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43과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
김태정 목사창세기 39:1-20약 46분 분량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39:6)
<요셉 이야기>의 두 번째 에피소드가 <요셉과 Mr. 보디발>이라고 한다면, 이어지는 세 번째 에피소드는 <요셉과 Mrs. 보디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그 내용에 있어 첫 번째 에피소드에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다시 ‘이집트’에 팔려온 ‘요셉’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37:36; 39:1).
하지만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은 처음부터 “형통한 자”로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의 주인 미스터 ‘보디발’ 때문입니다. ‘요셉’의 인생은 주인의 배려로 그야말로 승승장구입니다. 하지만 미세스 ‘보비달’은 이런 ‘요셉’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결국 무고하게 감옥에 갇힘으로써 ‘요셉’의 인생은 급전직하로 전락하고 맙니다. 지금까지 그의 인생의 기상도(氣象圖)는 맑음과 흐림의 연속입니다. ‘가나안’에서 한 번, 그리고 이곳 이집트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가나안’에서 그가 처음 누렸던 맑음은 순전히 아버지의 총애 때문이었고, 이후 겪어야만 했던 흐림은 자신의 탓이었다면, 이집트에서의 맑고도 희망 찬 출발은 자신의 공로 즉 성실과 근면과 전문성 덕분으로 돌릴 수 있겠습니다만, 이제 다시 찾아온 흐림은 순전히 타인의 탓 즉 악녀 미세스 ‘보디발’의 탓으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아니 이번에도 자신의 탓이 더 큽니다. 그가 이번에 당하는 고초는 다름 아닌 그가 고집했던 의로움의 대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본문 이야기에 대한 표면적인 신학적 진단이 될 것입니다.
또 다른 주제나 교훈은 없을까? 본문이 하나의 이야기로서 드러내고 있는 설화적 특징은 무엇인가? 예컨대, ‘요셉’이 지금 겪고 있는 어두움의 세월이 예표해 주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그리고 더 넓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화자가 이를 드러내기 위하여 도입하고 있는 문학적 수사(修辭)는 무엇인가? 그리고 본문은 <족장 이야기> 특히 “아브라함 언약”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 이들 질문들이 본문을 이해하는 중요한 독서 감상법이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세 번째 에피소드의 문학적 단위, 특히 단락의 끝을 결정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학자들마다 이견이 분분합니다. 학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대표적인 세 가지 견해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39:1-23; (2) 39:1-20절상; (3) 39:1-20. 논의의 핵심은 결국 39장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 단위로 볼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 세 절(39:21-23절)을 다음 단락에 연결시킬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만일 첫 번째 견해를 채택하여 39장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본다면, 나름대로 유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요셉 이야기>의 핵심 주제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표현이 수미상관을 이루면서 이야기의 구성을 대칭적으로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39:23)
그리고 내용적으로도 마지막 세절은 ‘요셉’이 옥에 갇히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앞 이야기를 요약하면서 동시에 이어지는 40장의 내용에 대한 서막 내지 배경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런 기법은 <창세기>의 여러 이야기에서 익히 보아오던 ‘히브리’ 식 이야기 기법의 단골 메뉴이기도 합니다.
한편 또 다른 일단의 학자들은(Gunkel 및 Coats) 두 번째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39장은 20절에서 두 개의 장면을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 구절을 기점으로 이야기를 둘로 분리해야 한다는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 근거해서 두 이야기를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39:1-20상; (2) 39:20하-40:23: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요셉이 옥에 갇혔으나(20절)
이렇게 구분했을 때, 각 이야기의 구성 요소는 “해설”(exposition)에 이은 “서술”(narration)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 이야기는 마치 시적 반복을 이루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즉 첫 번째 장면에서 “해설”에 해당하는 부분은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39:1-6이며, “서술”은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 즉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과정과 ‘요셉’이 옥에 갇히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39:7-20절상). 그리고 두 번째 장면의 “해설”은 옥에 갇힌 ‘요셉’에 관한 내용이며(39:20절하-23), “서술” 부분은 감옥에서의 생활을 다루고 있는 나머지 내용입니다(40:1-23). 그리고 각 이야기는 “해설”에서 “서술”로 그 양식을 바꿀 때, 공통적으로 “그 후에”(이 일 후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39:7, 40:1).
한편 이어지는 41장의 이야기, 즉 ‘바로’ 왕의 꿈과 ‘요셉’의 해몽에 관한 이야기는 또 다른 장면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며, 당연히 세 번째 장면으로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이 세 번째 장면이 앞선 두 장면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해설”이 없이 곧바로 “서술”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 이년 후에”(41:1상).
이 두 번째 입장에 따르면, ‘요셉’의 일생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절을 다루고 있는 전체 이야기(39:1-41:57)는 결국 세 개의 에피소드(또는 세 개의 장면)로 나눌 수 있을 것이며, 이는 ‘히브리’ 작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서술 방식이기도 합니다. 세 개의 에피소드가 연결되는 방식을 보면, 대개 첫 두 이야기가 서로 비슷하게 전개되다가 세 번째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뚜렷한 차이를 드러내면서 극적 반전을 이루어내고 있습니다(참고. 창 14:1-16; 레 8-10; 민 22-24). 예컨대, 첫 두 이야기에서 화자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고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는 진술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는 그가 ‘보디발’의 집에 팔려간 것에 대해서 그렇게 진술하고 있으며(39:2-6), 두 번째 장면에서는 그가 왕의 감옥에 갇혔다는 것에 대해서 동일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39:21-23). 그러나 두 경우 모두 희망에 대한 기대는 무참히 깨지고 맙니다. 첫 에피소드의 결론은 ‘보디발’이 ‘요셉’을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이며(39:21-23), 두 번째 에피소드의 결론은 왕의 관원장이 ‘요셉’과의 약속을 잊어버렸고, ‘요셉’은 그냥 감옥에 남아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40:23).
이제 세 번째 에피소드는 지난 두 번의 경우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고 그를 형통케 하셨다”는 언급도 없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화자는 곧바로 사실적 서술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만 이년 후에”(41:1상). 그러나 세 번째 에피소드의 결론은 뜻밖에도 지난 두 번의 그것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끝나고 있습니다. 실패와 절망이 아니라, 성공과 희망입니다. 그가 거둔 성공은 단순히 이전의 성공을 되찾은 수준, 즉 단순히 한 부자 관리의 집사나 왕의 감옥의 책임자로 회복된 것이 아니라, 화자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신다”고 선언하고 있는 ‘바로’ 왕(41:38) 다음으로 높은 권세를 가진 그 나라의 제 이 인자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세 번째 에피소드의 나머지 내용은 그 양식에 있어 “해설”로 볼 수 있으며, 그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앞의 두 에피소드와 무리 없이 연결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단락 구분과 관련해서 세 번째 견해는 무엇인가? 위 두 번째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차이는 두 번째 에피소드의 결론을 20절로 볼 것인가, 아니면 20절을 둘로 구분할 것인가의 차이입니다. 굳이 세 번째 견해를 채택해야 하는 당위성을 찾는다면, 20절 후반에 대한 ‘히브리’ 문장의 구문(構文)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가 옥에 갇혔더라”(20절하). 즉 이 문장의 주어는 고유 명사 ‘요셉’이 아니라 대명사 “그”로서,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으로 보기 보다는 앞 이야기의 결론으로 봄이 더 적절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에피소드는 다시 고유명사 ‘요셉’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21절상). 이 세 번째 견해에 따라 본문의 단락을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지막 3막의 세 장면은 매 장면마다 ‘보디발’의 아내의 끈질긴 유혹이 어떻게 실패로 끝나고 있는지 번갈아 가며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는 화자의 진술을 통해서(12절), 두 번째 장면에서는 ‘보디발’의 아내가 집안의 하인들에게 직접 고발하고 있는 대화를 통해서(14-15절),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간부(奸婦)가 자신의 남편에게 모함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17-18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 번에 걸친 의도적인 반복을 통해서 이 여인이 어떤 인물인지를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료와 편집. 자료비평 진영의 공통적인 입장은 39장 전체가 <야훼 자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가장 큰 이유는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여러 차례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훼’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서막: 요약(1절)
세 번째 에피소드는 <유다와 다말> 이야기에서 일탈하는 듯하다가, 다시 이야기의 본류(本流)로 돌아오면서 첫 번째 에피소드의 결론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1절)
이 단락이 기능하는 바는 일차적으로 지난 줄거리에 대한 요약입니다만, 같은 사건을 다소 다른 관점에서 조망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곳에서는 ‘요셉’이 수동태 문장의 주어로 등장하면서 무대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디발’을 여러 차례 “애굽 사람”으로 부르고 있는데(1, 2, 5절), 이는 아마도 ‘요셉’의 노예 신분과 대조를 이루기 위한 의도로 보이며, 더 나아가서는 훗날 이스라엘의 노예생활을 예고해 주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보디발’(rp'yfiwOP, 포티파르)은 ‘이집트’어로 “(태양 신) ‘레’(Re)가 준 자”라는 의미인데, 그의 직책 “시위(친위) 대장”의 정확한 의미는 분명치 않습니다. “내시”, “요리사”, 또는 “경호원” 등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만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보다 상세한 설명을 위해서 ‘해밀턴’(V. Hamilton)을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V. Hamiton, 458쪽.
그리고 화자는 ‘바로’가 정확히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2. 제 1막: 요셉의 형통(2-6절)
제 1막은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이 어떻게 주인의 인정과 존경을 받으면서 형통과 성공, 즉 신분 상승을 이루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경험한 첫 번째 신분 상승은 여느 노예들처럼 들이나 밖에서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대신에 주인의 집 안 일을 하도록 허용되었다는데 있습니다(2절). 다음으로 그는 “주인의 마음에 들어”(우리 성경은 그가 주인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번역하고 있음), 주인의개인 비서 내지는 “가정 총무”로 승격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주인의 모든 소유와 소유물을 돌보고 주관하게 되었습니다(4-5절).
그러나 화자는 이곳에서 단순히 ‘요셉’의 성공 스토리를 보여주고 있지만은 않습니다. 그 성공의 배후 내지는 원인도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2절)
이곳에서 한 가지 특기할 만 한 사실은 <요셉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훼”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지극히 이례적이라는 점입니다. 이곳 39장을 제외하고 나면(모두 8회 사용), 다른 곳에서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곳은 3회에 불과합니다(38:7, 10; 49:18). 그리고 이야기의 등장인물이 아니라 화자가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며, “요셉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라는 신학적 주제를 이끌어 내기 위한 의도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참고: 2, 3, 21, 23절). 화자의 이러한 의도와 쌍을 이루는 신학적 주제가 등장인물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는데, <요셉 이야기>의 거의 결말 부분에서 ‘요셉’이 그의 가족들에게 한 고백적 간증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나이다”(45;5-8; 50:17-21). 그런데 이곳에서 ‘요셉’이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름은 ‘야훼’가 아니라 ‘엘로힘’입니다. 요약하자면, 화자의 서술과 주인공 ‘요셉’의 직접적인 대화가 마치 공명을 이루듯, <요셉 이야기>의 핵심 주제로 꼽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벽두에는 화자가 먼저 이를 서술하면(39-41장),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서(45:5-8; 50:17-21) 주인공 ‘요셉’ 자신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동일한 주제를 메아리로 맞받아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39장은 <요셉 이야기>의 중요한 구성 요소일뿐더러, 후대의 첨가로 볼 수는 없습니다.
‘야훼’께서 족장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은 비단 ‘요셉’에게만 국한 된 것은 아닙니다. ‘이삭’에게도 그리고 ‘야곱’에게도 동일한 약속을 하셨는데(26:3, 24, 28; 28:15, 20; 31:3), 결국 이런 표현은 <야곱 순환>의 한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의 경우에서도 이런 표현은 이곳에서 두 번, 그리고 다음 단락(39:21, 23)에서 두 번 더 보게 될 것인데, 역설적으로 이런 표현은 앞으로 주인공에서 닥칠 시련과 환란을 예고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앞으로 주인공이 겪게 될 온간 시련이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항상 그의 편이 되어 지켜주실 것이라는 암시로 기능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과연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은 그의 주인 ‘보디발’도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낱 노예에 불과한 ‘요셉’을 단순한 육체노동자가 아니라 집안일을 맡아보는 자신의 개인 비서 내지는 집안의 총무로 삼기에 이릅니다:
3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3-4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요셉’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주인도 ‘요셉’ 때문에 덩달아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5절)
이 구절이 예고하고 암시해 주는 바는 분명합니다. 한 가정이 ‘요셉’으로 말미암아 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면, 훗날 ‘요셉’이 그 나라의 총리가 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온 나라가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구절에서 등장하고 있는 단어, “축복”(&r'B, 바락)은 <창세기>의 핵심 단어 중의 하나로서, 화자가 이곳에서 두 번이나 사용하고 있는 것도 결코 놀랄 일은 아닙니다(참고. 창 1:22; 12:2-3). 즉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땅의 온 족속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부분적이긴 하나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디발’은 아예 자신의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다 맡겨버리기에 이릅니다: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 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6절)
이 표현은 5절보다 더욱 강력한 것으로서, 문자적으로는 ‘보디발’이 ‘요셉’이 하자는 대로 내버려두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표현은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보다 문자적인 의미로 다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포기하고) 밖으로 나가매”(12절). 결국 6절의 이러한 표현은 앞으로 닥칠 ‘요셉’의 운명에 일말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 하였더라”는 표현은 ‘보디발’의 아내를 지칭하는 일종의 완곡어법(婉曲語法)일 수도 있겠습니다만(잠 30:20),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의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잠 30:20).
보다 정확하게는 “보디발 자신의 개인 사생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화자가 “요셉의 용모가 아름답고 빼어나다”고 언급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구약> 전체를 통틀어서 이런 칭찬을 받고 있는 사람은 ‘요셉’과 그의 어머니 ‘라헬’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창 29:17). 아들이 어머니를 닮아 아름답고 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으나, 이 역시 앞으로 닥칠 주인공의 운명에 불길한 복선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이어지는 에피소드에 대한 일종의 전조(前兆) 역할을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3. 제 2막: 奸婦의 유혹(7-10절)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이야기(7-20절)를 두고 흔히 주전 13 세기 ‘이집트’에서 전해오던 <두 형제 이야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내용인 즉은 이러합니다. 어느 날 형의 아내가 자기 시동생과 성관계를 갖자고 유혹합니다. 시동생은 크게 화를 내며 이를 거절하면서, 이 일을 형에게 알리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형수는 오히려 동생에게 겁탈을 당했다고 하며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고, 남편을 부추겨 소 떼들을 몰고 들에서 돌아오는 동생을 잡아 죽이라고 설득합니다. 그러나 소들이 이 사실을 동생에게 사전에 알려주고, 그는 달아나게 됩니다. 형은 동생을 쫓아갔으나 두 사람 사이에 갑자기 악어들로 가득 찬 강이 가로 놓이게 되고, 동생은 형에게 큰 소리로 자신의 무죄함을 외칩니다. 형은 동생의 말을 믿고 쫓기를 그만 두고 집으로 돌아가 그의 아내를 처단합니다.
‘궁켈’(Gunkel)에 따르면, 고대 영웅 이야기에는 영웅이 여인의 유혹을 거절하는 유사한 모티브들이 꽤나 알려져 있는지라 본문 이야기 역시 이러한 ‘이집트’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만, 두 이야기 사이에는 “외간 남자를 유혹하려다 실패한 부정(不貞)한 아내”의 모티브 외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습니다.
제 2막은 비교적 긴 시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용모가 아름답고 빼어난” ‘요셉’과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유혹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의 대화는 지극히 대조적입니다. 짧고 은근한 여자의 유혹과 이를 거절하는 ‘요셉’의 긴 설명이 그것입니다: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7절)
여인은 말보다 훔쳐보는 것을 더 오래 동안 한 것 같습니다. 그녀가 한 말이라고는 “나와 함께 자자”는 지극히 간결하고 퉁명스러운 한 마디 뿐입니다. 그러나 화자의 간결한 표현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즉 이 여자는 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말로 ‘요셉’을 유혹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요셉’의 말은 길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8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이 집에서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 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8-9절)
‘요셉’의 말은 그 내용에 있어, 실은 화자가 앞에서 이미 서술한 바 있는 것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은 극적 요소에 있어서나 주제에 있어서나 아주 적절하다 하겠습니다. 이곳에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핵심 강조어들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all); “다”(anything); “집”; “집안”(참고. 3-6절). ‘요셉’은 그가 거절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것은 주인의 큰 신뢰에 대한 배신행위이기 때문입니다(6절). 둘째, 그것은 아내로서 남편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 셋째, 그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간음을 큰 죄악으로 다루고 있기는 합니다만(20:9; 시 51:6), 이는 근동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이집트’ 여인과의 대화중임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하나님을 지칭하는 단어로 일반적인 ‘엘로힘’ 하나님 대신에 지극히 ‘유대’적인 ‘여호와’ 하나님을 사용하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셉’이 간음에 관하여 보이고 있는 거부의 태도나 자세는 <오경>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적 입장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참고. 잠 6-7장). 지혜문학에서 간음을 불법으로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를 금하셨기 때문이라거나 또는 그것이 사형에 준하는 범죄 행위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참고. 레 20:10; 신 22:22). <잠언서>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해서 간음을 금하고 있습니다: (1)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하기 때문에(6:32); 상처와 능욕과 부끄러움을 받기 때문에(6:33); 남편으로부터 분노의 복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6:34); 남편이 어떤 보상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6:35). 그나마 사형에 준하는 처벌과 관련해서 <잠언서>에서 경고하고 있는 언급은 다음과 같습니다: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같으니라”(잠 7:23).
그러나 여인의 유혹은 끈질깁니다. 그녀는 매일같이 유혹을 쉬지 않았으며, ‘요셉’의 태도 또한 고집스럽게 평행선을 달리고 있습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 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10절)
여인은 여러 말로 ‘요셉’을 유혹하였겠으나, 화자는 단 두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으로 처리함으로써 이 여인의 음심을 더욱 강렬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와 동침하자”(7, 12절). 그리고 ‘요셉’의 긴 거절의 변(辯)을 이 둘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둠으로써, 극적인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8-9절).
4. 제 3막: 요셉의 치욕(11-20절)
‘요셉’이 동침은커녕 이 여자 근처에도 가지 않으려하자, 여인의 인내는 바닥이 마고 마침내 어느 날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단 하루 만에 존경과 흠모의 대상에서 멸시와 저주의 대상으로 급전직하 하게 되고 마침내 감옥에 갇히는 수욕을 당하게 됩니다. 제 3막은 이 일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세 개의 짧은 장면을 통해서 차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면 1. 첫째, 화자는 실제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11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려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12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11-12절)
‘요셉’은 여느 날처럼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그 집에 들어갔습니다(출 20:9-10). 그리고 그 집안에서는 아무도 나중에 증인이 될 만 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 여인은 아주 노골적으로, 그리고 거칠게 ‘요셉’의 옷을 “붙잡으며”(cp'T, 타파스) 동침을 요구합니다. 이 동사는 폭력을 수반한 행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예: 신 9:17; 22:28; 왕상 11:30).
그녀는 단순히 애원하고 간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공격적으로 ‘요셉’을 밀어붙이고 있는 중입니다. 이 장면을 상상해 보자면 이 여인은 지금 남자의 옷을 잡아 벗기고 있는 중이며, 남자의 상반신이나 하반신은 아마 반나체(半裸體)로 드러나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옷이 정확히 어떤 종류의 옷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아마 겉옷이나 또는 上衣 등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에 개의치 않고 옷을 “내버려두고”(bz“[, 아자브) 그곳을 도망쳐 나옵니다. 흥미롭게도 화자는 다른 곳에서 이 동일한 동사를 사용한 바 있습니다: “그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에게 위탁하고(bz”[, 아자브)”(6절). 이 동사가 6절에서 ‘요셉’을 향한 ‘보디발’의 신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12절에서는 ‘보디발’을 향한 ‘요셉’의 충성심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그의 생애에서 두 번째로 타의에 의해 옷이 벗기는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 경험은 그의 형들에 의해서였습니다(37장). 처음의 옷은 아름다운 채색 “옷”(tn<toK, 케토네트)이었으나 이번에는 분명 단순한 “옷”(dg,B, 베게드)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다시 한 번 더 옷을 벗을 일이 있을 것인데, 그가 총리가 되었을 때 그의 형들을 돌려보내면서 각자에게 “옷”(hl;m]c, 시믈라) 한 벌 씩을 준 경우를 말합니다(45:22).
장면 2. 두 번째 장면은 남자로부터 퇴짜를 당한 여인이 과연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13그 여인이 요셉이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14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15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갔느니라(13-15)
여인은 우선 집안의 하인들을 향하여 ‘요셉’에 대한 고소와 고발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고소는 “악의와 허위에 가득 찬 선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요셉’은 황급하게 그 집을 빠져나오느라, 동료 하인들에게 일의 전후사정을 제대로 설명할 틈이 없었습니다. 만일 그가 그랬다면 지금 이 여자가 집안 하인들의 동정심을 얻기 위하여 이처럼 사악한 거짓말을 해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여인은 이방인 ‘요셉’에 대한 혐오감과 함께 자신의 남편 ‘보디발’을 향한 비난도 아울러 쏟아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을 싸잡아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 남자를 집안에 끌어들인 남편의 행위가 처음부터 정신 나간 짓이었다는 것이지요(14절). 왜 그런가? 여인의 대답을 들어봅시다: “‘요셉’이 나를 희롱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희롱하게 한 것 아닙니까?” 우리는 여기서 여인이 자신과 하인들을 동일시함으로써 일종의 동료의식 내지는 연대감을 갖게 하려는 교활한 술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인은 이어서 사실을 백팔십도 뒤집어, 자신의 행위를 ‘요셉’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습니다. 즉 ‘요셉’이 먼저 “나와 동침하자”고 요구했으며, 자신이 능욕당하기 직전에 고함을 치며 현장에서 도망쳐 나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14-15절). 지금 여인의 진술을 들어보면(14-15절), 앞서 화자가 진술했던바 내용이나 표현과 대동소이합니다만(12-13절), 그 순서가 완전히 뒤집어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뻔뻔한 거짓말에 더욱 무게를 싣고 정당화하기 위한 계략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인의 뻔뻔한 거짓말은 다른 표현에서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컨대, ‘요셉’이 그의 옷을 “여인의 손”(12절)에 버려두고 도망갔다고 말하는 대신, “내 곁에”(15절) 버려두고 도망갔다고 말하는 대목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인은 한 문장의 전치사 하나만을 살짝 바꿈으로써도,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기 위해서 먼저 옷을 벗어던졌음이 분명하다는 암시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장면 3. 여인의 무고(誣告)는 세 번째 장면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만, 이번에는 남편을 끌어들이는 일입니다:
16그의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17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18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19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16-20절)
여인의 간교함은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나고 있습니다. 앞에서 ‘요셉’을 고발하는 일에 소위 민족적이거나 인종적인 정서를 이용해서 ‘이집트’인 하인들을 부추겼다면, 이번에는 남편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자극해서 같은 짓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즉 이전에 “이방인 종이 우리 ‘이집트’인을 희롱하려한다”(14절)는 것이 여인의 상투적인 선동의 수법이었다면, 이번에는 “종이 주인의 아내를 희롱하려 한다”(17절)면서 악의적인 선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한 술 더 떠서, 남편이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주기를 바랐음인지, ‘요셉’을 처음 데려온 사람이 다름 아닌 남편임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17절). 그러나 하인들 앞에서 남편을 비방하던 때와는 그 강도에 있어 훨씬 부드러운 모습입니다. 남편을 지나치게 자극하거나 모멸감을 느끼게 해서 득이 될 것이 없다고 판단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인의 복수극은 성공했습니까? 그렇습니다. 남편은 격노하고, ‘요셉’을 옥에 가둡니다. 그런데 처벌이 생각보다는 가볍습니다. 대개 성폭행을 한 자에 대해서는 사형에 처하는 것이 관례인데(신 22;23-27), ‘요셉’이 노예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이지 않고 감옥에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무슨 이유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혹시나 그가 자신의 무죄를 강력하게 주장했게 때문이거나, 또는 주인이 아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어딘지 석연치 않은 곳이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훈과 적용
1. 乘勝長驅
야훼께서 함께 하시므로. 대한민국에서 TV 드라마가 성공하려면 소위 “막장 드라마”의 모든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는 속설(俗說)이 있습니다. “막장”이라 함은 그야말로 “갈 데까지 갔다”는 의미인데, 이는 드라마 작가나 감독들이 드라마의 성공을 위해서 온갖 극적 요소들을 억지로 무리하게 집어넣어 시청자들의 말초적인 감성을 자극한다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이들 작가나 감독들이 즐겨 사용하는 막장 요소들은, 예컨대 출생에 얽힌 비밀, 불치병, 고부간의 갈등, 불륜, 지나친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구도,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의 상승을 통한 인생 역전과 통쾌한 복수 등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시청자들도 이런 드라마를 저질스럽다고 비난하면서도 계속 보고 즐깁니다. 그래서 작가나 감독들이 시청률 때문에 “막장 드라마”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이는 마치 마약 주사의 빈도나 강도를 점점 더 자주, 그리고 더 세게 하는 것과 같아서 일종의 자해극(自害劇)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요셉 이야기>를 “막장 드라마”와 비교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우리 인류가 본능적으로 좋아할 수밖에 없는 한 가지 극적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신데렐라’적 자수성가(自手成家)의 모티브가 바로 그것입니다. 비천(卑賤)에서 영화(榮華)로, 굴욕에서 영광으로 변신하고 있는 ‘요셉’의 인생 역전 이야기는 흥미롭고 극적입니다. 그러나 화자는 ‘요셉’의 성공을 단순히 자수성가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그가 매사에 충성스럽고, 성실하며, 열심히 일하는 자로서, 성공할 수 있는 충분한 인격과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화자는 그의 성공을 다른 곳에서 찾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야훼’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셉 이야기>의 세 번째 에피소드의 주제도 바로 이것입니다. 즉 39장에서 화자는 이 주제를 일곱 번에 걸쳐 반복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중 네 번이 제 1막에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선 제 2절에서 화자는 ‘요셉’이 ‘이집트’의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오게 된 것 자체가 ‘야훼’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며, 그 때문에 그가 ‘보디발’의 집에서 형통하게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어지는 3절에서, 그의 주인 ‘보디발’이 ‘야훼’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으며, 또한 ‘야훼’께서 그의 범사에 함께 하심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 화자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한 결과는 ‘보디발’의 집에도 큰 축복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점, 즉 ‘요셉’의 성공은 ‘보디발’에게도 축복이 되었다는 사실은 <요셉 이야기>의 또 다른 핵심 주제로 꼽을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common grace)를 말합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M. Luther)도 바로 이 점에 주목하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온갖 축복은 단순히 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라반’이 그의 조카 ‘야곱’에게 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 예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30:27).
우리가 ‘루터’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신약>에서도 그 예를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될 때 그를 태운 배가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되었으나, 그와 함께 탄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된 것도 그를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4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25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26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행 27:24-26)
그렇다면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어떻습니까?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
불의한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즉 의인들 때문에 혜택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아전인수(我田引水)일까요? 그러나 ‘루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이 살던 독일 제국이 만일 종교개혁을 통한 복음의 부흥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아주 비참한 나라로 전락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이라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나라를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바꾸어 놓았으며, 어떻게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는지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한 학교와 병원의 설립, 문맹과 질병의 퇴치, 일제 치하에서 해방과 독립을 위한 투쟁, 한국 전쟁 이후 토탄에 빠진 나라의 빈민과 고아들을 위한 구제 활동 등등 이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대도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며, 심지어는 복음을 거부하고 배척하고 있는 것이 역사적 현실입니다. 그러나 <요셉 이야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적어도 한 사람의 이방인, 즉 ‘보디발’만은 이 반열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혜안(慧眼)을 가진 자로서, ‘요셉’의 성공이 결코 우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3절).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도 ‘보디발’과 같은 한 이방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비멜렉’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셔서 매사에 그를 형통케 하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을 두려워하며 그와 그의 후손들로 더불어 상호 불가침조약을 맺자고 제의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나의 삶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 내 주변에 ‘보디발’이나 ‘아비멜렉’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이방인들을 향한 ‘유대’인들의 그것은 아닙니까?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4)
주인의 은헤를 입어. 앞서 언급한 바처럼 ‘보디발’은 현명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 이야기>의 ‘멜기세댁’이나 ‘아비멜렉’에 버금가는 인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며, 먼 훗날 ‘여리고’ 성의 ‘라합’에 비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를 알아보았을 뿐만 아니라, 이런 자를 축복하고, 같은 편에 섰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들 모두는 줄을 잘 섰습니다. ‘보디발’은 어떻습니까? 한 노예가 자기 집에 온 이후로 만사형통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요셉’에게 복을 내리시는 줄을 알았고, 그래서 ‘요셉’의 하나님을 칭송했습니다(3-4절). 예수님 역시 어릴 적에 사람들로부터 이런 칭송을 받은 바 있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지혜와 키가 자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듯이, ‘요셉’ 역시 주인의 신뢰와 사랑을 받게 된 것이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일일 것입니다. 그가 ‘이집트’에 팔려온 것이 열일곱 살 때였으며, 삼십에 ‘바로’ 왕 앞에 섰으며(41:46), 그보다 이년 전에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41:1). 그러니까 그의 신뢰는 11년에 걸쳐 형성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신뢰란 하루아침에 잃을 수 있지만, 그것을 얻기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함을 교훈해 주는 듯합니다. 그리고 ‘요셉’이나 예수님이나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전에 하나님의 인정을 먼저 받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성공의 전제 조건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성공에는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며,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기 전에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높임과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느 지혜로운 채무자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이 세상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셉’의 성공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출발은 결코 순조롭지도, 유리한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처음에 ‘이집트’에 왔을 때,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습니다. 언어도, 풍습도, 문화도, 그리고 그 흔한 인맥도, 모든 것이 불리한 여건이었습니다. 동료 노예들의 따돌림도 결코 견디기 쉬운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불리한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외국에 유학을 나가 그 나라 학생들보다 더 좋은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고등학교 졸업자가 같이 입사한 대학 졸업자들보다 더 빨리 승진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서울이 아닌 중소 도시에서 타지 인이 사업으로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박지성이 그가 속한 구단에서 방출되지 않고 동료 선수들보다 더 오래, 더 많은 연봉으로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대답은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자연법칙과도 같습니다. 자연법칙은 항상 일관되며, 우연이나 요행이 없습니다. 성공에 이르는 길도 그러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가 일깨워 주는 인생의 중요한 교훈일 것입니다. 고 정주영 회장도 자신의 성공은 결코 기적이 아니라고 그가 쓴 책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성공의 비결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의 인격과 전문성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인격이란 함은 인내와 성실함과 일관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주인을 마치 하나님 섬기듯 십일 년을 하루같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창세기>의 ‘노아’와 같습니다. 주변의 조롱과 모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무려 백이십년에 걸쳐 방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어리석고, 융통성 없기로 말한다면 그를 따를 자 없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습니다:
5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엡 6:5-8)
두 번째로, 전문성이라 함은 일과 업무에서의 탁월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적어도 두 가지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으며, 自國의 역사 뿐 아니라, ‘이집트’의 역사에도 능통했습니다. 치수(治水)와 농사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영이나 행정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즉 그는 전문 경영인(CEO)이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를 그냥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먼저 우리의 존재와 참 모습을 비춰주십니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전에 전혀 관심이 없던 것들에 대해서 호기심과, 관심을 갖게 합니다. 그것이 역사든, 과학이든, 정치든, 사업이든, 그리고 신학이든 가리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이루어 보겠다고 하는 열정과 목표의식이 생겨납니다. 영성이다, 소명이다 하는 거창한 언어로 포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성령님의 활동일 뿐입니다. 나는 그저 그분의 동기 유발에 반응만 하면 됩니다. 전문인이 되는 길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계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냥 이전에 살던 방식대로 살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새로운 자아, 아니 진정한 자아의 성취를 위해서입니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이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3)
2. 유혹
우는 사자처럼.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청소년 시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요셉’의 청소년 시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가 승승장구하게 되는 비결이 바로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비유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으며, ‘보디발’이 그를 신뢰하고 총애하였습니다. 누구든 인격에 있어서나 전문성에 있어서나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요인은 또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 ‘라헬’을 닮아 용모 또한 빼어났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보는 순간 사랑에 빠져버렸듯이, ‘요셉’을 보고 반하지 않을 여자가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인격과, 전문식견과, 준수한 용모, 그리고 든든한 배경!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합니까? 명예와 부와 권력은 따 놓은 당상입니다. 이 남자를 마다할 여자가 있다면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남자를 누가 그냥 놔두겠습니까? 가장 먼저 그를 탐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보디발’의 아내였습니다. 주인 마나님이 집안의 준수하고 건장한 남자 종(從)을 유혹하는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드라마의 흔한 소재로서 특별할 것도, 크게 놀랄 일도 아닙니다. 유혹은 그 형태만 달리할 뿐이지 우리 모두에게 매일처럼 닥치는 지극히 일상적이며 자연스러운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하)
불가항력의 유혹. 지금 ‘보디발’ 여사는 어쩌다 충동적으로 ‘요셉’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음욕(淫慾)이 가득했으며, 이전에도 수시로 남편 몰래 이런 불륜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요셉’을 오래 동안 은밀히 지켜보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호기(好期)를 만나자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당당하게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요구하고 나섭니다(7절). 유혹은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집요했습니다. 여인은 날마다 ‘요셉’에게 간청을 했고(10절),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급기야는 집안에 아무도 없는 어느 날 ‘요셉’의 옷을 억지로 잡아끌며 동침을 요구하기에 이릅니다(11-12절).
혈기 왕성한 청년에게 농염(濃艶)한 여인의 유혹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살인이나 도적질 등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력한 것입니다. “성적 유혹”(性的 誘惑)은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강력한 유혹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유혹이 강력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다말’의 유혹 앞에 노출된 ‘유다’와는 격이 다릅니다. 앞에서 이미 다룬 바 있듯이, ‘다말’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지만 ‘요셉’은 그렇지 못합니다. ‘유다’가 ‘다말’의 유혹을 거절한다 해서 크게 낭패 볼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축복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다릅니다. ‘보디발’ 부인은 권력과 돈의 상징입니다. 만일 이 여인을 받아들인다면, 그의 미래는 성공을 향해서 더욱 쾌속 질주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지만, 만일 거절한다면 성공은커녕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게 한다는 여자의 원한을 사게 될 것이고 원수로 남게 될 것입니다. 절대 이 여자를 화나게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나마 지금 누리고 있는 명성과 명예마저 모두 빼앗겨 버리고 싶지 않다면 주인 마나님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이 집안에는 자신과 Mrs. ‘보디발’ 외는 아무도 없는 상황, 그야말로 완벽한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누가 이처럼 강력한 블랙홀을 빠져 나갈 수 있을까?
도망쳐라. ‘요셉’은 어떻게 했습니까? 강력한 유혹과 싸웠습니까?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주의 블랙홀은 그 중력이 무한대에 가까워 그 어떤 것도 그 속으로 다 빨아들이고 맙니다. 따라서 그 속에 빠져들지 않으려면 근처에 가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유혹에 대처하는 최상의 방법도 역시 이와 같지 않을까요?
‘요셉’의 경우 적어도 처음 몇 번은 유혹에 맞서 싸우려고 시도했던 것 같습니다. 여인을 설득하는 것이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8-9절). ‘요셉’은 왜 그녀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것은 주인의 큰 신뢰에 대한 배신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것은 아내로서 남편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 셋째, 그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셉’이 말해주는 사실을 몰라서입니까?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몰라서 ‘아담’을 유혹했으며, ‘아담’ 역시 이를 몰라서 ‘하와’의 제의를 받아들였습니까? 안타깝지만 대개의 경우 죄와 사탄의 강력한 중력(重力)에 노출될 경우 그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역(逆) 추진체가 아예 작동하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오히려 유혹을 은근히 즐긴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할까요? ‘보이스’(J. M. Boice) 목사님은 이와 관련해서 ‘터키’(Turkey)의 한 금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게으른 자는 오히려 스스로 사탄을 유혹한다.”
‘요셉’은 물론 게으른 방관자는 아닙니다. 분명하게 죄를 죄로 인식했고, 유혹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여인을 설득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시하기도 하면서 유혹에 빠져들지 않으려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블랙홀에 빠져들지 않는 최상의 길은 아예 그 근처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요셉’ 역시 결국 그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12절). 집요하게 옷소매 붙잡고 매달리는 여인을 뿌리치고 옷까지 벗어준 채 도망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내 체온으로 얼음을 녹일 수 없다면, 얼음이 나를 얼릴 것입니다. 얼지 않기 위해서 얼음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상책입니다. “주기도문”은 다음과 같은 간구로 끝맺고 있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13). ‘요셉’ 역시 이 기도를 열심히 주문처럼 외우면서 그 집을 도망쳐 나오고 있었을 것입니다.
전투 공동체. 그런데 그가 Mrs. ‘보디발’로부터 도망쳐 나와 어디로 갔을까요? 숨을 만한 도피성이라도 있었습니까? 불행하게도 그는 ‘가나안’이 아니라 ‘이집트’에 살고 있으며, 그의 이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가 아니라 홀로 광야에 서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혼자서 세상과의 힘든 싸움을 수행해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기도의 주체, 즉 전쟁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우리”임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즉 교회입니다. ‘죤 스토트’ 목사님도 이점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 구원시키지 않고 교회에 보내지 않으시며, 교회에 보내지 않고 구원시키지 않으신다.” 요약하자면 홀로 사는 성도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길버트 빌지키언’ 박사는 <공동체 101>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꿈은 공동체다”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시편>도 공동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시 133:1). 교회는 도피성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요셉’이 혼자서 그 힘든 유혹을 이길 수 없어 도망친 것이 최상의 선택이었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과 함께 죄와 사탄의 강력을 쳐서 이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10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0-13)
3. 의(義)의 대가
고난과 수치. 수년 전 필자는 형제들과 함께 ‘캄보디아’를 방문했다가 공항에서 참으로 황당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입국 수속을 해주는 한 직원이(우리나라로 치면 법무부에서 파견한 직원이었을 것입니다) 입국심사를 빨리 해주는 대가로 급행료를 요구해서 우리 모두가 거절하였더니, 그는 고의로 우리 일행을 입국자들이 선 줄 맨 뒤로 보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애교 섞인 보복 정도로 봐 줄 수도 있겠으나, 입국 후에 안 사실입니다만 우리 중 한 사람의 여권에서 입국신고서를 살짝 빼내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나중에 출국을 할 수가 없습니다. 며칠 뒤 출국할 때 결국 돈 얼마를 그 심사관에서 쥐어주고서야 비행기를 탈 수 있었습니다.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다짐했습니다. “다시는 이 나라에 오지 말아야지.”
이처럼 정당하지 못한 유혹을 거절한 대가는 대개 보복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대한민국도 한 때 부패 공화국으로 불린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해마다 발표되는 각국의 부패 지수를 보면 크게 나아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 예로써, 우리는 지금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줄줄이 지난 정권에서 저지른 부정과 비리로 감옥에 가는 소위 사회 지도층 인사들을 수도 없이 봅니다. 그러나 이들이 감옥에 가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유혹을 거절한 대가가 아니라, 그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넘어간 대가라는 점이 필자 일행이 ‘캄보디아’에서 겪었던 수난(受難)과는 판이하다 할 것입니다.
지금 ‘요셉’이 겪고 있는 수치와 수난도 요부(妖婦)의 정당하지 못한 유혹을 거부한 대가입니다. 의(義)의 대가인 셈입니다. 아무리 느슨한 기준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그가 지금 받고 있는 대우는 부당하며 억울합니다. <시편>도 그의 고초를 다음과 같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시 105:18).
사실 ‘요셉’은 주인으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칭찬과 격려를 받아야 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아내의 잘못은 남편이, 또는 남편의 잘못은 그 아내가 가장 나중에 알게 된다는 냉소가 있습니다. 노무현 전(前) 대통령의 경우만 보드라도 이 말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는 검찰 조사에서 자신의 아내가 받은 뇌물에 대해서, “모른다”, 또는 “기억나지 않는다” 등으로 일관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이 불쌍한 ‘보디발’이 노 전 대통령처럼 자기 아내가 한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아내의 정숙함과 현숙함에 대해서 아무 의심 없이 지내고 있었을까? 과연 그의 아내가 집안의 다른 남자를 유혹한 것이 ‘요셉’이 처음이었을까?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받는 인상은 여인의 유혹이 참으로 집요하고, 끈질기며, 공개적이고, 공세적이라는 점입니다. 이로 미루어 집안의 다른 노예들도 이전에 이와 유사한 유혹을 수시로 받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보디발’ 역시 아내의 이런 바람기에 대해서 누군가를 통해서 들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짐작 정도는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이런 일은 숨기고 싶어 합니다. 사실 이런 유의 범죄는 소위 하층 천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만은 아닙니다. “화이트 컬러 범죄”이든 “블루 컬러 범죄”이든 범죄이기는 매 일반일 것입니다. 다만 ‘보디발’은 사회적 체면 때문에 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본문은 “그가 불같이 화를 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9절). 그러나 분노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가 누구에게, 왜 화를 냈을까요? ‘요셉’에 대해서 일까? 아니면 둘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는 데에 대해서 화가 난 것일까? 그가 진정으로 아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면, 아내를 겁탈하려 했던 ‘요셉’을 잡아 죽였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를 감옥에 보내는 것으로 일을 수습하고 마는가? 그것도 일반 범죄자들의 감옥이 아니라, 특별한 감옥 즉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아마도 정치 수용소가 아니었을까?)에 말이지(20절).
좌절과 의심. ‘보디발’의 생각을 추측해 보는 것은 이야기의 본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요셉’의 생각일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시편>은 ‘요셉’의 육체적 고통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그의 고통이 어찌 육체적인 것뿐이었겠습니까? 적어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분노, 억울함, 좌절, 허탈, 배신감은 말할 것도 없고, 아마도 이런 결심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불의의 유혹을 거절한 대가가 이런 것일진대, 다시는 孤高하게 살지 말아야지.” ‘요셉’은 그를 유혹하던 요부의 불의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내의 말만 믿고 아무런 조사도 해 보지 않고, 다짜고짜 자기를 감옥에 처넣은 그의 주인 ‘보디발’의 불의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는 것만도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그는 전심점력으로 섬기던 “하나님의 불의”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요셉’은 ‘보디발’ 만을 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보디발’을 극진하게 섬긴 것은 하나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3-24).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고, 하나님은 그 대가로 그를 감옥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이 분노하는 “하나님의 불의”입니다. 거룩함에 대한 대가가 이런 것이라면 선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선이 선으로 보답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악으로 되갚음을 받는 세상이라면, 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이집트’의 감옥에서 ‘요셉’은 이런 생각으로 절망과 비탄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람이 낳은 자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예수님으로부터 극찬을 받았던 침례 ‘요한’조차도 감옥에서 좌절과 의심으로 괴로워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본다면, 이런 질문은 결코 지나친 억측만은 아닐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요셉’은 왜 이런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일까? 왜 그가 섬기던 두 주인 ‘보디발’과 하나님으로부터 이처럼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일까? 침례 ‘요한’이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2). 이 질문은 상당히 절제되어 있긴 합니다만, 현재 그가 겪고 있는 심적 고통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인격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 먼저 예언했고, 그래서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 그가 이런 질문을 할 때에는, 그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의 정도가 어느 정도일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뭐 이런 하소연 아니겠습니까? “주님, 정말 견디기 힘듭니다. 빨리 이 고통을 끝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4-6)
주님의 요지인 즉은, ‘요한’이 겪고 있는 수난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의인, 즉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반드시 겪게 되는 필연적인 과정이라고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10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0-12)
주님의 대답이 침례 ‘요한’에게 당장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그래도 기도의 응답은 받은 셈입니다. 약속과 희망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요셉’은 <이사야>(53장)가 예언하고 있는 “고난 받는 종”의 모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 ‘모세’나 ‘욥’이나 ‘예레미야’를 들 수 있다면, <신약>에서 예수님을 대표적 인물로 만나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당하는 아무 이유 없는 억울한 처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장차 올 영광.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억울함과 고난은 일상의 양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약속 또한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희망의 약속은 단순히 미래의 영역에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이 우리의 인격을 성숙시켜주는 훌륭한 인생의 막자사발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하나님의 연단은 단순히 한 개인에게 국한될 수는 없습니다. “고난 받는 종” 이스라엘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족장들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이 일시 중단된 것처럼 보이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 것”처럼(39:2), 이집트에서 복을 내리시고, 이를 통하여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50:20). <잠언서>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로마서>는 하나님의 나라도 이와 같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내가 겪고 있는 고난이 있습니까? 왜 그런 고난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 고난도 없다면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신학적 주제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표현이나 단어는 무엇입니까? 이야기의 수미상관을 이루는 표현은 없습니까?
2. 본문의 교훈을 나름대로 이끌어내 봅시다. “제자도의 대가”(the cost of discipleship)는 어떻습니까? 이는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본 훼퍼’ 목사님이 쓴 유명한 책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3. 본문의 설화적 특징이 “미래화”라고 한다면 어떤 점에서 그러합니까?
4. 나는 죄와 ‘사탄’의 유혹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