍한 존재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애절하게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한번 퇴짜를 맞았다고 해서 물러설 기색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압박하고 나섭니다: “선생님,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주십시오”(49절).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나는 지금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고상한 강의를 듣고 있을 형편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당신의 즉각적인 행동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이 간절한 요청에 예수님은 한 마디로 응답하십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50절상). 주님의 말씀은 실은 하나의 행동입니다. 주님의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말씀에 대해서 신하의 반응은 즉각적입니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힘과 권위를 느꼈나 봅니다. 그는 명령을 내리는 것과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두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 마디 대꾸도 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행동입니다. 비록 53절에서 드러나게 될 온전한 믿음에는 미치지는 못하지만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인간적인 필요와 괴로움에 처한 이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을 명하는 주권적인 권위가 들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떤 이미지나 그림에 순종하는(혹은 불순종하는) 존재가 아니라 어떤 말에 순종하는 존재입니다. 권위 있는 목소리에 익숙해져 있는 이 남자에게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충분했습니다. 그저 수용하고 순종하면서 예수님에게 그 말씀을 실현시킬 주권적인 자유를 맡긴 것입니다. 집요하게 도움을 청하던 그의 외침은 중심점을 옮기는 한 마디 말씀으로 조용해지고, 자신의 주권을 예수님의 손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돌아서서 집으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50절하).
이 사람이 그의 집까지 가려면 도중에 하룻밤을 머물러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날이 되어서야 자기 아들이 실제로 회복되었다는 좋은 소식을 가지고 마중 나온 자기 종들과 마주쳤던 것입니다(51절). 그러고는 시간을 따져 보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순간에 아들의 병이 나았음을 확인하게 됩니다(52절). 이러한 병 고침의 기적에 근거해서 그 신하와 가족은 믿음을 고백합니다(53절). 그 고백은 분명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약속된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앞선 사마리아 동네 사람들의 그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지 않고, 이 사건을 예수님이 가나에서 일으켰던 기적과 연계시키면서 ‘두 번째 표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54절). ‘가나’에서의 첫 번째 표적 이후 ‘예루살렘’에서 많은 표적을 행하신 것으로 전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쓰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도 비슷한 순서로 표적이 일어났습니다. 즉, 보통의 인간적인 필요에 의해서 나온 단순한 요청이 먼저 있었고, 예수님께서 일차적으로 퇴짜를 놓으셨고, 이어서 그분의 명령이 떨어지고, 인간 편에서의 순종이 뒤따랐으며, 그 명령에 순종한 자들만이 알아차린 소위 ‘표적’과 함께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순서가 그것입니다. 믿음과 표적의 관계에 관한 중요한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순종하는 자들에게만이 예수님께서는 은혜로 표적을 허락하신다는 사실 말입니다. 반대로 표적을 증거로서 요구하는 자들에게는 결코 이러한 일이 허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나에서 행하신 첫 번째 기적에서 창조자임을 보이셨습니다. 즐거움과 기쁨의 창조자 말입니다.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에서는 스스로를 새로운 성전 곧 하나님과 그 백성이 만나는 참된 장소로 선포하셨습니다. 니고데모에게는 자신이 위로부터의 새로운 탄생을 선사하는 분임을 계시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인들에게는 세상의 구주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버나움’에서는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는 자가 되셨습니다. “아들이 살았다”는 문구가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극적인 반전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신하의 믿음의 한 행동이었습니다. 질병과 죽음이 지배하던 이야기의 전반부(46-49절 사이에 이 단어가 얼마나 자주 등장하고 있는지 알아볼 일입니다)가 예수님의 말씀-“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을 기점으로 온통 생명의 단어들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을 봅니다(50-53절 사이에 이 단어가 몇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지 알아봅시다). 믿음이 인간 편에서 가져야 할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브루스 밀런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루스 밀런’, 117쪽.
예수님이 채워 주신 그 절박한 필요를 지닌 소년이 어떤 시점에서도 실제로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의 상황과도 유사하다. 그 소년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을 실제로 만난 것은 아니지만, 그 때문에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실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이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믿음이 발휘될 수 있는 배경이 된다.
‘밀런’의 말대로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과의 이 만남에는 그 소년의 병이 낫는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것이 걸려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 아버지의 심령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치유가 이루어지고 나자 그것은 그의 전 가족에게 복을 안겨다 주는 수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것은 바로 이 최종적인 보물이며 그분은 그것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심각한 괴로움을 경험하도록 내버려 둘 준비도 되어있는 것입니다. ‘브루스 밀런’, 119쪽.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참고 히 12:11)
2. 표적 2: 앉은뱅이를 일으키심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맞는 말입니까? 우리가 오래 동안 하도 많이 들어왔던 터라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은행이 망해가는 사업자에게 돈을 꾸어주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오히려 사업이 번창하여 대출이 필요 없는 사업가에 돈을 빌려주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의 경제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원리는 비단 인간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세속적 원리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성경>도 이를 지지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 25:29).
과연 그렇습니까? 과연 <성경>은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 원리를 지지해 주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 원리를 ‘베데스다’ 연못가의 앉은뱅이에게도 그대로 적용했습니까? 예수님께서 38년을 무기력하게 앉아있던 이 병자에게 “네가 스스로 일어나면 내가 돕겠다”고 약속했습니까?
“베데스다 연못가의 기적”은 이 질문에 대해서 무어라고 답하는지 알아볼 일입니다. 신하의 죽어가던 아들이 살아난 기적은 우리가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그 기적과 쌍을 이루고 있는 이 기적은 지금 우리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 결코 놓칠 수 없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처음 기적이 무대 뒤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이번의 기적은 무대 중앙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습. 기적의 배경 설명(1-5절)은 뛰어납니다. 사실적 묘사가 그렇고, 주제를 극적으로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독자들이 거의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도입하고 있는 대조적인 이미지의 사용 또한 그렇습니다.
화자는 천천히 그리고 아주 상세하게 ‘베데스다’ 연못가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설명을 통해서 마치 고속 촬영을 한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만일 그가 화가라면 필경 사실주의 학파에 속해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이나 주변 풍경 그리고 상황에 대한 묘사가 아주 사실적이라, 마치 오래 전에 현장에 있던 기억을 되살려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명절”; “예루살렘의 양문”; “베데스다 연못”; “다섯 행각”; ‘삼십팔 년 된 병자’; 등. 이와 같은 사실적인 표현들은 지금 우리가 꾸며낸 이야기나 전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대하고 있음을 분명히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꾸며낸 이야기나 전설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자신이 소개하고 있는 이야기가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임을 강조하려고 이처럼 사실적인 묘사를 택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의도가 있다 하겠습니다. 그가 그려내고 있는 것은 세상의 모습입니다.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그래서 무슨 일인가는 일어나야만 하는 그 세상의 모습, 즉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의 모습을 먼저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처음 다섯 절에서 이야기의 배경으로 그려내고 있는 모습은 어둠침침하고 절망적입니다. 무대는 온통 “눈먼 자”, “저는 자”, 그리고 “혈기마른 자” 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스스로 돕기는커녕 제대로 된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대조적인 표현이나 단어의 사용은 또 어떻습니까? 예컨대, “‘유대’인의 명절”과 ‘예루살렘’에 관한 언급이 그 중 하나입니다. 이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그가 언급했던, “‘유대’인의 결례”나 “여섯 개의 물 항아리”와 병행하는 대조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흥겨운 혼인 잔치에 “‘유대’인의 결례”나 “여섯 개의 물 항아리”를 대조시키고 있는 화자의 의도는 이곳에서 새 생명의 기적에 “‘유대’인의 명절”이나 ‘예루살렘’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과연 그가 무엇을 대조하려 함일까요? 그리고 숫자 “38”도 범상치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떠올려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유대’인의 결례”나 “여섯 개의 물 항아리”가 흥겨운 잔치에 무슨 기여를 했는가? ‘유대’인의 명절이나 ‘예루살렘’ 성전이나 예배가 ‘베데스다’ 연못가의 비참한 상황을 개선하는 일에 무슨 기여를 했단 말인가? 앉은뱅이가 38년을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었단 말인가? 도움은커녕 무슨 관심이라도 보였단 말인가? 연못의 물이 움직이면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아우성치는 이 세상에서... 무기력과 무관심, 그리고 무능과 무지. 이것이 화자가 생명의 기적에 대한 배경으로 채색해 내고 있는 모습입니다.
은혜와 주권. 그러나 바로 이와 같은 장면이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바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일어나야만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해주어야만 한다는 강렬한 바램입니다. 주님의 주권적인 개입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제 그 무대 안으로 주님께서 걸어 들어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눈은 그 많은 병자들 중에서 38년 동안 꼼짝없이 앉은뱅이로 살아오던 한 병자에게 머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도 그분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어찌 빛을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들 모두는 한 결 같이 인생의 소망을 엉뚱한 곳에 두고 있었습니다. 요행수나 미신(迷信)이 그들의 소망이었습니다. 즉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를 맞으러 일어나지도 않았습니다. 다리를 저는 자들이 어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무도 손을 뻗어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혈기 마른 자 즉 손발이 마비된 자가 어찌 손을 뻗어 구원을 요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먼저 오셨고, 그들 사이를 왕래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가장 절망적인 한 병자, 38년 된 앉은뱅이를 고쳐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사람의 믿음을 보고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왕의 신하처럼 주님에게 먼저 다가와 구원을 요청한 것도 아니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달려갈 수 있는 자도 아닙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먼저 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6절)? 사실 이 질문은 질문이 아닙니다. “내가 너를 고쳐주겠다”는 복음입니다. 어둠을 가르고 비치는 한 줄기 섬광(閃光)입니다. 주님의 이 선언은 왕의 신하에게,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는 선언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무기력한 세상을 향해 던지시는 주님의 주권적인 복음 선포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무어라 답했습니까? “아, 물론입니다. 정말 낫고 싶습니다. 저를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이렇게 답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맥 빠지는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가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7절). 불평과 원망입니다. 그의 대답을 듣고 있노라면 그가 필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 듯합니다. 그는 지금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도 오랜 질병으로 아주 피폐해져 있는 듯합니다. 우울증에다 자포자기, 그리고 세상을 향한 원망과 적개심으로 내면세계는 황폐할 대로 황폐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족이나 친구들도 모두 그를 떠난 것처럼 보입니다. 회복되어야 할 관계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전혀 매력적이지 못한 한 병자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은혜의 구원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일방적으로 그리고 주권적으로 말입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이 능력의 말씀 한 마디에 그는 즉각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걸어가고 있습니다(9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생명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결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일 뿐입니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이 기적은 그 사람의 믿음과는 아무 상관없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말입니다. 신하의 아들은 어떻습니까? 그의 믿음으로 아들이 살아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아들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결과로 살아났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은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그리고 그 많은 병자들 중에서 왜 하필 이 사람입니까? 왜 예수님은 공평하지 못한 것입니까? 왜 다른 사람들의 아픔은 그냥 지나치시는 것입니까? 왜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왜 이처럼 불공평한 것입니까? 그분은 정녕 불의하신 분인가요? 적어도 우리의 눈에는 그렇게 비칩니다. 그렇게 논리적이던 사도 ‘바울’도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비논리적인 억지로 우리의 입을 막고 있습니다.
14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5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16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4-18)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스스로를 도울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나는 결코 눈 멀 지도, 절지도, 그리고 혈기 마르지도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스스로를 도울 수 있어. 그러니 하늘도 나를 도와주어야 해.” 이렇게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3. 이날은 안식일이라
불편한 진실. 진실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는 언제입니까? 신문이나 방송 보도를 믿기보다는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이런저런 설(設)들을 받아들이고 싶을 때는 언제 입니까? 누가 진실을 불편하게 느낍니까?
한 예를 들어봅시다. 지금 우리 정부는 천안함 피격에 대하여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에 대한 규탄과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이끌어내려고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노력에 대해서 중국은 마지못해 동의하는 듯하면서도, 용어의 선택에 있어 매우 고민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예컨대, “천안함 피격”이 아니라 “천안함 사태”로 부르자는 제안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진실을 피해 가보려는 의도인 것이지요.
그래도 이것은 약과입니다. 처음 침몰 사건이 보도되었을 때, 민노당의 강 기갑 의원이 보여주었던 행태가 걸작입니다. 당시 정부나 국민 대다수가 심증(心證)은 있었으나 물증(物證)을 확보하지 못하여 침몰 원인을 놓고 말을 아끼고 있을 때, 그는 북한이 했을 리가 없다고 공언하고 나선 것입니다. 아니, 누가 북한이 그랬다고 말했나요? 그리고 나중에 침몰이 북한의 어뢰 공격에 의한 것이었다는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자 유 시민이라는 사람은 그 발표를 소설이라고 공언하기까지 했습니다. 도올 김용옥이라는 자는 정부의 발표를 0.00001%도 믿을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정부의 발표에 대한 대부분 야당들의 공식 입장이라는 것도 인터넷에서 떠도는 괴담 시리즈의 종합 셋트 수준입니다.
과연 이 사람들이 정부가 제시하는 여러 증거들을 일일이 확인해 보고, 반증할 수 있는 다른 증거들을 제시한 연후에 이와 같은 확신에 찬 말들을 했을까요? 아니라면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왜 국내외 전문가들이 과학적으로 체계적으로 연구 검토한 결과 발표한 내용을 믿기보다는 이러한 일에는 전혀 전문적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인터넷에 올려놓은 괴담 수준의 글을 믿고 싶어 하는 것일까? 이들 모두는 진실이 불편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철석같이 믿어오던 일련의 신념 체계를 수정하거나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무엇인가 목전의 이익을 위해서 고의로 거짓을 말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하겠습니다.
‘토마스 쿤’은 그의 명저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적은 바로 과학자 자신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과학자는 대개 나름대로의 사고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에 반하는 어떠한 새로운 이론이나 발견에 대해서 탐탁지 않게 여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진실이나 사실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기왕에 천안함 이야기가 나왔으니 예를 하나 더 들어봅시다. 얼마 전 참여연대와 또 다른 한 시민 단체가 유엔 안보리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정부가 제시하는 증거들에 대해서 의문과 허점이 많으므로 재조사를 해야 한다는 내용의 공문입니다. 언필칭 진리와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이들 단체들이 제시하고 있는 의문점들이란 것을 살펴보니 모두 인터넷에 떠도는 검증되지 않은 괴담들의 종합 세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이들 단체들의 진정한 의도가 과연 무엇인지 의심치 않을 수 없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 사람들이 자기 가족 중에 누가 희생을 당했다 해도 여전히 진실과 정의를 외치며 이런 공문을 보냈을까요? 우리는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의 이익보다는 정의와 진실이 더 우위에 있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불편한 기적.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느끼던 불편한 진실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병자를 고쳐주었다는 사실이었습니까? 또는 병 고침을 받은 그 자가 안식일에 일어나 걸었다는 사실이었습니까? 적어도 이들이 분노하는 모습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언필칭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이루는 데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는 일이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는 것인 양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이들을 가장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기적 그 자체입니다. 무려 38년을 가망 없이 살아가던 한 병자가 예수님의 말 한 마디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걷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그들의 신학에 따르면 결코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들이 할 수 없는 그 일을 누군가 해 낸 것입니다. 도저히 가망 없다고 포기했던 그 일을 누군가 가능하게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그들의 신학이, 그들의 종교가, 그들의 성전이 할 수 없던 그 일을 누군가 해낸 것입니다. 그들이 한 번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비루하고도 남루한 한 병자에게 누군가 관심을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그 일을 누군가 해낸 것입니다. 그러니 그자야말로 하나님의 아들로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 아닌가!
이게 싫은 것입니다. 속으로 이렇게 인정하고 싶습니다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소위 집단 사고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의 분노는 실은 질시와 질투의 다른 모습입니다. 안식일 운운은 자신들의 질투를 숨기기 위한 위선의 가면일 뿐입니다. 놀라운 기적에는 전혀 충격 받지 않은 것처럼 애써 외면하며, 관심은 안식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증스럽게도 안식일의 규례를 어긴 예수님과 병 고침을 받은 사람에 대해서 정의와 진실의 이름으로 정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자들과 더불어 안식일에 대해서 논쟁을 벌일 하등의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러합니다. 우리 또한 이곳에서 안식일의 기원이나 의미 등에 대해서 상세하게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며, 그럴 기분도 아닙니다. 안식과 안식일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서는 필자가 쓴 <창세기>의 <기원 이야기>에서 상세하게 다룬 바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생략합니다.
안식일은 그야말로 ‘유대’인의 절기인 것이지, 기독교인들의 절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의 <성경>에는 “주의 날”은 있을지언정 안식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든 우리가 개의할 바가 아닙니다. 중국인들이 그들의 “쌍십절”을 어떻게 지키든 우리가 개의할 바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미국인들이 추수감사절을 언제, 어떻게 지키든 한국 사람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영국 사람들이 그들의 여왕 생일을 지키든 말든 우리의 관심사가 아닌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주의 날. 우리에게는 “주의 날”은 있을지언정 “안식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에게 “주의 날”은 어떤 날입니까?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대해서 가졌던 오해만큼이나 깊고도 큰 오해를 나 역시 “주의 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에게 “주의 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당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할 그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주의 날” 역시 오늘날 내가 지켜야 할 그 무엇은 아닙니까?
놀랍게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의 날”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오히려 부활을 목격했던 그분의 제자들이 스스로 이날을 기념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제자들은 한 주간의 첫날을 “주의 날”로 정하고 정기적으로 기념했습니다. <신약>에서 “한 주의 첫날”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신학자 ‘쉐퍼’(L. S. Chafer)는 그의 책 <은혜>에서 적어도 열한 가지의 사건이 바로 이 “첫날”에 일어났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연구 결과라 이곳에서 간략하게 소개해 보려 합니다.
첫째, 무엇보다도 주님의 부활이 이 날에 일어났습니다. 네 <복음서>를 위시한 <신약>의 대부분의 책에서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둘째, 이날에 주님께서 부활 이후 처음으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참고. 요 20:17; 마 28:9; 눅 24:39).
셋째, 이날에 주님께서 다락방에 있던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셔서 평강 즉 ‘샬롬’을 기원하셨습니다.
넷째, 이날에 주님은 처음으로 제자들과 함께 떡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 일은 두 번에 걸쳐 있었는데, 한 번은 ‘엠마오’ 노상에서 두 제자들과 함께였으며, 또 한 번은 다른 모든 제자들과 함께였는데, 부활 이후 첫 날 다락방에서였습니다.
다섯째, 그리고 이날은 주님께서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성경>을 열어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 새로운 눈을 뜨게 한 날입니다.
여섯째, 이날은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을 향한 선교를 위임하신 날입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들을 보내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참고. 요 20:21; 눅 24:48).
일곱째, 그리고 이 첫날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날입니다(요 20:22).
여덟 번째, 부활 이후 일곱 번째 첫날은 오순절 사건이 있었던 날입니다. 즉 이날은 성령의 강림으로 신약 교회가 시작된 역사적인 날입니다.
아홉 번째, 사도 ‘바울’은 이날에 성령의 감동을 받아 사람들에게 설교를 시작했습니다(행 20).
열 번째, 이날은 고린도 교회가 사도 ‘바울’의 지시에 따라, 각자의 수입에 따라 연보를 모으는 날이었습니다(고전 16:2). 교인들은 이렇게 모아 둔 연보 돈을 ‘바울’을 통해서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로 가져가게 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교인들은 주의 첫날에 하나님을 위한 헌금을 한 것입니다.
열한 번째, 그리고 이날은 주님께서 ‘밧모’ 섬에 유배 중이던 사랑하던 제자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위대한 <계시록>을 기록하게 한 날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이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일들이 안식일이 아니라, 모두 한 주의 첫날 즉 “주의 날”에 있었습니다. 주의 날은 부활의 날이자 새로운 날, 새로운 시대의 시작입니다. 이날은 역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오늘날 기독교 예배를 위한 훌륭한 모델이 된다는 점에 있어서도 의미심장한 날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주의 날에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 이들 열한 가지 위대한 사건이나 일들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날에 성도들은 함께 모였으며, 사도들의 말씀을 들었으며, 함께 떡을 떼었으며, 서로의 필요를 나누었고, 헌금을 모았으며,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도하였습니다(참고. 행 2:43-47). 오늘날 우리 역시 이와 같이 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어느 날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사도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의 성도들이 처음서부터 행해왔던 전통이자 하나님의 형식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발적으로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며, 또한 그분의 오심을 기대하고 고대하며 우리 선조들의 예배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우리 선배들의 전승을 따르는 것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음을 재확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은혜에서 멀어지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구원도 멀어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은혜에서 멀어지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다시 율법의 안식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마귀는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값없이 돈 없이 와서 그분의 은혜를 마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언을 받았으며, 오직 은혜로 의롭게 되었으며, 오직 은혜로 거룩하게 될 뿐입니다. “주의 날” 예배는 그분의 놀라운 은혜의 기적을 즐기고 찬양하는 축제의 날입니다. 그분의 돌보심과 섬김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할렐루야!
4. 생명과 심판의 주, 그리스도
설명과 해석이 더 어렵고 구차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도 힘들지만, 부정하는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이와 같습니다. 너무 신비하고 기이해서 제대로 실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성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설명이 더 구차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38년 동안을 병으로 고생하던 이 사람은 지금 누가 자신의 병을 고쳐주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그는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골고루 비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모든 인류를 대표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 덕분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가 병 고침을 받은 후 조금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았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지체 없이 당국에 가서 안식일을 어겨가면서까지 자기 병을 고쳐 준 자가 누구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브루스 밀론’은 이 사람이 병 고침을 받은 후에도 전과 마찬가지로 착한 인물로 등장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브루스 밀른’, 123쪽.
사람이 육체적으로 치유를 받았다고 해서 영적인 치유도 받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역경에서 벗어낫다고 해서 사람이 경건해 지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고침을 받기 위해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또 고침을 받은 후에도 특별히 나아진 것도 없는 이 사람이 말입니다. 나는 이 사람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더 고약한 사람은 아닐까요? 즉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에 감사는커녕 더 악의를 품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느냐는 물음입니다. 하나님이 자비롭고 은혜롭기 때문에 더 화를 내고 있지는 않느냐는 것이지요. 선교사 ‘요나’처럼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 때문에 화가 나있고 심사가 뒤틀려 있습니다. ‘니느웨’ 성이 곧 멸망할 것이라는 설교를 하라고 해놓고서는, 그대로 하시면 될 것을 반대로 그들 모두를 살려주었으니 말입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2)
그래서 분통이 터지고 질투가 난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자격도 없는 녀석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수혜자가 되는 것을 볼 수가 없다는 태도인 것이지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이런 꼴을 볼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은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욘 4:3)
신앙이 어려도 한 참 어립니다. ‘마이클 프로스트’는 그의 책 「일상, 하나님의 신비」에서 신앙이 어린 아이들은 대개 하나님을 인과응보의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에서 소개하고 있는 집나간 작은 아들의 형이 그렇고, 포도원에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열심히 일하던 일군들이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공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복을 받고, 반대로 악하고 못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오경>의 하나님일 뿐입니다.
적어도 <오경> 속에서 하나님은 일정한 공식이나 틀 속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교리와 신학의 틀 속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지요. ‘유대’인 자신들처럼 말입니다. 안식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것을 어겼으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규정이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 규정을 어기면 안 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들은 안식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법을 어겼을 때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습니다(18절).
그런대도 예수님은 참으로 한가하십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 하듯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 상대방이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훤히 알고 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의 반응은 살기등등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17-18절). ‘유대’인들의 반응을 통해서 슬그머니 본문의 주제를 끼워 넣고 있는 화자의 이야기 솜씨가 놀라울 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은 지금 막 “나와 하나님은 곧 하나이니라”고 선언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설마 이들 ‘유대’인이나 ‘요나’처럼 화가 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대화중에 화를 내는 것은 그래도 상대방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화를 내는 것보다 정작 더 심각한 문제는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감정 따위가 생길 리가 없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솔직히 어떤 기분입니까? 이 말씀이 시큰둥하게 들립니까? 여느 때처럼 말입니까? 본인의 설교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이 한 사람이 병 고침을 받았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질병이 다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날 그 자리에 있던 나머지 모든 병자들이 고침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세상은커녕 병 고침을 받은 자조차도 달라진 것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왜 이 사람에게 먼저 찾아가서 그를 살려주신 것일까요? 그가 먼저 구하지도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그분의 능력이나 영광과 연관을 지어 생각하려 합니다. 그러나 ‘얀시’(P. Yancy)의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며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는 현실, 즉 썩어지고 소멸해가며 타락해 가는 이 세상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비정상적이고 잘못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만드신 모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되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이사야’가 꿈꾸던 ‘메시아’의 시대, 즉 하나님의 나라로 되돌아가야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강력한 그림이자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5-7)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아버지께서 이 사람을 긍휼히 여기므로 나도 그렇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빌 2:6).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될 때만이 우리도 주님과 같이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가 기도하시므로 나도 기도한다. 그가 긍휼히 여기므로 나도 긍휼히 여긴다.”
이 세상은 고통이나 고난에 대해서 ‘욥’의 친구들처럼 신학적인 해설이나 설교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과응보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자신을 보고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서 누구 잘못 때문에 그 지경이 되었는지 논쟁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를 보고 함께 아파하는 것으로 나는 이미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를 그리스도라고 하니 여러분은 화를 내시겠습니까? 나를 잡아 죽일 궁리를 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이들 ‘유대’인과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자는 말은 그분과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자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분의 사역과 하나가 되자는 것입니다. 문선명처럼 또 다른 예수가 되자는 말은 아닙니다. ‘아담’처럼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 서자는 말이 아닙니다(참고. 창 3:5).
예수님께서 인격적으로나 일에 있어서나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존함으로써 혼연일체가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19절). 그분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1:2),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았으며(1:18), 본 것을 그대로 행할 수 있었습니다. 태초 이전부터 있었던 영원한 사랑의 교제가 이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천지 창조도 이러한 사랑의 교제의 결과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이 성자 하나님을 감동시켜 자신을 죄인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으며, 성자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과 순종은 또한 성부 하나님을 감동시켜 그가 하는 일을 성자에게 나타내게 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20절).
교제는 사랑을 낳고, 사랑은 순종을 낳습니다. 연인들이 늘 서로를 향해서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결혼은 늘 미루어둔다면 그들의 말은 거짓입니다. 사랑한다면 하나 되기를 원하고, 또 늘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결혼입니다. 나는 정말 그리스도와 결혼했습니까? 하루에도 몇 번 씩이나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어도 지겹지 않습니까? 솔직히 다른 일을 하는 것보다 그분과 대화 하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즐겁습니까?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다면 나는 지금 예수님과 함께 부활을 경험했고, 낙원에 살고 있습니다.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입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24절)
4. 예수님의 증인들
중요한 질문. 우리 모두에게 궁극적으로 중요한 세 가지 질문이 있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존재론적 질문입니다: “과연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신이 존재할까?” 두 번째 질문은 인식론적 질문입니다: “만일 그와 같은 신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을까?” 마지막 세 번째 질문은 윤리∙도덕론적인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세 번째 질문은 실은 인생의 목적에 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들 질문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사람 그렇게 많지 않아 보입니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한가하게 이런 고민 할 틈이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답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덮어둔 채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방금 첫 번째 강론에서 스스로를 “하나님과 하나”라고 선언했으며, “생명과 심판의 주관자”라고 공언했습니다(17-30절).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질문 중에서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이미 대답을 해 버린 것입니다. 이 답변은 참으로 엄청난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농담이거나 미친 자의 헛소리가 아니라면, 그냥 듣고 넘어갈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단순히 ‘유대’에게만 국한된 문제도 아닙니다. 당연히 우리 모두의 반응은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강론의 주제는 바로 이 증거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변호해 줄 세 증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증인에 대해서 논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볼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증인의 법적 효력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말이 진실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누구를 두고 맹세해야 합니까? 당연히 자기 이름으로 해야겠지요. 더 높은 이름이 없으니 말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자신의 주장대로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다른 증인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자기 말이 곧 하나님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 점에 대해서 <요한복음>의 다른 곳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요 8:14).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고계십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다”(31절).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발언입니다. 왜 이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듯이 보이는 발언을 하실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것은 고소인, 즉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증언을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증언은 곧 하나님 자신의 증언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것을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불가분 예수님은 그들의 방식대로 증언에 관한 <신명기>의 원칙을 따르기로 작정하십니다: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신 19:15).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상대방에게 익숙하고 유리한 게임의 법칙을 따르겠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원래 논쟁에서 꿀릴 게 없는 사람은 이처럼 모든 것을 양보해 가면서 하면 법입니다. 여유가 있기 때문이지요.
성부 하나님. 그런데 예수님이 내세우는 첫 번째 증인이 누구입니까? 성부 하나님입니다: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32절상). 직역하자면, “다른 이가 있다”는 말인데, 그는 다름 아닌 성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예수님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부 하나님을 증인으로 내세웠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논쟁의 법칙에 맞지 않는 일종의 순환논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순환논리란 전제를 다시 결론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진화는 과학적 사실이다. 지질 주상도가 이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순환논리가 그 자체로써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논쟁에서 자신의 입장을 훼손시키거나 약화시킬 우려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왜 악수(惡手)를 자초하고 계신 것일까? 왜 첫 번째 증인으로 성부 하나님을 내세우고 있는 것일까? 차라리 다른 증인들을 먼저 내세우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사람이나, 사건이나, 또는 정황 증거 같은 것들 말입니다. 예컨대, 침례 ‘요한’이라든지, 기적이라든지, 또는 <성경>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일견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이들 증거나 증인들에게 공통적인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한 결 같이 성부 하나님이 보내신 것들이며, 따라서 성부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유대’인들도 이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는 점입니다. 즉 오늘날 우리에게는 순환논리로 여겨지는 예수님의 법적 대응 방식이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기막힌 전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예수님의 방식인 즉은, “상대방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전제로 논쟁을 시작하라”입니다.
침례 요한.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은 곧바로 이어서 침례 ‘요한’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침례 ‘요한’의 증거는 부차적이고 인간적인 증거일 뿐이며, 따라서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유대’ 당국자들은 사람들을 보내어 이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보려 한 바가 있기 때문에(1:19-36), 그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증인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습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이라 증언했습니까?
그의 증언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한 번은 부정적으로, 그리고 또 한 번은 긍정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선 부정적인 진술은 이것입니다: “나는 그 선지자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며, 그리스도도 아니라.” 그러나 이와 같은 부정적인 진술이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드러내는 바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자신이 아니라 자기 뒤에 올 자, 즉 예수님이 바로 그 사람이라는 강력한 진술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처럼 부정적인 증언만 한 것은 아닙니다. 긍정적이며 명시적으로 예수님을 가리키며 증언한 바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에게 침례를 베푼 후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든지 또는 “하나님의 어린 양” 등으로 부르고 있는 대목이 바로 그것입니다(1:34, 36).
그런데 정작 예수님은 침례 ‘요한’의 증언에 대해서 그렇게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 하노라”(34절상). 앞에서 말한 그대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을 증인으로 불러내는 것은 그를 통해서라도 믿어 구원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34절하).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예수님은 침례 ‘요한’을 “켜서 비추는 등불”과 같은 존재라고 하셨습니다. 나도 그렇습니까? 우리가 힘들고 어리석게만 보이는 전도를 수행해가는 한 침례 ‘요한’처럼 세상의 등불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등불을 침대 밑에 숨겨두는 어리석은 자가 없다고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기적. 예수님이 제시하는 세 번째 증거는 그분의 “일”(e[rgon, 에르곤)입니다. 기적을 말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를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36절).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도 기적의 증거에 대해서 일관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10:25)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10:37-38)
‘유대’인만큼 표적을 좋아하는 민족도 없다고 했으니(고전 122), 기적이야말로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 한마디로, 물이 포도주가 되고, 38년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으며, 죽어가던 아들이 살아납니다. 오직 생명과 죽음의 주관자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따라서 볼 눈이 있는 자들에게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보려고 하기만 한다면, 이들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심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눅 7:18-23).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적은 그냥 우연히 일어난 초자연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해서 어찌 기적으로 치부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이들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 주변에는 딱히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기이한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 지성인이라면 기적 따위는 믿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적은 일어날 수도 없고, 또 일어나서도 안 됩니다. 기적은 세상과 자연의 질서와 법칙을 무너뜨리고 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지하고 연약한 인간들이 기적이나 우연에 기대어 살지, 이성과 합리를 가진 자라면 결코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이쯤 되면 기적은 믿음이 아니라 실족의 원인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주장은 기적에 대한 또 다른 믿음의 선언인 것이지요. 이들 주장에 대해서 별도 설교 시간에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만, 다만 이곳에서는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는 사람에 대한 그분의 말씀을 읽는 것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눅 7:23)
성경.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네 번째 증인은 <성경>입니다. 증인으로서의 <성경>의 역할과 관련해서 처음 두 구절은 각별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경>을 다른 두 증인들, 즉 침례 ‘요한’이나 기적보다 더 중요한 증인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37절).
예수님은 지금 <성경>의 증언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이나 형상과 연관 짓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성경>을 읽는 것은 하나님의 모습을 보거나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에 준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오늘 우리가 가진 것과 같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을 리가 없으므로, 예수님은 당시 그들이 지닌 <성경> 즉 <율법>이나 <예언서>를 지칭하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율법>이나 <예언서>를 하나님의 음성이나 형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받던 당시 장면을 연상하면 될 것입니다. 이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으며, 천둥과 번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엄을 보았고, 이스라엘은 충격으로 떨고 있었습니다(출 19:16-25; 신 4:11-12, 33).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 그들의 <성경> 즉 <구약>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음성이자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도 이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예수님도 인정하십니다. 그들 역시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39절).
이처럼 <성경>의 증언은 실로 중요하므로 이 주제에 대해서도 다음 설교에서 좀 더 상세하게 다룰 계획입니다만, 여기서는 다만 <성경>의 일차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서 묻고 답하는 것으로 마무리 해야겠습니다.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성경>은 무엇입니까?
5. 기적에 대하여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기적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정확무오(正確無誤)한 말씀으로 믿고 살아가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이들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대한 신실한 증거가 되어 자신들의 믿음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거침돌이 되어 종교에 대한 불신(不信)만 가중시키기도 합니다: “종교란 결국 온갖 신화와 같은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지.”
이렇게 볼 때 결국 기적은 두 가지 상반된 기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그 믿음을 보강해주는 통로로, 그리고 불신자에게는 불신을 정당화시켜주는 근거로 기능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기적에 대해서 두 가지 상충되는 발언을 하셨습니다. 즉 기적을 보고 자신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반대로 사람들이 그분의 말을 믿지 않으므로 기적 행하기를 거부하셨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기적이 이처럼 상충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기적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보일 수 있을 것인가? 도대체 기적이란 무엇인가? 기적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기적은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은 아닌가?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기적에 의한 것이라고 어떻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성경>은 기적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기적은 왜 일어나는가? 기적은 과연 유익한가? <성경> 속의 그 많은 기적들이 왜 갑자기 사라져버렸는가? 이제 더 이상의 기적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이처럼 기적에 대한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이들 질문 모두에 대해서 일일이 답할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몇 가지 중요한 질문들에 대해서 답을 주려는 것이 본 설교의 목적입니다.
기적의 정의. 우선 기적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려면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가 합의(合意)하는 기적에 대한 정의(定義)가 있어야겠습니다. 우리 대부분이 일상생활에서 이 용어를 너무 자주 사용하고 있어, 본래의 의미가 다소 혼탁해진 면도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흔치 않는 용단이나 결단, 위대한 성공이나 성취, 재난이나 참사로부터의 극적인 생환이나 구출, 등등에 대해서 “기적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를 좋아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동일한 표현이 냉소적이거나 부정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컨대, 혐오하거나 경멸하는 인물이 극적 성취를 이루어 내거나 행운을 잡았을 때 “기적적”이라는 말로 우리의 반감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아주 역설적이긴 하지만,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현상이나 사건에 대해서도 이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우주 천체의 운행이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입니다. 즉, 지구가 처음 탄생 이후 단 한 번도 중단함이 없이 자전과 공전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기적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기적을 아주 광범위하게 두루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그 의미를 다소 제한해야겠습니다. 즉 기적을 불가분 과학법칙과 연관시켜 정의하자는 것입니다. 과학법칙은 흔히 일상적이고, 규칙적이며, 반복적인 사건이나 현상을 다루는 학문의 한 영역이라 한다면, 기적은 그 대척점에 서있는 것들 즉 그 빈도에 있어 불규칙적이거나 일회적(一回的)이며, 그 규모에 있어서도 비범하거나 초자연적인 범주에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 뒤에 <성경>이 기적과 관련해서 사용하는 단어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것입니다만, 일단 이 정도 수준의 정의라면 대부분 합의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기적을 이런 식으로 정의를 내리고 나면, 본질적으로 기적을 자연법칙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점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즉 두 용어는 서로 다른 두 영역을 다루고 있어, 상충되거나 상호 모순된다고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기적의 가능성이나 확률에 대한 질문도 무의미해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을 자연법칙과 연계해서 생각해 보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적과 과학법칙. 기적은 과연 과학법칙(또는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인가? 논리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수시로 우주에 개입하여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켜야 할 정도라면, 굳이 자연법칙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럴 경우 과학법칙은 오히려 성가신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성경>의 천지창조를 인정하는 사람들조차도 기적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수시로 우주나 인간사에 개입해서 그 항로나 운행을 바꾸어야 할 정도라면 창조는 애초부터 완전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논리이지요. 하나님의 창조는 처음부터 완벽한 것이었고, 우주는 마치 잘 만들어진 시계처럼, 그냥 내버려두어도 일련의 법칙에 따라 자동적으로 운행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흔히 “이신론”(理神論)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별도의 “세계관” 공부 시간이나 조직신학 공부에서 각종 신관(神觀)에 대해서 상세하게 배우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기적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천지만물은 하나님이 아니라 법칙이 운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법칙이란 결국 일상적이고도 반복적인 우리 인류의 경험을 귀납적으로 요약해 놓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 법칙에 의거해서, 어떤 일이 미래에 일어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예측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과학법칙은 기적의 가능성을 부인합니다. 왜냐하면 기적은 그 속성상 언제 일어날지, 그리고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설명할 적절한 수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측할 수 없다 해서 그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거나, 일어나지 말라고 명령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바로 여기에 귀납법적인 과학법칙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즉 과학법칙은 윤리∙도덕법과는 그 성격이나 적용범위가 전혀 다릅니다. 윤리∙도덕법은 율법처럼 “처방적”(處方的, prescriptive)입니다. 우리가 약을 처방받을 때, 그 약을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 아닙니다. 병이 낫기 위해서는 반드시 먹어야 합니다. 교통법규도 마찬가지입니다. 윤리∙도덕은 우리가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법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과학법칙은 그렇지 않습니다. 과학법칙은 처방적이 아니라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입니다. 즉 무슨 일이나 현상에 대한 설명이나 해설인 것이지, 그 일이 일어나야 된다든지 또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든지 하는 등의 규정이나 명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존의 과학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현상이 일어난다면,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법칙이나 패러다임을 고안해 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도덕법(moral law)과 자연법(natural law)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해를 위해서 조잡하지만 쉬운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예컨대, 수십 년 동안 아무도 방문해 본 적이 없는 울창한 숲속에 있는 한 작은 옹달샘에 물고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고 합시다. 그 물고기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외부 침입자의 방문을 받은 적도 없이 아주 평화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물고기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 죽는 날 동안 늘 이렇게 평화는 지속되겠지. 그런데 어느 날 난데없이 자기 몸의 수십 배에 해당하는 돌멩이 하나가 떨어져 고요하고 평화롭던 보금자리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등반 차 이곳을 찾은 한 어린 아이가 우물 속에 있는 자기를 보고 돌을 던진 것입니다. 그런데 물고기는 그 돌을 피하면서 본능적으로 외칩니다: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내 상식과 의사(意思)에 반해서 그 같은 일이 일어날 수가 없다는 주장인 것이지요. 그러나 그 일은 적어도 물고기에서 있어서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일이었으며, 그 어린 아이의 의지에 따라 일어난 것입니다.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도 이와 같은 것은 아닐까요? “안 돼,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인격적이며 초월적인 하나님이 계시다면, 초자연적인 일은 그의 의지나 의사에 따라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원하든 원치 않든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적은 자연법칙의 위반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인 첨가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일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난다면 기적이라 부를 수도 없을 것입니다만, 방금 소개한 이야기는 자연법과 도덕법의 성격이나 적용 범위를 이해하는 데 충분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없거나 설명할 수 없다 해서 모두 기적으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신비주의자가 아니라면 일상생활을 늘 초자연적인 기적에 의존해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다만 우리가 기적을 기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종의 규범 내지는 해석 틀을 가질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기적으로 인해서 야기되는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적이라 부를 수 있습니까? 기존의 과학법칙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을 기적으로 분류한다면, ‘헨리 모리스’(H. Morris)의 분류 방식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는 <성경>의 기적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1) 등급 A 기적; (2) 등급 B 기적. ‘헨리 모리스’, <자연과학의 성경적 기초>. 요단출판사: 서울.
그의 분류 방식의 근거는 흔히들 가장 보편적인 과학법칙으로 알려져 있는 “열역학의 법칙들”(the laws of thermodynamics)이나 ‘뉴턴’의 “힘의 법칙”입니다. 열역학의 법칙에는 세 가지가 알려져 있는데, 이중 처음 두 법칙을 일반적인 언어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열역학 제 일 법칙: 이 법칙은 흔히 질량보존의 법칙 또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우주 전체의 질량이나 에너지는 새롭게 창조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는 원리입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창조는 완전하고 완성된 창조로 선언하고 있으니만치, “열역학 제 일 법칙”은 성경적이기도 합니다. 이 법칙에 따르면, <성경>에서 소개하고 있는 제반 새로운 창조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기적입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의 기적; 오병이어(五甁二魚)의 기적; 등.
(2) 열역학 제 이 법칙: 흔히 “엔트로피의 법칙”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이 법칙은 비전문적인 용어를 빌자면, “무질서의 법칙”으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모든 자연 현상은 그대로 두면 질서가 무너지고 와해(瓦解)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선언입니다. 이 법칙은 굳이 법칙으로 이해하지 않더라도 우리 생활주변에서 늘 경험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늙고, 병들어 죽음에 이르는 전 과정이 이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일입니다. 새롭게 지은 집도 오랜 세월 그대로 방치해 두면 낡아 허물어집니다. 병정들을 한 줄로 세워 놓고 그대로 두면 어느새 줄이 흐트러지고 맙니다. 원숭이를 훈련시켜 온갖 재주를 부리게 할 수는 있겠으나, 조금만 그대로 두면 자기 마음대로 해버립니다. <성경>에서 소개하고 있는 수없이 많은 치유와 소생의 기적들이 이 범주에 듭니다: ‘나자로’가 살아난 일;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뜨는 사건; 등.
‘헨리 모리스’ 박사님은 이 두 법칙을 위반하는 모든 기적들을 “등급 A 기적” 또는 “창조의 기적”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들 기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딱히 이 두 법칙에 위배되지는 않지만, 기적적인 일로 분류할 수밖에 없는 수없이 많은 기적들이 <성경>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홍해의 기적”은 오늘날 대한민국 완도(莞島)에서 매년 일어나는 일과 너무 흡사하며, 굳이 초자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등의 과학적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홍해의 사건”을 기적으로 부르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나고 있는 시점(時點) 때문입니다. 즉 “왜, 하필 그 때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화자의 관심사는 “어떻게”가 아니라 “왜”에 있습니다. 오늘날의 독자라면 “우연”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많은 일들을 <성경>의 화자는 기적, 즉 하나님의 “필연”으로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왜, 하필 그 때에?”에 대한 질문을 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헨리 모리스’ 박사님은 이들 기적을 “등급 B의 기적” 또는 “섭리의 기적” 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들 기적의 예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봅시다. 기적은 자연법칙을 위반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이 질문은 마치 옹달샘의 물고기가 어느 날 샘에 떨어진 돌멩이를 놓고, 그 일이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것이니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것과 흡사합니다. 자연법칙은 규칙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귀납법적인 유추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한다든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처방(prescription)을 내릴 수 없습니다. 단지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서술(description)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서술에 입각해서 미래에 그와 유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과 전망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미국의 “대협곡”(the Grand Canyon)이 형성된 원인을 놓고 자연적인 원인, 즉 오랜 세월에 걸친 침식과 마모의 결과라고 설명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만, ‘러쉬모어’ 산(Mt. Rushmore) 절벽에 새겨놓은 네 사람의 대통령의 얼굴 즉 “큰 바위 얼굴들”도 동일한 자연적인 과정, 즉 오랜 세월 동안 비와 바람의 풍화작용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참고로 “큰 바위 얼굴들”은 1927-1941년 사이에 초자연적으로, 즉 조각가의 활동에 힘입어 홀연히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 “큰 바위 얼굴들”을 향해서 자연법칙의 위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일 초자연적인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그리고 그분이 어떤 능력이나 이치나 법칙이 아니라, 인격적인 존재라면, 그분의 의지나 의사에 따라 기존의 법칙들 외에 새로운 현상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원한다면 이들 새로운 일들을 기적으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우주의 운행이 이신론자의 주장처럼 이치나 법칙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우주와 세상이 규칙적으로 운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주와 세상에 대한 체계적이고 이성적인 접근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시사(示唆)하는 바는 무엇인가? 초자연적인 기적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드러내고 있다면, 자연법칙 또한 그분의 신실하심을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기적과 성경. 기적은 과연 <성경>에만 있을까? 그렇지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유신론(有神論)적 세계관은 기적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다신론(多神論)의 그리스-로마 세계에서부터, 범신론(汎神論)에 바탕을 둔 힌두교, 불교, 뉴에이지(New Age), 크리스챤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 그리고 유일신론(唯一神論)의 유대교나 기독교, 및 이슬람교에 이르기까지 모두 기적을 공공연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영웅적인 행위까지도 기적적인 행위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그 종교의 주장이나 가르침을 정당화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컨대, 기독교는 예수님의 기적을 말하고 있으며, ‘유대’교는 ‘모세’가 일으킨 기적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슬람’교는 선지자 ‘마호멧’이 산을 옮긴 기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힌두교나 ‘뉴에이지’ 등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매일처럼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공언합니다. 힌두교의 ‘구루’가 자신이나 타인에게 행하는 “공중부양”(空中浮揚)이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뉴에이지’의 선지자로 자칭하는 ‘벤쟈민 크림’(Benjamin Creme)은 누구나 ‘그리스도’라 칭하는 영적 능력이나 예지(叡智)를 받으면 이 같은 기적을 행할 수 있으며, 예수가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그리스도’라 부르는 “능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인격적 실체가 아니라 비인격적 “능력” 또는 “기”(氣)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범신론”이 말하는 기적은 초자연적인 개입이 아니라 우리가 설명할 수 없을 뿐이지, 단순한 자연법칙의 유출(流出) 내지는 산물(産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당연한 결론인 것이, “범신론”에서 궁극적인 실체는 자연 그 자체이지 어떤 초자연적인 실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어떠한 초자연적인 기적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자연이 내고, 내가 곧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연주의(Naturalsim)나 과학주의(Scienticisim)로 무장한 무신론(無神論)만이 기적의 가능성이나 필요성을 아예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불트만’(Rudolf Bultmann)은 <성경>과 예수님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신화적 요소들을 다 걷어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 같은 작업을 “비신화화”(demythologizing)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에게 있어 <신약>에서 기적으로 부르는 모든 사건들은 <성경> 기자들의 신화적 세계관의 발로일 뿐이며, 소위 “역사적 예수”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불트만’을 딱히 무신론자로 규정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이신론(理神論) 자임에는 분명해 보입니다. 아무튼 그에게 있어 기적이란 비합리적이며, 비과학적이며, 비역사적이고, 주관적이며,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허구일 뿐입니다. 그리고 기적은 어디까지나 믿음의 결과일 뿐으로서, 그의 믿음을 증명하거나 진위여부를 가려낼 수도, 또 그렇게 할 필요도 없게 됩니다. 이와 같은 주장에 따르면, 예수님의 죽음이나 부활에 대해서도 누가 무어라고 주장하든,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수레에 싣고 자기 집으로 가져갔다고 한들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것이 믿음의 결과이고 발로일진대 말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부활했든 아니했든 중요하지 않습니까? 기적의 진위여부를 가려내는 일이 정말 이처럼 아무 의미 없는 일일까요?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든 아니든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메시지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반박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그는 기적은 역사적이며, 과학적 사실일 뿐만 아니라, 신학과 신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기적에 대해서 어떻게 규정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기적과 관련한 본인의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 믿음의 근거이자, 출발점이며, 그 모든 논의에 대한 궁극적인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기적에 대해서 세 단어를 동원하여, 삼차원적이고도 입체적인 그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기적을 입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는 말은, 초자연적이며 범상치 않은 사건이나 현상의 한 측면만을 일컬어 기적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강조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사용하고 있는 세 단어는 (1) “능력”(power), (2) “기사”(이적)(wonder), 그리고 (3) “표적”(sign)입니다. 이들 세 단어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단어와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능력”-‘코아흐’(j'K)(렘 10:12; 출 15:6-7; 민 14:17; 대상 29:12; 출 9:16))와 ‘두나미스’(duvnami“)(눅 10:19; 롬 8:38; 마 11:20; 13:58; 눅 1:35; 고전 12:10; 롬 1:16); (2) “기사”(이적)-‘모페트’(tpe/m)(출 7:3; 신 26:8; 출 4:21)와 ‘테라스’(tevra”)(마 24:24; 요 4:48; 행 6:8; 14:3); (3) “표적”-‘오트’(t/a)(출 3:12; 4:3-8; 삿 6:17; 사 38:7; 렘 44:29)와 ‘스메이온’(shmei'on)(요 2:11; 6:2; 9:16; 11:47; 행 2:43; 4:16, 30; 8:13; 14:3; 마 12:39-40).
이들 세 단어는 기적을 이루고 있는 세 가지 요소이기도 하면서 기적의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 각각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알아봄으로써, 기적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기적을 “능력”으로 부르는 것은 그야말로 초자연적인 측면, 즉 기적의 강도나 규모를 일컬을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창조 행위(렘 10:12), 하나님의 통치(대상 29:12), 홍해의 기적(출 15:6-7; 민 14:17) 등에 대해서 언급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복음의 능력(롬 1:16), 예수님의 치유와 축사(逐邪)의 능력(마 11:20; 13:58; 눅 1:35), 그리고 때로는 사탄의 능력(눅 10:19; 롬 8:38)을 언급하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둘째, 기적을 “이적”(異蹟) 또는 “기사”(奇事)로 부르는 것은 기적의 빈도와 관련해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즉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사건이나 현상이 아니라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기이한 일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성경>은 때로 이 단어를 “표적”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컨대, <구약>은 “출애굽” 당시 ‘이집트’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기적들을 “이적과 표적”으로 부르고 있으며(출 4:21; 7:3; 신 26:8), <신약>에서는 열여섯 번에 걸쳐 이 단어를 “표적”함께 사용하고 있는데, 모두 예수님의 치유와 축사 사역과 연관해서입니다(마 24:24; 요 4:48; 행 6:8; 14:3).
셋째, 기적과 관련한 세 번째 단어는 “표적”인데, 이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즉 이 단어는 기적의 목적을 함의하는 단어로서, <요한복음>에서 집중적으로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요 2:11; 6:2; 9:16; 11:47).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기적은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창문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적이 표적으로 기능하는 방식, 즉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창문의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 일을 수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이나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보면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 즉 대리인을 통해서 자신의 권위나 능력을 드러내시고 있습니다. 예컨대, ‘모세’(출 3:12; 4:38)나, 사사(삿 6:17), 선지자(사 38:7; 렘 44:29)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며, 교회 시대에 이르러는 사도들(행 2:43; 4:16, 30; 8:13; 14:3),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 모든 직함을 모두 갖춘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부활을 들 수 있습니다(참고. 요 2:11; 6:2; 9:16; 11:47; 마 12:39).
기적의 가치. 그렇다면 “표적”으로서 기적이 왜 중요한가? 기적이 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사람들을 두려워 떨게 하기 위함인가? 요술이나 마술처럼 무슨 즐거움을 주기 위함인가? 자신이 속한 종교나 세계관의 가르침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함인가? 초월적인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인가?
예수님께서는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기적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참고. 요 9:3). 그러니까 기적이 아무리 엄청나고, 불가사의하다 할지라도,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초자연적인 사건일 뿐이지 기적으로 부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기적으로 부를 수 있는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이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의 기적은 항상 그 기적의 의미를 설명해주는 긴 강론을 수반하고 있으며, 이 강론에서 예수님은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유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 화자가 기적을 “표적”으로 환언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표적은 말 그대로 기적에 목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목적이란 믿음을 위한 것입니다. 즉 믿음을 강하게 하고 또 자극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기적이 믿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결국 기적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만 기적으로 인식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믿음은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하나의 창, 즉 해석 체계인 셈이지요. 그러니까 아무리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서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항상 두 가지 양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는 그 자체로써 아무 것도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 다는 사실이며, 또 다른 하나는 기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기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의 역사(役事)도 있습니다. 그 역시 가공할 만 한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지금도 그는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으며(엡 2:2), 자기 자신을 “빛의 천사”로 위장하여(고후 11:14), 마치 하나님 편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믿게 만듭니다. 사실이 이러할진대 하나님의 기적과 사탄의 역사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이 둘의 결정적인 차이는 하나님의 기적은 그야말로 하나님 자신의 행위로서, 어떠한 수단이나 도구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인간의 명령이나 주문(呪文)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마귀의 역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행스럽게 <성경>은 마귀의 역사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몇 가지 표지판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1) 점쟁이,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하는 자,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 (신 18:10-11)
(2) 점성술(신 4:19; 사 47:13-15)
(3)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딤전 4:1; 요일 4:1-2)
(4) 자칭 신이라 하는 자(창 3:5; 사 14:13)
(5) 우상숭배자(고전 10:19-20)
(6) 율법주의자와 금욕주의자(골 2:16-23; 딤전 4:1-3)
이들 표지판들이 기적과 ‘사탄’의 역사를 구분해 주는 중요한 안내자가 될 수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거듭 강조하거니와 그 일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점과 관련해서 우리는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성령의 열매를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기적이라 부르는 일이 과연 성령의 열매와 부합하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판단해 보자는 것이지요. 대개 동기는 그 열매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내가 기대하고 소망해야 할 가장 큰 기적이 있다면 무엇이 되어야만 할까요?
6. 기적과 은사주의
마지막으로, 기적에 관한 논의 중에서 가장 어려운 주제를 다루어보아야겠습니다. 이 부분의 논의를 위해서는 ‘존 맥아더’의 <무질서한 은사주의>를 참고하면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특히 이 책은 제 5장에서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시는가?”라는 주제에 대해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 본인 설교도 대부분 이 책의 내용을 참고한 것입니다.
그 주제는 다음 질문으로 대변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시는가?”
이들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선 다시 한 번 기적의 정의를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께 금전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달라고 기도했더니 정확히 돈이 필요한 그 날에 우편배달부가 수표를 가져다주는 것이 기적입니까? 오래 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그에게 전화를 했는데, 마침 그 때가 그 친구에게 격려가 필요한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기적입니까? 방안에서 놀던 아기가 전기 콘센트에 손을 집어넣으려는 순간, 아기 엄마가 밖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방에 들어와 위험천만한 순간을 모면하는 것이 기적입니까?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정확한 시점에 정확한 장소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응답해 주시는 것을 기적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한가입니다. 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런 일들을 기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우리는 앞에서 이와 유사한 경우를 통 털어 “섭리의 기적” (즉 등급 B의 기적)으로 부른다고 말한 바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예로 든 일들은 “섭리의 기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해야 더 적절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대 사회, 특히 카톨릭 교회나 개신 교회 안에서 신비주의나 소위 은사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신비하거나 불가사의한 현상을 보게 되면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해석하려 합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의 모든 기적들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능력의 말씀으로 붙들고 계시면서 섭리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히 1:3), 동시에 세상과 인간사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시고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므로 이 모든 일들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초대교회 시대 이후 지금까지 조금도 줄지 않았음을 믿습니다. 분명히 구원은 언제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이며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기적들을 오늘날에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에도 죽은 자들이 부활해서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지금도 누군가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하자면 지금도 ‘모세’나, ‘엘리야’나, 다른 선지자들이나,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행한 것과 같은 기적을 행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시대 이후 성령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들 특별한 하나님의 도구들에게 주신 것과 같은 은사를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기적을 행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그리고 더 중요하게도 그 시대가 언제인지 알아봄으로써, 우리의 주장을 더욱 확고하게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기적을 일으킨 당사자는 크게 네 무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 성부 하나님; (2) ‘모세’, ‘엘리야’, ‘엘리사’ 등과 같은 선지자; (3) 예수님; (4) 사도들. 그런데 천지창조의 경우를 제외하고 나면 <성경>의 기적들은 대부분 하나님께서 인간을 도구로 사용해서 간접적으로 행하신 것입니다. 그나마 이들 기적의 대부분은 <성경>의 역사에서 비교적 짧은 세 시기에 일어났으며, 그 기간도 모두 백 년 이상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이들 세 시기 중에서 특히 기적이 집중적으로 일어난 시기를 주목해 보면, “출애굽”와 예수님과 사도 시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과 사도들의 시대는 다른 어떤 시대와도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적의 빈도가 잦았습니다. 사실상 ‘유대’ 땅에서 질병이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축사와 치유와 소생의 기적 등등, 그야말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시대였습니다. 왜 이들 세 시기에 그처럼 많은 기적들이 집중해 있었을까? 왜 하나님께서는 이들 세 시기에 특별히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인간사에 개입하셨을까? 이유가 있고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이들 모든 기적은 “하나님 나라”와 <성경>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 국가의 시작, 그리고 그리스도와 사도시대는 새로운 이스라엘 즉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입니다. ‘모세’나 예수님의 사도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도구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행한 기적은 그 나라의 엄위와 권위와 능력에 대한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 왕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주도록 설득하고자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기적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 광야를 지나가는 여정에 늘 따라다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이 수여되는 동안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 처음으로 ‘모세’에게 임했을 때, ‘모세’ 자신조차 두려워 떨 정도로 극적인 현상들이 일어났습니다: 불; 연기; 나팔소리; 땅의 진동(히 12:18-21). ‘엘리야’와 ‘엘리사’의 기적에 대해서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왕상 18:39-40)
특히 예수님의 기적들은 모두 그가 하나님의 말씀이자 하나님들의 아들임을 확증해 주는 표적이라고 <요한복음>은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하나님 나라의 건설은 <성경>의 기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를 <오경>과 떼어놓을 수 없고, <신약>의 대부분은 사도들이 쓴 것이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이 완결되었을 때, 하나님의 계시는 완성되었습니다(참조. 히 1:1-2). 많은 표적과 기사(또는 이적)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책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말씀 즉 <성경>이 참되다는 것을 증거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대도 아직도 기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뒷받침해야 할 지속적인 필요가 있을까요? 아직도 어떤 이들이 가르치는 것처럼 믿음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사람들의 수요(需要)에 따라 기적을 행하십니까? 오늘날 표적, 기사, 치유, 축사 등으로 선전하고 있는 현상들을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행한 기적과 조금이라도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성경>의 어떤 구절도 사도 시대 이후에도 기적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기적적인 성령의 역사를 구하라고 권면하지도 않습니다. <신약>의 모든 <서신서>를 통틀어 성령과 관련한 계명은 다음 다섯 가지 뿐입니다: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5)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살전 5:19)
성령으로 기도하며(유 20)
이중 어떤 것도 성령을 기적과 연계시키고 있지 않으며, <신약>에 기적을 구하라는 계명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우리가 소망을 원한다면, 우리가 닻을 원한다면, 우리가 자신을 생명으로 인도할 것을 원한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성경>입니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롬 15:4)
우리는 기적을 추구하거나 행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교회에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가진 대변인이나 사도를 두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순종할 의무와 권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고후 5:7).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말씀대로, 정말 신령한 자라면, 정말 영성신학을 전공했다고 주장하는 자라면, 기적의 능력을 가진 자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죄”에 대한 깊은 자각을 가진 자라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도 매일처럼 전 세계적으로 기적으로 일으키고 계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회개시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게 함으로써 말입니다.
7. <성경>에 대하여(1)-목적
최근 한국 교회에 큰 별이 하나 졌습니다. “사랑의 교회” 옥 한음 목사님이 소천(召天)하셨습니다. 본인이 기억하기로, 옥 목사님은 한국 교회에서 “제자훈련”이라는 용어를 처음 탄생시킨 장본인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그분과는 오랜 지기였던 홍 정길 목사님께서도 추도식에서 그분을 회고하면서, 옥 목사님은 “교인들의 손에 <성경>을 들려준 목사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말은 정말 의미심장합니다. 당시 비교적 탄탄한 교회로부터 담임목사 제의를 받았으나 쉬운 길을 버리고, 교인 아홉 명으로 개척 교회를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일대 일의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을 고집하면서 지금의 교회로 키워놓았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성경>을 교인의 손에 들려준다는 말은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한 일 같지만, 그분이 개척할 당시만 해도 한국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마치 종교개혁 이전의 중세 교회의 상황처럼, 성경 해석이나 설교 등은 오직 목회자의 고유한 권한이고 책임이라는 인식이 만연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위 “평신도”가 “평신도”를 가르치고 말씀을 전하는 등의 사역은 언감생심(焉敢生心)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옥 목사님이 하신 일은 가히 선지자적 이었다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가 교인들의 손에 <성경>을 들려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교인들로 하여금 목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바라보게 했다는 것이지요. 필자는 인격에 있어서나 사역에 있어 감히 옥 목사님의 신발 끈을 푸는 일조차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만, 항상 바라기는 나의 제자나 이 교회 식구들 모두의 손에 <성경>을 들려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이야말로 선지자로 자처하는 모든 목회자라면 마땅히 품어야 할 이상이고 꿈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침례 ‘요한’을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 부르는 것도 그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자신이 아니라, <성경>을 제대로 바라보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교인들이 <성경>을 제대로 바라볼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이 질문은 결국 <성경>의 궁극적인 목적과 관련된 것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목적과 관련해서 <신약>이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곳을 찾는다면 다음 구절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다시 말하자면 <성경>은 무슨 역사적이거나, 고고학적이거나, 과학적이거나, 신학적인 지식이나 “정보”(information)를 제공해 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인적(全人的)인 “변화”(transformation)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성경>의 “문학과 역사”는 “교훈과 적용”에 앞설 수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성경>을 통해서 해당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정보나 지식을 얻을 수 있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성경>의 원래 의도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구절은 <성경>의 초자연적인 기원(起源)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즉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언급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에 관한 하나님의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물론 이 구절에서 “성경”은 일차적으로 <구약>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신∙구약>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경>의 목적과 관련해서, <요한복음>의 첫 번째 긴 강론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궁극적인 목적을 천명하고계십니다: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니라”(요 5:39후). 여기서도 “성경”은 일차적으로 <구약>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당시 ‘유대’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율법>이나 <예언서>를 읽을 때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과 그리스도. 그러나 과연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과연 <신약>의 빛 아래서 <구약>을 읽는 일이 가능했을까요? 다시 말하자면 <구약>의 모든 본문을 ‘그리스도’를 위한 소위 “모형론”(模型論)으로 해석하는 일이 과연 가능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오늘날 <신약>의 성도들에게 있어서야 이와 같은 해석은 하등 문제될 것이 없는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완성된 <신약>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 자체가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약>의 모든 기자들이 <신약>의 빛 아래에서 <구약>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소위 <신약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신 바처럼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습니다만(39절상)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내는 데에는 실패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이 실패한 원인을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 10:2)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열심만으로는 안 된다는 또 다른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역시 열심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겠지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無知)”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라 해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비극적 유월절 이후 이 두 사람은 상실한 마음을 안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길을 걸으며 그날 일어난 그 모든 일들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그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했습니다만 “올바른 지식”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참고. 눅 24:14-15). 중간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서 동행하고 있었음에도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변장하셨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누가’는 두 사람의 무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눅 24:16)
‘누가’의 보고(報告)는 참으로 역설적이며, 해학적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들의 영적 무지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도했으면서도,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영적 무지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두 사람은 ‘유대’인이었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었으며, 그와 함께 수년을 동거동락(同居同樂)했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고 있음에도, 그들의 눈은 여전히 가리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참으로 기이하고 신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처지는 실은 오늘 나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그분이 매일 나의 삶에서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경>을 들려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교훈을 위해서라도 ‘엠마오’의 두 제자가 어떻게 “올바른 지식”을 갖게 되었는지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올바른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이르지 못한 원인에 대해서 나중에 좀 더 상세하게 살펴볼 일입니다만,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예수께서 그들의 닫힌 눈과 마음을 열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보다 먼저 하신 일이 있습니다. 이들이 눈과 마음이 열릴 수 있도록 먼저 열어 보여주신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손에 <성경>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누구인지 먼저 알려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변장한 모습을 바꾸어 그들이 금방 알아볼 수 있도록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신에 그분은 <성경>을 “열어” 보여주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성경>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맛본 자라면, 더 알고 싶어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령님의 사역입니다. 과연 두 사람은 <성경>을 더 알기를 원했고, 예수님은 이들과 객주에 들어가 밤을 새워가며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눅 24:31상)
그들의 눈만 밝아졌습니까? 계속되는 이들의 고백과 간증을 들어봅시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말합니다. 지식은 들음에서 났으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였고, 올바른 지식은 마음을 감동시켰으며, 마음의 감동은 입으로 고백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이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던 길을 그대로 갔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스스로 대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참고. 눅 24:33-35).
열린 계시, 열린 해석.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도대체 어떻게 <성경>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이르게 되었을까?” 이 질문이 다소 이상하게 들립니까? 그렇다면 질문의 내용을 조금 바꾸어봅시다: “예수님은 도대체 어떻게 <성경>이 자기에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을까?” 참고: 39절.
예수님은 <구약성경>을 어떤 방식으로 묵상하고 이해하셨기에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에 대해서 그토록 확신에 찬 발언을 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구약성경>의 주인공 ‘이스라엘’을 자신과 동일시 할 수 있었을까? 예컨대, 선지자 ‘이사야’가 노래하던 “종의 노래”를 어떻게 자신의 노래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어떻게 <구약>의 그 모든 예언이나, 약속이나, 권면들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당시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토록 열심히 연구하고 공부했음에도 발견하지 못한 자기 정체성을 예수님은 어떻게 그처럼 과격하고도 철저하게 수용할 수 있었을까?
이 모든 질문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고 믿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성경공부 방식을 따를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단순, 명료합니다. 즉 그분이 하신 것처럼, <성경>의 그 모든 예언이나, 약속이나, 권면을 나를 통해서 성취시키려 하면 될 것입니다. 이 말은 다소 과격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어찌 내가 그리스도가 될 수 있으며, 사도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본질에 있어서가 아니라 인격이나 사역에 있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 오늘 하나님이 내 앞에서 <성경>을 펼쳐 보이실 때, 내 눈이 열리고, 내 가슴이 뜨거워진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알고 싶고, 찾기를 원하는 그 “소명”(召命)이 바로 이 순간 나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소명은 그야말로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한 것”이지 “내 나라와 내 의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소명의식의 가장 출발점은 채무감(債務感)에서 비롯됩니다. ‘바울’ 고백도 바로 이것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내 가슴은 무엇으로 뜨겁습니까? 내가 찾는 소명은 무엇이며, 그것을 찾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찾읍시다. 그러면 열릴 것입니다. <성경>은 마치 백화점에 상품을 진열해 놓듯 이미 성취된 하나님의 계시들을 진열해 놓은 전시대가 아닙니다. 내가 <성경>을 열 때마다 그분의 계시는 늘 새롭게 열립니다.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성경>은 끝나고 닫힌 책이 아닙니다. “현현”이나 “감동”으로서의 계시는 끝났지만, “조명”의 계시는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열린 마음으로, 기대하는 마음으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읽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살아서 역사하시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계시를 주실 것입니다. 이제 결단하고 헌신합시다. 그리고 나에게 소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8. <성경>에 대하여(2)-오용
<성경> 해석을 놓고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적어도 한 가지 점에 있어서는 견해를 같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전제가 그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이 정확무오(正確無誤)한 하나님의 계시라는 데 대해서는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성경>이란 오늘날의 <구약>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과 예수님은 <성경>을 놓고 사사건건 충돌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에 대하여 예수님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는 단순히 성경 해석상의 차이에서 오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성경>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 즉 <성경>의 궁극적인 목적과 이 <성경>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귀결된다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대’인들은 이 두 영역에서 모두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통해서 이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 하는도다. 41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4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37-42, 44절)
예수님의 진단인 즉은 ‘유대’인들은 <성경>의 목적을 곡해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활용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을 대하는 자세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입니까?
성경을 목적으로. 첫째, <성경>의 목적을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처럼 <성경>의 궁극적인 목적이 읽는 이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도록 하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그 일에 실패를 한 것입니다. 열심히 <성경>을 연구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많은 현대인들도 ‘유대’인만큼은 못하지만 <성경>을 거룩한 경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권위와 가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인들의 <성경>에 대한 인식은 여기까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일생을 마감합니다.
오늘 우리도 이와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나 성경공부 자체가 목적이 된다면 말입니다. 우리 역시 매 번 <성경> 공부 시간마다 본문의 “문학과 역사”, “신학과 신앙”, “교훈과 적용”, 그리고 “연습과 토의”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배우고 연구합니다. ‘유대’인들의 성경공부 방식도 이와 같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들 역시 본문의 “문학과 역사” 그리고 “신학과 신앙”에 대해서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연구는 여기까지였습니다. “교훈과 적용” 그리고 “연습과 토의”가 없었습니다. 즉 “오래된 <성경> 본문이 오늘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나는 이 구절을 오늘 어떻게 재해석해야 하는가?” 등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없었습니다.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성경> 본문을 화석(化石)처럼, 박제품(剝製品)처럼 여겼습니다. <성경>의 일점일획(一點一劃)도 함부로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한 당연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점 본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수 년 동안 여러 권의 성경공부 교재를 만들었으며, 그래서 여러분들로부터 적어도 <성경> 지식에 관한 한 존경과 찬사를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나 <성경> 지식이 나를 구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누가 나를 구원합니까? <성경>입니까? <성경>을 아는 지식입니까?
이 대답과 관련해서 우리가 9장에서 배우게 될, “날 때부터 소경된 자”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 소경이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어둠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을 알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한 이후 사람들이 어떻게 그의 눈이 떠졌는지 물었을 때 다음과 같이 간증하고 있습니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9:11). 참으로 간단명료한 간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그의 간증이 아니라 나중에 그 예수를 만났을 때 그가 보여주고 있는 다음과 같은 고백입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9:38).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셨으며, 그는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지금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며 찬양하고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가 ‘유대’인들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만났으나, ‘유대’인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 역시 예수라는 인물을 알고는 있었으나 믿지는 못했습니다. 적어도 그들의 <성경>에서 예수라는 인물을 찾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었으며 완성된 계시였고, 닫힌 문이었습니다. 새롭게 무엇인가를 더하거나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봅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9:29). 안타깝게도 그들은 <구약>이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구약>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조명해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와 같은 실수는 오늘날 <신약>의 백성 사이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을 닫힌 책, 즉 완성된 책으로 대하는 한에 있어서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오해의 소지가 없어야겠습니다. 적어도 <성경>의 내용과 관련해서 더 이상의 하나님의 계시는 없다는 것이 신약 교회의 믿음이고 신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수단에는 “현현”(顯現; manifestation)이나 “감동”(感動; inspiration)만 포함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조명”(照明; illumination)도 있습니다.
현현과 감동을 <성경>이 완성되기까지의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었다고 한다면, 조명은 <성경>이 완성된 이후 시공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으로 볼 수 있습니다. 현현과 감동이 <성경> 저자나 기자들에게 필요한 계시였다면, 조명은 <성경> 독자들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계시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조명의 계시 덕분에 <성경>은 더 이상 닫힌 책이 아니라, 열린 책이 되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책으로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독자의 처지나 환경, 시대나 장소에 따라 그렇게 기능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읽어야 한다는 소위 “근본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될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의 계시는 무한정 열려있으며 항상 새롭게 추가될 수 있다는 “신비주의자” 내지는 “은사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근본주의”와 “신비주의”는 일견 신학의 양 극단 즉 대척점에 서있는 것 같지만, 두 극단은 서로 만난다는 역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둘은 일맥상통한다 하겠습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 해석에 관한 한에 있어서는 근본주의에 가깝다 할 수 있겠습니다.
과도한 문자주의. 바로 여기에 ‘유대’인들의 또 다른 실수 즉 두 번째 실수가 있다 하겠습니다. 즉 다름 아닌 “문자주의”(文字主義) 내지는 “자구주의”(字句主義)가 그것입니다. 물론 문자주의가 전혀 무익하거나 해로운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중세 ‘맛소라’ 학자들이 <히브리 성경> 사본을 편집할 때, <성경>의 일점일획에 기울인 그들의 노력은 실로 경탄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 학자들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폭넓어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과도한 문자주의에 집착하게 되면 본질보다는 비본질적인 문제에 집착하게 됩니다.
문자주의의 폐해는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정 한 구절에 너무 과도한 신학 사상을 쌓아올린다든지, 문학적 수사(修辭)로 해설해야 할 부분을 역사적이고도 과학적인 사실과 일치시키려 한다든지, <성경>의 특정 번역본을 다른 번역본에 비해 비교 우위에 두는 등의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관한 복잡하고도 우스꽝스러운 ‘유대’적 규정들도 문자주의의 폐해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 이해와 관련해서 ‘유대’인들의 실수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자면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유대’인들은 <성경>의 목적이 아니라, <성경>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이 그들을 구원하는 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과도한 문자주의에 빠져 본질이 아니라 비본질적 집착에 빠져버렸습니다.
오늘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매일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있습니까? 그분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성경>을 읽기는 하나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이는 마치 오늘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주님 없는 성탄절을 즐기는 것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성탄절에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비단 현대인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첫 성탄절에도 예외 없이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에 있던 여관 주인 이 바로 그자가 아닐까요? ‘헤롯’ 왕은 어떻습니까? ‘예루살렘’ 성전 지도자들은 또 어떻습니까? 여관 주인은 ‘마리아’가 배속에 그리스도를 품고 직접 찾아왔습니다만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헤롯’은 동방의 현자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했음에도 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성전 지도자들 역시 그들의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어디서 태어날 것인지 알려주고 있음에도 그를 찾으려 나서지 않았습니다.
정작 이날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이 세상의 왕도, 종교 지도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무수한 군상들도 아니었습니다. 이들 역시 먹고 사는 일에 코가 빠져, 예수 그리스도를 찾을 시간도, 여유도 없었습니다. 이들 모두에게 이 세상은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었고,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에 예수를 만난 유일한 소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비천한 목동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천사를 만났습니다. 또 있습니다. 동방의 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이 아니었음에도 그 별을 보았습니다. 스타 즉 성탄절의 주인공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거명해야 할 두 사람이 있습니다. 두 늙은이, ‘시므온’과 ‘안나’입니다.
우주의 왕, 영광의 왕을 알현하기 위하여 줄을 서야 한다면 방금 소개한 이들은 맨 마지막에 서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왕을 만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줄이 하도 길어서, 또는 왕이 너무 바빠서 평생을 기다려도 기회가 올까말까 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시므온’과 과부 ‘안나’는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나이였습니다. ‘시므온’이 주를 만나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눅 2:29). ‘안나’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눅 2:37). 이들 모두 사회적인 지위로 보나, 나이로 보나 그 왕을 만날 기회는 사실상 없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을까요? <누가복음>은 ‘시므온’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눅 2:25). 그리고 ‘안나’에 대해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눅 2:37). 대답은 이것입니다. 즉 이들 모두는 자신에게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가 왔을 때 겸손하게 영접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그리고 <시편>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 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부르라(시 55:6)
오늘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는 과연 그를 찾고 있으며, 찾고 있다면 왜 입니까? 그리고 그를 찾기 위해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대답하고 헌신하고 결단합시다.
9. <성경>에 대하여(3)-<성경>의 고발
전두환 대통령 시절, 무슨 연유인지 알 수는 없으나 기업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국가가 잘 나가는 기업들을 임의로 처분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거나 타인에게 양도해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부산에 있던 국제 그룹도 그 중 하나인데, 이 기업이 소유하고 있던 수백억 대의 사옥이 공교롭게도 다름 아닌 당시 국제 그룹 회장 양정모 씨의 사돈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억울하게 재산을 빼앗긴 양씨는 정권이 바뀐 후 그 재산을 되찾으려고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사돈 사이에 법정 분쟁이 일어난 것이지요. 그런데 두 사돈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던 재산권에 관한 법정공방을 보면 아주 흥미롭습니다. 양씨는 자기에게 당연히 유리한 증언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피고소인의 며느리가 된 시집간 자기 딸을 증인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이게 무슨 청천벽력입니까! 그의 딸은 친정아버지가 아니라 시아버지에게 유리한 증거를 해버린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 딸이 자신의 친정아버지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만, 양씨의 편에서 보자면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라 하겠습니다. 시체 말로 완전히 물먹은 것이지요. 정말 이지 증인 잘 세워야 하겠습니다.
법정에 선 예수님과 ‘유대’인들. 각기 자신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내세우는 증인들은 누구입니까? 이들 증인은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양정모 전 회장님이 친딸을 변호인으로 내세운 것처럼 증인을 잘못 선택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고발. 법정에서 피고를 위한 증인의 역할은 피고의 주장이 옳음을 변론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극적인 역할일 뿐입니다. 보다 적극적인 역할은 무엇입니까? 원고 즉 고발자의 고발이 틀렸음을 고발하는 데 있습니다. 즉 고발자를 무고죄(誣告罪)로 역 고발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지금 그 역할을 자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자기 변론을 끝으로 법정을 떠나고 싶지 않은 듯합니다. 단순히 재판장이나 배심원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끝낼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유대’인들도 모두 인정하는 네 증인을 불러내어, 그들의 고발이 온당치 않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발이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37절).
예수님의 말씀인 즉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이방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둠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독도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누구보다 그분을 잘 알고 있으며, <성경>에 대해서도 달통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착각은 자유”라고 선언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혹시 나도 같은 진단을 받지는 않을까요? 나도 매일 <매일 성경>을 통해서 경건생활을 하고 있고, 기도도 하며, 성경공부에 참여하기도 하는데, 내가 도무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주님께서 진단한다면 말입니다.
예수님의 진단은 삼중적입니다. 첫째,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습니다(38절). 둘째,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40절). 셋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42절).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는 자를 영접하지 않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논리입니다. 이와 같은 진단은 예수님의 자기 변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유대’인들을 역 고발하여 피고인의 자리에 앉히는 것과 같습니다.
어쩌다가 이스라엘이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이처럼 철저하게 실패하게 된 근본 원인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의 진단인 즉은, 사람의 칭찬을 하나님의 칭찬보다 더 높게 평가한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 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44절).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는 자를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공적이나 세상의 인정을 앞세워 스스로를 높이는 자들을 오히려 더 인정하고 높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 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43절).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목회자가 교인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어떤 노력과 수고를 들이지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높이고, 인정하는 교인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같은 태도는 세상으로부터 배운 것이지요. 현대 사회의 선지자는 더 이상 목회자나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이 시대의 목회자나 사제는 과학자이거나 정치가이거나 또는 경제학자들입니다. 국가나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이들이 써놓은 책들이 서점에 넘쳐납니다. 사람들은 이들의 예연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처럼 신봉하며 따라갑니다.
예컨대, 역사와 인류의 종말에 관해서도 <성경>의 예언을 믿기보다는 과학자의 예언을 더 신뢰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저명한 우주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그의 책 <코스모스>의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태초에 우주가 있었고, 지금도 있고,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있을 것이다”(The cosmos, all that was, all that is, all that will be). 전형적인 유물론적 자연주의의 공언(公言)입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의 지위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창조와 진화의 논쟁은 어떻습니까? 이 역시 <성경>의 선언을 신뢰하기보다는 진화론자의 말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 현실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학생들도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교회에서는 창조론을 배우는 가운데 현실 타협의 지혜를 일찍부터 터득하게 됩니다. 어느 한 쪽을 따르기에는 너무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이겠지요.
‘베드로’ 사도는 이와 같은 세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3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벧후 3:3-5)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진단을 발견하게 됩니다. 소위 과학자나 선지자로 자처하는 자들이 <성경>을 조롱하며 역사의 종말을 거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의 정욕”에 따라 그렇게 하고 있다고 사도는 진단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 이름을 높이고 싶다는 정욕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예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과학자나 정치가들은 늘 자신의 이름으로 논문이나 정견(政見)을 발표합니다.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절대 하지 않습니다. 대중들의 신뢰나 지지를 나 혼자 차지하고 싶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들은 그렇다 치고, 이를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은 무슨 동기입니까? 대개 폐쇄된 사회는 집단사고를 드러내는 법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개인적인 생각이 있더라도 눌러두고 집단의 사고를 따라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뻔합니다. 괜한 소리해서 “왕따”를 자초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지 못해 안달들인데, 스스로 왕따가 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혼자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외롭게 살아가는 것보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훨씬 쉽고 편합니다.
집단사고의 위력은 인터넷에서 여지없이 그 정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흔히들 인터넷이 열린사회를 지향한다고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선지자를 자처하는 과학자나 정치가들도 인터넷 앞에서는 벌벌 떱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여론 주도자는 인터넷입니다. 대통령도 인터넷이 뽑고, 정부 각료들도 이들이 좌지우지해 버립니다. 국회도, 대통령도 소신에 따라 말하거나 행동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인터넷에 글 한 번 잘못 올렸다가는 벌떼처럼 달려들어 완전히 매장시켜 버립니다. 얼굴도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가 되어 이 사회의 여론을 주도해 갑니다. 인터넷은 현대 사회의 ‘바알’이 되어버렸습니다.
‘유대’ 지도자들 역시 집단사고의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만일 누구든 예수님의 주장을 인정하고 따른다면, 그는 필경 그 집단의 왕따가 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저항은 더욱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조직의 보존과 유지를 위해서나, 자기 세뇌를 위해서 말입니다.
모세의 고발. 그러나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은 진단이라기보다는 피고를 향한 검사의 논고나, 재판장의 판결문에 가깝다 하겠습니다. 어느새 원고와 피고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모습입니다. 이어지는 세 구절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해서 마치 검사가 논고를 하듯, 또는 재판장이 최종 판결문을 읽어내려 가듯 그를 고발하던 ‘유대’인들을 진단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45-47절).
이것은 진단이라기보다는 고발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즉 무고죄를 고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을 고발하는 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그들이 철석같이 믿어오던 이스라엘의 변호사 ‘모세’랍니다! 이 무슨 날벼락인가요? 자신들의 변호사가 직무유기를 넘어 기만과 배신까지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의 강론을 듣고, 혹시 마음속으로 “그래도 우리에게는 ‘모세’의 율법이 있는데” 하며 내심 자위하고 있었는데, 이 역시 착각이었던 것입니다.
아니 무슨 변호사가 의뢰인을 변호하고 보호해 주어야지 느닷없이 검사가 되어 자신들을 기소하고 있다니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지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들 ‘유대’인들이 착각을 해도 이만저만 한 것이 아닌 것이, 검사를 변호사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검사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법률에 입각해서 죄목(罪目)을 정하고 그에 따라 형량(刑量)을 정하면 그만입니다. 율법의 역할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법은 죄인을 구원해 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한 자를 가려내어 처벌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는 검사요 또한 율법인 것입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변호사요, 생명의 복음입니다.
이 모든 증인들을 다 살펴보았는데, 그래서 ‘유대’인들이 믿게 되었습니까? 침례 ‘요한’의 증언과, 기적의 증언, 그리고 <성경>의 증언을 사실로 받아들였습니까? 아닙니다. 철저하게 자기기만 속에서 구원의 확신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진단도 예수님의 진단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23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3-24)
만일 내가 지금 법정 배심원의 자리에 앉아 이 재판을 지켜보고 있다면, 어떤 판결을 내리시겠습니까? 억지 주장을 펴면서 한사코 믿지 않기로 작정하고 덤벼드는 원고, 즉 ‘유대’인 고발자들을 바라보면서 이들을 오히려 피고석에 앉혀 무고죄로 기소하고 싶은 심정은 아닙니까? 우리 화자의 의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독자들로 하여금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답답함으로 ‘유대’인들을 정죄하도록 유도하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혀놓고 있는 이 하나님의 백성을 보라! 법정에서 친정아버지의 편을 들어야 할 딸이 오히려 그 아버지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고 있는 이 배은망덕한 딸을 보라!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이 지금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향하여 증거를 제시하라고 윽박지르고 있다니!”
이래저래 아들과 아버지는 운명 공동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예수님과 공동 운명체입니까? 그분과 함께 피고석에 서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피고석에 서 있지 않다고 <성경>이 나를 고발하고 있습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신학적 주제는 무엇입니까? 화자는 이를 어떻게 드러내고 있습니까?
2.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예수님의 자기주장은 무엇입니까? 화자는 이를 ‘유대’인들의 반응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찾아봅시다.
3. 예수님께서 제시하는 네 증인들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나는 어디에 속합니까? 혹시 <성경>이 나를 고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4. 예수님의 성경공부 방식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내가 따라야 할 모범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여전히 열려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5장 17절을 묵상하고 토의해 봅시다.
5. 내가 간절히 찾는 소명(혹은 비전)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것을 찾았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알기를 원합니까? 그 소명을 갖기를 원한다면 그것을 위하여 내가 기울여 온 노력은 무엇이었습니까? 내 소명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소명은 무엇이었으며, ‘바울’ 사도의 소명은 무엇이었습니까? 진지하게 논의해 봅시다.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