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5과
이삭과 리브가
김태정 목사창세기 24:1-67약 74분 분량
이와 같이 그 밭과 그 속의 굴을
헷 족속이 아브라함 소유 매장지로 정하였더라(20절)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은 땅과 후손에 있다고 거듭 밝힌 바 있으며, <아브라함 이야기>도 이 두 요소를 중심으로 발전해가고 때로는 순환하기도 합니다. <막벨바 동굴 이야기>가 언약의 한 축인 그 땅에 관한 ‘아브라함’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라면, <이삭과 리브가 이야기>는 나머지 축인 후손에 관한 그의 관심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두 에피소드는 공히 언약의 부분적인 성취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그 언약이 성취되는 방식에 대해서도 일관된 입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주권적인 행위로 비롯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성취되는 방식에 있어서도 신비하고도 초자연적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언약의 또 다른 당사자 ‘아브라함’ 편에서 그저 수동적으로 앉아 기다리고 있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성취를 위하여 애쓰고 노력하는 등의 지극히 합리적이고 자연적인 측면도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아내의 매장지로 쓰기 위해서 그곳 주민 ‘에브론’으로부터 ‘헤브론’의 ‘막벨라’ 동굴을 은 사백 ‘세겔’이라는 값을 치르고 사야했습니다. 적어도 그에게 있어 결코 적은 액수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그가 기울이고 있는 관심과 노력 역시 금전적인 환산은 불가능하지만, 그에 버금가는 가치와 비중을 지니고 있는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화자가 이번 에피소드를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지는 그가 할애하고 있는 지면의 분량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전체 이야기 중에서 가장 긴 내용은 <창조 이야기>나 <대홍수 이야기>가 아니라,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67절로 구성된 에피소드입니다.
죽음 직전에 오래 동안 함께 했던 늙은 종에게 며느리를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에 관한 세부적인 지침을 주고 맹세까지 시키는 ‘아브라함’의 태도나,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하인의 행동에 관한 길고도 상세한 묘사, ‘리브가’를 만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배경 음악이 될 ‘섭리’의 문제까지를 장면을 바꾸어 가면서 소상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리브가’가 차지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화자가 이번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본문은 “충성”이나 “결혼” 등과 같은 주제들에 대해서 어떤 교훈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까?
문학과 역사
형식과 내용. <창세기> 24장은 책 전체를 통해서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야기의 내용이나 서술 방식이 길고도 상세하여,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로 간주하려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이야기 역시 <아브라함 순환>에서 만났던 이전의 이야기들이나 앞으로 전개될 <야곱 이야기>나 <요셉 이야기>들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실수로 삽입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많습니다. 본문 중에서 이전의 이야기들을 연상시켜주는 내용들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1절(참고, 18:11; 12:2; 22:17); (2) 3절과 37절(참고, 12:6; 13:7); (3) 4절(참고, 12:1); (4) 5절(참고, 15:7); (5) 7절(참고, 22:16; 12:7; 13:15; 15:18; 17:8); (6) 10절(참고, 11:27-29; 22:20); (7) 35절(참고, 12:2, 16; 13:2); (8) 36절(참고, 21:1-7; 25:5); (9) 40절(참고, 17:1; 13:17); (10) 60절(참고, 22:17); (11) 62절(참고, 16:14); (12) 67절(참고, 23장).
본문 중에는 이전의 이야기들을 연상시켜주는 구절들도 상당 수 등장하고 있지만,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를 예고해 주는 구절이나 단어들도 다수 발견됩니다. 예로써, <야곱 이야기>(25-32장)의 두 주인공 ‘리브가’와 ‘라반’은 이미 이곳에서 등장하고 있고, 하인과 ‘리브가’가 만나는 우물가의 조우는 ‘야곱’이 한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나는 이야기와(29:2-14) 유사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소 유사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다음 두 경우도 병행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1절과 33절(참고 26:29); (2) 12절(참고, 27:20).
<요셉 이야기>와의 연관성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인간사와 하나님의 섭리’라는 신학적 주제가 이곳에서도 강조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동일한 단어들이 두 에피소드에서 공히 나타나고 있기도 합니다. 상호 관계있는 단어들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2절(참고, 41:38; 50:7; 47:29); (2) 9절(참고, 47:31); (3) 28절(참고, 39:17, 19); (4) 36절(참고, 39:7-8); (5) 42절, 56절(참고, 43:4; 39:2, 3, 23); (6) 49절(참고, 47:29); (7) 65절(참고, 38:14).
하인이 ‘라반’을 만나 대화하는 내용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장차 있을 ‘아브라함’의 죽음에 대한 조문(弔文)을 읽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아브라함’의 삶의 궤적을 회고하는 부분에서는 그가 정말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축복을 누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브라함’이 누렸던 축복은 그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나 손자 세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크게 성취될 것입니다. ‘이삭’은 결혼을 하게 될 것이고 그 땅에서 계속 살게 될 것입니다. ‘리브가’가 하인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그와 함께 기꺼이 떠나겠다고 결의하는 모습을 보면, ‘여 족장 아브라함’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리브가’ 역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임을 그 이름을 통해서 암시가 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리브가’나 모두 ‘축복하다’(ךרב, 바라크)는 동사에서 비롯된 두 자음 ‘b’와 ‘r’을 포함하고 있는데, 실은 이 동사는 본문의 핵심 단어이기도 합니다(1, 27, 31, 35, 48, 60절).
앞서 밝힌 대로 본문에서는 <족장 이야기> 전체적으로 가장 중요한 두 인물, ‘리브가’와 ‘라반’이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후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은 주로 이 두 사람의 인간적인 생각과 계획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쉽게 결론내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인이 우물가에서 ‘리브가’를 만난 것은 우연이라기보다는 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신비한 응답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화자가 강조하고 있는 바이고, 따라서 앞으로 전개될 ‘리브가’의 삶도 우연이나 인간적인 계획에 따라 결정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통제에 따라 이루어질 것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됩니다.
단락과 범위. 이야기는 네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장소의 이동에 따라 교차대구의 구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대칭적 특징을 보이는 것은 장소만이 아니라,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예로써, ‘아브라함’이 하인을 보내면서 내리는 명령은, 나중에 그 하인이 ‘라반’으로부터 듣게 되는 대답과 묘한 대칭적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서(go) ...택하라(take)”(4절); “데리고(take) ...가서(go)”(51절). 이 대답에 따라 하인은 ‘리브가’를 데리고 갔으며(61절), ‘이삭’은 그녀를 데려다 아내로 맞이했습니다(67절).
본문이 하나의 이야기로서 통일성이나 일관성은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는 배경에는 본문 중에 이야기의 자연스런 흐름에 배치되는 반복이나 모순들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예로써, 반복과 관련해서 ‘라반’이 우물가로 나가는 이야기가 두 번에 걸쳐 소개되고 있습니다:
29리브가에게 오라버니가 있어 그의 이름은 라반이라 그가 우물로 달려가 그 사람에게 이르러, 30그의 누이의 코걸이와 그 손의 손목 고리를 보고 또 그의 누이 리브가가 그 사람이 자기에게 이같이 말하더라 함을 듣고 그 사람에게로 나아감이라 그 때에 그가 우물가 낙타 곁에 서 있더라(29-30절)
이야기의 모순은 ‘리브가’가 하인과 함께 떠나는 문제와 관련해서 ‘리브가’의 가족들이 보여주고 있는 상반되는 태도 때문입니다. 즉 한 번은 ‘리브가’를 데려가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는 듯하다가(51절), 다음에는 그에게 물어보아야겠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습니다(57-58절):
51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
57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 58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57-58)
자료와 편집. 이런 문제 제기는 자연스럽게 본문에 대한 역사적 질문, 즉 자료나 편집 시기와 관련한 문제들로 옮아갑니다. 우선 본문의 전승과 관련해서 처음에는 일치된 견해가 있었으나, 위에서 제기한 문제점들로 해서 이견이 등장했다가, 다시 최근 들어 이전의 합의로 되돌아가고 있는 듯 한 분위기입니다. 즉 처음 본문의 자료에 대해서 대부분 순수한 <야훼 전승>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만, 일부 학자들 사이에서 시기를 달리하는 두 개의 상이한 <야훼 전승>이 결합된 것이라든지, 또는 <야훼 전승>과 <엘로힘 전승>이 결합한 것이라는 등의 견해가 제시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본문의 최종 형태는 아니라 할지라도, 사용하고 있는 자료에 대해서 <야훼 전승>이라는 합의가 이루어져 있는 상태라고 합니다(Wenham).
그리고 본문의 최종 편집 시기와 관련해서도 견해가 일치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로써, 주전 5-6세기라는 비교적 후대의 작업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본문의 문체나 용어, 기타 결혼에 관한 관습 등이 주로 포로기 이후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시되는 용어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 여호와”(3-7절); “(무릎을) 꿇였다”(11절); “(물을 구유에) 붓고”(20절). 그리고 기도의 응답이나 천사에 대한 언급, 그리고 가나안인과의 결혼을 피하고 있는 등의 언급 역시 포로기 이후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관습이거나 종교적 신념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주장은 부인하기 어려운 관점들을 내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후대의 편집을 주장할 확실한 근거로 제시하기에는 무리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후대의 편집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일련의 문체나 용어나 종교 및 사회적 관습들이 포로기 이후 시대에 새롭게 생겨난 것들로 볼 수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후대의 편집자들이 이전부터 잘 알려져 있었던 개념들을 단지 채택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편집 시기와 관련해서 정반대의 견해를 피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들 역시 본문에서 구사하고 있는 문체나 용어들을 근거로, 본문의 저작 시기와 자료가 주전 7-9세기의 전통적인 초기 <야훼 전승>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초기 자료를 기본 골격으로 하여, 주전 7세기경에 <엘로힘 자료> 내지 <신명기 자료>를 연상시키는 일련의 용어들이 추가되었으며, 이후 주전 6세기경에 다시 <신명기 자료>가 더하여지고, 마지막으로 포로기 이후 소폭의 추가가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용어나 문체 등을 근거로 저자나 저작 시기를 결정하는 것에는 항상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의 어휘는 저자에 따라 결정되기보다는 그 문학적 장르가 결정하는 것이 더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저작 시기와 관련하여 가장 신중한 접근 방식을 보이고 있기로는 Aitken을 들 수 있습니다. 이후 이어지는 논의는 그의 견해를 토대로 한 것입니다: Wenham, 139쪽.
그에 따르면 <창세기> 24장은 고대 ‘유가릿’ 문헌에서 소개하고 있는 <Keret 영웅담>과 병행을 이루고 있는데, 주인공 Keret은 아내를 얻기 위해서 이역으로 군사 모험을 떠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보다 더 가까운 유사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만나는 이야기나(창 29), ‘모세’가 미래의 아내 ‘십보라’를 만나는 이야기(출 2:16-21) 등을 들 수 있는데, 한 결 같이 우물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미래의 아내를 우물가에서 만난다는 설정은 적어도 구약의 문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전형’(典型)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들 각각 이야기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서술 방식을 통해서 주요 등장인물들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 이야기에서도, 시작에서 마지막 결혼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직선적인 구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이들 전형적인 이야기에서 갖추고 있는 모든 특징적인 요소들을 다 포함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은 나름대로 공식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을 통해서 불필요한 반복이나 군더더기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야기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보다 넓은 <창세기> 전체의 관심사에 부합하는 요소들이 수시로 드러나고 있으며, 이런 점이 후대 편집자의 신학적 의도가 가미된 추가적인 삽입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예로써, ‘이삭’이 ‘리브가’를 맞이했던 장소와 관련해서 상충하는 두 진술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네게브 지역에 거주하였음이라(62절)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호를 얻었더라(67절)
또 다른 예는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관련한 진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화자는 서두에서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는 처음으로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1절하)
그리고 이 주제는 이야기의 중간에 ‘아브라함’의 하인의 진술로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33-36절). Aitken은 하인의 이런 진술은 원래 이야기에는 없었는데, <창세기>의 전체 주제와 보다 밀접하게 연결시키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삽입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 즉 하인과 ‘라반’과의 대화를 담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34-49절, 50-51절) 편집자의 손길이 미쳤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대화에서 두드러진 신학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섭리’로 볼 수 있는데, 이는 본문 이야기에 분명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화자가 이 대화를 다루고 있는 방식을 통해서 그의 신학적 강조점을 읽을 수 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라든지, ‘아브라함’이 그의 고향을 떠났다는 점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첨삭들을 다 제거하고 남아 있는 부분이 원래 이야기의 패러다임 내지는 주된 관심사였을 것인데, 요약해 보자면 “결혼의 즐거움에 참여하기 위하여 부모를 기꺼이 떠나고 싶어 하는 신부” 정도가 될 것입니다(Aitken).
그가 의도했던 신학적 의도란 무엇이었을까? 그렇다면 원래 이야기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을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본문은 그 최종 형태 만으로서도 하나의 ‘전형적인 이야기’로 볼 수 있겠습니다만, 신학적으로 강조하려는 전형은 사뭇 초점이 달라진 것처럼 보입니다. 즉 “주인의 명령에 충실하게 따르는 하인”에 관한 전형이라든지, 또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전형이 그것입니다. 후자와 관련하여 화자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감에 있어 어떻게 사람들을 인도해 가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관점들이 나름대로 의미가 없지는 않지만, 본문의 핵심 주제는 역시 ‘아브라함’ 언약의 관점에서 조명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그 언약을 이루어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이루어 가실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화자는 자신의 명시적인 진술을 통해서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 답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신학과 신앙
1. 아브라함과 하인(1-9절)
첫 무대는 ‘아브라함’의 나이에 대한 간단한 언급을 제외하면, 전적으로 ‘아브라함’과 그의 하인 사이에 오고 간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대화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은 하인으로 하여금 그의 고향에 가서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해오라고 요청합니다(2-4절). 이에 하인은 한 가지 가능한 어려움을 들어 다른 대안을 모색할 수도 있는지에 대해서 물어봅니다(5절). 그러나 ‘아브라함’은 며느리 감은 반드시 그의 고향 땅에서 데리고 와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하셨던 약속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6-8절). 이에 하인은 주인의 명령대로 따르겠다는 맹세를 바칩니다(9절).
이 장면을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의 직접적인 대화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장면에서 하인에게 내리는 ‘아브라함’의 명령은 임종을 앞둔 사람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가 이 일 후에도 한참을 더 살았지만, 이 장면은 분명 ‘야곱’이나 ‘요셉’의 임종 장면과 아주 흡사하다 할 것입니다(47:29-31; 50:25). 그러나 이들 장면 사이에는 흥미로운 차이가 있습니다. ‘야곱’이나 ‘요셉’의 경우에는 유언을 듣고 받아들이는 쪽은 그들의 자녀들이었지만, ‘아브라함’의 경우는 하인이라는 점입니다. 왜 그의 아들 ‘이삭’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차이는 또 있습니다. ‘야곱’이나 ‘요셉’의 관심사는 그들이 묻힐 약속의 땅에 관한 것이었지만, ‘아브라함’의 관심사는 후손 즉 며느리를 맞이하는 것에 있습니다. 후손이 없다면 하나님의 그 어떤 약속도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일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가(12:3, 7), 이제 자신의 입으로 그 약속을 재천명하면서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질 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그가 약속한 대로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는가? 즉 ‘아브라함’은 정말 그의 말대로 복된 인생을 살다 갔는가? 화자는 이 질문에 답하면서 무대의 첫 막을 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1절)
이런 표현은 <구약>의 위대한 인물의 마지막 행적을 그릴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수 13:1; 23:1; 왕상 1:1). <창세기> 화자는 이미 앞에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가 많아 늙었다는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18:11), 그의 장수(長壽)를 하나님의 축복과 관련해서 명시적으로 사용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화자의 이런 언급은 이후 하인의 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재천명 될 것임을 예상케 합니다(35절).
그의 생애를 돌아보면 축복의 약속으로 시작해서(12:1),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24:1). 하나님께서 처음 그에게 미래형으로 주셨던 약속은 이곳에서 과거형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희망과 전망이 현실이 된 것이지요: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12:2)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24:1)
하나님의 축복을 검증하는 일은 단순히 그가 오래 살았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고, 그가 누렸던 물질적인 축복(13장), 군사적인 승리(14장), 아내의 임신과 아들의 출생(21장), ‘이삭’의 기사회생(22장)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자신도 여러 차례 인생에서 불확실성의 시점을 거치기도 했고, 그와 후손들이 모든 민족의 빛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축복의 약속을 받은 사람이 이제 그의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건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2절)
이 하인이 누구든 이전에 ‘아브라함’이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엘리에셀’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15:2). 그리고 그가 ‘아브라함’의 전적인 신뢰를 얻고 있었다는 점을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보디발’과 ‘바로’ 왕의 신뢰를 얻었던 ‘요셉’에 버금가는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41:41; 42:6). 이러한 그가 자신의 경력에 있어 가장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임무가 얼마나 중요했던지 아주 특별한 형태의 맹세를 거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주인의 허벅지 밑에 손을 넣는 선서가 그것입니다. 여기서 허벅지는 분명 성기(性器) 즉 고환(睾丸)에 대한 완곡한 표현입니다(창 46:26; 출 1:5). 그러니까 하인은 지금 주인의 고환을 움켜지고 그의 명령을 수행하겠다는 약속과 맹세를 바쳐야 합니다.
이런 의식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알려져 있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의 관습에 따르면 선서를 할 때에는 거룩한 대상을 한 손에 잡고 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미국 등지에서 법정 선서나 대통령 취임 선서 시에 <성경> 위에 손을 얹는 것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성기는 어떤 면에서 거룩한 대상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생식을 뜻하는 생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특히 <아브라함 언약>의 징표이기도 한 할례 의식과 결부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할례 받은 성기를 붙잡고 맹세를 할 때,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증거와 관련된 일련의 단어들, ‘testimony’, ‘testify’, 및 ‘attest’ 등은 모두 동일한 ‘라틴’어 어원 ‘testes’(고환)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 ‘로마’ 사회에서도 무엇인가 맹세를 할 때 누군가의 고환을 잡는 것과 같은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맹세 의식은 <구약>의 다른 곳에서 딱 두 번 등장하고 있는데(24:2; 47:29), 두 경우 다 허벅지 아래로 손을 넣도록 요구하는 쪽은 연장자입니다. 그리고 모두 가족사에 관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관심사가 며느리였다면, ‘야곱’의 관심사는 사후 선조들의 매장지에 묻히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이야기에서의 공통적인 관심사는 여기가 아닌 그곳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며느리는 이곳 ‘가나안’이 아닌 ‘메소포타미아’ 땅에서 데려다 와야 했으며, ‘야곱’은 ‘이집트’가 아닌 ‘가나안’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인이나 ‘야곱’의 아들 ‘요셉’이나 각기 주인과 아버지의 허벅지 아래 손을 넣음으로써, 자신들에게 주어진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겠다는 서약 의식을 거쳤습니다. 누구든 이 서약을 깨뜨린 자는 선조들의 분노 아래 놓이게 될 것입니다.
선서의 내용은 무엇이며, 누구의 이름으로 선서를 해야 할 것인가? ‘아브라함’이 하인에게 요구하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3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4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3-4절)
다소 애매모호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아브라함’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동족결혼에 있었습니다. 4절의 “내 고향 내 족속”는 “내 족속의 고향”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여기서 족속(תךלומ, 몰레데트)이 의미하는 바가 다소 애매합니다. 아마 그 범위에 있어 친척과 부족 사이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인이 ‘리브가’를 선택한 것은 주인이 기대했던 이상의 임무를 수행했다고 볼 수 있는데, ‘리브가’는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조카의 딸이기 때문입니다(Wenham).
이런 그의 태도는 이전과는 크게 달라진 것입니다. ‘사래’를 누이라 속여 ‘이집트’의 ‘바로’ 왕이나 ‘블레셋’ 왕 ‘아비멜렉’의 아내가 될 뻔 했을 때는 이런 문제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혈연을 보존하고 이어가는 문제가 최대 관심사로 떠오른 듯합니다. 며느리나 그녀의 가족의 종교는 현재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리브가’의 오빠 ‘라반’은 다신교를 믿는 자였습니다. 며느리가 소위 ‘야훼’ 종교를 신봉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출신이 어딘가 하는 것입니다. 저곳 ‘메소포타미아’ 출신이 되어야지 이곳 ‘가나안’ 족속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조건은 또 있습니다. 며느리를 그곳에서 데려다가 이곳에서 살아야지, 아들이 그곳에 가서 살아서도 안 됩니다. 이런 조건이 <아브라함 언약>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은 자신의 이러한 여망을 피력하며 하인으로 하여금 선서를 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 야훼”의 이름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the LORD, the God of heaven and the God of earth(NIV).
이런 표현은 의미론적으로는 <창세기 1장>을 연상시켜주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서는 처음 등장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가장 가까운 표현으로서는 ‘아브라함’이 ‘소돔’ 왕 앞에서 불렀던 이름을 들 수 있습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14:22).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엘 엘리온’입니다.
아무튼 이런 표현은 중요한 법적 계약을 성립시킬 때, 소위 천지신명의 이름으로 행하던 관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나안’ 족속과의 결혼을 금지하는 규례는 <오경>의 다른 책에서도 계속해서 메아리처럼 들려오고 있습니다(출 34:16; 민 25; 신 7:3). 지금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결혼에 관한 이 원칙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데, 나중에 ‘이삭’ 역시 자신의 아들 ‘야곱’을 결혼시키기 위해 자기 아버지가 했던 것을 그대로 행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28:1-2).
그러나 하인의 입장에서 그가 선서한 내용을 과연 실천할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해서는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당연히 그가 처할 수 있는 가장 난감한 부분에 대해서 질문을 제기합니다:
종이 이르되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5절)
우리는 이 장면에서 마치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신탁을 전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형식적인 측면을 고려해 보면, 먼저 임무가 주어지면(3-4, 37-38절), 신탁을 받는 쪽에서 일단 거부 반응을 보입니다(5, 39절). 그러면 하나님 편에서 다시 한 번 동일한 말씀으로 재 확신을 시켜주고(6-8절), 끝에 가서는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징조나 표적이 나타납니다(42-48절). ‘모세’나 ‘예레미야’의 경우도 역시 본문의 하인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반응을 보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인의 질문에 동의하면서 여자가 함께 이곳으로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일단 긍정하고 있습니다:
6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을 그리로 데리고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하라. 7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8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6-8절)
그 여자가 누구이든, 하인의 초청을 받아들인다면 이전에 ‘아브라함’ 자신이 내린 결정과 꼭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친지와 아비와 고향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와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 아내와 결합하기 위하여 아비와 어미를 버려야 하는 쪽은 남편인 ‘이삭’이 아닙니다. 아비와 어미를 버려야 하는 쪽은 오히려 여자 쪽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아브라함’은 이전에 그가 겪었던 경험을 들려주고 있습니다(7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使者)를 하인보다 앞서 보낼 것이라는 그의 말은 다소 놀랍습니다. 지난 세월동안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에 대한 확신을 하인에게 심어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서는 ‘이삭’이 구사일생 살아난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22:11).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미 서약하셨으므로, 하인 역시 주인에게 서약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이곳으로 오지 않으려 할 때는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정중한 초청이 받아들여 지지 않을 때는 강요를 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까지 듣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인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그의 임무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있지 않고, 주인의 명령에 순종해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을 향해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도 이런 것입니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겔 2:5, 7). 따라서 그 여인이 오지 않으려 한다면, 하인은 선서에 대한 아무 책임도 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에 하인은 ‘아브라함’의 요구대로 그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어 맹세를 합니다:
그 종이 이에 그의 주인 아브라함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하였더라(9절)
2. 하인과 리브가(10-28)
제 2막의 무대는 ‘하란’ 땅의 한 우물가, 그리고 등장인물은 하인과 ‘리브가’ 그리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무대 위에 직접 등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무대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대화와 행동을 간섭하고 주도해 가는 숨은 인물로서 분명하게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예로써, 하인이 우물가에서 그가 찾는 처녀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는 장면을 통해서도 그렇고(12절), 그가 ‘리브가’를 만난 후에 머리를 숙여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장면 등을 통해서도(26절)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5-25절 사이에 소개하고 있는 모든 대화와 행동은 실은 하인의 기도에 대한 너무나 분명한 응답으로서, 마치 하나님이 감독의 “큐” 지시에 따라 정확한 타이밍에 맞추어 무대의 장막 바로 뒤에서 ‘리브가’를 무대 위로 밀어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두 번째 무대를 작은 하나의 이야기로 보고 구조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도표는 제 2막의 균형 감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처음과 마지막 장면에서 무대 위에 보이는 인물은 하인뿐입니다. 그는 첫 장면에서 등장하였다가 마지막 다섯 번째 장면에서 홀로 남아있습니다. 나머지 세 장면은 일종의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는데, 하인의 기도로 시작하여(12-14절) 기도로 끝나고 있습니다(26-27절). 하인의 단순한 독백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실은 무대 위의 등장인물과 무대 뒤의 등장인물 사이의 대화로 보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조적으로 정 중앙에 위치한 세 번째 장면에서는(15-25절) 세 등장인물이 모두 등장하고 있는데, 내용은 하인의 기도에 대한 즉각적이고 생생한 응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무대 위에 보이는 인물은 하인과 ‘리브가’ 뿐입니다. 세 번째 장면의 형식적 특징은 마치 두 개의 연이 유사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는 한 편의 시와 같습니다: (1) 15-20절; (2) 21-25절. 즉 첫 단락에서 ‘리브가’에 대한 인물이나 성격 묘사는 두 번째 단락에서 하인에 대한 묘사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15-16절; 21-22절). 그리고 하인의 요청과 질문에 대해서 ‘리브가’는 두 번에 걸쳐 반응하거나 대답하고 있습니다(17-19절; 23-25절).
제 2막의 이야기는 하인이 낙타 열 필을 비롯한 ‘결혼 지참금’(신부 값)을 가지고 떠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인이 끌고 간 낙타 열 필은 ‘아브라함’의 재산의 정도를 암시해 주고 있는데, 이와 관련한 숫자 10의 모티브는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1) ‘야곱’은 그의 형 ‘에서’에게 예물로 보낸 황소 열 필(32:15); (2) ‘요셉’이 그의 아버지 ‘야곱’에게 예물로 보낸 수나귀 열 필(45:23); (3) ‘이새’가 그의 아들 ‘다윗’을 시켜 형들에게 전달하라고 보낸 떡 열 덩이(삼상 17:17); (4) ‘여로보암’ 왕이 병든 아들의 운명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하여 아내를 시켜 선지자 ‘아히야’에게 보낸 떡 열 개(왕상 14:3); (5) ‘나아만’이 ‘엘리사’로부터 나병을 치료받기 위하여 당시 이스라엘 왕에게 예물로 보낸 은 십 탈란트(왕하 5:5). 이들 모두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예물이자 선물이었습니다.
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10절상)
그의 행선지는 ‘아브라함’의 고향, 즉 ‘메소포타미아’의 한 지역입니다. 여행은 실제 한 달 정도 걸렸을 텐데 이에 대한 내용은 무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치기 위하여 ‘모리아’로 3일 간의 여행에 대해서 침묵했던 것과 같습니다. 하인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어떻게 목적지에 당도했는가는 화자의 관심사는 아니었던 것 같고, 다만 여행의 마지막 장면만을 소개하고 있을 뿐입니다:
10하메소포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11그 낙타를 성 밖 우물곁에 꿇렸으니 저녁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으러 나올 때였더라(10절하-11절)
이 구절은 ‘가나안’에서 ‘나홀’까지 오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렸을 것이고, 긴 여행으로 하인이나 낙타 모두 상당히 지쳐있었음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긴 여행에 지친 낙타를 쉬게 하려고 성 밖 우물곁에 꿇렸다는 언급이 그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마른 낙타에게 물을 주려고 수고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관습에 따르면 방목이나 가축에게 물을 주는 등의 일은 여자, 특히 미혼의 처녀들이 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참고, 29:10; 출 2:16; 삼상 9:11). 그러나 ‘야곱’이나 ‘모세’는 비슷한 상황에서 자신들이 직접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지금 하인은 그런 일을 하기에는 너무 지쳐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 갈증을 해결하는 일이 더 급선무였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러나 그는 먼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12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13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곁에 서 있다가, 14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12-14)
하인의 기도는 여러 면에서 흥미롭습니다. 우선 그의 주된 관심사가 ‘이삭’에게 있다기보다는 주인 ‘아브라함’에게 있습니다.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간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즉 ‘헤세드’(דסח)입니다. 구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문 속에 이보다 더 강력하게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단어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간구의 근거가 되는 단어입니다. ‘헤세드’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자비와 사랑, 은혜와 긍휼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룻기>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유비를 통해서 잘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인 책입니다. ‘룻’이 ‘나오미’에게, ‘보아스’가 ‘룻’과 ‘나오미’에게 보여주고 있는 ‘헤세드’그 그것입니다. 즉 아무런 법적․도덕적 책임이나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는 행위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경>은 말할 것도 없고, 시편 기자도 이러한 하나님의 ‘헤세드’에 기초하여 간구를 올립니다(시 136; 출 20:6; 신 5:10).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푼 언약의 ‘헤세드’입니다(18:18-19; 22:16-18).
그분의 ‘헤세드’가 아니라면 약속도 언약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인 역시 이 점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놀라울 정도로 담대한 요구 조건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고 압박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가 제시하는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우물가로 물 길으러 오는 처녀 중에서 그에게는 물론 낙타에게도 마실 물을 권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을 기도의 응답내지 표적으로 삼겠다는 요구입니다. 적어도 이런 정도의 인품을 지닌 자라야 ‘이삭’의 신부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의 담대함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기도의 응답이 먼 미래가 아닌 오늘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는 데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12절).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압박하며 기도하기는 그가 유일한 인물은 아닙니다. ‘기드온’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삿 6:36-40).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기도에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응답하실까?
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15절)
즉각적이고 순간적이다 못해, 하인의 기도가 끝나기도 전에 이미 다 이루어져 버렸습니다. 마치 무대 감독의 “큐” 지시가 떨어지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리브가’를 무대 전면으로 밀쳐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는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만, ‘이사야’가 이에 대해서 훗날 다음과 같이 선언한 바 있기는 합니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사 65:24). 이처럼 <성경> 전체를 통해서 기도의 응답이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 여자는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생겼을까? 하인이 알기를 원했던 정보입니다만, 화자는 그녀의 신분과 소속을 우선 소상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하인에게가 아니라 독자들에게 먼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손녀 벌이니 일단 며느리로서의 필요조건은 갖춘 셈입니다. 하인이 알기는 원했던 정보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조금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땁고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그가 우물로 내려가서 물을 그 물동이에 채워 가지고 올라오는지라(16절)
아름다운 외모에 대해서는 하인도 식별할 수 있었을 테지만, 이 소녀가 처녀(즉 동정녀)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오직 독자들만 알 수 있는 정보일 뿐입니다. 이곳에서 처녀로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 단어, ‘베툴라’(הלותב)는 잘 사용되지 않는 동사 ‘바탈’(분리하다)에서 유래한 듯하며, 처녀(virgin) 또는 소녀(maiden) 등을 의미합니다. 비록 ‘히브리’어 사전들과 현대의 역본들이 일반적으로 ‘베툴라’를 동정녀(virgin)로 번역하긴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일반적인 의미라고 주장하며, 결혼 적령기의 소녀 정도로 번역할 것을 주장하기도 합니다(Wenham; Tsevat). 그러나 Wenham이 어떤 본문에서도 동정녀라는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 반면, Tsevat은 이 단어가 51회 사용되는 중에서 3회에서 이 의미를 인정하고 있습니다(레 21:31 이하, 신 22:19, 겔 44:22). 아무튼 ‘베툴라’가 <구약>에서 동정녀를 뜻하는 전문 용어가 아니라는 점은 대부분 일치하는 견해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동정녀를 뜻하는 다른 단어로 ‘알마’(המלע)가 더 적절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이사야>의 본문 때문일 것입니다(사 7:14). 본문에서도 ‘아브라함’의 하인도 나중에 ‘라반’을 만나 ‘리브가’를 지칭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43절).
아무튼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독자들은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보다 앞서서 유용한 정보를 제공받고 있습니다. 이 소녀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려준 정보만 해도, ‘아브라함’과 하인이 기대했던 이상의 조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등장인물들이 알기도 전에, 기도하기도 전에, 기도에서 원하는바 이상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 독자들이 아니라 기도의 주인공인 하인이 직접 이 사실을 확인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과연 이 소녀가 그가 원하던 자일까? 소녀의 행동을 유심히 살펴 볼 일입니다.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17종이 마주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네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18그가 이르되 내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동이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19마시게 하기를 다하고 이르되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서도 물을 길어 그것들도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20급히 물동이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려고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낙타를 위하여 긷는지라(17-20)
하인은 우물가로 다가오는 이 소녀를 보자마자 급한 마음으로 달려갑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는지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녀가 보이고 있는 행동은 그가 기도했던 것 이상입니다. 자신만큼이나 “급하게” 부탁에 응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기도제목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과연 낙타에게도 물을 줄까? 이번에도 역시 “급하게” 물동이를 비우고, “달려가서” 물을 긷습니다. 화자가 소녀의 행동을 묘사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이 두 단어는, 이전에 ‘아브라함’이 세 천사의 방문을 받고 그들에게 어떻게 음식을 마련해 주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가 사용했던 단어와 동일한 것들입니다: “급하게”; “달려가다”(18:2-7). 화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 시아버지에 그 며느리라.”
화자는 새로운 이야기의 진전을 보여주기 전에 이 점을 독자들로 하여금 곰곰이 음미해 보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21절)
“열 마리의 낙타에게 일일이 물을 길어다 먹이는 일이 한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얼마나 힘들고 시간이 걸릴 일일 것인가? 아름다운 외모, 아름다운 마음씨, 그기에 더하여 건강하고 활기에 넘치는 육체까지 갖추다니!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흐뭇함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하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들어옵니다. 이번 이야기의 핵심 단어는 “형통하게 하다”입니다(21, 40, 42, 56절; 참고, 39:3, 23). 적어도 독자들이 보기에 하인의 여행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주인이 부탁한 목표를 초과달성한 것이니까 말입니다.
과연 하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아직도 뭔가 더 확인할 일이 남아 있는 듯 보입니다:
22낙타들이 물마시기를 그치니, 노인은, 반 세겔 나가는 금 코걸이 하나와 십 세겔 나가는 금팔찌 두 개를 소녀에게 주면서, 23이르되 네가 누구의 딸이냐 청하건대 내게 말하라. 네 아버지의 집에 우리가 유숙할 곳이 있느냐(22-23)
이 두 가지 선물은 처녀가 제공한 봉사에 비해서 다소 과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인의 넉넉함과 부요함을 확인해 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Wenham). 한편으로 이 선물은 일종의 신부 값일 수도 있습니다(Hamilton). 그러나 이어지는 하인의 질문과 부탁을 들어보면, 이 선물이 처녀를 압박하는 일종의 협상 수단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처녀는 하인의 질문과 부탁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명쾌하고 정확한 것입니다:
24그 여자가 그에게 이르되 나는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이니이다. 25또 이르되 우리에게 짚과 사료가 족하며 유숙할 곳도 있나이다(24-25절)
그러나 처녀의 대답은 두 가지 점에서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합니다. 우선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브두엘’의 딸로 소개하면서, 어머니를 밝히는 대신 할머니 ‘밀가’를 거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형제 ‘나홀’과 ‘하란’이 있었는데, ‘하란’은 일찍 죽고 그의 딸 ‘밀가’가 삼촌 ‘나홀’과 결혼을 했습니다. 이 둘 사이에서 ‘브두엘’이 태어났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만, ‘밀가’의 지명도를 연상시켜 주는 언급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대답을 통해서 하인은 비로소 처녀가 ‘아브라함’과 친족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단순히 친척이 아니라, 그 이상입니다. 그는 다름 아닌 ‘이삭’의 사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하인’도 이 정도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을 신비한 기도의 응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인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한 처녀의 답변 역시 흥미롭습니다. 하인이 머물 곳이 있다고 대답하면서 물어보지도 않은 질문, 즉 낙타를 먹일 수 있는 짚과 사료도 넉넉하게 있다고 밝히고 있는 점이 그것입니다. 조금 전에 낙타 열 마리에게 모두 물을 먹였던 점을 기억한다면, 이번에는 이들을 집으로 데려다가 먹을 것도 줄 의사가 있음을 내비치는 사려 깊은 대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대답 역시 하인이 기대했던 그 이상의 응답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무엇을 확인할 것이 남아있단 말인가? 하인의 행동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기도가 단순히 응답받은 것이 아니라, 넘치도록 받았다는 감사와 경배와 찬양의 고백입니다:
26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27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26-27절)
그러나 최종 승인은 딸이 아니라, 아버지가 내려야 할 것입니다. 딸은 그길로 집으로 달려가 이 일을 고합니다:
소녀가 달려가서 이 일을 어머니 집에 알렸더니(28절)
이 처녀는 그냥 집으로 간 것이 아니라, “달려가서” 이 소식을 전합니다. 화자는 제 2막을 닫으면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이 처녀야말로 ‘이삭’의 신부가 되고도 남음이 있음을 각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독자와 하인 모두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지요. 이제 남은 문제는 과연 처녀의 가족들도 같은 마음일까 하는 것입니다. 처녀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 집으로 달려갔다는 언급이 벌써부터 심상치 않게 다가옵니다. 화자가 어머니 집으로 언급한 것과 관련해서 몇 가지 가능한 설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브두엘’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이럴 경우 50절에서 아들 ‘라반’과 함께 등장하고 있는 ‘브두엘’은 아마도 편집적 삽입의 결과일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그 아비의 생사 여부에 상관없이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는 한 소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룻 1:8). 또는 이런 표현은 모계 사회를 반영하는 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아직 이름도 드러나지 않은 처녀의 어머니가 과연 남편 ‘브두엘’과 마찬가지의 선의와 호의를 가지고 하인과 ‘아브라함’을 맞이할 것인가? 이래저래 이 마지막 구절은 이어지는 장면에 대한 기대와 전망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3. 하인과 라반(29-61)
환대. 제 3막이 열리면서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처녀의 아비 ‘브두엘’이 아니라 그 유명한 ‘라반’입니다. ‘라반’은 ‘히브리’어로 희다(ןבל)는 의미로서, 여러 문헌에서 여러 시대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이 지방에서 섬기던 월신(月神), ‘신’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히브리’어로 만월(滿月)을 ‘라바나’(הנבל)로 부릅니다.
‘브두엘’에 이미 죽은 뒤라 그가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처녀의 오빠는 매사에 관심이 많고 자기 동생이나 ‘아브라함’만큼이나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 남달랐던 모양입니다. 동생이 달려와 기간의 일을 알려주자 그 역시 하인을 보러 우물가로 달려 나오고 있습니다:
리브가에게 오라버니가 있어 그의 이름은 라반이라 그가 우물로 달려가 그 사람에게 이르러(29절)
그러나 독자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야곱 이야기>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는지라, 그가 하인을 맞으러 달려 나오는 데에는 필경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갖게 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화자 역시 이점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의 누이의 코걸이와 그 손의 손목고리를 보고 또 그의 누이 리브가가 그 사람이 자기에게 이같이 말하더라 함을 듣고 그 사람에게로 나아감이라. 그 때에 그가 우물가 낙타 곁에 서 있더라(30절)
누이가 몸에 걸치고 있는 코걸이와 손목 고리 때문입니다. 혹시 이 낯선 손님이 또 다른 값비싼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연! 열 마리나 되는 낙타가 그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낙타는 당시 매우 값비싸고 사치스러운 운송 수단이었다고 합니다. 낙타 곁에 서 있는 이 사람을 바라보는 ‘라반’의 안심하는 모습도 이 구절을 통해서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라반’이 달려 나온 동기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의 재물 욕심은 나중에 <야곱 이야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만, 화자는 이곳에서 이미 예고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라반’의 환대는 극진하다 못해 낯간지러울 지경입니다. 그의 언사와 태도가 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31라반이 이르되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여 들어오소서. 어찌 밖에 서 있나이까. 내가 방과 낙타의 처소를 준비하였나이다. 32그 사람이 그 집으로 들어가매 라반이 낙타의 짐을 부리고 짚과 사료를 낙타에게 주고 그 사람의 발과 그의 동행자들의 발 씻을 물을 주고, 33a그 앞에 음식을 베푸니(31-33절상)
하인의 신분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를 가리켜 “여호와의 복을 받은 자”로 추켜세우고 있는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는 그가 ‘야훼’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기보다는 단순히 부요한 자에 대한 경의와 존대의 표시로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재물은 당시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자주 그러하듯이, 등장인물의 대화는 그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진실을 드러낼 때가 많습니다. ‘라반’의 이런 고백은 실은 이번 이야기의 전제로 깔려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즉 ‘야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하인을 축복하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1, 35절). ‘라반’이 하인을 처음 대하는 순간 이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는 것을 봅니다.
낯선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으로 환대는 그 절정에 이르게 될 것이고, 이어서 보다 심각한 이야기로 나아가는 것이 상례일 것입니다(18:1-15). 그러나 이 하인은 그 순서를 뒤집고 있습니다. 즉 여행의 목적을 말하기 전에는 식사를 할 수 없다고 우깁니다: “내가 내 일을 진술하기 전에는 식사를 아니 하겠나이다”(33절). 긴 여행으로 너무 지친 나머지 낙타에게 물을 먹이는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그가 지금 보이고 있는 모습은 독자들을 감탄시키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목적과 사명에 충실한 종의 전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설득. ‘라반’이 이를 수락하고, 하인은 그가 온 목적을 길게 설명하기에 이릅니다(34-49절). 그가 설명하고 있는 내용은 이미 1-2막에서(1-27절) 이미 다룬 것이지만, 단순히 그 내용을 반복하는데 그치고 있지는 않습니다. 대개 ‘히브리’ 이야기 서술 방식은 상당히 절제되고 간결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을 하인이 다시 길게 회고하고 있는 이 단락은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진술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그는 ‘리브가’를 어떻게 만났으며, 이 처녀가 ‘이삭’의 신부가 틀림이 없다는 확신을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의 가족을 설득시킬 것인가? 이것이 남은 과제입니다. 따라서 그의 진술의 나머지 부분은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그가 이 목적을 위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시켜 가는지를 눈여겨 볼 일입니다. 그가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청원하고 있는 내용은 전체 이야기의 목표지점이기도 합니다:
이제 당신들이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내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알게 해 주시고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내게 알게 해 주셔서 내가 우로든지 좌로든지 행하게 하소서”(49절)
화자가 하인으로 하여금 ‘라반’을 설득하기 위해서 독자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을 길게 설명하게 하는 진정한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하인의 설명을 따라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는 것으로 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34절). 처녀의 가족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는 자기의 이름을 여전히 밝히지 않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온 모든 재산이 자기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라반’의 호기심을 촉발시키기 위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개 하인이 이처럼 재물이 많아서 내 누이에게 그저 줄 정도라면, 그 주인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 하인은 이런 ‘라반’의 생각을 정확하게 읽고 있기라도 한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시어 창성하게 하시되 소와 양과 은금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35절)
독자들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으며, 그가 누리고 있는 축복의 내용을 확인해 주는 재물의 목록들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본 바가 있습니다(12:16; 13:2; 20:14). 그러나 이 구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목록은 이전의 것들에 비해서 훨씬 더 포괄적이고 광범위합니다. 혹자는 이 목록을 가리켜 거명할 수 있는 모든 축복의 목록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라반’의 궁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한 진술임에 틀림없습니다.
자신과 주인의 관계, 그리고 주인의 재산 정도에 대해서 밝힌 후, 한 가지 흥미로운 가족사를 들려주는데, 이 또한 ‘라반’의 탐욕을 자극하고도 남을 정보입니다:
나의 주인의 아내 사라가 노년에 나의 주인에게 아들을 낳으매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 아들에게 주었나이다(36절)
주인이 아주 늙은 나이에 아들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의미이며, ‘리브가’와 결혼하기에 충분히 젊은 나이의 아들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소식은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아들에게 모두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 유산 상속은 나중에 이루어질 것이지만(25:5), 하인은 이를 이미 기정사실화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인이 ‘라반’을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끌어드리는 기술은 실로 예술적 경지입니다.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상대가 구미를 가지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물어보지도 않으면서, 은근히 사실을 과대 포장하기도 하면서,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바꾸어가면서 상대를 설득해가는 기술이 그것입니다.
지금까지 하인이 ‘라반’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그의 주인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인가에 관한 것으로서, 화자가 서두에서 독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보다 오히려 더 길고 상세한 것이었습니다(비교, 34-36절; 1절). ‘라반’을 설득할 의도였으니 그에게 분명한 확신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하인은 이어서 ‘아브라함’이 무슨 말을 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로 옮아가면서 자신이 온 목적을 보다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그는 설득의 달인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목적을 달성함에 있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은 각별히 강조하면서 그대로 옮기면서도,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짐짓 빼버리거나 또는 없던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복과 생략과 수정의 기법이라고나 할까요.
우선 그는 ‘아브라함’의 동기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측면보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2-8절; 37-41절). 즉 주인이 며느리 감으로 ‘가나안’ 땅의 여자를 맞이하기를 싫어한다는 점보다는, 오히려 그의 친족 중에서 찾고 싶어 하는 동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실제 ‘아브라함’이 정해놓은 조건 이상을 갖춘 신부를 발견한 상황에서, 주인이 지시했다고 하는 명령을 슬쩍 바꾸어 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명령과 하인이 전하고 있는 바를 비교해 봅시다:
아브라함: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아내를 택하라(4절)
하인: 내 아버지의 집 내 족속에게로 가서...아내를 택하라 하시기로(38절)
주인이 내게 이르시되,...너는 내 족속 중 내 아버지 집에서...아내를 택할 것이니라(40절)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는 실제 아브라함이 제시한 조건보다 그 범위를 더 제한시키고 있는 셈이지요. 예를 들어, 그의 주인은 단순히 옛 고향 출신의 처녀면 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마치 직계 친척 중에서 맞이하고 싶어 한다는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상대를 안심시키고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해가고 있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간절한 소망과 더불어 ‘이삭’과 ‘리브가’가 사촌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두 남매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하인은 지금 두 사람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염려와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하고 있습니다. 가족을 떠나야 하는 고통과 슬픔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가 주인과 나눈 대화를 소개하는 부분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즉 만일 여자가 그를 따라 함께 오지 않으려 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대화를 소개하면서도 원래의 대화 내용에서 다소 자극적이거나 불필요한 상상을 할 수 있는 내용은 빼버립니다:
하인: 여자가 나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아니하거든 내가 주인의 아들을 주인이 나오신 땅으로 인도하여 돌아가리이까(5절)
아브라함: 만일 여자가 너를 따라 오려고 하지 아니하면 나의 이 맹세가 너와 상관이 없나니 오직 내 아들을 데리고 그리로 가지 말지니라(8절)
하인의 회고: 내가 내 주인에게 여쭈되 혹 여자가 나를 따르지 아니하면 어찌 하리이까 한즉(39절)
이 대화는 민감한 내용을 담고 있어 차라리 소개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도 이를 소개하고 있는 하인의 의도를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원래의 대화와 나중에 이를 소개하는 하인의 진술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선 여자가 오지 않을 경우에 대한 표현이 미묘한 차이가 있으며(나중의 진술에서는 다소 완화된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 특히 여자가 오지 않으려 했을 때의 대안, 즉 ‘이삭’을 처녀가 사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는 안 된다는 아브라함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대화 내용은 일체 생략하고 있습니다. 혹시나 ‘라반’이 이를 듣고 엉뚱한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달라진 점은 또 있습니다. 하인의 임무가 성공적일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확신을 드러내는 대화의 내용 역시 의도적으로 바꾸어놓고 있는 점이 그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7절)
주인이 내게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그의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어 네게 평탄한 길을 주시리니 너는 내 족속 중 내 아버지 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 것이니라(40절)
‘아브라함’이 하인의 성공을 확신하는 데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천사의 동행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인은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언급은 생략하고 천사의 동행에 관한 부분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하인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라반’을 보다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신비한 섭리와 초자연적인 기적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극적으로 다가올 것인가? 다음 두 설명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극적으로 들릴 수 있을까에 관해서 상상해 봄으로써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주인의 모든 일을 간섭하고 섭리해 오셨습니다. 오늘 내가 이 처녀를 만난 것도 이런 섭리의 한 부분이지요.”; “하나님의 사자가 이 모든 여정에 함께하여, 내 기도를 들어주어 내가 오늘 이 처녀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 처녀가 왜 ‘이삭’과 결혼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충분히 설명을 마친 후에, 하인은 이제 우물가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도의 응답에 대한 증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42-48절). 그의 증거는 화자가 앞에서 소개한 내용과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이러한 간증은 그 자체로써 이미 설득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과장을 했으면 했지 조금도 축소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무엇을 기도했으며, 어떤 응답이 언제 응답되기를 기대했으며, 그것이 과연 어떻게 응답되었는지를 그대로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적어도 열린 마음의 소유자라면 이런 간증을 듣게 되면, 하나님께서 과연 기막히게 하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점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하인은 간증에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생략하고 있는데, ‘리브가’의 외모에 대한 언급이나(16절),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서 잠시 의문을 가졌던 부분(21절) 등이 그러합니다.
우물가의 에피소드에 관한 화자의 설명과 하인의 간증 사이에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하인의 진술 끝에서 드러납니다. 하인은 ‘리브가’의 아버지 이름과 그의 집에 유숙할 곳이 있는지 여부를 물어보기 전에, 코걸이와 손목거리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빼고, 아버지 이름을 먼저 물어본 연후에 선물을 주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에게 묻기를 네가 뉘 딸이냐 한즉 이르되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브두엘의 딸이라 하기로 내가 코걸이를 그 코에 꿰고 손목고리를 그 손에 끼우고(47절)
이렇게 말하는 의도에 대해서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해 봅시다.
하인이 강조하려는 요지인 즉은 우물가에서 일어났던 그 모든 일들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신비한 섭리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나의 주인의 동생의 딸을 그의 아들을 위하여 택하게 하셨으므로 내가 머리를 숙여 그에게 경배하고 찬송하였나이다(48절)
이 구절에서 밑줄로 처리한 부분의 ‘히브리’어 단어가 다름 아닌 신실함(תמא, 에메트)에 해답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은 이야기의 핵심 단어 중의 하나로서, <창세기> 전체적으로 여섯 번의 용례 중에서 24장에서만 세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27, 48, 49절). ‘에메트’는 ‘아멘,’ 곧 확고함, 확실함, 신실함 등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를 인격과 관련해서 사용할 때에는 주로 그의 말과 행동 및 사상적 특징과 연계하고 있습니다. 예로써, ‘이쉬 에메트’는 성실한 사람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용할 때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성실함을 말합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확실하다를 뜻하는 어근 ‘mn’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입니다. 영어로 이 개념을 전달하는 데에는 ‘reliability’(믿을만한; 신뢰할 만한)가 가장 포괄적인 단어일 것이다.
이제 하인은 그의 이야기에 마지막 쐐기를 박으면서 설득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제 당신들이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내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알게 해 주시고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내게 알게 해 주셔서 내가 우로든지 좌로든지 행하게 하소서(49절)
그의 발언은 위협에 가까운 것입니다. ‘라반’과 그의 가족이 하나님의 ‘인자함’과 ‘성실함’으로 ‘아브라함’의 요청에 응답해 주든지 말든지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차용하고 있는 이 두 단어는 실은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해서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단어이기도 합니다: “인자”(ךסה, 헤세드); “성실”(תמא, 에메트).
하인은 보다 단순하게, 직접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말이 그럴 듯하게 들리십니까?” 그러나 하인은 지금 ‘라반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는 듯합니다. 만일 그가 하인의 요청에 불응할 경우 그것은 단순히 인간의 요청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압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끝내 거부한다면 다른 곳에 가서 알아보겠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압박해 올 때, 누가 감히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옳든 그르든 말입니다. 이래서 하인의 협상력이 가히 예술적이라는 것입니다.
수락. 아니나 다를까. ‘라반’과 그의 아버지 ‘브두엘’은 하인이 기다리던 정답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처녀의 아버지 ‘브두엘’이 등장하는 것이 다소 놀랍습니다. 그동안 모든 대화와 협상 과정에서 ‘라반’이 가족을 대표하는 주 등장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구절이 후대의 편집이든지 또는 본문 변조나 파괴의 결과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예) ‘라반’과 ‘브두엘’이 아니라 ‘라반’과 그의 가족.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브두엘’이 일찍 죽었을 것이라는 가정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을 만한 증거가 어디에도 없고, 본문 파괴의 흔적을 찾는 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브두엘’이 그동안의 협상 과정에 등장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너무 늙어 이런 힘든 일을 감당하기 어려웠거나 또는 아내의 주도 하에 밀려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마치 훗날 ‘리브가’가 남편을 제치고 ‘야곱’을 선택하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Wenham).
50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51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50-51)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하는데 누가 감히 옳다 그르다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겠지요. ‘아브라함’의 재산 정도, ‘이삭’의 젊음, 그가 물려받게 될 엄청난 유산, 그리고 ‘이삭’과 ‘리브가’의 혈연관계, 이 모든 조건들이 결정을 내리는데 일정 부분 작용했을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변수는 역시 하나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 속에는 두려움과 불만이 베여있는 듯합니다. 어느 누가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체념하듯 동의하는 말, “데리고 가라”는 일찍이 ‘아브라함’이 하인에게, “가서 데리고 오라”고 했던 명령에 대한 메아리처럼 들립니다. 마침내 처녀의 가족은 결혼에 있어 가장 중요한 대 원칙 즉 ‘리브가’가 집을 떠나 ‘이삭’이 사는 곳으로 와야 한다는 점에 동의를 함으로써 이 모든 협상에 종지부를 찍은 셈입니다.
화자는 여기서 하인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다시 한 번 그의 영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참고: 12-14, 26-27, 42-44, 48절). 제 3막을 마치기 전에 협상의 진정한 주인공 하나님을 다시 한 번 무대 위로 올려놓고 있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의 종이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여호와께 절하고(52절)
그러나 협상이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신부 값을 지불하는 문제와(53절) 결혼시기를 정하는 문제(54-58절) 등에 관한 세부적인 조정 작업이 남아 있습니다.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신부 값’(רהמ)을 지불하는 것은 당시 하나의 관례였습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오십 ‘세겔’로 한정하고 있는데(신 22:29), 이는 일반 노동자가 수년간에 걸쳐 벌어야 하는 액수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인이 처녀의 가족에게 주었다는 선물은 바로 이 신부 값이었을 것입니다:
은금 패물과 의복을 꺼내어 리브가에게 주고 그의 오라버니와 어머니에게도 보물을 주니라(53절)
대개 신부 값은 신부에게 결혼 지참금의 명목으로 결혼과 함께 전해주는 것이 관례인데, 하인의 행동은 다소 이례적인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밝히고 있는 선물의 목록을 보면 당시 결혼 지참금에 해당하는 것들이긴 하지만 정확하게 이들이 과연 지참금이었는지, 그렇다면 왜 결혼도 하기 전에 전달하는 것인지 등에 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습니다. 아무튼 이 모든 일을 다 마친 후에 비로소 하인은 안심하고 식사를 마치고 편히 쉬게 됩니다: “이에 그들 곧 종과 동행자들이 먹고 마시고 유숙하고”(54절상).
이별. 그러나 하인의 휴식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가 저녁에 유숙하였다는 표현에 이어 곧바로 아침에 일어나자말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서 그러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그가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54절하)
“내 주인에게 돌아가게 해 달라”는 표현 속에는 명령조의 퉁명스러움이 담겨있습니다. 영어식의 “please”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 “청컨대”(אנ, 나)가 빠져 있는 것을 통해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날 우물가에서 ‘리브가’를 만나 마실 물을 요청할 때 그가 보였던 정중함이나(17절), 그녀의 오라비와 어머니에게 보여 왔던 지극히 외교적이고 정중한 태도에 비하면 완전히 돌변한 것입니다. 그는 지금 처녀의 가족들에게 요청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곧 떠나야겠다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처럼 태도가 돌변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순조롭게 진행되던 협상 분위기가 긴장 국면으로 돌변하고 있습니다. 밀고 당기고 하는 대화가 한동안 오고가다가 결국 결혼 당사자를 불러 본인 의사를 타진해 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남으로써 난처한 상황은 해소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처녀의 어머니나 오라비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리브가의 오라버니와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55절)
여기서 “며칠 또는 열흘”은 정확하게 어느 정도의 기간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그 이유는 ‘날’을 지칭하는 히브리어 단어 ‘욤’(םןי)이 갖는 다양한 의미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가장 기본적으로 ‘24 시간 하루’에서(창 1장), 한 나절, 막연한 기간 등을 의미하기도 하며, 복수형으로 쓰일 때는 “한 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삼상 27:7, 출 13:10; 레 25:29). 따라서 이 단어의 해석 여부에 따라, 문맥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열흘”의 의미 또한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예로써, ‘욤’을 한 해로 해석하면 “열흘”은 차라리 “열 달”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이 제시하는 기간이 며칠이든 열흘이든 또는 일 년이든, 하인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기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만류하지 마소서.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56절)
그런데 그가 제시하는 이유라는 것이 ‘리브가’의 가족을 설득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형통한 길을 주셨으니” 그러나 이 말의 뜻이 분명치 않습니다. 지금 당장 처녀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귀향길을 막을까 두렵다는 뜻인지, 주인 ‘아브라함’이 그렇게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뜻인지. 그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 그가 제시하고 있는 설명은 그동안 보여 주었던 설득의 달인다운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처녀의 가족들이 대안을 제시하며 협상을 시도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소녀를 불러 그에게 물으리라 하고(57절)
‘라반’은 이 협상안을 제시하면서 내심 그이 누이가 지금 당장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려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리브가’는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가? 이제 이야기는 가파르게 절정을 향해 나아갈 참입니다. 독자들도 긴장 가운데 침을 삼키며 초조하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리브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58절)
그동안 길게 끌어오던 이야기는 이 한 번의 결정적인 대화로 마침내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전체 이야기 중에서 “내가 가겠이다”고 답하는 ‘리브가’의 태도는 그녀의 오라비가 하인에게, “데리고 가라”고 승낙하면서 보여주었던 태도와 함께 가장 단호하고 결의에 찬 모습입니다. 이렇게 해서 ‘리브가’가 가족과 고향과 친지를 버리고 떠난다면, 이는 이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가족과 고향과 친지를 떠났던 것과 신학적으로나 문학적으로 병행을 이루는 셈입니다(참고, 12:1, 4).
이어지는 장면은 가족 간의 이별에 관한 것입니다. 모든 가족이 나와 인사하며 축복을 빌어주고 있습니다:
59그들이 그 누이 리브가와 그의 유모와 아브라함의 종과 그 동행자들을 보내며, 60리브가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 61리브가가 일어나 여자 종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가니 그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가니라(59-61)
이 장면에서도 ‘아브라함’에게 준 언약의 축복을 연상시켜주는 음성학적 언어의 유희를 발견하게 됩니다: ‘리브가’(הקבר, 리브카흐); 축복하다(ךרב, 발락); 천만(הבבר, 레바바흐). 또한 이들 단어들은 모두 <창세기>에서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의 “번성하라”(הבר, 라바흐)는 명령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이 처녀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언약이 실현되고 성취될 것임을 암시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축복의 기도 중에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하라”는 내용 또한 ‘아브라함’이 받았던 것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22:17).
마침내 하인은 ‘리브가’와 몸종들을 데리고 ‘하란’을 떠납니다. 하인이 그곳에 얼마나 머물렀는지가 분명치 않습니다. 추측컨대 그가 바라던 만큼 일이 신속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사라’의 죽음에 관한 것이라 두 에피소드가 시간적으로 바로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삭’의 결혼과 ‘사라’의 죽음 사이에는 적어도 3년의 간격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23:1; 25:20).
몸종 중에는 ‘드보라’도 있었을 것입니다(35:8). 그가 몰고 왔던 낙타 열 마리가 이들을 데리고 떠나는데 필요한 수단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61절 후반은 불필요 한 반복처럼 보입니다만, 주인이 그에게 명한 바를 그대로 수행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기법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동일한 두 동사 “취하다”(הקל, 라카흐)와 “가다”(ךלי, 얄라크)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4절; 62절후).
4. 이삭과 리브가(62-67)
네 번째 마지막 무대는 ‘이삭’과 ‘리브가’가 만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삭’은 신부를 맞이하고, ‘리브가’는 ‘사라’의 뒤를 이어 한 가계를 이끌어 주도적인 여 족장이 될 참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번 무대의 핵심 주제는 분명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의문점들이 해결되지 않고 넘어가고 있습니다: (1) 왜 이삭은 ‘브엘라해로이’에서 왔으며, ‘네게브’ 지역에 거주하였는가(62절)?; (2) 왜 ‘아브라함’은 이 장면에서 보이지 않는가? 왜 ‘아브라함’에게 귀향 보고를 하지 않고 ‘이삭’에게 하고 있는 것인가(66절)? 사실 하인은 이삭을 그의 주인으로 부르고 있기도 합니다(65절).
‘아브라함’이 보이지 않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하인이 떠나있는 동안 그가 죽었다고 가정한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이야기의 첫 장면에서 ‘아브라함’의 명령을 임종 시의 유언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야기>를 연대를 따라 읽어보면 이런 결론은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즉 만일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할 당시 나이가 마흔이라고 한다면(25:20),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140으로서, 그가 175세에 죽었으므로, 아직 살아있어야 합니다(25:7). 그러므로 며느리를 본 이후에도 30년을 더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당신의 제안은 무엇입니까? <성경>의 이야기는 반드시 연대기적 순서에 따라 기록되어야 합니까?
다음으로 이삭의 거주지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 때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네게브’ 지역에 거주하였음이라(62절)
‘아브라함’이 살던 곳과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는 곳은 ‘헤브론’이었습니다(23:2). ‘브엘라해로이’는 이곳으로부터 남서쪽으로 얼마간 떨어진 곳이니까, ‘아브라함’이 언제부터인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거나 또는 ‘이삭’이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이곳에서 살게 되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인은 ‘리브가’를 어디로 데려가야 할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이삭’과 ‘리브가’의 첫 대면 장면도 다고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두 사람의 대화가 전혀 소개되어 있지 않습니다. ‘리브가’가 하인에게 질문하고 하인이 ‘리브가’에게 대답하는 장면이 있고(65절), ‘이삭’과도 길게 대화하는 장면이 있습니다만, 정작 부부가 될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가 없습니다:
63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보매 낙타들이 오는지라, 64리브가가 눈을 들어 이삭을 바라보고 낙타에서 내려, 65종에게 말하되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 오는 자가 누구냐 종이 이르되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리브가가 너울을 가지고 자기의 얼굴을 가리더라, 66종이 그 행한 일을 다 이삭에게 아뢰매(63-66)
그리고 ‘이삭’이 들에서 묵상하였다는 언급 역시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분명치도 않습니다. 다만 두 사람이 처음 만날 때, 서로 눈을 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는 표현이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리브가’의 편에서 특기할 만한 행동은, 상대가 ‘이삭’이라는 말을 하인으로부터 듣기도 전에 낙타에서 내렸다는 사실인데, 실은 하인으로부터 그가 누구인지 듣자말자 즉각적으로 낙타에서 내렸다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일 것입니다. 하인이 ‘이삭’을 가리켜 자기 주인이라고 부르는 것은(65절), 아마 여행 중에 ‘아브라함’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리브가’는 천으로 얼굴을 가리는데, 결혼할 때까지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에 관한 언급으로 긴 이야기는 마침내 결말을 맺습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67절)
‘아브라함’이 그토록 원했던 소원이 성취를 보았고, 하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였으며, 하나님의 약속은 더욱 크게 성취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을 이어 한 집안을 이끌어 가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리브가’ 역시 ‘사라’를 이어 안주인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맞이해 들였다는 표현이 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오늘로 치면 일종의 중매결혼으로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통해서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화자는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 구절에서 ‘사라’의 죽음에 관한 언급은 있으되, ‘아브라함’에 관한 언급은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미 죽고 없다면 왜 이곳에서 ‘사라’ 대신 그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이 오히려 더 적절하지 않을까? 이와 관련해서 혹자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삭이 그의 아버지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그러나 정서적으로 아내가 아버지를 대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마지막 구절이 암시하는 바는, ‘이삭’이 ‘아브라함’을 대시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리브가’는 이제 ‘사라’를 대신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훈과 적용
1. 아브라함과 하인
‘아브라함’이 아내를 위하여 매장지를 구입한 일과, 아들을 위하여 며느리를 맞이하는 일은 서로 어떤 관련이 있는 것입니까? 두 에피소드가 마치 하나의 이야기처럼 두 장에 걸쳐 연이어 등장하고 있기에 물어보는 질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 주민들로부터 죽은 아내의 매장지로 “그 땅”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값을 치르고 ‘막벨라’ 동굴을 구입한 바 있습니다.
이제 그 자신 죽음을 목전에 두고 “그 땅”에 사는 처녀들을 제쳐두고, 굳이 그의 고향 출신 처녀를 며느리로 맞이하려 하고 있습니다(2-4절). 이 두 에피소드는 ‘아브라함’ 언약의 두 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이들 문제와 관련해서 명시적으로 어떻게 하라고 언급한 바는 없습니다. 그의 믿음의 발로로 보아야 할까요?
그렇다면 왜 이처럼 중요한 일을 자신이 직접 나서거나 당사자인 아들을 시키지 않고, 일개 하인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일까? 그 자신 이제 너무 늙고 기력이 쇠하여 기동조차 할 수 없게 된 것은 아닐까?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먼 외지로 내보내기에는 너무 위험 부담이 크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아들이 그 일을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조용하고, 소극적이며, 유약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브라함’은 임종 직전에 하인을 불러 마지막 유언을 남깁니다. 대개 마지막 유언은 자녀들에게 하는 것이 상례인데(참고, 47:29-31; 50:25), 그런 점에서 이 장면은 지극히 이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 이례적인 것은 하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2절하-3절상). 주인이 종과 더불어 맹세 의식을 행했다는 기록은 <구약>의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하는 맹세는 더욱 그러합니다.
도대체 이 하인이 누구이기에 이처럼 주인의 전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일까? 혹자는 그가 한 때 ‘아브라함’이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다메섹’의 ‘엘리에셀’일 것이라고 합니다만(15:2), 화자에게 이 질문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의 이름은 무명씨이며, 중요한 사실은 그가 주인의 전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아주 오래 동안 주인집의 모든 소유를 맡아 관리해 왔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2절상).
흥미롭게도 화자는 ‘아브라함’의 축복에 대해서 언급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1절하). 과연 이 말이 사실일까요? <성경>의 기록대로라면 그의 일생은 축복으로 시작해서 축복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12:1; 24:1). 그는 단순히 오래 살았을 뿐만 아니라(1절상), 많은 재산을 누렸으며(13장), 중요한 전투에서 군사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고(14장), 노년에 기적적으로 아내를 통해서 아들을 낳았으며(21장), 그 아들을 죽음 직전에서 되돌려 받기도 했습니다(22장). 이 외에도 여러 차례 인생에서 불확실한 시점을 거칠 때마다 그와 후손들이 모든 민족의 빛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기도 했습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복 받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받은 축복과 관련해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축복을 계승 및 확대시켜 줄 충성스러운 하인이 임종의 순간에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단순히 종이 아니라 친구였으며, 친구의 유지를 받들어 집행해 줄 법적 대리인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다”는 선언이 함축하고 있는 바가 아닐까요?
갑자기 그 하인이 이야기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한 인물에게 하나님의 의도대로 <아브라함 이야기>의 대미(大尾)를 장식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단없이 이어가는 역할을 하도록 맡겨두었다는 사실은 놀랍다 못해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이 한 사람의 헌신 여부에 따라 “하나님의 언약”의 성패가 달려 있기 때문이지요. 과연 그는 친구나 다름없는 주인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줄 것인가? 주인과 함께 맹세한 바를 실천에 옮길 것인가? 실천에 옮긴다면 어떻게 이루어 갈 것인가?
그가 이처럼 중요한 임무를 이루어가는 방식은 너무나 평범해서 오히려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기도가 그것이지요. 기도란 하나님의 백성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수사(修辭)일 것입니다. 그것에 관해서는 가장 많이 이야기하면서도, 실제 그것을 행하는 데에는 가장 어려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도하는 일이 쉬웠다면, <성경> 특히 신약에서 그렇게 자주 기도에 대해서 강조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평범한 일에 충실한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비범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하인은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사실 이 사람의 기도는, ‘아브라함’이 ‘고모라’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중보한 일을 제외하고 나면, <성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가 기도하는 동기 또한 위대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으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으뜸가는 덕목이 바로 이것입니다. 원하는 처녀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나, 기도가 신비한 방식으로 응답이 되었을 때에 그가 드리는 기도가 이를 증명하고도 남습니다:
12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13성 중 사람의 딸들이 물 길으러 나오겠사오니 내가 우물곁에 서 있다가, 14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12-14절)
26이에 그 사람이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고, 27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 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26-27절)
이 사람은 지금 자신이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방식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12절상);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27절상). 도대체 어디서, 누구로부터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태도를 배울 수 있었을까? 대답은 하나뿐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대답입니다. 그는 주인과 평생을 함께 해 온 자가 아닙니까! 그는 주인이 하는 말을 따라 했고, 주인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대로 따라 했으며, 주인의 인격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주인의 믿음이 그의 믿음이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실로 윤리․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탁월한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는 행동하기 전에 기도했고, 기도가 응답받았을 때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그리고 인간 대소사가 오직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에 달렸다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의 삶에 동행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40절), 자신의 삶에도 그렇게 한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약>에서 이 하인에 버금가는 의리의 사나이를 만납니다. 우리의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부를 때마다 후렴처럼 사용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것입니다. 그의 주인은 ‘그리스도’이며, 그의 하나님은 주인의 하나님입니다. 그는 매사에 주인의 유익을 구하는 충성스러운 하인이었고, 주인의 관심사가 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는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었고(살전 5:17), 인생의 목표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고전 10:31).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의 하인처럼 평생을 주인과 동행하고, 대화하며, 묵상하면서 배운 결과입니다. 비록 직접 눈으로 한 번도 본 적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의 주인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친구이기도 합니다(요 15:15). “사람이 그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합니다(요 15:13). 그 친구가 우리더러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마 6:33). 우리 삶의 동기나 목표를 자신이 했던 것처럼 설정하라는 것이지요. ‘바울’ 역시 동일한 충고를 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 ‘그리스도’의 신부를 구하는 일에 있어 우리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공 확률이 지극히 미미한 위험하기 짝이 없는 도박입니다. 엄청난 보배를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 맡기신 셈이지요(고후 4:7). 그러나 우리는 주저하거나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은 오히려 두려움을 내쫓기 때문입니다(요일 4:18). 친구 사이에도 두려움이 있을 수 없으며, 있다면 오직 신뢰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나에게 달렸다니!
2. 아브라함과 리브가
‘리브가’를 제 2의 ‘아브라함’으로 부를 수 있을까? 화자는 독자들로 하여금 이 질문을 염두에 두고 두 사람을 비교해 보도록 초청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이삭과 리브가 이야기>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두 사람의 이름이 갖는 음성학적 유사성, 두 사람의 말과 행동 등은 화자가 독자들을 위해서 마련해 놓은 흥미로운 장치들입니다. 찾아봅시다.
<이삭과 리브가 이야기>는 <창세기> 내에서 한 장(章)으로서는 가장 길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만큼 두 사람의 결혼 이야기는 다른 어느 이야기보다 이스라엘전체 역사를 통해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두 사람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이건만, 정작 결혼 당사자는 그 모든 과정에서 철저하게 배제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모든 것을 준비하고, 흥정하며, 결정하는 자들은 신랑과 신부가 아니라 그들의 가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두 주인공은 그 결과를 받아들임에 있어서는 아주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아주 신중하게, 기도 가운데,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것임을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점이 화자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간혹 그의 삶 전체가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기도 하나봅니다. 그래서 이웃이나 이방인들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뜻밖의 고백을 듣기도 하지요. ‘아비멜렉’의 눈에 비친 ‘아브라함’의 삶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21:22하). 이점 ‘브두엘’과 ‘라반’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하인으로부터 그동안 일어난 일에 대해서 듣기를 마친 이들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50-51절). “이 일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표현은 오늘날에도 인도 남부 지역에서 부모들이 자식의 결혼식에 하객들을 초청하면서 사용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장 경이로운 사실은 결혼 당사자 ‘리브가’의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화자는 신부의 외모나 인품이나 건강 상태 등에 대해서, 세심한 독자라면 결코 놓칠 수 없도록, 이야기 중간 중간에 무심결에 흘려버리듯 스캐치 한 바 있습니다. 처녀가 얼마나 친절하고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졌는가? 우물가에서 낯선 나그네가 물을 요청하자 급히 물동이를 내려 마시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몰고 온 낙타들도 마시도록 했을 정도다! 그녀의 건강 상태는 어떠했을까? 열 필의 낙타에게 일일이 물을 퍼 줄 정도였다! 뜨거운 사막을 건너 긴 여행을 한 낙타 한 마리가 마시는 물의 양이 적어도 80 리터라고 한다면, 도합 800 리터의 물을 퍼주어야 했다!
작은 물동이로 그 일을 하기 위해서 걸렸을 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수백 번을 왔다 갔다 했을 것이니, 보통 체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리브가’의 이러한 모습은 이전에 ‘아브라함’이 천사를 맞아 접대하기 위해서 온 집안을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던 모습을 연상시켜줍니다. 과연 그 시아버지에 그 며느리입니다.
그러나 ‘리브가’에 대하여 가장 경이로운 이야기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처녀의 아비와 오빠가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고백은 했으면서도, 막상 하인이 다음 날 아침 그녀를 데리고 가려고 했을 때 며칠을 더 묵어가기를 간청합니다: “이 아이로 하여금 며칠 또는 열흘을 우리와 함께 머물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55절). 하인이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자, 그들은 ‘리브가’를 직접 불러 본인의 생각을 물어보자고 제안합니다. 그들은 묻습니다: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이 질문에 담긴 뜻은 말할 것도 없이 영원한 이별입니다. 정든 가족과 고향을 땅을 떠나 낯선 사람과 함께 수백 킬로미터의 사막을 건너는 긴 여행 끝에 생면부지의 남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리브가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순진하리만치 단호하고 간결합니다: “내가 가겠나이다.” 만약 이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면 지금 당장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과연 ‘리브가’는 두 번째 ‘아브라함’으로 불리기에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친척과 고향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향했으며(12:4), 이후 이어지는 삶을 통해서 즉각적이고 유보 없는 순종의 모습을 보여준 바 있습니다. 예로써,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바로 그날” 명령을 수행했고(17:23),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으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에도 주저함이 없이 “그 다음날 이른 아침에” 그들을 내보냈으며(21:14),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에도 역시 “다음날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모든 준비를 마친 바 있습니다(22:3).
‘리브가’도 ‘아브라함’이나 그의 하인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있어 전혀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어 보입니다. 비록 한 번도 가본 적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향기가 ‘아브라함’에서 하인을 거쳐 ‘리브가’에게까지 이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마태’는 천국을 마치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풀어 놓은 곳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 왕이 종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청하였으나, 모두들 돌아보지도 않고 혹자는 자기 밭으로, 혹자는 자기 사업하러 가버립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종들을 잡아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나마 초청에 관심이 있는 자들조차도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그 초청에 즉각적으로 응하기를 거부하거나 지연시킵니다. 아버지 장사가 있어 이를 다 치른 후 가겠다든지, 또는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을 달라고도 합니다(눅 9:59-62). 이들 모두 열흘 후로 결단을 미루어 두려는 ‘리브가’의 오빠나 어미와 다르지 않습니다. 열흘은 열 달이 되고 하고 십년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는 사이 결단의 시기는 영영 사라지고 맙니다.
결혼은 우리 인생에 있어 출생이나 죽음과 함께 중요한 대사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열흘이 걸리든 열 달이 걸리든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연애의 감정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의 신앙과 인격, 외모나 건강, 가정환경과 교육 정도, 가족 구성원의 동의 등등이 모두 고려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신중해야 할 이유는 잘못된 결혼은 되 물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적어도 성경적 원리에 따른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연애의 감정만으로 결혼을 결정해 버리는 사례가 비일비재합니다. 사소한 일에는 목숨을 걸다시피 하면서도 정작 이런 문제를 놓고서는 어쩌면 그렇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인간은 모순되고 역설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고후 11:2).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구애하셨을 때 나는 얼마나 심각하게 반응하였으며, 지금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이삭’과 ‘리브가’의 <러브 스토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그것과는 시작부터 다릅니다. 대개 사랑의 이야기가 두 주인공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싹이 트고 발전해 가는 것이 상례지만,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철저하게 본인들의 계획이나 의사와는 상관없이 타자들이 주도해 갑니다. ‘아브라함’이 계획하고, 그의 하인이 이를 실행에 옮기며, ‘리브가’의 가족들이 동의함으로써 두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는 듯 보입니다.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들이 연극무대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실질적인 동력(動力)이자 동인(動因)은 무대 위에 한 번도 등장한 적은 없지만 다름 아닌 하나님 그분임을 우리는 이미 파악하고 있습니다. ‘리브가’는 자신이 미처 깨닫기도 전에, 신랑의 이름이나 존재를 알기도 전에, 이미 신부로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그렇다고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우리는 그리스도를 한 번도 만난 적도, 본적도 없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리스도의 신부를 찾아 나서도록 하셨습니다. 하인이 ‘리브가’를 ‘브엘세바’까지 데리고 가서 ‘이삭’과 대면하도록 한 것처럼 성령님께서도 이 세상이 끝나는 날, 그리스도의 얼굴을 대면하는 그날까지 신부의 일생을 보호하고 인도해 갈 것입니다. 하인이 ‘리브가’에게 “이제 나와 가려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녀가 “내가 가겠나이다”하고 대답했던 것처럼, 성령께서 나를 부르실 때 역시 같은 대답으로 반응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언젠가 그분의 얼굴을 볼 날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티나 주름 잡힌 것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이” 영광스러운 신부로서 살 수 있기를 기원해 보는 것입니다(엡 5:27).
연습과 토의
1. <이삭과 리브가 이야기>는 단순히 두 사람만의 러브 스토리는 아닙니다. 본문의 핵심 주제는 무엇이며, <아브라함 이야기> 전체에서 갖는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 본문 이야기가 앞선 <막벨라의 거래>와 쌍을 이루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논의해 봅시다. 어떤 점에서 그러합니까?
2. ‘아브라함’과 하인 사이에 이루어진 언약과 맹세의 내용은 무엇이며, <아브라함 언약>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3. ‘아브라함’의 하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리브가’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4.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는 어떻게 다릅니까? 이를 구분할 수 있습니까? 표적을 요구하는 하인의 기도는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입니까? 과연 ‘기도의 응답’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있는 것입니까? 타인을 설득하거나 압박하는 수단으로 ‘기도의 응답’을 사용할 수 있습니까? 오늘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