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7과
제 7과: 새로운 예배
김태정 목사요한복음 4:1-42약 129분 분량

새 질서(4): 새로운 예배
(4:1-42)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4:23,24)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이야기가 담긴 이 본문은, 화자의 탁월한 설화적 예술성이 다시 한 번 유감없이 드러나고 있는 곳입니다.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한 편의 서정적인 드라마입니다. 아주 로맨틱한 배경 설정이 그렇고, 죄 많은 한 여인의 극적인 변화가 그러하며, 人種과 性의 장벽을 뛰어넘는 기독교회의 보편주의에 대한 교훈 등이 다 그렇습니다. 설화로서의 수사적 기법 또한 우리 눈에 아주 익숙한 것들로서, 여인과 제자들을 동원한 “오해”의 기법이 등장하는가 하면, “물”을 영적 진리를 위한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는 점 역시 그러합니다. 그리고 구성(plot)의 “점진적인 확대”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바로 그 예가 될 것입니다. 즉 한 ‘유대’인 남자에 관한 여인의 지식이 어떻게 확대되어 가는지 살펴 볼입니다: 유대인(9절) ⇒ 선생님(11절) ⇒ 선지자(19절) ⇒ 그리스도(29절).
그러면 본문의 핵심적 주제는 무엇일까요? 본문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완전한 문학적 단위를 이루고 있습니다만, 앞선 세 이야기들과는 불가분 공통적인 주제로 연결되어 있음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즉 본문은 예수님 안에 나타난 “새로운 질서”라는 주제의 네 번째 에피소드에 해당됩니다. 다시 한 번 요약 및 정리를 위해서 앞선 세 개의 에피소드의 내용은 각기 무엇인지, 그리고 이들 각각이 드러내고자 했던 “새로운 질서”는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확인해 봅시다.
이들 네 개의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공통적인 주제 외에도, 본문에서 독특하게 관찰할 수 있는 일련의 새로운 주제들도 있습니다. 예컨대, (1) 개인 전도에 관한 교훈이 있는가 하면, (2) 예수 그리스도와의 체험적 만남을 통한 개인적 회심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기도 하며, (3) 인종과 성의 장벽을 뛰어넘는 세계 선교에 대한 교훈이 있으며, 그리고 (4) 제자도에 관한 가르침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본문은 기독교 상담심리의 한 전형으로 제시할 수 있기도 할 것입니다. 왜 그런지 공부를 진행하면서 알아 볼 것입니다. 이제 이 낭만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감상해 봅시다.
문학과 역사
형식과 내용. 본문(4:1-42)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립적이고 완전한 문학적 단위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만, “새 질서”라는 신학적 주제 하에 앞선 2장과 3장과 내용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예컨대, “가나의 혼인 잔치”에 등장한 바 있는 새로운 질서의 상징 포도주가 ‘유대’교에서 정결의식의 상징인 물과 극적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참고. 2장), 본문 에피소드에서도 ‘야곱’의 우물은 예수님이 제공하는 “생수”(生水)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아마도 <요한복음>의 화자는 ‘유대’교에서 물이 상징하는 바가 ‘토라’ 즉 율법인줄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나’에서 포도주가 천국의 선물을 상징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제공하시는 “생수”는 생명과 구원의 상징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3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성전 숙정”(聖殿 肅靜) 에피소드는 ‘예루살렘’ 성전과 예수님의 육체로서의 새 성전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사라져야 할 구시대적인 질서를 상징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비롯되는 새 성전은 새 시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과 ‘그리심’ 산에서의 예배는 ‘그리스도’와 그가 보내신 성령이 주도하시는 새 예배로 대치될 것입니다. 바로 이 주제가 본문의 핵심 줄거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단락과 구조. 본문의 구조를 결정짓는 흥미로운 요소는 두 번에 걸친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1) 첫 번째 대화-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7-26절); (2) 두 번째 대화-예수님과 제자들(31-38절).
첫 번째 대화는 본문의 서론에 해당하는 화자의 서술(1-6절)이 있는 후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첫 번째 대화는 다시 그 주제에 따라 두 단락으로 나누어 집니다: (1) 7-18절: 그리스도의 생수; (2) 19-26절: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
그리고 두 번째 대화는 앞뒤로 두 개의 상이한 서술과 연결되어 있는데, 앞의 것(27-30절)은 ‘사마리아’ 여인이 ‘수가’성 주민들에게 자신이 겪은 바를 증언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뒤의 것(39-42절)은 이들 주민들의 변화와 회심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이들 두 서술은 마치 괄호처럼 두 번째 대화를 둘러싸고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서술 모두 내용적으로는 첫 번째 대화에서 이미 등장한 것들이기도 합니다.
본문의 구조와 관련해서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다시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참고로, 이러한 구조가 주는 극적인 효과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즉 이는 마치 연극 무대의 앞과 뒤에서 두 개의 독립된 장면이 연출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무대의 한쪽 즉 ‘야곱’의 우물가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가 하면(단락 5), 무대의 다른 쪽 즉 ‘수가 성’에서는 조금 전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던 여인이 마을로 들어가서 동네 사람들을 열심히 설득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단락 4). 그러다가 두 무대를 구분하는 칸막이는 제거되면서 두 장면은 하나로 합쳐지고, 모든 출연자들이 한 무리가 되어 ‘수가’ 성으로 모여 들면서, 이 동네 사람들의 고백적 선언이 마치 ‘희랍’ 연극의 ‘휘날레’ 합창처럼 울려 펴지면서, 연극은 서서히 막을 내리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기법은 마치 두 개의 시냇물이 따로 따로 흐르다가, 일정한 지점에 이르러 큰 파도를 치며 함께 만나 하나의 새로운 큰 물줄기를 형성하여 흘러가는 양상과 같습니다.
배경.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배경(1-6절)을 통해서 화자는 예수님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슬쩍 언급하고 있습니다. ‘유대’ 지역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그의 추종자들이 늘어나자 예수님은 쓸데없는 소요와 마찰을 피하기 위함인지 급히 ‘갈릴리’로 물러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가장 빠른 지름길을 통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 歷史家 ‘요세푸스’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까지 급히 가려는 사람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되는데 이는 불과 3일의 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편리 함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 지름길을 택하지 않고 멀리 돌아갑니다. 그 이유는 이 지역 주민들에 대한 경멸과 적대감 때문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의 갈등은 역사적으로 뿌리가 아주 깊은 것입니다. 이런 배경 하에 예수님의 선택을 서술하고 있는 화자의 의도는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레슬리 뉴비긴’(L. Newbegin)은 예수님께서 우회로(迂廻路)를 택하지 않으시고,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할 지리적이고도 신학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마리아’ 선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선교’는 예수님 자신의 계획에는 없었던 것일 수도 있으나, 하나님의 뜻에는 분명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 운명의 만남이 이루어질 “야곱의 우물가”에 도착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우물의 정확한 위치나, 기원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은 화자의 관심사는 아닙니다.
신학과 신앙
1. 배경 및 서론(1-6절)
네 번째 에피소드의 무대는 ‘유대’ 땅이 아닌 ‘사마리아’입니다. 이 땅은 ‘유대’와 ‘갈릴리’ 사이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화자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곳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관해서 간략하게 설명함으로써, 이야기의 배경 및 서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1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1-3절)
이 배경 설명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에 모습을 나타내게 되신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침례 문제로 인해서 야기된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기 위하여 ‘갈릴리’로 가기 위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요한’의 침례와 예수님의 침례에 관한 논쟁은 이미 지난 에피소드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3:25).
하지만 이 배경 설명은 이야기의 흐름에서 볼 때 직전의 단락(3:31-36)과는 연결이 부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침례와 관련해서 ‘바리새’인들이 들은 바 있으며, 예수님께서 또한 이 사실을 알고 계셨다는 언급은 앞선 이야기 어디에도 없습니다(참고. 3:25). 따라서 배경 설명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이 세 구절은 단지 새로운 이야기의 출발점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세절은 배경 설명의 또 다른 측면으로서, <요한복음> 특유의 사실적인 묘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만, 앞선 세절과는 그 의미에 있어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봅니다:
4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4-6절)
다시 말하자면, 처음 세절이 예수님의 행동을 다소 수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나중 세절은 예수님의 숨은 의도를 암시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분의 행동이 수동적이라 함은 군중들 사이의 소요(騷擾)와 소모적인 신학적 논쟁을 피하여 ‘갈릴리’로 가는 도중 ‘사마리아’를 지나치지 않을 수 없게 된 상황을 연상할 수 있게 해줍니다. 하지만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할 필요는 없으며, 더 나아가 당시 정통적인 ‘유대’인이라면 할 수만 있다면 ‘사마리아’를 피해가려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안다면, 예수님께서 한사코 이 지역을 통과하려 했던 데에는 분명 의도적인 계산이 깔려있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적대감에 대해서는 두 번째 단락에서 보다 상세하게 설명할 것입니다.
의도적인 계산이라 함은 예수님의 선교 사역과 관련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F. F. Bruce). 그분께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화자가 예수님의 선교 사역과 관련해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3:14; 9:4; 10:16; 12:34; 20:9; 등).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만 이 빛을 비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책임의식의 발로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마리아’의 ‘수가’(Sucavr, 쉬카르)는 ‘세겜’ 인근에 있는 ‘아스카’(Askar)로 불리는 마을로 확인되고 있습니다만, <창세기>에 따르면 ‘야곱’이 근처 어딘가에 땅을 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창 33:19). 그리고 본문에 따르면 ‘야곱’은 이 땅을 ‘요셉’에게 주었는데 <창세기>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창 48:22). 또한 이곳은 ‘야곱’의 매장지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수 24:32). 다만 그가 이곳에 우물을 팠다는 기록은 <구약> 어디에도 없어 화자의 기록을 확인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만, 그랬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하겠습니다.
화자가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우물”(phgh, 페게)은 이어지는 두 절(11, 12절)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사람이 의도적으로 판 우물이라기보다는 자연적으로 있는 “샘”, 또는 “원천”(源泉)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세한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이 우물은 나무 뚜껑이나 또는 돌이 위를 덮고 있어 근처를 지나치는 나그네가 피곤을 풀기 위하여 잠시 그 위에 앉아 쉬기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 역시 그렇게 하셨다고 화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6절). 이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진정한 인성(人性)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데, 화자는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神性)을 늘 나란히 균형 있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왕의 보좌도, 안락의자도 아닌 땅바닥에 그냥 주저앉으신 것입니다(Chrysostom).
이때가 “여섯 시” 즉 정오쯤인데, 이 시간에 한 여인이 우물가에 물을 길러 왔다는 화자의 사실적 표현이 범상치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한낮의 더위가 아닌 선선한 해질 무렵이 물을 긷기에 더 적절한 때가 아닐까요? 하지만 처녀가 정오에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오는 일이 전혀 전례가 없는 일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한 예로, ‘모세’가 ‘미디안’의 한 우물가에서 쉬고 있을 때 ‘이드로’로 딸들이 물을 길러 온 때도 정오쯤이었습니다(출 2:15ff). 이로 미루어 ‘사마리아’ 여인이 정오에 물을 길러 오는 것이 당시의 관습에서 볼 때 이례적인 것이었든지 아닌지 단정지울 수는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이상하기는 이 여인이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에도 우물이 많이 있을 텐데, 왜 여기까지 와야만 했을까 입니다. 이곳 우물 수질(水質)이 더 좋았기 때문일 수도 있거나, 아니면 “야곱의 우물”과 관련된 모종의 미신에 가까운 신앙심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이 여인은 사람들 사이에 평판이 좋지 않았으며, 타인과의 접촉을 피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택했을 수도 있습니다.
2. 대화 1: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7-26절)
생수 그리스도. 그러나 바로 그 시간, 그리고 바로 그 장소에서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만남은 우연이고 운명적인 것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여인이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피하기 위하여 이 시간과 장소를 택한 것이라면, 예수님 또한 같은 이유로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지나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피곤하고 목이 말라 찾은 우물가 마침 그곳에서 예수님은 물을 길러 나온 ‘사마리아’의 한 여인과 이렇게 조우를 하게 된 것입니다. 말을 먼저 건 쪽은 예수님입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7절)
이 때 이곳에는 예수님과 여인 두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8절). 낯선 여인에게 먼저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하는 예수님의 행동을 놓고 혹자는 영혼을 얻기 위한 의도적인 접촉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긴 여행으로 지쳤고 정말 목이 말랐던 것은 분명합니다(7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행동은 두 가지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여인의 말을 들어봅시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9절)
상대는 여자였으며, 그 여자는 ‘사마리아’인이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낯선 여인과 대화를 한 사실에 대해서 당시의 규범이 무어라고 할까요? ‘랍비’의 한 인용문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리에서는 여자와, 심지어 자신의 아내와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여자에게 어떠한 인사라도 하는 것은 금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잘못은 이 여자가 ‘사마리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적대감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 왕국이 분열되고(왕상 12:1-24), 주전 721년에 ‘앗수르’인들이 북쪽 ‘이스라엘’ 왕국의 영토를 합병하고 그 땅에 이방인들을 이주시켜(왕하 17:24-41) 함께 살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이스라엘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아직 점령되지 않고 남아있는 남쪽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며, 이러한 혼합으로 탄생한 이세들을 동일 민족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며, 따라서 이들을 ‘사마리아’인이라 불렀습니다. 그 결과 ‘사마리아’인들이 주전 400년 경 ‘그리심’ 산에 자기들의 성전을 따로 세우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둘 사이의 분열과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갔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예수님의 행동은 혁명적이며, 기존 질서와 제도의 파괴자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든, 예수님은 자신의 필요를 이야기함으로써 그녀의 필요를 동시에 채워주기 위한 일종의 ‘접촉점’을 만들고 있는 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절)
접촉점은 “하나님의 선물”과 “생수”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통칭하는 말입니다만, 예수님은 여인이 지금 힘들여 퍼 올리고 있는 “생수”를 “하나님의 선물” 즉 “하나님의 구원”에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메마른 중동 지역에서 물의 가치는 각별할 것입니다. 생명에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이기에, 이를 여러 상징으로 폭넓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단어로(렘 2:13; 17:13), ‘유대’교에서는 “율법”(토라)이나 “지혜” 또는 “성령”을 상징하는 단어로(사 44:3)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에게는 “생수”는 곧 ‘로고스’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생수” 즉 “하나님의 선물”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이 질문과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는 또 다른 상징인 “생명의 떡”을 연계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6장). 예수님은 스스로를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으로 칭하셨는가 하면(6:51), “생명의 떡”과 “생수”의 두 상징어를 함께 결합하여 사용하신 바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6:35). 예수께서 “생수”라는 사실은 다른 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7:37-38). ‘요한’ 화자는 예수님의 이 선언에 이어 곧바로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7:39). 요약하자면, “생수”가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이해는 한심한 수준이었습니다. 그가 보이고 있는 반응은 전형적인 “오해”입니다.
11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11-12절)
이 여인의 오해는 ‘니고데모’가 “거듭남”에 대해서 보여준 오해와 ‘오버랩’ 되어 두 사람 사이의 흥미로운 유사성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해”의 역할은 진리를 더욱 확실하게 드러내게 하는 데 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즉 ‘니고데모’의 오해가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그 유명한 선언(3:16)을 있게 했던 것처럼, 이 여인의 오해로 그에 버금가는 유명한 선언을 만나게 됩니다.
1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
이 선언은 지혜에 대한 ‘유대’인의 역설적인 金言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먹는 자마다 더욱 배고플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마시는 자마다 더욱 목마르리라.” 이 두 선언은 외견상 상충되어 보입니다만 실은 같은 선언입니다(Bultmann). 두 선언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누구든 생수를 마시게 되면 더 이상 다른 물을 찾지 않을 것이며, 계속해서 동일한 생수만 찾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선언에 여인의 이해가 깊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최악의 경지로 치닫고 있습니다. 여전히 대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여자는 “생수”를 “마법의 물” 정도로 생각하기에 이르렀으며, 그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절)
물을 달라는 여인의 요청에 대해서 갑자기 예수님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16절). 주제를 바꿈과 동시에 그녀의 비도덕적인 삶을 빛 가운데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인은 내심 충격을 받았을까요? 별 뜻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농담(弄談)하듯 이 낯선 남자와 대화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자신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을 들춰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황스럽기는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화자가 복음서 내 여러 곳에서 예수님을 사람의 과거지사나 속마음을 꿰뚫고 있는 “초 신령한” 사람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1:48; 2:25; 11:14; 13:38). 하나님의 아들이 그만한 지혜나 능력을 갖는 것이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겠습니다만, 그런 믿음을 갖는 것과 화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 구절을 통해서 드러나는 화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만, 적어도 그는 예수님을 <구약>의 선지자적인 예지(豫知)를 가진 인물로 그리고 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지”란 단순히 미래에 대한 막연한 예측이나 예언(豫言)이 아니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나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내려지는 예언(預言) 내지는 추론(推論)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언”에 대한 두 가지 다른 의미가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인은 비로소 자신이 현재 처지를 일부나마 드러내기 시작하며, 예수님의 진단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17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7-18절)
‘모세’의 법을 따른다 해도, 여자가 다섯 번을 결혼한다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겠습니다만, ‘랍비’의 가르침은 아무리 많아도 세 번 이상은 못하도록 했다 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무려 다섯 번에 걸쳐 결혼과 이혼을 반복해 왔으며, 지금 살고 있는 남자와는 결혼도 하지 않은 동거 상태입니다. 혹자는 다섯 남편에 대해서 우화적인 해석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즉 “다섯 남편”은 이방 족속들이 섬기던 다섯 이방 신들로서, 이들 족속들이 ‘사마리아’를 침공하면서 그들이 섬기던 신들을 함께 지니고 왔습니다. 한편 여섯 번째 남편은 ‘야훼’로서 결코 ‘사마리아’인들의 남편이 될 수 없는 신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식의 해석을 결코 지지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열왕기>는 다섯 신이 아니라 일곱의 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왕하 17:30), 보다 중요하게도 ‘요한’ 화자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우화화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예배. 여인은 주제를 바꾸기로 작정한 것 같습니다. 시시콜콜한 개인 신상 문제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종교적 주제로 재빨리 옮겨가고 있습니다.
19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19-20절)
새로운 주제는 예배에 관한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예배의 장소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제는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이기도 했습니다. 참고 구절: 신 11:29; 12:1-14.
이처럼 중요한 주제를 예수님이 아니라, 여인이 먼저 꺼내고 있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왜 이 여인은 느닷없이 예배의 문제를 끄집어내고 있는 것일까? 면피를 위한 일종의 비켜가기 작전일까? 아니면 자신의 과거지사를 알아맞히는 이 남자에게서 무엇인가 범상치 않은 모습을 발견한 것일까? “아, 이 남자가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사람 속에 모든 있는 것을 다 알다니. 이 자는 선지자임에 틀림없어”(19절).
갑자기 ‘예배’와 ‘예배 장소’에 대한 문제를 언급하는 여인의 일견 ‘비켜가기’ 작전에 대해서 ‘레슬리 뉴비긴’은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자신을 변호하거나 죄를 감추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녀는 이 낯선 이를 신뢰하기로 작정했으므로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오히려 앞으로 더 나아간다. 죄가 노출된 이상 이제는 속죄의 가능성, 곧 용서의 가능성을 물어보아야 한다. 만약 제사장의 사역이 가능하지 않다면, 제사가 용납되고 죄가 씻어질 수 있는 ‘속죄소’가 없다면, 선지자가 치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죄로부터 깨끗하게 된 양심으로 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속죄소, 참 성전은 어디에 있는가? 유대인들이 믿듯이 시온 산에 있는가, 아니면 사마리아 인이 예배하는 그리심 산에 있는가? 이것은 여인이 죄라는 초점에서 슬쩍 비켜가는 말이지만 적절치 못한 행동은 아니다. 그것은 죄가 빛 가운데 노출되었을 때 반드시 제기되어야 할 질문을 촉발시키는 바른 압박이다. ‘레슬리 뉴비긴’, 80-81쪽.
여인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예수님은 이 새로운 주제에 대해서도 답변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답변은 길지는 않지만 예배에 관한 중요한 신학적 진실을 담고 있는 강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21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1-24절)
예수님은 먼저 예배의 장소와 대상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예배의 장소에 관한 한, 예수님은 어느 편도 아니라고 말합니다(21절). 예배의 장소와는 전혀 무관하게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드릴 새로운 종말의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서 “그 때”는 좁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때를 의미하는 것이지만, 보다 넓게는 종말이란 예수님과 함께 도래한 새 시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 때” 또는 “나의 때”는 “지금 이 순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언급은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여인을 향하여, “그리심 산 예배”로 대표되는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는 무지함 가운데 드리는 일종의 혼합주의적인 예배이며, 알지 못하는 신에게 드리는 예배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참고. 행 17:22-23). 반면 ‘유대’인들이 드리는 “예루살렘 성전 예배”는, 비록 이스라엘이 그들의 역사에서 수시로 하나님을 배반하긴 했지만, 적어도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말합니다(22절).
그렇다면 새로운 예배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 단락의 핵심 구절(23-24절)에서 새로운 예배와 관련해서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그 때가 지금 여기에 와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물론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은 영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영이라”는 선언은 하나님의 형이상학적인 존재에 대한 무슨 새로운 정의(定義)가 아니라, 그분께서 세상에서 일하시는 방식이나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선언은 “하나님은 빛이라”(요일 1:5)든지 또는 “하나님은 사랑이라”(요일 4:8)는 선언과 연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할 때 그분 자체가 사랑이라기보다는 이 세상을 사랑으로 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구절이 의미하는 바도, 그분께서 사람들을 대하시는 방식이 신비하고 신령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 또한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즉 “영적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과연 무엇인가? 이 여인은 제대로 이해했을까? 이해는커녕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입니다. 그녀의 말을 들어봅시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25절)
그녀의 진정한 속내는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말한 그 메시야가 오면 어차피 모든 것을 알게 될 테니 더 이상 대화가 필요치 않다는 뜻이 아닐까요? 추측컨대 이 여인은 지금 <사마리아 오경>의 <신명기>(18:15-18)를 의미하고 있는 듯합니다.
대화를 이쯤에서 중단하고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어야 선언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녀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을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선언이자 계시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26절)
여기서 “내가 그라”(ejgw eijmi, I am)는 표현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요한복음> 특유의 수사적 표현입니다(참고. 6:20; 8:28, 58). <구약>에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유사한 표현은 ‘하야’(hy:h) 즉 “스스로 있는 자”(출 3:14)를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요한 공동체”의 배경을 암시해 주는 선언이기도 합니다만, 이 여인이 그 계시의 첫 번째 수혜자가 되고 있는 셈입니다. 이 계시는 그 여인에게 있어 마른하늘에 벼락 치듯 들렸거나, 아니면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체득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본문의 플롯 전개상 후자의 경우가 더 그럴 듯해 보이긴 합니다만).
아무튼 이 여인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와 예수님의 “내가 그라”는 자기 계시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녀를 대신해서 요약해 보자면 이런 것이겠지요: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으며, 따라서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그분에게 집중해서 예배를 드릴 수 있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방법, 즉 그분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길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렇게 하셨다. “내가 그라”는 예수님의 자기 계시는 예루살렘 성전을 자기 몸으로 비유하셨던 것보다는(2:19) 진일보(進一步) 한 진술이다. 예수께서 자기 몸인 성전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는 것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예배를 정결하게 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선언하는 하나의 “표적”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라”는 이 계시는 성전 예배를 새로운 예배 즉 “신령과 진정”의 예배로 대체하게 될 것임을 분명하게 하는 선언이다.
3. 여인의 증거(27-30절)
여인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에 큰 충격을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화자는 여인의 반응을 소개하기 전에 제자들의 충격을 먼저 전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27절)
제자들의 충격은 당시 여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보편적 정서를 반영하는 것입니다(이에 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습니다. 화자는 왜 이들이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는지에 관해서 아무 설명도 없습니다.
추측컨대 여인의 충격과 반응을 소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화자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잠시 뒤로 미룬 채, 여인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회전무대의 배후 장면까지 보여주려는 듯이 말입니다.
28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28-30절)
가지고 온 물동이까지 두고 갈 정도로 여인의 충격은 컸으며, 그의 행동은 황급하고 신속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사실 그녀는 동네 사람들을 데리고 다시 돌아올 요량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사람들을 권하여, “와서 보라”고 간청하고 있는 장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29절). 하지만 이 여인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아직은 미미한 수준으로 보입니다. 기껏해야 자신의 과거 행적을 알아맞히는 사람 정도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증거는 강력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에 동네 사람들은 귀가 솔깃하여 그를 만나러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이 여인처럼 자신들의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는 아직은 알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4. 대화 2: 그리스도와 제자들(31-38절)
화자는 다시 장면을 바꾸어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수가’ 성 우물가로 우리를 데려옵니다. 그리고 여인의 증거를 소개하기 위해서 앞에서 잠시 미루어두었던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참고. 27절)를 다시 이어갈 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다루고 있는 이 두 번째 대화는 그 형식에 있어서나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 첫 번째 대화와 마치 시적 유사병행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糧食. 첫 번째 대화의 주제가 “생수”(生水)와 “예배”에 관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 대화의 주제는 “선교”와 “제자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들 주제 모두는 상호 연관성이 없는 것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중심으로 새롭게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이들 주제를 강론의 형식으로 차례대로 설명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대화중에 자연스럽게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여인과의 대화에서 주제는 생수에서 예배로 나아가고 있으며, 두 번째 제자들과의 대화에서도 주제는 선교에서 제자도로 옮아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의 대화에서 모두 화자는 “대조”(對照)와 “오해”의 기법을 통해서 이들 주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31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32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33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1-34절)
여인이 충격 가운데 버려두고 간 “물동이”와 제자들이 “빵”을 들고 층격 가운데 서있는 모습이 극적 대조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오해”를 극대화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생수”에 대해서 오해를 보였던 것처럼, 제자들은 빵 즉 “양식”(糧食)에 대해서 같은 오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해의 성격은 다른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께서 자기에서 줄 수 있는 양식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오해를 했다면, 제자들은 예수께서 필요한 양식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오해를 했다는 점이 다릅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 영적 수준에 있어 조금도 차이가 없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를 대하는 예수님의 인내심 역시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의미를, 여인에게는 “생수”의 의미를, 그리고 이번에는 제자들에게 “양식”의 의미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에게 필요한 양식은 “그분을 보내신 자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34절).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이와 같은 대답은 그분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하신 대답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1-4). 결국 예수님의 사역의 특징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절정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추수와 추수군. 예수님의 양식, 즉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34절)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이어지는 단락의 주제 즉 “선교”입니다.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가 “양식”에서 그에 대한 “추수”(秋收) 즉 “선교”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35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37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35-38절)
추수와 관련해서 이 단락은 이에 연관된 두 개의 고대 금언(金言)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1)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35절); (2)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37절). 전자(前者)는 추수의 시기와 관련된 것이며, 후자(後者)는 추수군의 역할과 관련된 것입니다. 추수의 시기와 관련해서 “넉 달”이 의미하는 바는 문자적으로 대화 당시를 기점으로 해서 대략 넉 달 후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보다는 긴박한 현재의 상황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즉 일반적으로 당시 파종과 수확 사이에는 육 개월의 기간이 필요했는데, 현재 넉 달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기다리는 시간은 지났고, 이제 남은 일은 수확하는 일 뿐이라는 절박함이 담겨있습니다. <성경>에서 “수확”이 상징하는 바는 “종말의 때”이므로(사 27:12; 욜 4:13; 막 4:1-9, 26-29; 마 13:24-30; 계 14:14-16),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모으시는 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종말과 관련한 예수님의 절박한 심정은 다음의 말씀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35절하). 예수님은 저 멀리서 동네 사람들을 데리고 자기에게로 오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을 바라보면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연찮게도 그 여인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이 하얀 색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은 36절에서 다시 한 번 다른 말로 종말이 이미 왔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추수군이 “이미 삯을 받았고”, “영생”의 열매를 모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인용하고 있는 두 번째 금언,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는 원래 부정적이고, 냉소적(冷笑的)이며, 절망과 심판의 위협을 담고 있는 말이었습니다. 예컨대, <미가서>의 한 구절이 그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네가 씨를 뿌려도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미 6:15상). 참고. 레 26:16; 신 28:30; 마 25:26.
그러나 예수님은 본문에서 이 금언을 전혀 다르게 아주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서의 다양한 역할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각자가 맡은 역할은 중요하며, 하나님의 섭리 하에 각자가 거둔 성공적인 사역을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38절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난해한 해석이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보내다”(ajpostevllw, 아포스텔로)의 시제(時制)가 단순 과거형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요한복음>의 지금까지의 진술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교를 위하여 ‘사마리아’ 지역으로 파송한 적도 없고, 본문의 문맥에서 보더라도 이들 제자들을 추수군으로 부를 만 한 하등의 근거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에 대한 가능한 해석은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장차 예수님의 제자들이 수행하게 될 선교 사역을 염두에 두고 미리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자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빌립’이나 다른 기독교인들이 수행한 ‘사마리아’ 선교를 시작한 염두에 둔 부활 사건 이후의 언급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논리적으로 볼 때 후자의 입장이 더 타당해 보이기는 합니다만, 이 구절의 배경과 관련해서 반드시 어느 한 입장을 고집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요한복음>의 기록이나 편집은 다양한 배경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므로, 어느 한 구절에 대한 특정한 배경을 상정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예수님 사역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38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란 예수님 자신이나, 침례 ‘요한’, 및 ‘수가’ 성 여인 등을 지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39절 참고).
5. ‘수가’성의 회심(39-42절)
증언과 회심. 연극의 회전 무대는 다시 돌아 ‘사마리아’의 ‘수가’ 성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단락에 부제(副題)를 붙인다면 “수가 성의 기적”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한 여인의 증거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39절)
혹자는 이 기적에 대해서 사도들이 마땅히 수행해야 했던 것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동료 ‘유대’인들에 대한 선교를 시작하기도 전에, 침례 ‘요한’의 사역에 버금가는 “증인”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입니다. 이 여인이 이룩한 성과는 훗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과도 극명하게 구별되고 있습니다(참고. 눅 9:51-54). 즉 예수께서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했을 때, 그분의 제자들이 준비를 위해서 그곳으로 앞서 갔으나 이 지역 주민들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한 여인이 많은 사람들을 예수께 데리고 왔습니다만, 많은 사도들은 단 한 명도 설득시키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제자들의 태도 또한 한심한 수준입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내려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나이까”(눅 9:54).
회심과 고백. 예수님이 ‘사마리아’에 머문 기간은 이틀에 불과했습니다만, 이 여인의 증거가 옳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40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 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39-42절)
이제 그들 스스로의 입으로 예수를 “구세주”(swthvr, 소테르)로 시인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지칭하며 사용하고 있는 용어 “구세주”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용어는 <서막>에서 화자 자신이 예수님과 관련하여 사용한 바 있는 일련의 용어들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의 간증에서 이 용어를 직접 사용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만, 여인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전한 바 있습니다(29절).
‘유대’인들은 이 단어를 ‘그리스도’ 즉 ‘메시아’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하지는 않으며,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만 사용합니다(참고. 사 43:3, 11; 63:8-9; 45:21-22). 물론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신약>의 기자들은 공공연하게 ‘그리스도’를 “구세주”와 혼용해서 부르고 있습니다(행 5:31; 13:23; 빌 3:20; 여타 서신서). 또한 당시 이방세계에서는 일련의 신들에 대해서 “구세주”라는 호칭은 붙여주었으며, ‘로마’ 세계에서는 황제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 인들이 이해하고 있는바 “구세주”는 어떤 존재일까? 이들의 ‘메시아’에 대한 이해는 <신명기>(18:15-18)의 약속을 성취시켜줄 “약속된 그 선지자”, “다시 올 자”, 또는 “두 번째 모세” 등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예수님과의 대면 이후 그를 “구세주”로 부른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복음서의 화자는 예수님에 대하여 그동안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새로운 용어, “구세주”를 ‘사마리아’ 인들의 고백을 통해서 새롭게 소개함으로써, 예수야말로 ‘유대’인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온 세상의 희망과 기대를 충족시켜줄 유일한 희망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1. 사마리아의 그리스도
대부분의 민주국가에서 인권과 관련해서 천명하고 있는 헌법 정신은 거의 같습니다. 즉 “어느 누구도 성(性)이나, 피부 색깔이나, 인종이나, 국적이나, 사회적 지위, 교육 정도에 따라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지닌다”는 선언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이 도대체 우리 인류가 어디서 이런 보편적 지식을 공유하게 되었을까입니다. 인류의 오랜 역사를 두고 축적되고 진화된 경험의 산물일까? 아니면 원래 우리 속에 마치 유전인자 정보처럼 태생적으로 내재해 왔던 것이었을까?
“인과율”(因果律; uniformity)은 이런 유(類)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련함에 있어 아주 유익한 도구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지금 ‘아이티’의 대지진으로 야기된 처참한 상황에 대해서 문명국가를 자처하는 거의 모든 국가들이 정치적 이념이나 경제적 득실 여부에 상관없이 돕겠다고 나서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어디에서 이런 아름다운 면이 있었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설령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사람이라도 속으로부터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강한 압박감 정도는 느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선한 구석이 보인다면, 그것은 선한 하나님의 인격을 반영하고 반증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이 나라에서 일어난 상황을 두고 미국의 보수 신학자 ‘팻 로벗슨’은 하나님의 저주가 내렸다고 진단하여 백악관으로부터 “어리석은” 발언으로 규탄을 받기도 했습니다만,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조차도 이런 일을 목도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나 그분의 속성에 대해서 정반대의 의문과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은 지구를 이토록 위험한 곳으로 만드셨단 말인가?” “왜 하나님은 하필이면 가장 가난한 그 나라를 마치 ‘소돔’과 ‘고모라’처럼 초토화시키셨단 말인가?” “하나님이 그토록 강하신 분이라면, 지진 정도는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그토록 선하신 분이라면 왜 그 나라를 그토록 참혹하게 내버려두셨단 말인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됩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해답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무기력증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고 그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물어본 것도 혹시 이와 같은 무기력증의 발로가 아니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사는 그 병의 원인이 아니라, 그 병자였습니다. 좀 더 현대 용어로 표현하자면 그 병자의 인권, 즉 치료받을 권리에 있었다 하겠습니다. 그의 성이나, 피부색갈이나, 인종이나, 사회 지위나, 교육정도나, 나이에 상관없는 그의 권리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의 보다 궁극적인 관심사는 그 병자를 고쳐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수가의 여인.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권리는 어떻습니까? 이 역시 아무도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들을 필요가 없는 사람도 없고, 또 복음을 듣지 말아야 할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화자는 그 첫 번째 사례를 ‘니고데모’를 통해서 보여준 바 있습니다(3장). 화자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소개하기 전에 우리 인류가 어떤 존재인지 먼저 밝혀두고 있습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2:24-25). 그리고 곧바로 이어서 ‘니고데모’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3:1). 그러니까 화자의 의도인 즉은 ‘니고데모’를 인류를 대표하는 그 한 사람으로 소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니고데모’에 이은 두 번째 사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의 이름 없는 한 여인입니다. 이 두 사람과 두 사례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보다는 오히려 차이점이 더 많아 보입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차이를 구별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이방인; ‘바리새’파에 속한 종교 지도자와 무소속의 평신도; 사회적 명망가와 무명의 인물; 고학력자와 무학력자; 거룩한 자와 부도덕한 자; 세간(世間)의 평판을 의식해서 밤중에 예수를 찾은 것과 역시 세간의 평판을 피하여 한낮에 우물을 찾은 것; 먼저 예수님을 찾아 온 자와 예수님이 찾아 나선 사람. 참으로 흥미로운 대조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와 수가의 여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이들 두 이야기를 나란히 연결해서 소개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 많은 차이를 무색하게 해 줄 결정적으로 중요한 유사성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유사성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복음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의로운 자도 없고, 복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정도의 극악무도한 죄인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니고데모’는 복음이 필요 없을 정도로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도 아니었으며, ‘사마리아’ 여인은 복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정도의 가망 없는 죄인도 아니었습니다. 화자가 이 두 이야기를 나란히 소개하면서, 이야기의 끝에 ‘사마리아’인들의 합창과도 같은 고백,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시라”로 마무리 하고 있는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니고데모’와 ‘수가’의 여인은 무엇이 그렇게 닮았습니까? 우선 두 사람 모두 스스로에 대해서 아주 호의적(好意的)이었고, 낙관적이었습니다. “나는 별 문제 없어!”였습니다. 영적으로 다소 허전함이나 갈급함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체적으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자위(自慰)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니고데모’가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은 자신의 종교적이고 지적인 성취감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인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 자신의 신앙(다소 미신에 가깝다 할 정도의)과 동족의 종교적 전통에 의지해서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잘못된 확신 즉 착각입니다.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오늘날 소위 “긍정의 힘” 또는 “적극적 사고”이라는 사이비 복음의 희생자로 살아가고 있는 현대 기독교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정말 나는 괜찮을 것일까? 나는 정말 괜찮은 존재일까? 정말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만 태어난 존재일까?
‘니고데모’와 ‘수가’의 여인이 닮은 점은 또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중에 보여주고 있는 “오해”를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세속적으로 해석한 결과 영적인 의미 파악을 하지 못했던 오해를 말합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남”의 의미를, 여인은 “생수”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새 생명”에 대한 상징이었던 것을 몰랐던 것이지요. 이러한 영적 무지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우리 시대의 지독한 무신론자 ‘리차드 도킨스’에게 사도의 이 진단은 참으로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 <만들어진 신>에서 하나님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가공의 존재이며,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어리석은 미신일 뿐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북한 지도자 김정일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역설적인 것이, ‘도킨스’나 김정일은 ‘니고데모’나 ‘수가’의 여인처럼, 스스로 만들어놓은 종교나 과학주의(科學主義)의 틀 속에서 자신을 속이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일들”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헨리 모리스’는 자신이 쓴 책 <The Long War Against God>에서, 인류의 역사를 하나님을 향한 오랜 반역(叛逆)의 역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에서 ‘예루살렘’의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한 결 같이 하나님을 거절하고 피해 숨으려 했습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 3:8);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말 2:8). 하지만 또 다른 역사가 있습니다. 인류의 죄의 역사를 거스르는 또 다른 반역의 역사, 즉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인류는 마귀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향해서 구원의 손길을 펼치신 적은 없으나, 우리를 향해서는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대도 상황이 왜 더 심각한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서도 그것을 고의로 거부하고 거절해 왔기 때문입니다(참고. 롬 1:20-23). 예수님도 이점을 매우 안타까워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절규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모두의 복음. ‘예루살렘’을 향해서 이처럼 절규하시던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향해 가신 것입니다. ‘수가’ 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마리아’에도 ‘니고데모’처럼 복음을 들어야 할 수없이 많은 영혼이 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 복음을 들어야 할 권리를 가진 자들이며, 복음은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예수님이 언제 찾아오셨습니까? 나는 언제 그분과 진정한 영적 대화를 나누었습니까? 그분이 언제 내 영혼의 질병을 치료해 주셨습니까? 예수님과의 첫 만남 이후 그분을 아는 지식이 날로 커지고 깊어져 왔습니까?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들을 자격과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 좋은 소식을 들려주기 위해서 굳이 갈 필요도 없는 길을 간 적은 없습니까? 굳이 만날 필요도 없는 사람을 만난 적은 없습니까? 굳이 따로 떼어놓을 필요도 없는 시간을 별도로 구분해 놓은 적은 없습니까? 이 모든 질문의 요지는 결국 이것입니다: “나는 과연 그분의 은혜 속에 살고 있습니까?” 그렇습니까?
2. 목마른 그리스도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불교의 가르침은 기독교 신앙에 분명 하나의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난은 종잡을 수 없으며, 때로는 특정 개인에게 설상가상으로 집중적으로 찾아오는 것 같아 아주 불공평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고난이 과연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는지를 물을 것입니다.
1755년 11월 1일 ‘리스본’은 지진으로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성 축일(聖 祝日) 중의 하나로서 교회마다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 중 서른 개 교회가 파괴되었고 약 1시간 동안 30,00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1994년 3월 28일 미국 ‘플로리다’ 주의 한 감리교회 건물이 무너져 그 안에서 예배를 드리던 성도들 중 38명이 압사를 당한 바가 있습니다. 국민의 절대다수가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는 ‘아이티’는 2010년 벽두에 엄습한 대지진으로 수십만 명이 죽음을 당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자비롭고 정의로우시다면 왜 그의 통치 하에서 이런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분이 선하지 않거나 전능하지 않다는 증거는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으려 씨름해 왔고, 그 결과 이 문제에 관한 탁월한 저술들이 여럿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루이스’(C. S. Lewis)가 쓴 <고통의 문제>도 고전 중의 하나로 꼽아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훗날 자기 아내가 암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가 쓴 책이 자기 고통을 감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고난에 관한 지식이 고난의 체험을 감면해 주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성경>도 고난이나 “악”(惡)의 문제에 대해서 완전한 해결책을 전혀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매 장마다 이들에 대해서 언급은 하고 있지만 관심사는 그 기원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극복하도록 권면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로가 될 뿐입니다. <성경>은 과연 고난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대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가?
‘존 스토트’ 목사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마지막 한 장을 이 문제에 대해서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여섯 가지 가능한 성경적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의 논증은 가히 고통에 관한 신학적 집대성이라 부를 만합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여섯 가지 해답 중에서 나는 이 자리에서 한 가지만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여섯 번째 논증으로서, 다른 모든 논증들보다 가장 웅장하고 심오하며,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고난을 하나님의 “연대적 사랑”(solitary love)의 증거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고통 안에서 하나님이 개인적이고 사랑에 찬 연대감을 갖는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주는 진정한 아픔은 그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관심한 듯이 보이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습니다. ‘필립 얀시’(P. Yancy)는 그의 책 <내가 고통 받을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에서 바로 이러한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기아나 전쟁이나 지진 등으로 죽어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하늘나라 보좌 위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거나, 그것을 즐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 것입니다.
나도 수년 전에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얼마나 많은 불평과 욕설을 내뱉었는지 모릅니다. 그게 버릇이 되어서 그런지 지금도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수시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 <성경>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도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욥’이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재난이 닥쳐 죽을지라도 무죄한 자의 절망도 그가 비웃으시리라”(욥 9:23).
하나님에 대한 이런 식의 지독한 풍자는 십자가를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은 정말 모든 고통으로부터 초월해 계시는가? 정말 우리의 모든 고난에 대해서 무감각하신가? ‘스토트’ 목사님은 상세하고도 철저한 논증을 통해서 결코 그렇지 않다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고난 받도록 허용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 받으셨고, 오늘날에도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서 계속 고난 받으신다.” 그가 소개하고 있는 한 촌극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촌극의 제목은 <기나긴 침묵>입니다.
세상 종말에, 수십억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거대한 평원에 뿔뿔이 흩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앞에 비취는 눈부신 빛으로부터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맨 앞부분 가까이 있는 몇몇 집단은 격하게 이야기했다. 수치에 움츠러든 것이 아니라 호전적인 태도로.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할 수 있어? 그가 고난에 대하여 어떻게 안단 말이야?” 피부가 거무스름한 건방진 젊은 여자가 눈에 불을 켰다. 그녀는 나치의 강체 수용소에서 문신으로 새겨진 번호를 보여 주기 위해 옷소매를 잡아 뜯었다. “우리는 공포, 구타, 고문, 죽음을 참고 견뎠어!”
다른 집단에서는 한 흑인 소년이 그의 옷깃을 내렸다. “이건 어때요?” 그는 흉한 실 모양의 화상 자죽을 보이면서 물었다. “린치를 당했어요. 아무 죄도 없이 다만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다른 무리에서는 우울한 눈빛의 임신한 여학생이 있었다. “왜 내가 고통을 받아야 해요. 그것 내 잘못이 아니예요.” 그녀는 투덜거리며 중얼거렸다. 평원 건터 편 저 멀리에는 그런 집단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다. 각각은 하나님께서 그가 이 세상에 허용한 악과 고난에 대해서 불평을 했다. 하나님이 달콤함과 빛만 있는 곳, 눈물이나 두려움이 없고, 배고픔이나 증오가 없는 하늘에 살고 있는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도대체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견뎌 내야만 하는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있기나 할까?
그래서 이 집단들은 각각 그들의 지도자들을 파견했는데, 그들은 가장 많이 고난을 받았다는 이유로 뽑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 명의 유대인, 한 명의 흑인, 히로시마에서 온 사람, 지독하게 불구가 된 관절염 환자, 날 때부터 기형으로 태어난 한 남자 등이었다. 평원 한 가운데서 그들은 서로의 의견을 들었다. 마침내 그들은 자신들의 논쟁을 제출할 준비가 되었다. 그것은 아주 재치 있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심판관으로서의 자격을 가지려면 인생이 견뎌야 했던 것들을 먼저 견뎌야만 했다. 그들의 결정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고 선고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를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하자. 그의 출생의 합법성이 의심을 받게 하자. 그에게 굉장히 어려운 일을 주어서 그가 그 일을 하려 할 때에 그의 가족들조차 그를 미쳤다고 생각하게 하자. 그가 가장 친한 친구에게 배반을 당하도록 하자. 그가 잘못된 비난을 받고, 편견에 찬 배심원들에게 재판을 받고, 비겁한 재판관에게 선고를 받게 하자. 그가 고난을 당하게 하자.
“마지막에 혼자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가 무섭게 맛보도록 하자. 그 다음에 그를 죽게 하자.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 도저히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게 하자. 그것을 입증해 줄 많은 무리의 목격자들이 있게 하자.”
각 지도자들이 자기 몫의 판결을 발표할 때, 모인 사람들의 무리로부터 찬성이 술렁거림이 올라왔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이 판결을 발표하는 것을 마쳤을 때,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다른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갑자기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이미 그 형벌을 다 당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의 그리스도” 이야기도 이 촌극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연대적 사랑”에 대한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해를 위해서 다시 한 번 지난 이야기를 회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3-4절). 여기서 “예수께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했다”는 말이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이 말은 그가 어쩔 수 없이 ‘사마리아’를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당시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데에는 두 경로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요단’의 동쪽을 따라 북상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본문에서 보듯 ‘요단’ 서쪽을 따라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경로입니다. 동쪽 편 길이 다소 멀기는 하나, 대부분의 정통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피해 가기 위해서 이 경로를 택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로 통과해야 했다는 말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그 길을 택했다는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는 상식과 관례를 깨는 행동을 마다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 대답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목마른 자에게 생수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이 쓸데없는 여행으로 자신이 먼저 지치고 목이 마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에 그대로 앉으시니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6-7절).
이 얼마나 역설적인 장면입니까? 물을 주러 온 자가 물이 필요한 자에게 오히려 물을 달라고 하다니 말입니다! 그는 지금 단순히 한 낮의 뜨거운 햇빛 때문에 지치고 목마른 것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그는 ‘요단’ 강둑의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피곤하고 목말라 하는 것은 바로 이 여인 때문이 아닙니까? 생수를 필요로 하는 이 여인과 같은 죄인들을 찾아다니느라 지치고 목마르게 된 것이 아닙니까? 이분은 이 여인과 대화의 접촉점을 찾기 위해서 괜히 목마른 척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정말 피곤하고, 지쳐있으며, 목이 말라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하는 이 낯선 남자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그가 훗날 햇볕이 뜨겁게 내려쬐는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 위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절박하고 애절한 상태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절규하게 될 것임을 예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이처럼 목말라 하게 된 것도 바로 자기를 위한 것임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애타게 목말라 하는 자로부터 구원의 강물이 흘러내릴 것임도 알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이 낯선 남자는 여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지치고 목이 말라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능자 하나님의 아들이 지금 여인이 겪어온 그 모든 것들을 체험하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긴 여행에 지쳐있고, 뜨거운 한 낯의 햇빛으로 목이 말라 있습니다. ‘니고데모’를 위해서, ‘수가’ 성의 여인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입니다. <히브리서>는 참 인간이 되신 참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4:15); 8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5:8-9)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나와 함께 고통을 느끼고 계실까요? 이제 질문의 내용을 바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 고통당할 때 나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느라, 단 한 번이라도 피곤하고 목말라 본 적이 있었습니까?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입니다. ‘도마’는 “내가 손의 못 자국을 보며...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 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도마’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한 것을 오늘날 세상이 교회에 대해서, 즉 나에게 대해서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신 손에서 못 자국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 맞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그런 사람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장사되었으며,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까?
3. 목마른 여인
‘수가’성 우물 한 쪽 편에 목마른 예수님이 물을 청하며 서계시다면, 그 맞은편에는 목마른 한 여인이 서있습니다. 이 장면은 지극히 목가적(牧歌的)으로 비취기도 하지만,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내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남자와 여자, 한 번도 결혼을 해 본 적이 없는 미혼 남성과 무려 여섯 번을 결혼한 기혼 여성,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과 도비도적인 사람 등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넓고도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금 두 사람 모두 피곤하고 목이 말라있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육체적으로만 목마르고 피곤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심신이 공히 피곤하고 아픈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혼이 왜 아프고 피곤할까? 내가 그 답을 알지 못한다면, 우물가의 이 여인과 그 형편이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니고데모’와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예수님은 왜 지금 심신이 피곤하고 목말라 있는 것일까요? 그것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볼 일입니다.
목마른 이 여인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 탄생 사건을 “임마누엘”로 부르고 있습니다(마 1:23). 번역하자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입니다(참고. 사 7:14). <요한복음>은 동일한 이 사건을 가리켜, “(그가)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참고. 1:14). 여기서 “거하다”는 동사는 직역하자면 “장막을 치다”(to tabernacle)입니다. 즉 <출애굽기>의 “장막”을 연상하면 될 것입니다. 광야에서 그 장막은 항상 이스라엘 진중에 머물렀고, 이스라엘과 함께 행군했습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 또한 그 백성 중에, 그 백성과 함께 계시다는 ‘요한’ 화자의 의도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단순히 나에게 무엇인가 지시하고, 인도하고, 가르쳐 주기 위해서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교제하기 위해서, 즉 나와 모든 것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기분, 느낌, 그리고 감정까지도 말입니다. 예컨대,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기도드리게 하고, 동시에 나와 함께 기도드립니다. 나로 하여금 기뻐하고 감사하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나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고통과, 좌절과, 괴로움에 동참하시면서 함께 아파하십니다. “긍휼” 즉 “함께 아파함”(compassion)의 의미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우신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바로 이 여인 때문에 울고 계시며, 마음 아파하고 계신 것입니다.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사마리아’ 광야에서, ‘히잡’(두건, 베일)을 쓰고, 온 몸에 긴소매, 긴치마를 두른 채 우물가에서 물을 긷고 있는 이 여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베어 나오는 한숨과, 눈물과, 분노와, 적개심, 그리고 자기 연민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이름도 알지 못하고, 눈을 마주쳐 본 적도 없지만, 이 여인의 행색(行色)을 보는 순간 예수님의 긍휼지심(矜恤之心)의 본능이 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왜 심신이 피곤하고 목마른 것입니까? 예수님 때문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순전히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바다에서 조난당한 사람이 절대로 금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바다 물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장은 시원하게 갈증을 해소할 수 있겠지만,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갈증은 더욱 심해지고 결국 온 몸의 세포가 소금 때문에 말라죽을 때까지 바닷물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지금 목마른 것은 지난 세월동안 계속해서 바닷물을 마셔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이 어떻게 하다 인생이라고 하는 “고해”(苦海)의 바다에서 조난을 당했는지, 그리고 왜 담수(淡水)가 아닌 해수(海水)를 마셔대고 있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여기서 그 원인과 이유를 따지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역시 이 여인의 처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세월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비속어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랄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이 여인이 여섯 번씩이나 결혼을 했다고 하지만, 미국의 유명한 여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대도 사람들은 이 여배우를 정죄하고 거부하기는커녕, 그가 새로운 남편을 맞이할 때마다 온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하곤 했습니다. ‘사마리아’의 이 여인이나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인생의 갈증을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 바다 한 가운데서 바닷물을 계속 마셔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그녀가 지닌 불세출의 미모로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지만, 이 여인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남편을 맞이할 때마다 이웃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았을 것이며, 지금의 남편을 맞이할 즈음에는 아예 사람들이 입에 떠올리기도 싫어하는 기피 인물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나 행위를 정당화 하는 방식 중의 하나로, 세상이나 타인을 탓하고 원망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도 그랬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예컨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곳 우물로 물을 길으러 올 때마다 자기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그 이웃들을 떠올리며 적개심으로 입술을 굳게 닫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도 저만치서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일단의 남정네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행색을 보아하니 ‘유대’인들 같습니다. ‘수가’성으로 양식을 구하러 들어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것이지요. 하지만 이들은 자기에게 눈인사는 고사하고 마치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여인은 모멸감과 수치심으로 다시 한 번 몸을 떱니다. 그리고 이내 적개심이 속에서 요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까지 뒤섞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인은 우물가에 도착할 때까지 ‘유대’인들에 대한 적개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런대 우물가에 도착하자말자 또 한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행색으로 보아 이 사람 역시 ‘유대’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조금 전에 겪은 경험도 있었던 터라 여인은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고 물을 긷기 위해 매달린 물통을 우물 아래로 내릴 준비를 합니다. 바로 그 때, 이 남자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물을 좀 주실 수 있겠소”(7절). 화들짝 놀란 여인은 그러나 짐짓 태연한 채 퉁명스럽게 대꾸합니다. 어찌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에게, 그것도 남자가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걸 수가 있느냐고 말입니다(8절). 그러나 상대는 더욱 알쏭달쏭한 말로 여인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할 생수”를 주겠다는 것입니다(10, 14절).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여인에게 찾아오셨다는 것 말입니다. 먼저 와서 말을 걸었고 대화를 주도했습니다. 가능한 모든 통로를 이용해서 여인과의 접촉점을 마련했습니다. 때로는 질문을 통해서, 때로는 명령을 통해서, 때로는 다른 사람의 스쳐 지나가는 말을 통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여인이 먼저 그 남자를 찾지 않았습니다. 만일 여인이 하는 대로 그냥 두었더라면, 그녀는 예수님을 우물 맞은편에 영원히 그대로 앉아있도록 내버려 두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생수”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지금 그분이 나에게도 동일한 “생수”를 주시겠다고 한다면 나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니고데모’가 여기까지 따라와서 이 대화를 들었다면 어떻게 이해했을까? 반대로 여인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한 밤중의 대화를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생수”란 문자 그대로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로서 더 좋은 물임에는 틀림없지만, 여인의 영적 수준은 ‘니고데모’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녀는 ‘니고데모’가 그랬던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대낮이지만 그녀의 영혼은 ‘니고데모’처럼 한밤중 가운데 있습니다. 여인은 “생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당연히 그것을 어디서 길을 수 있는지 물어봅니다(11절). 근처 어딘가에 “야곱의 우물”보다 더 나은 강이나 시내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짐작컨대, 이 여인은 지금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항변을 하고 있습니다. 뭐 내심 이런 식의 항변이겠지요: “아니, 당신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당신의 말은 상당히 불경하게 들리는군요. 우리의 위대한 조상 ‘야곱’이 당신보다 못해서 흐르는 생수를 찾지 못하고 여기다 우물을 팠을까요?” 여인은 이 우물에 대해서 신앙심마저 보이고 있는 듯합니다.
이 여인이 <성경>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구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영혼의 갈증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생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 <시편>은 하나님을 시냇물로 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 42:1). 하나님 스스로도 자신을 “생수”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그리고 메마른 땅에 물을 쏟아부어주시겠다고 약속도 하십니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사 44:3상). 그리고 <이사야> 55장에서 하나님의 그 유명한 약속을 만나게 됩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이뿐이 아닙니다. <에스겔서>나 <스가랴>는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성전 ‘예루살렘’으로부터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오는 장면을 그려내고 있습니다(겔 47:1-12; 슥 13:1; 14:8). 이 여인이 <신약>을 알 리야 없겠지만, <계시록>은 종말의 날에 이 약속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7).
이처럼 <성경>은 생생한 그림이나 이미지로 생수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여인은 여전히 목마름 가운데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생수”가 아닌 바닷물로 갈증을 해소하려 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 바닷물 속에는 참 많은 것들이 용해되어 있기는 합니다: 돈이나 명예; 지위; 가까운 친구들; 여섯 명의 남편; 가족; 종교 등. 여인의 허기를 해소시켜주고도 남을 만큼의 다양한 영양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지금 영양실조에 걸린 것이 아니라, 목이 마른 것입니다. 단순히 시원한 물 한 잔이 필요할 뿐입니다. 오, 가련한 여인! “생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생수”를 마시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가련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이 ‘유대’인 남자가 목마름을 무릅쓰고 왜 여기까지 왔으며, 왜 지금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가련한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이미 다니는 교회가 있다고 말합니까? 모태신앙인이라고 말합니까? 즉 ‘야곱’의 우물이 있다고 말합니까? 혹시 목이 마른 것이 아니라 배가 고픈 줄 알고, 물이 아닌 다른 먹을 것들로 자꾸 배를 채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생수처럼 보이는 것을 찾아 계속 마시기는 하나 늘 남는 것은 공허와 허무와 불만족뿐입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 차례입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
그분은 지금 자신이 우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말합니다. 우물은 덮개를 덮어버리거나, 돌이나 흙으로 막아버리면 더 이상 쓸모가 없습니다. 물이 솟아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솟아나는 샘물”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덮어도, 돌이든 더러운 흙이든 상관없이 마치 온천수처럼 항상 깨끗한 물이 솟아나옵니다. 나의 의지로 그분의 의지를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내 문밖에서 문 두드리는 그분을 몰아내지 맙시다. 내가 아무리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어둠 가운데 혼자 지내고 싶어도 그분은 바람처럼, 공기처럼 내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분의 은혜 속에 잠겨봅시다.
4. 네 남편을 불러 오라(I)
빛이 가진 기능 중의 하나는 “계시” 즉 “드러냄”입니다. 무엇을 드러냅니까? 일차적으로 발광체 그 자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빛을 받는 대상을 드러내 줍니다. 예컨대, 어둠 속에 있는 나에게 한 줄기 빛이 비췰 때, 내가 보게 되는 것은 나를 향해 비취는 그 빛과 그리고 내 모습입니다. ‘보이스’(J. M. Boice) 목사님은 기독교의 계시도 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첫째,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둘째,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의 참된 자아를 드러내줍니다. 이 두 계시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의 참된 자아를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보지 않고서는 나의 참된 자아를 발견할 길이 없습니다. ‘모세’나, ‘다윗’이나 ‘이사야’나 ‘베드로’가 이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보자말자 이내 자신들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나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자신이 구제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점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선언하신 바 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예수님 당시 종교인들은 그를 죽도록 미워했습니다. 얼마나 미워했으면 견원지간(犬猿之間)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조차 일치단결하여 예수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겠습니까? 그들은 왜 이토록 예수를 싫어했을까? 자신들의 위선(僞善)이 드러나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향해서 “회 칠을 한 무덤”이니 “독사의 자식”이니 하며 독설을 퍼부어대는 예수를 누가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정은 오늘이라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2010 남아공 월드컵을 석 달 앞두고 대한불교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는 대한축구협회에 “국가대표 축구선수의 종교행위 개선 요청”이라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조계종은 이 공문에서 “국가대표 축구선수는 공인으로서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 표출되는 행위는 타인의 종교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로 최대한 자제해야 할 것”이라 밝혔습니다. 조계종은 또한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SBS 해설위원(제갈성렬)의 종교적 표현으로 물의를 일으키며 화합과 평화의 올림픽 정신에 어긋나는 사건이 발생한 바 있다”며 축구협회에 축구 선수들의 기도 ‘세러모니’에 대한 의견을 밝혀줄 것과 종교행위 자제를 위한 선수∙실무자 대상 종교차별 예방 교육을 수립하고 시행해 줄 것은 요청했습니다. 이쯤 되면 종교평화위원회가 아니라 종교 갈등위원회로 불러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이에 대해 교회 언론회는 “스포츠 선수까지 관리하려는 불교계”라는 논평을 내며 조계종 종평위의 요구를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동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연아 선수가 ‘카톨릭’의 성호(聖號)를 표시하는 것에 눈에 띄었으나 아무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는 혐오의 수준을 넘어 타도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지난 수년 동안 불교계와 로마 카톨릭 교계 사이에 종교 간의 화합 운동이 꾸준히 전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개신교 기독교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특별히 잘못한 짓이라도 했나요? 교회가 무슨 반국가적인 혁명 노선을 부추기기 때문입니까? 개신교가 다른 종교계에 비해서 윤리∙도덕적으로 더 부패했기 때문입니까? 말과 행동이 전혀 일치하지 않기 때문입니까? 무례하고 오만하기 때문입니까? 이웃을 전혀 돌아보지 않고 자기네들끼리만 어울려 다니기 때문입니까? 가족이 아니라 교회를 먼저 섬기고 우선시하기 때문입니까? 이들 이유 모두 진리의 일단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를 다른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니 다른 데서 찾아내야 합니다. 정당하고, 떳떳하며, 결코 기죽지 않는 기독교 변증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을 예측이라도 하셨다는 듯이 오래 전에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상이 너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19).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제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제자임을 공공연하게, 아무 거리낌도 없이, 적극적으로, 때로는 도전적으로 증거하고 드러내고 다니기 때문에 싫은 것입니다.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증거하는 복음이 그들에게 거침돌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으나, 위선적인 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참을 수 없기 때문에 싫은 것입니다. 우리의 화자도 서막에서 사람들의 이러한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이렇게 진단한 바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3);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 하였으나”(1:10-11).
지금까지 여인도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대화의 주제도 그렇게 심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처음 보는 남자가 먼저 말을 걸어와 당황하긴 했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친절한 이 남자에게 점점 끌리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생수”가 어쩌고 할 때쯤에는 마치 게임을 하듯 이 사람을 좀 놀려줄까 하는 생각도 들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누굽니까? 남자라면 이골이 나있지를 않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된 것이지요.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이 낯선 남자 앞에 서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수치심과 모멸감으로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 여인이 누구입니까?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 이 순간을 빨리 모면하고 다른 대화로 넘어가야겠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도망치듯 대답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17절). 여인의 메시지인 즉은, “내 과거지사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아요. 하던 이야기나 계속 하시지요.”
나는 어떻습니까? 목장이나 예배 시간에 나 자신에 대해서 나누어본 적이 있습니까? 내 실패에 대해서 나누고 도움을 요청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늘 다른 사람 이야기입니까? 성경공부 시간 내내 졸거나 잠잠하다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돌변하여 정치와 시사 문제로 입에 침이 마르듯 신나게 열변을 토하지는 않습니까? 회개의 간증이나 신앙적 결단을 해야 하는 자리에서 설교를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입기 전에 먼저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어려운 말로 표현하자면, “칭의”에 앞서 용서 즉 “화목”이 필요한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희생 제사를 드리러 올 때에도 번제단을 항상 가장 먼저 통과해야 했던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번제단 위에 먼저 짐승의 피를 흘려 죄 사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히브리서>는 이에 대해서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히 9:22).
예수님은 여인에게 “생수”를 주겠다고 했으며, 여인은 다시는 이곳에 물을 길러 오지 않도록 그 “생수”를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15절). 그런데 느닷없이 예수님은 그 여인더러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십니다(16절). “생수”를 주시겠다고 했으니 그냥 주면 될 일이지, 남편은 왜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까? 기어코 이 여인도 번제단을 먼저 통과해야겠다는 것입니까?
여인은 회피하듯 얼른 답하고 넘어가고 싶었지만 대답은 솔직했습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놀랄 일이지요. 지금까지 한 번도 이처럼 솔직하게 내 심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속으로 다음과 같이 되 뇌이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지금 남편을 포함해서 남자를 여섯 번이나 바꾸어보았지만, 다 그렇고 그랬지. 그 사람이 그 사람이지. 어떤 녀석하고는 채 석 달도 같이 살지 못하고 헤어지기도 했으니 말이지. 지금 이 자도 함께 살고는 있지만 언제 또 헤어지게 될지.”
이 여인의 무질서하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생활은 요즈음 ‘할리우드’ 연예인들을 연상시킵니다. ‘니콜라스 케이지’는 얼마 전 한국 계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 ‘그레이스 프레슬리’라는 여인과의 삼 개월 동안의 결혼 생활을 끝내야 했습니다. 그가 이혼 사유로 내어놓은 것이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성격상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이미 두 번을 결혼한 상태였고, ‘그레이스 프레슬리’는 세 번째였습니다. 그리고 이 여자의 두 번째 남편은 그 유명한 흑인 가수 ‘마이클 잭슨’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무려 일곱 번인가 여덟 번인가를 결혼한 바 있습니다. 얼마 전 독일의 한 노인은 신문에 광고를 내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기와 잠자리를 같이 해주는 여자에게 수십억의 유산을 주겠다고 하니까 전 세계적으로 수백 명의 여자들이 지원을 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 노인은 그동안 여인들과의 섹스로 평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하기야 ‘솔로몬’도 처가 몇 사람이었습니까? 그럼에도 죽으면서 그가 남긴 말은 원도 한도 없이 살다가 간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덧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진정한 만족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네 남편을 데려 오너라.” 예수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담’을 향해서 던진 그 질문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질문이나 모두 죄인을 향한 진단이자 초청입니다. 나로 하여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먼저 들여다보라는 진단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가지고 오라”는 초청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서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상). 내가 예수님에게 데리고 와야 할 내 남편은 누구입니까? 회피하지 맙시다. 그분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다음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 남편을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예수께 나아오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이것이 과연 말처럼 쉬운 일일까요?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기독교는 쉬울까, 어려울까?”를 놓고 한 장(章)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가 다른 그 무엇보다 더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가 제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C. S. Lewis, 「순전한 기독교」, 장경철∙이종태 옮김. 서울: 홍성사, 2001, 298쪽.
그리스도가 말합니다. 나에게 전부를 다오. 나는 너의 시간이나 돈이나 일을 원치 않는다. 나는 “너”를 원한다. 나는 너의 본래의 자아를 괴롭히러 온 것이 아니라 죽이러 왔다. 미봉책은 필요 없다, 나는 여기저기 나뭇가지를 쳐 내는 것이 아니라 나무 자체를 아예 뽑고 싶다. 이를 뚫거나 씌우거나 막는 게 아니라 아예 뽑고 싶다. 너의 본래의 자아 전부를, 네가 악하다고 생각하는 욕망이나 죄 없는 욕망을 가리지 말고 전부 내게 넘겨다오. 그러면 그 대신 새 자아를 주마. 내 자아를 주마. 그러면 내 뜻이 곧 네 뜻이 될 것이다.
마치 중고차 수리공이 중고차의 일부를 고치고 바꾸어서 사용할 수 있게 하듯이, 예수님께서도 나를 그런 방식으로 고쳐주기 위해서 자기에게로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기독교는 역설적으로 다른 그 무엇보다 쉽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자아는 나의 옛 자아를 수리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그분의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직접 내 속에 들어오시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쉽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 자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두 자아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옛 자아의 한계를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리고 새 자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예수님의 초청은 다음과 같습니다: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30)
좁은 길이 좁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고달픈 일이 고달프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분의 자아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합시다!
5. 네 남편을 불러 오라(II)
진단과 선고. <로마서>를 <신약>의 모든 서신서 중에서 가장 유명하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는 “죄”와 “칭의”에 대한 탁월한 논증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처음 세 장에서 “칭의”에 앞서 “죄”의 문제를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롬 1:18-3:31). 그는 죄에 관해서 두 가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10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즉 모든 인류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대단히 죄송한 마음이지만, 이 선언에 따르면, 성철 스님도, 법정 스님도, 이순신 장군도, 테레사 수녀도, 김수한 추기경도, 그리고 안중근 의사도 결코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나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사도의 두 번째 결론은 무엇일까요?
13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3-18)
그의 두 번째 결론은 개개인의 죄질(罪質)에 관한 것입니다. 사도는 이곳에서 각인(各人)의 죄질을 논하면서 신체 각 부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목구멍; 혀; 입술; 입; 발; 눈. 즉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부패하고, 타락하여 단 한군데도 온전한 구석이 없다는 결론입니다. 사도의 두 결론을 다시 한 번 요약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고, 각 사람은 철저하고도 완벽하게 타락하여 도저히 구제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명의(名醫)의 진단은 그대로 수긍하고 받아들여 그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치료를 위한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축복과 은혜의 시작인 것이지요. 그러나 대개 그렇지 못합니다. 소극적으로는 무시하고 회피하는 것에서부터, 적극적으로는 이런 저런 이유나 근거를 가지고 항변하고 반박합니다.
사도는 사람들의 이런 모습을 크세 세 부류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부류가 소위 “쾌락주의자”입니다. 쾌락주의자란 진리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방식대로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전형적인 무신론자를 통칭하는 단어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가 진리를 알고 있느냐 또는 모르고 있느냐는 중요치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단지 정도의 차이 뿐입니다. 사도는 쾌락주의자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서 <로마서> 1:18-32 사이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쾌락주의자에게는 삶의 기준이 될 만한 가치체계가 없습니다.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취합니다. 나만 그렇게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라고 꾑니다: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32).
왜 이 자가 죄인입니까? 사도는 진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사람을 힘들이지 않고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가 분류하는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흔히 “윤리∙도덕 주의자”로 부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를 <로마서> 2:1-16 사이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 당시에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 시대에는 매우 수준 높은 도덕적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통칭합니다. 흥미롭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이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이처럼 높은 도덕적 기준에 따라 살아가는 자가 죄인이 되어야 합니까? 오히려 존경을 받아 마땅한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적어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첫째, 그가 아무리 높은 “의”(義)의 수준을 세워놓았다 한들 결코 하나님의 완전함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기준은 그리스도의 삶에서 보는 그 수준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가 “흠 없고, 점 없는” 완벽한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벧전 1:19). 완벽주의자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두 번째 이유는 보다 현실적입니다. 즉 그는 자신이 세워놓은 도덕적 기준에 따라 살아가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또 그렇게 살아가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그 높은 기준을 적용하려 애씁니다. 바로 여기에 도덕주의자의 억지와 위선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지요. 그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 결국 도덕주의자는 하나님이 그를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심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사람을 심판하는 근거와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야말로 높은 도덕적 기준에 따라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며 살다간 사람을 심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사도 ‘바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 2:6). 참으로 공명정대한 심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을 만나볼 차례입니다. 그는 다름 아닌 종교인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로마서> 2:17-29 사이에서 만나보게 되는데, 사도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이 부류에 속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제반 요구와 기준에 대해서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할례도 받았고, 제사와 예배도 드리며, 기도도 드리며, 일체의 종교 행사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사람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 들어봅시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롬 2:17-19).
과연 이런 사람을 죄인으로 부를 수 있을까요? 사도는 그렇다고 말합니다. 종교인 역시 쾌락주의자나 도덕주의자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심판이나 정죄를 면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왜 그런가요? 사도는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롬 2:25).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유대’인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과 동일하며, 따라서 정죄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논리적인 선언입니다. 사도는 이어서 강조합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8-29).
위선과 억지. 결국 “네가 어디 있느냐?” 또는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직면해서 모든 죄인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하나 같이 일관되고 한 결 같습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숨기는 것입니다. ‘아담’이 나무 잎으로 나신(裸身)을 가리고 나무 뒤에 숨었듯이 말입니다. 다만 가면의 형태나 종류가 다를 뿐입니다. 이방인 무신론자의 가면은 “쾌락주의”요, ‘헬라’ 철학자의 가면은 “윤리∙도덕”이며, ‘유대’인의 가면은 “종교”일 것입니다.
‘수가’ 성 여인은 어떻습니까? 이 여인은 무엇으로 자신의 치부를 가리려 하고 있습니까? 이 여인을 단순히 쾌락주의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너무 지나친 판단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여인의 입장에서 다섯 번씩이나 결혼을 했어야 할 그럴 만 한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유대’ 땅은 전쟁과 기근과 질병과 상해 등으로 남자들이 파리처럼 죽어가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과부는 구걸을 하거나 창녀가 되거나 아니면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남편이 다섯이라면 이 여인은 남편을 잃을 때마다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 틀림없다 하겠습니다. 적어도 살아남기 위해서 말입니다. 따라서 이 여인이 다섯 번 결혼을 했다 해서 죄인이 된 것은 아니라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한 여섯 명의 남자가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여인 스스로도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17절).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여인의 말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으니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7-18절). 지금 여인은 남편이 아닌 자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죄입니다. 여인이 정말 꺼내놓기가 싫었던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주제이지요.
여인은 즉시 자신의 죄를 고백했을까? 아닙니다. 대화의 주제를 바꿉니다. 마치 권투선수가 상대 선수의 주먹을 요리조리 피하듯, 예수님의 질문과 초청을 피하고 있습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보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는 것이지요. 어떤 가면입니까? 여인이 본능적으로 들고 나온 가면은 소위 “거대담론”(巨大談論), 즉 종교와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여인은 예배와 ‘예루살렘’을 들먹이며,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차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실 거대담론은 누구나 좋아하는 주제이지요. 왜냐하면 내가 직접 가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흔히 이 시대 진보 인사로 대접받는 사람들의 단골 메뉴는 민주와 자유, 민족과 통일, 인권과 복지, 환경과 세계 평화 등입니다. 사람들은 왜 이처럼 거대담론을 좋아할까? 그것들로 나를 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진정한 자아를 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선은 위선으로 끝나지 않고 때로는 억지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최근 선거철을 맞아 느닷없이 모든 초등학생들에 대한 무상 급식 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아주 형편이 어려운 일부 학생에게만 지급하는 현재의 무상 급식 제도는 수혜자들에게 일종의 수치심을 유발하므로 비교육적일 뿐만 아니라, 무상 급식은 헌법에 명시된 의무교육의 일환이니 마땅히 모든 학생들에게 시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제안을 싫어하겠습니까? 내 자식 공짜로 밥 준다는데. 기왕이면 교과서도, 교통비도, 교복도, 저녁까지 모두 무상으로 제공해 줄 수 있다면 더욱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필요한 재원은 어디서 마련하면 될까요? 당연히 국민 세금에서 지출해야겠지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과연 자신의 월급에서 매달 십일조를 떼어서 옆집에 사는 불우한 이웃에게 주라고 하면 찬성할지 모르겠습니다.
거대담론의 함정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대의명분을 지니고 있으며, 그래서 누군가는 헌신을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구태여 내가 개입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좋아하는 거대 담론 중의 하나는 세계 선교 내지는 제자훈련일 것입니다. 신앙적 양심이 있는 자라면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해서라도 거부해서는 안 될 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바로 옆집에 사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나 또는 일대일 성경공부로 초청하기 위해서 먼저 관계 맺기를 시도해 본 적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아니면 그 일이 두렵고 힘이 들어, 이는 생략하고 세계 선교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나는 이전에 주님을 만나기 전에 누군가 영적인 주제로 대화를 몰고 간다는 느낌이 들면 피상적 종교 문제로 주제를 바꾸거나 그 사람을 멀리했습니다. 너무 개인적인 문제이기도 했고, 두려움이 크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믿고 헌신하게 되면 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거나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말입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내 기도 제목들이 이 사실을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대부분의 기도 제목들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피상적이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거나 해 달라거나 하는 등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없습니다. 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하며 간구를 드리지 못하는 것일까? 두렵거나 또는 게으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본인의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강의실에서도 기록하지 않고 그냥 듣기만 하는 학생치고 좋은 성적을 내는 학생 없습니다. 우리는 기록함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사고와 논리를 구체화하고 정량화합니다. 객관적 지식이 주관적으로 내 속에서 육화(肉化)되는 것입니다. 간증 문을 한 번도 써보지 않는 성도, 결단과 헌신을 한 번도 공개적으로 발표해 본 적이 없는 성도, 구체적인 기도 제목이 없는 성도. 그래요. 그는 계획과 목표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멀어진 사람입니다.
초청. 이 여인은 어떻습니까? 지금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서 끝까지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25절). 여전히 여인의 주제는 종교적 문제입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살아갈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그냥 내버려 두었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항거하고 거부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온화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라”(26절). 초청의 말씀입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절)는 말씀입니다. “내게로 오라”(마 11:28)고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주님은 무엇이 그리도 아쉽고 부족하여 한사코 거부하고 거절하는 이 여인에게 이토록 포기하지 않는 관심을 보이시는 것일까요? 나에게도 이 말씀이 들립니까? 아니면 “수가 성 여인”처럼 한사코 그럴 듯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려 하지는 않습니까?
칠십 평생을 무신론자로 살면서도 채워지지 않은 영혼의 갈증 때문에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1>를 썼던 이어령 선생은 회심 후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2>를 썼습니다.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어렴풋이 보이고 멀리에서 들려옵니다.
어둠의 벼랑 앞에서
내 당신을 부르면
기척도 없이 다가서시며
“네가 거기 있었느냐”
“네가 그동안 거기 있었느냐”고
물으시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달빛처럼 내민 당신의 손은
왜 그렇게도 야위셨습니까
못자국의 아픔이 아직도 남으셨나이까.
도마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나도
그 상처를 조금 만져볼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혹시 내 눈물방물이 그 위에 떨어질지라도
용서하소서
아무 말씀도 하지 마옵소서.
여태까지 무엇을 하다 너 혼자 거기 있느냐고
더는 걱정 마옵소서.
그냥 당신의 야윈 손을 잡고
내 몇 방울의 차가운 눈물을 뿌리게 하소서.
6. 새롭고 살아있는 예배
“예배가 무엇이죠?” “예배는 어디서 드려야 하는 거죠?” 여인이 예수님에게 물었던 질문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사실 예배에 대해서 물어보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과의 대화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예배를 언급한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예배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안다면 이 장면은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이 장면이 역설적인지 잠시 뒤로 미루고, 우선 예수님께서 여인이 예배에 대해서 먼저 문제 제기를 했을 때 무어라 진단하셨는지 알아보는 것이 우선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영과 진리”의 예배, 그리고 “참되게 예배하는 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배에는 거짓된 예배, 즉 예배 아닌 예배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는 달리 표현하자면 “진정한 예배” 또는 “살아있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여인이 지금 예수님에게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거짓된 예배” 즉 “죽은 예배”라면, 예수님께서는 “살아있는 예배”가 무엇인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장면이야말로 “살아있는 예배”가 과연 무엇인지, 예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살아있는 예배에 대해서 <신약>으로부터 생생한 예를 들고자 한다면 바로 본문의 에피소드가 그 전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인의 예배. 우선 이 장면에서 여인이 맡은 역할은 “거짓된 예배” 즉 “죽은 예배”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론 브루스’는 “살아있는 예배”를 방해하는 요인들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론 브루스’, 113-114쪽.
첫째, 예배는 잘못된 행실에 의해서 방해를 받는다고 합니다. 바로 이 여인의 삶이 그러한 것이 아닐까요? 죽은 자가 살아있는 예배를 드릴 수는 없는 것이니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여인의 삶은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상징하고 대변하는 것입니다. 여인이나 이스라엘이나 한 결 같은 생각은 예배의 외형만 제대로 되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2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23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24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2-24)
이 말은 완전한 사람만이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은 진지하고 겸손하게 그 분에게 의존하며 진정 헌신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을 찾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시편>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 하시리이다(시 51:17)
둘째, 예배는 또한 잘못된 우선순위에 의해서도 방해를 받는다고 합니다. 바로 이것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본질적으로 저지른 잘못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 자신과 하나님의 전체적인 관계를 새롭게 해 줄 그 분이 바로 그 순간 그들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을 모른 채,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만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여인에게 중요한 예배 장소는 ‘예루살렘’이거나 아니면 ‘그리심’ 산입니다. 여인에게 ‘그리심’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예배의 장소로 제단을 세웠던 곳입니다(창 12:7; 33:20; 신 27:46). ‘사마리아’인들은 바로 이곳에 주전 400년경에 성전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를 허용할 수 없었고, 주전 128년에 이를 허물어버렸습니다. 이후 예배 장소에 대한 문제는 두 민족 간에 끊임없이 갈등의 쟁점이 되어왔던 것입니다. 여인이나 ‘유대’인에게 있어 우선순위는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 예배의 장소였던 것 같습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 와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살아있는 예배. 예수님은 여인에게나 우리 모두에게 살아있는 예배가 무엇인지 직접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선 예배의 주체가 누구인지, 그리고 예배의 대상은 누구인지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예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여인은 듣습니다. 예수님은 보여주시고 여인은 봅니다. 예수님은 이끌어 가시고 여인은 이끌려 갑니다. 이것이 예배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인은 처음에는 그럴 의도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배를 먼저 거론했을 뿐입니다. 예배의 목적, 예배의 대상을 회피하기 위해서 예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실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인은 난생 처음으로 살아있는 예배의 시공 속으로 초청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예배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한 인격체와의 만남인 것이지 일체의 주변적인 장식들을 보거나, 만지 거나, 듣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예배는 살아계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여인이 주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22절).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살아있는 역사” 즉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바탕을 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역사를 구속사(救贖史) 내지는 언약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역대기>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습니다:
15너희는 그의 언약 곧 천 대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할지어다. 16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이며, 17이는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원한 언약이라(대상 16:15-17)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예배는 매번 동일한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늘 새롭게 듣고, 새로운 각오와 감사로 정전을 떠납니다. 이는 <신약>의 성도라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 주 복음 즉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새 언약을 듣습니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살아있는 예배는 또한 살아있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과 진리”의 예배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3-24절). 혹자는 이 대목에서 “영”을 “성령”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만,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영과 진리”는 마치 “물과 성령”에서처럼 일종의 동의 반복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의미하는 바도 단순히 진솔하고 솔직한 예배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열정이나 격정, 감동과 눈물 등을 맛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만, 이들은 “살아있는 예배”의 전제 조건이나 증거라기보다는 결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으며, 좌우에 날선 검과 같아서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히 4:12)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예배”의 결과가 이러하다면 결국 그 예배가 보여주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일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는 것은 결국 진정한 예배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여인도 이점을 인정하고 있는 듯합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25-26절). 마침내 여인이 주님의 계시를 듣는 장면입니다.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예배”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배에 대해서 말하고 연구하고 논쟁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예배 시 어떤 음악을 사용해야 하는가? 손을 들고 찬양해야 하는가 아니면 내린 채로 해야 하는가? 축도는 “할지어다”로 끝내야 하는가 아니면 “하시옵소서”로 끝내야 하는가? 예배를 한 사람이 인도해야 하는가 아니면 여러 사람이 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를 살아내라고 권고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사도는 삶으로서의 예배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최상의 극진한 예배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것입니다.
7. 새 생명의 呱呱
조용하던 무대가 갑자기 시끄럽고 어지러워집니다. ‘수가’ 성 내로 먹을 것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대화는 이제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물동이를 내버려 둔 채 마을을 향해 달려갑니다. 충격과 흥분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물동이를 내버렸다는 사실도, 왜 우물가로 왔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달려갑니다. 여인의 가슴은 터질 것만 같습니다. “어서 가서 동네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주어야지.” 여인의 머리는 온통 이 생각으로 하얗게 되어버렸습니다.
대화가 필요 없게 된 사람은 여인만이 아닙니다. 제자들 역시 그렇습니다. 그들의 선생이 왜 이방인 여인과 은밀하게 단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왜 이 여인이 이처럼 황급하게 달려가는 것인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물어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남. 여인은 지금 왜 물동이를 내버려 둔 채 마을로 달려가고 있습니까? 도대체 이 여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화자가 그의 복음서에서 첫 번째 사례로 소개하고 있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실 ‘니고데모’가 먼저 경험했어야 했던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거듭남” 즉 “새로운 탄생”입니다. 여인은 이제 첫 번째 ‘아담’의 계보에서 두 번째 ‘아담’의 계보에 그 이름을 새롭게 올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일대 일의 만남을 통해서, 그분과의 개인적인 성경공부를 통해서, 여인은 이렇게 새롭게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여인은 마침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할 그 물을 마신 것입니다.
‘가나’의 기적이 초자연적이고 공개적이었다면, 이번의 기적은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내면적이며,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입니다. 정확히 어느 시점에 여인이 거듭 태어났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와서 그를 주님으로 부르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내가 그라”던 이 사람의 말이 진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인은 이제 새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여인이 거듭났음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지극히 평범한 단어 하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변화”입니다. 여인에게 일어난 변화를 통해서 거듭남의 신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슨 변화입니까? 두 가지 변화입니다.
어머니 배속에서 10개월을 지내던 태아가 바깥세상으로 나올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아십니까? ‘보이스’ 목사님은 신생아가 태어난 지 불과 수 초 동안에 겪는 수십 가지의 변화를 아주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중 일부만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어둠 속에서만 익숙해있던 아이의 눈은 빛에 적응하게 됩니다. 섭씨 36도의 어머니의 체온에서 그보다 무려 20도나 낮은 온도에도 적응하게 됩니다. 그동안 어머니의 탯줄을 통해서만 공급받던 영양분을 이제부터 입을 통해서 섭취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혈액 순환도 어머니의 탯줄이 아닌 자신의 심폐 기능을 통해서 작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열려있던 심장 판막은 이제부터 동맥과 정맥이 서로 섞이지 않도록 닫히게 됩니다. 그의 허파는 이제 공기로 숨 쉬는 기능을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코와 입과 소화기관과 그리고 피부도 그가 태어난 수 초 이내에 모두 변화와 적응을 거쳐 가야 할 것입니다. 새 생명의 탄생에 수반되는 변화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태아는 태어나자말자 죽어버릴 것입니다.
‘수가’ 성 여인에게 일어난 변화도 이와 같습니다. 여인은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여인에게만 국한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거듭난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변화입니다.
간증-입으로. 이 여인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아이가 태어날 때 산모나 의사가 가장 우선적으로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의 울음소리입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 우는 것은 공기가 폐로 들어가서 호흡을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영적 탄생도 이와 같습니다. 진흙 덩어리에 불과하던 ‘아담’의 코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호흡 즉 생기(生氣)를 불어넣었을 때 그가 비로소 “살아있는 영”이 되었던 것처럼(창 2:7), 누구든 거듭날 때 주변 사람들이 가장 듣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새 생명의 고고(呱呱)입니다. 우리는 이 울음소리를 다른 말로 간증(干證)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여러 곳에서 공중 고백 즉 간증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기 위해서 공중 고백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간증을 통해서 거듭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간증을 하는 이유는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사산(死産)이 아니라 생산(生産)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특히 교회 회중 앞에서 간증을 하는 문제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즉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혹자는 간증 대신에 그냥 조용하게 살아가는 쪽을 택합니다.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믿음은 그냥 가슴에 간직한 채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니고데모’와 이 여인의 차이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화자는 짓궂을 정도로 두 사람을 철저하고도 공개적으로 해부하고, 비교해 놓고 있습니다. 적어도 영적인 문제에 관한 한에 있어서는 ‘니고데모’는 여인과는 비교도 안 됩니다. 여인은 아예 관심조차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먼저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여인은 오히려 먼저 자기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요리저리 피하기만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는지 예수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의 초청을 한사코 피해가려 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니고데모’가 훨씬 진지하고 영적인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는 과연 거듭났을까요? 알 수가 없습니다. 거듭남에 관한 예수님의 그 위대한 강의를 들었지만, 그가 개인적으로 믿음의 고백과 간증을 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공모하고 있을 때, ‘니고데모’가 개입하여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는 함부로 심판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7:51). 그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인권 침해 여부인데, 그의 태도는 정말 훌륭하고 고상하며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예수를 주로 믿고 시인하는 공중 고백이나 간증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발언을 근거로 그가 거듭났다고 확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훗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그는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의 시체에 바를 몰약과 유향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19:39). 하지만 이와 같은 행동을 두고 그가 거듭났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죄책감에 그렇게 했을 수도 있으며, 누구든 죽은 자에 대해서 이 정도의 예우와 경의는 표할 수는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지난 번 천안 함의 전사 장병들에 대해서 우리 국민들이 보여준 애도와 경의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그가 거듭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그가 거듭났음을 확인할 만 한 아무 증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그가 하나님의 호흡을 받아들여 탄생의 큰 울음소리를 터뜨리는 것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니고데모’와 ‘수가’ 성 여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 그것입니다. 여인은 구원이 무엇인지 몰랐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찾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과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대화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새롭게 태어났음을 즉각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녀는 큰 소리로 새 생명의 탄생을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29절). 예수님은 “내가 그라”하며 여인에게 나타내셨고, 여인은 주님의 증언을 믿었으며, 주님의 증언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나는 언제 거듭났습니까? 그리고 언제 그 사실을 외쳤습니까? 지금도 수시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공적 예배에서나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말입니다.
간증-행동으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오시면 달라지는 것은 또 있습니다. 거듭난 자는 입으로 주를 간증하고 다닐 뿐만 아니라, 가치관도 함께 달라집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세계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 관심사, 우선순위 등등이 달라진다는 말이지요. 화자는 이를 여인의 행동을 통해서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28절상).
늘 그렇듯이 <요한복음>에서 화자의 묘사는 아주 사실적이며, 그래서 마치 생생한 현장 증인의 증거를 듣고 있는 듯합니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렸다는 사실이 거듭남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의 주제가 “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의 물에 관해서 말했고, 여인은 그 물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었습니다. 영혼의 갈증을 영원히 해갈시켜 줄 “그 물”을 얻은 것입니다. 하여 이제 그 물동이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지요. 더 이상 의지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내가 주님을 만난 이후 경험한 가치관이나 세계관의 변화는 무엇이었습니까?
필자가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은 성경공부를 통해서였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나를 만나주신 것이었지요. 아무튼 주님을 만난 이후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었습니다. 내 존재의 의미, 삶의 방식, 그리고 인생의 목표 등에 대해서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관심. 그러나 그날 이후 내가 겪은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이 여인과 마찬가지로 타인에 대한 관심이었습니다. 원래 본인은 체질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지 못하는 아주 소극적이고 소심한 편이었습니다. 누군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걸면 마지못해 대응하는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지금도 이런 체질은 크게 변하지 않아서, 타인의 인생사에 개입하거나 알려고 하지도 않으며 별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예외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관심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침례를 받고 성도들 앞에서 회심의 간증을 한 이후 목사님을 찾아가 전도할 대상이 있으면 함께 가자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말입니다. 그날 이후 나는 <성경>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일대 일 성경공부로 초청하는 일이 내 생활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는 지금도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주는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타인의 구원에 대한 관심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 아닌 남편에게 달려갔습니다. 자신을 이용하고, 학대하며, 멸시하던 이웃에게 달려갔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오르는 감격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4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도 이처럼 미치도록 강권하고 있습니까?
8. 먹지 않아도 배부름
오해. 여인이 무대에서 사라지자 예수님의 제자들이 빵을 들고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니다. 그러나 감히 물어보지를 못합니다. 대신 그들이 가지고 온 빵을 내밉니다. 바로 이 장면이 새로운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이야기의 주제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 장면이 주는 수사적(修辭的) 효과를 음미해 보는 것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대조를 통한 “오해”가 바로 그것입니다.
무엇이 대조되고 있습니까? 여인의 충격과 제자들의 충격입니다. 그리고 여인이 버려두고 간 물동이와 제자들이 가지고 온 빵이 대조적입니다. 화자는 이들 대조를 통해서 제자들의 영적 무지, 즉 “오해”를 드려내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이 여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왜 여인이 급하게 달려가고 있는지, 제자들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들이 예수님 앞에 빵을 내밀어 잡수시라고 하자 예수님은 “나에게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은 누군가 그분에게 이미 먹을 것을 갖다드렸는가 하며 서로에게 물어봅니다(33절). 우리는 여기서 제자들의 영적 수준이 ‘니고데모’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자들의 오해는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극대화되고 있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절). 제자들은 더욱 헷갈립니다. 오해가 풀리기는커녕 더욱 깊어만 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과연 무엇일까? 배고프지 않다는 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룬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뜻. 먼저 예수님의 양식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 순서인 듯싶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곧 그분의 양식이라고 하니 말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합니다. 앞날의 계획을 세울 때, 직업을 선택하고자 할 때, 결혼 상대를 고를 때, 사업 상 투자를 하려 할 때 등등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결정이나 선택을 앞에 두고 우리는 기도하며 필사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옵니다. 그분의 뜻을 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분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투영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사 그분의 뜻이 드러날 경우에라도 그 뜻에 따르기보다는 내 생각을 관철시키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대단히 불행하지만 우리에게는 진정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뜻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마치 제자들이 주는 빵처럼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만족만 줄 뿐일 것입니다. ‘수가’ 성 우물가의 물처럼 아무리 먹어도 항상 목마를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잡수신 빵은 이와 같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레슬리 뉴비긴’의 말대로 예수님에게는 오직 한 가지의 배고픔만이 그분을 압도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이중적입니다. 우선 하나님의 일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배고픔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것과, 또 한 편으로는 지금 당장 그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니 배고프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를 만나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환희와 감동으로 춤추며 달려가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이 현재 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너무 기뻐 밥 생각이 없다는 것이지요.
나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 역시 이러할까요? 나 때문에 즐거워서 밥 먹는 것도 잃어버릴 정도로 행복해 하고 계실까요? 예수님과 같은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면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 때문에, 즉 나의 증거로 인해서 그 인생이 달라진 사람이 있다면 말입니다. 내가 고통 가운데 낳은 영적 자식이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어머니는 항상 자식 걱정입니다. 자식에게 무엇을 해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받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도 더 주지 못해 안달입니다. 처녀와 어머니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이 주는 차이입니다. ‘사탄’이 언제 타락하였을까? 그 마음속에 만족이 없을 때, 즉 자기 뜻을 구하려 했을 때입니다. <성경>은 사탄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지는 않습니다만, <에스겔서>에서 중요한 한 단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에스겔서>에 따르면(겔 28:12), ‘사탄’은 원래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였으며,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말에 따르면 그는 더 바랄 것이 없는, 모든 것을 다 갖춘 왕이었고, 모든 피조물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3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사 14:13-14)
다시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가진 것, 자기가 누리고 있는 것, 자기의 위치나 신분에 대해서 한 번도 만족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늘 그 이상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내 뜻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위 두 문장에서 “내가 하리라”는 구절이 다섯 번이나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 뜻을 이루리라”는 장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시 <이사야>의 말입니다:
11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12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사 14:11-12)
<에덴 이야기>에서도 ‘사탄’의 운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3:14). 완벽한 조건 하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이 살아가던 ‘아담’을 타락시킨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 심판이 주는 아이러니는 ‘아담’이나 ‘사탄’이나 공히 분에 넘치는 만족을 구했으나 보상으로 받은 것은 끝없는 목마름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구하신 것은 결코 ‘사탄’이 구한 것과는 같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대로 그는 하나님의 양식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8)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6-10)
‘사탄’이 자기를 높여 자기 뜻을 이루려 하다가 비참하게 낮아졌으며, 타인들마저 비탄 속에 빠뜨렸다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했고, 그 결과 영광의 자리에 오르셨으며, 우리 모두에게 축복을 가져주었습니다.
온전히 이룸.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아셨고, 그 것을 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온전히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온전히 이룬다” 함은 “끝까지 완수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가 무엇을 시작하였으며 어떻게 그의 생애를 마감하셨는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성육신”; “공생애”;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 “중보”.
나는 어떻습니까? 시작은 하였으나 끝내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는 않습니까? 망대를 세우다 말고 그만 두는 어리석음에 대해서 주님께서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눅 13). 본인도 시작은 하였으나 끝내지 못한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를 들면, <창조교회> 설립과 도중하차가 그 일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당시 교회 식구들은 모두들 마치 ‘바벨’탑 사건 이후 온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듯 그렇게 흩어져 버렸습니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가슴 아픕니다. 또 있습니다. 수 년 뒤에 <버클랜드-대구교회> 창립 시 공동 담임 목사로 참여하였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그만두고 나와 버린 일이 그것입니다. 이 일 역시 좀 더 인내하며 견디지 못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경산교회>를 떠나온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상하게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끈기 있고, 도전정신이 있다고들 평가해 줍니다만, 유독 신앙이나 교회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마 만족을 모르고, 나를 높여 내 뜻을 이루려 했던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나에게 “끝까지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말입니다. 나는 별로 그렇지를 못합니다. 늘 하는 일에 만족이 없고, 있다 하더라도 오래가지를 못합니다. 다시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아 나섭니다.
제가 수 년 전 어느 예배에서 설교를 하던 중에 만족과 배고프지 않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개인 간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요즘 나에게도 배고프지 않을 일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새로 이사 간 전원주택은 너무 황홀하여 집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주변 경관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각 계절은 나름대로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하면서 우리를 즐겁게 해 주고 있습니다. 다정한 이웃이 있고, 물이 맑으며, 공기도 신선하고, 알지 못하는 소리로 지저귀며 새들이 정원수 사이로 날아다니며, 밤에는 별들이 더욱 높게만 느껴집니다. 아내를 그렇게 괴롭히던 불면증도 이곳에 와서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의 귀한 양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벗 삼아 식사를 하고 있노라면 때로는 내가 먹고 있는 음식이 무엇인지, 감미로운 맛이 어디에서 오는지 분간하기 어려워 질 때가 많습니다. 정말 먹지 않아도 배부를 때도 많은 것이죠.
“지금도 이 같은 고백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까?” 누가 이와 같이 물으면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수셨다는 양식을 아직도 제대로 먹지 못했거나, 아니면 아직도 하나님을 제대로 맛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내 안에 그분을 품으라고 권면하십니다.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되라는 것인 줄로 알겠습니다. 누군가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과 내가 그 자신이 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내가 그 자신이 될 필요가 없으며 그와 나는 늘 별개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내가 곧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겠죠. 누군가 고통 가운데서 예수님을 찾고 있다면, “내가 바로 그다. 그 같은 사람이 바로 여기 있다”라고 한다면 이단적 가르침일까요?
얼마 전 모 일간지에서 읽은 기사입니다. 즉 남을 도우며 봉사 활동을 꾸준히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고 자기 일에만 신경 쓰며 살아가는 사람보다 훨씬 건강하고 오래 산다고 합니다. 단순히 오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즐겁게 사는 한 비결을 소개한 듯합니다. 나에게도 이런 즐거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내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루지도 못했을 일을 이루며 행복하게 만족한 인생을 살아가는 제자들을 바라보는 것은 정녕 하나의 큰 즐거움입니다. 이곳에 계신 여러분도 역시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아니라면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며 누리고 있는 것들을 누리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식사며, 커피며, 청소며, 반주며, 목자의 헌신이니 관심과 기도며, 심지어는 남을 말을 경청하는 일 하며... 이 모든 일들은 그 일을 하는 당사자는 물론 도움을 받는 사람들 모두를 즐겁고 행복하게 하며, 이를 바라보는 예수님을 배부르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계속 그렇게 살아갑시다. 우리의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우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9. 하나님의 추수
<전도서>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전 3:1)고 말합니다. 여기서 “때”는 곧 기회를 의미하기도 할 것입니다. 사업에서나, 농사에서나, 또는 전쟁에서 성공 여부는 이 “때”를 어떻게 파악하고 활용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보이스’ 목사님은 한 예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7월의 첫 삼일동안 남군과 북군은 ‘게티스버그’(Gettyburg)라 불리는 곳에서 운명의 일전(一戰)을 치르게 됩니다. 그 전투에서 남군 총사령관은 ‘리’(Lee) 장군이었고, 북군 총사령관은 ‘미드’(G. G. Meade) 장군이었습니다. 삼일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전세(戰勢)는 북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남군은 4일 째 되는 밤중에 퇴각을 시작했으나, 그들이 ‘포토맥’(Potomac) 강가에 이르렀을 때에는 폭우로 갑자기 강물이 불어나 강을 건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남군은 이제 진퇴양난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뒤로는 북군이 좇아오고 앞에는 강물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제 북군의 ‘미드’ 장군은 물실호기(勿失好機)를 맞았습니다. 즉각적으로 진군 명령을 내려 남군을 격파하고 내전을 끝낼 수 있는 절호의 때를 맞은 것이지요. 그리고 당시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도 공격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미드’는 공격을 늦춥니다. 그리고는 연이은 작전회의로 공격을 계속 늦추기만 합니다. 이러는 동안 ‘포토맥’ 강물의 수위는 계속 낮아졌고, 마침내 남군은 모두 무사히 강을 건너 퇴각하고 맙니다. 이 일로 ‘리’ 장군은 전세를 회복하여 이후 전쟁은 이 년이나 더 지속되었으며, ‘미드’ 장군은 한 번도 승기(勝機)를 잡아보지 못했으며, 전쟁은 결국 그로부터 이 년 후인 1865년 4월 ‘리’ 장군이 북군의 총사령관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함으로써 종전을 맞이하게 됩니다.
기회를 놓쳤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사가 이러하다면, 영적인 문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좋은 기회를 놓친 결과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5)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수가’ 성 내로 먹을 것을 구하러 올라가던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제대로 포착했으며 활용했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반대편에서 한 여인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내려오는 것을 목격합니다. 그 한 사람의 여인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곳을 찾았던 것은 아닐까요? 그 여인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일부러 이곳 우물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제자들은 여인의 필요를 알 리가 없습니다. 그냥 지나치는 것은 물론이고 피해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 모습 또한 주님께서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여인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아셨고, 먼저 말을 걸었으며, 그녀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성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두 사람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여인에 대해서였을까요? 그녀의 필요에 대해서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심부름을 충실히 완수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잡수실 점심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은 선생님의 필요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왜 잘못된 것입니까?
추수의 때. 결론부터 말하자면, 첫째 일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기회, 즉 “그 때”를 놓쳤습니다. 제대로 활용을 못했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제자들에게 이 두 가지 문제를 가르쳐 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의 대가답게 주님은 두 개의 ‘유대’ 잠언을 영적 교훈을 위한 상징으로 사용하십니다: (1)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35절상); (2)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37절).
농사의 경우 대개 파종에서 수확까지 4-6개월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 ‘수가’ 성에서는 그렇게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이제 곧 ‘수가’ 성에서 거두게 될 영적 수확을 미리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밭은 이미 희어져 추수를 기다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분의 눈에 수백 명의 ‘사마리아’ 주민들이 하얀 옷을 입고 그를 향해서 달려 내려오고 있는 모습이 선하게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수확의 기회를 놓친 것이지요. 그러나 얼마나 다행입니까! 농사에서 추수는 일 년에 단 한 번으로 끝나지만, “영농”(靈農)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 숨 쉬는 매 순간이 수확의 때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 한 사람을 만나기를 기도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인식 때문입니다. 누구를 만나든, 어떤 상황에서 만나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기회를 그냥 날려버리지 않기 위함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간에” 그렇게 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해서 묻는 자에게 항상 대답할 준비를 하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언제, 어디서 수확의 기회를 만나더라도 오늘 제자들처럼 그냥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지요.
단순히 “교회 갑시다”는 말 한 마디조차도 주님의 수확에 참여하는 길임을 명심합시다. 목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리 스트로벨’(Lee Strobel)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얼마나 다른지 보여주는 극적인 예를 하나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오랜 세월 함께 일하던 옛 직장 동료를 찾아가서 다가오는 부활절 예배에 교회에 오도록 초청을 했습니다. 물론 그 친구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여 그는 낙담하여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지 수년 뒤에 한 중년 남자가 주일 아침 예배가 끝난 후 자기를 찾아와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당신이 내 인생에 미친 영적 영향력에 감사하고 싶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스트로벨’ 목사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수 년 전 ‘스트로벨’ 목사가 부활절 예배에 참석하자고 권유하던 그 친구 회사 사무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타일을 깔고 있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목사는 이 사람을 보지 못했지만 그 때 그는 목사의 말을 듣고 가슴이 고동치는 것을 느끼면서, 자기야말로 하나님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 부활절에 아내와 함께 교회에 갔고, 그날 이후부터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리 스트로벨’이 그의 책 <전도, 그 뜻밖의 모험>에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리 스트로벨∙마크 미텔버그, <전도, 그 뜻밖의 모험>. 포이에마: 서울. 2010.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추수의 동기. 추수는 단순히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선교의 진정한 동기는 주님의 “대 위임령”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총사령관이라면, 우리는 그분의 군대이자 병사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지키라고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을 받은 자들입니다. <신약>은 여러 곳에서 이 명령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만 강조하는 바가 조금씩 다를 뿐이라고 ‘보이스’ 목사님은 말합니다. 예컨대, <마태복음>의 경우 주님의 권위가 돋보이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마 28:18-19). <마가복음>에서는 “최후의 심판”에 방점(傍點)이 찍혀 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은 “대 위임령”을 “옛 예언의 성취”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47). 한편 <요한복음>은 선교를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 자신에게 부여하신 사역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마지막으로 <사도행전>은 선교를 세계복음화 전략의 일부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처럼 선교가 어떤 부분, 어떤 대목을 특별히 강조하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선교는 “대 위임령” 즉 명령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은 물론 지금 나에게도 해당되는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질문은 과연 내가 선교를 위해 가야하는가가 아니라 어디를 가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사령관께서 어디를 보내든 병사는 가야합니다. 우리는 선교사로 복음 전도자로 가야합니다.
그곳이 내 집일 수도, 직장일수도, 학교일 수도 있습니다. 용기가 없다거나, 아직 충분한 지식이 없다거나, 다른 더 급한 일이 있다는 등의 변명은 그야말로 변명이며 구차할 뿐입니다. 선교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께서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필요한 그 모든 것들을 채우실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순종할 의사만 있다면 말입니다. 매일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오늘 내가 누구를 만나든 당신께서 예비해 두신 그 한 사람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추수의 즐거움. 선교의 또 다른 동기는 없는 것입니까? “대 위임령”이 아무리 지고지선(至高至善)하고, 거역할 수 없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다 해도, 명령은 어디까지나 명령입니다. 그리고 명령받기를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큰 보상이 따른다고 해도 그것은 미래의 일일 뿐입니다. 솔직히 나는 주일 날 교회에 왜 나오는 것입니까? 무슨 보상 때문입니까? 두려움 때문입니까? 습관 때문입니까? 의무감이나 체면 때문입니까? 아니면 무슨 즐거움을 기대하기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즐겁기 때문입니다. 많은 여성들이 출산의 고통 때문에 다시는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다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되는 즐거움이지요. 즐거움만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은 즐거움에 더하여 막강한 권력도 함께 소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아이를 갖게 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자식이 없는 가정, 삭막하고 쓸쓸하며 조용합니다. 지상 최고의 복지국가로 불리는 북유럽의 세 나라(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에 가보면 첫 인상이 이와 같습니다. 매우 안정되고, 편안하고, 질서정연하지만 동력(動力)이 거의 다 소진된 엔진과 같다는 느낌입니다. 화려하고 장엄한 교회 건물들은 이제 관광객들이나 찾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렸습니다. 반면 우리의 수도 서울이나 베트남은 전혀 다릅니다. 시끄럽고, 소란스러우며, 무질서 하지만, 활기와 에너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나의 신앙생활은 어떠합니까? 따분하고 지루합니까? 예배나, 설교나, 성경공부가 그저 그렇고 그렇습니까? 수 없이 듣는 간증들이 나와는 별 상관이 없는 강 건너 불처럼 느껴집니까? 아니면 흥분과 모험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경험을 단 한 번이라도 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 감동을 예배나 성경공부 시간에 나누고 싶어 안달을 내 본적이 있습니까? ‘스트로벨’ 목사가 그의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던 것도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더 이상 따분한 신앙생화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바람도 물결도 일지 않는 잔잔한 물 위에 보트를 띄우고 정처 없이 표류하는 듯한 신앙생활 말이다. 개인 전도라는 높은 파도 위에서 즉흥적인 모험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가슴 벅찬 흥분과 성취감과 목적의식을 안겨준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의 메신저로서 불확실한 미래를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군대가 순전히 명령 체계에 의해서만 작동한다면 살아있는 유기체가 아니라 기계로 불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소위 “지상 선교 명령” 즉 “대 위임령”을 수행하는 것은 순전히 명령 때문만은 아닙니다. 또는 죽은 후 무슨 보상이나 상급을 기대하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순히 독일 병정이거나 아니면 잔혹한 ‘베니스’의 상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수확에 참여하는 것은 오늘 나의 삶이 달라지는 것을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흥분과 성취감과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이 더 이상 무기력과 무의미의 늪 속에서 허우적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말은 괜히 해보는 이상론이 아닙니다.
본인의 경우에도 누군가와 만나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와, 그렇지 못하고 늘 내 혼자만의 삶에 빠져 살아갈 때와는 전혀 다른 내 모습을 발견합니다. ‘스트로벨’ 목사도 그의 책에서 쓰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주님의 선교에 적극 참여하게 될 때 무엇이 달라지는지 본인의 체험을 통해서 이야기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성경공부를 대하는 기분과 태도가 달라집니다. 단순히 경건의 연습이나 지적 탐구의 일환이 아니라, 이웃에게 다가가는 데 필요한 지혜와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대하게 됩니다.
둘째, 기도생활에 초점이 생깁니다. 이점과 관련해서 지금 내 기도제목들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애매하고, 막연하며, 구체성이 없습니까? 거의 매일 드리는 중보 기도의 대상은 있습니까? 이번 주에 누구를 만나겠다는 목표는 정해져 있습니까?
셋째, 주일 예배가 기다려집니다. 그리고 찬양에 힘이 생깁니다.
넷째,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그동안 나는 바로 이점을 놓치고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우리 속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억누르고 죽이면 이처럼 정말 맥없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은 무엇보다도 사랑과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심는 자와 거두는 자. 추수하는 즐거움과 관련해서 예수님의 또 다른 잠언 즉 두 번째 잠언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37절). 우리가 전도를 쉽게 단념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동안 전도에 들인 노력에 비해 그 결과가 너무 미미하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또는 공들여 전도해 놓았더니 교회는 다른 곳에 갔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아예 내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두 번째 잠언은 이와 같은 우리의 실망을 향한 것입니다. 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반드시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거두는 자는 주님이시니 우리가 크게 염려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내가 전도해서, 내가 가르쳐,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보는 즐거움이 더할 수 없이 큽니다만, 내가 그 모든 즐거움을 혼자 독차지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지고,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즐거움을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이 나누기를 더 기뻐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내가 할 일은 그저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리그 그저 그 일을 하는 것 만으로써도, 나는 건강하고 역동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기회를 그냥 날려버리는 일이 없기를 축원드립니다.
10. 수가 성의 기적
오페라 “사마리아 여인”의 극적인 절정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여인과의 대화중에 예수님께서, “내가 (바로) 그라”(ejgw eijmi; I am)고 밝히고 있는 그 장면입니다(참고. 26절). <구약>에서 이에 상응하는 ‘히브리’ 어 표현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모세’와의 대화중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hy:h; I am)(출 4:14).
그러나 오페라의 절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치 바다에서 거대한 파도 뒤에 또 다른 작은 파도들이 연이어 밀려오듯, 화자는 절정의 여운(餘韻)을 계속 이어가고 싶은가 봅니다. 두 번째 절정은 환희(歡喜)에 찬 여인의 ‘아리아’ 즉 대중 고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보라 그가 그리스도가 아니냐”(29절하). 그리고 또 한 번의 절정은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수가’ 성 주민들이 관객 즉 온 세상을 향해서 외치고 있습니다: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시라”(42절). 이 장면에서 오페라의 회전 무대는 다시 한 바퀴 돌아 ‘수가’ 성 내를 비춰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목은 오페라의 ‘휘날레’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예수님의 자기 계시와 여인의 사랑의 고백에 이어, 극중 등장인물들 모두가 무대에 올라 거대한 환희의 합창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베토벤’의 “song of joy”를 부르고 있는 듯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기적이 일어난 것이지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그리고 이 기적이 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과연 무엇입니까?
증거와 말씀과 믿음. 우선 첫 번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직전의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사막의 모래 색깔만큼이나 따분하고, 무미건조하던 동네가 갑자기 생기를 띄며 술렁대기 시작합니다. 급히 달려온 탓에 숨을 헐떡이며 큰 소리로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여인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몰려든 사람들에게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모든 과거지사를 다 알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가 틀림없습니다!” 사실 여인은 예수님의 정체에 관하여 온전하게 다 이해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족집게 점쟁이” 정도로 인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인의 간증을 우습게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여인의 이해는 지극히 미미하고 자의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만, 놀랍게도 사람들을 예수님에게로 모여들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루살렘’이 아닌 ‘사마리아’ 땅에서, ‘유대’인들이 아닌 ‘사마리아’인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그리고 ‘가나’의 잔치에서처럼 초자연적인 표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일대 일 대화를 통해서입니다. 화자는 “가나의 잔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포도주의 기적을 통해서 (사람들이 아니라) 제자들이 믿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추구하던 표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 여인을 변하게 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 즉 말씀을 통해서 변했다는 말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그 말씀입니다. 확인을 위해서 본문을 다시 읽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39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39-41절)
이 짧은 세 절 속에 화자가 그의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강조하고자 하는 신학적 주제가 모두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여인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께 찾아와, 집으로 초청하여, 함께 지내면서,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그리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화자는 여기서 ‘수가’ 성 기적의 세 요소는 “증거”와 “믿음”과 “말씀” 이라고 강조하고 있으며, 이들 세 단어는 실은 <요한복음>의 신학적 주제어이기도 합니다. <로마서>도 동일하게 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러나 듣지 못한 자들이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지 않는다면 누가 들을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습니다.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수가’ 성 사람들은 이 여인이 있었기에 행복했습니다. 여인이 ‘아리아’를 불렀기에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 발은 무슨 일로 바쁩니까? 하루 종일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어떤 것들입니까? 시인 천 병상 씨가 노래한 것처럼 나는 진정 우연히 이 세상에 소풍 나온 자에 불과한 존재입니까? 그래서 한 세상 소풍 나온 학생처럼 그저 그렇게 살다 갈 요량입니까? 아니면 그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그 때 말입니다. 나의 때는 언제입니까? 내가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그 때 말입니다. 언제까지 기다릴 생각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같은 생각에 대해서,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7:6)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도하기 가장 적절한 때, 전도하기 가장 쉬운 대상이란 없다는 말씀이지요. 자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예수님조차도,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장소와 때에 여인을 찾았습니다. 이점 여인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할 신분과 자격을 전혀 갖추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네 사람들의 냉소를 의식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변화된 삶을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 한 충분한 시간을 가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노래를 부를 처지도, 그 때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기적이었습니다. 은혜의 물결이 ‘수가’ 성 온 동네로 퍼져갔으며, 실로 추수의 시기에 열매를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누구냐에 상관없이 모두 함께 즐거워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구주. 이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하나, 온 동네 사람들이 합창하는 환희의 찬송을 위해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시라”(42절하). 우리가 이 장면에서 듣게 되는 ‘휘날레’의 합창은 다름 아닌 <요한복음>의 신학적 주제 선언인 것입니다. “세상의 구주”라니요? 원문의 표현은 swth;r tou' kovsmou(the Savior of the World)로서, “세상”(cosmos)은 <요한복음>에서 무려 78회나 등장하고 있습니다(이 단어는 <신약> 전체적으로 185회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들어왔던 다른 이름들 외에 또 다른 이름이 더 필요한 것입니까? 당신은 그동안(1-4장) 등장했던 예수님의 이름을 몇 가지나 알고 있습니까?
이 새로운 이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설화 세계의 배경과 관련해서 추측해 볼 일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즉 그리스도는 그들만의 구주(救主)라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는 ‘메시아’는 세상의 구주가 아니라 ‘예루살렘’의 구주라야 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이 기다리던 구주 역시 ‘사마리아’의 구주라야 합니다(참고. 눅 9:52-53). ‘로마’ 세계는 ‘로마’의 구주를 원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의 구주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유대’인이 아닌 나와 우리에게 구주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의 구주가 갖는 의미가 ‘사마리아’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특히 우리에게도 각별하다 할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구원은 ‘유대’인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이를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롬 9:4)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분명 ‘이스라엘’의 역사였고, 우리는 약속 밖의 존재들이었습니다. <에베소서>의 선언입니다:
11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1-12)
이런 자들에게 왜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빛으로 찾아오셨을까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유대’인들만을 구원하기 위해서 종말의 날에 오신다 해도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처음부터 토기장이가 아무렇게나 쓰고 버릴 목적으로 만든 천한 토기(土器)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한 번 ‘휘날레’의 합창, “세상의 구주”를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라는 말은 그분이 대한민국의 구주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나의 구주가 되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세상의 구주”가 주는 의미는 또 있습니다. 또 다른 차원의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침례 ‘요한’의 선언에서 다시 한 번 출발해 봅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있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1:29). 우리는 여기서 희생제사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희생제사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입니다. 물론 공식적인 제도로서 확립되기는 “출애굽” 이후인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 기원은 <에덴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일을 희생제사의 원형(原型)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죽 옷은 짐승의 죽음을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희생제사는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이며, 그것이 필요하게 된 것은 인간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그분과 대화하기 위해서, 이러한 복잡한 절차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냥 벗은 상태로, 아무 때나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제 이전처럼 마음대로 하나님께 나아갔다가는 죽음밖에 없습니다. 누군가가 대신 죽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이 죽음을 “대속”(代贖)이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짐승의 옷을 입혀주기 위해서 양(?)을 대신 죽이신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몇 마리의 양이 필요했을까요? <창세기>로 돌아가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3:21). 적어도 두 마리의 양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말은 누구나 자신의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이 사실을 보게 됩니다. ‘가인’과 ‘아벨’은 각기 자기나름대로의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였으나, ‘가인’의 것을 거부했습니다(참고. 히 11:4).
이처럼 “일 인 일 양”(一人一羊)의 원칙은 아마도 수천 년을 두고 내려온 전통이자 제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출애굽”에 이르면 변화의 조짐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제정하신 “유월절”이 그것입니다. “유월절의 양”은 이제 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 가족을 대신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너희 각자가 어린 양을 잡을지니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 양을 취하라”(출 12:3). 이리하여 “양의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가정은 모든 식구가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대속”의 범위가 확대된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 이후 대속의 범위는 더욱 확대됩니다. 이번에는 한 가족에서 이스라엘 국가 전체로 나아갑니다. “대 속죄일”이 그것입니다. ‘유대’력에 때르면 7월 15일 그날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대 속죄일”에 양의 피를 지성소에 뿌림으로써, 모든 백성이 “대속”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불편은 남습니다. 매년 이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효력이 일 년 밖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더 나은 제사, 더 나은 제사장, 그리고 더 나은 “대속”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 7:22, 27)
여기서 “단번”에는 “단 한 번으로 영원히”(once for all)라는 의미입니다. 좋은 소식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침례 ‘요한’은 그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양”으로 선포하고 있으며, ‘수가’ 성의 대 합창은 그를 “세상의 구세주”라고 환호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는 특정 한 개인의 구주도 아니고, 한 가정의 구주도 아니며, 한 민족, 한 나라의 구주가 아닌 세상 모든 사람의 구주라는 선언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오늘날 나와 우리 교회가 외쳐 불러야 할 합창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우리 교회 안에 가두어두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핑계치 못하도록 계속 불러야 합니다.
14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나의 손과 발은 무슨 일로 바쁩니까? 기도합시다. 그리고 헌신하고 결단합시다.
교훈과 적용
1. 본문의 구조를 크게 둘로 나눈다면, 그 구조적 원리가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2. 두 단락의 공통적인 주제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3. 첫 번째 대화의 핵심적 주제들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들 주제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관됩니까?
4. 두 번째 대화의 핵심적 주제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들 주제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관됩니까?
5.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를 통해서 다음 주제들에 대해서 토의하고, 내가 결단하고 실천에 옮겨야 할 부분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헌신합시다: (1) 제자 훈련; (2) 세계 선교; (3) 간증과 고백.
6. ‘리 스트로벨’의 <전도, 그 뜻밖의 모험>을 읽고 독후감을 나눕시다.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