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40과
에서의 계보
김태정 목사창세기 36:1-37:1약 44분 분량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나(36:1)
<창세기> 36장은 <창세기> 내에서 가장 긴 장(章) 중의 하나로서, 내용도 순전히 한 개인 ‘에서’의 족보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에서’의 후예들 즉 ‘에돔’ 족속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주변적인 이야기일 뿐일 텐데, 화자가 이처럼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에서’의 족보를 ‘이스마엘’의 족보(25:12-18)와 비교해 보아도 더 상세하고 길 뿐만 아니라, 그 형식에 있어서도 지극히 이례적임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이곳에서 화자는 ‘에서’의 족보를 두 번에 걸쳐 소개하고 있습니다: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36:1)
“세일 산에 있는 에돔 족속의 조상 에서는 이러하니라”(36:9)
“‘에서’의 계보”를 <족장 이야기>의 구조적 틀 속에서 이해해 볼 때, 당연히 이곳에 있어야 하겠지만(아래 설명 참고), 그 내용에 있어 두 번째 계보(36:9-43)를 “‘이스마엘’의 계보”와 비교해 볼 때 이례적으로 길고 상세합니다. 이 두 계보를 비교해 봄으로써, 본문의 문학적 기능을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족보는 단순히 족보일 뿐입니다만, 흔히들 족보에도 신학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에서’의 족보를 이처럼 상세하게, 반복해서 다루고 있는 화자의 신학적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에돔’ 족속은 ‘에서’의 후예들로서, 주변 어느 족속들보다 더 밀접하게 이스라엘과 애증(愛憎)의 역사를 형성해 갔습니다. 아마 이런 점이 화자의 특별한 관심을 끌게 한 주 요인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하여 화자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성경>은 ‘에서’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어떤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까?
문학과 역사
범위와 단락. ‘에서’의 족보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열 번의 “족보”(톨레돗) 중 아홉 번째에 해당됩니다: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36:1). 이 족보의 특징과 기능을 파악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열 개의 족보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땅과 하늘의 계보(2:4); (2) ‘아담’의 계보(5:1); (3) ‘노아’의 계보(6:9); (4) ‘노아’의 아들들의 계보(10:1); (5) ‘셈’의 계보(11:10); (6) ‘데라’의 계보(11:27); (7) ‘이스마엘’의 계보(25:12); (8) ‘이삭’의 계보(25:19); (9) ‘에서’의 계보(36:1); (10) ‘야곱’의 계보(37:2).
이처럼 친숙한 ‘톨레돗’의 전형적인 표현이 본문의 시작을 알려주고 있습니다만, 위에서 본 것처럼 본문 중간(9절)에 거의 동일한 표현이 또 한 번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 지극히 이례적이며, 따라서 별도의 설명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창세기>에서 마지막이자 열 번째 ‘톨레돗’은 “야곱의 족보”로서 37:2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본문의 범위는 자연스럽게 36:1-37:1로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37:1)는 본문의 결론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이 구절은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36:8)와 상호 균형을 이루고 있기도 합니다.
본문의 구조는 열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1.제목(1절)
2.‘에서’의 결혼(2-5절)
3. ‘세일’로 간 ‘에서’(6-8절)
4. ‘에서’의 후손들(9-14절)
5.‘에서’의 후예: 족장들(15-19절)
6.‘호리’ 족속 ‘세일’의 후손(20-28절)
7.‘세일’의 후예: 족장들(29-30절)
8.‘에돔’의 왕들(31-39절)
9.족장들(40-43절)
10.‘야곱’의 행적(37:1)
내용과 형식. 본문 속에는 “다양한” 자료가 혼재해 있으며, 동시에 동일한 자료가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컨대, 두 번째 단락(2-5절)은 ‘에서’의 세 아내와 다섯 아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네 번째 단락(9-14절)은 이를 다시 반복해서 보여주면서 이번에는 ‘에서’의 첫 두 아들에게서 난 손자들의 이름을 더하고 있습니다. ‘에서’의 후손들에 관한 기록은 다섯 번째 단락(15-19절)에서 또 한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이번에는 ‘에서’의 자손 중 “족장”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에서’의 세 번째 아내의 자식들에게서 난 자손들입니다. 이어서 여섯 번째 단락(20-28절)과 일곱 번째 단락(29-30절)은 모두 ‘세일’의 자손들에 관한 기록인데, 차이가 있다면 여섯 번째 단락이 ‘세일’의 일곱 아들과 스무 명의 손자들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에 비해 일곱 번째 단락은 ‘세일’의 자손들 중 “족장”들만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여덟 번째 단락(31-39절)과 아홉 번째 단락(40-43절)은 각각 ‘에돔’의 여덟 왕과 ‘에서’에게서 나온 열한 명의 족장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왜 이처럼 ‘에서’ 곧 ‘에돔’ 족속에 관해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을까? 이들 족속이 혈연적으로 이스라엘과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으며, 한 때는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있기도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제외하고 나면 특별한 이유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구조적 틀 안에서 보자면 ‘에서’의 족보가 이곳에 있어야 할 당위성은 충분하다 할 것입니다. <창세기>의 열 개의 계보 중에서 마지막 네 개가 어떻게 상호 연결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면 그 당위성을 쉽게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 개의 계보가 연결되는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선택된 백성에 관한 긴 이야기가 선택받지 못한 백성에 관한 짧고 간단한 기록에 이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화자의 신학적 의도가 무엇이든 ‘에서’의 계보가 이곳에 있어야 할 문학적 당위성은 충분하다 할 것입니다:
일곱 번째 계보: ‘이스마엘’의 계보(25:12-18)
여덟 번째 계보: ‘이삭’의 계보(25:19-35:29)
아홉 번째 계보: ‘에서’의 계보(36:1-37:1)
열 번째 계보: ‘야곱’의 계보(37:2-50:26).
자료와 편집. 본문의 또 다른 형식적 특징, 즉 유사(類似) 자료의 “반복”에 관해서는 자료설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만, 과연 언제 여러 전승들이 하나의 본문으로 편집되었는지에 관해서 알 길이 없으며, 본문 속에 상충되어 보이는 기록들에 관해서도 과연 고대 편집자나 당시의 독자들이 오늘날의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인식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본문 안에 내용적으로 상충되거나 모순되는 부분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 혹자는 서로 다른 배경을 반영하거나 대변하는 일련의 “에돔 전승”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합니다(R. R. Wilson). G. Wenham, 335쪽(참고도서 1).
다른 배경이라 함은 다른 “삶의 자리” 즉 다른 “공동체”나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 견해가 옳다면, 당연히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첫째, 이들 전승들이 각기 다른 시대에 존재하던 것들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자료들을 다루는 후대 편집자들은 각 자료가 실제 속해 있던 공동체 내에서는 정확 무오(無誤) 했을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상이한 자료 간의 모순이나 충돌에 대해서는 고려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 그리고 일견 상충되거나 모순되는 계보의 기록들이 서로 다른 자료나 구두(口頭) 전승에 속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자료 모두 동 시대에 속해 있던 것들로서, 같은 자료나 전승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제는 본문에 대한 자료비평을 하고자 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관점이기도 합니다. 대개 계보는 그 내용이나 형식에 근거해서 볼 때 “사제 전승”(P 전승)으로 구분합니다만, 본문에서 보듯이 다양한 자료가 혼재해 있기 때문에 본문 전체를 “사제 전승”으로 구분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예컨대, ‘에서’의 아내들의 이름을 담고 있는 아래 두 구절도 흔히 “사제 전승”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으로서 본문의 기록(36:2-3)과는 다소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36:2-3)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26:34)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28:9)
이런 차이나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특히 본문의 두 번째 계보(9-43절)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후자의 질문과 관련해서 학자들은 두 가지 정도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사제 기자”가 사용한 자료로 간주하거나, 또는 후대의 편집적 삽입으로 간주하거나입니다. 그러나 두 선택 사이에서 어떤 쪽을 취할 것인가는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로 남아있습니다. 두 번째 계보(9-43절)의 자료나 편집과 관련해서 다양한 견해가 알려져 있습니다: G. Wenham, 335-336쪽(참고도서 1).
두 번째 계보에 대한 역사 비평의 연구 결과가 어떻든 이 단락은 그 자체로서 아주 정교한 하나의 단위임에 분명합니다(도표 참고):
이 단락은 다시 세 개의 작은 단위로 나눌 수 있으며, 각 단위는 후손들(또는 왕들)의 목록과 뒤이어 족장들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10-14절//15-18절; (2) 20-28절//29-30절; (3) 31-39절//41-43절. 그리고 이 단락의 큰 제목을 담고 있는 9절의 내용은 43절의 간기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제목(1절)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1절)
본문의 제목은 <창세기>의 다른 아홉 번의 계보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참고. 6:9; 11:27; 25:12, 19). ‘에서’와 ‘에돔’에 대해서는 <야곱 이야기>의 다른 에피소드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2. 에서의 결혼(2-5절)
이 두 번째 단락은 ‘에서’의 세 번의 결혼과 그로부터 태어난 다섯 명의 자식들에 대한 목록입니다. 목록과 함께 도표를 만들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2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3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 4아다는 엘리바스를 에서에게 낳았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고, 5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요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태어난 자들이더라(2-5절)

그러나 이 계보는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창세기>의 다른 본문과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26:34)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28:9)
‘에서’의 아내들 중 그 이름이 일치하는 사람은 ‘바스맛’ 뿐입니다. 그러나 ‘바스맛’에 대한 소개마저 각기 다릅니다. 본문에서는 ‘바스맛’을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나(3절), 26:34에서는 ‘헷’ 족속 ‘엘론’의 딸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따르면 ‘헷’ 족속 ‘엘론’의 딸은 ‘아다’입니다(2절).
왜 이들 기록이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는지, 그리고 이들 기록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에서’가 세 명 이상의 아내를 두었거나, 또는 이들이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었거나, 또는 개명(改名)을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각 여자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참고 도서를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Wenham, 337-341쪽.
3. 세일로 간 에서(6-8절)
‘에서’가 ‘세일’로 이사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이 세 번째 단락을 마지막으로 그의 행적은 <창세기>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6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7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8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6-8절)
‘에서’의 이주(移住)를 묘사하고 있는 이 장면은 <족장 이야기>에서는 이미 친숙한 것으로서, 단순히 한 가정의 이주라기보다는 부족 간의 결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컨대, ‘아브라함’과 ‘데라’의 결별이나(12:5), ‘아브라함’과 ‘롯’의 결별(13:5-6), 또는 ‘야곱’과 ‘라반’의 결별(31:18) 등을 연상시켜주는 장면입니다. 화자는 ‘에서’가 ‘세일’로 떠나는 이유에 대해서 ‘아브라함’과 ‘롯’이 결별해야 했던 이유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7절). 두 형제의 소유가 너무 많아 함께 거주하기에는 그 땅이 너무 좁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세겜’의 ‘하몰’이 했던 이야기를 기억해 볼 때, 그 땅은 결코 그렇게 좁지만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이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34:21). ‘에서’가 가축이나 소유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 땅은 두 형제가 함께 살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것은 아니었다는 암시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에서’는 ‘롯’과 같은 운명을 선택합니다. 즉 약속의 땅 밖에 살기로 선택했고,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기록 밖에 남기를 선택한 것과 같습니다. 이 본문을 37:1에 바로 연결하면, ‘에서’의 선택과 ‘야곱’의 선택이 더욱 두드러지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아마 원래의 전승은 36:8은 37:1과 바로 연결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36:8)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37:1)
4.에서의 후손들(9-14절)
이 단락에서 소개하고 있는 ‘에서’의 후손에 관한 정보는 두 번째 단락(2-5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을 보충하거나, 보완하는 수준입니다. 그리고 이 단락의 소제목(9절) 역시 본문 전체의 제목(1절)을 형식 상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9세일 산에 있는 에돔 족속의 조상 에서의 족보는 이러하고, 10그 자손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은 엘리바스요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은 르우엘이며, 11엘리바스의 아들들은 데만과 오말과 스보와 가담과 그나스요. 12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13르우엘의 아들들은 나핫과 세라와 삼마와 미사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자손이며, 14시브온의 손녀 아나의 딸 에서의 아내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은 이러하니 그가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에서에게 낳았더라(9-14절)
화자가 이곳에서 새롭게 제공하고 있는 일련의 정보는 첫 번째 단락과 비교해 볼 때,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제 1절에서 ‘에돔’과 ‘에서’를 같은 인물로 소개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에서’를 ‘에돔’ 족속의 조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이 단락에서 ‘에서’의 가계는 그의 두 아들 ‘엘리바스’와 ‘르우엘’을 통해서 낳은 도합 열 명의 손자들을 포함하여 3대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 계보를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도표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오홀리바마’의 세 아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언급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들 세 아들에 대해서는 ‘엘리바스’와 ‘르우엘’을 통해서 태어난 열 명의 손자들을 다 언급한 다음에 소개하고 있다는 점도 이상합니다(14절). 화자는 ‘아말렉’이 ‘엘리바스’와 그의 첩 담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며, 그를 포함해서 ‘에서’의 아들과 손자들은 도합 열다섯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숫자는 ‘이스마엘’의 열두 아들(25:12-16)이나 ‘야곱’의 열두 아들(35:22하-26)이나, 또는 ‘나홀’의 열두 아들(22:20-24)을 상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족보에서 첩의 아들 ‘아말렉’을 제외시키고, ‘오홀리바마’의 세 아들을 한 사람으로 간주한다면, ‘에서’의 자손 역시 열두 명이 됩니다. 혹자는 이와 관련해서 원래의 전승에는 열두 명의 이름만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현재의 목록에 소개하고 있는 열다섯 명의 이름 중에서 <성경>를 통해서 그 신원이 알려져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데만’(암 1:12); ‘그나스’(창 15:19); ‘아말렉’(출 17:8-16; 민 14:39-45; 신 25:17; 삼상 15). Wenham, 337-338쪽.
5. 에서의 후예: 족장들(15-19절)
이 단락에서 거명하고 있는 인물들의 목록은 바로 직전에 소개한 바 있는 목록(9-14절)과는 대동소이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앞 단락을 <야훼 전승>으로, 그리고 이 단락은 <사제 전승>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15에서 자손 중 족장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의 자손으로는 데만 족장, 오말 족장, 스보 족장, 그나스 족장과, 16고라 족장, 가담 족장, 아말렉 족장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엘리바스의 족장들이요 이들은 아다의 자손이며, 17에서의 아들 르우엘의 자손으로는 나핫 족장, 세라 족장, 삼마 족장, 미사 족장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르우엘의 족장들이요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자손이며, 18에서의 아내인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은 여우스 족장, 얄람 족장, 고라 족장이니 이들은 아나의 딸이요 에서의 아내인 오홀리바마로 말미암아 나온 족장들이라. 19에서 곧 에돔의 자손으로서 족장 된 자들이 이러하였더라(15-19절)
하지만 두 목록 사이에는 몇 가지 특징적인 차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두 도표 참고). 첫째, 이곳에 소개하고 있는 사람들은 ‘에서’의 손자(孫子)들로서 모두 “족장”(#WLa, 알루프)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단어는 36장에서만 42회 등장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목록이 <역대기>에 다시 한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대상 1:51-54). 그러나 그 외는 불과 네 번 등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출애굽기>는 이 단어를 ‘에돔’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에돔’ 족속의 용어일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출 15:15상). 그리고 <스가랴>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해섣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단어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사용해오던 단어였던 것으로 보입니다(슥 9:7; 12:5-6). 그의 입에서 그의 피를, 그의 잇 사이에서 그 가증한 것을 제거하리니 그들도 남아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유다의 “족장”(#WLa, 알루프) 같이 되겠고 ‘에그론’은 ‘여부스’ 사람 같이 되리라(슥 9:7); ‘유다’의 “족장”(#WLa, 알루프)들이 마음속에 이르기를 ‘예루살렘’ 주민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할지라, 그 날에 내가 ‘유다’ “족장”(#WLa, 알루프)들을 나무 가운데에 화로 같게 하며 곡식 단 사이에 횃불 같게 하리니 그들이 그 좌우에 에워싼 모든 민족들을 불사를 것이요 ‘예루살렘’ 사람들은 다시 그 본 곳 ‘예루살렘’에 살게 되리라(슥 12:5-6).
다만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왜 이 족장들의 목록이 ‘에서’의 계보 다음에 등장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둘째, 두 계보는 ‘엘리바스’의 두 아들에 대해서 그 순서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이전 계보에서는 ‘가담’과 ‘그나스’가 각각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아들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만(9-14절), 이곳에서는 각각 여섯 번째와 네 번째로 소개하고 있습니다(15-16절). 셋째, 두 계보에서 ‘엘리바스’의 아들의 수가 다릅니다. 이전 계보에서는 여섯 명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이곳에서는 ‘고라’를 추가하여 모두 일곱 명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에서’가 ‘엘리바스’와의 사이에 일곱 명의 아들을 둔 것은 ‘야곱’이 ‘레아’와의 사이에 일곱 명의 자녀를 둔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계보에 등장하고 있는 두 명의 ‘고라’는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는 ‘엘리바스’의 다섯 번째 아들이며, 다른 하나는 ‘오홀리바마’의 세 번째 아들입니다. 넷째, 두 계보는 마지막 간기(刊記)에 대한 표현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즉 이전 계보가 ‘에서’의 후손만을 요약하고 있는 것에 비해, 이번 계보는 이 표현에 덧붙여 ‘에서’의 후손 중 족장들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러한 차이야말로 이 단락의 독특한 기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추측컨대, 이 족장의 목록은 아마 정치 조직과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6. 세일의 후예(20-30절)
앞의 두 계보가 (1) ‘에서’의 후손(9-14절)과 (2) ‘에서’의 후손 중 족장들의 계보(15-19절)였다면, 이어지는 두 계보는 그 형식 상 같은 방식으로 (1) ‘세일’의 후손(20-28절)과 (2) ‘세일’의 후손 중 족장들(29-30절)을 다루고 있습니다:
(1) 세일의 후손
20그 땅의 주민 호리 족속 세일의 자손은 로단과 소발과 시브온과 아나와, 21디손과 에셀과 디산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세일의 자손 중 호리 족속의 족장들이요. 22로단의 자녀는 호리와 헤맘과 로단의 누이 딤나요. 23소발의 자녀는 알완과 마나핫과 에발과 스보와 오남이요. 24시브온의 자녀는 아야와 아나며 이 아나는 그 아버지 시브온의 나귀를 칠 때에 광야에서 온천을 발견하였고, 25아나의 자녀는 디손과 오홀리바마니 오홀리바마는 아나의 딸이며, 26디손의 자녀는 헴단과 에스반과 이드란과 그란이요. 27에셀의 자녀는 빌한과 사아완과 아간이요. 28디산의 자녀는 우스와 아란이니(20-28절)
(2) 세일의 후손 중 족장
29호리 족속의 족장들은 곧 로단 족장, 소발 족장, 시브온 족장, 아나 족장, 30디손 족장, 에셀 족장, 디산 족장이라 이들은 그들의 족속들에 따라 세일 땅에 있는 호리 족속의 족장들이었더라(29-30절)
‘세일’은 ‘에돔’ 족속이 살던 지역의 지명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 지역에 이전부터 살던 원주민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신명기>는 이 족속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호리’ 사람도 ‘세일’에 거주하였는데 ‘에서’의 자손이 그들을 멸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으니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의 땅에서 행한 것과 같았느니라”(신 2:12). <신명기>의 이러한 진술 속에 담긴 역사적 사실을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적어도 <창세기> 36장의 기록에 의하면), ‘에돔’ 족속이 ‘세일’ 땅에 들어왔을 때 그 지역에 살던 ‘호리’ 족속을 남김없이 전멸시킨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는 마치 훗날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공략할 때, 이 지역 주민들을 남김없이 소탕하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이 계보는 ‘세일’의 후손 중 족장들의 이름으로 일곱 명을 거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모두 스물한 명의 아이들이 태어났습니다(만일 ‘딤나’를 ‘로단’의 누이로 본다면 스무 명)(참고 22절). 이 계보 역시 ‘에서’의 계보와 마찬가지로 삼대(代)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계보는 중간에 ‘시브온’에 관한 설명으로 흐름이 끊기고 있습니다: “이 ‘아나’는 그 아버지 ‘시브온’의 나귀를 칠 때에 광야에서 “온천”(@yE, 옘)을 발견하였고”(24절하). “온천”으로 번역하고 있는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분명치 않으며, 다양한 번역이 알려져 있습니다: Hamilton, 398쪽.

6. 에돔의 왕들(31-39절)
이 족보는 (1) ‘에서’의 계보와 (2) ‘세일’의 계보에 이어 세 번째 주요 계보에 해당합니다. 이 계보는 ‘에돔’의 왕들을 다루고 있으며, ‘벨라’에서 시작하여 ‘하달’에 이르기까지 아홉 세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31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은 이러하니라. 32브올의 아들 벨라가 에돔의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의 이름은 딘하바며, 33벨라가 죽고 보스라 사람 세라의 아들 요밥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4요밥이 죽고 데만 족속의 땅의 후삼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5후삼이 죽고 브닷의 아들 곧 모압 들에서 미디안 족속을 친 하닷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 이름은 아윗이며, 36하닷이 죽고 마스레가의 삼라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7삼라가 죽고 유브라데 강변 르호봇의 사울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8사울이 죽고 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고, 39악볼의 아들 바알하난이 죽고 하달이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으니 그 도성 이름은 바우며 그의 아내의 이름은 므헤다벨이니 마드렛의 딸이요 메사합의 손녀더라(31-39절)
이들 왕들은 이스라엘의 왕들이 그 땅을 다스리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입니다(31절). 그러나 이들이 ‘사울’ 왕 이전에 있던 왕들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윗’ 왕 이전의 왕들을 의미하는 것인지 분명치는 않습니다. 다만 이 계보와 관련해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스라엘 왕국이 그 땅에 출현하기 전에는 어떤 형태로든 왕조(王朝)가 존재했던 것 같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점 왕위 계승이 아비와 자식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첫 번째 왕 ‘벨라’에 이어 두 번째 왕으로 등장하고 있는 ‘요밥’은 ‘벨라’의 아들이 아니라 ‘세라’의 아들입니다(33절). 그리고 왕이 바뀔 때마다 왕국의 수도 또한 바뀌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에돔’ 왕국은 ‘유대’ 왕국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왕국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비교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종종 “족장”을 “왕”으로 지칭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예: ‘미디안’의 왕들(삿 8:5, 12); ‘소바’의 왕들(삼상 14:47); ‘다메섹’의 왕 ‘벤 하닷’의 뒤를 이은 왕들(왕상 20:24).
이들은 왕조를 이루어 왕국을 계승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스라엘의 사사들처럼 특별한 은사와 강력한 지도력을 갖춘 자들로 나름대로의 한 부족이나 지역을 다스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여덟 명의 왕들이 살던 시대는 주전 13 세기경으로서,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본문 중에 “‘하닷’이 ‘미디안’ 족속을 쳤다”는 언급(35절)은 ‘기드온’이 ‘미디안’ 족속에 거둔 승리를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화자는 왜 이곳에 ‘에돔’의 왕들을 포함시키고 있을까? 비록 부분적이긴 하지만 ‘아브라함’ 언약(17:16)의 성취로 볼 수 있을까? ‘야곱’ 역시 왕국의 출현에 대한 약속을 받은 바 있습니다(35:11). ‘에서’에 대해서는 왕국에 관한 어떠한 약속도 없습니다만, 그의 후손들은 왕국을 이루고 있는 것을 봅니다.
7. 에서의 후손: 족장들(40-43절)
화자는 에서의 후손 중 족장들의 계보를 소개하면서, 다시 한 번 앞에서 해왔던 것과 동일한 형식적 패턴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본문의 첫 두 계보가 (1) ‘에서’의 후손(9-14절)과 (2) ‘에서’의 후손 중 족장들의 계보(15-19절)였고, 이어지는 두 계보 역시 (1) ‘세일’의 후손(20-28절)과 (2) ‘세일’의 후손 중 족장들(29-30절)의 계보였으며, 나머지 두 계보 또한 (1) ‘에돔’의 왕들의 계보(31-39절)와 (2) ‘에서’에게서 나온 족장들의 계보(40-43절)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은 이 마지막 계보에 관한 것입니다:
40에서에게서 나온 족장들의 이름은 그 종족과 거처와 이름을 따라 나누면 이러하니 딤나 족장, 알와 족장, 여뎃 족장, 41오홀리바마 족장, 엘라 족장, 비논 족장, 42그나스 족장, 데만 족장, 밉살 족장, 43막디엘 족장, 이람 족장이라 이들은 그 구역과 거처를 따른 에돔 족장들이며 에돔 족속의 조상은 에서더라(40-43절)
이처럼 본문의 형식은 앞에서 본 것과 동일하지만, 이곳에서 소개하고 있는 인물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에서’에게서 나온 족장의 수는 모두 열한 명으로서, 이중 일곱 명은 처음 등장하는 인물들입니다: ‘알와’; ‘여뎃’; ‘엘라’; ‘비논’; ‘밉살’; ‘막디엘’; ‘이람’. 그리고 나머지 네 명은 이미 앞에서 본 바 있습니다. 즉 ‘딤나’는 ‘엘리바스’의 첩(12절)으로도, ‘세일’의 아들 ‘로단’의 누이(22절)로도 소개받은 바 있습니다. ‘오홀리바마’는 ‘아나’의 딸이자 ‘에서’의 아내입니다(2, 14, 18절). ‘그나스’와 ‘데만’은 각기 ‘엘리바스’의 첫 번째와 다섯 번째 아들들입니다(11절). 그리고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에게서 나온 족장들 중 첫째와 네 번째 족장입니다(15절).
그런데 이 계보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에서’에게서 나왔다는 이들 열한 명의 족장들이, 다른 곳에서 소개하고 있는 ‘에서’에게서 나온 또 다른 열네 명의 족장들(15-19절)과 과연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에서’에게서 나온 족장에 관한 두 계보(15-19절; 40-43절)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름은 ‘데만’과 ‘그나스’ 두 사람 뿐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세 가지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첫째, 두 번째 계보(40-43절)는 아무런 역사적 근거나 가치가 없는 순전히 가공의 계보로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둘째, 두 번째 계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첫 번째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비해 후대의 인물들로 보자는 것입니다. 셋째, 첫 번째 계보(15-19절)가 족보별로 인물들을 나열하고 있다면, 두 번째는 지역별로 나열하고 있다고 보자는 것입니다: “‘에서’에게서 나온 족장들의 이름은 그 종족과 거처와 이름을 따라 나누면 이러하니”(40절상). 여기서 “이름”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거처의 이름으로 보아야 합니다.
교훈과 적용
1. 에서와 야곱.
족보나 지명(地名)에도 신학이 있을까? 그렇습니다. 이점 <창세기>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열 번의 족보 중에서 제 36장에 등장하고 있는 아홉 번째 족보는 그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 지극히 이례적입니다. 첫째, “‘에서’의 계보”는 “셋의 계보”(창 5)를 잇는 선택 된 백성의 족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주 길고 상세합니다(족보가 한 장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그렇습니다). 둘째, 긴 것도 모자라 이 족보를 두 번이나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36:1-8, 9-43). 마치 “아브라함의 언약”이 ‘야곱’이 아니라 ‘에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의 하나님 또는 언약의 하나님이 그 언약에 신실하시려면,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곤란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야곱’이 아니라 ‘에서’를 통해서 그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처럼 밤하늘의 별처럼 번성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2하-13). ‘에서’가 바로 이런 유형의 전형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축복과 관련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었습니다. 영속적(永續的)이고 영적(靈的)인 가치보다는 순간적이고 말초적인 것들을 더 추구했습니다(실은 ‘야곱’도 이점에 있어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만). 적어도 <로마서>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를 그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셔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롬 1:24상).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명예에 심각한 타격이 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멸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입니까?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 어미에게 한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장래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25:23).
하나님께서는 ‘에서’가 큰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서’의 잘못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나중에 동생에게 축복을 도난당한 후 아버지 ‘이삭’에게 조금이라도 좋으니 혹시 남은 축복이 있으면 달라고 졸라댔을 때,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준 약속이 있습니다: “그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27:39-40).
그러나 이 약속은 오늘날 우리 편에서 보자면, 축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저주에 더 가까운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예언을 36장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서’가 약속의 아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를 풍성하게 축복해 주셨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두 번에 걸쳐 민족들과 나라들과 왕들이 ‘에서’를 통해서 번창해 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가나안’에 있을 때, 세 아내를 통해서 다섯 명의 아들을 보게 됩니다(1-8절).
그가 이곳에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았던지 그 소유가 많아 ‘야곱’과 함께 살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며(7절), 결국 약속의 땅 밖의 ‘세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8절). 그런데 여기서도 그를 통해서 여러 민족과 나라와 왕들이 등장하게 됩니다(9-43절). 마치 하나님께서 ‘에서’를 ‘야곱’으로 착각하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라 부릅니다(행 14:17). ‘에서’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이 정도라면, ‘야곱’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에서’가 이처럼 번창하고 번성하고 있을 때, ‘야곱’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형보다 더 많은 축복과 은혜를 누리고 있었습니까? 그 반대였습니다. 택함을 받지 못한 형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이처럼 생육하고 번성하며 그 땅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택한 백성 ‘야곱’은 약속 밖의 땅 ‘하란’에서 종노릇하면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이십여 년 동안 말입니다. 물론 이 기간 동안에 그도 네 여인과 결혼도 하고, 이들을 통해서 열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보기도 합니다. 그 역시 종국에는 상당한 재력과 큰 일가(一家)를 이루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옵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의 방랑 생활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 땅에 돌아온 지 몇 년 만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 땅에 흉년이 들어 살아남기 위하여 ‘이집트’로 내려가야만 했습니다. 극심한 흉년으로 가축이나 재산을 상당히 잃은 후였겠지요. 그가 ‘이집트’로 간 것 까지는 어쩔 수 없었단 치더라도, 그의 후손들이 그곳에서 사백여 년 동안이나 노예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겠지요.
‘야곱’의 후손들이 ‘이집트’에서 이처럼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동안, 약속의 땅에 살던 ‘에서’의 후손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까? 수 세대에 걸쳐 생육하고 번성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와 족장들과 왕들이 나와 그 땅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에돔’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야곱’이나 그의 후손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요? 약속 밖의 백성들이 이처럼 온갖 세상의 축복과 명성과 명예를 한껏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이처럼 기막힌 사정은 ‘야곱’과 ‘에서’에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서’에 버금가는 축복을 ‘이스마엘’에게도 주셨습니다: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창 17:20).
이 약속은 과연 이루어졌습니까? 우리는 먼 곳에서 대답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인구 중 ‘이스마엘’의 후예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이들이 차지하는 지역이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아십니까? 절대다수의 산유국(産油國)을 구성하고 있는 종족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리고 ‘이삭’과 ‘야곱’이 살던 그 약속의 땅에는 젖과 꿀은 고사하고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아십니까? ‘에서’는 ‘이스마엘’의 딸 중 하나와도 결혼하여 가계를 번창시켰습니다.
‘이스마엘’이 이처럼 생육하고 번성하는 동안에 ‘이삭’은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그는 그의 아들 ‘야곱’처럼 나이 사십이 되어서야 겨우 결혼을 할 수 있었고, 아내 ‘리브가’는 결혼 후 한참 동안 자식조차 없었습니다(25:20-21). 저렇게 잘나가는 형 ‘이스마엘’을 바라보는 ‘이삭’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형 ‘에서’를 바라보는 ‘야곱’의 심정과 같은 것이었을까요? “왜 하나님은 나를 제쳐두고 약속 밖의 백성을 축복하시는 것일까?” 사도 ‘바울’도 한 때 이런 문제를 놓고 깊이 고민한 바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스라엘을 비켜 이방인에게로 전해지는 것을 보고 그는 다음과 같이 장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롬 11:1).
오늘 나는 어떻습니까? ‘모차르트’를 바라보는 ‘살르에르’의 마음은 아닙니까? 영화 <아마데우스>가 과연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담아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과 계획에 깊은 회의나 절망은 없습니까? 그러나 나는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로 하여금 소망을 갖도록 하려 하시는 것은 아닐까? 내가 사생아(私生兒)가 아니라 친아들이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에서와 에돔
역사나 인생은 반전(反轉)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도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필연에 의해서 말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토록 잘나가던 ‘에서’와 그 후손들 즉 ‘에돔’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에서’는 ‘아담’과 마찬가지로 누릴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인생을 등산(登山)으로 비유하자면 그는 산의 정상(頂上)에서 등산을 시작한 것과 같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등산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미 정상에 와 있었으니 말입니다. 하산(下山)하는 것 외는 남은 일이 없었습니다. 오호, 통재라! 바로 여기에 그의 인생의 비극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생 ‘야곱’이 산 정상을 향해서 열심히 올라오고 있는 동안 그는 오히려 산을 내려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이 말은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자 권”을 동생에게 빼앗겼다고 울고불고 하던 ‘에서’의 모습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27:34). 그러나 곰곰이 따지고 보면 그가 잃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동생을 멀리 망명 보내고, 아버지의 모든 가업과 그 땅마저 다 물려 받았습니다. 그의 재산과 가축과 세력은 날로 늘어만 갔습니다. 이십 년 후에 ‘하란’에서 돌아오는 동생을 맞으려 나올 때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나오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번창해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생이 화해를 위하여 예물로 내어놓는 무려 오백오십 수(首)에 달하는 가축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길 정도로 부유했습니다.
사람이 가진 것이 많으면 양보하기도 쉬운 법이지요. 그는 ‘가나안’ 땅을 동생에게 다시 한 번 양보하고(양보라는 표현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세일’ 땅으로 옮겨갑니다(36:7-8). 두 형제가 ‘가나안’에 함께 살기가 어려울 정도로 가축 수가 많았기 때문입니다(36:7). ‘세일’로 옮긴 뒤에도 ‘에서’는 더욱 번창 해 가기만 합니다. <창세기> 36장은 바로 이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의 가계는 일로(一路) 번창하여 그야말로 바다의 모래와도 같은 후손들이 그를 잇고 있으며, 수없이 많은 족장들과 왕들이 등장하여 그 땅을 지배하고 통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연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필연입니다. 그분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25:23; 27:39-40).
그렇다면 언제부터 그의 하산(下山)이 시작되었을까요? 영적(靈的) 하산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정확하게 언제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에서’는 체질적으로 영적 등산에는 어울리지 않았던 자였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처음부터 영적이다 뭐다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었다고 보는 편이 나을 듯싶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시점에서 그의 영혼이 어떻게 영적인 하산을 거듭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야곱 이야기>를 통해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첫째, 그는 자신의 장자 권을 경멸하였습니다. 장자 권이라 함은 장자로서 누리게 되는 물질적인 축복뿐만 아니라 영적인 축복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물질적인 축복이라 함은 장자로서 받게 되는 유산은 나머지 형제들이 갖는 그 모든 것들보다 두 배를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축복에는 한 가계의 우두머리가 되거나 또는 제사장이 되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의 경우라면 ‘메시아’의 선조가 되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에서’가 과연 이러한 영적 축복을 가치 있게 여겼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허기를 메우기 위하여 단 한 그릇의 죽과 장자 권을 바꿀 정도로 가치 없게 여겼으며, 경멸하였습니다(25:32, 34).
우리가 ‘에서’의 입장을 이해 못할 바가 아니지만 <성경>은 그의 태도를 비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결코 그를 닮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2:16-17).
둘째, 그는 장자 권을 경멸하였을 뿐만 아니라,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것들에 더 탐닉하였습니다. 예컨대, 그는 아내를 맞이함에 있어 한 번도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선택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늘 ‘가나안’ 여인들이나 또는 ‘이스마엘’의 딸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결혼은 부모의 기쁨이 아니라 늘 근심과 고민 거리였습니다(26:35). 영적인 것들이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좋은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적인 중립지대란 있을 수 없나 봅니다.
셋째, ‘에서’의 영적 쇠퇴는 그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그대로 전수되었습니다. 화자는 ‘에서’가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시키는 일에 실패했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그의 후손이라는 ‘에돔’ 족속의 면면을 보면 간접적으로 이를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이름만 가지고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길은 없겠습니다만, 전체 족보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이름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곳 족보에 등장하고 있는 전체 여든 한 명의 인물 중에서 기껏해야 ‘르우엘’(“하나님의 친구”)과 ‘여우스’(“하나님이 도우심”) 정도가 그나마 영적인 의미를 지니는 이름 정도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요인들이 ‘에돔’이 멸망하게 되는 필연으로 작동했던 것입니다.
‘에서’와 ‘에돔’의 운명은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오바댜>가 예언한 대로입니다. 이 책은 ‘에돔’의 멸망을 예고한 책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옵 1:8). ‘요단’ 남동편의 그 넓은 지역에서 큰 세력을 떨치며, 수 세대를 이어가던 ‘에돔’ 왕국이 도대체 무엇을 잘못 했기에 이처럼 멸절을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축복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옵 1:3). 흔히 난공불락(難攻不落)으로 알려져 있는 요새는 그것이 지닌 천혜(天惠)의 지리적 이점 때문에 오히려 적의 공략에 어이없게 무너져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화 <나바론의 요새>에서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째서 천혜(天惠)의 지리적 이점이 가장 큰 약점이 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이곳을 공격할 수 없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이 아닐까요? 두려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로 하여금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지만, “두려움”은 때로는 비타민처럼 우리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영양소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교만이나, 방자함이나, 안하무인 등과 같은 질병에 “두려움”은 아주 좋은 치료제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가장 으뜸 되는 대상은 하나님일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강조합니다(잠 1:7). <오바댜>는 ‘에돔’에게 이 두려움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아담’처럼 말입니다. ‘에돔’은 그들이 자랑하던 난공불락의 요새 때문에 스스로 높아졌고, 자만했으며, 이웃 나라들을 우습게 알았습니다. ‘보이스’(J. M. Boice) 목사님은 ‘에돔’이 자랑하던 천혜의 요새에 대해서 스위스 탐험가 ‘브루크하르트’(J. L. Burkhardt)의 탐험 보고서를 토대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J. M. Boice, The Minor Prophets: An Expositional Commentary, vol 1 (Grand Rapids: Zondevan, 1983). 인터넷 검색(www.naver.com)에서 “페트라 에돔 요새”를 입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에돔’이 자랑하던 요새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사진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에돔’은 스스로에게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고 호언장담했습니다만, 하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옵 1:4). 축복이 저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오바댜>는 ‘에돔’이 멸망한 또 다른 원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옵 1:10). <오바댜>는 ‘에돔’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무엇을 잘못하였는지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네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원수에게 넘기지 않을 것이니라”(옵 1:11-14).
즉 이 기록에 따르면, ‘예루살렘’이 한 때 적의 공격으로 함락된 경우가 있었는데, 형제 국가인 ‘에돔’이 처음에는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였으나 나중에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약탈하고, 도망가는 성 주민들을 붙잡아 적에게 넘겨주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선지자 ‘오바댜’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습니다만, <성경>에 따르면 ‘예루살렘’은 네 번에 걸쳐 적의 공격을 받은 바 있습니다: (1) ‘르호보암’ 재위 시 ‘이집트’ 왕 ‘시삭’의 공격(대하 12); (2) ‘유다’ 왕 ‘아마샤’ 재위 시 이스라엘 왕 ‘여호아스’의 공격(대하 25); (3) 주전 840 년 ‘블레셋’과 ‘아랍’의 공격(대하 21:16-17); (4) 주전 587 년 ‘바벨론’의 공격으로 인한 멸망(겔 35; 왕하 25:1-7; 시 137:7). ‘보이스’(J. M. Boice) 목사님은 ‘에돔’과 관련한 <오바댜>의 예언을 이들 네 번의 역사적 사건과 연관 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참고 도서 3, 851-853쪽).
분명한 사실은 ‘에돔’은 이스라엘과는 같은 피를 나눈 형제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적의 침입을 받았을 때 도움은커녕 이방 적국들에 못지않은 악행을 저질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도 단 한 번의 잘못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그렇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에돔’의 역사는 그 탄생에서 멸망에 이르기까지 점증하는 “범죄의 역사”로 규정해도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닐 것이며, <오바댜>의 예언도 이점을 강조하고 있는 듯합니다. ‘에돔’과 이스라엘의 “악연”(惡緣)의 역사는 ‘에서’와 ‘야곱’의 충돌과 갈등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는 이점을 <창세기>의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서 읽은 바 있습니다(창 25:19-34; 27:1-46; 33:1-17). 이처럼 이 형제 족속간의 해묵은 “구원”(舊怨)은 사백 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민수기>는 “출애굽” 당시 광야에서 ‘에돔’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어떻게 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민 20:14-21).
엄청난 범죄를 어느 날 갑자기 저지르게 되는 경우란 거의 없습니다. 죄의 속성은 조금씩, 살그머니 우리 영혼을 갉아 먹어가는 것입니다. ‘다윗’ 왕의 행적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그녀의 남편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출발은 그가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집에 머물러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에돔’은 어떻습니까? ‘에돔’의 범죄는 형제 나라가 처한 위기 상황을 보며 “수수방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옵 11절). 범죄의 시작이 무관심에서부터라니 기이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경우를 보면 형제간의 무관심이 어떻게 형제 살인까지 이르게 되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의 대답은 무관심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했을 때, ‘에돔’이 보인 첫 반응은 이런 식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매우 경건하지만 무관심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까? 세상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내 가족이나, 공동체 가족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사도 ‘바울’의 권면을 상기해 보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
‘에돔’의 무관심은 경멸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돕는 것은 고사하고 형제의 멸망을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옵 12, 13절). 그들은 또한 이스라엘의 “성문에 들어가기”까지 했습니다(옵 13절).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이 왜 멸망했는지 성 안으로 들어가 곰곰이 살피고 다녔다는 말은 아닐까요? 혹시 나는 상담이나 권면을 한답시고, 상대가 처한 어려운 상황의 원인을 시시콜콜한 데까지 캐내며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필요 이상의 호기심으로 치유가 아니라 상처를 덧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리고 상담 중 알게 된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흘리고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망해가는 이스라엘의 성 안으로 들어가, 즐거운 콧노래를 부르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거만하게 돌아다니는 ‘에돔’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노아’의 아들 ‘함’이 그의 아버지의 실수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했는지 알고 있습니다(창 9:22). 그리고 그와 그의 후손들이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창 9:25). ‘에돔’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가나안’이 ‘함’의 후손이라면, ‘에돔’은 영적 후손이라고 불러 마땅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한 그릇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잘못은 하나님께서 처리하실 것이지, ‘에돔’이 처리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형제의 잘못을 덮기보다는 광고하며 호외하고 다닙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형제를 그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그를 주관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실패하거나 쓰러져 있는 동료 형제를 세워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고전 14:26; 엡 4:16; 갈 6:1).
3. 에돔과 그리스도
한 종족 또는 한 왕국으로서 ‘에돔’의 역사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만, 한 조상 ‘에서’로부터 물려받은 기질마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죄의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한 개인의 기질은 한 국가의 기질이 되고, 그 국가의 기질은 다시 한 개인의 기질을 형성하는 토양이 되어갔다는 말입니다.
그 기질을 이어받은 한 왕이 다시 그 땅에 나타나서 ‘야곱’의 후예를 괴롭히고 멸절시키려 했습니다. 다름 아닌 ‘에돔’의 후예 ‘헤롯’ 왕이 바로 그자입니다. 그는 ‘야곱’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없애기 위해서 ‘베들레헴’의 모든 무고한 신생아들을 학살시키라고 명한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헤롯’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자는 그의 아들 ‘헤롯 안디바’였습니다. 이 자 또한 그 애비의 잔혹함을 닮아, 침례 ‘요한’을 목 베어 죽여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여우로 불렀습니다. 잔인할 뿐만 아니라 교활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연간 수입이 육백만 불에 이를 정도로 부유했으며, 그의 생활은 사치와 허영의 극에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생활을 가로막아 서는 자가 있으면 누구든 가차 없이 처단했습니다. 그는 실로 ‘유대’ 땅의 김정일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동일한 인생의 동기나 좌우명(座右銘)을 가지고 있었을 법합니다: “과연 내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또 다른 한 왕이 있었으니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야곱’의 후손이었으며, ‘다윗’ 왕의 후계자로서 왕 중의 왕입니다. 그러나 그는 행색으로나, 기질로나 ‘헤롯 안디바’와는 비교도 될 수 없었습니다. 결코 왕으로 불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고자 했다면 무력으로 그 나라를 쓸어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땅의 최고 권력자로 권좌에 오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다른 길을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기는 길이 아니라 지는 길, 즉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길이 ‘에돔’ 나라의 길과 구분되는 방식입니다.
‘헤롯 안디바’가, “내게 유익한 것이 무엇일까?”라고 물을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는가?”하고 묻습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지는 길을 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지만, ‘헤롯 안디바’는 훗날 권좌에서 쫓겨나 프랑스의 ‘리용’으로 유배되어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들 앞에도 늘 이처럼 두 길이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헤롯 안디바’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참고. 마 6:31-34)
그러나 과연 이것이 화자가 ‘에돔’의 계보를 보여주는 의도의 전부일까요? 이 계보를 또 다른 관점에서 조명해 볼 수는 없는 것일까요? 특히 이스라엘의 <성경> 속에 ‘에돔’의 족보를 포함시킨 시기가 이스라엘이 ‘에돔’을 정치군사적으로 편입시켜 실질적인 정치적 지배와 통치를 하고 있던 시기였다면, 부정적 의도보다는 오히려 긍정적 의도가 더 크게 작용했던 것은 아닐까? 비록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야곱’과 ‘에서’는 오랜 갈등과 원한을 풀고 용서와 화해를 했던 적도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다윗’ 왕국이 ‘에돔’을 병합하여 하나의 왕국으로 새 출발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형제가 함께 동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두 나라가 하나가 되는 것은 사필귀정(事必歸正)이 아닐까?
‘에돔’이 이스라엘에 합병된 것은 좁은 의미에서 보자면, ‘리브가’를 향한 하나님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고, <에서의 언약>이 성취된 것입니다. 즉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예언 말입니다(25:23). 그러나 이것은 더 큰 하나님의 언약 즉 <아브라함 언약>이 이삭과 야곱을 통해서 성취되는 한 방식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 밖의 백성 ‘에서’를 통해서 자신의 약속을 이루셨다면, 그분의 백성 ‘야곱’, 즉 이스라엘에 대해서야 일러 무엇 하겠습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은 <창세기>의 열 번의 ‘톨레돗’ 중에서 아홉 번째에 해당합니다. 다른 ‘톨레돗’과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어떤 점이 다른지 토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족보에도 신학이 있을까요? 본문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화자의 신학적 의도는 무엇일지 토의해 봅시다.
3.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지 묵상해 봅시다. 내가 헌신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