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44과
요셉과 감옥
김태정 목사창세기 39:21-40:23약 49분 분량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40:23)
희망과 좌절이 ‘요요’(yoyo)처럼 교차하는 우리네 인생에서, 이번 에피소드 역시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깊은 흥미와 관심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합니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은 대가로 부당하게 영어(囹圄)의 신세가 되긴 했지만, 빼어난 성품과 식견으로 감옥에서 다시 한 번 신분 상승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는 ‘요셉’은 과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증거 그 자체입니다. 특히 함께 수감된 왕의 최 측근 두 사람의 꿈을 해몽해 주게 되고, 이 중 한 사람은 그가 예언했던 대로 이전의 지위로 복직되었을 때, ‘요셉’은 더욱 출옥에 대한 희망으로 가슴 부풀어했습니다. 하지만 장미 빛 꿈도 잠간, 그는 철저하게 잊혀 진 존재가 되고 맙니다. 이전에 주인에 대한 그의 충성과 호의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동료 수인(囚人) “술 맡은 관원장”에게 베푼 호의는 후사(厚謝)가 되어 돌아온 것이 아니라,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다시 절망과 좌절과 배신이 그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화자의 진술은 과연 일관성이 있기라도 한 것입니까? 아니면 ‘요셉’이 잘 나갈 때에만 그저 해보는 수사(修辭)에 불과한 것입니까? 이번에는 하나님마저 ‘요셉’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던져보는 질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처럼 변덕스러운 분인가요? 이 본문에서 교훈으로 이끌어내어야 할 핵심어들은 많습니다: “희망과 좌절”; “헌신의 대가”; “의인의 고난”; “하나님의 의”; “언약.” 이들이 본문에 대한 독서 관점이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대부분의 학자들은 40장 전체를 <요셉 이야기>의 네 번째 에피소드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39:21에서 네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으며, 본 연구도 이에 따라 단락 구분을 한 바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의 세 번째와 네 번째 에피소드의 범위에 관해서는 39과에서 이미 다룬 바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앞 과에서 Wenham의 견해에 따라 두 에피소드의 범위를 결정한 바 있으므로, 네 번째 에피소드의 범위도 자연스럽게 결정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단락을 구분하면 흥미롭게도 네 번째와 네 번째 에피소드는 아래에서 보듯이 아름다운 시적 유사반복을 이루고 있습니다:
네 번째 에피소드를 보다 상세하게 단락 구분을 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네 번째 에피소드는 전체적으로 <요셉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내용도 세 번째 에피소드의 결론, 즉 “‘요셉’의 주인이 그를 감옥에 넣었다”(39:20)는 진술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두 에피소드를 연결시켜주고 있는 것은 내용뿐만이 아닙니다. 예컨대, 앞 이야기 중에서 39:2-6 사이에서 등장한 바 있는 일련의 관용적인 표현들이 39:21-40:4 부분에서 메아리처럼 반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에피소드에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표현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39:2/39:21)
(2) ‘요셉’이 주인(간사장)의 은혜를 입음(39:4/ 39:21)
(3) ‘요셉’이 형통하게 됨(39:2, 3/ 39:23)
(4) ‘요셉’이 주인(간사장)을 섬김(39:4/40:4)
(5) ‘요셉’에게 매사를 맡김(39:4/40:4)
(6) 맡기다/위탁하다(39:4/39:22)
(7) ‘요셉’이 무엇을 하든 간섭하지 아니함(39:6/39:23)
<요셉 이야기>에서 꿈도 중요한 소재가 되고 있습니다. 이곳 네 번째 에피소드에서 등장하고 있는 두 사람의 동료 수인(囚人)들이 꾼 두 번의 꿈(40:8-19)은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등장한 바 있는 ‘요셉’ 자신이 꾼 두 번의 꿈(37:5-10)을 연상시켜주고 있으며, 이는 다시 다음 에피소드에서 등장할 ‘바로’ 왕의 두 번의 꿈(41:1-32)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동료 수인들의 꿈을 해석해주는 ‘요셉’의 능력은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바로’ 왕의 신비한 꿈을 해석해 주는 능력을 예고해 주고 있다는 점이 더욱 특기할 만합니다. 특히 ‘요셉’이 함께 수감된 왕의 두 관원에서 꿈을 해몽해주면서 했던 말,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 하였나이다”(39:15)는 지나간 두 에피소드를 함축적으로 잘 요약해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자료와 편집. 전통적인 자료비평의 입장에 따르면, 39:21-23의 본문은 <야훼 자료>이며, 나머지 40장 전체는 대체적으로 <엘로힘 전승>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40장 내에서도 <야훼 자료>의 색채나 적어도 편집적인 손길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표현들이 그렇습니다: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40:1);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40:3). 이들은 내용 상 이미 <야훼 자료>로 인정받고 있는 39장의 에피소드를 전제로 하고 있거나 참고하고 있습니다(참고 39:21-23). 그리고 40:1에서 사용하고 있는 “범죄하다”는 용어는 <야훼 자료> 특유의 단어로서, 이어지는 3절이나 5절과 내용 상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39장과 40장은 여느 때처럼 <야훼 자료>와 <엘로힘 자료>가 보여주는 차이보다는 오히려 유사성을 더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물론 ‘궁켈’(Gunkel)은 39장과 40장이 서로 다른 자료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두 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요셉’에 관한 진술이 상충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39:20-23 (“야훼 자료”)에서는 ‘요셉’이 감옥에 있다고 소개하고 있는 것에 반해, 40:47 (“엘로힘 자료”)에서는 친위대장의 집에 있습니다. 그리고 39:22에 따르면 ‘요셉’이 옥중 죄수들을 감독하고 제반 사무를 처리하는 자로 묘사하고 있으나, 40:4에 의하면 수감된 두 관원들을 돌보는 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야훼 자료>에 속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요셉’이 노예로 팔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37:27), <엘로힘 자료>에서는 그가 납치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40:15).
그러나 이런 차이들은 지극히 미미한 것일 뿐만 아니라, 상이한 자료로 구분할 근거로써 충분치 못합니다. 더 나아가 이런 차이들은 이야기 구성상의 기법으로 달리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도 주목한 바처럼, 세 번째와 네 번째 에피소드가 시적 유사반복을 이루고 있으며, 39-41장 사이에서 등장하고 있는 세 개의 에피소드가 마치 세 폭의 병풍처럼 연결된 하나의 파노라마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 각각이 상이한 자료라기보다는 하나의 이야기로 기능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동일한 <야훼 자료>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Wenham).
신학과 신앙
1. 요셉의 형통(39:21-23)
우리는 위에서 39-41장의 구성상의 특징이 마치 세 폭의 병풍처럼 연결된 하나의 파노라마 식 이야기라고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런 인식에 따르면 본문은 병풍의 두 번째 화폭으로서,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진술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언급입니다. 두 에피소드의 시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39:21)
“야훼께서 인자를 더하셨다”는 표현은 <구약>에서 이곳에서만 등장하는 것으로서, 그분의 신실하심을 드러내는 표현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돌보고,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도 바로 그분의 신실하심에 기인한 것입니다(참고. 창 24:12, 14, 27). 이렇게 본다면 감옥에서 ‘요셉’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십사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라는 암시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다시 한 번 ‘요셉’의 인격이나 자질이 이곳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39:22)
지난번에는 ‘보디발’이 그에게 가정의 모든 업무를 다 관장하게 했던 것처럼(39:4), 이번에는 간수장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간수장 역시 ‘보디발’처럼(39:6), ‘요셉’을 신뢰하였고, 그가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모든 업무를 다 그에게 맡겼습니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39:23)
2. 두 관원장의 수감(40:1-4)
본문의 두 번째 단락은 두 관원장의 꿈과 ‘요셉’의 해몽에 관한 이야기의 배경을 이루는 곳입니다. 첫 번째 단락에서 ‘요셉’의 상대역이 ‘보디발’의 아내였다면, 이곳에서는 이들 두 사람이 될 것입니다.
1그 후에 애굽 왕의 굴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2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3그들은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4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40:1-4)
이야기는 “그 후에”라는 막연한 시간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합니다. 아마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의미합니다(참고. 15:1; 22:1; 39:7; 48:1). ‘요셉’이 감옥에 갇힌 이후 이들 새로운 죄수들이 수감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요셉’이 수감 생활을 포함해서 노예로 살았던 기간이 도합 13년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37:2; 41:46).
“술 맡은 자”의 업무는, 그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11절), 단순히 술병의 마개를 따서 먼저 시음(試飮)을 해보는 것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자리는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수시로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는 등 정치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지위로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직책도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느 1:11-2:8). “떡 굽는 자”에 대한 ‘이집트’ 단어도 있습니다만, 아마 왕궁의 식사 시종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들 두 사람이 무슨 죄를 저질러서 감옥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본문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39장에서 ‘보디발’의 아내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 문제가 화자의 관심사가 될 수 없다는 암시일 것입니다. 화자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이들 조연(助演)의 역할은 ‘요셉’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요셉’이 “그가 섬기는 주인(‘보디발’이든 ‘야훼’이든)에게 범죄 하지 않기 위해”(39:9) 억울하게 수감된 것이라면, 이들 두 관원은 “그들이 섬기는 주인(‘바로’)에 대하여 범죄를 저질러”(40:1) 수감된 것입니다. 주인에 대하여 불충하기는 미세스 ‘보디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들 세 사람의 공통점은 또 있습니다. 화자는 이들 모두를 실명(實名)으로 거론하지 않고 지위나 직책으로만 언급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입니다.
왕은 진노하여 두 범죄자를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있는 옥에 보냅니다. 화자는 이 감옥이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라고 앞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39:20). 감옥이라고 해봤자 친위대장의 집에 딸린 공간이니 오늘날의 가택연금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무튼 감옥은 감옥입니다. ‘요셉’이 이곳을 지하 감방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15절), 그 환경이 아주 좋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친위대장은 ‘요셉’으로 하여금 이 두 사람을 “돌보도록”(dq'P, 파카드) 지시를 내립니다. 이 동사는 이전에 ‘요셉’이 그의 주인 ‘보디발’을 섬긴다는 의미로 사용한 바 있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요셉’이 수감된 지 꽤나 시간이 흘렀을 것 같은데 여전히 요셉의 지위는 처음과 다름없어 보입니다. 그에 대한 간수장의 신뢰가 변치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물론 ‘보디발’이 여전히 친위대장으로 있다면 그의 천거도 한 몫 했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이전에 ‘보디발’을 섬기던 그 경험으로 이제는 새로 수감된 고위 관원을 돌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수장의 동기가 무엇이었든 ‘요셉’은 다시 한 번 ‘이집트’의 고급 관리와 접촉하게 됩니다. 이 새로운 관계가 훗날 그의 장래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지 그 자신 외는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3. 두 가지 꿈(5-19)
세 번째 단락은 본문의 중심 장면에 해당됩니다. <요셉 이야기>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꿈과 해몽에 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단락은 먼저 꿈에 관한 두 관원과 ‘요셉’의 대화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5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6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7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8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5-8절)
두 사람이 걱정하는 바는 단순히 그들이 꾼 꿈 때문만은 아닙니다. 둘이 동시에 같은 날 밤에 다른 꿈을 꾸었는데, 그것도 수감 중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두렵기만 한 것입니다. 이들이 ‘요셉’과 함께 수감된 자들이라는 화자의 불필요한 설명이 이들이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지를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영어(囹圄)의 신세로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들이 꾼 기이한 꿈을 해몽해 줄 사람도 없는 현실은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요셉’ 아침에 그들을 찾아옵니다. 시중들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이내 이들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묻습니다. 무슨 근심이 있는가하고 말입니다. 이와 똑 같은 질문을 ‘느헤미야’도 받은 바 있습니다(느 2:2). 물론 이 경우는 근심하는 자와 질문하는 자의 지위가 역전된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즉 왕이 “술 맡은 관원” ‘느헤미야’에게 근심의 이유를 물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장면은 아주 역설적이며, 대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섬기는 노예의 태평스러움과 섬김을 받는 두 상급자의 불안과 전전긍긍이 그것입니다. 노예가 상담자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상급자가 내담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요셉’의 따뜻한 마음과 염려가 이들의 가슴을 열고 있습니다. 만일 이들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염려로 계속 마음을 닫고 있었다면 자유의 몸이 되어 이전의 지위로 회복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잠에 관한 고대 ‘이집트’인들의 믿음은 잠을 통해서 망자(亡者)나 신(神)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꿈은 신들이 주는 일종의 선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에 대한 해몽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꿈을 꾸는 자는 자신의 꿈에 대해서 길조(吉兆)든 흉조(凶兆)든 나름대로 상상은 할 수 있습니다만, 정확한 해석은 전문가에게 의존했습니다. 이들에게 꿈의 해석은 전문 지식인의 소관으로서 아주 복잡한 과학기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관원이 염려했던 것도 감옥에서는 이들 전문인을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좌불안석이었고 절망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있어 꿈은 지식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신적 영감”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불안해하는 두 관원에게 하는 말이 바로 그의 이러한 태도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까?” 그는 나중에 ‘바로’ 왕 앞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해줍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41:16). ‘요셉’의 이러한 태도는 <구약>에서 보여주고 있는 관점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서, 어떠한 형태의 신비적 주술(呪術) 행위를 거부하고 오직 선지자의 예언만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인정하는 입장을 말합니다(신 18:10-22).
“해석은 하나님에게 있다”는 ‘요셉’의 대답은 이런 점에서 고대 근동의 꿈에 관한 일반적인 믿음과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는 화자 자신이 즐겨 사용하는 진술 중의 하나로서, 체계적으로 잘 정리된 일정 형태의 교리나 신조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낱 노예에 불과한 자의 입을 통해서 듣게 되는 이러한 진술은 두 관원들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도 없었고, 의심조차 해 보지도 않았던 꿈에 관한 충격적이며 지극히도 대조적인 진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셉’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해몽은 인간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용하실 수 있는 은사라는 점입니다. 미래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며, 그에 관한 계시를 받은 자만이 그 미래를 해석할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화자는 두 관원의 꿈 중에서 “술 맡은 자”의 꿈에 대해서 더 상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9술 맡은 관원장이 그의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10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11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12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13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당신이 그 전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드리게 되리이다(9-13절)
그리고 두 꿈이 갖는 우화적 성격을 비교해 보아도 “술 맡은 자”의 꿈이 덜 우화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다만 “(포도나무의) 세 가지” 만이 우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즉 “세 가지”는 “삼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포도를 따고 그 즙을 바로의 잔에 따르는” 행위도 이 사람의 일상적인 업무가 아니라면 우화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꿈에서 등장하고 있는 지배적인 수사는 숫자 “3”의 모티브입니다: “세 (나무) 가지”; “세 단계의 포도 성장 및 수확 과정 즉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는 과정”; “술 맡은 관원의 세 번의 행동, 즉 포도를 따고, 즙을 짜서, 바로에게 바치는 행위.” 포도의 성장과 생산에 관한 과정을 기술함에 있어서나, 술 맡은 관원의 연속적인 일련의 행위를 기술함에 있어서나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이 세 개의 동사로만 간략하게 처리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요셉’의 예언이 조만간 성취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요셉’의 설명은 간단했고 신속했습니다. 삼일 후에 술 맡은 관원은 원래의 지위로 회복될 것이었습니다(12-13절상). 여기서 “머리를 들어 올린다”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머리수를 헤아리다” 즉 인구조사를 하다는 의미입니다(민 1:2; 4:2). 두 번째는 “자신 있게 행동하다”는 의미입니다(삿 8:28; 시 24:9). 하지만 이곳과 <열왕기하>(25:27)에서 의미하는 바는 사뭇 다른 것이, “친절하게 대해주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19절에서는 문자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19절).
해몽을 통해서 동료 죄수들에게 호의를 베푼 ‘요셉’은 이제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이들에게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14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15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14-15절)
그가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해석해 준 꿈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셉’이 사용하고 있는 어휘들은 모두 하나님의 행위와 관련해서 <창세기>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기억하다”(8:1; 9:15; 19:29; 30:22; 출 2:24); “은혜를 베풀다”(24:12, 14; 출 20:6); “건져내다”(15:7; 출 20:2). 결국 ‘요셉’의 이 간청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예고해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납치되어왔다”고 말하고 있는데(문자적으로는 “도둑을 맞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는 그가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에 대해서 품고 있는 감정들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형들은 그의 자유를 “훔쳤으며”, 그를 노예로 팔아넘겼는데, 이는 출애굽>(21:16)에 따르면 사형에 이르는 범죄 행위임에는 분명합니다.
‘요셉’의 희망 찬 꿈 해석에 고무를 받은 사람은 정작 당사자인 “술 맡은 자”가 아니라 “빵 굽는 자”입니다. “술 맡은 자”의 반응에 대해서는 화자는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빵 굽는 자”는 거침없이 자신의 꿈에 대해서도 비슷한 해석을 기대하며 ‘요셉’에게 자신의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6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좋은 것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17맨 윗 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16-17절)
그의 꿈 내용으로 볼 때 이전에 그가 누리던 사회적 지위가 어떠했는지 상상할 수 있게 합니다. 다만 “흰 떡”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이곳에서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요셉’은 이 사람의 꿈에 대해서도 해석을 해주고 있습니다:
18요셉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19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18-19절)
다만 이번에는 그의 태도가 다소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판이한 꿈의 의미 때문일 것입니다. 과연 “빵 굽는 자”가 자신의 꿈 해석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일까? 길조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흉조로 받아들일 것인가? 자신의 죽을 운명도 모른 채 자신의 미래도 “술 맡은 자”의 그것처럼 희망적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셉’이 설명해주는 꿈 해석은 그 자체만을 볼 때, 두 가지 생각을 다 가능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즉 그의 꿈 해석은 비관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술 맡은 자”의 꿈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의 “세 가지”나 “세 광주리”나 모두 사흘을 의미하며, 두 경우 모두 왕이 “머리를 들어줄 것”이라는 해석은 두 사람의 운명이 같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꿈은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평행선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궤도를 향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요셉’은 그가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를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행위는 형벌 가운데서도 가장 참혹한 극형에 속하는 것입니다(신 21:22-23; 수 10:26). 이는 공개적인 처형 방식일 뿐만 아니라, 처형 이후에도 나무에 한동안 그대로 매달아 두어 사람들이 시체를 볼 수 있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후에도 영혼의 안식이 없을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빵 굽는 자”의 운명이 이렇게 될 것이었습니다. “새들이 그의 고기를 뜯어 먹을 것”이라는 언급은 무시무시하면서도 동시에 이 사람의 운명에 관한 ‘요셉’ 자신의 확신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4. 꿈의 성취(20-22절)
‘요셉’의 꿈 해석은 과연 정확했습니다. 왕의 생일을 맞이하여 실시한 대사면으로 두 사람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라지고 있습니다:
20제삼일은 바로의 생일이라 바로가 그의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그의 신하들 중에 머리를 들게 하니라. 21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22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20-22절)
화자가 그동안 수차례 언급했던 바대로, 과연 “야훼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39:20). 이 단락에서 화자가 사용하고 있는 어휘는 ‘요셉’ 자신의 진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13, 19절).
5. 잊혀 짐(23절)
그러나 이 시점에 어느 누구도 ‘요셉’의 신통력에 대해서 ‘바로’ 왕에게 진언(眞言)하는 자는 없어 보입니다. 전직으로 회복된 “술 맡은 자”도 ‘요셉’을 완전히 잊은 것처럼 보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23절)
화자는 이점을 시적 동의 반복을 통해서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지 못하고”; “잊었더라.” ‘요셉’은 철저하게 잊혀 진 존재가 되었으며, 다시 처음의 절망적인 상황 즉 ‘보디발’의 진노로 처음으로 옥에 갇히던 그 상황으로 되돌아가 있게 된 것입니다(39:20).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이 년을 속절없이 기다려야만 했습니다(41:1). 아무리 보아도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조차도 그를 잊은 듯합니다.
교훈과 적용
1. 다시 乘勝長驅
야훼께서 함께 하시므로. 대부분의 대중가요는 후렴 구절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보나 가사가 반복되는 곳을 말합니다. 이는 오페라의 ‘아리아’(aria)라 해서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오페라 <요셉 이야기>에서도 각 에피소드가 이와 같은 후렴 구절과 유사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셉이야기> 중에서 39-41장의 구조가 병풍 구조식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가나안’의 구덩이에서 구출되어 ‘이집트’의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와 그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총무집사로 승승장구하는 장면까지를 오페라의 제 1막이라 한다면, 제 2막은 두 번째 구덩이 즉 ‘이집트’의 감옥에서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셈입니다. 전체 <요셉 이야기> 중에서 39-41장은 세 개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데, 이들이 연결되는 방식은 마치 세 폭의 병풍으로 이루어진 파노라마라고 소개한 바 있습니다만, 각 에피소드는 그 자체적으로 일종의 U자형의 구성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U자형의 바닥에서 오페라 제 2막은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다시 상승곡선을 그릴 것이라는 점은 화자의 다음과 같은 해설이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39:21상)
즉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언급입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요셉’을 어떻게 대하든, 어떤 자리에 두든 하나님께서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의도대로 되돌려놓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브루그만’의 표현을 빌어보자면,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함께, 인간을 통해서, 그리고 인간의 의사에 반해서” 자신의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 ‘엘 샤다이’이십니다.
간사장의 은혜를 입어. 아니나 다를까. ‘요셉’은 이전에 ‘보디발’의 집에 팔려갔을 때 ‘보디발’의 호의를 입은 것처럼, 이곳 감옥에서는 간수장의 은혜로 다시 그 신분이 달라질 것입니다. 간수장 다음가는 책임과 권한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동료 죄수들을 돌보는 일에서부터 감옥 내의 제반 행정 업무까지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이를 두고 성공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신분 상승을 해 본들 감옥은 감옥일 뿐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의 신분은 죄수일 테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언제 자유인으로 출소를 하게 될지 알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성공에 앞서 성품을. 그의 성공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마다 성공에 이르는 다양한 요인들이 있지만, ‘요셉’의 성공 이야기에서는 젊은 시절의 감옥 생활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감옥이 그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일까?
미국 ‘뉴욕’(New York) 주에 있는 ‘스토니브룩’(Stony Brook) 고등학교의 교훈(校訓)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고 합니다: “Character before Career.” J. M. Boice. <Genesis>, vol 3. p 941.
그 의미를 풀이하자면, “성공을 이루기 전에 성품을 기르자” 정도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격이 성공을 이루어내는 것이지 성공이 인격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이 교훈에 가장 근접하는 동양의 가르침은 <사서오경>(四書五經) 중의 대학에 나오는 그 유명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금언일 것입니다. 이 교훈을 누구보다 먼저 적용했어야 할 한 사람을 찾아본다면, ‘패리스 힐튼’(Paris W. Hilton)양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가수, 영화배우, 패션모델 등 아주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이미 십대에 미국의 호텔 재벌 ‘힐튼’가의 상속여로서 온 세상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인생을 시작했습니다만, 어릴 적부터 마약 복용, 문란한 성생활 등 갖가지 기행과 추문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더니 결국 상속 녀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성공이 성품보다 먼저 찾아온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로서 “치국평천하”의 성공을 누리기 전에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었다면 “수신제가”를 통한 인격의 도야(陶冶)가 아니었을까? 그런 것 같습니다. 그는 ‘패리스 힐튼’처럼 십대에 산의 정상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십대에 산 아래에서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이 그의 첫 수련장이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새로운 출발을 하면서, 성숙을 위한 첫 번째 시험은 이전에 그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부당하고 억울한 현재의 내 모습에 대하여 불평과 원망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이 지경으로 몰아온 그 형들에 대하여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복수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 시험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닥쳐온 두 번째 큰 시험이 있습니다. 타협에 대한 유혹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미세스’ ‘보디발’로부터 오는 은밀하고도, 끈질긴 유혹이었습니다. 이 유혹은 지극히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적당히 눈감아주면 성공에 이르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아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타협하지 않았으며, 유혹의 블랙홀로부터 탈출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보상이나 훈장이 아니라, 감옥입니다. 이전보다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우리 사회의 통념 상 감옥은 인격의 성숙을 위한 훈련장 치고는 그렇게 권할 만 한 곳이 못됩니다. 감옥은 범죄자를 개과선천으로 이끌어주기보다는 죄질이 더 나쁜 범죄자를 양산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보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셉’의 경우 처음부터 범죄자로 투옥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는 이곳에서 ‘욥’의 아내처럼 원망과 분노로 하나님을 욕하며 그를 떠날 수도 있거나, 또는 침례 ‘요한’처럼 실의와 의심에 빠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대도 감옥은 그를 약하게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가 감옥 생활을 결코 즐거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만, 이곳에서 그는 더욱 단단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숙해 간 것처럼 보입니다.
함께 투옥된 동료 죄수(왕의 고위 신하들)들의 꿈을 해몽해 주면서 그들과 나누는 대화가 이점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 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40:8).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인격적 성숙을 보여주는 장면은 또 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자기 연민에 빠져 자나 깨나 자기 생각만 하고 지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돌보고 있습니다: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요셉이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40:6-7). 바로 이것이 성숙한 자와 미성숙한 자의 차이일 것입니다. 항상 받으려는 자와, 베풀 준비가 되어있는 자의 차이 말입니다. 이는 신앙인의 경우라 해서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컨대, 중보의 기도만 하더라도 항상 내 가족, 내 친지가 늘 우선순위에 올라와 있다면 나는 여전히 어린 아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먼저”일 것입니다. 항상 나와 내 가족을 돌보는 일에 온 시간과 재물과 은사를 사용할 것이 아니라, 적절히 균형 감각을 유지하라는 것이지요. 비록 여건이 여의치 않다 해도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감옥은 ‘요셉’에게 전혀 무익한 도장이었다기보다는 반대로 인격적 성숙을 향해서 승승장구해 갔던 곳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감옥에서 오히려 형통하게 된 자는 ‘요셉’ 외에도 ‘예레미야’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유다’ 왕국의 마지막 시기에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예루살렘’의 운명에 관해서 시종일관 같은 메시지를 선포하고 다녔습니다. 메시지의 핵심은 ‘바벨론’이 곧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설교를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 ‘바벨론’의 공격이 잠시 소강상태에 놓인 적이 있었습니다. ‘이집트’의 ‘바로’ 왕이 ‘유다’를 돕기 위해 원군을 보내오자 ‘바벨론’이 두려워 일시 물러났기 때문입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으며,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기호에 맞게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소강상태를 맞아 ‘예레미야’는 사역을 일시 중단하고 자신의 분깃을 받으려고 ‘베냐민’ 땅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렘 37:12).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바벨론’에 항복하고 망명을 신청하러 가는 것으로 단정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뒤집어씌운 혐의는 일종의 간첩혐의 내지는 국가반역죄일 것입니다. 항상 ‘예루살렘’에 대하여 부정적인 메시지만을 선포하던 그를 간첩혐의로 체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 왕은 옥에 갇힌 그를 왕궁으로 몰래 불러내어 나라의 운명에 관하여 물어봅니다. 과연 ‘바벨론’이 공격을 멈추고 돌아갈 것인지, 그리고 ‘예루살렘’에 과연 평화가 올 것인지에 관해서입니다.
16예레미야가 뚜껑 씌운 웅덩이에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 17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이끌어내고 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어 이르되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렘 37:16-17상)
이 장면은 마치 옥에 갇힌 ‘바로’ 왕의 두 관원이 ‘요셉’에게 근심하며 그들이 꾼 꿈에 대해서 물어보는 장면과 교차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왕이 국가의 장래에 대해서 ‘예레미야’의 조언을 구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예레미야’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마 그는 자신과 이런 대화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레미야, 네 사역은 결국 실패로 끝난 거야. 누구 한 사람 네 설교에 귀 기울여 들어준 사람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다시 그 동일한 설교를 왕에게 들려줄 텐가? 그만두게나. 정 하고 싶다면 적당히 좋은 말로 상대 기분이나 맞추어주게나.” 그러나 정작 그가 들려준 대답은 이전과 똑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치 왕을 실망시키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이 말입니다:
예레미야가 대답하되 있나이다 또 이르되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렘 37:16-17)
감옥은 이 선지자를 약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를 더욱 강인하게 만들었으며, 그 성이 멸망하는 날까지 즉 그의 예언이 성취되는 날까지 한 결 같이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삼손’은 어떻습니까? 그도 감옥에서 비로소 육체적 능력이 회복된 자입니다. 사랑하는 여인 ‘들리라’의 배신으로 힘의 원천이었던 머리털을 빼앗겨 버린 후 감옥에서 절치부심(切齒腐心)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중에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힘을 얻어 통쾌한 복수를 펼친 일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그의 마지막 행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삿 16:30). 감옥은 이처럼 ‘삼손’을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해주었습니다.
감옥에서 연단을 받아 형통을 경험한 성도는 <구약>에만 국한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컨대,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사도 ‘요한’은 어떻습니까? 그가 왜 그곳에 감금되었는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기” 때문입니다(계 1:9).
그런데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일곱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으며, 예수님의 영광을 대면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계 1:13-16). 이는 마치 ‘모세’가 하나님의 뒷모습을 본 것이나,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에 버금가는 체험입니다. ‘밧모’섬의 감옥은 사도를 약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담대하고 강인하게 만들어놓았습니다.
“감옥의 연단”과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감옥에 있는 그를 더욱 힘 빠지게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이 사도가 감옥에 있는 동안 복음을 더욱 열심히 증거하고 다녔다는 사실입니다. 이자들의 동기는 복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이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갈수록 ‘로마’ 당국의 박해가 더욱 심해질 것이며, ‘바울’은 이 일로 인하여 더욱 큰 고초를 겪게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참으로 사악한 동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만 사도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다음과 같은 말로 ‘빌리보’ 교인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15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빌 1:15-17)
‘예레미야’나 사도 ‘요한’이나 사도 ‘바울’은 ‘요셉’처럼 감옥에서 나와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기회는커녕 모두 순교로 인생을 마감했지만, 이들 모두 ‘요셉’의 경우에서처럼 감옥이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이끄는 가정교사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나는 어떤 성공을 원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일로 마음고생하며 시간허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2. 꿈과 해몽
우연의 필연. 영화 <바벨>은 지구 한 쪽 편에서 우연히 일어난 지극히 미미한 한 사건이나 개인의 의사 결정이 그 반대편에서 전혀 상관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야기 전개 방식이 시종일관 우연의 연속으로만 이루어져 있어 영화의 완성도는 수준 이하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연”은 이야기꾼들만 즐겨 사용하는 도구는 아닙니다. 과학의 영역에서는 “우연의 필연”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상황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돌연변이에 이은 자연선택”으로 진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돌연변이는 그냥 우연하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하나의 필연이라는 것이지요. 한 때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했던 대중가요 “만남”에서도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로 시작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문학에서나 과학에서나 또는 우리네 인생에서 우연이 자주 등장하면 흥미나 사실성은 반감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연”에 관한 <성경>의 화자들의 입장은 어떠할까요? 사용하는 용어가 다를 뿐, 크게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즉 <성경>의 화자들에게도 우연이란 있을 수 없으며, 있다면 “하나님의 필연”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연이란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룻 이야기>에서 화자는 ‘룻’과 ‘보아스’의 그 운명의 만남을 “우연히” 이루어진 일로 소개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하는 신비한 방식에 대한 화자의 표현일 뿐, 그 일이 그야말로 하나님의 계획과는 전혀 상관없이 일어난 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마 10:29).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때로는 상황이나 환경을 변화시키거나 또는 활용하시기도 합니다. 예컨대,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배에 승선했을 때, 바다에 광풍을 일으키면서까지 ‘요나’가 종국에는 순종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요나’가 ‘다시스’에서 돌이켜 ‘니느웨’로 가게 될 때까지 그에게 일어난 일연의 사건들도 “우연의 사슬”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연 속에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요셉’의 경우도 결코 예외는 아닙니다. 다만 그는 ‘요나’와는 달리 충실하게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나이 삼십에 이를 때까지 그에게 일어난 그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가셨습니다.
필연의 고리들. 이 시점에서 그동안 ‘요셉’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다시 한 번 회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연쇄 고리의 출발점은 “아버지의 편애”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편애”는 “형제들의 시기와 증오”를 낳게 됩니다(37:3-4). 또 다른 고리가 있는바, ‘요셉’이 꾼 “두 번의 꿈 이야기”입니다. 그가 형들에게 들려준 이 꿈 이야기는 더 큰 증오와 시기를 낳게 하였습니다(37:8). 미움은 살의(殺意)를 낳고, 살의는 다시 구체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땅속 동굴에 내버려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그냥 보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잔인하고 무정한 ‘유다’의 마음까지 간섭하셔서 그로 하여금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미디안’ 상인들에게 동생을 팔아넘기게 함으로써, ‘요셉’의 생명을 구출해내십니다(37:26-27). 즉 이번에 ‘요셉’을 살려낸 것은 “‘유다’의 탐욕”과 ‘미디안’ 상인들의 “우연한 출현”이었습니다. 모두들 자신의 목적과 계획을 위해서 자신의 역할을 단순히 수행하는 중에 만들어진 “필연의 고리”들입니다. 이런 상황을 <잠언>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요셉’도 바로 이 계획과 관련해서 훗날 그의 형들에게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하나님의 “필연의 고리”는 ‘이집트’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왔고, 그의 호의를 입어 그 집안의 총무 집사의 자리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나 정상(頂上)의 자리도 잠간, ‘미세스’ ‘보디발’의 모함으로 다시 한 번 지하 땅굴 속으로 내던져 집니다. 이번에는 ‘이집트’의 감옥입니다. 이 마지막 상황은 아무리 긍정적으로 해석하려 해도,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의 필연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 해도, 불필요하고 악하게만 보일 뿐입니다. 선이 악으로 되갚음을 받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요셉’과 함께 하시고 계시며, 이 상황에서도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사람과 하나님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부지런히 섭리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음 장면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1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2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3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4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40:1-4)
왜 하필 이 때 두 관원장이 왕의 진노를 사서 투옥이 된 것일까? 왜 간수장은 다른 사람도 아닌 ‘요셉’으로 하여금 이들을 시중들게 했을까? 우리는 이들 질문에 일일이 답할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 모든 일들이, 이 모든 사람들이 결국에는 <요셉 이야기>의 주변적인 무대장치며, 조연이라는 사실 외에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은 조연이 왕이든 죄인이든 가리지 않고 오직 주인공 ‘요셉’을 위하여 무대 위에 등장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두 관원장의 꿈은 어떻습니까(참고. 40:9-11, 16-17)? 이 또한 또 다른 필연의 고리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꿈의 내용이나 의미는 차치(且置)하고서라도 화자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이 우연치고는 아주 지나치다는 생각을 접을 수 없습니다. <성경>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너무나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또 꿈 이야기인가! 꿈 이야기가 아니면 <요셉 이야기>를 이끌어 갈 수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꿈의 내용은 또 어떻습니까? ‘요셉’은 고사하고, 정작 꿈꾼 당사자 자신들의 미래 운명과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어 보입니다. 두 꿈에서 공히 등장하고 있는 “3”이라는 숫자를 포함해서, 포도송이나, 흰 떡, 광주리 등이 도대체 두 사람의 운명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두 사람이 앞으로 정반대의 운명에 놓이게 될 것임을 무슨 재주로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귀신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요셉’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습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40:8하). 이 답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꿈의 해석이 하나님에게 달렸다는 말은, 꿈의 실질적인 내용과 상관없이 그분께서 그 결과를 그런 식으로 이끌어 가겠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달리 말하자면, 두 관원장의 경우 그들의 운명은 자신들이 꾼 꿈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바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의 해몽은 “꿈보다 해몽이 더 좋았던” 대표적인 경우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꿈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예컨대, 내가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하여 씨름하며 고민하는 중에 어느 날 꿈을 꾸었다면, 십중팔구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하였으니, 사소한 꿈 하나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꿈의 내용이 두 관원장의 경우처럼 도무지 해석이 불가능할 때 물어볼 상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행여나 ‘요셉’과 같은 소위 영성(?)이 충만한 성도라도 주변에 있다면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불행히도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못합니다. 이 꿈을 가지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민은 오히려 더 깊어만 갑니다. 두 관원 장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거듭 강조하거니와 우리는 꿈의 해석을 놓고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현대 심리학자들의 주장대로 꿈은 단지 무의식 상태의 욕구나 좌절을 반영할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오늘날 꿈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수단이나 통로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꿈은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에 하나님의 현현(顯現)의 한 수단이긴 했습니다만, 그나마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로서 꿈이 등장하고 있는 곳은 <구약>의 경우 <요셉 이야기>와 <다니엘>에서 일곱 차례, 그리고 <신약>의 경우 <마태복음>에서 여섯 차례가 전부일 정도로 그 비중이 지극히 미미하다 하겠습니다. 그나마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알리시는 방식은 영원히 포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오늘날 참되고 믿을 만 한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Sola Scriptura)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달렸다”는 ‘요셉’의 말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바울’의 선언이나 실은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 즉 “우연의 필연”이 어떻게 우리 삶에 작동하는지 궁금하기는 하지만,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굳이 알아야 할 그분의 뜻이 있다면 <성경>을 통해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항상 현재 진행형으로 나의 순종을 요구하는 그분의 말씀이 있을 뿐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계시하신대로, “I am who I am” 즉 과거나 미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지금 오늘의 하나님으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MC인 송해 선생이 한 젊은 MC로부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오히려, “금중에서 가장 중요한 금이 무엇인가?”라고 되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인 즉은 황금도, 천금도, 순금도, 아닌 “지금”입니다. 지금 현재 그가 하고 있는 일에 열중하여 즐겁게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충고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살후 5:16). 지금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를 가두고 있는 감옥은 무엇입니까? 힘든 상황이 나를 가로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죽도록 하기 싫은 일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인생에서 내가 보기에 아무 의미도, 유익도 없어 보이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의미 없는 사람들, 의미 없는 만남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 인생의 조연으로 등장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은 없습니까? 그 각각이 “하나님의 필연”을 이루는 연결 고리가 될 수도 있음을 자각해 보셨습니까? 그것도 모르고 염려와, 불만과, 원망으로 매일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사도 ‘바울’은 무슨 말을 했습니까? 꿈이 아니라 적절한 말씀들을 찾아 적어 봅시다.
3. 의(義)의 대가
잊혀짐. 매일 평균 33명이 이유도 모르는 질병으로 죽어가는 나라가 있습니다. 그 나라는 대한민국이며, 그 질병은 자살입니다. 우리나라는 자살률에 있어 OECD 국가 중에서 10년째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4년 노무현 정부 당시 “자살 예방 5개년 종합대책”까지 세웠는데, 정작 몇 년이 지난 후 그 정부의 최고 수장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로 생애를 마감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범민련 남측 의장을 맡기도 했던 강희남이라는 목사가 여든 아홉의 나이로 자살을 했습니다. 그는 유서에 이 한 목숨을 민족의 제단에 바친다는 유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목사라는 자가 한 목숨을 주님을 위해 바친다고 해도 될까 말까 한 판에 민족의 제단에 바친다고 하면서 죽었으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왜 자살을 할까? 인기 절정에 있는 연예인들이 자살을 택하면서 남긴 유서를 보면,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울증의 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연예인의 경우 인기가 떨어지고 대중들의 기억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강박감이 그 주된 원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절망의 끝에 자살을 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살은 역설적으로 희망에 대한 강력한 표출이기도 합니다. 즉 자살로 절망을 끝낼 수 있다는 왜곡된 희망일 것입니다. 적어도 <성경>의 메시지가 옳다면 자살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입니다. 죽음 이후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지난 번 이야기에서 ‘요셉’이 행한 의로운 행동에 대한 대가가 감옥행 즉 “고난과 수치”였다면, 이번 이야기에서는 “망각” 즉 “잊혀짐”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참고. 23절). 그가 감옥에서 섬기던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준 대가로 그에게 돌아온 것은 후사(厚謝)가 아니라, “잊혀짐”입니다. 이에 대해서 ‘요셉’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보이스’(J. M. Boice) 목사님은 이 부분에서 <성경> 기록의 행간(行間)을 읽을 것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즉 ‘요셉’의 심중을 헤아려 보자는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면서 과연 ‘요셉’은 심중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우리의 영웅, 사계절의 사나이,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 ‘요셉’도 지극히 인간적이며 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심지어 지금의 처지를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갔을 대화를 상상해 봅시다:
요셉: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 하였나이다”(14-15).
관원장: “아무렴. 물론이지. 내가 어찌 이 은혜를 잊을 수 있을까! 자네같이 성실하고 재능 있는 자를 내가 어찌 그냥 감옥에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아무 걱정 말게. 내가 나가는 대로 금방 자네를 왕에게 천거하여 여기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줌세.”
과연 꿈은 그대로 실현되었고, “술 맡은 관원장”은 왕의 은혜를 입어 출옥하여 이전 지위로 회복되었습니다만,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진술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23절). 그리고 이어지는 에피소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음과 같은 언급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자기가 나일 강 가에 서 있는데”(41:1).
만 이년! 그렇습니다. 만 이년이 그냥 흘러가버렸습니다!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그렇게 부탁했고, 그도 그렇게 하겠노라고 굳게 약속했는데도 말입니다! 유행가 가사에나 있을 법한 내용이 실제 일어난 것이지요. ‘요셉’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허망함? 배신감? 쓰라림? 그리고 그의 선택은?
영혼의 쇠사슬. 다른 것은 몰라도 <시편> 기자는 그의 상태를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시 105:18). 시인은 정확하게 누가 이런 상태에 놓여있는지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감옥에 갇힌 자라면 누구나 이처럼 자유의 박탈과 억압을 겪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육체적인 상태에 대한 묘사일 뿐입니다. 실은 그의 영혼이 지금 이런 어둠의 세월을 통과하고 있는 중입니다. 매일 같은 음식, 매일 보는 똑 같은 좁은 공간, 매일 반복되는 똑 같은 작업 등등. 단조로움은 우울증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처음 한 동안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영혼은 기다림과 부푼 희망으로 온갖 장밋빛 상상의 날개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곧 나갈 수 있을 거야.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겠지. 그가 왕에게 내 이야기를 해주었을 거야. 꿈을 해석해 주는 내 실력에 대해서도 말해 주었겠지.” 감옥 문이 열릴 때마다, 마치 조건 반사를 보이듯 그쪽으로 달려갑니다.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한 달이 지날 때마다, 실의에 빠져가는 자신을 오히려 달래면서 “술 맡은 관원장”의 약속이 성취되길 기다립니다. 이처럼 늦어지는 것은 그가 내 약속을 잊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너무 많이 밀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점차 그의 행동은 굼뜨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만 해도 감옥 문이 열릴 때 행여나 하는 기대로 달려 나가곤 했습니다만, 점차 그의 걸음은 느려지기 시작하다가, 언제부터인가 그냥 앉아서 그 문을 바라보다가, 이제는 고개도 돌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호의를 입은 관원장은 ‘요셉’을 완전히 잊어버렸고, 망각의 세월은 이년이나 흘렀습니다. 당연히 희망도 사라져버렸습니다. 이제 그의 영혼은 단조로움과 일상의 사슬에 묶여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크게 바랄 것도 없고, 더 이상 낙담할 그 무엇도 없습니다. 인생이란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 될 참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어찌 ‘요셉’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겠습니까? 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년이 아니라 더 긴 세월을 이런 상태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 어쩌면 다음 달에 월급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 회사 사정이 올해보다 내년에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 내년에는 진급이 있을지도 모를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 이번 부탁 한 번만 들어주면 그 은혜 결코 잊지 않겠다는 실없는 약속에 대한 희망. 한 해가 지나고 다시 한 해가 저물어도 기다리던 그 좋은 시절은 결코 오지 않습니다. 희망은 좌절을 낳고, 좌절은 원한과 앙심의 쇠사슬이 되어 내 영혼을 꽁꽁 묶어버립니다. 그렇게 나의 일상은 지루하게 끝도 없이 이어갈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 내 처지를 기억하며, 도움의 손길을 뻗어 줄 것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같은 처지일 테니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채,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인생이 고해(苦海)가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요셉’의 영혼은 어땠을까? 정말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진 채 감옥에서 지내면서 행여나 자살을 기도하지는 않았을까? 만일 그랬다면 그 이년은 그의 인생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고해의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과연 백해무익(百害無益)한 고해의 세월이었을까?
환난, 인내, 그리고 연단. 요즘 미국 대학교 졸업식의 축사 내용이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꿈과 도전을 말하는 대신 인내를 말한다고 합니다. 어려움을 참고 견디라는 것입니다. “대공황”(the Depression) 이후 처음으로 맞는 경제위기와 실업 대란 앞에서 꿈과 도전은 어쩌면 공허한 수사(修辭)에 불과한 것이겠지요. 최근 우리나라 어린이 사이에서 A형 간염 보균율이 매우 높다는 통계가 발표된 바 있습니다.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된 위생 상태와 풍요로운 식단에도 불구하고 이런 통계 수치를 접하는 우리는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당국은 그 원인을 아이들의 “저항력의 결핍”에서 찾고 있습니다. 치열한 전쟁 경험이 없는 장군이나 병사가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몸 안에 침투해 들어오는 온갖 질병과 대항하면서 만들어진 각종 항체가 없으니, 조그만 질병의 공격에도 속수무책인 것 같습니다. “후천성면역결핍증”(AIDS)도 이 병을 유발하는 특정 세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병입니다.
땅이 척박하고 메마른 곳에서 자란 포도나무에서 더 좋은 포도주가 생산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요셉’의 이년은 모두에게 잊혀 진 이년이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환난은 그의 영혼에 백혈구를 생산해주었으며, 단단한 면역체계를 형성해주는 기간으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를 더욱 성숙하고 완숙한 인격체로 만들어주는 기간이었습니다. 백전노장(百戰老將)은 한 두 번의 전투 경험으로 얻어지는 타이틀이 아닙니다. 승리와 패배를 수 없이 거친 후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겠지요. 김연아 선수는 지금까지 적어도 삼만 번은 빙판 위에서 넘어졌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관련해서 그 유명한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3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 함은(롬 5:3하-5절상)
환난이 외부로부터 침입해 들어오는 질병이라면, 인내는 그와 대적해 싸우는 항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단”(dokimh, 도키메)은 “인정받은 자질 내지 품격”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질병과의 치열한 전투 후에 완성되는 일종의 면역체계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억.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연단이 소망이 이루며,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선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환난이 단순히 한 개인의 인격적 자질을 성숙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소망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단은 분명 훌륭한 덕목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일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소망은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엇일까? 소망은 하나님의 계획이며 섭리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계획을 잊지 않고 이루신다는 말일 것입니다. 흔히 인간을 망각의 존재라고 합니다. 아무리 슬픈 기억도, 아무리 기쁜 기억도 세월이 지나면 서서히 사라집니다. 세월이 약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연극에 이런 대사가 등장합니다: “아무리 슬퍼도 남편 따라 죽는 아내 없고, 아내 따라 죽는 남편 없으며, 자식 따라 죽는 부모 없고, 부모 따라 죽는 자식 없다.” 맞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 금방이라도 따라 죽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세월이 지나면 견딜 만 해 집니다. 망각 때문입니다. 눈물겹도록 고마운 은혜를 입어 평생 잊을 것 같지 않지만, 이 역시 세월이 지나면 기억의 밖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억은 그렇지 않다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노아 이야기>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고독을 말하려 한다면, 외로움을 말하려 한다면, 무려 120년을 홍수를 대비해서 방주를 만들고 있던 ‘노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처음 한 동안은 세상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웃음마저 실은 관심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그에 대한 세인의 관심마저 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가 배를 만들든, 무엇을 하든 사람들은 도무지 그를 기억조차 못합니다. 그는 철저하게 내버려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그렇게 살았다면, ‘노아’는 감옥 밖에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요셉’이 불과 이 년을 그렇게 살았다면 ‘노아’는 120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실로 잊혀 진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를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창 8:1상)
하나님은 ‘노아’의 소망을 부끄럽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노아’를 잊으신 적이 없었으며, 인류를 향한 그분의 완벽한 계획을 이루어가시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억”과 관련해서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도적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노아’와는 달리 애초에 하나님의 관심 밖에 있던 자였습니다만, 죽어가면서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간청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 23:43). 그 도적은 십자가에서 그 어느 때보다 더한 고독과 상실감을 느꼈을 테지만, 예수님은 그의 간청을 기억하셔서 그를 함께 데리고 낙원으로 가셨습니다. 주님은 도적의 소망을 부끄럽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소망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다리다 지쳐 우울증에 빠진 사람에게 “다 괜찮아 질 거야. 힘내” 등과 같은 격려의 말은 별 소용이 없다고들 합니다만,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말은 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셉’에게 해 줄 수 있는 권면이 있다면, 부질없는 인생들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부질없는 인생을 믿다가 여의치 않았을 때 내게 돌아오는 것은 분노와 원망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사야>의 권면은 우리의 일생에 이웃의 돌봄이나 관심이나 배려 등이 전혀 필요치 않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늘 격려나 위로나 칭찬이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다만 내 미래나 운명을 사람의 손에 의탁하지 말라는 것이겠지요. 사업이나, 정치나, 기타 사회적 신분 상승을 위해서 학연이나 지연 및 혈연 등과 같은 것에 기대어 소위 “줄서기”가 일상화 되어 있는 대한민국의 풍토에서는 <이사야>의 권면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사회적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만, 우리는 믿음과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기억”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나는 그런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까?
연습과 토의
1. “요셉의 감옥”으로 부를 수도 있을 본문 에피소드는 직전의 에피소드와 어떻게 연결되고 있습니까?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연관성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2. ‘요셉’과 “감옥”과 “하나님”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3. 지금 나를 가두고 있는 감옥은 없습니까? 있다면 무엇이며, 이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4. 에피소드를 통해서 최소한 한 가지의 구체적인 적용 점을 찾아내봅시다 (가장 중요한 질문이자 작업이 될 것입니다).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