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과
태초의 이야기
김태정 목사창세기 1:1-2:3약 163분 분량
1
태초의 이야기
(1:1-2:3)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
웅장하면서도 단순하고, 장엄하면서도 꾸밈이 없으며, 심오하면서도 명쾌하며, 엄숙하면서도 흥겨운 축제의 서곡! 이것이 창세기의 서막(序幕)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마땅히 느낄 수 있는 지배적인 분위기입니다.
<창세기>의 서막은 비단 <창세기>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 대한 뛰어난 서론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성경>의 두 주제, 즉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인간을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두 인격체 사이의 오랜 관계의 역사에 대한 배경과 그 시작에 대한 이야기를 대하게 됩니다.
이야기는 시작, 중간, 결말이 있는 사건의 연속이라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이 부분(더 나아가 <창세기> 1-3장)은 시작이요, <계시록>은 결말이며, 다른 모든 사건들은 중간임이 분명합니다. <창세기>와 <계시록>의 대비는 <성경>의 아름다운 통일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창세기>는 시간-공간-물질(time-space-matter)로 이루어진 삼위(三位)의 우주(tri-universe) 삼위의 우주에 대해서는 ‘헨리 모리스’의 설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참고도서 14, 75-80쪽). 그는 이곳에서 시간의 삼위, 공간의 삼위, 그리고 물질의 삼위에 대해서 자연 과학자다운 해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계시록>은 이것이 어떻게 끝날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두 부분은 그래서 시간과 영원이 만나는 곳에 있어, 우리의 경험의 너머에 있고 솔직히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의 처음 이야기와 마지막 이야기는 하나의 계시, 즉 드러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경험이 도달할 수 없는 과거나 미래의 사건들을 표현함에 있어서도 상징이나 묵시 등을 이용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이야기 모두에 일종의 신비함이 있는데, 시간과 영원이 만나는 곳에는 언제나 이런 신비적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서론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우리는 지나친 문자 주의나 역사․과학적 해석을 시도할 필요가 없으며, 그렇게 했을 때 오히려 <성경> 본래의 의도를 벗어날 수 있다는 점도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부분들을 공부할 때 문학적이고 신학적일 필요가 있다는 점 또한 서론에서 강조한 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창세기>는 그 문학 양식으로 볼 때 하나의 “기원 이야기”(origin narrative)이지 “기원 과학”(origin science)이나 “역사”(history)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곳에서 “태초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관한 사실적인 보고서가 아니라, 그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고 동시에 노래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지와 생명과 인간의 창조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거나, 과학적인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창세기>의 첫 세 장을 (1) 소극적으로는 성경적 세계관에 반하는 일체의 세계관(예를 들어 무신론적이거나 범신론적 세계관)에 대한 반론이나 변증의 근거로 제시하는데 이용하는 동시에, (2) 적극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리며, 인간의 존재의미와 목적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자 대안으로써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창세기> 서막의 교훈적 측면이기도 합니다.
문학과 역사
1. 양식
사람마다 다르긴 하나 <창세기> 1:1-2:3을 하나의 단락, 즉 서막으로 구분하는 것은 그 형식적 특징에 있습니다. 우선 이 단락만이 ‘톨레돗’-“그 계보가 이러하니라”-의 형식을 따르지 않고 있음을 봅니다. 참고로 10개의 새로운 시작-‘톨레돗’(계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늘과 땅의 계보(2:4-4:26); (2) ‘아담’의 계보(5:1-6:8); (3) ‘노아’의 계보(6:9-9:29); (4) ‘노아’의 아들들의 계보(10:1-11:9); (5) ‘셈’의 계보(11:10-26); (6) ‘데라’의 후손(11:27-25:11); (7) ‘이스마엘’의 계보(25:12-18); (8) ‘이삭’의 계보(25:19-35:29); (9) ‘에서’의 계보(36:1-37:1); (10) ‘야곱’의 계보(37:2-50:26).
그리고 1:1과 2:1-3의 상관관계에서 드러나는 특징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 두 구절은 전체 내용의 처음과 마지막을 수미상관적(首尾相關的)으로 묶고 있으며, 동시에 교차대구적(交叉對句的)으로 연결하고 있다는 특징이 그것입니다. 개역 성경으로는 그 관계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만, <히브리 성경>이나 <영어성경>을 통해서 이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2:1-3)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1:1)
So the heaven and the earth (and all their host) were finished. On the seventh day God had finished his work which he did,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di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for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had created by making it(2:1-3)
두 개의 단락, 1:1-2와 2:1-3을 서막 속에 포함시킬 수 있는 요소는 또 있습니다. 각 구절이 맺고 있는 숫자 7과의 연관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선 각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의 총수가 7의 배수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은 단순히 우연으로 돌리기에는 상당히 의도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1) 1:1(7 단어); (2) 1:2(14 단어 = 7 x 2); (3) 2:1-3(35 단어 = 7 x 5). 더 나아가 서막 전체에 걸쳐서도 숫자 7은 지배적인 이미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1) ‘엘로힘’(35회); (2) “땅”(21회); (3) “하늘”(궁창)(21회); (4) “그대로 되니라”(7회); (5)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7회).
<창세기> 전체에 대한 문학과 역사 등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나마 서론에서 이미 다룬 바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해당되는 부분만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 부분을 공부할 때 곧장 내용분석으로 들어가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에 대해서 먼저 살피는 일입니다. 그 일은 본문의 문학 양식을 살피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양식은 <성경>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양식으로서 금방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창세기> 서막은 위에서 밝힌 대로 분명 “기원 이야기”(설화)에 속합니다. 이야기가 설화로서 갖추고 있는 내용과 형식에 대해서는 서론에서 개괄적으로 다룬 바 있습니다. 14-15쪽.
2. 구성
구성 1: 직선과 진행. 이 이야기에 스며있는 예술적 구성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절정과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진행적인 특징입니다. 즉 태초의 이야기는 먼저 총괄적이고 일반적인 것을 언급한 후에(1-2절), 보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사항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3절 이하). 이러한 이야기 서술 방식은 ‘히브리’ 문학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진술에 포함된 내용도 하늘의 이야기에서 땅의 이야기로 초점이 즉시 옮아갑니다. 땅의 새와, 짐승과, 물고기에 대한 묘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급작스러운 이동을 통해서 우리는 기자의 관심이 우주 만물이 아니라 그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점을 이내 간파하게 됩니다. 셋째 날과 여섯째 날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인데, 이 부분에 이르면 설명이 다른 날들에 비해서 길고 상세합니다.
그리고 세부적인 이야기는 인간의 창조에 이르러 그 절정을 맞고 있습니다. 여섯째 날의 이야기가 가장 상세하고 길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셋째 날이 여섯째 날을 위해서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아직 끝은 아닙니다. 일곱째 날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이 날은 그 동안의 진술의 결론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이러한 진행의 원리를 흐르는 물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즉 물이 산 정상에서 발원(發源)하여 계곡에 이르자 급류가 되어 빠르게 흘러내리다가, 산 아래 계곡의 바닥에 있는 조그만 웅덩이에 이르러는 잠시 쉬면서 그 안을 회전하게 되는데, 이 동안 점차 많은 양의 물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웅덩이가 차면 조금씩 흘러넘치면서 다시 빠른 물살을 만들고, 보다 큰 개울을 지나 큰 강에 이르면, 속도는 크게 줄어 서서히 흘러갑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큰 바다에 이르러서야 움직임을 멈추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나 자신의 말로 간단하게 요약해봅시다. 본문에서 물의 발원지는 어디이며, 계곡은 어디인지, 그리고 물이 빨리 흐르는 곳과 천천히 흘러가는 곳은 어디인지 파악해봅시다.
구성 2: 순환과 반복. 구성의 두 번째 특징은 순환과 반복입니다. 두 번째 구성의 특징은 자전거 바퀴가 앞으로 굴러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즉 전체 창조 기간 동안 매일 하나님의 창조의 행위에 대한 일련의 진술이 동일한 표현으로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음을 서론에서 확인한 바 있습니다(57쪽). 그러나 이러한 반복도 아주 무미건조하게, 기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가감되기도 하고, 표현상의 변화를 보이면서 아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래의 표는 서론에서 보았던 표를 다소 수정한 것으로서 이런 표현상의 변화를 고려하여 작성해 본 것입니다(두 표를 함께 비교해 보는 것도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전체 6일을 통해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표현은 무엇입니까(○표가 가장 많은 표현)? 이것은 성경적 창조와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동일한 표현이 두 번 이상 반복해서 나타나는 날은 언제입니까? 그 의도는 무엇입니까?
구성 3: 균형과 대칭. 구성의 세 번째 특징은 균형과 대칭성입니다. 우리는 서론에서 창조의 시가 병행하는 한 쌍의 세 절로 이루어진 일종의 “3부 시”(tripartite; 마치 세 절로 이루어진 노래처럼)와 같다고 진술한 바 있습니다. 그리하여 창조의 6일을 세 쌍의 묶음으로 짝짓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음 표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참고, 58쪽
우리가 이 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바는, 앞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후속되는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빛이 생긴 다음 그 빛의 전달자(태양, 달, 별 등)가 생겨나고, 하늘과 바다가 생긴 다음 새와 물고기가 각각 그들을 채우고 있으며, 땅과 육지가 있은 다음 짐승과 인간이 창조되고 채워지는 것을 봅니다.
3. 내용
이와 같은 균형의 원리는 단순히 이야기의 형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에도 암시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경험하고 있는 바이지만, 상충되어 보이는 두 요소가 늘 긴장과 균형을 유지한 채 존재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예컨대, 정치에서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그것이고, 사회적으로도 법과 조직이 있어 그 사회를 일정한 틀 속에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그 속에서 변화와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넘치는 역동성과 에너지가 있습니다. 인간 본성에도 이성(理性)과 감성(感性)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자연과학 영역에도 역시 그렇습니다. 필자가 전공하는 화학만 하더라도 그 연구의 대상이 물질의 상태와 변화에 관한 것인데, 상태란 그 물질의 고유한 성질, 즉 변하지 않고 있는 형태나 구조를 말하는 것이고, 변하는 성질이란 물질간의 만남을 통해서 일어나는 화학반응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타락한 우리가 볼 때에는 상호 대립적이고 위험하기조차 합니다. 그러나 실은 이러한 요소들은 상호보완적으로 존재하면서 전체의 균형을 유지시켜 주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작금의 우리나라 현실은 이런 조화와 상보의 원리를 억지로 깨고 집단적 획일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서막 속에도 이 두 가지 성질-정적(static) 질서와 동적(dynamic) 에너지-이 다 녹아들어 있습니다. 창조의 첫 3일 동안이 법과 질서에 대한 강조라면 이어지는 나머지 3일은 역동성과 에너지에 대한 강조인 듯 보입니다. 즉 창조가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창조명령, “있으라”와 “나누라”에 대한 순종으로서 법과 질서라는 테두리 안에서 존재하고 유지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러한 법과 질서는 창조 이후에도 이 우주와 생명체를 유지시켜주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우주와 생명체는 단순한 죽어있는 기계가 아니라 살아있고, 역동적이며, 자가 생산을 해낼 수 있는 활력에 찬 유기체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풀을 내는 땅”, “풀과 씨 맺는 채소”, 그리고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10, 12절)에 대한 묘사가 바로 그러한 것들입니다. 더욱 활기차고 생산적인 창조활동에 대한 묘사는 그 유명한 “문화명령”(지상 위임령)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며, 땅을 정복하고...모든 생명을 다스리라”(26-28절).
이 명령이 드러내고 있는 분위기는 아주 긍정적이며, 역동적입니다. 생명의 숨소리, 활력에 찬 에너지가 넘쳐나는 듯합니다. ‘비발디’(Vivaldi)의 <사계>(四季) 중에서 봄과 여름의 선율을 연상시켜주는 묘사입니다. 이 명령의 어디에도 어둡고, 혼돈스러우며, 공허한 구석은 없습니다. 그것들은 창조의 첫날에 “(생명의) 빛이 있으라”는 명령에 의해서 이미 사라지고 없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4. 배경
본문의 문학적 분석에 대한 연구와 관련해서 한 가지 남은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역사적 배경, 즉 “삶의 자리”에 대한 질문입니다. <창세기> 서막의 “내포 독자”들은 누구이며, 이들은 과연 어떤 상황에 처해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두 가지 견해가 있다는 점을 서론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45-46쪽). 첫 번째 견해는 ‘다윗’ 시대의 청중들로 보는 것입니다. ‘다윗’ 이후 이스라엘은 정치와 문화 및 경제에 있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흡사합니다. 그들의 미래는 낙관적으로 보이기만 합니다. 그들이 영원히 이 세계의 강자로 남아있을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경제적 풍요는 필경 종교적 이완과 세속화 현상, 그리고 정신적인 공허감과 허무감을 부추기게 됩니다. ‘핍립 얀시’도 그의 저서 「The Bible Jesus Read」에서 <전도서>의 저작 시기와 관련해서 이와 비슷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 기자는(흔히 ‘야훼’ 기자로 알려져 있음) 현재 백성이 누리고 있는 제반 축복의 근원이 ‘야훼’ 하나님임을 밝히고, 그에 대한 충성과 책임을 강조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또 다른 한 견해는 이와는 정반대의 상황에서 충고와 교훈을 위한 것입니다. 즉 ‘바벨론’ 포로 이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남은 자들이 그 청중이라는 견해입니다. 그들은 포로기간 동안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인 정체성을 상실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보살핌에 대한 신뢰도 상실해 버렸습니다. 그 동안의 그들의 생활은 마치 대홍수 시기나 <창세기> 1:2에서 그리고 있는 바처럼 “혼돈과 무질서와 어둠과 방황”의 가운데 있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역시 공허하여 아무도 살 수 없는 버려진 땅으로 남아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창조가 오히려 “반 창조”(反創造)의 극치에 와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된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노아’ 가족을 통해서 그들을 살려주고 번성시켜주셨듯이, 지금 ‘바벨론’에서 살아남아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에게도 이제 하나님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의 명령이 여전히 유효하게 살아있으니, 이제 모두 일어나 새로운 ‘예루살렘’을 함께 창조하고 건설하자는 메시지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 첫 걸음이 무엇일까? “처음으로 돌아가자?” 뭐 이런 메시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돌아가야 할 태초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창세기>는 그 서막에서 공동체의 이런 근원적이고도 실존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주고자 함입니다.
5. 자료와 편집
<창세기>의 문학적 배경, 즉 고대근동 문학과의 연계성이라든지 유사성과 관련해서는 서론에서 소상하게 다룬 바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생략합니다. 그리고 <창세기>를 포함한 <오경> 전체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의 일반적인 결론에 대해서도 역시 서론에서 간단하게나마 다룬 바 있습니다. <구약> 해석학 전반에 대한 소상한 지식을 위해서는 이형원의 저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경>이나 <창세기>에 대한 “자료비평적” 연구에 대해서는 ‘Wenham’이나 ‘Hamilton’의 저서가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다만 <창세기> 1장이 <구약>에서 아주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창조를 노래하고 있는 <구약>의 다른 본문과 비교해 보는 것도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창조를 다루고 있는 곳은 <시편>에서 대표적으로 세 곳을 들 수 있고(8, 136, 148편), <잠언>(8:22-31)과 <욥기> 등에서도 다루고 있습니다만(욥 38), 이들 모두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끄집어낸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활동을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아주 신비한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 1장은 그 규모나 범위에 있어 이들 모두를 능가하는 위대한 창조의 시요 노래입니다. 독자들은 이 노래를 통해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맛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창세기> 서막은 단순히 시로 보기에는 문학적으로 아주 복합 구조물과도 같습니다. 단적인 예로 창조의 “노래와 시”는 2장으로 넘어가면서 창조의 “이야기”로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웨스터만’(Westermann)은 <창세기>의 자료에 대해서 논하면서 “<사제전승>에 속하는 축제의 서곡 또는 전주곡”이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이곳에서 화자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비롯되는 일련의 거대한 사건의 흐름을 소개하고 있고, 이로부터 <족장 이야기>, 그리고 <출애굽 이야기>로 나아가다가, “시내 산 언약”에서 절정을 맞으면서, 그 절정의 중심에는 율법과 그 율법의 규정에 따라 장막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예배의 신학이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일견 <창세기> 1장은 그 자체로써만 보면 예배나 제사와 같은 <사제전승>의 요소를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분명 예배의 특권이나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시내’ 산에서 그들이 섬기고 예배드리는 ‘야훼’ 하나님은 다름 아닌 ‘엘로힘’ 즉 창조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서막은 그야말로 <창세기> 전체에 대한 거대한 서론이자 서막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화자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한 부족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주만물의 창조주요 절대 주권자이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창세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족장 이야기>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우주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이들을 통해서 온 땅의 인류들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특유의 문학적 형식인 대칭과 반복을 통해서 꾸며놓은 <창세기> 서막은 단순히 미사를 알리는 “초입경”(初入經)이나 예배를 위한 “준비 찬양”의 수준을 뛰어넘고 있습니다. 서막은 독자들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말씀 하나로 이 거대한 우주의 질서를 이룩해 놓으셨습니다. 곧 근동의 잡다한 창조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과는 감히 비교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위대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우주와 그 안에 천지만물과 특히 자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한 인간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립시다.
신학과 신앙
서막에 대한 “문학과 역사”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으므로, 이제 내용 분석을 통해서 서막의 신학을 연구할 차례입니다. 서막의 이야기는 편의상 시간대 별로 세 개의 기간으로 나눌 수 있으므로, 우리는 이 작업을 아래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첫 날 이전(1:1-2)
2. 창조의 6일(1:3-31)
3. 안식일(2:1-3)
1. 첫날 이전(1-2절)
서막의 첫 번째 단락은 <창세기>의 첫 두 절로서, 창조의 첫 날 이전의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1-2절)
지극히 단순한 이 두 구절에 대한 해석을 놓고 복잡하고도 지루한 논쟁이 역사적으로 있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논쟁의 핵심은 1절과 2절 사이의 구문론적인 관계에 관한 것으로서, 1절을 독립절로 볼 것인가, 아니면 2절이나 3절에 대한 종속절로 보아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 드러내고 있는 “태초의 혼돈과 공허”는 과연 어떤 시기와 어떤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인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논쟁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현재까지 대략 네 가지 가능한 이론이 알려져 있습니다. 논쟁의 핵심과 올바른 해석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알기 위해서는 Young의 저서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참고도서 8).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1절은 2절에 대한 종속절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기 시작할 때에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In the beginning when God created the heaven and earth,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NEB & NAB 번역본).
(2) 1절은 3절에 대한 종속절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시작할 때에-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In the beginning when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now the earth was formless and void-God said, Let there be light)(RSV, NEB, TEV, NAB 번역본).
(3) 1절은 제목을 의미하는 독립 절이다: “하나님이 태초의 천지의 창조자였다”(In the beginning God was the creator of heaven and earth). 그리고 1장의 나머지 부분은 이에 대한 설명이다.
(4) 1절은 하나님의 첫 창조행위를 묘사하는 독립 절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Now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
상기한 네 이론들은 나름대로 전혀 다른 의미를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처음 두 입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행위를 하실 때 하늘과 땅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는 무(無)로부터의 절대창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입장의 경우, 1절을 1장 전체에 대한 요약 내지는 제목으로 보기 때문에 역시 하나님의 창조는 반드시 절대창조일 필요가 없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네 번째 해석적 입장을 올바르고 전통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입장에 따르면, 1절과 2절은 각기 독립 절로서 1절은 태초의 하나님의 절대창조 행위를 묘사하고 있으며, 2절은 창조 직후의 지구의 초기 상태(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두 절을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우주만물)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지구는 아직 혼돈하고 공허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이 해석에 따라 두 구절을 시간대 별로 구분해 보면 아래 세 개의 상황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태초 이전
(2) 태초의 사건
(3) 태초의 지구
(1) 태초의 사건.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두 번째 상황, 즉 태초의 사건부터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태초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화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였다”고 선언함으로써, 우리를 곧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 즉 “시간(time)과 공간(space)과 물질(matter)”로 이루어진 3차원의 세계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모리스’(H. Morris) 박사는 이러한 우주가 삼위(三位)의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한다 하여 “삼위의 우주”로 부르고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각 위(位)는 또 다시 다른 삼위로 나누어진다고 보았는데, 시간의 경우 “과거와 현재와 미래”, 공간은 “가로와 세로와 높이”, 그리고 물질은 그 유명한 ‘아인쉬타인’(A. Einstein)의 상대성 원리의 공식(E = mc2)을 반영하고 있는 “에너지와 질량과 빛”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즉 태초에 무엇인가 시작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 “태초”(tyvioar, 레쉬트)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태초”의 의미에 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Young의 설명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참고도서 8, 14-20쪽).
여기서 ‘히브리어’ “태초”는 어원이 “최상”, “처음”, 또는 “우두머리” 등을 뜻하는 명사 “로쉬”(var)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이 단어가 시간을 드러내는 경우는 주로 상대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예컨대, 한 해의 시작이라든지(신 11:12) 또는 왕조(王朝)의 시작(렘 26:1) 등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본문에서처럼 어떤 절대적인 시간, 즉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은 어떤 시기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단어에 대한 두 가지 용례 중 어느 쪽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본문의 문맥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예컨대, <창세기> 1:1이나 <이사야> 46:10에서 사용하고 있는 “태초”는 공히 절대적인 시간의 시작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
따라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본문의 “태초”가 포함하고 있는 바는 우선 “시간”입니다. 즉 시간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성경>의 첫 단어, “태초에”(tyviarEB, 베레쉿트)가 드러내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tyvioar’(레쉬트)와 함께 사용하고 있는 ‘히브리’어 문자 ב(베)는 “~에”(in)에 해당하는 전치사(前置詞)입니다. 흥미롭게도 <창세기> 화자는 1절의 첫 두 단어를 동일한 문자 ב(베)로 시작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그가) 창조하였다”(ar:B; tyviarEB, 베레쉬트 바라). 이것이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화자의 의도적인 문학적 기술인지 분명치는 않습니다만, <창세기> 1장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보면 의도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서막 전체를 통해서 “창조하다”의 ‘히브리’ 단어 “바라”(ar:B)는 항상 또 다른 ב(베)로 시작하는 단어 “바라크”(&r'B,, 축복하다)와 나란히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1:21/22; 1:27/28; 2:3/3; 5:1-2/2). 화자의 의도인 즉은 “창조”와 “축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축복은 창조의 목적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훗날 ‘아브라함’(!h;r;b]a)을 통해서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참고로 ‘아브라함’ 역시 동일한 자음 ב를 포함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절대적인 시간의 시작과 함께 시작된 것이 또 있습니다. 역시 같은 1절에서 문장의 목적어로 등장하고 있는 “천지”, 즉 “하늘들(!yIm'v, 샤마임)과 땅”($r,a, 에레츠)입니다. 이 두 단어는 문자 그대로 땅과 하늘을 뜻합니다만, 고대 근동 문화권에서 우주로 이해하고 있던 단어이기도 합니다. 현대 과학의 용어를 빌자면 “시간과 공간”으로 부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결국 제 1절이 의미하는 바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두 번째 질문은 “누가 그 태초를 가능하게 하였는가?”입니다. ‘엘로힘’(!yhiOla)입니다: “하나님(엘로힘)이 창조하시니라.” ‘엘로힘’(하나님)은 <성경>에 등장하는 첫 번째 주어이며, <구약>을 통 털어 두 번째로 많이 등장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그런데 흥미롭게도 ‘엘로힘’은 하나님에 대한 통칭(일반적인 호칭)일 뿐이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고유명사는 아닙니다. 즉 ‘엘로힘’은 단순히 일반적인 신(神)을 지칭하는 단어이지, ‘야훼’나 ‘엘 샤다이’ 등과 같은 개인적인 이름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화자가 이곳에서 ‘야훼’ 대신에 ‘엘로힘’을 사용하는 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즉 창조주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개인적인 하나님만이 아니라 전 우주의 창조주라는 암시가 깔려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히브리’ 단어 ‘엘로힘’은 영어 단어 ‘God’에 해당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어 문화권에서 ‘God’은 현대사회의 세속주의의 영향으로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절대적 타자 정도로 이해되고 있습니다만, <창세기>의 ‘엘로힘’은 인격적 하나님, 즉 말하고 행동하는 존재이며, 말과 행동이 별개인 존재는 아닙니다.
‘엘로힘’은 문법적으로는 복수형 명사형이지만, 문장 안에서는 항상 단수형 동사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창세기> 화자가 고대근동지방의 다신론(多神論)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화자가 이곳에서 하나님을 복수형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유나 배경에 대해서는 추후 다른 곳에서 논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성경>의 첫 번째 동사 “창조하다”(ar:B, 바라)에 대한 사색으로 나아가봅시다. 이 단어와 관련해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 동사가 문장에서 사용될 때, 그 주어는 항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아무나 이 동사의 주어가 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인간이나 다른 신들이 이 동사의 주어로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창조는 오직 <성경>의 하나님,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만 속한 것이라는 중대한 선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동사는 간접목적어를 갖지 않습니다. 즉 수단이나 도구 또는 원재료를 뜻하는 “~으로부터의 창조”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이 동사의 직접목적어, 즉 창조의 산물은 대개 물질(창 1:6-10)이나 생명체(창 1:11, 12, 20-25), 또는 인간(창 1:26-30) 등에서 보듯이, 태초의 창조의 결과 즉 “무(無)로부터의 창조”를 암시하는 것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단어가 반드시 “무(無)로부터의 창조”를 명시적으로 단언하거나 강조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컨대, <성경>은 이 단어를 “재창조” 즉 “새롭게 하고 회복시킨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가하면 시 104:30; 암 4:13.
, “만들다”(עשׂה: 아사; make)나 “짓다”(יצר: 야짜르; form) 등과 함께 상호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 창 1:26, 27; 2:18, 19; 사 43:15.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강조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의 절대 창조행위, 즉 어느 누구의 간섭도, 의논도, 도움도 받음이 없는 완전한 자유의지에 의한 창조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동사의 시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첫 창조는 6일 동안 이루어진 일로서, 문법적으로 항상 과거 완료형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 이상의 창조는 없다는 강조입니다. 그러나 완성되고, 완료된 창조는 지속적인 보존과 유지, 그리고 때로는 회복이 필요합니다. 즉 재창조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히 1:3; 골 1:17; 계 4:11; 고후 5:17.
<성경>은 “재창조”와 관련해서도 동일한 동사 ‘바라’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완료형이 아닌 일종의 진행형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예: 시 104:30; 암 4:13; 사 43:15).
(2) 태초 이전. 태초의 사건에 대한 사색 끝에 당연히 이어지는 질문은 그 사건을 가능하게 만든 원인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이와 같은 질문은 한가한 자의 어리석은 신학적 놀음이 아니라, 인과율(因果律)의 대전제 즉 “원인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다”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시작이 있는 것들은 그보다 앞선 원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부터 무엇인가 나타날 수는 없습니다. 거미가 허공에 거미줄을 칠 수 없듯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선언도 허공에 그냥 떠 있는 선언이 아닙니다. 그보다 앞선 원인을 전제로 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화자는 이 질문에 대해서 어떤 명시적인 답변을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신약>은 여러 곳에서 태초의 사건을 가능하게 했던 그 무엇이 태초 이전부터 있었음을 암시하고는 있습니다. 예컨대, <요한복음>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24). 태초 이전에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계셨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같은 복음서는 두 분 사이에 교제(交際)가 있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요 1:1).
그리고 두 분의 교제는 약속도 함께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4).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 또는 “영생”을 의미합니다. 이 약속과 관련해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이 “창세전부터 미리 알려진바”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바울’ 사도는 “영생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딛 1:2).
그리고 이 약속이 태초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라면, 그것은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기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의도하고 계획했던 것임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태초 이전에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 아니라, 삼위의 하나님 사이에 “교제가 있었고, 계획이 있었으며, 또한 약속이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창조는 그 결과 나타난 열매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고대 근동 신화의 여타 창조론과 구별되는 바입니다. 창조와 창조론에 관해서는 <교훈과 적용>에서 조금 더 심도 있게 다루고 있으므로, 그곳을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는 본인이 저술한 <창조와 창조론>을 별도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3) 태초의 지구. 화자는 태초의 창조를 선포한 다음(1절), 곧바로 창조 직후의 지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2절)
앞에서 다룬 바 있듯이, 1절과 2절을 상호 대등한 독립절로 이해하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입니다. 강조를 위해서 2절 문장이 “그리고” 또는 “이제” 등의 접속사 또는 시제 부사를 괄호 안에 첨가하였습니다. 이런 전제 하에 2절을 이해하자면, 이곳에서 묘사하고 있는 상황은 창조 직후의 지구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화자는 1절과 2절에서 공히 “땅”을 의미하는 동일한 ‘히브리’ 단어 ‘에레츠’($r,a)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2절에서는 그 의미가 사뭇 달라지는데, “지구”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화자는 창조 직후의 지구의 모습을 세 개의 병행하는 구절로 연결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1)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2)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3)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들 세 구절로부터 태초의 지구의 모습에 대한 세 개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1) 혼돈(WhT, 토후); (2) 공허(WhB, 보후); (3) 흑암(&v,j, 호셰크). “혼돈과 공허”는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만, 이곳에서는 쌍을 이루어 크게 두 가지 이미지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예: 사 29:21)를 말하며, 다른 하나는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바처럼, “혼란과 무질서”를 의미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것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태라는 뜻입니다(사 34:11; 렘 4:23). 그리고 <신명기>나 <욥> 등에서는 사람이 길을 잃고 죽게 만드는 사막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신 32:10; 욥 6:18).
이처럼 창조 직후의 모습은 충격적이며, 하나님의 육일 동안의 창조가 끝났을 때 드러내게 될 조화와 질서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여기에 화자의 의도가 깔려있다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 행위 이전과 이후의 지구의 모습을 극적으로 대비시키고자 함입니다.
두 번째 표현,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역시 “혼돈과 공허” 만큼이나 부정적인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원시 대양 위로 어둠이 짙게 깔려있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묘사는 그 자체로서 무슨 영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분명 하나님의 속성에 반하는 강력한 상징적인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빛이 하나님을 상징하는 단어라면, 어두움은 정 반대의 상징으로서 하나님에 대하여 적대적인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악인(잠 2:13),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출 10:21), 또는 죽음(시 88:13)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한편 구원은 어둠 속에 있는 자들에게 비치는 빛으로 <성경>은 묘사하고 있습니다(예: 사 9:1).
그러나 어두움 속에서 인간은 볼 수 없을 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투명하게 드러날 뿐입니다: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시 139:12). 그러므로 위대한 계시의 순간에서조차도 하나님은 자신을 흑암으로 가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에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불길이 충천하고 어둠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데”(신 4:11);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에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수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신 5:23); “그 앞에 광채로 말미암아 빽빽한 구름이 지나며 우박과 숯불이 내리도다”(시 18:12).
이렇게 볼 때,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는 표현은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원시대양(原始大洋)이 주는 황량하고 어두운 부정적인 모습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그 어둠의 베일 뒤에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암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깊음”(!/hT, 테홈)이 의미하는 바는 “깊은 바다”, “심연” 등으로서 <구약>에서 36회 정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깊은 물은 사람을 익사시킬 수 있는 위협적인 존재이긴 합니다만(출 15:8), 동시에 메마른 근동 지역에서는 생명을 지탱시켜주는 필수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창 49:25; 신 8:7).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깊음”은 육지를 둘러싸고 있는 “원시대양”과 동의어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예. 창 7:11). <성경>의 어느 곳에도 이 대양이 하나님께서 싸워 통제해야 하는 어떤 힘이나 세력을 암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피조세계의 일부로 그리고 있습니다(참고. 시 104:6; 잠 8:27-28).
하지만 ‘궁켈’(Gunkel)은 ‘히브리’어 ‘테홈’을 ‘바벨론’ 신화의 ‘티아맛’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티아맛’은 ‘바벨론’의 여신(女神)으로서, ‘마르둑’이 죽여 그 시체를 둘로 쪼개어 한쪽은 바다로, 나머지 한 쪽은 땅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궁켈’은 <창조 이야기>가 ‘메소포타미아’의 창조 신화를 암시하고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후 여러 학자들도 <창세기>와 근동의 창조 신화와의 연계성을 보여주려고 시도한 바 있습니다만, 두 기사 사이에는 유사성보다는 차별성이 더 많습니다(이에 관해서는 이미 다룬 바 있습니다). 따라서 ‘테홈’과 ‘티아맛’은 어원론적으로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라도 두 창조 설화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2절 후반의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로 운행하시니라”에 대해서도 그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폰 라드’(von Rad), ‘스파이저’(Speiser), ‘슈미트’(Schmidt), ‘베스터만’(Westermann), 및 <NEB 성경> 등은 이 구절을 단순히 원시 대양의 혼돈과 무질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보고, “지표면 위에 부는 엄청난 위력의 바람”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한편 ‘궁켈’을 위시한 옛 학자들은 “하나님의 영” 또는 “하나님의 호흡” 등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란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신” 즉 ‘루아흐 엘로힘’(!yhiOla j“Wr)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루아흐’(j”Wr)는 “바람” 또는 “영” 으로 번역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지칭하는 단어 ‘엘로힘’(!yhiOla)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때로 문법적으로 최상급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막강한 바람” 등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구절의 구문론적 기능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습니다. 즉 이 구절은 앞선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와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와 대등절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곳에서 “깊음”이 의미하는 바는 곧 “물”이 될 것이므로, 결국 2절은 세 개의 병행 구절이 태초의 지구의 상황 즉 본격적인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기다리고 있는 태초의 지구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절과 2절이 혼돈과 흑암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를 운행하시다”는 2절의 세 번째 구절 또한 그에 대응하는 묘사로 보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루아흐 엘로힘’에 대한 적절한 해석은 “하나님의 신”보다는 “거대한 바람”이 더 나아보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창세기> 1장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엘로힘’을 단순히 최상급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단순화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 내에서 ‘엘로힘’은 항상 “하나님”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경> 어디에도 ‘루아흐 엘로힘’을 “거대한 바람” 내지 “거대한 폭풍”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 없으며, 항상 “하나님의 영” 또는 “하나님의 바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루아흐’를 “바람”으로 해석하든, “영”이나 “호흡”으로 해석하든, 하나님의 모종의 개입이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2절의 세 번째 구절을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앞선 두 구절과 반드시 상충되는 묘사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즉 “혼돈과 흑암”이 어떻게 “하나님의 운행”과 조회를 이룰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흑암”의 경우만 하더라도 실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곳에서처럼 부정적인 의미로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반(反)하는 일체의 세력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긍정적으로는 피난처 또는 도피처 등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루아흐’에 대한 해석으로 “바람”, “호흡”, 또는 “영”을 택할 수도 있겠으나, 이에 수반되는 동사 “운행하다”(#j'r, 라하프)와 가장 잘 어울리는 주어는 “호흡”이나 “영”보다는 “바람”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 동사가 의미하는 바가 “배회하다” 내지는 “돌아다니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동사를 “알을 품다” 또는 “부화하다” 등으로 해석한다면, 이에 상응하는 주어로써 “영”이나 “호흡”을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 또한 없을 것입니다. 이런 해석과 관련해서 연상되는 이미지는 마치 닭이 알을 품고 있듯, 하나님의 영이 지구를 품고 있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상은 고대 근동 지방의 일부 우주관과도 일맥상통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운행하다”(#j'r, 라하프)를 사용하고 있는 곳은 <신명기>가 유일한데, 이곳에서도 “알을 품다”는 뜻이 아니라 “날다”, “배회하다” 등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j'r)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신 32:11). 다른 ‘유가릿’ 문헌에서도 이 단어를 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루아흐 엘로힘’을 이해하는 방식은 그것을 하나의 자연적인 힘이나 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바람”일 것인데, 이는 결국 “하나님의 영”에 대한 강력하고도 생생한 이미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을 통해서 받게 되는 인상은 강력하고도 신비한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성경>은 때로 하나님의 임재를 “하나님의 바람”과 연계해서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내가 보니 북쪽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방에 비치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겔 1:4); “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그 생물들도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겔 1:12); “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생물들도 영이 가려 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니라”(겔 1:20). 또한 <잠언서>나 <욥>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지혜와 연결 짓고 있기도 합니다(잠 8; 욥 38).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를 운행하시다”는 의미를 이들 구절들과 연계시킬 수 있을지 분명치는 않지만, 아무튼 이 구절은 창조 직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제 본격적인 창조 행위를 준비하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게 합니다.
2. 창조의 6일(1:3-31)
1) 첫째 날(3-5절)
화자가 <히브리 성경>에서 육일 동안의 하나님의 창조를 기술하기 위하여 각 날마다 동원하고 있는 단어의 수는 모두 열 개입니다. 그리고 이들 열 개의 단어는 일정한 표준 공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첫 세절(3-5절)은 그 첫 번째 기록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창조에 관한 진술은 이들 열 개의 단어를 일정한 공식에 따라 배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배열순서는 창조의 각 단계를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3-5절)
그리고 배열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선언: “하나님이 이르시되”
(2) 명령: “...있으라” (또는 “되어라”)
(3) 성취: “그대로 되니라”
(4) 수행: “나누시고”
(5) 승인: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6) 작명: “...칭하시고”
(7) 시간: “...째 날이라
우선 첫 번째 공식, “하나님이 이르시되”는 1장 전체적으로 모두 열 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습니다(6, 9, 11, 14, 20, 24, 26, 28, 29절). 물론 <구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다”(rm'a, 아마르)는 생각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이곳에서 창조와 관련하여 이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할 것입니다. 즉 그분의 말씀은 무엇인가를 존재케 하는 명령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말씀인 동시에 예언의 말씀으로 기능합니다. 즉 무롤 유로 가능케 할 뿐 아니라, 미래를 현실로 가능하게 만들어줍니다. 이 첫 번째 공식이 바로 그 점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할 것입니다.
두 번째 공식은 “빛이 있어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자 동시에 창조 행위 그 자체입니다. 이 문장은 명령형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만(6, 9, 14정 등), 여섯째 날에 이르러서는 “우리가 ...하자”(let us)의 권유형 문장으로 표현되고 있기도 (참고. 26절).
“빛”(r/a, 오르)은 하나님의 창조의 첫 작품입니다. 혼돈과 어둠으로 뒤덮여 있던 원시대양에서 이 빛은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빛은 그 자체로서 하등 거룩하거나 신비하게 여길 대상은 아닙니다만, 때로 상징적으로 “생명”, “구원”, “계명”, 또는 “하나님의 임재” 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시 56:14; 사 9:1; 잠 6:23; 출 10:23). 그렇다면 빛은 문자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어둠”과는 반명제(反命題)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둠”에 관한 2절의 설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빛”의 창조와 관련해서 제기되는 한 가지 의문점은 그것이 해나 달이나 별 등과 같은 여타 천제(天體)들의 창조보다 앞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14-19절). 태양이 있기 전에 이 빛이 있었다는 선언을 순전히 천문학의 설명과 조화를 이루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선언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교훈과 적용>에서 보다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입니다.
적어도 화자에게 있어 더 중요한 관심사는, 오늘날의 독자들과는 달리, 두 번째 공식의 의미보다는 이어지는 세 번째 공식일 것입니다: “빛이 있었더라.” “성취”를 드러내는 이 표현은 다른 곳에서는 “그대로 되니라”로 약간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7, 9, 11, 15, 24, 30절). 아무튼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명령이 그대로 성취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어지는 4절은 네 번째(때로는 다섯 번째) 공식을 담은 표현,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이 표현은 1장에서 일곱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10, 12, 18, 21, 25, 31절). 위대한 창조자이자 예술가이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보고 만족하고 경탄해 하는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는 이 표현은 창조주에게 돌리는 일종의 찬송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피조세계는 위대하고 선하신 하나님을 속성을 반영하고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좋다고 여기시는 것은 어둠이 아니라 빛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좋다”(b/f, 토브)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그 질(質)에 있어서나 만들어진 목적에 잘 부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념해야 해야 할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대상이 무엇이든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부합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선하시며, 그분의 선하심이 그가 만든 모든 피조물에 반영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4절의 나머지 구절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묘사하고 있는 다섯 번째(또는 네 번째) 공식, “(빛과 어둠을) 나누사”입니다. 이곳에서는 이 표현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다음에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다른 곳에서는 이보다 먼저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참고. 12, 16-18, 21, 25절), 이 두 표현의 순서는 다소 융통성있게 사용된 것 같습니다. “나누다” 또는 “분리하다”(ld'B, 바달)는 “창조하다”(ar:B, 바라)와 함께 1장에서 핵심 되는 단어입니다. 창조 이야기를 통해서 보듯, 하나님께서 나누신 것은 “빛과 어둠” 외에도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 “낮과 밤” 등이 있습니다(6, 7, 14, 18절). <성경>의 다른 곳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선택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예: 레 20:24; 민 8:14; 신 4:41; 10:8; 왕상 8:53). ‘이스라엘’도 이처럼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 거룩한 것과 타락한 것들을 구별하여 살도록 요청받고 있다 하겠습니다(레 10:10; 20:25).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시는 과정에서 어둠보다는 빛을 더 선호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인데, 이런 상상을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궁창 위의 물”을 더 선호하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 공식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에 대한 “작명”(作名) 작업입니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5절상). 이 표현 또한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이은 공식적인 표현으로 창조의 육일 동안 일곱 번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5절의 두 번, 8절, 10절의 두 번; 22, 28절). 그런데 마지막 두 곳에서는 작명이 아니라 “축복”의 선언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명하시는 것 중에는 하늘과 땅과 바다와 낮과 밤 등이 있습니다. 근동의 다른 창조 신화인 <에뉴마 엘리쉬>에서도 창조는 항상 명명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작명 또는 명명을 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권위 또는 통치를 의미합니다(참고. 2:20; 왕하 23:24; 24:17). 우리나라에서도 신생아의 이름을 가장이나 또는 어른이 작명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둠을 창조했다는 기록은 없음에도, 어둠을 밤이라 칭함으로써 그에 대한 통치권을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작명에는 권위나 통치 외에도 역할이나 기능을 부여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예컨대, 빛과 어둠을 낮과 밤이라 칭하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공식은 창조의 날에 대한 언급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5절하). 이 표현은 각 날의 창조 행위를 마감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8, 13, 19, 23, 31; 2:2). 여기서 아침보다 저녁을 먼저 언급하는 것은 전형적인 ‘히브리’적 사고로서, 하루가 새벽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황혼과 함께 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볼 때, 태초의 첫날은 어둠에서 시작하여(2절) 어둠으로 끝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제 빛이 창조된 이후에 저녁이 옴으로써, 둘째 날이 시작될 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화자의 관심사는 하루 중에서 저녁이 먼저냐 낮이 먼저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루가 저녁과 낮으로 구분됨을 강조하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화자가 처음으로 소개하고 있는 단어 “날”(!/y, 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오늘날의 24시간 하루를 의미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시간구분-“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에 대한 표현이 6일 동안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하루를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 “욤”(מי)은 정상적인 24시간을 의미할 수 도 있고, 낮 12 시간을 의미할 수 도 있거나, 또는 불특정 기간(예: 주의 날; 사사의 시대) 예를 들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 그 날의 날, 그 벌받는 때가 이르렀음이로다(렘 50:17;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창 2:4);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창 5:1); ”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로 쉬게 하사 품군같이 그 날을 마치게 하옵소서“(욥 14:6) 등의 구절이 그 예가 될 것입니다.
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1:4-5의 기록을 보면 이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인데 여기서 기자는 ‘욤’(מי)의 정의를 아주 조심스럽게 내리고 있음을 봅니다. 특히 같은 단어를 한 번은 그냥 낮으로, 또 한 번은 24시간의 하루로 정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빛을 낮(מי)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이는 첫째 날(מי)이니라”(1:5).
둘째, 6일 동안의 창조와 7일째의 안식일이 갖는 연결성 때문입니다. 즉 창조의 6일이 문자적인 날들이 아니라면 제 7일의 의미가 애매모호해 지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제 4계명은 우리에게 6일 동안 일하고 하루를 쉬라고 하시는데, 그 이유와 근거로써 창세기의 제 7일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엿새 동안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1).
만일 창조의 날이 긴 시간을 의미해야 한다면 이상의 구절도 “너는 불특정한 여섯 시대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일곱 번째의 불특정한 시대동안은 쉴 것이라”라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해석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의 6일간의 노동과 하루의 안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모델로 주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화자는 하나님의 전체 창조 사건을 7일(육일 더하기 하루)이라는 틀 속에서 이해하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둘째 날(1:6-8)
첫째 날의 사역에서는 모든 중심이 빛에 있었습니다. 둘째 날의 관심은 땅에 있습니다. 이 날의 사역의 목적은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보는 순서, 즉 빛이 창조된 후에 궁창이 창조되는 순서는 <에뉴마 엘리쉬>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티아맛’이 살해되었을 때 ‘마르둑’은 그녀를 짤라 절반은 하늘을 만드는데, 나머지 절반은 땅을 만드는데 사용합니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6-8절)
이곳에서도 한 가지 표현, “보시기에 좋았더라”만 빼고 나머지 여섯 가지 공식이 모두 등장하고 있습니다. 왜 이 공식이 빠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혹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분리하는 작업이 다음 날 까지 계속될 것이었기에, 연속성을 의식해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둘을 분리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 “궁창”(ציקר: 라키아)이고, 이 궁창을 “하늘”(םישׁמ: 솨마임)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궁창의 의미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 단어의 어원을 통해서 볼 때, “얇게 펼쳐놓은 장막” 내지는 “지구를 덮고 있는 유리 돔”(dome)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이 단어는 원래 “눌러 찍어서 펴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것으로서(사 42:5; 시 136:6), 금을 망치로 두드려 편다는 의미로 쓰이는가 하면(출 39:3), 주물-부은 거울-을 펼쳐놓는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고(욥 37:18), 그 밝기가 수정이나 유리와 같다고 묘사하기도 합니다(겔 1:22; 단 12:3).
그래서 학자들은 이러한 표현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원시 우주관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구형(半球形)의 차양막이 편편한 지구를 덮고 있는 그림은 꽤 잘 알려져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이 덮개 위에 많은 양이 물이 있고, 비가 내릴 때 이 덮개의 구멍이 뚫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모리스’(H. Morris) 등과 같은 창조과학자는 이러한 생각에 반대하면서 이 궁창을 아예 대기권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는 궁창을 하늘(또는 천상: heaven)과 같은 의미로 보고, <성경>도 여러 종류의 하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대기권(렘 4:25), 성층권(사 13:10), “참 하늘”(히 9:24), “하늘들의 하늘”(대하 2:6)들이 그것입니다(참고도서 10, 58-61쪽; 참고도서 11, 제 10장). 그러나 현대 지구과학에서 공간을 지표면으로부터 대기권, 화학권, 대류권, 이온권, 성층권 등의 여러 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 중 일부라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지는 지극히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궁창의 의미가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정확하게 무엇인지 밝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반복되는 화자의 진술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성취에 대한 표현이 그것입니다.
3) 셋째 날(1:9-13)
이제 창조의 이야기는 빛의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 대한 언급을 거쳐, 우리 인간의 거주지인 육지의 이야기로 옮아갑니다. 이 날 역시 두 가지의 창조행위를 볼 수 있습니다: (1) 바다와 육지의 분리; (2) 육지 식물들의 창조. 이 말은 셋째 날에도 창조의 대부분의 공식이 그대로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9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9-13절)
여기서 “한 곳”은 분명 물이 땅을 뒤덮고 있는 “모든 곳”과는 대조를 이루는 표현입니다만(9절), 이는 “바다”를 의미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10절). 물론 한 곳이라 해서 단 한 개의 대양(大洋)만을 의미한다고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대륙이라 함은 대양으로 둘러싸인 섬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고대인들에게 세상은 마른 땅과 그 안에 바다로 이루어진 곳으로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물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땅을 범람하지 못하고 그 경계 내에 머물러 있다고 보았습니다(렘 5:22). 이처럼 엄청난 분리의 작업이 완료되었을 때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10절하). 창조 시에 있었던 이러한 땅과 바다의 분리가 대 홍수로 허물어질 때, 다시 태초의 혼란과 무질서가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날에 땅에는 식물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화자는 이들 식물들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1) 풀(av,D, 데셰); (2) 채소(bc,[, 에세브); (3) 나무($[, 에츠). 일견 이들 세 이름은 각기 다른 식물 종류를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일부 학자들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풀”이 의미하는 바는 보다 넓게 식물과 나무 모두를 총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풀”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할 때, 11절은 다음과 같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풀, 즉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 이와 같은 해석을 지지할 수 있는 근거는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29-30절에서도 “채소”와 “과목”이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풀”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이 그것입니다. <성경>의 초기 번역본에서나,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도 이처럼 식물을 세 종류가 아닌 두 종류로 구분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 또 한 가지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단어는 “종류”(@ym, 민)입니다. 이 단어는 소위 <사제 문서>를 구분하는 공통적인 단어 중의 하나입니다(참고. 21절, 24-25절; 6:20; 7:14; 레 11:14-29; 신 14:13-18). 이곳에서도 화자는 이 단어에 대한 정의(定義)나 그 구분에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식물을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시고, 그들 각각에게 번식력 즉, “씨 맺고 열매 맺는” 능력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번식력 즉 재창조의 능력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반영 내지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각기 다른 종류”가 암시하고 있는 바는, 비록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또 구분하신 것들을 사람이 혼란스럽게 하거나 뒤섞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레 19:1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다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 너는 소와 나귀를 격리하여 갈지 말며,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신 22:9-11).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
혼돈이 아닌 질서가 하나님의 창조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임에 분명합니다. 이처럼 창조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의도는 창조의 방법이나 목적만큼이나 화자에게 있어 중차대한 관심사였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 독자들이 창조와 관련하여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질문들에 골몰하고 있는 것에 반해, <성경>은 창조의 신학과 신앙에 더 치중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왜 세상과 자연은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바 모습 그대로인가?” 이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넷째 날(1:14-19)
셋째 날의 창조의 결과 육지는 이제 그 거주자를 맞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마치 새로운 주인을 맞을 아파트의 실내 장식과, 냉․온방 장치와, 음식이 다 준비된 상태와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 땅위에 있기 위해서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땅의 날과, 계절과, 그리고 낮과 밤을 주관할 특별한 장치가 그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들을 하늘에 창조하셨습니다. 물론 이러한 구분(계절, 주야, 등등)은 이미 첫째 날부터 시작되고 있었다고 앞에서 언급했습니다만, 이들 천체들의 기능은 땅에 사는 우리 인간들을 위한 것입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14-19절)
넷째 날은 첫째 날과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컨대, 첫째 날 창조되었던 “빛”을 지구에 전달해 줄 태양이나, 달이나, 별과 같은 발광체(發光體)들이 하늘에 등장하여 그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물론 이들 천체들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미 창조되어 있던 원재료들을 통해서 만들어졌고, 이어 특별한 기능을 부여받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천체들의 재료(원료)들은 첫날에 이미 창조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Young, 138쪽. .
넷째 날에 대한 기술은 여섯째 날 다음으로 길고 상세합니다. 화자가 이들 천체와 관련해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점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는 시사입니다. 예의 친숙한 창조 공식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선 전체적으로, 창조 공식을 구성하는 일곱 개의 요소 중에서 한 가지, 즉 “복 주시되/칭하니”를 제외하고는 모두 등장하고 있는 점이 다른 날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특기할 만 한 점은 화자가 “교차대구”의 기법을 통해서 이날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A 주야를 나뉘게 하라(14절상)
B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라(14절하)
C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15)
D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16절상)
D'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16절하)
C' 땅에 비취게 하시며(17절)
B'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18절상)
A'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18절하)
우리는 여기서 두 번씩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세 쌍의 하나님의 명령을 만나게 됩니다: (1) “나뉘라”; (2) “비취라”; (3) “주관하라.” 그리고 교차대구의 중심에는 두 개의 발광체, 해와 달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들이 만들어진 것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16절).
이처럼 특이한 구조가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즉 중요한 두 발광체인 해와 달을 언급하면서 전후에 이들의 기능과 관련해서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들 두 광명체가 만들어졌음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왜 이 둘을 각기 해와 달로 칭하지 않고, 단순히 “큰 빛”과 “작은 빛”이라고 언급하고 있을까? “태양”(שׂמשׁ: 솨마쉬), “달”(חרי: 야리)은 별도의 고유명사를 가지고 있는데도, 화자는 이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2절에서 사용한바 있는 단어 “빛”(רוא: 오르)을 사용하여 태양을 “큰 빛”, 달을 “작은 빛”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빛, 즉 별들에 대해서는 가장 뒤에 간단히 언급만 하고 넘어가는 것일까? 해, 달, 그리고 별들의 창조에 관한 <창세기>의 이러한 순서는 ‘바벨론’의 <에뉴마 엘리쉬>에서 보는 순서와는 정반대 입니다.
화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일은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해나 달은 무슨 신비한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단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나마 이들이 존재하는 이유도 인간들을 위한 것, 즉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들 기능과 관련해서 볼 때, 별들은 해와 달에 비해서 그 중요성이 다소 떨어지고 덜 중요한 것만은 틀림없다 하겠습니다. 별이나 별자리를 인간의 운명에 직결시키는 근동의 창조 신화에서는 별에 대해서 먼저 언급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화자는 이들 천체의 기능을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 징조(תוא: 오트 signs); (2) 사시(דעומ: 모에드 fixed times); (3) 일자와 연한(days and years). 이러한 구분은 <리브리 성경> 본문에 대한 정확한 구문론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참고도서 1, 22-23쪽; 참고도서 5, 8-9쪽).
“일자와 연한”은 현대 독자들이 이해하고 있는바 그대로 단순히 시간과 관련된 것이 분명합니다. 두 번째 기능, “사시”는 <구약>에서 다양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정된 시간”(호 9:5)을 의미하기도 하고, “약속된 모임”(욥 30:23)이나 “약속된 장소” 또는 “약속된 표시”(삿 20:38) 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로 미루어 이 단어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절기나 축제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징조”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기적이나 예언의 징조(또는 표적)등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삼상 10:17; 출 4:8.
예컨대, 대 홍수 이후 하늘의 무지개 현상(창 9:12)이라든지 ‘히스기아’ 왕에게 나타났던 해 그림자(사 38:7) 등이 모두 해와 관련해서 나타났던 현상들이었습니다.
5) 다섯째 날(20-23절)
다섯째 날은 둘째 날과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첫째 날이 셋째 날과 대칭을 이루고 있는 방식과 유사하다 할 것입니다 즉 첫째 날에 빛의 창조가 있었고, 셋째 날에는 빛의 전달자에 해당하는 광명체들(해, 달, 별)들의 등장이 있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둘째 날에 궁창과 하늘의 분리가 있었는데, 다섯째 날에는 궁창과 하늘을 채울 생명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날 역시 표준적인 창조의 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봅니다. 다만 한 가지 공식, “그대로 되니라”가 빠져 있습니다.
다섯째 날의 중심에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hy:j vp,n, 네페쉬 하야)가 있습니다. 이 용어는 바다와 육지와 하늘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 즉 어류, 조류, 곤충, 뱀, 짐승, 인간 등을 총칭하는 표현으로서(예: 1:20, 24: 9:10, 16), 이들이 갖는 공통점은 “생명의 호흡”(hy:j vp,n; 네페쉬 하야)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네페쉬’는 <성경>에서 “영혼”(soul; spirit) 또는 “바람”(wind) 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야”는 “하와” 등에서 보듯이 “생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직역하자면 생령(生靈)이 됩니다.
화자는 특유의 삼분법적인 분류 방식에 따라 이들 생명체들을 다시 다음 세 종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 수중 생명체들($r<v,, 샤라츠); (2) 새들(#/[, 오프); (3) 바다의 큰 짐승들(@yNIT, 탄닌)입니다.
20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20-23절)
“생명의 호흡”을 가진 첫 번째 대상은 물속에서 “무리지어 다니는 것들”($r<v,, 샤라츠)로서 통칭 “수중 생명체”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정확하게 어떤 것들인지 분명치는 않습니다. <한글 성경>은 20절을 단순히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20절상)로 번역하고 있지만, 이 문장을 원어에 가깝게 번역해보면, “물들은 무리들로 하여금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게 하라”(Let the waters swarm with swarming things; $r<v, !yIM'h' Wxr]v]y)입니다. 즉 이 문장은 11절에서처럼 동족목적어(同族目的語)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동족목적어(同族目的語)란 한 문장의 목적어가 동사와 같은 어근에서 유래한 명사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1) “그가 꿈을 꾸었다”(He dreamed a dream); (2) “땅은 풀을 내게 하라”(Let the earth grow green with grass)(11절상). 20절의 경우 문장의 동사는 ‘$r'v;’(샤라츠)로서, “충만하다”, “가득 차다”, “우글거리다”이며, 이 동사의 동족목적어는 <한글 성경>에서 단순히 “생물”($r<v,)로 번역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 문장이 전해주는 이미지는 이들 생명체들이 마치 곤충이나 뱀 또는 벌레들처럼 무리를 지어 꼬불꼬불 몸을 움직이면서 어지럽고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모습입니다. 아무튼 이들은 바다에서 “생명의 호흡”을 대표하는 무리들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하늘에서 “생명의 호흡”을 가진 것들은 새들(#/[, 오프)로 통칭하고 있습니다만, 이들 역시 단순히 “조류”(鳥類)들만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단어는 때로는 곤충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모든 생명체들에 대한 통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자는 20절에 이어 21절에서 다시 바다와 공중의 생명체에 대한 언급을 반복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바다의 큰 짐승들”(@yNIT, 탄닌)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뱀”(출 7:9, 10, 12; 신 32:33; 시 91:13), “악어”(겔 29:3; 32:3), 또는 “큰 힘을 지닌 짐승”(렘 51:34) 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대세력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사 27:1; 51:9; 시 74:13; 욥 7:12). 예: (1)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사 27:1); (2)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사 51:9); (3)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시 74:13); (4) “내가 바다니이까, 용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욥 7:12).
‘가나안’ 신화에 따르면, 바다와 용은 ‘가나안’의 ‘바알’(Baal) 신을 대적하다 패배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어, <창세기> 또한 신화적 요소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화자는 1절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단어 “창조”(바라)를 이곳에서 다시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바다의 큰 짐승들”조차도 일개 피조물에 불과하며, 결코 하나님의 대적이 될 수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편>도 같은 입장입니다: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시 148:7).
이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반복되는 창조의 공식, “복주시되”를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22절). 하나님의 축복은 <창세기> 전체의 중심 되는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짐승들을 축복하셨고(1:11), 사람들을 축복하셨으며(1:280), 안식일을 복 주셨으며(2:3), ‘아담’에게 복을 주셨고(5:2), ‘노아’를 축복하셨으며(9:1), 이후 이스라엘의 모든 족장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12:3; 17:16, 20 등). 참고로 이들 약속은 “생육하고”, “번창하는” 것을 통해서 성취될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네 개의 동사 “창조하다”, “축복하다”, “생육하다”, “번성하다”는 모두 음성학적인 유사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1) ‘바라’(בר: 창조하다); (2) ‘바락’(ברך: 축복하다); (3) ‘파라’(ףרה: 생육하다); (4) ‘라바’(רבה: 번성하다).
6) 여섯째 날(24-31절)
창조 이야기의 절정은 여섯째 날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날은 형식적으로는 셋째 날과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처음 3일 동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오늘날 흔히 ‘생태계’라고 부르는 인간의 거주 환경을 만들고 조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섯째 날의 중심에는 땅에서 살아가게 될 다른 종류의 “생명의 호흡”(hy:j vp,n; 네페쉬 하야), 즉 인간과 짐승이 있습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24-31절)
여섯째 날의 중요성은 그 길이와 형식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습니다. 긴 내용과 두 번에 걸쳐 반복되는 창조의 공식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창조의 일곱 공식 중에서 두 가지 요소, 즉 “복주시되”(28절)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31절)를 제외하고는 모두 두 번 이상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반복은 다른 날의 두 배 이상입니다. 창조공식 표에 의하면 이날의 반복되는 표현은 다음과 같습니다(6쪽 참조): (1) 선언(4회)-“하나님이 가라사대”(24, 26, 28, 29절); (2) 창조의 명령(2회)-“있으라(되어라)”(24, 26절); (3) 성취(2회)-“그대로 되니라”(24, 30절); (4) 창조 행위(2회)-“만드사”(25, 27절); (5) 승인(2회)-“보시기에 좋았더라”(25, 31절).
이와 같은 형식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안식일 전날 즉 6일째에 만나와 메추라기를 평일보다 두 배 이상 얻었던 사실을 연상시켜줍니다.
화자가 “생명의 호흡”을 분류하는 방식은 여전히 이전과 동일합니다. 즉 삼중적인 분류가 그것입니다: (1) 가축(hm;heB, 베헤마); (2) 땅에 기는 것들(cm,r, 레메스); (3) 땅의 짐승(yj $r,a, 에레츠 하이)-야생동물. 물론 이와 같은 화자의 분류법은 당연히 오늘날의 복잡한 동물계통도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처음 두 절은 일종의 유사반복으로 서로 교차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A가축과 땅에 기는 것들
B땅의 짐승들
B1땅의 짐승들
A1가축과 땅에 기는 것들
그런데 이들 창조와 관련해서 한 가지 빠진 것이 눈에 뜹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공식이 그것입니다. 공중의 새나 바다의 물고기와(22절) 인간에 대해서는(28절) 축복을 하셨고, 또 이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이 뒤따르고 있는 것에 반해 이들 짐승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치는 않습니다만, 두 가지 이유가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는 땅의 짐승들이 인간과 경쟁을 하거나 위험에 빠뜨릴까 봐 그 명령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가설과(참고, 출 23:29; 레 26:22), 또 하나는 인간이 땅의 모든 짐승들을 대표하고 있으므로 명령은 한 번으로 족하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두 번째 견해가 더 적절해 보입니다. 또 한 가지 짐승의 창조와 관련해서 주목할 만 한 점은, ‘바라’ 대신에 ‘아사’를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아사’(השׂא)는 우리말로 “만들다”(make)는 뜻으로 다른 ‘히브리’어 단어 ‘야짜르’(רצי)와 함께 인간이나 생명들의 창조를 위한 단어로 ‘바라’와 함께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창조 이야기는 인간의 창조로 그 절정에 도달하고 있습니다(26-31절). 인간의 창조는 창조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처음 6일 동안의 모든 창조가 인간의 필요 즉 그의 의식주와 생활 방식을 위한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연히 인간의 창조에 관한 여섯 절의 진술은 느리고, 상세할 뿐만 아니라, 독특합니다.
26절상하나님의 의도: 일인칭 대화
26절하인간의 창조의 목적: 땅을 다스림
27절인간의 창조
28절축복: 생육하고 번성하라
29절인간이 먹을 음식
30절짐승들이 먹을 음식
하나님의 의도. 일인칭으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26절상). 이 구절은 역사적으로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그 결과 방대한 양의 연구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구절의 해석과 관련된 논의의 핵심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왜 하나님은 “나”라는 단수형 주어가 아닌 “우리”를 사용하고 있는가?
(2) 두개의 전치사, “~따라”(ב, 베)와 “~대로”(כ, 케)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3) “형상”과 “모양”은 과연 서로 다른 것인가? 다르다면 얼마나 다른가?
(1) 왜 복수형 주어인가? “우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우선 ‘필로’(Philo)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유대’인 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궁전에서 천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예. 사 6:8). 서구 학자들 중에서도 이와 같은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 ‘스키너’(Skineer); ‘폰 라드’(von Rad); ‘클라인’(Kline); ‘기스펜’(Gispen); ‘데이’(Day).
물론 첫 번째 견해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창조가 하나님과 천사들의 공동 작업임을 인정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천사들은 하나님의 장엄한 “인간 창조”의 순간을 목격하고 있는 증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욥기>도 이에 동의하는 듯합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욥 38:4, 7).
두 번째 입장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바탕으로 삼고 있는데, 하나님의 대화 상대가 ‘그리스도’라는 입장입니다. <바나바 서신>이나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 등을 이러한 입장의 주창자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입장은 오늘날 기독교 진영 내에서조차도 더 이상 인정받고 있지는 못합니다. 세 번째 입장은, 저명한 신학자 ‘궁켈’(Gunkel)이 제안한 것으로서, “사제 기자”가 주변의 다신론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복수형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은 그 내용에 있어 오히려 고대 근동의 창조 신화를 배격하고 있기 때문에, 26절의 내용이 다신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현대 학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네 번째 견해는, 하나님과 같은 거대하고 장엄한 대상에 대해서 그 위엄과 권위를 더하기 위해서 복수형을 사용한다는 해석입니다. 영어에서 왕을 가리켜 “폐하”(Your Highness)라고 한다든지, 왕이 스스로를 “짐”(朕)으로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견해는,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재촉하시는 자신과의 대화에서 “우리”를 사용한다고 말합니다. 예컨대, <시편>의 화자들이 종종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내 영혼아”하며 부르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에 반해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설명은 하나님이 하늘의 왕궁에서 천사들과 대화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마치 만조백관(滿朝百官)들이 모인 앞에서 왕의 선언을 연상하면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 하였느니라”(욥 38:4, 7). 이 견해는 ‘유대’적 사고를 반영하고 있고, 특별히 신학적인 문제를 드러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2) 두 전치사, “(형상을)따라”(ב, 베)와 “(형상)대로”(כ, 케)에 대하여. 이 두 전치사는 그 의미에 있어 다소 중복되는 점이 없지는 않지만, 동의어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사실상 동의어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전치사 “~따라”에 대해서 극히 제한적인 의미, 즉 “~의 자격으로”(in the capacity of)의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다음 구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yD:v' laeB, 베 엘샤다이) 나타났으나”(출 6:3상). 이들의 주장인 즉은, 이 구절에서 “전능의 하나님으로”에서 사용하고 있는 전치사가 ‘베’(ב)이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모방한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화자는 이 두 전치사를 때로 구별하지 않고 혼용하고 있기도 합니다(창 5:1, 3). 특히 이 구절에서 “모양”과 “형상”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두 전치사 ‘베’(ב)가 의미하는 바도, “~처럼”(영어의 like에 해당함) 또는 “(을) 따라”(영어의 in the pattern of)가 무난한 해석이 될 것입니다. <출애굽>에서 이와 유사한 표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출 25:40). 따라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는 시적인 유사 반복으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3) “형상”(!l,x, 첼렘)과 “모양”(tWmD, 데무트)은 과연 서로 다른 것인가? <성경>에서 “형상”(!l,x, 첼렘)이 등장하는 예는 그렇게 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어원(語源)조차 분명치 않아 이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단어는 열일곱 번 등장하고 있는데, 이중 열 번이 주로 다양한 “외형”(外形)과 관련해서입니다: “종기의 형상”(삼상 6:5); “사람의 형상”(겔 16:17); “우상”(민 33:52); “이미지나 그림자”(시 39:7; 73:20). 그리고 나머지 다섯 번이 <창세기>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1:26, 27; 5:3; 9:6). 이 단어의 어원을 추적해서 유사한 발음의 의미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합니다. 이 단어가 어원 상 “자르다” 또는 “어두워지다” 등과 관련이 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만, 이 단어의 해석에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합니다.
한편 이와는 달리 “모양”(tWmD, 데무트)은 그 의미가 분명합니다. 이 단어는 “닮다” 또는 “비슷하다”는 동사와 분명하게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명사형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모형”(模型) 또는 “계획” 등을 의미합니다(왕상 16:10). <성경>에서 25회 등장하고 있는 이 단어는 대부분 선지자 ‘에스겔’의 환상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tWmD, 데무트)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tWmD, 데무트)이 있더라”(겔 1:5). 이 구절에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과 같은” 또는 “~을 닮은” 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이 두 단어는 서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상호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대략 다섯 가지 정도의 견해가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에서 소개하는 다섯 가지 견해는 Wenham의 저서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Wenham, pp 29-32.
(a) “형상”과 “모양”은 서로 다르다.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에 따르면 이 두 단어는 인간 본성에서 뚜렷하게 구분되는 두 속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형상”이 “이성” “인격” 등과 같은 자연적 속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모양”은 “윤리”나 “도덕” 등과 같은 “초자연적 은혜”를 반영하고 있다는 입장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해석학적인 측면에서 유용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런 해석은 이들 단어가 원래 내포하고 있는 의미들과는 거리가 멀다 하겠습니다. <창세기>에서 두 단어를 구별 없이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예: 5:3), 두 번째 단어 “모양”은 첫 번째 단어 “형상”의 정확한 의미를 보완해 주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두 단어를 서로 다른 것으로 구분하는 것은 <창세기>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b) “형상”은 인간이 그의 창조주와 공유하고 있는 속성, 예컨대 “정신적이고 영적”인 본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일견 그럴 듯 해 보입니다만, 과연 정확하게 어떤 본성을 의미하는 것인지 꼬집어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혹자는 인간의 지(知)∙정(情)∙의(意)가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합니다만, <성경>에서 이 단어를 그러한 용도로 사용한 예가 전무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상당히 자의적인 것으로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속성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자신의 가치관을 <성경> 속에 주입한 결과라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형상”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을 유보하거나 또는 더 정확한 의미를 찾고 있는 실정입니다.
(c) “형상”은 “외모”까지도 포함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근거로서, “외모”를 의미할 때 “형상”이라는 단어를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도 한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데무트) 곧 자기의 형상(첼렘)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5:3). 이 말은 ‘셋’이 그의 아버지 ‘아담’을 외형적으로 닮았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견해는 일부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구약>이 그리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 즉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과는 불가분 배치되는 견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참고. 신 4:15-16).
(d) “형상”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것이다. 인간이 지상에서 “신의 대리자”라는 사상은 고대 근동에서 왕을 지칭하며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나 ‘아시리아’ 문헌에서 왕을 신의 형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성경>에서도 인간의 소명이 피조세계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왕상 5:4). 그리고 <시편>은 인간의 각별한 지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시 8:5-6).
(e) “형상”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역량” 내지 “수용력”(受容力)을 말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대화하고, 언약을 맺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르트’(K. Barth)나 ‘베스터만’(Westermann) 등과 같은 석학들이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들은 26절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 실질적인 목적어는 “사람”이 아니고, “우리의 형상을”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인 즉은, 인간의 창조와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인간이 하나님과 독특한 관계 속에 있도록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하나님에게 대답하고 응답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창조의 과정에 대한 기술이 아니듯이, 인간의 한 구성 요소도 아닐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이들 각각의 견해는 나름대로 진리의 일단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어떠한 견해도 “하나님의 형상”을 만족스럽게 설명하고 있지는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람과 아담. 여섯째 날의 창조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주목할 만 한 점은 “사람”(!d;a, 아담)에 대한 표현입니다. 화자는 두 절(26-27절)에 걸쳐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26절에서는 아무런 관사(冠詞) 없이 사용하고 있고, 27절에서는 관사를 붙여 “그 사람”(!d;aה, 하아담)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특정 개인을 지칭하기보다는 인류 전체 즉 “남자와 여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자는 인간의 창조를 서술이 아닌 노래로 부르고 있음을 앞에서 지적한 바 있습니다. 노래의 세 절 중에서 처음 둘은 대략 교차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며)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가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27절)
처음 두 절이 인간의 독특한 지위와 특권을 노래하고 있다면, 세 번째 절은 “여자”에 대해서도 동등한 지위와 권리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대한 ‘미드라쉬’(Midrash) 주해서는 인간이 처음에 창조될 당시에는 양성(兩性)이었으나 나중에 각기 분리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으나,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른 해석입니다. 오히려 “남자와 여자”는 두 성(性)이 처음부터 구분되어있었으며, 곧 드러날 28절의 축복, “생육하고 번성하라”에 대해서 예고해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축복과 약속.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 즉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짐승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참고. 22절),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짐승들에 대해서는 단순한 명령으로 끝나고 있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라는 새로운 구절을 더하고 있습니다(참고. 28절). 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인격적 관계와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짐승들에게는 없는 새로운 소명을 더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8절하). 이로써 인간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참고. 26절). 하지만 <창세기>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축복이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 명령은 <성경>의 다른 명령들처럼, 하나님 스스로 이루시는 하나의 약속이며, 인간들로 하여금 그 약속을 이룰 수 있도록 하시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은 대홍수 이후 ‘노아’를 통해서(9:1), 그리고 족장들을 통해서 반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17:2, 20; 28:3; 35:11). <창세기>의 모든 족보(5, 9, 11, 25, 36, 46장)들 역시 하나님의 동일한 약속이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침묵의 증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야곱’ 또한 임종 시에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어떻게 이루셨는지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48:4; 47:27).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적극적인 관점에서 결혼은 자녀 출산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될 것이며, 소극적으로는 고대 근동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던 출산을 위한 신령제(神靈祭)를 배격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자녀를 출산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따라서 그분의 백성들이 자녀 출산을 위해서 이상한 수단에 의지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 뿐만 아니라, 불신의 소치이기도 할 것입니다(참고. 16; 30:14-15).
창조의 목적은 우리가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 외에 “다스리고 정복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명령은 보다 상세하게 그 의미를 반복해서 규정해 주고 있습니다: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8절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피조세계에서 왕과 같은 존재이며, 하나님을 대리해서 세상을 다스리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에 대한 무제한적이고 무자비한 착취나 훼손을 허락받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왕은 권리 못지 않게 책임 또한 막중했습니다. 즉 백성, 특히 가난하고 연약한 백성들의 안위를 돌볼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시 72:12-14). 법과 정의를 세우고 원칙을 세워서 나라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해야 할 책임도 맡고 있었습니다. 왕의 권리와 책임이 이와 같다면, 세상의 왕 사람의 역할 또한 그와 같다 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짐승들도 인간의 지배를 받도록 되어있지만, 동시에 인간의 동반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이어지는 <에덴 이야기>에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2:18-20). 예컨대,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의롭다고 인정받은 ‘노아’도 방주를 만들면서, 홍수로 생명체들이 전멸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배 안에 모든 종류의 짐승들을 들여보내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6:20; 7:3).
인간의 음식.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해준다는 사실은 근동의 창조 신화와는 완전히 대조를 이루는 모습입니다(29-30절). 근동 신화에서 인간의 역할은 신들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주는 노예에 불과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웨스터만’(Westermann)을 위시한 일부 신학자들은 29-30절에 기초하여 사람과 짐승은 원래 초식만을 먹도록 창조되었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일부 <선지서>에서도 언젠가는 “사자가 황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라”(사 11:7; 65:25; 호 2:18)는 구절들이 있어, 이들 주장을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새 시대는 낙원(樂園)의 회복이라는 사상을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29절은 사람이 식물과 과일을 먹는 것을 허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30절은 다소 제한적인 의미로서 짐승에게는 식물만 먹도록 제한하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육식을 허용하고 있는 장면은 “대홍수” 이후에 처음 등장하고 있어(9:3), 초식에 관한 이들 주장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은 인간으로 하여금 육식(肉食)을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육식이 타락 이후 비롯된 것으로 보는 입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은 모든 짐승들을 다스리도록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짐승의 가죽 옷을 해 입히셨고(3:21), ‘아벨’은 양을 제사에 바쳤으며(4:2-4), ‘노아’는 정결하고 부정한 짐승들을 따로 구분하였습니다(7:2). 따라서 육식이 대홍수 이후에 처음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홍수 이후에도 육식을 허용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선한 창조. 육일 동안의 창조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31절)는 언급으로 끝나고 있는데, 이는 그동안의 반복되는 표현 “보시기에 좋았더라”와는 분명히 구분되고 있습니다(참고. 4, 10, 12, 18, 21, 25절). 우선 화자는 다른 곳에서와는 달리, “하나님이 만드신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심히 좋았더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가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시면서 느끼는 만족감과 애착심 등을 느끼게 하는 대목입니다. 세 번째는, “심히(정말) 좋았더라”는 표현입니다. 완전하고 선한 창조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7) 일곱째 날(2:1-3)
일곱째 날의 핵심은 단연 “안식”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 앞선 육일 동안의 그것과는 판이합니다.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1-3절)
이처럼 그 내용과 형식이 판이하다는 판단에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중세의 장절(章節) 구분 방식은 이 단락을 새로운 장(章)으로 구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단락은 제 1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서막>의 결론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단락은 “천지와 만물”(1절)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신”(3절) 등의 표현으로 1장 1절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와 교차대구적 관계에 놓이게 함으로써, 제 1장의 창조 이야기를 회고하면서 동시에 적절한 균형을 이루도록 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제 칠일”과 “하나님의 안식”에 대해서 세 번이나 반복함으로써, 일곱째 날의 특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흔히 <구약>에서 “만물”(ab;x lK, 콜 차바)이라 함은 문자적으로 “많은 무리” 즉 “천체들”(신 4:19)이나 심지어 “천사들”(왕상 22:19)도 포함하지만, 이곳에서는 전자만을 의미한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야말로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셨다”는 표현은 해석상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표현에 따르면 마치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도 일을 계속하신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일부 <성경> 번역본이나 주석가들은 “일곱째 날”을 “여섯째 날”로 바꾸고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일곱째 날”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단순한 필경 상의 실수로 치부할 수만은 없어 보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날을 여섯째 날로 번역하게 되면 동사 “마치다”(hl;K, 칼라)의 정확한 의미를 간과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경> 내에서(예: 창 17:22; 49:33; 출 40:33)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그 시제가 항상 과거 완료형입니다. 따라서 ‘히브리’ 문장에서, 2절을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도 계속 일을 하시다가 그날이 되어서야 마치셨다”고 해석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이곳에서 “일”(hk;al;m, 멜라카)은 일상적인 인간의 일을 뜻하는 것입니다만(39:11; 출 20:9), 바로 그 점 때문에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묘사함에 있어 이 단어를 도입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뜻밖이라는 생각입니다. 혹시 화자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안식의 패턴을 인간의 일과 안식에 대한 규범으로 교훈하기 위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Westermann). 참고로, <출애굽기>에서는 성막 건설이 세상의 창조와 비유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출 40:33).
한편 “안식”(tb'v, 샤바트)은 그 어원이 다소 불분명하긴 하지만 세 가지 정도 상호 연관되는 의미가 있습니다: (1) 일을 쉬다; (2) 그치다; (3) 안식일을 지키다. 이곳에서는 첫 번째 의미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만, 나머지 두 의미도 전혀 배제하고 있지는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화자는 이날을 명시적으로 “안식일”로 부르고 있지는 않습니다. 혹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제 칠일”과 이날의 모든 배수가 되는 날(14, 21, 28일 등)들은 불길한 날로 인식하고 있어, 이를 교정하고 배격하기 위한 의도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단어의 기원이 무엇이든, 이날을 명시적으로 “안식일”로 부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든, 하나님은 이 날을 “축복”하셨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날과 관련해서 이러한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통상적으로 <성경>에서 축복의 대상은 살아있는 생명체로 국한하고 있는 것에 비추어볼 때, 도대체 “날”이 어떤 방식으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인지 분명치 않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는데(참고. 1:22, 28), 일체의 창조적 활동이나 사역이 없는 일곱째 날이 축복을 받았다고 하니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 또한 이례적인 일입니다. <성경>에서 장소나 사람이나 또는 제기(祭器) 등을 별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합니다만, 안식일 외에 성일(聖日)을 축제의 날로 부르고 있는 곳은 <느헤미야> 뿐입니다(느 8:9, 11).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구약>에서 거룩하다고 여기는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구별하셨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들은 그 목적대로 사용됨이 마땅할 것입니다. “일곱째 날”은 <성경>에서 가장 처음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대상이며,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 거룩한 속성을 부여받은 대사이기도 합니다. <창세기>은 바로 이런 논리로 안식일의 거룩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하나님의 거룩함의 반영이라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며, 따라서 거룩한 인간이 거룩한 안식일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 자명해 집니다.
교훈과 적용
1. 그 모든 것의 시작
첫날 이전. ‘헨리 모리스’(Henry Morris) 박사는 <창세기> 1:1절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성경>의 나머지를 믿는데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단순한 이 두 구절에 대한 해석을 놓고 복잡하고도 지루한 논쟁이 역사적으로 있어왔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1절과 2절 사이의 구문론적인 관계에 관한 것으로서, <창세기> 1장 1절이 과연 독립 절인가 아니면, 뒤에 나오는 2절이나 3절에 대한 종속절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2절이 묘사하고 있는 ‘태초의 혼돈과 공허’는 과연 언제, 그리고 어떤 상태인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논쟁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창조론이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론에서 <창세기>가 당시 근동 지방의 다양한 창조 신화에 그 문학적 배경을 두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올바르고도 전통적인 해석은 두 절을 각각 별도의 독립절로 보고, 1절을 태초의 하나님의 절대창조 행위로, 그리고 2절을 하나님의 창조 직후의(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구의 초기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두 절의 의미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우주만물)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지구는 아직 혼돈하고 공허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면 어떤 연유로 창세기의 첫 두 절에 대한 해석을 놓고 이처럼 다양한 견해들이 대두되게 되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잠시 뒤로 미루고, 본문의 의미를 먼저 파악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두 절에 포함되어 있는 단어 하나하나마다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태초의 사건. “태초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였다”고 선언함으로써, 우리를 곧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 즉 시간(time)과, 공간(space)과, 물질(matter)로 이루어진 3차원의 세계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즉 태초에 무엇인가 시작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 “태초”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Young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Young, 14-20쪽.
즉 시간의 시작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점이 <히브리 성경>에서 가장 처음으로 등장하는 단어, “태초에”(베레쉿트)가 드러내는 의미입니다. 시간이 시작됐다는 말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조잡하지만 쉬운 예를 한 가지 든다면, 태엽이 다 풀려 잠자고 있는 시계를 태엽을 감아주는 순간 시간의 작동이 시작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아무튼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개념이긴 하지만, 시간과 관련해서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밝혀 놓은 바에 의하면, 시간은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즉 시간이 불변의 절대적인 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간의 시작과 함께 시작된 것이 또 있습니다. 1절에서 이어서 등장하는 “천지”(즉 하늘과 땅)입니다. 천지는 다른 말로 공간과 물질입니다. 공간은 시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동양 사상에서도 이 둘을 “時空”이라는 한 단어로 부르고 있고, 서구의 물리학에서도 ‘time-space’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공 안에 모든 것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란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골 1:16.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긴 설명이 필요하지는 않겠습니다만, “보이지 않는 것들”이란 과연 무엇을 말할까요? “영적 존재”(천사 등)나 또는 대우주를 유지시켜주고 보존시켜주는 일련의 “힘” 이 우주를 질서 있게 유지시키고, 지탱시켜주는 세 가지 종류의 힘이 알려져 있습니다: (1) 强力-별들과 별들 사이의 힘(重力, 만유인력); (2) 中力-서로 다른 두 전하 사이에 작용하는 힘(전자기력); (3) 弱力-원자 핵 내의 여러 가지 입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
내지 “법칙” 우리는 이러한 법칙들이 하나님께서 천지창조 시 삼위 간에 맺은 “창조의 언약”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엇인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공간(가로x세로x높이)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존재는 항상 시간 속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즉 시간 속에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과 물질은 항상 서로를 필요로 하고 이 중 한 가지만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주를 “삼위의 우주”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모든 시작을 지니는 것들의 특징입니다. 즉 그들은 유한하고, 의존적이며, 제한적입니다. 항상 그보다 앞선 원인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태초 이전.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이 우주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입니다. 도대체 태초 이전에 무엇이 있었기에 <성경>에서 말하는 태초의 사건이 가능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쓸데없이 해보는 한가한 질문이 아닙니다. ‘쉐퍼’ 박사님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그의 사색을 반드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프란시스 쉐퍼’, 24-29쪽).
모든 시작이 있는 것들은 그보다 앞선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방금 말했습니다. 즉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부터 무엇인가 나타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거미줄이 허공에 매달려 있을 수 없듯이 <창세기>의 대 선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 역시 허공 속에 매달려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앞선 원인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질문과 관련해서 <요한복음>은 힌트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24). 즉 태초 이전에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계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은 마치 별거한 부부처럼 각기 다른 방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할 수 없는 친밀함으로 “교제”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영원한 “교제”를 누리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즉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요 1:1.
태초 이전에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교제 외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4). 그렇습니다. 두 분의 교제 위에 “약속”도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언약”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인데, 선택의 약속이 그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약속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예수님의 희생적인 죽음이 “창세전부터 미리 알려진바”라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 역시 “영생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딛 1:2).
이 말은 두 분의 약속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계획”에 따른 것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한 번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태초 이전에 무엇이 있었을까?
태초 이전에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 아니라, 삼위의 하나님 사이에 “교제”가 있었고, “계획”이 있었으며, 또한 “약속”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가까울 수 없는 친밀함으로, 모여서 사랑하고, 의논하고, 그리고 회의했습니다. 창조는 그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마치 물이 흘러내려 가듯 아주 자연스럽게, 아무 무리 없이 일어난 것입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함께 참여한 일입니다. 창조는 하나님이 우주에 혼자 계시기가 심심해서, 또는 자신의 영광을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어서 영광 받으려고 한 일만은 아닌 듯합니다. 삼위 하나님 사이의 “인격적 교제와 약속과 계획 가운데 이루어진 사랑의 열매”라고 ‘쉐퍼’ 박사님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창조론은 이처럼 일체의 다른 창조론을 배격하고 있습니다. ‘가이슬러’는 그의 책에서 창조에 관한 주도적인 세 견해로서 (1) 성경적 창조론: creation ex nihilo; (2) 범신론적 창조론(creation ex deo); (3) 무신론적(유물론적) 창조론(creation ex materia)을 설명과 함께 훌륭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참고도서 16).
예를 들어, 창조가 신들의 싸움의 결과 나타난 것도 아니고, 신들의 심판의 결과도 아닙니다(다신론). 또는 신들이 스스로 자신의 일부를 변형시켜 드러낸 것도 아니고(범신론), 이미 존재하고 있던 비인격적인 자연이나 물질로부터 나타난 것도 아닙니다(무신론). 소위 대폭발이론(the Big Bang Theory)도 무신론적 창조론의 한 아류(亞流)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세 가지 정도의 무신론적 창조론이 물리학계에서 제시되었습니다만, 둘은 이미 폐기 처분되고 오늘날 유일한 우주생성론으로 남아있는 이론으로 대폭발이론(The Big Bang Theory)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 이론을 하나님의 창조의 한 방법쯤으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만(사실 과학적으로 ‘빅뱅’을 대체할 수 있는 더 나은 이론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이론은 실은 무신론적 창조론에 불과합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태초에 대폭발이 있었고, 그 폭발의 여진으로 지금도 팽창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이론의 한 가지 칭찬할만한 점은 우주가 시작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태초에 있었다는 그 무엇은 현재의 우주 전체를 최고도로 압축해 놓은 우주의 한 점(point)으로서, 그 엄청난 질량과 밀도와 내부 에너지와 온도를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대폭발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빅뱅이론은 그 것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궁극적인 원인, 즉 제 1원인이 되시는 분으로서, 그 자신은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 다른 원인을 필요치 아니하시며, 또한 시간과 공간과 그리고 물질의 제한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 1장이 암시하는 바이고,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내려지는 당연한 결론입니다. 만일 우주가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 시간동안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현재의 시간까지 도달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한 전부터 지금까지 오는데도 무한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상은 우리의 정서적인 안정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도대체 원인의 원인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고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단순히 수학적으로는 두 숫자 사이에 무한한 수를 집어넣는 것이 가능하지만, 실제 우리의 경험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책꽂이의 두 끝 사이에 무한대의 책을 진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지고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가 창조하였을까?” “하나님의 몸무게는 얼마나 될까?” 나는 이런 질문을 해 본 적이 없습니까? 나는 우주에 시작이 있어야 한다는 (1) 성경적 근거, (2) 과학적 근거, (3) 논리적(철학적) 근거를 체계적으로 제시할 수 있습니까? 명쾌한 답변을 위하여 ‘모리스’(참고도서 14, 제 1장)와 ‘가이슬러’(참고도서 16, 제 1장)를 읽어봅시다.
2. 하나님.
태초 이전에 태초의 사건을 가능하게 한 원인이 있었다면, 그 원인은 모든 원인의 궁극적인 제 일 원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 일 원인에 앞선 또 다른 원인은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달리기 경기에서 일등보다 앞선 선수는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원인의 무한(無限) 고리는 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 일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태초에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창조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 창조주이십니까?
창조의 하나님. ‘엘로힘’입니다: “하나님(엘로힘)이 창조하시니라”(1절). ‘엘로힘’(하나님)은 <성경>의 첫 주어이며, <구약> 전체적으로 ‘야훼’ 다음으로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엘로힘’은 ‘야훼’나 또는 ‘엘 샤다이’와 달리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는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일 뿐입니다. 즉 영어로는 God, 우리말로는 그냥 신(神)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화자는 왜 이스라엘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인 ‘야훼’나 ‘엘 샤다이’ 대신에 ‘엘로힘’을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앞에서 이미 밝힌 바 있듯이, 화자는 지금 천지창조에 관한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에 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에서의 순서는 <창세기> 다음에 <출애굽기>이지만, 아마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이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듣게 된 것은 “출애굽” 사건 이후였을 것입니다. 지금 ‘모세’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전체 백성 앞에서 창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고 가정해 본다면, 그는 지금 “출애굽”의 구원을 이루신 족장의 하나님 ‘야훼’가 천지창조의 주인이기도 하다는 신앙고백을 토해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언은 마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해서, “당신은 나의 주시요, 나의 하나님 이십니다”(요 20:28)하고 외치던 모습과 중첩되어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족장의 하나님 ‘야훼’가 창조의 하나님 ‘엘로힘’과 연결되는 방식은 ‘야훼’의 이름에 있다 하겠습니다. 영원 전부터 존재하시면서, 교제와 계획과 약속에 따라 태초의 사건을 가능하게 하신 창조주의 이름 ‘엘로힘’은 결국 ‘야훼’의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훼’의 어원(語源)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지만, 많은 번역본에서 ‘야훼’를 “스스로 존재하는 자”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번역은 우선 논리적으로도 적절한 것이 못됩니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말은 자신이 자신의 원인이기도 하고 동시에 결과도 된다는 모순 된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논리학에서 원인과 결과는 결코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존재의 원인과 관련해서 다음 세 가지 유형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1) 스스로 존재하는 방식(self-caused)
(2) 그보다 앞선 원인(타자)에 의해서 존재하는 방식(caused by other)
(3) 원인이 없는 제 1원인(uncaused)
이중 ‘야훼’의 의미로 가장 가까운 것은 세 번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그는 모든 원인의 제 일 원인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화자는 ‘엘로힘’을 ‘야훼’와 동일 선상에 놓음으로써,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의 하나님을 이해하고 기억하는 방식을 다원화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예컨대, 이스라엘이 ‘야훼’를 기억하는 방식이 “구속과 언약”이라고 한다면, ‘엘로힘’을 기억하는 방식은 “창조”에 있다 하겠습니다.
이제 “창조”(ארב: 바라)라는 단어를 통해서 ‘엘로힘’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성경>은 창조에서 시작하여(창 1:1) 창조로 끝납니다(계 4:11; 10:6; 21:5; 22:13). 그리고 그 사이에 또한 하나님의 중단 없는 창조행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시 104:30; 암 4:13). 우리가 이들 각각을 구별하여 부른다면 (1) 원 창조(orginal creation), (2) 재창조(re-creation), 그리고 (3) 새 창조(new creation)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와 관련해서 가장 흥미롭고도 중요한 사실은, 이 동사가 문장에서 쓰일 때 동사의 주어는 항상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무나 이 동사의 주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인간이나 다른 신들이 이 동사와 함께 사용된 적이 없습니다. 창조는 오직 <성경>의 하나님,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에게만 속한 고유한 행위라는 중대한 선언입니다. ‘엘로힘’이 ‘야훼’가 되어야 할 근거가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이 동사는 간접목적어를 갖지 않습니다. 즉 그 재료를 의미하는 “~로부터의 창조”가 없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로, 이 동사의 직접목적어는 주로 “물질”이거나(창 1:6-10), “생명체”이거나(창 1:11, 12, 20-25), 또는 “인간”으로서(창 1:26-30), 이들 모두는 어떤 원재료를 통해서가 아닌 “무로부터의” 창조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직 말씀으로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을 무로부터 창조하였다는 선언은 그분이 무소불위(無所不爲)와 전지전능(全知全能)의 인격체가 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단어가 반드시 “무로부터의” 창조를 명시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히브리’ 동사 ‘바라’는 “재창조” 즉 “새롭게 하고 회복시키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 하면(시 104:30; 암 4:13), 또 한 편으로는 “만들다”(השׂע: 아사; make)와 “짓다”(רצי: 야짜르; form) 등과 함께 별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창 1:26, 27; 2:18, 19; 사 43:15 등을 읽고 이 세 동사들이 어떻게 상호 구분 없이 쓰이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이곳에서 강조하려는 바는 하나님의 절대 창조행위, 즉 어느 누구의 간섭도, 의논도, 도움도 받음이 없는 완전한 자유의지에 의한 창조입니다.
창조와 관련한 네 번째 사실은 이 동사의 시제(時制)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처음 6일 동안의 창조를 진술하면서 화자는 이 동사를 항상 과거 완료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첫 창조는 6일 동안 완성된 것으로서 더 이상의 창조는 없다는 암시입니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그 유명한 과학법칙, “열역학 제 1법칙”과 연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섭리의 하나님. 더 이상의 새로운 창조는 없지만 지속적인 유지와 보존, 그리고 때로는 회복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회복이 필요하게 된 것은 “타락” 이후의 일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행위를 “재창조” 즉 “구속”이라 부르는데, <성경>은 이에 대해서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참고. 히 1:3; 골 1:17; 계 4:11; 고후 5:17). 특히 <구약>에서 “재창조”를 의미하는 단어로, “창조”를 뜻하는 동일한 단어 ‘바라’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동사의 시제는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입니다(예. 시 104:30; 암 4:13; 사 43:15).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능력의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말씀으로 그 우주를 붙들고 계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하나님의 이와 같은 재창조의 사역을 다른 말로 “섭리”(攝理)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이신론(理神論)의 주장처럼, 피조세계가 마치 시계태엽처럼 스스로 알아서 작동하도록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개입하고 계십니다. 창조 직후의 모습입니다(참고. 2절):
(1)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2)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3)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의 개입과 활동에 대해서 다루기 전에, 잠시 일탈하여 태초의 지구의 모습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1절이 우리로 하여금 광대한 삼차원의 우주를 바라보게 했다면, 2절은 “땅”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바라보게 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철저하게 땅 중심적입니다. <구약> 전체를 통해서 “그 땅”을 떠난 하나님의 백성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땅”과 “하나님”과 “백성”은 <구약>의 중요한 세 가지 신학적 주제이자 구약 윤리의 시 기둥을 이루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이 땅은 영적인 차원까지 포함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는지 단언할 수는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관심의 초점이 지구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성경>은 이런 점에서 철저하게 실용적입니다. 즉 <성경>은 우리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우주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으며, 우리가 죄를 짓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태어나시고 죽으신 이 지구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히브리 성경>은 <창세기>의 첫 두 절에서 “땅”을 뜻하는 동일한 ‘히브리’어 명사 ‘에레츠’를 사용하고 있지만, 각 절에서 의미하는 바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즉 2절 등장하는 “땅”(에레츠)은 지구를 의미합니다.
화자가 그려내고 있는 태초의 지구의 모습은 두 개의 병행구절을 통해서 느낄 수 있듯이 어딘지 으스스하고 음산하기만 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이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서 동원하고 세 단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주는 이미지는 매우 부정적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이 있었습니다. 혹자는 <창세기>를 ‘히브리’인들의 창조신화라고 말합니다. 고대 근동지방의 창조신화에 의하면 세계는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에서, 또는 원래는 바다였던 곳에서, 또는 어두움에서부터, 또는 계란에서 발생했다고 합니다. ‘바벨론’의 창조신화 <에뉴마 엘리쉬>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이 신화에 의하면, 신성한 물의 신 ‘압수’(Apsu)와 짠물의 신 ‘티아맛’(Tiamat)이 결합하여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아들 및 딸 신들이 탄생하였고, 이들이 서로 싸우며 소란스럽게 하자 두 신이 이들 모두를 죽이려고 하자, 이를 안 자녀 신들이 그들의 대표로 ‘마르둑’(Marduk)을 뽑아 두 신을 죽이도록 청탁하게 됩니다. ‘마르둑’은 ‘티아맛’을 죽이고 그 시체를 둘로 쪼개어 반으로는 하늘을 삼고, 나머지 반으로는 땅을 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6-28쪽 참고).
사실 본문 중에 흑암을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 ‘테홈’(תהומ)이 짠 물의 신 ‘티아맛’과 동일한 어원에서 출발한 것은 사실입니다.
또 다른 일단의 학자들은 이 상태를 타락과 심판 이후의 지구의 모습으로 간주합니다. 이와 같은 견해를 “아담이전 간격이론”(the Pre-Adamic Gap Theory)으로 부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아담’ 이전에 이미 인류가 존재하였으며, 이들이 하나님께 대항하자 하나님이 이들을 멸하고 전 우주적인 심판을 내렸으며, 그 결과가 이곳에서 묘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창조의 시기와 관련한 다양한 견해에 대해서는 ‘모리스’ 박사님이 잘 요약해 놓고 있습니다(참고도서 14). 뒤에 다시 다루도록 합시다.
간격이론의 동기는 현대과학과의 조화를 이루자는 것입니다. 즉 현대 지질학에 의하면 지구는 약 46억 년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창세기>의 첫 두절에서 그리고 있는 기간이 바로 이 시기에 속하며, 오늘날 발견되는 화석도 이 기간 중에 형성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구약 신학자 ‘폰 라드’(von Rad)에 따르면, 제 2절은 태초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던 상황일 뿐만 아니라 언제나 되풀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물의 창조의 배경에는 흑암의 깊음이 있고, 창조된 만물이 다시 그곳으로 빠져 들어가려는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마치 우주에 ‘블랙홀’(black hole)이 있어 모든 것을 그 안으로 빨아들이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과 유사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 흑암 위에 인간이 다시 빠져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 창조 교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라고 그는 강조합니다. 상당히 우화적(allegorical) 해석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통찰력이 넘치는 사색임에 틀림없습니다. E. Young, 제 2장.
‘칼 바르트’(K. Barth)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즉 그는 2절이 가공하지 않은 원래의 지구의 상태에 대한 묘사가 아니고, 악과 죄, 배교(背敎)와 그 결과 등과 같은 죄인의 원래의 상태에 대한 묘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이 세계는 존재나 본질이 있을 수 없으며 피조물들의 선함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제 2절에서 우리에게 남겨 둔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서 부정되고 거부되며, 스쳐지나간 뒤에 남겨 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 상태로서는 세계는 하나님이 계획하고 창조했던 세계와는 완전히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창조한 실질적인 우주의 과거로서 아주 낡아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어두움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실제적인 사역, 그리고 우주 자체의 실체를 망각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은 하나님이 증오하는 것을 사랑함으로써 바로 이러한 어두움의 상태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즉 “반 창조”(uncreation)의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인간은 과거를 돌아보고, 그 과거를 오늘에 불러들이고, 그리고 그 과거가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Young, 제 2장.
이 두 사람의 견해는 제 2절에 대한 해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교훈적 설교라고 보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어쨌든 이처럼 다양한 견해들의 배경에는 멀리는 고대 근동지방의 창조신화에서부터 가까이는 현대과학정신이 녹아있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신화와 과학주의는 상호 적대적인 것 같지만,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실은 그 이름만 바꾸어 가면서 시대를 두고두고 하나님의 계시를 흐리게 함에 있어서 친근한 동역자의 역할을 해 왔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태초의 지구의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인간이 살 수 없는 상태가 있었던 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단 한 순간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습니다. 지극히 부정적인 태초의 지구의 모습,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곧 전개될 상황에 의해서 오히려 매우 밝은 빛을 던져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다시 말하자면, 태초의 그 모든 혼돈과 정적과 무질서마저도 처음부터 철저하게 하나님의 통제와, 지배와 그리고 계획 하에 있었던 것입니다. 태초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이 지구를 창조 이후 내버려 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질서와 빛과 거주를 위해서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교훈이 있다면, 하나님의 이어지는 창조적 손길이 없었다면 여전히 이 지구는 태초 때처럼 혼돈과 어두움 가운데서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motionless), 형체(특징적인 구분)도 없이(formless) 남아있게 될 운명이었다는 것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것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참고. 사 34:11; 렘 4:23.
그리고 이어지는 표현,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역시 비슷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원시 대양 위로 어둠이 짙게 깔려있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대한 묘사는 그 자체로서 아무런 영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분명 하나님의 속성에 반하는 강력한 상징적인 의미가 연상됩니다. <성경>에서 어두움은 분명 빛이신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모르는 사악한 세력으로(잠 2:13), 또는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출 10:21), 또는 죽음(시 88:13)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표현은 <에뉴마 엘리쉬>와는 문학적 유사성이 있기는 합니다. 그리고 태초의 지구의 상황이 얼마나 오래 동안 그러한 상태로 지속되었는지 과학적으로 증명할 길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문학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그리고 있는 상황은 하나님의 통제와 지배 아래 놓여있는, 하나님의 창조적 손길을 잠잠히, 유순하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으로서, 근동신화의 오류를 지적하고 교정하려는 신학적 의도를 느끼게 합니다.
따라서 “수면 위를 운행하는 하나님의 신”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본격적인 창조활동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하나님 자신, 또는 그의 지혜나 능력에 대한 신비로운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참고. 잠 8; 겔 1:4, 12, 20).
3. 하나님의 창조(1)-창조의 공식
서막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설명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은 단 6일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이 단락을 연구할 때 특별히 기억해야 할 사실은 관심의 초점을 창조의 과학과 역사에 둘 것이 아니라, 창조의 신학과 신앙에 두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본질과 비 본질을 구별하자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창조와 관련해서 제기되는 과학적 질문들을 일부러 회피하지는 않고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이지만, 우리가 과학적 질문들에 답하기 전에 먼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창조의 6일은 전체 우주의 역사에서 아주 특별했던 한 기간으로서, 이 기간 동안 일어났던 사건은 다시는 반복하거나 재현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관찰이나 실험 등과 같은 방법으로 증명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기간 중에 일어나는 창조의 사건을 오늘날 실험과학(operation science)의 도구나 방법론으로 해석하려 할 때, 필경 난감한 지경에 빠지게 됩니다. 특히 창조의 방법이나 시기(기간)에 대해서 알고자 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6일 동안의 창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할 때, 오늘날 우주물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지구로부터 수억 광년이나 떨어진 별들의 존재가 바로 그 점을 말해 줍니다. 이러한 사실은 마치 우주의 나이가 최소한 그 정도는 되어야 함을 증거 하기 때문입니다. 창조과학에 대한 부분은 후에 별도로 집중적으로 공부할 기회를 가지겠습니다만, 특별히 창조의 시간에 대해서는 ‘윗트콤’(참고도서 11, 제 1장)이나 ‘모리스’(참고도서 14, 제 4장)의 논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창조 이야기의 본질은 아무래도 그 예술적 아름다움, 즉 양식과 구조에 있다고 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감상을 통해서 창조의 신학과 신앙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쉐퍼’가 잘 지적하였듯이, 하나님의 창조는 두 단계에 걸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1) 무로부터의 창조
(2) 분리와 나눔
이와 같은 구조는 창조의 첫 날부터 아주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마치 표준 공식과도 같은 일곱 개의 진술이 첫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를 얼마나 잘 기억하고 있습니까?
첫 번째 명령은 “빛이 있어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빛을 어두움으로부터 “분리”하셨습니다. 이처럼 창조의 명령에 이은 창조의 행위는 육일 동안 일곱 번에 걸쳐 반복 등장하고 있습니다:
(1) 빛과 어두움(4절)
(2)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7절)
(3) 바다와 육지(9절) 및 풀과 채소와 과일(12절)
(4) 낮과 밤(15-16절)
(5) 조류와 어류(21절)
(6) 땅의 짐승과 짐승, 짐승과 인간, 남자와 여자(25, 27절)
(7) 여섯 날과 일곱째 날
화자가 이와 같은 반복을 통해서 강조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특히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이나, 그분의 피조 세계에 대해서 강조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법과 질서”의 하나님을 드러내려 함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피조 세계도 이를 증거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 아주 질서정연하고, 안정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고, 연구가 가능하고, 또한 예측이 가능합니다. 즉 우리는 안심하고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연구 활동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태양은 항상 동쪽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지고, 봄이 오면 다음에는 반드시 여름이 옵니다. 이러한 사상은 당시 근동지방의 창조 신화와는 완전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들 신화에 의하면, 자연과 신들은 너무나 변덕스러워서 도무지 우리 인간이 접근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친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을 위협하고, 착취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는 신실하신 삼위의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 아주 질서정연하고 친근합니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이 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불렀습니다(요 15:15).
그러나 이러한 규칙과 질서는 마치 기계나 죽은 시체처럼 고정되어 있거나 딱딱하고 차가운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움직임이 있고, “활력과 에너지”가 있으며, 생명의 재창조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질서와 규칙입니다. <창세기>를 읽는 독자라면 창조의 첫 3일을 통해서 고정된 구조와 질서를, 그리고 나머지 3일을 통해서 역동성과 에너지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역동성을 지닌 질서와 규칙입니다. 다른 표현을 빌자면, “정중동”(停中動)이라고나 할까요.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은 하나님의 또 다른 행위, 즉 “축복과 작명”으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즉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고, 구별하시며, 이들 각각에게 이름을 주시고 축복을 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숫자 “7”의 수사가 돋보이고 있습니다(5, 8, 10, 22, 28절). 이름을 주셔서 이름 없는 것들로부터 분리하셨고, 그들에게 축복을 주셔서 그렇지 못한 것들로부터 분리하셨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그의 소유와 통치를 드러내는 말입니다. 즉 아무 의미 없이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분리”라는 단어는 “거룩함” 곧 하나님의 “선택”을 의미합니다. 레 20:24; 민 8:14; 신 4:41; 10:8; 왕상 8:53.
이스라엘 역시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이스라엘 역시 거룩해야 합니다. <레위기>는 이에 대한 교훈입니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좋았더라”입니다. 이 말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그분의 승인 내지는 인정을 담은 것입니다. 이 표현 역시 일곱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4, 10, 12, 18, 21, 25, 31절). 특히 3일째와 6일째에 는 두 번씩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이들 두 날이 모두 인간의 거주와 그의 탄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좋았다는 말입니까? 모든 피조물들과 그리고 그것들이 질서정연하게 그리고 아주 다양하게 존재하는 방식이 선하고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선하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을 통해서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은 “악”(惡)의 문제로 나아갑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가져보았을 의문, 즉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그것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그것도 하나님이 창조하셨단 말인가?”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창세기>의 이 표현을 묵상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에 따르면, “악이란 존재하지 않는 그 자체”입니다. 악의 문제에 대한 논의는 대부분의 조직신학 서적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Geisler’(참고도서 14, 제 4장)나 ‘Lewis’의 일련의 저서들, 「Mere Christianity」, 「The Great Divorce」, 「The Problem of Pain」, 및 J. Stott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등에서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아담’만 있고 ‘하와’가 없을 때 “좋지 못하다”고 하셨습니다(창 2:18). 사악한 인간은 어떤 인간입니까?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일련의 덕목(德目)을 결핍하고 있는 인간을 말합니다: 친절; 도덕성; 용기; 절제; 등. ‘어거스틴’의 정의에 따르면 악이란 하나의 실재(實在)로서 존재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보고 만질 수 있는 어떤 실체(實體)는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와 같은 정의가 완벽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본문에 따르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좋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고, 그 어떠한 언어로도 규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인가 비교할 때 이미 존재하는 두 가지를 놓고 서로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존재와 비존재를 구별하는 것은 마치 오렌지와 사과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맛이 있는지를 비교하는 것과 같고, 남자와 여자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지를 비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요?
적어도 존재의 문제에 있어서는 그러하다고 화자는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레미야’처럼 한탄해서는 안 됩니다: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렘 20:14, 18).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한탄과 후회로 세월을 보내서도 안되겠습니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차라리 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내가 차라리 하나님을 몰랐더라면”; “무자식이 상팔자지.”
그렇다면 화자가 “보시기에 좋았다”는 표현을 반복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시 현재 보이는 사물이나 이들이 존재하는 방식이 선하지 못하다는 것은 아닐까요?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탄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어.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을거야.” 사도 ‘바울’도 같은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탄식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범죄 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19-20). ‘바울’이나 화자나 모두 회복, 즉 재창조가 필요하다는 선언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까? 화자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또 다른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곱 번의 창조명령에 뒤이어 등장하고 있는 또 다른 일곱 번의 선언이 그것입니다: “그대로 되니라”(3, 7, 9, 11, 15, 24, 30절). 하나님의 말씀(명령)은 그냥 무의미하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성취가 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축복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권위(또는 힘)에 순응하지 않으면 괴롭고 외롭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순종을 구속 즉 구원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자유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요 8:31-32.
우주에 나가 우주복을 벗어버리면 우주복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그 순간 죽음이 따릅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는 순간 수압(水壓)이 주는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는 있지만, 역시 죽기는 매 일반입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지 않으면 오히려 화를 자초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롬 13:1-4.
그 모든 것들의 시작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을까? 창조의 첫 날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나는 어떻게 매일 매일의 삶에서 거듭남을 체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을 체험하며 살 수 있을까? 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의 창조(II)-첫째 날
창조 이야기에는 반복과 순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첫날에서 시작하여 육일동안 앞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날에 대한 묵상과 깨달음은 나머지 날들을 이해함에 있어 빛을 비춰줄 것입니다.
관성의 법칙에 의하면, 정지해 있는 물체는 외부에서 특별히 힘을 받지 않으면 정지한 상태 그대로 있으려 합니다. 반대로 운동하고 있는 물체도 다른 외부의 힘이 없다면 그 운동을 계속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몸도 이 법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얼마 전 아내가 사고로 손가락뼈가 부러져 손에 기브스를 하다가 한 달여 만에 풀었는데, 손가락을 다시 움직이는데 엄청난 고통이 따랐습니다. 한 달여 동안 꼼짝도 못하게 묶어 둔 결과였습니다. 관성의 법칙은 비단 물질세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세계나 영혼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작동합니다. 버릇이나 습관은 좋든 나쁘든 관성 즉 타성을 나타내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중독이라 부르는 좋지 못한 타성이 있는데, 노름이나 음주, 게임 중독, 늦잠 등을 말합니다. 이런 중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과 고통이 따릅니다. 때로는 불가능하기 까지 합니다. 얼만 전 컴퓨터 게임 중독에 빠진 한 부부가 어린 아이를 집에 버려두어 굶어 죽게 한 사례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 그 중독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움을 주려하면 오히려 화를 내며 거부합니다. 한동안 나도 두 아들을 아침마다 깨우느라 정말 힘든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게으름이나 무질서도 이와 같습니다. 한 번 이에 빠져든 사람은 그 상태로 그냥 남아있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의 “나자로 이야기”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요 11). 예수님께서 ‘나자로’의 시체가 놓인 동굴 무덤가에서 큰 소리로 “나자로야, 나오너라!”하고 외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주님의 생명의 빛이 한 줄기 섬광이 되어 동굴의 어둠과 정적을 가르면서, 이미 썩어서 아무런 형체도 모양도 없이 혼돈과 무질서 속에 놓여있던 ‘나자로’의 시체를 파고들었으며, 그 순간 그의 시체는 죽음과 와해(瓦解)와 분열의 관성을 이기고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나서, 어둠에서 분리되어 빛으로 걸어 나오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창조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축복입니다. 인격체와 비 인격체 사이에서도 이와 같은 완벽한 의사소통(communication)이 가능함을 <요한복음>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창조 명령, “빛이 있어라”(3절)는 바로 이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얼마동안 인지 알 수는 없으나 태초의 원시대양, 즉 어둠과 혼돈과 무질서 가운데서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그냥 그런 상태로 있었을 그 원시 대양은 이제 힘든 관성을 깨고 하나님의 힘찬 명령에 힘입어 그대로 순종하여 나아옵니다. 이 역시 인격체와 비 인격체 간의 완벽한 의사소통의 결과입니다.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이 명령의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요? ‘나자로’에게 일어났던 바로 그 일입니다. 크게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1) 모양 갖추기; (2) 움직임. 다음과 같은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둡고 조용하기만 하던 공장, 조립라인 입구에 그냥 수북이 쌓여만 있던 제품 원료들... 전기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갑자기 공장 여기저기서 빛이 들어오고, 기계는 엄청난 굉음을 울리면서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하고, 그리고 잠시 후부터 제품들이 생산라인을 거쳐서 조립되어 나오기 시작하는 장면을 연상해 볼 수 있습니까?
바로 이것이 천지창조의 첫 날 천사들이 목격했을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전율을 상상해 봅시다. 이처럼 엄청난 일이 일어날 줄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목도하고서도 타락하는 천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천사들 역시 지식이나 능력에 있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그들의 마음 속에 “나도 한 번 하나님처럼 해볼까?”라는 은근한 교만이 자리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쯤 해서 과학적 질문을 하나 던져 봅시다. 첫날의 빛은 과연 무엇일까요? 태양과 달과 별들은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던 때입니다. 화자도 이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고 상당히 의도적이라는 것이죠. 흥미롭게도 ‘바벨론’ 신화 ‘에뉴마엘리쉬’에도 역시 동일한 순서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태양보다 빛이 먼저 창조됩니다.
즉 그는 빛을 태양(또는 달과 별)과 분리하여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발광체들이 없어도 빛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손에 빛을 쥐고 있으며, 태양이나 달이 없어도 빛을 비출 수 있음을 강조하려는 듯 보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J. Calvin이 그의 <창세기> 주석에서 이미 피력한 바 있습니다.
화자의 의도가 진정 이러하다면, 첫날의 “빛”의 성격에 관하여 현대과학과 조화를 이루어보려는 일련의 시도는 무의미할 뿐입니다. 첫 삼일은 나머지 삼일과는 그 길이가 달랐을 것이라는 해석이 이러한 시도 중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창조와 창조론”에서 상세하게 다룰 생각입니다.
아무튼 빛의 정체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알게 된 것은 지극히 최근의 일로서, 20세기 초 ‘아인스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통해서입니다. 빛에 관한 그의 유명한 방정식(E=mc2)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식에 의하면, 빛과 에너지와 물질은 상호 가변적입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방정식 역시 삼위의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빛, 즉 태양을 비롯한 발광체들이 발하는 모든 빛은 실은 에너지의 한 형태입니다. 이 방정식을 빌어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셨다는 구절을 이해하자면,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순전히 질량으로만 이루어진 우주를 “충전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빛 즉 에너지는 뒤이어 등장하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빛의 창조에 이어 빛을 어둠으로부터 분리하고, 저녁과 아침이 교대로 나타나게 하였다는 것도 이 방정식과 결부시켜 이해하면 전혀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즉 이때부터 지구의 자전과 공전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소 억지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구의 회전은 태양과 상관없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두 번째 질문, “과연 이 첫째 날이 오늘의 24시간일까?”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나 설교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 창조의 첫 삼일 동안은 나머지 3일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첫 3일은 오늘날의 하루-24시간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태양은 4일째에 가서야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날들에 대한 논쟁은 별도 연구하는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즉 하루의 길이는 태양이 있기 전에도(또는 태양과는 상관없이) 자전 속도를 하루 24시간으로 고정해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의 기준이나 관찰을 위해서 태양에게 그 기능만 별도 부여하면 될 것입니다.
이처럼 구차한 과학적 설명이 아니더라도, <창세기> 1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날”에 대해서 본문의 양식이나 구조가 문자적으로 해석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실제 그러한 해석이 과학적으로 합당한가에 관한 문제는 화자의 관심사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즉 창조 이야기가 과학적으로 증명되든 안 되든 그의 관심사는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창세기>의 “날”이 오늘날의 24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은 다음 몇 가지 사실을 통해서도 거듭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시간구분 즉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가 6일 동안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루를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 “욤”(מי)은 정상적인 24시간을 의미할 수 도 있고, 낮 12 시간을 의미할 수 도 있으며, 또는 불특정 기간(예: 주의 날; 사사의 시대) 예를 들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그 날의 날, 그 벌 받는 때가 이르렀음이로다”(렘 50:17;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창 2:4);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창 5:1); ”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로 쉬게 하사 품군같이 그 날을 마치게 하옵소서“(욥 14:6) 등의 구절이 그 예가 될 것입니다.
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에서(1:4-5), 단어의 정의(定義)를 아주 조심스럽게 내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같은 단어를 한 번은 그냥 낮으로, 또 한 번은 24시간의 하루로 정의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빛을 낮(מי)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이는 첫째 날(מי)이니라”(1:5).
둘째, 6일 동안의 창조와 7일째의 안식일이 갖는 연결성 때문입니다. 즉 창조의 6일이 문자적인 날들이 아니라면, 제 7일의 의미가 애매모호해 지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제 4계명은 6일 동안 일하고 하루를 쉴 것을 명령하고 있는데, 그 이유와 근거로써 <창세기>의 “일곱째 날”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엿새 동안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1).
만일 창조의 날이 긴 시간을 의미해야 한다면 이상의 구절도 “너는 불특정한 여섯 시대동안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일곱 번째의 불특정한 시대동안은 쉴 것이라”라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해석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의 6일간의 노동과 하루의 안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모델로 주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화자는 하나님의 전체 창조 사건을 7일(6일 + 하루)이라는 틀 속에서 이해하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 하나님의 창조(III)- 둘째 날
첫째 날의 사역의 핵심은 빛입니다. 둘째 날의 관심은 땅에 있습니다. 이 날의 사역은 땅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의 이러한 순서, 즉 빛이 창조된 후에 궁창이 창조되는 순서는 역시 ‘에뉴마엘리쉬’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티아맛’이 살해되었을 때 ‘마르둑’은 그녀를 짤라 절반은 하늘을 만드는데, 나머지 절반은 땅을 만드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한 가지 표현, “보시기에 좋았더라”만 빼고 나머지 여섯 가지의 표현이 다 등장하고 있습니다. 왜 이 표현이 빠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혹시 물과 물을 분리하는 작업이 다음 날 까지 계속될 것이었기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둘을 분리하는 기능을 가진 것이 “궁창”(ציקר: 라키아)이고, 이 궁창을 “하늘”(םישׁמ: 솨마임)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궁창의 의미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단어의 어원을 통해서 볼 때, “얇게 펼쳐놓은 장막” 내지는 “지구를 덮고 있는 유리 돔(dome)”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이 단어는 원래 “눌러 찍어서 펴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것으로서(사 42:5; 시 136:6), 금을 망치로 두드려 편다는 의미로 쓰이는가 하면(출 39:3), 주물-부은 거울-을 펼쳐놓는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고(욥 37:18), 그 밝기가 수정이나 유리와 같다고 묘사하기도 합니다(겔 1:22; 단 12:3).
그래서 학자들은 이러한 표현이 고대 ‘히브리’인들의 원시 우주관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구형(半球形)의 차양막이 편편한 지구를 덮고 있는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덮개 위에 많은 양이 물이 있고, 비가 내릴 때 이 덮개의 구멍이 뚫린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리스’(H. Morris)는 이와 같은 주장에 반대하면서 궁창을 오늘날의 대기권에 해당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궁창을 하늘(또는 천상: heaven)과 같은 의미로 보고, <성경>도 여러 종류의 하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대기권(렘 4:25), 성층권(사 13:10), “참 하늘”(히 9:24), “하늘들의 하늘”(대하 2:6)들이 그것입니다(참고도서 10, 58-61쪽; 참고도서 11, 제 10장). 그러나 현대 지구과학에서 공간을 지표면으로부터 대기권, 화학권, 대류권, 이온권, 성층권 등의 여러 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 중 일부라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지는 지극히 의심스럽습니다.
이 단어가 현대과학에 비추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를 밝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앞에서도 계속 강조하였듯이, 반복되는 표현을 통해서 드러나는 화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질서와 조화의 하나님께서 이 지구를 우리 인간이 살기에 적합하도록 그 환경과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다는 은혜로운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과 권위에 대한 피조세계의 순종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하늘이 무슨 의지나 생명력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인격적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무슨 “하늘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의 뜻이 있을 뿐입니다.
6. 하나님의 창조(IV)- 셋째 날
이제 창조의 이야기는 빛의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 대한 언급을 거쳐, 우리 인간의 거주지인 육지의 이야기로 옮아갑니다. 이 날 역시 두 가지 창조행위를 볼 수 있습니다: (1) 바다와 육지의 분리; (2) 육지 식물들의 창조.
셋째 날은 여섯째 날 다음으로 중요합니다.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그의 거주지를 마련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속도도 다소 느려지고, 점차 상세해 지고 있습니다. 이날에 하나님의 사역을 보면 마치 출산을 앞둔 어머니가 태어날 자식을 위해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이사 가기 전에 이사 갈 집에 미리 가서 청소와 새로운 단장을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날, 즉 인간 창조를 3일 앞두고 무언가 분주하고도 흥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인지 그 동안 빠르고 간결하게 진행되어 오던 이야기가 다소 느려지면서, 동시에 상세해지고 있습니다. 창조에 관한 반복적인 표현도 이 날에는 대부분 두 번씩이나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이 가라사대”(9, 11절); (2) “있어라”(되어라)(9, 11절); (3) “그대로 되니라”(9, 11절); (4) “보시기에 좋았더라”(10, 12절); (5) “칭하시고”(10절).
이 날에 전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던 분리의 사역을 상상해 보는 것도 본문을 감상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모리스’ 박사는 이 날에 엄청난 물리/화학작용들이 대양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오늘날의 지구의 모습은 대부분 대홍수 이후 형성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만 그 기본적인 골격과 내용은 이 날에 갖추어졌을 것입니다: ‘헨리 모리스’, 61-62쪽.
예컨대, 물아래 놓여있던 땅들이 솟아오르면서 물은 땅의 높낮이에 따라 사방으로 흩어져 모이면서 바다나 호수나 대양을 이루고, 나머지 물들은 그들이 갇혀있을 수 있도록 해저 터널이나 홈통들도 무수히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물속에 녹아있던 화학 원소들이 침전되면서 저들끼리 결합하여 바다 속의 온갖 바위나, 미네랄, 그리고 심지어는 보다 복잡한 유기화합물까지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곧 이어 등장할 육지 식물들의 성장 재료(또는 비료)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들 전체가 오늘날 지구의 지각(crust)과 맨틀(mantle)과 그리고 심장(core)을 이루는 주요 성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엄청난 물리/화학 작용이 진행되는 동안 발생했던 열이나 에너지의 일부가 지구의 심장부에 갇혀 지금도 높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은 이와 같은 대 격변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옷으로 덮음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주의 견책으로 인하여 도망하며 주의 우레 소리를 인하여 빨리 가서, 주의 정하신 처소에 이르렀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시 104:5-10).
하나님께서 이처럼 바다와 육지를 구분하시는 이유는 그 땅을 온갖 종류의 아름다운 식물들로 장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분리와 장식이 보시기에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가 대홍수 시절에 무너지고 흩어졌을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죽음과 혼돈이 다시 찾아왔던 것입니다. 다시 태초의 그 어둠으로 되돌아갔다고나 할까요?
이제 다시 과학의 문제로 우리의 관심을 잠시 돌려봅시다. 첫 번째 질문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기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들이 어디서 왔을까요? “진화론”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고향은 원시 대양이라고 말합니다. 대양 속에 생명체가 자랄 만한 적절한 환경이 주어졌을 때 단세포 생명체들이 생기게 되었고, 이들이 플랑크톤, 삼엽충, 연체류, 어류, 양서류, 파충류, 그리고 포유류로 진화하면서 육지로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 이야기가 일정한 순서를 따라 진행된다고 볼 때(화자의 의도는 분명 그렇습니다만), 창조 이야기의 구성이 진행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관찰한 바 있습니다(문학과 역사). 물론 창조의 순서가 과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검증할 방법은 없습니다.
진화론의 가정은 틀렸습니다. 왜냐하면 이날까지 바다에는 아직 아무런 생명체가 없습니다. 적어도 이틀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있다면 조금 전에 언급한 무기 원소들이나, 미네랄, 그리고 유기화합물들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조건은 물론 생명체가 자랄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체로서 생명체로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틀 뒤에 물 속 생명체의 창조를 위한 환경으로 미리 준비해 두신 것이라고 보는 편이 낫겠습니다. 화자는 오히려 육지에서 창조가 먼저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크게 세 종류를 볼 수 있는데 풀과, 채소와, 그리고 나무입니다. 성서적 창조론과 철학적 창조론이 차이가 나는 한 부분입니다.
우리의 두 번째 과학적 질문은, “이들 식물들이 과연 어떻게 창조되었을까?”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들의 씨를 뿌려서 스스로 싹이 터서 자라게 하셨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이미 성장한 식물들로 시작하게 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렇게 묻는 배경에는 만일 하나님께서 前者의 방법을 택하셨다면 어떻게 하루도 채 안되어 그 모든 씨앗들이 싹이 터서 장성한 식물들로 자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윗트콤’과 ‘모리스’는 소위 “현상 나이”(apparent age)를 제시합니다. 이들은 성서적 창조론의 세 가지 특징으로 (1) 초자연적 창조, (2) 순간 창조, (3) 현상나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참고도서 9, 제 1장; 참고도서 10, 62-63쪽).
즉 모든 초자연적인 창조는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며 완성된 형태로 창조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어떤 나이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아담’은 어린아이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니 이러한 주장에도 충분한 근거는 있다고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을 택하셨는가에 대한 질문은 오늘날 실험과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질문으로서 구태여 답변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성경 본문에 의하면 후자(後者)의 방법, 즉 “완성된 창조”를 택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과학적 질문은, 세 종류의 식물들이 대표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즉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식물들을 세 개의 군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분류는 단지 ‘히브리’ 화자가 바라보는 것이지 오늘날의 복잡한 생물 계통도와 비교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린네이’가 체계화 한 생물 계통도에 의하면 생물들은 계, 문, 강, 목, 과, 속, 종으로 세분화되어 있습니다만 ‘히브리’어 “민”은 이들 중 어디에 속하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종류’(ןימ: 민)라는 단어입니다. 즉 이들 식물들이 어떤 것들이든 또는 몇 가지이든 각기 구별되어 만들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라고 번식해 갈 때 항상 자신의 영역-성질과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계속해서 법과 질서에 관한 모티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것을 혼합해서는 안 되며, 합해 놓으신 것을 분리해서도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레 19:19).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이 다 빼앗김이 될까 하노라. 너는 소와 나귀를 격리하여 갈지 말며,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신 22:9-11).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
7. 하나님의 창조(V)- 넷째 날
넷째 날에 이르러 지구는 거주자를 맞을 준비를 갖춥니다. 마치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는 아파트의 실내 장식과, 냉․온방 장치와, 음식이 다 준비된 상태와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 땅위에 있기 위해서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땅의 날과, 계절과, 그리고 낮과 밤을 주관할 특별한 장치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들을 하늘에 창조하셨습니다.
이날의 이야기는 첫째 날의 창조 이야기와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즉 첫째 날 창조되었던 그 빛을 지구에 전달해 줄 태양이나 달이나 별들이 이날에 하늘에서 창조되어 그 기능을 담당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날의 사역은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고 이미 만들어져있는 재료들을 사용한 것이고, 이 날에 특별한 기능을 부여한 것이라고 보아야겠습니다.
이날에 이르러 이야기는 여섯째 날 다음으로 길고 상세합니다. 이들 천체와 관련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는 것이겠지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강조하고 싶은지는 역시 우리에게 익숙한 창조 이야기의 표준 공식을 연구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전체적으로 보면, 창조 공식을 이루는 일곱 개의 요소 중에서 한 가지 요소, “복 주시되/칭하니”만 빼고 모두 등장하고 있는 점이 다른 날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 날에 이르러 화자는 같은 이야기를 두 번 반복하되, 교차대구적으로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A 주야를 나뉘게 하라(14절상)
B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라(14절하)
C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15)
D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16절상)
D'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16절하)
C' 땅에 비취게 하시며(17절)
B'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18절상)
A'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18절하)
여기서 두 번씩 반복되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은 “나뉘라”, “비취라”, 그리고 “주관하라”입니다. 교차대구의 중심에는 두 광명 즉 태양과 달이 창조되었다는 언급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16절).
이 형식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왜 화자는 두 광명체 해와 달을 기능 즉 나눔과 비췸과 주관함을 두 번씩이나 강조하고 있으며, 구조의 한 가운데 이들이 창조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이 둘을 해와 달로 칭하지 않고, 그냥 두 빛 “큰 빛”과 “작은 빛”이라고만 부르고 있을까? 그리고 나머지 빛, 별들에 대해서는 마지막으로 슬쩍 언급만 하고 넘어가는 것일까?
우리는 이에 대한 해답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이들은 결코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 그들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단지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나마 그들의 존재 이유도 우리를 위한 것, 즉 우리에게 징조와 사시와 그리고 일자와 연한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능적인 측면에서 볼 때, 별들의 기능은 해나 달에 비해서 덜 중요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기능 외에 다른 어떤 특별한 의미도 없고, 또 우리가 부여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기능은 과연 무엇인지 그 의미를 좀더 확실하게 이해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세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1) 징조(תוא: 오트 signs); (2) 사시(דעומ: 모에드 fixed times); (3) 일자와 연한(days and years). 이러한 구분은 <히브리어 성경> 본문에 대한 정확한 구문론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참고도서 1, 22-23쪽; 참고도서 5, 8-9쪽).
여기서 ‘일자와 연한’에 대해서는 특별한 어려움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바 그대로 단순히 시간과 관련된 기능입니다. 두 번째 기능 “사시”는 <구약>에서 “지정된 시간”(호 9:5), “약속된 모임”(욥 30:23), “약속된 장소”, “약속된 표시”(삿 20:38) 등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유대’인들의 종교적 절기나 축제 등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징조”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기적이나 예언의 징조(또는 표적)등과 관련된 초자연적인 현상 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홍수 이후 하늘의 무지개 현상(창 9:12)이라든지 ‘히스기야’ 왕에게 보여주었던 해 그림자(사 38:7) 등이 모두 해와 관련해서 나타났던 현상이었습니다.
이제 넷째 날의 사역과 관련해서 다시 과학의 문제로 관심을 돌려봅시다. 현대 천문학에 의하면 우주는 대폭발 이후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고, 진화의 가장 최근 단계가 태양계이며, 태양으로부터 다시 지구와 달이 떨어져 나왔다고 믿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별들이 가장 오래되었고 다음으로 태양, 지구와 달의 순서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우주 내에 존재하는 여러 다양한 별과 은하의 상태 즉 밝기나 크기가 이를 증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때때로 새롭게 생겨나는 신성(新星; nova)이나, 또는 그 수명을 다한 별은 폭발하면서 엄청난 세기의 빛을 발하는 초신성(超新星; supernova)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필경 우주의 나이와 관련된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즉 이들이 폭발할 때 발생하는 빛이 지구까지 도착하는데 수십만 광년이 걸리는데, 이는 결국 우주와 별들의 역사가 아주 오래되었음을 반증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혹자는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별과 태양계의 상대적인 나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과학적으로 확인된 바도 없고, 확인할 길도 없다고 말합니다. 아무튼 이 점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주천문학자들이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하겠습니다.
<성경>도 이 점에 대해서는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창조 이야기의 진행 순서를 살펴보면 이들의 상대적인 나이는 오히려 정반대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첫날에 지구의 창조가 있었고(창 1:1), 셋째 날에 해와 달과 그리고 별들의 창조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창 1:16). 그러나 우리는 <창세기>의 기록만으로 상대적인 창조의 순서를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천체들이 이날 처음으로 창조되었는지, 아니면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 날에 와서 비로소 그 기능만을 새롭게 부여받았는지가 분명치 않기 때문입니다. 화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들이 창조된 상대적 순서가 아니라, 그들 간의 상대적인 기능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신성과 초신성의 문제 역시 이들에 관한 과학적 발견들 즉 이들이 수십만 내지 수십억 광년이나 걸려 지구에 도달한다는 사실이 정확하다면, 이에 대한 대답을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성서학자들의 영역은 아닙니다만 “젊은 우주”(young universe)를 주장하는 일명 “최근창조론자”(recent creationist)들에게는 특별한 관심의 영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시대 대표적인 최근창조론자인 ‘헨리 모리스’의 해결책이 무엇인지 알아봄으로써, 이 문제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는 숙제로 남아있음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역시 자신의 독자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는데 그치고 있고, 그나마 이들 과학자들의 연구도 학계의 인정이나 주목을 받고 있지는 않습니다.
첫째 해결책은 빛이 직선 공간이 아니라 “리만 공간”(Riemannian space)으로 불리는 일종의 휘어진 공간 안에서 이동하기 때문에, 실제 무한히 먼 광원에서 오는 빛도 지구에 도달하는 데는 불과 16 년밖에 안 걸린다는 주장입니다. 두 번째 해결책은 더더욱 황당한 주장인데, 빛의 속도가 창조 당시에는 매우 빨랐으나 점차 줄어들다가 아주 최근에 와서야 현재의 빛의 속도가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모리스’ 자신의 주장인데, 실제 300광년 이상 되는 거리는 직접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며, 따라서 신성이니 초신성이니 하는 관찰 자체를 신뢰할 수 없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모든 주장들이 궁극적으로는 가장 간단한 설명 방법, 즉 “현상나이”와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한 번 이 개념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다 자란 성년으로 창조되었고, 과일 나무는 열매가 열린 채로 창조되었으며, 별빛은 이미 공간을 다 통과한 상태로 창조되었으며, 전체 우주도 이미 다 완성되고 자란 상태로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첫날밤부터 지금 우리가 보는 별빛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8. 하나님의 창조(VI)- 다섯째 날
다섯째 날의 하나님의 중심 사역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living creatures: היח שׁפנ 네페쉬 하야)를 창조하고 이들을 각기 종류대로 분리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없기 때문에 아직도 이 지구는 땅과 바다와 하늘을 막론하고 조용하고 적막하기만 합니다. 활력이 넘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이날에 등장하는 세 종류의 생명체는 바다와 하늘을 채울 것입니다:
(1) 바다의 큰 짐승(sea monster: ןינת 탄닌)
(2) 수중 생명체(swarming things: ץרשׁ 쉐레츠)
(3) 공중의 새들입니다.
첫째 날 빛의 창조가 셋째 날의 빛의 전달자들(해, 달, 별)의 창조와 대칭을 이루고 있다면, 다섯째 말은 둘째 날과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창조의 표준 공식은 한 가지 요소, 즉 “그대로 되니라”만 빼고 모두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날에 첫째 날 이후 처음으로 다시 등장하는 단어가 있는데, “창조조”를 뜻하는 ‘바로’입니다. 특히 이 단어는 “바다의 큰 짐승”과 연관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짐승은 때로는 뱀이나(출 7:9, 10, 12; 신 32:33; 시 91:13), 악어(겔 29:3; 32:3), 또는 큰 힘을 지닌 짐승(렘 51:34)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대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사 27:1);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사 51:9);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시 74:13); 내가 바다니이까 용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욥 7:12)
이들 구절은 일견 ‘가나안’의 신화적 모티브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가나안’의 신화에 의하면, 바다와 용은 ‘가나’의 ‘바알’(Baal) 신을 대적하다 패배하는 세력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이들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하며, 결코 하나님의 대적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도 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외치고 있습니다: “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시 148:7).
이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반복되는 창조의 공식, “복 주시되”를 통해서도 다시 한 번 드러내고 있습니다(22절). 이처럼 하나님의 축복은 <창세기> 전체의 중심 되는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짐승들을 축복하시고(1:11), 사람들을 축복하시며(1:280), 안식일을 복 주시며(2:3), ‘아담’을 축복하시며(5:2), ‘노아’를 축복하시고(9:1), 이스라엘의 모든 족장들에게 각기 복을 주셨습니다(12:3; 17:16, 20 등등).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은 “생육하고”, “번창하는” 것을 통해서 성취되고 있습니다. 실로 <창세기>는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에 관한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가장 밝고 긍정적인 네 단어, “창조하다”, “축복하다”, “생육하다”, “번성하다”가 모두 음성학적인 유사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1) “창조하다”(ארב: 바라); (2) “축복하다”(ךרב: 바락); (3) “생육하다”(הרף: 파라); (4) “번성하다”(הבר: 라바). 화자의 뛰어난 문학적 솜씨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9. 하나님의 창조(VII)- 여섯째 날
창조 이야기의 절정은 여섯째 날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날은 형식적으로 셋째 날과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첫 3일 동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오늘날 소위 “생태계”로 불리는 인간의 거주 환경을 만들고 조성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일이 있다면 육지에서 살 ‘네페쉬 하야’(생명) 즉 짐승과 인간을 만드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남은 하루는 매우 중요하고, 또 해야 할 일도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이야기도 6일 중에서 가장 길고 상세합니다. 창조의 일곱 공식 중에서 두 요소, “복 주시되”(28절)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31절)만 한 번씩 나타나고, 나머지 모두 적어도 두 번 이상씩 반복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반복은 다른 날에 비하면 두 배 이상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안식일 전날에(6일째) ‘만나’와 메추라기를 평일보다 두 배 이상 얻었던 사실을 연상시켜줍니다.
화자는 땅의 짐승들을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1) 가축; (2) 땅에 기는 것들; (3) 야생동물-땅의 짐승. 이러한 분류는 물론 오늘날 우리가 보는 복잡한 동물계통도의 분류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하루 만에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진화론의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고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25절에 의하면 이들 모두 땅에서 저절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집적 만드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들 짐승의 창조와 관련해서 화자는 ‘바라’ 대신에 ‘아사’를 쓰고 있습니다.
10. 하나님의 형상-인간
여섯째 날의 창조 이야기의 절정은 인간의 창조에 있습니다(26-31절). 그리고 인간의 창조는 전체 창조의 절정이자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빠진 창조 이야기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창조를 언급하고 있는 여섯 구절의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나 자신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이해가 달라집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들 질문에 대한 성경적 세계관을 제공해주는 해답을 이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나는 누구인가? 이는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입니다. 이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화자는 무미건조한 산문을 떠나 시적 유사병행과 교차대구로 노래하며 화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26절상)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가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가 그들을 창조하셨도다(27절)
인간만이 갖고 있는 특별하고도 독특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냥 서술적으로 드러내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음 직합니다. 노래의 핵심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선 26절에서 “우리”를 세 번에 걸쳐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단어에 힘을 주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27절에서는 첫 두 절을 교차대구로 진행하다가, 셋째 절에서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임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아주 심사숙고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컨대, 그동안 익숙한 창조의 공식, “하나님이 가라사대”와 “그대로 되어라” 대신에 다른 표현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이 표현은 일종의 권고 형으로서 마치 하나님께서 누군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란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즉 ‘유대’적인 해석과 기독교적인 해석을 말합니다. 교부시대 이후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전통적으로 이 표현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해석이 전혀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기독교 교리에 어긋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이는 기독교인은 거의 없습니다. 폐기처분 된 상태입니다. 삼위일체의 개념을 용납하지 않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설명은 하나님이 하늘의 왕궁에서 천사들과 대화하고 있다는 입장입니다: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 하였느니라”(욥 38:4, 7). 마치 만조백관들이 도열한 자리에서 왕이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장면을 연상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누구를 지칭하는가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인간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그 대답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란 과연 무슨 뜻입니까? 유사병행구절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에서 등장하고 있는 두 단어 중, “형상”(םלצ 체렘: image)은 그 어원이 불분명하고, “모양”(תןמך 데무트: likeness)은 “닮은 꼴” 또는 “유사성” 등을 의미합니다. 노래의 전후 문맥을 살펴볼 때 두 단어는 결국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장을 유사한 다른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일백 삼 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창 5:3). 여기서 “형상”과 “모양”은 단순히 시적 유사반복의 관계에 있는 동일한 의미의 단어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혹자는 이와 같은 유사반복을 “비슷하기는 하지만 동일하지는 않은 모습”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결국 이 말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일치되는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와 우리 사이에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좀 어렵게 말하자면, 하나님은 우리와 “공유적 속성”(共有的 屬性)과 “비공유적 속성”(非共有的 屬性)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가지고 있는 “공유적 속성”은 무엇일까? 가장 포괄적으로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인격성”(personality)입니다. 하나님이 인격적 존재라고 하는 말은 그분께서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성과 감성; 사랑과 미움; 말하기와 듣기; 권리와 책임; 등. 한편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비공유적 속성”을 가장 포괄적으로 요약할 수 있는 단어를 찾는다면 “초월성”(transcendence)과 “내재성”(immanence)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비공유적 속성에는 예컨대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있습니다: 영생불멸(eternity); 전지전능(omniportent); 무소부재(omniscience).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을 염두에 둔 선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첫째, 인간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교제)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relationship). 서로 대화하고,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나누며, 꿈과 계획을 나누며, 창조적 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끊어진 것을 두고 사망이라 규정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는 살았다고 주장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단지 외견상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뿌리가 잘린 “성탄 트리”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두 번째 의미는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의 대변자 내지는 대리자라는 것입니다(reflection; representation). 이러한 해석은 고대 근동지방의 습관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왕이 넓은 왕국을 다 통치할 수 없으므로 변두리마다 왕의 형상을 세워놓고 보는 이마다, “이 땅의 주인은 이 형상에 새겨놓은 바로 이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도록 했습니다. 동전에 통치자의 형상을 새겨 넣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들은 인간을 바라봄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실제 고대 근동 지방의 문헌들을 보면 왕을 신의 형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편>도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 하시나이까 저를 천사(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 이니이다(시 8:4-8).
즉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대신해서 자연 세계의 왕이 되도록 설계하신 것입니다: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1:26하). 짐승들이나 기타 피조물들이 만일 인지 능력이나 또는 그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면 인간을 보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문화명령(창조명령). 인간에 대한 첫 번째 질문이 존재론적인 것이었다면 두 번째 질문은 윤리∙도덕론적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인간의 소명에 관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다스리라(1:28)
우리는 이 말씀을 “대 위임령”(the Greatest Commission) 또는 “문화명령” 이라 부릅니다. 필자는 이 말씀을 “창조명령”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그 이유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축복이요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대화가 통하는 유일한 상대라는 의미입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는 무엇인가를 부탁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신 가장 오래되고, 그래서 가장 근원적인 말씀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자 말자 처음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에 태어날 때 “대 위임령”의 축복과 약속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특권과 책임에 대해서 이처럼 단호하고도 명쾌하게 선언하고 있는 곳은 <성경> 외에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세상에서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헌법의 전문(前文)과도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문화명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과 세상으로부터 동시에 버림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명령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략 네 가지 영역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의도(목적)
(2) 문화명령의 적용 범위
(3) 우리의 자세와 태도(방법)
(4)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한가?
첫째, 문화명령이 의도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명령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나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이 명령을 과연 “창조명령”으로 부를 수 있을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요? “나는 너희들의 창조주이자 왕이다. 그리고 너희는 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너희들 역시 이 세상에서 왕처럼, 창조주처럼 살아가라.” 이런 점에서 “창조명령”은 명령인 동시에 엄청난 축복을 수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명령 속에 포함된 다섯 가지 명령문은 모두 “하라”는 적극적인 긍정문들 뿐 입니다.
둘째, 문화명령의 적용 대상이나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 한 마디로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크게 세 영역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세 개의 우주로 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천지(창 1:1); (2) 생명체(창 1:21); (3) 인간(창 1:27). 그러므로 문화명령은 이들 세 우주를 정복하고 다스리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정신적이고도 육체적인 활동을 수행하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누군가를 다스리고 정복하기 위해서는 그 대상에 대해서 연구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각각의 우주에 대한 인간의 활동을 오늘날의 용어로 정리해 보자면, 자연과학(물질과학 및 생명과학), 인문과학, 사회과학 등으로 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교육은 이 모든 분야를 다 포함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며, 단순한 <성경> 공부에 국한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 카이퍼’(A. Keiper)가 선언한대로 전체 우주 가운데서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문화명령을 수행하는 태도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여기서 “정복하고 다스리다”는 단어들이 군사적인 용어임에는 틀림없지만, 의미하는 바는 사뭇 다릅니다. 인간이 비록 이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을 대리하는 왕임에는 틀림없지만, 왕은 북한의 김정일 같은 독재자가 아니라면, 자기 임의대로 국가를 경영할 수 없습니다. 권리는 항상 책임을 수반합니다. 고대 근동 지방의 왕들은 그 백성, 특히 가난한 자들의 행복과 안녕을 도모하는 것이 그의 중요한 책무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 이와 같은 책무를 감당하도록 특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 포악한 독재자가 되어 하나님의 형상인 백성을 파괴하고 억압했습니다. 왕의 개인적 야욕을 위해서 법과 질서를 어지럽혔는가 하면, 인간의 다양한 필요와 변화를 통제하고 획일화하려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들 왕들은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여기에 자연에 대한 왕으로서 인간의 책무에 대한 교훈이 있습니다. 인간은 절대 권력을 지닌 왕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예컨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인류의 관심사인 환경문제만 해도, ‘사울’이 그의 백성에게 했던 것처럼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그렇게 한다면, 결말은 ‘사울’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과연 자연에 대한 무자비한 파괴와 착취를 옹호하고 있을까?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비기독교적인 환경단체들은 기독교에 바탕을 둔 서구의 기계론적인 과학정신이 환경파괴의 주범이라고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환경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새로운 ‘패러다임’, 즉 자연과 생명체를 하나로 보는 “범신론”에 바탕을 둔 동양철학 내지는 “뉴 에이지 과학”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최근의 한 저서가 이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알아볼 일입니다:
지구의 오염은 200년 전 서양의 산업혁명에서 시작하였으나 그 이전의 사상에서 문제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자연과 떨어져 존재하는 초월 신으로서의 기독교, 나아가 영적 영역에서의 구원을 강조한 기독교의 구원론이 인간의 관심을 자연에서 멀어지도록 했다...이때 세속 세계에 나타난 것이 과학이며 과학은 자연을 통제하여 인간의 삶을 향상시킬 수단을 강구하게 되었다. 17세기에 과학과 종교는 확연하게 갈라져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종교가 영적 세계에 안주한 반면, 과학과 자연과 우주를 신이 없는 기계적인 것으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제 자연은 신과 인간의 생명력과 구별되는 단지 기계적인 파악의 대상이 되었고 이로부터 산업화의 명분으로 약탈이 자행되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서 ‘뉴 에이지’ 사상가들이 왜 그토록 환경운동에 몰두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환경 파괴에 대한 이들의 진단은 대체적으로 우리가 동의할 수는 있습니다만, 그들의 범신론적인 전제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연과 우주가 우리와 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고, 우리 또한 그들의 한 부분이므로 그들을 보호하고 보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사상이 전무했던 동양에서 환경 파괴가 서구보다는 훨씬 덜 심각했을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도나 중국 등지에서 산이나 숲들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초토화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의 환경운동에 대한 동기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문화명령의 적극적 측면, 즉 우리의 특권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여기서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말은 “소유로 삼아, 그 성질을 연구하고 분석하여 활용하고 개발하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서 그가 만드신 것들을 더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창조하고, 창출함으로써,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즐거움에 동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창조적 활동이 좁게는 가정에서 자녀를 낳고 기르는 일에서 시작하여,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학문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연구와 가르치는 일에서, 교회에서 영적인 제자를 만드는 일에서, 그리고 넓게는 우리의 이웃을 그 자체로서 사랑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창조적으로 수행하자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고 단지 그것들의 관리자, 즉 청지기에 불과함을 늘 인식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처럼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과 약속을 동시에 주신 것입니다(1:28). 예컨대, 우리는 여기서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출산을 위해서 당시 이방세계에서 행하던 온갖 미신적인 제의가 불필요함을 금반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음식을 제공해 주셨다는 기록도(1:29-30),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신화들과는 전혀 딴 판입니다. 한 예로, <에뉴마엘리쉬>에 의하면 신들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이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음식을 제공해주는 노예로 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음식과 관련해서 기독교인들의 오래된 한 가지 신화는 인간은 원래 채식을 하도록 되어있었고 육식은 홍수 이후에 허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언서>에서도 이와 같은 입장을 지지하는 듯한 선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마지막 날에는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라는 예언이라든지(사 11:7; 65:25), 홍수 이후 ‘노아’에게 육식도 허용하는 이야기(창 9:3) 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에 육식 금지를 시사하는 아무런 구절이 없으며, 오히려 짐승들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에서 육식도 허용하는 듯한 암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아담’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짐승의 가죽을 벗겨 그에게 옷으로 주었으며(창 3:21), ‘아벨’은 하나님에게 양을 희생제사로 바치기도 했습니다(창 4:2-4). 그리고 ‘노아’는 홍수 이전에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별하였습니다(창 7:2).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모든 것을 허용하시고, 그것들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위계질서들이 “심히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창 1:31). 그가 금지하신 것이 있다면 육식이 아니라 동산의 “지식의 열매”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해주는 결정적인 지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넷째, 마지막으로 남은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은 “문화명령은 여전히 유효한가?”입니다. 즉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인가?”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대답은 “예”입니다. 비록 ‘사탄’의 반란과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선하고 아름다운 창조는 반창조로 나아가 버렸고(창 1:2), 하나님의 형상은 철저하게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롬 3:23),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주셨던 것과 동일한 명령과 약속을 대홍수 이후 ‘노아’와 세 아들에게 주셨습니다(창 9:1-2). 우리는 이 명령과 약속을 “언약”이라 부르는데, 이 “언약”은 ‘아브라함’을 거쳐(창 12:1-7) ‘다윗’ 시대까지 여전히 효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주셨으니”(시 8:6). 그리고 <신약> 시대에 이르러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마 28:19-20). 사도 ‘바울’도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골 3:10)
11. 창조와 안식
창조 이야기는 인간의 창조로 절정에 이르렀다가, “안식”에 관한 이야기로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결론인 셈입니다. 제 칠일의 이야기는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육일 동안의 이야기와는 판이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서막>의 한 부분 즉 결론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안식 이야기>가 <창조 이야기>와 별개의 단락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 속에 포함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즉 안식은 창조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어야 함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서 “안식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서도 설명해 줄 수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탁월하고도 해박한 전문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와 안식. 안식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단어는 창조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안식을 “창조-재창조-새 창조”의 틀 안에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우선 창조의 틀 안에서 안식을 이해해 보자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와 독특한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언약이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최초의 언약은 “창조언약” 즉 “창조명령”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창 1:28).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명령도 아니고 율법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의 관계입니다.
따라서 안식도 이 언약 속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창조의 언약은 일반적인 면과 구체적인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면은 앞에서 언급한 “창조명령”(창 1:28)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면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특별한 한 행동을 말합니다. 소위 선악과(善惡果)에 대한 금지가 바로 그것입니다(창 2:16,17). 대개 창조언약을 논할 때, 구체적인 면만을 절대적으로 강조해 왔기 때문에, 기독교 세계관과 인생관에 큰 결핍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안식일의 기원은 분명 <창세기> 서막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창조와 안식은 하나님의 전체 창조사역의 구조적 원리, 즉 “육일의 사역 후에 하루의 휴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안식의 중요성은 이와 같은 형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 2:3). 우리는 여기서 안식과 함께 등장하는 네 개의 단어를 주목해야합니다:
(1) 마침(완성)
(2) 쉼
(3) 축복
(4) 거룩
축복. 먼저 안식과 축복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복주셨다”고 말할 때, 아무 뜻 없이 말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이날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말입니다(막 2:27). 따라서 안식은 율법이 아니라 자유이자 특권입니다.
그러나 안식은 단순히 인간만을 위한 날이 아닙니다. 들의 모든 짐승까지도 참여하는 전 우주를 포함하는 축복입니다. 물론 땅도 여기에 속합니다. 즉 칠년에 한 번 안식년, 그리고 칠년의 일곱 번 후에 오는 희년(禧年)까지 더하여 기념하도록 했습니다(레 25:1-7). 이처럼 안식일과 안식년 그리고 희년을 제정하신 목적은 인간을 일의 노예에서 구출하는 동시에, 땅도 보호하고자 함입니다: “땅은 여호와께 대하여 안식하였다”(레 25:4).
우리는 이 세상에 포로 된 자가 아니며,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하는 목적이 이 땅을 끊임없이 경작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열매를 평화롭게 즐기며 사는데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육일을 일하시고 하루를 쉬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일주일이 7일로, 그리고 음력으로 한 달이 네 번의 7일 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7일 주기를 바꾸어 보려는 모든 역사적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났음을 우리는 압니다. 프랑스 혁명 급진파들이 그러했고, 러시아 혁명 당시에 일주일을 10일로 해보았습니다만 모두 고통만 더해줄 뿐이었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안식일이 십계명이 있기 전에는 ‘유대’인들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자연법칙과도 같을진대 말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이전에는 안식일이고 뭐고 없었습니다. 그저 죽도록 일만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들을 일의 노예에서 구출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은 구원과 함께 주어진 자유요 해방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이 날을 망각하며 지낼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러면 당시 다른 민족들에게도 이런 날이 있었을까요? 당시 근동지방에서 는 한 달 중 7일, 14일, 21일, 28일 등 7과 관련된 모든 날들은 불길하고 재수 없는 날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안식일은 이와 같은 사회적 통념을 바꾸어놓는 ‘유대’적인 세계관의 선언입니다: “안식일은 불길한 날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위한 축복의 날이다.”
거룩. 안식과 관련된 두 번째 단어는 “거룩”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즉 자신이 창조주로서 기억되는 방식을 세우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에는 시간을 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예배를 통해서 하루뿐만 아니라, 자신은 물론 자신의 일의 소산까지 구별하여 드리도록 요구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완성). 안식과 관련된 세 번째 단어는 “마침” 즉 완성입니다. 더 이상의 창조는 없다는 뜻입니다. 창조가 완결되었고 더 이상의 창조가 없다는 것은 이 우주가 안정되고 일정하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속에서 안심하고 지낼 수 있으며, 우주에 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연구 활동을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서 ‘모리스’ 박사는 상세하게 자연 과학자다운 설명을 덧 부치고 있습니다. 열역학 제 일 법칙과 관련한 그의 설명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참고도서 11, 제 7장).
쉼. 안식의 네 번째 강조점은 완전한 휴식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휴식의 정도는 어디까지입니까? 일반적으로 휴식은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영역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급진적으로 “영적인 휴식”까지 포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영적인 휴식”은 무슨 <성경>적인 근거가 있다기보다는, 필자가 편의를 위해 임의로 만든 신조어로서, “하나님마저도 아예 잊어버리고 지내는 일종의 수면 내지 휴면 상태”를 말합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가 단 한 순간도 필요하지 않을 때가 없고, 하나님은 성령의 내주를 통해서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이 <성경>적 전리이긴 합니다만, 역설적으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잠시 떨어져 살고 싶다는 욕구를 느낄 때도 있음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을 속속들이 드러내고 싶지 않습니다. 타락 후 ‘아담’의 행보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물며 사람들 사이의 교제에서 완전한 노출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이고, 그것을 억지로 요구하게 될 때 그것은 비인격적 억압과 구속이 되고 그 결과 상호관계는 끊어지고 파괴되고 맙니다. 누구나 자신이 안전하게 느끼는 자신만의 “도피성”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이런 원리가 적용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현실적으로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기도하며, 말씀 묵상하며, 범사에 그를 기억하고 살 수 만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간 정신분열증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합니다. 필자가 제시한 “영적인 휴식”에 대해서는 반드시 동의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오직 본인의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재창조(구속). 창조가 하나님의 백성을 처음 창조한 것이라면, 구원은 하나님의 백성을 재창조하는 것입니다. 어느 경우에도 안식은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재창조가 안식과는 어떤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창조언약 하에서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禧年)은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직선적”인 흐름의 특징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이들 특징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루의 안식을 앞두고 엿새 동안 일하는 방식은 “창조의 언약” 하에서, “기다림”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아담’의 범죄로 창조의 질서와 리듬이 파괴되고, 노동은 더 이상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과 수고가 따르게 되었고, 그나마 수고의 대가도 항상 기대할 수만은 없게 된 상황에서는 “기다림”은 더욱 절실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곱째 날의 안식일을 기다리며, 이 백성은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그날을 미리 내다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안식과 구원, 즉 재창조와 연결되는 방식인 것입니다. <신명기>가 이를 적절히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2-15)
여기서 안식일을 준수하는 이유는 창조 뿐 아니라 구원과도 연관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으로서 안식을 주셨으므로,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준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추가해서 이스라엘은 안식년도 기념해야 했습니다. 칠년에 한 번씩 이스라엘의 땅도 ‘야훼’ 하나님께 안식을 기념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레 25:1-7.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안식의 목적은 인간을 쉬게 할 뿐 아니라, 땅을 보호하려는 것입니다: “땅은 여호와께 대해 안식하였다”(레 25:4). 땅이 비록 인간의 손에 있을지라도 무제한의 소유물은 아닙니다. 그 땅은 ‘야훼’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동시에 안식년은 세상과 관련된 인간의 모습을 잘 나타내 줍니다. 인간은 세상에 포로 된 자가 아니며, 땅을 끊임없이 경작하는 것이 그의 삶의 목적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겪은 70년의 포로생활도 안식의 원리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안식의 규례를 어겼기 때문에 그 땅이 안식을 누리게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땅으로부터 추방했습니다: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대하 36:21).
이스라엘은 또한 희년을 기념했습니다.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간 끝, 즉 매 50년 되는 해에는 특별한 축하행사가 열렸습니다. 그 해의 첫 날에 나팔이 울리고, 온 땅에는 자유가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날 모든 채무가 면제받게 되었습니다. 희년의 선포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깁니다. “여호수아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 들어가서 12 지파가 균등하게 땅을 분배받았을 텐데 어찌하여 노예가 생기게 되었으며, 채무자가 나타나게 되었을까?” 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누가 이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을까요?
흥미롭게도 <이사야>는 이날을 ‘메시아’의 오심과 연계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이사야>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음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여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결론적으로 <구약>의 안식은 구원의 미완성을 암시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종말론적 신앙 속에 살도록 자극하고 격려했던 것입니다.
새 창조. 이스라엘의 기대와 소망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으로 성취되고, 완성되었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좀 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최초의 창조활동을 능가하는 사건입니다. 처음 창조로 세상이 탄생되었다면, 부활의 사건으로 세상은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역사를 전혀 다르게 봅니다. 우리는 단순히 다가올 구원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장래의 안식을 기다리지 만은 않습니다. 이미 성취된 구원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옛것은 지나가고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따라서 우리는 안식일을 기다리며 엿새의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안식 속에서 기뻐하며 일주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주일의 첫 날이 안식일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주일의 예배는 단순한 휴식 이상의 날로서, 이날에 제자들은 주의 부활을 기념하고 그의 주되심을 선포하는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때까지 “영원한 안식”은 여전히 남아있기는 합니다.
마지막으로, 창조의 언약과 관련해서 안식 외에도 결혼과 노동의 규례가 추가로 설명되어야 합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제 2장에서 소개할 것입니다.
6. 창조와 창조론
마찬가지로 창조와 창조론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소개는 별도 교재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태초 이전에 인격적 원인, 즉 삼위의 하나님이 있었고, 창조는 그들 사이의 교제와 계획과 약속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말은 오늘날 우리와 교회에 어떤 의미와 교훈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까?
그러면 오늘 우리는 <창세기> 서막을 어떤 상황에서 읽어야 할까? 만일 그 의도가 단순히 과거에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에 관한 역사적이고도 과학적 사실을 알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화자의 의도를 놓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상황은 어떠합니까? 나의 지성과 감성은 균형 잡혀있는가? 나의 신앙과 신학은 균형 잡혀 있는가? 육체와 정신은 균형 잡혀있는가? 더 나아가 지금 나의 가정 생활은 어떠한가? 직장에서는 어떤가? 그리고 교회에서는 어떠한가?
혹시 <서막>에서 벗어나 “반 창조”(anti-creation)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는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는 하셨지만 어느새 공허와, 혼돈과, 어두움 가운데서 방황하고 있지는 않는가? 아무런 형체도 특징도 없고, 움직임도 없으며, 하나님의 신은 떠나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나는 지금 창조의 질서와 활력의 한가운데 서있는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생육하며, 번창하며, 충만하며, 땅에 충만하며, 땅 즉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기 위하여 지적이고도 정신적이며 육체적인 노동을 하고 있는가? 나의 생활은 얼마나 질서가 잡혀있는가? 노동과 안식의 구별은 잘하고 있는가? 피할 것은 피하고 있는가?
보다 깊이 있는 연구를 위해서 다음 질문들을 함께 논의해 봅시다.
2. <창세기>에 대한 시각. 우리가 <태초의 이야기>를 읽을 때, 과학적이거나 역사적이 되기보다는 문학적이고도 신학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왜 중요한지 창조의 날들에 관한 논쟁을 예를 들어 설명해 봅시다.
3. 본문의 형식과 내용. 우리가 <성경> 본문을 연구할 때, 본문의 문학적 형식을 우선적으로 고려함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예를 들어 설명해 봅시다.
4. 태초 이전. 태초 이전의 사건은 무엇이며, 우리가 이것을 따져보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5. 창세기 1:1-2는 6일 동안의 본격적인 창조 활동이 있기 전의 창조된 세계의 상태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화적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6. 태초의 사건은 6일 동안의 창조활동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창조의 공식을 이용하여(6쪽) 하나님의 창조의 내용과 각 날들 간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7. 창조와 안식. 일곱째 날의 의미에 대해서 창조(원 창조, 재창조, 새 창조)와 관련하여 설명해 봅시다.
8. <서막>의 주제들. <서막>의 주제는 하나님과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이 외에도 다른 주제들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서막>을 통해서 아래 주제들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1) 창조주 하나님; (2) 창조; (3) 인간; (4) 창조명령; (5) 창조와 창조신앙; (6) 2절의 의미; (7) ‘엘로힘’; (8) 창조-세 가지 창조론의 유형.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