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38과
인 사
김태정 목사갈라디아서 1:1-5약 20분 분량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1:1)
공문서가 아니라 편지를 쓰는 목적은 대개 인사를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서신의 벽두부터 의례적인 문안 인사를 생략한 채 마치 항의 편지를 쓰듯 거칠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사도 직분이 초자연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수신자들을 처음부터 압도하려는 듯한 의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중간에 간략하게 수신자들을 향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을 전하기는 합니다만, 서신의 인사말은 전체적으로 지극히 공식적이며, 딱딱하고,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그의 다른 서신과 비교해 보는 것도 본 서신의 동기나 목적에 대해서 시사해 주는 바가 클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사말은 사도의 기분만 전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짧은 다섯 절의 본문 속에는 서신 전체의 신학을 대변할 수 있는 주제나 내용들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이 인사말이 제공해 줄 수 있는 일련의 주제나 정보가 무엇인지 찾아내 보는 것도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신약>의 세계에서 주고받던 편지의 서두(序頭)는 항상 일정한 패턴을 따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A가 B에게 (또는 A로부터 B에게)... 문안을.” ‘바울’ 사도 역시 당시의 관례에 따라, 그의 서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우선 그의 이름을 밝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1절), 수신자들이 누구인지(2절), 그리고 그들에게 인사와 문안을 전하고 있습니다(3절). 이러한 전통적인 형식에 더하여, 그는 자신과 함께 서신을 보내고 있는 동료들을 밝히고 있으며(2절),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아마 신조의 형식으로 되었을)으로 보이는 구절을 의례적인 인사에 추가하고 있으며(4절), 마지막 “송영”(doxology)으로써(5절) 서신의 문안 인사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서신의 형식에 보다 중요한 두 가지 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 자신의 사도직(apostleship)에 대한 확신에 찬 선언이며(1절), 다른 하나는 신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과(4절) 하나님 아버지의 활동과 뜻에 관한 선언입니다(4절). 이 두 가지 결정적인 변화를 통해서 그는 서신의 주제를 벽두부터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 특유의 방법론이 두 가지 측면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1) 단도직입적인 단어의 구사: “사도”; “아버지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2) 교차대구적 형식: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not from men)
사람들로부터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nor through any man)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but through Jesus Christ)
하나님 아버지로부터(and from God the Father)
신학과 신앙
1. 발신자
서신의 발신자가 누구인지 밝혀주고 있는 제 1 절은 발신자 자신의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정체성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1절)
바울(Παύολ). ‘바울’은 ‘그리스’ 어로 “작다”(little)는 뜻입니다. 유대인으로서 그의 이름은 ‘사울’로서, 그와 같은 ‘베냐민’ 지파에 속했던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의 이름에서 취한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그가 자신의 출생과 신분에 대해서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빌 3:5). 또한 그는 로마 시민으로서(행 16:37-38; 25:10-12), 당시의 관례를 따랐다면 세 가지 이름을 취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1) 가족 또는 지파의 이름; (2) 그리고 그 앞에 첫 이름(예: Gaius Julius Caesar의 Gaius); (3) 마지막에 오는 성(性).
그리스나 또는 다른 지역 출신 사람으로서 로마 시민이 된 경우라면, 원래의 성(性)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추가로 로마식을 따라 나머지 두 이름을 더하게 됩니다(로마 이름은 대개 자신이 신세를 진 사람들의 이름을 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경우에는 <신약> 어디에도 이런 로마식 이름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 이름 ‘바울’은 동시에 로마식 성(性)도 될 수 있기에, 이방인(주로 헬라인)을 향한 유대 그리스도인으로서, 양쪽 세계에서 보다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름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ἀπὁστολο, apostle). 이 호칭은 그의 서신 모두에서 바울이 자신의 선교적 정체성과 관련해서 자신의 이름처럼 사용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위를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도”란 일반적으로 “보냄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데, <신약>에서는 특별히 보냄을 받은 자의 권위 내지는 대표성을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래 각 경우 “사도” 즉 “보냄을 받은 자”가 사용되고 있는 다양한 용례를 살펴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대상과 범위를 살펴봅시다:
보냄을 받은 자(사도)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요 13:16하)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사도)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후 8:23)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너희 사자(사도)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빌 2:25)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그러나 보다 좁은 의미로는 잘 알려져 있는 열 두 사도를 포함해서(마 10:2; 막 3:14; 눅 6:13; 9:10; 17:5; 22:14; 행 1:2, 26), 어떤 특별한 사역을 담당했던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기도 합니다(눅 11:49; 행 14:4, 14; 롬 16:7; 갈 1:19; 엡 3:5; 계 18:20). 대개 이들은 ‘예수’님 생전에 그분께서 직접 선택한 자들로서, 그분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의 사역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목격한 자들입니다(행 1:22). <신약>에서 이런 좁은 의미에서 “사도”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는 대략 76회에 이릅니다. ‘바울’이 자신의 모든 서신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례는 바로 좁은 의미의 “사도”를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그 권위를 위임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당시 그레코-로마 세계에서는 “사도”에 대한 이해가 사뭇 달랐다고 합니다. 주전 5 세기에서 주후 2 세기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그리스 또는 유대-그리스 문헌에서 “사도”를 사람을 지칭하는 “대사”나 “대리자” 등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고, 오히려 군사적 목적의 탐사나 탐험 등을 의미하는 비인격적 단어로 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Longenecker는 그이 주석서에서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를 덧붙이고 있습니다(2-4쪽).
출처와 권위. 결국 사도 직분의 출처와 권위는 바로 하나님 자신으로서, ‘바울’은 서신의 벽두에서부터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고 언급한바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은 부정문으로, 그리고 또 한 번은 긍정문으로 반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원문의 교차대구적 형식을 살려 다시 옮겨보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사도 된)(1절)
바로 이 부분이 <갈라디아서>의 문안 인사와 관련해서 가장 특징적인 표현입니다. 물론 다른 서신에서 ‘바울’은 거의 습관적으로 자신을 “사도”라고 밝히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처럼 수고스럽게 시적 대조 반복을 통해서 자신의 사도 직분을 강조하고 있는 곳은 본 서신이 유일합니다. 예: 롬 1:1; 고전 1:1; 고후 1:1; 등등. 다만 <빌립보서>가 예외적으로 “사도”를 언급하는 대신 “(예수의) 종”으로 자신을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자신을 “종”으로 부르고 있기는 합니다(롬 1:1).
왜 그가 이렇게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서론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만, 우리는 이 문장을 통해서 소극적인 자기방어와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변론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혀두고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이겠지요.
그가 지칭하고 있는 “사람들”과 “사람”은 의미 없는 단순 반복이 아니라, 각기 복수(複數)형과 단수(單數)형으로서 다른 대상을 지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전자(前者)는 분명 일반 사람들로서, 구체적으로는 ‘바울’의 반대자들이 주장하는바, 열 두 사도를 포함한 당시 ‘예루살렘’ 교회 내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즉 그의 사도직분은 이들로부터 위임받았거나 또는 중재자의 중재를 통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신약>은 ‘아나니아’나 ‘바나바’ 등과 같은 특정인의 중재를 통해서 ‘바울’이 사도직분과 관련한 사역이나 역할을 위임받은 이야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 행 9:10-19, 27; 11:25-26; 22:12-16).
그리고 후자(後者)는 다소 애매하기는 하지만, 단수형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아, 일종의 기관 내지는 단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회당”이나 “공회” 또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교회가 보낸 “사자”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후 8:23; 빌 2:25.
특히 ‘바울’이 1:17-2:24에서 소개하고 있는 한 사건을 통해서 볼 때,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과 “사람”은 ‘예루살렘’ 교회와 그 교회의 지도자(사도)들로서, 그는 자신의 사도직분이 그의 반대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들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처음부터 못박아두고 싶은 것입니다.
‘바울’이 소극적인 자기 방어에서 한 걸음 나아가, 보다 적극적이고도 공격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출처와 권위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한글 성경을 비롯한 여러 번역본에서 이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정확하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서”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어떻게 번역하든 그가 받은 사도직분은 제 삼자나 제 삼의 기관의 중재나 중보를 통해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도 직접적인 계시를 통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다만 이 표현과 관련해서 한 가지 특기할 만 한 점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표현에서 두 위격의 순서가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바뀌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롬 1:7; 고전 1:3; 고후 1:2; 엡 1:2; 빌 1:2; 살전 1:1; 살후 1:1; 1:12; 딤전 1:2; 딤후 1:2; 디 1:4; 몬 3. 물론 이 역전이 곧바로 이어지는 3절에서 다시 바뀌고 있기는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는 이곳에서도 일종의 교차대구적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Longenecker).
또 한 가지 이 표현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울’의 계시의 핵심에는 늘 “그리스도”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중심” 계시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두 위격(位格)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학적 관계를 밝히는데 정력을 쏟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일과 관련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가 서신의 다른 곳에서도 계속 강조하고 있듯이(갈 3:19-20),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와는 달리 결코 중보자나 중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사람이 세운 어떤 기관이나 조직과도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도 이 점에서 있어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주장과 관련해서 ‘존 스토트’(J. Sttot) 목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교회가 성경을 썼다고 합니다. 성경 저자 역시 교회의 한 일원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 위에 있으며 성경을 해석할 권리를 가지 뿐 아니라 보충할 권리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무리가 있는 것이 사도는 교회의 사도이거나 교회가 임명한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도입니다. 본 서신에서도 ‘바울’은 “교회의 사도 된 바울은 교회의 위임을 받아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쓴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로 시작하는 두 번째 표현이 이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분은 늘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바울’을 사도로 임명하는 일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은 하나님의 대리인 정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며, 이런 점에서 그의 사도직의 권위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에 관한 사상은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고후 5:19; 딤전 2:5-6). 아마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그리스도’란 다름 아닌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나셔서 그로 하여금 이방인을 위한 그분의 그릇이 되라고 명하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분명할 것입니다(행 9:15-16; 22:21; 26:16-18).
그리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는 하나님입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한 두 번째 언급입니다. 앞에서 ‘바울’의 사도직의 궁극적인 출처로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정통 ‘유대인’으로서 ‘바울’의 관심사는 두 위격(位格)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데 있지는 않은 듯합니다. 그에게 있어 유일 신 하나님의 존재나 속성은 마치 공기와 같아서 너무나 당연하고 자명한 지식이라,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하나님을 언급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일과 관련해서 그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이 아니라, 그분께서 행하신 구속의 사역과 관련해서 언급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함께 있는 모든 형제(2절상). 안부를 묻고 있는 자는 ‘바울’만이 아닙니다. 그는 왜 이들 형제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울’은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서신과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습니다: ‘소스데네’(고전 1:1); ‘디모데’(고후 1:1; 빌 1:1; 골 1:1; 몬 1); ‘실라’와 ‘디모데’(살전 1:1; 살후 1:1). 아마도 이들은 ‘바울’의 동역자 내지 개인 비서들이었을 것이며, 서신의 수신자들에게 알려진 경우에는 이름을 직접 거명하기도 했을 것입니다(롬 16:22). ‘바울’은 <빌립보서>에서도 동일한 표현으로 이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빌 4:21), 그는 이들이 단순한 필기사가 아니라, 그와 함께 상대방에게 인사와 문안을 전하면서 동시에 서신에 기록된 내용이 옳고 정당한 것임을 지지하고 확증해 주는 동료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비록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함께 있는 형제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여 집니다. 그는 함께 있는 형제들이 소수 몇몇이 아니라, “모든 형제”라고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더욱 견고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누구인가에 관해서는 서신의 기록 시기나 수신자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추측은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로마’ 남부의 ‘갈라디아’ 지역에 대한 일차 선교 여행을 다녀 온 직후,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기 전에, 그 지역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행에 동행했던 중요한 인물 ‘바나바’는 왜 빠져 있을까? ‘안디옥’에서 그가 보인 지극히 실망스러운 행동(2:11-13)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Longenecker). 이름이 빠져 있기는 그의 개인 비서는 물론 ‘안디옥’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이들 모두 수신자들에게는 생소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정 반대로 이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이미 잘 알려진 선교사들이라 새삼스럽게 거명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런 설명은 서신의 기록이 보다 늦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했을 때 가능하기는 합니다.
2. 수신자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2절하). 발신자에 대한 긴 부연 설명과는 정 반대로 수신자에 대한 언급은 지나칠 정도로 간단명료합니다. 대개 그는 그의 수신자들을 향해서 다소 길면서 수사적인 감사나 칭찬의 말을 전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전혀 그런 감사나 의례적인 칭찬의 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형식적인 차이가 <갈라디아서>의 배경에 어떤 암시를 주고 있습니까?
그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이나, 그가 느끼고 있는 분노나 실망 등을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단호하고도 결연한 태도로 서신 전체의 분위기를 잡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신자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다른 점은 흔히 그의 다른 서신에서 볼 수 있는 한 지역 교회가 아니라(예: 살전 1:1; 살후 1:1; 고전 1:2; 고후 1:1), 여러 교회들을 망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점 때문에 당시 ‘갈라디아’ 지역 내에 몇 개의 교회가 있었는지, 구성원들의 인종 분포가 어떠했는지, 각 교회들이 지역적으로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지 등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들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부분적이긴 하지만, 서신의 기록 시기나 장소 등에 대한 전제(前提)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일 수신자를 남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로 본다면(본 교재에서 채택하고 있는 전제), 이들 교회는 <사도행전> 13:14-14:25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처럼 교회 구성원들은 다양한 인종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교회 상호간에는 기능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확한 수신자가 누구였든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갈라디아서>는 그 지역 내에 흩어져 있던, 이방인들로 구성된 여러 교회에게 보내는 일종의 회람용 서신이라는 점입니다.
3. 은혜와 평강
3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3-4절)
은혜와 평강. ‘유대’인이면서 동시에 ‘로마’ 시민이었던 ‘바울’에게 있어 이처럼 ‘히브리’ 식과 ‘그리스’ 식 인사가 결합한 안부 인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은혜”(Χάρι, 카리스)는 당시 ‘그리스’ 문화권에서 오늘날 “안녕” 내지는 “신의 가호가 있기를” 정도의 상투적인 인사로 생각할 수 있고, “평강”(ειρήνη, 에이레네)에 해당하는 히브리 어는 “샬롬”(מולשׁ)으로서 ‘유대’인들의 상투적인 인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 이 두 단어는 보다 심오한 신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곧바로 등장하고 있는 이런 표현 때문입니다. 예컨대, <로마서> 5장에서 “평강”은 단순한 마음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은혜”의 결과로 사람들이 누리게 된 “하나님과의 화평”(peace with God), 즉 적대적인 관계가 제거된 상태를 말합니다(롬 5:12-21). 따라서 “평강”은 “은혜”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게 된 자는 당연히 “하나님의 평화”(peace of God)를 마음으로부터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만(빌 4:7), 그것은 부수적인 은혜의 결과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동시에 또는 각기 따로 ‘바울’ 서신은 물론 다른 서신에서 축복의 인사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바울’에게 있어 이 두 단어는 복음의 본질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단어는 그 기원을 초자연적인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 서신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적어도 인간의 구원과 관련해서는 완전히 한 인격체처럼 제시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갈라디아서>만 하드라도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2:21)와 “그리스도의 은혜”(1:6)는 사실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은혜”의 결과로 얻어지는 “평강” 역시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평강”(빌 4:7)과 “그리스도의 평강”(골 3:15)은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바울’에게 있어 인간을 위한 구원의 사역에 관한 한, 하나님과 부활하신 주님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나 구별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언급할 때마다 그분이 하신 한 일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역을 언급하지 않고는 그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분이 하신 일이란 다름 아닌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적 죽음”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에 대해서 이미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그분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아마 <이사야서>의 “종의 노래”(사 53:5-6, 12)를 염두에 둔 듯하며, 스스로를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 여기신 듯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는 표현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Longenecker), 이와 유사한 신앙고백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었다”는 표현도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고전 15:3). 이외에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해서 다소 표현들을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롬 5:6-8; 14:15; 고전 1:13; 11:24; 골 1:21-22).
(우리를) 건지시려고. 이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목적에 대한 진술입니다. “건지다”(ἐξαιρέω, 엑사이레오)로 번역하고 있는 이 동사는 신약에서 8회 정도 등장하고 있고, “제거하다(뽑아내다)”(마 5:29; 18:19), “구출하다”(행 7:10, 34; 12:11; 23:27), “선택하다”(행 26:17) 등의 다양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만, ‘바울’이 이곳에서 전달하고 있는 의미는 두 번째 것으로서 그것도 보다 영적인 구원에 대한 강조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바울’이 의도하고 있는 구원이 보다 영적인데 있다는 점은 그 구원이 “이 악한 세대로부터”라는 점에서 보다 명확해 집니다. 인류의 역사를 악한 “현 세대”와 선한 “다음 세대”로 구분하는 방식은 전형적인 유대주의의 소산입니다. 그들은 지고자(至高者)가 역사를 한 세대가 아닌 두 세대로 만들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4 에스라 7:50). 물론 ‘사두개’ 인들은 부활이나 영생 등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들의 시대를 지선(至善)의 시대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예컨대, ‘마카비’ 반란과 뒤 이은 ‘하스모니아’ 왕조의 통치를 위대한 시대의 시작으로 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바리새’ 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시대가 무시무시한 종말의 고통으로 절정에 이른 후 다음 세대가 열린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이 악한 세대”라고 말할 때 정확하게 문자적으로 유대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당시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그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대상은 세상의 초등 학문이라고까지 폄하하고 있는 “유대 율법 주의자”들이라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이 세상에 대한 그의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도 그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롬 12:2).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우리가 유대주의에 동의하든 않든, 세상에 대해서 늘 민감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구절이 지칭하고 있는 바가 “그리스도가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든, 또는 “우리를 건지시려는” 것이든, 아니면 둘 다 이든, ‘그리스도’가 이룬 그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뜻과 아버지로서의 관심과 배려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는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4. 영광송(榮光頌)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5절)
(그) 영광이 저에게. ‘바울’의 서신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찬미 내지는 영광송이 의례적인 인사말 이후에 나타나기는 이곳이 유일합니다. 이로 미루어 이 부분 역시 원래는 4절의 기독론적 신앙고백의 한 일부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어휘나 표현 등을 통해서 볼 때, 그 기원을 유대인 기독 공동체의 예배 의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예: 계 1:5-6), 더 나아가서는 <구약>과 유대교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관계 대명사로 처리하고 있는 “저에게”는 물론 이미 앞에서 한 번 사용한 바 있는 “우리 하나님과 아버지에게”를 지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영광”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구약적 배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편>은 피조물들이 창조주 하나님에게만 합당한 영광과 예배를 드려야 함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시 29:2; 96:8).
세세토록. 하나님에 대한 영광과 찬미는 아무리 해도 과함이 없다는 강조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번역본에서는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만, 이 부분에 대한 ‘헬라어’어 표현은 분명 <칠십인 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일한 의미를 훨씬 강조한 것입니다.
아멘. 찬미와 영광의 송영에 마지막으로 ‘아멘’을 덧붙임으로써, 초대 기독 공동체는 그들의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시편>의 네 개의 책이 모두 ‘아멘’으로 끝나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시 41:13; 72:19; 89:52; 106:48). ‘바울’ 역시 이러한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은 그의 복음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결 같이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우리의 구원은 결코 “율법의 행위”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입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