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39과
여정의 끝
김태정 목사창세기 35:1-29약 53분 분량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35:1)
‘야곱’의 생애에 극적인 사건들이 하도 많아서 본문에 소개하고 있는 일련의 이야기들은 오히려 <야곱 순환>의 반 절정(反絶頂)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담고 있는 내용들의 면면을 보면 ‘야곱’이 ‘벧엘’로 돌아온 후 인생의 황혼기에 일어난 몇몇 이야기들을 그저 특별한 구성이나 형식에 구애받음이 없이 얼기설기 섞어놓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이런 첫 인상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본문은 그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 <야곱 순환>의 다른 에피소드들에 비해 다소 엉성하고 간략하긴 하지만, 신학적 깊이마저 그렇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특히 다른 이야기들과의 상관관계에 있어서 본문이 전해주는 신학적 주제는 결코 소홀히 다룰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본문이 족장 언약과 관련해서 전해주는 메시지는 무엇이며, <아브라함 이야기>나 <정복 이야기>나 <출애굽 이야기> 등과는 어떤 설화적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야곱의 순례>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본문은 <야곱 이야기>의 마지막이자 열세 번째 에피소드에 해당합니다(도표 참고):

하지만 본문은 <야곱 순환> 내에서 다른 에피소드들과는 달리, 하나의 통일된 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잡다한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모아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대한 단락 구분은 물론, 각 부분들이 어떻게 상호 연관성을 가질 수 있을지, 그리고 <야곱 순환> 내에서 마지막 에피소드로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 등을 파악하기는 그렇게 쉽지만은 않아 보입니다. 일견 이곳에 포함된 일련의 내용들은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그의 아버지 ‘이삭’이 죽기 직전까지의 기간 동안에 일어난 일들에 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관찰일 뿐입니다. 본문을 보다 깊이 있게 관찰해 보면 그 구조적인 원리는 <창세기> 내의 다른 이야기들에서 익히 관찰할 수 있는 그것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부르심(1절)
(2) ‘야곱’의 순종(2-8절)
(3) 약속의 재확인(9-12절)
(4) ‘벧엘’의 예배(13-15절)
(5) ‘벤야민’의 탄생: 라헬의 죽음과 장사
(6) ‘르우벤’의 수치(21-22절상)
(7) ‘야곱’의 자식들(22하-26절)
(8) ‘이삭’의 죽음과 장사(‘이삭’의 두 아들)
내용과 구조.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들은 거의 대부분 <야곱 순환> 내의 다른 많은 이야기들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본문의 내용들이 <야곱 이야기>의 다른 에피소드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 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1,3절과 28장; (2) 2, 4절과 31:29, 34-35; (3) 5절과 34:30-31; (4) 7절과 28:11-22; (5) 8절과 24:59; (6) 9절과 33:18; (7) 10절과 32:25-33; (8) 11-12절과 28:3-4, 13-15, 20-21; (9) 14절과 28:18, 22; (10) 15절과 28:17; (11) 16절과 29-30장; (12) 17절과 30-22-24; (13) 18절과 30:1; (14) 21절과 33:19; (15) 22절과 29:32; 30:3-8; (16) 22-26절과 29:31-30:24; (17) 27절과 23장; (18) 28-29절과 25:7-10.
이러한 사실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점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기본 구조와 골격은 <아브라함 순환>, <야곱 순환>, 및 <요셉 순환>이라는 세 개의 긴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이야기의 서두와 결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의 계보는 이러하니라”(11:27; 25:19; 37:2);
(2) “~의 나이가 ~세라. ~이(가)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가지 열조에게로 돌아가고 그의 아들 ~가 그를 장사하였더라”(25:7-10; 35:28-29; 49:33-50:26).
그리고 각 이야기는 그 시작과 마지막 부분에 각 족장들의 여정(旅程)과 족보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예. 11:27-12:9; 25:1-11; 37:2-36; 46:1-50:14). 본문에서 비교적 소상하게 밝혀주고 있는 ‘야곱’의 나머지 여정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야곱’은 ‘세겜’에서 시작하여 ‘헤브론’을 향하여 점차 남쪽으로 이동해 가고 있을 것을 봅니다:
(1) 옮겨가라는 명령(1-4절)
(2) ‘루스’(벧엘)로 옮김(5-6절)
(3) ‘에브라’로 옮김(16절)
(4) ‘믹달-에델’로 옮김(21절)
(5) ‘헤브론’으로 옮김(27절)
‘야곱’의 여정에 관한 이러한 기록은 그저 아무 의미 없이 무작위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상당히 의도적인 것임을 다른 <족장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서 볼 수 있는 서술들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고 있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죽음과 장사 지내는 장면에 대한 서술이 더욱 그러합니다(도표 참고):

이 도표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세 개의 <족장 이야기>는 결국 같은 구성이나 편집의 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족장 이야기>를 단순히 이야기로 부르지 않고 <족장 순환>으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각 이야기에서 “반복”과 “현재화”와 그리고 “예시”(豫示)의 기법을 놓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각 <족장 이야기>를 읽을 때 명심해 두어야 할 해석상의 관점이기도 합니다.
자료와 편집. 전통적으로 “자료비평” 학자들은 최종 편집자의 손길 외에도 전통적인 세 개의 전승 즉 <야훼 전승>, <사제 전승> 및 <엘로힘 전승> 모두가 본문 속에 들어있다고 인정해 왔습니다. 예컨대, Skinner는 본문의 자료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습니다: (1) 1-8절, 14절, 16-20절(엘로힘 전승); (2) 21-22절상과 나머지(야훼 전승); (3) 9-13절, 15절, 22하-29절(사제 전승). 그러나 최근의 자료비평 연구에 따르면 본문 속에는 <엘로힘 전승>은 전혀 없습니다. 예컨대, Westermann은 본문의 자료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1) 1-7절(최종 편집인); (2) 8절, 14-22절상과 나머지(야훼전승); (3) 9-13절, 22하-29절(사제 전승). 그러나 Coats는 9-14절 및 22하-29절(사제전승)을 제외하고 나머지 본문 모두를 <야훼 전승>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료비평 진영 내에서조차 다양한 이견이 상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해설은 Wenham을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소명(1절)
<야곱 이야기>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야곱’의 마지막 여정을 담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마지막 여정의 첫 기착지(寄着地)는 흥미롭게도 그가 ‘에서’를 피하여 도망할 때 하나님을 처음으로 만났던 곳, ‘벧엘’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서원을 한 바 있습니다. 만일 그가 무사히 이곳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하나님을 섬기겠으며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말입니다. 마침내 그는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며, 그런 점에서 그의 마지막 여정은 일종의 종교적 “순례”(巡禮)이자 “귀거래사”(歸去來辭)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 본문을 통해서 보게 될 것입니다. 순례의 첫 기착지가 ‘벧엘’이 되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1절)
‘야곱’의 일생은 이처럼 “일어나 떠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모든 여행은 자의(自意)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타의(他意)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전에 형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는 그의 부모가 그렇게 하도록 명령했고(27:43; 28:2), ‘벧엘’에서 ‘하란’을 향하여 떠날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31:13). 당시 “벧엘의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이번에는 ‘벧엘’로 “올라가라”(hl;[, 알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의 여행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여기서 명령문의 동사 “올라가라”가 함의(含意)하고 있는 바는 단순히 ‘벧엘’이 ‘세겜’보다 지리적으로 고지대(高地帶)에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바는 종교적 “순례”입니다. <시편>에서 예배와 축제를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으로 나아가는 것을 두고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 누구인가(시 24:3). 아니나 다를까 ‘야곱’이 ‘벧엘’에 다시 올라가야 하는 이유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이전처럼 “도피”가 아니라, “제단을 쌓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종교적 책임을 다하기 위함입니다. <족장 이야기>에서 족장으로 하여금 제단을 쌓으라는 명령은 이곳이 처음이긴 합니다만, ‘야곱’이 그의 만년(晩年)에 이 명령을 받고 있는 것과 ‘아브라함’이 비슷한 시기에 “번제를 바치라”(22:2)는 명령을 받았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비교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각 명령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는데, 다름 아닌 “순종에 대한 시험”입니다. 물론 그 강도에 있어 ‘야곱’의 시험은 ‘아브라함’이 받은 것보다는 훨씬 쉬운 것이긴 합니다만, ‘시므온’과 ‘레위’의 잔인한 복수극 때문에 극도로 분개해 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따돌리고 도망쳐 나오는 것 또한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참고. 34:30). ‘가나안’의 대부분의 장정들은 모두 죽었을 텐데 이들의 복수를 두려워하고 있는 ‘야곱’의 모습은, 마치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야기의 일관성을 떨어뜨리는 모순 된 표현이기는 합니다.
2. 순종(2-8절)
그럼에도 ‘야곱’은 ‘아브라함’에 버금가는 즉각적인 순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참고. 22:3):
2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2-4절)
명령을 받는 자에서 명령을 내리는 자로 바뀌고 있는 순간입니다. 그가 ‘세겜’을 떠나기 전에 집안 식구들을 향하여 내리고 있는 세 가지 지시 사항은 한 마디로 “성결 의식”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이방 신상들을 제거하고”;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이방 신을 섬기는 행위는,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출 20:3)고 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와는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도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시 24:3-4). 여기서 “허탄한 데”란 우상과 같은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방 신들을 버리는”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재 헌신의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수 24:14, 23-24; 삿 10:16; 삼상 7:3-4).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종교적 결단의 시기에 이런 의식을 행하곤 했습니다. 예배란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고, 이를 위해서는 예배자의 순결은 절대적인 전제조건이 될 것입니다. 순결 의식은 주로 몸을 깨끗하게 씻고, 의복을 갈아입고, 면도를 하는 등 가시적인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레 14:8-9; 민 8:7), 이러한 외적인 행위는 내적인 상태에 대한 당연한 표현일 것입니다. 예배의 형식은 예배의 내용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원리일 것입니다. ‘시내’ 산 계시 이전에는 옷을 씻고, 성 행위를 자제하는 것이 순결 의식의 중요한 표현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출 19:10-15). <오경>은 여러 곳에서 “성 행위”와 “피를 흘리는 행위”를 부정(不淨)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민 31:19; 레 15:18; 18:24-29). 이곳에서 ‘야곱’이 가족들에게 옷을 갈아입도록 지시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34장에서 다루고 있는 “디나 에피소드”는 이 두 가지 부정한 행위 모두가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야곱’은 가족들에게 이번에 ‘벧엘’로 올라가는 것은 이전처럼 “도피”가 아니라, “제단을 쌓기 위함” 즉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3절). 그리고 ‘벧엘’에서의 예배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그는 “환난의 날” 즉 형을 피해 도망하던 그 시절을 회상해 내고 있습니다. “환난의 날”은 특히 <시편>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시 20:1);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이 시점에 그가 특별히 기억해 내고 있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그가 드렸던 기도와 서원(誓願)일 것입니다(28:20). 그가 하나님 앞에 드렸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돌아가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가족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놀랍게도 ‘야곱’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지닌 모든 “이방 신들”과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줍니다. 이 부분에서 “귀고리들”에 관한 언급은 특별히 흥미롭습니다. 이스라엘의 후대 역사에서 “(금)귀고리들”을 녹여 “금송아지”나 “에봇”과 같은 우상을 만드는데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출 32:2-4; 삿 8:24-27). ‘모세’가 금송아지를 갈아서 가루로 만들었다면, ‘야곱’은 이들 모두를 ‘세겜’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어버립니다(4절). 이처럼 이들이 “이방 신들”과 함께 “귀고리들”마저 땅에 묻어버렸다는 사실은 그들의 결연한 각오와 자세를 느끼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앞으로 우상 숭배에 사용될 개연성이 높은 그 모든 소지들을 사전에 완벽하게 제거해버렸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이와 관련해서 훗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보여줄 모습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민 31:48-54). 이스라엘은 ‘미디안’ 족속과의 전투 후에 스스로를 정결하게 해야 했습니다(민 31:19-20). 전쟁 중에 살인을 하고 시체를 만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결 의식의 한 부분으로 전쟁 중에 획득한 전리품을 성막에 바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받은바 금패물 곧 발목 고리, 손목 고리, 인장 반지, 귀 고리, 목걸이들을 여호와께 헌금으로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려고 가져왔나이다”(민 32:50). 이로 미루어 ‘야곱’이 땅에 묻은 “귀고리들” 역시 ‘세겜’ 족속들을 잡아 죽일 때 전리품으로 탈취한 것들일 수 있습니다(어찌 귀고리뿐 이겠습니까만). 이렇게 볼 때 <창세기: 34장>과 <민수기 31:1-9>는 아주 밀접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35:1-4의 본문 역시 동일한 연장선상에서 해석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드디어 ‘야곱’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 장소를 떠납니다. 사실 그는 자식들이 저지른 대 학살극으로 인하여 그곳 주민들의 복수가 두려웠고, 신변의 위기를 느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세겜’을 곧바로 떠나지 못하고 계획했던 것보다 더 오래 지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가족들이 그를 따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 나아왔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결단에 상응하는 인도와 보호를 재확인해주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이어지는 구절이 그 해답입니다: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5절)
다름 아닌 “두려움”의 모티브입니다. 사실 ‘야곱’은 그동안 여러 가지 두려움과 싸워야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말할 것도 없고(28:17), ‘라반’에 대한 두려움(31:31)이나 ‘에서’에 대한 두려움 등이 그가 싸워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두려워 떨고 있는 쪽은 ‘야곱’이 아니라 ‘가나안’ 주민들입니다. ‘야곱’은 나름대로 두려워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만(34:30), 하나님의 두려움은 ‘야곱’이 아니라, 그 지역 주민들에게 덮쳐, 그곳을 도망치듯 빠져 나오는 ‘야곱’을 그냥 지켜보는 것 외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 장면은 <출애굽>이나 <여호수아>의 정복 이야기에 대한 반 모형(反 模型)이 되기에 충분하며(출 23:27; 신 7:20-24; 수 2:9-11), <아브라함 이야기>의 반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창 12:17-20).
마침내 ‘야곱’ 일행은 ‘벧엘’에 당도합니다:
6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6-7절)
그런데 우리는 이 장면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을 주목하게 됩니다. 우선 ‘벧엘’의 옛 이름 ‘루스’의 사용입니다. ‘루스’가 ‘벧엘’로 이름이 바뀐 것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으므로(28:19), 이곳에서 다시 이전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일견 불필요한 반복처럼 여겨집니다. 이와 유사한 경우는 본문에서 한 번 더 찾아볼 수 있는데,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35:10; 32:27-28). 이처럼 이전 이름과 새 이름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것을 두고 상이한 두 자료가 혼재해 있는 결과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화자의 의도가 담긴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창세기> 내에서 한 사건에 대한 반복 서술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며, 이는 그 사건의 중요성이나 진실성을 부각시키거나 또는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이삭’의 출생에 관한 언급이나(17:19; 18:10) 또는 <요셉 이야기>에서 짝을 이루어 소개하고 있는 꿈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37:6-10; 40:5-19; 41:1-7, 32).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보자면, 화자는 이곳에서 ‘루스’와 ‘벧엘’을 함께 묶어 사용함으로써 그곳에서 있었던 중요한 한 사건 즉 하나님의 현현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7, 13-15절). ‘야곱’이 그곳을 그냥 ‘벧엘’이라 부르지 않고 ‘엘 벧엘’, 즉 “벧엘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직역하자면 “하나님 집의 하나님”(El of the House of El)이 될 것입니다.
이어 등장하는 구절은 불필요하거나 이야기의 흐름에서 일탈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8절)
죽음에 관한 언급은 35장에서 이 곳 외에도 두 번 더 등장하고 있습니다만(19, 29절), ‘리브가’가 아닌 그녀의 유모의 죽음에 관해서, 그것도 그녀의 이름을 처음으로 거명하면서 소개하고 있는 것이 상당히 이례적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족장 이야기>는 족장들의 죽음과 장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25:7-11; 35:29; 49:33), 그들의 아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다루고 있습니다(23:1-20; 35:19). 다만 ‘리브가’의 경우만 이례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추측컨대 ‘리브가’는 ‘야곱’이 아직 ‘하란’에 거주하고 있을 때 이미 죽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리브가’는 자신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던 아들을 떠나보낸 이후 다시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27:45). 본문이 <야곱 이야기>의 마지막 에피소드로서 처음 것과 교차 대구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면, 처음 에피소드가 두 남자 ‘야곱’과 ‘에서’의 출생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하고 있다면, 마지막 에피소드는 두 여인 ‘드보라’와 ‘라헬’의 죽음으로 끝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3. 확약(9-15절)
“아브라함 언약”의 절정은 무엇일까? ‘아브라함’이 사흘간의 여행 끝에 ‘모리아’ 산에 올라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 했을 때였습니다. 그의 생애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이때만큼 결정적이고도 단정적으로 재확인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점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리아’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곳 ‘벧엘’에서 ‘야곱’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하고도 포괄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언약을 재확인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대가입니다. ‘야곱’이 훗날 그의 임종 시에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며 상기시켜주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도 바로 이 대목입니다(48:3-4):
9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10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11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12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9-12절)
이곳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회고하고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먼저 ‘야곱’의 새로운 신분 즉 정체성에 대한 재확인입니다(10절). 다름 아닌 그의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입니다. 이 새로운 이름에 대한 설명은 더 이상 필요치는 않을 것입니다(참고. 32:28).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은 <창세기>에서 너무나 자주 등장하여 이제는 아주 친숙한 표현이 되어 버렸습니다. 참고. 1:22, 28; 9:1, 7; 17:20; 28:3; 47:27; 48:4; 출 1:7.
예컨대, 하나님께서는 자식이 없는 ‘아담’과 ‘하와’나(1:22, 28), ‘노아’의 아들들과 그의 아내들에게(9:1, 7), 약속의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아브라함’에게(17:6), 아직 미혼이었던 ‘이스마엘’에게(17:20) 동일한 명령을 주신 바 있습니다. ‘이삭’ 역시 ‘야곱’을 축복하면서 같은 말을 한 바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28:3). 이곳에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전능한 하나님”으로 지칭하면서, 동일한 명령을 ‘야곱’에게 내리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미 네 명의 아내를 통해서 무려 열세 명의 자녀를 두고 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자식이 또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더군다나 이제 곧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 텐데(19절), 이 명령은 참으로 역설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명령은 단순한 자녀 출산과 관련해서 좁게 이해할 것이 아니라, 11절 후반에서 그리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11절하). 즉 민족이나 왕국의 출현과 관련한 것입니다. 민족이나 나라에 관한 이 언급은 ‘야곱’의 출생과 관련하여 ‘리브가’가 들었던 예언을 연상시켜주기도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25:23). ‘이삭’ 역시 이와 유사한 기도를 한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가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28:3).
마지막으로 땅에 관한 약속도 이전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익히 알려져 있는 것으로서, 이곳에서는 단지 이들을 다시 한 번 요약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이삭’의 기도나(28:4), ‘벧엘’에서의 ‘야곱’의 꿈에서나(28:13), 보다 멀리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17:8)에서 이 약속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아주 짧은 이 몇 구절 속에 그동안 ‘야곱’이 그의 생애에 여러 단계에서 산발적으로 들어오던 언약의 약속이 집약되어 있다 하겠습니다. 물론 그가 이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속에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등의 단기적인 약속(28:15, 20-21)은 이미 성취된 바라, 더 이상의 언급은 필요치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새로운 대목이 있다면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왕의 출현에 관한 예언입니다. 왕의 출현과 관련해서 ‘아브라함’도 듣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참고. 17:6, 16), ‘야곱’은 처음 들어보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끝으로 하나님은 ‘야곱’을 떠나십니다: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13절)
이 장면과 함께 35장은 17장과 아주 닮은 점이 많습니다. 두 곳에서 공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엘 샤다이’(전능자 하나님)를 사용하고 있으며, 족장의 이름이 바뀌는 것을 다루고 있으며, 왕의 출현에 대한 예언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각 장면은 마지막을 동일한 표현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17:22).
하나님의 현현과 언약에 대한 재확인으로 ‘야곱’의 기분은 그 어느 때보다 들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그의 일생에서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영적으로 건강하고 충만한 때가 있었을까! 그가 보이고 있는 반응은 무엇입니까?
14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15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14-15절)
그가 ‘벧엘’에 돌아와 처음 한 일은 제단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만(1, 7절), 이번에는 다시 “돌기둥”(hb;Xem, 맛체바)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전제물과 기름을 붓습니다. 이전에 그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도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은 바 있습니다만(28:18),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전제물을 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화자는 ‘벧엘’을 언급할 때마다 세 번에 걸쳐,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13, 14, 15절)으로 지칭하고 있는데, 이는 또 다른 세 번에 걸친 진술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10, 11, 12절)와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과연 이곳은 ‘벧엘’ 즉 “하나님의 집”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4. 재앙(16-22절상)
그러나 이야기는 다시 반 절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순종, 약속의 재확인과 헌신의 결단으로 상승곡선을 이어오던 이야기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비극과 재앙과 수치를 향해서 추락하고 있습니다. 출생의 환희가 있는가 하면, 죽음과 이별의 아픔이 있고, 수치와 재앙이 이 단락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생의 모든 고해(苦海)”와 질곡(桎梏)의 압축판을 보는 것 같습니다:
16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17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18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19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20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21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22상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16-22절상)
그 첫 번째가 ‘라헬’의 죽음입니다. ‘야곱’이 왜 그곳을 떠나 남쪽 ‘에브랏’으로 옮겨 갔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지도 참고). ‘에브랏’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알 수는 없습니다만, ‘벧엘’에서 걸어서 “얼마간의 거리”라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대략 두 시간 정도의 거리, 즉 11 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는 지점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여정의 마지막 기착지가 ‘헤브론’인 점을 감안한다면, 이곳은 아마 ‘예루살렘’ 북쪽의 한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은 그 이름을 통해서 추정할 수 있는 바처럼, ‘유다’ 지파의 한 부족인 ‘에브랏’ 족속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며(대상 2:19), ‘베들레헴’이나 ‘기리앗 여람’ 등의 마을이 이 지역에 있었습니다(대상 2:50-52). 그렇다면 ‘벤야민’의 출생지나 ‘라헬’의 무덤도 이곳에 위치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추측은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것이, ‘라헬’이 ‘벤야민’ 지파의 땅 ‘라마’에서 자식을 위하여 통곡했음을 암시해 주는 <성경>의 기록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렘 31:15; 삼상 10:2; 수 18:25). ‘라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8 킬로미터 북쪽에 있습니다.
아무튼 영적으로 잔뜩 고무된 그와 그의 가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비극과 재앙이었습니다.
‘라헬’이 겪고 있는 극심한 산통(産痛)은 이전에 그의 시어미 ‘리브가’가 쌍둥이가 그녀의 뱃속에서 싸우고 있을 당시 겪었던 그 고통과 같은 것입니다(25:22). 산파(産婆)의 위로의 말은 당시 산모에게 주던 의례적인 덕담(德談)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산파의 덕담을 통해서 당시 남아 선호 사상을 읽을 수 있습니다(참고, 삼상 4:20). 그러나 ‘라헬’에게 득남의 소식은 아주 각별한 것입니다. 그녀가 첫 아들 ‘요셉’을 낳았을 때 했던 말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요셉이라 하니 여호와는 다시 다른 아들을 내게 더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30:24). ‘라헬’은 이제 죽어가면서 자신의 기도의 응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러니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산모가 아이를 낳다 죽은 일은 최근까지만 해도 오히려 일상적인 일로 간주되던 터라, 당시 화자나 독자들에게 있어 ‘라헬’의 죽음이 주는 비탄이나 슬픔의 정도가 현대 독자들이 느끼는 것보다는 훨씬 덜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라헬’의 죽음이 특별히 비극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이전에 그녀가 남편을 향해서 내쏟던 불만과 항의의 절규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겠노라”(30:1).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그 아들이 지금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어미가 이제 태어나는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즉 “슬픔의 아들”로 부르고 있는 것은 너무나 적절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아내가 낳은 아들입니다. ‘야곱’에게 이 아들은 ‘벤야민’ 즉 “오른 손의 아들”입니다. ‘베노니’나 ‘벤야민’의 어원과 관련하여 다른 설명들이 있습니다: Wenham, 326-327쪽; Hamilton, 384-385쪽.
“오른 쪽”은 행운과 축복을 상징합니다(신 27:12-13; 마 25:33). 과연 이 아들을 “행운과 축복”의 열매로 불러 마땅한 것인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의 성취로 보아도 괜찮은 것일까? 그런 점에서 이 아들의 탄생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아들을 얻는 대신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를 장사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제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말 할 것도 없이 슬픔의 강도는 이번이 훨씬 더 큰 것입니다.
‘라헬’이 장사된 곳은 ‘베들레헴’이 아니라 ‘에브랏’입니다(19절). ‘라헬’의 묘지가 어딘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다른 저서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Hamilton, 387쪽; Wenham, 327쪽.
그 정확한 위치는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사무엘서>나 또는 <예레미야>에 따르면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삼상 10:2; 렘 31:15). 아내의 죽음을 기념하여 묘비를 세웁니다. 그가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무엇인가를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기는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참고. 28:18; 35:14; 35:20). 이중 두 기념비는 ‘야곱’의 사후 화자 당대에까지 계속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야곱’의 비극은 ‘라헬’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 큰 비극이자 수치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들 ‘르우벤’이 자신의 첩 ‘빌하’와 잠자리를 함께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르우벤’은 자신의 배 다른 형제 ‘단’과 ‘납달리’의 어머니와 통간을 한 것입니다! 그는 자기 어머니와 통간을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화자는 이 엄청난 사건을 지극히 짧게 단 한 문장으로 간단히 처리함으로써, 자신의 충격과 두려움을 오히려 극도로 억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르우벤’이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충동적인 욕정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Wenham, Hamilton). 그의 동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왕정 초기에 있었던 일부 사례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왕위 계승자는 선왕의 아내들마저 자신의 소유로 삼았습니다(삼하 12:8). 그리고 왕의 재위 기간 중에 그 아내를 범한다는 것은 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울’의 부하였던 ‘아브넬’이 ‘사울’의 첩 ‘리스바’와 통간을 한 사실을 알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은 크게 분노합니다. 그가 분노한 것은 단순히 윤리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왕위를 찬탈하려는 의도를 간파했기 때문입니다(삼하 3:6-7). 이와 유사한 경우를 ‘압살롬’과 ‘아히도벨’의 음모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으로 하여금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도록 충동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다윗’ 왕의 권위를 무력화시키기 위함입니다(삼하 16:20-22). ‘르우벤’은 어떤 인물인가? 디나’의 경우에서 보듯이, 그는 치밀하고, 계산적이며, 아주 냉혹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오래 전에는 그 어머니 ‘레아’에게 합환채를 가져다주어 ‘라헬’과 ‘야곱’에 대한 적개심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런 그가 ‘빌하’를 범한 것은, 그녀가 ‘라헬’을 이어 ‘야곱’이 편애하는 아내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장을 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동기가 무엇이었든 <성경>은 이런 행위에 대해서 죽음의 저주를 내리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의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여 아버지의 하체를 드러내지 말지니라”(레 18:8; 20:11; 신 22:30상). 그러나 ‘야곱’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디나’의 경우에서처럼 이번에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22절하). 무관심이었을까? 무기력이었을까? 무서움이었을까? 이들 질문은 이어지는 <요셉 이야기>의 배경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야곱’의 가정불화는 ‘레아’와 ‘라헬’에서 비롯되어, 두 여자의 자식들에게로 전가되고, 이제는 ‘빌하’의 자식들에게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봅니다. <요셉 이야기>에서는 ‘르우벤’의 밝은 면이 드러나기는 합니다. ‘요셉’을 팔아넘기려는 동생들의 계획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등 그를 구출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르우벤’에 대해서 얼마나 분노하고 있었는지는 그의 마지막 유언에서 잘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집안의 장자로서의 축복은커녕 저주가 그가 받은 유업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49:2-3).
5. 아들들(22하-26절)
‘벤야민’과 ‘르우벤’에 관한 이야기에 이어 나머지 열 명의 아들들에 관한 목록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22하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23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25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26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22하-26절)
이번에는 디나’가 빠져 있는 것이 특기할 만합니다. 이들 목록이 왜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단순히 이 목록이 다른 자료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설명이 어려운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족장 이야기>와 형식이나 구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참고. 문학과 역사). 따라서 이 목록이 기능하는 바는, ‘벤야민’과 ‘르우벤’에 관한 이야기(21-22절상)과 마찬가지로, 이어지는 <요셉 이야기>를 예비하면서, 각각의 이들이 누구의 자식인지를 다시 한 번 밝혀주기 위한 의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이들의 순서도 나이대로가 아니라 어머니에 따라입니다: ‘레아’(23절); ‘라헬’(24절); ‘빌하’(25절); ‘실바’(26절). 이 순서는 ‘요셉’만 제외하면 <출애굽>(1:1-4)에 소개하고 있는 목록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46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목록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때의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레아’의 아들들(46:8-15); ‘실바’의 아들들(46:16-18); ‘라헬’의 아들들(46:19-22); ‘빌하’의 아들들(46:23-25). 물론 이 경우에도 항상 처음은 ‘레아’의 아들들입니다.
화자는 이 아들들이 ‘밧단-아람’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벤야민’은 이중에서 제외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야곱’이 ‘밧단-아람’을 떠난 후 ‘가나안’의 ‘에브랏’에서 낳은 아들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목록은 ‘벤야민’이 ‘가나안’에서 태어났다고 서술하고 있는 <엘로힘 자료>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사제 전승>에서 유래한 것이거나, 아니면 화자가 이를 알면서도 본문의 간결함을 위해서 사실을 무시한 것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으로 보입니다.
6. 죽음(27-29절)
이제 <야곱 이야기>는 ‘야곱’이 그 땅에서 마지막으로 이른 곳에 대한 언급과 그의 아버지 ‘이삭’의 죽음에 관한 언급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27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8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27-29절)
그가 인생의 황혼기에 여정의 마지막 기착지로 마침내 정착하게 된 곳은 아버지 ‘이삭’이 살고 있는 ‘헤브론’입니다. ‘이삭’은 ‘브엘세바’에서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에 이르러 살고 있었습니다. 이 장소는 <족장 이야기>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일련의 중요한 약속을 받은 바 있으며(13:14-18; 15-18장), 나그네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처음으로 땅을 구입한 바 있기도 합니다(23장).
<야곱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삭’의 죽음에 관한 언급입니다. 그의 나이 향년 180세였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태어날 때 그의 나이는 60세였습니다(25:26). 그리고 ‘에서’가 결혼할 당시 ‘이삭’은 100세였습니다(26:34). 그리고 그가 ‘야곱’을 축복할 당시 눈이 멀고 목소리는 떨리는 등 임종을 눈앞에 둔 사람 같았습니다(27:2, 4). 그의 아내 ‘리브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27:10). 그렇다면 그는 ‘에서’가 결혼 결혼한 이후에도 80년을 더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 두 기록이 상호 모순을 보이고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 서로 다른 두 전승에서 기인한 차이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35:27-29의 자료는 <사제 전승>으로서 <야훼 전승>에 속하는 27장의 이야기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Hamilton).
그렇지 않다면 27장에서 그리고 있는 죽어가는 이삭의 모습은 다소 과장된 것일 수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이삭’의 임종에 관한 기록은 여러 면에서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임종에 관한 것과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25:7-11). 두 이야기에서 모두 두 사람의 향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25:7; 35:28).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은 서로 떨어져 살던 두 형제가 다시 만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이들이 함께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있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25:9; 35:29). ‘이삭’이 묻힌 곳은 그의 아버지가 묻혀있던 ‘막벨레’ 동굴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창세기>의 마지막에 가서야 알 수 있습니다(49:29-32).
교훈과 적용
1. 소명-벧엘로 가라
“청춘은 인생의 한 시기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다.” ‘사무엘 울만’(S. Ullman)의 말입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젊다고 믿고 있는 것만큼 젊고,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늙었으며, 스스로 확신하고 있는 만큼 젊고, 두려워하고 있는 만큼 늙었으며, 희망에 가득 차 있는 만큼 젊고, 절망하고 있는 만큼 늙었다.” 그리고 ‘포스딕’(H. M. Fodick)은 이렇게 말합니다: “젊음만 유지할 수 있다면 늙는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제임스 가필드’(J. A. Garfield)의 다음과 같은 말은 또 어떻습니까? “주름이 이마 위에 생기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마음에 생기게 해서는 안 된다.”
모두들 늙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 같습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이런 말을 듣고 어서 빨리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라도 했습니까? 적어도 필자에게는 이들 모두 공허한 말장난으로 들릴 뿐입니다. 이점에 있어 오히려 우리네 조상들이 훨씬 더 진솔하다는 생각입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이 노래는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쾌락을 즐기자는 것이라기보다는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한 짙은 거부감이나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고려 시대의 학자 우탁(禹倬)도 늙기를 거부하는 애절한 마음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전도서>나 <시편>의 기자들도 늙음을 한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그러나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므로, 우리가 늙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 소망도 없는 이방인들처럼 절망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사도 ‘바울’은 권고하고 있습니다(살전 4:13). 다소 역설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영원한 것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철들자 환갑이라”는 우리네 관용어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음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늙는 다는 것이 전혀 무익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곱’도 그의 만년(晩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와 같은 지혜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의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온통 문제 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문제 대부분은 다른 사람 아닌 자신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인생의 만년에 이르러 이전에 결코 누려보지 못했던 안식이나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말썽 많은 ‘세겜’을 떠나 ‘벧엘’로 갔고, 그곳에서 다시 조상의 무덤이 있는 ‘헤브론’으로 가서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거기서 그 어느 때보다 더 풍성하게 하나님의 임재와 기쁨 가운데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흥미롭게도 ‘세겜’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습니다(참고. 34장). ‘야곱’이 ‘세겜’ 땅에 살던 그 세월을 기억하며 떠올릴 수 있는 단어란 오직 “욕정”과 “속임수”와 “살육”과 “배신”과 “복수”와 “보복에 대한 두려움”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35장은 온통 하나님과 그분의 이름이 포함된 단어들로 도배를 하다시피 해 놓았습니다. “하나님”이 몇 번 나타나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 ‘엘’(אל)을 포함하고 있는 단어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몇 번 나타나고 있는지 세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볼 때 ‘야곱’ 인생의 황금기는 황혼기에 찾아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세겜’을 떠날 때 나이가 몇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이곳에서 그의 나이 120이라고 하고 있고, 147세에 죽었으니(창 47:28), 이곳에서 적어도 30 내지 40년은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태어날 때 ‘이삭’의 나이는 60이었으며(창 25:26), ‘이삭’은 180세에 죽었으니, 이 때 ‘야곱’의 나이는 120세가 됩니다. 그리고 ‘야곱’은 147세에 죽습니다(창 47:28). 그러나 35장에서 다루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비교적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일어난 것들로 보아야 하며, 이중 많은 부분이 ‘이삭’이 ‘헤브론’에 살고 있던 기간과 겹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 기간이 ‘야곱’의 인생에서 가장 풍성했던 기간이었던 셈입니다(여전히 골치 아픈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만).
파란만장했던 인생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지 않고, 그나마 안락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게 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야곱’의 넉넉한 황혼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35:1). 이 부르심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든, 그의 나이가 몇이든, 어떤 상황에 있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위치나 상황에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서 특권이자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소명(召命)은 항상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의미와 목표를 설정해 주기도 하며, 수정해 주기도 하고, 또는 새롭게 기억나게 해 주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런 경험을 한 번도 해 보지도 못하고 한 평생을 보내는 것만큼 더 허망한 인생이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나의 소명은 무엇이었습니까? 지금도 그것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궤도 수정을 해야 했습니까? 아니면 처음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다 사라져 버렸습니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내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때가 늦어버렸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 7:6). 우리에게 있어 너무 늦은 때란 있을 수 없다는 메시지임에 분명합니다. 우리가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여 순종할 준비만 되어 있다면 말입니다. 늘 문제는 우리의 게으름이거나 또는 불순종인 것이겠지요. ‘야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에게 남아 있는 시간은 이제 불과 삼사십 년 이거나, 또는 무려 삼사십 년입니다. 이 말은 그가 자신의 남은 생애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인데, 하나님에게는 별로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전능자의 팔이 짧아서, 또는 때가 너무 늦어서 이루지 못할 일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셨고, 그가 잊고 있었던 소명을 새롭게 일깨워주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야곱’을 향한 부르심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가 가야 할 ‘벧엘’은 과연 어떤 곳입니까?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회고.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는 소명은 낯설거나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엇인가 새롭게 기억나게 하고, 회고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가 기억해 내어야 할 사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과연 하나님께서는 지금 ‘야곱’에게 그 ‘벧엘’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1절하).
이제 ‘야곱’은 ‘세겜’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이 도시가 복수와 살육과 두려움의 도시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곳을 떠나기는 해야겠는데, 어디로 또 가야할지 막막합니다.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형이 살고 있는 ‘에돔’으로 갈 수도 없습니다. 어디로 가야할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 시점입니다. 아마 그는 이 계시를 받는 순간, “아, 그렇구나!”하며 탄성을 질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삼십 년 전의 일들이 갑자기 어제의 일처럼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그의 처지는 지금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가 두려워 피하려 했던 상대가 다를 뿐입니다. 이전에는 형을 피하여 도망가야 했지만 지금은 ‘세겜’ 주민들의 보복이 두려워 떠나야 할 참입니다. 답답하고 막막합니다. 그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마치 영화 필름을 되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전의 그 장면이 다시 나타나고, 이전의 배경 음악이 다시 들려오고, 이전의 그 인물들이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영화 <타이타닉>의 마지막 부분을 기억하십니까?). 아니, 등장인물들도 다시 나타난다고요? 그렇습니다. 누가 나타나야 합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은 그 때 그 하나님을 다시 만난 것입니다. 과연 그분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한 결 같이 ‘야곱’ 곁에 계셨던 것입니다. ‘야곱’도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달은 듯합니다. 그의 외침을 들어봅시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3절). ‘야곱’은 지금 아름다웠던 지난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소명과 비전과 약속을 기억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내가 기억해 낼 수 있는 과거는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내 환난 날에 응답하신 적이 있습니까? 항상 나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있습니까? 내가 돌아갈 수 있는 “출애굽”이나 “벧엘의 꿈”이 있습니까? 내 인생에 더 이상 낙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영광스러운 영원의 꿈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차이는 내가 간증하고 나눌 수 있는 “출애굽”이나 “벧엘의 꿈”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나의 “출애굽”은 언제였습니까? 그 때 나는 무엇을 헌신했습니까? 지금도 감격과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 첫사랑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재 헌신. 누가 “인생은 칠십부터”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야곱’의 인생은 120부터입니다. 소명의 재확인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명은 단순히 확인하거나 회고하는 것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날 때 어떻게 했는지 그 당시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여호수아’ 군대가 ‘요단’을 건넌 후 어떻게 했습니까?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어떻게 했습니까? 재 헌신의 결단과 행동입니다. ‘야곱’도 지금 이 자라에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아마 난생 처음으로 온 가족 구성원들을 독려하면서 동일한 헌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3절).
‘야곱’의 간증은 효력이 있었나 봅니다. 이번에는 모두가 하나가 되어 가장(家長)의 요구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사분오열(四分五裂) 되었던 공동체가 모처럼 하나가 되는 순간입니다. 이들은 각자 지니고 있던 우상들을 ‘야곱’에게 주고 ‘야곱’은 이들을 땅에 묻어버립니다(4절).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지금까지 이런저런 우상들을 지니고 다녔는지 믿기지 않습니다만, 헌신은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묻었던 때를 벗겨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의 마술사들이 사도 ‘바울’의 전도로 회심을 한 후, 그들이 쓰든 모든 책들을 불사르는 등 헌신의 결단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행 19:19). 이처럼 헌신은 구체적인 행동을 동반하기 마련입니다. 나는 처음 믿었을 때 무슨 헌신을 했습니까? 내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내가 “상수리나무” 아래 묻어버릴 신상과 귀고리는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열거해 봅시다.
‘야곱’의 헌신은 일회성으로 끝난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개가 그 토한 곳으로 되돌아가듯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지는 않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가고 성숙해 갔던 것이겠지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떼를 쓰기보다는 오히려 무엇을 드릴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집착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되었고, 순간적이고 찰나적인 것들보다는 영원한 것에 대한 열망이 깊어져 갔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주신 그 모든 것들, 즉 집이나 사람이나 장소나 사건들보다는 하나님 그분을 더 잘 알고 싶다는 열망으로 노후(老後)를 보냈던 것 같다는 말입니다. 단정적이지는 않지만, 이러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한 사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즉 그는 ‘벧엘’에 이르러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 벧엘’로 부르고 있습니다(7절). 알다시피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며, ‘엘 벧엘’은 “벧엘의 하나님” 즉 “하나님 집의 하나님”입니다. 그의 관심사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으로 중심축이 이동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일 수가 있습니다(J. M. Boice). 그가 처음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이 장소는 특별히 거룩한 장소였기에 “하나님의 집”으로 불렀을 것입니다만, 이제는 그 집이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징표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런 추측에 동의하든 않든, 젊은 시절 우리의 관심사는 신앙의 본질보다는 형상 또는 형식에 많이 치우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물, 장소, 행사, 공적 예배 등등은 중요한 관심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그리고 인생의 황혼에 접어들수록 이런 것들보다는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욕구가 생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풀은 마르고 꽃은 지며, 인걸도 사라질 것이며, 산천도 유구하지 않다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 더 절감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도 바로 이 시기가 될 것입니다. 즉 바로 이 시기에 하나님과의 보다 은밀하고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기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고백이 이런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나도 이 나이에 이런 열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만 있다면!
2. 축복-이스라엘이라 하라
이런 열망에 부응이라도 하듯 하나님은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십니다. ‘야곱’이 그동안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벧엘’의 현현을 기억해 냈고, 축복과 약속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축복을 오늘 재 헌신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헌신했고, 과거의 모든 때를 벗겨냈습니다. 그는 이전의 ‘벧엘’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과거의 ‘벧엘’을 현재로 불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과 내일을 위한 자산으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십니다. 이번에는 ‘벧엘’의 약속과 함께 ‘얍복’강의 추억도 함께 기억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네 이름이 야곱이지만은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10절). 왜 하나님은 그의 새로운 이름을 다시 상기시켜주고 계시는 것일까? 그는 이미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그날 ‘얍복’강의 씨름(32:24-28) 이후 하나님은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그를 새롭게 바라보시겠다는 말일 것입니다. 새로운 관계라고 할까요.
그러나 ‘야곱’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새로운 이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새 부대에는 새 술”을 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몰랐던 것이겠지요. <창세기> 화자도 그날 이후 지금까지 ‘야곱’을 부를 때마다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전 이름 ‘야곱’으로 계속 불러 왔습니다. 화자가 ‘야곱’과 이스라엘을 번갈아 부르고 있는 것은 이 사건 이후부터입니다(창 35:16 이후).
아마 그 속에 ‘야곱’과 이스라엘이 함께 살면서 서로 왕 노릇 하려고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기도 합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3상). 사도는 그러나 이 고백과 함께 다음과 같이 통탄하며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당연히 그 대답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의 ‘야곱’도 이스라엘이 된 이후 이런 영혼의 갈등과 고통을 겪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세겜 사건” 이후 그의 영혼과 육체는 궁지로 내몰리고 있었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먼저 나타나셔서 그로 하여금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고,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에 걸 맞는 생활을 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시에는 늘 약속이나 축복이 따랐음도 함께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특히 이번에는 새로운 약속을 추가로 더해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창 35:11-12).
그가 “생육하고 번성하겠다”는 약속은 얼마나 흥미롭습니까? 그는 이미 열두 명의 아들을 두고 있으며(23-26절), 이제 늙어 더 이상 자식을 볼 수도 없는 상황 아닙니까? 그러나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이 어찌 나이에 국한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한다면 말입니다. 이어지는 약속도 그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단순히 열두 명의 자식을 그의 생전에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후에는 나라와 민족과 왕국까지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 속에는 그 땅의 정복에 관한 것도 당연히 전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혹시 나에게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미흡하다고 생각되는 하나님의 약속이나 축복이 있습니까? 혹시 그것이 내 자식 대에 가서 이루어져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축복과 관련해서 한 가지만 더 기억합시다: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시는지라”(13절). 무슨 말입니까? 추측건대 이날 이후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직접적인 “현현”(顯現)의 방식으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후 하나님께서 ‘요셉’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시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이 아니라 다소 간접적인 방식 즉 꿈을 통해서 나타나셨을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족장 시대는 야곱에 이르러 그 끝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일종의 전환기에 속한 인물인 셈입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이날 이후부터 ‘야곱’에게는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새로운 “벧엘의 꿈”이나 “얍복강의 씨름”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현이 ‘야곱’의 나머지 생애를 인도하고 지시해 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계시를 체험했고,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 있으며, 이 지식을 바탕으로 나머지 삶을 살아가면 될 것입니다. 나머지 삶이 어떻게 전개되든지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야곱’은 죽을 때까지 그야말로 “초 신령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늘 새로운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마다, 새로운 하나님의 현현을 기대하고 기도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 개인에게 이점이 진실이라면,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벧엘의 꿈”이나 “얍복강의 씨름”에 버금가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성경>이 그것입니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 하나님의 계시는 신자 속에 거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조명으로 <성경>을 통해서 끊임없이 계시되어 왔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경> 외에 새로운 하나님의 계시를 알려고 애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말씀을 <성경> 속에 두셨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 즉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그 모든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지금 청년의 때에 살고 있든, 나이 들어 더 이상 인생의 낙이 없다고 생각하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나 계시를 알고 싶다면, <성경>을 들고 읽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일련의 표지판이란 없습니다! 설령 있다 해도 우리는 그 진위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는 행복한 무리입니다.
3. 하나님의 나라-이미와 아직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한 가장 큰 역설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고, 아직 올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두 나라를 상징하는 각각의 원(圓)이 일정 부분 서로 겹쳐 있는 모습을 연상하면 될 것인데, 우리의 삶은 바로 이 겹쳐져 있는 부분에 놓여 있습니다. 전문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 겹쳐 있는 부분 속에 죽음과 삶, 고통과 환희, 그리고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과도기이자 전환기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실체입니다.
삶의 진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진리 중의 하나는 “삶은 고해”(苦海)라는 사실입니다. 석가는 사해(四海) 가운데 삶을 가장 큰 고해(苦海)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반쪽 진리일 뿐이지만, 우리 인생에게는 늘 진리의 전부인양 다가와서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야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세 사람의 죽음을 목도하게 됩니다: ‘드보라’; ‘라헬’; ‘이삭’. 세 사람의 죽음 모두 ‘야곱’에게는 깊은 슬픔을 안겨주는 사건일 수밖에 없습니다.
화자가 ‘드보라’를 언급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이 여인은 ‘리브가’의 몸종으로서 ‘리브가’가 가나안으로 시집올 때 함께 따라와, 지난 150년을 한 가족으로 동고동락해 왔습니다. 모르긴 해도 이 여인은 ‘리브가’가 죽은 후에도 가족의 일원으로서, ‘야곱’과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왔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인과 종이 아니라 서로 깊이 신뢰하는 친구로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런 ‘드보라’가 죽었을 때 ‘야곱’이 그녀를 ‘벧엘’의 상수리나무 아래 장사하고서는 그 장소를 ‘알란 바굿’, 즉 “통곡의 상수리나무”로 명명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의 슬픔이 얼마나 컸던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슬픔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의 삶의 의미이자 목표였던 ‘라헬’의 죽음은 ‘야곱’의 일생에서 가장 큰 비극이자 슬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16절). ‘야곱’은 처음 그녀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져버렸고, 그녀와 결혼하기 위하여 무려 14년을 기다렸던 여인이었습니다. 총애하는 아들 ‘요셉’이 그녀로부터 나왔고, 두 번째 아들 ‘벤야민’을 출산하면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합니다. 훗날 ‘야곱’이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면서 ‘라헬’에 관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목이 메어 말을 못할 정도로 그의 비탄이 얼마나 컸던 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지켜보아야 했던 죽음은 아버지 ‘이삭’의 죽음입니다. 화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삭’은 향년 180세로 장수를 누렸으니(29절) 특별히 애통할 만 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죽음은 자식에게는 큰 슬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버지 생전에 그를 속인 일이나, 그로 인하여 자신은 물론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큰 상처와 갈등을 야기 시켰던 점은 큰 후회로 남아 있습니다. 원래 불효자가 부모의 장례식장에서 더 많이, 더 크게 운다고 하는데, 혹시 ‘야곱’이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비오는 날 울어대는 청개구리처럼 말입니다.
이것으로 ‘야곱’의 인생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까? 더 이상의 슬픔이나 고통은 없었습니까? <황금 연못>가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수치스러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자신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성경> 이야기에 결코 포함시켜서는 안 될 수치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의 사후(死後)가 아니라, 생전입니다.
무엇입니까? 큰 아들 ‘르우벤’이 ‘빌하’와 통간을 한 것입니다(22절). ‘빌하’는 자기 이모 ‘라헬’의 몸종이자 아버지의 첩입니다. 아버지의 첩과 상관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다룬바 있으므로, 더 이상 이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만, ‘야곱’은 이 일로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화자는 ‘야곱’의 반응에 대해서 단순히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22절하)고 처리해 버림으로써, 그의 반응을 우리로 하여금 상상해 보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르우벤’이 어떤 인물입니까? 친 동생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분노와 수치로 몸을 떨던 자가 아닙니까? 그는 ‘세겜’이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치 못할 일을 행했다”고 울부짖었습니다(참고. 34:7). 그리고 <성경>이 정하는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을 어겨가면서까지 잔인한 유혈 복수극을 감행했던 자입니다. 그런 그가 이런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 일이 ‘빌하’의 동의하에 이루어진 것인가는 문제의 핵심은 아닐 것입니다. 명예와 정의를 생명처럼 여기던 그가 이런 일을 스스로 저지르다니! ‘야곱’도 우리처럼 유구무언(有口無言)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일은 다시 한 번 ‘야곱’의 가슴에 씻을 수없는 상처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이 정도면 인생은 충분히 “고해” 그 자체가 아닐까! 더 이상 무슨 낙이 남아 있겠는가? 그러나 죽음과 수치로 대표되는 그의 어두운 인생에 그래도 새 생명의 탄생과 희망의 약속이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라헬’의 죽음을 대신하여 ‘벤야민’이 새 생명을 이어갈 것이고, ‘이삭’의 죽음을 대신하여 ‘야곱’의 열두 아들이(22-25절) 이스라엘을 이어갈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이처럼 죽음과 삶, 과거와 미래, 그리고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완전히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살다가 갈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러하겠지요.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설 것이라는 점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은 <야곱 이야기>의 열세 번째 에피소드에 해당합니다. 어떤 내용들이 있는지 기억해 보고, 이들 각 내용들이 <야곱 이야기>나 <족장 이야기>의 핵심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토의해 봅시다.
2. ‘야곱’이 ‘세겜’에서 ‘벧엘’로 간 것에 대해서 그 의미와 교훈을 이끌어내 봅시다.
3. <갈라디아서>는 이스라엘을 어린 아이, 그리고 신약 교회를 어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와 교훈을 이끌어내 봅시다. 특히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해서 논의를 발전시켜봅시다.
4. 나는 공적 예배나 성경 공부 또는 개인 경건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습니까? 지난 주 내가 들었던 소명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 소명과 반응을 공개적인 헌신의 간증을 통해서 드러냈습니까? 공적 예배나 목장 모임이나 성경 공부의 마지막은 실은 이런 방식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것도 단순히 한 두 마디의 말로써가 아니라, 기도나 간증을 써보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주 내가 버려야 할 귀고리는 무엇입니까? 이번 주 새롭게 헌신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구체적인 목록을 만들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