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의 두 번째 이야기는 인류 역사에서 아마도 가장 유명한 이야기 <에덴 이야기>입니다. <창세기>에서는 항상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때마다, “~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또는 “~의 계보(‘톨레돗’)가 이러하니라”로 시작하며, 계보와 다음 계보 사이의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하나의 독립된 단위를 이룹니다. 이와 같은 표현은 <창세기> 전체적으로 10 번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앞에서 배웠습니다: (1) ‘아담’의 계보; (2) ‘노아’의 계보; (3) ‘노아’의 아들들의 계보; (4) ‘셈’의 계보; (5) ‘데라’의 계보; (6) ‘이스마엘’의 계보; (7) ‘이삭’의 계보; (8) ‘에서’의 계보; (9) ‘야곱’의 계보. <창세기> 제 1막은 그 첫 번째 계보로서, 세 개의 연관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1) <에덴 이야기>(2:5-3:24); (2) <가인과 아벨 이야기>(4:1-16); (3) ‘가인’의 후손(4:17-26). <에덴 이야기>는 그 첫 번째에 해당하며, 이들 모두는 창조와 타락이라는 주제 하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낙원과 실락원”(樂園과 失樂園)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는 모든 서구 문학의 원형(原型)이 되기도 합니다. 문학의 유형으로 볼 때, <에덴 이야기>는 분명 <창세기: 서막>과 마찬가지로 “기원 이야기”(origin narrative) 임에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두 이야기는 공히 “창조와 언약”의 기원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 이야기>에 대한 개론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서 ‘라솔’(Rasor)의 「구약개론」(참고도서 23, 129-133쪽)과 ‘라이겐’(Ryken)의 「문학에서 본 성경」(참고도서 10, 35-41쪽)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두 이야기의 형식이나 내용은 사뭇 다릅니다.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서막이 다루고 있는 바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에 관한 것이라면, <에덴 이야기>는 “그 세상이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실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고 있는 세상은 <창세기> 1-2장에서 그리고 있는 “선하고 아름다운 창조”와는 거리가 멀고, ‘에덴’동산과 같은 지상 낙원도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어둡고, 혼란스러운 곳이 이 세상입니다. 부서지고, 깨어지고, 소외되고, 온갖 소동으로 가득 찬 곳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상호 불신과 적대감, 시기와 질투심으로 서로를 경계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저히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변덕스러움, 잔인함, 이중성, 등등. 그러면서도 또한 우리는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씨름하며 살아가는 가련하고 불쌍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은 우리의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멀어서 살아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에덴’동산은 역사의 시공간 속에서 분명히 실재(實在)하던 곳이었습니다(창 2:10-14). 그 아름다운 곳, 즉 물이 풍부하고, 생명의 나무를 포함한 온갖 먹을 것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생명의 활기가 넘치던 곳에서 ‘아담’은 그의 일생을 시작하였습니다. 매일 해야 할 일이 있기는 했었지만(2:15), 그것은 어디까지나 즐겁고 유쾌한 것이었지 삶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과 고통은 아니었습니다. 가시와 엉겅퀴와 야수들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는 물론 모든 피조물들과도 거짓 없고, 평화스러운 교제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이 장소는 그 정확한 위치 파악조차도 불가능한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에덴’동산은 실재(實在)하는 동시에 잃어버린 곳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간절히 동경하지만 결코 가까이 할 수 없고, 간절히 바라기는 하지만 결코 소유할 수 없다는, 이 두 주제가 어우러져 있는 단어가 곧 ‘에덴’인 것입니다.
우리의 화자는 왜 이처럼 ‘에덴’동산을 가슴에 사무치도록 아름답고, 순결하게 그리고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왜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그처럼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들리도록 하고 있습니까?
누군가 분노와 한숨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도록 유도하기 위함은 아닐까요?: “도대체 누가 그 세상을 이처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단 말인가 아니면 ‘아담’이 그랬단 말인가?” 이것은 마치 온 국민이 국가적 부도를 맞아 경제적인 고통 가운데서 그 고통을 가져오게 한 장본인이 누구인가를 따지고 싶어 하는 심정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현재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이 다른 사람이 저질러놓은 결과 때문이라고 한다면, 분하고 원통해서 더욱 더 그 책임을 묻고 싶어 할 것입니다.
<에덴 이야기>(2-3장)의 핵심은 그 모든 문제의 발단, 즉 동산 중앙에서 일어났던 아주 더럽고, 치사하고, 야비한 배신의 한 행위를 철저하게 들추어내어 고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담의 선택”에 대해서 이처럼 강력하고도 원색적인 용어들을 동원해서 비난하는 이유도,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그만큼 분노해 있고 절망해 있기 때문입니다. 오만과 배신, 증오와 불신, 거짓과 살인, 고독과 절망, 이 모두는 단순히 이론이 아니라 매일 매일 우리가 만나는 것들입니다. 당시의 <창세기> 화자처럼 말입니다. 그 역시 지금 극도로 분노해 있고, ‘아담’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이야기의 형식과 구조를 통해서 아주 강력하게 그리고 절묘하게 드러내고 싶은 지도 모르겠습니다.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
<에덴 이야기>에 이어 <첫 인류>(4:1-26)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유명한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대표적인 내용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서 타락에서 비롯된 인류의 죄악이 어떻게 심화되고 발전해 가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제 2장: 에덴 이야기
2
에덴 이야기
(2:4-3:24)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2:4)
문학과 역사
편집과 자료. <에덴 이야기>는 내용상 크게 두 주제, “창조와 타락”, 또는 “낙원과 실낙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절정은 두 번째 주제에 있습니다. 즉 창조가 아니라 타락이며, 낙원이 아니라 실낙원에 관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 및 짐승들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는 단지 타락의 주제를 보다 극적으로 돋보이게 하기 위한 보조 장치입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이야기를 쓰다 보니 서막에서의 창조 이야기와는 그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상당히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두개의 창조 이야기는 하나의 연속적인 사건이 아니라, 두 개의 독립된(아니면 적어도 상호보완적인) 이야기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두 이야기의 대표적인 차이점들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이 다릅니다. 제 1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이며, 제 2장에서는 ‘야훼 엘로힘’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아마도, <에덴 이야기>의 주제가 창조보다는 “타락과 구속”에 있으므로, 구속과 언약의 하나님 ‘야훼’를 언급함으로써 구속의 필요성을 암시하려는 의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제 2장에서 ‘야훼’의 이름은 무려 20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한 묘사가 다릅니다. 제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는 오직 “말씀에 의한 창조”(creation by fiat)로 드러나고 있는데 반해, 제 2장에서는 “행위에 의한 창조”(creation by action)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는 각기 상호보완적으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줌과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다양한 체험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셋째, 창조의 순서가 다릅니다. 제 1장에서는 식물-짐승-남자와 여자의 순서로 창조가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에덴 이야기>에서는 아담-짐승-여자의 순서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 역시 두 이야기의 구성상의 특징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서막이 “선하고 아름다운” 창조라는 주제를 상향식(上向式)으로 전개시키면서 인간의 창조를 이야기의 절정에 두고 있는 반면, <에덴 이야기>는 그 구성을 하향식(下向式)으로 전개하면서 “선하고 아름다운 창조”의 절정에서 인간이 어떻게 타락해 가는 지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넷째,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설명이 다릅니다. 제 1장은 인간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서 초자연적인 특성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 <에덴 이야기>는 흙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연적인 측면, 유한성, 연약성, 의존성 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이야기의 서로 다른 주제와 일치시키기 위한 화자의 의도일 것입니다.
다섯째, 두 이야기의 문학적 상수(常數)들이 다릅니다. 예컨대, 제 1장은 선언이나 하나님의 명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에덴 이야기>는 상징과 비유, 그리고 신인동형론적인 표현들을 주로 구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두 이야기는 많은 차이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만, 이들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두 이야기가 마치 상호 모순되고 대립되며 별개의 이야기로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의 태동을 가능하게 한 것도 이들 차이점들에 대한 학문적 연구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참고: 본 교재의 <서론>.
하지만 제반 “역사비평”의 주장의 진위 여부에 상관없이, 두 개의 창조 이야기가 나름대로 신학적 목적을 달리하고 있다고 전제한다면, 크게 개의할 부분은 아닐 것입니다. 예컨대, 창조의 순서와 관련해서 두 이야기의 핵심은 인간이 생물 중에서 처음 창조되었느냐, 아니면 맨 나중에 창조되었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 이야기가 공히 강조하고 있는 점은 인간을 창조의 절정으로써 영광된 위치에 올려놓는데 있습니다. 제 1장은 하나님의 창조 활동의 절정 즉 가장 마지막에 인간을 둠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가 하면, 제 2장은 인간 창조에 관한 사실을 가장 먼저 다룸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즉 두 이야기는 각각 인간이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는가와, 그리고 어떻게 그 인간이 타락해 갔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생명체들의 창조의 순서를 놓고, 과학적 및 역사적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이를 진화론과의 논쟁에 인용하는 것은 창조 이야기의 핵심과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창조 이야기는 적어도 창조의 순서에 있어 상이하고 상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락과 구조. <에덴 이야기>의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감상법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겠는데, 이곳에서 소개하는 내용은 Walsh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한 것입니다. 참고 도서 12.
전체 이야기는 일곱 개의 작은 이야기(또는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구성은 상호 대칭적인 U字型의 비극적 드라마에 해당됩니다. <에덴 이야기>의 형삭과 구조적 특징을 아래 도표에 정리해 보았습니다. 위의 도표는 에덴 이야기의 형식적 특징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일곱 개의 장면 중에서 같은 색을 가지는 장면들이 각기 짝을 이루도록 했으니, 각 장면의 양식, 등장인물 및 역할, 지리적 상호 위치, 상호 관계 등에 대해서 연구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적 특징을 통해서 화자가 타락에 대해서 진정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대해서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전체적인 구조부터 살펴보기로 합시다. 일곱 개의 장면은 네 번째 장면을 중심축으로 하여 구조적으로 대칭(거울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의 위치에 관한 언급(2:10-14)을 제외하면,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이 끊어지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이야기가 진행되는 순서에 따라 장소가 어떻게 함께 이동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이야기는 처음 동산 밖에서 하나님의 한 행위로 시작하여 동산 안으로, 점차적으로 동산 내부로, 동산 내부의 대화로, 동산 중앙에서의 불순종으로, 그리고 동산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법은 <홍수 이야기>, <바벨탑 이야기>,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 등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대의 중앙이자 중심부, 즉 U字型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 아담의 배신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전체 이야기를 반전시키는 곳이며, 또한 반 절정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타락의 주도적 역할을 한 자는 물론 ‘아담’과 ‘하와’입니다. 왜냐하면 이 장면에서 등장인물은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뱀도 없습니다. 이러한 장치를 통해서 화자가 등장인물들이 저지른 반역 행위에 대해서 말하려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가 동산 중앙에 있는 “지혜의 나무”에 접근하여 열매를 따먹은 것을 방해하는 그 어떤 세력도 없었습니다. 대개 이러한 모티브를 담고 있는 일반적인 신화의 경우를 보면, 그 주변에 필경 초자연적인 수호신이나 또는 숨겨진 무기나 함정 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에덴 이야기>에는 이러한 요소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만일 있다면 아담의 마음속에 기억으로 남아있을 하나님의 말씀만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아담에게 필요한 것이 있었다면 오직 한 가지, 불신앙뿐이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변하는 것은 장소의 이동뿐만이 아닙니다. 장소가 바뀔 때마다 등장인물들의 역할과 그들 간의 상호관계 또한 변해 갑니다. 이러한 변화 또한 결코 놓칠 수 없는 이야기의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이와 같은 상대적인 역할은 피조세계에서의 위계질서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역할이 바뀌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 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타락 이전, 즉 처음 두 무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창조의 위계질서는 하나님 ⇒ ‘아담’ ⇒ ‘하와’ ⇒ 짐승의 순서이었는데, 동산 중앙에서 타락이 일어나기까지의 주도적 인물은 짐승 ⇒ ‘하와’ ⇒ ‘아담’ ⇒ 하나님의 순서로 완전히 역전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대칭을 이루고 있는 두 장면은 내용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양식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처음과 마지막 무대의 양식은 일종의 “서술”(narrative)입니다. 두 장면은 공통적으로 상황에 대한 묘사를 시적으로 다룬 다음(2:5-6 및 3:22), 두 장소의 경계선을 넘는 하나님의 행위(2:8 및 3:23-24)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 느껴지는 효과는, 타락 이후의 상황에 대한 일종의 예견이 될 것이므로 독자로 하여금 긴장감이나 불안 심리를 갖도록 하고 있습니다. 두 장면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들로서는 “동방”, “생명나무”, “갈고 지키며”, ‘아담’과 ‘아다마’ 등이 있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와 여섯째 장면은 동산 내부의 어느 한 장소로서, 하나님, ‘아담’, ‘하와’, 뱀 모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이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인간과 피조세계와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둘째 장면에서는 그 이상적 상황, 즉 인간의 지배와 주도를 다루고 있는 아주 희망적인 분위기라면, 여섯째 장면은 그 실존적 상황, 즉 좌절과 실패와 고통을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해서도, 둘째 장면에서는 대등하고도 상보적이던 것이, 여섯째 장면에서는 종속적이고 의존적인 관계로 변하고 있습니다. 두 장면에서 공히 남자가 여자에게 이름을 부쳐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여자와 하와)(2:23 및 3:20) 남자의 우월적인 권위는 타락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여자의 역할이 각기 아내와(2:24) 어미로(3:20) 주어지고 있고, 옷에 관해서도 “벗었으나 부끄럽지 않던” 것이(2:25) 타락 이후의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옷을 해 입히고 있는 것으로 바뀌고 있습니다(3:21).
세 번째와 다섯 번째 장면은 ‘사탄’과 여자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대화의 내용은 두 나무에 대한 세 번의 언급, 열매를 먹는 것에 관한 것과 그 결과에 관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장면은 전체 이야기의 반 절정을 그리고 있으며, “타락”이 그 주제입니다.
<에덴 이야기>를 흥미롭게 하는 또 다른 요소는 문학적 수사(修辭)로서, 언어의 유희(遊戱), 반복되는 숫자의 모티브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예컨대, “아담과 아다마”, “에덴과 케뎀”, “이시와 이솨”, “하야와 하와”, “야훼와 엘로힘”(두 이름), “생명나무와 선악의 나무”(두 나무), “이솨와 하와”(두 이름), “두 번의 추방” 이야기(3:23,24절) 등이 모두 이에 속합니다. 이들 수사적 기법이 주는 효과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신학과 신앙
제목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4절)
이 구절은 제 1막(2:4하-4:26)의 제목으로 기능하면서, 동시에 <서막>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형식에 있어 일종의 교차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A하늘과
B 땅
C 창조될 때에
C' 만드시던 날에
B 땅과
A하늘
아마도 이런 형식적 요소를 고려했음인지, 화자는 4절 후반에서 “하늘과 땅” 대신에 다소 생소한 “땅과 하늘”이라는 표현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통상 보게 되는 순서는 “하늘과 땅”이지 “땅과 하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한 곳에서도 이처럼 두 단어를 예외적으로 역전(逆轉)시켜 사용하고 있는데, 이 경우에도 바로 이 구절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지어다 그의 이름이 홀로 높으시며 그의 영광이 땅과 하늘 위에 뛰어나심이로다”(시 148:13). 그리고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라”(4절상)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와도 일정 부분 교차대구를 이루고 있기도 합니다. 이들 두 구절에서 한 쌍의 동사, “창조하다”(바라)와 “만들다”(아사)는 하나님의 활동을 묘사하는 핵심적인 단어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제 1막의 계보(톨레돗)가 <창세기>의 다른 계보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유독 이곳에서만 사람 이름이나 가계(家系)가 아닌 “하늘과 땅”을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 이름이 등장하는 다른 ‘톨레돗’의 경우 실제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 사람의 아들입니다. 예컨대, 여섯 번째 ‘데라’의 계보(11:27-25:11)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데라’의 계보는 ‘데라’의 죽음에 관한 언급으로 시작하여 ‘아브라함’의 죽음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계보가 시작되면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호칭, “야훼 하나님”(!yhiOla hwhy)이 등장하고 있는 데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경>에서 이 호칭이 <창세기> 2-3장외에 등장하고 있는 곳은 <출애굽기>(9:30)가 유일합니다. 화자는 <에덴 이야기>(2-3장)에서 뱀과 여인이 대화하는 장면을 제외하고는 일관되게 이 호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대화에서 이들은 하나님을 그분의 개인적인 이름 ‘야훼’ 대신에 단순히 ‘엘로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야훼’는 이스라엘의 구속과 관련해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창세기>의 다른 곳에서는 ‘엘로힘’ 또는 ‘야훼’로 구분하여 부르고 있으며, 이곳에서처럼 두 이름을 한꺼번에 붙여 부르고 있지는 않습니다. <에덴 이야기>처럼 아주 정교하게 다듬어진 이야기에서 왜 이처럼 두 이름을 한꺼번에 붙여 호칭하고 있는지 그 이유는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혹자는 <에덴 이야기>가 <야훼>와 <엘로힘>의 두 자료의 편집의 결과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오늘날 학계에서 크게 지지를 받고 있지는 않습니다. ‘야훼 엘로힘’의 이름에 대한 자료비평적 연구는 Wenham이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56-57쪽.
1. 창조와 언약(5-17절)
태초의 지구. <에덴 이야기>와 <서막>은 아주 다른 문학적 상수(常數)들을 사용하여 신학적 주제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만, 그 형식에 있어 마치 시적 유사병행을 이루듯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에덴 이야기>의 제목에 해당하는 “하늘과 땅의 계보가 이러 하니라”(2:4)는 <서막>의 첫 선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와 일대 일의 대응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두 경우 모두 “태초의 지구”에 대한 묘사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에덴 이야기>가 그려주는 창조 직후의 지구의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5-6절)
이런 상태는 창조 이후 인간이 경작을 시작하기 전에 태초의 지구의 황량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기능적으로 이 두 구절은 <서막>의 두 번째 구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1:2)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일견 무관해 보이는 두 개의 진술은 실은 동일한 모티브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즉 <서막>에서 “혼돈”과 “어두움”과 “공허”라는 숫자 “3”의 모티브를 사용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에덴 이야기>에서도 “생명”과 “인간”과 “음식”의 부재(不在)를 보여줌으로써 동일한 모티브를 사용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네 개의 병행하는 상황 묘사를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함(5절)
(2) 들에는 초목이 없음(5절)
(3)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함(6절)
(4)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심(6절)
하지만 이들 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드러내고자 함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합니다. 혹자는 <에덴 이야기>가 <야훼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이들 표현은 태초의 지구의 모습에 대한 “야훼적 표현”으로서 <사제 전승>에 속하는 <서막>의 “사제적 표현”에 대응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서막>이 태초의 황량한 지구를 “물”에 뒤덮여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에덴 이야기>는 이와는 정 반대로 건조한 “사막”의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다른 일단의 학자들은, <에덴 이야기>는 <서막>의 내용을 전제로 기술하고 있으니만치, 이 두 구절은 인간이 땅에서 경작을 시작하기 전의 땅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다른 견해는 타락 이전과 이후의 지구의 모습을 대조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즉 이 견해에 따르면, 화자의 의도인 즉은 인간의 탄생 이전의 지구의 모습(5-6절)과 창조와 타락 이후의 상황(3:17-24)을 대조시키려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들 세 가지 견해 모두 나름대로 일단의 진실은 포함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화자는 5-6절 사이에서 땅과 관련하여 세 단어를, 식물과 관련해서는 두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1) “땅”($r,a, 에레츠); “들” 또는 “밭”(hd,c, 사데); “지면”(hm;d;a, 아다마): (2) “초목”(bc,[, 에세브); “채소”(j'yc, 시아흐). 땅과 관련된 세 단어는 일부 문맥에서 상호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어 각각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는 것이 어렵겠습니다만, 그래도 <창세기>의 처음 두 장에서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에레츠’는 “하늘”과 대조되는 단어로서(2:4), “땅”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단어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반해 ‘사데’는 ‘에레츠’의 일부분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에레츠’로부터 물이 흘러나와 ‘아다마’를 적셔 식물을 경작할 수 있도록 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다마’는 경작지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흙”(rp;[, 아파르) 즉 “먼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책임은 ‘아다마’를 경작하고 가꾸는 것이었습니다(2:5; 3:18). 인간이 ‘아다마’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아다마’의 ‘아파르’, 즉 “땅의 흙”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일 것입니다(7절). 한편 ‘사데’는 ‘아다마’와는 대조되는 개념을 드러내고 있는 듯합니다. 즉 ‘아다마’가 채소를 경작하는 거주 가능한 땅을 뜻한다면, ‘사데’는 짐승이나 나무가 거주하는 들이나 광야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2:19, 20; 3:1, 14; 2:5; 3:18). 그리고 ‘사데’는 목축지를 뜻하기도 합니다(4:8). 인간의 삶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광야나 사막을 경작 가능한 땅으로 바꾸거나, 반대로 경작지가 황무지로 변하는 것을 막으려는 투쟁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초목”(bc,[, 에세브)과 “채소”(j'yc, 시아흐)의 차이는 식용(食用) 여부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초목은 흔치 않는 단어입니다만, 사막 등지의 메마른 곳에서 자라는 키가 작은 관목 식물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참고. 21:15; 욥 30:4, 7). 한편 채소는 식용 가능한 경작 식물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1:29, 30; 3:18).
결국 <창세기> 2:5를 통해서 두 종류의 땅이 있음을 알게 되는데, 하나는 짐승이나 나무들이 서식하고 있는 광야나 들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의 노력으로 경작과 개관이 가능한 농경지입니다. 이러한 구분은 이와 유사한 상황을 그리고 있는 근동의 다른 창조 신화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땅에 대한 이런 구분은 실은 아무 의미도 없었던 것이, 사막을 적셔줄 비가 내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땅을 경작할 어느 누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있었다면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시는 안개” 정도였습니다(6절). 이런 점에서 5절과 6절은 상호 대조적인 상황을 그려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구문론적으로도 6절이 “그러나”로 시작하고 있어 5절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6절을 통해서 <에덴 이야기>가 문학적으로 근동의 다른 창조 신화와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안개”(da, 에드)는 “맑은 물”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는데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곳은 본문이 유일하며, <욥기>에서는 “구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욥 36:27). 한편 <칠십인 역>에서는 “샘물”로 번역하고 있는데, 어원 상 ‘수메르/아카디아’어의 ‘이드’(거대한 강을 의미함)와 상관이 있어 보입니다. 이보다는 다소 설득력이 떨어지긴 하지만, 이 단어는 또한 ‘아카디아’어 ‘에두’(홍수 또는 지하수의 분출을 뜻함)와 연관이 있다는 설명이 있는가 하면, “비구름”을 뜻하는 ‘이두’와 연결을 짓기도 합니다.
이 단어의 정확한 기원이 무엇이든, 지하수가 흘러나와 땅을 적신다는 개념은 <수메르 신화>에서 이미 친숙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처럼 많은 양의 물이 지하에서 흘러나와 땅을 적시고 있었다면(6절), 왜 땅은 메마르고 초목과 나무가 자라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일까(5절)? 다시 말하자면 5절과 6절은 왜 전혀 상반되는 상황을 그려주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궁켈’이나 ‘베스터만’ 등은 5절과 6절이 서로 다른 전승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이와 같은 주장은 화자의 문학적 솜씨를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즉 <창세기>를 쓸 정도의 화자라면 5절과 같이 문맥과 상충되는 문장을 고의로 삽입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진술에서도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셨다”(10절상)고 하면서 6절의 묘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5절에서 그리고 있는 상황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부재(不在)에 대한 강력한 암시로 이해함이 마땅할 것입니다(Castellano; Gispen). 즉 땅을 개관할 인간이 없는 상황에서 채소가 나지 않음은 지극히 당연하며, 이처럼 풍성한 물의 공급도 무용지물이 된다는 암시일 것입니다. 실제 근동지역에서 연례적으로 발생하는 강의 범람은 인간의 손길이 아니라면 매년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놓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땅을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림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긴장 가운데 사람 즉 ‘아담’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게 하는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아담의 탄생. 이어지는 구절이 “그래서”, 또는 “그 때”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그 때)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7절)
인간과 땅의 관계는 5절과 6절에서 이미 강조한 바 있습니다만, 이는 7절에 대한 전주곡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즉 이곳에서 화자는 기막힌 언어의 유희(遊戱)를 통해서 이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상술(詳述)하고 있습니다. 즉 ‘아담’(!d;a)과 ‘아다마’(hm;d;a)의 연결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담’이 ‘아다마’로부터 탄생했다는 것이지요. ‘아다마’가 문법적으로 ‘아담’의 여성 형임에는 분명하지만, 두 단어 사이에 어떤 어원론적인 연계성이 있는지는 분명치는 않습니다. 혹자는 두 단어가 모두 “붉다”(םאָ, 아돔)는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앞서 언급한 바처럼 두 단어 사이에 음성학적 유사성이 있다는 점이며, 이를 통해서 인간의 역할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땅의 흙으로부터 창조되었으며, 그의 소명은 그 땅을 경작하는 것이며(2:5, 15), 그리고 죽음과 함께 땅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3:19). 땅은 그의 요람(搖籃)이자 집이며 무덤이 될 것입니다.
인간의 창조와 관련해서 화자는 이곳에서 “창조하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동사 ‘바라’ 대신에 “(빚어) 만들다”는 의미의 동사 ‘야짜르’(rx'y)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드러내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토기공으로서(렘 18:2), 그가 진흙을 빚어 토기를 만드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물론 “땅의 먼지”는 토기를 만드는 정상적인 재료는 아닐 것입니다만. 진흙으로부터 토기를 만드는 과정은 지루하고 반복적인 작업임에는 분명하지만, 정교하여 예술적인 감각을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전달하려는 이미지도 후자와 관련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참고. 사 44:9-10). 물론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관련해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짐승을 이와 같이 빚어 만드셨고(2:19), ‘리워야단’을 지으셨으며(시 104:26), 마른 땅과(시 95:5), 산과(암 4:13), 그리고 미래의 역사마저도 만드십니다(사 22:11; 렘 33:2).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적 손길은 인간이 땅의 먼지를 통해서이든, 또는 여인의 자궁을 통해서든(사 44:2, 24), 또는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성격을 개조하는 과정을 통해서든(사 43:21; 44:21),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인간이 “(땅의) 먼지”(rp;[, 아파르)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성경> 여러 곳에서 암시되고 있습니다(욥 10:9; 사 29:16; 시 90:3; 104:29 등). 일련의 근동 창조 신화에서도 이와 같은 사상을 엿볼 수 있는데, <길가메쉬> 서사시는 여신 ‘아루루’가 ‘엔키두’를 진흙에서 만들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1:34). ‘이집트’ 비문에도 ‘크눔’ 신이 진흙을 빚어 인간을 만들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프로메데우스’ 신이 첫 인간을 흙과 물로 빚어 만들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가 그리고 있는 인간 창조의 모습도 이와 같은 근동 문학적 모티브를 빌어 와 <성경> 특유의 세계관으로 선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어놓은 단순한 물질 그 이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은”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그 속에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선물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과 생명 현상을 단순한 화합물과 전기화학적 현상으로 보려는 환원주의적 세계관은 비단 <성경> 뿐만 아니라 여타 근동 신화에서도 배격하고 있는 사상입니다. 예컨대, ‘바벨로니아’ 민족은 인간을 진흙과 신의 혈기를 받은 존재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이집트’인들도 인간은 신들처럼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프로메테우스’ 역시 진흙으로 인간을 빚은 후에 신적 영기를 불어넣어주었습니다.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생기”(yj hm;v;n, 네샤마 하임)는 <에스겔>에서 말하는 “영”(j"Wr, 루아흐)(겔 37:9)과는 다릅니다(두 경우 모두 “불어넣다”(jp'n, 나파흐)는 동일한 동사를 사용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물론 “영”(靈) 즉 ‘루아흐’와 “기”(氣)/“호흡” 즉 ‘네샤마’는 거의 동의어처럼 나란히 등장하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만(예. 욥 27:3; 사 42:5), 후자(後者)가 전자(前者)에 비해 좁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기”즉 “생명의 호흡”은 식물에는 없는 동물만이 지니고 있는 특별한 능력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화자는 다른 곳에서 대홍수가 “코에 생기를 지는 모든 생명체”들을 다 전멸시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7:22). “생기”가 이처럼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의 독특한 생명 현상으로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때로는 더욱 제한적으로 인간의 호흡에 국한해서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수 11:11; 사 2:22). 반대로 아주 포괄적으로 “하나님의 호흡”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삼하 22:16). 따라서 하나님이 진흙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호흡을 하게 함으로써 살아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생령”(היה vp,n, 네페쉬 하야) 즉 “살아있는 존재”가 된 것은 는 하나님께서 호흡을 불어넣으신 결과입니다. 화자는 이 동일한 표현을 “땅의 짐승”이나 “공중의 새”을 거론할 때에도 역시 사용하고 있습니다(2:19; 9:9; 1:20). ‘네페쉬’(명여)는 “숨쉬다” 또는 “원기를 회복하다”를 뜻하는 동사 ‘나파쉬’(vp'n:)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이며, “숨쉬는 존재”, “영혼”, “생명”, “자아”, “시체”, “목구멍”, “식욕” 등 아주 다양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 단어는 <구약> 전체적으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 중의 하나로서 754회 등장하고 있습니다.
에덴의 언약. 인간의 독특한 지위와 역할에 대해서는 <서막>에서 이미 선언한 바 있습니다. 즉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리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1:26-28). 이를 “창조의 언약”으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에덴 이야기>에서도 이에 병행하는 언급을 찾을 수 있는바, 우리는 이를 “에덴의 언약”으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볼 때 “에덴의 언약”은 “창조의 언약”과는 유사병행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보다 구체적이며, 다소 제한적이고, 소극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컨대, “창조의 언약”이 처음부터 끝까지 긍정적인 명령문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에 반해, “에덴의 언약”은 부정적인 금기 조항도 동시에 포함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에덴의 언약”은 인간의 거처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이어지는 내용 전체에 대한 요약 선언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8절)
이 구절은 등의 접속사 “그리고”와 함께 시작하고 있는데, 동산의 창조는 ‘아담’의 창조 이후에 이루어진 일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산을 ‘아담’을 위하여 동산을 창설하셨다는 이 구절은, 그에게 먹을 것을 마련해 주셨다는 <서막>의 선언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1:29).
여기서 말하는 “동산”(@G, 간)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정원 내지 공원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인데(참고. 3:23), 초기 번역본에서는 이 단어를 “낙원”(paradise)으로 번역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 동산을 다른 곳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표현 “에덴동산”(예. 2:15; 3:23, 24) 또는 단순히 ‘에덴’(4:16; 사 51:3) 등으로 부르지 않고, “에덴에 (있는)” 동산으로 호칭하고 있는 점입니다. 이로 미루어 ‘에덴’은 동산이 있는 지역 또는 장소임이 분명해 보이며, 화자가 전해주는 위치는 “동방”, 즉 “이스라엘의 동쪽”으로서, ‘메소포타미아’ 또는 ‘아라비아’에 있는 어디 쯤 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에덴’을 그 어원에 근거해서 “평원”으로 이해하려는 견해가 있기는 합니다만 ‘에덴’(@d<[)은 “평원”을 뜻하는 ‘수메르’어 ‘에덴’(eden)에 근거하는 ‘아카드’어 ‘에디누’(edinu)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 오히려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의 “즐거움” 또는 “화려함” 등과 연관시키는 것이 더 간단해 보입니다. ‘에덴’(@d<[)은 <구약>의 다른 곳에서 동음이의어로 수차례 등장하고 있습니다: 삼하 1:24; 렘 51:3; 시 36:9.
아무튼 <성경>에서 ‘에덴’이 등장하는 곳마다 동방 사막에 있는 비옥한 한 땅, 즉 물이 많고 초목이 잘 자라는 오아시스를 그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사 51:3; 겔 31:9, 16, 18; 36:35). 이처럼 기름진 땅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는데, “동방의 에덴”이 의미하는 바도 이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동방은 해가 뜨는 곳으로서, 해 즉 “빛”은 하나님의 계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사 2:2-4; 시 36:10). 그런 점에서 ‘에덴’을 하나님의 “성막”을 예표(豫表)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화자는 이 장소가 상상 속의 이상향이 아니라, 분명히 실재(實在)하던 곳이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에덴’ 주변에 흐르는 네 개의 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음 여섯 구절은 8절의 요약에 대한 부차적인 설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9-14절)
9절에 따르면, 동산의 나무 역시 ‘아담’이나 다른 짐승들처럼(7, 19절), “땅의 흙”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동산에 나무들이 있으며, 이들이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았다”는 언급은 하나님의 베푸심이 풍성했다는 의미입니다.
화자는 동산의 나무를 언급하면서 두 종류의 나무, 즉 “동산 가운에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본문에 따르면 “생명나무”만이 동산의 중앙에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겠습니다만, 다른 곳에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역시 동산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3:3). 혹자는 이러한 차이를 근거로, <에덴 이야기>가 이전 자료, 즉 생명나무에 대한 정보만 제공해 주고 있는 자료에 대한 편집적 보충 작업의 결과일 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성경>에서 나무를 생명의 상징으로 묘사하는 것은 그렇게 낯선 일은 아닙니다. <길가메쉬>에서도 주인공이 깊은 샘에서 청년의 젊음을 유지시켜주는 한 나무를 발견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도 이 나무를 먹는 자마다 영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3:22). <잠언>에서는 “지혜”(3:18), “의(義)의 열매”(11:30), “소원 성취”(13:12), “점잖은 말” 등을 생명의 나무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들은 인생을 풍성하게 만드는 덕목(德目)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무는 여름날에 푸름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에서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상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예. 시 1:3; 렘 17:8). ‘아브라함’은 그가 심은 ‘에셀’ 나무 곁에서 기도하였으며(21:33), <신명기>는 반대로 “푸른 나무”를 ‘가나안’의 우상 신전의 한 표상으로 비난하고 있기도 합니다(신 12:2). 더 나아가 성막의 황금 촛대는 생명나무를 본 따 만든 것으로서, 촛대를 이루고 있는 열두 개의 가지와 그로부터 비치는 불빛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지켜주는 하나님의 생명의 임재를 상징해주고 있습니다.
한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생명나무”와는 달리 오직 이곳에서만 등장하고 있으며, 그 의미에 대해서 확인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지극히 중요하다 할 것인데, <에덴 이야기> 전체적으로 이 나무가 핵심 단어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이 나무는 이야기의 서두에서 두 번(2:9, 17), 하나님과 ‘아담’의 대화 장면에서 한 번(3:5), 그리고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 번(3:22)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 나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생명나무가 영생을 가져다준다고 하므로, 이 나무는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갖게 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둘째,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서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대략 다섯 가지 정도의 견해가 알려져 있습니다:
(1)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를 뜻하는 것이다. 즉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였다면 선(善)이 무엇인지 알았을 것이고, 반대로 불순종의 결과로 악(惡)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나무의 기능은 일종의 기회의 문과 같은 것으로서, 그 자체로서 선과 악과 관련한 어떤 속성들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자신의 문의 반대편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다면, 그 이름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문을 열어야만 가능한 경우와 같다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나름대로 수긍할 만 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부적절하다 하겠습니다. “생명나무”가 (하나님만이 소유하고 있는) 영생을 제공해주듯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역시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해있는 거룩한 지식을 제공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참고. 3:5, 22). 더 나아가 이와 같은 견해는 <신명기>나 <사무엘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 선과 악에 대한 선언과도 일치하지 않는 면이 있습니다. 즉 인간은 선악을 분별할 능력이 없다는 선언이 그것입니다: “또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시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도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산업이 되게 하리라”(신 1:39); “내 나이가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삼하 19:35상).
(2)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은 옳고 그름에 대한 인식 즉 윤리의식을 뜻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견해는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화자의 서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행위가 항상 윤리적 판단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윤리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그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획득되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3)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은 성(性)에 관한 지식이다. 이 견해 역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통 털어 볼 때, 하나님께서 사람이 성적 지식을 갖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한 적이 없으며(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적절하지 못함을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1:28; 2:18-25), 그 지식을 유보시켰다는 어떤 암시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4)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은 전지(全知; omniscience)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하늘과 땅”이 전체 우주를 의미하는 다른 표현이듯이, “선과 악”이 의미하고 있는 바도, 전체를 이루고 있는 부분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견해 역시 적절치 않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하나님이 전지하신 것이 사실이며, ‘하와’가 그와 같은 지식을 갖기를 희망했지만(3:6), ‘아담’과 ‘화와’는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원하던 지식을 얻게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갖게 된 지식은 역설적으로 자신들이 벗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한 수치심뿐이었습니다(3:7-8).
(5)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은 “지혜” 내지는 “통찰력”을 뜻하는 것이다. 일견 이와 같은 견해는 두 번째 견해만큼이나 타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며, 어린 아이에게는 지혜가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지혜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잠언서>만 하더라도 지혜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지고(至高)의 가치로 인식하고 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이 결코 지녀서는 안 될 지혜와 지식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예: 욥 15:7-9, 40; 잠 30:1-4). 사실 <욥기>도 “하나님의 신비”를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독자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이나, 우주나, 또는 인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영역입니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계시를 완전히 배제한 채 순수한 이성적 접근만으로 이들에 관한 이해를 하려 할 때,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인간의 독립성이나 자율성에 관한 확신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잠언서>는 다음과 같이 교훈하고 있습니다: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잠 1:7).
적어도 <야훼 전승>에서 전제하고 있는 “지혜로운 인간”에 대한 이해는 자존적인 존재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와 같은 전제를 바탕으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란 결국 인간에게 금기시 된 지위나 지식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소유해서는 오히려 해로울 수 있는 지식이 있다는 생각은 <에스겔서> 28장을 통해서 그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책은 ‘두로’ 왕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그는 스스로를 높여 하나님으로 자처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가졌다고 주장하다가 “하나님의 산”(‘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겔 28:6, 15-17). <시편>에서도 “야훼의 계명”은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눈을 밝게 하시도다”(시 19:8-10)라고 노래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계명”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비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은유적이긴 하지만 <시편> 역시 <에덴동산 이야기>를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에덴 언약”은 “창조언약”(1:28)과 함께 동일한 하나님의 계시이기는 합니다만, “창조언약”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라면 “에덴언약”은 소극적이고 제한적인 면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언약”이 무제한적인(?) 번영과 번성을 약속하고 있다면, “에덴언약”은 제한적이며 금기된 지식에 대한 접근은 죽음을 초래할 것이라는 약속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훗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 두 언약보다 훨씬 더 많은 계명들이 추가되었습니다만, 이를 어긴 자는 하나님의 저주와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계명”은 본질 상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사람이 이를 고치거나 추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신 4:2). 따라서 소위 인간의 “도덕적 자율성”은 처음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도 인간의 지혜를 하나님의 법보다 우선순위에 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결코 어겨서는 안 된다는 경고는 “성막” 안에 있는 “언약궤”가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언약궤”는 지성소에 있으며, 언약의 두 돌 판은 그 궤 안에 보관되어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며, 만일 누구든지 언약궤를 만지는 것은 물론 보기만 해도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출 40:20; 민 4:15, 2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결국 “에덴언약”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보다 구체적인 언약의 내용을 알리는 일종의 표제어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어지는 서술도 그와 관련된 것으로서, 화자는 이를 15-17절에서 이어가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15절)
사실 이 구절은 8절에 바로 연결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여기서 화자는 동산에서의 ‘아담’이 해야 할 일을 추가로 더하고 있습니다. 그의 일이란 “경작하고 지키는” 일입니다. “경작하다”(db'[, 아바드)는 일반적으로 “일하다” 또는 “섬기다”는 의미를 지닌 단어로서, 주로 땅을 경작하는 것을 말합니다(참고. 2:5; 3:23; 4:2, 12 등). 그리고 종교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하는데(신 4:19), 특히 ‘레위’ 족들이 “성막”에서 섬기는 행위와 관련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민 3:7-8; 4:23-24, 26 등).
마찬가지로, “지키다”(rm'v, 샤마르)는 단순히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 그대로 입니다만(4:9; 30:31), <오경> 등에서는 주로 종교적인 차원에서의 명령이나 의무를 수행한다는 의미로 더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17:9; 레 18:5). 특히 ‘레위’ 인들이 성막에서 외부인들의 출입을 경계하고 막는 일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민 1:53; 3:7-8). 그런 점에서 이들 두 단어가 특히 <사제문서>에서 유사 동의어로써 혼용(混用)되고 있다는 사실은 다소 놀라운 일입니다(참고. 민 3:7-8; 8:26; 18:5-6). 이와 관련해서 ‘에덴’ 동산이 성막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인간은 타락 이전에도 이미 노동을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천국 역시 하릴 없이 놀고먹는 곳이 아님도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에뉴마 엘리쉬>나 <에트라시스> 등과 같은 근동 신화에서도 신들이 자신들을 대신해서 노동을 하도록 하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창세기>의 이야기는 이들 신화와는 다른 것이, 창조 이야기 어디에도 하나님이 자신의 일을 경감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암시는 없습니다. 오히려 노동을 인간 삶의 한 본질적인 요소로 의도했을 뿐입니다.
이어지는 두 절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제공하는 풍성한 언약의 약속을 읽을 수 있으며, 이와 동시에 <타락 이야기>(3장)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16-17절)
화자는 9절에서 동산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있었다고 설명한 바 있었습니다만, 이곳에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이들을 먹어도 좋다는 허가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동산에는 “각종” 나무들이 있었다는 화자의 서술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동산에 있는 각종 나무들”은 동산 중앙에 있는 특별한 두 나무, 즉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특히 “선악을 알게 하는 단 한 그루의 나무”와는 더욱 그러합니다. 의미인 즉은, 두 사람은 자신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동산의 각종 나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생명나무”의 열매들을 먹어 풍성한 삶을 누려갈 수도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금기시킨 것은 그 많은 나무들 가운데 오직 한 그루의 나무뿐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금지조항은 간결하면서도 단호합니다: “결코 먹지 말라”; “반드시 죽으리라.” 참고로 “십계명”의 모든 부정 명령문이 이처럼 단호하고 간결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참고. 출 20:5, 7, 11). 이곳에서 명령문은 문장의 형식이나 문법에 있어 “십계명”이나 <구약>의 여타 계명들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예. 20:7; 삼상 14:39, 44; 22:16; 왕상 2:37, 42; 왕하 1:4, 6; 겔 33:8, 14). 이들 모든 명령들은 하나님의 금기 명령이 명령과 불순종에 따른 결과 즉 위협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특별한 나무를 금기시킨 것은, 혹자가 제안하는 바처럼, 그 나무가 무슨 독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의 명령은 그만큼 심각하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함입니다. 죽음의 선고를 직역하자면, “먹는 그날에 반드시 죽으리라”입니다. 물론 “뱀”은 그들이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으며(3:4), 실제로도 두 사람은 타락 이후에도 수백 년을 더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모순에 대해서 뒤에 다시 상세하게 살펴보게 되겠지만, 17절은 하나님의 분명하고도 즉각적인 행동을 강조하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경고나 명령의 어디에도 애매모호함이나, 주저함이나, 불분명한 곳이 없으며, 오해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에덴의 위치. 우리는 앞에서 ‘에덴’의 위치에 관한 언급은 서술의 흐름을 일시 중단시킨 바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참고 10-14절). 이처럼 서술의 흐름이 끊어지고 있는 것을 두고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편집적 삽입”의 결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다만 편집의 시기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기는 합니다. 초기의 학자들은 이 본문이 <야훼 전승>에 비해서 상당히 후대의 전승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데 반해, 보다 최근의 견해는 그 반대로 <야훼 전승> 만큼이나 오래된 자료로서 “야훼 기자”가 자신이 가진 자료를 본문 속에 포함시켰을 것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그 증거로, ‘티그리스’ 강에 대한 언급을 들 수 있습니다. 14절에 따르면 ‘티그리스’ 강이 ‘아수르’ 동쪽으로 흐르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지명에 대한 표현은 ‘아수르’가 ‘시리아’의 수도였던 시절부터 사용해 오던 아주 오래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덴’의 위치에 관한 본문이 아주 오래된 전승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또 다른 증거는 구문론적(構文論的)으로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즉 ‘에덴’의 위치를 알려주는 10절은 문법적으로 9절에 대한 일종의 종속절의 기능을 하고 있어 두 절이 아무런 무리 없이 연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다섯 구절(10-14절)은 상징적으로도 2장의 나머지 부분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웨스터만’(Westermann)은 네 강에 대한 언급이 마치 10장에서 보는 것과 같은 족보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제시하기도 합니다. 즉 화자 당대에 익히 알려져 있는 현실 상황 즉 국가나 강들의 궁극적인 기원 즉 원역사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10절의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는 문법적으로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강이 “동산을 적시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10절상). 이 표현에 따르면 강의 발원지는 ‘에덴’으로서 이 강이 동산 안으로 흘러들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에덴’과 “강”이 같은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강은 동산 내에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강과는 별도로 원시 대양(大洋)도 존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즉 6절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그 대양이 온 지면을 적시고 있었으며, 강은 지하수가 흘러나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동산을 떠난 강은 이후 네 갈래로 나누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10절하). 이 구절이 제시하고 있는 이미지는 동산에서 흘러나온 강이 온 지면을 덮어 감싸고 있는 형국으로서 거대하고 풍요로움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시편>은 강을 하나님의 성소와 연관짓고 있습니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시 46:4). 또한 <에스겔>은 종말의 날 ‘예루살렘’으로부터 거대한 강이 흘러나와 사해(死海)를 적시게 될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겔 47:1-12). 아무튼 이 경우 모두 강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강 ‘비손’(11절)과 세 번째 강 ‘기혼’(13절)을 확인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학자들은 두 단어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용어일 것으로 보는데, ‘비손’은 “도약하는 자”(跳躍)로서 “도약하다”(@/tyP, 피숀)에서, 그리고 ‘기혼’은 “터져나오다”를 뜻하는 ‘기아흐’(h'yGi)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두 강의 의미에 대한 일치하는 견해는 아직 없습니다.
‘비손’이 등장하는 곳은 <구약> 전체적으로 이곳이 유일합니다. 이 강의 위치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혹자는 인도의 ‘인두스’ 강으로, 또는 ‘갠지스’ 강으로, 또는 ‘아라비아’의 여러 강 중의 하나로, 또는 ‘메소포타미아’ 강으로 제안하기도 합니다.
이 강이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표현은 다른 곳에서도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예. 10:7, 29; 25:18; 삼상 15:7; 대상 1:9, 23). 이로 미루어 ‘하윌라’는 ‘아라비아’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고대 ‘아라비아’는 금의 산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비손’은 ‘아라비아’의 한 강이거나 또는 ‘하윌라’ 전 지역을 감돌아 흐르는 ‘페르샤’ 만과 홍해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윌라’ 지역에는 금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12절은 적어도 두 가지를 더 추가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가 ‘베델리엄’입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베도라흐’(jl'doB)를 ‘헬라’어로 음역(音譯)한 것으로서, “향기 나는 진주”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입니다. <민수기>는 ‘만나’를 진주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만나는 갓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민 11:7). 나머지 한 가지는 ‘호마노’(!h'v, 쇼함)입니다. 이는 보석의 일종으로 보이며, 여러 번역본에서 갖가지 다른 이름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정확한 의미는 분명치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들 돌이 성막 장식용으로 널리 사용되기도 했으며(출 25:7; 대상 29:2), 제사장의 외투에도 달기도 했습니다(출 28:9, 20). 즉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을 이 돌 위에 적고, 이를 다시 금으로 둘러싸서, ‘에봇’의 어깨 위에 부착을 했습니다(출 28:9-14).
12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순금”도 성막에서 가장 거룩하다고 여기던 기물(器物)들, 즉 언약궤나, 향단이나, 촛대 등을 덮는 장식용으로 널리 이용된 바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에덴’이나 훗날 “성막”은 모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강의 이름은 ‘기혼’입니다(13절). ‘기혼’은 예루살렘의 중요한 샘 즉 처녀 샘을 일컫는 이름입니다(참고. 왕상 1:33, 38). 하지만 이 강이 “구스 온 땅을 둘렀고”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확인하는 바로는 ‘기혼’은 ‘이집트’의 ‘나일’강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구스’는 ‘에티오피아’에 있는 지역입니다(예. 사 20:3, 5; 렘 46:9). 그러나 <창세기> 화자는 다른 곳에서 ‘구스’를 한 족속 즉 옛 ‘바벨론’ 제국의 후손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8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9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10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11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12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10:8-12)
이 족속은 오늘날 ‘이란’ 서쪽의 산악 지역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기혼’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는 한 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모든 강들이 모여드는 한 지점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인데, ‘아르메니아’ 산악 지역이거나 또는 ‘페르샤’ 만 상류 지점이었을 것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강에 비해서 세 번째와 네 번째 강 ‘티그리스’와 ‘유브라데스’(14절)는 확인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다만 ‘티그리스’가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다”(14절상)는 언급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앗수르’는 고대 ‘앗수르’ 제국의 수도를 의미하는 것이지, 제국 전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앗수르’ 제국의 영토는 ‘티그리스’ 강의 양쪽에 걸쳐 있었던 반면, 강 자체는 동쪽을 향해 흐르고 있었거나 또는 도시 앞쪽으로 흐르고 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전 1400년 이후 ‘앗수르’는 더 이상 제국의 수도가 아니었으며,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이 본문이 <창세기> 내에서도 아주 오래된 전승이 분명하다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는 그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성지(聖地)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14절에 관해서 어떤 결론도 유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지금까지 ‘에덴’의 위치에 관해서 길게 논의했습니다만, 결론은 여전히 그렇게 단정적이지 못합니다. 다만 동산에 관한 일반적인 배경 설명(5-8절)으로 미루어볼 때, ‘에덴’의 위치로 ‘메소포타미아’를 선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에덴’에서 한 큰 강이 발원(發源)하여 동산을 나와 네 개의 강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이들 중에 ‘티그리스’와 ‘유브라데스’가 포함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설명만을 근거로 해서 볼 때, ‘에덴’은 ‘티그리스’와 ‘유브라데스’의 발원지 근처인 ‘아르메니아’ 지역 어딘가에 위치해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며, 이 같은 견해가 그동안의 지배적인 정설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표현도 없지 않는 것이, 예컨대, “하윌라를 감도는 비손”이라든지(11절), “구스 온 땅을 두르는 기혼”(13절) 등이 그렇습니다. ‘하윌라’가 ‘아라비아’인지, 그리고 ‘구스’가 ‘에티오피아’를 지칭하는지 아니면 ‘페르샤’ 즉 서부 ‘이란’을 지칭하는지 분명치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간단한 방안은 고대 근동지방에 관한 분명치 않은 지리적 지식을 가지고 본문을 해석하려고 시도하지 말고 그냥 덮어두면 될 것입니다.
2. 돕는 배필(2:18-25)
하나님의 사색. “에덴의 언약”은 “에덴의 위치”에 대한 서술로 잠시 끊어졌습니다만, “돕는 배필”에 관한 이야기로 다시 이어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먼저 배필의 필요성에 관한 하나님의 독백 내지는 사색(思索)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18절)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색 또는 독백은 1장 이후 처음으로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동사 “이르시다”(rm'a, 아마르)는 그런 점에서 “사색”과 “독백”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1:28), 먼저 “우리가 인간을 만들자”(1:26)고 독백(또는 사색)하셨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좋지 아니하니”와 같은 표현은 창세기 1장에서 일곱 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는 전형적인 표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와 비교해 볼 때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독자들로 하여금 배우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담’은 그의 짝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18, 20절). <성경>에서 “돕다/돕는 자”(rz<[, 에제르)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의미합니다만, “군사적인 도움”으로도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사 30:5; 겔 12:14; 호 13:9). 또한 “돕는 자”는 “도움을 받는 자”에 비해서 더 우월하다거나 힘이 더 세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후자(後者) 그 자신 만으로는 어딘가 불완전하고 부적절하다는 의미입니다(예. 수 1:14; 10:4, 6; 대상 12:17, 19, 21, 22). 복합 합성어 “배필”(dg<n, 네게드)은 일종의 합성 전치사로서, 문자적으로 “맞은편에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곳에서만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배필”은 “그와 같은 자”가 아니라 “유사하지만 반대편에 서 있는 자” 즉 “보완해 주는 자”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배필”은 단순히 매일 ‘아담’의 일을 거들어주거나,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만을 포함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 일도 내포해야겠지만, 더 넓게는 상호 의존 내지는 협력의 관계까지를 포함하고 있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하느니라 (전 4:10-12).
다른 배필들. 하나님께서는 “배필”의 필요성을 인정은 하셨지만, 정작 그에 필요한 조치를 취함에 있어서는 유보적입니다. 제 1장의 창조 기사에서 보는 바처럼 하나님의 선언과 즉각적인 성취를 볼 수 없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여자의 출현을 이처럼 지체시키고 있는 것은 서막(1:26-28)의 기록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거의 동시에 창조되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색과 성취 사이에 시간적 공백이 있다는 사실이 일종의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즉 ‘아담’의 고독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짐승들의 등장은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19-20절)
이들 모든 짐승들이 ‘아담’처럼 흙으로부터 만들어졌으며(7, 19절), ‘아담’과 같은 “생령”이라는 사실이 ‘아담’의 곤경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더 나아가 “짐승”이나 “생물”을 지칭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모두 ‘하이’(yj)로서, ‘아담’의 배필 ‘하와’(hW;j)와 유사한 발음을 지니고 있습니다만, ‘아담’이 찾고 있는 배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담’이 각종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과 관련해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의 지식과 지혜가 아주 뛰어나다는 사실입니다. ‘유대’ 민족은 이름의 민족입니다. 각각의 이름은 항상 그 이름에 상당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아담’이 이들 각각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말은 개개의 속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또 하나는, “창조의 언약”(1:26-28)에서 이미 드러난 바 있지만, ‘아담’이 가지고 있는 피조세계에 대한 권위일 것입니다. <구약>의 관습에 의하면 무릇 이름을 하사하는 자는 그 이름을 받는 자보다 신분상으로 지배계급에 속합니다. 새 자녀가 태어날 때 그 집안의 가장 어른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지만 안타가운 사실은 이와 같은 ‘아담’의 지혜와 우월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짐승들은 ‘아담’의 배필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다”는 마지막 표현이 이를 웅변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담의 노래. 결국 ‘아담’의 곤경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취하신 첫 번째 조치는 안타깝지만 적절한 방안이 되지 못했습니다. 나머지 구절들은 두 번째 조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21-25절)
두 번째 조치는 성공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담’의 노래”(23절)가 이를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남자의 갈비뼈로부터 여자를 창조했다는 사실은 남자가 자신의 완벽한 행복을 위해서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게 해줍니다.
여자의 창조와 관련한 다섯 절의 이야기는 시적 분위기를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즉 이 본문은 여자의 탄생에 관한 무슨 의학적이고 과학적인 설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기사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즉 갈비뼈가 남자의 옆구리에 붙어있는 것처럼, 아내 역시 한 남자의 갈비뼈로서 그의 옆에서 동반자가 될 것이며, 동시에 그녀의 영혼은 남편의 영혼과 결합되어야 할 것입니다.
‘맷튜 헨리’(Matthew Henry)는 이와 같은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남자의 머리로부터 만들어져 그를 통치하고 지배하라는 것도 아니고, 남자의 발에서 나와 그에게 짓밟히고 지배받도록 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의 옆구리에서 나와 남자와 동등한 지위를 누리도록 의도한 것이며, 그의 팔 아래에 있는 갈비뼈에서 나와 그의 보호를 받도록 한 것이며, 남자의 심장 부근에서 나왔기에 그의 사랑을 받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참으로 기발하고 매력이 넘치는 설명임에 분명합니다만, 여자의 창조에는 이보다 훨씬 더 심오한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우선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결혼에 관한 이상(理想)이 담겨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조화와 친밀함이라는 부부관계에 대한 이상 말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관계가 깨어졌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 이어지는 <타락 이야기>(3장)에서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결국 결혼에 대한 기록도 1-2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바처럼 인류의 존재방식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회복해야 할 원형(原型)으로 그리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상이 이루어질 날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성취되는 그날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읽을 때, 유념해야 할 사실은 고대 이스라엘이 결혼에 관하여 품고 있는 이상과 목적에 대한 확신일 것입니다.
2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깊은 잠”은 종종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으로서(사 29:10; 삼상 26:12), 하나님의 현현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창 15:12; 욥 4:13). 특히 ‘하와’의 창조와 관련해서 잠을 언급하고 있는 의도는 그것이 인간의 관찰을 넘어서는 신비한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임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아담’이 눈을 뜬 채로 바라보고 있다는 자체가 이야기의 신비한 요소를 반감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빗대를 취하여 살로 채웠다”는 표현 역시 창조 이야기의 심미적 요소를 강조하려는 화자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22절)는 21절에 대한 시적 유사 반복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묘사하고 있는 동사 “만들다”(hn:B, 바나)는 “짓다” 또는 “건축하다”는 의미로서, 이곳과 <아모서>(암 9:6)에서만 등장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수술이 끝나고 남자가 눈을 뜨자 하나님께서는 여인을 그에게 데려오십니다(22절). 창조주께서 직접 남자에게 그의 배필을 소개하는 장면입니다. 남자가 그의 배필을 만나는 과정에서 그의 역할은 주도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수동적이고 피동적이 되고 있는 모습이 현대인의 관점에서 다소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연애가 아닌 중매로 결혼이 성사되던 사회에서는 이 같은 모습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자는 완벽한 그의 배필 즉 여자를 보자말자 기쁨의 환호성으로 내지릅니다. <개역 성경>에는 ‘아담’의 노래(23절)를 번역하면서, “마침내” 또는 “드디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ם: 하파암)를 빠뜨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담’의 환호성을 제대로 맛보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을 영어로 번역해보면 다소 원문의 맛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This, this time! This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is shall be called a woman, for from a man was she taken, this one!”(“마침내(찾았구나)! 그래 바로 이 자야. 이 사람이야말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로다! 그대 이름은 ‘이샤’(여자)라, ‘이시’(남자)에게서 나왔음이로다!”).
흔히 “아담의 노래”로 알려져 있는 두 구절(23-24절)은 그 형식에 있어 이박자로 된 세 개의 구두점과, 삼박자로 된 두 개의 구두점을 포함하고 있는 시로 볼 수 있습니다. 형식에 맞추어 “아담의 노래”를 다시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번에, 이 자,2
내 뼈 중의 뼈,2
내 살 중의 살,2
이 자를 여자라 하리라,3
남자에게서 이 자가 나왔음이니,3
이와 같이 짧은 다섯 행 속에 ‘히브리’ 시 특유의 시적 기교들이 녹아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유사병행(2-3행; 4-5행); (2) 모음운(母音韻)과 언어의 유희(남자와 여자-‘이쉬’(vya)와 ‘잇샤’(hV;a)); (3) 교차대구(ABC/CBA)(4-5행, “이 자... 여자//남자...이 자); (4) 수사적 반복(이번과 이 자). 수사적 반복이 노리는 효과는 모든 시선을 이 여인을 주목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아담의 노래” 중에서 처음 세 행은 전통적으로 골육지친(骨肉之親)을 뜻하는 ‘히브리’ 시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참고. 창 29:14; 삿 9:2; 삼하 5:1; 19:13-14). 특히 여자가 남자의 갈비뼈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서술은 이와 같은 골육지친에 대한 예시(例示)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첫 남자 ‘아담’의 경우라면 이와 같은 표현을 문자적으로 인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표현은 인간으로서 남자와 여자의 동등성을 규정지어줄 뿐만 아니라, 여타 짐승들과 구별시켜주고 있기도 합니다(19-20절; 참고 1:26-28).
“아담의 노래”의 마지막 두 행은 ‘히브리’ 식 이름 짓기에 대한 전형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이름과 그 이름에 대한 설명이 뒤따르고 있는 형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자(vya)와 여자(hV;a)는 음성학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단어 사이에 어떤 어원론적인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단지 ‘히브리’ 전통 문학적 표현은 사람의 탄생과 관련해서 언어의 유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참고. 4:1, 25; 17:17, 19; 29:32-30:24, 등). 인류의 첫 남자가 첫 여자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이 대목 역시 유사한 형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남자와 여자가 본질적으로 동등하며 차별이 없는 것은 사실이나, 남자가 여자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있다는 사실은 남자에 대한 여자의 종속적인 측면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이어지는 이야기의 중요한 한 전제가 될 것입니다(3:17).
“아담의 노래” 마지막 두 절(24-25절)은 ‘아담’을 위한 하나님의 두 번째 배려가 완벽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두 구절은 “아담의 노래” 속에 포함은 되어있습니다만, ‘아담’의 노래가 아니라 화자 자신의 서술로서, 첫 번째 남자와 결혼을 다른 모든 결혼의 한 전형으로 제시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다”(bz"[, 아자브)는 “버리다”는 의미도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부모를 떠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것으로 번역해야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결혼하는 남자들은 그들의 부모를 떠나기보다는 대개 부모의 집에서 함께 살거나 또는 부모의 집 근처에서 살았으며, 부모를 떠나는 쪽은 남자가 아니라 오히려 여자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당시 ‘유대’ 관습에서 볼 때, 아주 혁명적이고 충격적입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가난한 자나 ‘레위’ 족이나, 언약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신 12:19; 14:27; 29:24). 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결코 버리거나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신 31:8; 수 1:5).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이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떠나다”는 동사는 어떤 절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호 6:6)에서 보듯, 하나님께서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제사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있음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부모와 처자를 버리라”는 예수님의 명령도(마 16:24-25) 그들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랑보다 앞설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지, 문자적인 의미에서 혈연의 가족을 미워하라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결혼을 통해서 남자의 우선순위는 변화를 맞이합니다. 결혼 전에는 부모에 대한 의무가 최우선이었지만, 결혼 후에는 그의 아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현대사회에서야 부모에 대한 효도가 종종 무시되기도 하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책무 다음으로 중요한 책무의 대상은 부모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24절의 선언은 매우 충격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자와) 연합하여”(qb'D, 다바크)(24절)는 “달라붙다”, “굳게 결합하다(밀착하다)는 뜻으로서, 결혼의 중요한 요소가 “열정”과 “영속성”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야곱 이야기>에서도 ‘세겜’이 ‘디나’를 사랑하는 것을 두고 같은 표현, 즉 “그의 영혼이 디나에게 합하여”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창 34:3). 또한 이스라엘이 그들의 기업에 연합할 것이라는 서술도, 그 기업이 영원히 그들의 것이 될 것이라는 약속의 표현인 것입니다(민 36:7, 9). <신명기>도 반복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의 하나님과 연합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신 10:20; 11:22; 13:5). 결국 이곳에서 결혼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는 두 단어 “떠나다”와 “연합하다”는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과 관련해서 수시로 등장하는 단어라는 점에서, 결혼 역시 이와 같은 언약의 수준에서 인식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한 몸을 이루다”는 단순히 육체적 결합이나, 자손의 출산, 영적이고 정서적인 연합 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 의미하는 바가 혈연관계를 의미했던 바처럼,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통해서 골육지친의 관계 속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두 사람은 결혼을 통해서 형제요 자매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통해서 맺어지는 이와 같은 혈연관계에 대한 적용 사례들이 <레위기>나 <신명기> 등에 드러나 있습니다(참고. 레 18, 20; 신 24:1-4). 예컨대, 여자는 결혼을 통해서 남편의 형제들에 대해서 자매가 되며, 시부모들에 대해서는 딸이 되므로, 남편의 죽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들 시집 식구 중 어느 누구와도 결혼을 할 수 없으며, 남편 역시 그의 아내와 이혼을 할 수 없습니다(참고. 자매와 비 혈연관계로 돌아서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니라”(25절)는 두 번째 장면을 끝맺는 기능을 하고 있으며, 여섯 번째 장면과 교차대구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참고. “문학과 역사”). 그리고 제 3장에서 만나게 될 여러 가지 행위들에 대한 배경의 기능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은 동산의 금지된 식물을 먹음으로써 자신들이 벗은 줄을 알고 부끄러워,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들의 육체를 가렸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나무 뒤로 몸을 숨겼습니다(3:7-11). 하지만 25절에 의하면, 두 사람은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습니다: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니라”(25절). 마치 어린 아이가 자신의 나신(裸身)에 대해서 아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은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마지막 구절은 ‘에덴’ 동산에서 두 사람에게는 결코 부족함이 없었음을 시사해 줄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타락 이야기>의 배경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3. 유혹: 뱀과 여인(3:1-5)
뱀의 등장. 이야기의 세 번째 장면은 뱀에 관한 묘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여인과 뱀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1절)
이야기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뱀에 대한 묘사는 ‘히브리’ 서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서, 그가 과연 그토록 간교한지를 조심스럽게 관찰해보라는 화자의 권유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뱀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 무대 위의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뱀에 관한 묘사 중에서 “간교하다”라 번역된 ‘히브리’ 단어, “아룸”(!Wr[)은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 모두를 다 내포하고 있습니다. “교활하다”, “간교하다”, “슬기롭다”, “영리하다” 등입니다. 따라서 한편으로 볼 때, 이는 지혜자라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일종의 덕목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참고, 잠 12:16; 13:16). 그러나 지혜에 대한 오용(誤用)은 사악함이나 교활함으로 변질될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욥 5:12; 15:5; 출 21:14; 수 9:4).
“뱀”과 관련해서 화자가 이 단어를 특별히 선택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언어의 유희(遊戱)로도 볼 수 있습니다. 화자는 직전의 장면에서 이 단어와 비슷한 발음을 지니는 단어 “아롬”(!/r[)을 사용한 바 있는데, 이는 “벗다”는 의미로서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묘사할 때였습니다. 역설적으로, 두 사람은 지혜를 추구했습니다만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자신들이 벗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두 단어가 이들의 처음과 나중 상태를 어떻게 회화적(繪畵的)으로 드러내고 있는지 독자들은 알 수 있습니다(“아룸”을 추구했으나 “아롬”을 얻게 되었다는 의미이겠지요).
화자가 뱀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 중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종종 묻게 되는 질문은, “왜 뱀이 나타나서 여자를 유혹했는가?”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다양한 답변이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중 어느 것도 만족할 만 한 것은 못됩니다. 초기 ‘유대’교 및 기독교 학자들은 이 뱀을 ‘사탄’이나 ‘마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만, <구약>에서 이 장면 외에는 <오경>을 비롯한 많은 다른 책에서 마귀에 관한 어떠한 언급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과연 화자가 뱀을 그렇게 규정했는지에 관해서는 의문이 많습니다. 또 다른 견해는 뱀을 ‘가나안’의 풍요의 신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에덴 이야기>는 결국 ‘야훼’ 하나님에게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바알’ 신을 따를 것인가에 대한 이스라엘이 당면한 선택에 대한 예시라는 견해입니다. 하지만 이 견해 역시 무리가 있는 것이, 신학자 ‘웨스터만’(Westermann)이 관찰한 바처럼, 화자가 진정 뱀을 이스라엘의 진정한 믿음을 방해하는 대적자로 제시하고 싶었다면, 창조 이야기에서 분명하게 그렇다고 언급을 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견해가 있는데, 고대 근동 지방에서 뱀은 지혜와 생명과 혼돈의 상징으로서, 사실 이 모든 주제들은 본문 이야기와 일정 부분 접촉점이나 연관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 역시 본문에 뱀이 등장하는 근거로 제시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당시 고대인들에게 친숙했을 어떤 신화적 모티브가 본문 이야기 속에 약간 변형된 채 녹아든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길가메쉬 서사시>는 주인공 ‘길가메쉬’가 어떻게 영생의 나무를 발견하게 되었는지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한 연못에서 헤엄을 치는 동안 뱀이 나타나서 그 나무를 집어삼켜버리고 ‘길가메쉬’는 영생을 상실하고 맙니다. <성경>의 <에덴 이야기>는 <길가메쉬 서사시>와는 전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뱀과 남자, 나무, 그리고 생명의 약속 등을 고루 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운명과 관련해서 두 이야기는 전혀 다릅니다. 즉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주인공은 운이 나빠 생명의 나무를 잃어버렸을 뿐이지만, <창세기>에서 ‘아담’은 우연이 아닌 의도적인 불순종으로 생명의 약속을 상실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레위기> 11장이나 <신명기> 14장에 따르면, 뱀은 부정하고 가증스러운 짐승의 대표적인 짐승으로 분류되어야 할 것입니다. 땅에 기어 다니고 배로 밀어 다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뱀은 다른 정결한 짐승 즉 희생제사로 드리는 짐승들에 비해서 가장 가증스러운 짐승으로 구분되어야 할 것입니다. 구약세계에서 짐승의 상징으로 뱀은 하나님의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하나님에게 적대적인 후보자로 꼽히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죽은 시체도 살아있는 생물에 비해서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뱀에 비하면 훨씬 나은 편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에게 적대적인 피조물로 간주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체를 등장시켜 ‘하와’와 대화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일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짐승이 갖는 상징성에 친숙했을 이스라엘에게 인간을 꾀어 그의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대적자로 뱀만큼 더 적절한 후보자도 없었을 것입니다. <유가리트 신화>에 등장하는 ‘리워야단’ 뱀도 <이사야>에서는 하나님께서 멸하신 피조물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사 27:1), <구약> 시대에 뱀을 하나님의 적대세력으로 공공연하게 연결시키고 있었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이 뱀이 여자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의 질문은 일견 아무런 나쁜 의도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히브리’ 문장의 첫 단어로 등장하고 있는 단어, “참으로”는 의심에 찬 놀라움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진정으로”, “정말로”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나머지 문장 전체의 의미를 결정짓는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단어 하나로 하나님께서 원래 풍성하게 허용하셨던 것을 완전히 왜곡시키고 뒤집어놓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2:16). 하지만 뱀의 질문은 아주 순진하고 천진난만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뱀이 하나님의 그 모든 명령들을 어떻게 알았을까? 이것이 화자가 독자들로 하여금 질문해 보도록 기대하는 것입니다. 뱀 그 자신도 하나님의 명령을 들어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 이토록 하나님의 명령을 왜곡시킬 수 있단 말인가? 결국 뱀이 던지는 첫 마디 말, 즉 그의 질문 하나로 그가 얼마나 간교한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간교함은 또 있는데, 그가 “야훼 하나님”을 단순한 “신” 즉 ‘엘로힘 하나님’으로 바꾸어 부름으로써(참고. 3:1; 2:16), 하나님을 친숙한 언약의 하나님이 아닌, 아주 소원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창조의 하나님으로 인식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대답. 여자는 뱀의 질문을 교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른 왜곡이 시작되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우선 그녀에게 허용된 범위에 관한 언급인데, 하나님께서는 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를 먹을 수 있다고 말했으나(2:16), 여자는 이 부분을 생략하고 있습니다(2절).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호칭(呼稱)도 뱀이 사용한 호칭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야훼’가 아닌 ‘엘로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3절).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각하게도 삭제와 왜곡에 이어, 자신의 생각을 추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두고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인의 답변을 통해서 하나님은 친밀하고, 자비로운 분이 아니라 다소 엄격하고 유보적인 존재로 비취고 있습니다. 단지 금단의 열매를 만지는 것만으로도 죽게 된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여자는 이미 뱀의 생각에 상당히 경도(傾倒)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삭제와, 추가와, 수정의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입니다.
뱀의 반응. 여자의 답변에 대한 뱀의 반응을 통해서 그가 과연 얼마나 교활한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4-5절)
그는 정면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반박하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금단의 열매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를 획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뱀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두 사람은 그 열매를 먹은 뒤에도 결코 죽지 않았으며 오히려 930년을 더 살았습니다(5:5)! 그리고 두 사람의 눈은 밝아졌으며(7절), 하나님도 그들에 대해서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2절). 그러니까 적어도 <성경>에 드러난 그대로 읽어보면, 거짓말을 한 쪽은 뱀이 아니라 하나님인 것처럼 보입니다. 결코 이루어지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두 사람을 위협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학자들이 옳게 지적하고 있는 바대로, 뱀은 반쪽짜리 진실을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를 교활하다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그의 두루 뭉실함이나, 애매모호함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뱀은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라고 직접적으로 말한 적도 없습니다. 그는 유혹에 관한 한 예술적인 경지에 이른 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두 사람의 눈이 밝아질 것이라는 대목에서 보다 분명해지고 있기는 합니다. 과연 두 사람의 눈은 예언대로 밝아졌으나, 이어지는 이야기는 일말의 안타까운 역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7절상). 그들의 눈이 밝아져 알게 된 처음 사실이 자신들이 벗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처럼 선악을 분간할 줄 알게 된” 결과는 두 사람을 하나님과 더욱 단절시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왔을 때, 둘은 나무 사이에 숨었고(8절), 결국 동산으로부터 추방당합니다. 뱀의 약속은 이루어졌으나, 우리가 흔히 기대할 수 있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 이것이야말로 죽음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방식일 것입니다. “정녕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명령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산은 하나님의 존재와 생명을 시사하는 온갖 상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나무들”; “금”; “네개의 강”; “지성소를 장식할 때 사용하던 온각 보석들.”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진전한 성소에 들어올 때 진정한 생명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나병 환자들의 경우에서 보듯이, 성소에서 쫓겨나는 것은 곧 죽음의 영역으로 내쫓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들은 옷을 찢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애곡하는 자들처럼 행동해야 했습니다(참고. 레 13:45). 이스라엘의 진영에서 쫓겨나는 것이 곧 죽음을 의미했다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것은 더욱 심각한 죽음을 의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이 동산에서 쫓겨나는 순간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과의 모든 일상 대화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동산의 과실들을 먹을 수 없게 되었으며, 그 모든 풍성한 것들을 누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그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힘든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수고의 끝에는 그들의 고향 즉 땅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살았으나 실은 죽은 상태에 대한 예시를 <사울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사무엘’의 관점에서 볼 때, ‘사울’은 그가 ‘길갈’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을 때 이미 죽은 자였습니다. ‘사무엘’이 그를 위하여 애곡했던 것도 바로 이를 의미합니다(삼상 15:35-16:1). 그리고 화자 역시 분명하게 ‘사무엘’의 이와 같은 입장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이 죽는 날까지 다시는 그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물론 화자는 이후 ‘사무엘’과 ‘사울’의 만남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삼상 19:24), ‘사울’은 죽은 자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뱀은 정말 영리한 자였습니다. 그의 말은 전적으로 거짓이었다기보다는 앞서 지적한 대로 반쪽짜리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평가할 때, 뱀은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깊은 관점에서 볼 때, 그의 말은 틀린 것이었습니다.
4. 타락: 아담과 하와(6-8절)
이 장면은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는 곳으로서 전제 일곱 개의 장면의 정 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 서사의 양식에서 볼 때 가장 효과적으로 화자의 의미가 드러나고 있는 곳입니다. 이 장면을 전후한 다른 장면과 비교해서, 화자의 진술이나 묘사는 지극히 절제되고 간략합니다. 특히 결정적인 장면에 대한 묘사는 단 일곱 개의 대등 접속사, “그리고”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문장 구조가 주는 효과는 이야기가 빠른 속도로 전개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여자가 보고”, “따먹고”, “주매”...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에덴 이야기>의 구조는 교차대구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교차대구의 정 중앙에 있는 이 네 번째 장면의 구조 또한 동일한 교차대구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가장 중앙에, “그리고 그도 먹은지라”는 서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즉 이 장면의 핵심 단어가 “먹다”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진술을 중심으로 교차대구의 양편에 여인의 희망과 좌절, 즉 동기와 결과가 나란히 등장하여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눈이 밝아져”; “벗은 줄을 알고”; “나무 뒤에 숨은 지라.” 이와 같은 대조는 분명 화자의 의도라 할 것입니다. 지혜를 갖게 될 것이라는 여인의 부푼 기대가 교차대구의 전반에 자리하고 있고(6절), 그 기대의 당연한 결과가 아주 희화적(戱畵的)으로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구조는 주제의 심각성만 아니라면, 아주 우스꽝스러운 구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Walsh는 타락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사실을 관찰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등장인물들의 역할에서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인데, ‘아담’은 하나님 대신에 그의 아내의 말을 듣고 있으며, ‘하와’는 남편 대신 짐승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하나님에게 국한해서 사용했던 일련의 표현들이 여자의 행동을 묘사하는데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보기에 좋았다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여인의 눈에 동산 중앙의 나무가 “보기에도 좋았다”는 표현은 <창조 이야기>의 반복적인 표현 중의 하나인,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를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또한 <창조 이야기>에서 남자와 갈빗대를 “취하는” 분은 ‘야훼’ 하나님이지만(2:15, 21, 22, 23), 이곳에서는 나무의 열매를 “취하는” 쪽은 여자입니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 남자에게 필요한 그 모든 것들을 ‘야훼’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셨지만, 이제 남자와 여자는 스스로 자신들의 옷을 만들어 입게 될 것입니다(1:7, 11, 26, 31; 2:18). 요약하자면, 이곳에서 인류의 첫 부부는 하나님의 명령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일련의 특권들을 탈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히는 장면은(3:21), 분명 은혜의 행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창조주의 권위와 권리를 재확인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시작. 유혹은 뱀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타락은 여자로부터입니다. 그녀가 남편이나 하나님이 아니라 뱀의 말에 넘어감으로써 타락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6절)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동산 중앙의 특별한 한 나무가 더 이상 특별하게 보이지 않고, 다른 나무들과 똑 같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즉 동산 중앙의 그 나무가 다른 나무들처럼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게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참고. 2:9). “보기에 좋다”나 “탐스럽다” 등은 모두 어원 상 “탐내다”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이 단어는 “십계명”의 중요한 용어가 될 것입니다(심 5:21; 축 20:17). 그 점에서 이 장면은 “십계명”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여인은 금단의 열매를 혼자만 먹은 것이 아니라,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이는 역사적 타락에 남편 역시 함께 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참고. 6:18; 7:7; 13:1). 사실 남편의 행동은 불순종의 결정판이며 완결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직후 타락의 결과가 연쇄작용처럼 펼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행. 그 첫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7절)
이 장면은 불가분 타락 이전의 두 사람의 상태, 즉 “두 사람이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2:15)는 언급이나, 뱀의 예언 즉 “그들의 눈이 밝아질 것”(3:5) 말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뱀의 예언은 문자적으로 성취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이 밝아져 보게 된 것은 다소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더 높은 그 무엇이 아니라, 자신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수줍어 무화과나무 잎으로 나체를 가리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이 ‘가나안’에서는 가장 큰 잎이라 그것으로 신체를 가렸겠지만, 잎의 모양새가 들쭉날쭉하여 효과적인 가리개 기능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치마”(r/gj, 하고르) “허리 띠” 또는 “허리 덮개” 등을 의미하고 있는바(왕상 2:5; 왕하 3:21; 사 3:24), 그들의 가리개로서는 효과적인 것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의 이와 같은 행동은 그들이 무엇엔가 다급하고 절박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전의 한가롭고 자유로운 동산의 분위기(2:25)는 이제 산산이 부서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이 가리고 피하고 싶어 했던 대상이 누구였을까? 하나님이었을까 아니면 상대방이었을까? 그 대상이 누구든지 간에 한 가지 분명하게 된 사실은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기도 전에 이미 무엇인가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취하고 있는 행동을 통해서 이점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8절)
하나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동산을 거니셨으며, 두 사람은 그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닐던 시각은 햇볕이 강렬하게 내려 쪼이는 한나절이 아닌 비교적 “서늘한 오후”였습니다. 이전에도 이 시간에 두 사람은 하나님과 만나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던 것 같으며, 따라서 이 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동산의 환경을 나무와 강, 금과 은 등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하려 함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에덴’ 동산을 후대 이스라엘이 광야에 세운 성막에 상징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거닐다”는 동사는 다른 곳에서 사막에서 이스라엘의 성막이나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와 관련해서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레 26:12; 신 23:15; 삼하 7:6-7).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범죄 이후에도 이전처럼 동산을 거니시는 일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바이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두 사람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나무들 뒤로 숨어버렸습니다! 이전에는 벗었으나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는데, 이보다 더 극적일 수가 없습니다. 두 사람의 순진함이나 천진난만함은 이제 죄책감에 따른 두려움에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좋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나무들이(2:9), 이제 하나님을 피하게 해주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5. 심문(9-13절)
다섯 번째 장면은 타락의 결과 즉 하나님의 심문(審問)을 담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순서는 앞 장면과는 정 반대입니다: 남자; 여인; 뱀. 원래의 순서는 여섯 번째 장면에서 다시 등장할 것입니다만,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는 순서대로입니다. 즉 뱀에 대한 저주가 가장 먼저 등장하고 이어서 여자와 남자의 순서입니다(3:14-19). 그리고 죄의 다양한 측면들이 등장인물 자신들의 진술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문에는 일말의 부드러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구원자로써 두 사람을 찾고 나선 분은 이전에 그들을 창조하셨던 그 하나님이십니다. 화자는 8절부터 다시 “야훼 하나님”의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은 창조주시며 심판자이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인간과의 언약의 한쪽 당사자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을 불러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대목은 퉁명스럽게 들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9절)
이 장면은 ‘이집트’의 ‘바로’ 왕이나 ‘아비멜렉’ 등과 같은 권력자가 그들의 언약 당사자인 ‘아브라함’에 대하여 불평하며 꾸짖는 장면과 겹쳐 나타나고 있습니다(12:18; 20:9; 26:910). 이어지는 질문, “네가 어디 있느냐?”는 일종의 수사(修辭)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사 33:18; 36:19; 시 42:4, 11). 하나님께서 두 사람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어보는 것은 아닐 테니 말입니다. 이와 유사한 질문이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도 등장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장면이 그것입니다(4:9). 이 질문에 이어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4:10)고 하시면서 ‘가인’을 몰아세우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어디 있는지 몰라 묻는 질문은 아닌 것입니다.
이와 같은 수사적 질문을 통해서 화자는 ‘아담’과 ‘하와’를 마치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아주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자식과 숨바꼭질을 하는 부모의 경우라면, “아가야, 어디 있지?”하고 묻는 것은 아이로 하여금 숨어있지 말고 나오도록 유도하는 질문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일이 이 장면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연 두 사람은 부끄러운 얼굴로 나무 뒤에서 얼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하나님의 질문을 앞으로 나와서 자신들이 행한 일에 대해서 설명을 하도록 초청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겠습니다. ‘아담’의 반응이 먼저입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10절)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이 장면에서 남자가 먼저 등장함으로써 “타락” 장면에서 여자가 먼저 등장했던 것과는 역순(逆順)을 이루고 있으며, 하나님의 심문 역시 역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먼저 자기가 나무 뒤에 숨어 있었음을 밝힙니다. 하나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잘못을 기꺼이 인정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대화의 주제를 다른 것으로 바꾸려 안간힘입니다. 그는 자신이 숨은 이유를 변명하고 있습니다. “벗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변명이 오히려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증거하고 있음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질문 역시 그분의 무지(無知)를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죄인으로 하여금 자백을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11절)
하지만 ‘아담’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입니다. 그는 앞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는 동일한 내용을 반복 설명하고 있습니다(참고. 6절).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2절)
누구나 그러하듯이 ‘아담’은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타인에게로 책임을 전가하려 합니다만, 이번에는 ‘하와’입니다. 하지만 그의 비난은 여인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잘못으로 몰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여기서 “죄가 심히 죄 됨”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죄는 사람을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 즉 아내마저 원수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의 영광스러운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켜버립니다. 인간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 중의 하나도 결국 자신의 행동을 환경이나 운명의 탓으로 돌리려 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항변에 대해서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계신데, 이는 피고의 항변을 기각하는 판사의 모습과 같다 하겠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심문은 여인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3절)
다시 한 번 질문은 수사적입니다. 놀라움을 담은 질문으로서,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시며, ‘아담’을 통해서도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아담’과 마찬가지로 책임을 제 삼자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그 대상은 뱀입니다. 여인의 변명은 ‘에덴’ 동산을 특징지어주던 태초에 인간이 누리던 다른 피조물들과 관계를 여지없이 파괴시켜놓고 있습니다. 이처럼 죄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그리고 마침내 인간과 짐승들과 관계마저 단절시켜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새로운 회복에 대해서 잊지 않고 노래하고 있습니다(예: 사 11:6-9).
6. 심판(14-21절)
하지만 하나님의 심문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뱀에게는 대답하고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하나님께서는 범죄에 관련된 자들에게 차례대로 판결을 내리십니다. 뱀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여인과 남자 순서입니다. 이 장면이 전체 이야기에서 여섯 번째가 되는 곳입니다. 형식적으로 이 장면은 두 번째 장면(2:18-25)과 대칭을 이루는 곳으로서, 각 장면은 남편이 아내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2:23);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3:20).
하나님의 정죄(14-19절)는 시적 운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야기 속에 이와 같은 운문이 포함된 것을 두고, 후대의 편집적 삽입으로 보기도 합니다. 원래 이야기는 심문에 이어 곧바로 추방으로 이어졌는데, ‘야훼’ 기자가 다른 전승에서 이 부분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원래의 전승과 삽입된 부분이 이미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하나의 이야기로 융합되어 있어, 이와 같은 주장은 큰 의미는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먼저 뱀을 향하고 있습니다.
1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14-15절)
14절의 경우, “여호와 하나님이.... 더욱 저주를 받아”라는 부분을 빼면, 이 구절의 나머지 부분은 리듬을 갖춘 삼행시로 볼 수 있습니다:
네 배로 다니고
살아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그리고 14절의 전반부,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모든 육축과 모든 짐승보다 가장 저주를 받아”는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3:1)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두 구절에서 등장하고 있는 단어 “저주”(rr"a, 아라르)와 “간교”(!Wr[, 아룸)는 서로 발음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뱀이 받은 저주는 그가 지닌 지식 즉 “간교함”에 상응하는 것이었다는 암시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뱀에 대한 저주가 심각하게 들리는 것은 하나님이 어느 누구에게 직접 저주를 내리시는 경우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 장면 외에는 ‘가인’에 대해서 뿐이기 때문입니다(참고. 4:11). 그 외 경우는 모두 제 삼자를 통해서입니다. 예컨대, 이스라엘은 대부분 ‘모세’나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예언을 듣습니다(신 28:16). 저주는 축복의 반대어입니다(참고. 12:3). <성경>에서 저주를 내린다는 말은 특정 범죄를 저지른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법정에서 가려낼 수 없는 각종 은밀한 범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신 27:15-26). 그리하여 저주를 받은 자는 온갖 형태의 불행이 그 사람 위에 임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단순히 행운이 따르지 않은 것으로 여길 수 있는 일조차, <성경>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저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 저주는 즉각적으로 그 효력을 발휘할 수도 있습니다만(민 22:6), 실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결과가 달리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장면에서 놀라운 점은 하나님께서 직접 한 개인을 향하여 저주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저주의 효력이나 결과는 철저하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관찰할 수 있는 뱀의 특징들, 즉 기어 다니는 행태나, 흙을 먹고 살면서 인간들이 가장 싫어하는 짐승 중의 하나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하나님의 저주가 그대로 이루어진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레위기>에서도 배로 기어 다니는 짐승들은 불결한 것으로 별도 취급하고 있습니다(레 11:42). 그가 저주의 결과로 배로 기어 다닌다는 말은 이전에는 뱀도 처음에는 다른 짐승들처럼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화자가 지금 현재의 뱀의 행태가 하나님의 저주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뱀이 흙을 먹을 것이라는 저주도 문자 그대로 그가 흙을 주식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해석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오히려 이 구절은 뱀이 받은 수치와 모멸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래 구절들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광야에 사는 자는 그 앞에 굽히며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시 72:9); 왕들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사 49:23);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리이다(미 7:17)
그리고 이와 같은 수치는 뱀이 “살아있는 동안” 지속될 것이며, 아래 15절에서 보듯이 당대에만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15).
즉 후손에게까지 저주의 영향이 지속적으로 미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뱀의 적대감이 온 인류와 모든 뱀의 후손에게까지 확대되었습니다(참고. 민 35:21-22; 겔 25:15; 35:5). 온 인류 즉 “여자의 후손”과 뱀의 무리 즉 “너의 후손”은 영원히 원수가 되어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항하는 무리들은 지금부터 그들 내에서조차 서로 싸우게 될 것이며, 이와 같은 ‘모티브’는 <바벨탑 이야기>에서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11:1-9). 지금 영속화되고 있는 문제는 단순히 하나님과 뱀 간의 전쟁이 아니라, 모든 인류와 뱀 간의 전투로 확대될 것입니다(참고. 사 11:8).
여기서 4 행(行)으로 이루어진 저주의 시 중에서 마지막 두 행에 대한 해석에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특히 “상하게 하다”(#Wv, 슈프)라는 단어에 대한 해석인데, “분쇄하다” 또는 “박살내다” 등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이곳과 <성문서> 두 곳에서만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시139:11; 욥 9:17). <아모서>에서는 이와 비슷한 어근을 가지는 단어, ‘샤아프’(#a'v)가 등장하고 있는데, “갈망하다”, “눌러 부수다”, 또는 “유린하다” 등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두 단어가 어근이 유사하다 하여, 뜻도 상호 구분 없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대 번역본이나 현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단어의 해석을 놓고 일치된 견해는 없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두 행에서 반복 등장하고 있는 이 단어가 두 곳 모두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갈망하다”는 의미보다는 “눌러 부수다” 내지는 “짓누르다”는 해석을 선호한다는 말입니다. 일부 소수이긴 하지만, 두 단어의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두 단어가 의미는 다르지만, 두 행(行) 사이에 분명 언어의 유희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즉 여인의 후손이 뱀을 “짓누르다”와 뱀이 사람의 발꿈치를 “갈망하다” 사이의 언어의 유희가 그것입니다.
이처럼 두 단어의 어원을 놓고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어원이 어떠하든 본문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문법적이고 역사적 해석이 더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는 미 완료형(未完了型) 반복입니다. 즉 싸우고 있는 두 상대가 서로를 상하게 하기 위해서 반복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과 뱀의 자손 사이에 지속적이고 영속적인 적대감이 상존해 왔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석에서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싸움이 어느 한 편의 승리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끝없이 계속 이어질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이 구절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원인론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오늘날 인간과 뱀 사이에 常存하는 적대감이나 혐오감에 대한 기원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 행의 순서로 볼 때, 인간과 뱀의 전투는 인간에게 유리하게 끝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또 한 편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 두 절이 뱀에 대한 저주를 담고 있지 인간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더군다나 이 전투에서 뱀이 처해있는 상황은 인간에 비해 유리한 조건은 아닙니다. 즉 그는 기껏해야 사람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이야기가 단순히 인간과 뱀의 적대적인 관계에 대해서 원인론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기보다는, 왜 뱀이 그토록 불쾌감을 유발하는지에 대한 현실적인 설명일 뿐입니다. 그렇게 볼 때, 이야기속의 많은 요소들은 상당히 상징적이며, 여인과 뱀의 대화 속에도 상당히 애매모호하고도 풍자적인 면이 많습니다. 만일 이야기 전체적으로 어딘가에 상징적이고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면, 이곳에서 유독 그러한 요소들이 다 사라져버리고 뱀은 그냥 뱀일 뿐이며, 하나님에 적대적인 하나의 상징으로 볼 수 없다고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이상할 것입니다.
이곳에서 뱀을 하나의 상징, 즉 죄와 죽음과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뱀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는 단순히 뱀에 대한 저주로 보기보다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 전개되는 선과 악의 오랜 투쟁과 인간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뒤이어 등장하는 ‘가인’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와도 잘 일치하고 있습니다.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11)
즉 ‘가인’은 죄의 유혹을 끊임없이 받게 될 것이지만, 그가 이를 거부한다면 승리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오래된 ‘유대’ 전승에서나, <탈굼 성경>, <칠십인 역> 등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즉 뱀은 ‘사탄’을 상징하고 있으며, ‘메시아’의 날에 그를 이기려 시도할 것입니다. <신약>의 여러 책에서도 이와 같은 해석을 암시하고 있으며, 이 구절을 종말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롬 16:20; 히 2:14; 계 12). 즉 “여자의 후손”은 ‘마리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요, 뱀과 그의 후손은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이며, 이 싸움에서 궁극적인 승리는 여자의 후손이며, 그가 곧 인류의 구원자가 될 것이라는 이해입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꽤나 오래된 것으로서, ‘유대’교에서부터 <신약>의 교부시대에 이르기까지 아주 광범위합니다. ‘쉐퍼’ 역시 같은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참고도서 7: 제 6장).
물론 <성경> 전체 맥락에서 볼 때 이러한 해석은 크게 이상할 것은 없어 보입니다만, <창세기> 화자의 원래 의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단지 우리가 뱀의 후손, 즉 악의 유혹이나 세력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뱀에 대한 저주에 이어 여인에 대한 선고입니다. 마치 4행시와 같습니다.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고통 가운데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라(3:16).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아담’의 범죄를 말미암아 저주를 받은 쪽은 뱀과(14절)과 땅(17절)이지 남자와 여자가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선고는 원래 그들에게 주어졌던 역할을 거두어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여인의 경우 남자의 조력자요 자녀의 어머니 역할을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참고. 2:18, 23-24). 선고의 첫 번째 부분은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고통과 수고가 따를 것이라는 선고입니다. 많은 자녀를 갖는 것, 특히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시 113:9)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참고. 시 127, 128). 하지만 현대과학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출산의 고통은 그 당시에 가장 큰 고통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참고. 미 4:9-1; 사 13:8; 21:3). 이곳에서 두 번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단어 “고통”(@/bX;[, 잇차본; bx,[, 에체브)은 자녀 출산에 따른 고통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카수토’(Cassuto)는 화자가 이곳에서 언어의 유희를 즐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이 단어는 발음 상 “나무”($[, 에츠)를 연상시켜준다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인 즉은 여인이 자녀를 낳을 때마다 고통 중에 “그 나무”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여인을 향한 두 번째 선고는 아내의 역할과 관련된 것입니다만, 이 부분에서도 화자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견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점에 있어서는 아내는 원래부터 남편보다 우위에 있도록 창조된 것은 아니므로, 특별히 이 구절이 달라진 상황, 즉 여인에 대한 저주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여인은 원래부터 남편의 조력자였으며, 남편이 아내의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2:23; 3:20), 아내가 아니라 남편이 주도적이고 우월적인 지위를 누리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중에 “다스리다”는 단어도 이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자연스럽게 제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억지로 굴복시키다”든지, “심하고 거칠게 다루다”는 등의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역사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사회에서 여자에 대한 대우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인의 역할이 “(동등하게) 사랑하고 출산하는” 것에서 “갈망하고 지배하는” 것으로 바뀌어버린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내들은 남편에 대한 이와 같은 욕구로 인하여 자신들이 착취당하도록 내버려두기도 합니다. 즉 자신들이 지닌 성적 욕구는 때로 남자들의 비이성적인 요구에 스스로를 내맡기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여인의 운명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다시 한 번 뒤틀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해석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예컨대, 아내의 욕구나 갈망은 남편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독립을 향한 갈구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남편을 지배하려는 욕구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Susan Foh). 이와 같은 해석은 4:7에 대해서도 동일한 해석을 요구하게 됩니다. 즉 ‘가인’은 “죄”에 대한 욕구가 있으나 그는 이를 정복하고 이겨야 한다는 해석입니다. 남편을 다스리려는 욕구는 아내를 지배하려는 남편의 명령과 정면으로 배치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논리적으로 단순하고 매력적이긴 합니다만,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사모하다”(hq;WvT, 테슈카)가 이 두 곳(3:16; 4:7) 외에는 사용되고 있는 예가 없어, “강요하다”는 의미로 해석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다 하겠습니다.
‘아담’은 그가 지녔던 권위에도 불구하고 저주로부터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를 향한 저주가 가장 길고도 철저합니다: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17-19절)
왜 이처럼 길고도 상세할까? 그것은 타락에 관한 한 그의 책임이 가장 크고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지시사항을 따른 대신에 아내의 조언을 따랐습니다(17절). 여기서 저주의 내용이 너무 길어 혹자는 저주에 관한 두 개의 다른 내용이 합쳐진 것이라고 제시하기도 합니다만, 웨스터만(Westermann)은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원래 하나의 내용이었던 것을 17절 전반부와 18절후반부에 새로운 내용으로 추가하였다는 견해입니다.
‘아담’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뜻하는 일반명사입니다만, 이곳에서는 처음으로 고유명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를 향한 저주에서 저주의 이유-“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를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유가 얼마나 심각하고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즉 ‘아담’의 결정적인 잘못은 하나님에게 순종한 것이 아니라 아내에게 순종한 것에 있다는 말입니다. “누구의 말을 듣다”는 “순종하다”와 동의어로 통하고 있습니다(출 18:24; 왕하 10:6).
저주 속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는 단어는 동사 “먹다”입니다. 세 구절에서 무려 다섯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저지른 범죄는 금지된 식물을 먹은 데 있으며, 따라서 그에 따른 처벌도 먹는 것과 관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먹고 살기 위한 일체의 노력과 수고를 통해서 지난 날 저지른 잘못된 행위와 노력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었던 동산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게 될 것입니다(2:9).
저주와 관련하여 또 하나 중요한 단어는 “땅”(hm;d;a, 아다마)입니다. 저주는 “땅”에 관한 언급에서 시작하여(17절) “땅”에 관한 언급으로 끝맺고 있어(19절) 마치 시적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는 듯한 모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땅은 “물리 흐르고 비옥하지”만(신 33:13-16; 창 2:8-14), 그것이 저주를 받았을 때 그 모든 특혜들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참고. 18절).
“수고하여야 먹으리라”는 표현은 다른 말로 “고통 가운데 먹으리라”는 뜻입니다. 이와 유사한 표현을 16절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내는 고통 가운데 출산하게 됨으로써, 여자로서의 역할에 큰 고통을 더하게 될 것이며, 남자 또한 식물을 수확하는 경작자로서의 역할에 큰 고통을 더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평생”이 될 것입니다. 이는 여인과 뱀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 것이기도 합니다. “평생”이라는 단어의 등장은, 19절에서 보다 명확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만, 인생의 유한함을 예고해주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즉 죽음인 것입니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18절)는 표현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내다”(jm'x;, 차마흐)는 타락 이전의 동산을 묘사하는 표현에서도 사용하고 있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2:5);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2:9).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나란히 한 쌍으로 등장하면서 황무지 등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참고. 호 10:8). 그리고 같은 18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밭의 채소”는 아마 들의 야생식물과 밭에서 경작한 채소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이 또한 타락 이전에 하나님께서 두 사람에게 먹으라고 제공해주신 과실 맺는 나무들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이 동산을 영영 떠나게 될 것임을 시사해주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놓고 노동이 저주의 결과라고 단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타락 이전에도 인간은 동산을 지키고 가꾸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2:15). 노동에 고통과 좌절이 수반되었다는 사실을 저주의 결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아담’의 편에서 보자면, 그가 받은 처벌 속에는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힘들고도 빈약한 소출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와’ 역시 아내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의 존재의 의미가 그 뿌리에서부터 타격을 받는 처벌이 내려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보다 명시적으로, 그 저가는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19절상). 이 표현은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많은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즉 그는 “땅의 티끌”로부터 만들어졌으며(2:7), 이제 그 티끌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남자가 땅으로부터 취해졌던 것처럼(3:19), 여인은 남자로부터 취해졌습니다(2:23). 결국 사람의 생존을 위한 일생의 투쟁은 죽음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바로 이 선언을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2:17)는 사전 경고가 성취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만, 일부 견해를 달리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예: Skinner, Westermann, Gunkel). 이들에 따르면 죽음은 저주의 결과가 아니라 흙에서 취한 피조물에게 주어진 당연한 운명이며, 두 사람이 금단의 열매를 먹지 않았다 하더라도 죽기는 매 일반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에덴 이야기> 어디에도 이들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언급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은 큰 호응을 얻고 있지는 못합니다. 여섯 번째 장면의 마지막 두 절(20-21절)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두 번째 장면의 마지막 두 절(2:24-25)과 좋은 균형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20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3:20-21절)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2:24-25)
이와 같은 형식적 유사성으로 인해서 장면 간의 균형은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며, 더불어 두 부분에 대한 해석의 근거도 이와 같은 틀 안에서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교훈과 설교에서 이 부분에 대한 예를 보게 될 것임).
‘아담’이 아내에게 붙여준 이름 ‘하와’(hW;j)는 “뱀”을 뜻하는 ‘아람’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초기 ‘유대’ 주석가들과 일부 현대 학자들은 이 뜻이 바로 ‘아담’이 원래 의미했던 바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아담’은 그의 아내를 “뱀”이라 부르면서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와’에 대한 본문의 설명, 즉 “모든 산 자의 어머니”는 화자 자신의 언어의 유희에 가까운 재해석입니다. 물론 ‘하와’에 대한 설명을 화자 자신이 덧붙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와’를 지칭하면서 과거형 즉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되었음이더라”고 표현했을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하와’를 뱀과 연계시키는 것은 무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하와’는 “생명”을 뜻하는 단어 ‘하야’(hy:j)와 더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칠십인 역>에서도 이와 같은 견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 이 장면에서 남편이 그의 아내를 “생명”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일까요? 인생의 유한함을 알리는 저주의 선언(19절)이나, 출산의 고통(16절), 그리고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의 투쟁(15절)에 대한 언급이 있은 바로 직후에 이와 같은 이름을 붙여주고 있는 것인가? 물론 이들 저주에 담긴 내용 모두는 한 결 같이 생명에 대한 암시를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 아내의 이름을 통해서 생명에 대한 희망이나 믿음을 피력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21절)는 사실은 ‘에덴’ 동산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친절한 배려로서(참고. 2:8, 15, 19, 22) 상당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옷은 단순히 보호 기능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한 사회에서 그 사람의 지위나 권위를 상징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옷의 성격에 대해서 <히브리 성경>은 물론 <칠십인 역>과 대부분의 현대 번역본들은 “가죽옷”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다른 번역본에서는 달리 번역하고 이 대목에서 다른 해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피부를 위하여.” 직역하자면, 하나님께서 두 사람이 벌거벗었음을 보고 이를 가리기 위하여 옷을 해 입혔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하나님께서 옷을 해 입히신 목적 중의 하나님이 분명하지만,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취하고 있는 해석을 따르는 것이 무난할 듯합니다.
“옷을 지어 입히다”(vb'l, 라바시)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는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왕이 귀하게 여기는 대상에게 옷을 입히는 경우와(참고. 창 41:42; 삼상 17:38), 다른 하나는 제사장들에게 입혀주는 거룩한 의상으로서 이는 ‘모세’가 이들에게 입혀주던 것들입니다(참고. 출 28:41; 29:8; 40:14; 레 8:13).
여기서 다시 한 번 <에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일련의 용어들이 성전 예배에서 사용하는 용어들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즉 <에덴 이야기> 속에 성막 모티브가 베어있다는 인식이 그것입니다. 예컨대,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사제들은 성막 제단 앞에 나아갈 때 자신들의 은밀한 부분은 가려야 합니다(출 20:26; 28:42). 실로 모든 이스라엘은 대소변을 볼 때에 진영 밖으로 나가서 보되 배설물을 땅을 파서 덮어야 했습니다(신 23:12-14). 왜냐하면 진영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서도 ‘아담’과 ‘하와’는 나신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옷을 지어 입히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 이전에는 그들은 물론 하나님조차도 그들의 나신에 대해서 개의치 않았던 것입니다(2:25; 3:11).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두 사람에게 옷을 지어 입히신 행위는 흔히들 생각하고 있는 바처럼, 은혜의 행위가 아니라 그들의 죄를 상기시켜 주는 행위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마치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옷을 입지 않고서는 그분에게 나아갈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7. 추방(22-24절)
일곱 번째 장면은 전체 이야기의 결론이며, 첫 장면(2:5-17)과는 쌍을 이루고 있습니다. 두 장면 모두에서 주인공은 하나님과 인간이며, 이중에서 유일한 행위자는 하나님이며, 인간은 피동적인 역할만을 맡고 있을 뿐입니다.
22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2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22-24절)
그리고 두 장면에서 공히 등장하는 독특한 용어들이 있는데, “동방”, “에덴동산”, 그리고 “생명나무” 등입니다. 주인공의 동선(動線)은 동산과 들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는 동산 밖에서 동산 안으로,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동산 안에서 동산 밖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반면 나머지 모든 장면에서 주인공들의 행동은 동산 내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주인공들의 움직임만으로도 이야기는 이제 일곱 번째 장면에서 마무리를 하고 있으며, 그 순환을 마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와 같은 순환을 통해서 인간은 그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 동산은 인간을 위해서 마련되었으며(2:8), 그는 동산 안에서 생명나무 실과들을 먹는 것이 허용되었으며(2:9, 16-17), 동산을 가꾸고 지키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2:15). 동산은 풍요로웠고, 두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으며, 노동도 힘들고 귀찮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는 언제든지 만나서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곱 번째 장면은 이와는 완전히 대조적이며 급변한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동산 주인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쫓겨나고 있으며, 생명나무에는 근접도 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한 때 동산지기였던 이들이 동산에 접근조차 할 수 없도록 “천사들과 두루 도는 불칼”을 두어 방어벽을 쳐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죽음의 예고가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인 바, 그들은 흙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3:19).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고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뱀의 예언도 일부 성취되었음을 인정하고 계신 듯합니다(참고. 3:5).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처럼 된 것”은 아니고,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마 하나님이나 천사 등과 같은 천상의 존재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천상의 존재들처럼 되었다는 것은 선과 악을 아는 지식에 있어 그렇다는 뜻이지, 다른 어떤 점에 있어서도 하나님이나 천사들과 같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이나 천사가 될 수가 없으며, 특히 영생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행여나 그들이 영생을 얻게 될까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시도(試圖)를 사전에 차단하려 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22절하).
그런데 이 문장은 중도에 끊나버려,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머지 생각을 상상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이와 같은 문학적 기법을 “돈절법”(頓絶法)이라 부릅니다). 예컨대, “그를 동산에서 쫓아내야겠다”는 등의 계획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통상 ‘히브리’ 문학에서 하나님의 생각이나 계획은 정확하고 완전한 성취의 형태로 나타나는 법인데, 화자가 이를 생략하는 의도는 하나님의 행동 즉 사전 조치가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내고자함 일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말씀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들을 동산에서 추방하는 조치를 취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생명나무”로부터 분리시켰다는 언급을 통해서 이 두 사람은 그 나무의 과실은 아직 먹어보지도 못한 상태임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동산으로부터 쫓겨난 것은 영구적(永久的)이며, 돌이킬 수 없는 조치였음을 반복과 언어의 유희를 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23, 24절). 반복이라 함은 두 번에 걸쳐 비슷한 의미를 지지는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한 번은 “내보내다”(jl'v, 샬라흐)는 동사를, 또 한 번은 “추방하다”(vr'G, 가라쉬)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동사는 또 다른 동사 “손을 들다(뻗다)”(ה, 솨라흐)와는 동일한 어근(語根)을 갖고 있는데, 화자는 이를 통해서 언어의 유희를 꾀하고 있습니다. 즉 “아담이 손을 들어(ה, 솨라흐) 생명나무 실과를 취하려(ה, 라카흐) 했을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내보내어(ה, 솨라흐) 그가 취함을 입은(ה, 라카흐) 토지를 갈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일종의 선제공격을 통해서 ‘아담’이 영생을 누려 신적 존재가 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해버렸습니다.
두 번째 동사 ‘가라쉬’(שׁ)는 첫 번째 동사 ‘솨라흐’(ה)보다 훨씬 강력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경>에서 이 단어는 ‘가나안’ 족속의 추방과 관련해서 종종 사용되고 있습니다(예. 출 23:28-31). 의미인 즉은 두 사람의 추방은 되돌릴 수 없는 영구적인 조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23절과 24절이 유사한 의미를 지니는 다른 두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고 해서, 이 두절이 상호 다른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다시는 동산 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이 “주둔하고”(@k'v, 샤칸) 있는데, 이 단어는 특히 성막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예. 출 25:8). 그런 점에서 <에덴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러 용어들이 성막의 제의적(祭儀的) 상징을 지니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는데, ‘그룹’(bWrK, 케루브)의 등장도 이점을 더욱 보강하고 있습니다. ‘그룹’는 사람의 얼굴을 한 날개 달린 사자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근동 지역에서 성소(聖所)의 수호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아카디아’ 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성막이나 성전 벽을 ‘그룹’으로 장식하고 있으며(출 26:31; 왕상 6:29), 언약궤 위에도 한 쌍의 ‘그룹’이 조각되어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고 있고(출 25:18-22), 성전의 지성소 내에도 한 쌍의 거대한 ‘그룹’이 이를 지키고 있습니다(왕상 6:23-28).
“두루 도는 불 칼”은 <구약> 어디에도 등장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불은 하나님의 임재, 특히 그분의 심판을 상징하는 용어로 자주 사용하는 단어이기는 합니다(출 19:18; 시 104:4). “두루 돈다”(&p'h, 하파크)는 “변화시키다”, “뒤짚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사사기>에서는 보리떡이 ‘미디안’ 진영에 굴러들어오는 장면을 묘사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그 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삿 7:13). 이로 미루어 “두루 도는 불 칼”이 전하는 상징은, 섬광(閃光)처럼 ‘지그재그’ 모양으로 회전하고 있는 칼입니다. 이들이 지키고 있는 것은 동산의 “생명나무”입니다. 이와 유사한 성막의 상징은 성막 내에 있는 황금 촛대가 될 것입니다. 이 성물(聖物)은 생명나무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동산의 “동쪽”입니다. 왜 하필 동쪽인가? ‘카수토’(Cassuto)에 따르면, 그곳은 동산의 입구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성막과의 연관성을 읽을 수 있는데, 성막이나 성전 모두 동쪽을 통해서 cnf입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결국 <에덴 이야기>는 이런저런 용어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후대 역사에 등장하는 성막과 성전 제의와 깊은 연관을 지으려 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더 나아가 <에덴 이야기>는 벽두에서부터 “강”이나 “금”, “보석들”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이들 역시 성전의 전형적인 모형(模型)들로서,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는 것들입니다. 결국 두 사람이 금단의 열매를 먹었을 때, 이들이 탈취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에덴 이야기>의 여러 요소들이 성막(聖幕)의 제의적(祭儀的)인 상징을 지닌다는 사실을 간파한 바 있습니다. 24절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이중 대표적인 학자로서 Wenhem을 들 수 있는데, 보다 상세히 알기 원하는 사람은 그의 저서(참고도서1)나 논문 [Sanctuary Symbolism in the Garden of Eden Story]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이 논문은 앞서 소개한 바 있는 [I Studied Inscriptions from before the Flood] 라는 책의 한 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1. 아담과 아다마
‘아담’이 태어나기 전에 지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화자는 <에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습니다: “들에는 아직 초목이 없었고”(5절); “밭에는 아직 채소가 나지 아니 하였으며”(5절);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6절); “온 지면을 적셨더라”(6절). 마치 방송 리포터가 현장에서 뉴스를 전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와 함께 TV 카메라도 각도를 달리하면서 네 방향을 천천히 보여주고 있는 듯합니다. 한편 <서막>은 창조 직전의 지구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1:2상).
두 이야기를 전하는 화자가 동일인물이든 아니든, 우리가 받는 느낌은 일관되고 동일한 것입니다. 즉 두 이야기가 전해주는 지구의 모습은 결국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서막에서 그려주는 지구는 온통 물로 뒤덮여있는 캄캄한 바다이며, 이곳 <에덴 이야기>에서 보여주는 지구는 풀 한 포기 없고 안개만이 짙게 드리워져 있는 황량한 사막입니다.
이런 곳에 과연 누가 살 수 있을까? 이 장면을 지켜보는 시청자라면 누구나 떠올렸을 질문일 것입니다. 적어도 사람이 살 수 있기 위해서는 이곳이 아닌 다른 환경이 필요하거나, 아니면 이곳을 사람이 살 수 있는 쾌적한 환경으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한편 “타락”에 대해서 알고 있는 독자라면, 이와 같은 환경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이후의 바로 그 땅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에덴 이야기>는 그 벽두에서부터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타락”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서막의 분위기는 이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곳에서는 ‘아담’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상태에서 창조되었습니다. 그가 눈을 떴을 때에는 그가 필요로 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준비되어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에덴 이야기>를 긴장 가운데 시작하는 화자의 의도는 무엇인가? 독자들로 하여금 “타락”과 그 비참한 결과를 예고하고 준비시키기 위함이 아닐까요?
이곳에서 그리고 있는 땅의 상태도 바로 이 점을 강하게 암시해주고 있습니다(6절). 여기서 “안개”란 지하수로 번역함이 옳을 것입니다. 즉 지하수가 땅으로부터 흘러나와 온 지면을 적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모습은 부정적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이기도 해서, 바로 직전에 그리고 있는 땅에 대한 명백한 부정적인 묘사와는 일견 상충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5절).
그러나 이 같은 대조병행이야말로 ‘아담’의 역할에 대한 강한 암시가 되고 있습니다. 즉 그가 없으면 이처럼 넘쳐나는 물도 무용지물이 된다는 암시일 것입니다. 실제 근동지역에서 연례적으로 발생하는 강의 범람은 인간의 손길이 아니라면 매년 모든 것을 무로 돌려놓고 말 것입니다. 어쨌든 땅에 대한 이와 같은 부정적인 묘사를 통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긴장 가운데 이야기의 주인공‘아담’이 등장하기를 한껏 기다리게 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7절)이 접속사 “그 때”(또는 “그래서”)로 시작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황량하고 거친 땅의 흙으로부터 ‘아담’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의 출신 성분을 강조라도 하려는 듯이 화자는 이름과 관련하여 언어의 유희를 즐기고 있습니다. 즉 ‘아담’(םךא)과 땅을 뜻하는 ‘아다마’(הםךא) 모두 “붉음”을 의미하는 ‘아돔’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학자들의 견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흙은 그가 곧 이사하여 살게 될 ‘에덴’동산 안에 있는 그 흙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동산 안에서 누리게 될 그 풍성한 삶과 역사는 원래 그에게 속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죄와 죽음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는 인류의 역사는 “타락” 이후 ‘에덴’동산 밖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아담’이 동산 밖의 흙으로부터 나왔다고 강조하는 것은 그가 그 땅으로 되돌아간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도 없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로서, 바로 그 일이 그의 운명이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즉 땅은 그의 요람이자, 가정이요, 또한 그의 묘지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그 땅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운명을 바꾸어 놓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이며, 초자연적인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황공하게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서>에서 고백하고 있는 바처럼, 진흙이 도기로 변한 것입니다. 이 일은 “은혜”요, 하나님의 언약 하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님은 ‘아다마’를 ‘아담’으로, 즉 흙을 살아있는 존재(living creature), 즉 “생령”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생령”은 물론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짐승들-땅에 기는 것들, 공중의 새들, 바다의 짐승들-모두가 ‘생령’입니다(19절).
그러나 인간은 단순히 살아 숨 쉬는 존재만은 아닙니다. 그는 “생령”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생기”(生氣) 내지는 좁은 의미로 “하나님의 영”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바로 이점이 인간과 다른 짐승을 구별하는 가장 뚜렷한 차이일 것입니다. ‘아담’은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아담’이 누렸던 지위가 얼마나 과분한 것이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허망한 욕심을 부리게 될 것임을 복선(伏線)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각별하게 창조되었으므로, 목적 또한 각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각별한 관계, 즉 “언약의 관계”를 맺으려 하십니다. 언약의 일반적인 내용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 “창조 명령”입니다(창 1:28). 나는 이 명령을 얼마나 잘 기억하고 있습니까? 암송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언약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에 두실 때 좀 더 구체적인 언약 하나를 더하셨습니다. 그것은 동산에서 ‘아담’의 기본적인 생활 조건과 관계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에덴의 언약” 또는 “아담의 언약”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언약에서 밝히고 있는 첫 번째 조항은, 위에서 언급한 ‘창조 명령’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모든 것을 “지키고 다스리라”는 적극적인 명령입니다(15절). 우리는 이 명령이 의미하는 바를 좀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에덴’동산이 ‘아담’이 살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화의 가능성이 전혀 없거나 불필요한 곳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파라다이스’란 ‘아담’이 그냥 하릴 없이 놀고먹는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동산은 ‘아담’이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 새로운 변화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고, 늘 새로운 가능성으로 열려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노동이나 일은 혹자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타락 이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창조 이전부터 계획된 창조의 한 섭리일 것입니다. 안식은 노동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천국에까지 확대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삶이 어떠한 것이 될지 추측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타락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이 모든 일들이 이제는 즐거운 것이 아니라 귀찮고 힘들어졌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에덴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두 단어 “다스리다”와 “지키다”(참고. 2:15)가 하나님과 성막을 “섬기다”, “봉사하다”, 또는 “시무하다” 등의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는 것을 두고, ‘에덴’ 동산을 광야에서의 하나님의 성막의 예표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사실 거룩한 일들이 될 수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바울’도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고 또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권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언약”의 두 번째 측면은 소극적이긴 합니다만(16-17절), 너무나 명확하여 도무지 오해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역시 이중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적극적으로 해야 될 것과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담’의 장래는 항상 그의 도덕적 선택의 결과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그 선택이란 “먹을 것인가 안 먹을 것인가?” 즉 “생명이냐 지혜냐?”에 관한 것입니다. 그의 선택은 ‘햄릿’의 그 유명한 독백,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의 문제로 직결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도전과 선택의 상징으로 동산 중앙에 두 나무, 즉 생명의 나무와 선악(또는 지혜)을 알게 해주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아담’이 만일 생명의 나무를 선택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지만, 두 번째 나무를 선택하게 된다면 이후부터 그는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완전한 권리를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 즉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고, 선악에 대한 도덕적 자율권을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물론 하나님의 특권을 빼앗는 것이고,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행위입니다(창 3:5, 22). 즉 그는 스스로의 운명의 주인공이 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운명의 주인공이 되는 일은 과연 축복일까? 오늘날의 과학적 지식주의는 우리가 무엇이든지 다 알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무한경쟁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지혜문학에서도 인간 최대의 목표가 지혜를 얻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아서는 안 된다고 배우기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야훼의 명령을 지키라”(신 4:2).
일견 <오경>과 <성문서>의 가르침은 서로 모순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획득해서는 안 되는 지혜가 있다는 말인 듯합니다. 예를 들어,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장막이나 법궤 근처로 결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돌 판은 성막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습니다. 그것을 만지거나 볼 수도 없었습니다(민 4:15, 20).
이제 비로소 우리는 ‘에덴’동산이 어떤 장소인 동시에, 어떤 삶의 방식을 나타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즉 ‘에덴’동산은 인간을 위해서 창조되긴 했지만, 동시에 인간이 그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규정해 주는 곳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에덴’은 어떤 게으른 자의 한적한 피신처나 은신처가 아니라 처음부터 도전과 시련, 선택과 결단의 장소였던 셈입니다.
나는 지금 스스로 도덕적 자율권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마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동산의 중앙에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구속 안에서만 비로소 진정한 자유가 되고, 우리의 풍성한 생명은 우리가 가진 지식의 양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종을 통해서 온다는 사실을 ‘아담’이 그의 사랑하는 후손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의존적이며 언약적인 존재인 것을 깨닫고 범사에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살지니라. 무슨 중대한 결정이나 선택을 해야 할 때, 무엇이 올바른 선택인지를 항상 그에게 물어보고 해야 할 것이야.” 선과 악을 알게 하는 한 나무에 대해서 ‘쉐퍼’ 박사님은 이렇게 결론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한 나무를 만드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단순한 한 나무를 만드셨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이 나무가 다른 나무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은 단순히 ‘이 강을 건너지 말라. 이 산을 오르지 말라’라고 하셨을 수도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동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피조물로서 나를 믿고, 너희의 본문을 지켜라. 피조물로서 나를 믿고, 나를 사랑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만들어준 위치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은 결국 예수님께서 인간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는 한 ‘바리새’인의 질문에 답하면서 주신 말씀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26-28)
우리는 이보다 약 1500년 전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쉐마’에서도 똑같은 말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돕는 배필
필자는 가끔 중세의 수도사들을 부러워 할 때가 많습니다. 늘 한 곳에 살면서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명상과 기도, 성경 읽기, 그리고 예배가 고작이었을 것이니까 말입니다. 물론 밭을 가꾸는 등의 육체적인 노동도 있었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자신들의 정신 활동으로 지친 마음에 윤활유 역할을 해주었을 것이니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 비슷한 신앙의 색깔을 지닌 사람들이 모였으니 저희들끼리 배우고, 가르치고, 권면하고, 도전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고 밖으로 전도지 들고 돌아다니면서 믿지 않겠다는 사람 붙들고 싸울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또한 수도원의 일 년 계획이나 미래를 향한 비전이다 뭐다 하면서 요란 떨며 계획 세우고 알리고 할 필요도 없었을 터이니까 말입니다. 수도원 부흥이다 성장이다 하는 부담도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곳에 살겠다고 오는 사람들을 선별해서 돌려보내는 일이 더욱 큰 고민 거리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신나는 곳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필자의 이러한 부러움은 해인사나 불국사 등의 사찰을 방문 할 때도 생깁니다. 포교다 뭐다 하면서 돌아다니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와서 시주도 하고 배우기도 하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저 엄숙하게 앉아 염불이나 외우고 목탁이나 두드리면 되는 것 아닌가 여겨집니다.
어떻습니까? ‘에덴’동산은 바로 이런 곳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곳에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없습니다. 교회도 이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일까요?
<에덴 이야기>의 두 번째 장면은 하나님의 사색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18절). 이 선언은 두 번째 무대의 주제를 서술한 것입니다.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두 번에 걸쳐 무엇인가 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19-20절, 21-24절).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라는 사실은 첫 번째 방식이 현재의 난국을 해결해 줄 적절한 방안이 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방식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요? ‘아담’이 단순히 결혼하지 않고 홀아비로 사는 것입니까? ‘아담’이 혼자 있으면 오히려 하나님과의 교제나 관계가 더욱 돈독해 질 수 있어 더 좋을 텐데 왜 혼자 지내는 일이 좋지 않다는 것입니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갖추고 있으며, 하나님 외는 아무도 간섭하거나 지배하고 통제할 수 없는 엄청난 권력의 소유자, 고독한 황제 ‘아담’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다는 말입니까? 그가 고독하다는 점 빼고 말입니다. 도대체 ‘아담’에게 무엇이 문제입니까?
혹시 병원의 독실에서 몇 주간 혼자 입원해 본 적이 있다면 이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도 병문안 오는 사람도 없고, 있다면 의사나 간호사들만이 시간에 맞춰 찾아와 직업적인 질문이나 할 일만을 하고 가는 그런 곳에 입원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 때 느끼는 기분은 어떠한 것일까요? 고독과 외로움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 고독과 외로움이 ‘아담’의 문제였습니다! 고독에 관한 주제로 여러 사람들이 이런 저런 많은 책을 쓴 바 있습니다만, 스위스의 내과 의사이자 정신 의학자인 ‘폴 트루니에’(Paul Tournier)가 쓴 「Escape from Loneliness」가 꽤나 잘 알려져 있어 일독을 권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 「고독」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번역판이 나온 이후 지금까지 꾸준하게 중판을 거듭해 오고 있습니다: ‘폴 트루니에’. 「고독」. 윤경남 역. 서울: IVP, 1998.
즉 하나님은 ‘에덴’동산이 ‘에덴’기도원이나 ‘에덴’수도원이 되는 것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에덴’공동체, 즉 ‘에덴’교회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그러니까 창조 이전부터 그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였다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서두에서 ‘바울’ 사도는 이 점을 밝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찾아 적어봅시다.
바로 이 점이 두 번째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사람은 사회적인 동물로서 그는 처음부터 더불어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는 결코 혼자 살 수도 없고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됩니다. 그가 사회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친구나, 부모나, 스승이나, 제자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관계를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인간다워 질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 관계를 통해서 수없이 많은 실망과 좌절과 분노를 경험하게 되지만, 그래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 관계를 결코 떠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 존재의 한 방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직장이나 학교나 교회에서 꼴 보기 싫고 미운 사람 정말 많은데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떠나 하나님과의 보다 깊은 교제를 위해서(또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도원이나 기도원을 찾아보기도 하지만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러한 방식으로는 우리가 도무지 성숙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의 성숙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 필요한 셈입니다! 즉 만남이 없이는 인격적 성숙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이없는 역설이긴 하지만 부모가 되는 훈련은 자식을 낳고 난 뒤부터 비로소 시작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식이 부모를 부모 되도록 훈련시킨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곧장 기도원으로 달려가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면, 그분의 계시를 받기를 원하신다면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이(즉 <성경>을 집어 들고 읽는 것) 최상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취하신 조처가 무엇입니까? “돕는 배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단순히 ‘아담’이 일을 하는데 같이 돕는다든지, 애를 낳아준다든지 하는 식의 도움이 아니라, 그의 현재의 딱한 처지를 구원해 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없으면 ‘아담’이 어딘가 부족하고 불완전한 존재가 되는 바로 그러한 동역자라는 뜻입니다. <전도서>는 이 점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 하느니라 (전 4:0-12).
그러나 이처럼 절실한 ‘아담’의 필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대응 방식이 너무나 엉뚱하고 한가롭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19절). ‘아담’을 세워놓고 흙으로 짐승들을 빚고 계시는 하나님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 각각에게 이름을 지어보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한가로움도 함께 맛보시기 바랍니다. ‘아담’의 어려운 처지를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독자들은 지금 짐승들이 아니라 여자 즉 ‘하와’가 필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러한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여자의 출현을 지연시키고 있습니다. 서막(1:26-28)에서 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서막을 통해서 남자와 여자가 거의 동시에 탄생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하겠습니다. 화자의 의도인 즉은?
‘아담’이 이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20절). 이 한 구절 속에 ‘아담’의 현재 기분이 어떤지 잘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선 모든 생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있는 ‘아담’을 보면서,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그는 지식과 지혜에 있어 아주 뛰어나다는 점입니다. ‘유대’ 민족은 이름의 민족입니다. 각각의 이름은 항상 그 이름에 상당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아담’이 이들 각각에게 이름을 하사해 주었다는 뜻은 그들의 속성을 잘 파악하였다는 뜻입니다. 둘째, 그의 피조세계에 대한 권위입니다. <구약>의 다른 기록에 의하면 무릇 이름을 하사하는 자는 그 이름을 받는 자보다 신분상으로 지배계급에 속합니다. 우리도 새 자녀가 태어날 때 그 이름은 집안에서 가장 웃어른이 짓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특권-그의 지식과 권위-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는 경탄과 즐거움이 아니라 탄식과 한숨입니다: “이것 봐라. 내 짝은 어디에도 없잖아!” 어째서 그 모든 짐승들이 ‘아담’의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이들도 ‘아담’과 마찬가지로 땅에서 나왔고, 또한 ‘아담’과 마찬가지로 “생령” 즉 “살아있는 존재”가 아닙니까? 출신지나 출생 성분으로 말하자면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이들 짐승들의 이름도 ‘아담’과 마찬가지로 ‘하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이들 ‘하야’들이 자기 앞을 지나가는 동안 내내 외로움과 고독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아담’의 친구나 도울 배필이 될 수 없습니다. ‘아담’에게는 필요한 존재는 이들 ‘하야’가 아니라 ‘하와’입니다. 아무리 ‘하야’가 ‘하와’처럼 들린다 해도 결코 ‘하와’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자는 이 점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육축과...모든 짐승에게”(20절).
드디어 하나님께서 잘못을 인정하시는 모습입니다. 즉 ‘하와’를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하와’를 창조하는 일이 수없이 많은 다른 ‘하야’를 창조하는 일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깊이 잠들게 하시고”;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고”. 동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아주 신비롭고 아름다운 표현들입니다. 여자를 창조하는 일이 얼마나 신비로운 것인지 강조하려는 의도인 듯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첫 외과 수술을 마취를 통해서 수행하였다든지, 또는 남자의 갈비뼈가 여자보다 부족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등의 사실을 쓸데없이 추가해서 여자의 창조와 관련된 신비를 깨뜨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화자의 의도인 즉은 여자를 창조하는 일과 관련해서 그 신비함을 더하고자 함일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가 인간의 관찰이나 탐구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경외 받아야 할 그 무엇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아담’이 눈을 멀뚱멀뚱 크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 모습은 싱겁기가 그지없습니다.
또 하나 강조해야 할 사실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얼마나 깊고도 친밀한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본래 하나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모든 인류가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같은 장소에 살고 있기 때문에 공동운명체가 된 것이 아니라, 본래 한 사람 ‘아담’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공동운명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시도가 과연 성공했을까요? 즉 ‘아담’이 그의 고독과 외로움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까? 물론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는 순간 얼마나 황홀해 하고 만족해하는 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다른 짐승들을 보면서 취했던 태도와는 아주 판이합니다. 그는 지금 즐거움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아담’의 기분을 최대한 살려서 본문을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침내(찾았구나)! 그래 바로 이 자야. 이 사람이야말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로다! 그대 이름은 ‘이샤’(여자)라, ‘이시’(남자)에게서 나왔음이로다!”(23절).
‘아담’은 지금 ‘하와’가 자기와는 남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친족관계, 즉 혈연관계에 있음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 노래를 통해서 창조 질서 내에서의 남녀 간의 관계도 보게 됩니다. 그가 다른 짐승들(‘하야’)에게 그랬던 것처럼 여자(‘하와’)에게도 이름을 지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아담’의 권위를 보게 됩니다. 남자가 여자를 위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고전 11:9).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무슨 종속적이라거나 열등한 관계라는 암시는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와’는 ‘아담’의 구원자입니다. 그리고 그 역할마저도 한시적입니다. 천국에서는 결혼도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두 구절 (24-25절)에서 화자는 ‘아담’을 위한 하나님의 두 번째 배려가 얼마나 완벽했는지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이 두 구절은 단순히 결혼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두 구절은 결혼식 주례사로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만, 그러나 당시 ‘유대’ 관습에서 보면 아주 혁명적이고 충격적입니다. 십계명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고대 이스라엘에서 부모는 하나님 다음으로 공경하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부모나 가족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나는 자비를 원하지 제사를 원치 않는다”(눅 16:25)고 말씀하심으로써 부모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하는 자들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결혼의 기원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시 결혼하는 남자들은 그들의 부모를 떠나기보다는 대개 부모의 집에서 함께 살거나 또는 부모의 집 근처에서 살았으며, 부모를 떠나는 쪽은 남자가 아니라 오히려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본문을 통해서 결혼에 관한 성경적인 가르침과 교훈을 얻을 수는 있겠으나(아래 주석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먼저 우리의 관심을 결혼에 국한시켜 봅시다.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떠나다”(또는 “버리다”)는 동사와 관련된 것으로서 결혼은 새로운 하나의 독립된 가정 중심의 생활을 의미합니다. 여자는 물론 남자도 그들이 과거에 속해있던 각자의 가정을 떠나서 새로운 가정에 적응하고 충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민자가 우선적으로 이민국에 열심히 적응하며 살아야 하듯이 말입니다. 이 점이 결혼의 배타적인 측면입니다. 그러나 많은 결혼이 그렇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비극으로 치닫는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경우 많은 부모들은 자식들이 결혼하기 전에는 그 자식의 전인적인 교육에 대해서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다가 그들이 결혼한 후에야 갑자기 교육을 시키려 듭니다. 이 점은 특히 며느리를 맞이하는 시부모의 경우 더욱 심합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결혼하는 당사자는 어떻습니까? 이 역시 우리나라에만 볼 수 있는 문화로서, 젊은 부부들은 결혼했으면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독립한 완전한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결혼 전보다 더욱 부모에게 종속되려 합니다. 그리하여 부모들은(특히 친정부모) 대를 이어 그들의 자식에게 충성하고 봉사합니다. 자식들이 부모를 섬기고 보호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두 번째는 상호 결합에 관한 것인데, “한 몸을 이룬다”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육체적인 결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결혼의 영속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둘이 원래 하나였던 만큼 결혼을 통해서 둘이 다시 하나로 되돌아가는 것으로서 계속 그러한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 들의 시부모도, 친정부모도, 친구도, 스승도, 목회자도. 어느 누구도 두 사람의 결혼생활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간섭할 권리가 없습니다. 결혼 자체가 이처럼 배타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 이혼은 명백히 창조의 질서를 위반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들의 내적 관계에 관한 것으로서, “그들이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도 사실이지만, 보다 깊게는 서로의 관계가 서로 숨기고 감추고 할 필요도 없는 아주 정직하고도 완벽한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 화자는 ‘아담’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가 완벽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2장을 1장과 연계해서 읽게 되면, ‘아담’과 짐승과 ‘하와’의 창조는 단지 창조 이야기의 부록 정도로 그치고 맙니다. 그러나 <창세기> 2장을 <에덴 이야기>라는 전체적인 틀 안에서 바라보게 되면, 즉 2장을 타락이라는 3장의 서곡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 의미가 아주 뚜렷해집니다. 2장 전체적으로 강조하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아담’을 흙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그분만이 지니신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하나님의 형상이 되게 하여, 그에게 완벽한 지식과, 완벽한 권세와, 그리고 완벽한 환경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부족하여 다시 그에게 그의 반려자를 주어 그의 딱한 처지를 구원해 주도록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 하여금 위로는 하나님과, 아래로는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그리고 옆으로는 ‘하와’와 완벽한 관계를 맺도록 배려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은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배신할 아무런 이유도, 동기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배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가증스러운 것이었던 지를 알게 됩니다. 그는 도무지 핑계할 것이 없었습니다.
3. 유혹: 뱀과 여인
‘사탄’은 한 번도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라고 직접적으로 말한 적도 없고, 또 거짓말을 했다고 비난받을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가 한 말은 모두 사실임이 뒤에 밝혀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고, 그녀의 남편도 이 일에 동참시켰습니다. 도대체 누구 때문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경>은 여전히 ‘사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고후 11:3).
바로 여기에 ‘사탄’의 간교함이 돋보이는 것이고, 그래서 화자는 <에덴 이야기>의 세 번째 장면을 시작하면서 뱀의 간교함에 대해서 먼저 해설을 덧붙인 다음에 뱀과 ‘하와’의 대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3:1).
무슨 의도입니까? 독자들로 하여금 이어지는 대화의 내용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어디서 그가 잘못하고 있는지를 밝혀내어 보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가련한 여인처럼 순진무구하게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겠지요. ‘사탄’은 우리 인류가 처음으로 범죄 하도록 하는데 대화라는 도구를 사용했다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유혹이 일어나고 있는 곳은 아마도 동산 중앙 근처 그 “문제의 나무”가 잘 보이는 곳일 것으로 짐작됩니다. ‘사탄’이 혼자 있는 ‘하와’에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그 동안 주도적인 역할을 하시던 야훼 하나님이 갑자기 보이지 않습니다. 대화중에 ‘사탄’과 ‘하와’가 그의 이름을 거명하기는 하지만 그나마도 <에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친숙하고 친밀한 그 이름이 아닙니다. ‘아담’도 역시 없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먼저 시작하고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인물도 ‘하와’가 아니라 ‘사탄’입니다. 즉 이 장면에서는 처음부터 뭔가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고, 역할도 뒤죽박죽이 된 채로 시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갑자기 달라진 무대 분위기를 감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제 뱀의 유혹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살펴봅시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는 지금 하나님과 ‘하와’ 사이에 맺어져 있는 언약에 대해서는 짐짓 모르는 채 하면서 아주 순진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첫말은 실은 질문이 아니라 놀라움과 회의가 담긴 선언입니다. 즉 이런 것이죠: “아니, 그래 정말 하나님이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했단 말이지!” 아주 교묘한 유도 선언입니다.
뱀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까?” ‘아담’과 하나님 사이에서 있었던 대화를 엿들었을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하와’에게 이런 말을 하면서 접근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뱀은 지금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슬그머니 왜곡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그의 간교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날 이간질의 명수들이 쓰는 수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언약의 내용만 왜곡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언약이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님을, 즉 그렇게 열심히 지킬 필요가 없음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부르는 방식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에덴이야기>에서 하나님은 항상 화나 독자들에게 친숙하고 친밀한 ‘야훼’ 하나님인데, 뱀은 하나님을 그냥 ‘엘로힘’으로만 부르고 있습니다. ‘야훼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서 언약의 당사자입니다. 지금 뱀은 이러한 하나님을 단순히 ‘엘로힘’으로만 부름으로써 그가 창조주이긴 하지만 왠지 멀리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하나님을 언약의 당사자가 아닌 단순한 창조주로서 묘사함으로써 왠지 그가 멀리 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슬그머니 왜곡되고, 또 그가 인간의 대소사에 시시콜콜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배교(背敎)의 출발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순진한 ‘하와’는 그냥 넘어 가버립니다. 그녀는 지금 뱀의 선언 중에서 잘못된 부분을 교정해 주는 듯한데, 그나마 정확한 것이 못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만 빼고 동산 나무의 모든 실과는 먹을 수 있다고 하신 것에 반하여, 그녀는 지금 “모든”이라는 단어를 빼버립니다. 단순히 동산의 실과를 먹을 수 있다는 투입니다. 그리고는 그 동산 중앙의 나무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만지지도 말라” (3:2-3). 그리고 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켰습니다: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3:3). 하나님은 그들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2:17).
우리가 보기에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만, ‘하와’가 저지르고 있는 결정적인 세 가지 잘못은 하나님의 말씀을 삭제하고, 추가하고, 그리고 수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범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계시록>의 끝 부분에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하와’는 지금 뱀보다 한 걸음 더 앞질러 하나님의 속성을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어느새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언약의 ‘야훼’ 하나님이, 엄격하고, 딱딱하며, 멀리 초월해 있는 하나님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진정한 코미디언은 자신이 웃지 않고 남을 웃기는 것이라면, 진정한 ‘사탄’은 자신보다 사람들을 더 앞서서 범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뱀의 대답에서 그의 간교함은 더욱 돋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유혹을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천재입니다. 즉 그는 처음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일부러 모르는 척 가장하면서 ‘하와’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보다 단호하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그의 깊은 속마음까지 다 알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첫째는 ‘하와’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이 예언은 그대로 적중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에도 930년을 살았으니 말입니다(5:5)! 그러니 여기서 진실을 말한 쪽은 하나님이 아니라 뱀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그들이 단순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을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그것을 먹는 순간(또는 먹자 말자)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2:17).”
두 번째는 그가 하나님의 마음까지 읽을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5). 이 말 역시 사실임이 드러납니다: “야훼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3:22).
그러나 뱀의 이 말은 반쪽 진리만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듯이 <에덴 이야기>에는 온통 하나님의 임재와 교제, 그리고 그의 생명력에 관한 상징-나무, 과일, 네 강, 금과 보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필수 불가결한 예배의 요소들입니다. 공동체를 떠난 이스라엘은 생각할 수 없고, 성소를 중심으로 한 예배를 떠난 이스라엘 또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형벌은 육체적인 죽음 그 자체보다는 공동체로부터 쫓겨나는 것입니다. 즉 그가 맺고 있던 그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즉 그는 이 순간부터 살았다고 하나 실은 죽은 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인 죽음인 셈입니다. 인간은 그가 맺고 있는 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볼 때 (1) 생물학적 관계 (2) 사회적인 관계 (3) 영적인 관계로 구분할 수 있겠는데, <성경>이 말하는 인간론은 이 중 어느 한 가지도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인이 그 공동체에서 축출하는 형벌은 직접적으로는 두 번째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세 번째 영적인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도 단절된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당시 근동지방의 정치 경제적인 상황에서 볼 때, 이 둘의 관계가 단절되면 궁극적으로는 첫 번째 관계도 단절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은 그가 길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이미 죽은 자 취급을 당합니다. 그를 위하여 곡을 하는 사무엘의 행동이 이를 증거 해 줍니다(삼상 15:36-16:1). 그리고 ‘사무엘’은 그가 죽을 때까지 ‘사울’을 다시는 보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뱀은 정말 간교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언-“너희들이 이것을 먹는 그 날에는(그 순간부터) 정녕 죽으리라”(2:17)-은 나와의 모든 교제나 관계가 다 끊어지리라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결국 분리일 것입니다. 따라서 일차적인 죽음이란 하나님과의 풍성한 교제가 상실되는 것이고(요 10:35), 이차적인 죽음은 육체적인 죽임이 될 것이며, 그리고 영원한 죽음은 <누가복음> 15장의 어느 부자에서 보듯이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담’과 ‘하와’는 비록 육체적으로는 930년을 살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생물학적인 삶을 산 것 뿐이었습니다. <계시록>의 ‘사데’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너희들이 살았다고 하나 실은 죽은 자로다”(계 3:1).
뱀은 얼마나 간교하고 집요한가! 오늘날 우리 모두가 그러하듯이 뱀은 그 자신이 밟았던 전철을 ‘하와’에게 그대로 따르기를 유혹했습니다. 우리는 범죄 함에 있어서 늘 혼자이기를 싫어합니다. 나만 비난받기를 싫어합니다. 그리하여 달콤하고도 교묘한 말로 끊임없이 동조자를 찾아 나섭니다. 특히 그 자가 성도인 경우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뒤따라옵니다. 기도해야 된다고 걱정하기도 합니다. 거룩한 위선이라고나 할까요? 또 있습니다. 뱀은 자신의 지식을 하나님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것에 썼습니다. 그의 유혹의 기술은 단번에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짐짓 그렇게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 같지 않은 영역을 건드립니다: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그래서 문제의 핵심은 “과연 죽는 것인가 아닌가?”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는 “뱀을 믿을 것인가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의 문제로 끝나고 만 것입니다.
따라서 유혹 이야기의 핵심은, “이 ‘사탄’이 도대체 누구일까?”,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반역하게 되었을까?”, “이 뱀의 정체는 무엇일까”하는 등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성경>의 여러 부분들을 찾아가면서 ‘사탄’과 그의 타락의 기원에 대해서 설명을 하려고 하지만, 결과는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특히 ‘사탄’의 대리자로서의 뱀의 정체에 대해서는 근동의 여러 설화에 등장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구약> 역시 그러한 모티브를 취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27:1)나 <욥>(26:13) 등에서 하나님의 대적자로서의 뱀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서도 ‘사탄’을 “옛 뱀”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어쨌든 구약세계에서 뱀이 지니는 상징성은 <레위기> 11장에서 보듯이 살아있는 생명체로서 가장 불결한 짐승이니 만치 독자들에게 주었던 효과가 컸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뱀에 대한 느낌이 다른 짐승에 비해서 그렇게 유쾌하지는 못한 것을 인정합니다.
오히려 핵심은 그러한 유혹은 언제 어디서나 아주 교묘한 형태로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류의 지상낙원이었고 하나님이 늘 거닐고 계셨던 바로 그곳에서조차도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성도간의 교제가 풍성하고 성령 충만 하던 초대교회에서도 뱀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찾아와 유혹했습니다(행 5). ‘사탄’은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갑니다. 이러한 유혹이 올 때 이상하게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위 성도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혼자서 하나님 말씀 몇 마디 가지고 그 유혹에 대항해 보지만 번번이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바로 이러한 것을 처음으로 경험한 사람이 바로 ‘하와’였습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시험받으시던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때 ‘사탄’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켰는지, 그리고 예수님은 이에 어떻게 대처하셨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사탄’의 말을 믿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고, 신뢰했으며, 그 말씀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혼자 있을 때 유혹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가에 대한 좋은 본보기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 가지, 교회를 향해서 오는 유혹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 그들이 받았던 유혹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도 ‘베드로’는 이내 감지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적어도 공동체를 향해 다가오는 유혹과 범죄에 대해서 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목장이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모두가 한꺼번에 넘어가는 일을 지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4. 타락: 아담과 하와
내가 본 한 영화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사람이 살인을 하게 되는 세 가지 동기가 있다. 그것은 돈이나, 애정이나, 또는 복수심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동기가 있는데, 그것은 교만이다. 그가 살인을 하고도 무사할 수 있다고 믿는 그 교만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주위에서 보험금이 탐이 나서 아내나 남편, 부모를 살해하는 이야기를 너무나 많이 듣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도 부족하여 자기 자신의 발목을 철로에 묶어 기차에 치어 잘리게 하고는 보험금을 신청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두 보험 회사를 아주 우습게 본 사람들입니다.
나는 타락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늘 이런 질문을 합니다. 물론 아직도 속 시원하게 해답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만: “그 찬란한 하나님의 형상이 겨우 이것밖에 되지 않았단 말인가! 50:50의 확률에서 왜 하필이면 택하지 말아야 할 그 50을 택했단 말인가!” 하나님의 솜씨가 겨우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필자의 아버지께서 오래 전에 화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알코홀 공장을 수 년 간에 걸쳐 어렵게 설계하여 시험 가동하는 첫 날에 공장이 폭발하여 모든 사업계획이 허사로 돌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도 이런 수준이었단 말입니까?
도대체 그가 누구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온갖 정성과 계획으로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로 만드셨던 분입니다. 오죽 했으면 하나님 스스로도 “심히 좋구나”하고 탄복하신 그러한 존재가 아닙니까.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첫 번째 시련에서 진정한 자유의지가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자유의지-죄와 타락으로 얼룩져서 십중팔구 하나님을 거부하는 쪽을 선택하는-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야말로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자유스러울 수 있는 그러한 자유의지를 말합니다. 이러한 그가 마치 알코홀 공장이 시험가동 첫날에 폭발하듯, 또는 우주선이 카운트다운을 마치고 이륙하는 순간에 엄청난 굉음을 내고 폭발해버리듯이 그 첫 시험에서 철저하게 실패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누구의 잘못입니까? 우주선의 잘못입니까 아니면 설계자의 잘못입니까?
‘아담’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아담’의 잘못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입니까? 물론 ‘아담’을 우주선과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하드라도 하나님은 이 일에 결코 무관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모든 일에 누군가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책임을 기꺼이 졌습니까? 아니면 아담에게만 그 책임을 물었습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은 스스로 그 책임을 떠맡았습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뒤에 다시 돌아오기로 하고, 먼저 ‘아담’의 책임 문제를 따져보아야겠습니다. 그 역시 이 문제에 결코 자유스러울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가 다름 아닌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의 동기는 진정 무엇이었을까요? ‘하와’의 동기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와’의 동기는 뱀의 그것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모두 한 가지 동일한 동기인 듯합니다. 무엇일까요?
<에덴 이야기>는 네 번째 장면의 “타락”에서 반 절정에 이릅니다. 우리가 ‘히브리’ 언어와 문학에 전혀 생소한지라 절정의 효과를 완벽하게 맛볼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입니다만, 그래도 이야기의 형식적인 측면들을 통해서 대충은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내용 한 가지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지나갑시다. 모든 예술 작품이 다 그러하듯이,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내용을 담고 있는 형식을 먼저 파악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자는 이러한 생각에 다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음악을 듣고 즐거워하는 것이 그 음악의 장르나 작곡의 기법을 다 알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떤 아마추어 화가 한 분의 말에 따르면, 소나무를 한 그루 그려도 계절에 따라 물감의 배색이 달라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모르고 소나무를 그리는 사람은 계절에 상관없이 늘 같은 소나무만을 그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형식에 구애받음이 없이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도 있겠지만, 보다 세련된 감상을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작품을 이루고 있는 형식과 구성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도 늘 이 점을 염두에 두게 되면 우리의 신학이나 신앙이 놀랄 정도로 성숙하게 됩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통찰력을 갖게 되고, 자신감이 생깁니다. 흔히 성경 구절 몇 구절 읽고 서둘러 교훈을 끄집어내는 식의 단조로운 경건주의 일변도의 성경공부에서 탈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아주 흥미로워 집니다.
그 동안 다소 생소하고도, 느릿느릿하게 흘러오던 이야기가 이곳에 이르러 갑자기 템포가 빨라지고 아주 간결해집니다. 즉 화자는 유혹에서 타락에 이르기까지의 등장인물들의 행동에 대한 묘사를 ‘스타카토’처럼 아주 짧고도 간결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엄청난 사건을 단 세 개의 동사로 처리해 버리고 맙니다: “취하고”; “먹고”; “주었다”.
이러한 표현이 주는 효과는 타락에 이르기까지 ‘하와’가 취한 일련의 결정적인 행동이 일사천리 식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한 결정이 자리 잡은 이상 더 이상 멈추거나 머뭇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 스스로 그 효과를 잠시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혹에 이르는 긴 심리 묘사가 있고, 이것은 범죄의 동기에 대한 강한 암시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와’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에덴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일곱 개의 장면이 U 字型의 대칭 구조를 이루면서, 그 중심 가장 깊은 골짜기에 타락 이야기(6-7절)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짧은 타락 이야기는 다시 범죄의 동기-실행-영향(결과)을 중심으로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타락의 동기가 되었던 ‘하와’의 부푼 기대-먹기에 좋고, 눈에 보기에 즐겁고, 지혜를 주리라는-가 한쪽에 있고, 또 한쪽에는 그 기대를 좇아 행한 결과-눈이 밝아지고, 벗은 줄을 알게 되고, 나무 사이에 숨게 되는-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기와 그 결과에 대한 이러한 대조는 그들의 범죄의 심각성만 아니라면 차라리 우스꽝스럽다 못해 눈물겹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칭의 중심이자, 전체 <에덴 이야기>의 가장 낮은 골짜기에 아담의 행위가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그도 먹었더라”(לאיּ: 와요칼).
바로 이 동사야말로 전체 <에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아담’이 아내로부터 그 과일을 받아 들었을 때, 온 우주에는 요란한 비상경계령이 내려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놓고, 순진한 하와만 빼고 모두가 하던 동작을 멈추고 숨을 죽이며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하늘의 천군 천사들도, ‘에덴’동산의 모든 피조물들도, 그리고 그 뱀도. 정말 숨 막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그가 한입을 깨물었을 때, 모두는 “아, 안돼!”하며 땅이 꺼져라 장탄식을 내뿜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내 두려움으로 떨었습니다. 이 순간 하나님은 차라리 눈을 감고 얼굴을 돌려 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슬픔과 후회와 배신감으로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죄의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7절). 아담의 이 행동은 불순종을 향한 인간의 마지막이자 결정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는 보다 궁극적인 결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심판은 한 사람으로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롬 5:12-19).
이 사건은 다름 아닌 동산의 중앙에서 일어났고,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동산지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피조물의 우두머리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그가 열매를 먹기 위해서 어느 누구와 싸울 필요도 없었습니다. 무슨 영웅적인 전투를 통해서 빼앗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나무를 지키는 호위병이나 천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싸워야 할 상대는 바로 자신뿐이었습니다. 그 마음 판에 새겨진 양심의 법이 바로 그가 싸워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자유의지는 그 양심을 선택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담’은 다른 쪽을 선택했을까요? 그의 동기는 진정 무엇이었단 말입니까? 혹자는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여자의 범죄에 함께 동참했다고 말합니다. 일종의 夫唱婦隨라고나 할까요. 그리고 그의 이러한 행동을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은 것에 비유합니다(엡 5:25). 그래서 ‘아담’의 범죄는 그 동기가 아주 고상하게 승화됩니다. 애정 때문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에덴 이야기>의 핵심은 “그리고 그도 먹었더라”입니다. 이 선언은 이야기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배경음악과도 같은 것입니다. 즉 그의 행동은 의도적이고, 사악했으며,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은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다”(딤전 2:14) 고 말함으로써, ‘아담’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없는 듯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구절마저도 두 가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방금 해석한 바처럼 타락의 일차적인 책임을 ‘하와’에게 묻는 것으로서, ‘사탄’에게 속아 먼저 범죄 한 쪽은 ‘아담’이라기보다는 ‘하와’라는 입장입니다. 두 번째는, ‘아담’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으로서, ‘사탄’에게 속아서 범죄 한 쪽은 ‘하와’이지 ‘아담’은 속아서 범죄 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이고도 고의적으로 범죄 했다는 해석을 취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두 입장 중 어느 쪽을 취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도 계속해서 ‘아담’에게 궁극적인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롬 5:15).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고전 11:8)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이제 우리는 타락 이야기의 첫 번째 부분, 즉 타락의 동기로 되돌아갈 차례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아담’의 동기가 ‘하와’의 그것과 같다고 했으니, 이제는 “도대체 하와의 동기는 과연 무엇이었을까?”를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었을까요? <성경>은 이것을 죄악이라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 2:16).
그리고 ‘하와’는 먹음직한 것을 먹고 싶어 했고, 보기에 아름다운 것을 즐기고 싶어 했고, 또 지식과 지혜를 추구하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본능적인 동기였습니다. 이것이 과연 나쁜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자가 누구이며, 인간의 인간다움이 과연 무엇이란 말입니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와’가 이러한 가치들을 추구하는 것에는 하등 잘못된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육체의 필요한 것들을 추구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고, 지식과 지혜를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이 지닌 특권이자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문화명령으로 알려져 있는 “창조명령”(창 1:28)이 그 점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서 앞장에서 상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Morris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참고도서 11).
만일 ‘아담’이나 ‘하와’가 이러한 가치들을 추구하기를 포기한다면 ‘에덴’동산은 무미건조하고, 무지몽매한 자들의 천국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예술도, 문학도, 학문도, 기술도 없는 그러한 곳 말입니다. 오직 ‘아담’과 ‘하와’의 영혼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가치들이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압도해 버릴 때 일어나게 됩니다. ‘하와’에게는 이 모든 것들보다 앞서서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와’는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동산 중앙의 그 나무가 다른 나무들과 동일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별로 특이하게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구별해 놓은 것, 즉 거룩한 것이 거룩하게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사람이 거룩하게 행동하지 않을 때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곳에는 어느새 세속주의와, 혼합주의와, 그리고 다원주의가 지배하게 됩니다. 이러한 세계관의 특징은 어떤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인간 그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주의 주인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화자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와가 보기에 동산 중앙의 그 나무도 심히 좋았더라”(6절상).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서막>에서 하나님이 창조행위와 관련해서 쓰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어느새 ‘하와’는 창조주 하나님의 지위에 올라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에덴 이야기>의 네 번째 무대의 주인공은 ‘야훼’ 하나님도 아니고 ‘아담’도 아닙니다. ‘하와’가 모든 것을 판단하고 주도해 갑니다. 등장인물들의 역할이 반전되어버렸습니다. 그 동안에는 인간에게 필요한 무엇인가를 “취하여 주는” 쪽은 ‘야훼’ 하나님이었습니다. 즉 그가 흙을 취하여 ‘아담’을 만들었고, 그의 갈빗대를 취하여 ‘하와’를 만들었으며, ‘하와’를 다시 ‘아담’에게 주었습니다(15,21-23절). 그러나 이곳에서는 ‘하와’가 과일을 “취하여 주고”있습니다.
이제 ‘하와’는 더 이상 아내, 즉 “남자의 여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아담’이 남편, 즉 “여자의 남자”가 되어버렸습니다. 히브리 성경은 이러한 변화를 아주 의미심장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녀와 함께 그녀의 남편”(6절). <히브리 성경>은 ‘아담’을 ‘아담’으로 부르지 않고, “여자의 남편”이라고 처리함으로써 그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 여자와 함께 한 그 여자의 남편”(감 레이솨흐 임마흐)이라는 표현에서 “그 여자”는 사실 불필요한 수식어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씩이나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하와’의 이름을 ‘이샤’(여자)로 부르는 이유는 그가 ‘이시’(남자)에게서 나왔기 때문인데, 이제는 그 남자가 여자에게서 나온 듯한 느낌을 자아내도록 그를 ‘이솨흐’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들은 이제 함께 하나님의 지위와 특권을 찬탈하기 시작합니다. 그 동안 그들이 필요한 것들은 ‘야훼’ 하나님께서 모두 제공해주셨는데, 이제부터는 그들 스스로 필요한 옷을 만들어 입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7절). 비교를 위하여 <창세기> 1:7, 11, 26, 23 및 2:18 등을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들이 타락 후에 하나님께서 가족 옷을 해 입으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창조주의 고유한 권한에 대한 재확인이기도 합니다.
‘아담’이 타락하게 되는 동기는 ‘하와’나 뱀과 마찬가지로 가장 최고의 가치를 최고로 여기지 않는 데서 비롯한 것입니다. ‘아담’은 ‘하와’의 말을, ‘하와’는 뱀의 말을, 뱀은 자신의 말을 듣게 된 것이 이 모든 창조 질서가 파괴되는 동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 동기는 그렇게 하고서도 무사할 수 있다고 믿은 그 자만이었습니다.
그 옛 뱀, ‘사탄’은 지금도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도록 계속 유혹하고 있습니다. 내가 모든 결정의 주인이고 가치 판단의 최종 권위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니라”(잠 1:7). 이것이 우리가 자랑해야 할 가장 큰 자랑입니다.
이제 ‘타락’에서 남은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하와’의 동기가 과연 성취되었을까 입니다. 즉 결과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은 원하던 지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들이 벗었다는 그 지식입니다. 이 지식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야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그를 두려워하고 멀리하게 하는 지식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한낮의 뜨거운 태양열을 피해 오후 서늘한 바람이 부는 시각에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이 타락한 이후에도 그 동산을 거닐고 계셨고, 그들과 대화하러 오셨으며, 동산은 여전히 풍성했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백팔십도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뱀도 말한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함께 동산을 거닐며, 대화하고, 꿈을 나누며, 아주 친밀한 ‘야훼’ 하나님이 아니라, 저 멀리 하늘에 있는 두려운 창조주 내지는 신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그러한 신적 존재로 말입니다.
‘쉐퍼’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전에 인간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손을 흔들기만 하면, 그토록 경이로웠던 순간이 이제는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신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도 두려움의 원인이 되고 말았다.” 쉐퍼의 [기독교성경관] (참고도서 7)의 제 5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벗었으나 전혀 거리낄 것이 없었던 “아담과 그 아내”(2:25)는 이제 부끄럽고 두려워서 나무 사이에 숨어 버립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고, 그를 더욱 알아가도록 만든 그 나무들을 오히려 하나님을 피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 아주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나 ‘쉐퍼’는 계속 말합니다. 동일한 참고 서적 82쪽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존재라고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것은 우리의 과거입니다. 우리는 다른 왕-거짓의 아비-를 섬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자만해서는 안 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1-22)
따라서 우리는 죄인들의 세계를 주목하고 그들을 위하여 울어야겠습니다. 우리가 그 사람들을 바라볼 때 우리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을 절대로 잊지 맙시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여전히 그들과 한 부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여전히 죄를 범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너무나 자주 우리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 무사할 수 있으리라는 자만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구속받았다면 참으로 감사합시다. ‘아담’과 그 아내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그와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화하고, 꿈을 나누고, 게으름을 고치고, 잘못된 일에 대해서 책임지려 하며, 하나님께서 특별히 정해놓으신 최고의 가치들을 좇아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삶을 원하십니까?
5. 심문: 네가 어디 있느냐
1980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 근해 ‘포클랜드’ 섬의 영유권을 놓고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자존심이 걸린 한판 전쟁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편에서 보면 이 섬이 지리적으로는 自國 근해에 있어 나름대로 영유권을 주장할 충분한 근거는 있었습니다만, 실질적으로는 그 동안 영국의 소유였고 국제적으로도 그렇게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실은 ‘아르헨티나’의 군사 정권이 괜한 시비를 걸어온 셈이었습니다. 독재 치하에서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국에서는 이 전쟁을 위하여 여왕의 둘째 아들인 ‘앤드류’ 왕자까지 참전하는 등 거국적인 의지와 결의를 보였습니다. 만일 지게 되면 그들의 자존심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기 때문이었습니다. ‘캐나다’와 미국도 영국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전쟁은 불과 며칠 만에 영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싱겁게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 직후 영국에서는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쟁에 이겨 온 나라가 축제분위기로 들떠 있는 판에 영국의 외무장관이 사임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르헨티나’의 계획과 의도를 미리 파악하여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책임을 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는 어떠했을까요? 전쟁에 져서 나라가 안팎으로 엉망이 되고, 국제적인 망신살이 뻗쳤는데도 누구하나 책임지고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바로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훌륭한 지도자를 갖는 것이 국가나 공동체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며 귀중한 선물인가를 알게 하는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들어 미국의 장래에 대해서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경우를 보더라도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그의 성추문에 대해서 책임을 물어 그를 탄핵하고 사임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대답한 바 있습니다. 국가 지도자의 사생활은 그의 공적 생활과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즉 대통령으로서 업무 능력만 탁월하면 됐지 여자와 무슨 관계를 갖든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과 30년 전만 해도 미국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한 예로, ‘에드워드 케네디’가 관련되었던 ‘체파쿠트니크’ 호수의 익사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그가 여비서를 태우고 술에 취하여 운전하다 호수에 빠졌을 때, 차와 여비서를 남겨두고 혼자만 헤엄쳐 나온 그를 두고 국민들은 비겁하고도 비도덕적인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 그는 세 번이나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갔으나 번번이 도중하차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성명서를 내고, 대통령 후보 경선을 영원히 포기하겠다고 했습니다. 그제야 국민들은 참으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고 칭찬했습니다. 지도자의 책임과 관련한 좋은 본보기입니다.
<에덴 이야기>의 다섯 번째 장면은 바로 이 책임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무대의 제목으로 “심문”이 더 잘 어울릴 듯합니다. 물론 심문자는 ‘야훼’ 하나님이십니다. 무대가 시작되자 말자 ‘야훼’ 하나님이 다시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계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3:9).‘야훼’ 하나님께서 무대의 주인공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담’을 먼저 부르고, 이어서 ‘하와’에게 나아갑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3:13).
창조의 질서를 다시 회복시키겠다는 의미입니다. 뱀에게는 아예 질문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뱀은 처음부터 하나님과의 대화의 상대가 될 수 없었던 존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형상인 ‘아담’과 ‘하와’만이 하나님과 대화하고, 대응하며, 권리와 책임을 공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감히 도울 수 있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먼저 ‘아담’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우리는 이 질문에 상당히 불만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그 동안 어디 가셨다가 일이 다 낭패가 된 후에야 어슬렁어슬렁 나타나서 ‘아담’에게 책임이나 묻겠다는 것입니까? 왜 진작 말리지 못했습니까? 왜 ‘아담’이 그렇게 할 때 목을 비틀어서라도 막지 않았느냐고 우리는 따지고 싶은 것입니다. ‘아담’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질문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 하신 것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못하셨기 때문이지요.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그 동산에서, 바로 그들 곁에서, 그들이 하는 짓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것뿐이었습니다. ‘아담’의 자유의지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희망마저도 산산이 깨어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니 ‘아담’이 타락할 줄 미리 알고 계셨고, 그래서 막상 그가 불순종했을 때 크게 놀라워하거나 슬퍼하지도 않았으며, 그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권위에 손상을 입히지 않았으니, 그를 영광스럽게 한 것이 됩니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안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이런 질문은 미 성숙아나 노예들이나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대해서 전혀 알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누군가 일일이 따라다니면서,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늘 누군가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되어 매사를 친절하게 인도하고 지시해주어야 합니다. 어떤 규범이나 원칙이 소용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매정하고, 딱딱하며, 인간미라고는 전혀 없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늘 누군가 곁에서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어야 하고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늘 도움을 받고 얻어먹기만 하는데도 도무지 부끄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존심과 자긍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현재 처지에 대해서 분노할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그저 슬슬 기며 무조건 없었던 일로 용서만 받으려고 합니다. 예로써, 시험 중에 부정행위를 하다가 발각되었을 때 깨끗이 인정하고 포기해야 하는데, 악착같이 시험 감독관을 따라다니며 한번만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감독관이 이 학생의 요구대로 그 일을 없었던 일로 간주하고 그를 용서해준다면 어떻게 됩니까? 지난 1980년 ‘행클리’라는 자는 ‘레이건’ 대통령을 저격하고도 무죄 방면되었습니다. 그가 병원으로부터 정신병자라는 진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에서 범죄를 행하고도 용서받을 수 있는 두 특권층이 있습니다. 미성년자와 정신병자입니다. 본인들은 무조건 용서를 받아 좋아하겠지만, 그 순간부터 그들은 사회로부터 정상적인 인간 대우를 받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주는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유와 책임 아니겠습니까? 그 둘은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존 스토트 박사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책임을 물으려 하시는가?”에 대한 문제를 놓고 아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인간다움의 가장 큰 특징이 인간의 자유와 책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외쳐야 합니다. 책임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말입니다.
따라서 ‘아담’은,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마땅히 기뻐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직도 나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있구나. 그렇다면 내가 당당하게 나가서 맞서야지.” 따라서 만일 하나님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를 대한다면 오히려 심히 불쾌하게 생각했어야 마땅합니다.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알고” 거지는 왜 항상 거지로 남아 있을까? 남에게 그저 얻어먹는 것이 도무지 부끄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록 순간의 판단착오로 엄청난 실수를 저질러 다른 짐승들 보기에도 창피해서, 이렇게 나무 뒤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도, 여전히 그를 찾으시니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질문은 단순히 ‘아담’에게 그 책임을 묻겠다는 차원 이상입니다. 단순히 그에게 책임만을 물으려 했다면 “왜 네가 그곳에 숨어 있느냐?” 라든지 “왜 네가 그 짓을 했느냐?”라고 물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가인’에게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4:9)라든지, ‘하갈’에게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16:8)라는 질문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인의 죄를 들추어내어서 그 책임을 물으려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선한 목자의 모습을 봅니다: “아담아 네가 누구냐? 너 자신을 바라보아라. 네 모습을 쳐다봐. 네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그 나무 뒤가 아니라, 나하고 거니는 것이지.”
그러나 ‘아담’의 유전인자는 이미 변명과 자기 합리화라는 방어 체계를 구축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정상적인 반응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대답이 이를 증거 합니다. 우리는 영 엉뚱한 대답을 듣게 됩니다.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3:10). 그는 지금 그가 숨고 있는 이유를 들먹이고 있습니다. 이 대답은 “네가 왜 그 나무 뒤에 숨었느냐?” 라는 질문에 합당한 것이지,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에 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하면 “내가 여기 이렇게 숨어 있습니다.”하면 될 텐데, 여전히 나무 뒤에 쪼그리고 앉아서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대면하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과 흡사합니다. 지금 동거하고 있는 남편 데리고 오라고 했더니 엉뚱하게 예배 운운하고 있습니다(참고. 요 4:16-20). “순종이 예배보다 낫다”(삼상 15:22)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요? 오늘날 우리가 회개나 순종의 설교나 권면을 들을 때, 교회 사역 운운하며 그 銳鋒을 피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아담’은 벗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지금 그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그가 벗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벗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질문은 아마 그런 것일 것입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3:11상). 도대체 자기가 벗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 뱀이 말해주었을까요? 그 여자가 일러주었을까요? 아니면 ‘아담’ 자신입니까? 이 질문은 ‘아담’의 그 두려움과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도대체 어디서 왔느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대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먹었느냐?”(3:11하). 이제 드디어 하나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문제의 핵심을 바라보도록 합니다. 이것은 정말 결정적인 질문입니다. 아주 중대한 순간입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더러 자기 남편을 불러오라고 명하는 그 순간과도 같습니다. 두 경우 모두 죄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나아오도록 권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네 자신을 바라보아라. 네가 지금 어디 있느냐? 혹시 네가 회피하고 있는 그 무엇이 있느냐?” 당신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담’의 자기방어체계는 완벽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3:12). 이 한마디 말로 ‘아담’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친구를 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그에게 모든 것을 제공해 주었던 창조주 하나님마저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적자와 범법자로 몰아갑니다. 타락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와’를 자신에게 소개해 준 하나님에게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지금 타락의 원인을 주변 환경과 운명의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처럼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담’은 우리 모두를 대변하고, 대표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죄의 결과가 얼마나 사악하고 심각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먹었느냐?”하고 물으실 때, “예, 죄송합니다. 저도 먹었습니다.”하면 될 것을 계속해서 문제를 꼬이게 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이렇게 열심히 변명을 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더 이상 듣지 않고, ‘하와’에게로 얼굴을 돌립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묻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3:13) 안타깝고 놀랍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여자 역시 ‘아담’의 대답과 대동소이 합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3:13).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 자신과 맺고 있는 또 다른 관계를 파괴하고, 적대시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도 ‘아담’보다 나은 것이 적어도 하나님에게는 그 책임을 돌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어쨌든 혹시 이 여자는 ‘아담’과 다를까하고 기대해 보았지만 역시 실망뿐입니다.
이처럼 타락은, 아니 타락 이후의 자기합리화를 통해서 그 모든 친밀하던 관계-인간상호, 하나님, 피조물-가 파괴되고, 그때부터 긴장과 갈등과 의심과 적대감으로 가득 찬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고 있음을 봅니다. <이사야>는 종말의 시대는 이러한 모든 끊어진 관계들이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고 노래합니다: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6-9)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 천국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회개는 단순히 과거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회개의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용서만 받고 산다면 다른 피조물들 보기에도 창피하게 짝이 없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자유와 책임” 바로 그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회개는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스캇 펙’ 박사의 [아직도 가야할 길] 에서도 모든 스트레스의 원인이 책임회피라고 한 말을 기억합니다. 그는 우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직면하지 않으려 할 때, 불안과 갈등은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나무 뒤에 쪼그리고 앉아 그의 아내와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과 불만을 늘어놓고 있는 ‘아담’, 아니 나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대답은 이러해야 할 것입니다: “예, 내가 했습니다. 여기 나의 옛 남편들이 있습니다. 앞으로 더 잘하겠습니다.”
목회자의 가장 큰 책임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이 구절은 마치 세 가지 다른 영역의 사역-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만, 원문에 충실한 보다 정확한 번역은 “이는 성도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하게 함으로써 그를 온전케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입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가 아닌 한 가지 사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목회자의 역할은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기독교 사역자, 즉 또 다른 목회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목사와 교사로서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책임 몇 가지를 항목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첫째가 주일 설교입니다. 적어도 필자가 설교를 위해서 임하는 자세는 오직 한 가지, “성경을 정확하게”입니다. 필자는 성도들의 귀를 즐겁게 해줄 의향은 전혀 없습니다.
두 번째는 성경공부입니다. 이 역시 좌우명은 “정확하고 깊게”입니다. 무식한 백성을 만들지 말자. 이것은 <호세아>의 좌우명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필자가 죽어서 하나님을 만날 때,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한가지만은 내 사명을 다했노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즉 얄팍하고, 피상적인 제자훈련 교제를 만들어 그것을 주입시키는 식의 교회 교육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때로 교회가 지나치게 훈련에 치중한 나머지 지적으로 무식한 성도들을 양산할 수도 있다는 지적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서점에 나오는 수많은 훈련교재들이 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쉽고, 짧은 시일 안에 끝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기독교 입문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그러한 수준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우리가 “단단한 식물”을 먹는 성인이 되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배우는 자에서 가르치는 선생으로 나아가라고 말합니다(히 5:12-6:3). <성경>의 여러 책들을 직접 읽고, 해석하고, 해석하는 방법을 배우고,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책임은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권면하는 일입니다.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며, 함께 사역자가 되도록 권하는 것입니다. 사역자에게는 두 가지 영역에서 계속적인 헌신이 필요합니다. 열심과 전문성이 그것입니다. 오래 전에 필자가 목사 안수를 받는 예배에 참여한 한 여학생은 필자의 조카가 바이올린 연주하는 것에 감동을 받아, 자기도 그 분야의 사역자가 되기를 헌신하여 그 길로 바이올린을 사서 배우는 중이라고 합니다. 필자 역시 사역의 전문성을 키우기 위하여 4년 반을 신학 공부에 투자했습니다.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필자는 늘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물으면서 지내왔습니다. 나는 과연 내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그리고 다른 일에서처럼 전문가가 되기 위하여 열심히 투자하고 있는가? 그러한 나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어왔는가? 만일 듣는 자들이 거부하거나 또는 제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이것은 탁월성을 향한 고민이기도 합니다. 대충대충 설교준비하고, 성경공부 준비하고, 늘 아마추어 수준의 사역자로 남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져야 할 책임은 열심과 전문성 바로 그것입니다. 단 한 가지를 하더라도 주께 하듯 해야겠습니다. 내가 무슨 분야에서든 전문인이 되었을 때 솔직히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자신입니까? 나의 전문 분야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지금 어디에 쓰고 있습니까?
6. 저주: 흙으로 돌아가라
서기 이천년 광복절은 흥분과 감격, 슬픔과 분노 그 자체였습니다. 반세기만에 이루어진 이산가족들의 3일 간의 만남과 이별이 바로 그 이유였습니다. 어느 취재 기자의 말처럼, 바로 이 순간은 그들에게는 평생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소중한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이를 TV로 지켜보았다는 성균관대학교의 외국인 교수 ‘존 홀스타인’은 “깊은 슬픔과 함께 말할 수 없는 분노도 느낀다”고 술회했습니다. 조선일보 2000년 8월 16일字 (제 5면).
우리 모두의 기분을 잘 대변한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노 가운데서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우리를 이렇게 남과 북으로 반세기 동안이나 갈라놓았단 말인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누구에게 이 분노를 터뜨려야 합니까? 6.25전쟁이었습니까? 아니면 당시의 주변 강대국이던 소련과 미국이었습니까? 당시의 국제 정세였습니까? 아니면 2차 대전 이후 비롯된 냉전의 이념이었습니까? 이도 저도 아니면 남과 북의 당국자들입니까?
이러한 감격의 상봉이 이루어지던 그 날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한 인사는 기념사 가운데서 그의 분노를 “냉전의 이념”에다 대고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즉 우리가 냉전 시대의 희생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수가 이념(理念)이라는 것이지요. 같은 날 모 방송국의 한 시사프로에서 한 출연자는 현재 남북 간의 협력과 화해에 가장 큰 걸림돌은 남한 내의 수구보수 세력이라고 단언하였습니다. 사실 이러한 논리는 이전에도 남한 내 소위 진보적인 학자들이 주로 내세워왔던 이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특히 김대중-김정일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이후 더욱 힘을 얻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최근에 이루어지고 있는 남북 간의 교류나 협력에 대해서 경계하거나 비판적인 견해를 밝히는 사람은 필경 북측으로부터는 통일 저해 반동세력으로, 그리고 우리 남쪽 사회에서는 수구보수 세력으로 낙인찍힐 판입니다. 시쳇말로 “왕따” 취급을 당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남과 북 모두 이상한 합의점에 도달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우리의 과거는 모두 묻어두고 오직 민족의 오늘과 내일만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과거의 잘잘못을 따져서 다시 한 번 상처를 드러내지 말자는 합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회 분위기에 대해서 미국의 한 연구소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은 전쟁으로 얻은 지난 반세기의 귀중한 경험을 다 잃어버리고 다시 배우려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일본의 역사왜곡이나 망각에 대해서는 결코 참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우리 민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물론 독일이나 프랑스 정부도 2차 대전의 전쟁 범죄자들이 비록 자국민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찾아서 처벌하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가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말입니다. 저들이 우리보다 더 잔혹하고 무자비한 것입니까? 과거의 정리가 없이는 진정한 역사 발전이 없다는 인식이 아닐까요?
이제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져 버린 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취하시는 일련의 행동들-뱀과 여인과 ‘아담’을 향한 저주-도 바로 그와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직 변명에만 급급하면서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냥 자신들의 과거를 묻어버려 주시기를 바라던 두 사람에게 하나님은 가혹할 정도로 무거운 처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흙에서 왔으니 다시 흙으로 돌아가라.”
하지만 이 저주는 너무 심한 것이 아닐까요? 왜 하나님은 타락에 연루된 범죄 당사자들을 이번 한 번만 용서하고 지나갈 수는 없는 것일까요? 그리고 이 범죄 행위가 우연의 실수가 아니고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것이라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지금 누구를 저주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저주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으로 종말이고 끝입니까 아니면 희망의 서곡입니까?
하나님께서 범죄 당사자들에게 차례대로 내리시는 저주는 그 내용이나 성격이 단순히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결과가 지속되어 우리가 소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들입니다. 뱀이 땅을 기어 다니는 것이라든지, 여자의 출산의 고통이라든지,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이 바로 그러합니다. 이 모든 현대 삶의 특징들이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 직접 내리신 저주의 결과입니다. 뱀도, 여자도, 남자도, 그리고 전체 우주도 이제 비정상적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대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태도나 방식도 변해버린 것입니다. 즉 모든 관계가 분리되고 소외되어버린 것입니다.
타락의 원인 제공자는 단연 뱀입니다(뱀을 ‘사탄’으로 보지 않고 문자 그대로 본다면, 뱀 역시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하와’를 타락에 동참시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뱀에게 분리와 소외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관찰해 봅시다. 뱀은 처음부터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서 그런지 몰라도, 하나님은 뱀에게 “네가 왜 이처럼 행하였느냐?”하고 묻지 않습니다. 그냥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하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모든 육축과 모든 짐승보다 가장 저주를 받아”(14절) 이 선언은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3:1)의 선언과 아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저주”와 “간교함”의 ‘히브리’ 발음은 아주 유사할 뿐만 아니라, 이 두 절은 그 내용에 있어서도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즉 뱀이 받은 저주는 그가 지식에 상응하는 것이었다는 의미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주의 내용이 심각하게 들리는 것은 이 저주를 내리는 자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느 누구에게 직접 저주를 내리시는 경우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곳과 그리고 ‘가인’에 대해서 뿐입니다(참고. 4:11). 통상 하나님의 저주는 제 삼자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컨대, 이스라엘은 ‘모세’나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탁을 듣습니다(예. 신 28:16). 그러므로 뱀이 받은 저주는 바꾸거나 피할 수가 없게 된 셈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오늘까지도 뱀이 배로 기어 다니고, 먼지를 마시며, 그리고 인간들이 가장 싫어하는 짐승 중의 하나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레위기>에서도 배로 기어 다니는 짐승들은 불결한 것으로 별도 취급하고 있습니다(레 11:42). 그가 배로 기어 다니고, 먼지를 먹으면서 죽도록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그가 받은 수치와 모멸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뱀이 옛날에는 다리를 가졌는가에 관한 토론은 본문의 주제와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서, 우리는 이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한 때는 모든 다른 짐승들보다 더 지혜롭고, 당당하게 자랑하며 살던 그가 이제는 그들과 가장 멀리 떨어져서 땅에 배를 댄 채 슬슬 기며, 그들의 발아래서, 그들이 일으키는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살아가게 되었으니 이 어찌 창피하고 수치스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그들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기는커녕 발로 자신을 밟으려 하는 원수들일진대 그가 느끼는 고독감이나 외로움이나 소외감은 더욱 크고 서럽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기분을 시편의 기자나 선지자들이 잘 노래하고 있습니다(시 72:9; 사 49:23; 믹 7:17).
이러한 수치와 모욕과 적대감은 당대에 그치지 않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3:15).
하나님과 뱀의 적대감은 이제 온 인류, 즉 “여인의 후손”과 모든 뱀의 무리에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적어도 문자적으로만 볼 때, 우리는 이 본문을 분명 원인론적인 구절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오늘날 인간과 뱀 사이에 常存하는 적대감이나 혐오감에 대한 기원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근거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 <창세기>의 처음 두 막은 창조와 타락을 원인론적으로 설명해 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일 뱀이 상징하는 바가 죄와 죽음과 악의 세력이라면, 이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보다 확대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죄와 악에 대한 인간의 궁극적인 승리로 보는 것입니다: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11).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해석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려합니다. 소위 말하는 “원시복음”을 찾으려 한다는 것이지요. 즉 “여인의 후손”은 ‘마리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요, 뱀과 그의 후손은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이며, 이 싸움에서 궁극적인 승리는 여인의 후손이며, 그가 곧 인류의 구원자가 될 것이라는 설정입니다. 사실 이러한 해석은 꽤나 오래된 것으로서, ‘유대’교에서부터 <신약>의 교부시대에 이르기까지 아주 역사가 오랩니다. 이 본문에 대한 ‘쉐퍼’의 해석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참고도서 7: 제 6장)
물론 <성경> 전체 맥락에서 볼 때 이러한 해석은 크게 이상할 것은 없어 보입니다만, <창세기> 화자의 원래 의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관심사는 단지 우리가 뱀의 후손, 즉 악의 유혹이나 세력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뱀이 처벌을 받았으니 뱀의 꾐에 넘어간 ‘하와’는 이제 괜찮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 역시 결코 예외일 수 없습니다. 얼마나 못났으면 뱀에게 속아 넘어갔단 말입니까(사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하나님은 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고통 가운데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라(3:16).
마치 4행으로 이루어진 시와도 같은 이 저주는 여인의 두 가지 기능과 역할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앗아가는 것입니다. 첫째는 어머니로서의 기능에 관한 것입니다. 고대근동지방에서 자식을 많이 둔 어머니는 축복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저주로 말미암아 그녀의 축복은 이제부터 항상 고통을 동반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두 번째는 아내로서의 기능에 관한 것입니다. ‘하와’의 원래 역할은 ‘아담’의 외로운 처지를 구원해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관계는 대등하고 상호 의존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관계가 이제 불평등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서로를 지배하려는 욕구로 갈등과 분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여자는 남자로부터 독립하려하고, 남자는 여자의 복종을 요구하게 됩니다. 서로 한 몸이고 한 마음이던 것이 이제는 갈라져 싸우게 되었습니다.
‘쉐퍼’의 말을 빌면 여기서부터 조직 없는 민주주의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질서 즉 남편 우위의 가정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하와’의 이름을 지어주고 있는 것을 통해서 그러한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24절). 가정에서 이러한 새로운 질서를 타락한 세상에서 가정을 유지시키는 어쩔 수 없는 차선책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도는 상호간의 사랑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가르침이 이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는 바, 남편은 그의 아내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엡 5:23).
이와 같은 ‘아담’의 권위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저주로부터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내려지는 저주가 가장 길고도 철저합니다: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3:17-19)
왜 이처럼 길고도 상세합니까? 그것은 타락에 있어 ‘아담’의 책임이 가장 크기 때문입니다. 그는 ‘에덴’을 지키는 하나님의 청지기이며, 그것을 지키라는 명령을 직접 들은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이 같은 내린 적이 없습니다. ‘하와’도 짐승도 이런 명령을 직접 듣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지위는 앞에서 본 것처럼 가장 권위 있고 우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참담하게 실패하고 말았으니 하나님의 분노와 상실감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하와’의 명령에 순종했던 것입니다(17절).
하나님이 그에게 내리신 저주의 내용 역시 이중적입니다. 첫째는 먹고사는 것과 관련된 고통과 수고입니다. 이것을 두 번에 걸쳐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었으니 앞으로 먹고사는 일이 힘들고 고달프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담’은 이제 무엇인가 먹으려고 할 때마다 두고두고 그가 행한 그 범죄에 대해서 상기하게 될 것입니다(이 세 절에서 ‘먹는다’는 동사가 몇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지 세어보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저주는 죽음입니다. 원래 그의 출생 성분이었던 동산 밖의 그 흙으로 되돌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단순히 생물학적인 죽음을 넘어서는 훨씬 더 심각하고도 광범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주제, “추방”을 다룰 때 상세하게 논의할 것입니다.
저주와 관련해서 마지막 두 절(20-21절)은 다소 생소하게 들립니다. ‘아담’이 아내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과,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일이 그것입니다. 가죽옷을 입히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우리는 통상 은혜의 행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짐승의 피를 흘려야 하며, 짐승의 피는 <구약>에서 아주 친숙한 구원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연 이 구절을 이처럼 해석해도 되는 것일까? 대답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형식적인 측면으로 볼 때, 여섯 번째 장면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이 두 절은 두 번째 장면의 마지막 두 절(2:24-25)과 좋은 균형과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관계 속에서 해석의 틀을 마련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실들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지 밝혀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균형과 대조를 통해서 화자가 드러내고자하는 의도를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장면에 대한 비교 연구를 통해서 이끌어낼 수 있는 주제는 적어도 두 가지입니다: (1) 권위와 질서; (2) 분리. 따라서 하나님께서 두 사람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도 은혜의 행위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로 보는 편이 본문의 주제에 더 잘 어울릴 것입니다. 그들은 앞으로는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로 벌거벗은 몸으로는 나아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 옷은 따라서 자신들의 죄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에덴 이야기> 속에 “성막” 모티브가 있다고 보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에덴’동산이 성막이며, 동산 안에서의 삶과 교제는 성막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공동체의 삶으로 보는 시각입니다. 공동체의 어느 누구도 성막 안으로 하나님께 나아올 때 결코 하체를 드러내어서는 안 됩니다(출 28).
우리가 이 두 절을 어떻게 해석하든, 즉 그 속에 하나님의 좋은 소식이 담겨있다고 보든 아니면 전혀 부정적인 것으로 해석하든,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즉 복음의 좋은 소식은 이 본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경 전체의 일관된 내용을 통해서 쉽게 접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너는 흙이 흙으로 돌아가라”는 소식은 단순히 죄를 상기시켜 주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가 죽음의 문제를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구약>에서 재와 먼지는 또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회개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회개는 따라서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고안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수심에 불타는 하나님 앞에서 수치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가 겸손히 우리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 1:9).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그 흙은, 우리가 다시 그 흙으로부터 살아나올 수 있다는 부활의 희망을 안고 있습니다. ‘나자로’의 부활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7. 추방: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해방 이후 우리나라 정치를 되돌아보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요란하게 들고 나오는 구호가 있습니다. “개혁”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도 얼마나 성미가 급한지 선진 제국들이 수십 년 또는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 놓은 제도나 관습을 불과 며칠 내지는 몇 달 만에 다 이루어 놓고야 말겠다고 설칩니다. 그러니 무리와 졸속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막상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는 하나 없고, 늘어가는 것은 개혁의 주체 세력인 새로운 기득권층과, 개혁의 대상으로 내몰려가서 패가망신 당한 한 맺힌 사람들뿐입니다. 또 있습니다. 그 어느 편에도 끼지 못한 절대 다수의 무기력에 빠진 소외 계층이 바로 그들입니다. 역시 개혁이나 혁명의 문제점은 그것이 지나치게 개혁적이거나 혁명적이지 못하다는데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즉 철저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정치․사회적 혼란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든 정치 권력자들의 한결같은 한 가지 동기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자유입니다. 이 무슨 역설입니까! 권력을 잡은 자들이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니요! 무슨 자유입니까? 자신들이 의도하는 바대로 정국을 이끌어가고 싶다는 동기입니다. 그래서 더 많은 권력을 원하고, 더 많은 지지자를 원하며, 국회에서도 다수당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독재자가 간절히 원하는 것도 자유입니다. 자신의 의도를 마음대로 펼칠 수 있는 자유입니다. 사실 독재 정권은 독재자 한 사람의 절대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입니다. 절대 다수의 구속을 담보로 해서 말입니다. 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경쟁자들보다 한 걸음 더 빨리, 더 많은 정보를 원합니까? 지배하고 정복하겠다는 동기 아닙니까? 즉 자유를 원하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가격을 결정하고, 판매하고 싶은 그 자유를 원하는 것이죠. 한 예로써, 인간의 유전정보에 대한 모든 지식과 특허를 어느 특정 기업체가 모두 소유하고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문제에 대해서 [TIME] (1999/3/22字)에서도 특집으로 다룬 바 있습니다. 미국의 한 회사는 유전 공학과 관련하여 그들이 연구한 대부분의 중요한 결과들을 모두 특허로 출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후 아무도 그 결과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가 없게 됩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그렇게 알고 싶어 합니까? 오늘에 만족하며 살 수 없다는 불안 심리는 하나님의 백성도 예외는 아닌 것이, 우리 역시 늘 우리 앞날에 대한 소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얼마나 안달입니까?
그들을 지배하고 있을 그 운명의 구속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정말 자유를 원합니다. 더 많은 자유,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를 말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절대자유까지도 말입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그리고 만일 가능하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과학의 종말]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모든 지식을 다 소유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될까? 그는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자유스럽게 될까?” 이 질문을 약간 변형시켜 보겠습니다: “만일 한 인간이 그가 알아야 할 모든 지식을 다 갖게 되었을 때, 그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그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마저도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에덴 이야기>의 결론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그 동산에서 내쫓으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자기와 같이 되었으니 시기심이 발동하여 동산에서 쫓아내 버린 것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하나님의 형상인 ‘아담’이 자기와 같이 되는 것이 못 마땅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시다: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3:22). 과연 그런 것처럼
이 말씀에 의하면 적어도 ‘아담’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같이 되는 일은 특권이나 축복이 아니라 참담한 실패와 불행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뱀은 그것이 큰 특권이라고 말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구별할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5). 적어도 뱀이 약속하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과 같이 되는 일”은 하나님이 누리고 있는 그 절대적 자유를 얻는 것이 됩니다.
‘아담’ 역시 그렇게 생각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에 비해서는 무언가 아직 부족하며, 그래서 하나님이 누리고 있을 그 자유를 가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로부터 구속받지 않는 참된 인간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실 자유란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담’이 취했던 선택을 타락이라고 부릅니다만, 모든 사람이 다 여기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자 ‘칸트’는 ‘아담’을 가리켜 스스로의 운명은 물론 신의 뜻마저 박차고, 이성과 의지가 시키는 바대로 행했던 참된 영웅이라고 칭찬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칸트’에게 있어서 <에덴 이야기>는 타락이 아니라 자유를 향한 진보이자 일대 모험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인간들에게 불을 가져다 준 행위를 영웅적이라고 극찬했던 영국 시인 ‘바이런’의 시에 비유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과 영웅들 가운데 후세 사람들에게 가장 칭송받는 이는 아마도 ‘프로메테우스’일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이런’이 <프로메테우스>라는 시에서 묘사했듯이 그는 “인간의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신들이 능멸해도 좋을 것으로는 여기지 못하게 했던/불멸의 눈을 가진 이”였습니다. 그는 그리스인들이 가장 소중히 여겼던 가치-인간과 자유-의 다른 이름이었으며, 부당한 고통을 견디는 고결한 정신, 억압에 항거하는 투쟁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제도와 질서에 이의를 제기하는 불온한 사람들에게는 늘 그의 이름이 따라붙었습니다. 예를 들어 [라인신문]은 청년 ‘마르크스’를 가리켜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에덴 이야기>의 그 어디에도 ‘아담’을 칭송하고 축하하는 곳은 없습니다. 그가 스스로의 운명의 주인이 되어 신의 구속을 벗어 던지고, 그가 쟁취한 자유를 가지고 의기양양하게 ‘에덴’동산을 그의 아내와 함께 떠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임의행동의 형식으로 점잖게 동산을 떠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강제로 쫓겨난 것입니다(23, 24절). 이것은 그가 그토록 얻기를 원했던 것을 단순히 얻지 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역설적이게도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무 것도 새로운 것을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가졌던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것을 되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아담’ 대신 천사들이 동산의 생명나무를 그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잃어버린 것 중에서 가장 큰 손실은 바로 자신의 자유, 즉 ‘자유의지’였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구속되기보다는 스스로의 자유를 찾아 나섰을 때 그가 진정 얻게 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새로운 구속이었습니다. 즉 노예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땅의 노예, 시간의 노예, 자신의 노예(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며 그 모든 결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러한 상태)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의 의지의 주인, 즉 자신의 신이 되려고 할 때 그는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절대 자유란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도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그의 자유를 제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하실 때만이 가장 하나님답게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상황에서 내리는 결정이나 선택은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까? 나 자신의 자유를 취하는 쪽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입니까?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구속당하지 않고 개인의 자유와 의사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독립을 포기하고 양보하며 살아갈 때입니다.
‘폴 트루니에’도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사람과 싸우는 사람은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자신의 생활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렇게 해서 가정과 사회의 관계에서 희생정신을 실천하는 사람은 독립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히 주어지지 않는 독립을 얻게 된다. 이러한 주제와 관련하여 ‘폴 트루니에’(P. Tournier)의 저서 「고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반세기 전에 처음 출판된 이 책이 국내에는 수년 전에 비로소 번역되어 소개되어, 그 내용이 오늘날의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것들도 있지만, 여전히 현대인의 고독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상호 신뢰와 복종을 미덕으로 하는 공동체의 존재를 피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를 뛰어넘은 호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P. Tournier(윤경남 역) 「고독」. IVP: 서울. 1998.
<에덴 이야기>는 그 마지막 막을 내리면서 청중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자유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구속되어라. 당신은 노예가 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네 자유를 행사하라.” 예수님께서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0-31). 결국 참된 자유나 행복은 진정한 권위에 승복하는 데에서 오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연습과 토의
1. <창세기>의 첫 번째 ‘톨레돗’은 세 가지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습니다. 각각의 내용과 주제를 밝혀봅시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고 있습니까?
“타락”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가장 중요한 결과가 “분열과 분리”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첫 인류의 타락은 가장 먼저 인간과 하나님을 분리시켰으며, 이후 정체성의 상실을 통해서 자신과의 분리가 일어났고, 인간과 동료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을 분리시켜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분리와 소외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마저 분리되고 소외되어야 했습니다. 이 마지막 분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 ‘쉐퍼’는 그의 책 「기독교 성경관」에서 타락 이후 나타나게 된 극적인 변화에 관해서 <분열과 분리>라는 주제로 요약하면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참고도서 7, 제 6장).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만들어 입히신 새 옷은 이러한 분열 가운데서도 특히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분리를 잘 상징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은 이제 더 이상 허물없는 사이가 아니었으며, 하나님 역시 아무런 허물없이 마음대로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는 이전의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즉 타락하기 이전에는 ‘아담’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단 한 번의 예배-창조주 앞에서 피조물로서 드리는 예배-로 충분했습니다만, 이제는 두 번의 예배-피조물로서 뿐만 아니라 죄인으로서 드리는 예배-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절차와 심지어는 시간과 장소마저 정하셨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것을 무시하거나 바꿀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레위기>의 제사규례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지성소 앞까지 나아가기 위해서 먼저 번제단을 거쳐야 했습니다. 번제단에서 드리는 피의 제사는 회개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일 이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 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아론’의 두 아들 ‘아비후’와 ‘나답’의 경우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참고 레 10:1-7).
이처럼 두 계열의 예배-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와 그렇지 못한 예배-가 있다는 것은 두 계열의 인류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바로 그들입니다(3:15). 그리고 그 두 계열의 인류는 각기 상반되는 두 계열의 문화를 창조해 냅니다. <창세기> 4장은 두 계열의 인류가 만들어내는 예배와 문화 사이의 분리와 분열이 타락 이후에 어떻게 더욱 그 골이 깊어지고 넓어져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학과 역사
<창세기> 4장은 형식이나 구조에 있어 여전히 첫 번째 ‘톨레돗’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톨레돗)이 이러하니라”(2:1). 왜냐하면 두 번째 ‘톨레돗’이 <창세기> 5장에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5:1).
당연히 이곳에서도 <에덴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일련의 구성이나 수사적 기법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에덴 이야기>와 <첫 인류의 가족 이야기>는 형식이나 구조적으로 시적 유사반복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동시에 두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통일성을 갖추고 구성이 발전하고 확대해 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두 이야기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모티브로서 숫자 “일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즉 이곳에서도 <에덴 이야기>에서처럼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묘사가 일곱 번 내지는 그 배수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중요한 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아담’에서 ‘라멕’에 이르는 7 대의 계보-이 계보는 ‘가인’의 후예, 즉 뱀의 후손에 속하는데, 이들 인류가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는지를 소개하면서, 특히 마지막 ‘라멕’에 이르러는 그 분열과 분리가 절정에 이르고 있음.
(2) ‘가인’을 죽이는 자의 형벌은 7 배가 될 것이지만(15절), ‘라멕’을 괴롭히는 자는 77 배의 보복을 받을 것이라는 언급(24절).
(3) <가인과 아벨 이야기>(4:1-17): ‘아벨’과 ‘아우’(각각 7회)와 ‘가인’(14 회) 등장
(4) 제 2막 전체에서(2:1-4:26) ‘토지’(예레츠)(7회)와 ‘땅’(아다마)(14회)과 ‘하나님’(‘야훼 하나님’ 또는 ‘야훼’와 함께)(35회-서막에서의 사용 회수와 동일함)과 ‘부르다’(14회). 따라서 1:1에서 4:26에 이르기까지 ‘야훼’의 이름이 도합 70회 등장하고 있음.
특히 <에덴 이야기>의 마지막 구절,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야훼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 당연히 성취되어야 할 예언처럼 들리기까지 합니다.
모티브의 반복 외에도 구조적인 반복 또한 관찰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구조를 세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때, 각 단락이 동일한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1) 두 예배: 가인과 아벨(3-16절)
2) 두 인류: 가인의 후예(17-24절)
3) 두 번째 씨: 셋의 후예(25-26절)
즉 각 단락은 다음과 같은 서술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1절)
‘가인’이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17절)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25절).
이를 통해서 본문의 주제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는데, “인류의 두 계보”가 그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첫 번째 단락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3-16절)와 <라멕의 노래>(23-24절)는 이 주제에서 일탈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가인’과 ‘아벨’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1-2절)는 곧바로 ‘에녹’의 탄생(17절)으로 이어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법은 <창세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대홍수 이야기>(6:1-9:27)가 ‘아담’의 계보(5:32)와 ‘노아’의 계보(9:28-29)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계보를 다루는 방식 또한 우리에게 친숙합니다. 즉 한 부모 밑에 둘 내지는 세 아들이 있는데(예: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 ‘노아’의 세 아들 ‘햄’과 ‘셈’과 ‘야벳’), 이들 중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쪽은 법적으로 당연한 권리를 가지는 장자가 아니라 차남입니다. 본문에서도 장남 ‘가인’을 제치고 차남 ‘아벨’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고 있습니다. ‘가인’은 ‘아벨’이 죽고 난 뒤에도 은총의 대상이 못됩니다. 또 다른 아들(두 번째 차남) ‘셋’이 그 계보를 이어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는 항상 장남의 계보를 먼저 언급하고, 뒤에 여인의 후손을 언급합니다. ‘노아’의 계보에서 첫 두 아들 ‘햄’과 ‘야벳’의 계보가 작은아들 ‘셈’의 계보보다 앞서있고(10장), ‘이스마엘’과 ‘이삭’의 경우가 그러하며(25:12-34), ‘에서’와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36-37장). 본문에서도 ‘가인’의 계보(4:17-24)가 ‘셋’의 계보(4:25-5:32)보다 먼저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넓게는 <에덴 이야기>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두 이야기는 그 형식에 있어 닮은 점이 아주 많습니다. 아래 표에 도시한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구조적 특징을 제 2과에서 다룬 바 있는 <에덴 이야기>의 구조적 특징과 비교를 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이야기의 전체적인 형식은 <에덴 이야기>에서처럼,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장면마다 해설과 대화가 번갈아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장면 1/5, 2/4들이 각기 한 쌍을 이루고 있으며, 이야기의 핵심은 ‘아벨’이 피살되는 세 번째 장면으로서 이야기의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장면 1/5에서 주인공은 ‘가인’과 ‘야훼’ 하나님으로서, ‘가인’이 먼저 하나님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처음 장면에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이고 나중 장면에서는 기도와 간구를 위해서입니다만, 두 번 다 하나님으로부터 거절을 당합니다.
두 번째와 네 번째 장면에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두 번씩이나 중요한 수사적 질문을 하십니다:
1)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6-7절)?
2)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9-10절)?
두 번째 장면에서는 죄가 가인을 집어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가 하면, 네 번째 장면에서는 땅이 그 입을 벌려 ‘아벨’의 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편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타락 이야기>와도 대응을 이루고 있는 부분이 많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장 특징적인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두 장면 모두에서 가장 결정적인 부분 즉 범죄행위를 지극히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3:6-8; 4:8). 이는 범죄 전후의 긴 해설과 대화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2) 범죄 후에 하나님의 심문과 저주가 아주 흡사합니다: (1)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4:9)//“네가 어디 있느냐”(3:9); (2)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4:10; 3:13); (3)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4:7)//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3:16); (4)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4:11)//”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3:17).
3) 하나님이 ‘가인’에게 표를 주는 모습과(4:15)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만들어 입히는 모습(3:21).
4) 유사한 주인공의 운명: 두 경우 모두 범죄자가 하나님 곁을 떠나 ‘에덴’의 동방에 거주하게 됨(4:16; 3:24).
이와 같이 두 이야기가 형식이나 내용에서 유사성이나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은 두 이야기가 하나의 주제로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제는 다름 아닌 “죄”입니다. <에덴 이야기>가 “죄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면,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그 죄가 어떻게 이 세상 속에서 힘을 발휘해 가는가?”를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한편 두 이야기는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에 있어, 유사성만큼이나 차이들도 많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에덴 이야기>가 하나님과 아주 친밀한 두 주인공을 다루고 있다면, ‘가인’은 처음부터 그의 예배가 하나님으로부터 아예 인정도 받지 못하는 소원한 관계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와’가 범죄 하는 데에는 사전 유혹이 필요했습니다만(3:1-5), ‘가인’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범죄 후에 각자에게 내려지는 처벌에 대한 반응이 다릅니다. ‘아담’과 ‘하와’와 뱀은 처벌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는 반면(3:14-20), ‘가인’은 그 처벌이 너무 가혹하다고 항의하고 있습니다(4:14).
차이는 또 있습니다. 예컨대, ‘가인’은 타인의 보복이 두려워 떨었습니다만(14절), 그의 후손 ‘라멕’은 살인을 하고서도 아주 자랑스럽게 떠들고 있습니다(24절). 타락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한 개인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도 그러했습니다.
화자의 의도인 즉은 ‘가인’의 족보를 통해서는 아무런 희망이 있을 수 없음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동시에 새로운 가계의 출현을 고대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계보를 다루는 곳에서 <가인과 아벨 이야기>(3-16절)나 <라멕의 노래>(23-24절)가 본문의 흐름을 끊고 사이사이에 등장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은 인류의 첫 가계 즉 ‘가인’의 가계를 통해서는 그분의 나라를 이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버려두고 새로운 두 번째 가계 즉 ‘셋’의 가계를 통해서 그분의 나라를 이어가시려는 의도입니다. 바로 이점이 본문의 마지막 단락이자 결론입니다.
신학과 신앙
1. 두 예배(1-16절)
도입(1-2절상). 첫 두 절은 ‘가인’과 ‘아벨’의 탄생에 관한 화자의 서술로서, ‘아담’의 계보가 ‘가인’을 통해서 시작되는 부분입니다. 내용 상 ‘가인’의 계보는 17-26절에서 이어질 것입니다만, 그 중간에 <가인과 아벨 이야기>(3-16절)가 삽입되어 있어 일종의 문학적 일탈(逸脫)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1-2절상)
<타락 이야기>(3장)에서 보았던 것처럼, 화자는 새로운 에피소드를 소개할 때면 통상 상황 묘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는 언급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동침”으로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 단어는 “알다”([d'y, 야다)인데, 매우 광범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주로 감각을 통해서 얻어진 지식이나, 타인에게 전수될 수 있는 체험이나 실질적인 지식 등을 의미합니다. 이곳에서는 남녀 사이의 동침에 대한 완곡적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성경> 여러 곳에서 동일한 용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예. 4:17; 19:5, 8; 24:16). 이어지는 단어들 즉 “임신”과 “득남”은 “동침” 즉 “알다”의 당연한 순서가 됨이 마땅하다 하겠습니다.
‘가인’(@yIq, 카인)의 이름과 “내가 득남하였다”(hn:q, 카나)는 ‘가인’의 선언 사이에는 일종의 유음(類音)이 존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독자의 주목을 끌기 위한 화자의 의도로 보입니다. 이와 같은 음성학적 유사성은 또 있습니다. 즉 <가인과 아벨 이야기> 전체에 걸쳐 주인공 ‘가인’을 연상시켜주는 일련의 단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1) 8절-“가인이 일어나”(@yIq' !q;Y:w", 야킴/가인)
(2) 15절-“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Q;=yU !yIt'[;b]vi @yIq', 가인 쉬브아타임 나캄)
(3) 24절-“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yIq;= A!Q'yU, 나캄 카인).
화자는 ‘가인’(@yIq, 카인)에 대한 어원학(語源學)적인 설명으로 ‘카나’(hn:q), 즉 “내가 득남하였다”를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둘 사이에는 순전히 음성학적인 유사성만 있을 뿐이지, 어떤 실질적이고 내용적인 연관성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에서 등장하고 있는 일련의 다른 이름들에 대한 어원학적 설명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1) ‘셋’(4:25); (2) ‘노아’(5:29); (3) ‘레위’(29:34); (4) ‘유다’(29:35).
‘가인’에 대한 역사적인 어원은 불분명합니다. 혹자는 ‘가인’을 “대장장이”, “철기를 다루는 자” 등과 연결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이들 단어들이 ‘아라비아’어나 ‘아람’어로 ‘케이난’, ‘케난’ 등으로 발음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에서도 ‘두발 가인’을 “구리와 쇠로 기구를 만드는 자”로(22절) 칭하고 있고, ‘가인’을 “창을 다루는 자”와 연관시키고 있어(삼하 21:16), 이 같은 견해를 지지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또 다른 학자는 ‘가인’을 한 “피조물”과 동일시하기도 합니다만, 결론적으로 ‘가인’의 어원에 대한 어떠한 단정도 내릴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담’이 ‘가인’을 놓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1절하)고 말하고 있는 부분은 단어 하나하나마다 해석 상 난제가 많습니다. 난제는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옵니다. 첫째, 이 문장의 동사 “얻다”(hn:q, 카나)가 정확하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둘째, 문장의 목적어에 해당하는 “아들” 대신에 “남자”(hn:q, 이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이상합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로 말미암아”(.hw:hy]Ata, 에트 야훼)에서 단어 ‘에트’를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통상적으로 ‘에트’를 “~와 함께”라는 전치사로 간주한다면,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말 번역 그대로일 것입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내지 “여호와와 함께”). 하지만 이 단어를 일종의 정관사(定冠詞)로 본다면 해석은 전혀 달라집니다. 즉 번역은 “야훼로 부르는 한 남자를 낳았다”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문장의 동사 ‘카나’(hn:q)는 여러 번역이 가능합니다. 예컨대, “창조하다”(14:19, 22)가 그것입니다. 물론 이 단어는 이곳에서 번역하고 있는 바처럼 “얻다” 또는 “사다”(예: 25:10; 33:19)로 사용할 때가 더 많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창조이야기>(1-3장)의 연장선상에서 다루려 한다면, 이 단어를 “창조하다”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샀다”는 해석도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실제 이와 같은 번역을 반영한 이름들이 주전 이천 년 시대에 실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번역이 가져다주는 한 가지 이점은 ‘에트 야훼’(.hw:hy]Ata)의 ‘에트’를 관용적인 용법(用法)에 보다 가까운 전치사 “~로부터”(from)로 번역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용법은 <에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담의 노래” 중 일부, 즉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2:23)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가인’을 낳고 의기양양해 하고 있는 ‘하와’의 모습을 ‘하와’의 탄생을 바라보며 득의만만해 하고 있는 ‘아담’의 모습과 중첩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하와’가 지금 자신을 ‘야훼’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에 놓으며 승리의 환호를 외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나도 야훼와 마찬가지로 한 남자 아이를 창조하였노라.” 또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여호와의 징표인 한 아이를 얻었다(낳았다)” 또는 “내가 여호와 즉 한 남자를 낳았다”입니다. 이와 같은 해석의 근거는 단어 ‘에트’가 “~의 징표”로 해석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의 정신을 따르자면 ‘가인’은 3:15에서 언급하고 있는 “약속의 씨”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셈입니다.
이런 저런 다양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1절에 대한 가장 타당한 해석은 “내가 여호와로 부르는 한 남자를 창조하였다”라기보다는 “내가 여호와의 도움으로 한 남자를 얻었다”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매모호함이 없는 것이 아니며, ‘하와’ 자신도 그녀가 이룩한 성취를 내심 ‘야훼’ 하나님의 역사와 견주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며, 그가 자신의 아들이 되었으면 하는 소원도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가인’에 이은 둘째 아들 ‘아벨’의 탄생에 대한 언급(2절)은 “아담의 계보”(17절 이후)를 <가인과 아벨 이야기>(3-16절)와 훌륭하게 연결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두 형제의 직업(양치기와 농부)에 관한 언급은 17절, 20절, 21절과 잘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동시에 2절은 두 형제의 이름을 중심으로 교차대구를 이루고 있으며, 이와 같은 구조는 3-5절의 구성에서도 그대로 연속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형식은 ‘에서’와 ‘야곱’의 탄생에서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두 아들의 탄생4:1, 2절상25:24-26
두 아들의 이름4:1절하25:15하, 26절하
두 아들의 직업4:2절하25:27
하지만 차이도 있습니다. 즉 ‘가인’과 ‘아벨’은 ‘야곱’과 ‘에서’와는 달리 쌍둥이는 아니었습니다. ‘아벨’은 동생이었으며, 이점이 신학적으로 중요한 암시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벨’은 그의 형 ‘가인’의 경우와는 달리 그의 이름에 관한 아무런 의미론적 언급이 없습니다. 당시 너무 잘 알려져서 따로 특별히 설명이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구약>에서 ‘아벨’(lb<h, 헤벨)은 “호흡” 또는 “허무”를 의미합니다(전 1:2).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 144:4).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욥 7:16). 결국 그의 이름은 그에게 닥칠 운명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가 동생이라는 사실과 농사하는 자라는 언급은 하나님께서 그를 더 사랑하신다는 암시가 깔려 있습니다. 사실 ‘아담’의 직업적 소명도 땅을 경작하는 일이었습니다만(참고. 2:15), 훗날 족장들이 선호하는 직업은 ‘다윗’처럼(삼상 16:11) 양치는 일이었습니다(참고. 47:3). 그리도 장남이 법적인 특권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참고. 25:32; 27:1-40; 신 21:15-17), 하나님의 선택은 주로 차남이나 다른 형제들의 몫이었습니다(예: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 ‘에서’가 아닌 ‘야곱’; ‘므낫세’가 아닌 ‘에브라임’; ‘제시’의 여덟 번째 아들 ‘다윗’). 이곳에서도 ‘가인’이 아닌 ‘아벨’이 선택의 특권을 누리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두 예배(2절하-5절). 위 세 절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첫 번째 장면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이 장면은 아래 도표에서 보듯이 마지막 다섯 번째 장면과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형식은 해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등장인물의 상대적 비중이 다르다는 것인데, 첫 번째 장면에서는 ‘가인’과 ‘아벨’이 전면에 그리고 하나님이 배경 인물로 등장하고 있는 것에 반해,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 역할이 반전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무대의 주역으로, 그리고 ‘가인’이 수동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야기의 전체적인 구조가 교차대구이면서 동시에 첫 번째 장면 자체도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볼 때, 일종의 교차대구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자가 등장인물을 언급하는 순서를 유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2b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2절후-5절)
두 주인공이 등장하는 순서를 보면, ‘아벨’과 ‘가인’-‘가인’과 ‘아벨’-‘아벨’이 교대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을 앞선 도입부와도 교차대구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함인지, 화자는 ‘가인’의 제사(예배)를 먼저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월(!ymi=y)이 지난 후에”(3절)로 시작하고 있는 ‘가인’의 제사에 대한 서술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별도의 전승으로부터 편집적 삽입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세월”은 “날들”(days)로서, 어떤 “불특정한 기간”(참고. 24:55; 40:4) 또는 “한 해”(참고. 레 25:29; 삼상 1:21) 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히브리’ 구문론적으로나, 논리적으로 후자로 해석함이 더 적절할 듯합니다. 즉 구문론적으로 볼 때, “지난 후에”($Qem yhiy]w;)는 항상 특정 기간과 연계해서 사용하는 것이 상례이며(예. 8:6; 출 12:41), 논리적으로도 농사의 소출을 제사로 바치는 것은 한 해의 끝에 이루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사람이 바친 “제물”(hj'n]m, 민하)은 세속적으로는 윗사람의 호의를 기대하며 드리는 예물을 의미합니다만(32:14, 19; 43:11), 제의적인 용어로 사용될 때에는 짐승을 바치는 희생제물과 대조되는 “소제” 즉 곡식 예물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물론 간혹 둘 다를 포함하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예. 삼상 2:17, 29). 따라서 좁은 의미로 볼 때, “제물”은 ‘가인’의 제사만을 지칭해야 할 것입니다만, 이어지는 ‘아벨’의 희생제사에도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두 경우 모두 포함할 수 있다 할 것입니다.
‘아벨’의 제물은 목자(牧者)라는 그의 직업을 반영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의 두 번째 아들인 ‘아벨’이 짐승의 첫 새끼를 희생 제물로 드린 것에 반해, 그의 첫 아들 ‘가인’은 짐승의 첫 새끼도 곡식의 첫 소산도 바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단순히 우연으로 돌리기에는 암시하는 바가 크다 하겠습니다. 짐승의 첫 새끼에 관한 언급은 <출애굽>에서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출 22:28-29; 34:19-20). 이 법에 따르면 짐승의 첫 태생은 반드시 희생 제물로 바치거나, 또는 다른 것으로 대속(代贖)을 받아야 합니다. 첫 태생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법에 따라 인간의 첫 태생은 (희생 제물로 바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대속을 받아야 하며, 이스라엘은 국가로서 하나님의 첫 태생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출 13:2, 12-15). 모든 희생제사에서 기름 부위는 “화제”(火祭) 즉 태워서 드려야 하는데, 이 역시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모든 부위 가운데서 가장 좋은 부분이기 때문입니다(레 3:16; 신 32:38). 이렇게 볼 때 ‘아벨’은 그가 가진 짐승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당연히 ‘야훼’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원문의 의미 상,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에 대해서는 아무런 눈길도 주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어떻게 각자의 제사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는지 또는 받지 못했는지 알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에 대해서 일종의 가시적인 징조가 나타나는 곳을 볼 수도 있습니다만(참고. 레 9:24; 삿 6:21; 왕상 18:38), 본문에서 화자의 관심사는 그러한 징표들이 어떻게 나타났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승인 여부에 있다 하겠습니다.
이 단락의 마지막 구절(5절)은 ‘가인’의 제사에 대해서 언급함으로써, 본문의 교차대구적인 구조를 완결시키고 있습니다. 화자의 전언에 따르면, ‘가인’은 단순히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을” 정도였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때로 살인의 전조(前兆)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합니다(참고. 34:7; 삼상 18:8; 느 4:1; 민 16:15; 삼하 3:8). “얼굴을 떨구다”는 표현 역시 유사한 경우를 묘사할 때 등장하고 있습니다(참고. 6절; 욥 29:24; 렘 3:12).
‘가인’의 제사는 거부되고 ‘아벨’의 제사가 받아들여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아래 다섯 가지 정도의 설명이 알려져 있습니다:
(1) 하나님은 목자를 선호한다(Gunkel). 하지만 이 같은 설명은 ‘아담’ 역시 목자가 아니라 땅을 치는 농부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참고. 2:15)
(2) 하나님은 곡식 제사보다는 동물의 희생 제사를 선호한다(Skinner, Jacob). <구약>의 제사법에 따르면, 짐승의 피가 요구되는 희생제사가 더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곡식 제사를 무시하거나 생략했던 것은 아니라, 이 역시 적절한 설명은 될 수 없습니다.
(3) 선택 교리에 관한 하나님의 신비를 보여주고 있다(von Rad, Vawter, Goka, Westermann). 본문은 장남과 차남에 대한 선택과 유기(遺棄)의 신비한 교리를 예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설명의 전부는 될 수 없습니다. 즉 본문에서 하나님의 동기에 대한 다른 특별한 언급이 없다면 모를까, 이곳에서는 그렇지 않음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하나님은 두 사람의 내적 동기를 보신 것이다(Calvin, Dillmann, Driver). <히브리서>에 따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믿음의 동기를 선호하셨고, 그를 더 선호하셨다는 설명입니다.
(5) 대부분의 학자들 사이에 공감을 얻고 있는 설명은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과 관련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두 사람이 예배에 임하는 자세를 중요하게 여기셨다는 설명입니다. 두 사람이 드린 예물도 결국 예배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나 자세를 반영한 것에 불과합니다. 화자의 진술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이런 것일 것입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 중에서 일부를 드린 반면, ‘아벨’은 가장 좋고 으뜸 되는 처음 것을 드렸습니다. 사실 ‘아벨’의 예배는 <구약>의 제사법이 요구하고 있는 바로서, “온전하고 흠 없는” 짐승을 드린 것입니다(참고. 레 1:3; 22:20-22 등). ‘아벨’의 제사가 개인적인 희생이 따랐다면, ‘가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암시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사무엘서>에서도 그 정신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삼하 24:24).”
이 본문은 <구약>에서 제사에 관한 첫 번째 언급으로서, 제사에 관한 태도나 원리를 본문은 암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심문(6-7절). 두 번째 장면은 네 번째 장면(9-14절)과 대칭을 이루고 있고, 본문의 양식은 하나님과 ‘가인’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6-7절)
두 장면 모두에서 하나님께서 주인공에게 두 번의 질문을 하고 있으며, ‘가인’에게 닥칠 운명에 관한 선언으로 각 장면이 끝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두 번째 장면에서는 ‘가인’의 대꾸가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연속적인 두 질문은 첫 번째 장면의 결말에 대한 자연스러운 연결로서, 5절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그 특징 상 뱀이 ‘하와’를 유혹하며 물었던 질문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하겠습니다(참고. 3:1). 두 경우 모두 질문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뱀의 질문은 ‘하와’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도한 반면, 하나님의 질문은 인간으로 하여금 돌이켜 회개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이어지는 7절에 대해서 학자들은 <창세기> 전체적으로 가장 난해하고 불투명한 구절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등장하고 있는 일련의 단어들 때문입니다: “(낯을) 들다”(ac;n, 나사); “엎드리다”($b'r, 라바츠); “문”(jt'P, 페타흐). 이들 단어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며, 이들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네가 잘 하면 장자로서의 영예를 누리게 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죄가 장자를 향하여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Ben Yashar). 다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즉 ‘가인’은 장자로서 각별한 책임 즉 예배의 책임이 있는 바, 그가 이를 잘 수행하면 장자로서의 특권들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낯을) 들다”와 “문”을 각기 “용서하다”(“받아들이다”)(참고 49:3)와 “태를 열다”(참고. 창 29:31; 30:32)로 이해할 때 가능한 해석이 될 것입니다. 이에 따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에 대한 해석도 “그(또는 그것)가 너를 원하나 너는 그(또는 그것)를 다스릴지니라”로서 여기서 그는 동생 ‘아벨’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 같은 해석은 장자 권에 관한 <성경>의 사상과 조화를 이루고 있기는 하나, 두 단어에 대하여 불가분 새로운 해석을 도입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본문의 의미를 변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해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두 번째 가능한 해석은 ‘히브리’어 본문의 형식이나 문법이 시적 운율에 있어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인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Ramaroson). 이 주장에 따르면, 7절은 다음 3 세 개의 행(行)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참고. 각 행에 대한 박자 개념을 이해할 수 있기 위하여 ‘히브리’ 본문도 함께 실었습니다. 각 행에서 몇 개의 단어가 등장하고 있는지만 살피면 될 것입니다).
7a네가 잘하면 어찌 용서함이 없겠느냐?
(taec] b~yfiyTeA!ai a/lh) (3 박자)
7b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be=ro taF;j' jt'P,l' byfiyte al !~aiw) (5 박자)
7c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BAlv;m]Ti hT;a'w] /tq;WvT] *~yl,~aew) (4 박자)
Ramaroson에 따르면, 이들 세 개의 행은 원래 4/4/4의 형식이었으나 편집적 실수로 인하여 첫 번째 행에 있어야 할 한 단어, “죄”(ha:F;j, 핫타아)가 두 번째 행으로 옮겨와서 현재의 3/5/4 형식이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를 첫 번째 행으로 옮겨놓으면, 원래의 4/4/4의 형식이 됩니다.
7a네가 잘하면 어찌 죄에 대하여 용서함이 없겠느냐?
(taF;j' taec] b~yfiyTeA!ai a/lh) (4 박자)
7b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엎드린 자(마귀)가 문에 있느니라
($be=ro jt'P,l' byfiyte al !~aiw) (4 박자)
7c그것은 너를 원하나 너는 그것을 다스릴지니라
(./BAlv;m]Ti hT;a'w] /tq;WvT] *~yl,~aew) (4 박자)
이렇게 했을 때, 세 번째 행에 등장하는 “그것”은 더 이상 “죄”(여성 명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분사형 “구부린(엎드린) 자”($b'r, 라바츠)를 가리켜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구문론적인 불일치를 해소할 수 있게 됩니다. 이곳에서 ‘히브리’어 ‘라바츠’를 “구부린(엎드린) 자(마귀)”로 해석한 데에는 이 단어가 “눕는 곳”을 의미하는 명사형인 ‘아카드’어 ‘라바추’와 동족어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일단의 학자들(CAsuto, Speiser, Westermann, Gispen, Vawter)도 Ramaroson와 유사한 해석을 제시하고 있으며, 마지막 세 번째 행의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남성 명사 ‘라바츠’라는 데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학자들은 본문의 구조를 전혀 변형시키지 않은 채로 유사한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럴 경우 첫 번째 행에 등장하고 있는 단어, “용서하다”(taec)의 의미가 애매해 진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원래 “낯을 들다”(ac;n:, 나사)에서 유래한 것인데, 그 의미가 아주 다양하기 때문에 문맥에 의해서 그 의미를 결정해야 합니다.
본문에서도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이 다양할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이 ‘가인’을 용서하다; (2) 하나님이 ‘가인’과 그의 제사를 받아들이다; (3) ‘가인’의 기분이 나아지다(그가 얼굴을 숙인 것과 대조적으로); (4) ‘가인’의 당당한 태도(구부려 엎드려 있는 죄와 대조적으로).
이 장면이 주는 분위기로 볼 때, 처음 두 해석이 가장 그럴 듯하며 전통적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두 해석도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것이, 만일 하나님께서 ‘가인’을 용서해주셨다면 그의 기분이나 태도가 달라졌을 것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문 앞에 엎드려있다”는 문장에서 “엎드려있다”는 동사는 위에서 밝힌 대로 ‘아카드’어의 ‘라바추’와 동족어로서, 건물 입구를 지켜 서 있는 관리나 귀신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찰 입구에서 “사천왕”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볼 때 화자는 “죄”를 귀신으로 의인화하여 마치 맹수처럼 ‘가인’의 문 앞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즉 그가 ‘가인’을 집어삼키려고 하나 ‘가인’은 그를 오히려 이겨야 한다는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인(8절). 세 번째 장면은 이야기 전체의 중심을 이루는 곳으로서, ‘가인’과 ‘아벨’이 유일한 등장인물입니다. 아무런 대화도 없습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8절)
화자는 이처럼 중요한 장면을 지극히 짧은 단 한 문장으로 처리함으로써, 그리고 “아우 아벨”을 두 번 반복 사용함으로써, ‘가인’의 행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쳐죽이다”로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 단어‘하라크’(gr"h)는 아주 잔인하고 폭력적인 살인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의 행위가 고의적이었는지 또는 우발적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그러한 구별은 화자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만 ‘가인’이 동생을 죽인 곳이 그들이 “들에 있을 때”였다는 화자의 설명을 통해서 ‘가인’의 살인은 사전에 준비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은 인적이 뜸한 한적한 곳으로서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참고. 신 22:25-27). ‘가인’이 무슨 말을 동생에게 했는지도 없기에, 이야기를 급하게 절정으로 이끌어가려는 화자의 의도가 드러나 보입니다. 이와 같은 기법은 “타락 이야기”에서도 이미 본 바 있습니다(참고. 3:22-23).
심판(9-14절). 네 번째 장면은 두 번째 장면에서처럼 다시 대화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무대의 주인공은 하나님과 ‘가인’입니다.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9-14절)
다만 이곳에서는 두 번째 장면에서와는 달리 ‘가인’의 대응을 아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점이 다릅니다. ‘가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문에 이은 저주의 선언이 그 형식에 있어 “타락 이야기”와 아주 흡사합니다:
(1)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3:9)
(2)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10절)//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3:13)
(3)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11절)//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3:14)
(4)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12절)// “17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3:17-19)
그리고 “타락 이야기”에 등장하는 상당수의 핵심 단어들이 이곳에서도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1) “알다”; (2) “지키다”; (3) “저주를 받다”; (4) “땅”; (5) “유리하다”.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은 ‘아담’의 경우에서처럼 수사적(修辭的) 질문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아벨’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신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질문의 의도인 즉은 ‘가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라는 초청이자 촉구입니다. 이야기는 다시 한 번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전에 ‘아담’이 이와 유사한 질문을 받았을 때, 그의 대답은 적어도 진실의 일부를 담고는 있었습니다(3:10). 하지만 ‘가인’은 자기는 알지 못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뻔뻔스럽게도 야유와 냉소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아벨’이 “양치는 자”라고 했으니, 그의 대답은 “내가 양치는 자의 양치는 자라도 된다는 말입니까?”라는 냉소를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사실 <구약>에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목자, 즉 “지킴이”가 되도록 부름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아우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전적으로 부정하기 위하여, 그 책임을 과도하게 부풀려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지키다”는 항상 감시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주제넘은 행동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레위기>에 따르면, 누군가 곤경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도움을 주어야 할 사람은 그의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레 25:48). 그러므로 ‘가인’이 했어야 할 일은 아우를 늘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곤경에 빠졌을 때에 도움을 주거나, 특히 살인을 당했을 때에는 피의 복수를 했어야 합니다(민 36:12-28). 그가 자신의 책임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부모들보다 더 마음이 완악하고 곧은 자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인’의 뻔뻔스러운 책임 회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죄악이 무엇인지 본인에게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10절). 그리고 이 장면에서 이야기는 절정에 이르고 있다 하겠습니다. 물론 이야기의 전개로 볼 때, 이야기의 절정은 ‘가인’이 동생을 살해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화자는 그 장면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간략하게 언급해버리고, 이곳 10절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대화를 소개함으로써, ‘가인’의 행위가 얼마나 악한 것이었는가를 성공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을 전체 이야기의 절정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히브리’어로 네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 “네 아우의 핏소리가 나에게 호소하고 있다”는 별도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아주 강력한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생명은 핏속에 있으므로(레 17:11), 피를 흘리는 행위 즉 살인은 가장 추악하고 타락한 행위가 될 것입니다. 당연히 살인에 대한 피의 복수를 그냥 지나친다면 그것은 거룩한 땅을 오염시키는 일이며, 그 땅에 하나님이 계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재앙(災殃)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도피성(逃避性)을 그 땅에 두셨습니다(민 35:9-34; 신 19:1-13). 그리하여 살인자를 추적할 수 없을 때에는 희생제사로 대체하도록 규정을 마련해두기도 했습니다(신 21:1-9).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살인은 반드시 피의 복수를 수반해야 합니다(창 9:5). 이곳에서 ‘아벨’의 피가 그 복수를 위해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호소하다”(q['x, 챠아크)는 양식이 없을 때나(창 41:55),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나(삿 4:3), 또는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나(출 14:10), 겁탈을 당하고 있는 여인이 도움을 청할 때(신 22:24, 27) 등과 같은 아주 위급하거나 절박한 상황에서 울부짖는 행위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의를 당한 희생자가 하나님께 간청하는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출 22:23, 27). 그리고 <구약>은 한 결 같이,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울부짖음을 결코 외면하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사 19:20; 시 34:19; 107:6, 28; 삼하 23; 왕상 21).
11절은 ‘가인’이 저지른 범죄의 당연한 결과를 그리고 있습니다: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아.” 일부 학자들은 이 구절을 ‘아담’에게 내려진 저주와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한다고 제시하기도 합니다: “네가 땅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11절이 의미하는 바가 “땅으로부터 유리되는” 저주라고 설명합니다. 즉 인간의 삶의 터전인 경작지로부터 미개척지로 추방되는 저주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범죄의 결과 ‘가인’과 ‘아담’에게 내려진 저주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는 직접적인 저주를 내렸지만, ‘아담’의 경우에는 그가 아니라 뱀과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점입니다(참고. 3:14, 17). 이런 점에서 처벌의 정도도 심화되었다 할 수 있습니다. ‘가인’에게 내려진 저주는 일종의 복수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그는 땅이 주는 열매를 제사로 드렸으며, 그 땅에게는 아우의 피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뿌려진 피는 그를 향해서 울부짖었으며, 이는 그 땅이 그를 위하여 소출을 내주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그가 그 땅으로부터 배척당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땅이 입을 벌리다”는 무엇인가 역겨운 사람이나 행동을 집어삼키거나 또는 토해낼 때 종종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민 16:30, 32; 신 11:6; 레 18:28). 혹자는 이 땅을 지하 세계 즉 죽은 자가 가는 ‘스올’로 이해하기도 합니다(참고. 사 5:14; 합 2:5).
12절은 11절의 저주에 대한 일종의 유사반복 내지는 종합 반복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담’은 힘들게 수고하여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었던 것에 비해, ‘가인’은 아예 그 땅에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가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이는 그의 운명이 가족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할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부족이나 씨족 사회에서 종족 살인에 대한 대가로 받게 되는 형벌입니다. 누군가 살인을 당했을 때 피의 복수의 의무를 진 자는 피살자와 가까운 친척이나 가족일 것입니다만(민 35:9-28), 가족을 살인한 자의 운명은 공동체로부터 추방이 하나의 대안적인 처벌이었던 것이지요(참고. 삼상 13:34-14:24). 그러니까 “땅으로부터 유리됨”은 모든 관계 특히 가족관계가 끊어짐을 의미한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또는 끊어짐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처벌에 대한 ‘가인’의 대응은 그것이 너무 가혹하다는 불평입니다(13절). 직역하자면, “내 형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겁다”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하여 그 대가 즉 형벌을 감당해야 함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레 5:1, 17; 민 5:31). 그러나 하나님께서 형벌을 감당한다고 할 때, 이는 죄인에 대한 용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출 34:7; 호 14:3). 제사장이나 ‘레위’족이 “죄를 감당하다”함은 자신의 죄악이나 백성의 죄를 감당한다는 의미입니다(민 18:1, 23). 그러나 ‘가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당연한 대가를 치루는 것이며, 그는 이를 가혹하다고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너무 지나치다고 불평하는 형벌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 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14절). ‘가인’의 호소는 내용 상 앞선 하나님의 심판(12절)을 반복하고 있습니다만, <에덴 이야기>를 연상시켜주기에 충분합니다. 그가 지면에서 쫓겨 나가는 모습은 ‘아담’ 부부가 동산으로부터 추방당하는 장면과 오버랩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3:24). ‘가인’은 그 부모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숨어 지내야 할 것입니다(3:8). 그런데 그의 불평인 즉은 그의 부모보다 더 멀리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단순히 동산으로부터 추방당했습니다만, ‘가인’은 “지면”으로부터 추방당하고 있습니다.
살인의 창시자(創始者)로서 그는 어쩌면 동산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기대했을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은 훗날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할 도피성의 상징으로 볼 수 있을 것인즉, 그는 그곳에 피신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출 21:14; 왕상 2:28). 아닌 게 아니라, 훗날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에 버금가는 한 사례가 있기도 합니다. 즉 ‘압살롬’이 그의 동생 ‘암논’을 죽이고 도망자의 신세로 살다가 ‘헤브론’으로 돌아와서 희생 제사를 드린 경우가 그것입니다(삼하 15:7-9). 사실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소에 가서 서약을 올렸어야 합니다만, 대신에 ‘헤브론’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리스’ 시대에는 살인자는 그가 살고 있는 성소에서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규정되어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동료 인간들을 두려워하게 되나 봅니다(참고. 욥 15:20-25). ‘가인’이 불평하고 있는 기저(基底)에도 바로 이와 같은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자기를 만나는 자마다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이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대목입니다. 즉 당시 ‘가인’은 자기 부모 외에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을 텐데 누구를 두려워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같은 모순 때문에,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에덴 이야기>와는 별도의 전승으로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에덴 이야기>에 곧바로 연결시키면서, 있을 수 있는 이와 같은 논리적 모순을 모를 리는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화자는 두 이야기를 하나로 연결시키면서, ‘아벨’의 복수를 도모하고 있을 ‘아담’의 다른 후손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결과(15-16절). 마지막 장면의 주인공은 하나님과 ‘가인’으로서, 이곳에서 두 등장인물의 역할은 각기 주도적이며 수동적입니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15-16절)
화자는 다시 한 번 ‘가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 내용을 이곳에서 반복하면서 이야기의 결말로 삼고 있습니다(16절). 즉 ‘가인’은 이제 ‘에덴’을 떠나 방랑자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설명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추가적인 선고를 덧붙이고 있는데, ‘가인’이 ‘아벨’의 죽음에 대한 피의 복수를 피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추가적인 대목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가인’의 형벌을 다소 감형시켜주는 은혜의 행위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피의 복수를 당하여 일찍 죽게 되면 그 자체로써 그에게 내려진 저주가 사실 상 끝나게 되는 것이므로, 그는 형기(刑期)가 사실 상 단축되는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일곱 배나 받을 것”이라는 선언은 일종의 판례법(判例法)에 해당합니다(참고. 출 22:19; 21:12, 15-17). 여기서 “일곱 배”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치는 않습니다만, 하나님의 철저한 보복을 의미하는 시적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시 12:6; 79:12; 잠 6:31). 물론 일곱은 <구약>에서 자주 사용하는 거룩한 숫자이기도 합니다.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겠다는 대목 역시 애매한 점이 많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아주 다양한 표적들이 있는데, 이들은 주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호의(好意)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예: 무지개, 할례, 기적, 성취된 예언: 9:12; 17:11; 출 3:12; 사 7:11). 따라서 ‘가인’에게 준 표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어왔습니다. 즉 ‘가인’을 공격하려는 자들이 그가 지닌 표지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으므로, 이 표지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가인’을 보호하는 장치로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표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학자들은 아주 다양한 추측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문신(文身)이라거나, 특별한 머리 스타일이라거나, 심지어는 ‘가인’을 뒤따라 다니는 개(犬)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혹자는 아주 간단하게 ‘가인’(@yIq)이라는 이름 자체가 표지라는 견해를 내놓고 있습니다. ‘가인’은 “복수하다”(또는 “처벌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나캄’(!q'n)과 발음이 비슷하다하여, 그의 이름이 하나님의 복수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인’의 이름에 관한 설명은 그의 출생과 더불어 이미 본문 속에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1절),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명입니다. 물론 <창세기>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바뀌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기에(예. 17:5, 15), 이 같은 설명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결국 ‘가인’이 받은 표지가 정확히 무엇이었던지 분명치는 않습니다만, 그 기능은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그 기능은 이중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타락 이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으로부터 얻어 입은 옷은 은혜와 동시에 자신들의 과거 잘못을 상기시켜주는 이중적인 기능을 했던 것처럼, ‘가인’이 받은 표지 역시 가상적인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그를 보호해주는 기능과 동시에 공동체로부터 분리되고 소외된 채 살아가는 도망자 된 신세였음을 상기시켜주었을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처음 두 주인공이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시작했습니다만, 결론은 ‘가인’이 하나님을 떠나 “에덴의 동쪽”에서 유리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는 그의 부모가 겪었을 것보다 더 심화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의 부모가 상실한 것이 있다면 ‘에덴’ 동산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이었던 것에 비해, ‘가인’은 상실을 넘어 “유리”(遊離)와 “방랑”을 뜻하는 땅 ‘놋’에서 홀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결국 <타락 이야기: 3장>나 <가인과 아벨 이야기>나 공히 보여주고 있는 한 가지 진실은 죄는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시키며,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2. 두 계보: 가인의 후예(17-24절)
<가인과 아벨 이야기>의 제 2부는 그 형식에 있어 단순한 족보와 담론(談論)에 이어 시와 노래가 뒤섞여 있습니다.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17-24절)
이 부분은 ‘가인’의 살인에 관한 이야기(3-16절)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내용 상 2절에 곧바로 연결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3-16절의 내용은 일종의 문학적 일탈(逸脫)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자는 아주 간략하지만, ‘가인’의 후손들의 다양한 직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예: 17, 20, 21, 22절). 그리고 뒤이어 ‘라멕’의 노래에 관해서는 유독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그의 의도인 즉은 ‘라멕’이 그의 조상 ‘가인’이 지녔던 그 모든 폭력적 기질을 그대로 전수받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함일 것입니다. 특히 이 족보에서 두드러진 두 인물은 ‘라멕’과 ‘에녹’으로서, 이 두 이름은 다음 단락에 등장하고 있는 <셋의 족보>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두 사람에 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도, 두 족보에 등장하는 두 사람의 ‘에녹’과 두 사람의 ‘라멕’을 독자들이 혼돈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외 대부분의 홍수 이전 인물들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이름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4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문학적 형식이나 내용의 일관성으로 미루어,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4장 전체를 <야훼 전승>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 근접하는 유사한 이야기를 찾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다만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영웅적 인물들에 관한 예들은 근동 문학에서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예컨대, <수메르 홍수설화>는 ‘아프칼루’(apkallu)로 불리는 일곱 명의 현자(賢者)들이 홍수 이전에 살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들 현자들은 일종의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서 ‘메소포타미아’의 신 ‘엔키’(Enki)가 창조한 자들입니다. 이들을 창조한 의도는 인류로 하여금 문화와 문명을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며, 이들은 ‘엔키’의 제사장으로서, 고대 왕들이나 지배자들에 대해서는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본문과 고대 근동 신화와 어떤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만, <창세기> 화자는 이들 신화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 정도는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은 지식을 토대로 그는 성경적 세계관을 피력하고 싶었을 것인 즉, 그가 소개하고 있는 건축술이나 음악이나 예술 등과 같은 문화와 문명은 다양한 직업들이 ‘엔키’와 같은 神의 선물이 아니라, 일정 부분 어쩔 수 없이 ‘가인’의 죄의 본성을 간직하고 있음을 제시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인’의 후예라는 족보 자체가 이미 이점을 암묵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결국 ‘야훼’ 화자가 이 족보를 통해서 드러내 보이고 싶은 바는, ‘아담’에게서 비롯된 죄가 ‘가인’을 거쳐 그의 후손들에게 점점 확산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가인이 아내를 맞아 에녹을 낳았다”(17절)는 표현은 1절이나 25절과도 병행하는 표현입니다(다시 한 번 진술의 일관성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에녹’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은 여러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1) ‘야렛’의 아들(5:18-24); (2) ‘미디안’의 아들(25:4); (3) ‘르우벤’의 장자(46:9). 흥미롭게도 ‘가인’이 ‘아담’의 장남이었던 것처럼 ‘르우벤’도 ‘야곱’의 장남이었으며, 두 사람 모두 장남의 이름이 ‘에녹’입니다. 어원론적으로 ‘에녹’(&/nj)은 “바치다” 또는 “훈련시키다”는 뜻입니다. 만일 첫 번째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그는 도시 건설자로서 도시를 지어 하나님께 드린 자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17절의 의미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즉 성을 쌓아 바친 이가 ‘가인’인지 ‘에녹’인지가 분명치 않다는 말입니다. <한글 개역>이나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에 따르면, 의심의 여지 없이 성을 쌓은 이는 ‘가인’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특히 17절 후반의 “아들의 이름을 따라”가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직전 구절에서 ‘가인’은 저주를 받아 땅에서 방랑 생활을 시작하게 될 것인데, 곧바로 이어 그가 성을 쌓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딘지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17절에서 끝 부분, “아들의 이름을 따라”가 없다면 성을 쌓은 이는 ‘가인’이 아니라 ‘에녹’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겠습니다. 특히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였고(2절), ‘에녹’의 후손 중에서 ‘유발’이라는 자는 모든 음악 예술가의 조상이 되었다는 사실(21절) 등으로 미루어 보아서도 ‘에녹’을 건축가의 조상으로 인정한다 해서 크게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일단의 학자들은 17절을 다음과 같이 수정할 것을 제안하기도 합니다: “그(‘에녹’)가 성을 쌓고, 그 자신의 이름을 따라 성을 ‘에녹’이라 이름 하였으니.” 17절을 이렇게 수정하고 나면 ‘가인’의 족보는 일곱 세대를 거치는 동안 일련의 흐름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즉 인류의 첫 농부 ‘가인’에서 시작하여, 첫 건축가 ‘에녹’을 거쳐 마지막 일곱 번째에서 인류의 첫 음악 예술가 ‘유발’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에녹’의 아들 이름은 ‘이랏’인데, 그 의미는 불분명합니다. 여러 가지 의미가 제시되고 있는데, 예컨대, “새”, “당나귀”, “힘”, “오두막” 등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랏’의 아들 ‘므후야엘’ 역시 그 의미가 불분명합니다만, “하나님의 제사장”,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다”, 또는 “하나님께서 멸절시키다” 등의 의미가 제시되고 있기도 합니다. ‘므후야엘’의 아들 ‘므두사엘’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견해가 일치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다음과 같은 다양한 의미가 알려져 있습니다: “지하세계의 사람”; “욕망의 사람”; “기도의 사람.”
‘므두사엘’의 아들은 ‘라멕’으로서, “강한 자”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나 그 어원은 불분명합니다. 그는 ‘아담’의 칠대 손이며, ‘가인’의 계보 중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는 족보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그의 난폭한 성품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일곱은 ‘히브리’ 특유의 완전수로서, 그의 성격은 자신의 선조 ‘가인’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성(罪性)이 점차적으로 확대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장남(長男)을 중심으로 수직으로 전개되는 가계는 마지막 ‘라멕’에 이르면 세 아들을 중심으로 수평적 분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19-22절): ‘아다’와 ‘씰라’와 ‘야발’. 이와 같은 족보 기술 방식은 <창세기>의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 기법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노아’의 세 아들에 관한 기술이나(5:32), ‘데라’의 세 아들에 관한 기술(11:26)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도 <가인과 아벨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창세기>의 다른 이야기들과 일련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컨대, ‘라멕’이 두 아내를 둔 것과 관련해서 그가 ‘가인’의 후손으로 <창세기> 화자는 이를 정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다처(一夫多妻)의 중혼(重婚)은 족장 시대에는 흔한 관례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예: ‘아브라함’, ‘에서’, ‘야곱’),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화자의 관심사는 오히려 죄의 속성에 관한 보편적인 현상을 주목하는데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즉 결혼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나 삶의 방식이 어떻게 죄의 오염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는지를 보여주고자 함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덴 이야기>는 일부일처(一夫一妻)가 이상적인 관계임을 시사한 바 있으므로, 이곳에서 ‘라멕’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이상적인 인간의 규범으로부터 얼마나 타락해갔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라멕’의 아내 ‘아다’는 “장식”(裝飾) 또는 “아름다움” 등의 의미로 알려져 있으며, ‘에서’의 아내 중에도 같은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36:2). ‘라멕’의 두 번째 아내, ‘씰라’(hL;x, 칠라)는 “그늘”(lxe, 첼) 또는 “그림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마도 근동의 열사(熱砂)가 주는 더위로부터 그늘이 주는 안식을 암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그녀의 이름이 “반짝이다”(lxlx, 첼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그녀의 이름이 “달콤한 음성”을 암시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라멕’의 두 아내는 각기 여성의 두 가지 특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 “아름다운 용모”와 “매혹적인 음성”이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화자는 ‘라멕’이 이와 같은 여성의 육감적인 매력에 쉽게 넘어가는 인물로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라멕’의 세 아들, ‘아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은 모두 “생산하다”는 의미의 동일한 ‘히브리’어 어근에서 유래한 것으로 봅니다만, 세 이름 사이의 정확한 차이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으나, 세 이름은 그 발음에 있어 모두 ‘아벨’을 연상시켜주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의 직업이 모두 그들의 조상 ‘가인’(@yIq)을 음성학적으로 닮았다는 점입니다: (1) ‘야발’-가축을 치는 자(hn<q]m, 미크네); (2) ‘유발’-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는 <구약>에서 애곡(t@nyIq)과 연결되기도 함; (3) ‘두발가인’-이름 자체가 ‘가인’을 포함하고 있음. 이처럼 두 자녀에게 발음이 비슷한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구약>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예. ‘메단’/‘미디안’, 25:2; ‘에바’/‘에벨’, 25:4; ‘이스와’/‘이스위’, 46:17; ‘오홀라’/‘오홀리바’, 겔 23:4).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는 기술로 미루어, 그가 ‘베두인’ 족의 조상이 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단순히 ‘아벨’의 양치는 일을 이어받은 것은 아닙니다. ‘아벨’이 단순히 양을 길렀다면, ‘야발’은 여타 모든 가축들 즉 양과 염소와 당나귀 낙타 등을 망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아벨’이 단순히 목축업에 머물었다면, ‘야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거래까지도 관여했을 것이며, 그런 점에서 일종의 문화의 진보가 이루어진 셈입니다.
‘유발’은 인류의 첫 음악가로 불러야 할 것입니다(21절). 그의 이름은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이스라엘이 희년(禧年)이나 기타 중요한 종교 행사에서 사용하는 “양각”(羊角) 나팔 ‘요벨’과 발음이 비슷합니다(참고. 출 19:13; 레 25:9-10; 수 6:5).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수금과 퉁소”는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간단한 악기입니다.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날카로운 기구를 만드는 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22절). 한 사람의 이름으로 두 이름을 연결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두 번째 이름 ‘가인’은 첫 번째 이름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이며, ‘가인’은 아마 “대장장이”(smith) 정도로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인’은 후대의 편집에 의해서 ‘두발’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이며, 이는 <구약>에서 여러 차례 등장하는 동명이인(同名異人) ‘두발’과 구별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예. 10:2; 대상 1:5; 사 66:19; 겔 27:13). 그리고 ‘두발’은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그의 이복형제들 ‘야발’과 ‘유발’과 동일한 ‘히브리’어 어근(語根)인 ‘야발’(לבי)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 의미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두발-가인’이 하는 일은 기구를 “날카롭게 하는”(vf'l, 라타쉬) 것이었는데, 이 단어는 여기 외에 다른 세 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삼상 13:20; 시 7:12; 52:2; 욥 16:9). “구리”는 구리 금속과 그의 합금인 청동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구리는 주전 사천 년 경부터 인류가 처음 사용한 금속으로서, 철보다 먼저 언급하고 있는 것은 적절하다 할 것입니다. 철기 시대는 청동기 시대 다음에 도래한 것으로 주전 이천 년 경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이처럼 일찍 철기의 사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본문에서 의미하는 바는 불을 사용한 주조(鑄造)가 아니라 단순한 수작업(手作業)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 “날카롭게 하다”는 단순한 공예 수작업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이해하는 방식은 화자가 이곳에서 철기 사용의 정확한 연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금속 세공(細工)과 같은 기술의 기원에 대해서 언급하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발-가인’의 누이 ‘나마’(hm;[}n)는 “즐거움” 또는 “유쾌함” 등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르호보암’의 어머니 이름이기도 합니다(왕상 14:21). 왜 하필 이곳에 이 여인이 등장하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그녀는 ‘노아’의 아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서술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화자의 의도로 보자는 것입니다(Wilson). 즉 ‘라멕’의 첫 번째 아내 ‘아다’가 두 아들을 낳았으니, 그의 두 번째 아내 ‘씰라’도 ‘두발-가인’에 이어 ‘나마’를 포함시키면 두 자녀가 되므로 족보에서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라멕의 노래>로 ‘가인’의 족보는 마무리됩니다(23-24절). 음악의 출현이 있었으니(21절), 당연히 시(詩)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라멕의 노래>는 다양한 시적 장치를 통해서 그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히브리’ 시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시적 유사 반복의 병행법이 눈에 띕니다: (1) ‘아다’와 ‘씰라’여// ‘라멕’의 아내들이여; (2) 내 목소리를 들어라//내 말에 귀 기울이라(참고. 사 28:23; 32:9; 시 17:6); (3) 사람을 죽였고//소년을 죽였도다; (4) 상처로 말미암아//상함으로 말미암아(출 21:25, 사 1:6); (5) 칠십 배//칠십칠 배.
노래의 운율(韻律) 또한 주목할 만한데, 많은 단어들이 모음 “이”로 끝나거나 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를 언급하는 부분이 무려 다섯 번이나 등장하고 있어 ‘라멕’의 포악한 자기중심성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노래는 전체적으로 세 쌍의 유사 반복 병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이와 같은 운율은 잠언이 대체적으로 한 쌍의 병행 대구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각 쌍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라멕’은 이 노래를 통해서 살인을 한 자신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정당방위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 일종의 과잉방어로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자를 살인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년”(dl,y, 옐레드)은 대체적으로 “어린 아이”로 번역하고 있으나, <성경>에서는 노쇠한 자와 대비되는 대략 사십여 세까지의 나이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왕상 12:8, 10; 왕상 14:21; 단 1:4).
노래의 마지막 한 쌍의 병행 대구는 특이하게도 두 절 모두 결과를 나타내는 접속사, “그러므로”(yKi, 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라멕’이 호언(豪言)하고 있는 “칠십 배”의 복수는 분명 <구약>에서 규정하고 있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즉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노래의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화자는 ‘라멕’의 후손은 모두 정죄 아래에 있음을 선언하고 있으며, 앞으로 닥칠 재난을 예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3. 두 계보: 셋의 후예(25-26절)
이 두 구절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와 <아담의 계보> 사이에 위치하면서, 두 문단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25-26절)
부부가 동침하여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서술은 이곳에서 세 번째로 등장하고 있습니다(참고. 4:1, 17). 그와 동시에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서술도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 단락은 이전의 기록을 회고하면서 동시에 5장의 내용을 예고하는 가교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 처음으로 ‘아담’(!d;a)은 정관사 없이 등장함으로써,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이 아니라 ‘아담’으로 불리는 한 개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단락이 다음 단락의 주제를 미리 담고 있다는 사실은 이 단락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4:25-26은 5:1-6:8의 내용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셋’의 출생에 관한 이 단락이 주는 효과를 맛보기 위해서는 앞선 두 단락, 즉 ‘가인’과 ‘아벨’의 출생과 그 결과(1-16절, 17-24절)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둡고 무거운 두 이야기의 분위기와는 달리 ‘셋’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희망의 빛을 비춰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하나는 ‘셋’의 이름과 관련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서술이 그것입니다.
‘하와’가 새로운 아들의 이름을 ‘셋’(tv)이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25절하). 이 문장의 동사 “주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셋’과 발음이 유사한 ‘쉬트’(tyv)입니다. 따라서 ‘셋’의 이름은 이 동사에서 유래한 것 같지만, 실은 두 단어 사이에는 의미론적으로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어보입니다. 오히려 ‘셋’은 “낳다”(tyv, 쉬트)라는 ‘히브리’ 동사에 대한 음성학적 유희(遊戱)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은 ‘셋’의 이름은 이 동사에서 유래했다고 보고, ‘셋’의 이름으로부터 “대신하다” 또는 “대체하다”라는 의미를 이끌어내기도 합니다. 물론 ‘셋’과 <민수기>에 등장하는 한 지파의 이름, ‘셋’(tv)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민 24:17).
‘가인’의 경우 하나님의 이름은 ‘야훼’이나, ‘셋’의 경우 단순히 ‘엘로힘’입니다. 그리고 ‘가인’에 대해서 “득남” 즉 한 “사람”인데 비해, ‘셋’의 경우는 “씨”로 부르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일까? 일부 학자들은 ‘하와’가 ‘가인’을 낳았을 때에 비해서 ‘셋’을 낳았을 때가 자긍심이 훨씬 덜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야훼’로 부를 때 이스라엘이 어떻게 인식했는지에 대해서 이해한다면 두 출생에 대해서 ‘하와’가 느꼈을 태도의 차이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창조와 언약의 하나님, 친밀하고 가까운 하나님인 반면, ‘엘로힘’은 어딘지 소원(疏遠)하고 비인격적인 신입니다. 그렇다면 ‘셋’을 단순히 한 아이가 아니라 “씨”로 부르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웬햄’(Wenham)에 따르면, ‘셋’을 통해서 가계가 이어가기를 원하는 ‘하와’의 소망을 드러낸 것일 수 있습니다. 이는 <창세기> 전체의 일관된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 “씨”를 언급하며, ‘하와’는 “가인이 죽인 아벨을 대신한 씨”로 부르면서, 그가 낳은 세 아들의 이름 모두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살인자도 피살자도 모두 자신의 아들이었음을 부지불식간에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에노스’(v/na)라 불렀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 사실은 처음으로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참고. 4:1, 25). ‘에노스’는 “사람” 또는 “인간”을 뜻하는데, ‘아담’의 경우에서처럼 고유명사(이곳)가 되거나 또는 일반명사가 되기도 합니다. 이 단어가 고유명사로 42회, 그리고 일반명사로 554회 등장하고 있습니다. 때로 이 단어는 인간의 연약함이나 유한함,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疎外)(예. 시 104:15; 욥 28:13)를 나타내는데 사용하기도 합니다. 다만 ‘아담’과 ‘에노스’ 사이에 어떤 의미론적 차이가 있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그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알려져 있습니다. 초기 ‘유대’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시작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장 속에 “여호와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와 같은 해석은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할 것입니다. <족장 이야기>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예. 12:8; 13:4; 21:33; 26:25), 이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나 제사에 대한 포괄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의미하는 바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가인’의 후손들로부터 “목축”이나 “음악”이나 “금속 세공” 등과 같은 인류 문명이 비롯되었다는 화자의 서술을 읽은 바 있으므로(20-22절), 이번에는 정상적이고 참된 예배의 시작이 ‘셋’의 후손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서술이 당연이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가인’과 ‘아벨’도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렸습니다만(3-4절), ‘에노스’로부터 시작되는 예배는 새로운 시작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언급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예. 9:20; 10:8).
그리고 ‘야훼’의 이름이 이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비평적 관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즉 이 구절을 “이때부터 사람들이 기도에서 하나님을 ‘야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때, <야훼 전승>에 속하는 본문에서 어떻게 이처럼 이른 시기에 ‘야훼’의 이름이 등장할 수 있느냐는 의문입니다. 학계는 대체적으로 <엘로힘 전승>(출 3:14-15)이나 <사제 전승>(출 6:3)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훼’가 등장하는 시기를 ‘모세’와 거의 동 시대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견해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이유들로 해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첫째, ‘야훼’ 화자는 이미 1절에서 ‘화와’의 입을 빌어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한 바 있으므로 ‘에노스’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야훼’의 이름이 등장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 <창세기> 1-11장이 다루고 있는 내용과 <출애굽기>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동 시대의 사건이 될 수 없습니다. 이곳 26절에서 화자의 주된 관심사는 이스라엘의 한 특정 시기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그리고자 함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인류의 제도나 경험을 알려주는데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이름을 ‘야훼’로 불렀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셋째, “야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는 서술이 과연 사람들이 하나님을 ‘야훼’로 예배하기 시작했음을 뜻하는 것인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창세기> 12-50장을 유심히 읽어보면, 이곳에서 화자가 ‘야훼’라는 이름이 ‘모세’ 이전에 알려져 있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26절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석은, 단순히 “이때부터 공적 예배가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결론을 지지할 수 있는 근거로 ‘수메르’의 <홍수 이야기>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도 홍수 이전에 이미 도시나 성 그리고 예배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1. 가인을 기다리며
본인의 큰 아들 달우가 처음 태어났을 때, 얼마나 귀엽고 잘 생겼던지 모릅니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동네를 돌아다니면 보는 사람들마다 아주 귀엽다고 한 마씩 해댔습니다. 외국인들의 눈에도 이 아이가 귀엽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달우를 보고 귀여워할 때마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우쭐해지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래, 이 녀석은 분명 나의 유전인자를 물려받지는 않았을 거야. 적어도 외모에 있어서는 말이지.” 평소 내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늘 일종의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던 나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아들에게 거는 기대도 대단했습니다. 자라가면서 하는 짓도 아주 똑똑하고 예사롭지 않게 보였기 때문이지요. “이 녀석 분명 나중에 큰일을 할 거야. 내가 못 다한 일을 할 수 있겠지.” 나는 이렇게 믿으며 커가는 그를 아주 흐뭇하게 지켜보았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와 같은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아들에 대해서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말이지요. 참 한심한 아버지라고 놀려도 어쩔 수 없습니다.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에 대해서 이 같은 기대를 가지지 않겠습니까!
특히 어머니 쪽이 그 정도가 더 심하지 않겠습니까? 자기 뱃속에서 열 달이나 품고 있다 세상에 내보냈으니, 얼마나 자랑스럽고 사랑스럽겠느냐는 것이지요. 그 어머니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자기가 낳은 자식에 거는 기대는 더욱 각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대(代)를 이어 연결되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내 자식을 통해서 이루실 신비하고도 놀라운 일을 기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어머니들, 심정이 어떻습니까? 흥분과 기대로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습니까?
여자의 아들. ‘아담’과 ‘하와’는 어떠했을까요? 난생 처음 경험해보는 임신의 경험, 내 배속에 그 “약속의 씨”를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참고. 3:15), 자신들에게 내려진 저주가 이 아이를 통해서 사라지고 다시 그 동산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아이가 태어나는 날을 손꼽아 헤아리고 있지 않았을까요? 요즘 같았으면 달력에 표시를 해가며, 열 달, 아홉 달, 여덟 달, 한 달, 한 주일, 삼 일, 그리고 내일... 그야말로 하루가 여삼추(如三秋)와 같은 심정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여인의 아들”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었을 것입니다. ‘아담’이 아내의 이름을 ‘하와’, 즉 “생명” 또는 “생명을 주는 자”로 지은 것만 보아도 그의 믿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분명 죽을 것”(2:17)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에덴의 동쪽”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아들의 탄생은 그 자체로써 구원이고, 회복이며, 소생(蘇生)이 될 것입니다.
마침내 아이가 태어납니다! 두 사람의 기쁨과 흥분을 상상해 볼 수 있겠습니까? 구세주가 태어난 것이에요! 그들의 ‘메시아’ 즉 그리스도 말입니다. ‘가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기록을 많이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여인의 배에서 태어난 첫 인류, 배꼽을 지닌 첫 인류, 부모를 구원해 줄 자식, 세상에 생명을 전수(傳受)해 줄 약속의 씨, 등등. 내 품에 안겨 눈을 감고 새록새록 숨 쉬며 젖을 빨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하와’의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혹시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과 겹치지는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두 아들 모두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 줄 아이, 즉 그리스도인 것이지요.
아이를 내려다보며 그의 부모가 무엇이라 환호하고 있는지 들어봅시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1절하). 부모의 기대, 환희, 희망, 그리고 자랑을 엿볼 수 있는 환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역본은 이 구절을 “내가 ‘야훼’로 부르는 한 남자를 낳았다”로 번역하기까지 합니다. ‘화와’의 기쁨이나 자신만만함이 어떠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상의 난제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다룬 바 있습니다.
하지만 두 아이는 처음부터 그 운명이 엇갈리고 있었음을 ‘하와’가 꿈엔들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자신의 팔에 안겨 평화롭게 잠들고 있는 이 아이가 인류의 첫 살인자, 그것도 인류의 첫 번째 존속살인자(尊屬殺人者)가 될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자신의 배에서 태어난 두 아들이 될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가해자의 어머니이자 동시에 피해자의 어머니가 되어 그 어느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가련한 신세가 될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도대체 누구를 변호해야 하며,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외에는 달리 원망의 대상이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처음부터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날 줄을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냥 그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었기 때문이지요.
뱀의 아들. 하나님의 예언에 따르면, “여인의 후손” 즉 ‘가인’을 통해서 생명이 세상에 들어오도록 되어있었으나, 인류의 역사는 처음부터 아이러니 그 자체로 시작합니다. 생명이 아니라 피, 즉 죽음으로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그는 생명을 주는 자가 아니라, 죽음을 주는 자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이제 여인의 아들이 아닌 뱀의 아들로 성장하게 될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지혜와 지식이 자라,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던 또 다른 여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창조 명령”(또는 “지상 명령”)의 핵심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번창하라”입니다(참고. 1:28). 이 명령은 단순한 명령이라기보다는 거룩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이 창대하게 되리라”는 약속인 것이지요. 하지만 <성경> 도처에 하나님의 약속이 정 반대로 성취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희망 찬 약속으로 시작하였다가 참담한 실패로 끝나는 경우 말입니다. 그 첫 번째 사례가 ‘아담’과 ‘하와’일 것이고, ‘가인’을 그 두 번째 사례로 꼽아야 할 것 같습니다.
도대체 ‘가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사이좋게 지내던 형제가 어느 날 갑자기 원수가 되어, 형이 동생을 잡아 죽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무슨 유산이나, 지위를 두고 다투었을 리도 없고, 보험금이 탐이 나서 동생을 죽였을 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인’이 태어날 때부터 무슨 선천성 살인 기질을 가져서, 아무나 닥치는 대로 “묻지 마” 식의 살인을 저질렀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부모의 죄의 유전자가 자식에게 전수되었다고 한다면 어찌 ‘아벨’은 예외일 수 있겠습니까!
두 형제의 기질이나 직업만 보면 오히려 동생이 형보다 더 과격해질 수 있는 환경적 요인이 많았다 하겠습니다. 형은 농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고, 동생은 목축업입니다. 잡아 죽이고, 가죽을 벗기고, 피를 보는 일은 형보다 오히려 동생이 더 많이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물론 직업이 사람의 기질을 만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만, 가능성으로 볼 때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농사일은 때를 기다려야 하고, 날씨를 살펴야 하며, 열매가 익을 때까지 기다리며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내와 절제와 성숙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가인’이 오히려 한 수 위가 아니었을까 억측도 해봅니다. 왜 이런 억측인가? ‘가인’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안타깝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의 처음과 나중을 알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사장 ‘엘리’ 가문도 어떻게 그 종말을 고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삼손’은 어떻습니까? 시작과 나중이 이처럼 극명하게 갈리는 경우가 어찌 한 개인에 국한될 수 있겠습니까!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도 “제사장 나라”로 출발하였습니다(참고. 출 19:6). 하나님과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 즉 “생명의 씨앗”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도 열방의 ‘메시아’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은 ‘사울’이나 ‘솔로몬’이나 ‘엘리’나 ‘삼손’과 같은 운명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 나라” 즉 왕국보다 더 영광스러운 나라에서 시작하여, 왕국으로 변질되더니, 결국 이웃 왕국의 노예로 마무리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회복의 기회를 맞이하긴 했으나, 자신의 지혜로 하나님의 지혜를 판단하다가, 그들의 창조주 즉 생명의 주를 살해하는 결정적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즉 ‘가인’의 후예, “뱀의 아들”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섭리와 운명. 그렇다면 처음부터 ‘가인’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던가? 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던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태어나는 것과 태어나지 않은 쪽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마치 사과와 오렌지 맛의 우열을 가리는 것만큼이나 어리석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만, 하도 ‘가인’의 인생 역전이 안타깝고 남의 일 같지 않기에 해보는 우문(愚問)일 것입니다.
만일 ‘가인’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면, 그가 처음부터 뱀의 아들이 될 운명이었다면, ‘삼손’도, ‘엘리’도, ‘사울’도, ‘솔로몬’도, 그리고 ‘이스라엘’도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주장해야 하지 않을까? 선지자 ‘예레미야’가 스스로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형편이 하도 어려워, 왜 자기를 태어나게 했느냐고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을 쏟아낸 바 있습니다(참고. 렘 19).
하기야 예수님께서도 자기를 팔 자에 대해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지 않습니까(마 26:24)! ‘가롯 유다’를 두고 하신 말씀이지요. 이 말씀은 듣기에 따라, ‘가롯 유다’에게는 인생을 다르게 살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는 뜻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의 궁극적인 책임은 ‘가롯 유다’나 ‘가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로 돌림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들은 감독이나 작가가 아니라, 출연자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감독이나 작가가 시키는 대로 충실하게 악역(惡役)을 수행했던 것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한 가지 단서가 필요합니다. 그 연극의 감독이나 작가가 하나님이라는 단서 말입니다. 그러나 운명론자는 운명의 존재나 운명의 뜻을 믿을지언정, 하나님의 존재나 그분의 의지(意志)를 믿지 않습니다. 설령 믿는다 해도, 하나님은 모순의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존재하지도 않는 하나님에게 그 모든 일의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운명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정직한 태도가 아닐까요?
우리는 인생을 흔히 “각본 없는 연극”이라 부릅니다. 이 얼마나 멋진 통찰인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에 운명이니, 예정이니 하는 것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말이지요. 예컨대, ‘가인’과 ‘아벨’은 각기 처음부터 가해자와 피해자로 살 운명으로 정해져 있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두 사람은 처음부터 동일한 조건에서 출발했습니다. 동일한 부모, 동일한 가정환경, 동일한 교육, 동일한 하나님, 동일한 예배와 제사, 동일한 기회, 동일한 하나님. 두 사람을 화가(畵家)로 비유하자면, 이들은 각기 똑 같은 도화지(圖畵紙)와 물감 재료를 가지고 각자의 인생을 그려나갔다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가나안’에서 처음 이렇게 출발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구획 정리를 해놓고 각 지파를 이주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움밈과 둠밈’, 즉 주사위를 던져 거주지를 정하도록 했습니다. 참으로 민주적인 방식이었고, 하나님의 인격의 일단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방식을 “섭리”(攝理)라 부릅니다. 섭리와 운명은 전혀 다릅니다. 운명이 획일적이고, 결정적이고, 기계적이며, 비인격적이라면, 섭리는 다양하고, 열려있으며, 융통성이 있고, 인격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분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인격적인 하나님의 섭리가 있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인격적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습니다. 모 신학자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은 멋진 문장으로 요약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와 함께, 때로는 우리의 뜻에 반(反)해서, 그리고 때로는 우리의 뜻과 무관하게 일하신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의 인생에 간여한 방식도 이와 같았다 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처럼 애매모호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일하시는가? 인격적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그분의 절대자유와 절대주권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면 할수록, 인간의 책임도 함께 강조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가인’은 뱀의 자식이 되도록 예정되어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가인’은 그 사실을 알 수도,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예정이 없는 것으로 알고 살았어야 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살면서 내일이 결코 오지 않을 것처럼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교육과 훈련, 예배와 제사, 그리고 교제를 통해서 세상의 구세주가 되기 위하여 열심히 살아갔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고 소망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면 어찌 나를 위해서 악한 일을 계획해두셨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하지만 ‘가인’은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자신의 소명에 실패했을 때, ‘바벨론’으로 흩어졌던 것처럼, 이제 ‘가인’도 땅에서 유리(遊離)하는 자가 되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었습니다. 두려움과 허무와 상실감을 안고 국적도, 가정도, 이웃도 없이 말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형벌은 사회적 죽음, 즉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었습니다.
선택의 기로. ‘가인’의 행동은 우리에게 시사(示唆)하는 바가 큽니다. 그의 인생은, “시작은 거창하였으나 나중이 미미하게 된” 두 번째 사례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자유인으로 출발하였으나, 노예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은혜로 시작하였으나, 저주로 끝납니다. 공동체의 축복으로 시작하였으나 외톨이로 전전긍긍하며 살 것입니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되어 승승장구 장성(將星)이 되고 국가의 최고 사령관까지 올랐으나, 반역죄로 종국에는 이등병으로 강등된 전직 대통령의 신세와 같습니다. 거룩한 ‘나실인’으로 출발하였으나 무절제와 방탕으로 결국 이방인의 노예가 되어 두 눈이 뽑히는 등 치욕의 인생을 살다간 ‘삼손’과 같습니다.
자신이 택한 선택의 결과일 것입니다. 결국 선택은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자유인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노예로 살 것인가?”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 “자유의 노예로 살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노예로 살 것인가?” <성경>은 ‘가인’이 자신의 노예가 되어 본능이 시키는 대로 살았다고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요일 3:12);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도다. 또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유 1:10)
미래에 대한 예언(豫言)은 실은 현실을 향한 예언(預言)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구약>의 그 모든 <예언서>들이 미래에 있을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豫言) 내지 예고(豫告)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지금 살던 방식대로 그대로 살라고 권고하지는 않습니다. 그 반대인 것이지요. 지금 당장 그 멸망의 길에서 떠나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豫言의 목적인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豫言書>는 <預言書>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미래의 지구 환경이나 인구 문제 등에 관한 이런 저런 충격적인 보고서들이 봇물 터지듯 출판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지구에 다칠 대재앙의 前兆라는 경고와 함께 말입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떠할까요? 2012년 6월 23일(토) 대한민국은 20-50 클럽에 가입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단 일곱 나라만 가입해 있는 명예의 클럽입니다. 그것도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 식민 국가에서 이 업적을 성취한 나라는 대한민국뿐입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우려도 함께 싣고 있습니다. 최고속의 노령화와 출산율 저하로 2045년에는 인구는 다시 4천만 이하로 떨어질 것이며, 우리는 이 클럽에서 제외될 것이라는 우울한 예언(豫言)입니다. 불과 30년 후면 다시 우리는 중진국 수준으로 하락할 것이랍니다. 과연 그렇게 될까요? 과연 이 예언은 성취될까요?
나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까?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히브리서>는 이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습니다.
4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9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히 6:4-9)
즉 우리에게 두 길이 있고, 그 길은 오늘 내가 어떻게 하는가에 달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고는 이것입니다. 제발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나중이 미미하게 되는 참사(慘事)는 피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참사를 피할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탁월함은 훈련과 습관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탁월한 사람이라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행동하기 때문에 탁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은 습관이 만든다.”
훈련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체질을 낳고, 체질은 운명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교회와 목장과 학교가 있어, 격려하고, 훈계하고, 질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나의 미래를 위해서 말입니다.
2. 가인과 아벨
한 때 유행하던 TV 광고 문구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 광고 문구라기보다는 차라리 잠언에 더 가깝다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담’ 부부나 ‘가인’에게도 이 잠언을 적용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가인’도 그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과연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첫 번째 인류가 되었던 것일까?
그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인간을 향해서 “저주”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하게 한 장본인이었습니다(참고. 4:11). 이전에 하나님께서 뱀을 향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으며(3:14), 그리고 땅에 대해서도 또 한 번 사용하신 적이 있습니다. 즉 땅이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아, 두 사람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 적이 있습니다(참고. 3:17). 하지만 사람을 향해서 저주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신 것은 ‘가인’의 경우가 처음이었습니다. 이래저래 ‘가인’은 기록의 사나이입니다.
가인의 형벌. 그가 받은 저주는 죽을 때까지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자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11절하-12절).
‘가인’의 저주는 그의 부모가 받은 것에 비하면 심각한 발전이며, 이 저주 속에 포함된 일련의 선언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땅이 더 이상 효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은 ‘아담’과 ‘하와’에게도 이미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었지만, ‘가인’의 경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땅이 그를 추방하고 배척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의인화법(擬人化法)을 사용해서 땅의 부르짖음을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당신은 나를 경작하여 나의 소산을 하나님께 드렸으면서, 그 보상으로 내게 준 것은 동생의 피가 아니었소! 나도 이제 더 이상 당신에게 내 소산을 줄 수가 없소. 내 땅에서 떠나시오”
땅이 그를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과 그는 원래 하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가 원래 “땅의 티끌”에서 탄생한 존재가 아닙니까! 그 역시 그러합니다. 이렇게 볼 때, ‘가인’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거부당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아 고아원에 내다 버리는 상황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향에서 배척당하고 추방당하는 선지자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한 개인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가혹한 형벌은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었습니다. 이는 사회적 죽음을 말합니다. ‘가인’이 지금 그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암시입니다. 그는 ‘아사셀’ 양처럼 앞으로 평생을 가정도, 고향도, 공동체도, 국적도 없이 정처 없이 외톨이로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인생은 그야말로 나그네 길이 될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학교에서 “왕따”를 견디다 못해 자살을 선택하는 청소년 학생들의 수가 연간 수백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사회적 죽음은 곧 개인의 영혼을 황폐화시키며, 종국에는 육체적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가인’이 자신에게 내려진 저주가 지나치게 무겁고 가혹하다며, 하나님에게 대드는 모습을 통해서도 ‘가인’의 저주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13-14절).
우리는 이 장면에서 화자 자신의 삶의 자리를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땅”에서 쫓겨나 ‘바벨론’에서 구차스러운 삶을 연명해가고 있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바로 그들일 것입니다. 그 땅이 그들을 내쫒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땅을 혹사하였기 때문입니다. 안식일도, 안식년도, 희년도 없이 오직 일, 일만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지금 그는 하나님이 없는 이곳 ‘바벨론’ 강가에 앉아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지요.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던 그 황홀한 예배, 그 영광과 약속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지금 그는 ‘블레셋’ 인들의 잔치에 노리개 감으로 초대된 맹인 ‘삼손’의 처지처럼 되었다는 것이지요.
가인의 예배. 도대체 무슨 연고로 ‘가인’은 이토록 혹독한 판결을 받게 된 것입니까? 도대체 무슨 선택을 잘못 했던 것일까? 무슨 실수를 저질렀던 것일까?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하나님에게 드린 예배가 문제였습니다. 무슨 살인이나, 간음이나, 거짓말 등과 같은 범죄 행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가 비극의 사단(事端)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한 일입니까!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지요. 다른 일도 아니고 예배 때문이라니! 박수치고, 노래하며, 기도하고, 축도하는 자리에서 저주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행여나 ‘가인’이 빈손으로 나왔다고 그럽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온갖 아름답고 풍성한 과일과 곡식들을 다 가지고 나온 것이에요! 이런 사람의 예배를 거들떠보지도 않다니요!
‘가인’의 기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화면을 되돌려봅시다. 한 해의 끝에 두 형제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제사를 드립니다. 두 사람이 드리는 제물은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것입니다. 농부인 ‘가인’은 땅의 곡식을, 목자인 ‘아벨’은 양과 그 기름을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은 거부하고 ‘아벨’의 것만 받으십니다. 이에 ‘가인’은 격분합니다.
나라도 당연히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럴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예배만 받아들이고 내 것은 받지 않으신다면 말입니다. 호의(好意)를 무시당하는 것만큼 더한 모멸감이나 분노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건 속말로 뭐주고 뺨맞은 정도가 아닙니다. 누가 이런 고약하고 심술궂고 편파적인 신(神)에게 예배를 드리고 싶겠습니까! 누가 그를 섬기고 존경하고 싶겠습니까! ‘야곱’의 자식들이 왜 그들의 애비를 알기를 우습게 알았습니까? 편애(偏愛)였습니다.
“그래서 섭섭합니다. 화가 납니다.” 가인이 이렇게 불만을 드러냈더니(5절), 하나님은 미안하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비난하고 꾸짖는 것이에요(6절). 예컨대 이런 것입니다. 주일날 만사(萬事)를 제쳐두고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설교자가 격려는커녕 되레 야단을 치는 것이에요. 저주에 가까운 설교를 나에게 막 퍼붓는 것입니다. 아, 교회 나와 준 것만도 고마워해야 할 판에 나에게 야단을 쳐? 야단을 치려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자들을 향해서 해야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설령 무엇인가 잘못했다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더 기회를 주셔야지. 예컨대, 잘못되었으니 다시 하라든지 말이지요.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가인’이 크게 잘못한 것도 없어 보입니다만. 하지만 그에게는 두 번째 기회도 없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정말 비정하고, 쌀쌀하고, 불 같이 화를 잘 내는 하나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인격적인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분의 평소 성격이나 기질이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가리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나답’과 ‘아비후’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제사장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배 한 번 잘못 드렸다 죽음을 자초했습니다(참고. 레 10:1-2). 예배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자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어떻습니까? 성도들이 은혜를 받아 한 마음 한 뜻이 되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성령 충만하게 되자(행 4:32),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이에 질 새라, 소유를 팔아 그 중의 일부를 교회에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오, 통재라! 그중 일부를 자신들의 것으로 감추었다는 이유로 다른 곳도 아닌 교회와 성도들 앞에서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참고. 행 5:1-11). 도대체 이런 끔찍하고도 억울한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바보들 같으니라고, 차라리 처음부터 내어놓지를 말지.”
이 사람들에 비하면 ‘가인’은 그나마 다행인 것입니다. 최소한 죽음은 면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항변할 기회도 갖지 않았습니까! ‘나답’과 ‘아비후’,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러한 기회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 번의 선택으로 평생이 결정되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즉 그들에게 두 번째 기회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가인의 선택.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가인’의 예배를 거부하시는 것일까? “하나님은 농부가 아니라 목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라고 혹자는 말합니다. 사실과는 아주 거리가 먼 답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땅을 경작하도록 명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창 2:15).
그렇다면 ‘가인’이 드리는 제물에 문제가 있었을까? 혹자는 그렇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은 곡식보다는 짐승과 그 피의 제물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발상은 다분히 후대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를 염두에 두고 나온 것입니다. 즉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레위기>의 규례를 말하는 것입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일부 속죄와 관련한 제사는 짐승을 희생 제물로 요구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제사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자원제”로 드리는 제물 중에는 소제, 즉 곡식제물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가인’이 드린 제물이 문제였다고 볼 수는 없을 듯합니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우리는 “거룩한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화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다 나은 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본문과 <신약> 한 곳을 참고해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히 11:4)
우리는 여기서 ‘아벨’의 믿음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가 지니고 있는 내면의 자발적인 동기에 대해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면 ‘가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말일까? 그가 억지로 제물을 드렸단 말일까? 그렇지는 않은 듯합니다. ‘가인’의 시대에 무슨 의무적인 제사 규례 같은 것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인’ 역시 자발적으로 하나님에게 예물을 드렸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두 사람 다 자발적으로 예배를 드렸으면 됐지 또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 차이는 아마도 그들이 드리는 제물의 질(質)에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화자는 ‘가인’의 예물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아벨’의 예물을 상세하게 보여줌으로써 무언중에 두 종류의 예배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아벨’이 드린 예물이 “첫 새끼와 그 기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4절). 즉 ‘아벨’은 짐승들 중의 첫 번째와, 그 짐승의 가장 맛있는 부분인 기름 부위, 즉 최상의 것을 드렸다는 암시입니다.
이와 같은 표현은 결코 우연이랄 수 없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첫 아들 ‘가인’이 첫 소산을 드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둘째 아들 ‘아벨’이 그 첫 새끼를 드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소유이지만, 특별히 첫 태생은 짐승이든, 곡식이든, 열매든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다만 그 첫 태생이 사람일 경우에는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대속’(代贖; redemption)이라고 부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출애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참고. 출 22:28-29; 34:19-20). 즉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모든 장자들의 죽음의 대가로 “출애굽”이라는 구속을 받았습니다(참고. 출 13:2, 12-15; 4:22). 그렇다면 ‘가인’은 하나님의 장자(長子)로서, 자기를 대신할 짐승의 첫 태생을 드려야 했던 것이나, 오히려 둘째인 ‘아벨’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구한 역설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가인’에게 하나님은 두 번째 선택이었다는 것이지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한 것이 아니라, 내 나라와 내 유익을 먼저 구했다고 할까요?
이뿐 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물은 결코 흠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레 1:3; 20:20-22). 늙었거나, 병들었거나, 사지(四肢)가 온전하지 못한 것들은 다 제물로서의 자격이 없습니다. 일년생 양의 가치가 바로 이것입니다. 두 번째 ‘아담’ 즉 이스라엘의 장자 예수님은 왜 인생의 황금기 즉 청년의 시기에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드렸습니까? 우리가 드리는 십일조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립니까? 왜 우리는 한 주일의 첫날을 “주의 날”(the Lord's day)로 기념합니까? 왜 교회는 청소년 선교를 그 중요한 사역으로 삼아야 합니까?
‘아벨’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마저도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했고, 그것을 행동으로 보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해주셨기 때문에 드리는 단순한 감사의 예배 이상의 헌신이요, 결단입니다. ‘아벨’의 ‘헤세드’가 빛나는 장면입니다. 즉 그는 둘째 아들로서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가인’처럼 ‘나실’인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양의 첫 새끼를 드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십일조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룻’처럼 안 해도 될 일을 했습니다. ‘룻’의 동서(同壻) ‘오르바’의 선택을 우리는 결코 나무라거나 정죄할 수 없습니다. 희망 없는 미래에 누가 투자를 하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오르바’의 선택은 지혜롭고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오르바’의 선택이 지혜롭고 현명한 선택이었다면, ‘룻’의 선택은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룻’은 “운명이 바꿀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바꿀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꾸지 않는 것”임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백 번 양보해서 ‘가인’의 선택을 ‘오르바’의 선택처럼 현명하고 지혜로운 것이었다고 한다 해도, ‘아벨’의 선택은 ‘룻’의 그것처럼 탁월하고 위대한 것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가인’이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렸다면, ‘아벨’은 드리지 않아도 될 것을 드렸습니다. ‘가인’이 쓰고 남은 것을 드렸다면, ‘아벨’은 최상의 것을 따로 떼어놓았습니다. ‘가인’이 자기의 소유를 드렸다면, ‘아벨’은 자신을 드렸습니다.
습관의 중력. 두 사람의 예배에 왜 이처럼 큰 차이가 나는 것일까? 어쩌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이번 한 번만 그랬을까? ‘가인’이 너무 바빴던 것일까? 그 해 특별히 소출이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그동안 잘 해 왔는데, 이번만 그랬던 것일까? 그래서 하나님은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일까?
서양 격언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생각은 말이 되고, 말은 행동이 되며, 행동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성품이 되며, 성품은 운명이 된다.” 모든 올림픽 종목이 지속적인 반복 훈련을 필요로 하지만, 특히 체조 경기나 피겨 스케이팅 등은 뼈를 깎는 반복 연습을 요구합니다. 이들 선수들은 습관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글을 잘 하는 것은 타고날 때부터 한글에 대한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봉사활동이나 기부도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전도나 설교가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인’의 예배는 평소 습관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날 예배에서 ‘가인’의 모습은 평소 그의 모습이었습니다. 혼자 있을 때 그의 모습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날도 그의 습관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충실하게 ‘가인’의 평소 모습을 드러내주었습니다. ‘가인’은 매일 매 순간 습관이 시키는 대로 선택했고, 그렇게 살아왔던 것입니다. 자연이 그를 선택한 것도, 운명이 그를 선택한 것도,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냅니까? 주일 예배를 대하는 내 모습은 어떠합니까? 회중 앞에 나와 공적 기도를 드리는 내 내면 세계는 어떠합니까? 혹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이런 저런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횡설수설 내지는 중언부언하지는 않습니까? 설교가 듣기에 부담이 되고 거북하지 않습니까? 헌신과 결단의 초청을 들을 때마다 부담스럽긴 하지만, 계속 무시하며 절호의 기회를 날려버리지는 않습니까? 과연 언제까지 그렇게 하실 작정입니까? 언제까지 그동안 살아오던 방식대로 살아갈 요량입니까?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체질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바로 지금이 결단의 순간입니다. 나오셔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내일이란 없습니다. 다음 주 예배도 없습니다. 그것은 환상이나 희망 속에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이 은혜 받을 때요, 지금이 구원을 얻을 때인 것이지요. 집나간 작은 아들처럼 분연히 차고 일어나야합니다: “그래, 지금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자.” “내가 다시는 개가 그 토한 곳으로 돌아가듯 하지 않겠노라.”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헌신을 요구하시면서 이렇게 도전하십니다: “만일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 강 물이 넘칠 때에는 어찌하겠느냐”(렘 12:5).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탁월한 삶을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발걸음을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사귐을 갖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유진 피터슨). 주님께서도 우리로 하여금, “좁은 길로 가라”고 초청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유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이 가니까 물어보지도 않고 그냥 따라가는 그 넓은 길이 아니라, 대부분 가려 하지 않는 그 길 말입니다. 그 길은 외롭고 위험할 수도 있지만, 시시하고 쩨쩨한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실로 위대하고 탁월한 길인 것입니다.
탁월해지고 싶습니까? 지금 당장 헌신합시다! 할렐루야!
3. 가인의 하나님
천만리(千萬里)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희옵고
내 마음 둘 듸 없어 냇가의 안자시니
져 물도 내 안 같아여 우러 밤길 녜놋다
이 시는 어린 단종이 폐위(廢位)되어 영월로 유배될 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서 호위 책임을 맡았던 왕방연(王邦衍)이 돌아오는 길에 지었다는 노래입니다. 어린 왕을 유배지에 남겨두고 돌아와야 했던 안타까움과 죄책감을 흐르는 시냇물에 이입(移入)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흐르는 시냇물 소리마저 유배(流配)의 애절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던 모양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왕으로부터 버림받은 신하가 유배지에서 이전에 누리던 왕의 총애와 사랑을 그리워하며 부른 노래도 있습니다. 그 유명한 송강 정철(松江 鄭澈)의 사미인곡(思美人曲)이나 속미인곡(續美人曲) 등이 이에 속한다 할 것입니다. 이처럼 유배나 귀양은 당시 사형(死刑) 다음으로 중한 형벌이었던 모양입니다. 죄를 지었으면 감옥에 가두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굳이 모든 사회적 관계로부터 격리시키는 이유를 우리는 알 것 같기도 합니다. 홀로 남겨지는 두려움이나, 고통이나, 불편함, 그리고 그리움을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형벌. 유배란 결국 사회적 죽음으로서, 고대 ‘유대’ 사회에서도 공동체로부터 추방은 죽음 다음으로 큰 형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담’이나 ‘가인’이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대가로 받은 형벌은 유배나 귀양에 준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법정 판결과 비교하자면, 감형(減刑) 없는 무기징역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은 다시는 낙원의 동산으로 돌아올 수 없었고, ‘가인’은 평생 홀로 배회하여 외롭게 떠돌이로 살아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창살 없는 감옥에서 홀로 수감생활을 하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인생을 창살 없는 감옥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는 참으로 적절한 비유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인생이란 결국 동산 밖에서, 하나님과 유리(遊離)된 나 자신만의 삶을 말하는 것일진대, 그 자체로써 감옥이라 아니 할 수 없겠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거의 무제한으로 누리던 자유와 특권을 송두리째 박탈 당해버렸으니, 두 사람에게는 이전의 삶을 기억한다는 자체가 견디기 어려운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먼 훗날 ‘바벨론’ 강가에서 ‘예루살렘’ 망향가(望鄕歌)를 부르며 슬픔에 잠겨있던 이스라엘 실향민들을 떠올려 보면, 지금 ‘가인’의 처지가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그 좋았던 시절이 기억이 나서 더 서럽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아버지를 버리고 집 나간 작은 아들도 같은 서러움과 멸시를 당했는데, 그 역시 그 좋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내 집이 있었고, 내 아버지가 있었고, 내 형제가 있었고, 공동체가 있었으며, 예배가 있었고, 찬송이 있었으며, 성경공부가 있었으며,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대화가 있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가 있었습니다. 나는 주인이었고 주인의 아들이었지, 노예가 아니었습니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만나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아, 자유란 그처럼 엄청난 선물이었던 것을 이전에는 미처 몰랐구나! 그 영광의 주님을 내가 몰랐구나!
‘가인’과 ‘아벨’은 자라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 이야기를 부모로부터 들으면서 자라지 않았을까? 마치 이북 출신 부모님을 둔 이남의 자식들처럼 말입니다. 또는 이민 간 부모를 둔 자녀들처럼 말입니다. ‘아담’이나 ‘하와’에게 ‘에덴’을 향한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더 깊고 깊어져 고치기 어려운 질병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움이 그들의 병이었습니다. 그리움이 더할수록 지난날 자신들이 저지른 그 행동이 더욱 후회스럽고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아, 내가 그 때 왜 그랬을까?”
오랜 외국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한 자매님이 그 긴 세월동안 가장 힘들었던 일이 그리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남편도 곁에 있었고, 그 세월동안 세 자녀를 두었음에도 무엇이 그토록 그리웠던 것일까요? 본인의 아내도 늘 그리움의 병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남편인 내가 있고, 두 아들이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남편이 있었으나 그는 늘 타인이었습니다. 학교와 교회 일로 주변에 있기는 했으나, 내 속에 들어오지는 않으려 하는 것 같았습니다. 두 아들이 어렸을 적에는 그나마 그들이 위안이 되기도 했는데, 이제는 이들도 결혼을 해서 떠나버렸습니다.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때로 우울증을 낳기도 하고, 또 때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분노로 화산처럼 폭발하기도 합니다.
‘하와’도 혹시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토록 친밀하기만 했던 남편과의 관계는 타락 이후 분리와 분열을 겪으면서, ‘아담’은 곁에는 있으되 실은 없는 존재가 되지 않았을까? 동거는 하였으되 별거의 상태로 접어든 것은 아니었을까? 하나님께서, “네가 남편을 원할 것이라”고 예고하신 것도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었을까? 부부 사이에 그리움이 해결되지 못하면 그 결과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대답은 당신의 몫입니다.
‘가인’은 무엇이 그토록 두려웠던 것일까? 그는 이렇게 항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 너무 가혹한 형벌을 내리시는군요. 두 번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이렇게 나를 저 광야로 내몰다니요. 너무합니다. 너무 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닥쳐올 외로움과 그리움의 어두운 그림자를 상상하며 떨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가인의 항변. 왕의 아들이자, 부모의 구원자이며, 세상을 구속하라고 이 세상에 태어난 ‘가인’이 광야로 내 쫓긴다는 사실. 단종과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내몰렸다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에게 가해진 형량은 그가 저지른 범죄에 비하면 지나치게 무거운 것은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가인’은 판결이 부당하다며 항소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의 항소를 들어봅시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내가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13-14절).
피해자가 아니라 피의자가 항소를 제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보는 이의 가슴을 무겁게 만듭니다. 잔혹한 살인자 서진환을 연상시켜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최근 한 주부를 성폭행하고 무참하게 살해한 장본인입니다. 그가 법원 1심 재판에서 무기징역 형을 선고받자, 상고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 형량이 너무 무겁다는 것입니다!
살인자가 살인을 두려워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얼마 전 제주도 올레 길을 산책하던 한 여인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강성익 역시 법정에서 지금 ‘가인’과 비슷한 행동을 보였습니다. 형량이 너무 무겁다면서,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한 것이 그것입니다. 원래 배심원제도를 도입한 배경에는 판사의 판결이 지나치게 가벼워, 배심원단의 일종의 군중심리를 이용해서 판결을 보다 엄하고 무겁게 내리게 하자는 것이었는데, 실제 그동안 배심원단이 내린 평결을 통계적으로 분석해보니 오히려 판사의 선고보다 더 가볍게 나왔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남의 일에 대해서는 관대해지나 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강성익은 1심 재판에서 사형이 아닌 23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배심원단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등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 동정심을 유발한 것이 형량을 낮게 받은 이유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이에 분개한 쪽은 피해자 유족입니다. 유족의 분노인 즉은 도대체 사람을 얼마나 잔인하게 더 죽여야 사형 선고를 받을 수 있느냐며 재판관을 향하여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피해자들보다 더 분노한 사람은 피의자 강성익이었습니다. 그는 형량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자 재판관을 향해서 온갖 욕설을 퍼부어대면서 법정에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불의한 판결. ‘아벨’이나 ‘아벨’의 유족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그들 역시 하나님의 판결이 정의롭지 못하며, 불공정하다고 주장할까요? ‘아벨’의 유족이 기대하는 공정한 심판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이번 살인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마땅했을까요?
<구약>에서 “기업을 무르다”(la'G, 가알)는 말은 “자기 친족을 어려움이나 위험에서 구하다”는 뜻입니다. <룻기>에서 ‘보아스’가 보여주고 있는 행동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고엘 법”으로 알려져 있는 이 제도는 살인자에 대한 피의 복수도 허용하고 있습니다. “피의 보수자”는 가장 가까운 친족을 언급하는데 사용되며, 일명 “구속자”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의 임무는 자신의 친척을 살해한 자를 처벌하는 것입니다(신 19:6). 이 단어는 “보수자”라는 의미로 <구약>에서 12회 등장합니다(민 35:12, 19, 21; 35:24, 25, 27; 신 19:6, 12; 수 20:3, 5, 9).
이 경우 복수를 하려는 사람은 당연히 피해자의 가족이나 친척일 것입니다.
특히 <구약>에서 규정하고 있는 규례에 의하면, ‘가인’은 사형(死刑)을 면할 수 없습니다.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참고. 창 9:6; 민 35:16). 그런데 ‘가인’의 경우는 참으로 일이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형이 동생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계획적으로, 아주 잔혹하게 죽였습니다. 동생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 때 복수를 해주어야 할 책임을 진 사람이 동생을 죽어버렸으니 난감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보호자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가해자로 돌변하는 경우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비일비재한데, ‘가인’이 그 원조(元祖)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셨을 때, ‘가인’의 대꾸가 참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립니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내가 무슨 내 아우를 지키는 목자(牧者)라도 되라는 말씀입니까?” 이 질문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가인’은 지금 자기 입으로 “고엘 법”을 상기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그 법의 제정자인 하나님에게 말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할까? 과연 그에게 무어라 답해주어야 할까?
동생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복수를 해주어야 할 형이 오히려 동생을 죽여 버렸으니, 누가 억울한 ‘아벨’을 위하여 피의 복수를 해 줄 것인가? ‘아담’과 ‘하와’? 아니면 다른 형제들? 하나님이 직접 나섰습니다. 어떤 처벌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사형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분 스스로 정해놓은 형량(刑量)에 의하면 말입니다. 그런대 실제 판결 내용은 사형이 아닌 귀양 즉 유배(流配)입니다: “너는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12절하). 그냥 살려둔 것입니다!
살려두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를 해치지 못하도록 특별한 조치까지 마련해 주었습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15절). ‘가인’이 정확하게 무슨 표를 받았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이는 상징적으로 ‘아담’에게 입혀주신 “가죽 옷”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하여 행여나 누군가 ‘아벨’을 위한 “피의 복수”를 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차단막을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 비록 솜방망이 처벌이긴 해도 하나님 자신이 이미 처리한 사항이니,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에 따라 다른 어느 누구도 다시 그의 죄를 묻지 말라는 의도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부분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제정한 그 법을 스스로 어기고 있습니다! 솜방망이 처벌이 아니라, 아예 그 법을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그분 스스로도, ‘아벨’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호소하고 있다고 해놓고서는 정작 판결은 엉뚱하게 해버렸습니다. 이래도 괜찮은 것입니까? 누구보다도, ‘아벨’이 그 판결에 만족하고 수긍할 수 있을까요? 의롭고 공정한 판결을 해주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고 있을 그와 그의 유족들이 과연 이 재판을 정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서진환이 무기징역 형을 받자, 살해당한 여인의 남편이 도저히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다면서 상고(上告)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아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아벨’은 이 남편보다 더 억울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하나님이 내린 판결이니 어디 상고할 곳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호소는 억울하게 피해를 당한 자나 강간을 당한 여인이 도움을 외치는 절규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 정의와 공평이 어디 있느냐? 정말 억울해서 못살겠다. 살인자가 그냥 길거리를 활보하도록 내버려두다니!” 억울한 자를 신원해 주는 하나님인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음부도 그 입을 벌려 ‘아벨’의 피를 집어삼켜 버렸다고 말합니다(10절). 이는 그 땅도 더럽게 오염되어버렸다는 말입니다. <레위기>에 의하면 피가 묻은 사람이나, 땅, 혹은 물건은 다른 무엇보다 더 더러운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생명이 그 피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참고. 레 17:11).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오염된 땅에서는 절대로 살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인자를 도피성에서 따로 살게 하는 것도 그 땅의 나머지 부분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억울하게 당한 자를 신원(伸寃)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분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시 34:19). 하지만 하나님은 이번 판결로 그분의 명성에 큰 타격을 입은 듯합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닌 그분 스스로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신원함. “가인 재판”을 방청하면서, 우리는 ‘마이클 샌더스’가 물었던 질문, 즉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방청객들에게 이 재판은 정의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하나님의 판결에 만족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벨’과 그의 유족은 말할 것도 없고, ‘가인’조차도 불만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어떠했을까? 재판 결과에 흡족해 했을까? 그들의 아들 ‘가인’이 귀양길을 떠나는 것을 고소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아니면 애틋하고 애절한 심정으로 아들을 떠나보냈을까? 그들의 첫 아들이자, 자신들과 세상의 ‘메시야’가 될 수도 있었을 그 아들, 동생의 ‘고엘’이 되었어야 마땅한 그 아들을 말입니다. 누가 이들 부부의 참담한 심정을 감히 이해라도 할 수 있을까? 누가 이들의 억울함을 신원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이처럼 우리는 “가인 사건”을 놓고 하나님이 정의롭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사건”은 어떠합니까? 과연 십자가는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내고 있습니까?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억울함을 신원해 줄 수 있을까? 가족이나 동족으로부터 극심한 질시와, 편견과, 조롱과, 오해 속에 살다가 끝내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던 그의 억울함을 누가 신원해 주어야 하는가? 과연 이것을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아무 잘못도 없는 그 아들을 죽음에 내주었던 아버지의 행동은 과연 정의로운 것이었던가? 그 아버지의 억울함은 누가 보상하고, 신원해주어야 합니까?
십자가 사건은 정의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것은 불의한 스캔들이었습니다. 법과 정의가 넘치는 곳에 처벌과 사망이 넘쳐납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정의롭고 공평하기만을 바랍니까? 그래서 나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바랍니까? 그렇다면 나로 인해 죽어야 했던 아들과, 그 아들을 잃어야 했던 아버지 하나님의 억울함은 누가 풀어주어야 할까요?
4. 가인의 후예
역사는 과연 발전하고 진보하는가?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고 답할 것 같습니다. 굳이 생물학에서의 진화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류의 역사나 문명을 돌아보면 변하지 않는 것은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대개는 이전보다 더 발전된 형태로 변해 간다는 느낌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전보다 확실히 발전한 것처럼 보입니다: 더 많은 정보, 더 빨라진 왕래와 통신, 더 편리한 도구, 더 나아진 위생, 더 길어진 수명, 등.
과연 이와 같은 진보의 끝이 어디까지일지 잘 모르겠습니다. 과연 끝이 있기나 할 것인지, 있다면 흔히들 말하는 ‘유토피아’일지. 진보에 대한 이 같은 낙관론은 실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이십세기 후반부터 진보에 대한 기대는 다소 시들해진 느낌입니다만, 지나간 18-19세기의 두 세대, 즉 계몽시대 이후 제 일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만 해도 세상은 인류의 역사가 끝없이 발전할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모든 조짐이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었겠지요.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정신건강에도 아주 유익하겠습니다만,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근거 없는 낙관론에 대해서 찬물을 끼얹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지막을 알고 슬퍼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눅 23:28). 그분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는 ‘야고보’ 사도도 비슷한 충고를 하고 있습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약 4:9).
이 두 형제는 체질적으로 비관론자이거나, 아니면 아주 심술궂고 편협한 종교인임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좀 더 근사하고 상냥하게 말할 수도 있는 것을 가지고 정떨어지는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미래가 내가 기대하고 희망하듯 그렇게 항상 낙관적이지 만은 아닐 것이라는 경고성 메시지는 아닐까? 그렇다면 혹시 내가 간과하고 있는 진보의 또 다른 모습에 주목하라는 경고는 아닐까?
가인의 저주. 오늘 본문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진보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인’은 ‘에덴’을 떠나 ‘놋’으로 가서 정착을 합니다. 이 부분에서 나는 훗날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그 삼촌을 떠나 ‘소돔’으로 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롯’의 편에서 보자면 삼촌과, 그 땅과, 그 공동체를 떠나, 기회의 땅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거칠고 척박한 농촌에서 세련되고 우아한 도시로, 무미건조함에서 화려함으로, 구태(舊態)를 벗고 혁신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자기 발전을 위해 나아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공동체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나선 것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물고기가 물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소돔’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일가(一家)를 이루게 됩니다.
물론 ‘가인’은 ‘롯’과는 상황이 사뭇 다릅니다. ‘롯’이 자발적으로 떠났다면 ‘가인’은 쫓겨났으니 말입니다. 그는 ‘에덴’에서 “‘에덴’의 동쪽”으로 쫓겨났던 것입니다. <에덴 이야기>에서 “‘에덴’의 동쪽”이 시사(示唆)하는 바에 대해서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롯’이 유목 생활에서 도회지 정착민으로 살아간 것에 반해, ‘가인’은 이제 ‘에덴’의 농경생활(農耕生活)에서 “‘에덴’의 동쪽”에서 방랑자 즉 유목인(遊牧人)으로 살아가야할 참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부평초(浮萍草)가 될 운명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표식” 때문입니다. 형벌이 너무 지나치며,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 것이라고 항변하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표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이 표를 보고 아무도 그를 해치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래서 ‘가인’의 편에서 보자면 불행 중 다행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게 되었지만 적어도 신변에 대한 보장은 받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따라서 그는 처벌에 대해서 불평할 것이 아니라, 은혜에 대해서 감사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 같은 처우를 은혜라고 할 수 있을까? 주변 사람들은 그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을까? 그리고 주변의 시선을 대하는 자신의 기분은 과연 어떠했을까? 한 가정주부를 성폭력하고 무참하게 살해했던 서진환이 자신의 범행 동기를 묻는 수사관에게 발찌 때문이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놈의 발찌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직장을 가질 수도 없고, 자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더 엄격합니다. 성폭력범이 형기를 마치고 나온 뒤에도 그가 사는 집 앞에 경고 팻말까지 붙여놓습니다. “성 범죄자가 이곳에 살고 있으니 주의하십시오”라는 경고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출옥 후에도 평생을 이웃으로부터 갖은 모독과 냉대 가운데서 살아가야 합니다. 단 한 번의 잘못으로 평생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안고 살아가야합니다. 혹자는 이 같은 처사를 두고 또 다른 살인이라 하기도 합니다. 너무 가혹한 형벌이라는 뜻이겠지요.
‘가인’이 어떤 표식을 어떻게 받았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그를 만나는 사람이라면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을 표식임에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하여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요주의 인물로 기피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목욕탕에서 온 몸에 문신을 한 사람을 경원(敬遠)시 하듯 말입니다. “아,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구나”하며 으쓱한 기분이 들었을까? 이래저래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진 셈입니다. 아무도 그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을 터이니 말입니다.
‘가인’의 “표”는 이전에 그의 부모가 하나님으로부터 얻어 입었던 “가죽 옷”과 병행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가죽옷이 은혜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분리와 소외의 상징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인’이 받은 이 인식표 역시 그러합니다. 그 자신과 하나님과의 분리와 소외, 가족으로부터의 분리와 소외, 이웃으로부터의 분리와 소외가 그것입니다. 그 스스로도 “땅에서 유리하며 피하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듯이 말입니다.
가인의 도시. 하지만 그는 자신의 운명을 거부한 것처럼 보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의 계획이나 의도를 무시한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는 유목인으로 살기보다는 정착생활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놋’이라는 곳에서 자신이 만든 도피성(逃避城)에서 살아가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의 첫 아들 이름을 따라 그곳을 ‘에녹’이라 부르며 도시를 건설합니다. 마침내 안전한 피신처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부평초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지요. ‘에덴’이 ‘에녹’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이 같은 ‘가인’의 행위를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보아야 할까? 긴 방랑을 끝내고 마침내 도피처를 마련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38년의 광야생활을 마감하고 ‘가나안’에 정착하여 도시를 건설하며 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리셨던 저주를 마침내 풀어 주신 것일까? <창세기> 화자는 이 질문에 대해서 별다른 평가나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창세기> 1-11장 사이에서 또 한 번 등장하는 도시 건축 이야기, 즉 “바벨탑 이야기”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벨탑 공사”는 한 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전쟁 선포였습니다. 도시 ‘바벨’은 반역자들의 온상(溫床)이었고, ‘바벨’의 탑은 교만과 저항의 상징이었습니다. 도시 자유인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모였으며,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저항했습니다. 자유의 이름으로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놈의 자유가 뭐기에!
성(城)과 탑(塔)을 짓기 위해서 그들은 문화와 문명을 동원합니다. 과학과 기술을 활용한 것이었습니다. 벽돌을 구워내고, 돌 대신에 벽돌을 사용하고, 또 진흙 대신에 역청을 동원합니다. 모두들 한 가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니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쌓아올린 성(城)과 탑(塔)의 위용(威容)은 그들의 이름과 업적을 후대에 기리 남기게 될 것이었습니다.
‘가인’이 자신의 도시를 건설한 것도 같은 동기에서였을까? ‘해밀턴’(V. Hamilton)은 그의 행위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마련해주신 신변 안전에 대한 약속을 확신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구책을 마련했던 것이다.” ‘엘룰’(J. Ellul)도 비슷한 말을 남긴 바 있습니다: “‘가인’은 자신이 저지러놓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치유책은 그 자신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달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아이들. 이처럼 문화와 문명은 도시를 건설하고, 도시는 다시 문화와 문명을 먹고, 자라며, 더욱 발전해 갑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 이름을 만납니다. 우연찮게 세 사람 모두 음성학적으로 ‘바벨’을 연상시키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발’; ‘유발’; ‘두발’. 이들 모두 도시에서 태어난 아이들입니다. 동시에 도시의 문화와 문명을 재창조하고, 계승 발전시킨 장본인들입니다.
이들은 ‘라멕’의 두 아내 ‘아다’와 ‘실라’에게서 태어난 배다른 형제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처음으로 결혼에 관한 일부일처(一夫一妻) 제도가 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인류학의 일반적인 속설은 일부다처(一夫多妻)에서 일부일처로 발전해 왔다고 합니다만, 본문에 따르면 오히려 그 반대로 발전해(?) 왔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한 여자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룬 것이 아니라, 두 여자와 연합하는 첫 번째 사례를 보고 있습니다(V. Hamilton).
화자는 이 같은 발전(?)에 대해서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즉 옳고 그름에 대한 평가를 자제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 같은 침묵이 낯선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영웅들, 즉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일부다처의 결혼생활에 대해서도 <창세기> 화자는 옳고 그름에 관한 평가를 유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 같은 결혼을 인정했다든지, 또는 기뻐하셨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실은 <구약>에서 일부다처는 대부분의 경우 가정의 분열이나 불화, 그리고 때로는 가정 파괴로 끝맺고 있다는 점입니다. 결혼이 일부일처에서 일부다처로 진보하고 발전했음에도 말입니다.
가정의 파괴와 해체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조만간 아예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단어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습니다.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에서 진보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동성애 합법화 운동 때문입니다. 결국 미국 대법원에서 결혼에 대한 기존의 정의를 위법으로 규정했습니다. 즉 결혼을 이성(異姓) 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기존의 법이 위헌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두 남자나 또는 두 여자가 양친이 되는 가정에서 누구를 아버지로 부를 것이며, 누구를 어머니로 부를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단어를 고안해내야 할 판입니다. 이 같은 현실을 과연 결혼의 진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쌍수(雙手)를 들어 환영할 수 있을까?
본문은 ‘야발’과 ‘유발’과 ‘두발’ 세 사람이 인류 문명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사람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발’은 농축산 분야에서, ‘야발’은 음악 분야에서, 그리고 ‘두발’은 금속․제련 분야에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인류의 중요한 문화와 문명이 이들 “뱀의 후손” 즉 ‘가인’의 후예를 통해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예컨대, ‘헬라’의 철학이나 ‘로마’의 법과 제도는 ‘히브리’ 세계관이 결코 제공할 수 없었던 유익을 인류에게 기여한 바 있습니다(Hamilton). 수없이 많은 위대한 과학적 업적이 소위 이방인 과학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바대로,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참고. 마 5:45).
라멕의 노래. 이렇게 이야기가 ‘해피 앤딩’으로 끝났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곧 이어 등장하는 <라멕의 노래>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노래는 두 행복한 출생 이야기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놓여있습니다: ‘라멕’의 네 자녀들의 출생; ‘셋’의 출생. 그의 노래는 진보와 발전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보의 그늘 아래에서 함께 성장하고 있는 독버섯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죄”가 그것입니다.
그의 노래는 환희의 노래입니다. 자신의 업적과 용기를 한껏 드러내는 자작 노래입니다. ‘라멕’을 현대판 “싱어송 라이터”로 부를 만도 합니다. 그의 기분을 대변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내 아내들이여, 와서 내가 이룬 업적을 보라.” 그의 노래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신령한 시와 찬미가 아닙니다. 교만하고 뻔뻔한 노래입니다. 즉 사람 죽인 것을 자랑하는 노래입니다. 마치 전과자들이 모인 감방에서 누가 더 많은 전과의 업적(?)을 쌓았는지 자랑하고 경쟁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아담’과 ‘화와’나 ‘가인’조차도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범죄를 변명하고 다른 이에게 전가는 했을지라도, 자랑하고 뽐내지는 않았습니다.
‘라멕’이 살인을 하는 동기도 단순히 보복의 차원,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을 넘어선 것입니다(참고. 출 21:20-25). 조금이라도 피해를 받았다 싶으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가차 없이 칠십 배의 보복을 감행합니다. 자기보다 앞선 사람이 공중전화를 너무 오래 쓴다고 하여 칼로 찍어 죽이는 행위와 같습니다. 담배 꽁초를 함부로 길거리에 버린다고 나무라는 할머니를 벽돌로 찍어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노래는 “일곱에 일흔 번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기막힌 대조반복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도시”의 모습이자 분위기였습니다. 내가 자초한 질병을 스스로 치유해 보겠다고 세운 도시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치유와 회복이 아니라, 확산과 창궐(猖獗)이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휘젓고 다니면서 전염시키고 오염시킬 것입니다. 조류독감이 조류를 통해서 세균을 확산시켜간다면, “죄”는 하나님의 은혜인 문화와 문명, 과학과 기술을 매개체로 하여 그렇게 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죄가 심히 죄 되는” 요인이 있다 하겠습니다. 약을 독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지요.
“가인의 도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을까? ‘라멕’과 같은 살기등등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사람 말고는 없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닥쳐오는 위험이나, 위협이나, 공격이나, 어려움을 스스로 해결하되 단순히 해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일곱에 칠십 배로 되갚아주는 잔인무도한 ‘라멕’ 같은 사람 외에는 살아남을 자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서는 오직 힘이 진실입니다. ‘가인’에서 ‘라멕’의 자식들에 이르는 일곱 세대에 이르기까지 “가인의 도시”에는 하나님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아무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이것이 화자의 암시입니다.
이렇게 <가인 이야기>는 철저하게 비극으로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그 마음속에 하나님 두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성”이 아니라 “가인의 도성”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더 중요한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마음의 상실한 대로 내버려두셨기 때문입니다. ‘바벨’의 경우처럼 직접 내려오셔서 파괴하시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셨습니다. 마치 ‘가나안’ 일곱 족속의 범죄를 사백 년 동안이나 내버려두신 것처럼 말입니다. ‘노아’가 올 때까지 그 도시는 그렇게 발전하고 진보해 갔습니다.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이 도시처럼 말입니다. 나는 왜 여기 고아처럼 내던져져 있는 것일까? 나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여기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5. 여인의 후예
자기 나이를 물어보는 ‘이집트’의 ‘바로’ 왕에게, ‘야곱’은 백삼십 년이라는 “험하고도 모진 세월”을 보냈노라고 대답합니다(창 47:9). 그가 그처럼 험한 세월을 살게 된 것은 대부분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보아야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의 자기연민적인 고백에 측은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 아닌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민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약속의 씨, 왕 같은 제사장, 그리고 택한 족속으로 태어났던 것입니다. 왕궁에서 호사(豪奢)를 누리며 살아야 할 왕이 마구간에서 평생을 허송세월하며 보냈기에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이었을까요?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었을까요?
하지만 그의 인생에도 반전(反轉)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구세주 ‘요셉’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들 ‘요셉’을 만나 ‘이집트’ ‘고센’에서 보낸 마지막 이십 년은 그의 생애에서 최고의 황금기로서, 난생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황홀하고 꿈같은 기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의 마지막 이십 년은 지난 세월 그가 겪었던 그 모든 고초를 보상받고도 남을 정도로, 편안하고 안락한 세월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 모든 눈물과 한숨과 고통과 갈등은 이제 옛 일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쉬고 싶으면 쉬고, 눕고 싶으면 눕고, 먹고 싶으면 먹고, 일하고 싶으면 일하면 그만입니다. 아들 하나 잘 둔 덕분에 이처럼 인생 대박을 맛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인 시대. ‘아담’과 ‘하와’ 부부는 어떻습니까? 기구한 인생으로 치자면 이들 부부가 단연 으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 부부 역시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야곱’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대와, 약속과, 환경과 조건 가운데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실수로 그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고 분리된 채, 무려 930여 년 동안 ‘에덴’의 동쪽에서 상실과 허무의 세월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이들 부부가 자신들의 심정을 직접 드러낸 바 없기에 속속들이 알 길은 없습니다만, ‘야곱’이 그의 외삼촌 집에서 보낸 이십 년을 어떻게 회고하고 있는지를 주목해 봄으로써 ‘아담’ 부부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짐작해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는 외삼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창 31:40-41).
요즘 말로 하자면 그는 “갑”(甲)의 횡포 속에 철저하게 “을”(乙)의 신분으로 그 긴 세월을 살아왔다는 말입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말입니다. 먼 훗날 ‘바벨론’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좋았던 옛 시절을 노래하며, 칠십여 년의 세월을 한숨과 후회로 살아갔던 것도 ‘아담’ 부부의 심정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될 수 있겠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십 년이나 또는 칠십 년의 세월을 어찌 ‘아담’이 보낸 구백삼십 년의 세월과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더 나아가 ‘야곱’과 이스라엘은 그래도 훗날 고토(故土)로 돌아가기라도 했지만, ‘아담’ 부부는 그런 호사도 누리지 못하며 살다가 ‘에덴’의 동쪽 어딘가에서 생을 마무리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들에게도 인생 역전의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이들에게도 아들이 있었습니다. ‘가인’ 말입니다. ‘가인’도 부모의 구세주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가 “약속의 씨”, 즉 “여인의 후손”이 될 수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마땅히 그랬어야 했지요. 우리는 ‘하와’가 ‘가인’을 놓고 득의만만(得意滿滿)해 하던 모습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참고. 4:1). 어쩌면 ‘에덴’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또한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기쁨은 잠시였습니다. 날이 갈수록 ‘가인’은 서서히 “뱀의 아들”로 자라갔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인류 최초의 살인자, 그것도 존속살해자(尊屬殺害者)의 오명(汚名)을 뒤집어쓴 것도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담’ 부부는 아들의 행동이 우발적인 실수가 아니었음을 그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그냥 지켜보는 것 외는 달리 할 일이 없었겠지요. 아들이 제 멋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외는 달리 할 것이 없는 부모의 심정을 자식을 키워 본 경험이 있다면 이해하고도 남으리라 생각합니다.
‘가인’은 부모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에게도 대항하기를 서슴지 않았으며, 마음속에 하나님을 두는 것조차 싫어했습니다. 집에서 새는 쪽박이 어찌 밖에서 새지 않겠습니까! 가정에서 부모를 우습게 여기는 자가 어찌 교회에서 모범적인 교인이 될 수 있을까요? ‘가인’은 자신의 이름이 붙은 “가인의 도시”, “가인의 문화”를 만들어갑니다. 모든 것이 “가인 표”입니다. 이 속에서 태어나는 아이들도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가인의 형상”을 갖고 태어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가인’이 대세(大勢)가 되어버리는 그야말로 “가인 시대”가 도래합니다.
이리하여 “가인 정신”이 지배하는 암흑시대는 적어도 수백 년을 이어져 내려갑니다. 암흑시대의 시대정신은 “힘 있는 자가 법이고, 큰소리치는 자가 이긴다”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시대정신을 ‘아담’의 칠대 손인 ‘라멕’의 노래를 통해서 들을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라멕’의 노래”는 하나님에게 바치는 신령한 시와 찬미가 아니라, 나에게 바치는 인간 승리의 노래입니다. 그것도 악행(惡行)을 자랑하고 권장하는 행진곡입니다. 아무도 말리거나 대항하지 않습니다. 그저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둘 뿐입니다. 어느 한 사람 좁은 길을 가려하지 않습니다. 아, 하나님은 진정 죽어버린 것입니다!
부흥의 단초. 이처럼 캄캄한 “가인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아담’과 ‘하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여인의 후손”이 아니라 뱀의 후손이 “생육하며 번성하는” 것을 바라보는 그 심정 말입니다. 이방원처럼 하여가(何如歌)를 부르며 시대정신에 동조하며 살았을까? 아니면 정몽주처럼 단심가(丹心歌)를 부르며 좁은 길을 가려했을까?
적어도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아담’과 ‘하와’ 부부는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와는 다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약속의 씨앗을 기다리다 못해 여종 ‘하갈’의 아들로 대신하려 했던 것에 비해, ‘아담’과 ‘하와’는 약속의 씨앗을 찾는 일에 있어, ‘가인’의 후손 중에서 찾았던 것이 아니라, ‘하와’의 몸을 통해서 난 자로 약속의 씨로 삼으려 했습니다.
과연 이들 부부가 일말의 신앙심으로 이 같은 선택을 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결과론적으로는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창세기> 본문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25절상). 화자는 무슨 의도인지 알 수는 없으나, ‘가인’의 경우와는 달리 이번에는 ‘하와’가 아닌 ‘아담’ 자신이 직접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들 ‘셋’을 대하는 ‘아담’의 태도나 인식이 달라졌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어지는 본문을 보겠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25절하). 우리는 여기서 ‘아담’이 “다른 씨”를 언급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은 그냥 한 아들이었습니다. ‘하와’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1절하). 이전과는 분명히 달라진 모습입니다.
‘아담’은 지금 “새로운 계보”의 시작 내지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도 자신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을 주도하고 있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가 마치 하나님의 신탁(神託)을 선포하는 선지자의 위치에 서 있는 것만 같습니다. 마치 왕의 귀환을 보듯 사라졌던 하나님의 이름이 역사의 주관자로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에덴’의 범죄 이후, 수 세기 동안 세상을 지배하던 혼동과 공허와 흑암을 걷어내는 재창조 즉 구속(救贖)의 빛이 비추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회복과 부흥의 단초가 마련된 셈입니다. 다시 한 번 ‘아담’ 부부에게 인생 역전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교회 시대. 회복과 부흥은 새 창조가 아닙니다. 이전에 없던 것을 새로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적은 것을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더 높은 탑을 쌓아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더 큰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은 원래 있어야 하는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원래 되어야 할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부흥은 “다시” 시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26절). 즉 다시 하나님에게도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이 장면을 가리켜, “교회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칼빈’도 이 순간을 종교의 회복이라고 지칭한 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시대에 한 조그만 가정에서 교회가 개척되었고, 개척 예배가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개척교회의 목사로, 그리고 세상의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서 ‘아담’은 진정한 ‘아담’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상징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훗날 ‘야곱’의 예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어주신 새 이름 이스라엘을 잊어버리고, 옛 이름 ‘야곱’에 충실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세겜’ 땅에서 이방인과 뒤섞여 살다가, 다시 인생의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바로 이 무렵, 그는 새롭게 헌신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로 올라가 거기서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그가 어떻게 반응하고, 헌신하는지 읽어보기로 하지요:
2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35:2-3)
이제 곧 “야곱 교회”의 개척 예배가 드려질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야말로 ‘야곱’이 진정으로 이스라엘로 거듭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대홍수가 끝난 후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한 첫 번째 일도 예배였습니다(8:20). 이 예배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일종의 팡파르였던 셈입니다. ‘에노스’로부터 시작되는 예배 역시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시대”가 열린다는 선포였던 것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가는 순간이 도래한 것입니다! 한 작은 개척교회, “셋 교회”를 통해서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도 바로 그러한 것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연습과 토의
1. <창세기>의 첫 번째 ‘톨레돗’은 세 가지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습니다. 각각의 내용과 주제를 밝혀봅시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고 있습니까?
2. <에덴 이야기>의 형식과 구성에 대해서 적어봅시다, <에덴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일곱 개의 장면을 이루고 있다고 하는데, 각 장면의 주제와 제목을 알아봅시다. 이 중 가장 핵심적인 장면은 어떤 곳이며, 이를 통해서 <에덴 이야기>의 신학적 주제를 밝혀 봅시다.
3. <에덴 이야기>를 통해서 “죄”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1) 죄의 기원; (2) 죄의 정의; (3) 죄의 동기; (4) 죄의 결과.
4. 타락과 저주의 결과를 “수고와 고통” 또는 “분리” 등과 연관시켜 토의해 봅시다. 저주를 받은 세 당사자들이 겪어야 했던 체험과 관련해서 이들 주제를 토의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