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교재는 기독교한국침례회 <늘푸른교회> 가족들과 일반인들을 위한 <갈라디아서: 역사와 문학과 신학>의 보조 자료로 만든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훈계하며, 책망하고, 바르게 하며, 또 의로 교육하기’ 위해서 쓰신 그분의 말씀입니다(딤후 3:16). 이것이 바로 <성경>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읽고 계시며, 우리 또한 그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공부를 하고자 하는 자는 항상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변화 받기를 원하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변화 없는 <성경> 공부는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자이므로 <성경>을 모르는 자보다 오히려 더 불순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이와 같은 궁극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기는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전달함에 있어서 법조문이나 신문기사처럼 딱딱하거나, 무미건조한 방식이 아니라, 시나 노래로 아름답게 부르거나, 흥미진진한 이야기 등으로 우리에게 전하십니다. 즉 문학이라는 그릇을 빌어서 그의 의도를 전달하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신학이라는 내용이 문학이라는 그릇에 담겨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알게 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진리들이 얼마다 아름답게 표현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맛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공부를 통해서 교훈을 배울 뿐만 아니라, 교훈이 지닌 심미적인 아름다움 또한 감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 공부의 이차적인 목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외에도 <성경> 공부에서 빠뜨릴 수 없는 한 가지 요소가 있는데, <성경>이 현재의 본문으로 형성되기까지의 전승들의 역사와 배경과 관련된 연구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역사비평적(歷史批評的) 연구라고 합니다(이 용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본인의 <창세기> 교재에서 상세하게 설명한 바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을 공부하는 세 번째 목적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결국 <성경> 공부를 하는 우리의 종합적인 목적이 삼중적임을 알게 됩니다. 신학과 문학과 역사가 그것입니다.
사실 인류 최고의 걸작품으로 일컬어지는 <성경>은 자체가 지닌 역사적 사실적 신뢰도에 대하여, 미적이고 운율적인 아름다움에 대하여, 그리고 종교적, 윤리적 탁월성에 대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예리한 비평을 시도하도록 도전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비평적 작업을 거치는 동안 <성경>은 더욱 권위 있고, 영감 넘치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스스럼없이 보여줄 것입니다. 필자도 비록 신학적 지식에 있어서나 문학적 소양에 있어 그야말로 천학비재하기 짝이 없지만, 나름대로 이러한 기본자세에 입각해서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본 교재의 <서론> 부분에서는 <갈라디아서>에 대한 서론적인 문제들을 다루게 될 것인데, 주로 해석과 관련한 일련의 연구들을 간단히 소개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각 부에서는 이상에서 언급한 원리에 따라 역사와 문학과 신학에 대해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편저자: 김 태 정
참고도서
본 교재는 아래 소개된 책들을 참고하여 편집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보다 깊은 연구를 원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소개하였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주해서 및 성경공부
1. Richard N. Longenecker, Galatians. Word Biblical Commentary, Waco: Word Books Publishers, 1990.
2. Herman N. Ridderbos, Ierving Jensen, 「Galatia」. 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ment, Eerdmans: WM. B. Publishing Co., Grand Rapids, Michigan, 1935.
3. William Barclay, The Letters to the Galatians and Ephesians (revised ed.). The Saint Andrew Press: Edinburgh, Scotland, 1976.
4. J. Stott, 「자유에 이르는 오직 한 길」. 문인현∙김경신 역. 서울: 아가페 출판사, 1990.
5. Eugen Peterson,「자유」. 김명희 역, 서울: IVP, 2007.
6. M. R. DeHaan, 「율법이냐 은혜냐」. 이용화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71.
신약 개론
7. D. A. Carson, L. Morris, 「신약 개론」. 조진준 역, 서울: 은성, 1993.
8. R. P. Martin, 「신약의 초석 II」. 원광연 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3.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
학습목표
본인은 이 책을 처음 공부할 때 여러 주석서들의 도움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것은 태어나 처음으로 혼자서 해보는 <성경> 공부였으며, 지식이 더할수록 느껴지던 당시의 흥분과 감격을 잊지 못합니다.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갈라디아서>만이 지니고 있는 폭풍과도 같은 사도 ‘바울’의 열정을 공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기대를 가지고 이 책을 대합니까? 감히 권하건대, <갈라디아서>에 대한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이 공부를 통해서 기대하고 목표하는 바가 무엇인지 적어 나누어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각 장별 중요 구절을 암송한다든지, 강의가 진행되는 동안 적어도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삼겠다는 등의 기대가 그것입니다. 일련번호를 매겨서 본인이 기억하기 쉽도록 기록해 두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제 2과:동기와 배경(1:6-10)..........................................................................................53
B. 간증과 변론(서술; Narratio)(1:11-2:14)
제 3과:주제 선언(1:11-12)............................................................................................72
제 4과:회심과 소명(1:13-17)........................................................................................88
제 5과:첫 예루살렘 방문(1:18-24)............................................................................104
제 6과: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2:1-10)....................................................................119
제 7과:안디옥 에피소드(2:11-14)..............................................................................146
C. 명제 제시(명제; Proposotio)(2:15-21)
제 8과:서신의 명제(2:15-21)......................................................................................165
D. 주제의 검증(Probatio)(3:1-4:11)
제 9과:율법주의 반박(1)(3:1-5)................................................................................201
제 10과:율법주의 반박(2)(3:6-14)..............................................................................216
제 11과:율법주의 반박(3)(3:15-18)............................................................................237
제 12과:명목주의 반박(1)(3:19-25)............................................................................251
제 13과:명목주의 반박(2)(3:26-29)............................................................................273
제 14과:명목주의 반박(3)(4:1-7)................................................................................289
제 15과:교인들을 위한 염려(4:8-11).........................................................................308
제 3 부: 요 청(4:12-6:10)
A. 권면 1: 유대주의에 대하여(Exhortatio)(4:12-5:12)
제 16과:개인적 호소(4:12-20)....................................................................................323
제 17과:사라-하갈 알레고리(4:21-31).....................................................................338
제 18과:자유에 굳게 서라(5:1-12)...........................................................................357
B. 권면 2: 방임주의에 대하여(Exhortatio)(5:13-6:10)
제 19과:사랑과 섬김과 성령(5:13-18).....................................................................378
제 20과: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5:19-26)...........................................................393
제 21과:모두에게 선을(6:1-10)..................................................................................417
제 22과:추신(6:11-18)..................................................................................................438
서 론:
역사와 문학과 신학
서론
<갈라디아서>의 역사
<갈라디아서>의 역사라 함은 이 책의 역사적 배경과 관련한 제반 연구들을 일컫습니다. 서신의 시기, 발신자와 수신자,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 ‘갈라디아’인의 정체, 등등. 이곳에서는 이들 문제들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역사와 관련한 논의는 주로 ‘롱게넥커’(R. Longenecker)와 ‘마틴’(R. Martin)을 참고하였습니다: 참고도서 1 및 8.
1. 저자
저자. <갈라디아서> 연구에 있어 가장 논란이 없는 부분이 바로 서신의 저자에 관한 문제로서, 발신자는 다름 아닌 사도 ‘바울’이라는 점에 대해서 이론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서신은 벽두에서부터 발신자가 누구인지 밝히고 있습니다(1:1). 이 외에도 서신이 보여주고 있는 신학적 논점, 논점을 입증할 수 있는 성경적 지식, 문장의 스타일 등등은 바울 아닌 어느 누구를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만듭니다. ‘롱게넥커’(R. Longenecker)의 말처럼, 만일 <갈라디아서>가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면, <신약>의 어떤 서신도 그의 저작이 될 수 없을 것인데, <갈라디아서>에 필적할 만한 신학적 주장을 펼치고 있는 서신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필경사. 서신의 저작과 관련한 논의 중에서 종종 무시되는 질문이 바로 서신의 대필자에 관한 것입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 발견되는 방대한 분량의 문헌들이 대필자의 손으로 기록되었음이 밝혀진 바 있습니다. <성경>의 기자들도 아마 당시의 이러한 관행을 따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필경사들이 그들의 일에 대한 대가를 받았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는데, 액수는 필경의 수준에 따라 달랐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이 대필을 함에 있어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역시 경우마다 달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야말로 고객이 원하는바 그대로 글자 하나 바꾸지 않고 필경을 해주는가 하면, 한 단락이나 문장 내에서 나름대로 변화를 보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의 자필 서명과 관련해서는 <신약>에서는 어떤 자필 서명도 발견되지 않습니다만, 이점 역시 당시의 관행을 따랐을 것으로 보이며, 이를 위해서 필경사들을 활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 경우에 필경사들은 전문적인 필사자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친분이 가까운 비서들이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에서 사도는 친필로 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이는 편지마다 표시로서 이렇게 쓰노라”(살후 3:17). 그가 서신의 마지막에 이렇게 쓰는 이유는 서신의 출처나 진위 여부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한 시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필 서명에 관한 이런 언급은 당시의 관행을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그가 다른 서신에서도 이렇게 했음을 시사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의 친필 서명을 어떻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만, 아마도 서신의 다른 부분과 구분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고전 16:21; 골 4:18). 그런데 <로마서>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필경사가 있었다는 사실 외에는 수수께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의문들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롬 16:22). 그리고 <갈라디아서>의 다음과 같은 자필 추신 역시 다소 애매모호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추신의 특징에 대해서 무엇인가 알려주고 있습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갈 6:11).
사도 ‘바울’이 서신을 대필해주는 동료 필경사들에 대해서 과연 얼마만큼의 감독과 통제를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단언할 수가 없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필경사의 책임이나 융통성 여부는 경우에 따라 달랐을 것이므로, 사도의 생각을 종합적으로 알아서 정리했는지, 글자 하나 틀림이 없이 불러주는 대로 따라 적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나중에 본문 연구에서 보다 상세하게 서술할 것이지만, 이곳에서는 사도의 대필자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만으로 마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즉 서신의 저자가 ‘바울’이라는 사실과 함께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그의 동료 대필자들입니다. 이들은 아마 사도의 지시에 따라 서신의 대부분을 기록한 자들로서, 이들은 그의 개인 비서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이며, 사도가 인사말에서 형제들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1:2). 어쩌면 이들은 사도가 불러주는 것 이상의 감정이나 사상들을 서신 속에 집어넣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합니다. 다만 확실한 것이 있다면, (1) 서신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6;11) 서신의 본체와 추신은 분명히 다른 필체로 구분이 확실했으며, (2) <갈라디아서>의 열정적이고 격정적인 분위기를 통해서 보듯이, 이들 필경사들은 사도의 감정을 누그러뜨리거나 완화시키기 위해서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2. 수신자
수신자의 정체는 서신으로부터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1:2); (2)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3:1). 그러나 과연 이들은 누구입니까? 민족을 지칭하는 말입니까? 아니면 ‘갈라디아’로 불리는 로마의 영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총칭하는 이름입니까? 정확하게 그 넓은 ‘갈라디아’ 지역 어디에 이들이 살고 있었습니까? ‘바울’이 이들을 전도한 시기는 언제였습니까? 이후 이들은 ‘바울’과 어떤 접촉을 지니며 살았습니까? 이런 질문들이 수신자와 관련해서 제기되는 것들입니다.
‘갈라디아’라는 명칭은 오늘날의 ‘터어키’를 포함하는 소아시의 넓은 지역을 일컫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이 명칭은 엄밀하게 말해서 주전 4세기 ‘갈리아’Gaul)를 떠나서 주전 280 년경에 ‘앙키라’(Ancyra, 오늘날의 앙카라) 주변으로 와서 거기에 정착한 주민들을 가리킵니다. 주전 25 년 ‘갈라디아’의 마지막 왕 ‘아민타스’가 죽자 ‘아우구스투스’는 그 왕국을 제국의 한 지방으로 재정비하여 지방 총독의 관할 아래 두었고, 그 지역을 남쪽으로 확장시켰습니다. 3 세기 말 경에는 남쪽 지방은 따로 분리되었고, ‘갈라디아’ 지방은 북쪽 지방으로만 축소되었습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갈라디아’는 북쪽 지역으로만 이해되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바울’이 사용한 호칭이었을까? 사도는 제 1차 전도여행에서 남쪽 지방을 방문한 적은 있었지만(행 13-14), 공식적으로 북쪽 지방에는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습니다(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16:6과 18:23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도의 방문이 북쪽 지방 방문을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볼 때 본 서신에서 언급하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들은 사도가 제 1차 전도여행 시에 세운 것들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행 13-14). 즉 남쪽 ‘갈라디아’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그 반대의 견해 즉 북쪽 ‘갈라디아’를 지지하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두 견해의 대표적인 주장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북 갈라디아설. 이것이 전통적인 견해이며 18 세기 이전에는 모두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1) 당시의 용어를 볼 때, ‘갈라디아’는 ‘골’(Gaul) 사람들이 살던 북쪽 지방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미 살펴본 대로 ‘갈라디아’는 전체 지역을 의미하기도 했다.
(2) <사도행전>에 의하면, ‘안디옥’을 ‘비시디아’로 부르고 있는 반면(행 13:14), ‘더베’와 ‘루스드라’는 ‘루가오니아’에 있는 도시들이라고 부르고 있다(행 14:6). ‘누가’는 지리적인 위치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들 지역 이름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누가’가 ‘브리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이라고 했을 때(행 16:6)지리적인 위치에서의 ‘갈라디아’, 즉 북쪽 ‘갈라디아’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3) ‘브리기아’ 사람들을 칭하기 위하여 ‘갈라디아’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용어는 로마의 속박을 받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타당성이 없다. ‘바울’도 자신을 로마 시민이라고 했고, 더욱이 이미 언급된 모든 도시들을 포함시킬 수 있는 호칭은 ‘갈라디아’라는 용어 밖에는 없었다. 요즘 상황에 비유해 본다면, ‘웨일즈’ 사람이나, ‘스코틀랜드’ 사람이나, ‘잉글랜드’ 사람 모두를 영국 사람으로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즉 영국만이 모든 영국 사람들을 포함시킬 수 있는 유일한 호칭이듯이, 고대 ‘갈라디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4) 이와 유사한 반박으로 ‘바울’은 ‘루가오니아’ 사람들이나 ‘비시디아’ 사람들에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3:1)라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른 호칭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이 바른 호칭 선택인가? 이미 살펴본 대로 ‘갈라디아’ 지방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시켜서 부를 수 있는 호칭은 그것 뿐이다.
(5) ‘갈라디아’ 사람들의 미신적이고 변덕스러운 성격이 ‘골’ 사람들과 일치한다. 하지만 그러한 묘사가 ‘갈라디아’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고린도’ 교인들은 어떠한가?
(6) ‘브리기아-갈라디아’ 지방(행 16:6; 18:3)은 ‘브리기아’와 ‘갈라디아’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이 두 지역이 별개의 지역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대로 이 표현의 가장 적합한 뜻은, ‘브리기아-갈라디아’ 지방이며, 두 개의 별도 지역임을 가리킨다는 증거는 없다.
(7) ‘바울’은 나중에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갔었다고 하는데(갈 1:21), 이에 대해 ‘마르크센’(Marxen)이 평가하기를, “남쪽 ‘갈라디아’설에 의하면 그는 그 때 거기서 교회를 개척했을 텐데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는 ‘갈라디아’의 영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러한 가정은 이치에 맞지 않으며, 그 여행은 ‘바울’이 남쪽 ‘갈라디아’에서 교회를 개척했던 여행과는(행 9:30) 다른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8) <갈라디아서>에는 사도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 복음을 전할 때, 반대를 받았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사도가 방문한 도시마다 박해를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남 갈라디아 설. 19 세기 말 ‘램지’(W. M. Ramsay)가 이 주장을 처음 제기함으로써 서신의 수신자에 대한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상 처음으로 소아시아 지방을 몸소 답사하고 고고학적 참구와 비문 및 고전 문헌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독자의 정체에 대한 나름대로의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게 됩니다. 그는 이전부터 있어왔던 남 ‘갈라디아 설’의 주장에 더하여 자신 만의 새로운 증거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1) ‘바울’이 알고 방문했던 남쪽 지방의 도시들과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나, 북쪽에 대해서는 아무 정보도 없다(설령 행 16:6과 18:23의 기록이 북쪽 지역에서의 사역을 의미한다 하드라도, 사도가 그곳에 교회를 세웠다는 기록은 없다). 여기에는 사도의 다른 지역에서 행한 사역과 비교해 볼 때 엄청난 차이가 있다. 만일 사도가 북쪽 지역으로 갔다면 언젠가 거기에 갔다는 사실을 서신에서 분명하게 언급할 법도 한데, 그에 관한 아무런 언급도 없다.
(2) ‘바울’이 여행한 ‘갈라디아’와 ‘브리기아’ 지방이라는 희한한 표현(행 16:6)은 사도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을 떠난 갔던 곳(행 16:2), 즉 ‘브리기오 갈라디아’ 지방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 북쪽 지방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지역이 두 지역 즉 ‘갈라디아’와 ‘브리기아’라고 본다.
(3) 사도는 대체적으로 그 지역의 로마 총독의 이름을 사용하며, ‘갈라디아’인은 ‘루가오니아’와 인근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도가 항상 총독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이 논증의 반증으로 남아 있고, ‘갈라디아’인에는 북쪽에 있는 ‘골’ 사람들도 되었을 수도 있다.
(4) ‘갈라디아’인이란 단어는 ‘루스드라’, ‘이고니온’, ‘더베’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 단어가 북쪽에 있는 ‘골’ 민족을 제외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5) 사도는 ‘예루살렘’에 있는 신자들을 위해 구제 헌금을 한 사람들 중에 ‘갈라디아’ 교회들도 언급했다(고전 16:1). <사도행전>에는 헌금을 한 것처럼 보이는 ‘베뢰아’ 사람 한 명, 두 명의 ‘데살로니가’ 사람, 두 명의 ‘남 갈라디아’ 사람, 그리고 두 명의 아시아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다(행 20:4). 그러나 ‘누가’가 구체적으로 이들이 헌금을 한 사람들이라고 말한 적은 없고, 또한 ‘고린도’ 교회들에 관해서는 일체의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 열거는 미완성의 것일 수도 있다.
(6) 이 지역의 북쪽 지방은 상업이 성행했던 남쪽 지방만큼 개방된 곳이 아니었다. 사도가 “몸이 불편했기 때문에”(갈 4:13), 그와 같은 산악 지방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요양이 필요한 환자는 가기 쉬운 곳을 찾게 마련이다.
(7) ‘유대’인 대적자들이 이처럼 험난한 지역까지 ‘바울’을 쫓아갔다고 보기는 어렵고, 오히려 남쪽 도시로 쫓아갔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종교적으로 얼마나 광적이었던가!
(8)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 같이 나를 영접하였도다”(갈 4:14)라고 한 사도의 말은 그가 ‘루스드라’에서 ‘허메’로 환영받은 것에 대한 암시라는 주장이다(행 14:12). 그러나 이것은 나중에 ‘루스드라’인이 사도를 돌로 쳤다는 사실을 왜곡시킨 것이다. 그가 천사와 같이 영접을 받았다는 내용은 때로는 전혀 반대의 방향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사도가 병자로서 ‘갈라디아’에 왔다면, 그는 결코 천사처럼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9) 남쪽 설을 형성하는데 누구보다 큰 공헌을 했던 ‘램지’는 교회는 언어 소통이 가능한 지역을 따라 발전해 갔는데, 이것은 북쪽이 아니라 남쪽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0) ‘바나바’가 세 번 서신에서 언급되고 있는데(2:1, 9, 13), 이는 독자들이 그를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는 사도가 남쪽 ‘갈라디아’의 교회들을 개척했던 여행에서만 그와 동행했다. ‘바나바’는 ‘고린도’에 간 적이 없지만 <고린도전서>에서 그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고(고전9:6), 또한 ‘베드로’가 북쪽에 갔다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음을(갈 2:7-8)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처럼 수신자와 관련된 이상의 모든 논증들을 살펴볼 때, 어느 한 쪽을 결정적으로 지지할 만한 어떤 증거가 없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만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북쪽 갈라디아설” 보다는 “남쪽 갈라디아설”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3. 기록 시기
한 마디로 이 질문에 대한 확실한 대답은 없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입니다. 수신자들이 과연 누구였는가 하는 것도 이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만일 수신자들이 북 ‘갈라디아’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사도는 그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전에는 그들에게 서신을 보냈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이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습니다. 다만 같은 책 16:6과 16;23에서 슬쩍 지나치듯이 그의 방문 사실을 언급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남 ‘갈라디아’ 설을 받아들인다 해도 과연 사도가 이 교회들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한 때가 언제인가 하는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즉 그의 선교 방문이 끝난 직후였는가, 아니면 훗날 그가 ‘에베소’에서 사역하던 기간 동안이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본 서신에서 밝히고 있듯이(4:13), 사도는 서신을 쓸 때에 이미 ‘갈라디아’에 한두 번 간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4:13). 그가 밝히고 있는 “처음에”라는 시점이 그의 첫 선교 방문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또 다른 방문일 수도 있습니다. ‘라이트풋트’(Lightfoot)는 이 나중의 방문들이 <사도행전> 16장과 18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하며, 따라서 이 서신을 기록한 시기는 그런 방문 이후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처음에”라는 시기가 이차적인 의미가 있다 하더라고, 그것은 오로지 그의 제 1차 선교 여행 후기에 ‘갈라디아’ 교회들을 재차 방문한 사실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행 14:24 이후).
서신에서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 같이 속히” 잘못된 신앙으로 휩쓸려 간 것에 대해서 놀라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갈 1:6). 이는 교회가 세워진 시점을 가리키거나, 또는 <사도행전> 16:6에서 말하고 있는 방문의 때를 가리키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전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개연성이 높다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6:6의 기록은 그가 ‘갈라디아’ 지역을 통과하여 지나간 것을 말하는 것이고, 거기서 션교 활동을 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8:23도 이 상황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사도가 그곳의 교회들에서 행한 사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제자들을 강건하게 한 사실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예루살렘’ 방문을 한 시기에 대해서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서신의 기록 시기에 대해서도 비교적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그의 두 차례 방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처음은 그가 회심한지 3년 후의 일로서, ‘다메섹’에 머물렀습니다: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1:18). 두 번째는 14년의 공백 기간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2:1-10). 여기서 복잡한 문제는 ‘누가’가 ‘바울’의 모든 중요한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과 또한 ‘바울’ 자신도 ‘갈라디아’에서 그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고 가정할 때, <사도행전>에 나타난 여러 사건들 가운데 과연 어떤 것들이 이들 방문 이야기와 일치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가 ‘바울’의 모든 행적을 일일이 기록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적어도 ‘바울’ 자신은 그가 아는 바를 모두 언급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그런대로 타당해 보입니다. 사도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은 자신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과 만난 일에 대해서 “모두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변론함에 있어 하나라도 빼어 놓으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신의 신뢰성에 치명타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그의 대적자들의 입장을 강화시켜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쓰는 모든 사실이 진실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1:20). 물론 진실을 말하는 것과 모든 사실을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만.
<사도행전>은 다섯 차례에 걸쳐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중 두 차례의 방문은 시기가 너무 늦어 거론할 만한 가치가 없으나(행 18:22; 21:27이후), 나머지 세 번의 방문은 분명 서신의 저작 시기와 관련해서 의미가 있습니다: (1) 회심한 이후의 방문(행 9:26-30); (2) ‘예루살렘’ 기근 방문으로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로부터 파송 받은 방문(11:27-30). 이후 ‘안디옥’으로 돌아옴(행 12:25); (3) “예루살렘 공의회” 참석을 위한 방문(행 15:1-30).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의 기록을 가장 자연스럽게 조화시킬 수 있는 길은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두 번의 ‘예루살렘’ 방문(1:18-24; 2:1-10)을 각기 <사도행전>의 9:26-30 및 11:27-30의 기록과 연결시키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후자의 경우 두 기록이 사도의 ‘예루살렘’ 방문 목적을 달리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방문에는 두 가지 목적이 다 있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바울’과 ‘바나바’는 “기근 방문” 길에 또한 교회 지도자들과 만나서 이방인을 교회에 받아들이는 문제를 논의할 기회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의 만남은 어디까지 사적인 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 따르면, ‘바울’과 ‘베드로’ 사이에 이루어진 합의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서술이 있긴 하지만, ‘베드로’를 ‘게바'로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것이 사적인 만남 이상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 만남에 대해서 <사도행전>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을 입증할 만한 시사점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방인 신자들을 교회에 받아들이는 조건에 관한 논의는 제 1차 선교여행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성이 있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내에 쌍방 간의 합의점을 시사해 주는 언급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갈 2:9). 그리고 이런 합의를 기반으로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디아’의 이방인들에게 전도 사역을 행했을 것입니다(행 13-14장). 또한 “계시를 인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사도의 말은(2:9) 어쩌면 <사도행전>에서 기록하고 있는 ‘아가보’의 예언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며(행 11:28), 그의 권면에 따라 교회는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사건을 연결시키면,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의 사건들을 순서대로 정리할 수 있게 되며, 저자가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거나 중요한 내용을 빠뜨리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외에 <갈라디아서>와 <사도행전>의 기록을 다른 방식으로 조화시켜보려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즉 <갈라디아서> 2:1-10의 방문 기록을 “기근 방문”이 아닌, 이보다 더 뒤의 “예루살렘 공의회”(행 15)를 위한 방문과 조화시켜보려는 시도가 그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바울’은 중요한 “기근 방문”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셈입니다. 혹자는 이 방문이 사적이고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사도의 목적은 ‘예루살렘’ 지도자들과의 만남을 가급적 빼지 않고 일일이 기록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상황에서 이 만남을 고의로 빠뜨릴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갈라디아서> 2:1-10의 방문이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의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면, 그 유명한 ‘베드로’가 개입된 “안디옥 사건”(갈 2:11 이후)이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에 일어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공의회의 결정을 무시한 것이 되고, ‘바울’은 이런 그를 신랄하게 비난한 것이 됩니다(갈 2:11). 그러나 <사도행전>의 기록에 따르면(행 15), ‘베드로’와 ‘바울’은 서로 “교제의 악수”를 나누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서 서신의 시기와 관련한 사실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갈라디아서> 1:2와 3:1에서 언급하고 있는 교회들은 제 1차 ‘남 갈라디아’ 전도 여행 시 세운 것들이다.
(2) <갈라디아서> 4:13은 이 전도 여행을 가리키는 것이든지, 아니면 사도가 지중해 연안을 따라 여행하다가 다시 방문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행 14:21-23).
(3) 사도의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은(갈 1:18) 그의 회심 이후에 이루어진 방문이다(행 9:26). 그의 회심과 ‘예루살렘’ 방문 사이에 ‘아라비아’와 ‘다메섹’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회심 후 14년 만에(2:1는 이런 의미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성이 있음)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는데, 이는 “기근방문”이었다.
(4) 사도의 제 1차 전도여행 기간 동안 아시아 지역의 이방인들에 대한 사역이 큰 성공을 거두자 일단의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이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게 되고, 결국 문제가 발생하고 교회 내에서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사도는 신자들이 그렇게 속히 신학적 오류에 빠져드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1:6), 이 문제를 바로잡아주기 위해서 서신을 쓰게 되었다. 기록 시기는 대략 48-49년 사이에 ‘시리아’ ‘안디옥’에서, 공의회에 참석하러 가는 중에 썼을 것이다.
4. 반대자들
반대자들의 정체. <갈라디아서> 내에는 발신자와 수신자 외에 제 삼의 인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데, 다름 아닌 ‘바울’의 반대자들입니다. 이들은 지금 막 새롭게 탄생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으며, 그 교회를 세운 ‘바울’ 사도를 분노와 염려 속에 빠뜨리고 있으며, 그래서 사도로 하여금 서신을 쓰게 한 동기를 제공한 자들입니다. 과연 이들이 누구입니까? 그리고 이들이 주장하는 신학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이에 대한 대답을 당사자들로부터 직접 들을 수는 없고, 사도의 서신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이들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를 사도의 입을 통해서 확인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교부시대 이후 오늘날까지 기독교 전체 역사를 통해서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 아주 다양한 견해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반대자들의 정체와 주장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롱게넥커’(R. Longenecker)를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참고도서 1.
대표적인 견해들이 나름대로 정당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너무 많아 오히려 혼란을 주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 논의에 관해서 방대한 분량의 지식과 정보가 축적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문제에 대해서 대답을 얻기 원하는 자라면 그 출발점은 여전히 <성경> 본문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서신 내에서 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일련의 주장들을 반추함으로써 그나마 진실에 가까운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우선 가장 가까이서 이들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는 본문은 서신의 처음(1:6-9)과 마지막(6:11-18) 두 곳일 것입니다:
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1:6-9)
11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6:11-18)
우선 첫 번째 본문, 즉 서신의 동기와 목적에서 알 수 있는 바는, 이들 반대자들은 지금 복음의 진실을 호도하고 교인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마치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되는 양, ‘바울’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고 있는 듯이 행세하고 있었던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본문인 서신의 추신(追伸)를 통해서 받는 인상은, 이들 반대자는 교회 내의 이방인 교인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도록 부추기고 있으며, 사도는 이들의 저의가 자신들에게 닥칠 핍박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폭로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의 반대자들의 정체에 대해서 논할 때, 바로 이 두 본문이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본문이 되어야 함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 두 본문 외에도, 그 명료성에 있어서는 다소 떨어지긴 하지만, 다른 참고할 만한 본문들이 서신 내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컨대, 사도가 자신의 사도 직분에 대한 변론을 하고 있는 두 본문(1:1; 1:11-2:10)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는, 그의 반대자들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소위 기둥이라 부르는 ‘예루살렘’의 열두 사도의 권위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비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가 ‘모세’의 율법에 대해서도 두어 차례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2:15-3:18; 3:19-4:7), 그의 주장인 즉은 율법은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없으며, 그 목적은 일종의 몽학선생(가정교사)과 같이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도 인도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이런 주장이 시사해 주는 바는, 그의 반대자들이 사도와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는 율법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일련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반대자들과는 대립되는 논지를 펼치고 있는데, 예를 들면 (1)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든지(3:6-9), (2) 믿음과 율법의 관계(3:10-14), (3) 언약과 약속(3:15-18), (4) 율법의 목적(3:19-4:7), 그리고 (5)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땅에 있는 ‘예루살렘’보다 더 낫다는 설명(4:21-31) 등입니다. 이런 논지와 그의 반대 논리를 통해서 이들 반대자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추측할 수 있는 바는 이들이 ‘유대’적인 배경과 친 ‘예루살렘’ 경향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한편, 이들 반대자들은 복음(사도가 다른 복음이라 칭하고 있기는 하지만)을 가르쳤으며(1:6-9),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했다는 점에서(6:12) 기독교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사도의 반대자들은 “기독교 유대인”(또는 “유대인 기독교인”)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주로 ‘예루살렘’ 교회 출신으로서, ‘갈라디아’ 교회로 들어와,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되기 위한 조건과 기독교 신앙생활의 규범으로 ‘유대’적인 종교와 의식(할례나 절기 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신학적으로 근거가 있으며, 그들의 주된 관심사가 이방인들도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또한 자신들의 주장이 사도 ‘바울’의 메시지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보강하거나 보완하여 완전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首長) ‘야고보’ 사도의 목회적 관심사도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야고보’ 사도의 목회적 관심사라 함은 ‘팔레스타인’ 바깥 지역에 있는 기독 공동체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관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가 이들을 바라보는 입장은 전혀 다릅니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피하는 것이고, 이방인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하였다는 사실을 자랑거리고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6:12-13). 바로 이 두 구절이야말로 유대주의자들의 동기와 의도를 이해함에 있어 핵심이 되는 부분입니다. 이들은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지만, 혈연적으로는 유대인인 관계로 당시 배타적 민족주의의 거센 압력 앞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반대자들의 신학. 사도의 반대자들의 정체를 총칭해서 유대주의자로 부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동기와 의도에 대해서 파악했으니, 이제 남은 질문은 과연 그들이 과연 무엇을 가르쳤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서신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 수밖에 없습니다만, ‘롱게넥커’에 따르면 대략 두 가지 주장을 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1) 율법주의(律法主義, legalism); (2) 명목주의(名目主義, nomism) 명목론(명목주의)는 다른 용어로 신율주의(神律主義)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뒤에 나올 것입니다.
. 이중 전자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고 또 서신을 통해서도 비교적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만, 후자의 주장은 그렇게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율법주의란 말 그대로 행위를 통한 칭의를 말합니다. 행위란 율법에서 요구하는 제반 종교적∙제의적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으며, 그분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사도는 역사적, 성경적, 그리고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이들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합니다. 칭의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 근거도 신자의 믿음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라고 말합니다. 율법주의의 오류에 대해서는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도 익히 알고 있는 것으로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특기할 만 한 이견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소위 명목주의입니다. 명목주의는 다소 은밀하면서도 그럴 듯해서 쉽게 그 오류를 지적해 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명목주의의 관심사는 구원이나 칭의가 아니라, 완벽함이나 온전함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완벽함을 추구할 수 있을까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율법에서 요구하는 일련의 제의적이고 종교적인 행위들을 준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속에는 소위 할례나 절기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명목주의는 그 자체로 하등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신앙의 완벽을 추구해 가려고 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서, 윤리∙도덕 및 종교∙제의적인 규정들을 열심히 준수하고 행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
바로 거기에 맹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명목주의에 의하면, 이방인이 믿음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하드라도 율법에서 요구하는 이들 요구 사항들을 수행하지 않으면 ‘유대’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유의 복음이 오히려 차별과 구분을 조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남자와 여자; 자유인과 노예; 신실한 교인과 불성실한 교인; 등등. 결국 명목주의가 입증한 것이 있다면, 역설적이긴 하지만, 그 의도나 목적이 하나님과 그분을 즐겁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박해를 모면하고 자랑거리를 내세우려는 지극히 개인적이거나 배타적 민족주의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6:12-13).
그렇다면 이 명목주의에 대한 적절한 처방은 없는 것일까? 율법주의에 대한 처방이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라고 한다면, 명목주의의 오류에 대한 처방은 성령의 열매 내지는 성령의 행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5. 교회의 상황
당시 교회의 상황에 대해서는 위에서 지금까지 다룬 바 있는 서신의 목적이나 기타 반대자들에 관한 진술들을 통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만, 교인들이 당면한 직접적이고 일차적인 대적자 유대주의 외에도, 하나의 개연성으로 거론할 수 있는 대적자가 있습니다. 방임주의(放任主義)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물론 당시 교회에 유대주의자 외에 방임주의자로 불리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교회의 앞날에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하나의 풍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상의 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비단 ‘갈라디아’ 교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교회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방임주의는 그야말로 무제한적인 자유를 말하는 것으로서, 유대주의에 버금가는 해악과 폐해를 교회에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는 이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방임주의에 대한 처방 역시 성령의 열매 내지 성령의 행위에 따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문학
<성경>의 어느 책을 공부할 때나 마찬가지이지만, 형식과 내용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와 그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같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경우에도 우선 그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이 서신의 구조적이고 수사적인 특징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롱게넥커’(R. Longenecker)가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참고도서: 1). 이곳의 내용 또한 이 책에서 대부분 발췌한 것입니다.
1. 장르
현대 독자들에게 서한(書翰, epistle)과 편지(便紙, letter)를 구분한다는 것은 힘들고 별 의미도 없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둘을 굳이 구분하자면 전자(前者)는 보다 교훈적이고 의례적이며 문학적인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며, 후자(後者)는 그야말로 개인적이며, 사적인 서신으로서 비문학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서신>들은 이중 어느 쪽에 속할까? 이 질문에 대해서 신학자 ‘다이스만’(A. Deissmann)은 후자에 속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즉 그의 서신의 대부분은 소수의 특정 무리에게 보낸 아주 사적이며, 어떠한 문학적인 형식이나 구조도 없는 지극히 비문학적인 일반 편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듯이, <바울 서신>들은 소수의 특정 무리가 아니라 일단의 기독교인들을 향하고 있으며, 사적인 것이 아니라 회람용으로 읽을 수 있도록 했고, 일정한 형식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며, 당시 사용하던 다양한 수사적 기법, 설득의 기술, 초대 교회의 신앙 고백들, 유대적 <성경> 석의(釋義) 방식, 목회적 권면 등 실로 독특한 양식을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스 베츠’(Hans D. Betz)는 <갈라디아서>를 일종의 변증 서신의 장르에 속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의 주장은 이 서신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논쟁점들만 고려해 본다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습니다. 분명 이 서신 속에는 사도 자신의 자서전적인 술회(述懷)나 변증, 그리고 변론 등의 요소가 들어있기는 하나, 그것은 이 서신을 수사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았을 때이고, 수사적인 분석만으로 서신 전체에 대한 구조 파악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나중에 이 서신을 수사적인 관점에서 분석해 볼 것이지만, 이 외에도 구조적인 관점에서도 분석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구조 분석
<갈라디아서>를 일별해 보면 당시 ‘헬라’ 사회의 일반 서신에서 사용하고 있는 요소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 요소들은 대개 다음과 같습니다:
1. 머리말(발신자; 수신자; 인사말)
2. 감사와 축복
3. 본론(공식적인 인사; 일련의 연결구 또는 전환 구들; 종말론적 절정; 여행담)
4. 권면(명령문들)
5. 맺는 말(인사; 송영; 축도; 등)
그러나 그는 어느 특정 틀에 매이지 않고, 그 시대에 통용되던 다양한 서신의 형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감사 부분에서 당시 ‘헬라’ 서신의 틀을 따르면서 동시에 기독교 예배 의식을 반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에 따라 <갈라디아서>의 기본 구조를 보다 상세하게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1-5인사
1:6-4:11책망(자전적 간증과 신학적 논쟁)
4:12-6:10요청(개인적; 성경적; 윤리적 호소)
6:11-18추서
3. 수사와 구조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본 서신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이곳에서 사도가 채택하고 있는 주요 수사적 형식이나 양식에 입각해서 서신을 분석해 보는 것도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사도는 이곳에서 자신의 논점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당시 ‘헬라’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던 수사적 형식이나 설득 방식을 활용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고대 수사학자들이 발전시킨 기본 수사적 요소들 중에 어떤 것들이 있으며, 본 서신의 각 부분들이 이들 요소들 중 어떤 것에 속하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래 이태리체로 단어들이 수사적 요소에 해당됩니다:
(1) Exordium(머리말, 서문): 발신자의 특징과 핵심 논제들을 드러냄
(2) Narratio(해설, 해명): 핵심 논제들에 대한 사실 설명 또는 해설
(3) Propositio(명제, 주제): 일치와 불일치 및 검증이 필요한 핵심 논제들에 대한 요점 정리
(4) Probatio(확증, 검증): 중심 논제의 발전 및 확대
(5) Refutatio(반박, 반론): 반대자들의 논점에 대한 반박
(6) Peroration(결말, 결론): 결론 및 동정적 반응 유발
‘베츠’에 따르면, <갈라디아서>를 위 모델에 적용해 보았을 때, 이 서신은 일종의 변증 서신이 될 것이며, ‘갈라디아’ 교인들은 배심원, 그리고 사도 자신은 피고인의 신분, 그의 대적자들은 고발인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 모델을 서신의 내용과 연결시켜 볼 때, 다음 도표와 같은 수사적 구조 분석이 가능해 질 것이며, 본 교재도 이러한 구조 분석에 따라 설명과 해설을 진행해 갈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의 신학
이 짧은 서신이 기독교 역사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습니다. 교회사에서 이 서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가에 따라 아주 다양한 신학과 교리와 주장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런 현상은 오늘에도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본 서신의 핵심 사상이나 주제 등에 관해서는 <갈라디아서>의 역사에서 유대주의와 방임주의와 관련해서 간략하게 다룬 바 있습니다만, 초대교회 이후 교부시대와 종교개혁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알려지고 있는 다양한 신학과 주장들을 개괄해 보는 것이 본 서신을 이해하고 오늘의 삶에 적용함에 있어 아주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1. 마르시온(Marcion)
‘마르시온’이 편찬한 <신약 성경>은 <누가복음>과 열권의 <바울 서신>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방식에 따라 임의로 내용의 일부를 삭제하고 변조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서신>의 순서도 <갈라디아서>를 필두로 다음과 같이 배치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로마서>; <데살로니가 전서>; <데살로니가 후서>; <라오디게아서>(<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그가 <갈라디아서>를 이해하는 방식은, 이 서신은 유대주의와 모든 ‘유대’적인 것들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이 서신은 따라서 ‘유대’ 율법은 물론 <구약>에서 그리고 있는 창조주 하나님마저 폐기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바울’이 그리고 있는 하나님과는 다른 신입니다. 이 서신의 머리말(갈 1:6-9)에서도 ‘바울’은 자신의 복음과 유대주의의 복음을 별도 취급하고 있으며, 이른바 다른 복음을 전해준 하늘로부터 온 천사들은 바로 이 창조주 하나님이 보낸 사자라고 규정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또한 <하갈-사라 알레고리>(4:21-31)에 대해서도 ‘바울’이 전혀 다른 두 개의 계시를 제시하고 있으며, 당연히 전자(前者)가 ‘유대’ 종교를 대변하는 자로서, 이 자를 쫓아내야 한다고 ‘바울’이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세상이 나에 대하여 죽고 내가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6:14)는 ‘바울’의 말에 대해서도 ‘유대’인의 하나님과 ‘유대’인의 율법에 대해서 그러하다고 주장합니다. ‘마르시온’에게 있어 ‘예루살렘’의 사도들 또한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들은 유대주의에 지나치게 밀착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이들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서로 다른 복음을 가르쳤으며, 그 유명한 <안디옥 사건>(2:11-14), 즉 이방인과 식사를 하던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보낸 사자들이 왔을 때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 것을 두고 ‘바울’이 그를 비난하는 것도 이들이 서로 다른 복음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르시온주의”는 그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2. 터툴리안(Tertullian)
‘마르시온’의 주장을 처음으로 반박한 사람은 ‘카르타고’의 ‘터툴리안’입니다. ‘터툴리안’ 역시 ‘마르시온’과 마찬가지로 ‘유대주의’ 즉 ‘율법주의’를 반대하고 있지만, 창조주 하나님과 <구약>에 관한 그의 입장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는 ‘마르시온’이 <구약>을 배격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신약>의 하나님과 다른 신으로 부인한 것은 심각한 오류였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율법을 제정하신 분도, 그 율법을 폐기하신 분도, 그리고 복음을 세우신 분도 모두 동일하신 한 분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다만 그 각각을 통해서 행동하시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갈라디아서>와 관련해서 그가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기독교의 반율법주의도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분이 보내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과 다른 복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구원론에 있어서나, 기독론에 있어서나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율법과 관련해서 신앙의 초기에 다소 미성숙하고 의심쩍은 입장을 가졌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초기에는 이런 차이가 사도들 사이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나 ‘바울’이 이들 지도자들과 회합을 가진 후에 교제의 악수를 나눔으로써 화합과 일치를 보였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터툴리안’이 보이고 있는 시각은 정통적인 시각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즉 율법은 단지 초등 교사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어릴 적에 필요했던 것이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을 성취하심으로써, 그것을 폐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 때 그의 용어 사용에 대해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데, 그는 “하나님은 율법을 버리심과 동시에 확증하셨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소 이율배반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그가 의미하는 바는 제도와 의식으로서의 율법은 사라졌지만, 윤리∙도덕적인 측면에서의 율법은 완성되고 세워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3. 영지주의자들(Gnostics)
초대교회 영지주의자들 역시 사도 ‘바울’을 영지주의(靈知主義)의 선구자 정도로 여기고 최고의 존경을 보냈습니다. 영지주의는 철저한 이원론적 세계관을 근간으로 삼고 있는데, 2-3 세기 무렵에 아주 다양한 형태와 운동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스스로를 ‘바울’의 계승자로 자처하는 ‘발렌티안’ 무리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무리는 <로마서>, <고린도 전서>, <고린도 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그리고 <히브리서> 등을 <바울 서신>으로 받아들였습니다만, <디모데 전서>나 <디모데 후서> 및 <디도서> 등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들 책 중에 이단 특히 영지주의와 흡사한 가르침을 비난하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이들이 <갈라디아서>를 특별히 다른 책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몇 가지 이유로 이 책을 각별하게 생각했던 것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예컨대, 서신의 1-2장 사이에서 ‘바울’이 자신의 사도 직분이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사람들로부터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는 주장하는 부분이(1:1, 11-12; 2:2) 영지주의자 자신들의 주장과 너무 흡사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증거본문으로 <갈라디아서> 본문을 인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갈라디아서> 3-4장에서 사도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영지주의자들은 이런 구분을 “부르심을 받은 자”(즉 psychics로 불리는 자들)와 “택함을 받은 자”(즉 pneumatics로 불리는 자들)에 대한 비유로 이해하였습니다. 이런 구분은 아마 영적 지식이나 수준의 차이에서 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영지주의자들도 ‘마르시온’처럼 <구약>의 ‘유대’인의 하나님을 <신약>의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비해 악하고, 열등한 존재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에 따르면 <구약>의 하나님은 psychics이며, <신약>의 하나님은 pneumatics가 됩니다. 당연히 ‘예루살렘’ 사도들과 그들이 가르치는 것은 열등하고 악하며, ‘바울’과 그가 전하는 것이 우월하고 더 영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다만 ‘마르시온’의 주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마르시온’이 <구약>과 모든 ‘유대’적인 것들을 배격했지만, 영지주의는 이러한 것들을 인정은 하되 상대적으로 덜 영적인 것으로 간주했다는 점입니다. <하갈-사라 이야기>를 예를 들자면, 두 아들 중 첫 아들은 psychics이며 노예와 다름없는 처지이고, 둘째 아들은 pneumatics로서 자유자이며, 약속의 아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해석에 있어서도, 영지주의자들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와 성령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는 ‘바울’의 가르침을 아전인수(我田引水) 식으로 자신들의 입지나 지위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려 했습니다. 즉 자신들이야말로 더 영적인 기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아전인수는 <갈라디아서> 6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이 교인들을 향하여 신령한 너희로 부르는 것을 놓고, 이는 자신들을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며, <갈라디아서>는 영지주의 신학을 확증시켜주는 서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기독교 교회 내에서 영지주의의 오류를 지적한 신학자들은 ‘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오리겐’ 등과 같은 교부들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 교부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이방인에게 선포된 기독교 복음은 본질적으로 <구약>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구속 계획 속에 이전부터 이미 포함되어 있던 것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도 ‘예루살렘’ 사도들의 권위에 순복했으며, 그가 전한 복음 또한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영지주의의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4. 알렉산드리아 교부들
2-3 세기 무렵의 대표적인 두 명의 ‘알렉산드리아’ 교부는 ‘클레멘트’와 ‘오리겐’을 들 수 있습니다만, 이들이 <갈라디아서>에 관해서 썼다는 ‘헬라어’ 주석서는 한 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문헌에서 이들의 글을 광범위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부분적으로나마 이 두 교부의 사상을 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선 ‘클레멘트’의 경우 <갈라디아서>에 대한 그의 이해는 ‘바울’이 서신에서 쓰고 있는바 그대로입니다. 그의 생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며, 율법의 목적은 다분히 교육과 훈련을 위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하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성한 자이며, 칭의는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 앞에서 신자의 책임은 아버지의 뜻을 믿고 온전히 따르는 것이다.
‘오리겐’은 <성경>에 대한 영적인 해석 즉 ‘알레고리’ 해석으로 잘 알려진 사람입니다. 따라서 <갈라디아서>에 대한 그의 입장은 그가 쓴 다른 여러 주석서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대개 소위 영적 해석의 근저에는 극단적인 이원론(二元論)이 자리하고 있기 마련입니다. 영혼은 하나님의 사역이지만 육체의 본성은 그렇지 않다고 그는 말합니다. 따라서 그는 <갈라디아서>(5:17)에서 언급하고 있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에 대한 구분을 자신의 이원론에 대한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그의 <갈라디아 주석서>를 발견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갈라디아서>는 그가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세우는데 이론적인 기초가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바울’이 행하고 있는 <하갈-사라 알레고리>(4:21-31)는 그 자신의 <성경>에 대한 영적인 해석 즉 알레고리화를 정당화하는데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을 것입니다.
기독교인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그의 입장은 ‘터툴리안’이나 ‘이레니우스’ 등과 같은 정통적인 교부들의 사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즉 율법을 (1) 의식법과 (2) 윤리∙도덕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자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폐기되었으나, 후자는 보존되고 오히려 확대되었다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서, 복음을 율법의 성취로 이해하고는 있으나, 그의 주된 관심사는 율법의 영적이고 감춰진 측면을 밝혀내는데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롬 6:14)는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 하나님의 계시의 발전적인 측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율법의 문자적 의미와 내면적 의미(즉 율법의 정신)의 차이를 발견하는데 강조를 두고 있습니다. 그의 이런 태도가 <갈라디아서>를 해석함에 있어 일관된 입장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5. 안디옥 교부들
‘시리아’의 ‘안디옥’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일단의 학자들을 가리켜 이렇게 부릅니다. 이들의 해석적 입장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영적이고 알레고리적인 해석과는 대척점에서 <성경>에 대한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들 중 대표적인 교부는 유명한 ‘요한 크리소스톰’(주후 345-407)을 들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대한 ‘안디옥’ 교부들의 입장은, 적어도 <구약>과 율법의 지위에 관한 한 ‘알렉산드리아’ 교부나 ‘터툴리안’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르시온’의 “구약 폐기론”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다만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설명함에 있어 다소 정적인 것으로 이해했다면, ‘안디옥’ 학파는 보다 동적인 것으로 이해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안디옥’ 학파에게 있어 <신약>은 단순히 <구약>과 나란히 서있는 두 언약이 아니라, <구약>의 계시가 보다 발전되고 확장된 언약입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율법과 복음, 기독교인과 율법 등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따라서 ‘안디옥’ 학파는 율법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그 이면의 의미가 있다든지, 율법을 의식법과 윤리∙도덕법으로 이분화 하는 등의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입장을 철저히 배격하였습니다.
6. 라틴과 희랍 주석가들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 ‘라틴’과 희랍어 주석서가 많이 쏟아져 나왔습니다만, 이중 네 명의 작가들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1) ‘암브로스’; (2) ‘제롬’; (3) ‘어거스틴’; (4) ‘펠라기우스’.
‘제롬’은 그의 주석서에서 이전의 많은 주석들을 참고하고 있습니다만, 이중 특별히 ‘오리겐’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해석적 경향도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그것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라틴’ 주석서로는 ‘암브로스’의 저작이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고 하나, 이 역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해석을 많이 따르고 있다고 합니다. ‘어거스틴’은 그 깊이에 있어서나 영적인 통찰력에 있어서 독창적이고 타인의 작품을 거의 인용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탁월한 주석서로 꼽을 만하지만, 여전히 비평적 주석서로 보기에는 결함을 많이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펠라기우스’는 그 자신 이단 논쟁에 휘말린 당사자로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가치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7. 종교개혁자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세 사람의 주석가로 ‘에라스무스’, ‘루터’, 그리고 ‘칼빈’을 들 수 있습니다. ‘에라스무스’의 <갈라디아서 주석>은 <로마서 주석>과 함께 당시 유럽 전역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습니다만, 율법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알렉산드리라’ 학파의 해석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즉 율법은 의식법과 도덕법으로 나눌 수 있는바, 전자는 이미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폐기처분 되었으며, 후자는 역시 그의 사역으로 재확립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의식법으로서의 율법이 폐기처분되었다는 그의 주장은 당시 의식적 종교로서의 ‘로마카톨릭’ 교회에 대한 그의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가리켜 “내가 약혼한 나의 서신이며, 나의 아내”라고 할 정도로 이 서신에 대한 애착이 지대했습니다. 그의 초기 주석서는 ‘제롬’이나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만, 이후 수차례 증보와 개정을 거치는 동안 전통적인 ‘라틴’식 해석으로부터 결별하고, ‘안디옥’ 학파의 해석적 입장을 따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하던 그가 싸운 신학의 전선(戰線)은 두 곳으로서, 하나는 중세 ‘카톨릭’ 신학을 대표하는 ‘스콜라’ 신학이며, 또 하나는 당시의 급진적 개혁주의였습니다. 전자를 바라보는 그의 입장은 이들이 율법과 복음의 문제에 있어 현대판 유대주의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자는 현대판 이원론자들이며 우화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율법은 항상 문자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육체와 영혼도 구분되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칼빈’ 역시 <갈라디아서>에 대한 그의 이해에 있어 ‘루터’나 다른 전통적인 주석가들의 해석적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으며, 오늘날까지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의 입장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져 있는 터라 새삼 거론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8. 회고와 전망
위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바처럼, <로마서>에 비해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이 짧은 서신은 그 길이에 상관없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혹자는 <갈라디아서>를 일러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영적 다이나마이트와 같다. 그러므로 폭발이 없이 그 책을 다룬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마틴 루터’는 “<갈라디아서>는 나의 서신이며, 나는 이 책과 약혼했다. 이 책은 나의 아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책을 가리켜 “분노의 서신”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책을 읽을 때 독자들이 어떤 심정과 자세로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일종의 사전 경고문과도 같이 들립니다. 따라서 누구든 이 책을 읽으려 할 때 최소한 다음의 질문 정도는 마음속에 품고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왜 사도는 이처럼 분노하고 있는가?”
일반인들이나 종교인들의 대부분의 생각은 신적 구원은 인간의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한 이해도 다양하고, 구원에 필요한 수단이나 방법 또한 다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닙니다. 기독교는 종종 성례 제도를 잘 준행하고, 특정한 기준을 정해서 그 기준에 맞추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등, 일련의 종교∙의식적 행위와 윤리∙도덕적 행위의 틀 안에서 이해하려 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책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설 수 있는 자격, 즉 “칭의”는 이런 잡다한 윤리∙도덕적 행위나 종교∙의식적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의 행위 즉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얻어진다고 이 책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는 기독교인이 얼마나 될까요? 제대로 된 교회라면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 것이라”는 정통 신조를 거의 매주 예배 시간이나 성경공부 시간에 수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이 머리로 하는 것이라면, 신앙은 머리로서가 아니라 가슴이나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성적인 동물이라 머리가 시키는 대로 행하기보다는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기가 훨씬 더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갈라디아서>의 ‘베드로’와 ‘바나바’의 경우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로 꼽히는 이들 사도들조차도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다말고, 슬그머니 피해버렸습니다(2:11-14). 이런 그들을 두고 우리의 사도는 심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그들의 신학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 즉 관습을 책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학을 신앙으로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성경>인가 관습인가?; 지식인가 전통인가? 신학인가 관행인가?”
연습과 토의
1. <갈라디아서>의 역사라 함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용어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질문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2. <갈라디아서>의 문체나 구성이나 구조 등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3. ‘알레고리’적 해석, 또는 우화적(풍유적> 해석이라 함은 어떤 것입니까? 이 책에서 한 예를 찾을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풍유적 해석이 허용되는 범위는 어디까지 입니까?
4. <갈라디아서>에서 “칭의”(Justification, 稱義)의 근간으로 제시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믿음”(흔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번역되기도 함)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5. <갈라디아서>를 “전투의 서신” 또는 “분노의 서신”으로 부르는 이유를 알겠습니까? 서신의 분위기를 통해서 내가 받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6. 율법주의와 명목주의에 대해서 설명해 봅시다.
제 1부: 인사
제 1부
인 사
1
인 사
(1:1-5)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1:1)
공문서가 아니라 편지를 쓰는 목적은 대개 인사를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서신의 벽두부터 의례적인 문안 인사를 생략한 채 마치 항의 편지를 쓰듯 거칠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사도 직분이 초자연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수신자들을 처음부터 압도하려는 듯한 의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중간에 간략하게 수신자들을 향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을 전하기는 합니다만, 서신의 인사말은 전체적으로 지극히 공식적이며, 딱딱하고, 살벌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그의 다른 서신과 비교해 보는 것도 본 서신의 동기나 목적에 대해서 시사해 주는 바가 클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사말은 사도의 기분만 전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짧은 다섯 절의 본문 속에는 서신 전체의 신학을 대변할 수 있는 주제나 내용들이 총망라되어 있습니다. 이 인사말이 제공해 줄 수 있는 일련의 주제나 정보가 무엇인지 찾아내 보는 것도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신약>의 세계에서 주고받던 편지의 서두(序頭)는 항상 일정한 패턴을 따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A가 B에게 (또는 A로부터 B에게)... 문안을.” ‘바울’ 사도 역시 당시의 관례에 따라, 그의 서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우선 그의 이름을 밝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1절), 수신자들이 누구인지(2절), 그리고 그들에게 인사와 문안을 전하고 있습니다(3절). 이러한 전통적인 형식에 더하여, 그는 자신과 함께 서신을 보내고 있는 동료들을 밝히고 있으며(2절),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고백(아마 신조의 형식으로 되었을)으로 보이는 구절을 의례적인 인사에 추가하고 있으며(4절), 마지막 송영(doxology)으로써(5절) 서신의 문안 인사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서신의 형식에 보다 중요한 두 가지 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 자신의 사도직(apostleship)에 대한 확신에 찬 선언이며(1절), 다른 하나는 신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과(4절) 하나님 아버지의 활동과 뜻에 관한 선언입니다(4절). 이 두 가지 결정적인 변화를 통해서 그는 서신의 주제를 벽두부터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 특유의 방법론이 두 가지 측면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을 봅니다:
(1) 단도직입적인 단어의 구사: “사도”; “아버지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2) 교차대구적 형식: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not from men)
사람들로부터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nor through any man)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but through Jesus Christ)
하나님 아버지로부터(and from God the Father)
신학과 신앙
1. 발신자
서신의 발신자가 누구인지 밝혀주고 있는 제 1 절은 발신자 자신의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정체성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1절)
바울(Παύολ). 바울은 그리스 어로 “작다”(little)는 뜻입니다. 유대인으로서 그의 이름은 사울로서, 그와 같은 베냐민 지파에 속했던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의 이름에서 취한 것입니다. 이로 미루어 그가 자신의 출생과 신분에 대해서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빌 3:5). 또한 그는 로마 시민으로서(행 16:37-38; 25:10-12), 당시의 관례를 따랐다면 세 가지 이름을 취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1) 가족 또는 지파의 이름; (2) 그리고 그 앞에 첫 이름(예: Gaius Julius Caesar의 Gaius); (3) 마지막에 오는 성(性).
그리스나 또는 다른 지역 출신 사람으로서 로마 시민이 된 경우라면, 원래의 성(性)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추가로 로마식을 따라 나머지 두 이름을 더하게 됩니다(로마 이름은 대개 자신이 신세를 진 사람들의 이름을 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경우에는 <신약> 어디에도 이런 로마식 이름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 이름 바울은 동시에 로마식 성(性)도 될 수 있기에, 이방인(주로 헬라인)을 향한 유대 그리스도인으로서, 양쪽 세계에서 보다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이름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ajpovstolo", apostle). 이 호칭은 그의 서신 모두에서 바울이 자신의 선교적 정체성과 관련해서 자신의 이름처럼 사용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위를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도란 일반적으로 “보냄을 받은 자”를 의미하는데, <신약>에서는 특별히 보냄을 받은 자의 권위 내지는 대표성을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래 각 경우 사도 즉 보냄을 받은 자가 사용되고 있는 다양한 용례를 살펴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대상과 범위를 살펴봅시다:
보냄을 받은 자(사도)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요 13:16하)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료요 너희를 위한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자(사도)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후 8:23)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너희 사자(사도)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빌 2:25)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그러나 보다 좁은 의미로는 잘 알려져 있는 열 두 사도를 포함해서(마 10:2; 막 3:14; 눅 6:13; 9:10; 17:5; 22:14; 행 1:2, 26), 어떤 특별한 사역을 담당했던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기도 합니다(눅 11:49; 행 14:4, 14; 롬 16:7; 갈 1:19; 엡 3:5; 계 18:20). 대개 이들은 예수님 생전에 그분께서 직접 선택한 자들로서, 그분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의 사역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목격한 자들입니다(행 1:22). <신약>에서 이런 좁은 의미에서 사도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는 대략 76회에 이릅니다. 바울이 자신의 모든 서신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례는 바로 좁은 의미의 사도를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그 권위를 위임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당시 그레코-로마 세계에서는 사도에 대한 이해가 사뭇 달랐다고 합니다. 주전 5 세기에서 주후 2 세기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그리스 또는 유대-그리스 문헌에서 사도를 사람을 지칭하는 대사(代使)나 대리자 등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고, 오히려 군사적 목적의 탐사나 탐험 등을 의미하는 비인격적 단어로 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Longenecker는 그의 주석서에서 이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를 덧붙이고 있습니다(2-4쪽).
출처와 권위. 결국 사도 직분의 출처와 권위는 바로 하나님 자신으로서, 바울은 서신의 벽두에서부터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고 언급한바있습니다. 그것도 한 번은 부정문으로, 그리고 또 한 번은 긍정문으로 반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원문의 교차대구적 형식을 살려 다시 옮겨보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사도 된)(1절)
바로 이 부분이 <갈라디아서>의 문안 인사와 관련해서 가장 특징적인 표현입니다. 물론 다른 서신에서 바울은 거의 습관적으로 자신을 사도라고 밝히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처럼 수고스럽게 시적 대조 반복을 통해서 자신의 사도 직분을 강조하고 있는 곳은 본 서신이 유일합니다. 예: 롬 1:1; 고전 1:1; 고후 1:1; 등등. 다만 <빌립보서>가 예외적으로 사도를 언급하는 대신 “(예수의) 종”으로 자신을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자신을 “종”으로 부르고 있기는 합니다(롬 1:1).
왜 그가 이렇게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서론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만, 우리는 이 문장을 통해서 소극적인 자기방어와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변론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분명하게 밝혀두고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이겠지요.
그가 지칭하고 있는 “사람들”과 “사람”은 의미 없는 단순 반복이 아니라, 각기 복수(複數)형과 단수(單數)형으로서 다른 대상을 지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전자(前者)는 분명 일반 사람들로서, 구체적으로는 바울의 반대자들이 주장하는바, 열 두 사도를 포함한 당시 예루살렘 교회 내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즉 그의 사도직분은 이들로부터 위임받았거나 또는 중재자의 중재를 통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신약>은 아나니아나 바나바 등과 같은 특정인의 중재를 통해서 바울이 사도직분과 관련한 사역이나 역할을 위임받은 이야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 행 9:10-19, 27; 11:25-26; 22:12-16).
그리고 후자(後者)는 다소 애매하기는 하지만, 단수형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아, 일종의 기관 내지는 단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회당(會堂)이나 공회(公會) 또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교회가 보낸 사자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고후 8:23; 빌 2:25.
특히 바울이 1:17-2:24에서 소개하고 있는 한 사건을 통해서 볼 때,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과 “사람”은 예루살렘 교회와 그 교회의 지도자(사도)들로서, 그는 자신의 사도직분이 그의 반대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이들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처음부터 못박아두고 싶은 것입니다.
바울이 소극적인 자기 방어에서 한 걸음 나아가, 보다 적극적이고도 공격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출처와 권위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한글 성경을 비롯한 여러 번역본에서 이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정확하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서”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어떻게 번역하든 그가 받은 사도직분은 제 삼자나 제 삼의 기관의 중재나 중보를 통해서가 아니라,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도 직접적인 계시를 통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다만 이 표현과 관련해서 한 가지 특기할 만 한 점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의 표현에서 두 위격의 순서가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바뀌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롬 1:7; 고전 1:3; 고후 1:2; 엡 1:2; 빌 1:2; 살전 1:1; 살후 1:1; 1:12; 딤전 1:2; 딤후 1:2; 디 1:4; 몬 3. 물론 이 역전이 곧바로 이어지는 3절에서 다시 바뀌고 있기는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는 이곳에서도 일종의 교차대구적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Longenecker).
또 한 가지 이 표현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울’의 계시의 핵심에는 늘 그리스도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중심” 계시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두 위격(位格)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학적 관계를 밝히는데 정력을 쏟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일과 관련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가 서신의 다른 곳에서도 계속 강조하고 있듯이(갈 3:19-20),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와는 달리 결코 중보자나 중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사람이 세운 어떤 기관이나 조직과도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도 이 점에서 있어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주장과 관련해서 존 스토트(J. Sttot) 목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교회가 <성경>을 썼다고 합니다. <성경> 저자 역시 교회의 한 일원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경> 위에 있으며 <성경>을 해석할 권리를 가지 뿐 아니라 보충할 권리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무리가 있는 것이 사도는 교회의 사도이거나 교회가 임명한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도입니다. 본 서신에서도 바울은 “교회의 사도 된 바울은 교회의 위임을 받아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쓴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로 시작하는 두 번째 표현이 이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분은 늘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바울을 사도로 임명하는 일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은 하나님의 대리인 정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며, 이런 점에서 그의 사도직의 권위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역할에 관한 사상은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고후 5:19; 딤전 2:5-6). 아마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그리스도’란 다름 아닌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나셔서 그로 하여금 이방인을 위한 그분의 그릇이 되라고 명하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분명할 것입니다(행 9:15-16; 22:21; 26:16-18).
그리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는 하나님입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한 두 번째 언급입니다. 앞에서 바울의 사도직의 궁극적인 출처로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정통 유대인으로서 바울의 관심사는 두 위격(位格)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데 있지는 않은 듯합니다. 그에게 있어 유일 신 하나님의 존재나 속성은 마치 공기와 같아서 너무나 당연하고 자명한 지식이라,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하나님을 언급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일과 관련해서 그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이 아니라, 그분께서 행하신 구속의 사역과 관련해서 언급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서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함께 있는 모든 형제(2절상). 안부를 묻고 있는 자는 바울만이 아닙니다. 그는 왜 이들 형제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울은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서신과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습니다: 소스데네(고전 1:1); 디모데(고후 1:1; 빌 1:1; 골 1:1; 몬 1); 실라와 디모데(살전 1:1; 살후 1:1). 아마도 이들은 바울의 동역자 내지 개인 비서들이었을 것이며, 서신의 수신자들에게 알려진 경우에는 이름을 직접 거명하기도 했을 것입니다(롬 16:22). 바울은 <빌립보서>에서도 동일한 표현으로 이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빌 4:21), 그는 이들이 단순한 필기사가 아니라, 그와 함께 상대방에게 인사와 문안을 전하면서 동시에 서신에 기록된 내용이 옳고 정당한 것임을 지지하고 확증해 주는 동료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도 비록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함께 있는 형제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여 집니다. 그는 함께 있는 형제들이 소수 몇몇이 아니라, “모든 형제”라고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더욱 견고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누구인가에 관해서는 서신의 기록 시기나 수신자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시리아의 안디옥 교회 지도자들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추측은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로마 남부의 갈라디아 지역에 대한 일차 선교 여행을 다녀 온 직후,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기 전에, 그 지역 교회에 편지를 쓴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행에 동행했던 중요한 인물 바나바는 왜 빠져 있을까? 안디옥에서 그가 보인 지극히 실망스러운 행동(2:11-13)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Longenecker). 이름이 빠져 있기는 그의 개인 비서는 물론 안디옥 교회의 다른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이들 모두 수신자들에게는 생소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정 반대로 이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이미 잘 알려진 선교사들이라 새삼스럽게 거명할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런 설명은 서신의 기록이 보다 늦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가정을 전제로 했을 때 가능하기는 합니다.
2. 수신자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2절하). 발신자에 대한 긴 부연 설명과는 정 반대로 수신자에 대한 언급은 지나칠 정도로 간단명료합니다. 대개 그는 그의 수신자들을 향해서 다소 길면서 수사적인 감사나 칭찬의 말을 전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전혀 그런 감사나 의례적인 칭찬의 말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형식적인 차이가 <갈라디아서>의 배경에 어떤 암시를 주고 있습니까?
그가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이나, 그가 느끼고 있는 분노나 실망 등을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단호하고도 결연한 태도로 서신 전체의 분위기를 잡아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신자와 관련해서 또 한 가지 다른 점은 흔히 그의 다른 서신에서 볼 수 있는 한 지역 교회가 아니라(예: 살전 1:1; 살후 1:1; 고전 1:2; 고후 1:1), 여러 교회들을 망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점 때문에 당시 갈라디아 지역 내에 몇 개의 교회가 있었는지, 구성원들의 인종 분포가 어떠했는지, 각 교회들이 지역적으로 서로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지 등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들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부분적이긴 하지만, 서신의 기록 시기나 장소 등에 대한 전제(前提)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일 수신자를 남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들로 본다면(본 교재에서 채택하고 있는 전제), 이들 교회는 <사도행전> 13:14-14:25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처럼 교회 구성원들은 다양한 인종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교회 상호간에는 기능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확한 수신자가 누구였든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갈라디아서>는 그 지역 내에 흩어져 있던, 이방인들로 구성된 여러 교회에게 보내는 일종의 회람용 서신이라는 점입니다.
3. 은혜와 평강
3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3-4절)
은혜와 평강. 유대인이면서 동시에 로마 시민이었던 바울에게 있어 이처럼 히브리 식과 그리스식 인사가 결합한 안부 인사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은혜(Χάρι, 카리스)는 당시 그리스 문화권에서 오늘날 “안녕” 내지는 “신의 가호가 있기를” 정도의 상투적인 인사로 생각할 수 있고, 평강(ειρήνη, 에이레네)에 해당하는 히브리 어는 샬롬(מולשׁ)으로서 유대인들의 상투적인 인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 이 두 단어는 보다 심오한 신학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곧바로 등장하고 있는 이런 표현 때문입니다. 예컨대, <로마서> 5장에서 평강은 단순한 마음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은혜의 결과로 사람들이 누리게 된 하나님과의 화평(peace with God), 즉 적대적인 관계가 제거된 상태를 말합니다(롬 5:12-21). 따라서 평강은 은혜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게 된 자는 당연히 하나님의 평화(peace of God)를 마음으로부터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만(빌 4:7), 그것은 부수적인 은혜의 결과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동시에 또는 각기 따로 바울 서신은 물론 다른 서신에서 축복의 인사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바울에게 있어 이 두 단어는 복음의 본질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단어는 그 기원을 초자연적인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 서신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적어도 인간의 구원과 관련해서는 완전히 한 인격체처럼 제시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갈라디아서>만 하더라도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2:21)와 그리스도의 은혜(1:6)는 사실상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은혜의 결과로 얻어지는 평강 역시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평강(빌 4:7)과 그리스도의 평강(골 3:15)은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바울에게 있어 인간을 위한 구원의 사역에 관한 한, 하나님과 부활하신 주님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나 구별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언급할 때마다 그분이 하신 한 일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역을 언급하지 않고는 그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분이 하신 일이란 다름 아닌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적 죽음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에 대해서 이미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그분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아마 <이사야서>의 종의 노래(사 53:5-6, 12)를 염두에 둔 듯하며, 스스로를 하나님의 거룩한 종으로 여기신 듯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는 표현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Longenecker), 이와 유사한 신앙고백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었다”는 표현도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고전 15:3). 이외에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해서 다소 표현들을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롬 5:6-8; 14:15; 고전 1:13; 11:24; 골 1:21-22).
(우리를) 건지시려고. 이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목적에 대한 진술입니다. 건지다(ἐξαιρέω, 엑사이레오)로 번역하고 있는 이 동사는 신약에서 8회 정도 등장하고 있고, 제거하다(뽑아내다)(마 5:29; 18:19), 구출하다(행 7:10, 34; 12:11; 23:27), 선택하다(행 26:17) 등의 다양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만, 바울이 이곳에서 전달하고 있는 의미는 두 번째 것으로서 그것도 보다 영적인 구원에 대한 강조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바울이 의도하고 있는 구원이 보다 영적인데 있다는 점은 그 구원이 이 악한 세대로부터라는 점에서 보다 명확해 집니다. 인류의 역사를 악한 현 세대와 선한 다음 세대로 구분하는 방식은 전형적인 유대주의의 소산입니다. 그들은 지고자(至高者)가 역사를 한 세대가 아닌 두 세대로 만들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4 에스라 7:50). 물론 사두개 인들은 부활이나 영생 등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들의 시대를 지선(至善)의 시대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예컨대, 마카비 반란과 뒤 이은 하스모니아 왕조의 통치를 위대한 시대의 시작으로 보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바리새 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시대가 무시무시한 종말의 고통으로 절정에 이른 후 다음 세대가 열린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이 악한 세대라고 말할 때 정확하게 문자적으로 유대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당시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그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대상은 세상의 초등 학문이라고까지 폄하하고 있는 유대 율법 주의자들이라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이 세상에 대한 그의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도 그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롬 12:2).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우리가 유대주의에 동의하든 않든, 세상에 대해서 늘 민감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구절이 지칭하고 있는 바가 그리스도가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든, 또는 우리를 건지시려는 것이든, 아니면 둘 다 이든, 그리스도가 이룬 그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뜻과 아버지로서의 관심과 배려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는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4. 영광송(榮光頌)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5절)
(그) 영광이 저에게. 바울의 서신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찬미 내지는 영광송이 의례적인 인사말 이후에 나타나기는 이곳이 유일합니다. 이로 미루어 이 부분 역시 원래는 4절의 기독론적 신앙고백의 한 일부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어휘나 표현 등을 통해서 볼 때, 그 기원을 유대인 기독 공동체의 예배 의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예: 계 1:5-6), 더 나아가서는 <구약>과 유대교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관계 대명사로 처리하고 있는 저에게는 물론 이미 앞에서 한 번 사용한 바 있는 우리 하나님과 아버지에게를 지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영광”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구약적 배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편>은 피조물들이 창조주 하나님에게만 합당한 영광과 예배를 드려야 함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시 29:2; 96:8).
세세토록. 하나님에 대한 영광과 찬미는 아무리 해도 과함이 없다는 강조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번역본에서는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만, 이 부분에 대한 헬라어 표현은 분명 <칠십인 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일한 의미를 훨씬 강조한 것입니다.
아멘. 찬미와 영광의 송영에 마지막으로 아멘을 덧붙임으로써, 초대 기독 공동체는 그들의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시편>의 네 개의 책이 모두 아멘으로 끝나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시 41:13; 72:19; 89:52; 106:48). 바울 역시 이러한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은 그의 복음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 결 같이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 우리의 구원은 결코 율법의 행위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입니다.
연습과 토의
1. <갈라디아서>의 인사말이 바울 사도의 다른 <서신서>들에 비해서 어떻게 다른지 알아봅시다. 그리고 이 차이는 본 서신의 배경과 관련해서 어떤 빛을 던져주고 있습니까?
2. <갈라디아서>의 문체나 구성이나 구조 등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3. ‘알레고리’적 해석, 또는 우화적(풍유적> 해석이라 함은 어떤 것입니까? 이 책에서 한 예를 찾을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풍유적 해석이 허용되는 범위는 어디까지 입니까?
4. <갈라디아서>에서 “칭의”(Justification, 稱義)의 근간으로 제시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믿음”(흔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번역되기도 함)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5. <갈라디아서>를 “전투의 서신” 또는 “분노의 서신”으로 부르는 이유를 알겠습니까? 서신의 분위기를 통해서 내가 받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6. 율법주의와 명목주의에 대해서 설명해 봅시다.
제 2과: 동기와 배경 (서론)
제 2부
책 망
A. 머리말
(1:1-6)
2
동기와 배경
(1:6-10)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1:7)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스스로를 “사도”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은, 그가 다른 서신들에서 자신을 사도라고 밝히고 있는 것과는 그 깊이나 강도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서신의 벽두에서부터 이 사도직분에 대해서 강도 높게 언급함으로써(1:1), 사도직의 권위에 관한 문제가 서신의 중요한 주제가 될 것임을 예고해 준 바 있습니다. 따라서 서신의 수신자들이나 독자들은 당연히 사도가 이 주제를 계속해서 발전시켜 갈 것으로 예상할 수 있겠으나, 예상은 빗나가고 있습니다. 사도는 대신에 ‘갈라디아’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진단하고, 진정한 복음이 무엇인지 재정의(再定議)함으로써, 있을 수 있는 사이비 복음의 발효를 사전에 차단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자신이 가진 사도적 권위는 말할 것도 없고 천사들의 권위까지고 참된 복음의 권위 아래 복속시키고 있습니다. 그가 의도하고 있는 이중적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교회 내에 들어와 있는 “유대주의”를 차단하고, 더 나아가 모든 기독교인들을 위한 신학과 신앙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참된 복음은 단순하고도 간단합니다. 즉 그가 전했고, 그들이 받아들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복음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일반 명사가 아니라 마치 사람이나 장소처럼 유일무이한 대명사와 같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해서 두 번에 걸친 저주를 쏟아낸 후, 사도는 다소 감상적이며 도전적인 질문을 불쑥 내던지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질문은 두 번에 걸친 수사적 강조입니다. 요지인 즉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곧바로 그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을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서신을 쓰는 동기와 관련해서 사도의 입장은 이처럼 단호하면서도 비타협적입니다. 그는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이에 대처하는 방식 또한 처음부터 감상적이며 감정적입니다. 다른 문제들을 대함에 있어 그는 포용과 관용과 인내로 일관하고 있습니다만(예“ 고전 7-14; 빌 1:15-18; 4:8-9), 이곳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처럼 분노하게 하고 있으며, 비타협적이며 비관용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까?
문학과 역사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는 문안 인사에 이어 긴 감사(感謝)가 따르는 것이 상례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감사함은...”(롬 1:8; 고전 1:4; 립 1:3; 골 1:3; 살전 1:2; 살후 1:3; 딤후 1:3; 몬 4; 엡 1:15). 이러한 감사를 통해서 사도는 수신자들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또한 그들을 위한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밝히고 있습니다. 동시에 이러한 감사 속에 그는 서신을 쓰게 된 동기와 목적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자연스럽게 서신의 주제도 감사의 글속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독 <갈라디아서>에만 이런 통상적인 감사가 없습니다. 감사 대신 “찬미”가 문안 인사를 잇고 있습니다. 이처럼 감사의 글이 빠져 있다는 사실은 그가 자신이 당면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분노와 좌절을 느끼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단호하고도 급박한 자신의 심정이 수신자들에게 강력하게 전해지게 하려는 의도 또한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서신 곳곳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로 부르는 등 그들을 향한 사랑과 애정을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1:11; 3:15; 4:12, 28 31; 5:11, 13; 6:1, 18), 그들을 칭찬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어 보입니다. 아마 사도는 지금 나쁜 소식을 방금 들었으며, 이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가 보이고 있는 반응은 한가한 “감사”(εὐχαριστϖ)가 아니라, “충격”(θαυμάζω)입니다: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6절). 편지의 서론(exordium)은 이처럼 놀라움과 함께 감사를 대신하면서 시작하고 있으며, 편지의 전체적인 주제를 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신의 동기와 목적은 결국 현재 처해있는 위기적 상황을 진단하는 것인데, 사도는 먼저 “내가 놀랐다”(θαυμάζω ὅτι)는 “책망”과 함께 왜 놀랐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6절상). 그리고는 “복음”을 교란하는 자들이 전하는 ‘메시지’ 즉 “다른 복음”과 차별화 시키면서(6절하), 동시에 “참된 복음”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 차원에서 다시 조명되어야 할 것이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리스도의 복음; (2) 우리가 전한 복음; (3) 너희가 받은 복음(7절하-9절). 이어서 사도는 이 세 가지 기억과 상관없는 복음을 전하는 자는, 자신과 천사들을 포함해서 그 누구든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음을 두 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지어다”(8절하); “누구든지... 저주를 받을지어다”(9절하).
마지막으로, 사도는 자신의 진정한 의도와 관련해서 반대자들에게는 다소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서론을 마치고 있습니다. 즉 그가 오직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즐겁게 하려는 것이지,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10절).
신학과 신앙
1. 책망(6절)
서신의 대부분은 “변론과 논박”으로서(1:6-4:11), 사도는 이 단락을 책망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6절하)
보다 정확하게는 “내가 놀랐다”로 번역할 수 있는 이 구절은 법정에서 피고를 향한 검사의 논고를 연상시켜주는 수사적 표현임에 분명합니다. 따라서 단순한 호기심 어린 놀라움이라기보다는 비난과 책망을 담은 놀라움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점은 이미 수차례 지적한 바와 같이, 독자들을 위한 칭찬이나 감사가 그의 인사말에서 빠져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의 변덕과 불안정에 놀라움과 함께 심한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가 이처럼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6절상)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그들의 신속한 반응 때문입니다: “이같이 속히.” 사도가 전했고 그들이 받아들였던 그 복음을 이처럼 빨리 포기할 수 있는 교인들의 신속함에 놀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잘못을 행함에 있어 이처럼 재빠른 교인들의 행동은 지난 날 ‘이스라엘’이 보여주었던 신속한 배교의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1)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출 32:8); (2)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 하였더라”(삿 2:17). <칠십인 역>은 이 두 본문에서 모두 “이처럼 속히”(οὕτως ταχέως)에 해당하는 동일한 헬라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두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 길”(ἡ ὁδος)은 초대 교회 당시 스스로를 ‘그리스도 인’으로 밝히면서 사용한 단어라는 사실입니다(g0d 9:2; 19:9, 23; 22:4; 24:14, 22). 이렇게 볼 때 “이처럼 속히”에서 중요한 점은 문자적인 기간이 아니라, 수사적 과장일 것입니다.
또 하나 사도를 놀라게 하고 있는 것은 그들은 지금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들을 부르신 이를 “떠나고 있다”(μετατίθημι, 메타티데미)는 사실입니다. 이 단어는 접두어 “메타”(meta)에서 보듯이 “변하다”, “타락하다”, “버리다”, “등을 돌리다”, “변절하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는 마지막 의미로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철학에서 이 단어는 한 학파에서 다른 학파로 사상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이 단어가 현재 진행형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 서신을 받을 즈음에 이미 배교가 시작되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이런 점은 4:9-10나 5:2-4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의 관심사는 배교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 즉 누구에 대한 배교인가에 있습니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그들을 부르신 이”로서 문맥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입니다. 바로 이점이 사도를 놀라게 하고 있는데, 경건한 유대․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오히려 하나님을 버리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나타난 수단 또는 통로는 “그리스도에 의한” 또는 “그리스도를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두 표현은 의미상 동일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한”(ἐν χάριτι χριστου; by the grace of Christ)(6절); “그의 은혜를 통해서”(διὰ τής χάριτος αὐτου, through his grace)(1:15). 하나님 앞에서 신자들의 신분과 관련해서 사도가 사용하고 있는 또 다른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서”(ἐν χριστω; in the Christ)입니다(1:22; 2:4, 17; 3:26, 28).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때문이었다는 말입니다. 사도는 인사말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적어도 구원의 복음과 관련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완전히 한 인격체로 보고 있습니다.
2. 다른 복음(6절하-7절)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는 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버리고, “다른” 복음을 쫓고 있는 중인데, 실은 이것은 전혀 복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6하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7다른 복음은 없나니(6절하-7절)
이 부분은 해석상 난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이름하에 제 일 복음, 제 이 복음, 제 삼 복음 등과 같이 여러 종류의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밖에는 없으며 그 외에는 복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 이 부분의 해석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두 절에서 유사반복처럼 사용되고 있는 두 단어 때문입니다: (1) “다른(ἕτερος, 헤테로스) 복음을 따르는 것을”(6절하); (2) “다른(ἄλλος, 알로스) 복음은 없나니”(7절상). 이러한 차이가 단순히 본문 변조의 결과인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드라도, 두 단어의 의미상의 차이를 구분해 내는 것조차도 간단치 않습니다. 대체적으로 두 단어는 동의어로서, 일반적으로 “다른 종류”라는 의미보다는 “같은 종류에 속하지만 새로운 그 무엇”이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다른 곳에서 이 두 단어를 별 구별 없이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1:19; 고전 15:39-41; 고후 11:4). 그러나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두 단어가 다른 의미를 갖도록 의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헤테로스”는 “또 다른 종류”로서, 그리고 “알로스”는 “한 종류 내에서 다른(또는 새로운)”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의 반대자들은 자신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바울’이 전한 것을 적어도 보충해 줄 수는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의 진단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7절하)
그의 요지인 즉은, 이들 반대자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한 보충 자료이거나 또는 다른 이름의 복음이 아닌 것이 분명한데, 그 이유는 그 열매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열매란 교회를 교란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었으며, 이들은 사도가 편지를 쓰고 있는 그 시점에도 여전히 교회 안에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는 자신이 전한 복음을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점을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는데(롬 15:19; 고전 9:12; 고후 2:12; 4:4; 9:13; 10:14; 빌 1:27; 살전 3:2; 살후 1:8), 이를 “하나님의 복음”과 구별 없이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롬 1:1-3; 15:16; 살전 2:2, 8-9; 딤전 1:11).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그리스도께서 전한 복음” 또는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3. 다른 복음의 저주(8-9절)
그렇다면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의 반대자들이 전한 “다른 복음” 사이에 타협점은 없는 것일까? 두 복음은 서로를 보충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갈라디아’ 교인들과 유대주의자들은 적어도 이런 식으로 확신했는지도 모릅니다. 사도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8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8-9절)
“그러나”로 시작하고 있는 그의 반박에는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두 번에 걸친 “저주”가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두 절의 문장 형식은 가정법으로서, 첫 번째 문장에서(8절) 전제로 하고 있는 바는 이론적으로나 가능하나 그 실현 여부가 희박하고 불투명한 미래에 관한 것이지만, 두 번째 문장에서(9절) 전제로 하고 있는 바는 보다 직접적이며 당장의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식의 짝짓기는 당시 ‘코이네 헬라어’에서는 상당히 보편적인 수사적 방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유사한 경우를 <신약>의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요 10:37-38; 13:17; 행 5:38-39; 고전 10:27-28.
사도가 이곳에서 가정법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도 ‘바울’ 자신이나 “하늘의 천사”가 다른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나 현실에서는 매우 희박한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을 통해서 한 가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즉 진실로 중요한 것은 복음의 내용인 것이지, 복음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바울’은 처음부터 사도로서 자신의 권위를 강조한 바 있고(1:1), 이어지는 자전적인 고백을 통해서도 계속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1:11-2:14). 이점은 그의 다른 서신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고후 10:1:12:10; 빌 3:4-21; 살전 2:1-12).
그러나 그가 사도라는 사실은 복음 그 자체에 비하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천사”도 예외일 수 없다는 강조는 일종의 “해학”이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천상(天上)의 존재들까지 끌어 들이고 있는 배경에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을 빠뜨릴 수 없을 것인데, 이들 반대자들은 스스로를 ‘예루살렘’ 교회나 그 교회의 지위 높은 사도들로부터 검증과 신임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위 유명하다는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 대해서 ‘바울’ 자신이 보이고 있는 입장은 분명 역설 그 자체입니다(2:11-14). 사도가 인식하고 있는 바, 설교자의 권위는 복음의 권위에서 유래한 것이지 복음의 권위가 설교자의 권위대문에 세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는 복음의 내용이 세상의 권위나 신임을 받아 변질되거나 수정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는 자가 있다면 당연히 “저주”(ἀνάθεμα)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코이네 헬라’ 단어 “저주”(ἀνάθεμα)는 고대어 ἀνάθημα의 변형으로서, 그 의미는 둘 다 동일합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된 것”, 또는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을 위하여 구별된 것”입니다. 칠십인 역에서는 <구약>의 ‘헤렘’(םרח)을 이 단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예: 레 27:28-29; 신 7:26; 13:17; 수 6:17-18; 7:11-13, 15). ‘헤렘’을 누구든 만지거나 소유하게 되면 그 자신도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신약>에서는 이 단어를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된 것”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곳도 있습니다만(눅 21:5), ‘바울’은 <칠십인 역>의 용례를 따라 부정적인 ‘헤렘’의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다른 예: 롬 9:3; 고전 12:3; 16:22).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사도는 이전에 그가 가르쳤던 바를 강조하기 위하여 당시 ‘헬라’ 서신의 용례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은 그의 다른 서신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고전 15:3; 고후 7:3; 13:2; 갈 5:3, 21; 살전 4:1, 6; 살후 2:5). 정확하게 언제 무슨 가르침을 주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만, 아마 그가 ‘갈라디아’ 지역을 처음 방문할 당시를 의미하는 듯합니다(참고, 5:3, 21).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받게 될 저주는 필연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가 강조를 위해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 “두 저주”는 이런 식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후자는 전자를 구체화시켜주는 방식의 연결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하나의 가능성으로서가 아니라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지요.
4. 진정한 의도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에게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0절)
이 구절은 다소 뜻밖입니다. 느닷없이 사도는 자신의 진정한 의도에 대해서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 이 구절의 기능에 대해서 논란이 많습니다. 과연 이 구절이 처음부터 단락(6-10절)의 일부분이었을까? 그리고 전후 문맥과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서론”에 해당하는 앞 단락(1:6-9)과 “해설”에 해당하는 새로운 단락(1:12-2:14)을 연결해 주는 전이 구절인가? 또는 용솟음치는 사도의 감정과 기분을 보여주고 있는 하나의 새로운 단락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최근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마지막 견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Longenecker). 사도의 분노는 8-9절에서 이미 최고조에 달해 있으며, 그러한 감정이 10절에까지 자연스럽게 이입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여전히 하나의 단락으로 구분해야 할 것 같습니다(아니면 적어도 단락의 일부로서 괄호로 묶어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가 이처럼 자신의 진정한 의도에 대해서 밝히고 있는 배경에는 역시 유대주의자들의 근거 없는 주장이 깔려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바울’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받아들이게 된 것도 실은 그가 교인들의 입맛에 맞도록 메시지의 내용을 변질시켰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아첨꾼” 또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자” 등으로 비난하면서 당시의 수사학자(修辭學者)나 웅변가들의 반열에 놓았을 것입니다. 예컨대, “할례”의 경우, ‘바울’도 그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어디에선가 그에 대해서 설교도 했을 터인데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를 강요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의 환심과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는 식입니다. ‘바울’이 이런 비난에 대해서 어떻게 자신을 변론하고 있는지 그의 다른 서신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고전 10:33; 살전 2:4-5).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반대자들을 저주에 가까울 정도로 강도 높게 비난했던 그가 이번에는 두 번에 걸쳐 대답이 필요 없는 수사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의도에 대해서 옹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 자신도 회심한 유대․기독교인으로서 유대적인 관습과 생활 방식을 존경하고 따라야 한다는 데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으며(고전 9:19-23),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고전 7:17-20). 그러나 “모세 율법”에 관한 한 이방 기독교인과 유대․기독교인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그는 ‘갈라디아’ 지역 선교 당시, “모세 율법”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조건이나 또는 기독교 신앙생활의 규범으로 제시하지 않았던 것이지, 단순히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면, 자신은 결코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10절의 이 마지막 선언은 앞에서 던졌던 수사적 질문,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에 대한 대답이 되기도 합니다. 일견 이 선언은 모순처럼 들립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곳에서는 전혀 상반되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 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3). 정말 그렇습니까? 정말 복음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에 대한 대답을 위하여, 그가 “이방인을 위한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표현을 곰곰이 묵상해 보아야겠습니다. 이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바울의 두 발언이 갖는 일반성과 특수성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유일무이한 복음. 우리는 일반 명사와 고유 명사가 어떻게 다른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온천(溫泉)하면 일반 명사로서 세계 여러 곳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온천이 “부곡 온천”이 되면 전 세계적으로 부곡 외에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고유명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극히 보편타당해야 할 일반 명사도 때로는 마치 고유명사처럼 둔갑하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통일”이나 “자주”와 같은 단어는 우리 모두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바 그대로 이겠습니다만, 이 단어가 이북 정권 사람들에 의해서 사용될 때에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통일은 “적화 통일”을 의미하게 되고, 자주는 “반미 자주”가 됩니다. “북한”이라는 이름도 정식 명칭이 “민주 인민 공화국”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민주”나 “인민”의 의미가 심각하게 왜곡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복음”(福音)은 어떻습니까? 위에 든 예들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그 의미가 변해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하자면 고유 명사가 일반 명사화 되는 방향으로 변천해 왔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에 대한 한자어를 그대로 해석하면 “좋은 소식”이 됩니다. ‘헬라어’로 ‘유앙겔리론’(εὐαγγἑλιον)으로 부르는데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오늘날 이 단어의 사용처는 더욱 확대되고 보편화 되어서 거의 대부분의 좋은 소식 또는 반가운 소식에 대한 대명사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국회가 유류세(油類稅)를 삭감하는 법안을 상정하겠다고 하는데, 이는 대부분의 국민들에게는 “복음”의 소식입니다. 얼마 전 아무런 부작용도 없는 먹는 자궁암 치료약이 개발되어, 이제 더 이상 병원에 가서 입원하여 주사를 맞아야 하는 고통과 수고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이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에게는 분명 “복음”의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유의 “복음”은 그 수를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다양한 형태로 우리를 즐겁게, 편리하게, 건강하게, 그리고 유익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자, 과연 이런 것들을 “복음”의 반열에 포함시켜도 괜찮은 것입니까? “복음”이 과연 무엇인가를 놓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지금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 교회에 사이비 선생들, 즉 유대주의자들이 몰래 들어와서 교회를 교란시켜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말합니다. “복음”은 고유 명사가 아니라 그냥 일반 명사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좋은 소식이 어디 한 가지 뿐이겠느냐 이거죠. 대한민국에 온천이 여러 개가 있듯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한 복음 역시 이것저것 다른 복음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전에 전했던 복음도 그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아니면 적어도 두 복음이 상호 보완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가르침에 많은 교인들이 넘어갔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그는 말합니다. 복음은 하나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즉 고유명사화 된 “그 복음” 외는 복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복음이라는 이름을 아무데나 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누군가 나를 내 이름이 아닌 다름 이름으로 부른다면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요즈음 중국은 가짜의 천국이라고 합니다. 먹는 음식에서부터 첨단 공산품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제품에 “짝퉁”이 있다고 합니다. 예컨대 삼성의 휴대 전화기 ‘에니콜’의 짝퉁을 만들어 ‘에미콜’이라는 이름으로 팔고 있고, 현대의 ‘투산’ 자동차의 짝퉁을 만들어 다른 이름으로 외국에 수출까지 한다고 합니다. 기가 차고, 분통이 터집니다. 도저히 그냥 묵과하고 지날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도 역시 이런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를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까? “짝퉁”을 만들어 파는 자들도 그렇지만, 너무 쉽게, 너무 신속하게 진품을 버리고 가짜에 속아 넘어가 그것을 사는 자들입니다. 너무 한심하고 어리석어 견딜 수가 없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분노는 단순한 배신감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그의 분노는 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데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그의 열정과 헌신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복음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너무나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사도는 이전에 이들 교인들이 경험한 사건과 사실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다시 한 번 복음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선 복음은 다른 사람들이 아닌 “우리가 전한 복음”이라야 합니다(8절). 여기서 우리란 바울과 그의 선교 여행에 동행했던 일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너희가 받은 복음”입니다(9절). 그들은 이미 복음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인 경험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새로운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차원이 있는데, 복음은 그 핵심이나 본질에 있어 “그리스도의 복음”이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7절).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함은 “그리스도가 전한 복음” 또는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등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는 자신이 전한 복음을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점을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으며, 이를 “하나님의 복음”과 구별 없이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복음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과 함께 고유명사화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바에 따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공적 외에 다른 것을 더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역은 완성된 사역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값없는 은혜의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 그러나 어떻게 은혜를 그저 앉아서 값없이 받을 수 있을까보냐? 우리 모두가 보일 수 있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적어도 양식과 체면이 있는 자라면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른들로부터 세배 돈 얼마를 받는데도 그냥 드러누워 받는 자가 없거늘,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야 더 일러 무엇 하랴. 이것이 당시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이었습니다. “복음”에다 무엇인가 더하거나 보태야 된다는 것입니다. 교과서로 치자면 일종의 색인인 셈입니다. 이들이 보태려고 하는 것은 소위 “복음의 조건”으로서, “모세의 율법”이 그것입니다. 좁게는 율법이 요구하는 바, “할례”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이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의복이자 음식이며, 의식이자 생활이었습니다. 그들이 이 율법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별개의 문제였습니다만. 아무튼 이들 유대주의자들이 시도하고 있는 바는 “복음”이라는 고유명사를 일반화 하자는 것이지요.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복음은 논리적이 되고 이성적이 됩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것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인격이고,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으로서,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나타나거나 일어날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만일 무엇인가 나타난다면 그 이름을 달리 불러야지 “복음”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복음은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7절).
만일 있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저주가 될 뿐입니다.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은혜를 주는 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엇인가 해야만 하는 것이 논리이고 이성적인 자세일 것입니다만, 그렇게 하는 순간 그 모든 노력의 대가는 저주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이 얼마나 역설이며 비이성적입니까? 바로 이점이 은혜의 모순인 것이지요. 어떻게 이럴 수가? 사랑은 이성이 아니라 비이성이며, 맹목적이고 일방적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애쓰고 힘쓰는 자식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은혜는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어느 누가, 어느 종교가, 어느 제도가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다고 나서는 자가 있다면, 그는 스스로 하나님이 되겠다고 작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당연히 저주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사도는 이점을 두 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천사들도(심지어는 예수님 자신마저도) 예외일 수가 없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누가 전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전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개혁에 관한 책을 쓰신 한 목사님의 그의 책에서 설교는 반드시 신학과 목회 교육을 받은 목사가 해야지 일반 비전문인이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공학도는 그저 공학에 대해서만 강의를 해야지, 철학이나, 경영이나, 다른 분야의 강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철학은 공학자보다 철학자가 더 잘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공학자라고 해서 철학 강의를 하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지요. 요는 누가 강의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강의하느냐가 문제인 셈이지요. 오죽했으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불순한 동기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기뻐한다고 말했겠습니까. 왜냐하면 누가 무슨 동기로 하든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의도. 사도가 이처럼 넓고 열린 자세를 가질 수 있는 것도 다름 아닌 그의 동기와 의도가 자신의 만족이나 유익을 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모시고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이방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종”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한 구절 속에 그의 삶의 목표와 자세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기쁘고 즐겁게 해야 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를 즐겁게 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비위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슬프게 할 수 없고, 그리스도를 모시기 위해서 사람들을 내팽개칠 수 없습니다.
내 사역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나의 권위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문학적 기능은 무엇이며, 수사학적인 기능은 무엇입니까?
2. 서신의 동기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3. 현재 교회가 당면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본 서신 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유대주의”의 신학적 주장은 무엇입니까?
B. 간증과 변론
(서술; Narratio)
(1:11-2:14)
제 3과: 주제 선언
3
간증과 변론 (1):
주제 선언
(1:11-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1:11상)
<갈라디아서> 서신은 그 형식이나 구조에 있어 크게 네 개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1) 인사(1:1-5)
(2) 책망(1:6-4:11)
(3) 권면(4:12-6:10)
(4) 추신(追伸)(6:11-18)
이중 두 번째, “책망”이 서신에서 가장 긴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양식(樣式)은 자기 변론을 위한 “해설” 내지는 “이야기”(narrtio) 정도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책망”의 첫 번째 단락에 해당하는 제 2 과는(1:6-10) 그 양식에 있어 일종의 “머리말” 또는 “서두”(書頭; exordium)로 볼 수 있습니다.
사도는 이 서두를 끝낸 후, 변론을 위한 자전적(自傳的) 이야기, 즉 간증(干證)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그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 먼저 밝혀두고 있습니다:
1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1-12절)
이 두 절이 문학적으로 기능하는 바는 일종의 주제 선언으로서, 제 3 과는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도 사도는 통상적인 서신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로 시작하는 주제 선언으로서(1:11), 이곳에서 사도는 그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과 그 기원에 대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너희가 들었나니”로 시작하고 있는 자서전적인 간증이 그것인데(1:13), 이는 주제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지지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1:13-2:14 사이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도가 이 주제 선언을 통해서 밝히고자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질문의 요지인 즉은 “바울의 복음”과 “예루살렘 교회의 복음” 사이에 공통점은 무엇이며,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본문의 독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대부분의 주석서에서 단 두 절로 이루어진 이 부분을 별도의 단락으로 취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혹자는 앞 단락에 연결시키고 있는가 하면(1:6-12) 또 다른 학자는 다음 단락에 포함시키고 있기도 합니다(1:11-2:14). 그만큼 이 두 절의 문학적인 기능이 분명치 않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11절을 과연 새로운 단락의 시작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앞 단락에 이어지는 종속 구절로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용하는 접속사의 종류 여하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두 문장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전자의 경우라면 앞 단락에 이어져야 마땅할 것인데, 이 접속사가 기능하는 바는 앞의 내용을(1:6-10) 설명하고 보충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후자의 경우는 분명 새로운 단락의 시작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 접속사가 기능하는 바는 서론에서 서술한 내용을 반박하고 부정하면서 새로운 내용을 전개하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내용이란 “인사”부분에서 밝힌 바 있는 내용으로서(1:1상), 이 단락에서 그 주제를 보다 확대해 갈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로만으로 단락 구분을 결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불행하게도 모든 사본이 다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J. Jeremias)는 <갈라디아서> 전체가 교차대구의 형식으로 이루어 진 것으로 간주하고, 이 단락을 그 첫 시작으로 별도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해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11절과 12절에서 각각 “사람의 뜻을 따라”(kata; a[nqrwpon; human)와 “사람에게서”(para; ajnqrwvpou; from any man)가 등장하고 있는데, 이 두 표현이 서신의 나머지 부분에서 그 순서가 뒤바뀌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1:13-2:21에서 복음과 관련한 핵심 주제는 그것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펼쳐지다가, 이어지는 3:1-6:10에서는 그것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예레미야“의 주장에 따르면, 사도는 이처럼 그의 복음을 변론함에 있어, 자신의 개인적인 간증을 통한 변론에서는(1:13-2:21) 그 복음이 “사람에게서”(12절) 나온 것이 아님을 강조하다가, 이어서 성경에 입각한 변론을 펼칠 때에는(3:1-6:10) 자기의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11절) 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F. Mussner):
A. 선언: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1:11)
B. 선언: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1:12)
B. 해설: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 바울의 복음(1:13-2:21)
A. 해설: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닌 바울의 복음(3:1-6:10)
이런 구조 분석은 그럴듯해 보이긴 하지만, 허술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 근거로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Longenecker): (1) 전체 교차대구를 완성시켜 줄 수 있는 대응되는 세부 짝들을 찾아내기가 어렵다는 점; (2) 전체 구조를 조화롭게 구성하기 어렵다는 점; (3) 한 주제가 어디서 끝나며 새로운 주제가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알기가 어렵다는 점. 이 외에도 보다 근본적인 질문은 과연 사도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두 표현을 교차대구적으로 사용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물론 ‘예레미야’가 관찰한 바대로, 사도는 1:13-2:14에서 그의 복음의 유래와 기원에 대해서 자서전적인 간증을 통해서 변호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그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며, 그 설명이 2:15-21에서 절정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1:11-2:21의 본문에는 공통적인 주제들이 담겨 있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단락의 구조는, 당시 전형적인 서신의 패턴이었던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11절)와 “너희가 들었거니와”(13절)의 표현을 통해서 오히려 더 뚜렷하게 구분되고 있으며, 이 두 절로 시작되는 각 단락은 수사적 형태에 있어 “해설”(1:11-2:14)과 “제안”(2:15-21)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두절의 문학적 기능은 1:13-2:14에서 볼 수 있는 자전적인 변론에 앞선 주제 선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사도는 “나의 복음” 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변론을 전개함에 있어, “서론”에서 그의 독자들의 과거 체험을 상기시킴으로써 시작한 바 있습니다(1:6-10). 이어지는 단락은 일종의 주제 선언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여기서 그는 변론의 주제를 도입하면서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을 사실을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서 그들의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11절상)
이런 표현은 당시 ‘헬라’ 서신에서 상투적인 것으로서, 사도가 그의 독자들에게 엄숙한 경고나 확신을 주고자 할 때 자주 사용하던 표현이기도 합니다(고전 12:3; 15:1; 고후 8:1).
사도가 “형제”로 부르고 있는 사람들은 동료 유대․기독교인들이 아니라, 배교의 유혹을 받고 있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입니다. 흔히 “형제”는 유대인들이 동료 유대인들을 부를 때 쓰는 호칭이거나(레 19:17; 신 1:16; 행 7:2; 롬 9:3), 또는 ‘헬라’ 세계에서 종교 공동체 내에서 서로를 향해서 부르던 호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의 제자들을 “형제”로 불렀듯이(참고, 마 23:8; 막 3:31-35), 초대 교회 내에서도 예수님과의 관계나 그분의 뜻을 함께 수행하는 동료라는 인식에서 서로를 향해서 “형제”로 호칭하기도 했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라는 인식 하에 “형제”로 부르고 있습니다(롬 8:29). 이렇게 함으로써 상호 의존적인 존재로서의 동료애와 형제애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롬 14:10, 13, 15, 고전 5:11; 6:5-8; 8:11-13; 15:58; 고후 1:1; 2:13). 더 나아가 사도는 지금 배교에 빠져 이런 관계나 형제 의식을 상실해 가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도 “형제”로 부르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참고, 3:15; 4:12, 28, 31; 5:11, 13; 6:1, 18).
이처럼 극진한 형제애로 이들에게 간청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무엇을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11절하)
“내가 전한 복음”은 보다 간단하게는 “나의 복음”이자(롬 2:16; 16:25), “그리스도의 복음” 또는 “하나님의 복음”이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이 복음과 관련해서 사도가 핵심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말합니다(3:1). 그러나 특별히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강조하고 있는 바는,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진 것은 유대인들의 관습이나 생활 방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유대인들이 그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한 번에 이루어진, 이미 성취된, 그래서 되돌리거나,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더할 수 없는 사건을 말합니다. 실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과 관련해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루살렘’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하등 다를 바가 없으며, 사도 또한 그 점을 계속 강조한 바 있습니다(참고. 고전 15:1-11). 그리고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에게도 이 점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나의 복음” 또는 “내가 전한 복음”이라고 말할 때, 한 가지 분명하게 차별을 두고 싶은 것이 있다면 “(모세의) 율법”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사도가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실 때 율법과는 아무 상관없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의 주장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전한 복음은 그 내용에 있어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결 같다고 말입니다. 이 점은 11절의 헬라어 문장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어 번역에서 그 의미는 보다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I want you to know, brothers, that the gospel I preached is not something that man made up”(v 11; NIV). 즉 밑줄 친 두 동사는 그 시제가 각각 과거 분사와 현재 형으로서, 복음의 일관성을 드러내 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즉 그가 처음 전한 복음은 지금도 사람으로부터 말미암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서신의 인사말에서 강조했던(1절상) 바와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복음이 사람들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두 번에 걸친 부정을 통해서 강조한 바 있습니다만,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11절에 이어 12절에서 재차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도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12절상)
이 구절은 11절하에서 강조한 내용에 대한 일종의 부연 설명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문장은 원문에서 “왜냐하면(for)...”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전한 복음은 그 기원에 있어서나 수단에 있어, 오직 초자연적인 계시를 통해서 얻어진 것임을, 두 번의 부정에 이은 긍정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12절하)
이렇게 해서 11-12절은 전체적으로 그 수사적 기법에 있어, 1절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듯이,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의 객체 즉 계시의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다음과 같은 고백이 그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16절상).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방인에게 전하는 복음은 율법과는 무관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계시는 하나의 수단이거나 또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후자(後者)로 이해하는 편이 나을 듯한데, ‘헬라’어 문장이 이를 지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문안인사에서 밝히고 있는 자신의 선언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으신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1:1b). “계시로 말미암다”의 ‘헬라’어 표현은 “di jajpokaluvyew"”(through revelation)으로서(12절) 분명 수단의 의미가 드러나고 있으며, 1:1b에서도 동일한 헬라어 전치사 di 를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의 수단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도가 ‘갈라디아’에서 직면하고 있는 근원적인 질문은 과연 그가 전하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이 어디서 비롯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그의 복음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것입니다. 따라서 “계시로 말미암아”(12절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는 주격 소유 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도가 이 주제 선언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문안 인사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할 수 있는 자격과 권위는 계시를 통해서 얻은 것이며, 그 계시의 통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입니다.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목에서 직접적으로 만난 ‘예수’라는 인물이며, 그가 접한 계시 속에는 이방인을 향한 선교의 사명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갈라디아와 예루살렘. ‘갈라디아’와 ‘예루살렘’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두 지역이 갖는 기후나 사회∙문화적이거나 또는 인종적인 차이에 관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적인 것으로서, ‘바울’이 ‘갈라디아’의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다니던 그의 “계시”(apocalypse)와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나 “선포” 즉 “케리그마”(kerygma)와는 어떤 상관이 있었는가에 관한 질문입니다. 이 둘은 상호 배타적인가 아니면 상호 포괄적인가? 그리고 두 교회는 각기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아니면 최소한의 공통점은 지니고 있었을까?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으며,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으로부터 배웠거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질문들은 지금도 학자들 사이에서 관심과 논란을 야기하는 질문들이기도 합니다. 두 교회가 상호간에 끼친 영향과 관련해서 혹자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하는가 하면, 혹자는 ‘바울’이 어떤 형태로든 당시 초대교회의 전승이나 신앙고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당신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이처럼 두 교회의 상호의존성과 관련해서 논란이 많은 것은, 사도 자신이 일견 상충되는 고백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곳에서(11-12절)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들로 말미암은 것도,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도 아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직접 “받은”(παρέλαβον) 것임을 개인적인 간증을 통해서 강변하고 있습니다(1:13-2:14).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서 “성찬식”이나 “부활” 등과 관련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전승과 ‘케리그마’를 그대로 “받아들이는”(παρέλαβον)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고전 11:23-26);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15:3-11).
그러나 이들 서로 다른 메시지는 그 상황과 배경을 떠나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각 메시지가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그가 받은 계시는 초대교회의 선포 내용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도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과 관련해서 새로운 차원의 이해를 더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낫습니다. 그 새로운 것들이란 주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과의 관계에 관한 것들입니다.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유대 식 종교 의식과 상관없는 이방인 선교에 관 것이라든지, 둘째 유대 식 생활 방식을 뛰어넘는 진정한 기독교적 생활 방식이라든지, 셋째 교회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차별이나 등급 등을 말합니다. 이들 문제를 제외하고 나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근본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전승에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방인 문제에 관한 한, 그는 궤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즉 이방인의 구원과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은 ‘모세’의 율법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 그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방인 선교의 당위성이 있기도 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사도는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하나의 “신비”(μυστήριον; mystery)로 보았으며, <구약>에서 수수께끼 같은 예언으로 남아 있던 것이 때가 이르러 자기에게 계시를 통해서 알려진 것이라고 말합니다(참고, 롬 16:25-26; 엡 3:2-10; 골 1:26-27). 바로 이점에서 그의 복음이 유일무이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갈라디아’ 교회에서 유대 주의자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는 아닙니다. 유대∙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예수’를 그들의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문제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이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바울의 복음” 즉 그가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믿기로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는 이방인에 관한 계획은 없다는 것입니다. 설령 있다고 하드라도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유대’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유대’적 관습과 전통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과 “할례”가 그 속에 포함되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바울’은 열두 사도의 자격 요건은 갖추지 못했습니다(요 15:27; 행 1:21-22). 따라서 그 자신도 솔직히 인정하고 있듯이, 그의 복음은 전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전승과 가르침에 의존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사건” 이후 그의 복음은 단순히 교회의 전승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고, 그분의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 받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교회의 전승과 가르침을 완성시켜주는 기능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은 결국 “전승(교회의 케리그마)과 계시의 통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자가 유대인을 위한 것이었다면, 후자는 이방인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때가 찰 때까지 숨겨놓은 신비였습니다. 이제 핵심 정리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봅시다. “케리그마와 계시는 동일합니까?” 그렇습니다. 둘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이 없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주의자들도 ‘바울’도 “케리그마와 계시는 동일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서로 다른 복음이라고까지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대주의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방인을 유대인으로 만드는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는 반면, ‘바울’은 그 복음은 이방인을 새로운 족속, 즉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현대판 할례. 오늘날에도 교회 안팎으로 현대판 유대주의자들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교인이 되기 위해서나 또는 교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일련의 조건이나 행동 지침 들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닌가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술이나 담배를 우선 끊어야 한다든지,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든지, 십일조를 해야 한다든지, 기도나 금식을 해야 한다든지, 심지어 방언을 해야 하다든지, <구약>의 절기 헌금을 해야 한다든지, 교회 예배에 빠져서는 안 된다든지, 모든 교회는 교단에 가입해야 한다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제 조건이나 행동 수칙이 있습니다. 일종의 현대판 “할례”인 셈이지요. 이들이 과연 복음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복음이란 것이 이처럼 많은 사선(射線)을 넘고 또 넘어 마침내 승리의 제물로 쟁취하는 그 무엇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한 일은 과연 무엇이며, 왜 복음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쓸데없는 짓을 한 것입니까?
세상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자유에 공짜란 없다”고 말입니다(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싸워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맞는 말입니다. 아무도 이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노년에 경제적 자유를 위해서 젊었을 때 힘들게 일하고 저축합니다. 신체적 자유를 위해서 매일처럼 열심히 운동하고 체력을 단련합니다. 정치적 자유를 위해서 독재와 맞서 싸웁니다. 왜 이처럼 자유의 대가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일까요? 아무도 자신이 가진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자유를 희생시켜서라도 더 행복하고 더 많이 가질 자유를 원합니다. 절대 권력을 지닌 독재자 역시 자유를 원한다는 역설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유”도 이런 것입니까?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서 힘들게 싸워야 합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그 대가로 쟁취하는 그 무엇입니까? 사실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유”란 실로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은 무가치 한 것이 아니라 가치를 매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The gospel is priceless). 가치를 매길 수 없으니까 그것을 살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 외에는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 즉 “하나님의 자유”의 역설이지요. 그러니까 자유는 그저 주든지 아니면 누군가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누가 그 대가를 치렀습니까?
하나님 자신 즉 ‘그리스도’입니다. 신학자 ‘바클레이’(W. Barcley)는 말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묻는 것이다.” ‘피터슨’(E. Peterson) 목사도 “자유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엇을 할까 생각하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 생각하는 곳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유는 우리가 돈을 주고 사는 것도, 노력하여 쟁취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나, 설교나, 기도나, 금식이나, 선교나, 교육이나, 훈련이나, 자선이나, 섬김이나, 나눔이나, 부흥회 등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유는 이 모든 종교적 행사와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모든 종교는 구속이며 거짓이며 위선일 뿐입니다. 자유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그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일 뿐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누구든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누구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나는 진정 자유롭습니까? 어떠한 인습이나, 제도나, 조직이나, 이념이나, 가치관으로부터 말입니다.
세상과 그리스도인. 이 마지막 질문은 자유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과연 어떤 존재이며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와 같은 질문은 수없이 많은 책에서 단골 주제로 다루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대표적인 저서로 ‘쟈크 엘룰’의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쟈크 엘룰. 「세상속의 그리스도인」. 이문장 역. 서울: 대장간, 1992.
자유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날 수는 없습니다. 국가든 개인이든 해방에 이어 독립을 누리게 될 때, 비로소 자유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그리스도인을 “새로운 피조물”(new creature)로 지칭하고 있습니다(고후 5:17). “새로운 창조”는 돌이킬 수 없는 혁명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완성을 향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궁극적 완성을 향한 새로운 구속” 하에 자신을 내어놓는 것을 말합니다. ‘쟈크 엘룰’은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세상과 천국 사이에 윤리, 혹은 문화라는 다리를 놓고 그 한 가운데 안주하려고 한다. 그러나 윤리나 문화와 같은 인위적인 노력으로써 신앙의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이 노력은 선택 가능한 여러 방법 중 가장 반 기독교적인 태도다. ‘쟈크 엘룰’, ibid.
무슨 말입니까? “새로운 피조물”은 그의 삶의 방식을 위해서 단순히 기존에 존재하고 있는 제반 사상이나 이념, 인습이나 전통, 윤리나 문화 중에서 택일하는 존재가 아니라, 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해 가는 존재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일은 상당히 고통스럽고 힘들며 현대판 유대주의자들로부터 배척과 경멸을 받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두 나라 즉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끼어 살아가야만 하는 이중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진정 자유인입니까?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연습과 토의
1. 1:11-12의 두 절은 책이나 논문으로 치면 제목과도 같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갈라디아서> 전체의 형식과 구조를 다시 한 번 회고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2. “바울의 복음”과 “초대 교회의 복음”(흔히 케리그마로 불림)의 동질성과 이질성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3. ‘바울’이 말하는 “신비”(또는 비밀)란 무엇입니까?
4. 현대판 ‘할례’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그리고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에 대해서도 나누어 봅시다. 그 근거는 무엇이며, 없다면 왜 그러한지...
제 4과: 회심 그 이전과 이후
4
간증과 변론 (2):
회심 이전; 회심; 소명
(1:13-17)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16하-17절상)
사도는 이 단락에서 그의 회심과 소명, 그리고 이를 전후한 그의 삶에 대해서 짧게 회고하고 있습니다. 물론 회심하기 이전이나 이후 할 것 없이 그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섭리 하에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인데, 이는 그가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을 전하게 된 계기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리스도의 계시”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그가 전하는 복음이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전수받았거나 위임받았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 부인하거나 반박할 수 없는 ‘알리바이’ 때문인 것입니다. 회심을 전후해서 이들을 만날만 한 장소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유대인으로서의 지난 삶에 대해서 언급함으로써 그의 극적 회심과 소명에 대해서 밝히고는 있지만, 강조하고 싶은 핵심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복음과 관련해서 어느 누구를 만난 적도, 상의한 적도 없다는 사실입니다(16하-17절). 바로 이런 점에서 본문이 기능하는 바는 법정에서 흔히 사용하는 일종의 ‘알리바이’성 자기 변론입니다. 이런 식의 변론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1:18-24).
왜 사도는 이처럼 강력한 부정을 통해서 자신을 변론할 필요를 느꼈을까요? 그의 반대자들을 염두에 둔 발언임에 분명합니다.
문학과 역사
사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사도직에 대한 논란과 그가 전하는 복음의 출처에 관한 논란이 그것입니다(1:1). 사도는 주제 선언에서 “그의 복음”이 사람들로부터 비롯되었거나, 사람들을 통해서 배운 것이 아니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1:11-12). 어떻게 그것을 입증할 수 있을까? 개인적인 간증을 통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1:13-2:14). 예컨대, 유대주의자로서의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하게 된 이야기, 회심과 함께 이방인 선교를 향한 소명, ‘예루살렘’ 방문 이야기,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의 만남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합니다. 그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들도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이라는 말로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들었거니와...”(13절상). 그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란 좁게는 13-14절의 내용, 즉 사도가 회심하기 이전의 삶에 관한 이야기로 국한할 수 있겠습니다만, 보다 넓게는 1:13-2:14에서 밝히고 있는 그동안의 그의 삶 전체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가 이전에 ‘갈라디아’ 교인들과 함께 있을 때, 이 모든 일들에 대해서 세세하게 다 이야기해 주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만, 지금 다시 그간의 일들을 이처럼 상세하게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의 반대자들이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들을 날조하여 유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를 반박하고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전의 간증들을 다시 반복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가 본문에서(13-17절) 밝히고 있는 회심 이전의 삶과 회심에 이은 이방인 선교를 위한 소명에 관한 것입니다. 그가 원래 유대교인이었음을 먼저 밝히고 있는 것도 그를 향한 거짓 소문을 반박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자신은 처음부터 이방인들에게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을 전하도록 준비된 자는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은 정반대였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를 철저하게 박해하고 파괴하는데 혈안이 되어있을 정도로 유대교 광신자였다”고 그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해서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13-14절)
주후 2-4세기경의 작품으로 알려진 일부 문헌에서도 ‘바울’은 유대∙기독교인들이 기피하고 혐오하는 인물로 그리고 있습니다(Longenecker). 예컨대 「야고보의 승천」은 ‘바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폄하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소 사람이며 그의 부모는 모두 헬라인이다. 그러든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오랫동안 머물게 되자 그곳 (대)제사장의 딸과 결혼할 마음이 생겼고, 이로 인해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그는 격노하여 할례와 안식일과 율법을 거부하는 글을 썼다.
2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는 또 다른 책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바울’을 향해서 “불법적이고 어리석은 교리를 전하는 대적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작품에서 ‘바울’은 “전 세계를 향한 유대∙기독교의 선교를 단절시키는 자”로 비난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나 ‘야고보’ 사도들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시몬 메구스’(Simon Magus)와 같은 인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을 향한 이런 비난이나 공격이 1세기의 유대∙기독교의 한 종파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만,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 역시 이런 식으로 당시 교인들을 회유하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바울’이 자신은 원래 유대교인이었다는 점을 밝히면서 논쟁을 시작하고 있는 것도(13-14절), 반대자들의 이러한 시도 즉 유대인으로서의 ‘바울’의 삶과 경력은 무가치하며 별것 아니라고 하는 반대자들의 공략과 회유를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회심사건이나 이방인 선교를 위한 소명에 관한 간증과 관련해서도(15-17절), 특히 반대자들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입니다. 첫째는 ‘바울’의 신앙 고백은 인간적인 만남이나 가르침을 통해서도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회심 이후 그의 활동에 관해서인데, 처음에는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으나 나중에는 그로부터 탈선해버렸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거짓 소문에 대해서 ‘바울’은 이방인 선교의 소명은 하나님의 예언적 계시에 따라 이루어진 초자연적인 사건이며, 이와 관련해서 ‘예루살렘’의 어떤 지도자들도 한참동안 만난 적이 없다는 점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15-17절)
신학과 신앙
1. 회심 이전(13-14절)
‘알리바이’는 법정에서 자신의 주장이 정당한 것임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사도는 자신의 입장을 먼저 밝힌 후(1:11-12), 자신의 입장이 정당한 것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자료들을 동원하여 ‘알리바이’의 자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서 밝히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그것도 그의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13절상)
이 구절은 실은 접속사 “왜냐하면”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해명성 발언에 적절한 접속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의 독자들이 들어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란 무엇입니까? 구문론적으로 볼 때 이 동사는 13-14절만을 포함하고 있어, 사도의 회심 이전의 삶만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의미론적으로 보다 포괄적으로 회심 이후 지금까지의 삶과 활동 전체를 지칭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참고, 1:13-2:14).
“유대교”란 “유대교적인 세계관과 행동 방식”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신약>에서는 13-14절에서 유일하게 두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아마도 이방인들이 경멸하는 뜻으로 만들어낸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 유사한 경우로 ‘안디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부르던 것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문헌에서도, 참고: <제 2 마카비서>(2:21; 8:1; 14:38); <제 4 마카비서>(4:26).
이 단어를 ‘헬레니즘’과는 대조되는 “유대교와 유대적인 삶의 방식”을 의미하고 있어, 그 유래가 어디든 적어도 유대인들에게는 명예로운 호칭으로 변한 것 같습니다(Longenecker).
사도는 이전에 그가 ‘유대교’인으로 있을 때 행한 일에 대해서 두 가지 예를 들어 그의 설명에 일관성을 더하고 있습니다:
13b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13후-14절)
이 문장이 의미하고 있는 바는, “박해하고 멸하는” 사도의 행위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반복적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교회를 단순히 지역교회가 아닌(1:2, 22), 참고: 살전 1:1; 살후 1:1; 고전 1:2; 고후 1:1.
“하나님의 교회”로 호칭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그의 이해를 보다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문맥상 “하나님의 교회”(th;n ejkklhsivan tou' qeou)는 “유대교”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도가 이런 호칭을 통해서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분명해 보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성은 당시 ‘유대교’의 그것을 뛰어넘는 보다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것에서 찾아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기인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가 박해한 교회는 주로 ‘유대인’들로 구성된 초기 유대∙기독교 공동체였음에도 주저 없이 “하나님의 교회”로 부르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인종과 지역의 벽을 뛰어넘는 우주적 교회에 대한 사도의 이해가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사도가 이러한 “하나님의 교회”를 왜 그처럼 광란에 가까울 정도로 박해하고 파괴하려했을까? 혹자는 그 이유를 ‘바울’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찾으려 합니다. 즉 바깥으로 드러난 살기등등한 모습은 실은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의심과 갈등을 잠재우고 싶은 처절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아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물론 상대를 누르기 위해서 그에 대해서 알아야 하듯이, ‘바울’이 신흥 종교 기독교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지식은 가졌을 것이고, 이에 종교적인 진지함이나 순교자적인 열정이 더하여 그를 고통스럽게 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회심을 설명하기 위한 이러한 심리적학적인 접근 방식은 오늘날 큰 인기를 얻고 있지는 못한 듯합니다. 오히려 더 나은 설명으로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 만연해 있던 종교적 광신을 그 이유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바울’같은 종교적 순수성과 열정을 지닌 사람의 눈에는 새로 발흥하는 종교가 분파주의를 조장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단으로 비쳤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이런 종교를 처단하는 일에 앞장선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당시 ‘바리새 유대인’들에게 있어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일은 메시아의 시대를 맞이하는데 있어 필수적인 전제조건이었다는 점입니다. ‘바울’의 “광란”도 이런 맥락에서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행동의 지표로 삼을 만한 예들이 <구약>이나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 ‘모세’가 ‘바알브올’에서 음란한 이스라엘 인들을 처형한 사건(민 25:1-5); (2) 제사장 ‘비느하스’가 ‘모압’ 평원에서 ‘이스라엘’ 남자들과 ‘미디안’ 여자들을 처형한 사건(민 25:6-15); (3) ‘맛디아’와 ‘하시딤’이 그의 백성들 중에서 배교자들을 가려내 처형한 사건(마카비 1서 2:23-28, 42-48). 아마 ‘바울’의 귓전에는 이런 행동을 칭찬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민 25:11-13).
결론적으로 성경과 역사적 선례는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기대 심리 등이 한데 어우러져, ‘바울’로 하여금 배교자들을 색출하여 처형하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할 수 있게 했을 것입니다. 특히 그는 ‘메시아’의 도래를 앞두고 ‘이스라엘’은 율법에 대한 믿음과 충성에 있어 하나로 연합하여 순수함과 깨끗함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말할 나위 없이 바로 이런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칭찬을 듣는 일로 믿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두 번째 예로 제시하고 있는 지난 삶의 모습은 그가 동료 ‘유대인’들에 비해서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 동사는 원래 항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충돌에도 불구하고 전진하다”는 의미입니다. 이후 이 단어는 “영적∙도덕적 발전을 거듭하다” 또는 “배움에 있어 큰 발전을 이루다” 등의 의미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로 신약에서 사용되고 있는 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눅 2:52; 롬 13:12; 빌 1:12, 25; 딤전 4:15; 딤후 2:16; 3:9, 13.
본문에서 이 동사가 과거 진행형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대교’인으로서 ‘바울’은 영적∙도덕적으로 지속적으로 진전을 이루어 간 것으로 보입니다.
혹자는 사도가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다”는 고백을 두고, 그가 소위 “열심당”(Zealot)으로 알려진 극렬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나,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지나치게”는 단순한 비교형 부사일 뿐입니다. 이와 유사한 표현은 그의 서신 다른 곳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고후 1:12; 7:13, 15; 11:23; 12:15.
그가 비교하고 있는 대상은 동 시대의 다른 유대인들로서, 엄격한 율법주의자 정도로 그를 이해하면 충분할 것입니다(참고, 행 22:3). 그리고 그가 말하는 “조상의 전통”이란 ‘유대 바리새’ 학파의 가르침이나 행습들로서 나중에 ‘미쉬나’(Mishnah), ‘미드라쉼’(Midrashim), ‘팔레스타인’이나 ‘바벨론’의 ‘게마라스’(Gemaras) 등으로 다양하게 분파해 간 전승을 의미합니다. 또한 ‘바울’과 동 시대의 회당에서 유래한 보다 대중적인 해석 체계도 그 속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인데, 현존하는 ‘타르굼’(Targumim)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인 즉은 그는 열렬한 ‘유대주의’자로서 신망을 얻고 있었으며(참고, 행 22:3; 빌 3:5-6), 그것을 버릴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2. 회심(15-16절상)
그의 회심과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 사도가 간증하고자 하는 논지의 절정은 이 단락의 거의 끝부분에 가서야 드러나고 있습니다: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16하-17절상). 그러나 이처럼 강력한 ‘알리바이’를 펼치기 위해서, 그는 먼저 자신의 사역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긍정적인 톤(tone)으로 밝혀두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5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상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15-16절상)
그를 “부르고”, “택정하신”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런 표현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부를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렘 1:5; 사 49:1-6). 사도가 자신의 사도직의 출처에 관해서 이런 표현을 차용하고 있는 것은 수차례 언급한 바 있듯이 분명 의도적인 것입니다. 사도는 <로마서>에서 그의 복음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미 예언 된 것이었다고 강조하고 있는데(롬 1:1), 이 논리를 조금만 연장하면 그는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이미 태어나기 이전부터 “선택”되었고 “소명”을 받은 자로서 이들과 같은 반열에 서 있는 것입니다. “선택”과 “소명”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기쁘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는 선언은 이어지는 절정을 향한 토대와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3. 회심 이후(16하-17절)
그 절정이란 두 번에 걸친 강력한 부정과 한 번의 긍정으로 이루어져 있는 ‘알리바이’입니다:
16하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16하-17절)
바로 이점이 사도가 강력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핵심으로서 회심 이후의 그의 행적에 관한 입증입니다. “혈육”은 원문에서 “혈과 육”으로 두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영어 번역에서처럼 단순히 “사람들”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이 구절은 따라서 그의 복음이 “사람들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11절의 선언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만나러 가지 않았다는 주장은 그의 복음이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라”는 12절의 선언에서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도들을 언급하면서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이라고 불러줌으로써,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열두 사도들과 같은 반열에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아라비아로 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간증은 다소 애매모호합니다. 그가 정확히 ‘아라비아’의 어느 지역으로 갔는지, 그리고 왜 갔는지가 분명치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당시 존재하던 ‘아라비아’의 ‘나바틴 왕국’은 꽤나 넓은 지역에 걸쳐 있어, ‘요르단’ 계곡의 동쪽에서부터 남서로는 ‘사해’, 그리고 북동쪽으로는 ‘유프라데스’ 강까지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중에서 문화적 중심지로 왕국 남쪽의 ‘페트라’, 그리고 북쪽의 ‘보스트라’를 꼽을 수도 있겠지만, 이나마도 시대에 따라 ‘다메섹’과 같은 동쪽 ‘시리아’ 지역의 도시들이나 ‘요단’ 동편의 여러 도시들도 포함되기도 했기 때문에 위치 추정은 더욱 힘들어 집니다. 이 왕국은 주전 9년에서 주후 40년까지 ‘아레타스 4세’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의 재위 기간 동안 ‘다메섹’이 중심 지역이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참고, 고후 11:32). 왕국의 국경 역시 시대에 따라 변천을 거듭한 것으로 보이며, 사도가 “내가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다”는 언급에서 볼 수 있듯이 그가 서신을 쓸 당시에 ‘다메섹’은 더 이상 ‘아라비아’의 일부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가 간 곳이 ‘다메섹’은 아니었다는 사실 외에는 정확하게 그가 어디고 갔는지 알 길은 없어 보입니다. 나중에 그는 ‘시내 산’이 ‘아라비아’에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어(4:25), 일부 학자들은 그가 간 곳이 ‘시나이’ 반도 부근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가 ‘아라비아’라고 할 때 아마도 ‘나바틴’ 왕국을 지칭한 듯 하며, 그리고 국경이 근처에 있다고 말한 듯합니다. 하지만 그가 ‘다메섹’에서 얼마나 떨어진 곳으로 갔는지 그의 짧은 선언을 통해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은 그가 왜 그곳으로 갔는가 하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추측하기로 이방인 선교를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듯한 추측은 또 있습니다. 즉 사색과 명상을 위한 시간과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그것입니다. 사실 그는 지난 삶을 돌아보고,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계시의 의미를 음미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유대교’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으로부터 될 수 있으면 멀리 벗어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나중에 “다메섹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언급은 <사도행전>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의 회심과 소명에 관한 이야기를 간접적이긴 하지만 확인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참고, 행 9:1-22; 22:5-16; 26:12-20). ‘다메섹’은 주전 64년 이후부터 ‘시리아’에 있는 ‘로마’의 영지로서, ‘데가볼리스’로 불리는 열 개 도시 중의 하나로서 생활과 경제의 중심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현존하는 건축물이나 비명 등을 통해서 볼 때, 이 도시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광범위하게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도시에는 ‘아랍’인들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한 때는 ‘아라비아’의 ‘나바틴’ 왕국의 통치 하에 들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유대인’들도 많이 있었는데, ‘요세푸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들 중 10,500여 명이 주후 66년 반 로마 소요 시에 ‘다메섹’ 사람들에 의해서 살해를 당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 도시로 ‘바울’은 공회의 허락을 받아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처단하러 떠났으며, 도중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그 도시에서 그가 처음으로 전한 ‘메시지’가 “예수가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행 9:20-22). 그가 ‘아라비아’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곳도 바로 이 도시였다고 사도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라비아’나 ‘다메섹’은 어느 기준으로 보드라도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바로 이 부분이 그가 강조하고 싶은 점입니다.
교훈과 적용
회심 이전. 개인적인 간증은 때로는 강력한 복음 전도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그 간증이 극적인 변화를 수반할 때 더욱 그러합니다. 물론 이것이 복음 전도의 보편타당한 수단이나 방법이 될 수는 없을지라도, 누구든 한두 가지 정도의 개인적인 <출애굽>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마땅히 그래야 할 것입니다. 극적인 변화로 말할 것 같으면 ‘바울’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셨다는 점에서 그의 회심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맞먹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는 자신의 개인적인 ‘출애굽’ 에피소드를 먼저 언급함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온갖 날조와 비방을 깨부수고 정당성을 확보하려 합니다.
그가 입증하고자 하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요약하자면, 자기가 전하는 복음은 결코 어느 누구로부터 전수받았거나 배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직접 받았다는 사실입니다(11-12절). 그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요? 즉 그에게 <출애굽> 즉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이 미쳤다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요?
그보다 먼저 한 가지 합의해 두어야 할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든 하나님의 권능의 팔에 붙잡히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이런 합의가 가능할까요? ‘유대’인이라면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십이 년 동안을 혈루증을 앓던 한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졌을 뿐인데도 즉시 완쾌되었다는 이야기를 그들이 들어 알고 있든 모르든 상관없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족속입니다.
이런 합의를 바탕으로, 사도는 자신의 지난 삶이 어떠했는지 먼저 밝히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13-14절). 그가 ‘유대’인으로 살고 있을 때 자신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한 마디로 그는 1 세기의 ‘탈레반’이었습니다. 광신자였고, 전심을 바쳐 헌신했으며, 기독교인을 비롯한 이교도들은 멸망을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며, 따라서 이들을 잡아 죽이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신의 소명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면서 그의 지난 행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기독교인이라면 남녀를 불문하고 발견되는 대로 잡기 위해서 집집마다 돌아다녔고, 잡은 그들을 감옥에 넣었습니다(행 8:3). 이들을 죽이고자 할 때 찬성의 표를 던졌습니다(26:10). 단순히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아예 없애버리려고 돌아다녔습니다. 이것이 그의 지난 삶이었습니다.
회심.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인과율(因果律)은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로 시작하는 회심에 관한 간증은 이전의 삶에 대한 간증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스토트’(J. Stott) 목사님은 이러한 대조를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죤 스토트, ibid.
즉 13-14절에서 사도가 자신에 대해서 말할 때,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다...내가 교회를 멸하려고 했다...내가 유대교에 열심이었다...내가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해 매우 열심이었다” 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회심과 관련한 간증 문에서(15-16절상)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신 하나님”;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 “내 안에 그의 아들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 하나님”. 우리는 회심에서 밝히고 있는 하나님의 주도권과 은혜를 조금 더 상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신 하나님. 그의 회심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야곱’이나 ‘예레미야’처럼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사도가 될 자로 구별되어있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의 회심은 그 자신에게 속한 어떤 기질이나 특징과 상관없이 이루어진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었습니다.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 출생하기 전부터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은 역사적 소명으로 연결됩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과분한 사랑을 뜻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항해서 투쟁해 왔습니다. 그는 자비를 받을 자격도 없었으며,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를 찾았고 은혜로 그를 불렀습니다.
내 안에 그의 아들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내신 것은 오직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이전에도 이 인물에 대해서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예수’는 사기꾼이었고, 미혹하는 자였습니다. 이런 지식은 어디서 온 것일까?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로부터 말미암은 것인가? ‘예수’에 대한 잘못된 지식이야말로 사람들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입소문이나 학교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서 ‘예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세상의 구세주”요, “나의 주인”입니다.
회심 이후. 이것으로 사도의 ‘알리바이’는 충분하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회심 자체만으로는 그가 전하고 있는 복음이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이 아님을 증명하기에는 충분치가 않습니다. 회심 이후 다른 사도로부터 배웠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이 마지막 두 절은 사도가 제시하려고 하는 ‘알리바이’의 핵심이자, 절정이기도 합니다. 그가 말하고 싶은 요점은 이것입니다: “나는 ‘예루살렘’에 있는 어떤 사도들과도 복음에 관해서 논의해 본 적도, 배운 바도 없다.” 그는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세 가지 알리바이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증거가 그가 ‘아라비아’로 갔다는 사실입니다(17절).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도는 ‘다메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전하면서 며칠을 보냅니다(행 9:20).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그는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복음을 전하려고 선교사로서 그곳에 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크리소스톰’은 ‘바울’이 그곳에 있는 야만스럽고 미개한 종족들을 복음화 하려고 갔다고 말합니다만, ‘라이트푸트’(Lightfoot)가 쓰고 있듯이 “그의 아라비아 방문은 두껍고 어두운 베일에 쌓여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쩌면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가정을 상정해 봄으로써,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교훈으로 삼는 것도 전혀 무익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는 바는, 그가 ‘아라비아’로 간 것은 즉 사색과 명상을 위한 시간과 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그것입니다. 사실 그는 지난 삶을 돌아보고,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계시의 의미를 음미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유대교’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으로부터 될 수 있으면 멀리 벗어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거기서 3년을 머물렀습니다(18절).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접촉하기에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공 속에 그는 홀로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함께 한 자가 있었다면 오직 그의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습니다.
기독교 사역은 “관계의 사역”임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중요한 간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 무엇을 하느냐?”를 물어야 할 때입니다. 그분을 만나기 위한 특별한 시간과 장소가 있습니까? ‘마르다’처럼 ‘그리스도’를 위해서 너무 바쁘게 일하느라 그분과 함께 할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닌가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이런 특별한 시간과 장소야말로, 나의 신학과 신앙을 폄하하거나 비방하는 나의 대적자들에 대한 변증에 필요한 기초를 마련해 줄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문학적인 기능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2. 본문은 그 형식에 있어 법정에서의 ‘알리바이’에 해당됩니다. 그가 제시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3. ‘바울’이 말하는 회심 이후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는 언급을 묵상해 봅시다.
4. 나의 개인적인 ‘출애굽 사건’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나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반대와 비방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하고 있습니까?
제 5과: 첫 예루살렘 방문
5
간증과 변론 (3):
첫 예루살렘 방문
(1:18-24)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18절상)
사도가 전해주는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알리바이’는 회심 이후 (1) ‘예루살렘’을 처음 방문한 것과 (2) 이후 ‘시리아’와 ‘길리기아’에서 복음 전도 활동을 한 것에 관한 짧은 이야기입니다. 특히 ‘예루살렘’ 방문과 관련해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하기까지 합니다. 그만큼 이 방문과 관련해서 입증하고자 하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방문 그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즉 그 방문이 향후 자신의 권위와 복음에 아무런 도움도 영향도 주지 않았음을 강조하는 데 있습니다. 그를 둘러싼 비방은 무엇이며, 이 방문 이야기를 통해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사도가 ‘예루살렘’ 방문 이야기를 통해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세 가지입니다.
그가 들려주는 다섯 번째 이야기 역시 네 번째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예루살렘’ 교회가 있는 ‘유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방 지역 ‘시리아’와 ‘길리기아’로 복음 전도 여행을 간 이야기를 통해서 사도가 전해주는 두 가지 핵심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행의 결과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극적인 수사적 대비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무엇인지 파악해 봅시다.
문학과 역사
사도가 이어서 들려주는 세 개의 이야기들은 모두 ‘예루살렘’과 관계된 것들입니다(1:18-2:10). 이들 이야기는 모두 접속사 “그리고 나서”(e[peita, 에페이타)로 시작하고 있어, 이들 이야기들이 시간적으로 연속적으로 일어난 일련의 사건임을 알 수 있게 합니다:
(1) (그리고 나서) 그 후 삼년 만에 (1:18)
(2) (그리고 나서) 그 후에(1:21)
(3) (그리고 나서) 십사 년 후에(2:1)
물론 이 접속사는 대부분의 번역본에서는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방문과 관련된 이들 사건들이 구체적으로 언제 이루어졌는가는 “삼 년 후”(1:18)와 “십사 년 후”(2:1)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선 이 두 시점이 각각 “다메섹 사건”을 기점으로 계산한 것이거나 또는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돌아온 시점을 기준으로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삼 년”과 “십사 년”은 하나의 사건을 기점으로 “그로부터 삼 년”과 “그로부터 십사 년”을 의미할 수도 있거나, 또는 서로 연속적인 시점 즉 “그로부터 삼년 후에 다시 십사 년” 즉 “십칠 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바는, 사도가 과연 “일 년”을 완전한 한 해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을 수도 있거나 아니면 한 해의 일부로 사용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바울의 복음”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사도들로부터 배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반박하기 위해서 사도가 제시한 증거는 “예루살렘 사도들과의 접촉이나 만남”과는 전혀 무관한 “다메섹에서 주님과의 극적인 만남”과 “아바비아 여행”에 관한 것이었습니다(1:13-17). 이어지는 세 이야기가(1:18-2:10) 모두 “그 후”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는 것도 그의 이야기에 어떤 단절이나 불연속성이 없음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는 이곳에서 그의 네 번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1) 회심 이후 ‘예루살렘’의 첫 방문과(18-20절) 이후 ‘시리아’와 ‘길리기아’로 돌아온 이야기(21-24절)가 그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앞에서 시작한 바 있는(16하-17절) ‘알리바이’성 변론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예루살렘 방문(18-20절)
사도가 들려주는 네 번째 이야기는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이 방문 이야기를 세 가지 측면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18절)
삼년 만에. 이 방문이 정확하게 언제 이루어진 것입니까? “그 후 삼년 만”이라고 사도는 밝히고 있습니다. 이때 그가 사용하고 있는 접속사, “그리고 나서”는 시간적이거나 또는 논리적인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코이네 헬라어’에서 흔히 사용하는 단어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가 어떤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모호함이 남는 것은 사실입니다. 소위 “다메섹 사건”일 수도 있고, ‘아라비아’에서 ‘다메섹’으로 돌아 온 삼 년일 수도 있습니다. 전자(前者) 즉 “다메섹 사건”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다”(16절하)는 사도의 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즉 그가 회심 이후 “곧바로” 아무나 만나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면, “그 후 삼년”도 바로 이 사건을 기점으로 하고 있어야 한다는 논리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삼 년”이 완전한 년 수라기보다는 단순히 “삼년 째 되는 해”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라, 정확한 기간은 알 수 없을 듯합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자신의 사도직분이나 사역에 관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로부터 위임이나 인정을 받기 위해서 한 동안 ‘예루살렘’을 방문한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가 주님을 만난 지 3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뿐이었습니다.
베드로와 15일을. 그렇다면 비록 한참 뒤이긴 하지만 그가 ‘예루살렘’을 찾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게바’ 즉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방문하다”(iJstorevw, 히스토레오)는 <신약>에서 이곳에서 단 한 번 등장하고 있는 단어로서, 고전 ‘헬라어’에서는 “조사하다” 또는 “질의하다”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다른 문헌에서는 “이야기하다”, “보고하다”, 또는 “교제를 나누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R. Longenecker, 37쪽.
사도가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례는 아마 이 마지막 의미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피터슨’(E. Peterson) 목사님의 말대로 그가 ‘베드로’를 만나러 간 것도 무슨 강의나, 보고나, 선전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사적인 만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E. Peterson, 71쪽.
사도가 ‘베드로’와의 만남에서 또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와 함께 15일을 지냈다는 사실입니다. 이 기간은 그가 ‘예루살렘’을 떠나 있었던 3년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렇다면 사도가 ‘게바’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요? 비록 그가 ‘게바’로부터 무슨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라 사적인 “교제”를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서라든지 자신에 대한 평가를 탐색하기 위해서 간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점 ‘피터슨’(E. Peterson) 목사님도 맑힌 바 있다고 위에서 소개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의 연합을 강조하고 있는 ‘바울’이라면, 참고. 갈 3:26-29; 고전 1:10; 12:12.
‘게바’와의 만남을 통해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이와 무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3년을 기다렸다는 사실도, 그가 ‘예루살렘’ 사도들과 차별성을 시도하려고 했다든지 또는 혼자서 고고한 척 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예루살렘’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방문지로서 가장 적합하지 않은 곳입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그는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주의자들에게는 변절자로 낙인찍혀 있었을 것이며,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한 때 그들을 박해하던 자로서 기피인물이 되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사람이 15일 간을 함께 하면서 나눈 대화의 주된 내용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단순히 날씨 이야기나 하면서 15일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함께 머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각자의 체험과 지식, 그리고 소명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특히 ‘바울’의 편에서 보자면 ‘베드로’가 들려주는 예수님의 생전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서 많은 것을 듣고 배우는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베드로’를 통해서 새로운 지식을 얻고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되었다고 해서 그가 다른 사도들보다 열등하거나 종속되어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의 사도직과 이방인 선교는 전혀 별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과 우열을 가리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야고보 외에는. 이어지는 사도의 알리바이는 무엇입니까?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19절)
이 구절은 구문론적으로 다소 애매모호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즉 ‘바울’이 ‘야고보’를 사도 중의 한 사람으로 보고 있는지, 또는 그들과 구별하여 언급하고 있는지가 문장 자체만으로는 분명치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전자의 입장을 취한다면, ‘바울’이 만난 사도는 두 사람이 될 것이고, 반대로 후자의 경우라면 해석은 다소 달라집니다. 즉 ‘바울’이 만난 사도는 ‘베드로’가 유일한 인물이며, 그 외 ‘예루살렘’에서 만난 인물은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가 유일하다는 해석이 가능해 집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는 예수님의 네 형제 중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는 바로 그 인물임이 분명합니다(막 6:3; 마 13:55).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같은 이름을 가진 자가 두 사람 있는데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그들입니다(막 3:17-18; 행 1:13; 12:2).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그의 형 생전에는 그를 믿고 따르지는 않았으나(참고, 막 3:21, 31-35; 요 7:3-5), 주님의 부활 이후에 회심하여 교회의 중요한 일원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행 15:13; 21:18-19; 갈 2:1-10; 고전 15:7). 이후 그는 교회의 지도자급 인물로 급부상하여(행 15:13; 21:18-19; 갈 2:1-10),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떠난 후로는 교회의 중심 지도자가 됩니다. 그가 단순히 예수님의 친동생이라는 이유로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예단하는 것은 적절치 못합니다. 오히려 급격하게 성장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 지도자가 필요한 상황에서, ‘다윗’의 후손이자 예수님의 동생인 그가 자연스럽게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주후 62년 ‘안나’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당시 순교하였으며, 이후 “의인”의 칭호를 받게 됩니다. 이후 ‘에비온 파(Ebionites)’ 추종자들은 그를 열두 사도의 반열에 놓기도 하였으며, 초창기 일부 ‘유대∙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한 가지 ‘야고보’와 관련하여 격렬한 논쟁 점 중의 하나는 <신약>에서 호칭하고 있는 바, “주의 형제”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첫 번째 견해는 말 그대로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 형제로서 ‘요셉’과 ‘마리아’가 낳은 자식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견해는 ‘터툴리안’(AD 160-220)과 동 시대의 사람들 및 ‘로마’의 ‘헬비디우스’(Helvidius, AD 380) 등이 받아들였던 견해로서, 이 견해를 ‘Helvidian’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두 번째 견해는, 그를 예수님의 “이복 형제” 즉 ‘요셉’이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들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는 ‘에피파니우스’(AD 315-403) 등이 주장한 것이라 하여 흔히 ‘Epiphanian’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견해는 첫 번째와 대치되는 것으로서, ‘야고보’는 ‘알패오’와 ‘글로바의 마리아’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로서 예수님의 사촌 형제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는 ‘제롬’(Jerome, AD 347-420)이 처음 제기하였는데, 이 주장을 통해서 ‘마리아’가 예수님 출산 이후로는 아무 자녀도 낳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견해를 흔히 ‘Hieronymian’으로 부르고 있으며, ‘로마 카톨릭’의 공식적인 입장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주의 형제”에 대한 해석이 교리에 따라 다양하게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교리적 차이만 아니라면, ‘야고보’가 예수님과 이모동부(異母同父)의 관계에 있다는 견해는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어쨌거나 사도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분명합니다. 무엇입니까?
그가 누구든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만난 유일한 인물은 ‘베드로’와 ‘야고보’ 두 사람 뿐이며, 이들로부터 무슨 가르침을 받아 자신의 이방인 사역을 의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주장입니다. 결국 사도가 말하려는 요점은 이것입니다: “내 비록 예루살렘으로 가긴 했지만, 내가 주를 만난 지 3년이 지난 후였으며, 그곳에서 유명하다는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지만 그것은 지극히 사적인 것이었고, 그 기간도 15일에 불과했다. 이 기간 동안 무슨 길고도 상세한 복음에 관한 가르침을 전수 받을 수 있었겠느냐?”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도는 신학적 논쟁의 법정에서 단순히 자신의 ‘알리바이’를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듯합니다. 그만큼 고소인들의 악의에 찬 거짓 선전과 비방이 심각하다고 판단한 것이겠지요. 이제 그는 ‘알리바이’에 이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더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20절)
사도의 이런 태도는 과연 온당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도 그 어떤 이름으로도 결코 맹세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마 5:33-37)? 우리는 사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로마법” 제도 하에서 “(신의 이름을 건) 맹세”는 특별한 기능을 했던 것 같습니다. 즉 민∙형사상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를 법정에서 다루기 전에 피고나 또는 원고로 하여금 “맹세”를 하게 함으로써, 실제 재판의 전 과정을 줄이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관행을 말합니다. 이 때 어느 쪽이든 자신의 정당함이나 또는 무고함을 “맹세”함으로써, 문제를 법정에까지 가져갈 수도 있다는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상대측에 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하건대, 내가 아무 잘못도 없으니 고소하려면 해보라”는 식이겠지요. 당시 ‘바울’이나 그의 독자들도 이런 법 관행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20절이 주는 메시지의 효과는 충분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비록 사도 자신도 ‘그리스도’인이 세상 법정에서 서로를 송사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기는 합니다만(고전 6:1-8),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법정에까지 가지고 가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고후 1:23; 11:31; 살전 2:5). 자신과 그의 복음을 향해서 쏟아지는 거짓 선전과 악의에 찬 비방에 대해서, 교회와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는 사도의 결의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시리아와 길리기아 방문(21-24절)
사도가 전해주는 다섯 번째 이야기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방문에 관한 것으로서, 이번에도 이 방문과 관련해서 그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두 가지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21절)
또 다른 접속사 “그리고 나서”가 암시해 주고 있는 바는 그의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과 이어지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방문 사이에 그 어떤 장애 요인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사도가 방문한 두 지역은 행정적인 구역이라기보다는 보다 넓은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수리아’는 ‘안디옥’ 주변 지방을, 그리고 ‘길리기아’는 그의 고향 ‘다소’ 주변의 지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참고, 행 9:30; 11:25-26).
그가 이 지역에서 ‘예루살렘’을 두 번째로 방문하기 전까지 무슨 일을 했는지에 관해서는 23절을 통해서 추론할 수 있듯이, 복음 전도였습니다. 물론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이곳에서 본격적인 선교 활동을 전개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만, 적어도 그의 초기 선교 사역의 시작으로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그가 <고린도후서> 11:23-29에서 언급하고 있는, “수없이 많은 고난”은 이 기간 동안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로부터 다섯 번, 그리고 ‘로마’ 당국으로부터 세 번의 태장(笞杖)을 받았던 것도 이 시기에 있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사도가 ‘디아스포라’의 회당을 돌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을 때 ‘유대’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로마’ 당국으로부터도 많은 박해와 배척을 당했을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소식은 ‘유대’ 땅으로도 전해졌을 것입니다.
나를 알지 못하고. 그러면 사도가 지금 ‘시리아’와 ‘길리기아’ 방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진정한 의도는 무엇입니까? 그 첫 번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22절)
만일 사도가 ‘예루살렘’ 사도들의 지휘나 감독 하에 있었다면, 두 번의 ‘예루살렘’ 방문 기간 사이에 ‘유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런 곳에서 복음 전도 사역을 수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죽했으면 개인적으로 그와 일면식(一面識)이라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고는 ‘유대’의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아무도 없었겠습니까? 당연히 그의 사역은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과는 전혀 무관한, 전적으로 독립적인 행보였음이 다시 한 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예외가 있다면, ‘예루살렘’ 교회 회중들 중 아무도 ‘바울’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지는 못해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그리고 그가 무슨 활동을 펼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23)
하나님께 영광을. 이 소문은 사도가 날조한 것이 아니라, 그의 복음을 들은 ‘시리아’와 ‘길리기아’의 유대∙그리스도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입니다. 이들이 확인해주고 있는 더욱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전하고 다니는 복음이 다른 복음이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복음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전에 이 복음의 박해자가 지금은 수호자가 되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극적인 대조를 통해서 그의 다섯 번째 간증에 쐐기를 박고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24절)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의 권위와 “그의 복음”을 단순히 인정만 한 것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족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불만으로 일그러져 있는 ‘유대주의자’들의 얼굴과 함께 ‘오버랩’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그의 종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과 사상에 있어서나 어휘에 있어 맥을 같이 하고 있는 듯합니다: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사 49:3).
교훈과 적용
예루살렘 방문.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이야기는 모두 자유의 이야기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한 사람이 어떻게 이전의 생각이나 사상의 한계에서 벗어나게 되었는지, 어떻게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나게 되었는지, 어떻게 죄책감이나 후회라는 감정적 감옥에서 벗어나게 되었는지를 다루고 있다. 결국 우리 모두에게는 변화될 자유, 즉 우주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자유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들은 잘 정리된 수학 공식처럼 되어 있지는 않다.” 유진 피터슨(E. Peterson), 61쪽.
사람들은 곧잘 공식을 선호합니다. 우리를 모든 염려와 근심에서 해방시켜 줄 몇 주 내지 몇 개월 완성의 “처방전”을 기대합니다. 때로는 어떤 심리학적인 주문이나, 종교적인 의식도 이 속에 포함되기도 합니다. 많은 “자유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듣는 천편일률적인 공식들 중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뒤 사회적인 신분상승을 경험했다,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었다,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나 치유와 환희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곧 헌신의 대가라고 주장하는 듯합니다. 자신의 삶이 사회∙경제적으로나 육체∙정신적으로 이전보다 더 힘들어졌다는 이야기는 정말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아무튼 자유는 공식처럼 오지 않으며, ‘가공식품’처럼 급조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지나치게 단순하지도 않습니다. 자유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전 생애에 걸쳐 진행되는 혁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방식입니다. 그는 정형화(定型化) 된 공식을 제시하기는커녕 오히려 역발상(逆發想)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가 들려주는 네 번째 이야기는 ‘예루살렘’ 방문에 관한 것입니다. 이전에 그가 들려주었던 세 이야기는 모두 주로 개인적인 영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1) 이전의 삶; (2) 대역전; (3) ‘아라비아’에서의 고독의 시간. 그런데 사도는 이 네 번째 이야기에서 “나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나누는 것에 관해서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느낌이 정당하고 건전하다는 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의 경험은 자칫 신비주의나 독선으로 흐를 위험이 많습니다. 바로 이것이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개인의 특수하고도 독특한 이야기가 공동체 안에서 나누어질 때, 하나님의 은혜의 공통적인 구조를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자기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격상시키지 않습니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뿐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는 많은 차이를 발견했을 것입니다. 자라온 배경에 있어서나, ‘그리스도’인이 된 과정에 있어서나, 각자가 받은 소명에 있어서나,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세속적이고 거칠고 경건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바울’은 세련되고 도시적이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죄 된 삶에서 회심했고, ‘바울’은 종교적인 삶에서 회심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먹고 대화하고 일하며 그분과 밀접한 인격적 관계를 갖는 가운데 회심했습니다만, ‘바울’은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짧게 그분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의 이런 관계 때문에 자연스럽게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로 그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바울’은 수 년 동안 지도자로서의 권위는커녕 그리스도인들을 살인한 도살자라는 악명을 쓰고 살아야 했습니다(유진 피터슨).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은 불과 15일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만나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나누면서, 경쟁자가 아니라 동역자가 되어 갔습니다. “나의 이야기”가 “그의 이야기”보다 낫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회심의 방식이나 모델 같은 것은 없으며, 회심을 위한 네 단계의 공식 같은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교의 방식이나 대상에도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 이시지만 서로는 다르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일한 은혜의 선물을 받았지만, 서로의 삶 속에서 독창적인 이야기를 창조하고 계신 것도 알았습니다. 두 사도는 이를 발견하고 함께 즐거워하며, 15일을 꿈같이 보냈을 것입니다. 서로를 주장하지도 않았고, 가르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르다고 인정은 했지만 배척은 하지 않았습니다. 각자는 자신이 독특하다는 점을 알았지만 자신만이 독특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이 들려주는 “예루살렘 이야기”가 “역발상”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왜 이것이 역발상인가? 사람들은 늘 권력이나 권위에 줄을 대려 합니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유력 인사로 인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강연이나 저술에서도 세계적인 석학들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이 정당함을 인정받으려 합니다. 사기꾼들도 청와대나 정부 고위 관리와 어떤 식으로든 친분이 있음을 과시하면서 접근합니다. 동국대학교 교수였던 신정아도 세계적인 예일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사기를 쳤습니다. 선거 때마나 국회의원들 대선 유력 후보나 정당을 쫓아 줄서기에 바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유령 신학교라도 좋으니 신학 박사 학위를 받으려고 애쓰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필자 역시 만일 ‘바울’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 필경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 있는 사도들과의 친분을 과시하거나, 그들로부터 중요한 가르침을 전수받았다는 일종의 학위증이나 또는 수료증 같은 것을 받으려고 안달을 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정반대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가기는 했지만, 가서 만난 사람이라고는 단 두 사람 ‘베드로’ 사도와 주님의 동생 ‘야고보’ 뿐이었지. 그것도 15일 간이라는 지극히 짧은 기간이었다네.” 도대체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시리아와 길리기아 방문. 그의 다섯 번째 이야기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나의 이야기”를 “그들의 이야기”로 만들어 주는 것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회심의 이야기가 소명에 관한 이야기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이야기”는 개인적인 것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 머물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로, 더 나아가서 “그들의 이야기”로 흘러 넘쳐야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예루살렘’ 교회 식구들이 아니라, 사도 자신도 전혀 알지 못하던 상인, 선생, 외판원, 학생, 엔지니어, 군인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모두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삶 속으로 ‘바울’ 자신의 “나의 이야기”가 흘러 들어가서, 그들로부터 새롭고도 다양한 “나의 이야기”가 창조되어 나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디도’일 것입니다(2:1, 3).
그런데 이런 일이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나 승인 하에 이루어진 것입니까? 사도가 ‘예루살렘’에 있을 때 만난 사람이라고는 단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그 외는 아무도 그의 얼굴도 제대로 알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그를 가르쳤겠으며, 이방인 선교에 대해서 논의를 할 수 있었겠으며, 승인이나 감독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정 반대로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도가 ‘수리아’와 ‘길리기아’에서 행하는 소식을 나중에 듣고 놀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역발상은 다시 한 번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제 누가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것입니까? ‘바울’입니까 또는 그의 반대자들입니까? 이제 일그러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사도를 쳐다보고 있는 이 사람들 모습이 보입니까?
나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었습니까? “나의 이야기”를 “그의 이야기”와 함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나누며 “우리의 이야기”로 공유해 본 적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로 만들어 본 적은 있습니까? 사람들이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습니까?
연습과 토의
1. 사도가 들려주는 네 번째 ‘알리바이’는 무엇입니까? 그 이야기의 내용은 무엇이며, 사도가 의도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2. 다섯 번째 ‘알리바이’는 무엇이며, 의도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3. 자유의 이야기에 공식이 없다는 말에 대해서 소감을 나누어봅시다.
4.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를 “그의 이야기”와 함께 나누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로 만들어본 적은 있었습니까? 아니면 각자의 이야기로 끝났습니까?
제 6과: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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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과 변론 (4):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
(2:1-10)
(그리고) 십 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2:1)
사도가 들려주는 여섯 번째 ‘알리바이’는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기입니다. 그가 이 방문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아래 네 가지 정도인데, 이를 통해서 그의 반대자들은 그 존립 근거마저 무너지고 있음을 봅니다:
(1) 이번 방문은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지 14년이 지난 뒤였으며, 그가 만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나 다른 지도자들은 그의 사역에 아무 것도 새롭게 더하거나 가르쳐 준 것이 없다.
(2) 그가 간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지, ‘예루살렘’ 교회의 요청에 의한 것도 아니며, 그 교회의 권위에 승복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3) 그들은 각자가 맡은 사역에 대해서 상호 인정과 합의를 이루었다.
(4) ‘예루살렘’ 사도들은 ‘바울’로 하여금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계속 생각하고 돌보아 줄 것을 추가로 요청까지 하였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사도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무엇입니까? 사도가 추호의 양보도 없이 지키려 했던 것은 무엇이며, 양보와 타협을 했던 부분은 무엇입니까? 오늘날에도 자칭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라 하나 실은 “거짓 형제”요 “속이는 자”가 있습니까?
문학과 역사
사도가 변론을 위해서 제시하는 여섯 번째 ‘알리바이’는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기입니다. 앞 과에서 이미 언급한 바처럼, ‘예루살렘’ 방문과 관련한 세 번의 언급이 모두 동일한 접속사 “그리고 나서”(e[peita, 에페이타)로 시작하고 있으며, 이러한 표현과 가장 가까운 영어식 표현은 “and then”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 이야기들이 모두 연속적으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도의 이야기 역시 끊어짐이 없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그리고 나서) 삼년 만에 (1:18)
(2) (그리고 나서) 그 후에(1:21)
(3) (그리고 나서) 십사 년 후에(2:1)
이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과 관련해서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두 번째 방문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으로 알려져 있는 사도들을 만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만남은 첫 번째 방문이 있은 지 14년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십사 년”과 관련해서 앞 과에서도 다룬 바 있습니다만, 이 기간이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기점으로 한 것인지, 그가 ‘아라비아’로부터 ‘다메섹’으로 돌아온 시점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 또는 그의 회심 사건을 기점으로 한 것인지 분명치는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만, 십여 년은 짧지 않은 세월임에 분명합니다.
(2) 그나마 이 방문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지, ‘예루살렘’ 사도들의 요청이나 또는 그들의 권위에 승복하기 위해서 간 것은 아니었다. (3) 방문의 결과는 소위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으로 알려져 있는 사도들과 이방인 선교와 관련해서 “친교의 악수” 즉 동의와 합의가 이루어졌다.
본문은 대략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인데, 첫 번째 단락에 해당하는 1-5절은 방문과 관련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내용상 이곳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은 사도가 주장하려는 논점과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갔다는 점, ‘헬라인’ ‘디도’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하라는 아무런 압력도 사도들로부터 받지 않았다는 점, 일부 거짓 형제들의 저항과 반대에 부딪혔다는 점 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문장의 구성상 그가 소개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연결이 부자연스러우며, 특히 4절에서는 문법적인 “파격”(anacoluthon)이 보이기도 합니다. 문법적 파격이라 함은, 예를 들어 “He who has an ear to hear, let him hear”에서 두 번째 문장은 처음 문장과 다른 구문을 이루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참고: 본문 내용).
구조적으로 볼 때, 3-5절은 일종의 괄호로 처리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좀 더 세분하자면, 이 부분은 두 개의 괄호로 연결되어 있는데, 3절에서 첫 번째 괄호가 있고 4-5절은 두 번째 괄호 속에 포함되어야 할 내용입니다.
두 번째 단락(6-10절)은 내용상 ‘예루살렘’ 방문의 결과를 다루고 있는데, 문장의 구성이 여러 개의 진술들이 함께 모여 마치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는 것 같은 형국입니다. 그가 들려주는 방문의 결과란, ‘바울’이나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각자 수행하고 있는 선교 사역에 대해서 이견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들은 일치를 이루었으며 서로를 인정하는 소위 “교제의 악수”를 나누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편에서 보자면 이러한 일치는 그가 “계속해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사역 속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었습니다.
신학과 신앙
두 번째 방문(1-5절)
십사 년 후에. 그동안 사도는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때마다, 자신의 이야기가 중간에 빠뜨린 부분이 없이 계속 연결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곧바로”(εύθέως, 유데오스)(1:16) 또는 “그리고 나서”(ἒπειτα, 에페이타)(1:18, 21) 등의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을 밝힌 바 있습니다. 이제 여섯 번째로 들려주는 그의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기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리고 나서) 삼 년 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1:18)
(그리고 나서) 십사 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2:1)
다만 두 문장 사이에는 적지만 미묘한 어휘상의 차이가 있기는 합니다. 즉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각기 다른 전치사, “...만에”(μετά, 메타)와 “...후에”(διά, 디아)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전자(前者)의 경우는 뒤따르는 명사가 대격(對格)이 되지만, 후자(後者)는 소유격(所有格)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그 자체로서 큰 의미가 있다고 보기보다는, ‘바울’의 문장 스타일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유사반복을 선호하는 ‘유대’식 표현과, 단조로운 반복을 기피하려는 ‘그리스’식 표현이 함께 어우러진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자는 것이지요.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하고 있는 “십사 년 후”가 정확히 언제인지 분명치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거듭 반복하지만, 그의 회심 사건을 기점으로 한 것인지(1:15), 또는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기점으로 한 것인지(1:18-20) 분명치 않다는 말입니다. 이에 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본 교재의 <서론>에서 다룬 바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십사 년 후”는 문맥상으로 보자면 직전의 진술 “그 후에 수리아와 길리기아” 방문(1:21)과 연결되어야 할 것 같은데,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는 진술은 역사적으로는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1:18)과 연결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일부 사본에서는 “다시”라는 단어를 생략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사도행전>에서 언급하고 있는 “예루살렘 공의회”(행 15)에 참가하기 위하여 사도가 그곳을 방문한 사실과 일치시키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따르면 이 방문은 세 번째에 해당합니다(만일 행 12:25에서 언급하고 있는 방문까지 포함시킨다면 네 번째 방문이 될 것입니다).
이 두 번째 방문이 “십사 년 후에” 이루어졌다는 진술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입니까?
바나바와 디도. 이어서 강조하고 싶은 점이 또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방문에서 그는 혼자 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2:1)
‘바나바’는 초대교회에서 중요 인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그는 여러 번 등장하고 있으며, 이방인 선교와 ‘유대’인 선교 사이의 교량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행 9:27; 11:22-30; 13:1-14:28; 15:2-4, 12, 22, 36-41). 그가 ‘바울’의 서신에서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으며(2:1), 곧바로 이어서 다시 언급되고 있습니다(2:9, 13). 그의 본명은 ‘요셉’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행 1:23), 사도들이 그의 기질을 따라 ‘바나바’(위로의 아들)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면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의 구분을 위해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의 출생지는 ‘사이프러스’이며 ‘레위’ 가문에 속하였고, ‘예루살렘’에 있을 당시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하여, 이후 자신의 땅을 팔아 교회나 사도들을 재정적으로 돕기도 했습니다(행 4:36-37). 또한 ‘다소의 바울’을 사도들에게 소개하였고, 그를 변호하는 일을 자임하기도 했습니다(행 9:27). ‘예루살렘’ 교회는 그를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기독교 선교와 감독을 위해서 보내는데, 이 때 그는 ‘바울’을 동역자로 데리고 갑니다(행 11:22-26).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헌금을 이 두 선교사를 통해서 보내게 됩니다(행 11:27-30). 그리고 이후 ‘안디옥’ 교회는 이 두 사람을 안수하여 ‘키프러스’와 ‘갈라디아’ 지역의 선교사로 파송하는데, 이것이 ‘바울’의 제 1차 선교여행의 시발이 된 것입니다(행 13:1-14:28). 이들이 이 지역에 대한 선교 여행에서 돌아오자, 교회는 다시 이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교회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관계라든지, 이방인에 대한 할례 문제 등과 같은 골칫거리를 다루도록 합니다(행 15:1-35). 이것이 그 유명한 “예루살렘 공의회”입니다. 회의가 끝난 후 두 사람은 각자의 선교 사역을 위해서 갈라지게 되는데(행 15:36-41), 중대한 견해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전히 친구로 남아있었던 것 같습니다(고전 6:9; 고후 8:18-19).
‘예루살렘’에 기근이 들어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보낼 당시만 해도(행 11:25-26, 30; 갈 2:1-10), ‘바나바’가 ‘바울’에 비해 선임자의 역할을 했던 것 같은데, 이곳에서는(갈 2:1-10) 사도가 계속해서 일인칭으로 당시의 일을 회고하고 있어, 자신이 오히려 선임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사실 그의 지도자적인 역할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잘 드러나고 있기는 합니다(행 15:1-30). 제 1차 선교 여행 당시 메시지를 전한 쪽은 ‘바울’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그가 사실상의 선임자의 역할을 수행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지난 일을 회고할 때에도 자신의 입장에서 진술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뿐만 아니라, 특히 ‘바나바’가 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한 때 흔들리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갈 2:13),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데리고 간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디도’로서, ‘바나바’와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대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으며(3절), 사도가 ‘안디옥’에 있을 때 회심한 자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 서신에서 그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는 이미 친숙한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바울’과 ‘바나바’가 이 지역을 선교하던 처음부터 그들과 함께 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후 그는 ‘바울’의 대리인으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기도 했고(고후 2:12-13; 7:5-16),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 기금을 마련하는 책임자로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고후 8:6-24; 9:35; 12:18). 이러한 그가 <사도행전>에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입니다. 혹자는 그가 ‘누가’의 동생이라 형이 그의 책에서 일부러 누락시켰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그럴 듯한 설명은, 오히려 연보 모금과 관련한 그의 역할 때문이라는 데 있어 보입니다. 즉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에 관해서 단 한 번 언급이 있기는 한데(행 24:17), 그 외는 이에 관해서 특별히 따로 언급해야 할 필요성이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후대의 전승은 그가 ‘크레데’의 감독이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참고, 딛 1:5).
‘디도’를 ‘예루살렘’에 데리고 갈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한 쪽은 ‘바울’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1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를 단수형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왜 그를 데리고 갔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이 두 번째 방문이 언제 이루어졌는가에 따라 그 대답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즉 만일 이 방문이 <사도행전> 15장에서 다루고 있는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디도’를 데리고 간 것은 그 회의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주제에 대해서 쐐기를 박기 위한 의도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디도’를 데리고 간 것은 ‘마르틴 루터’(M. Luther)가 주장하고 있는 바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있는 자신의 자유를 과시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인 ‘바나바’는 물론 이방인 ‘디도’와 함께 그 자리에 나타난 것 자체가, 그가 ‘유대’인 가운데서는 ‘유대’인이 되고, 이방인 가운데서는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몸소 보여준 셈입니다. 따라서 “그의 복음”에 따르면, 유대인으로서 할례를 받을 수는 있으나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한편 이 방문이 이보다는 앞선 시점, 즉 <사도행전> 11장에서 밝히고 있는 바처럼 “예루살렘 기근” 시에 어려움에 빠져 있던 ‘예루살렘’ 교회에 연보를 전달하기 위한 방문이었다면, 설명은 다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때만 해도 아직은 이들 신학적 문제가 큰 쟁점으로 부각되지도 않았고, “유대주의자”들의 반대도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을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디도’를 데리고 간 것은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는 단순한 동행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바울’과 ‘바나바’가 자신들의 1차 선교 여행 때부터 그를 데리고 다녔다면, ‘예루살렘’이 비록 선교 지역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곳까지 동행시켰다 해서 크게 이상할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그를 데리고 간 사실을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을 위해서 사도가 지난 일을 현재의 관점에서 회고하고 있다고 추측해 보자는 것입니다. 즉 이전에 ‘디도’를 데리고 간 것이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던 일이었으나, “그의 복음”에 대해서 비난과 반대가 쏟아지고 있는 현 시점에서, 그 대수롭지 않던 에피소드에 새삼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자신의 입장을 대변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계시를 따라. 두 번째 방문에서 그는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독단적으로 계획하지도 않았습니다:
계시를 따라 올라가(2절상)
그는 서신의 벽두에서부터 자신의 회심과 소명이 인간의 생각이나 인간의 조직 및 기관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1:1, 12, 16). 이 방문도 역시 같은 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그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에게 있어 이 계시는 그의 존재와 행동의 근거이자 동기이기도 합니다(고후 12:1). 그가 말하는 계시는 신비한 영적 체험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특별한 행동 방향과 관련해서 내리는 하나님의 지침이나 명령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은 사도가 받은 다양한 형태의 계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 꿈과 환상(16:9; 18:9-10; 23:11; 27:23-24); (2) 황홀경(22:17-21; 참고 고후 12:2-4); (3) 성령의 표적(13:2; 16:6, 7; 20:22-23; 21:4); (4) 예언자의 예언(11:28; 21:10-11). 사도가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된 것은 이중 어떤 계시에 의해서였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혹시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는 ‘아가보’의 예언을 듣고 방문하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참고, 행 11:28).
그가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한 일에 대해서 2절의 나머지 부분은 밝히고 있습니다. 동기와 방식에 대한 정보도 동시에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 하는 것이나 달음질 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2절하)
그가 한 일은 “그들 앞에 복음을 제시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을 의미할 수 있겠으나, 오히려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 공동체 전체를 총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제시하다”는 “생각해 보기 위하여 제출하다” 또는 “상담을 위해서 대화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가 제시한 “복음”은 지금 현재 사도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고 있는” 그 복음으로서, 그 본질이나 대상은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1:11-12). 이때 사용하고 있는 동사, “전파하다”는 그 시제가 현재형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바울’의 복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결 같이 동일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만일 이번 방문이 “예루살렘 공의회”와 때를 맞춘 것이라고 본다면, 사도는 이번 방문에서 두 번의 회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번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리고 또 한 번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과의 사적인 모임에서 자신의 복음을 변론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사도가 자신의 방문을 서술하는 방식은 2:2-10절 사이에서 볼 수 있듯이, 우선 일반적이고 총체적인 설명을 먼저 언급한 다음, 점점 세부적인 내용으로 확대해 가는 식입니다: (1) 일반적인 내용(2절하); (2) 회의 참석자들의 대상이나 신분(2절하, 6-9절); (3) 회의의 결과(7-10절). 물론 ‘예루살렘’이 방문이 언제 이루어졌든, ‘바울’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외에도 다른 사도들도 당연히 만났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사도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이들 세 사도들과의 사적인 회합 자체입니다. 결국 “유력한 자들”이란 직전에 언급하고 있는 대명사 “그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일반적인 서술에서 구체적인 내용으로 확대해 가는 첫 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을 가리켜 “유력한 자들”로 지칭하는 저의는 무엇일까요? 사실 이 표현은 당시에 일종의 정치적 수사로서, 긍정적인 의미도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냉소나 역설의 의미를 드러낼 때 사용했던 표현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의도하고 있는 바는 아마 이 모두인지 모르겠습니다. 즉 사도들의 권위나 역할을 인정은 하면서도, 동시에 이들을 지나치게 추켜세우며 그 권위를 부풀리고 다니는 ‘유대주의자’들의 태도에 대해서는 냉소와 조소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겠지요.
헛되지 않게 하려. 비록 하나님의 계시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이처럼 ‘예루살렘’을 두 번씩이나 방문하는 동기나 목적은 과연 무엇입니까? 2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를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달음질 하는 것이나 달음질 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는 자신이 그동안 한 일이 “헛되이 될까봐 두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다른 곳에서도 이런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고후 6:1; 빌 2:16; 살전 3:5), 여기서 “헛되다”는 표현은 “무용지물이 되다” 또는 “아무 소용없게 되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까? 그의 “달리기”입니다. 사도는 종종 자신이 하는 일이나 성도의 신앙생활을 마라톤 경주에 비유하곤 합니다(갈 5:7; 빌 3:14; 딤후 4:7; 히 3:1; 고전 9:24-27; 빌 2:16).
사도들과의 만남과 화합이 왜 이처럼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일까? 그는 자신의 사도직이나 소명이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계시로 말미암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른 사도들로부터 아무 것도 위임받은 것도 없고 배운 바도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브루스’(F. F. Bruce)가 이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R. N. Longnecker, 49쪽.
그의 소명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루살렘과의 교제가 없이는 결코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이방인 선교가 예루살렘의 모 교회와 균열이 생긴다면 그것은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이는 곧 그리스도가 나누어지는 것이며, 이방인 선교를 향해서 쏟아왔던 바울의 헌신이나 앞으로의 헌신 역시 좌절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승인이 없다고 해서 ‘바울’의 선교나 그의 복음이 무위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겠지만, 상당히 어렵게 만들 것만은 분명합니다. 복음의 본질에 있어 ‘바울’과 ‘예루살렘’ 사도들이 분열한다면, 이방인 선교는 물론 유대인 선교 역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 교회의 연합은 교회의 다양성만큼이나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구제 헌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토록 애쓰는 사도의 모습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기도 합니다(참고, 롬 15:25-32; 고전 16:1-3; 고후 9:12-15). 사도가 자신의 권위나 복음에 대해서 추호의 의심도 없었으면서도, 그토록 두려워했던 바도 바로 이점 즉 “교회의 연합”이 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방문과 관련해서 1-2절이 방문의 동기나 목적과 관련된 내용이라면, 그 방문의 결과는 6-10절 사이에서 드러나면서 두 부분이 논리적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3-5절은 형식적으로는 괄호(括弧)로 구별되는 부분으로서, 그 내용은 일종의 삽입 ‘에피소드’로 볼 수 있습니다. 1-2절과 3-5절의 연결이 부자연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이 기능하는 바는 분명해 보입니다. 즉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보강하거나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내용 상 한 개의 큰 괄호가 그 안에 다시 작은 괄호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에 따라 세 절을 다시 적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3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 하였으니, {4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그들에게서 우리가 한 시도 복종하지 아니 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3-5절)
이런 구분을 따르면 마치 사도가 두 개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는 ‘디도’의 할례 문제이고(3절), 다른 하나는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의 거짓 주장에 대한 문제인 듯합니다(4-5절). 그러나 보다 그럴듯한 설명은 3-5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동일한 사건에 대한 것으로서, 4-5절은 3절에 대한 추가 설명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디도’를 두 번째 방문에 동행시켰다는 점은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1절). 이곳에서 그를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그가 할례를 받지 않았음을 강조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인 디도조차도”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사도의 주장은 상당히 강력한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선교 사역을 하기 전까지는 다 할례를 받았다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은 근거가 없음을 주장하려는 의도처럼 보입니다.
다만 여기서 사도의 이어지는 표현에 다소 모호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3절하). 대부분의 학자들은 ‘디도’가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일부 학자들의 이해는 이와는 다릅니다. 즉 ‘디도’가 할례를 받기는 했지만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장 속의 부사 “억지로”에 방점을 두게 되면, “억지로는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 하였으니”로 그렇게 해석 될 여지는 충분히 있어 보입니다. 더 나아가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늘 양보와 타협으로 일관했던 ‘바울’이라면 이 문제에 대해서도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3절에서 방점(傍點)은 “억지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헬라인 디도)조차도...받지 않았다”에 있습니다. 그리고 5절에 따르면, ‘디도’가 할례를 받았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 보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해석은 지나치게 인위적인 것이라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보다 심각한 해석상의 어려움은 4절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4절). 즉 이 구절을 3절의 연장선에서 이해하여 동일한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지가 분명치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4절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이곳에서 소위 문법적 “파격”(anacoluthon)이 일어나고 있어(필요한 주어와 동사가 없음), 구문(構文) 상 3절과의 관계가 명확치 않다는 점입니다. 3절과 4-5절 사이의 구문론 상의 관계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 R. N. Longnecker, 50-52쪽; (2) H. N. Ridderboss, 83-84쪽.
만일 4절을 3절과 동격으로 취급한다면, 결국 4-5절과 3절은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4절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디도의 할례 문제) 발생하게 된 것은 결국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4절상). 여기서 “거짓 형제들”이란 자칭 헌신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주장은 하나 실은 그 행동이나 가르침에 있어 ‘바울’의 선교 사역에 훼방을 놓는 자들을 말합니다(참고, 고후 11:26).
이곳에서 형용사로 사용하고 있는 “가만히 들어온”의 명사형은 상대 진영에 침투해 들어가는 “첩자” 또는 “변절자”를 의미합니다. 이들이 침투해 들어간 진영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 교회’입니다. 비록 이런 자들이 ‘예루살렘’ 사도들의 인정을 받고 있었다고 하드라도, 사도는 결코 이들을 교회의 정상적인 회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의 진정한 목적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4절하). 사도의 표현은 차라리 냉소적이기까지 합니다. 첩자들이 누구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와 복음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자유는 서신 전체의 핵심 주제로서 서신의 나머지 부분에서 계속해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가 이처럼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문제는 단순히 ‘디도’의 할례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그 자체로서 순수하게 지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5절). 사도는 여러 경우에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스스로의 주장이나 고집을 버린 바 있습니다(5:12; 고전 9:19-23; 행 16:3; 21:23). 그런 그가 이곳에서 이처럼 달라져 있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입니까?
방문의 결과(6-10절)
방문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본문의 두 번째 단락이 이에 대한 대답을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6유력하다는 이들 중에(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 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은 것과 같음을 보았고, 8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6-10절)
다섯 절로 이루어진 이 단락은 원래 한 문장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내용을 전개해 가는 수사적 방식을 분석해 보면 마치 긴 두루마리를 따라 내려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장이 부주의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즉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자신의 논지를 아주 조심스럽게 하나하나 펼쳐가고 있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 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6절)
6절에서 다시 한 번 문법적으로 anancoluthon이 보이고 있어 구조 분석에 다소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사도가 의도하는 바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의 사도들에 관해서 처음 언급할 때(1-2절), ‘디도’의 할례 문제를 거론하면서(3-5절) 이들과 일정 부분 거리를 두는 모습이었는데, 이곳에서는 아예 유대주의자들의 주장, 즉 자신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의 신학을 대변하고 있다는 주장을 뿌리 채 뽑아버리겠다는 의도입니다. ‘바울’이 의도하고 있는 바는 ‘예루살렘’ 사도들을 흠집 내거나 그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들을 “그 유력한 자들”이라고 부르면서 그 권위를 세워주고 있습니다. 그가 거부하고 있는 것은 “기둥”같은 사도들의 신분이나 지위에 관한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입니다.
6절에서 사도가 강조하려는 요지인 즉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들이 누구이든, 과거에 어떤 지위나 신분을 누렸든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사역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력을 끼친 적도 없다는 점입니다. 이제 그는 7-10절에서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역할과 관련해서 정 반대의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6절에서 이들 사도들이 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밝히고 있다면, 7-10절에서는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 일, 즉 ‘예루살렘’ 방문의 궁극적인 결과에 대해서 사도는 이 단락의 끝 부분에 가서 밝히고 있습니다만(9절하-10절), 그 전에 먼저 그러한 결과에 이르게 되는 배경과 근거를 소개하는 것으로 두 번째 단락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7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은 것과 같음을 보았고, (8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상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7-9절상)
다시 한 번 8절에서 괄호로 처리된 부분을 만납니다만, 전체적인 의미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사도들은 자신들이 보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기초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받아들이게 됩니다(9절하-10절). 그런데 문제는 과연 언제, 어떻게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사도 자신의 소명에 관해서 듣고 난 뒤였습니까(1:11-12)? ‘바울’이 ‘시리아’와 ‘길리기아’에서 사역할 당시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듣고 난 뒤였습니까(1:23-24)? 아니면 사도가 그들과의 사적인 회합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힌 뒤였습니까(2:2)? 이를 밝히기는 불가능합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이상에서 언급한 그 모든 사실들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림에 있어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예루살렘’ 사도들이 먼저 깨닫게 된 사실이(본 것은) 7절하-8절 사이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평소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어휘와는 다소 다른 표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첫 번째가 “할례자를 위한 복음”과 “비 할례자를 위한 복음”에 대한 그의 발언입니다. 이는 “다른 복음”은 없다는 그 자신의 주장과는(1:6-9; 2:11-16) 동떨어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곳에서만 유일하게 ‘게바’가 아닌 ‘베드로’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7-9절 사이의 전체 내용을 삭제해 버려도, 6-10절 사이의 문장은 그대로 보존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대답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우선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두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대상과 전략의 차이일 것입니다. 그리고 ‘게바’와 ‘베드로’의 차이에 대해서도 별다른 구분 없이 그저 바꾸어가면서 불렀거나, 또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바대로 따랐을 수도 있습니다(그는 때때로 자신이 의도하는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어휘나 표현을 그대로 차용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사도들은 ‘바울’의 이방인 선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7절), 그가 받은 “은혜”를 인식하기에 이르렀습니다(9절). 바로 이 점이야말로 사도가 그의 반대자들과의 논쟁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일 것입니다. 이 은혜는 그냥 일반적인 의미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7-8절의 내용 자체만으로는 다른 사도들도 이 부분을 명시적으로 인정했는지, 그를 사도로 불러주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그런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다만 ‘예루살렘’ 사도들이 받아들였던 사실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유대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 역시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로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정도일 것입니다.
사도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세 사도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 이제 비로소 그동안 사도가 사사로이 만났다는 ‘예루살렘’의 유력한 자들이(2절) 누구인지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들 세 사람이 등장하는 순서에 대해서 이런 저런 논의를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이곳에서는 생략하기로 합니다. 참고: R. N. Longnecker, 56-57쪽.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바울’ 서신에서 사도 ‘요한’을 언급하기는 이곳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앞에서 밝힌 바 있는 ‘예수’님의 동생일 것입니다.
이제 사도는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방문의 결과, 즉 교회의 공식적인 반응을 소개함으로써, 여섯 번째 알리바이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9절하)
“친교의 악수” 즉 “오른 손을 내어주는” 행위는 당시 관용적인 표현으로서 단순히 서로를 인정하거나, 또는 우정을 과시하는 것 이상을 말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언약 의식입니다. 이런 행위를 통해서 서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믿음과 동역 의식을 확인하게 됩니다. 서로는 동일한 언약 하에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상대에 대해서 주장하거나 요구하는 태도를 가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실을 놓고 엄숙하게 합의하고 인준함으로써 각자 언약의 요구 사항 아래 자신을 놓습니다. R. N. Longnecker, 58쪽; H. N. Ridderboss, 90쪽.
그들이 합의한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에게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9절하)
그들이 이해하고 합의한 사항이란 요약하자면, 하나의 신학에 두 개의 선교전략이 있을 수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합의는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포괄적인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우리”와 “그들”은 일차적으로 선교해야 할 대상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호 교차적으로 선교를 해서는 안 된다는 합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 선교를 해서는 안 되며, ‘예루살렘’ 사도들은 이방인 선교를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도가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10절)
이 구절은, “다만”이라는 부사의 사용에서 보듯이, 앞에서 이루 합의 내용에 포함되는 단서조건이라기보다는 추가적인 합의 사항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가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위에 합의한 것 외에 내가 그들의 요청에 한 가지 더 추가로 양보를 해준 것이 있지만, 그것은 나의 반대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것도 그들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탁에 의해서 양보한 것임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부탁한 것이란 다름 아닌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말고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즉 ‘바울’이 이방인 선교를 위해 행사하고 있는 그 자유를 가난한 ‘유대’인 형제들을 위해서도 행사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의 요청이 있기 오래 전부터 이미 이 일을 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10절하). <사도행전>이나 <서신서> 여러 곳에서 이방인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구제 헌금을 거두는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롬 15:25; 고전 16:1; 고후 8:1; 9:1; 행 11:29; 12:25; 24:17). 이는 그만큼 ‘예루살렘’의 형편이 어려웠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고후 8:14). 일례로 <사도행전>에서는 ‘글라우디우스’ 황제 당시 닥쳤던 큰 기근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이른바 “기근을 위한 특별 모금”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기도 합니다(행 11:29). ‘바울’은 이런 일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롬 15:27). 그는 가난한 동족을 돕는 일에는 그의 자유가 방종으로 흐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교훈과 적용
필자가 잘 아는 후배 교수 이야기입니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기독 서클인 CCC에 가입하였고, 그곳에서 한 자매를 만나 결혼까지 하였으며, 그 후 지금까지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바울’을 사도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약>에서 네 복음서나 다른 책들은 다 믿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바울’의 <서신서>들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문제를 자기 교회 목사님과의 성경공부 시간에 여러 차례 제기한 적이 있었고, 필자에게도 두어 차례 물어온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교회 목사님도 그랬겠지만, 필자 역시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를 설득하려고 했습니다만 별 도움이 되지 못한 듯합니다. 그는 아직도 이 문제를 가지고 힘든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갈라디아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소위 “유대주의자”의 후예로 보아야 할지 난감합니다만, 본인 스스로는 절대로 그런 유의 사람은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정말 신기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합니다. 그를 설득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이라곤 함께 성경공부를 좀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권유가 전부였습니다. 혹시 하나님의 계시나 은혜로 그가 새로운 눈을 뜨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이 그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그의 신분과 가르침을 인정할 수 없다고 야단들이었으니 말입니다.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필자의 후배 교수가 지닌 불신은 개인적이며, 지적인 회의나 고민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반면, ‘바울’의 반대자들은 공개적으로 그를 비방하고 중상모략하면서, 새로 태어난 교회를 넘어지게 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도 친분이 있으며, 그들의 인정도 받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강력한 대적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
이에 사도는 그의 여섯 번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도 네 번째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방문에 관한 것입니다만, 이번 방문이 두 번째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여섯 번째 이야기를 포함해서 그동안 사도가 자신을 변론하기 위해서 들려 준 모든 이야기들이 필자가 방금 언급했던 후배 교수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갖게 합니다. 이 사람 역시 오래 동안 교회의 일원이었으며, 신앙에 필요한 웬만한 지식쯤은 훤히 꿰뚫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사도가 역설하고 있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나서) 십사 년 후에. 무엇보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를 십사 년 동안 단 두 번밖에 찾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선언은 실로 놀라운 것입니다. 왜 이 선언이 놀라운 것일까요? 신앙과 신학의 진원지요 중심이며, 그의 반대자들이 그토록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을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이 기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만난 적이 없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발언은 자기의 경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들과의 끈끈한 관계를 앞세우며 덤비는 그의 반대자들의 공세에 대처하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발언인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불리한 선택을 자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다만 ‘바울’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대상은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이 아니라, 이들 사도들을 필요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기고 있는 ‘유대주의자’들의 태도인 것입니다. 그는 이들의 이런 태도에 대해서 냉소와 조소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두 번째 방문에서 그는 혼자 가지 않고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갔습니다. ‘바나바’는 전형적인 ‘유대’인이었고, ‘디도’는 이방인입니다. ‘바나바’가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것은 하등 문제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만, ‘바울’이 왜 ‘디도’를 데리고 갔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이 두 번째 방문이 <사도행전> 15장에서 다루고 있는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디도’를 데리고 간 것은 그 회의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주제에 대해서 쐐기를 박기 위한 의도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디도’를 데리고 간 것은 ‘마르틴 루터’(M. Luther)가 주장하고 있는 바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있는 자신의 자유를 과시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인 ‘바나바’는 물론 이방인 ‘디도’와 함께 그 자리에 나타난 것 자체가, 그가 ‘유대’인 가운데서는 ‘유대’인이 되고, 이방인 가운데서는 이방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몸소 보여준 셈입니다. 따라서 “그의 복음”에 따르면, ‘유대’인으로서 할례를 받을 수는 있으나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유진 피터슨’ 목사님도 ‘디도’와 관련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이 값없이 받아 주시는 것에 대해서 이런 저런 전제 조건을 달려하는가? 왜 우리는 하나님의 받아 주심이, 그저 값없이 주시는 행위라고 선언할 수 없는가? 우리가 서로를 부분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 서로를 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사실은 거부나 마찬가지다. 그런 식의 받아들임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선물이 아니라, 어떤 길을 따르도록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내미는 당근과 같은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조건부 받아들임이 교회 안에서 너무 많은데 놀랄 뿐입니다: “옷은 이런 식으로 입으라.”; “기도는 이렇게 하라.”; “예배는 이런 식으로 하라.” 필자가 ‘대구 버클랜드 침례교회’에서 공동 목회자로 섬길 당시 동료 목사들과 사모들이 필자에게 이런 식으로 요구해 왔습니다. 필자는 그런 정해진 틀에 맞출 수 없었고, 결국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바울’ 역시 틀에 맞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로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역시 자신이 누리는 그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계시를 따라. 그는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독단적으로 계획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계시가 정확하게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지 알기는 어렵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방문이 ‘예루살렘’ 교회의 요청이나 또는 그 권위에 승복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가 한 일은 “그들 앞에 복음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제시한 “복음”은 지금 현재 사도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고 있는” 그 복음으로서,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 결 같이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왜 이런 만남이 필요했습니까? ‘예루살렘’ 교회의 승인이 없다고 해서 ‘바울’의 선교나 그의 복음이 무위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겠지만, 상당히 어렵게 만들 것만은 분명합니다. 복음의 본질에 있어 ‘바울’과 ‘예루살렘’ 사도들이 분열한다면, 이방인 선교는 물론 유대인 선교 역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 교회의 연합은 교회의 다양성만큼이나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가난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구제 헌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토록 애쓰는 사도의 모습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기도 합니다. 사도가 자신의 권위나 복음에 대해서 추호의 의심도 없었으면서도, 그토록 두려워했던 바도 바로 이점 즉 “교회의 연합”이 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방문의 결과
방문의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까? 사도는 방문의 결과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언급으로써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부정문으로, 또 한 번은 긍정문으로 밝혀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그들이 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언급이라면, 두 번째는 그들이 한 일은 무엇인지에 관한 언급입니다.
그들이 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들이 누구이든, 과거에 어떤 지위나 신분을 누렸든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사역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력을 끼친 적도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한 일이란 무엇입니까? “친교의 악수”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친교의 악수” 즉 “오른 손을 내어주는” 행위는 당시 관용적인 표현으로서 단순히 서로를 인정하거나, 또는 우정을 과시하는 것 이상을 말합니다. 그들은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상호 인정하고 합의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들이 이해하고 합의한 사항이란 요약하자면, 하나의 신학에 두 개의 선교전략이 있을 수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합의는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포괄적인 것이었습니다. 즉 “우리”와 “그들”은 일차적으로 선교해야 할 대상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호 교차적으로 선교를 해서는 안 된다는 합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 선교를 해서는 안 되며, ‘예루살렘’ 사도들은 이방인 선교를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누구든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사역을 발전시킬 자유가 있고, 하나님 앞에서 독창적인 사역을 할 자유가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는 늘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는 길이 목사나 선교사, 신부나 수녀가 되는 것이라고, 혹은 의료직이나 사회사업이나 교육계에 관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일을 정확하게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늘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우리에 대해 그렇게 잘 알지 못한다. 우리 각자는 독특한 은사를 가지고 있으며, 선례가 없더라도 주의 사역에 그 은사를 사용할 수 있다. 또한 우리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저항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다만 한 가지 힘없고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들을 무시하거나 잊을 자유는 없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점이 사도가 추가로 합의한 내용입니다. 사도가 하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위에 합의한 것 외에 내가 그들의 요청에 한 가지 더 추가로 양보를 해준 것이 있지만, 그것은 나의 반대자들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것도 그들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탁에 의해서 양보한 것임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부탁한 것이란 다름 아닌 “(예루살렘의)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말고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즉 ‘바울’이 이방인 선교를 위해 행사하고 있는 그 자유를 가난한 ‘유대’인 형제들을 위해서도 행사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자신은 이들의 요청이 있기 오래 전부터 이미 이 일을 해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동족을 돕는 일에는 그의 자유가 방종으로 흐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자유는 종교나 의식으로부터의 자유였던 것이지 윤리나 도덕적 원칙으로부터의 자유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에서 가난한 공동체 회원을 위해서 그들의 재산을 일부 공유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교인들이 내는 헌금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교회> 역시 헌금을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 결정을 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한 번 결정을 내리고 나면 계속해서 해야 한다는 문제 때문에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할 필요 때문이기도 하지만, 헌금의 일차적인 순위 또는 사용처는 공동체 내의 가난한 자를 위해서 쓰는 것이 옳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되 더욱 풍성히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풍성함”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한적이거나, 따분함이나, 무기력함과는 거리가 있는 단어입니다. 사도는 이 본문에서 우리가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저항할 자유”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풍성함”은 우리의 삶이 창조적이고 독창적이 될 자유를 염두에 두는 말입니다. 사도는 자신의 이방인 선교가 바로 이 자유, 즉 “사역의 자유”에 해당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우리의 자유가 윤리나 도덕적 원칙으로부터의 자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사도가 들려주는 여섯 번째 ‘알리바이’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2. 사도가 결코 양보할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이며, 타협하고 합의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3. 내가 누리는 “풍성한 삶”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그리스도인의 “창조적 자유”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 한계는 무엇입니까?
제 7과: 안디옥 에피소드
7
간증과 변론 (5):
안디옥 에피소드
(2:11-14)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2:14하)
사도가 마지막으로 들려주는 자전적 이야기, “안디옥 에피소드”는 그 기능하는 바에 있어 앞선 이야기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반대와 도전을 제압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있습니다. 동시에 본문은 문학적으로 교량(橋梁) 내지는 전이(轉移)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도는 본문 이후부터 <갈라디아서>의 핵심 내용을 이루는 “복음과 율법”에 관한 대 강좌(大講座)를 펼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학적 양식에 있어서도 “이야기”(narratio)에서 “해설”(propositio)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사도는 서신의 벽두에 자신의 소명과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다른 사도들을 비롯한 사람들의 가르침이나 위임을 통해서 온 것이 아님을 선언한 바 있습니다(1:11-12). 그리고 이 선언을 지지해 줄 일련의 ‘알리바이’들을 법정 진술의 형식으로 제시해 왔는데, 특히 직전의 이야기 즉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 이야기에서는 그 유명하다는 ‘예루살렘’ 사도들과 합의까지 이끌어 낼 수 있었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더욱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2:1-10).
이제 이 마지막 이야기에서 교회의 수장(首長)에 해당하는 ‘베드로’가 그 중요한 합의에 반(反)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복음을 위기에 빠뜨렸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입니까?
문학과 역사
흔히 “안디옥 에피소드”로 부르는 본문은 사도가 자기변호를 위하여 들려주는 일련의 자전적(自傳的) 이야기(1:11-214)의 마지막에 해당됩니다. 사도가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때마다, 연속성과 일관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동안 사용해 왔던 동일한 접속사-“그리고 나서”-가 이번 이야기에는 없습니다. 대신 어떤 불특정 시간을 뜻하는 새로운 접속사 “할 때”(o{te, 호테)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차이가 있습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2:11상)
이런 차이 때문에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건이 “예루살렘 방문”(2:1-10) 이야기보다 오히려 먼저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정 반대의 입장 즉 그 이후에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Longenecker).
본 사건이 일어난 시점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정작 이 사건의 배경이나 상황과 관련하여 본문을 통해서나 역사적으로나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대한 이런저런 해석들이 대부분 추측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복잡한 사건이었기에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기에 이르렀을까?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 ‘안디옥’ 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베드로’가 ‘안디옥’에는 언제 그리고 왜 왔을까? ‘베드로’와 그의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식사를 하다말고 물러난 사실이 그들 자신은 물론 ‘바울’에게 어떤 신학적 문제를 야기 시킨 것이었을까? ‘바나바’의 입장은 왜 중요했을까? 이 논쟁에서 승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이 사건이 일어난 이후의 ‘안디옥’ 교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불행하게도 이 모든 질문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답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제임스 던’(James. Dunn)이 지적한대로, “안디옥 에피소드”는 <신약>에서 가장 감질 나는 이야기 중의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만일 이 사건의 전모와 그 이후 미친 영향 등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초기 기독교 발전을 이해하는데 있어 귀중한 정보와 통찰력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의 첫 5 세기동안 내놓으라 하는 신학적 대가들이나 이단 및 이교도 저술가들이 “안디옥 에피소드”에 대해서 저마다 내놓은 해석들이 실로 다양하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이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에비온’파(the Ebionites)는 이 이야기를 ‘바울’을 공격하기 위한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에비온’파는 ‘유대주의’적 입장을 고수했던 일단의 무리로서, ‘예수’를 ‘유대’인의 한 선지자로 인정한 바 있습니다.
반면 ‘마르시온’파(the Marcionist)는 정반대로 동일한 이야기를 ‘베드로’를 비난하기 위한 근거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마르시온’파는 영지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일단의 학파로서, <구약>을 거부하고 <신약> 가운데서도 <바울 서신>을 비롯한 11권의 책만 인정했습니다.
한편 2세기 후반의 이교도 저술가였던 ‘켈수스’(Celsus)나 ‘포르피릴’(Porphyry; c. 230-305) 등은 ‘바울’과 ‘베드로’가 부끄러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전제 하에 기독교 전체를 매도하기 위한 근거로 “안디옥 에피소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들 이단이나 이교도 저술가의 입장 외에도 소위 정통 기독교 신학 내에서도 입장이 갈리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스’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터툴리안’(Tertullian)은 ‘마르시온’파를 반박하면서도, ‘베드로’를 비난하는 ‘바울’에 대해서는 반응이 지나쳤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는 이야기 속의 ‘게바’는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오리겐’(Origen)이나 ‘크리소스톰’(Chrysostom)이나 ‘제롬’(Jerome) 등은 이 이야기가 ‘유대’주의를 보다 효과적으로 공략하기 위하여 ‘베드로’와 ‘바울’ 사이에서 꾸며낸 것이라는 주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Augstine)는 이런 해석을 반박하면서, “안디옥 에피소드”야말로 신분이나 지위를 초월하는 진리 선포의 한 전형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 속에는 교회 수장(首長) ‘베드로’의 실수, 이를 지적하고 책망하면서 복음을 변호하는 ‘바울’, 그리고 나이에 있어서나 교회 내의 신분에 있어 선임자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겸손한 ‘베드로’의 모습 등은 이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들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견해들이 이런저런 수정이나 재해석을 통해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도가 들려주는 “안디옥 에피소드”를 재구성해보면 대략 다음 다섯 단계에 걸쳐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 ‘예루살렘’으로부터 대표단이 방문하기 전 이방인 신자들과 더불어 애찬(愛餐)을 나누는 ‘베드로’;
(2) ‘예루살렘’으로부터 대표단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슬그머니 물러나는 ‘베드로’;
(3) ‘베드로’에 이어 같은 행동을 보이고 있는 ‘유대’인 형제들과 이에 동참하는 ‘바나바’;
(4) ‘베드로’와 ‘바나바’의 행동을 위선적이며, 비겁한 행동으로 규정하는 ‘바울’;
(5) ‘베드로’에 대한 공개적인 비난을 하고 있는 ‘바울’.
‘베드로’와 ‘바울’이 ‘예루살렘’ 회합에서 서로 “친교의 악수”을 나누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2:7-10), ‘바울’이 ‘베드로’를 비난하고 있는 이 장면은 일견 모순되거나 적어도 뚜렷한 대조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안디옥 에피소드”를 그의 마지막 이야기로 전해주는 사도의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무엇입니까?
신학과 신앙
앞에서 간략하게 언급하였듯이, “안디옥 에피소드”는 기독교 초기 역사와 성경 해석사(解釋史)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바 있습니다. 누구나 인지할 수 있듯이, 본문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교회의 수장 ‘베드로’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자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를 비롯하여 일단의 교부들은 ‘게바’가 열두 사도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칠십 제자 중에 속해 있던 동명이인(同名異人)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루터’(M. Luther)에게 있어서도 이 문제는 결코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율법과 관련하여 이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사건은 기독교 초기 역사를 재구성함에 있어 반기독교적인 편견을 가진 진영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好材)가 될 것임이 분명합니다. ‘바울’의 비타협적인 태도나 두 사도 간의 갈등과 충돌을 필요 이상으로 확대할 경우 도달하게 될 결론은 뻔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오늘날까지 ‘튀빙겐’ 학파(the Tübingen school)를 비롯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진영에 가담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모든 해석들은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근거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들의 주장을 지지해주는 증거 본문은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안디옥 에피소드”와 관련해서 제기되는 의문은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가 하는데 있습니다. ‘게바’가 ‘안디옥’을 방문한 시점이 분명치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11절상)
이 구절에서 보듯이 시제 접속사는 불분명한 시점을 드러내고 있기는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혹자는 이 사건이 역사적으로 ‘바울’의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2:1-10) 이전에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동안 연속적으로 사용해 오던 접속사 “그리고 나서”(1:18, 21; 2:1) 대신에 애매하게 “...할 때에”를 사용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정 반대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이 “예루살렘 공의회”(행 15)를 위한 방문이었든 또는 “기근 시 구제 헌금을 전달하기 위한 방문”(행 11)이었든 개의치 않습니다. 이 두 번째 입장을 지지한다면, “안디옥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아마도 ‘바울’과 ‘바나바’가 “제 1차 선교여행”(행 13:4-14:25)에서 ‘시리아’로 돌아온 이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그들이 선교여행으로부터 ‘안디옥’으로 돌아와 “제자들과 함께 한참을 머문” 시점에서부터(행 14:26-28) “예루살렘 공의회”(행 15:1-29) 참석을 위하여 떠나는 시점 어디쯤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번째 입장을 지지해 주는 증거는 본문에서도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즉 11절이 “그러나”(δέ)로 시작하고 있는데, 한글 성경에는 이 접속사의 의미가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이 접속사는 “단절”과 “연속”이라는 이중적인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절”이라 함은, 이제 본문에서 다루게 될 “안디옥 에피소드”(2:11-14)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예루살렘의 대타협”(2:7-10)과는 날선 대조를 보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연속”이라 함은, “안디옥 에피소드” 역시 원래의 목적 즉 ‘바울’과 ‘예루살렘’ 사도들 간의 차별성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에 충실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논리적으로 ‘게바’는 ‘바울’로부터 책망을 받기 전에 이미 ‘안디옥’에 와있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가 ‘안디옥’에는 언제 그리고 왜 왔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가 ‘안디옥’의 첫 번째 주교(主敎)였다고 하는데, 신학적으로는 유용한 이론이긴 하나 역사적인 증거는 불충분한 실정입니다. 물론 ‘안디옥’ 교회는 ‘바울’이 그곳에서 선교 활동을 하기 전에도 이미 있었고(행 11:19-26), ‘바울’ 당시 유대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들도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그렇지 않다면 “안디옥 사건”이 일어났을 리도 없었겠지요), <사도행전>에서는 이 지역을 ‘바울’의 이방인 선교의 전초기지로 그리고 있으며, <이그나티우스 서신>에서도 그 지역 ‘기독교’는 특성 상 “바울적”이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게바’의 안디옥 방문은 주교로서의 방문이 아니라, ‘바울’이나 그 지역 ‘그리스도’인 모두 잘 알고 있었던 방문이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유대인이나 기독교도나 할 것 없이 ‘예루살렘’과 ‘안디옥’을 왕래하는 일은 아주 흔하고 빈번했을 것입니다(행 11:19-26, 30; 15:1-4, 22, 30; 18:22). 그렇다면 ‘게바’의 방문도 단순한 방문이었을까? 아니면 ‘예루살렘’ 교회에 불어 닥친 핍박을 피하기 위함이었을까(참고, 행 12:17)?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성격이나 상황에 대해서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 섞여 있는 하나의 교회였는지, 여러 개의 교회가 있었는지, 또는 이방인 따로 유대인 따로 모이는 두 개의 교회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추측컨대 유대인들과 이방인 섞여있는 여러 개의 교회가 산재해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한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른 교회들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Longenecker).
베드로의 행위(11-13절)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베드로’가 무엇을 잘못했으며, 왜 그렇게 행동했으며, 그가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11절하)
‘베드로’가 한 행동은 한글 성경에서 번역하고 있는 바처럼 단순히 “비난”이나 “책망”받을 정도가 아니라, 원어에 따르면 “(하나님 앞에서) 저주(정죄)를 받을 만한 행동”이었습니다. 일부 영어 성경에서도 ‘베드로’의 행동에 대해서 “견책” 내지는 “비난” 정도의 의미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1) I withstood him to the face , because he was to be blamed(KJV); (2) I opposed him to his face, because he was clearly in the wrong(NIV).
이 표현은 상당히 강력한 것입니다. 바로 이 표현이 ‘에비온 파’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해석으로서, ‘바울’을 배척하고 공격하는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이들에 따르면 ‘베드로’에 대한 ‘바울’의 공격은 과도하다는 것이겠지요.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베드로’의 행동이 왜 “정죄 받아” 마땅한 것이었습니까? 사도는 상황 묘사와 함께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12절)
여기서 ‘야고보’는 예수님이 분명하며, 주후 40 년경부터 순교할 때까지(주후 62년) ‘예루살렘’ 교회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러 정황들로 미루어 보건대,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낸 대표자들로서 ‘안디옥’ 교회에서의 신앙의 행습에 관하여 모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염려하고 있는 바를 전달하기 위하여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Longenecker).
이들이 와서 이런 문제를 언급했을 때 ‘베드로’가 보인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하던 식사 자리에서 “물러난”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식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안디옥’에 온 이후 계속 그렇게 해 왔다는 사실에 비하면 그의 이런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먹다”의 시제가 미 완료형이라는 사실을 통해서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왜 식사를 하다말고 물러났을까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입니까?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도행전> 10-11장 사이에서 ‘베드로’는 두 번에 걸쳐 경이로운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 모두 이방인과 관계된 것들입니다(행 10:9-23; 10:24-11:18). 그는 어느 날 ‘욥바’의 집 지붕 위에서 환상 중에 하늘로부터 각종 불결한 짐승들(새, 짐승, 파충류)을 담은 보자기를 보았는데, 그 때 하나님께서 이들을 잡아먹으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거절했으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을 세 번이나 들었습니다. 이 일이 있는 직후 ‘고넬료’가 보낸 전달자를 맞아 그의 집으로 갔을 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고, 이에 ‘고넬료’와 그의 온 식구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가 이 일을 통해서 깨닫게 된 사실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체험을 바탕으로 이방인에 대한 그의 입장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며, 예컨대 ‘안디옥’에서 이방인과의 식사를 하는 일도 그에게는 전혀 거리낌이 없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이런 그가 이방인과의 식사 문제에 대해서 갑자기 입장을 바꾸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그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바울’이 전하고 있습니다. 좀 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할례자”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할례자”들이 정확히 누구인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가능한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1) 할례에 대해서 민족주의적인 편견을 보이는 ‘유대주의자’를 포함하는 유대∙그리스도인들; (2) 같은 유대∙그리스도인들이기는 하나 민족적 편견이 없는 무리; (3) 단순한 ‘유대’인들 즉 비기독교 ‘유대’인들; (4) 이방인 ‘그리스도’인이긴 하나 ‘유대주의’적 사고와 생활 방식을 따르는 무리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들 “할례자”들이 유대∙그리스도인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입장에도 많은 의문이 남습니다: ‘야고보’와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으로 인정받던 ‘베드로’가 무엇 때문에 이들 방문자들을 두려워했을까? 이들은 ‘유대’주의자였을까? 이들을 보낸 ‘야고보’ 역시 ‘유대’주의자였을까? 또는 자신들의 요구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디옥’ 교회와는 결별을 하겠다고 ‘베드로’를 위협하던 ‘예루살렘’ 교회 내의 보수적인 파벌이었을까? 요구 조건이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요청한 일련의 의식 및 윤리적 합의 사항(행 1520-21, 28-29)이었거나, 또는 ‘안디옥’ 교회에까지 미치는 ‘베드로’의 사도로서의 영향력 확대에 관한 문제였을 수 있습니다. 이런 가상 시나리오를 전제로 한다면, ‘베드로’의 선택은 다분히 신학적인 동기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즉 그의 행동은, 비록 ‘바울’은 위선적이라고 몰아붙이고 있긴 하지만, ‘안디옥’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가 결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어쩔 수없는 선택이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들 방문자들이 단순히 ‘유대’인들이었다면, ‘베드로’의 행동에 대한 설명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무관할 수없는 설명입니다. 즉 주후 40-50년대 당시 ‘유대’ 땅은 소위 열심 당원이 주도하는 배타적 민족주의적 열풍이 일던 시절로서, 이런 열광은 비단 ‘유대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유대∙기독교도 사이에서도 상당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물론 이방인 기독교들에 대해서도 함께 어울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호감을 보이는 자들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보였음은 자명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연스럽게 배타적 민족주의와 결합하게 되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이라 해서 이런 상황으로부터 결코 자유스러울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 지도자들에게는 ‘안디옥’의 이방인 교회가 필요 이상으로 ‘유대’인들을 자극하는 일단의 신앙 행태를 보이는 것에 대해서, 어떤 형태로든 통제나 규정이 필요하다는 인식에 이르렀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시나리오를 전제로 ‘베드로’가 취한 행동을 새롭게 재구성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그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 이방인과의 교제나 교류가 ‘예루살렘’의 열심당원들에게 전해져서 교회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깊어지게 되고, 그 결과 안디옥 교회와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이 지역 이방인 선교를 어렵게 만드는 상황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자리를 뜬 것이라는 설명이 그것입니다. 이들이 누구였든, ‘베드로’의 동기가 무엇이었든, 그가 취한 행동은 전술적인 실수였습니다. 그 실수란 다름 아닌 신학과 신앙의 불일치를 말합니다. 즉 신학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고 자신도 옳다고 믿고 있었던 바를,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포기하고 물러났던 행동이 그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실질적인 신앙의 행태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베드로’가 보인 행동은 결과적으로 심각한 신학적 파장을 몰고 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것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식사 문제를 포함한 일련의 ‘유대’적 패턴을 따르지 않는 한, ‘유대∙그리스도’인들과는 ‘예수’ 안에서 진정한 하나 됨이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전제 하에서는 “바울의 복음”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당시 자신의 행동이 미칠 이처럼 심각한 결과에 대해서 인식했을 리가 없고,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가 당면하고 있었을 민족주의적 열풍과 ‘유대’인들을 향한 선교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취한 행동은 그 자신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13절)
여기서 “남은 유대인들”이란 ‘안디옥’ 교회의 유대∙기독교인들을 말합니다. 이들 역시 나름대로 어떤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했는지, 아니면 ‘베드로’ 사도에 대한 예우와 존경의 표시로 그렇게 했는지 분명치는 않습니다. 추측컨대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사실 ‘안디옥’ 교회의 유대∙기독교인들로 말하자면 이방인과의 교제에 있어 ‘유대’ 지역의 민족주의적 ‘유대’인들에 비해 훨씬 자유스러운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을 것이며,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온 동료 유대인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 그들 역시 ‘베드로’처럼 흔들리다 동일한 “위선”을 저지르고 맙니다. 사도는 이들의 행동 또한 “위선”이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위선의 연쇄작용은 ‘바나바’에게까지 미쳤습니다. “(그리하여) ‘바나바’도”에서 ‘바울’ 사도의 고통과 배신감을 잘 느낄 수가 있습니다. ‘바나바’야말로 이런 일로 결코 넘어갈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바울’의 옹호자였으며(행 9:26-28), ‘안디옥’에서는 선배 기독교인으로 오히려 리더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이며(행 11:25-30), 제 1차 선교여행 시에는 그의 동역자이기도 했습니다(행 13:2-14:26). 그런 그마저 민족주의적 열광과 이념 앞에 흔들려 ‘베드로’의 행동을 따랐으니, 사도가 그의 이런 행동을 “위선”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의 반응(14절)
‘바울’은 이런 위선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 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14절)
14절은 강력한 대등 접속사 “그러나”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대부분 “그러므로”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가 취할 행동이 다른 사람들이 취한 행동과는(12-13절) 분명히 다를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행동을 취한 시점도 ‘베드로’를 비롯한 ‘안디옥’의 기독교인들이 취한 단 한 번의 “위선”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들이 수차례 반복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난 뒤였습니다. 12-14절이 의미하는 바가 이런 것입니다.
이런 해석에 대해서 물론 의문이 남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는 이런 위선이 계속해서 저지러지고 있는 것을 곧바로 개입하여 막지 않고 한동안 방치해 두었는가? 처음에는 자신조차도 이들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갈피를 잡지 못했단 말인가? 또는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안디옥’에 돌아온 뒤에 알게 되었을까?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만, 이 마지막 견해가 가장 그럴 듯해 보입니다(Longenecker). 만일 그렇지 않고, 사도가 처음부터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한동안 침묵하고 있었다면, 그 역시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들의 행동을 “외식” 즉 “위선”이라고 못 박았고, “바르게 행하지 아니하는”(14절상)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취한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베드로’의 면전에다 대고 그를 비난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들은 단순히 유대∙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안디옥’ 교회의 모든 교인들을 망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공격한 사람은 이들 모두가 아니라 교회의 수장 ‘베드로’ 혼자였습니다. 사도가 극도로 실망한 대상은 단순히 ‘베드로’ 뿐만 아니라 ‘바나바’와 넓게는 ‘안디옥’의 모든 기독교인들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바울’은 왜 이처럼 발작에 가까운 반응을 ‘베드로’에게 보이고 있습니까? 그가 결핍하고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원리 때문입니다. 즉 그동안 ‘베드로’의 생활 방식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 하면서,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가 ‘유대’인답게 살지 못했다는 말은 ‘유대’법을 어기고 이방인과 교류하면서 식사를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고 했다는 말은 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떠난 행위로서, 이는 그들 역시 마찬가지 행동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런 행동은 단순한 자기모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허물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두 민족이나 두 계층이 있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교회는 둘이 되고, 복음도 둘이 되며, 믿음도 둘이 되는 것이지요. 사도는 이것을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초대교회에서 교인들의 신앙의 행습 가운데 하나는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식사를 ‘아가페’ 즉 “애찬”(愛餐)으로 부릅니다. 이 자리에는 계급이나 신분을 막론하고 모두 모였으며, 자신이 가진 것을 가지고 와서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러니 노예나 가난한 자들에게는 한 주간 내내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W. Barclay).
그러나 이 자리가 모두에게 즐겁고 유쾌한 자리만은 아니었습니다. 엄격한 유대인들에게 있어 ‘아가페’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죄악이며, 민족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 이방인들과는 사업은 물론 함께 길을 걸을 수도 없으며, 친절을 보여서도 안 되고, 집안에 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이방인 “지옥의 땔감”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민족적 편견은 비단 종교적인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영역에서도 소위 “열심당”(the Zealot) 등에서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유대주의”도 실은 종교와 민족주의적 이념이 결합하여 낳은 일종의 사이비 종교였던 셈입니다.
“유대주의”적 광풍은 비단 “열심당원”이나 “바리새파”에게만 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도가 된 자들에게도 민족주의적 압력은 대단했을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특히 ‘예루살렘’ 교회가 있는 유대 지역에서 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상대적으로 이런 ‘유대’적 편견이나 배타적인 민족주의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얼마동안인지는 몰라도 ‘베드로’ 사도는 이곳을 방문하는 동안 교회의 수장답게 이방인들과 자유롭게 만나고, 대화하며, “애찬”을 나누고 있는 것을 보드라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전혀 거리낌이 없는 듯 보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는 하나이며, 복음은 ‘유대’인이고 ‘헬라’인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자유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일단의 형제들이 오기 전까지 만이었습니다.
베드로의 행동
행동. 이들이 왔을 때 그는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그의 자유는 흔들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바대로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해오던 것과는 정 반대로 행하고 말았습니다. 스스로 그동안 자신이 해오던 생활 방식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알고, 확신하며, 가르쳐 오던 그것이 틀렸음을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베드로’를 찾아온 사람들이 누구였기에 ‘베드로’와 같은 대 사도가 이런 행동을 했는가에 대해서 논의를 집중시키고 있지만, 이는 그렇게 중요한 논의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들이 누구였든 무슨 주장을 했든, ‘베드로’는 이들에게 굴복하였고, 급기야는 자기모순에 빠져버렸습니다.
동기. 그가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는 정말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일까요?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10-11장 사이에서 ‘베드로’는 두 번에 걸쳐 경이로운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 모두 이방인과 관계된 것들입니다(행 10:9-23; 10:24-11:18). 그는 어느 날 ‘욥바’의 집 지붕 위에서 환상 중에 하늘로부터 각종 불결한 짐승들(새, 짐승, 파충류)을 담은 보자기를 보았는데, 그 때 하나님께서 이들을 잡아먹으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거절했으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을 세 번이나 들었습니다. 이 일이 있는 직후 ‘고넬료’가 보낸 전달자를 맞아 그의 집으로 갔을 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았고, 이에 ‘고넬료’와 그의 온 식구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가 이 일을 통해서 깨닫게 된 사실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체험을 바탕으로 이방인에 대한 그의 입장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며, 예컨대, ‘안디옥’에서 이방인과의 식사를 하는 일도 그에게는 전혀 거리낌이 없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이런 그가 이방인과의 식사 문제에 대해서 갑자기 입장을 바꾸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울’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할례자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들 “할례자들”은 누구였으며, 그가 과연 무엇을 두려워했을까요? 참고: <신학과 신앙>
사도로서의 자신의 권위나 영향력이 줄어드는데 대한 두려움이었을까요? 이들 방문객들과 지나치게 대립각을 세움으로써, 오히려 ‘안디옥’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가 갈라지게 되어 그의 ‘유대’인 선교가 방해를 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요? ‘베드로’ 자신의 입장을 들어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뿐입니다.
결과. 그러나 이들 방문객들이 누구였든, ‘베드로’의 동기가 무엇이었든,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 심각한 사실은 ‘베드로’의 행동이 혼자의 일로 끝나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그는 동료 기독교인들은 물론 ‘바나바’마저 흔들리게 했습니다. 그의 행동에 동참하게 만들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바나바’도 같이 행동했다고 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실망과 충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단순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전술적으로 일시 양보와 후퇴를 한 것으로 인정해 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드라도 그 전술은 처참한 실패였습니다. ‘베드로’가 보인 행동은 결과적으로 심각한 신학적 파장을 몰고 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것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식사 문제를 포함한 일련의 ‘유대’적 패턴을 따르지 않는 한, ‘유대∙그리스도’인들과는 ‘예수’ 안에서 진정한 하나 됨이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전제 하에서는 “바울의 복음”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울의 행동
행동. 당연히 ‘바울’은 이에 대해 격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보인 행동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를 면전에서 공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조용하게 넘어가지도 않았고, 이전에 그를 만나 그랬던 것처럼 사적으로 만나 해결하려들지도 않았습니다(참고, 2:2). 양보와 타협의 대가답지 않는 사도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기. 어떻게 그가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를 이처럼 몰아 부칠 수 있단 말인가? 왜 그의 성미를 조금 억제하지 못하는가? 평소 ‘베드로’와 무슨 원한이나 경쟁심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왜 진리를 말하되 사랑 안에서 하지 못하는가? 왜 좀 오래 참으며 기다리지 못했던가? 그는 왜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단 말인가?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베드로’가 결핍하고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원리 때문입니다. 즉 그의 생활 방식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 하면서,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유대’인답게 살지 못했다는 말은 ‘유대’법을 어기고 이방인과 교류하면서 식사를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고 했다는 말은 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떠난 행위로서, 이는 그들 역시 마찬가지 행동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런 행동은 단순한 자기모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허물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두 민족이나 두 계층이 있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교회는 둘이 되고, 복음도 둘이 되며, 믿음도 둘이 되는 것이지요. 사도는 이것을 참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안디옥’에서 두 사람의 충돌로부터 나는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가 지켜야 할 “복음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걸려 넘어진 무엇이었습니까? 사도가 그토록 치열하게 지키려 했던 대 원칙은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이에 대해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연습과 토의
1. 사도가 들려주는 마지막 ‘알리바이’의 내용은 무엇이며,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2. 종교가 이념이나 사상과 결합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한 예를 들어 설명해 봅시다.
3. 나는 내가 지키지 못하는 것을 다른 이에게 지킬 것을 요구하지는 않습니까? 혹 있다면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4. ‘바울’ 사도가 동료인 ‘베드로’에게 보이고 있는 이 행동은 과연 온당한 것입니까?
C. 명제(Proposotio)
(2:15-21)
제 8과: 서신의 명제
8
서신의 命題
(2:15-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21)
본문의 문학적 기능은 무엇이며 왜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가? 그리고 신학적 주제는 무엇이며 그것을 알 수 있기나 한가? 과연 본문을 <갈라디아서> 전체의 “대명제”(大命題)로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즉 “명제”로서 갖추어야 할 수사학적(修辭學的)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가?
이들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본문을 통해서 관찰할 수 있는 적어도 세 가지 정도의 의문 내지는 문제점을 파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전후 문맥과 관련된 질문입니다. 즉 이 본문이 직전에 소개하고 있는 “안디옥 에피소드”(2:11-14)와는 어떤 관계에 있으며, 3장 이후의 본문과는 신학적으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둘째, 내적 일관성 내지는 사상의 흐름과 관련된 질문입니다. 비록 본문이 상호 연관된 일련의 논지(論旨)들을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흐름을 쫓아가기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유사한 선언들이 필요 이상으로 반복되고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셋째, 본문의 핵심 사상에 관한 질문입니다. 본문이 지극히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문장 구성이 극도로 압축되고 절제되어 있어 정확하게 무엇을 핵심적으로 드러내려 하는지를 가려내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질문으로 되돌아가보자면, 본문의 기능이나 전후문맥과 관련해서 학자들이 오래 동안 확신하지 못했던 점은 두 가지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이 이곳에서 “안디옥 에피소드”(2:11-14)에 대해서 요약을 하고 있는 것인가, 또는 본문을 3:1-4:11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전개하려고 하는 신학적 논의에 대한 서론으로 도입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이 학자들이 함의(含意)하고 있는 바는, 이 두 입장의 중간을 취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식적으로는 ‘베드로’를 향한 개인적인 ‘메시지’로 보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상대로 한 보편적인 ‘메시지’로 보자는 입장입니다. 예컨대, 사도는 이곳에서 개인적인 동기에서 출발하여 보다 보편적인 원리 선언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 보자면, 본문이 기능하는 바는 <갈라디아서>의 “명제”(proposition)로서, 그동안 “이야기”(narration)로 구성된 전체 내용을 요약하면서, 동시에 향후 전개될 “검증”(probation) 작업에 대한 논리적 기초를 마련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을 단순히 ‘베드로’를 향한 ‘바울’의 개인적인 연설로 보기보다는, 비록 그러한 동기에서 출발했다 하드라도, 사도의 전체적인 간증(1:11-2:14)에 대한 요약으로 보아야 하며, 동시에 다음의 논의(3:1-4:11)를 위한 서론적 전이(轉移)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자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질문에 관해서입니다. 과연 본문에 내적 일관성이나 사상의 흐름이 있는가 하는 점인데, 이를 위해서는 하나의 “명제”로서 본문의 형식과 내용이 과연 고대의 수사학자들이 정의하고 있는바 기능과 특징에 얼마나 부합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될 것입니다. 즉 하나의 “명제”는 내용상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는 이미 합의가 이루어져 있는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고, 둘째는 아직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고 논의를 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사학적(修辭學的) 특징으로는 “간결성” 및 “함축성”과 함께 “총괄성”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본문은 이러한 특징들을 두루 갖추고 있어 서신 전체에 대한 “대명제”(大命題)의 기능을 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핵심 주제나 사상에 관한 질문이었는데 문장 구성이 극도로 압축되고 절제되어 있어 핵심 사상을 끄집어내기가 어렵다고 한 바 있습니다. 수사학(修辭學)에 있어서나 법의학(法醫學)에 있어, 하나의 “명제”는 항상 “변론”과 이에 대한 “검증”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3:1-4:11의 본문이 “검증” 부분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복잡하게 얽혀있는 실타래가 풀리듯, “명제”(2:15-21)에서 전하려고 하는 핵심 사상이 보다 상세하게 그리고 천천히 드러날 것으로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제 처음 물었던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었습니까?
문학과 역사
<갈라디아서>가 문학적 ‘장르’(genre)에 있어 서신임에 분명하지만, 그 의도하는 바에 따라 일종의 “변증서신”(辨證書信)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변증”이라함은 말 그대로 “변론”(argument)과 “증거”(probation)를 포함한다는 것인데, 이 둘은 실은 “법의학”(法醫學)이나 “수사학”(修辭學)에서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법의학”에서 전통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일련의 수사학적(修辭學的) 요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머리말(exordium): 피고든 원고든 화자(話者)의 특징과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한 중심 주제를 드러냄;
(2) 이야기(narration):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한 사실 설명
(3) 해설(명제)(proposition): 합의점과 미 합의점에 대한 언급과 검증해야 할 중심 주제들에 대해서 언급함;
(4) 검증(확인)(probation): 중심 논지들을 발전시킴;
(5) 반박(refutation): 상대의 논점들을 반박함;
(6) 결론(conclusion): 중심 주제들에 대한 요약과 더불어 동정적 반응을 유도함.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에서 변증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사도 직분”과 “그의 복음”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그가 피고인의 자격으로 법정에 서있다면, 고소인은 그의 반대자들 즉 “유대주의자”들이며, 서신의 독자들은 배심원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사도는 이제 피고소인으로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하여 전통적인 수사학적(修辭學的) 관행을 따르고 있으며, 본 서신 또한 그 형식이나 구조에 있어 이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수사학”(修辭學)에서 필요한 제반 요소들이 차례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 본 교재의 <서론>.
(1) 서신의 전문(prescript)1:1-5
(2) 머리말(exordium)1:6-11
(3) 이야기(narration)1:12-2:14
(4) 해설(명제)(proposition)2:15-21
(5) 검증(확인)(probation)3:1-4:31
(6) 권면(exhortation)5:1-6:10
(7) 서신의 후기 및 결론6:11-18
재판에서 고소인이나 피고소인은 재판장이나 배심원 앞에서 자신의 논지(論旨)를 본격적으로 펼치기 전에, 재판과 관련된 일련의 사실들을 먼저 “진술”(narration)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이 때 진술은 간단하고, 명쾌하며, 사실에 근거한 믿을만한 진술이어야 합니다.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검증”(probation) 내지는 확인 작업인 만큼, 이곳에서 고소인이나 피고소인은 자신의 정당함을 알리기 위하여 일련의 증거들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 두 행위 사이에 “논제”(論題) 또는 “명제”(proposition)가 위치하게 됩니다. 각자는 이곳에서 자신이 주장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간단명료하게, 압축적으로, 그러면서 포괄적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이때 설득의 극대화를 위해서 두 가지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 상례인데, 우선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명백한 사실들에 대해서 먼저 언급한 다음, 이어서 현재 논쟁이 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밝히는 것입니다. 이 때 두 요소가 기능하는 바가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는 사실들을 먼저 언급함으로써 일단 기선을 제압해 놓은 다음, 곧바로 논쟁점들을 부각시키고, 이어서 “반박”(refutation) 작업에 들어감으로써 재판에서 승리를 얻어내자는 것입니다. “반박”이 “명제”에 뒤이어 곧바로 등장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위에서 구분한 방식에 따르자면, 본문(2:15-21)은 분명 “명제”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에 필요한 두 요소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요소, 즉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본문의 첫 두절입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15-16절)
두 번째 요소, 즉 아직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논쟁이 되고 있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이어지는 네 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다시 각기 두절씩 짝을 이루어 한 번은 부정적인 진술로(17-18절), 또 한 번은 긍정적인 진술로(19-20절) 논쟁점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진술에서 그가 부인하고 있는 사실은 (1) 기독교인의 자유가 오히려 방종을 조장한다는 주장과 (2) 기독교 신앙생활을 율법주의에 두려는 일단의 시도에 대해서입니다. 한편 긍정적인 진술에서 그가 주장하는 바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기독교 신앙생활에 관한 대헌장입니다.
세 번째 요소 즉 반박을 통한 명제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그것입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쓸데없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를 위하여 죽으셨다”(21절).
결국 사도가 이곳에서 제시하고 하고 있는 논점(論點)은, 3:1-4:11 사이에서 보다 상세하게 “검증” 작업을 펼치게 될 것이지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바로서, 율법이 구원에 있어 하는 역할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논제”입니다(15-16절). 우리는 이를 흔히 “반 율법주의”(anti-legalism; 反 律法主義)라 부릅니다. 이 “명제”에 대해서 사도는 3:1-18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검증”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의 “검증” 작업은 삼중적입니다: (1) 역사적 사실(개인적 체험)을 통한 검증(3:1-5); (2) <성경>을 통한 검증(3:6-14); (3) 신학적(논리적) 논쟁을 통한 검증(3:15-18). 사도가 두 번째로 제시하는 논지는 율법이 기독교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흔히 “반 명목론”(anti-nomism; 反 名目論)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이 명제에 대한 검증 작업은 3:19-4:7 사이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이, 비록 보편적인 기독교 진리 선언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안디옥 에피소드”를 계기로 벌어지고 있는 ‘바울’과 ‘베드로’ 간의 개인적인 수준의 논쟁 정도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본문이 기능하는 바는 서신 전체에 대한 “명제” 도입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그런 점에서 전후 내용에 대한 연결 고리가 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논지 1: 우리가 알거니와(15-16절)
“안디옥 에피소드”를 마지막으로 사도의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만, 그는 이 체험을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 두지 않고 배심원 즉 그의 수신자들 앞에서 자신의 “논지”로 삼기 위한 소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이슈’는 “율법과 구원과 신앙”입니다. 사도는 먼저 이 주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명제”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유대∙기독교인”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를 밝히는 것인데, 그야말로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이중적인 자기 인식을 포함하고 있는데, “혈통을 통한 자기 인식”과 “신학적 헌신을 통한 자기 인식”이 그것입니다. 본문의 첫 두절에서 이를 각각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15절)
‘바울’이 여기서 “우리”라고 할 때, 그는 이제 단순히 ‘베드로’만을 상대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유대’인을 포함하는 보편적인 “명제” 선언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유대’인이 누구인가를 밝히면서, “이방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관용적으로 사용하던 것으로서, “이방죄인”이라 함은 윤리∙도덕적인 측면을 의미하기보다는,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는 달리 율법에서 요구하는 제의적이고 종교적인 규례들을 지키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강조를 위해서 일종의 대조 반복의 수사(修辭)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유대주의자”들을 향한 일종의 역설 내지는 냉소를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기독교인”에 대한 두 번째 자기 인식, 즉 “신학적 자기 인식”은 16절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독립적인 문장이 아니라, 15절과는 등가 접속사(等價 接續詞) “그리고...”로 연결시키는 것이 헬라어 본문에 대한 가장 무난한 번역으로 보이며, 대부분의 번역에서 이런 입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곳에 옮긴 한글 번역은 <개역 개정>입니다. 또한 이 구절에 대한 <헬라어 판> 본문의 의미와 해석에 관해서는 Longenecker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R. N. Longenecker, 83쪽.
a(그리고)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b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c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6절)
그러나 이 번역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문장의 구성은 다소 산만하며, 그 내용 또한 불필요한 반복의 연속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은 그 내용에 있어 적어도 네 가지 정도의 핵심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들 각각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중요한 것이, 이 단락이 서신 전체에서 신학적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이들 특징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바울’은 이곳에서 뿐만 아니라 17절과 21절에서 다섯 번에 걸쳐 동일한 어근(語根)을 갖는 한 단어, “의”(儀; δικαι)를 여러 형태의 품사(品詞)로 바꾸어가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i) 동사형(3회, 16절)-“칭의”(δικαιόω, 디카이오); (ii) 동사형(1회, 17절); (iii) 명사형(1회, 21절)-“의”(δκαιοσύνη, 디카이오수네);
(2) “율법”(νόμος, 노모스)을 ‘예수 그리스도’와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 한 사도의 태도;
(3) “율법의 행위”(ἔργων νόμου, 에르곤 노모)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4)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πίστεως Ίησου Χριστου)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 믿음인가?”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인가?”
우선 “의”란 과연 무엇입니까? 첫 번째 특징인 “의”에 대해서, 기독교 역사에서 그 해석을 놓고 아주 다양하면서도 복장한 논의가 있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논의의 핵심은 사도가 이들 단어들을 사용할 때, 과연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즉 “의”(“의로움”이든 “칭의”이든)가 의미하는 바가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윤리∙도덕적인 삶의 질”을 염두에 둔 것인가, 아니면 이와는 별개로 “선언적이고 법적인 관계나 신분”을 염두에 둔 것인가에 관한 논의가 그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로마 카톨릭’ 진영에서는 이 단어의 명사형인 “의로움”이나 형용사형인 “의로운”(정의로운)에 무게를 두면서 전자(前者)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칭의”(δικαιόω)는 최후의 심판 시에 내려지는 최종 판결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반면 개신교 진영에서는 이 단어의 동사형인 “칭의”에 무게를 두면서 후자(後者)의 입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칭의”는 윤리∙도덕적인 의로운 삶이라기보다는 법적으로 전가되거나 선언된 “올바른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입장을 상호 보완적으로 바라보는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즉 “올바른 관계”는 “올바른(의로운) 삶”을 수반하게 된다고 전제하자는 것이지요. 따라서 사도가 “칭의” 즉 “의롭게 되다”라는 동사형을 사용할 때에는 늘 법적이고 관계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면 될 것이고, 반면 이 단어의 명사형이나 형용사형에는 늘 “正義로운 행동”과 연관해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한 단어에 이처럼 이중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근거도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선 16절의 선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믿다”의 태(態)가 “완료형” 즉 돌이킬 수 없는 행위로서 “의롭게 되는” 것은 그 결과 수반되는 당연한 법적인 신분이나 관계의 변동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나머지 구절에서 동사형으로 네 번(16-17), 그리고 명사형으로 한 번(21절) 등장하고 있는데, 이 모든 경우에서는 신분이나 관계보다는 “행동 방식”과 연관해서 이해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예)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17절상).
이제 16절의 두 번째 특징으로 거론한 바 있는 “율법”에 관한 문제입니다. 사도가 이 단어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했는가를 놓고서도 역사적으로 광범위한 논의가 있어왔습니다. 그 논의의 바탕에는 “율법”에 대해서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듯한 ‘바울’의 태도가 깔려 있습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며”, “의롭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롬 7:12, 14; 딤전 1:8). 이 때 그가 말하는 율법은 “모세 율법”으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여러 곳에서 그는 율법을 “그리스도의 공적(功績)”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비난하며 공격하고 있습니다. 16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의미가 바로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모세 율법”을 어떤 형태로든 “의”와 연관되는 하나의 종교 제도로 이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따라서 결국 ‘바울’과 “율법”에 대한 논의에 있어 분수령이 되는 곳은 사도가 이러한 종교적 제도로서의 “율법”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핵심 요점은 이것입니다: “사도는 율법 그 자체를 반대하고 있는 것인가 또는 율법주의 즉 율법을 하나님의 호의(好意)를 얻는 수단으로 보려하는 특정 태도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인가?” ‘알렉산드리아’ 교부들과 ‘안디옥’ 교부들은 바로 이 점에서 완전히 반대편의 입장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입장은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소위 “율법주의”와 관련해서, 비단 ‘바울’뿐만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심지어 ‘유대’교의 ‘랍비’들마저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도는 단순히 “율법주의” 그 자체를 비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 기초한 “종교 체계” 전체를 공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율법주의”에 근거한 종교 제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게 될 새로운 관계를 예비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에 의해서 대체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이 점을 이어지는 “검증” 단락에서(3:1-4:11) 보다 상세하게 밝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특징으로 지적한 바 있는 “율법의 행위”란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업적으로 내세울 만한 어떤 “선한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까? 또는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를 말합니까? 아니면 보다 제한 적이면서도 덜 편파적이며 종교적인 영역에 국한되는 “할례”나 “안식일 준수”나 “식사 규례” 등과 같은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까? 이 마지막 행위는 ‘유대’인을 가장 ‘유대’인답게 해주는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이기는 하나, 그 자체로서 칭찬받을 만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명목론”을 상징하거나 대표하는 행위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명목”(名目論, nomism) 또는 “명목주의”(名目主義)는 일명 신율주의(神律主義)로 불리는데, 이와 비슷한 용어인 “율법주의”(律法主義, legalism)와 함께 1 세기 유대∙기독교인들의 신학과 신앙에 깊은 영향을 끼친 바 있습니다. “율법주의”가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라면, “명목론”은 구원 후 기독교인으로서의 신앙생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율법을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를 얻기 위한 통로 또는 수단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며, 한 편 “명목론”은 기독교인이 되고 난 이후에도 유대인으로서 할례나 안식일 준수나 음식에 관한 규례 등과 같은 최소한의 율법의 요구 조건들은 만족시켜야 한다는 입장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가 구원을 말하고 있다면, 명목론은 구원 이후의 삶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유대’인이라면 기독교인이 된 이후라도 체질적으로 “명목론자”가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문제는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를 요구했다는 점에서 ‘바울’의 복음과는 대척점(對蹠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명목론”에 빠진 초대 교회 당시 ‘유대’인들조차도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하나님 앞에 공적을 쌓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보이는 즐겁고도 자발적인 반응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즉 일 세기 경 “유대주의”는 근본적으로 “율법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조차도 “솔로몬의 기도”에 관해서 해석하면서, “하나님은 하나도 부족한 것도 없고 보상을 필요로 하는 분도 아니므로 인간이 그 행위로써 하나님께 감사를 돌려준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이다”고 한 바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16절에서 선언하고 있는 바도 바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으로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이점 ‘야고보’나 ‘베드로’나 다른 유대∙기독교인들 모두 공유하고 있었던 확신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약속의 ‘메시야’라는 믿음 말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믿음의 본질에 관한 확신 위에, 기독교인으로서 믿음의 대상(또는 내용)에 관한 확신을 더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 세기 유대∙기독교인들이 “율법주의자”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최소한 종교적인 “명목론”에 빠져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혈통으로는 ‘유대’인이면서 신학적으로는 기독교인이었으니 달리 선택의 여지는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즉 예수를 믿되 ‘유대’적인 관습이나 규례들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유대’인에게 있어서야 이런 입장이 절묘한 타협일 수도 있겠으나, 이방인에게도 그렇게 살도록 요구하게 되면 “복음”과 “율법”은 대척점에 설 수 밖에 없고 그 결과는 “율법주의”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이 이를 공공연하게 요구하고 있었다면, ‘안디옥’에서 ‘베드로’는 부지불식간에 이를 드러낸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바울’에게 있어 “율법의 행위”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그에게 있어 “율법의 행위”란 단순히 종교적인 영역에만 국한되는 소위 “명목론”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의 “율법주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 준수를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는 종교 체계 전체를 의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유대’인을 가름하는 진정한 척도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사도는 분명히 하고 있으며, 이점 동료 유대∙기독교인들도 동의하고 있는 바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이제 16절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는 헬라어 본문 “pivstew" Cristou' jIhsou”(피스테오스 예수 크리스토스)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치는 않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본문의 “예수 그리스도”의 품사(品詞)를 목적격 소유 형태로 볼 것인가, 또는 주격 소유 형으로 볼 것인가에 있습니다. 목적격 소유로 변역하게 되면 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faith in Jesus Christ)이 될 것이나, 반면 주격 소유로 번역하게 되면 그 의미하는 바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faith 또는 faithfulness of Jesus Christ)으로 완전히 달라집니다. 대개의 경우, <개역성경>우리 말 성경에서 보듯이 “예수 그리스도”(' jIhsou Cristou)를 목적격 소유로 해석하고 있습니다만, 그 반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의견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이 헬라어 표현이 <바울 서신>에서 등장하고 있는 빈도는 일곱 번에 불과하여(2:16에서 두 번; 3:22; 롬 3:22, 26; 엡 3:12; 빌 3:9),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어려움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음”(pivsti", 피스티스)에 대응하는 ‘히브리’어 단어 ‘에무나’(הנןמא)는 “믿음”(faith)과 “신실함”(faithfulness)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다른 곳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와 비교해 본다면, 두 가지 가능한 경우 중에서 어떤 해석을 취할 것인가는 생각보다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컨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미쁘심”(pivstin tou' qeou)(3:3)이나 “아브라함의 믿음”(pivsti" jAbraa;m)(3:4) 등에서 보듯이, “pivstew" Cristou' jIhsou”(피스테오스 예수 크리스토스), 또한 주격 소유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는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기독교 복음의 객관적인 근간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의 복음의 객관성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순종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는 그의 삶 전체와 소극적으로는 그의 죽음이 절대적 순종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복음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pivsti" Cristou' jIhsou)이라는 객관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 이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인 대응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고 있음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 서신>에는 기독교 신앙의 객관적이고도 주관적인 근거가 균형 있게 드러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기독교 신앙의 객관적 근거와 주관적 체험,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πίστις Ίησου Χριστου)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함께 등장하고 있는 성경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διά πίστις Ίησου Χριστου;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2)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έπαγγελία έκ πίστεως Ίησου Χριστου;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기초한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함이라”(갈 3:22); (3)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τὴν διά Χριστου;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16절 역시 그 중 하나에 해당됩니다. 일부를 다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16절상)
이 번역에 따르면 상호 반명제(反命題)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은 “율법의 행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또는 신실함)”이지,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객관적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에 있는 것이지 “율법에 기초한 사람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을 비롯한 유대∙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러한 객관적 사실을 주관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사도는 16절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를 수사적 반복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왜냐하면) 육체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6절하)
이 부분에서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 동사 “믿다”의 시제(時制)는 완료형으로서,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행위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가 목적하는 바는 “의롭게 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다고 16절의 마지막 문장에서 못 박음으로써,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논지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논지 2: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17-20절)
부정적 진술. 사도는 15-16절에서 유대∙기독교인은 누구이며, 무엇을 믿는가에 대해서 모두가 동의하고 합의하고 있는 사항에 대해서 자신의 논지를 요약한 바 있습니다. 논지의 요점은 소위 “율법주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는 17-20절 사이에서 두 번째 논지로 나아가고 있는데, 그 내용은 피차간에 논쟁이 되고 있는 사항 즉 “명목론”에 관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논쟁의 핵심은 이런 것입니다: “이방인 기독교인도 유대∙기독교인처럼 율법이 요구하는 종교∙제의적인 요구조건들을 준수해야 하는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17절)
그러나 이 구절은 보기보다 복잡하며, 그 해석 또한 아주 다양하게 제시된 바 있습니다. 우선 이 구절에서 제시하고 있는 세 가지의 논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고 있다; (2) 그런데 우리는 지금 죄인으로 몰리고 있다; (3)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죄를 조장하는 자이다. 마치 삼단 논법과도 같은 이들 논점과 관련해서 우리의 질문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여기서 어떤 사실을 천명하고 있는가 아니면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몰리고 있다는 말은 과연 사실인가? 사도는 지금 반대자들의 공격과 비난에 대해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들의 주장은 무엇이며, 이에 대한 대응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죄를 짓게 한다는 주장은 어떤 근거에 의해서인가?
우선 첫 번째 논점,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고 한 것”은 과연 사실입니까? 이 논점은 조건 절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문법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사실임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만, 15-16절 사이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은 ‘바울’의 서신 여러 곳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신자(信者)의 지위나 신분 및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를 강조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1:22; 2:4; 3:14, 26, 28; 5:6, 10).
보다 중요한 질문은 두 번째 논점, 즉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난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원문의 의미에 보다 가까운 번역은 “우리 자신조차도 죄인으로 드러난다”가 될 것인데, 이 표현은 15절에서 “우리는 이방 죄인이 아니라”는 선언을 연상시켜 주기도 합니다. 사도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면 다시 죄를 짓게 되고 결국 죄인으로 되돌아간다는 말입니까? 또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는 이방인에 비해서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또는 “율법주의자”들의 다음과 같은 공격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까?
만일 당신이 모세의 율법에 따라 살지 않으면 당신의 방종한 생활을 점검할 방법이 없다. 만일 율법으로 신앙생활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가 모든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결국 도덕적 파탄의 책임자이고 죄를 짓게 하는 원흉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유의 한계를 넘어 방종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며, 이는 이방 죄인들에 비해 결코 나을 것이 없는 수준이다. ‘바울’의 복음이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이라면, 그가 늘 주장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이 죄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본 교재의 <서론>에서 밝힌 바 있듯이, 사도가 ‘갈라디아’에서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1) “유대주의자”들이 제기한 문제로서 이방 기독교인도 ‘유대’ 율법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는 주장; (2) ‘갈라디아’ 교인들 자체의 문제로서 방종을 수용하고 용인하는 태도. 순전히 신앙의 실천적인 면만을 고려해 본다면, 전자의 태도는 후자의 태도를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열망을 반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바라볼 때,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나게 된다”고 말한 사도의 진의를 추측해 보기가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는 지금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라보는 시각, 즉 ‘갈라디아’ 기독교인들이 높은 도덕적 수준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은 하나 실제로는 죄를 짓고 있다는 시각에 대해서 인정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비록 “칭의”(稱義)가 순전히 법적인 선언으로서 윤리∙도덕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하드라도, 기독교인으로서 높은 윤리∙도덕적 수준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의 반응은 적절한 것이며, 더 나아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고백이 아닐 수 없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죄를 조장하는 자”라는 세 번째 논점까지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는 서신의 후반부에서(5:13-26)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자유와 방종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다루면서, 도덕적 방종이나 타락은 더 엄격하고 더 많은 율법을 적용한다 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성령의 인도에 따름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냥 감정 섞인 결론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왜 그럴 수 없습니까? “왜냐하면..”의 후치사(後置詞)로 시작하는 18절이 그 해답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18절)
사도의 주장에 따르면, 기독교인이 율법과 결별한 후 다시 율법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율법을 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사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율법주의”를 거부하면서 “명목론”을 지지하게 되면 그렇다는 것이지요.
사도는 지금 일종의 반어법적인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즉 “내가 만일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있다면, 그게 바로 나다”라는 식의 논리가 그것입니다. 그는 지금 사실과 반대되는 가정(假定)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일에 대해서 가정을 도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즉 아마 그는 이 말을 하면서 ‘베드로’나 다른 유대∙기독교인들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이 문장에서 마치 자기 자신이 그런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일인칭 주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17절에서는 반대로 일인칭 복수형 “우리”를 사용한 바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비난을 자신에게 돌리는 식의 이런 수사적 기법은 상당히 외교적이기까지 합니다.
사도가 “율법을 헐었다”고 할 때, “율법주의”는 물론 “명목론”조차 결별했다는 말입니다. 구원에 있어서나 신앙생활에 있어서나 율법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 때 동사 “헐었다”의 시제가 “완료형”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긍정적 진술. 이어지는 두 절에서 사도는 유대 “명목론”에 대한 자신의 신학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20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19-20절)
그가 제시하고 있는 논점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율법의 목적- 스스로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동시에 이를 뛰어넘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맺도록 하는데 있다; (2) ‘그리스도’의 죽음과 효력-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확인할 때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 (3) ‘그리스도’ 중심 신앙생활- ‘유대’인이나 유대∙기독교인들이 율법 중심의 신앙생활을 한다면, 기독교인들은 그들 속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삶을 인도하시는 ‘그리스도’ 중심의 생활을 하게 된다.
율법이 하는 일이 과연 무엇입니까? 사도는 이 질문과 관련해서 나중에 보다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지만(3:19-4:7), 19절에서 율법의 목적에 대해서 요약해서 핵심적으로 밝혀주고 있습니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율법이 하는 일은, 내가 하나님에 대하여 친밀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의 영향력이 더 이상 나에게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옮겨놓는 일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표현이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롬 6:2, 10-11; 7:2-6). 반대로 “...에 대하여 살았다”는 것은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롬 6:10-11; 14:7-8; 고후 5:15). 율법에 대하여 죽은 목적은 율법을 부정하거나 무효화 하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도는 18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일인칭 단수롤 사용함으로써, 기독교인으로서의 삶과 죽음의 체험을 개인화하고 있는데, 그 강도가 이전보다 훨씬 더합니다. 즉 이전에는 타인이 받아야 할 비난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강조의 효과가 다소 미약했지만, 이번에는 정반대로 자신의 개인적 체험이 다른 모든 신자들과 공유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희망을 ‘그리스도’에게 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처럼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을 달리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효력은 무엇입니까?” 해답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자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체험으로 동일시할 때, 율법의 권세로부터 자유스러워진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초대 교회의 설교의 핵심이었으며, <갈라디아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1:4; 3:1, 13; 6:12, 14).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효력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 구원 또는 구속과 관련하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만(롬 3:23-26; 5:9-10, 18-19; 6:1-7; 7:14-25), 이곳에서는 “율법에 대하여 죽음”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7:1-6에서 이 개념을 예시를 통해서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는 바로 이런 체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문자적으로서가 아니라 영적인 체험을 일컫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 문장에서 동사의 시제는 완료형으로서, 과거에 행위가 단 한 번 이루어졌고, 그 결과가 현재까지 미치고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선언의 의미는 이 문장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한글 성경을 비록해서 많은 영어 번역본에서는 이 문장을 20절에 두고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헬라어 성경에서는 19절의 끝에 두고 있습니다(본 교재에서도 헬라어 역본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럴 경우, 다중적(多重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율법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에 합당한 삶을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스스로 그 영향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2) 그러한 영향력의 상실은 신자들이 하나님과 보다 풍성한 관계를 맺는데 필수적이다; (3)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권세로부터 자유를 요구한다; (4) 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것으로 동일 시 함으로써 그분이 성취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함께 체험할 수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율법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말고 또 다른 체험은 없는가? 20절에서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20절은 등가접속사 “그리고”(δέ)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즉 19절의 논의에 이은 또 다른 논리를 소개하려는 의도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20절상). 또 다른 체험이란 나 자신의 “육체의 권세”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문장에서 “나”는 헬라어로 “육체”(σάρξ, 사르케) 또는 “육체의 소욕(所欲)”을 말하는 것으로서, “성령” 또는 “성령의 소욕”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5:13-24).
이런 자유가 가능하게 되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 갈 1:22; 2:4; 3:14, 26, 28; 5:6, 10.
“기독교 신비주의”(Christian mysticism)란 바로 이런 상태를 말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비주의”란 대체로 무아지경, 황홀경, 금욕주의적인 명상, 신적인 몰입, 등을 연상시켜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신비주의”는 이와는 반대로, 진정한 자아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 본래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지, 이를 부인하거나 이로부터 도피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어떤 황홀한 방법으로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초자연적인 존재와 합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에 반응하면서 그분과의 인격적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 신비주의”의 한 쪽 측면인 “그리스도 안에서”와 유사한 표현으로 “그 안에서”, “주 안에서”, 또는 “성령 안에서”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표현은 <바울 서신>에서만 무려 164회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 그리스도”와 유사한 표현으로서는 내(또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등을 들 수 있습니다(참고. 갈 2:20; 골 1:27, 29; 엡 3:16-17).
“기독교 신비주의”가 개인의 삶속에서 드러나는 구체적인 예로서, “성령 충만”의 삶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갈 5:22-23).
한 개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율법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질 뿐만 아니라,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게 되므로 자신의 “육체의 권세”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고 했습니다(20절상). 이제 사도는 20절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 논지를 계속 이어가면서, “그리스도가 내안에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추가로 해설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절하).
즉 기독교 삶은 믿음의 삶이며, 그러한 삶의 토대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있다고 한 바 있습니다(16절). 믿음의 삶은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대한 헌신과 신뢰의 표현입니다.
결론: 폐하지 아니하노니(21절)
본문의 마지막 구절은 수사적(修辭的) 성격 상 반박(refutation)이며, 기능상 그가 펼친 대 논쟁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즉 사도는 이곳에서 반대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논쟁의 핵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1절)
이 문장은 전체 논제의 마지막 문장으로서, 앞의 문장들과 어떤 구문론적인 연결이 없이 갑자기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21절의 전반부는 반박문에 해당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 하노니”(21절상). 이 문장의 동사 “폐하다”는 일종의 법적인 용어로서, “언약”이나 “유언” 또는 “조약” 등을 무효화 하거나 폐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도가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반박문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의 반대자들을 겨냥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들 반대자는 ‘바울’이 전하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은혜의 복음”이 실은 방종을 조장하므로, 실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오히려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사도는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지극히 짧은 한 문장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지만, 곧 이어 이에 대해 보다 소상하게 “검증” 작업을 펼치게 될 것입니다(3:1-4:11).
반박에 이은 결론이 21절 후반부에 등가 접속사 “왜냐하면...”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반박에 대한 자신의 해설이자 설명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1절하). 사도는 16절에서 이미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다”는 “유대주의자”들의 확신이 잘못된 것임을 설파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장의 마지막은 수사적(修辭的) 기능상 일종의 귀류법(歸謬法)에 해당합니다. 그 내용은 그동안 사도가 힘써 싸워왔던 복음의 핵심 내용,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효력”에 대한 최종 진술로 볼 수 있습니다. 종합하자면,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행위(믿음)”은 공존할 수 없고, “율법으로 말미암을 수 있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 사이에도 아무런 공통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교훈과 적용
신학자 ‘바클레이’(W. Barclay)는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에서 두 가지 큰 유혹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는 유혹이고, 다른 하나는 조그만 업적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려는 유혹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에서 ‘바울’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도 따지고 보면 이 두 가지 유혹에서 비롯된 치명적인 두 가지 신학적 오류입니다. 그 첫 번째가 “율법주의”로 불리는 것이고, 두 번째가 “명목론”으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길, 즉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율법을 준수하는데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 신학에 따르면 율법을 모르는 “이방죄인”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명목론”은 보다 은밀하고 그럴 듯한 신학처럼 보입니다. 즉 이방인도 “율법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는 있으나, 계속해서 의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하나님의 호의를 입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율법에서 요구하는바 일련의 규례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규례는 주로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규례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음식규례; 안식일 규례; 할례의 규례; 등). 다시 말하자면 이방인이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유대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만일 이방인 기독교인이 율법의 규례로 재무장 하지 않으면, 윤리∙도덕적으로 방종으로 흐르게 되며, 율법은 이를 막는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논지입니다.
지금 ‘바울’은 피고소인의 신분으로 법정에 서 있습니다. 그를 고소한 자들은 유대인과 유대∙기독교인들입니다. 피의(被疑) 내용은 두 가지 정도입니다. 그가 율법무용론자이며 또한 도덕폐기론자라는 것입니다. 율법무용론자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고, 도덕폐기론자로서 자유를 넘어 방종을 조장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배심원으로 자격으로 앉아 고소인과 피고소인의 변론과 검증을 듣고 있습니다.
사도는 피고소인으로서, 그동안 일어났던 일련의 일들을 이야기 형식으로 진술했고(1:13-2:14), 이제 본격적으로 그가 변론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요약해서 설명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의 논지는 아주 압축되어 있고, 함축적이며, 그러면서도 서신 전체를 대변하고 망라하고 있습니다. 재판관은 물론 배심원을 효과적으로 설득하기 위하여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수사학적 기법들도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의 논지는 세 단계에 걸쳐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첫 단계가 이 재판에 참석하고 있는 모든 관객들이 하나같이 인정하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확인된 사실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15-16절). 처음부터 논쟁의 소지가 있는 문제들을 먼저 언급하는 것은 재판에서 현명한 일은 못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듣는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게 한 후, 비로소 논쟁이 되고 있는 사안들 즉 피의 내용에 대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는 두 번째 단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17-20절). 이 부분에서 그는 반복을 통해서 자신의 논지가 정당함을 주장하는데, 한 번은 부정적인 진술을 통해서(17-18절), 또 한 번은 긍정적인 진술을 통해서(19-20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고소인들이 반론의 논리를 만들기 전에, 그리고 배심원들 사이에서 일고 있는 긍정과 감동의 물결이 채 사라지기 전에, 최후의 반박 진술로써 쐐기를 박고 있습니다(21절).
우리가 알거니와(15-16절). 이제 사도의 첫 번째 논지를 살펴봅시다. 피고소인이고 배심원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인정하고 동의하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유대인이며 이방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선언은 특히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자들에게 대하여 한 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유대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온 자들이며, 율법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방인 죄인들과는 당연히 구별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이 할례나 안식일이나 음식 법을 제대로 알 리가 없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 말 속에는 그렇게 스스로를 뽐내는 자들에 대한 냉소와 비아양이 깔려 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과연 너희들도 율법을 잘 알고 지키고 있느냐?”
혈통은 그렇다 치고, 기독교인은 누구이며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이방인이고, 유대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받아들이고 있는 신학적인 입장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16절에서 당장하고 있는데, 이 선언은 다름 아닌 <갈라디아서>의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입니다:
a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b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c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6절)
일견 문장의 구성이 다소 산만하며, 그 내용 또한 불필요한 반복의 연속처럼 보입니다만, <신약> 전체를 통해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네 가지 핵심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각각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치명적으로 중요합니다. 우선 이들 특징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의”, “의롭게 됨”(칭의); (2) “율법”; (3) “율법의 행위”; (4)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이들 각각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상세하게 다룬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이들 상호간의 관계에 대해서 간단히 정리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선 “의”란 “윤리∙도덕적인 삶의 질”을 염두에 둔 것이라기보다는 “선언적이고 법적인 관계나 신분”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단어는 일종의 법률적인 용어로서, 법정에서 내려지는 최종 판결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칭의”는 구원과 관련하여 드러낼 수 있는 하나의 ‘이미지’로 볼 수 있습니다(죤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유죄 선고가 아니라 무죄 선고 즉 “의인”으로 불릴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사도는 이 질문에 대해서 서로 대척점에 있는 두 가지 행위를 그 해답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율법의 행위”입니다. 그에게 있어 “율법의 행위”란 단순히 종교적인 영역에만 국한되는 소위 “명목론”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의 “율법주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 준수를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는 종교 체계 전체를 의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유대’인을 가름하는 진정한 척도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사도는 분명히 하고 있으며, 이점 동료 유대∙기독교인들도 동의하고 있는 바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그렇다면 해답은 “율법의 행위”와 대척점에 있는 다른 행위일 수밖에 없을 텐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행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행위” 쯤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번역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헬라어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faith 또는 faithfulness of Jesus Christ)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행위”와 대척점에 있는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인 것입니다. 사도는 이 행위를 기독교 복음의 객관적인 근간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의 복음의 객관성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순종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는 그의 삶 전체와 소극적으로는 그의 죽음이 절대적 순종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결국 기독교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이라는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인간의 주관적인 대응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6절 일부를 다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16절상)
이 번역에 따르면 상호 반명제(反命題)의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은 “율법의 행위”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또는 신실함)”이지,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객관적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에 있는 것이지 “율법에 기초한 사람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을 비롯한 유대∙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이러한 객관적 사실을 주관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사도는 16절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를 수사적 반복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왜냐하면) 육체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6절하)
이 부분에서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 동사 “믿다”의 시제(時制)는 완료형으로서,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행위임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가 목적하는 바는 “의롭게 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다고 16절의 마지막 문장에서 못 박음으로써,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논지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17-20절). 이쯤 해서 사도는 피차간에 논쟁이 되고 있는 사항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명목론”에 관한 것입니다: “이방인 기독교인도 유대∙기독교인처럼 율법이 요구하는 종교∙제의적인 요구조건들을 준수해야 하는가?” 그의 대답은 결론적으로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소인들의 주장이 아무 근거도 없고 논리적으로 모순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왜냐하면)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17-18절)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는 행위”는 다름 아닌 “명목론”의 주장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일종의 자기모순이 될 수밖에 없는데, 기독교인이 율법과 결별한 후 다시 율법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스스로 율법을 어기는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사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율법주의”를 거부하면서 “명목론”을 지지하게 되면 그렇다는 것이지요. 사도는 지금 일종의 반어법적인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즉 “내가 만일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있다면, 그게 바로 나다”라는 식의 논리가 그것입니다. 그는 이 말을 하면서 ‘베드로’나 다른 유대∙기독교인들의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이 문장에서 마치 자기 자신이 그런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일인칭 주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17절에서는 반대로 일인칭 복수형 “우리”를 사용한 바 있습니다).
사도가 “율법을 헐었다”고 할 때, “율법주의”는 물론 “명목론”조차 결별했다는 말입니다. 구원에 있어서나 신앙생활에 있어서나 율법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 “명목론”에 대한 자신의 신학의 핵심을 19-20절에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세 가지 논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율법의 목적; (2) ‘그리스도’의 죽음과 효력; (3) ‘그리스도’ 중심 신앙생활.
율법이 하는 일이 과연 무엇입니까? 역설적이긴 하지만 율법이 하는 일은, 내가 하나님에 대하여 친밀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의 영향력이 더 이상 나에게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옮겨놓는 일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표현이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관계가 끊어진 상태를 말하며, 반대로 “...에 대하여 살았다”는 것은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은 목적은 율법을 부정하거나 무효화 하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도는 18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일인칭 단수롤 사용함으로써, 기독교인으로서의 삶과 죽음의 체험을 개인화하고 있는데, 자신의 희망을 ‘그리스도’에게 두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처럼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해답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자 개개인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체험으로 동일시할 때, 율법의 권세로부터 자유스러워진다는 뜻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율법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말고 또 다른 체험은 없는가? 20절에서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20절상). 또 다른 체험이란 나 자신의 “육체의 권세”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문장에서 “나”는 헬라어로 “육체” 또는 “육체의 소욕(所欲)”을 말하는 것으로서, “성령” 또는 “성령의 소욕”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5:13-24).
한 개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율법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질 뿐만 아니라,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게 되므로 자신의 “육체의 권세”로부터도 자유로워진다고 했습니다(20절상). 이제 사도는 20절의 나머지 부분에서 이 논지를 계속 이어가면서, “그리스도가 내안에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추가로 해설해 주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절하).
즉 기독교 삶은 믿음의 삶이며, 그러한 삶의 토대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있다고 한 바 있습니다(16절). 믿음의 삶은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대한 헌신과 신뢰의 표현입니다.
폐하지 아니하노니(21절). 사도는 마지막으로 반대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자신의 변론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반박의 핵심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일견 느닷없이 보이는 이 선언은 실은 그의 반대자들의 집요한 공세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의 반대자는 ‘바울’이 전하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은혜의 복음”이 방종을 조장하므로, 실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오히려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사도는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지극히 짧은 한 문장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지만, 곧 이어 이에 대해 보다 소상하게 “검증” 작업을 펼치게 될 것입니다(3:1-4:11).
반박에 대한 자신의 해설이자 설명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1절하). 사도는 16절에서 이미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다”는 “유대주의자”들의 확신이 잘못된 것임을 설파한 바 있습니다. 이 선언은 그동안 사도가 힘써 싸워왔던 복음의 핵심 내용,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효력”에 대한 최종 진술로 볼 수 있습니다. 종합하자면,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행위(믿음)”은 공존할 수 없고, “율법으로 말미암을 수 있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 사이에도 아무런 공통점도 없습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 기능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2. 본문은 <갈라디아서> 전체에 대한 일종의 <Magna Carta>로 볼 수 있는데, 어째서 그러한지 토의해 봅시다.
3. “율법주의”와 “명목론”(신율주의)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4. 오늘 교회에서 “신율주의”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지 토의해 봅시다.
제 9과: 율법주의 반박(1)
D. 檢證
(3:1-4:11)
법정에서 검사가 논고를 내릴 때나, 변호사가 변론을 할 때에 있어서나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이점은 연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검증”(檢證, probation)은 연설이나 재판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서론”(exordium)이나 “이야기”(narration)는 모두 이를 위한 준비 작업에 불과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에서 바로 이 “검증”에 해당되는 부분이 3:1-4:11로서, 서신 전체를 통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그동안 “이야기” 부분에서(1:11-2:14) 견지해 왔던 소극적이고도 수세적인 입장을 뛰어넘어, “변론”(또는 명제 선언) 부분에서는(2:15-21) 보다 적극적이고도 공격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 바 있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할 자료들을 제시할 차례입니다. 그가 제시할 증거들이란 “율법주의”(legalism)와 “명목주의”(nominism)가 틀렸음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증거들을 말합니다. 참고로 다시 요약하자면, “율법주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율법의 행위”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편 “명목주의”는 보다 완벽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위” 외에 “율법의 행위”를 더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전체 “검증” 본문은 이 두 주제에 따라 다시 크게 두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3:1-18율법주의 반박
(2) 3:19-4:11명목주의 반박
한편 이 두 주제는 2:15-21 사이에서 이미 서신의 “대명제”(大命題, proposition)로 제시된 바 있으며, 이 본문 역시 상기한 두 주제에 따라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2:15-16율법주의 반박
(2) 2:17-21명목주의 반박
서신의 구조를 통해서 볼 때, “명제”와 “검증”을 포함하고 있는 본문들이 상호 연결되는 방식을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3:1-18 사이에서 율법주의를 반박하는 검증 본문을 다시 세분해 보면, 검증 작업이 세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경험을 통한 검증(3:1-5)
(2) 성경을 통한 검증(3:6-14)
(3) 신학을 통한 검증(3:15-18)
마찬가지로 3:19-4:11 사이의 명목주의를 반박하는 검증 본문도 세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누어짐을 볼 수 있습니다:
(1) 율법의 목적과 기능(3:19-25)
(2)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3:26-29)
(3) 관계에 대한 예시(4:1-7)
(4) 사도의 염려(4:8-11)
“검증” 본문은 당시의 상투적인 수사학적(修辭學的) 관행을 따라 상대를 비난하고 질책하는 표현을 도입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인이여”(3:1). 그리고 끝 부분도 이와 유사한 질책성 발언으로 마감하고 있습니다: “내가 ...두려워 하노라”(4:11). 이 두 구절 사이에 일단의 수사적(修辭的) 질문들이 (1) 3:1-5 사이에서 한 번, (2) 그리고 4:8-10 사이에서 또 한 번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 두 단락이 문학적으로 기능하는 바는 “검증” 본문에 대한 수미상관(首尾相關)입니다. 따라서 이런 구조를 통해서 “검증” 본문의 시작과 끝이 어딘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3:1“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인이여”(비난과 질책)
(2) 3:1-5수사적 질문들
(3) 4:8-10수사적 질문들
(4) 4:11“내가 두려워 하노라”(비난과 질책)
수사학적(修辭學的) 관점에서 볼 때, 사도는 이 부분에서도 서신의 벽두부터(1:6) 도입해 왔던 소위 “법정 수사”(法廷 修辭)의 기법을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점 3:1-5 사이에서 사도가 제기하고 있는 일련의 질책성 심문(審問)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락의 나머지 본문(3:6-4:11)에서는 일부 구절들을 제외하고는(3:6상; 4:9) 당시 그리스∙로마의 전통적인 수사 기법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곳에서 수사학적(修辭學的) 기법을 ‘유대’식 논쟁과 성경 해석 방법에 더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아브라함’에 관한 그의 주석이 그 전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검증” 본문에서 사도가 시도하고 있는 바는 “명제” 선언에서 드러난 두 주제, “율법주의”와 “명목주의”에 대해서 보다 ‘유대’적인 전통과 방식에 따라,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증거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 그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는 소극적이거나 방어적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공격적입니다.
9
율법주의 반박(1)
경험을 통한 검증
(3:1-5)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2절하)
<갈라디아서>의 “검증”(檢證)에 해당되는 본문은 3:1-18 사이로서, ‘바울’의 서신중에서 아마도 가장 친숙하고 가장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본문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곳에서 “기독교 복음”의 핵심에 대해서, “율법주의”에 대해서, 그리고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에 대해서 아주 강도 높게, 그리고 심도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단락이 기능하는 바는, 사도가 2:15-16에서 천명한 바 있는 기독교 복음의 “대 명제”, 즉 율법은 기독교 복음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이 옳고 정당한 것임을 세 가지 측면에서 “검증”(檢證)하는 일입니다. 사도가 접근하는 세 가지 방식은 다음과 같으며, 본문은 그 첫 번째에 해당됩니다:
(1) 경험을 통한 논증(1-5절)
(2) 성경을 통한 논증(6-14절)
(3) 신학적 입장을 통한 논증(15-1절)
문학과 역사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경험을 토대로 “검증” 작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에 대해서 처음 어떻게 반응했으며, 그 후 “유대주의자”들이 이 지역에 나타나기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받아들였던 복음과 자신들의 생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축복을 제대로 연결시킬 수만 있었더라도, “유대주의자”들이 발붙일 틈이 없었을 것이고,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사도는 단언합니다.
본문의 분위기는 수사학적으로 당시의 설교자나 교사나 작가들의 글에서 느껴지는 것과 흡사한 점들이 너무 많습니다. 본문의 다섯 절 안에는 추궁하고 심문하는 식의 질문들이 여섯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문책성 질문들은 그리스∙로마 시대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수사적 형태로서 바울도 이를 즐겨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 롬 3:1-9, 27-31; 4:1, 9-10; 6:1-3, 15-16; 7:1, 7; 8:31-35.
본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랄하고도 모욕적인 비난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어리석도다”(3:1). 이런 표현 또한 당시 설교자들이 흔히 사용하던 수사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도 역시 이러한 수사학적 기법들을 활용해서 ‘갈라디아’의 이방 기독교인들을 효과적으로 설득시키려 시도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그동안 피의자로서 자신의 입장과 논지를 밝히고, 그 논지 하나하나에 대해서 이제 본격적으로 “검증” 작업에 들어가려는 순간, 참고 억눌러 왔던 감정이 화산이 폭발하듯 갑자기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1절상)
피의자의 신분으로서 배심원들에게 자신의 직분과 그의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변론하던 모습에서 돌변하여, 그 배심원들을 향해서 비난과 독설을 퍼붓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수신자들을 집적 호명하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입니다: (1) “고린도 인들이여”(고후 6:11); (2) “빌립보 사라들아”(빌 4:15); (3) “디모데야”(딤전 6:20). 그러나 감탄사 “오!”(ὥ 또는 ὦ)와 함께 수신자들을 부르는 경우는 그의 서신중에서는 이곳이 유일합니다. 그러나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감탄사와 호칭을 동시에 사용하는 용례는 더러 있습니다: 마 15:28; 막 9:19; 행 13:10; 약 2:20).
본문에서 두 번이나 등장하고 있는 “어리석다”는 단어를 통해서 사도의 비난이 얼마나 신랄한지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어리석은 자”를 “지혜 있는 자”의 대조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는데(롬 1:14), 그가 이곳에서 지칭하는 대상은 “헬라 야만인”을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갈라디아’의 이방 신자들을 향하여 “어리석다”고 할 때는 그런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의 영적 분별력이 만족스럽지 못함을 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그의 깊은 근심과 좌절 그리고 곤혹스러움을 드러내주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도가 염려하는 것은 이들의 지적 능력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 분별력이 없는 것이 더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기는 ‘엠마오’의 두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누가복음>은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한탄을 유사한 표현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한탄에 이어 여섯 가지의 질문이 마치 피의자를 심문하는 검사처럼 속사포처럼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누가 너희를 속였느냐(1절중)
본문에 등장하는 “속이다”는 동사는 신약에서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단어로서, 그 의미하는 바는 다소 상징적인 것으로서 “마술을 걸어 현혹시키다” 또는 “마법을 걸다” 등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 구절을 “누가 너희에게 환각제를 주었느냐?”로 고쳐 쓰고 있습니다(The Message). 사도가 보기에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이 사악한 귀신의 주술(呪術) 에 빠져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런 식의 질문은 당시 반대자들의 책략과 음모를 밝히 드러내기 위한 수사적 표현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악한 주술을 깨뜨리기 위한 처방은 “복음”을 다시 들려주는 것 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는 그가 이전에 공개적으로 이들에게 전했던 그 복음을 수고스럽게도 다시 한 번 더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의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1절하)
사도에게 있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다”(σταυρό, 스타우로)는 동사는 본문 중에서는 완료형 분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이 사건이 과거에 단 한 번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나 효과가 현재까지 미치고 있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객관적인 근거가 될 것이며, 따라서 이 복음을 한 번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이를 대체할 만한 어떤 다른 수단이나 방법을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율법주의”를 비롯한 여타 종교적 가르침과 구별되는 기독교 복음의 대 헌장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들이 이전에 사도로부터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었던 이 복음을 지금 다시 한 번 더 듣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동사 “밝히 보이다”(προγράφω, 프로그라포)는 헬라어로 “미리 쓰다” 또는 “공표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만, 본문에서는 후자(後者)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이전에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마치 공개적으로 발표를 하듯, 또는 ‘예수’의 깃발을 그들 앞에 흔들어 보이듯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고, 사도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알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2절상)
하지만 그가 알고 싶은 것은 단순히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을까”가 아니라, 그들이 이전에 복음을 받아들였을 때 실제 무슨 체험을 했는가를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2절에서 이 단락의 가장 중요한 핵심 변론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령”에 관한 언급으로서, 사도는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미 체험한 바 있는 “성령의 체험”에 호소하면서, 과연 그들이 무슨 근거로 “성령”을 받을 수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만일 이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면, 즉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점을 인정만 한다면, 더 이상의 논쟁은 필요가 없으며 “유대주의자”들의 유혹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두 번째 수사적 질문은 이런 확신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2절하)
현대 독자들에게 이 질문은 다소 느닷없다는 생각입니다. 갑작스러운 “성령”의 등장 때문입니다. 잘 알다시피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에 관한 언급은 두 번 등장하고 있는데, 이곳 본문과 서신의 후반부에서 자유와 방종과 관련해서입니다(5:13-26). 물론 ‘바울’은 서신 전체를 통해서 “성령” 그 자체를 논쟁의 핵심 주제로 삼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성령”에 대한 그의 인식은 서신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변론을 전개할 때나 호소할 때나 항상 “성령의 내주하심”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여 집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성령”을 받은 바 있습니다. 사도는 이점을 전제로 하고 변론을 펼쳐가고 있으며, 3절에서도 그들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고 재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시작하였다”는 동사의 시제와 태는 완료형 분사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주장하고 있는 바는, 그들이 성령을 받았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모두가 “성령을 받았음”을 누구나가 인정하는 절대적 사실로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가 “율법의 행위”에 있었든지, 아니면 “듣고 믿었던 행위”(έζ άκοἦς πίστεως)에 있었든지는 차후의 문제입니다. 사도는 여기서 새로운 용어, “듣고 믿었던 행위”를 등장시키면서 “율법의 행위”와 반명제(反命題)의 관계에 두고 있습니다. 이전에 그는 “그리스도의 행위(즉 믿음)”를 “율법의 행위”와 대척점에 둔 바 있습니다만(2:15-16), 이곳에서 그는 새로운 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용어의 의미가 그렇게 분명치가 않습니다. “들었던 신체의 한 부분”을 말하는 것인지, “들었던 내용”을 말하는 것인지, 또는 “듣고 믿었던 행위”를 말하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지만 마지막 번역이 가장 그럴 듯합니다(Longenecker). 그렇게 보는 데에는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행위(즉 믿음)”가 “칭의”의 객관적 근거로서 “율법의 행위”와 대척점에 있었다면, 신자들의 “믿음의 행위”가 그 주관적 근거로서 동일한 대척지점에 서 있다고 보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끓어오르는 분노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지 사도는 다시 신랄하게 세 번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3절상)
교인들의 영적인 무분별과 자가당착적인 행동, 그리고 이로 인한 위기 상황의 발생. 차분하고도 논리적인 변론을 전개하기가 곤란할 정도로 사도는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간신히 네 번째 질문을 통해서 다시 본 궤도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절하)
우리는 여기서 두 쌍의 개념들이 반명제의 관계에 서 있는 것을 봅니다: (1) 성령과 육체; (2) 시작과 마침(완성). 특히 “성령과 육체”는 사도가 새롭게 소개하고 있는 상호 반명제의 관계에 있는 개념으로서,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행위”나 또는 “율법의 행위와 듣고 믿는 행위” 등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결국 이들 모두를 종합해 볼 때, 각 용어는 반명제의 관계에 서 있는 두 진영 중 어느 한 쪽에 속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한 쪽 편에 “율법의 행위”와 “육체”가 있다면, 다른 한 진영에는 “그리스도의 행위”와 “듣고 믿음의 행위”가 있습니다.
이 네 번째 수사적 질문에서 사도가 강조하려는 바는, 기독교 신앙생활의 일관성입니다. 즉 처음 시작을 “성령”에 의지하였다가, 어느 시점에서 “육체” 즉 “인간의 노력”에 의지하려는 것에 대한 질타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처음이나, 중간이나 그리고 마지막까지 오직 “성령”의 활동에 의지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도의 다섯 번째 질문은 네 번째와 마찬가지로 신자들의 경험에 호소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이번에는 회심 당시의 경험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는 일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4절)
그러나 이 구절은 전통적으로 난해한 구절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문장 속에 등장하는 “괴로움을 받다”(πάσχω, 파스코)는 단어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칠십인 역>에서나 <신약>에서 거의 예외 없이 “불쾌하고 달갑지 않은 괴로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 눅 22:15; 24:46; 행 1:3; 3:18; 17:3; 고전 12:26; 히 2:18; 9:26; 벧전 2:20, 23; 3:17).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이곳에서도 이 단어를 복음 때문에 받게 된 “고난”이나 “핍박” 등과 관련해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와는 정 반대의 의미, 즉 “호의적이거나 달가운 경험”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도 ‘그리스’ 문헌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일부 번역본에서는 4절을 “너희가 이처럼 많은 경험들을 헛되이 하였느냐?”는 의미로 번역하고 있기도 합니다. 영어 성경에서 이런 식으로 번역을 한 예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Did you experience so many things in vain?--if it really is in vain(RSV)
Did you experience so much for nothing?--if it really was for nothing(NRSV)
전후 문맥으로 볼 때, 이곳에서 말하는 “많은 경험들”이란 다름 아닌 “성령의 체험”이나 “성령으로 시작한 체험”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참고: 3절).
만일 이 단어의 어원이나 또는 <신약>에서 사용되고 있는 빈도만으로 이 구절을 해석한다면, 그 의미는 “고난”이나 “핍박” 등과 같은 괴로운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3-4절을 함께 고려해 볼 때, 오히려 그 반대의 의미가 더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갈라디아서>의 전체적인 배경에서 보드라도, ‘갈라디아’ 교인들이 외부로부터 무슨 고난이나 핍박을 받았다는 아무런 암시도 없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이런 입장에서 4절을 재구성해 본다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여러분들의 놀라운 체험, 성령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그 많은 영적인 체험들이 이제 아무 쓸모없게 되었단 말입니까?
사도는 지금 절망이 아니라, 이들이 다시 돌이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여섯 번째 질문으로 배심원들을 향한 심문에 가까운 모든 질문들은 끝이 납니다. 질문의 요점은 직접적으로는 2절을 반복하고 있긴 하지만, 실은 2-4절 사이에서 소개한 바 있는 신자들의 모든 경험들을 총망라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a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b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c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5절)
그가 요약하고 있는 신자들의 경험이란 이중적인 것입니다. 첫째는 회심 당시의 경험으로서, “성령을 받았던 체험” 즉 “성령 세례”를 말하며(“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5a절), 두 번째는 회심 이후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을 말하는 것으로서,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서 나타난 다양한 형태의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말합니다(“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고...”, 5b절). 전자의 경험을 2-3절에서 그리고 있다면(“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후자의 경험은 4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이처럼 많은 경험을...”). 구문론 상 이 두 구절은 모두 동일한 정관사 “(그) 이”에 연결되어 있으며, 이 때 “그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이 두 경험의 수혜자는 모두 동일한 “너희들”입니다.
사도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성령의 체험”을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인지 또는 “듣고 믿었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인지 물음으로써 “검증”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검증” 작업 내내 이들 반명제의 관계에 대한 논증은 계속될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너희들이 믿을 때. 오래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상영된 바 있는 영화 <이집트 왕자: The Prince of Egypt>의 절정이자 압권은 역시 영화의 마지막 부분인 “홍해 탈출”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그 유명한 주제곡, “너희가 믿을 때”(When you believe)가 당시 미국을 대표하던 최고의 가수 ‘머라이어 캐리’와 ‘휘트니 휴스턴’의 이중창으로 흘러나오면서 관람객의 감동은 극에 달합니다. 이 노래는 제 71회 ‘오스카’상 시상식에서 주제가 상을 받아 더욱 유명해진 바 있습니다.
“출애굽”은 <구약>의 출발점이자 ‘이스라엘’의 출발점이기도 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정체성을 잊고 방황하고 타락할 때마다, 회고하고 돌아가야 할 정신적 고향이자 신학적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오경>이나 <예언서>의 모든 설교와 훈계도 이 사건을 축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너희들이 믿었을 때 무슨 일이 생겼는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체험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이집트’의 마병과 수레들이 그 갈라진 홍해 사이로 수장되었으며, 광야에서 메추라기와 ‘만나’를 먹었으며, ‘시내’ 산 정상에서 울려 퍼지는 천둥과 번개를 듣고 보았으며, ‘가나안’에 들어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그들에게 나타났고, 이후 그들과 늘 함께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자 ‘이스라엘’의 실재였습니다.
‘바울’은 이들 ‘이스라엘’의 영적 후예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똑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가 믿을 때 무슨 일이 생겼는가?”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하나만은 꼭 알고 싶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2절). 그들이 사도의 복음을 듣고 믿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사도는 대답을 기다릴 틈도 없이 먼저 그 대답을 해버립니다. <홍해 에피소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체험을 했다고 말합니다. “성령의 체험”입니다. 즉 그 때 그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직접 그들 속에 들어와 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 속에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령의 오심”을 역사적 사건으로 체험했고, 이후 “성령의 내주하심”은 하나의 실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회심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체험이나 현상들을 간증합니다. 그러나 그 간증이 아무리 극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이라 해도, “성령의 체험”을 언급하지 않거나 인식하지 못한다면, 아직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도가 본문에서 “경험을 통한 논증”에서 “성령의 체험”을 핵심 증거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첫 경험은 바로 “성령의 강림”입니다. 성령께서 오셨을 때 ‘사라’는 ‘이삭’을 낳았으며, ‘마리아’는 예수님을 출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침례 시에 물속으로부터 나왔을 때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그분에게 내려오셨으며,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로 하여금 기도하며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으며, 로마인 백부장 ‘고넬료’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중에 성령을 받았습니다.
나에게는 언제 그 일이 일어났으며, 어떻게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 도달하여 구름과 천둥소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듣고 보았던 것과 같은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의 임재는 그런 것과 같지 않다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바람이 부는 것처럼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알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대로 부는 것처럼 오직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임의대로 찾아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서야 바람이 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그분의 임재를 알 수 있을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초자연적인 엄청난 사건이나 현상을 기대했다면 꿈을 깨는 것이 좋습니다. 성령은 사건도 아니고, 현상도 아니며, 느낌은 더더욱 아닙니다. 성령은 인격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볼 수 없듯이 성령 또한 언제, 어떻게 오시는지 볼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비롯해서 방금 소개한 바 있는 <신약>의 모든 인물들에게 성령께서 오신 때는 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을 때였습니다.
율법의 행위와 성령의 행위. 그렇다면 성령께서 왜 오셨습니까? 그들이 율법의 가르침에 열심히 순종하여 거룩한 삶을 살고 있을 때, 그에 대한 보상을 해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사도는 바로 이점을 본문의 변증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즉 이번에 대척점에 서 있는 두 명제는 “율법의 행위”와 “성령의 행위”입니다. 그는 이 주제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2절상)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절)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5절)
여기서 보듯이 “성령의 강림”은 “율법의 행위”나 “육체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믿음의 행위”(그리스도와 신자)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강림”은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능력을 행하시고” 있다고 사도는 강조하고 있습니다(5절).
일회적인 사건으로 끝난 것은 오히려 “율법의 행위”였습니다. <출애굽기>나 <히브리서>는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처음 임했는지를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시내’ 산에서 시커먼 구름이 산 정상을 감돌며, 천둥과 벼락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그들에게 강림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무력 시위였습니다. 누구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임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모였던 모든 자들이 두려워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이후 이 율법이 그렇게도 무서워 떨던 백성들의 가슴 속에 자리하면서 그들의 삶을 지켜주고 보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늘 살기 등등 이들을 잡아 죽일 궁리만 해왔습니다. 법이 많은 곳에 처벌이 많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내’ 산에서 율법이 강림했던 그 날 이후 수천 년이 지난 동일한 그날, 즉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인 수천 명의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강림”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임재”하셔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비롯한 그의 모든 백성들의 삶 속에서 계속해서 기적을 일으키며 능력을 행사해 왔습니다(5절). 그러니까 사도가 이곳에서 “율법주의” 즉 “율법의 행위”와 대척점에 두고 있는 것은 “믿음의 행위”(그리스도와 신자들의)만이 아닙니다. “성령의 행위” 다시 말하자면 “성령의 능력”도 동시에 대척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행위”가 과연 무엇인지 이곳에서 드러나 있지는 않습니다만, 서신의 후반부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상세하고도 구체적으로 듣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체험한 “성령의 행위”는 그들이 믿음의 생활을 시작한 이후 겪은 성령의 다양한 사역, 즉 그 열매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인격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것입니다. 때로 그 열매는 달고 맛있기도 했으나, 대개는 예수님을 좇아 좁은 길을 걸으면서 따먹을 수밖에 없었던 쓰디 쓴 것이었습니다(4절).
이제 이 단락을 처음 시작하면서 물었던 질문에 대답할 차례입니다: “왜 성령께서 오셨는가?”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은 율법을 받고도 다시 ‘이집트’의 송아지를 섬기는 것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능력입니다. 실은 율법의 한계라고 해야겠지요. ‘바울’은 율법을 “의문(儀文)의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을 받았던 무리들은 결코 이전으로 되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능력”(행위)입니다.
“유대주의”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이렇게 꾑니다: “그래,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위가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지. 그렇지만 적어도 유대인이라면 최소한의 율법은 지키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아주 교묘한 속임수입니다. 우리는 이를 “명목론”이라고 칭한 바 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우리가 이 가르침을 따르는 순간, ‘시내’ 산의 ‘이스라엘’과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개가 그 토한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지요. 그들이 내버렸던 “유대주의”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내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이후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이런저런 사람들이 이런저런 대답들로 세상과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일 때문에 분노하고 있습니까? 이제 내가 ‘바울’에게 대답할 차례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 기능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수사학적 기법은 어떤 것입니까?
2. 수사학적 기능으로 볼 때, 본문은 “경험을 통한 검증”에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사도가 거론하고 있는 핵심적인 경험은 무엇입니까? 교인들이 이미 경험한 것은 무엇이며, 계속해서 경험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3. 본문에서 상호 반명제의 관계에 있는 개념들을 짝을 짓고, 설명해 봅시다. 그리고 각 개념을 “율법주의”와 “명목론”과 연결시켜봅시다.
4. 기독교인으로서 나의 첫 경험은 무엇이었습니까?
제 10과: 율법주의 반박(2)
10
율법주의 반박(2)
성경을 통한 검증
(3:6-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14절)
<갈라디아서>에서 “검증”(檢證)에 해당되는 본문은 넓게는 3:1-4:11 사이입니다. 이곳에서 ‘바울’이 행하고 있는 바는, “율법주의”(legalism)와 “명목주의”(nominism)에 대해서 그가 2:15-21 사이에서 천명한 “대명제”(大命題)들을 검증하고, 관련된 증거들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주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율법의 행위”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편 “명목주의”는 보다 완벽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위” 외에 “율법의 행위”를 더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도는 3:1-4:11 사이에서 이 두 신학 사상에 대항해서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주제에 따라 본문은 다시 크게 두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3:1-18율법주의 반박
(2) 3:19-4:11명목주의 반박
그리고 3:1-18 사이에서 율법주의를 반박하는 검증 본문을 다시 세분해 보면, 검증 작업이 세 방향에서 이루어짐도 보았습니다:
(1) 경험을 통한 검증(3:1-5)
(2) 성경을 통한 검증(3:6-14)
(3) 신학을 통한 검증(3:15-18)
이 과에서 다룰 내용은 두 번째 검증 작업에 관한 것으로서, <성경>을 통한 검증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가 인용하고 있는 <성경> 본문들은 자신의 입장을 지지해 주고 있을까요? 아니면 원래 그러한 의도로 기록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교회 시대의 <성경> 해석 방법들은 그것이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든 혹은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든 간에 해석학적 합리성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오히려 <구약>의 본문으로부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강조할 수 있고, 또 당대의 삶에 대한 교훈을 뽑아낼 수 있는 방법이면 가치 있는 해석 방법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비평학적 입장에서 평가할 때, 초대 교회 시대의 해석 방법은 본문 자체로부터 의미를 뽑아내는 ‘exegesis’가 아니라, 본문 자체에 자신의 사상을 집어넣으려는 ‘eisgesis’에 가까웠습니다. 즉 자신의 사상을 논리성이 결여된 채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소개하는 무모한 “본문 인용”(text-proof)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 역시 이와 같은 성경 해석 방법에 익숙해 있는 유대인입니다. 따라서 그가 이곳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경> 본문들도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식의 해석은 현대 해석학에서는 지양(止揚)되어야 할 자세임에 틀림없음에도, 본문에서 사도가 인용하고 있는 여섯 구절의 <구약> 본문은 사도가 의도하고자 했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리고 본문의 핵심 내용은 무엇이며, 직전의 검증 내용(3:1-5)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습니까?
문학과 역사
사도는 앞 단락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경험을 토대로 “반 율법주의”(反“律法主義)에 대한 검증”(probation)을 시작한바 있습니다(3:1-5). 이제 이곳에서는 그 두 번째로 “성경을 통한 검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그가 인용하고 있는 <구약>은 모두 여섯 구절로서, 핵심 내용이나 주제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세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서신의 통상적인 관례에서 볼 때, 독자들의 동의를 구하기 위하여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인 “너희들도 아는 바라”(7절)를 “아브라함 언약”과 함께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의도하는 바는 7절을 6절에서 인용하고 있는 <창세기> 15:6의 본문에 대한 결론으로 삼고자 함입니다.
수사학적(修辭學的) 관점에서 볼 때, ‘아브라함’을 믿음의 전형(典型)으로 제시하면서 논증을 시작하고 있는 점은 당시 그리스∙로마 시대의 기법을 그대로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논의가 전개되면서 <성경> 본문을 인용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무리한 성경 본문 인용”의 전형입니다(위 설명 참고).
구조적으로 볼 때, 사도는 첫 번째 단락에서(6-9절) “아브라함의 믿음과 축복”에 초점을 맞춘 다음, 두 번째 단락으로(10-14절) 논의를 발전시켜갑니다. 우선 10-12절 사이에서 매 절마다 율법과 관련한 사도 자신의 논의를 전개시킨 다음, <구약>에서 한 구절씩을 인용함으로써 증거 본문으로 삼고 있습니다:
(1) 10절: (왜냐하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신 27:26) 하였음이라;
(2) 11절: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 2:4) 하였음이라;
(3) 12절: (그러나)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러나)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레 18:5) 하였느니라.
이들 각 절은 모두 등가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만(괄호 속의 접속사), 13절에서는 이를 생략한 채 마지막 논점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신 21:23) 하였음이라.
이런 “생략”의 기법이 주는 효과는 분명합니다. 강조를 위한 것인데, 그가 인용하고 있는 이 마지막 구절(13절상)은 ‘바울’ 이전부터 유대∙기독교인 사이에 회자(膾炙)되던 유명한 신앙 고백문(告白文)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사도는 이 고백문에서 드러나고 있는 진리의 일단을 ‘갈라디아’의 현 상황에 적용하면서 14절에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14절)
우리는 이 마지막 구절에서 “믿음”과 “성령”이 다시 한 번 등장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검증”을 위한 두 본문(3:1-5; 3:6-14)이 적어도 주제에 있어서는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두 본문이 분위기에 있어서나, 접근 방식에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앞 단락에서(3:1-5) 제시한 바 있는 “믿음의 행위”와 “성령의 행위”에 대한 논의가 이곳에서 다시 마지막 구절에서 등장함으로써, 주제에 대한 논의가 절정에 이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위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바울’의 <성경> 해석 방식입니다. 그가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이 무리한 “본문 인용”의 전형이라고 언급하였듯이, 누구나 사도와 동의할 수만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이 어떤 합리성이나 일말의 권위를 가지려면 이 문제가 우선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본문의 서론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믿음과 축복(6-9절)
사도가 <성경>에서 이끌어내고 있는 첫 번째 사례는 ‘아브라함’입니다. ‘헬라’어 성경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kaqw;" jAbraa;m”(카토스 아브람). “카토스”는 “...처럼” 또는 “...와 같이” 등의 의미를 갖는 부사로서 흔히 비교를 위해서 <성경>으로부터 특정 구절을 인용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흔히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기록 된 바”로 번역하면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 마 26:24; 막 1:2; 14:21; 눅 2:23; 행 15:15; 롬 1:17; 2:24; 3:10; 4:17; 8:36.
전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자면”, “아브라함으로 말할 것 같으면” 또는 “아브라함을 바라보라” 등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지금 경험을 통한 검증에서 <성경>의 예를 통한 검증으로 옮겨가면서, 수사적(修辭的) 방식 또한 그리스∙로마 방식에서 ‘유대’ 식 성경해석의 전형으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후부터 그가 전개하는 성경 해석의 논리는 모두 이와 같이 소위 “무리한 본문 인용”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제 그가 처음으로 인용하고 있는 성경 구절은 <창세기> 15:6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6절; 창 15:6)
그 많은 <아브라함 이야기> 중에서 왜 하필 이 구절인가? 이 문장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이 구절에 대한 가능한 다양한 의미나 해석에 대해서는 필자의 <창세기> 교재에서 상세하게 다룬 바 있습니다.
적어도 “유대주의자”라면 의심의 여지없이 ‘아브라함’을 위대한 믿음의 표상 내지는 전형(典型)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 ‘아브라함’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모세’의 율법이 있기 이전에 이미 할례까지 받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마도 <창세기> 17:4-14 사이에 소개하고 있는 “할례 의식”을 예로써 제시했을 법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관심사는 <창세기> 17장의 “할례 의식”에까지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창세기> 15장의 “아브라함의 믿음”과 그러한 믿음이 끼친 효과 내지는 결과에만 국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율법주의”를 반박하기가 그렇게 간단치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7장에 의하면, “유대주의” 식 해석을 따르지 않는다 해도, “할례”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서 소개되고 있으며, ‘아브라함’이 언약의 당사자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기 위한 한 전제 조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도가 “아브라함 언약”과 관련하여 이후에 언급되고 있는 추가적인 규례나 조건들보다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를 다루고 있는 <창세기> 15:6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보다 포괄적이고 핵심적인 주제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혹자는 이 둘을 구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차이는 현상적인 것일 뿐 실질적인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기독교인들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이며(갈 5:5), ‘아브라함’ 역시 기독교인과 마찬가지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사도에게 있어, ‘아브라함’의 믿음은 기독교 복음에서 요구하고 있는 믿음과 질적인 면에서 하등 다를 바가 없으며,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동일한 성격의 반응인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의 반응을 하나님께서는 “의”로 “정하셨습니다”(λογίζομαι, 로기조마이).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헬라’ 문헌에서나 <신약>에서는 공히 “간주하다”, “여기다”, “측정하다” 등인데, <칠십인 역>에서는 <히브리어 성경>에서 동일한 의미를 갖는 “하삽”(בשׁח)을 번역한 것입니다.
물론 당시의 ‘유대’인들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을 언급할 때면 주로 <창세기> 15:6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의”는 “의로운 행동”의 결과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아람어’로 된 <탈굼>의 경우만 하드라도, “아브라함의 의”를 <창세기> 14장에서 다루고 있는 에피소드, 즉 ‘아브라함’이 동방의 네 왕들과의 전투에서 ‘롯’과 그의 가족을 구출한 일과 연관 지워 해석하고 있습니다(Longenecker). 그러나 ‘바울’ 사도는 <창세기> 15:6을 인용하면서 14장의 사건을 연결시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으며, 17장의 “할례 의식”을 언약의 전제 조건으로 삼고 있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전후문맥에 대해서 전혀 고려함이 없이, 이 구절만을 인용함으로써 그가 진정으로 강조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의로운 행동도, 할례도 아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을 뿐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 언약”은 그의 후손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가 <창세기> 15:6을 인용한 것은 이어지는 7절에서의 주장에 대한 증거 본문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알지어다(7절)
이 문장의 형태는 일부 영어 번역본에 따르면 단순 서술형으로 볼 수도 있으나, 대개 명령형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 구절은 그 내용에 있어 6절에 대한 논리적인 귀결 내지는 결론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란 신자 개개인의 “(주관적인) 믿음에 의지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들은 누구나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도의 주장일진대, 이 표현은 당연히 ‘유대’인들 사이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킬 것이 뻔합니다. 적어도 그들에게 있어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에만 국한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할 때 <구약>을 근거로 소개하거나, 그들이 ‘아브라함’이나 ‘유대’ 민족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태도는 “유대주의자”들의 그동안 보여준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강조해 왔습니다. 사도가 이곳에서 이 표현을 차용하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의 언약” 속에 포함될 수 있는가? 사도의 대답은 단순히 “그렇다”를 넘어, “<성경>에서 이미 예언한 바 있다”입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8절)
사도에 따르면 그 예언의 말씀은 다름 아닌 <창세기> 12:3입니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전체 “아브라함 언약”의 일부로서, 언약의 세 요소인 땅과 후손과 축복 중에서 세 번째 요소인 “축복”과 관련된 것입니다. 비교를 위하여 “아브라함 언약”을 이곳에 다시 한 번 옮겨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2-3).
사도가 논증을 위해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과연 이방인이 ‘아브라함’의 언약 속에 포함되느냐에 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 속에 이방인도 당연히 포함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마땅하지만, 사도는 이 표현 대신에 “이방인”(ἔθνος; 에트노스)이라는 단어로 대체함으로써 그의 대답으로 삼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8절은 문법적으로나 논리적으로 7절과 연결되고 있으며, 그 내용에 있어 6절로부터 당연히 유추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바울’에게 있어 이방인은 처음부터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 대상으로서, 이들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은 <구약> 전체에 걸쳐 드러나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써, 바울은 <로마서> 15:9-12에서 이방인에 관해서 쓰면서 <구약>의 다양한 본문들을 인용하고 있음을 봅니다: 시 18:49; 삼하 22:50; 신 32:43; 시 117:1; 사 11:10.
그리고 바로 이점을 그의 이방인 독자들이 알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아브라함’을 잇는 연결 고리는 “믿음”입니다. 바로 이점을 9절에서 결론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9절)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는, 보다 정확하게는 “믿음에 의지하는 자”를 말하며, “율법에 의지하는 자”,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는 자”, 또는 “할례를 받은 자” 등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자를 말합니다.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과 동등한 의미를 전달하고 있으며(7절), 이곳 9절에서처럼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자”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2. 율법과 저주(10-14절)
이 두 번째 단락은 또 다른 후치접속사(後置接續詞) “왜냐하면”(γάρ, 가르)으로 시작하고 있어, 첫 번째 단락에 대한 설명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첫 번째 단락의 핵심어가 “믿음과 의”인데 반해, 이곳에서의 핵심어는 “율법과 저주”로서, 이에 대한 성경적 증거들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곳에서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고자 하는 “유대주의자”들을 향해서 노골적이고 신랄한 공격을 퍼붓고 있습니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성경>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율법 책 중의 율법 책”으로 알려져 있는 <신명기>와 <레위기>입니다. 우선 “율법의 행위”와 관련하여 그가 내리고 있는 진단은 단순 명쾌 그 자체입니다:
(왜냐하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10절상)
“율법의 행위”와 저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지요. 사도는 그 첫 번째 성경적 증거를 <신명기>에서 찾고 있습니다:
기록 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0절하, 신 27:26)
그러나 그가 인용하고 있는 성경 본문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무리한 본문 인용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마소라>나 <칠십인 역>과도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를 보이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고의로 본문 변조를 했을 수도 있고, 또는 사도 당시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역본(譯本)으로부터 인용했을 수도 있거나, 아니면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임의로 인용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차이들이 그 의미를 크게 훼손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사도가 강조를 위해서 절대적인 의미로 도입하고 있는 일련의 표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누구든지”(pa'“); “모든 일”(pa'”); “항상 행함”. 이 구절은 <신명기> 27:9-26에서 발췌한 것으로, 그 배경은 ‘이스라엘’이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매년 “모세의 언약”을 갱신하면서, 행하는 서약 의식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각 여섯 지파 씩 축복의 산 ‘그리심’과 저주의 산 ‘에발’에 나누어 서서 저주의 율례에 대하여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저주의 선언은 열두 가지로서(신 27:15-26절), 그 마지막 저주가 26절에 등장하면서 앞선 모든 저주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26절).
따라서 이러한 배경 하에서 보자면 당연히 강조점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데 있고, 이것이 바로 “유대주의자”들이 올바르게 이해했던 바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바울’의 이해는 무리한 본문 인용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을 “반 율법주의”에 대한 <성경>의 예로 인용할 수 있는 근거는 ‘바울’의 전제(前提) 때문입니다. 그의 전제란, “어느 누구도 율법을 항상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10절이 설명형 접속사 “왜냐하면”으로 시작하고 있다면, 11절은 반어적 접속사 “그러나”(δέ, 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절은 상호 반명제의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11절)
사도가 이곳에서 반명제를 위하여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그 유명한 <하박국> 2:4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불행하게도 사도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다양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래 두 사본의 예에서 보듯이 정확한 의미를 도출해 내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마소라>: 의인은 그의 믿음(또는 신실함)으로 살리라
<칠십인역>: 의인은 나의 [하나님의] 신실함에 근거하여 살리라; 나의 의로운 자는 믿음(또는 신실함)에 근거하여 살리라
논란의 핵심은 이 구절을 “구원론”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구원 받은 자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있는 듯합니다. ‘도드’(C. H. Dodd)는 전자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그에 따르면, 이 구절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구원론”의 증거 본문으로 삼았던 것으로서, 이곳 <갈라디아서>에서 뿐만 아니라 <로마서>(1:17)나 <히브리서>(10:38) 등과 같은 <신약>의 다른 문맥적 상황에서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모두 동일한 “구원”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는 왜 이처럼 논란이 많은 구절을 인용하고 있을까? 이 구절이 ‘유대’인과 이방인 기독교인 모두에게 익히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사는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그의 방점(傍點)은 오히려 “믿음”에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했을 때에 비로소 11절은 10절과는 반명제의 관계에 서게 됩니다. 10절이 “율법과 저주”를 말하고 있다면, 11절은 “믿음과 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어지는 12절에서 다시 율법에 관해서 언급함으로써, 이번에는 11절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반어적 접속사 “그러나”가 두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δέ 와 άλλά).
(그러나)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러나)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12절)
그러니까 11절이 10절과 반명제의 관계에 있고, 다시 12절이 11절과 반명제의 관계에 서게 됨으로써, 12절은 결국 10절과 한 쌍을 이루고 있으며 11절이 그 반대편에 서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한 쪽 진영(陣營)의 핵심어가 “율법과 저주”라면(10, 12절) 다른 진영의 핵심어는 “믿음과 의”입니다(11절).
사도가 이곳에서 인용하고 있는 본문은 <레위기>(레 18:5)로서, <하박국> 본문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레 18:5). 이런 대조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율법은 오직 행함에 있는 것이지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래저래 “유대주의자”들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는 “모세의 율법”은 믿음이 아닌 행위를 요구함으로써, 기독교와 나란히 설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13절에 이르러 “율법과 저주”에 대한 그동안의 논의에서 갑자기 이탈하여 주제를 바꾸고 있습니다. 새로운 주제는 “구속”(ἐξαγοράζάω, 엑사고라조)입니다. 그동안 10-12절 사이에서 각 절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던 접속사의 부재(不在)가 이런 변화를 더욱 실감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13절)
이 단어는 <신약>에서 4 회, 모두 <바울 서신>에서만 나타나고 있습니다(갈 3:13; 갈 4:5; 엡 5:16; 골 4:5). 이 단어가 그려주는 이미지는 시장에서의 상거래로서, 노예의 값을 치르고 구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존 스토트’(J. Stott)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인의 구원과 관련하여 “화해”, “구속”, “칭의”, “화목”의 네 단어로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가 이곳에서 새롭게 소개하는 내용은 두 가지 점에서 각별합니다: (1) ‘그리스도’가 행한 구속의 행위에 대하여 지극히 짧고도 함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 (2) 일인칭 복수 대명사 “우리”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 <갈라디아서> 내에서 “우리”는 때로 유대∙기독교인들을 지칭하기도 하지만(갈 2:15; 3:23-25; 4:5), 이곳에서는 아직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보여 집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관한 짧은 선언은, 그것이 짧고 함축적이라는 점에서 ‘바울’ 이전부터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있어왔던 신앙 고백으로 보여 집니다.
이 고백과 관련하여 사도가 제시하고 있는 성경적 근거는 <신명기>입니다(신 21:23).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그의 인용은 무리한 것이며, <칠십인 역>과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배경 설명을 위하여 <신명기> 21:22-23을 다시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법에 따르면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은 대개 돌을 던져 죽이는데, 그 후에는 말뚝에 묶거나 나무에 달아 하나님의 버리심에 대한 징표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저주를 받았다 함은 그가 나무에 달렸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나무에 달아 죽임으로써 그가 그렇게 저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앞에서 외적 표적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런 행습은 죽은 자에 대해서는 치욕을 더하는 것이며, 이를 보는 자들에 대해서는 경고가 되는 이중적인 포석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구약>적 배경을 지닌 ‘유대’인들에게 십자가 위에서 ‘메시아’의 죽음은 수치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고전 1:23; 갈 5:11). 모든 유대∙기독교인들이 당면했던 핵심 문제는, 어떻게 ‘예수’를 하나님의 ‘메시아’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이해할 수 있을까 입니다. 사도가 인용하고 있는 <신명기> 본문은 이들이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악화시켰을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이들 유대∙기독교인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게 결론내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받은 십자가의 저주는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해서 받은 것이다(고후 5:21). 따라서 사도가 1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과 인용하고 있는 <신명기> 본문도 초대 유대∙기독교인들의 신앙 고백에서 취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도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율법주의”의 제반 요구 조건들을 무위로 돌리고 있으며, 동시에 ‘아브라함’의 축복과 “성령의 약속”에 대한 기초를 마련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14절)
이 구절은 <성경>을 통한 논증의(3:6-14) 결론이자 절정으로서, 사도는 이곳에서 두 절을 모두 “...하기 위하여”(ἵνα, 히나)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3:6-14의 본문에 대한 결론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본문을 이루고 있는 두 단락의 핵심 주제가 이 한 절에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1) ‘아브라함’의 축복; (2) 성령의 악속. 구조적으로 볼 때 두 절은 종속(從屬)의 관계가 아닌 등위(等位)의 관계에 있으며, 문법적으로 볼 때는 두 절은 각기 고유한 의도와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절에서 “아브라함의 축복”과 관련하여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바는 두 가지입니다: (1) 이방인에게도; (2) 그리스도 안에서. 서신 내내 사도의 관심사는 이방∙기독교인들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과 ‘아브라함’이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율법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두 번째 절에서 “성령의 약속”과 관련하여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바는 “믿음으로”입니다. 사도는 그의 첫 번째 검증에서(3:1-5) 신자들의 경험과 관련해서 “성령의 행위”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제 두 번째 검증에서도 “성령의 약속”을 언급함으로써 <성경>을 통한 논증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도는 성령의 임재와 내주하심에 대해서 늘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바울’에게 있어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또한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과 관련해서 사도가 강조하는 바는,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14절이 기능하는 바는 이중적으로 보이는데, 좁게는 <성경>을 통한 논증에 해당되는 본문(6-13절)의 결론일 뿐 아니라, 보다 넓게는 그동안의 “검증” 전체(3:1-14)에 대한 결론도 된다는 점입니다. 즉 14절의 두 절이 그동안의 논증 전체의 주제들과 연결되는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훈과 적용
“율법주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율법의 행위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 바 있습니다: “너희들이 믿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너희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 때문이었는가 아니면 믿음의 행위 때문이었는가?” 이제 그는 이곳에서 또 다른 질문으로 “율법주의”를 반박하고 나섭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그가 말하는 <성경>은 물론 유대인들의 <성경> 즉 <구약>을 말합니다.
그가 <성경>을 토대로 “율법주의”가 틀렸음을 증명하겠다는 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체험”은 그것이 아무리 경천동지(驚天動地)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는데 반해서, <성경>은 이러한 경험을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며, 영구화 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효과적으로 <성경>을 이용하는 방법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저 관록이나, 경험이나, 또는 세속적 논리로 기독교 진리를 설명하거나 대변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점에 있어서 기독교인과 크게 다릅니다. 성경은 그들에게 있어 호흡이며 생활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오랜 세월동안 나름대로 독특한 성경 해석 방법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것이 현대 성경 해석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얼마만큼의 타당성을 지니는가 하는 문제는 별도로 따져보아야 하지만 말입니다. 이점 ‘바울’ 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역시 ‘유대’인으로서 율법주의를 반박하는 <성경>적 증거들을 자유자재로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무리한 “본문 인용”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의 성경 해석은 당대 유대인들조차도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본문은 마치 성경 해석의 미로(迷路)와도 같습니다. 수수께끼와도 같은 <성경> 인용과 예시, 자의적인 해석 때문입니다. 그는 아홉 절에 불과한 본문 가운데서 무려 여섯 구절을 <구약>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모두 기독교 복음의 핵심 주제들이자 동시에 그의 논쟁적 관심사와 관련 있는 것들입니다. 사도의 독특한 성경 인용 방식으로 인하여 본문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과 논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믿음의 행위와 축복(6-9절). 본문의 첫 번째 단락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믿음의 행위와 칭의”에 관한 것입니다. 그 <성경>적 근거로서 제시하고 있는 사례는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특히 그가 주목하는 한 구절은 <창세기> 15:6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창 15:6).”
왜 사도는 그 많은 <아브라함 이야기> 중에서 유독 이 구절에 관심을 쏟는 것일까? 아마도 “믿음과 의”의 관계에 대해서 이 구절만큼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주는 곳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구절 속에는 ‘아브라함’의 행위와 관련해서 그 어떠한 언급도 없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있다면 그의 “믿음의 행위”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아브라함’의 의에 대해서 다르게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아브라함’은 위대한 믿음의 표상이지 전형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구절을 이해하는 방식은 사뭇 다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다른 행적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예컨대, <창세기> 14장에서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해서 보여주고 있는 영웅적인 행동이라든지, 또는 <창세기> 17장에서 그려주고 있는 “할례”를 통한 순종 등에도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을 종합해 볼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도는 이들 이야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설령 있다고 하드라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논지를 펼치는데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오직 “믿음과 의”의 관계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사도가 유독 <창세기> 15:6만을 인용하고 있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의 또 다른 관심사는 이방인입니다. 과연 “아브라함 언약”이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는가 아니면 이방인도 포함되는가?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그가 <창세기> 15:6을 언급한 것도 이 질문에 대해 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7절에서 그 대답을 듣습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알지어다(7절).”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방인을 위한 복음이 <성경>에서 이미 예언된 것이었다는 주장까지 펼칩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3하).” 이것은 <아브라함 이야기>의 벽두에 소개된 바 있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특별히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부분은 “아브라함의 복”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이 ‘아브라함’ 언약 속에 포함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의 행위”입니다(9절).
율법의 행위와 저주(10-14절). “믿음의 행위”와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은 “율법의 행위”입니다. 이 두 행위는 각기 “칭의”와 “저주”를 파트너로 삼고 있습니다. 본문의 두 번째 단락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율법의 행위와 저주”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은 과연 “율법의 행위와 저주”에 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사도는 증거를 위해서 <성경> 중에서 가장 율법적인 두 권의 책 <신명기>와 <레위기>에서 여섯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그의 인용과 해석 방식은 자의적이고 일방적이며, 당대 ‘유대’인들 사이에서조차 논란의 여지가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예컨대, “율법주의”는 저주를 잉태할 뿐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가 인용하고 있는 <신명기> 27:26이나(10절) <레위기> 18:5(12절) 등은 원래의 의도와는 정 반대의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 두 구절이 의도하고 있는 바는, 하나님의 백성은 모두 그분의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도, 사도는 그 의미를 뒤집어 “율법의 행위”는 저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율법을 따라 열심히 살다보면 ‘아브라함’의 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사도와 “율법주의”가 극명하게 갈리고 있는 부분입니다.
어째서 이처럼 해석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는 것일까? “율법의 행위”에 대한 사도의 전제 때문입니다. 그의 전제란 “의인은 없나니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즉 어느 누구도 율법을 항상 지킬 수 있는 자란 없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27:26를 인용하면서 일종의 본문 변조를 시도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모든 일을”; “항상”.
사도는 한 술 더 떠서, <구약>의 선지자들조차도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유일한 길임을 가르친 바 있다고 주장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사도가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것은 이 구절이 아마 당시 기독교도는 물론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회자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한 이해는 역시 서로 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런 차이는 개의치 않습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믿음”과 “구원”의 관계이며, 이 둘 사이를 연결시켜줄 수만 있다면 어떤 구절이라도 제시할 용의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율법의 저주는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대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행위가 그것을 폐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가 즉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그렇게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저주를 부른다는 사실을 엄중하게 경고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리스도’를 단순한 죽음이 아닌 나무 위에 달려 죽게 했습니다. 다만 사도가 이 주장을 하기 위해서 인용하고 있는 <신명기> 21:23 역시 전통적인 ‘유대’적 해석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는 사실은 이곳에서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튼 사도가 13절에서 느닷없이 주제를 바꾸어 “십자가와 구속”을 언급하는 이유는 그동안의 논증에 대한 결론을 14절에서 이끌어 내기 위함입니다. 두 핵심어는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입니다. 종합해 볼 때, 그의 신학 사전에는 “믿음의 행위”, “의”, “성령의 행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가 일단의 동의어 군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믿을 때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 기능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수사학적 기법은 어떤 것입니까?
2. 사도가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여섯 개의 <구약> 본문은 과연 그가 펼치려고 하는 논지에 대한 적절한 성경적 예가 될 수 있습니까? 당신은 그의 성경 인용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3. 본문 14절의 기능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4.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을 어떻게 인용하고 있습니까?
제 11과: 율법주의 반박(3)
11
율법주의 반박(3)
신학을 통한 검증
(3:15-18)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제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15절)
“율법주의”에 대한 반박과 이에 대한 검증 작업은(3:1-18) 이 본문에서 세 번째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신자들의 경험을 통한 검증, 두 번째가 성경을 통한 검증, 그리고 세 번째는 논리적이고 신학적인 변론을 통한 검증이 될 것입니다:
(1) 경험을 통한 검증(3:1-5)
(2) 성경을 통한 검증(3:6-14)
(3) 신학을 통한 검증(3:15-18)
그러나 본문에서 사도가 자신의 신학적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은 다분히 일방적이고 독단적입니다. 이는 그가 두 번째 단락의 성경해석에서 보였던 무리한 본문 인용과 유사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그가 이곳에서 전개하는 논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에 근거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독서의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사도가 이곳에서 전개하고 있는 논리의 근저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1)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되돌릴 수 없는, 가장 으뜸 되는 약속이며, (2) 그 약속의 수혜자는 여러 사람이 아니라 단 한 사람, 즉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그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요지인 즉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분의 약속은 다수(多數)의 “율법주의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국한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바울’이 율법을 모독한다고 비난받아야 한다면, “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 유업 즉 그리스도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로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논리인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성령이야말로 율법보다 훨씬 이전에 율법과는 아무 상관없이 주어진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 요소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의 유업을 잇는 일에 있어서는 아무 상관도 역할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에서 새로운 차원의 논지를 전개함에 있어, 사도는 서신에서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두 가지 관행적인 표현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표현은, “형제들아, 내가 말하노니”입니다(15절상). 이런 표현이 기능하는 바는, 새로운 논리의 전개가 있을 것임을 예고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곧이어 15하-16절에서 그 논점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언약”과 관련한 두 가지 논점으로서, 결코 폐할 수 없는 약속의 본질과 그 약속의 진정한 후계자가 누구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두 번째 표현 역시, 17절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있는, “(그러나)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입니다. 이와 함께 17-18절에서 이끌어 내고 있는 결론은 15-16절에서 다룬 내용에 대한 결론입니다.
수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처럼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신학적 논지는 이전에 성경 해석에 보여주었던 방식과 아주 흡사합니다. 즉 상대나 상대의 논점들을 직접 공격하거나 비난하는 방식이 아니라, 상대방의 전제를 바탕으로 해서 그로부터 역공을 펼치는 방식입니다. 예컨대, “유대주의”의 가르침은 (1)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일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보충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2) 그 언약의 수혜자는 ‘아브라함’의 생물학적인 후손들인 유대 민족국가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사도가 전개하고 있는 논리는 앞선 두 번의 검증에서 보여주었던 논지들에 반하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아브라함 언약”이 갖는 의미를 자신의 입장에서 일방적인 태도로 재해석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앞 단락의 마지막 구절에서(14절하)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령의 약속”을 언급하면서 이전의 모든 검증의 결론으로 삼았던 것처럼, 이 세 번째 검증에서 바로 그 “약속”이라는 단어를 다시 선택하여 그것이 “율법”과는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풀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의 목적과 기능”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상세하게 밝히게 될 것이지만(3:19-4:7), 이곳에서는 단지 “아브라함 언약”과 관련해서만 간략하게 요점을 밝히는 것으로 그치고 있습니다. 즉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과도, “아브라함 언약”에 포함된 약속을 받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유언과 언약(15-16절)
사도는 새로운 검증을 시작하면서, “아브라함 언약”이 함의하고 있는바 의미를 나름대로 해석하기 위해서, 일상적인 실례를 들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15절상)
이런 식의 호칭은 <갈라디아서>에서는 늘 중요한 단락이 새롭게 시작되거나(1:11; 4:12; 5:13), 그 단락 안에서 다시 작은 단위가 새롭게 시작되거나(3:15; 6:1), 한 단락의 마무리를 지을 때나(4:31; 5:11), 또는 서신의 마지막 인사말을 전할 때(6:18) 거의 예외 없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기능적인 측면 외에도, 수신자들에 대한 사도 자신의 애정을 엿볼 수 있게 해줍니다.
한편 “사람의 예대로 말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애매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이 표현은 이곳을 포함하여 ‘바울’의 서신에만 네 번 등장하고 있을 뿐(롬 3:5; 6:9; 고전 9:8), 신약이나, <칠십인 역>이나 기타 ‘헬라’ 문헌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오늘날 ‘히브리어’나 ‘아람어’에 이에 병행하는 어떤 표현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문자적으로 이 구절을 해석하자면, “내가 한 인간으로서 이야기 하겠다”는 것인데, 문맥상으로는 “일상생활에서 한 예를 들어 말해 보겠다”가 될 것입니다. 그 예가 무엇이든 사도 자신의 일방적인 이해와 신학적 입장을 담은 것이 될 것임을 예고해 줍니다. 사도가 예로 들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의 유언(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15절하)
여기서 “언약”(διαθήκην, 디아테켄)으로 번역하고 있는 이 단어는 실은 “유언”으로 번역함이 더 마땅할 것입니다. Longenecker는 이 단어와 관련하여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128-130쪽.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유언을 통해서 한 번 토로된 소원이나 약속은 바꿀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로마법에서나 오늘날 영국 법에서도 그러한데, 어떤 사람이 자신의 유언을 바꾸려면 새로 유언을 하거나 유언 보족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로 미루어 아마 사도는 고대 ‘그리스’의 법을 예로 들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법에 따르면 한 번 작성하여 확정한 유서는 다시 무효화 하거나 변개할 수 없었습니다. 한 사람의 유언도 덜하거나 더할 수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약속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는 것입니다. 수사학에서 볼 때 이것은 일종의 아 포르티오리(a fortiori)에 해당합니다. 즉 하위 개념을 가지고 상위개념을 설명하는 방식을 말하는데, 예컨대 일상생활에서 통용되는 것이라면 영적인 영역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이 논리에 따르면 지금 사도가 예로 들고 있는 15절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어지는 16절의 내용 또한 사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 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였으니 곧 그리스도라(16절)
이 구절에 대한 <헬라어 성경>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으며, 따라서 15-16절은 하나의 논지로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17-18절은 이에 대한 결론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나타나는 두 핵심어는 “약속들”과 “자손”(씨)입니다. 우선 “약속”과 관련해서 두 가지 특기할 만 한 점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앞선 두 번의 검증이(3:1-5; 3:6-14) 그 마지막을 “성령의 약속”으로 마무리함으로써 논지의 절정으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단어가 이후 상당 부분에 걸쳐(3:15-4:31) 핵심 단어로 아주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3:17, 18, 21, 22, 29; 4:28). 빈도수로 보자면 이후부터 이 단어는 그동안의 핵심 단어였던 “복음”이나(1:7-9, 11; 2:2, 5, 7, 14; 3:8) 또는 “축복”(3:8, 9, 14) 등을 대체하고 있으며, 동시에 “기업”(유업)과 연관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3:18; 4:1-7, 21-31).
사도가 “아브라함 언약”과 관련해서 “약속”을 언급할 때, 주로 단수형을 사용하고 있지만(갈 3:17, 18, 22, 29; 롬 4:13, 14, 16, 20), 간혹 복수형으로도 사용하고 있어(갈 3:16, 21; 롬 9:4) 특별한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에 대한 “약속들”이나 또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들”을 언급할 때 종종 복수형으로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일반 ‘유대’ 문헌에서는 단수형과 복수형 사이에 특별한 구별을 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약속”의 수혜자에 관한 언급으로서, 당연히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씨)이라는 사실입니다. <창세기>의 모든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도 이점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12:2-3, 7; 13:15-16; 15:4-6, 18; 17:4, 7-8; 22:17-19; 24:7).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약속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핵심단어로 등장하고 있는 그 “자손”은 누구인가? 말할 것도 없이 ‘유대’ 민족입니다. 이곳에서 등장하고 있는 “자손”은 단수형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민족도 이에 포함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스마엘’의 후손도 여기에 포함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오직 ‘이삭’을 통해서 태어난 자라야만 진정한 후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 단어에 대한 해석을 놓고 전통 ‘유대’인들과 입장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역시 이 단어가 단수형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자손”을 인종적인 차원에서의 단수, 즉 한 민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 반면, 사도는 이 단어가 한 특정 개인, 즉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주 기발한 해석이자 신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해석학적 입장에서 보자면 전형적인 “우화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의 한 부류인 “그리스도론적 해석”입니다. 이 해석의 옳고 그름은 차치하고서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유대’민족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2. 언약과 율법(17-18절)
이어지는 두 절(17-18절)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자, 이 단락에 대한 결론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17절)
이 절이 <헬라어 성경>에서 “그러므로”(δέ, 데)로 시작하고 있으며, 15절에서처럼 “내가 말하노니”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외 15-16절에서 사용한 것과 같거나 유사한 일단의 용어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는데, 특히 “언약”(15, 17절)과 “약속”(16, 17절)이 두드러집니다.
“언약”은 문맥에 따라서 그 의미와 적용 범위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넓게는 하나님과의 “언약”에서부터 좁게는 인간들 사이의 “유언”까지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15절에서는 “유언”의 의미로 사용된 바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약속”과 관련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처럼, 그것이 단수형이든 복수형이든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과 연관을 가집니다. 이 외에도 두 단락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동사 “정하다”(προκυρόω, 푸로퀴로오)의 태와 시제가 수동태 완료형으로서, 유사한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언약을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것은 그분이 언약의 제정자(制定者)이자 동시에 수여자(授與者)임을 드러내는 선언입니다.
17절과 관련해서 가장 당황스러운 부분은 율법이 “아브라함 언약”이 있기 430년 전에 이미 확정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의 논의에 있어 이 기간이 400년이든 430년이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만, 약간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아브라함’ 이후 ‘모세’까지 이르는 기간을 430년으로 계산하고 있는가 하면(출 12:40), <창세기>는 동일한 기간을 400년으로 잡고 있습니다(창 15:13).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 ‘랍비’들도 당혹스러워 하기는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대개 이러한 차이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430년은 “아브라함 언약”의 수립에서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받기까지의 기간으로 보며, 400년은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의 기간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무튼 ‘유대’ 전통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부터 이미 이를 지키고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가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창 17:10-14) 전체 ‘모세’ 율법을 받아들이고 준수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진리는 점진적으로 발전되고 확장된다는 “유대주의”의 사고 체계는 ‘모세’의 율법을 “아브라함 언약”이 단순히 발전된 형태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15절에서 보여주었던 아 포르티오리(a fortiori)의 원리에 따라, “아브라함 언약”이 ‘모세’의 율법을 선행하고 있으며, 따라서 후자가 전자를 폐기하거나 첨가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즉 ‘모세’의 율법은 “아브라함 언약”에 대해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는 왜 율법이 약속을 폐기할 수 없는지 밝힘으로써, 17절에 대한 진짜 결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 주신 것이라(18절)
18절에 대한 <헬라어 성경>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하고 있어, 17절에 대한 이유 내지는 보충 설명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율법과 약속”에 관한 이 결론 역시 그동안 사도가 전개해 왔던 “이분법적 논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참고; 2:15-16). 사도가 그동안 해왔던 논리 전개 방식을 다시 한 번 요약해 보면, 그는 우선 “명제 선언”에서(2:15-16)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를 대비시킵니다. 곧바로 이어지는 첫 번째 “검증”에서 “율법의 행위”와 “듣고 믿음의 행위”를 신자들의 경험을 토대로 제시한 바 있으며, 이어지는 두 번째 “검증”에서도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는 자”와 “믿음에 의존하는 자”를 구분하면서, 전자를 “율법과 저주”의 대상으로, 그리고 후자를 “의와 축복의 대상”으로 나누고 있습니다(3:6-14). 그리고 <성경> 특히 <창세기>로부터 새로운 주제들을 이끌어 내면서 두 번째 “검증”의 결론이자 세 번째 “검증”을 위한 연결 고리로 삼고 있는데, 그 주제들이란 “성령의 약속”, “아브라함 언약”, “언약의 약속과 축복”, “그리스도와 모세의 율법” 등을 말합니다. 이어지는 단락에서(3:19-4:7)에서도 보게 되겠지만, 율법에 관한 주제는 “율법의 목적과 기능”으로까지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기에 앞서, 우선 “율법과 약속”의 문제에 대해서 쐐기를 박아두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사도에게 있어 “모세의 율법”과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은 결코 뒤섞일 수 없으며, 나란히 갈 수도 없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18절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유업”(κληρονόμος, 클레로노모스)입니다. 이 단어는 이후 이어지는 논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참고: 3:29; 4:1, 7, 30; 5:21.
사실 이전에도(16-17절) 언약이나 약속과 관련해서 비록 명시적은 아니지만 충분히 예측 가능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유업과 관련해서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을 살펴보면, “땅”과 “후손”과 그리고 “(물질적인) 축복”일 것입니다(창 12:2-3; 13:14-17; 15:7, 18-21; 17:3-8). 그러나 이들 항목들은 <신약>의 여러 책들에서 볼 수 있듯이 영적인 의미로 쉽게 확장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5:21; 행 2:32; 고전 6:9-10; 엡 5:5; 골 3:24).
“유업”과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주다”(χαρίζομαι, 카리조마이)는 동사입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값없이 주다” 또는 “은혜를 베풀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유업”은 무슨 상거래의 결과나 또는 “율법의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는 점이 강하게 베여있습니다. 특히 18절에서 이 동사의 시제는 완료형으로, 그 결과가 지금도 미치고 있는 것으로서 사도가 이 단락을 통해서 강조하고자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하나님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원칙에 입각해서 ‘아브라함’과 ‘모세’를 다루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을, ‘모세’에게는 ‘율법’을 주셨다는 사실에서 이점을 확인할 수 있을 듯합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와 <출애굽>에서 약속과 율법을 대할 수 있습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루터’의 표현에 따르면, 이 둘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또 인격적으로나 구별되며, 그 차이는 하늘과 땅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만큼 떨어져 있습니다. 약속은 늘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하리니, 내가... 하리니, ...내가 하리니.” 그러나 율법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 할지니, 너는 ...하지 말지니.” 약속은 하나님의 종교이며, 하나님의 계획을 말하며,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주도권을 말합니다. 한편 율법은 인간의 종교, 인간의 책임, 인간의 행위를 말합니다. 약속은 오직 믿어주기만을 바랍니다. 그러나 율법은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약속”, “은혜”, 그리고 “믿음”의 범주 안에서 관계 하십니다. 그러나 ‘모세’와는 “율법”, “계명”, 그리고 “행위”라는 범주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이 둘 중 어느 쪽이 우선이며 먼저입니까? 이 둘은 모두 궁극적으로 “칭의”(justification) 즉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됩니다. 적어도 “칭의”와 관련해서 볼 때, 하나님과 우리의 본질적인 차이는 그분은 법정에서 심판관의 자리에, 그리고 우리는 피고인의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책에서 역사상 인류의 어떠한 문제도 궁극적으로 “죄”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서는 문제의 원인에 대한 진정한 해답을 얻을 수 없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이룰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의롭다 함” 즉 “무죄 방면”을 선고 받기 전에 선결 과제가 하나 있는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적대적인 관계를 해소하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J. Stott) 목사님은 그것을 “화목”(propitiation)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화목”이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에 대해서 진노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죄”에 대해서입니다. 어떻게 그분의 진노를 달랠 수 있을까? 이것은 “화목”의 주체, 즉 “누가 화목을 이루는가”에 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론상 두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그분의 진노를 풀어드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께서 스스로 진노를 거두시는 길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 길이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고, 실은 한 가지 길 즉 하나님 스스로 진노를 푸는 길 밖에 없습니다. 즉 그분께서 먼저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제사는 범죄 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는 길에 관한 지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 위해서는,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들이 그렇게 했을 때에만 하나님께서 스스로 만족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종교나 문화에서 제사가 의미하는 바가 “진혼”(鎭魂) 즉 “달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는 그 기원이나 절차나 의미에 있어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셨고, 그 시기와 방법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일례로, 그것이 감사의 제사이든, 헌신의 제사이든, 먼저 “화목의 번제”를 드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화목에는 반드시 희생 제물이 필요한데, 이 역시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그 대상을 지정해 놓으셨습니다. 이처럼 희생 제사가 철저하고도 엄격한 것은 하나님 자신이 완벽하시므로 그분 스스로 제정한 것이 아니면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시사입니다. 우리는 <레위기>에서 대 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이 멋대로 제사를 드리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한 일화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스스로 풀지 않으면 아무도 달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그분의 진노를 풀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엄격하고도 뼈를 깎는 고통과 노력을 통해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율법주의”는 두 가지 점에서 치명적인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화목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전제가 그것입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불완전함은 노력을 통해서 혹시 다소간 개선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완벽에 이르기는 불가능합니다. 흙이 물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율법주의”는 인간을 교만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종교적 엘리트를 양산해 내며, 소위 거룩한 무리와 세속적인 무리,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영적인 ‘그리스도’인, 물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과 성령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 미지근한 신자와 뜨거운 신자 등으로 사람을 가르고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전쟁은 왜 일어나는가?”는 질문에 대해 “두려움과 이익 추구와 명예 추구”때문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의 동기야말로 바로 이 세 가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율법주의자”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은 물론 인간들과도 적대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완벽주의의 또 다른 이름으로서 기독교 역사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정신 장애 현상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소식이 전해주는 역설은 어느 누구도, 그 어떠한 노력도 하나님의 진노를 달랠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 진노를 스스로 누그러뜨리셨으며, 우리와 “화평” 즉 “화목”을 이루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진노를 푸는 희생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 복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은 죄를 근절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죄를 짓지 않는 훈련을 오래 받거나,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처럼 죄만 만나면 극렬한 반동을 보이도록 엄격한 훈련을 받는 것은 죄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유일한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용서입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만이 용서를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대면하기를 거부한다면, 처벌하거나, 윤리 교육을 하거나, 죄를 부인하는 전략을 만들어 냄으로써 죄의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중 어떤 것도 별 효과가 없습니다. 죄의 유일한 구제책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용서받으려면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아무 변명도, 자기 합리화도, 부인도, 새해 결심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단순히 “내가 고백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요한 사도도 다윗의 기도도 모두 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하다가 들키면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거나 약속합니다. 그러나 결심이나 약속은 처음 얼마동안은 효과가 있습니다만,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우리는 실없는 사람, 의지가 없는 사람, 빈말을 하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힙니다. 하나님 앞에 죄에 대해 고백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죄를 관리해 보겠다고 고집부리거나, 무슨 장치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고백은 그냥 하나님의 용서의 넓은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신실함으로 둘러싸인 세상으로 말입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가 열어놓은 세상이며, 오래 전부터 “아브라함 언약” 속에 이미 약속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두 가지 사실, 즉 율법보다 더 오래 되었고, 또 나중에 변조시킬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율법보다 앞서며 율법이 약속을 폐기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은 “검증”의 세 번째 논지에 해당합니다. 본문의 기능과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수사학적 기법은 어떤 것입니까?
2. 언약과 율법은 상호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율법이 언약을 무효화 하거나 폐기할 수 없는 이유를 사도의 논리를 따라 전개해 봅시다.
제 12과: 명목주의 반박(1)
12
명목주의 반박(1)
율법의 목적과 기능
(3:19-25)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15절)
<갈라디아서> 제 2부(1:6-4:11)는 “책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래 네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누어 진행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R. N. Longenecker, 목차 참고.
(1) 서론(exordium)(1:6-10): 서신의 동기와 배경
(2) 해설(narratio)(1:11-2:14): 자전적 변론
(3) 명제(propositio)(2:15-21): 서신의 명제 선언
(4) 검증(probatio)(3:1-4:11): 명제에 대한 예시와 검증
이 모든 단락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율법주의”(legalism)와 “명목주의”(nomism)임을 보았으며, “명제”와 “검증” 단락에서 이 둘을 반박하는 변론과 이를 뒷받침 해줄 수 있는 검증 작업이 여러 각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또한 본 바 있습니다. 이 두 주제들이 상호 연결되는 방식을 다시 한 번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검증” 작업은 주제에 따라 다시 두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누어지고 있는데, 첫 번째 단락(3:1-18)의 중심 주제는 “율법주의”를 반박하는 내용으로서, 검증 작업이 세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경험을 통한 검증(3:1-5)
(2) 성경을 통한 검증(3:6-14)
(3) 신학을 통한 검증(3:15-18)
이상이 지난 세 과에서 다룬 바 있는 내용들이며, 이어지는 네 과에서는 “명목주의”를 반박하는 내용들을 다루게 될 것인바, 그 내용에 따라 네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1) 율법의 목적과 기능(3:19-25)
(2)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3:26-29)
(3) 두 관계에 대한 예시(4:1-7)
(4) 사도의 염려(4:8-11)
“율법주의”와 “명목주의”는 모두 율법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일견 큰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명목주의”와 관련된 위의 내용(3:19-4:7)은 불필요한 반복이나 또는 부수적인 첨가 정도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자(前者)가 “율법과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후자(後者)는 “율법과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도 전자보다는 오히려 후자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할례를 포함한 율법의 최소한의 규례들을 지켜야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명목주의”입니다. 따라서 “명목주의”는 신자들로 하여금 유대인이 되라고 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종교적 “완벽주의자”가 되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율법의 목적과 기능”이라든지, “신자와 율법과의 관계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라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와 같은 주제는 “율법주의”에서 이미 다룬 바 있는 내용에 대한 부차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명목주의”를 다룸에 있어 피해갈 수 없는 내용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3:19-4:11의 본문을 읽어가야 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본문은 구조적으로 세 개의 소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율법의 목적과 기능에 관한 질문
(2)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의 관계에 관한 부차적인 질문
(3) 교회 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논쟁점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
첫 두 질문은 그 형식에 있어 유사한 수사적 질문입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19절); “그런즉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21절). 이들 질문들은 3:1-18에서 사도가 밝힌 바 있는 “율법주의”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들 질문은 적어도 ‘유대’인들의 “명목주의”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대답을 필요로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두 질문이 제기되는 방식이 이전의 문장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기보다는 다소 갑작스러우며, 그 대답 또한 분명하게 핵심을 찌르고 있기는 하지만 짧고 다소 신비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본문의 마지막 단락에 해당하는 23-25절은 앞의 내용(두 번의 질문과 대답들)과는 접속사 “δέ”(데)로 연결되면서, 일부 영어 번역본에서는 이를 “그러나”로 번역하고 있기도 합니다만(예: RSV; KJV), 대개 생략하여 번역하고 있습니다.
전체 논의에 대한 절정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절정에서 사도는 논쟁의 핵심으로 독자들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가 이곳에서 주로 사용하는 표현은 “율법 아래”(under the law)입니다. “율법 아래에 산다”는 표현을 통해서 사도가 보여주는 유비(analogy)는 귀족 내지는 특권층 속한 가정에서 사는 모습 그것입니다.
율법의 목적과 기능을 다루고 있는 본문이 종종 앞에서 사도가 다룬 바 있는 “율법주의”에 대한 부록 내지는 색인 정도로 취급받아온 것도 사실입니다만, 엄밀하게 말해서 본문이야말로 사도가 당면하고 있는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그려주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사도가 이곳에서 율법에 관해서 총괄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당시의 상황과 관련해서 볼 때 본문의 내용은 그 목적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곳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중요한 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는 무엇인가?”; “모세의 율법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신학과 신앙
1. 율법과 약속(19-20절)
“율법주의”에 대한 사도의 반론은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할 육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명목주의”에 대한 사도의 반론은 우리는 “율법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반론을 듣는 독자라면 이방인이고 ‘유대’인이고 가릴 것 없이 당연히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이냐(19절상)
<헬라어 성경>에 의하면 “그렇다면 왜 율법이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목적이나 기능을 물어보는 질문입니다. 이런 유의 수사적 질문에는 동사가 생략된 경우가 많은데 이 질문 역시 그러합니다.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종종 “왜”라는 의문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롬 3:7; 14:10; 고전 4:7). 사도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19절하)
그런데 이 대답에는 여러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들이 있습니다. 사도의 대답에는 다섯 가지 정도의 강조점이 있습니다(Longenecker): (1) 율법은 더하여 진 것이다; (2) 범법 때문이었다; (3) 약속의 씨가 올 때까지 만이다; (4) 천사들을 통하여 베푸신 것이다; (5) 중보자의 손에 의한 것이었다. 이 문장이 전체적으로 갖는 의미는 분명 율법의 목적과 기능에 관한 것이지만,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 강조점은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들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하나씩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율법이 더하여졌다”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동사의 시제와 태는 각기 과거 완료형 수동태입니다.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율법이 기능하는 바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서 어떤 핵심적인 부분이 아니라, 추가로 더하여진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보조적이며 부수적인 역할을 할 뿐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율법이 더하여 진 것은 “범법 때문이었다”는 표현은 첫 번째 표현에 비해서 다소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기서 “범법”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표준이나 규범에서 벗어나는 행위” 또는 “규범을 무시하는 행위” 등입니다.
적어도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율법이 더해진 이유를 “죄를 죄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입장입니다(롬 3:20; 4:15; 5:13; 7:7). 또 하나는 “죄를 더 짓게 하고 확산시키려는 목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롬 5:20). 따라서 율법의 목적은 전자(前者)의 해석에 따르면 예방과 방지의 의도가 있는 것이라면, 후자(後者)의 해석에 따르면 오히려 조장하고 확산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문맥의 상황에서 보면 전자의 입장이 더 그럴 듯해 보이지만, “...때문에”가 가지는 이중적이고 애매한 의미 때문에 어느 한 쪽이라고 단언하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어쩌면 사도의 입장에서 보면 의도적으로 애매하게 하려했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의 의도가 무엇이든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율법은 범죄와 연관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든지 또는 완벽한 신앙인이 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기한 율법의 두 가지 목적 외에 율법이 기능하는 바를 열거하자면, 앞으로 다루게 되겠지만 저주와 감독의 기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셋째, “약속의 씨가 올 때까지”는 율법의 한시적인 특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씨”는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입니다. 사도에 의하면 율법은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한시적으로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사도의 견해가 전통적인 “유대주의”와 갈리고 있습니다. 율법의 통용시한을 한시적으로 보는 어떤 유대인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유대인 학자 ‘필로’는 율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해와 달과 하늘과 땅이 존재하는 한 율법은 변치 않을 것이다.”
넷째, “율법이 천사를 통하여 베풀어진 것”이라는 사도의 언급을 역사적인 관점과 그의 개인적인 인식의 차원에서 따져볼 조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성경>은 사도의 인식을 지지하고 있을까요? <맛소라> 사본은 ‘시내 산’에서 율법 수여와 관련해서 천사가 있었다는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출애굽>(19:18)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연기와 천둥소리와 함께 “불 가운데서” 시내 산에 강림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신명기>(33:2)는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실 때, “일만 성도” 가운데에 강림하셨고 “불타는 율례”(또는 번쩍이는 불)를 가지고 오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편 <시편>(68:18)에서는 율법 수여와 관련하여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병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직접적으로 천사를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율법 수여와 천사와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기는 <칠십인 역>이 처음입니다. <칠십인 역>은 <신명기> 33:2에서 그 의미가 다소 애매할 수밖에 없는 표현, “그의 오른 손에는 그들을 위해 불타는 율례(번쩍이는 불)가 있도다”를 번역하면서 “그의 오른 손에는 그들을 위해 천사가 있도다”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훗날 ‘랍비’들에게는 <신명기> 33:2보다 더 중요한 구절이 있는데, <시편>(68:18)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병거”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병거”가 다름 아닌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호위했던 “천군 천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칠십인 역>이나 랍비들의 사상이 사도 당시 율법과 천사와의 관계에 관한 지배적인 인식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약>에서도 이런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행 7:53);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 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히 2:2).
초기 “유대주의” 진영에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는 대부분의 주요 계시의 사건에까지 천사의 역할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율법과 천사의 등장을 연계시키고 있는 것은 ‘시내’ 산 사건의 의미와 가치를 더 높이고 영화롭게 하려는 저의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역시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19-20절의 문맥을 고려해 볼 때, 그는 율법 수여와 관련해서 정 반대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율법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중재자를 통해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계시의 질적 차원에서 보자면, 천사라는 중재자를 통해 주셨으니 “유대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율법이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직접적인 계시보다는 열등하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 논리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바탕 위에 새로운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사도의 수사가 다시 한 번 돋보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가 율법과 관련하여 강조하고 있는 점은 그것이 “중보자의 손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여기서 중보자는 ‘모세’를 지칭하고 있습니다만, ‘오리겐’, ‘크리소스톰’, ‘제롬’, ‘루터’, ‘칼빈’ 등은 <신약>에 기초하여 이 중보자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참고: 딤전 2:5; 히 8:6; 9:15; 12:24.
<칠십인 역>에서는 “중보자의 손”을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의 ‘모세’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으로” 준 것이 율법과 계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참고: 레 26:46; 민 4:37, 41, 45, 49; 9:23; 10:23; 15:23; 17:5; 33:1; 36:13; 수 21:2; 22:9; 삿 3:4; 대상 16:40; 대하 33:8; 시 76:21.
그러나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중보자의 손”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점은 ‘모세’의 중보자적인 역할이 아니라, 율법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중개되었다는 점입니다. 19절만을 따로 떼어놓고 볼 때, 사도가 중보자인 ‘모세’나 “중보자의 손으로” 전해진 ‘모세’의 율법을 경멸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20절에서는 그런 의도가 분명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20절)
이 구절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듯이 <바울 서신> 전체를 통해서 가장 어려운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갈라디아서>에 관한 최고의 주석가로 알려져 있는 ‘라이트풋트’(Lightfoot)는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무려 250-300여 가지에 이른다고 했고, 또 다른 한 주석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430 가지가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Longenecker). 이들 학자들의 주장은 다소 과장되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만큼 이 구절이 해석하기에 어려움이 많다는 실토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중보자를 언급함으로써 율법에 대해서 무언가 부정적인 느낌을 갖도록 하려는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요? 즉 율법이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중간에 매개자를 개입시킴으로써 마치 율법 수여에 복수(複數)의 인물이 개입되어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의도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복수의 인물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문제 해결의 관건이 될 것입니다. 중보자가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라”는 말 속에는 두 당사자가 있다는 암시인데, 그 두 당사자가 과연 누구인가를 놓고 적어도 세 가지 해석적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 두 당사자는 하나님과 유대 백성을 지칭한다.
(2) 두 당사자는 두 집단으로서, 천사집단과 유대 백성을 지칭한다. 이 두 집단 사이를 왕래하며 조정의 역할을 하는 자가 중보자이다.
(3) 중보자 그 자체가 이미 복수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이 세 번째 해석은 중재자(또는 매개자)를 필요로 하는 거래는 어떤 것이든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는 거래보다 열등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설명 중에서 첫 번째가 가장 그럴듯해 보입니다. 두 번째 설명을 배제하는 이유는 천사 집단을 율법과 관련하여 주요 당사자로 지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대’ 전통에서 ‘시내’ 산 율법 수여에서 천사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도구 내지는 수단에 불과한 존재들이며, 율법 계약의 한 당사자로 인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설명의 또 다른 문제는 만일 천사를 율법 계약의 한 당사자로 인정하게 되면, ‘모세’는 중보자가 아니라 천사들의 한 도구에 불과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유대’교는 물론 기독교에서조차 인정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세 번째 설명 역시 그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중보자가 개입된 거래는 열등하며 중보자 또한 그러합니다. 그러나 ‘모세’를 율법의 중보자로 받아들이고 있는 ‘유대’ 전승치고 어느 곳에도 ‘모세’나 율법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도가 이곳에서 만일 중보자 ‘모세’를 깎아내리려고 시도하고 있다면, 그는 그동안 집중해 왔던 논쟁의 초점을 흐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의 공격의 대상은 율법이었지 ‘모세’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해서 첫 번째 설명이 유일한 대안으로 남게 됩니다. 물론 이 설명에도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논의의 초점이 천사나 ‘모세’로부터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대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설명이 강조하고자 바는 율법이 약속에 비해 열등하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백성들이 율법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제 삼자의 매개를 통해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이 “시내 산 에피소드”에 대한 사도의 입장이 전통적인 “유대주의”와 궤를 달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열등하게 보는 것은 천사나 ‘모세’가 아니라 율법 그 자체입니다.
이제 사도는 20절 후반에서 ‘이스라엘’의 그 유명한 ‘쉐마’를 인용함으로써, 전반부와 극적인 시적 “대조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 이시니라”(29절하). 이는 모든 ‘유대’인들의 신조 가운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가 이곳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은 일관되고 지속적인 한 분 하나님의 속성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중보자는 한 편만을 위함이 아니라”(20절상)에서 율법의 간접적이고, 계약적인 측면과 계약 당사자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20절하)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직접적이고, 일방적인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강조한다면 열등한 것을 따르는 것이고, 약속을 강조한다면 탁월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직접적으로 거래하고 만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초기의 일부 “유대주의”에서도 어떠한 형태로든 중보자가 개입된 계약은 보다 열등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직접적으로 거래하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도 합니다. 심지어 <칠십인 역>과 같은 곳에서도 이를 지지하는 듯한 구절이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사 63:9)(Longnecker, 142-143쪽).
2. 율법과 저주(21-22절)
율법은 약속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음을 이미 인정한 바 있고(3:15-18), 이제는 중보자의 손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주신 약속에 비해 계시의 질적 측면에서 열등할 수밖에 없음도 살펴보았습니다(3:19-20). 그렇다면 율법에 대해서 남은 질문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21절상)
이 질문은 19절에서 물었던 첫 번째 것에 비해 부수적인 질문 같기도 합니다만, 율법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합리적인 결론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대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율법이 약속과 반명제(反 命題)의 관계에 있다고 한다면 그는 분명 극단적인 “율법폐기론자”로 낙인찍힐 것이 분명할 것이기 때문에, 이 질문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21절하)
논리적으로 볼 때 대답은 “그렇다”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사도는 율법과 약속을 서로 대척점(對蹠點)에 두고 논리를 전개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아주 강력한 부정(不定)입니다. 일부 번역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를 거부하신다”로 번역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어서 그는 왜 그런지 자신의 논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제시하고 있는 논지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전제(“유대주의”이든 “명목주의”이든 상관없이)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바대로 율법이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약속과는 대척점에 있는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정일 뿐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아주 강력한 접속사 “그러나”로 시작하면서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전제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22절)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바는 율법이 생명을 주는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성경>은 아마도 특정 구절을 의미하는 것일 텐데, 예컨대, 사도가 3:10에서 인용한 바 있는 <신명기> 27:26일 것입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율법을 항상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믿음은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율법은 약속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속을 기다리며 기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율법은 약속을 더욱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 약속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기초한 약속을 말합니다(21절하).
사도는 이곳에서 마치 두 가닥의 끈을 꼬아 하나의 줄을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의 끈은 “하나님의 율법”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전자(前者)가 죄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고 모든 인간을 저주 아래 두고 있다면, 후자(後者)는 ‘그리스도’의 믿음(순종)에 초점을 맞추며 인간들의 믿음의 반응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끌어내리는 역할을 한다면, 약속은 우리를 이끌어 올리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율법과 약속”은 동일하지도 않으며,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상보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마치 하나처럼 융합된 것도 아니면서도, 하나의 공동 목적을 위해서 상호 얽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3. 율법과 초등교사(23-25절)
율법의 역할과 관련하여 사도의 논지는 23절에서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23절)
이 구절은 22절과 놀라운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데, 동일한 동사 “매다”(또는 “가두다”)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동사가 22절에서는 능동 과거 완료형으로, 23절에서는 현재 수동 분사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두 구절에서 공히 “기독교 복음”을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2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언급하고 있으며, 23절에서는 “믿음”을 다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구절은 문장의 주어와 율법의 기능과 관련한 묘사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예컨대, 22절에서는 모두가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데 반해, 23절에서는 “우리” 즉 ‘유대’인들이 “율법 아래”(율법의 보호와 관찰 아래)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기능과 관련해서 전자가 율법의 저주를 강조하고 있다면, 후자는 율법의 감독(관찰)을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넓게 보자면 ‘유대’인 또한 2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모든 인류” 속에 포함되어야 하고 이들 역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에 더하여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는 달리 보다 특별한 방식으로 “율법 아래”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특별한 방식이 무엇인지 24-25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24절)
율법이 ‘유대’인에게 기능했던바 특별한 방식이란 “초등교사”(παιδαγωγὸς, 파이다고고스)의 노릇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교사” 내지는 “선생”(διδάσκαλος, 디다스칼로스) 정도가 될 것이나, 당시에는 이와 구별하여 사용했습니다. 이 두 단어의 차이에 대해서 Longenecker는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146-148쪽).
후자가 주로 교육적이고 지적인 가르침을 주었다면, 전자는 주로 보호 감독 및 훈련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신분이나 지위도 주로 노예로서 그들이 섬기는 주인의 아이들에 대한 훈련과 보호 및 감독을 맡았다고 합니다. 그는 실질적인 교육을 맡아 했던 교사가 아니라 주인의 아이들을 교사에게로 데려다주는 자였습니다. 그나마 그 역할도 한시적이었는데, 아이들이 장성할 때까지 만이었습니다.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했던 역할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εὶς Χριστόν, 에이스 크리스톤) 역할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헬라어 성경>은 적어도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장소의 이동과 관련된 의미의 “그리스도에게로”(to Christ)가 되며, 또 하나는 시간과 연관된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until Christ comes)가 되기도 합니다. 두 해석 모두 율법의 기능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문맥 상 후자의 해석이 더 타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23절과 25절에서 각기 “믿음이 오기 전에”와 “믿음이 온 후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해석은 더욱 타당해 보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했던 역할은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초등교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가 왔을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동안 율법이 이방인이고 ‘유대’인이고 가리지 않고 했던 역할이 있다면, 죄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하며, 죄를 더욱 드러나게 하고, 죄를 정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더하여 율법의 역할이 있다면, 모두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 마지막 역할과 관련하여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일종의 “초등교사”와 같았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사도는 ‘유대’인들의 “명목주의”에 대해서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25절)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로 비롯된 기독교 복음의 도래로 초등교사로서의 율법의 역할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유대’인이 문화적, 민족적, 또는 실용적 이유 등으로 해서 계속해서 율법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이 모든 ‘유대’적인 전통과 관습을 등지고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할례든 종교적인 의식이든 또는 그 무엇이든 ‘유대’적인 생활 방식과 관계된 그 어떤 것들도 믿음의 생활에 대한 전제 조건이 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이점은 이방인 기독교인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 진영 내에서 어느 누구도 “율법주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인정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을 뿐이라는 데에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 이후의 삶은 어떠합니까? 종교적 성취나 완성을 위하여 율법이나 계명을 쫓아 살아야 합니까? 당연히 그래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이자 도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찌 그 정도도 지키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도의 대답은 “절대 그럴 수 없다”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종교적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것으로서, 불가능한 목표 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율법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약속에는 믿음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순종의 행동을 요구합니다.
약속이 율법보다 더 지키기 쉽기 때문에 율법을 버리고 약속을 취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이 율법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언약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율법이 이를 고치거나 없앨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약속이 율법보다 더 오래되었으며, 언약은 한 번 확정되면 고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사도의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 또 다른 극단으로 비칩니다. ‘유대’인들이 수천 년 동안 지켜온 율법을 하루아침에 폐기처분하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방 기독교인들조차도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는 주장입니다. 이어지는 질문은 당연히 “그러면 율법은 왜 필요한가?”일 것입니다.
1. 율법과 약속
그는 이 질문에 대해서 다섯 가지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율법은 단순히 약속이 이어 추가로 더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보조적이며 부수적인 역할을 할 뿐인 것입니다.
둘째, 이 율법이 더하여 진 것은 범법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선 율법이 더하여진 것은 “죄를 죄로 인식하기 위한 목적”에서였습니다. 속도 제한 표지판이 하는 역할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고속도로 상에서 속도 제한이 없다면 어느 누구도 속도위반을 했을 때 벌금을 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목적에 따르면 율법이 하는 역할이란 예방과 방지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역설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율법을 더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더 짓게 하고 확산시키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위와는 정 반대로 오히려 죄를 조장하고 확산시키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마치 교통순경이 속도 표지계를 들고 숨어 지키는 목적이 속도위반을 방지하려는 목적보다는 오히려 운전자가 속도위반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할 것입니다. 참으로 황당하고 기막힌 목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율법이 하는 역할이라는 것이 오히려 범죄를 조장하는 것이며,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범죄 했을 때 처벌하는 것이 고작이라니 말입니다.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율법은 범죄와 연관이 있으며, 의로움이나 완벽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임을 인식하게 됩니다.
셋째, 율법의 유효 기간이 한시적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기간은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통용시한을 한시적으로 보는 ‘유대’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유대인 학자 ‘필로’에 따르면, 해와 달과 하늘과 땅이 존재하는 한 율법은 변치 않을 것이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율법은 천사를 통하여 중보자의 손으로 베풀어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사도 개인의 신학적 입장도 아니고 성경적 근거도 없는 진술입니다. 오래된 ‘유대’ ‘랍비’의 사상일 뿐입니다. 이런 사상의 배경에는 율법과 천사의 등장을 연계시켜서 ‘시내’ 산 사건의 의미와 가치를 더 높이고 영화롭게 하려는 저의가 깔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율법 수여와 관련해서 정 반대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율법은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중재자를 통해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계시의 질적 차원에서 보자면, 천사라는 중재자를 통해 주셨으니 “유대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율법이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직접적인 계시보다는 열등하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 논리를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바탕 위에 새로운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사도의 수사가 다시 한 번 돋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가 율법과 관련하여 강조하고 있는 점은 그것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중개되었다는 점입니다. 즉 율법이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중간에 매개자를 개입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중보자가 개입된 거래는 열등하며 중보자 또한 그러합니다. 따라서 율법은 약속에 비해 열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율법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제 삼자의 매개를 통해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이 “시내 산 에피소드”에 대한 사도의 입장이 전통적인 “유대주의”와 궤를 달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열등하게 보는 것은 천사나 ‘모세’가 아니라 율법 그 자체입니다.
율법은 일종의 계약으로서 중보자를 필요로 하며, 중보자는 양 편을 오가며 타협과 절충을 모색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계약 당사자의 책임 준수가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늘 깨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약속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분의 백성들에게 직접적으로 하신 것이며, 그래서 율법보다 훨씬 탁월하며, 지속적이며 일관됩니다. 하나님은 어느 중보자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백성과 일대일로 만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2. 율법과 저주
그렇다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는 것입니까? 서로 앙숙처럼 대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도가 보여준 태도나 논리에 따르면 당연히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사도는 율법과 약속을 늘 서로 대척점(對蹠點)에 두고 논리를 전개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정 반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왜 그런지 이유를 밝히면서 이번에도 그의 논리는 ‘유대’인들의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바대로 율법이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약속과는 대척점에 있는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정일 뿐이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신명기> 27:26만 하드라도, 율법을 항상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자란 아무도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믿음은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율법은 약속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속을 기다리며 기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율법의 또 다른 기능이 있습니다. 즉 율법은 인간에게 저주를 내려, 그로 하여금 절망하게 하고, 비참한 지경으로 몰아가서 이렇게 묻게 만듭니다: “누가 이 사망에서 나를 구원할꼬?” 즉 율법이 주는 사망의 늪 속에서 약속이 주는 생명을 갈구하도록 만든다는 것이지요. 그 약속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신실함)”에 기초한 약속을 말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기능입니다. 그러니 어찌 율법이 약속과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절망은 약속을 더욱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지요. (21절하). 이처럼 율법과 약속은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해 있으면서도, 결국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신비하게 기능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율법과 초등교사(23-25절)
모두가 “율법의 저주 아래” 있었다면, “우리” 즉 ‘유대’인들 역시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다만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보다 특별한 방식으로 “율법 아래”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한 방식이란 율법이 ‘유대’인들에게는 “초등교사”의 노릇을 해왔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초등교사”란 로마 시대 당시 주인의 신임을 받는 노예로서, 주인의 아이들에 대한 훈련과 보호 및 감독의 역할을 했습니다. 무슨 실질적인 지적 교육을 맡아 했던 교사가 아니라 주인의 아이들을 교사에게로 데려다주는 자였습니다.
그나마 그 역할도 한시적이었는데, 아이들이 장성할 때까지 만이었습니다. 율법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until Christ comes) “초등교사”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가 왔을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동안 율법이 이방인이고 ‘유대’인이고 가리지 않고 했던 역할이 있다면, 죄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하며, 죄를 더욱 드러나게 하고, 죄를 정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더하여 율법의 역할이 있다면, 모두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이 마지막 역할과 관련하여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일종의 “초등교사”와 같았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로 기독교 복음이 왔고, 따라서 초등교사로서의 율법의 역할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이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유대’적인 전통과 관습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살아간들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만, 그런 생활 방식은 기독교 복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에 대해서도 이러할진대 이방 기독교인에 대해서야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괴롭히는 수없이 많은 계명들이 있습니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도 있고, 교회가 만들어 놓은 것들도 있으며,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 명목은 모두 하나같이 “하나님의 백성이 어찌 그럴 수 있느냐?” 라든지 또는“하나님의 백성이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느냐?”입니다. 이 모두 그야말로 “명목론”의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율법은 외적 책임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내적 원리를 말합니다. 율법은 의문의 죽은 것이지만, 성령의 법은 생명의 법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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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 기능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본문에서 사용하고 있는 수사학적 기법은 어떤 것입니까?
2. 율법과 약속에 관한 사도의 논지를 다섯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까?
3. 율법이 약속과 반대되는 것이 아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4. 율법이 초등교사로서의 역할은 무엇이며, 누구를 대상으로 한 것입니까?
제 13과: 명목주의 반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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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목주의 반박(2)
그리스도안에서 새 관계들
(3:26-29)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27절)
법률이나 시행령은 원래 제정한 목적이 그것을 잘 지키는 자들에게 무슨 상이나 표창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어기는 자들을 처벌하기 위함입니다. 법을 잘 지켰다고 해서 상을 주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잘 지키지 못해서 벌을 받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교통법규 하나만 해도 그렇습니다. 교통질서 아무리 잘 지켜보아야 상 받을 일 없습니다. 잘 지키다가도 어쩌다 한 번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범칙금 고지서가 집으로 날아듭니다.
율법도 이와 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한 번도 빠짐없이,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항상, 율법의 모든 규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자란 없습니다. 오히려 율법은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고, 나아가서는 죄를 더 짓게 만듭니다. “명목주의”의 허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모두는 율법 아래에 있기 때문에 결코 완벽한 신앙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지난 단락에서 내린 결론입니다. 다소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진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쫓아 살 수 없는 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 단락에서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불과 네 개의 절로 이루어진 본문은 구조적으로 꽤나 복잡하다 할 것입니다. 우선 첫 구절은 형식 상 일종의 “선언”에 해당됩니다: “너희가...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26절). 그리고 이어지는 두 절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 문”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내용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27-28절). 그리고 마지막 절은 하나의 결론적인 선언으로서, 이방 기독교인과 ‘아브라함’과의 관계에 대해서 “유대주의자”들이 제기한 바 있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29절). 각 구절의 기원이나 출처와 관련해서 볼 때, 26절이나 27-28절 등은 초대교회부터 익히 알려져 있는 내용들을 사도가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마지막 29절은 26-28절의 내용을 토대로, 당면한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구조 및 출처와 관련된 이러한 가정은 본문의 구문(構文)이나 그 가운데 등장하고 있는 다양한 어휘들을 설명하기에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선 본문의 구문(構文) 상의 특징은 세 개의 접속사(“왜냐하면...왜냐하면...그렇다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세 접속사는 각기 26절과 27절 및 29절의 첫머리에 등장하여 세 개의 단락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들 각각은 별개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기보다는 하나의 주제를 놓고 일관된 논리를 전개해 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핵심 주제를 드러냄에 있어서도 여러 다양한 어휘들을 구사하고 있어, 이들이 상호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본문의 핵심 표현은 ‘그리스도’와 관련한 네 가지 유사한 표현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26, 28절);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27절); “그리스도로 옷 입은”(27절); “그리스도의 것”(29절). 그리고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사도가 강조하고 있는 두 단어는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시키고 있는 “(너희) 모두”와 “(아브라함의) 씨”입니다. 이로 미루어 사도에게 있어 ‘아브라함’과 ‘이방인’ 사이의 간극을 이어주는 다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지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율법은 왜 사람을 의롭게 하지도 못하며, 또 의롭게 된 자가 완벽에 이르게 하지도 못하는 것일까요? 앞 단락에서는(3:19-25) 그 이유에 대해서 보다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바 있습니다. 그 이유란 율법의 제한적이고 한시적인 목적이나 기능 때문이었습니다. 즉 율법은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며, 죄를 더 짓게 만들며, 감독하고 관찰하는 한시적인 기능이 끝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이 단락에서는(3:26-29) 보다 적극적인 관점에서 왜 기독교적 삶이 율법적인 삶과 상관이 없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부터 율법중심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하나님의 아들(26절)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들의 원래 신분이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가릴 것 없이 이제 더 이상 율법의 요구를 쫓아 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소극적으로는 그들이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3:19-25). 그러나 그보다 더 발전적이고 적극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게 된 새로운 체험,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26절)
<헬라어 성경>은 이 구절을 “왜냐하면”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접속사가 기능하는 바는, 앞에서 전개한 논지를 이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설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다 적절한 번역도 “왜냐하면 여러분도 알다시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용례를 <신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롬 7:2; 마 12:40; 23:3; 24:38; 막 7:3; 눅 9:14; 요 3:16; 4:8, 9; 히 3:4; 벧후 2:8.
이 구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대상은 “(너희) 모두”(πάντες, 판테스)입니다. 사도는 이 단어를 단락의 첫 머리에 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27-28절에서도, “누구든지”라든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등의 표현을 통해서 이 단어의 보편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으며, 이를 마지막 29절에서 “아브라함 자손”으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갈라디아 서> 전체를 통해서 이곳에서 유일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이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4:6-7에서 다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다소 까다로운 표현은 이인칭 복수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단어 “너희”인데, 23-25절 사이에 등장하고 있는 “우리”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26절에 이르러 그 대상이 다소 좁아진 느낌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소 이상한 표현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입니다. 여기서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일 텐데, 23-25절 사이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 믿음”과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 믿음”은 문맥 상 “너희의 믿음”이 되어야 마땅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 믿음”의 결과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사도가 즐겨 사용하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바울’의 서신 전체를 통해서 이 표현은 대략 164회 정도 나타나고 있습니다(Longnecker).
동시에 초대 교회에서 사용하던 신앙고백의 한 표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표현이 전달해주는 바가 다소 신비주의적인 느낌이 들게 하지만, 체험적이고, 인격적이며, 더할 수 없이 친밀한 교제와 관계로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안에서(27-28절)
이 두 절이 기능하는 바는 앞선 26절의 선언을 재확인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사도는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을 차용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27(왜냐하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왜냐하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27-28절)
<헬라어 성경>에서 이 구절이 다시 한 번 “왜냐하면...”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기능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합니다. 아마도 27-28절은 초대 교회에서 침례 의식에서 사용하던 신앙고백으로서, 사도가 26절에서 언급한 바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에 대한 자신의 논지를 재확인하기 위해서 도입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H. Schlier). 그래서 구조적으로 볼 때, 이 두 구절이 없어도 26절의 내용은 본문의 결론에 해당하는 29절에 무리 없이 연결될 수 있음을 봅니다(26절에서 곧바로 29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28절의 끝 부분에 등장하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표현은 26절의 내용을 논리적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27절의 “누구든지”는 26절의 “(너희) 모두”와 나란히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7절의 “누구든지”(ὃσοι, 호소이)는 남성 복수형으로서, 26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남성 복수형 “모두”(πάντες, 판테스)와는 동등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율법과 약속”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볼 때, 28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세 쌍의 등위 구(等位句)-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중에서 첫 번째 쌍만이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을 뿐입니다. 물론 서신의 후반에서 “자유와 종”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서> 4-5장에서 다루고 있는 “자유와 종”에 관한 주제는 신앙적이고 영적인 부분에 관한 것으로서, 이곳에서 말하는 사회적인 신분이나 계급에 관한 언급은 아닙니다. 이곳에서 사도가 주장하는 바는 기독교 복음이 이런 사회적인 신분의 차이를 철폐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 번째 쌍으로 등장하고 있는 “남자와 여자”의 문제도 “유대주의”나 “명목론”과는 직접적으로 연관은 없습니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성(性)의 차별 또한 사라졌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세 쌍의 표현은 사도의 다른 서신에서도 다소간 축약된 형태로든 또는 확장된 형태로든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순서는 변하지 않고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들 표현이 사도 자신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내에서 하나의 고정된 형태로 사용되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고린도 전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 <골로새서>에서도 유사한 표현을 봅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1). 마찬가지로 <고린도 전서> 7:17-28절 사이에서도 “할례파나 무할례파”에 대해서(17-19절), “종이나 자유인”에 대해서(21-23절), 그리고 “결혼”에 대해서(25-28절) 동일한 순서로 다루고 있는 것을 봅니다. 특히 <고린도전서> 12:13이나 <골로새서> 3:11에서는 이들 표현을 침례와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문 28절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 군데 모두 이들 표현을 침례에 관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들이 원래 사용되던 배경은 초대교회 내에서 침례 시에 신앙고백의 한 형태로 회자되던 표현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문구가 원래 의도했던 바도, 침례를 통해서 공동체의 새로운 회원이 된 자들의 신분과 지위에 관한 간략한 정보를 제공해주고자 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 의미하는 바는, 회원 모두는 마지막 심판의 날에 하나님 앞에서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신분의 차이 없이 동등하게 그 책임과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겠지요. 사도가 이곳에서 이 표현을 언급하는 이유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 사실을 상기시켜줌과 동시에 자신의 논지를 증명하려 함일 것입니다. 사도가 앞에서 이들 교인들을 향해서 “너희가 이미 듣고 보았다”고 쓰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침례”란 당연히 기독교 침례를 말하는 것으로서, 항상 “침수 침례” 즉 물속에 잠기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참고: 롬 6:3; 고전 1:13-17; 12:13; 15:29.
이 동사가 수동태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타인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궁극적으로 하나님 자신 또는 ‘그리스도’(엡 5:26)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침례는 “그리스도 안에서(또는 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거나(27절; 롬 6:3; 고전 1:13, 15; 10:2), 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기도 합니다(마 28:19; 행 8:16; 19:5).
또 한 가지 침례와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사실은 침례와 믿음과의 관계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침례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이 관계를 본문의 문맥 안에서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26절과 27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26절과 27절에서 각기 등장하고 있는 두 단어, “모두”와 “누구든지”가 동일한 의미를 가지며 상호 병행 관계에 있음을 보았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는(26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는”(27절) 자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믿음과 침례가 연결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이 이처럼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동일하거나 상보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즉 믿음이 있다고 해서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든지, 반대로 침례가 믿음을 대신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침례는 내적인 믿음에 대한 외적인 증거(표징)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았다는 의미이며, 그분의 성령의 은사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침례는 할례와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할례와 침례 모두 어차피 외적인 의식이니만큼, 사도는 단순히 할례를 침례로 대체하고 있는 것입니까? 만일 사도가 침례를 믿음을 대체할 수 있는 종교적 의식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면, 기독교 침례는 ‘유대’교의 할례를 대신하는 것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대주의”와의 힘든 싸움을 회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의 침례에 대한 인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침례와 믿음은 기독교인이 됨에 있어 각기 필수적인 요소이긴 하지만, 이 둘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능하고 작동하는 것입니다.
침례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언급은, 침례를 받는 것이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 사실입니다. 이러한 은유가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덕성을 갖추며, 그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칠십인 역>에서는 “의”나 “구원”이나 “영광”의 옷을 입는다는 표현이 여러 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하 6:41; 욥 29:14; 시 131:9, 16, 18; 잠 31:25; 사 51:9; 52:1; 61:10; 슥 3:3-5. 이와 반대로 “수치”의 옷을 입는다는 표현도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욥 8:22; 시 131:18; 막카비 1서 1:28.
이러한 상징은 사도의 다른 서신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신자들로 하여금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으라”고 권면하고 있으며(골 3:12; 살전 5:8),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권하는가 하며(롬 13:12),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모든 신자는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고전 15:53). 그러니까 초대교회는 침례 후보자들에게 바로 이러한 상징들로써, 침례 전과 이후의 삶에 대해서 강조하고 권면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26-27절의 사건들이 있은 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즉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26절), 침례를 통해서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된(27절) 결과가 무엇인가? 28절은 이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대답인 즉은 “옛 관계들이 사라지고, 새 관계들이 왔다”입니다. 사라진 옛 관계들이 무엇인지 <헬라어 성경>은 세 번의 반복되는 부정문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구분도)없으며”; “종이나 자유인의 (구분도) 없으며”; “남자나 여자의 (구분도) 없나니”(28절상).
이들 세 가지 구분은 나름대로 독특한 영역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구분은 서신의 주제와 가장 잘 일치하는 “유대주의”나 “명목론”과 관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주제는 서신의 주제와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습니다만, 그 자체로서 기독교 윤리와는 결코 무관할 수 없고 오히려 지대한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들입니다.
왜 하필 이들 세 가지 관계에 대한 언급이 초대교회의 신앙고백 속에 포함되었을까요? 정확히 가름하기는 어려우나, 아마도 ‘유대’인들의 기도문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기도 합니다. 즉 이들이 아침에 드리는 기도문 속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이방인이 아닌 자여 복 되도다; 노예가 아닌 자여 복 되도다; 여자가 아닌 자여 복 되도다.” 이방인과 노예와 여자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 바로 이런 ‘유대’적 편견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쉽게 가정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따라서 침례 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적이고, 사회적이며, 성적인 옛 관계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관계들이 시작되었다는 신앙고백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롭게 시작된 관계들이란 28절 후반에서 긍정문으로 드러내고 있는 내용을 말합니다: “너희는... (왜냐하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28절하). 사도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접속사 “왜냐하면”을 사용함으로써, 그의 논리가 앞의 것과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접속사는 26절상과 27절상에서 같은 이유로 한 번씩 등장한 바 있습니다.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너희”, “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등과 같은 표현은 26절에서 이미 친숙하게 된 것들입니다. 즉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이나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표현은 결국 동일한 의미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다만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방식과 관련해서 26절과 28절에서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믿음으로”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 비해, 후자는 “침례를 통해서”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3. 아브라함의 후손(29절)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관계”에 대한 사도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29절)
한 마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동시에 “약속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하여 사도는 다른 어떠한 새로운 논리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26절과 27-2절에서 각기 초대교회의 선언과 신앙고백을 인용한 터라, 29절은 그 바탕 위에서 내려지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의 조건절도 이러한 바탕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이들 전제는 신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 결론으로 “유대주의”의 주장은 다시 한 번 그 근거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율법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약속의 당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하나님의 아들. 야구의 투수나 축구의 골키퍼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잘 해 보아야 점수를 올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역할이 수비이므로 기껏해야 무실점으로 상대를 막아내는 것뿐입니다. 법률이나 시행령도 이와 비슷합니다. 원래 이들을 제정한 목적이 그것을 잘 지키는 자에게 무슨 상이나 표창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어기는 자를 처벌하기 위함입니다. 법을 잘 지켰다고 해서 상을 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잘 지키지 못해서 벌을 받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교통법규 하나만 해도 그렇습니다. 교통질서 아무리 잘 지켜보아야 상 받을 일 없습니다. 잘 지키다가도 어쩌다 한 번 실수라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범칙금 고지서가 집으로 날아듭니다.
율법도 그렇습니다. 율법의 목적은 사람을 살리는데 있지 않고, 죽이는 것입니다. 죄를 죄로 인식하게 하거나, 또는 죄를 더 짓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절망하게 하고 절망 가운데서 절규하게 만듭니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바로 이것이 그나마 율법의 순기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도저히 하나님의 절대적인 규범을 지킬 수 없다는 절망 가운데서 그분의 자비와 긍휼을 기다리고 간구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목적은 역설적으로 율법은 지킬 수 없는 것이라고 깨닫게 만드는데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우리 모두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롬 7:4상). 무슨 법이나 계약은 그 당사자가 살아 있을 동안에만 효력을 발휘합니다. 따라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죽는 것밖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점을 혼인관계를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그에게 매인 바 되어, 만일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로 정죄를 받게 됩니다만, 남편이 죽은 후에는 자유롭게 되어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않습니다(롬 7:1-3).
‘갈라디아’ 교인들도 이제 더 이상 율법의 요구를 쫓아 살 필요도, 또 그렇게 살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 모두는 “율법 아래에” 살면서 모두 죽었기 때문에 “율법 아래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앞 단락에서 내린 결론입니다(3:19-25).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명목주의”를 반박하는 소극적인 이유가 될 뿐입니다. 그보다는 더 발전적이고 적극적인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의 말대로 음부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사람의 목적은 죽는데 있지 않고 사는데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롬 7:4하). 이곳 <갈라디아서>에서 그의 표현은 더욱 강력하고 역동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런 신분의 변화가 가능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26절)
이 새로운 관계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사실을 단순히 “구원”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막연하고 무미건조합니다. <성경>은 구원에 대하여 우리가 보다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존 스토트’(J. Stott) 목사님은 이들 그림을 “화목”, “구속”, “칭의”, “화해” 등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이들 각각의 단어조차도 전체 그림의 부분을 담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화목”은 성전에서의 의식을 보여주며, “구속”은 시장에서의 상거래를, 그리고 “칭의”는 법정에서의 절차를, 그리고 “화해”는 가정이나 가족에서의 경험을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존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들 각각의 그림들은 전체 그림의 고작 같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더해가는 순서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화목”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구속”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자유를, 그리고 “칭의”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연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화목”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죄인을 향한 진노를 푸셨으며, “구속”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 살도록 은혜를 베푸셨으며, “칭의”를 통해서는 죄인인 우리에게 “무죄 선고”를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 단어 어디에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나 관계의 형성에 대한 이미지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더 이상의 무엇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화해”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용서 그 이상의 무엇입니다. 한 가족으로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로써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가까워 질 수 없을 정도의 친밀한 교제와 관계, 그리고 특권이 이 표현이 보여주는 생생한 그림입니다.
그러나 “화목”, “구속”, “칭의”, “화해” 등은 구원의 그림을 그려주는 상보적인 요소들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대속”이라고 부릅니다만, 사도는 이곳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적 행위” 때문입니다. 이 객관적 토대는 “우리의 믿음의 행위”로 인해서 나의 주관적인 체험이 되고 소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리해 봅시다.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더더욱 율법의 요구에 따라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론적으로나 체험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는 당연히 이전의 모든 관계를 불필요하게 하며 사라지게 만듭니다. 사도는 <고린도 후서>에서 이점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초대 교회가 침례 의식에서 사용하던 신앙고백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27-28절)
새로운 피조물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됨으로써, 이전에 내가 맺고 있던 그 모든 관계들은 인종과 사회적인 신분과 성적 차이에서 오는 그 모든 편견과 차별들입니다. 이들 세 가지 구분은 나름대로 독특한 영역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 구분은 서신의 주제와 가장 잘 일치하는 “유대주의”나 “명목론”과 관계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주제는 서신의 주제와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습니다만, 그 자체로서 기독교 윤리와는 결코 무관할 수 없고 오히려 지대한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들입니다.
왜 하필 이들 세 가지 관계만이 침례 시 신앙고백 속에 포함되었을까요? 아마도 ‘유대’인들의 기도문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기도 합니다. 즉 이들이 아침에 드리는 기도문 속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이방인이 아닌 자여 복 되도다; 노예가 아닌 자여 복 되도다; 여자가 아닌 자여 복 되도다.” 이방인과 노예와 여자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 바로 이런 ‘유대’적 편견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쉽게 가정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따라서 침례 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인종적이고, 사회적이며, 성적인 옛 관계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관계들이 시작되었다는 신앙고백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침례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26절) 있는 모든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는”(27절) 자입니다. 혹이나 믿음이 있다고 해서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든지, 반대로 침례를 받았으니 믿음이 생기겠거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침례는 내적인 믿음에 대한 외적인 증거(표징)가 됩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았다는 의미이며, 그분의 성령의 은사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는 또한 침례를 받는 것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은유로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덕성을 갖추며, 그처럼 행동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초대교회는 침례 후보자들에게 바로 이러한 상징들로써, 침례 전과 이후의 삶에 대해서 강조하고 권면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관계”에 대한 사도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29절)
한 마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동시에 “약속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그 모든 내용들에 대한 지극히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율법주의”는 물론 “명목론”도 그 터전을 모두 잃게 되었습니다. 즉 “율법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약속의 당사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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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과 토의
1. 본문은 “명목론”에 반박하는 두 번째 검증으로서, 첫 번째 것에 비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핵심 주제는 무엇인지 이를 토대로 설명해 봅시다.
2. 새로운 관계란 무엇이며, 그 토대는 무엇입니까?
3. 침례가 본문의 주제는 아니지만, 침례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 봅시다.
제 14과: 명목주의 반박(3)
14
명목주의 반박(3):
새 관계의 예시
(4:1-7)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4:7).
앞 단락의 주제나 결론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관계는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 됨이나 “그리스도로 옷 입음”이었습니다. 사회, 문화적으로 새로운 관계가 뜻하는 바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할 것 없이”, 그리고 “종이나 자유자나 할 것 없이” 모두 하나님과 동일한 관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제 본문에서 이 새로운 관계에 대한 설명을 보다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하나의 유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 유비의 출처나 역사가 분명치는 않으나, 그것이 전하려는 의도 즉 어떻게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단순 명료홥니다. 본문의 구조도 이런 유비를 중심으로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1) 유비; (2) 유비의 적용; (3) 유비의 결론.
본문 전체를 통해서 유비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한 쌍의 핵심어는 “종과 아들”입니다. 이 둘이 어떻게 구별되어야 하는지, 왜 혼용되어서는 안 되는지 등에 관한 이해가 독서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본문의 문학적인 기능은 하나의 유비(analogy) 또는 예시(illustration)를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그 예시란 명문 가문에서 유업을 이을 한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이 아들이 장성하면 가문과 유업을 잇게 될 것이지만, 그 때까지는 마치 종처럼 보호와 감독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이 비유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백성이 “율법 아래에서” 어린아이처럼 살다가(3:23-25)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3:26-29) 성인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본문은 3:23-26에서 다루고 있는 신학적 주제에 대해서 하나의 쉬운 예를 제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본문의 기능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일련의 용어라든지 비유의 배경이나 출처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본문의 구조조차 상당히 까다롭고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우선 본문의 1-2절 사이에 등장하고 있는 단어들을 살펴보면, “유업을 이을 자”, “어린아이”, “주인”, “후견인”, “청지기” 등이 모두 법률 용어들로서, 특히 사도가 2절에서 인용하고 있는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다”는 표현은 과연 어떤 법제도 하에서 시행되던 규정인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당시 ‘그리스-로마’ 시대의 법체계에서 따온 것인지, ‘로마’나 또는 ‘그리스’시대 단독의 법체계에서 가져온 것인지, 아니면 ‘셈’ 계열의 법제도에서 원용한 것인지 분명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초등학문”(3절)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애매모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아들의 명분” 즉 “양자 삼기”가 5절과 7절에서 각기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도 분명치가 않습니다. 그 간결하고도 힘찬 형식이나 내용적 특징 때문에 일종의 “선포”(케리그마)로 보는 이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 두 구절 안에 교차대구 형식으로 이루어진 “파송”과 관련한 내용도 있어, “파송 문구”로 보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때가 차매”라든지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등과 같은 표현은 ‘바울’이 즐겨 사용하지 않은 표현이며, 오히려 초기 유대 기독교인의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 표현의 출처나 기원과 관련해서 이런저런 추측을 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이 표현이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의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인지, 사도가 그것을 자신의 이야기로 다시 소개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메섹’에서 그가 직접 체험한 예수님에 대한 간증을 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이라는 신앙 고백의 일부를 인용하고 있는 것인지 단언할 수 있는 근거라곤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요약하자면, 본문의 기원이나 출처 그리고 본문 내의 여러 구절들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이 더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예시가 드러내고자 하는 전체적인 의미는 분명합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으로 미 성숙아였을 때는 모세의 율법의 보호와 관찰 아래 살아야 했으나, 이제 아버지가 정한 때가 차서 ‘그리스도’가 온 이후로는 “율법 아래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인으로서, 자유롭게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유비(1-2절)
사도는 앞의 두 단락에서(3:19-25; 26-29) 율법의 목적과 기능을 논하면서 “율법 아래 사는 삶” 이 무엇이며(3:26-25),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관계가 무엇인지(3:26-29)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 세 번째 단락에서는 이 두 주제를 하나의 유비를 통해서 그가 의미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비란 “유업을 이을 자”(상속자)에 관한 것으로서 이 단어는 이미 직전의 구절에서(3: 29) 등장한 바 있습니다.
1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1-2절)
이 구절에 따르면, 아들은 법적으로는 “유업을 이을 자”이며, 따라서 가정에 속한 모든 것들에 대한 소유주 즉 “어린 주인”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아직 “어린 아이”이며, 노예와 다를 바 없습니다. 명문대가의 상속자를 어린 아이 취급하는 것에 대해서 다소 불쾌한 감정을 가질 수도 있게 있겠으나, 이 유비가 보여주고 있는 바는 가족 관계에 관한 것으로서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즐거움 기분을 갖게 합니
<신약>에서 “어린아이”는 문자적으로는 뜻 그대로 “어린 아이”이지만(마 21:16), 상징적으로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마 11:25; 눅 10:21). 유대인 학자 ‘필로’는 이 단어를 “초보자” 또는 “덕목 훈련을 향한 순례자”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는 일반적으로 “미성숙한 신앙인”을 지칭하고 있습니다(고전 3:1; 13:11; 엡 4:14; 살 전 2:7; 히 5:13). 그러나 이곳에서는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어린 아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이 구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일련의 단어들, 즉 “유업을 이을 자”, “어린 아이”, “주인”, “후견인”, “청지기” 등은 다른 서신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이해하고 있는 바처럼 모두 법률적인 용어들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정에서 그 “어린 아이”가 “노예”와 별 차이가 없다고 한 사도의 언급은 예시를 위한 일종의 과장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도의 요점인 즉은, 이 둘은 어떤 형태로든 법이나 규율 아래 살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성인이 된 후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무구나 이런 과정을 거쳐 왔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유쾌한 것이었든 그 반대였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어려서 즉위할 경우 수렴청정(垂簾聽政)을 거치는 것과 유사하다 할 것입니다. 법적으로는 어린 왕도 분면 왕이긴 하지만 사회적 경험이나 성숙도에 있어 그는 여전히 어린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어린 주인”을 돌보고 감독하는 이를 “후견인”과 “청지기”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역할이나 기능과 관련해서 그 차이가 무엇인지 분명치가 않습니다. 두 단어 공히 어린 아이를 보호하고 감독한다는 공통점은 있어 보입니다만, 그 정확한 용례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도는 어디서 이런 유비를 가져온 것일까요? 이 두 단어가 동시에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기를 사도가 아마 당시 ‘로마’에서 통용되고 있던 “양육법”이나 또는 “양육 계약”과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즉 이들 법에 따르면 한집안의 상속자가 열네 살이 될 때까지 그 아이의 아버지가 임명한 “가정교사”의 감독 하에 두었다가, 그 이후 다시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집정관 위원회”와 같은 기관에서 임명한 “관리자” 내지는 “집정관”의 관리 하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시기적으로 이보다 더 오래된 제도를 염두에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상당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의 법 제도라든지 또는 ‘셈족’ 계열의 배경을 갖는 제도 등을 말합니다. 사도가 이곳에서 정확하게 어떤 법체계를 염두어 있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고대의 상속법은 모두 한 결 같이 상속이 그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유언자가 죽고 난 이후입니다. 사도에 따르면 본문에서 유언자는 하나님이시니, 그분의 죽음을 상정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일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위에서 소개한 바 있는 ‘로마법’에 따르면 상속자가 “가정교사”와 “집정관”의 감독이나 보호 하에 있는 기간과 시기가 정확하게 법으로 규정되어 있으며, 전자(前者)는 유언자가 직접 임명할 수 있지만, 후자(候者)는 시 집정관의 최종 승인 하에 임명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본문에서 사도가 예시하고 있는 바는 두 직분자 모두를 유언자인 아버지가 임명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들 때문에 혹자는 사도가 말하는 유산 상속에 관한 법률은 당시 보다는 오히려 후대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로 상속자의 나이에 대한 규정이나 감독관을 임명하는 방법이나 절차가 ‘로마법’과 ‘그리스 법’이 서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가 들고 있는 이 유비를 밝히기 위해서 당시의 상속법에 근거해서 재구성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을 수박에 없습니다. ‘로마’의 ‘져스틴’ 황제(주후 527-65)의 상속법만 하더라도 그의 재위 기간을 보드라도 ‘바울’보다 훨씬 이후에 제정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나 ‘셈족’의 유산 법들도 마찬가지로 사도 시대에 비해 오백 년 뒤에 제정된 것들입니다. 다시 한 번 요약하자면 사도의 비유는 적어도 세 가지 점에서 이들 법 어느 것과도 일치하고 있지 않습니다: (1) 유산 상속의 시기나 감독의 기간과 관련해서 막연하게 “아버지가 정한 때”라고만 언급하고 있다는 점; (2) 유산 상속의 시기나 감독의 기간과 관련해서 막연하게 “아버지가 정한 때”라고만 언급하고 있다는 점; (3) “후견인”과 “청지기”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 따라서 사도가 2절에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다”고 말할 때 정확히 그가 어떤 법 제도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어떤 법제도를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하고 잇든지, 자신이 전하려는 의도와 관련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유가 상징적이든 또는 실질적이든 간에 어떤 예시도 정확하게 그 상황이나 사건을 사실적으로 인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적용(3-5절)
유비의 궁극적인 목적은 적용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3절)
적용의 대상은 “우리”입니다. 사도는 <갈라디아서>의 여러 곳에서 이방인 기독교인을 향해서 “너희”라는 이인칭 복수형을 사용하다가 수시로 그 대상을 바꾸어 일인칭 복수형 “우리”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문맥에 따라 “우리”는 ‘유대인’을 지칭하기도 하고, 이방인과 ‘유대’인을 포함하는 전체 기독교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1) “우리”가 혈통적인 ‘유대’인을 지칭하는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2:15);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 하도다”(3:23-25). 한편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우리를 속량하셨으니…….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이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3:13-14)
본문에서도 3-5절에서 혈통적인 ‘유대’인을 지칭하는 듯한 “우리”를 두 번 사용하였다가, 6-7절에서는 이방인을 포함하는 기독교인 전체로 그 의미를 확대한 다음, “너희”라는 단어로 끝맺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노릇 하였다”는 표현은 3:23-25 사이에서 “초등교사” 관련한 표현과는 일종의 유사 반복을 이루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초등학문”은 “기본 요소” 또는 “기본 원리”등을 뜻하는데, 사도는 이곳에서 자신의 의도에 따라 이 단어의 의미를 기묘하게 뒤틀어 놓고 있습니다. 신약 시대에 성경 외의 다른 문헌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는 용례는 적어도 여섯 가지 정도가 알려져 있습니다: (1) 해시계의 바늘 또는 그림자; (2) 한 단어의 일부(문자나 음절), 알파벳의 문자들; (3) 우주의 성분 요소(즉 원소), 기본 성분, 기본 요소, 기본 원리; (4) 별이나 기타 천체들; (5) 신, 귀신, 천사 등과 같은 영적 존재들.
즉 그는 율법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가 올 때가지 자신의 백성들을 준비시키는 기본 요소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사도가 “초등학문”에 “세상”이라는 단어를 수식어로 덧붙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상은 그야말로 우주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만, 사도는 간혹 이 단어에 윤리적인 의미를 첨가하여 “영적인” 것과 반대되는 “육적인” 또는 “세상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참고: 5:13-26). <히브리서>에서는 “이 세상”이라는 단어를 “성소”를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히 9:2). 율법도 장막도 모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것들은 모두 실체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율법 아래서” 사는 것은 다시“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되돌아가자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초등학문”을 율법과 관련하여 사용할 때에는 율법의 저주와 감시 기능을 떠올릴 수 있겠으나, 사도는 이 표현을 이방인의 회심 이전의 삶과 관련해서도 사용하고 있음을 봅니다(9절). 이 경우에 그가 의미하는 바는 세상의 풍습이나 철학, 종교나 미신 등을 총칭하는 것일 것입니다.
사도가 ‘그리스도’나 구속 등과 관련하여 말할 때 종종 초대교회 당시의 신앙 고백이나 선언이나 선포 등을 인용하는 것을 봅니다(1:4;3:1,13,26, 27-28).이어지는 4-5절에서도 이들 고백이나 선포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 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송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5절)
이 두절은 구조적으로 복잡합니다. 우선 4절은 종속절 “때가 차매”라는 종속절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이어서 소위 “파송문”, 즉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 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식의 “파송문”은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롬 8:3-4; 요 3:14-17; 요일 4:9-10). 그리고는 두 개의 분사구분이 이어지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독특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두 개의 부사절로 단락을 마감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목적과 관련한 선언입니다. 구조적으로 볼 때 이 두 절은 일종의 교차대구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A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 사
B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B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A'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두 절에서 담고 있는 내용과 관련해서, “때가 차매”라든지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등과 같은 표현은 ‘바울’의 서신중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등장하는 것들입니다. 특히 이중 두 번째 표현은 서신의 주제와는 직접적인 상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이라는 표현과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구조적으로도 4절의 교차대구적인 형식에서 보면 오히려 없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이처럼 4-5절의 구조나 내용, 그리고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형의 등장 등으로 미루어 이 단락은 사도 자신의 창작물이라기보다는 초대교회 당시의 신앙고백이나 선포에서 그 일부를 취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자유나 양자됨과 관련하여 자신의 주장을 지지해 주는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문장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4-절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그 출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Longeneker를 참고 할 필요가 있습니다: Longenecker, 166-170쪽.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4절 후반의 두 분사구문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해서 독특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첫 번째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그 특성에 관한 대표적인 선언입니다. 이 선언만으로 동정녀 탄생을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 표현은 인간으로 태어난 아이에 관한 상투적인 ”유대“식 표현으로 받아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그는 진정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임에 분명합니다. 두 번째 표현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독특한 선언으로 강조하고 있는 바는, 그가 한 인간으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고, 율법의 저주를 죽음으로써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참고: 마 5:17-18; 갈 3:13; 빌 2:8).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왜 여자에게서 태어났으며, 율법 아래에서 태어났을까? 이어지는 5절에서 “…….하기 위하여”히나 로 시작되는 두 개의 부사절이 그 대답이 될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5절). 일반적으로는 접속사 “히나”가 기능하는 바는 목적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지만, ‘코이네 그리스’(Koine Greek) 어법에서는 이 용례를 보다 확장시켜 목적과 결과를 동시에 드러내기도 합니다. 두 부사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내용을 보드라도 목적인지 결과인지 뚜렷이 구별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유대’ 사상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즉 목적)은 결과와 마찬가지라는 인식이 보편적입니다. 하나님은 그 계획하시는 바를 다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인식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적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목적이자 동시에 결과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복음과 관련한 역설은, 하나님의 목적이 결과로서 나타나기 위해서는 인간의 대응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구절에 등장하고 있는 두 동사를 통해서도 이점이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속량하다”:(2) “얻다” 즉 전자(前者)는 하나님의 목적이자 행위이며, 후자(後者)는 인간의 대응(믿음의 반응)으로서 결과 즉 목적의 성채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믿음의 반응으로 얻게 되는 결과는 “아들(양자 )의 명분”입니다. 이 단어는 <칠십인 역>이나 <신약>에서<바울 서신>외에는 사용하지 않은 단어입니다만,<바울 서신>에서는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기독교인이 현재 누리고 있는 아들 됨(롬 8:15);(2) 기독교인이 미래에 가지게 될 부활의 육체(롬 8:23; (3) ‘이스라엘’이 과거에 가지고 있던 하나님과의 관계(롬 9:4) (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신자들(엡 1:5). 사도 당시 ‘유대’교 진영에서나 ‘유대 기독교’인 사이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사도 역시 이 동일한 단어를 기독교 복음과 관련하여 사용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이 이해해왔던 하나님과의 각별한 그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3. 결론(6-7절)
마지막 두 절은 본문 전체를 흐르는 “아들과 종”에 관한 유비의 결론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보다 엄밀하게는 7절을 그 절정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6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 사 아빠 아버지 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6-7절)
그러나 이 두 절은 본문의 나머지 구절들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검증 본문 전체(3:1-4:11)와도 그 연결이나 흐름이 어색한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우선 문학적 상수의 변화를 꼽을 수 있는데, 3-5절 사이에서 사용해오던 일인칭 복수 대명사 “우리”가 이곳에서 이인칭 복수 대명사 “너희”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일 수 도 있는데, “성령을 받은 일”과 “아들이 된 일”의 전후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이 두 사건 중에서 어떤 일이 먼저 일어났는지를 따지는 일이 신학적으로 무의미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반드시 그렇게 볼 일도 아닌 듯합니다. 왜냐하면 사도가 이 단락에서 두 사건을 등장시키고 있는 순서는 그동안 보다 넓은 맥락에서 이 두 사건을 다루고 있는 순서와는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동안 사도가 주장해 왔던 바에 따르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3:26) 이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에(3:2-5,14) 근거하고 있습니다. 즉 이들은 성령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사도는 <로마서> 8:15-17에서도 이 순서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6절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고 있습니다. 즉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성령을 받게 되었다는 논지입니다.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순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있어왔고, 교리적이고도 철학적인 관점의 차이에 따라 당연히 그 입장도 달랐던 것이 사실입니다.
왜 이처럼 6-7절에서 연결이 부자연스러우며 어색하게 느껴질까? 두 가지 의문점 중에서 우선 첫 번째 것, 즉 수신자가 “우리”에서 “너희”로 바뀌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를 담고 있는 4-5절의 본문은 그 출처가 사도 자신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신앙고백에서 인용 한 것이기 때문이며, 이 고백 문을 6-7절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자신의 논지로 적용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의문과 관련해서 사도의 신학적 입장은 적어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그에게 있어 “성령을 받는 일”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일” 사이에는 무슨 전후관계의 순서가 있기 보다는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기독교인의 체험으로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따라서 상황에 따라,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의 성격에 따라, 이 두 사건의 순서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사도는 3장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지휘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의 약속의 씨를 강조하면서 그 근거로 그들이 “성령을 받은 일” 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에 따르면 “성령을 받은 일”이 먼저 있었고, 그 후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 6-7절에서는 같은 결론에 이르면서도 그에 이르는 논리 전개 과정이 정 반대입니다. 즉 이곳에서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먼저 밝힌 후에, 성령이 이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을 받는 일”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일” 사이에는 무슨 전후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밀접한 상호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도가 6절에서 “그 아들의 영”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합니다. 이 표현은 ‘바울’ 서신 전체에서 이곳에서 유일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곳에서 이와 유사한 표현들이 등장하고 있는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롬 8:9);“아들의 영”(롬 8:15; “주의 영”(고후 3:17); “예수 그리스도의 영”(빌 1:19).
결국 이 두 표현은 기독교 신앙생활에서 두 단계에 걸쳐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그 순서가 어떠하든),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복합적인 구원의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사도가 성령을 강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만(참고3:2, 5, 14), 이곳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처럼 성령을 강조하는 목적이 어디 있을까요? 성령을 받으면 더 영적이 되거나 ‘카리스마’가 넘치기 때문입니까? 오늘날에도 이런 믿음이 여전히 교회 안에서 팽배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의 목적은 다른 데 있습니다. 본문에서 성령의 역할은 “증거” 내지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란 ‘그리스도’의 행위로 가능하게 된 “아들 됨”에 관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것을 교인들에게 증거하고 있는가 하면(3:2, 5), 이곳에서처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는 우리의 편에 서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 큰 소리로 외쳐 부릅니다: “압바, 아버지!”
여기서 “압바, 아버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새롭고도 친밀한 관계의 질적 수준이 어떠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압바”(!Abba)는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유래한 아버지를 뜻하는 “아브”(אב)의 강조형인 “아바”(אבא)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 단어를 ‘그리스’어 “아버지”(pathvr, 파테르)와 함께 이중 언어로 구성된 일종의 복합어로 사용한 듯합니다.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이런 전통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부를 때 동일한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가 하면, “주 기도문”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호칭을 이전에 존재 했던 법적인 관계의 차원을 넘어,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이루어진 개인적이고, 인격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7절에서 사도의 결론은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단순히 4:1-6절의 유비에 대한 결론일 뿐만 아니라, 앞 단락(3:26-29)에서 강조한 바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에 대한 결론이기도 합니다. 보다 확대해서 말하자면 7절은 사도가 3장 이후 지금까지 제시해 온 모든 논의에 결론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곳에서 수신자를 “우리”에서 “너희”로 바꾸고 있는 것도 이 결론적인 선언이 미치는 영향이나 결과가 집단적인 체험에서 보다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차원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결론은 무엇입니까? “나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자는 이제 하나님의 성숙한 자녀들입니다. 그들은 자유인이며, 그 자유를 누릴 책임과 권리를 동시에 지닌 자들입니다. 사도는 앞에서도(3:26) 이점을 분명하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만, 이곳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그 믿음에 충실하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7절의 결론이 차이를 보이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종과 아들의 차이에 관한 강조입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나 전통적으로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 신분 모두에서 찾고 있습니다만,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점입니다. 본문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종과 아들은 상호 구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닙니다. 종은 종이고 아들은 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는가 하면, 타인들로부터도 그렇게 불리기를 은근히 바라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도 사도가 이 차이를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듯도 합니다.
7절의 나머지 결론은 하나님의 유업에 관한 최종 선언입니다. 이 주제는 앞 단락(3:26-29)에서도 역시 마지막 결론으로 등장한 바 있습니다: 누가 진정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인가? 아들인가 종인가?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사도는 <로마서>에서도 같은 대답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롬 8:17장). 다만 본문에서 유업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받게 된다는 표현을 덧붙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유비. 한 나라에서의 왕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地下 萬人之上)”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 나라에 속한 모든 것들, 백성과 땅과 재물과 심지어 시간마저 그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그가 어려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받는 동안에는 이 모든 권리를 자기 마음대로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법적으로 어린 왕도 분명 왕이긴 하지만 사회적 경험이나 성숙도에 있어 그는 여전히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간섭이나 지휘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자기의 명령을 받는 신하와 다를 바 없습니다.
한 가정에서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도 이와 유사하다고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예가 실제 그 출처가 정확히 어디인지 분간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추측컨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전통이나 관행에서 가져온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가 그려주는 유비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명문 가정의 미성년기의 상속자는 명목상으로는 모든 소유의 주인이지만, 아직은 그 모든 것을 누를 수 없습니다. “후견인”이나 “청지기”가 그의 인격은 물론 재산까지 관리합니다. 그들은 그에게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고, 또 그를 지도하고 다스리기까지 합니다. 그는 규제 아래 있으며, 자유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종과 다를 바 없습니다. 또한 그는 사회가 정해 놓은 성인의 연령이 될 때까지 종의 신분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적용. <구약>의 ‘이스라엘’이 이와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상속자들이지만, 아직은 미성년자아ㅔ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약속은커녕 율법의 감시와 굴레 아래 종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대소사 간에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는 일이란 없었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감독과 지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율법은 그들에게 마치 세상의 초등학문과 같았습니다. 그것은 사도의 표현에 따르면 “약하고 천박한” 것이었습니다(9절. 그것이 “약하다”함은 아무런 능력이 없다는 것이요, “천박하다”함은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입니다(J. Sttot). 즉 그것은 아무런 축복도 약속도 그 자체로서 지니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주의”는 주장합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율법을 행하면 그것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유나 약속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유진 피터슨’(E Peterson) 목사님이 지적한대로, 자유나 약속은 싸워서 “빼앗는”(take) 그 무엇이 아니라 단순히 얻거나 “받는”(receive) 그 무엇이라고 말합니다. 자유는 그것을 쟁취하거나 빼앗으려 할 때 오히려 가진 자유마저 빼앗긴다는 역설을 <에덴 이야기>에서 배운 바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누리지 않고 주지 않았던 자유를 “취하려고”(take) 하다가 모든 것을 상실하였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불을 얻은 것이 아니라 “취하려고” 하다가 영원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빵과 포도주를 받는 기독교 성찬 예식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자유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E Peterson). 자유는 반항하거나 주장함으로써가 아니라 주는 자를 그냥 수동적으로 신뢰하기만 하면 됩니다.
사도는 또한 자유에는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때가 차매”가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때란 고대 사회에서 인정하는 일정한 나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때는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 때를 말합니다.
그리고 자유는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의 자유에 행동이 필요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 즉 “구속”(redeem)의 행동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1세기 ‘그리스’에서 종을 자유롭게 하는 과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떠한 종이 부유한 자유인의 관심을 끌어 그 자유인이 종을 자유롭게 하기로 결정했다면, 그 자유인은 성전이나 재단으로 가서 제사장에게 그 종의 몸값을 지불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선언을 합니다: “아폴로 신이 주인으로부터 이 종을 사서……. 이제 자유롭다.” 그리고 제사장은 몸값을 이전 주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종은 그 신분이 달라지는데, 이전에 그의 가치는 누구를 위해서 무인인가를 얼마나 잘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런 평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 사람은 무엇인가를 함으로써가 아니라 누군가가 됨으로써 귀중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E. Peterson).
그 관계란 우리가 하나님과 한 가족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끄래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잇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친밀함 속으로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구약> 어디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간혹 아버지로 부르기는 하지만, 가족 관계에서의 아버지, 또는 아빠로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늘 기도하실 때마다 일상 언어에서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부르는 것처럼 그분을 부르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할 수 있고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부를 때마다 경직되고 공식적인 의례 관계에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큰 실수를 저지를까 봐, 난처해질까 봐, 올바른 이름을 사용하지 않아서 쫓겨날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성령께서 아주 큰 소리로 외쳐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외칩니다. 이것이 성령의 가장 초보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입니다.
결론. “나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자는 이제 하나님의 성숙한 자녀들입니다. 그들은 자유인이며, 그 자유를 누릴 책임과 권리를 동시에 지닌 자들입니다. 우리는 종이 되기도 하면서 동시에 아들이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 두 신분은 상호 구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닙니다. 종은 종이고 아들은 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는가 하면, 타인들로부터도 그렇게 불리기를 은근히 바라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가 이 차이를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듯도 합니다.
누가 진정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입니까? 아들입니까 종입니까?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입니다. 사도는 <로마서>에서도 같은 대답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롬 8:17상).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동시에 “약속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서 종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아니면 율법이 정해놓은 규범의 특 속에서 완벽주의를 지향하며 살기를 원합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은 “명목론”에 반박하는 세 번째 검증으로서, 앞서 행한 두 번의 검증에 대한 예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예시는 무엇이며, 그 핵심은 무엇입니까?
2. 새로운 관계와 관련해서 성령의 역할이 소위 영적 은사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에 대한 당신의 느낌을 말해 봅시다.
3. 본문 전체를 관통하는 한 쌍의 핵심어는 “종과 아들”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종”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제 15과: 교인들을 위한 염려
15
교인들을 위한 염려
(4:8-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11절)
사도는 그의 검증 작업의 마지막을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한 염려와 걱정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앞에서 했던 바처럼(3:1-5) 수신자들을 향한 직접 화법을 통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 단락에 이르러 그동안 그가 대항해 왔던 두 주제 (1) 율법주의(3:1-18)와 (2) 명목주의(3:19-4:7)에 대한 검증 은 이제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분위기는 마치 법정에서 긴 법리 공방을 끝낸 변호사나 검사가 배심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최종 진술을 쏟아내고 있는 듯합니다. 배심원들은 대개 법정 논쟁과 관련해서 전문가들도 아니고, 설령 그렇다 하드라도, 사람의 속성 상 이성과 논리보다는 감성적 호소에 설득당하는 경우가 더 많은 법입니다. 사도 역시 그동안 “율법주의”와 “명목주의”가 옳지 않다는 사실을 성경적, 역사적, 논리적 이유를 바탕으로 열심히 반박해 왔습니다만, 이곳 최후 진술에서 수신자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쪽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신학자로서 자신의 신학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불타는 열정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목회자로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영혼을 향한 애타는 사랑과 근심 때문이라는 점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이제 검증을 위한 사도의 모든 논쟁과 공방은 끝났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수신자들을 향해서 직접적으로 자신의 지식과 지위가 아니라, 자신의 사랑과 염려를 들어내 보이고 있습니다. 즉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가슴을 열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3:1-5에서 그랬던 것처럼 본문 9절에서 다시 한 번 심문성(審問性) 질의를 던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3:1-5와 4:8-11의 두 본문은 그 형식에 있어서나 수사적 기법에 있어서나 “검증 본문”(3:1-4:11) 전체에 대한 일종의 수미상관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사도가 의도하는 바는 ‘갈라디아’ 교인들의 태도와 계획을 되돌리는 일일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긴 법리 공방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그들의 감성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 분위기도 차갑고 공적인 연설이나 강의 대신에 보다 인간적이며 감성적인 호소로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사도가 이처럼 직접 교인들을 상대로 가장 먼저 호소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이 회심 이전에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신)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하였더니(8절)
접속사 “그러나”가 이러한 대조를 분명하게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이전의 상태와 대조를 이루고 있는 현재의 모습은 직전의 단락 6-7절에서 묘사하고 있는바 그것일 것입니다:
6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6-7절)
비록 ‘유대’인과 이방인이 회심 이전의 경험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있겠지만, 두 집단 모두 한때는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구별이 없다는 것이 사도의 진단입니다: “종노릇하였다”(8절). ‘유대’인들이 율법의 종노릇을 하며 살고 있었다면, 율법 아래에서 ‘유대’인들이 종처럼 살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앞 단락에서 수차례 언급한 바 있습니다(4:1-2, 3).
이방인들은 본질적으로 신이 아닌 것들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이방인들의 예배와 관련해서 “소위 신들이라 부르는 것들”에 대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고전 8:5), 이방인들의 희생 제사도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에게” 드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10:20). 이 구 구절 자체만으로는 사도가 이방신이라는 것이 그 실체가 아예 없다고 보는 것이지 또는 마귀와 같은 존재로 보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은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8절에 따르면, 비록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런저런 많은 “신”과 “주”를 만들어 내고 있기는 하지만(고전 8:6), 사도는 그 실체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듯이 보입니다(참고: 고전 8:5). 그러면서도 사도는 “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고전 8:7)라고 말함으로써, 실제 이방신들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도 인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사도의 두 번째 호소는 무엇입니까? 그들의 현재 상태와 신분, 즉 그딜이 이 현재 누리고 있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이전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8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새로운 관계를 묘사하고 있는 6-7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9절과도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9절)
여기서 “알다”는 동사가 갖는 성경적 의미는 주로 “체험을 통해서” 인지하게 되는 경험적 지식을 말하는 것으로서, 동사의 시제는 완료형 분사로서 체험적 지식이 현재까지 미치고 있는 상태를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체험적 지식이란 앞 단락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라든지(3:26), 또는 “그의 아들의 영”을 갖는 것 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된 것과 관련해서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는 이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구절을 접속사 “~라기보다는”(μάλλον δέ, 말론 데)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서는 앞의 구절을 “~뿐만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뒤에 따라오는 내용이 더 중요할 것임을 예고해 주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이 모든 새로운 관계들이 하나님의 주도와 인간의 반응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도 아니고(율법주의의 주장처럼), 인간이 찾아나서 된 것도 아니며(신비주의의 주장처럼), 인간의 지식이나 깨달음을 통해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영지주의의 주장처럼). 오직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은혜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실이 이렇다면, ‘갈라디아’ 교인들을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입니까?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다시 이전의 상태, 즉 아무 관계도 없었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9절 후반의 수사적 질문이 바로 이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9절하). 이 질문은 하나님의 주도 아래, 그리스도의 행위와, 성령의 증거로, 나 역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과 새롭고도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이 관계를 끊고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역설입니다. 여기서 “돌아가다”(ἐπιστεϕϖ, 에피스트레포)는 종교적 배교 내지 회심을 말하는 것으로서(살전 1:9; 눅 1:16; 벧후 2:21-22), 본문에서 그 시제가 현재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갈라디아’ 교인들의 배교 행위가 현재 진행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들 교인들은 이제 율법의 주목하게 되었고, 사도는 그것을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이라고 경멸하고 있습니다. 앞에서(3절) 사도는 율법을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지칭한 바 있습니다만, 이곳에서는 이 단어 앞에 “약하고 천박하다”는 두 개의 수식어를 덧붙임으로써 율법의 본질과 기능을 보다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약하다” 함은 아무런 실질적인 효력이나 능력을 나타낼 수 없다는 의미이며, “천박하다”는 말은 그 자체로써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가 제공해주는 풍성함이나 다양한 색상의 꽃다발에 비해 율법이 제공해주는 텅 빈 광주리를 연상해 보면 쉽게 이 단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의 수사적 질문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9절하). 이 두 번째 질문은 새로운 차원의 질문이라기보다는 보충적인 것으로 보는 편이 더 나을 듯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다시 이전의 이방 종교로 되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긴 것입니다.
물론 사도가 이처럼 “유대주의”와 “이방 종교”를 거의 같은 수준의 종교로 매도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과격한 주장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것을 두고 이방신을 섬기는 것과 같은 수준에 두다니 말입니다. 어찌 할례를 받는 일과 종교적 절기를 지키는 것이 이방종교로 매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히려 이런 일련의 행위들을 통해서 이전에 이방인으로서의 관습이나 생각들을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사도에게 있어 그 어떤 행동도, 그 어떤 선의도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행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면 부질없을 뿐만 아니라, 악한 것일 뿐입니다. 그의 행위에 무엇인가를 더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불신이자 배교입니다.
그들이 더하고 있던 행위들은 예를 들어 어떤 것들을 말합니까? 아마 다음과 같은 종교적 행위들이 아닐까요? 비록 9절과 10절을 연결시켜주는 어떠한 접속사도 없지만, 코이네 그리스 문자에서 때로 강조를 위해서 앞 문장과의 연결 고리가 없이 독립적 절이나 구가 올 경우가 간혹 있다고 합니다.
10절은 이들 ‘갈라디아’ 교인들이 반복적으로 행하고 있던 일련의 종교적 행위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10절)
여기서는 소개하고 있는 네 가지 행위들은 9절에서 사도가 언급한 바 있는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을 대표하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정확하게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는 어렵습니다만, ‘유대’ 종교와 관련된 종교 절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날”(ἡμέρας, 헤메라스)은 아마 “안식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달”(μήνας, 메나스)은 매월 첫날을 기념하여 지키는 “월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며(사 66:23; 골 2:16; 민 10:10; 28:11; 대상 23:31), “절기”(καιρούς, 카이로스)는 유대인들의 유월절, 장막절, 그리고 “해”(ἐνιαυτούς, 에니아우토스)는 안식년이나 희년 등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 구절 자체만으로 현재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들 절기들을 다시 지키고 있는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미래의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사도가 우려하는 바도 바로 이점인지 모르겠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이점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11절)
서신의 벽두에서부터 시작된 사도의 긴 책망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1:6-4:11). 현재형으로 묘사하고 있는 자신의 현재 심경 즉 “두렵다”는 표현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배교와 배신의 행위가 시작은 되었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라는 암시를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그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열심히 노력을 쏟았지만 무의미하게 끝날지도 모를 가능성”입니다.
교훈과 적용
‘바울’은 위대한 변증가이자 신학자이지만 동시에 따뜻하고도 다정다감한 가슴을 지닌 목회자였던 것 같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 2부인 “책망”의 단락에서(1:6-4:11)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신학적 오류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를 책망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때로는 재판장의 자리에 서기도 하고, 검사의 자격으로 조목조목 증거를 제시하면서 피고를 꼼짝달싹 못하게 질타하는가 하면, 때로는 피고인의 변호사로서 눈물을 흘리며 배심원과 재판장을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제 2부의 마지막 단락인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사도의 모습이 바로 이 변호사의 모습입니다. 원고 측 검사는 말할 것도 없고, 재판장이나 배심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최종 진술을 쏟아내고 있는 장면이 바로 이곳입니다. 이 최후의 진술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또 다른 증거를 제시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또 다른 강력한 논리나 증거로 상대를 압도하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라면 사도는 그동안 할 만큼 했습니다. 즉 “율법주의”와 “명목주의”가 옳지 않다는 사실을 성경적, 역사적, 논리적, 체험적 근거를 바탕으로 열심히 반박해 왔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겪은 체험이란 무엇입니까? 이것은 어쩌면 이 신학적 공방에서 더할 수 없이 중요한 논쟁의 토대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체험이란 다름 아닌 “성령의 체험”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들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를 믿었을 때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기억상실증 환자라면 모를까 누가 이를 부인함으로써 자기당착의 모순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성령께서 증인이 되어 이제 그들이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었다는 것이 됩니다. 즉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새롭게 입양되었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약속의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체험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이며 특별한 것이라 보편타당한 원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겠지요. <성경> 어디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약속의 상속자라고 공언하고 있는가? 이 공박에 대해서 사도는 <성경>에서 한 예를 이끌어냅니다. 그 유명한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사실 ‘이스라엘’의 모든 약속이 바로 이 이야기를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약속의 시조로 부를 수 있는 근거는 그가 율법에 충실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기 때문이며,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주도적인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율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브라함’이 바로 이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니냐? <신명기>나 <레위기> 모두 ‘이스라엘’이 참된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열심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사도는 말합니다. 그들이 제시하는 성경 구절들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즉 제대로 된 “성경 해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사도는 이들 “유대주의자”들이 금과옥조로 받들고 있는 일련의 성경 구절들을 재해석해주고 있습니다. 예컨대, 율법 준수와 관련해서 그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며 살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역설적으로 바로 이런 깨달음을 갖게 하려는 것이 율법의 목적이자 기능이라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주장들이 사도의 독단적이고 독창적인 <성경> 해석의 산물입니까? 그렇지 않다고 그는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한 공동체가 있어왔다고 말합니다. 사도가 본문 여러 곳에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을 인용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예: 3:1, 13, 26, 27-28; 4:4-6). 그가 전했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실과 관련해서 사도 자신이 유일한 인물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에 초대교회에서 동일한 신앙과 신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제시하는 역사적 근거가 됩니다.
이처럼 사도는 “율법주의”와 “명목주의”가 옳지 않다는 사실을 성경적, 역사적, 논리적 이유를 바탕으로 열심히 반박해 왔습니다. 이제 더 이상 무슨 증거나 논리가 필요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설령 더 이상의 논리나 증거들을 제시한다 하드라도, 사람의 속성 상 이성과 논리보다는 감성적 호소에 설득당하는 경우가 더 많은 법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거의 매일 같이 일어났던 전쟁을 보면 인간의 이성이 큰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성이 감성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성의 지배를 받아왔다고 보는 편이 나을 듯싶습니다.
사도는 이곳 최후 진술에서 수신자들의 감성에 호소하는 쪽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신학자로서 자신의 신학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불타는 열정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목회자로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영혼을 향한 애타는 사랑과 근심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의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열어 보이고 싶은 것이지요. “내가 너희를 위해 수고한 것이 헛될까 하노라.” 그래서 이 절규는 그의 최후 진술로서 더 이상 적절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이렇게 울어줄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이렇게 울어줄 영적인 아들이나 딸이 있습니까?
연습과 토의
1. 본문은 문학적 기능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서신의 단락 구분에 대해서 다시 요약해 봅시다.
2. 본문의 분위기나 톤은 어떤 것입니까?
3. 나를 매일처럼 가슴 절이게 만드는 영적 자식이 있습니까? 아니면 나를 위해서 이처럼 절규하는 영적 애비가 있습니까?
제 16과: 개인적 호소
제 3 부
요 청
A. 권면(I)
유대주의에 대하여
(4:12-5:12)
<갈라디아서>에서 제 3부의 시작, 즉 “권면”이 어디서 시작되는가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이 있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처럼 논란이 많은 이유는 4장 이후 권면으로 볼 수 있는 명령들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예: 4:12, 4:21, 4:31, 5:1, 5:2, 5:7, 5:13 등).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서신의 제 2부는 4:12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이 구절에서 사도의 첫 명령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사실 4장에만 이 외에도 “사라와 하갈”의 우화를 소개하면서 네 번의 명령문이 더 나타나고 있습니다(4:27, 30). 이 중 처음 세 번의 명령은 “즐거워하라”, “외쳐라”, 그리고 “소리 질러라”인데 모두 <이사야서>(54:1)에서 인용하고 있으며, 나머지 하나는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로서 <창세기>(21:10)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네 번의 명령 중에서 네 번째야 말로 본 서신의 신학적 배경이나 주제에 걸 맞는 명령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후로 서신의 나머지 부분에서(5:1-6:10) 명령과 권면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1) 명령(5:1, 13, 14, 16, 6:1, 2, 6, 7); (2) 권면(5:25, 26; 6:9, 10). 따라서 4:12-6:10 전체를 서신의 권면 부분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본 교재의 <서론>에서 다룬 바 있듯이, ‘갈라디아’ 교회가 처해 있는 위기 상황은 이중적입니다. 그 하나는 “율법주의”와 “명목론”이며, 다른 하나는 “자유방임주의”(또는 “율법폐기론”)입니다. 전자(前者)가 “유대주의”라는 외부의 적이라면, 후자(後者)는 보다 교묘한 것으로서 교회의 태동기부터 잠재해 있었던 내부의 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자(前者)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이 누리는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하려는 시도라면, 후자(後者)는 그 자유를 개인의 탐욕을 위한 무책임한 “방임주의”로 몰아가려는 시도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안에 이 두 무리가 별도로 존재하면서 교회를 위협했다기보다는, 교회 전체가 이들 잘못된 신학적 교리에 의해 어느 한 쪽으로 휩쓸릴 위기에 처해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예컨대, “유대주의”의 가르침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 교회를 향해서 마치 모든 교인들이 다 그러하다는 듯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인이여”(3:1)라고 꾸짖고 있는가 하면, “자유방임주의”에 대해서도 “형제들아”(6:1)하고 부르면서 마치 교회 전체가 그런 위험에 빠져들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서신의 권면은 크게 이들 두 오류에 대한 지침과 훈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그 내용에 따라 다시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 권면 I(4:12-5:12): “유대주의”에 대한 경고와 권면
(2) 권면 II(5:13-6:10): “율법폐기론”에 대한 경고와 권면
제 2부의 4:12-5:12 본문은 형식 상 제 1부의 16-4:11 본문과 일종의 시적 유사 병행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도 흥미로운 관찰이 될 것입니다:
제 2부의 나머지 단락(5:13-6:10)에 대한 해설은 추후 해당 본문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16
개인적 호소
(4:12-20)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12절).
문학과 역사
본문의 분위기 내지는 사도의 기분을 묘사할 적절한 단어를 찾자면, “격정과 감정”, “비이성적”, “불합리” 등등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은 분석이 어려울 정도로 사도의 개인적 감정이 심하게 유입되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한 주석가의 말대로 사도는 이곳에서 모든 이성적 논의를 잠시 접어두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호소 및 간구와 함께 자신의 숨은 감정을 드러내고 있습니다(Burton). 그런 점에서 본문의 분위기는 직전 단락(4:8-11)의 그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곳에 이르러 감정이 북받쳐 자신에 대한 통제를 상실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잊어버린 듯합니다(Mussner). 백번 양보해서 본문에 담긴 내용이 그 자체로서 불합리하거나 일관성이 결여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처럼 서신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갈라디아서> 역시 서신의 일종으로서 당시 ‘헬라’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서신이 보여주고 있는 한 유형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즉 당시 사회에서는 서신이 지나치게 일반적이고 추상적이라는 인상을 피하기 위하여 개인적이고 감정이 실린 내용들을 도입하면서 그 분위기를 조절하는 기법을 사용하는 것이 통례였다고 합니다. 본 서신의 제 2부에서 보여주었던 내용이 지나치게 신학적이고 추상적인 것들이라고 한다면, 이곳에서 보여주고 있는 바는 사도 자신의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대응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처럼 사도의 격정과 감정으로 가득 차 있으며, 현대 독자들이 잘 알지 못하는 당시의 상황도 이런저런 암시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이 비합리적이라거나 또는 사도의 개인적인 감정이 비정상적으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만은 없을 듯합니다. 오히려 그는 이곳에서 서신의 국면, 즉 “견책”에서 “권면”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가 이전에 ‘갈라디아’ 교인들과 맺었던 관계를 회상시키면서 지금 그들 사이에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관계와 대조시키는 방식으로 권면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새로운 출발점에서 그가 하고 싶은 말은 한 마디로 “나처럼 되라”(4:12)입니다.
사도는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그의 수신자들을 방문할 계획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롬 15:14-32; 고전 16:1-18; 빌 2:19-30). 이곳에서는 20절이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4:20). 그러나 이곳에서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 당장 방문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엄밀하게 이 구절은 다른 서신에서 밝히고 있는 방문 계획과는 그 동기가 분명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 서신에서는 다른 곳에서처럼 공식적으로 이에 해당하는 단락이 없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신학과 신앙
1. 권고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서신의 제 3부는 사도의 신학적 논쟁이나 설교가 아니라, 개인적 호소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이전에 맺었던 친분 관계를 바탕으로 그들의 사랑과 충성심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싸움이 아니라 간구와 호소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권하노니(12절상)
사도는 여전히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로 부르면서 그들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동사 “권하다”(devomai, 데오마이)는 그 자체로서 “정중하게 요청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이곳에서는 친밀한 호칭, “형제들아”와 함께 사용함으로써 간절한 요청 내지는 부탁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요청하는 내용인 즉은 제 3부 전체에서 드러나고 있는 권면 내용이 될 것이며,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은 서신의 제 3부에 대한 표제어(caption)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가 주는 첫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12절상)
즉 “나와 같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그 자체로서 오해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독자들은 사도가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았으며,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처럼 산다는 것은 이전의 잘못된 모든 관계를 끊고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와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도 사도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관계로 출발을 했습니다만, 지금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유대교에서 요구하는 절기와 제사와 할례와 음식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 기독교 신앙생활을 완성시키는 것으로 착각하며 다시 그 이전의 관계로 되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이들은 사도가 걷고 있는 길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완전히 배교의 상태로 돌아버린 것은 아닌 듯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다”는 언급은 사도나 이들 교인이나 한 때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함께 걸어가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다”는 말의 의미가 애매모호하여 여러 가지 번역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성경> 본문에 따르면 아무런 동사도 없이 단순한 부사구 “내가 너희처럼”(κἀϒὼ ὡς ὑμεἷς, 카고 호스 휘메이스)이 됩니다. 이 구절이 “나와 같이 되라”는 주절(主節)에 대한 부사구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체적인 의미가 통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절(主節)에서와 같은 동사인 “되다”(become) 또는 “이다”(be)를 임의로 삽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동사의 시제(時制)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사뭇 달라질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어 번역에서는 이 구절이 과거 사도의 행동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동사 “되다”의 과거형 또는 완료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As I have become like you(are)”; “As I became like you(are).”
즉 이 구절이 사도의 현재의 모습을 말하는 것인지 또는 과거의 행동을 말하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전후 문맥을 볼 때, 이 구절은 사도가 이전에 취했던 행동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즉 그는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이방인과 동일시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 동기는 다음 구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내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 9:20-22).
그런데 12절은 사도의 다음과 같은 말로 또 한 번 갑작스러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12절하)
앞에서 사도의 관심사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지금 현재 자신처럼 되는 것인데, 느닷없이 과거의 경험으로 교인들을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처음 그들이 함께 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없는 현대 독자들에게는 그래서 이 구절의 의미 또한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몇 가지 가능한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전에는 나를 해롭게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원수처럼 대하고 있다”(16절 참고); (2) “너희가 나를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나 하나님을 해롭게 하는 것이다(1:6 참고)”; (3) “너희가 나를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이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으며 그들의 관계가 어떠했던지 알 길은 없으나, 이 구절이 주는 인상은 지금 사도와 ‘갈라디아’ 교인들은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운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2. 회상
이어지는 세절에서 이들 사이에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단초를 마련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사도가 이들에게 지난 일을 생각해 보도록 유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3, 15절). 사도가 상기시켜주는 첫 번째 기억은 다음과 같습니다:
13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13-14절)
이처럼 “너희도 아는 바라”(13절) 또는 “내가 증언 하노니”(15절) 등과 같이 과거의 사실을 회상시켜주는 언급이 “나처럼 되라”는 명령이나 권면에 곧바로 이어 등장하는 일은 사도의 서신에서는 이례적인 것은 아닙니다(참고, 고전 16:15; 살전 4:1-2). ‘갈라디아’ 교인들이 알고 있는 바란 무엇입니까? 이전에 ‘바울’이 그곳에서 전도 여행을 할 당시 그들과 누렸던 그 아름답고 즐거운 관계를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육체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δι ʹ ἀσθένειαν, 디아 아스데네이아)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육체의 연약함”은 분명 어떤 형태의 질병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추측컨대 이 질병은 그동안 그가 겪어야 했던 수없이 많은 수난들, 즉 감옥 생활이나, 뭇매나, 여러 번의 죽을 고비, 공회나 로마 당국으로부터 받은 여러 번의 태장(笞杖)에서 얻은 결과였을 것입니다(참고. 고후 11:23-25). 또는 그가 말하는 “육체의 가시”(고후 12:7-10)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그가 간질을 앓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가 과연 어떤 질병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자신이 밝히고 있지 않으므로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다만 이 질병이 ‘갈라디아’ 지역 선교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도가 ‘갈라디아’ 지역을 첫 선교지로 삼은 것이 이 질병 때문이었다는 것인지, 또는 몸이 약하여 다른 지방으로 갈 계획을 취소하고 원래 계획보다 더 오래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지역 선교에서 병을 얻어 휴식과 회복을 위해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는 말인지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원인이 무엇이었든 ‘바울’과 같은 사람에게는 실은 모든 것, 모든 상황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고 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십분 활용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F. Mussner).
사도는 14절에서 ‘갈라디아’ 교인들과 누렸던 그 아름다운 관계의 일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그러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14절)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번역하자면, “내 육체에 있는 너희의 유혹”(your temptation in my flesh)이라는 다소 어색한 표현이 됩니다만, 그 뜻은 분명합니다. 즉 사도가 가졌던 질병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있어 그를 배척하거나 경멸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것인데도, 오히려 따뜻하게 맞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자신도 그의 질병을 “사탄의 사자”라고까지 한 마당에(고후 12:7), 이들이 이를 개의치 않고 사도를 이처럼 맞이해 주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냥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차원이 아니라, 마치 하나님의 천사나 ‘그리스도 예수’를 대하듯 했다고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최대의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천사라든가 또는 ‘그리스도 예수’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교인들의 가슴을 향한 수사적 과장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의 증언과 회상(回想)은 계속됩니다. 교인들을 향한 두 번째 기억인 셈입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15절)
그의 두 번째 증언은 수사적 질문과 함께 시작하면서, 이전에 그들이 누렸던 관계를 새로운 차원에서 회상하고 있습니다. 수사적 질문은 한 마디로 “너희가 이전에 누리던 그 축복(행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눈이라도 빼 줄” 정도의 관계였다는 것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간이라도 빼 줄” 정도였다는 것인데, 이 역시 최상의 수사적 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진단
이처럼 더 이상 친밀할 수 없었던 그 관계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끊어질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16절)
이것이 사도가 내리는 첫 번째 진단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것이지요. 여기서 접속사 “그런즉”이 기능하는 바는 원래 하나의 독립 절을 이끌며 유추나 앞선 논지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역본에서 이 문장을 수사적 질문의 형식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개역성경>에서도 같은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분노에 찬 탄식 문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원수가 된 것 같습니다.” 사도가 그렇게 생각한다기보다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에게 보여주고 있는 태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시작으로 13-15절에서 보여주고 있는 아름답던 지난 시절에 대한 회상은 갑자기 중단되어버렸습니다.
그의 분노에 찬 두 번째 진단은 이제 “그들” 즉 “유대주의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17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17-18절)
그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그가 누구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 모두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 두 절에서 세 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는 동사는 “열심내다”(ζηλόω, 젤로오)입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누군가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분투하다”, “투기하다” 등입니다.
사도는 누구든, 무엇에든, 열심을 내는 것 자체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신도 그런 점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18절). 따라서 혹시 다른 사람들도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교인들의 호의를 얻고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대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서 질투하거나 시기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그 동기에 있다고 말합니다. 즉 이들 “유대주의자”들이 열심을 내는 것은 “이간시키기 위함”(ἐκκλείω, 엑클레이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와 그들 사이를 갈라놓고, 궁극적으로는 사도의 지도력을 거부하게 하고, 자신들의 가르침을 따르고 통제를 받게 하겠다는 것이 그 동기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진단은 사도 자신의 진정한 동기에 관한 것입니다:
19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19-20절)
이 마지막 진단에서 다시 한 번 갑자기 그 톤과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 진단에서 “유대주의자”들을 대할 때의 태도와는 당연히 다른 것입니다. 분노와 반대로 일관하던 모습에서 애틋한 사랑과 염려와 그리고 당혹감이 함께 묻어나오고 있습니다: (1) “나의 자녀들아”; (2) “다시...해산하는 수고를”; (3)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사도는 그의 서신 여러 곳에서 교인들을 향하여 “나의 자녀들아”(τέκνα μου, 테크나 무)하고 부릅니다(고전 4:14, 17; 고후 6:13; 12:14; 살전 2:7, 11; 빌 10). 교인들을 향한 그의 애틋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해산하는 어머니로 묘사하고 있기는 이곳이 처음입니다. 19절의 상징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사도가 자신을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산모”로 묘사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도 “그리스도라는 배아를 자궁 속에 잉태하여 그것이 자라 완전한 태아가 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어머니”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도가 기독교인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자”라든지(롬 8:29), 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자”(빌 3:10)라고 한 적은 있습니다만,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다는 표현은 상당히 이례적이며, 그가 자주 사용하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과는 상반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 안에서”이든 “그리스도 안에서”이든 모두 신자와 하나님 사이의 밀접한 인격적 관계를 말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제 사도가 처음도 아니고 “다시” 해산하는 아픔을 겪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갈라디아’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의 초보와 기본 진리를 다시 가르쳐야 할 정도의 필요성에 놓여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절에서 마지막으로 교인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는 것으로 자가 진단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심경과 함께 희망 사항도 밝히고 있습니다만, 이 희망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편지는 발신자의 존재를 대신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사도 역시 ‘갈라디아’ 교인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신에 “그들과 함께 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그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희망은 18절에서도 밝힌 바 있어, 대리자나 또는 편지의 전달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그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감정을 드러낸 것이기도 합니다. 그가 그렇게 하고 싶은 이유는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자신의 실망과 당혹스러움을 나타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이처럼 서신의 제 2부의 벽두에서 위기에 빠진 교인들을 향하여 권면과 호소와 진단으로 시작하였다가 그들을 향한 실망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닙니다. 이제 곧바로 ‘하갈과 사라’에 관한 우화적 해석을 시작으로(4:21-31), 복음 안에서 그들이 누리는 자유에 대한 강론으로(5:1-12) 직접적인 권면에 몰입하게 될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권고. 이 세상 어느 누가 “나처럼 살아라”고 감히 충고할 수 있겠습니까? 신화 속의 ‘나르시스’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누가 “내가 너와 같이 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상대에 대한 이해심과 배려가 이 정도라면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종종 이런 충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한 예로써,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빌 3:17). 과연 이 충고가 사도로서 그의 신학적 지식에 대한 우월감이나 또는 초인적인 선교 사역에 대한 자만심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자기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아는 사람도 없다는 확신 가운데서 나온 것일까요? 정 반대입니다. 오히려 ‘빌립보’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영지주의자”들이 이런 주장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과 영통하는 지식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무리가 또 있었습니다. 사도가 “할례당”으로 부르던 무리 즉 “유대주의자”들이었습니다. 사도는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오히려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고 하면 할수록 더 모르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온전히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3:12-14). 그래서 그는 “누구든지 온전히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자라면 마땅히 이런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자기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충고는 자랑이나 자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한 불가지론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학이나 신앙적 확신이 지나치면 이처럼 교회나 세상에 대해서 도움보다는 폐해가 더 커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도 같은 심정으로 같은 충고를 해 주고 있습니다. 이 역시 명령이나 충고라기보다는 호소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것입니다. 방대한 신학적 지식을 갖춘 머리만 가진 학자요 사도가 아니라, 자식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비이성적이 되어도 전혀 개의치 않겠다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그는 교인들을 “형제”로 부르는가 하면(12절), “나의 자녀들”로 부르고 있기도 합니다(19절). 이 호칭은 사도 ‘요한’이 즐겨 사용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사도는 심지어 스스로를 그들을 위해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19절).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고 있는 자유를 교인들도 누릴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비슷한 뜻을 피력한 바 있습니다. 왕은 그에게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말할 때, 사도는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이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행 26:28, 29). 그가 왕에게 말한 것은 달리 표현하면, “나는 당신이 나와 같이 죄수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나와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합니다.”가 될 것입니다. 이런 간절한 소원은 비단 사도가 그의 교인들을 향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다른 불신자들에게 가져야 하는 것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도는 자유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에 살던 이방인들이 그와 같은 자유를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처럼 되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입장에 서서 자신을 그들과 동일 시 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다른 서신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20-22).
신학이나 신앙적 확신이 지나친 사람은 결코 이룰 수 없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선교나 전도의 목표가 다른 사람을 우리와 같이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먼저 우리가 그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끌어올리기도 힘든데, 내가 내려가는 것은 실은 더욱 힘든 노릇이기에 사도의 이 말은 정말이지 우리를 거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과연 누군가를 전도하기 위하여 그의 입장과 처지에서 생각하고 행동해 본 적이 있을까?
회상. 사람들이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바가 “이해받고 싶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도는 자신과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전에는 서로를 이처럼 이해하고 용납해 주던 때가 있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처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 즉 “육체의 연약함으로” 그 지역에서 처음 복음을 전할 때에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할 정도의 “육체의 가시”를 사도가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이고 그의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서로가 상대방의 입장에 서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사도는 자신의 질병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그가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육체에 심어놓은 가시라고 칭한 바 있습니다. 아파본 사람이 아파하는 자의 심정을 잘 안다고 합니다. 이런 육체적 고통이 그를 겸손하게 한 한 요인이 되었던 것일까요?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도 그들의 편에서, 그들의 처지에 서서, 이해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혹시나 나의 간증이 이 사람들을 격려하기 보다는 넘어뜨리고 좌절케 하지는 않을까? 초자연적인 능력이나 은혜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거부하고 배척할 정도로 혐오스러울 수도 있는 질병 또한 함께 받았다는 사실도 전해야 하지 않을까? 이들에게 절기예배나, 십일조나, 새벽기도나, 철야예배를 강요할 수는 없겠지.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 우리네 속어처럼 사도는 추측컨대 그런 심정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인들의 마음은 움직였습니다. 이들은 사도를 배척하고 경멸하기보다는 오히려 측은히 여기고 용납해 주었습니다. <잠언서>는 이렇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 ‘갈라디아’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낮아지는 사도를 오히려 높여 그를 하나님의 천사인양, 그리스도 그 자체인양 사랑하고 받들어주었습니다. 분네 넘치는 예우를 해주었던 것입니다.
진단.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일입니다. 지금 이들은 사도를 마치 원수 대하듯 합니다. 사도가 올바른 진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로서의 권위를 인정했을 때 천사처럼 대하던 그들이 이제는 원수처럼 대하고 있으니, 사람의 마음이 이처럼 변덕스럽고 간사한 것인가 봅니다.
이들이 이렇게 돌변한 것은 가만히 들어와 감언이설로 꾀는 자들 때문입니다. 조강지처(糟糠之妻)와 죽마고우(竹馬故友)는 버리는 법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도를 버리고 첩이나 새로운 친구를 사귀려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동기도 모른 채 말입니다. 대개 새로 들어온 자들의 동기는 한 가지입니다. 첩은 돈을 바라고, 새 친구는 오래 된 사랑을 훔치려 듭니다. ‘압살롬’이 그의 아비에 대한 백성들의 사랑을 훔치려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교인도 자신의 목회자에게 싫증이 나기 시작할 때, 이단들의 가르침이 달콤하게 들립니다. 필자 역시 필자가 인도하는 성경 공부에 다른 교회 교인들이 간혹 와서 은혜를 받았다며 좋아할 때, 내심 걱정이 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교인의 수평이동을 필자가 스스로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처럼 말입니다. 필자 때문에 그가 속한 교회의 목자를 비난하거나 혐오하게 되면, 나 자신이 “유대주의자”들의 행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자괴감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셀 모임”이나 또는 “성경 학교”가 바라는 유일한 목적이나 동기가 있다면, 사도가 자신에 대해서 진단하고 있는바 진정한 동기 그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설령 기존 교인이 우리의 모임이나 학교에 참석한다 할지라도, 그를 자신이 속한 교회에 돌아가서 그 교회를 섬기는 것을 돕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넓게는 지금 사도가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해산하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그가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역시 어머니가 되어 해산하는 수고를 거치게 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각 사람을 가르쳐 그 또한 가르치는 자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에서 사도의 심정을 느끼게 하는 구절을 발견하고 음미해 봅시다.
2. 본문의 분위기나 톤은 어떤 것입니까?
3. <우리 교회>의 “셀 모임”이나 “성경 학교”의 진정한 동기와 목적에 대해서 나누어 봅시다.
제 17과: 사라-하갈 알레고리
17
사라-하갈 알레고리
(4:21-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31절).
오늘날 <성경> 해석학의 입장에서 보면 ‘사라-하갈’에 관한 본문의 해석은 “우화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의 백미(白眉)로 꼽을 만합니다. <성경> 본문에 대한 이런 식의 접근 방식은 해석적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것은 분명하지만, ‘유대’적 전통과 배경을 가진 자라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성경>은 항상 바깥으로 드러난 의미 외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랍비’의 전통에 따르면 <성경>에는 적어도 네 가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문자적 의미입니다(Peshat). 두 번째는 (성경 기자가) 의도한 의미입니다(Remaz). 세 번째는 탐구와 연구를 통해서 유추될 수 있는 의미입니다(Derush). 그리고 마지막이 우화적 의미입니다(Sod). 이들 네 의미의 첫 글자를 따면 PRDS가 되는데, 이것은 “파라다이스”(Paradise)의 자음만을 묶어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이 네 의미를 모두 획득한 사람은 천국의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네 번째 즉 우화적 의미야말로 최고의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서 ‘랍비’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이끌어내려 했던 의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성경>의 어떤 이야기에 대해서도 이면의 숨은 뜻, 즉 우화적 의미를 이끌어내려 시도했고, <아브라함 순환>의 일부로서 익히 알려져 있는 “사라-하갈” 이야기도 ‘랍비’들 사이에서는 이미 그 우화적 의미가 널리 알려져 있었을 것이며, ‘바울’도 이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이곳에서 그 동일한 이야기를 다시 소개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익히 알려져 있는 의미를 단순히 인용하기 위함입니까? 나름대로 독창적인 재해석을 하려 함입니까?
그는 이곳에서 유대주의자들을 향해서 “대인입증”(對人立證, argumentum ad hominem) 방식이라는 논증법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대인입증” 방식이라 함은 상대방의 성격이나 지위, 처지, 사상 등을 끌어들여 자기 논리를 정당화하는 논쟁 방식을 말합니다. 사도는 앞에서도 이 방식을 사용해서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한 바 있습니다만, 참고: 3:15-18에 대한 주석.
<사라-하갈 이야기>에 대해서도 기존의 우화적 해석을 뒤집어 나름대로의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유대주의”가 바라보는 이 이야기의 우화적 의미는 무엇이며, 사도는 이를 어떻게 재해석하고 있습니까? 바로 이점이 본문을 읽는 독서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본문의 기능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다양한 논란이나 주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새롭게 시작된 권면과 호소의 한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 지배적인 듯합니다. 이와는 달리 본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사라-하갈 이야기>는 사도가 논쟁을 전개하는 중에 하나의 예로써 나중에 추가로 도입한 것이라는 입장이 널리 펴져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입장에 따르면 본문은 제 3부가 아니라 제 2부에 속해야 할 것입니다.
이 본문 속에는 “(내게) 말하라”는 문장을 포함해서 모두 네 번의 명령문과 두 번의 호칭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네 번의 동사는 모두 사도 자신의 명령이 아니라 <구약> 본문에서 인용한 것들로서, “즐거워하라”, “소리 질러라”, “외치라”, 그리고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입니다. 그리고 두 번의 호칭은 “형제들아”입니다. 본 서신의 제 3부에서 본문의 위치나 형식 등은 앞부분에서 이미 이와 유사한 사례를 관찰한바 있습니다:
이 도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사도는 두 번의 경우에서 모두 소위 “대인입증” 논증법을 통해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성경 해석 방식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이해하고 있는 방식은 그것이 두 단계에 걸쳐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 첫 단계가 초보적이며 원시적인 단계라고 한다면, 두 번째가 보다 발전되고 심화된 단계라는 이해가 그것입니다. 예컨대, “사라-하갈” 이야기에 대한 이들의 이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첫 아들이긴 하지만 ‘이삭’만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아들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삭’의 계열을 따라 법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유대’민족과 ‘유대’ 국가를 대표하는 자들이며, ‘이스마엘’은 ‘유대’민족이 아니며 당연히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 “유대주의자”들의 판단 근거는 누가 진정한 ‘유대’인인가 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바울’의 복음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먼저 소개되고 선포되긴 했지만 그 질적 수준에 있어서는 초보적이고 원시적인 것으로서, 비유로 하자면 첫 아들 ‘이스마엘’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신들의 가르침은 비록 ‘바울’보다는 뒤늦게 소개되긴 했지만 진정한 계시를 대변하는 것으로서 둘째 아들 ‘이삭’에 비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의 “대인입증” 방식은 이들의 알레고리를 그대로 채택하면서 동시에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즉 그는 일단 전통 “유대주의”적 해석에 따라 ‘하갈’과 ‘이스마엘’을 노예와 육체적 출산을 따라 난 자들로, 그리고 ‘사라’와 ‘이삭’을 자유와 약속을 대표하는 자들로 일단 받아들입니다. 그런 다음 비유를 더욱 확대하여 ‘하갈’과 ‘이스마엘’은 ‘시내’ 산과 ‘예루살렘’을 대표하고 있고, ‘사라’와 ‘이삭’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시온’ 산을 의미하는 것 같음)을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가 주장하고자 바는 그가 전하는 복음이 아니라 “유대주의”야말로 ‘이스마엘’과 ‘하갈’의 계열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현재 “땅에 있는 예루살렘”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자들이라는 것이지요. 사도가 앞에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믿음과 칭의의 성경적인 사례로 채택하였다면(3:6-9), 이곳에서는 <사라와 하갈 이야기>를 자유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마련하면서 교인들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과 신앙
1. 호소(21절)
사도는 그 유명한 <사라-하갈 알레고리>를 “내게 말하라”고 명령하고 호소함으로써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22절)
이 구절은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앞 단락과도 적절한 연결을 꾀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가 주목하고 있는 대상은 단순히 일단의 “유대주의자”들만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 모두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3:1). 이들 교인들은 지금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것이지 완전히 율법의 삶으로 아직 돌아간 상태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율법 아래에” 산다는 것은 “율법주의”와는 다르다고 거듭 밝힌 바 있습니다. 즉 이것은 “명목주의”로서, 기독교인으로서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바 제반 의식이나 절기들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에서 두 번째로 등장하는 “율법”은 앞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 구절이 이어지는 22절의 “기록된바”와 연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넓게는 <구약> 전체를 지칭하거나 또는 좁게는 <오경>을 지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성경을 듣지 못하였느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들음” 즉 “성경을 들음”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단순히 “귀로 듣는다”는 의미 이상입니다. ‘유대’인이라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토라> 즉 율법을 크게 낭송하는 것을 듣습니다(행 15:21).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그것을 내면화 하고, 묵상하고, 이해하며, 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서>에서도 “보는 것”이나, “듣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나, 그리고 “회개하는 것” 등을 모두 동의어로 처리하고 있습니다(사 1:10; 6:9-10). ‘이스라엘’의 가장 으뜸가는 신앙고백 즉 “쉐마”도 이 “들음”의 행위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던지는 질문, “네가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인즉, 이들 교인들이 진정으로 율법의 말씀을 이해했다면 “명목주의”의 삶으로 되돌아갈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호소이자 주장인 것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앞서 그가 밝힌 대로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한시적으로 “몽학선생” 즉 초등 교사의 역할을 한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2. 성경(22-23절)
그가 들려주는 <율법>의 말씀은 그 유명한 <사라-하갈 이야기>입니다:
22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22-23절)
사도가 <성경>을 인용할 때마다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 바로 “기록된 바”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는 단순히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아브라함 이야기> 일부를 요약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일탈(逸脫)을 통해서 우리는 사도가 바야흐로 “대인입증”의 논쟁을 시작하겠다는 암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즉 그는 <사라-하갈 이야기> 이야기와 관련해서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바를 먼저 드러내어 설명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논점을 일단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 연후에 상대방의 입장을 근거로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펼쳐 보이겠다는 의도인 것이지요. 그는 이곳에서 “여종”과 “자유 있는 여자”, 그리고 “육체”와 “약속”을 뚜렷하게 대비시키고 있습니다만, 이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의 해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다. 추측컨대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들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라-하갈 이야기>에 대해서는 “유대주의자”들을 통해서 익히 들어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요점은 무엇이었을까요? 누가 ‘이스마엘’이며 누가 ‘이삭’이라는 말입니까? “유대주의자”들은 강변합니다. 자신들의 방식대로 따라 살지 않는 모든 이방 기독교인들은 비록 ‘이스마엘’의 후손은 될지언정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 즉 ‘이삭’의 후손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점에서 <사라-하갈 이야기>는 “율법주의”나 “명목주의”를 위한 우화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에 대한 사도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사도 역시 이들과 한 가지 점에 있어서는 동의하고 있는 바가 있습니다. 즉 ‘하갈’은 여종이고 ‘이스마엘’은 육체의 자식이며, ‘사라’는 자유 있는 여자이며 ‘이삭’은 약속의 씨앗이라는 사실 말입니다(23절).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해석, 즉 “대인입증”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것일 뿐입니다.
3. 풍유(24-27절)
과연 그는 이어지는 네 절에서 <사라-하갈 이야기>를 풍유(諷諭)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확대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24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24-27절)
우선 그는 25절에서 <사라-하갈 이야기>를 “비유”(ἀλληϒορία, 알레고리아)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23-24절에서 언급한 “여종”과 “자유 있는 여자”가 누구인지 밝히면서, 동시에 이들에 대한 사도 자신의 풍유적 해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25절에 대한 해석은 만만치 않은 것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1) 과연 “하갈”이 처음부터 25 절의 일부였을까?; (2) 만일 그렇다면 25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해서, <마소라 사본>을 비롯해서 초대교회 교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있습니다. 당연히 현존하는 대부분의 사본이나 번역본에서도 “하갈”을 본문에 포함시키기도 하고 또는 생략하기도 합니다. 참고로 거의 모든 영어 번역본이나 한글 성경에서는 “하갈”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만약 “하갈”을 생략한다면 25절은 다음처럼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내’는 ‘아라비아’에 있는 산으로서...” 또는 “‘시내’ 산은 ‘아라비아’에 있으니....” 지금 이곳에서 지리에 관한 이 정보가 그렇게도 중요한 것입니까? 왜 사도는 이처럼 중요한 논쟁에서 별로 중요할 것 같지도 않은 지질학적 정보를 느닷없이 삽입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대답은 사도는 지금 ‘시내’ 산이 약속의 땅이 아니라 이방의 땅 ‘아라비아’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설명은 <성경>에서 유사한 예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스데반’도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그 기원을 약속의 땅에서 멀리 떨어진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행 7:2-36).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의 구속의 역사를 약속의 땅이 아닌 먼 이방의 땅에서 시작하셨는지를 보여주는데 있는 듯합니다.
다소 무리한 대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갈”을 집어넣은 것이 후대 편집자의 의도적인 본문 변조라고 할지라도, 이것이 본문 내에 있는 것이 없는 편보다는 훨씬 더 나아보입니다. 사도의 논리 전개에 있어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도는 다음 질문에 대한 답변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갈’을 ‘시내’ 산에 비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아무리 그럴 듯한 대답을 한다 하드라도, ‘하갈’을 ‘시내’ 산에 비유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 다양한 설명들이 알려져 있습니다. 예컨대, ‘아랍’어로 ‘하갈’은 “바위” 또는 “절벽”을 의미하므로 이 단어를 산과 연계해서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아랍’어로 ‘하갈’의 첫 자음 “ㅎ”(h)는 ‘히브리’어의 “ה”(h)와는 그 발음이 유사하기는 하지만 상호 대응관계에 있지는 않기 때문에 이런 식의 설명은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일단의 학자들은 앞에서처럼 이 두 사이의 관계를 언어학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바울’ 자신의 지적∙사상적 배경에서 찾으려 하소 있습니다. 즉 ‘바울’과 같은 ‘유대 랍비’에게는 <성경> 구절들에 대한 풍유적 해석은 지극히 일상적인 것으로서, 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피상적인 관계에 있는 것들도 상호 연계시키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아라비아’ 사막은 ‘유대’ 전승에서도 ‘이스라엘’과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도 한데,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이라든지, ‘시내’ 산 율법 전수 등이 그러합니다. ‘바울’도 개인적으로 ‘아라비아’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곳으로서, 그가 회심 이후 수년을 혼자서 복음이나 율법의 의미를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보낸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그가 ‘아라비아’의 ‘시내’ 산을 율법과 연관 짓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며, 더 나아가 그가 지금 다루고 있는 자유와 종의 주제와 관련해서도 <사라-하갈 이야기>의 풍유를 더욱 확대해서 여종 ‘하갈’을 ‘시내’ 산으로까지 비약시키고 있는 것도 사도의 독창적인 상상력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R. N. Longernecker).
궁극적으로 사도 자신의 독창적인 상상력이 빚어낸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 ‘하갈’을 “지금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면서 풍유의 범위를 비약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사라-하갈 이야기>에 대한 사도의 이해와 해석이 전통적인 ‘유대’ 식의 그것과 정면으로 출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통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갖는 의미는 실로 중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속사는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사라와 이삭 이야기>로 이어지고, 다시 ‘시내’ 산에서 주어진 <모세의 율법>을 거쳐, 지금 있는 ‘예루살렘’에서 그 정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즉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그 성전은 장차 올 ‘이스라엘’의 모형이자 희망의 상징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가 바라보는 ‘예루살렘’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구속사에서 사도의 핵심어는 “자유”와 “종”입니다. 그에게 있어 지금 있는 ‘예루살렘’은 율법과 “유대주의자”들을 자녀로 가지고 있는 그 어머니 ‘하갈’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사라’는 당연히 장차 올 ‘예루살렘’을 상징해야 함이 당연할 것입니다. 사도는 이를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26절). 사도는 이 관계를 25-26절에서 교차대구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두 절은 각각 전체 구조의 절반을 이루고 있기는 합니다만, 완벽한 대칭 구조에서는 다소 벗어나고 있습니다:
A ‘하갈’
B ‘시내’산
C 종
D 지금 있는 ‘예루살렘’
D1 위에 있는 ‘예루살렘’
C1 자유
B1 (‘시온’ 산)
A1 우리 어머니
‘유대’ 전승에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또는 하늘의 ‘예루살렘’)이라는 개념은 아주 다양하면서도 풍성한 배경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개념은 인류 역사의 완성 내지는 하나님의 구속의 절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말의 날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도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성”(또는 하나님의 성)에 대한 언급은 <구약>에서 이미 그 씨앗을 배태하고 있기는 합니다만(시 87:3; 사 54), 이후 ‘유대’ 지혜문학이나 묵시문학 등에서 보다 발전된 형태의 종말론적인 소망과 관련해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R. N. Longernecker, 214쪽.
그러나 <신약>에서는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그리스도’의 통치라는 기독교적 소망과 관련해서 “새 ‘예루살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히 11:10, 14-16; 12:22; 13:14; 계 3:12; 21:2). 이들 <신약>의 구절들에 따르면 옛날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바라던 “새 예루살렘”은 지금 현재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성취와 시작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자유자”, 보다 구체적으로는 “우리 어머니”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어머니”가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사라’를 암시하고 있음은 명약관화(明若觀火) 한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인 ‘사라’가 누리던 지위(22-23절)는 ‘갈라디아’의 기독교인들의 것이 될 것이며, 이점에서 ‘사라’ ‘갈라디아’ 교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의 영적인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25-26절의 교차대구는 완벽한 대칭 구조는 아닙니다. 예로써, 25절의 ‘시내’ 산과 대칭을 이룰 다른 산(山)이 26절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약의 다른 곳에서 두 산에 대한 대조가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히 12:18-22). 이처럼 ‘시내’ 산을 하나님의 계시의 산으로, 그리고 ‘시온’ 산을 종말론적 구속의 산으로 대조시키게 된 것은 제 2 성전 시대 이후 비롯된 민족적 ‘유대교’의 발흥에서 그 발단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사도는 이곳에서 그러한 대조를 인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만일 그가 ‘시온’ 산을 ‘시내’ 산에 대조되는 개념으로 소개한다면 오히려 독자들이 더 혼란스러워하고, 결국 자신의 논지를 펼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요? ‘유대’인들에게 ‘시온’ 산은 실은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시내’ 산이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신 “역사적인 산”이라면, ‘시온’ 산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마지막 날에 그의 나라를 세우실 “종말의 산”으로서 다름 아닌 지금의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해를 가진 교인들에게 ‘시온’ 산을 지금의 ‘예루살렘’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대조시키게 되면 혼란만 더 가중시키는 것이라고 사도는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아무튼 사도는 27절에서 ‘시온’ 산의 영광과 관련하여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성경적 근거를 <이사야서>로부터 인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사 54:1). <헬라어 성경>에서 27절이 접속사 “왜냐하면”(γάρ)으로 시작하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는 종말론적 예언으로서 장차 도래할 “시온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라’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면, 이 둘은 모두 이방인이고 ‘유대’인이고 가릴 것 없이 모든 기독교인들의 어머니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는 여기서 ‘사라’를 “잉태하지 못한 자”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칠십인 역>에서 <창세기>(11:30)나 <이사야서>(54:1) 모두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에 착안한 때문일 것입니다. 당연히 “잉태하지 못한 자”는 “예루살렘”이며, 자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내”이기도 합니다(사 54:11-12). 이 여인 즉 ‘예루살렘은 자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 ‘야훼’께서 다시 그녀를 일으켜 세우실 것이며(사 54:11-12), 그분께서 직접 그녀의 자식들을 가르칠 것이기 때문입니다(사 54:13).
<사라-하갈 이야기>에 대한 사도의 우화적 해석에 따르면, ‘사라’는 ‘갈라디아’ 교회의 이방인 교인들뿐만 아니라 ‘유대’ 기독교인들의 영적인 어머니입니다. 왜냐하면 ‘사라’는 ‘아브라함’의 자유인 아내로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자유로운 약속의 자녀들을 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사도의 해석에 따르면 ‘사라’의 자녀들이 남편 있는 ‘하갈’의 자녀들보다 더 많게 될 것입니다. ‘사라’가 우리 어머니가 되는 이유는 그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서 종의 자식들을 데리고 있는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대립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에게 있어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말에 ‘갈라디아’ 교인들이 경험하게 될 현실이며,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 종말론적 상황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4. 적용(28-31절)
자신의 해석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마련한 사도는 이제 그의 논리의 당연한 귀결 즉 적용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28절)
즉 “유대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사라’와 ‘아브라함’의 자유인 자녀들이며,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자녀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으로 대표되는 자들이며, 당연히 모두 한 형제로 불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다름 아닌 ‘갈라디아’ 교인들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29절).
그 체험이란 이전에 ‘이삭’이 ‘이스마엘’로부터 받았던 박해와 조롱과 같은 체험을 말합니다. 참고로, <창세기>에서는 ‘이스마엘’이 ‘이삭’에게 주었다는 박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만, <탈굼 성경>이나 기타 여러 랍비 전승에서는 이에 관한 기록들이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사도는 이곳에서 <이삭과 이스마엘 이야기>를 현재 ‘갈라디아’ 교인들이 겪고 있는 체험에 대한 일종의 “모형”(type)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체를 따라 난 자”와 “성령을 따라 난 자”는 각기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제 마지막 두 절의 권면을 통해서 <사라-하갈 이야기>에 대한 우화적 해석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0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30-31절)
그가 현재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에 적용시키며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창세기>에서 ‘사라’의 무자비한 요구 사항입니다(창 21:10). 다만 ‘사라’의 이런 요구 사항을 ‘사라’가 했다고 말하지 않고 <성경>이 말하고 있다고 하는가 하면, 본문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본문 변조를 꾀하고 있기도 합니다: “내 아들”이 아니라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 아마도 이러한 요구 사항은 이전에 “유대주의”들이 반대로 ‘바울’ 사도를 내쫓으라고 하면서 동일한 성경 본문을 인용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사도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대인입증” 식의 논증을 통해서 동일한 이야기를 권면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권면의 핵심 요지인 즉은, 율법의 구속과 복음의 자유는 공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 몰래 숨어들어 온 “유대주의자”들과 “명목주의자”들을 교회 공동체로부터 추방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31절은 <사라-하갈 알레고리>의 결론이자 3:10-4:11 사이에서 사도가 전개한 모든 논의의 대 결론으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누구나 인정할 수 있듯이 본문은 그 내용에 있어서나 수사적 방법에 있어 <갈라디아서> 내에서 가장 어려운 곳으로 평가받을 만합니다. 첫째로,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오늘날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는 낯선 <구약> 본문에 대한 우화적 해석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이스마엘’, ‘사라’, ‘하갈’, ‘시내’ 산 ‘예루살렘’ 등이 이곳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사도가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특별한 논쟁 방식 즉 “대인입증”으로 불리는 논쟁 방식 때문입니다. 이는 당시 ‘유대 랍비’들 사이에서는 흔한 것이었습니다만,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방식입니다.
호소. 그렇지만 본문의 핵심 주제는 정당하며 분명합니다. 사도는 지금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향해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이나 “유대주의자”들이 아니라, 율법적 종교인들로서 특정한 일련의 규칙들을 준수함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려 하는 자들(이들을 명목론자라고 한 바 있음)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사도는 말합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사도는 지금 이들에게 “대인입증” 방식의 논쟁을 적용하면서 그들의 견해가 얼마나 부조리하며 모순적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에서의 논증은 세 단계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첫째가 역사의 인용 단계이고, 둘째가 비유(즉 풍유) 단계이며, 셋째가 적용 단계입니다.
역사. 사도가 인용하고 있는 역사는 그들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가 논쟁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이 이야기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유대교 특유의 우화적 해석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부분은 자신들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새로운 하나님의 도성이자 교회의 중심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누구든 이 공동체가 인정하는 일련의 규정들을 준수하지 않으면 약속의 후손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유대주의”의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의 배경에 <아브라함 이야기>의 주요 등장인물인 ‘사라’와 ‘하갈’, ‘이삭’과 ‘이스마엘’에 대한 우화적 해석이 깔려 있습니다.
이들이 <아브라함 이야기>를 이해하는 일차적인 방식은 <성경>에 있는 그대로입니다. 즉 ‘사라’는 자유자이고 ‘하갈’은 노예이며, ‘이삭’은 자유자의 후손이며 ‘이스마엘’은 여종의 아들로서 그 또한 노예입니다. 따라서 약속은 ‘이스마엘’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삭’을 통해서 전해져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성경>에 대한 일차적 이해이며, ‘바울’도 “유대주의자”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한 이해는 일차적 의미에 그칠 수 없고, 가장 심오한 부분 즉 우화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즉 과연 이들 주인공들이 누구를 대변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은 다름 아닌 자신들이 ‘아브라함’-‘사라’-‘이삭’의 계열이 상징하고 있는 대상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에 따르면 ‘사라’와 ‘이삭’과 ‘유대’인과 ‘모세’의 율법과 ‘시내’ 산과 ‘예루살렘’과 ‘예루살렘’의 모교회가 모두 하나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한편, ‘바울’과 그가 전하는 복음은 비록 ‘아브라함’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스마엘’처럼 첫 아들이긴 하지만 진정한 약속의 후손은 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은 “이스마엘 복음”으로서, ‘사라’가 “여종과 그 아들을 내 쫓으라”고 요구했던 것처럼 폐기처분해야 합니다.
풍유. 그러나 우화적 해석에 대한 사도의 이해는 정반대입니다. “대인입증” 방식의 수사를 통해서 그들의 해석을 반대로 뒤집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즉 “지금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모든 믿는 자들의 진정한 어머니이며, 자유자 ‘사라’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의 기독교인들이 진정한 자유자의 아들 ‘이삭’이며 약속의 후손입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사도는 <이사야서>의 예언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사 54:1). ‘이사야’는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아기를 낳지 못하는 상태에 있고 그래서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인의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회복하여 이전보다 더 많은 자녀들을 낳게 될 것입니다. 이 약속은 훗날 ‘예루살렘’에 다시 ‘유대’ 공동체가 건설됨으로써 일부 성취를 보기도 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사도의 해석 역시 우화적 해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여기서 “잉태하지 못하는 자”, “산고를 모르는 자”, “홀로 사는 자”가 일차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대상은 ‘사라’이며, “남편 있는 자”는 ‘하갈’입니다.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라’를 ‘갈라디아’의 기독교인들로, 그리고 ‘하갈’을 “유대주의자”들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 있는 예루살렘”은 ‘하갈’로서 “유대주의자”들의 어머니이며, ‘사라’는 기독교인들의 어머니로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적용. 사도의 우화적 해석의 절정은 마지막 결론이자 교훈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들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이 결론으로부터 얻어지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은 교훈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첫 번째가 29절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배경을 <창세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이 젖을 뗄 때 즈음하여 종의 아들 ‘이스마엘’로부터 조롱과 핍박을 받았다면 오늘날 우리 또한 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오는 이런저런 형태의 핍박이나 조롱은 세상 즉 이방인들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의 이복형제인 종교인들 즉 외형적 교회로부터 온다는 것이 우리의 체험입니다. 예수께서도 멸시와 조롱을 받은 것이 그의 고향과 그의 가족 친지들로부터였습니다. ‘바울’의 가장 극렬한 반대자들도 이방인이 아니라 그의 동료라는 사실이 본 서신을 통해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 당시 ‘이삭’과 같은 어린 ‘프로테스탄트’를 억압하고 핍박한 것은 다름 아닌 중세 교황 체제 하의 ‘로마 카톨릭’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자녀들에 대한 교훈은 항상 부정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밝은 약속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것이 두 번째 교훈으로 30절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처음에 ‘이스마엘’을 상속자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라,... 내가 이삭과 내 언약을 세우리라”고 답하셨습니다(창 17:18-21). 이 약속에 근거하여 ‘사라’는 ‘이스마엘’을 내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면 ‘이스마엘’과 같지 않고 ‘이삭’과 같은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은 혈육에 의해서가 아니라 영적인 관계에 의해서입니다.
결국 ‘이삭’의 운명은 이처럼 양면성을 갖습니다. 핍박과 고통이 있다면 상속과 특권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경멸과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후사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인의 존재 양식에 대한 역설입니다. 사도는 이점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8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내용과 수사에 있어 가장 특징적인 두 가지 요소는 무엇입니까?
2. 그리스도인의 존재 양식과 관련한 역설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제 18과: 자유에 굳게 서라
18
자유에 굳게 서라
(5:1-1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
이 단락을 마지막으로 “유대주의”에 대한 사도의 논쟁은 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서신의 벽두에서부터 이곳까지 논쟁과 해설과 검증의 방식으로 “유대주의”의 실체와 그 해악에 대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 가르쳐 왔습니다. 이 모든 일의 끝을 권면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것이 권면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단순히 이 단락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서신 전체에 걸쳐 전개해 온 사도의 “자유의 복음”에 대한 요약적 선언이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기능을 가진 여러 요소들이 어우러져 본문을 구성하고 있는데, 대략 여섯 가지로 구분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1) 기독교 자유의 복음에 대한 선언과 선포(1절상); (2) 권면과 “유대주의”의 위협에 대한 경고(1절하-4절); (3) 기독교 복음의 요약(5-6절); (4) 상호 연관성이 결여된 일련의 수사적 언급-질문, 역설, 잠언 등(7-11절상); (5) 결론(11절하); (6) 추가 색인-냉소. 이들 요소들이 두 개의 단락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들 각각을 파악해 내고 음미하는 것이 본문의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형식과 기능. <신약>이나 초기 기독교 문헌에서 자주 등장하는 “권고”나 “권면”의 문학적 특징에 대해서 가장 먼저 언급한 학자는 ‘디벨리우스’(Martin Dibelius)라는 사람입니다. 그에 따르면, 이들 “권면”은 윤리∙도덕과 관련한 일련의 주제들을 상호 내적인 연관성도 없이, 그리고 당장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만한 대상도 없이 일반적인 관점에서 다룬 것일 뿐입니다. <바울 서신>만 하드라도 대개 그 구조를 “논증”과 “권면”의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둘은 서로 문체도 다를 뿐만 아니라, “권면” 부분은 당장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기 보다는 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요구 사항을 다루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들 “권면”은 윤리나 도덕에 관한 “사도의 신학”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바울’에게 독특하게 볼 수 있는 다른 사상과도 별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여러 학자들도 ‘디벨리우스’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 서신>에 등장하고 있는 일련의 “권면”이 그 내용에 있어 다분히 일반적이거나 전통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권면들을 배열함에 있어서도 상호 순서가 뒤바뀌어도 별 문제가 없으며, 이들을 적용함에 있어 당장의 문제들과도 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권면은 사도가 지금까지(1-4장) 전개해 온 전체 논증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사도의 깊은 상심과 염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그가 그동안 전개해 왔던 논증과 권면들이 압축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구조적으로 볼 때, 본문은 서신의 머리말과 함께 일종의 수미상관을 이루고 있음을 봅니다: <1:6-10>//<5:1-12>. 이 두 본문은 그 억양이나 표현에 있어, “유대주의”의 위협에 대항하여 사도가 그동안 제시한 그 모든 언급들에 대하여 골격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두 본문과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할 만 한 점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두 본문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아주 격앙되어 있고 단호하다는 점; (2) 서로 병행되는 유사한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 (4) 두 본문에서 공히 “다시”를 사용함으로써, 단언적인 분위기를 조성함; (5) 두 본문 모두에서 저주가 등장하고 있음. 이들을 다시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범위와 단락. 본문의 단락은 그 기능적인 측면이나 문장의 분위기로 볼 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단락이 기능하는 바는 사도가 그동안 전개해 왔던 그 모든 논증에 대한 요약 내지 결론이며, 성격 상 선언과 권면 및 경고로 볼 수 있다면, 두 번째 단락이 기능하는 바는 “유대주의”에 대한 공격과 비난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선언/요청/경고(1-6절)
(2) 공격과 비난(7-12절)
첫 번째 단락을 다시 세부적으로 분석해 보면, 위에 구분한 바대로 처음(1절상)과 마지막(5-6절)이 선언과 확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사이에(1절하-4절) “유대주의”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한편 여섯 절로 이루어진 두 번째 단락의 분위기는 공격과 비난으로 일관하고 있는데, 매 절마다 다른 수사적(修辭的) 특징을 지닌 언급들을 어지럽게 짜 맞추어 놓은 듯한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신랄하고도 예리한 지적에서 시작하여, 수사적 질문, 금언, 위협, 역설, 그리고 마지막으로 냉소에 가까운 농담으로 공격의 절정에 이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1) 수사적 질문: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못하게 하더냐?”(7절)
(2) 예리한 지적: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8절)
(3) 잠언(금언):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9절)
(4) 위협: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 심판을 받으리라”(10절)
(5) 역설(아이러니):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11절)
(6) 냉소: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는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12절)
본문의 결론은 11절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만, 12절은 일종의 색인(索引)으로서 사도가 결론에 이어 추가하고 있는 최후의 공격이기도 합니다.
신학과 신앙
1. 선언/권면/경고(1-6절)
선언(1절상).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첫 번째 단락은 그 기능에 있어 “선언”과 “요청”과 그리고 “경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선언”은 다름 아닌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 선언과 동일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1절상)
그러나 이 구절에 대한 ‘헬라어’ 문장은 다소 특이합니다. <헬라어 성경>에서 1절은 앞선 문장과 연결 고리 역할을 해줄 만한 아무런 전이구절이나 접속사도 없이 다소 느닷없이 하나의 독립적인 문장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1절상의 구문(構文)과 관련하여 다양한 본문 변조가 있어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 중 원문에 가장 충실할 것으로 판단되는 <헬라어 사본>을 문자적으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자유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For freedom Christ set us free).
사도는 이곳에서 단순하게 문법적 직설법으로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언급하고 있는 이 “자유”는 실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사라-하갈 알레고리>에서 “자유 있는 여인”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어(4:22, 23, 30, 31), 이후 다루게 될 “자유”의 주제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래서 이 자유에 대한 사상은 4장의 범위를 뛰어넘어 이후 서신 전체의 분위기를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서신의 인사말(1:1-5)에서도 그는 ‘그리스도’를 지칭하면서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내어주신” 자로 그린 바 있습니다. 또한 제 2부의 “해설” 단락(1:11-2:14)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자유”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자유”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자유”에 대한 강조는 “해설”에 이어 “검증” 단락(3:1-4:11)으로까지 확대되고 있습니다. 그가 강조하고 있는 바는 “율법 아래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새로운 관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자유”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이나 세상 앞에서 누리고 상황이나 처지를 대변하는 단어이며, 본 서신 전체의 핵심어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 구절(5:1상)의 기능과 관련하여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과연 이 구절을 앞선 <사라-하갈 이야기>(4:21-31)의 결론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권면의 단락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라면 두 단락을 잇는 전이구절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일련의 어휘나 핵심 사상만을 본다면, 첫 번째 견해 즉 <사라-하갈 이야기>의 결론으로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자유에 관한 선언에 이어 “굳세게 서라”는 권면에 이어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경고에 이르기까지 앞선 이야기에 대한 결론으로 삼기에 충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한 바대로, 이 구절은 앞선 문장과 연결 고리 역할을 해줄 만한 아무런 전이구절이나 접속사가 없다는 점에서 순수하게 결론으로 삼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5:1과 5:13에서 동일한 표현 “자유를 위하여”가 나란히 등장하고 있어, 이들 구절을 포함하는 각 단락은 새로운 단락의 시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가장 무난한 입장은 세 번째 견해 즉 일종의 전이적 기능을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기능에 관한 입장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선언(5:1상): 1:6-4:31 사이의 모든 논의에 대한 요약과 결론
(2) 권면(5:1하-12절): 결론적인 권면
이 구절과 관련하여 남은 문제는 구문과 관련된 것으로서, “자유를 위하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문법적으로 이 단어는 여격(與格)으로서, “자유에 의하여”(by the freedom) 또는 “자유를 항하여”(for the freedom) 등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전자(前者)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수단과 방법의 의미를 지니게 되어, 이 구절에 대한 번역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그 자유”(the freedom by which Christ has set us free)가 될 것이며, 만일 후자(後者)의 입장을 취하면 목적과 목표의 의미를 지니게 되어, 그 번역은 5:13에서 보는 바처럼 “그리스도께서 그 자유를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으니”(For the freedom Christ set us free)가 될 것입니다.
권면(1절하). 1절 후반은 문법적으로 명령문으로 요청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절하)
이 구절의 첫 번째 동사 “굳건하게 서다”(στήκω, 스테코)는 <바울 서신>뿐만 아니라 <복음서> 여러 곳에서 권면을 위하여 자주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예: 막 3:31; 11:25; 요 1:26; 롬 14:4; 살후 2:15; 계 12:4; 빌 1:27; 4:1.
두 번째 명령문의 동사 “(멍에를) 메다”는 문법적으로 수동형으로서, “붙잡혀 있지 말라” 내지는 “메어있지 말라” 등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멍에”(ζυϒός, 쥐고스)는 당시 배경에서 “명예로운 책임”과 “강요된 부담”이라는 양면성을 다 지니고 있습니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가족이나 공동체 또는 율법 준행 등에 대한 책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초청의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멍에를 지고 나로부터 배우라...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마 11:29-30). 한편 후자와 관련해서는 “노예 생활”이나 기타 “마음에 내키지 않는 강요 된 행위” 등을 상징하는 단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연설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행 15:10).
그리고 “다시”가 의미하는 바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전에도 “율법의 멍에”를 지고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가 뜻하는 바는 “세상의 초등학문”일 것입니다. 즉 이들이 이전의 이교도적인 삶의 방식으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의 입장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주의적 삶”이나 “이교도적인 삶”이나 하등 차이가 없고, 내버려야 할 삶의 방식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은 자유를 포기하고 노예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론적으로 1절에서 사도는 1:6-4:31 사이에서 그가 제시해 온 모든 논증들을 요약하면서, 동시에 기독교 복음의 핵심과 “유대주의”의 위협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절).
경고(1절하-4절). 이어지는 부분에서(1절하-4절) 이 선언은 권면과 경고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2절은 일차적인 경고가 주어지고 있는 곳입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2절)
이곳에서 사도의 경고는 이전에 머리말(1:6-10)에서 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것이며, 이처럼 강력한 톤을 본문 끝까지 계속 이어가다가 마지막 12절에서 가슴을 찌르는 듯한 냉소로 그 절정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첫 세 단어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은 아니지만, 강조를 위해서 도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라, 나 바울은.”
2절의 조건 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은 보다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너희가 스스로를 할례를 받도록 허용한다면”이 됩니다. 조건절의 형식은 소위 “제 3급 조건절”로서 그 암시하는 바는 ‘갈라디아’인의 할례 문제는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의 경고는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키는 차원이 아니라, 지금 현재 ‘갈라디아’ 교인들의 겪고 있는 심리 상태를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지금 할례를 받을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이런 결정에 대하여 사도가 줄 수 있는 경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조건절에 대한 이 귀결(歸結)의 시제가 미래형인 점을 고려한다면, 이 구절에 대한 보다 정확한 번역은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하여 심판의 날에 도우러 오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종말의 심판에 관한 어떠한 언급이나 암시도 없으며, 4절에서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다”와 “(은혜에서) 떨어지다” 등의 동사들이 완료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리스도가 너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을” 시점은 종말의 날이라기보다는 그들이 할례를 받으려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그 시점 이후부터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이 할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리스도’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도움이나 유익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일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는 “유대인 기독교인”이 할례를 받은 채로 살아간다든지 또는 율법의 규례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참고: 고전 7:17-24). 그가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쫓아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 아니라, 기독교를 “율법주의”로 만드는 것이므로 당연히 이런 방식을 고집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는 아무런 도움도 유익도 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에 대해서 생각지도 말아야 할 이유는 또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3절)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가 그것입니다. 할례는 ‘그리스도’로부터 아무런 도움이나 유익을 받을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율법 전체를 행해야 하는 과중한 부담을 지워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시 증언하다”고 쓰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다시” 증언한다는 말은 이전에 그가 ‘갈라디아’에 있을 때 할례에 대해서 일차 언급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단어를 사용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2절과 3절을 비교해 볼 때 내용 상 반복되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2절에서 언급한 내용을 새삼 강조하기 위하여 “다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이 단어가 필요지 않다는 판단 때문인지 일부 사본에서는 이 단어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3절이 2절의 내용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앞에서 말한 내용을 강조하면서 3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서 “다시 말한다”고 쓸 수는 있을 것입니다(참고: 1:8-9의 두 절에서도 이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전에 사도가 ‘갈라디아’에 있을 때 할례에 대해서 언급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그가 그곳을 떠난 이후에 발생한 상항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사용하고 있는 동사 “증언하다”(μαρτύρμαι, 마르튀로마이)는 원래 “증언”을 뜻하는 “마르튀스”(μάρτυς)에서 유래하였는데, “순교자”(martyr)도 여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왜 할례를 받는 순간 율법의 모든 요구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합니까? “유대주의자”들이 과연 그렇게 말하고 가르쳤을까요? 아마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이방 기독교인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약속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 그들이 행하고 있는 일련의 종교적 관습들을 따라 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예컨대, 안식일이나 절기 들을 지키며, 할례를 받는 것 등을 말합니다. 이런 가르침에 ‘갈라디아’ 교인들도 진지하게 반응하면서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할례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들이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한 가지 분명하게 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즉 할례는 단순히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할례를 받는 순간 율법의 모든 요구 조건들을 다 준수하겠다고 선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사도의 이런 주장에 대해서 일부 학자들은 그가 율법을 과도하게 해석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유대교”의 가르침 중에는 분명 모든 율법에 대하여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전승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참고: R. N. Longernecker, 227쪽.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약>의 다른 서신에서도 사도의 이런 주장과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따라서 비단 율법뿐만 아니라 모든 규정이나 법령의 세부 조항 하나하나는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든, 길든 짧든, 상호 연관되어 전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느 특정 조항 하나만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3절에서 사도는 율법에 대해서 과도한 해석을 하고 있거나 무리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사도는 3절에 이러 4절에서도 “유대주의”의 가르침을 따르는데 오는 심각한 결과를 또 하나 더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4절)
이 세 번째 경고는 2-3절에서 소개한 바 있는 두 가지 경고보다 훨씬 심각하게 들립니다. 세 경고는 어떤 것입니까? 요약을 위해서 여기서 다시 한 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2절); (2)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져야 한다(3절); (3)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멀어진다(4절). 이 세 번째 경고와 관련해서도 “유대주의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즉 율법의 가르침을 쫓아 산다고 해서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거나 그의 은혜를 버리는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점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반대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칭의”는 율법이나 율법의 삶과는 아무 상관도 없으며, 상호 대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세 번째 경고가 2-3절에서의 경고에 비해서 훨씬 심각하게 들리는 이유는, 주어나 동사의 형태나 시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특정 개인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누구든지”)을 상대로 하고 있으며, 문장 속의 두 동사 모두 완료형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의미를 살려 4절을 다시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비록 여러분들이 아직 할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누구든지 할례를 받음으로써 의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이미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졌고, 은혜에서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사도는 ‘유대’인 기독교인이 할례를 받고 율법에서 가르치는 대로 복음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해서 무어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이방인 기독교인의 태도, 즉 기독교 복음을 율법의 가르침과 혼합시켜 살겠다는 그 태도입니다.
사도가 2-4절에서 할례의 폐해와 그 심각한 결과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이어지는 두 절(5-6절상)에서는 긍정적인 묘사를 통해서 그가 앞에서(2:15-21; 3:1-411) 밝혔던 복음의 진수(眞髓)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5(왜냐하면)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상(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가 효력이 없되(5-6절상)
그가 말하는 상대는 누구입니까? 이곳에서 그가 소개하고 있는 내용은, 두 절의 문장 구문이나 또는 어휘 등을 통해서 볼 때, 새롭다기보다는 이전에 사도 자신이 했던 말들 중에서 요약 및 발췌의 형식으로 정리해 놓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한 가지 특기할 만 한 점은 일인칭 복수형 “우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문 전체를 통해서(1-10절) 대부분 복수 이인칭 “너희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유독 이곳에서만 “우리”를 사용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는 것이지요. 이는 물론 사도가 자신을 수신자들과 동일시하고 싶을 때 쓰는 표현으로서, 문맥에서 볼 때 ‘갈라디아’의 이방인 기독교인들보다는 오히려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지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6절 후반의 내용은 5-6절상의 내용에 새롭게 추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중요성이 덜한 것은 아닙니다만, 이 구절은 이전에 그가 말했던바 내용과는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6절하)
이 구절이 새롭게 추가된 것이라고 추측하는 데에는 다음 몇 가지 근거를 댈 수 있을 것입니다: (1)이곳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이 서신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 (2) “사랑”과 “믿음”은 <바울 서신>의 핵심 단어들이긴 하지만 이곳에서처럼 직접적인 관계로 묘사하고 있는 곳은 없다는 점. 따라서 사도가 이 구절을 더하고 있는 이유는 이전에 그가 가르쳤던 내용에 대해서 간략하게 요약을 한 다음 새로운 무엇인가를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인 즉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과 그 속에 필연적으로 내재할 수밖에 없는 역동적인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 주석가의 말대로, 이러한 사랑의 관계가 없다면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필경 비윤리적인 방종으로 흐르고 말 것이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 사도가 이 구절을 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공격과 비난(7-12절)
이 두 번째 단락은 첫 번째와는 달리 구성이나 형식이 다소 자유스럽고 산만합니다. 첫 번째 단락이 “굳세게 서라”는 주제어를 중심으로 잘 정돈된 형식과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면, 두 번째 단락은 신랄한 수사적인 질문, 금언, 역설, 냉소에 가까운 농담 등이 산만하게 뒤섞여 있는 지극히 비형식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단락이 기능하는 바는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공격과 저주에 가까운 비난입니다. “유대주의”의 위협에 대해서 긴 논증과 권면으로 첫 번째 단락을 마친 사도는 이곳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비난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예리한 수사적 질문입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7절)
우리가 알다시피 사도는 종종 신앙생활을 운동장에서 달리기 경주를 하는 선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2:2; 고전 9:24-27; 빌 3:14; 딤후 4:7; 행 20:24). 인생을 운동 경기에 비유하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는 지극히 흔한 것이었습니다. “달음질”과 관련해서 동사의 시제를 미완료형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갈라디아’ 인들이 이전에 복음을 처음 받아들였을 때와 현재의 모습이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참고. 4:13-15).
이들이 현재 달라진 이유는 과거에 누군가가 경주를 “방해했기”(ἐϒκόπτω, 엥콮토) 때문입니다. 이 때 사용하고 있는 동사의 시제는 완료형으로서 과거에 이미 일어난 것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 결과 ‘갈라디아’ 교인들이 “순종하지”(πείθεθαι, 페이테스타이) 못하게 된 것이라는 현재형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이 사실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수사적 질문에 이어 사도는 8절에서 스스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다름 아닌 “유대주의자”들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8절)
이들은 분명 자신들의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포장했겠지만 사도의 진단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 낸 것일 뿐이라는 진단입니다. 사도는 이곳에서 <신약>에서 유일하게 이곳에서만 등장하는 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권면”(πεισμονή, 페이스모네). 이 단어는 원래 “설득”, “확신”, 또는 “순종” 등과 같이 중립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만, 기독교 진영에서 “공허한 수사” 또는 “아첨” 등으로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문맥에 비추어 “교묘한 속임수”나 “계산 된 설득” 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유대주의자”들의 “권면”은 하나님의 원래 목적이나 뜻과는 상관없는 자신들의 유익을 위한 설득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이어서 이들 “유대주의자”들의 노력과 관련하여, 이런 일이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아주 골치 아픈 상황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경계를 주기 위해서 금언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9절)
사도는 동일한 금언을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고전 5:6). 이때에는 교회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음행과 관련해서였습니다만, 이곳에서는 잘못된 신학에 대한 경고를 위해서입니다. 이 누룩이 예수님의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나 “천국”의 확산과 관련해서 긍정적으로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마 13:33; 눅 13:21), 대개 부정적인 의미로 부패시키고 오염시키는 원흉으로 다루고 있습니다(막 8:15).
10절에서 사도는 갑자기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긍정과 확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는 두 번째 단락 전체를 지배적인 그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10절상)
그가 진정으로 전하고 싶은 마음을 이런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든 적어도 나만은 여러분들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이처럼 확신을 갖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주 안에서”입니다. “주 안에서”(ἐν κυρω, 엔 쿠리오)는 <바울 서신> 전체를 통해서 이곳 외에 모두 46회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 표현 외에도 “그리스도 안에서”(ἐν Χριστῷ, 엔 크리스토) 및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ἐν Χριστῷ Ἰησου, 엔 크리스토 예수)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전자(前者)는 <갈라디아서>(1:22; 2:17) 외에 그의 서신에서 24회, 그리고 후자(後者)는 역시 <갈라디아서>(2:4; 3:14, 26, 28; 5:6) 외에 37회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확신하고 있는 바는 교인들이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즉 그가 8-9절에서 언급한 바 있는 내용으로서, 첫째 “유대주의자”들의 권면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둘째 그들의 가르침이 누룩처럼 온 교회를 부패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무슨 근거로 사도가 이처럼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인지는 본문을 통해서는 상세히 알 길이 없고, 다만 그 자신의 언급을 통해서 추측컨대, 현 상황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 안에서” 희망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확신과 희망은 누룩에게는 적용될 수 없습니다. 그가 교인들에 대해서 확신하는 만큼이나, 이들 누룩에 대해서도 똑 같은 정도로 그러나 정 반대의 확신을 가지고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10절하)
교회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헬라어 성경>에 의하면 단수형으로서 특정 개인을 지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1:7이나 5:12에서는 복수형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도 일반적인 “유대주의자”들로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든지”가 지칭하는 바도 특정 개인이 아니라, 이들 무리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절에서 사도가 말하는 “심판”은 그 자체로서 “최후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때로 교회의 징계 조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아마 사도는 “유대주의자”들 역시 교회의 징계를 받아야 할 뿐만 아니라, 종말의 날에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사도는 이제 11절에서 그의 독자들이 미처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새로운 역설적 질문으로 두 번째 단락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11절상)
사도는 아마도 자신의 논증이나 권면이 결론을 향해 나아가면서 무엇인가 더 말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그 자신에 관한 오해와 근거 없는 비방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러했을 것입니다. 할례도 그중의 하나로서, 그를 비방하는 자들이 ‘바울’ 역시 할례를 지지하였으며 선교 여행 중에는 이에 관해서 가르치기도 했다고 말했을 법합니다. 이들 “유대주의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디도 사건”(갈 2:1-5)의 진실을 왜곡시켜 사도가 그에게 할례를 받게 했다고 퍼뜨리기도 했을 것이며, 사도 자신도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바 있기도 합니다(행 16:1-3). 그리고 사도 스스로도 할례를 지지하거나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참고. 고전 7:17-20; 9:19-23). “유대주의자”들이 오해하기 십상이었을 것입니다만, 이들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즉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사도는 ‘유대’인 기독교인이 할례를 받거나 ‘유대’ 방식을 좇아 사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까지 자신들의 방식을 강요하거나 고집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11절하)
이 구절은 5:1-11절 사이의 모든 내용에 대한 결론입니다. 또는 더 나아가 1:6-5:11 전체에 대한 결론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권면”(5:13-6:10)은 더 이상 “유대주의”에 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내리는 결론인 즉은 할례는 철저하게 기독교 복음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며, 이를 무효화 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사도는 마지막 결론에 이은 최후의 일격을 냉소와 조롱으로 그의 공격과 비난의 절정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12절)
‘바울’의 서신을 통 털어 이처럼 비이성적이고 무례한 공격을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가 공격하는 대상은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로서, 서신의 다른 곳에서 “교란하는 자들”(1:7) 또는 “요동하게 하는 자”(5:10하) 등으로 그리고 있는 “유대주의자”들 말합니다. 사도는 이들을 향하여 냉소와 멸시로 다음과 같은 독설을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할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 차라리 그것을 잘라내 버려라.” 여기서 “할례”와 “유대주의”에 대한 그의 혐오감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B. 권면(2)
방종에 대하여
(5:13-6:10)
<갈라디아서>에서 제 3부, 즉 “권면”의 내용과 구성에 관해서는 제 3부의 서두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처해 있는 위기 상황은 이중적이라고 언급한바 있습니다. 그 하나는 “율법주의”와 “명목론”이며, 다른 하나는 “자유방임주의”(또는 “율법폐기론”)입니다. 전자(前者)가 “유대주의”라는 외부의 적이라면, 후자(後者)는 보다 교묘한 것으로서 교회의 태동기부터 신자(信者) 개개인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었던 내부의 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전자(前者)가 실질적인 위협이었다면, 후자(後者)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상존(常存)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자(前者)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이 누리는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하려는 시도라면, 후자(後者)는 그 자유를 개인의 탐욕을 위한 무책임한 “방임주의”로 몰아가려는 시도일 것입니다. 이처럼 <갈라디아서> 제 3부는 이들 두 신학적 오류에 대한 지침과 훈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1) 권면 I(4:12-5:12): “유대주의”에 대한 경고와 권면
(2) 권면 II(5:13-6:10): “방종”에 대한 경고와 권면
두 번째 권면도 첫 번째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곳에서 상투적인 서신의 관례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자유의 헌장(憲章)을 반복 선포하면서 후치사(後置詞) “그러므로”(ϒάρ)의 사용과(번역되지 않음) 함께 짧은 부가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 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ϒάρ) 굳건하게 서서...”(5:1);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ϒάρ) 그 자유로 기회를 삼지 말고...”(5:13).
(2) “그러므로 내가 이르노니”(λέϒω δέ, 레고 데)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5:16): 이런 표현은 상투적으로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는 내용들을 하나의 자료로 통합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참고. 3:17; 4:1).
(3) 새로운 시작이나 전환이 있는 곳에서 등장하는 “형제들아”의 호칭: “형제들아...”(5:13); “형제들아...”(6:1). 비교를 위해서 서신의 다른 곳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11; 3:15; 4:12, 28, 31; 5:11; 6:18.
(4) 강조를 위하여 유사한 의미를 갖는 두 접속사 ἄρα(아라)(“그러므로”, “따라서”)와 οὖν(운)(“그러므로”, “따라서”)을 동시에 연결해서 결론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 “그러므로(ἄρα οὖν)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6:10).
(5) 하나의 단락임을 구분할 수 있도록 처음과 끝을 수사적 수미상관으로 처리하고 있다는 점: “...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5:13);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6:10).
이 단락부터 사도의 권면은 “자유”가 “방종”으로 흐를 위험에 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의 자유가 율법의 구속을 받아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체의 기회”가 되어서도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방종으로 흐르는 것을 막아 줄 처방약은 이 단락에서(5:13-6:10) 핵심어로 등장하고 있는 세 단어, “사랑”과 “섬김”(서로 종노릇함)과 그리고 “성령”입니다. 이 세 단어는 마치 사람에게 있어 세포와 조직을 유지시켜주는 골격과도 같이 서신의 나머지 부분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사랑의 주제가 이 단락에서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 지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사도가 방종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려는 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1)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5:13하); (2)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5:14); (3)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5:19-21); (4)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5:22-23); (5) “우리가 선을 행하되...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6:9-10); (6)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너희는 온유한 심정으로...”(6:1); (7)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6:2); (8)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6:6).
이처럼 서신의 나머지 부분이 온통 사랑과 섬김의 주제로 가득 차 있지만, 이러한 생활의 근간은 다름 아닌 “성령의 삶”인 것을 이 단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성령에 관한 언급이 사랑이나 섬김이라는 단어보다 더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단락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5:13하)는 서두의 권면도 “성령을 따라 행하라”(5:16상)는 권면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행하는 삶”은 (1) 소위 “육체의 욕심”으로부터 신자를 보호해 줄 것이며(5:16-17), (2) 율법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줄 것이며(5:18), (3) 다양한 성령의 열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을 맺게 할 것이며(5:22-23), (4) 성령의 인도를 체험하게 될 것이며(5:25상), (5) 자만하지 않게 할 것이며(5:26), (6) 범죄한 자를 회복하게 할 것이며(6:1상), (7) 자신의 책임을 질 뿐 만 아니라 타인의 무거운 짐도 함께 지게 할 것이며(6:2, 5), 그리고 (8) 영생을 보장해 줄 것입니다.
사도가 이 단락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련의 권면은 그 성격 상 일상생활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행동 강령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우리는 앞에서 ‘디벨리우스’가 이런 견해를 제시한 첫 인물이라는 점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갈라디아’ 교회의 특수한 상황을 염두에 두었을 때, 서신의 주제 “복음의 자유”와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즉 자유를 위협하는 두 번째 요소인 “방종”에 대한 처방전으로서의 기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5:13-6:10은 4:12-5:12와 함께 권면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바, 각 단락의 주제는 (1) 유대주의에 대한 반박과 (2) 방임주의에 대한 예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19과: 권면(2): 사랑/섬김/방종
19
사랑과 섬김과 성령
(5:13-18)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13절).
문학과 역사
5:13-6:10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련의 권면들은 상호 관련이 없는 일반적인 행동강령들을 의미 없이 나열해 놓은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둔 구체적인 것들이라는 점을 앞에서 수차례 언급한 바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단순히 “유대주의”의 주장들 즉 “율법주의”와 “명목론”에 걸려 넘어진 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복음의 은혜”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 만 아니라, “복음의 삶”을 사는데도 실패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복음의 자유”를 “방종”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유혹과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주의”가 신학적 오류라고 규정한다면, “방임주의”는 일종의 신앙적 오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방임”이 무슨 신학적이고도 철학적인 “자유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나 태도에 있어 이기심이라든지, 교만이나 무시라든지, 자기중심적인 생활 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오류에 대한 적절한 처방전 역시, 그가 “유대주의”라는 신학적 오류를 공박할 때 강조했던 것처럼 “성령”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사도에게 있어 기독교 신앙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성령의 임재와 행위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3:2)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5:16)
이 단락에서 사도는 “기독교 방종”과 관련하여 서신의 나머지 부분을 관통하는 두 가지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1)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13절); (2) “성령을 따라 행하라”(16절). 이 두 권면은 서로 독립적이거나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동기와 행위라는 인과 관계 속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알 수 있게 해주는 표현이 예의 그 친숙한 “(그러므로) 내가 이르노니”라는 선언입니다. 특히 이 선언에서 접속사 “그러므로”가 기능하고 있는 바는, 첫 번째 권면이 두 번째 권면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성령을 따라 행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을 따라 행함”은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행위”의 바탕이자 토대를 이루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나머지 모든 권면들은 결국 이 두 권면을 보다 심화하고 확장시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선언/권면/경고(13-15절)
사도는 “기독교 방종”에 대한 권면을 시작하면서, 그가 직전의 단락에서(5:1-12) “유대주의”를 경고하면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먼저 복음의 자유에 대한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비교를 위해서 두 단락의 서두를 병행시켜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5:1상)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5:13상)
두 구절에 차이가 있다면 구문론적인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앞 단락의 문장은 능동태로서 주어는 3인칭 단수형, 그리고 동사의 시제는 완료형인데 반해서, 이곳에서의 문장은 수동태이며 주어는 이인칭 복수형입니다. 문장의 태(態)와 관련해서 두 문장은 의미론적으로 아주 미미하기는 하지만, 강조하려는 바가 다른 듯합니다. 즉 전자가 ‘그리스도’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면, 후자는 비록 생략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강조하려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두 문장이 의도하고 있는 바는 동일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에 따르면 13절은 접속사 “그러므로”(ϒάρ)를 수반하고 있어, 13-18절 전체 내용을 앞 단락의 내용(5:1-12)과 연결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접속사는 5:1절상에서 언급한 바 있는 “자유의 주제”를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하면서 다시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5:1상에서 자유에 관한 선언이 있은 후로 5:1절하-12 사이에서 내용이 다소 다른 곳으로 일탈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아니면 적어도 12절의 “냉소”로부터는 다시 돌아와 이전의 주제를 이어갈 필요는 있었을 것입니다.
두 문장에서 모두 “자유”의 품사는 여격(일종의 간접 목적어)입니다. 그런데 여격에는 수단이나 방법을 의미하는 여격과 목적이나 목표를 수반하는 여격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만, 13절에서는 후자로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적이 “자유”라는 의미라는 말입니다.
선언에 이은 권면은 무엇입니까? 상호 대조되는 두 권면이 한 번은 부정문으로 또 한 번은 긍정문으로 번갈아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권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13절중)
엄격하게 말하자면 이 문장에는 동사가 없습니다만, <헬라어 성경>의 의미를 살려 번역하자면 “그 자유를 육체를 위한 기회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자유”는 바로 직전에 진술한 바 있는 자유를 말함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기회”는 원래 “출발점” 또는 군사 용어로 “작전 본부” 등을 의미합니다만, 이곳에서처럼 “동기” 또는 “기회” 및 “구실” 등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참고. 롬 7:8; 고후 5:12; 11:12; 딤전 5:14).
그렇다면 “육체(σάρξ, 사르크스)의 기회”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적어도 두 가지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단락 이전까지 이 단어는 주로 단순히 “혈육을 가진 인간”(1:16; 2:16) 또는 문자 그대로 “육체”(2:20; 4:13-14, 23, 29)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인간의 노력”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있기는 합니다: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3). 이 경우 이 단어는 다소 윤리적인 함축성을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6:12-13 사이에서 다시 한 번 문자적인 의미로서의 “육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를 제외하면 서신의 나머지 부분에서 “육체”가 함축하는 바는 윤리적인 것들입니다. 예컨대, 인간의 타락하고도 부패한 본성, 죄악 성 등과 연계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두 번째 권면은 무엇입니까? 긍정문으로 시작되는 다음과 같은 권면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13절하)
이 두 번째 권면은 분명 첫 번째 것과 반명제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자유를 표현하는 방법에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을 “육체의 기회”로 삼든지 또는 “사랑으로 종노릇” 하든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택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당연히 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그러나”로 시작하는 두 번째 명령문은 기독교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는 것에 대해서 아주 강력하게 다시 한 번 반대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명령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윤리∙도덕적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유대주의”도 같은 주장을 펼칩니다. 이점 사도 ‘바울’이나 “유대주의자”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유대주의자”에게 기독교인의 윤리∙도덕적 책임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가장 충실하게 잘 드러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 기독교인의 윤리∙도덕적 책임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근간에는 “성령의 인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곳에서 강조하고 있는 “사랑”과 관련해서는 이전에 두어 차례 언급한 바 있습니다. 사도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사랑”과 관련해서 본 서신 내에서 두 곳을 참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까이는 5:6에서 그가 언급하고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라”는 구절과 멀리는 2:20에서 고백하고 있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과 관련한 구절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와 관련해서는 16절 이후부터 언급하게 될 것인데, 16절에서 예의 그 친숙한 “(따라서) 내가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이 두 강조점을 하나로 묶어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랑으로 종노릇하라”는 명령은 기독교의 윤리적 책임이 이중적인 양상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게 해 줍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그가 가진 자유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1:10), “서로의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그토록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강조해오던 사도가 이제는 다시 “종노릇하라”고 하니 역설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나란히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노예”가 되는 것과 “율법의 노예”가 되는 것 사이에는 뚜렷한 구별과 차별이 있음을 사도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적인 동기와 외적인 구속의 차이가 그것입니다. 율법이나 세상의 초등학문의 노예가 되는 것은 일방적이고, 억압적이며,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노예”가 되는 것은 자발적이며, 자유스러운 행동으로 실패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폐기처분되어야 마땅한가? 예수님께서는 그가 오신 것은 율법을 폐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완전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마 5:17). ‘바울’ 역시 그와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14절)
그의 이 말은 충격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그렇게도 “율법주의”를 비방하고(예: 3:6-14), 율법의 한시적인 역할만을 인정했던(3:23-4:7) 그가 이처럼 태도를 돌변할 수 있을까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열심히 사랑함으로써 율법을 완성시켜야 하는 것일까요? 그가 정면에서는 율법을 공격하면서 뒤에서는 그것을 옹호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의 진정한 의도는 과연 무엇입니까? 왜 이처럼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까?
이런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다양한 설명들이 제시된 바 있습니다만, 보다 상세한 내용을 위해서 롱거넥커(R. N. Longernecker)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R. N. Longernecker, 242쪽.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구절이 명령문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사도는 이곳에서 율법을 행해야 한다든지 또는 완성해야 한다든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율법주의”는 율법을 행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도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어 “율법의 완성”은 기독교 생활의 결과인 것이지 전제 조건이 아닙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14절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행하며, 그것으로 율법의 모든 요구 조건을 만족시킨 것이며 성취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에서의 초점은 <로마서>(13:8-10)에서와 마찬가지로 율법이 아니라 사랑에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랑에 반응하는 사랑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를 드러내는 그 사랑이야말로 기독교의 윤리∙도덕적 책임에 대한 동기가 되는 것이며, 그리고 그 결과는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이 성취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자유에 대한 선언과 권면에 이어 다시 한 번 쓰디 쓴 냉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형식에 있어 앞 단락에서 했던 것과 같습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15절)
이것은 조건적이긴 하지만 경고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상징은 분명합니다. 짐승들이 서로 물고 뜯다가 결국에는 모두 죽음으로 끝나는 싸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물고” “뜯는” 동사는 모두 현재형으로,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멸망하는” 동사는 완료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결말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서로 싸우는 상대는 누구입니까? 교회 내에서 “유대주의”와 “반유대주의”와의 싸움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자신만의 자유를 주장하며 “방종”으로 흘러간 자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냉정하고도 무자비한 태도나 자세를 지칭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나을 듯합니다.
2. 권면과 약속(16-18절)
“사랑 안에서 서로 종노릇하라”는 첫 번째 권면이 기독교의 윤리∙도덕적 책임을 말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권면에서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인데, 이는 첫 번째 권면에 대한 바탕이자 근간을 이루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 하리라(16절)
바로 이러한 “성령의 역할”이야말로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기독교 윤리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입니다. 그는 여기서 “(그러므로) 내가 이르노니”라는 형식을 빌어 앞에서(13절하-14절) 언급했던 “사랑”의 주제를 이제 그가 이곳에서(16-18절) 전개하려는 “성령”의 주제와 하나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16절의 선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1) 권면-“성령을 따라 행하라”; (2) 약속-“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 하리라.” 그리고 이 구절은 이어지는 단락(5:17-24)에서 보다 심도 있게 다루어 질 것이며, 이후 다시 한 번 권면에 이어(5:25), ‘갈라디아’ 교회의 현 상황에 곧바로 적용될 것입니다(5:26-6:10).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보다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성령과 함께 걸어라”입니다. 이 동사는 <바울 서신>이나 <요한 서신> 등에서 “행동하다” 또는 “삶을 살다”는 의미로 자주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참고: 롬 6:4; 8:4; 13:13; 14:15; 고전 3:3; 7:17; 고후 4:2; 5:7; 10:2, 3; 12:18; 엡 2:2, 10; 4:17; 5:2, 15; 빌 3:17, 18; 골 2:6; 3:7; 4:5; 살전 1:12; 4:1, 12; 요일 2:6; 요이 4, 6; 요삼 3-4.
따라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은 “방종의 삶”이나 또는 “율법적인 삶”과는 구별되는 삶의 질적 수준을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현재형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 명령문이 의미하는 바는 현재 ‘갈라디아’ 교인들이 취해야 할 행동 방식에 대한 권면으로서, 이들로 하여금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계속해서 그렇게 살도록 주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이전에 그들의 삶속에서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고(3:3-5),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살아왔습니다(5:5). 그들이 회심 당시나 “유대주의”의 교리를 듣기 전에 이러한 “성령의 체험”을 했다면, 이제부터 “사랑의 종노릇”을 함에 있어서도 동일한 “성령의 체험”이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 권면과 함께 약속이 따라 옵니다: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 하리라.” 물론 이 문장의 주어는 “너희” 즉 ‘갈라디아’ 교인들이지만,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두 존재는 “성령 하나님”과 “육체”입니다. 여기서 전자는 인격적 존재인데 반해 후자는 일종의 준 인격적 존재로 의인화 하고 있음을 봅니다. 성령과 육체가 서로 주인 노릇을 하려고 싸우고 있는 이 상황이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딜레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상황에서 기독교인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무엇입니까? 사도가 들려주는 약속인 즉은, 우리가 성령에 따라 행하면 육체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 구절에서 이중 부정문을 사용함으로써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다시 한 번 성령과 육체를 대비시키면서, 이 둘이 서로 어떻게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류의 처지를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17절)
<헬라어 성경>은 이 구절에서 “그러므로”(ϒάρ, 가르)를 사용함으로써, 16절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재확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시 한 번 더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곳에서 육체와 성령을 대조시킴으로써 윤리적 이분법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분법은 비단 <바울 서신>에서 뿐만 아니라 <요한 서신>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런 사상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나 ‘요한’의 이분법은 어디까지나 영적인 영역에 국한된 것으로서, 우주적 이분법이나 인류학적 이분법으로까지 확대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18절은 무슨 새로운 사상이나 대조되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13-17절의 내용에 추가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 구절에 서두에 “그리고”(δέ, 데)라는 접속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 하리라(18절)
사도는 이 마지막 구절에서 그의 두 권면 즉 “사랑 안에서 서로 종노릇하라”와 “성령에 따라 행하라”를 “유대주의”의 “명목론”에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사도의 이러한 결론은 다소 기이하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자유와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5:1-6에서 마지막으로 다룬 바 있으며, “자유와 방종”에 관해서 다루고 있는 본문(5:13-18)과는 주제에 있어 다소 동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자들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둘이 아니라 “자유와 율법”에 관한 주제 하나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동일한 교인들에게 “자유와 방종”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자유와 율법”의 문제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유대주의”의 이분법적인 주장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즉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1) 율법에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2) 육체가 원하는 대로 방종함으로써 이전의 이방인의 생활로 되돌아 갈 것인가. 따라서 사도가 자유와 관련하여 율법을 언급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극단적인 이분법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지나치게 극단적이고 단순화 된 것입니다. 제 삼의 길은 없을까요? “율법 아래에” 살지 않으면서 동시에 “육체의 욕심”에 따라 사는 것도 아닌 삶의 방식은 없는 것일까요? “성령에 따라 행하는 삶”이 바로 그 해답입니다. 이것은 중도나 중용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 율법에 좇아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중도를 걷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성령에 따라 행하는 삶”은 이 둘을 초월하는 전혀 새로운 대안이자 제 삼의 길이기도 합니다.
교훈과 적용
자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자유를 위하여 부름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결단이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성령의 행위”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믿음의 행위”를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3:2).
따라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이 받은 자유를 부당하다거나 과분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움츠러들게 해서도 안 됩니다. 자유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이자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 자유가 몇몇 특권층의 전유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형제들아”라고 부언하고 있는 것입니다(13절상).
그러나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이 자유는 심히 훼손되고, 왜곡되어 있으며, 억압받고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표현대로, 마치 위험한 짐승을 동물원의 철장 속에 가두어 놓고 안전하게 즐기려는 사람들처럼, 기독교 자유를 특정 공간이나 형식이나 체제 속에 가두어 놓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시도는 기독교회사에서 끊임없이 있어왔고, 지금도 행해지고 있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교단의 이름으로, 예배의 이름으로, 그리고 전문가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대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유보하거나 담보해 버린 채 스스로 노예로 살아가려 합니다. 간혹 불평도 하긴 하지만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려는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기독교 자유가 주는 넘치는 에너지와 흥분과 때로 위험하기까지 한 상상력은 항상 남의 이야기이거나 저 세상에서나 가능한 일로 치부해 버립니다. 이것은 단언컨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모독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나는 진정 자유로 인한 흥분과 스릴을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상상의 날개를 펼치며 무엇이든 해보고 싶다는 열망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자유의 본질 속에는 예측할 수 없는 에너지가 꿈틀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예. 자유가 이처럼 예측할 수 없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또한 자유의 위험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의 위험에 대해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13절하). 그는 자유가 그 자체로서 완전한 것이 아니라 기회라고 말합니다.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그는 두 가지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기회란 자유를 “육체”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체”란 단순히 물질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고, 윤리∙도덕적인 영역과 관련된 것을 말합니다. 즉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서 비롯된 온갖 죄악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곧 이어서 이들 죄악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그 예를 열거하고 있습니다(5:17-21).
자유가 줄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자유를 가지고 종이 되라고 하니 그렇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종이 되라고 하니 더더욱 견딜 수 없는 노릇입니다. 오늘날 소위 성직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아무튼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의 종이 된다든다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우며 가장 꺼리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행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즉 자신의 자유를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고 구속하는데 사용하려 한다는 것이지요. 독재자들이 가장 바라는 바가 역설적으로 자유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원하는 자유란 거의 방해 받지 않는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바로 이런 자유를 원합니다. 아무런 제약이나 제한도 없는 그런 자유를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러한 자유를 방종이며 육체의 탐욕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자유의 가장 큰 역설은 “종이 되는 것”입니다. 육체적 종이 아니라 그 관계에 있어 종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사랑의 역설이기도 합니다. 사도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했으니 말입니다. ‘바울’이 자유에 대해서 전문가라면, 사도 ‘요한’은 사랑에 대해서 전문가입니다. 그는 사랑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요일 4:19), 다른 하나는 그것이 사람들과의 관계라고(요일 4:17) 말합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런 가르침에 착안하여 사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랑은 내 감정을 묘사하는 단어가 아니다. 사랑은 묵상하거나 토론하는 어떤 이상이나 추상적인 것이나 순수한 것이 아니다. 사랑은 사람들과 관련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거나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이다.” ‘유진 피터슨’, 199쪽.
‘바울’ 역시 이점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야말로 율법을 진정으로 성취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4절). 우리는 그의 이 말에 오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즉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함으로써 율법의 요구 조건을 만족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율법은 성취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기독교 생활의 결과인 것이지 전제 조건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행하며, 그것으로 율법의 모든 요구 조건을 만족시킨 것이며 성취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우리가 어떻게 아무런 수치심도 느끼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의 종노릇”을 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할 수 없다” 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을 때, 우리의 의지나 노력이나 결단으로 된 것이 아니듯이, 우리가 그 자유로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결단이나 의지로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려고 할 때, 그것은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는 이런 딜레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16절). 원어에 충실하자면 “성령과 함께 걸어라”가 됩니다. 달리 말하자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가 아니라, 그저 어떤 행동을 받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지시를 받을 때, 말을 들을 때, 사랑을 받을 때, 인도하심을 받을 때 등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아주 소극적으로 들립니다. “성령에 따라 행하는 것”이 마치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솜털 같은 구름 위에 앉아 구름이 가는대로 실려 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어느 날 갑자기 날개가 달려 하늘로 날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무슨 초 신령한 황홀경에 빠져 자신이 무엇을 하는 지도 모르는 상태도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런 계획도, 목적도, 방향도 없이 떠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성과 지혜와 성경과 전통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아주 적극적이며 의도적인 행동입니다. 이처럼 적극적으로 의도적으로 행동하는 것과 소극적이며 수동적으로 “인도를 받는 일”은 항상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성령에 따라 행하는 것”이 전하는 총체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만이 “육체의 탐욕”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에 따라 행하는 삶”은 “율법에 좇아 사는 삶”도 아니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삶”도 아닙니다. 중도나 중용의 삶을 의미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 율법에 좇아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중도를 걷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성령에 따라 행하는 삶”은 이 둘을 초월하는 전혀 새로운 대안이자 제 삼의 길인 것입니다.
토의 문제
1. 기독교 복음을 위협하는 두 가지 신학적 오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무엇입니까?
2. 본문의 형식이나 내용은 앞선 단락(5:1-12)와 어떻게 구별되고 있으며, 그 분위기나 톤은 어떻습니까?
3. 본문 이후 서신의 전체에 대한 두 가지 개괄적 권면이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무엇인지 밝혀내고, 이 둘의 기능과 둘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제 20과: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
20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5:19-26)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25절).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사도는 앞 단락(513-18)에서 “육체의 욕심”과 “성령의 행위”가 서로 대적한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제 그는 이 단락에서 “악한 행동”과 “선한 행동”의 목록을 만들어 나란히 대비시키면서 이 주제를 확장 및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이 두 목록을 각기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와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사도가 이 두 목록을 보여주는 목적은 이중적입니다: (1) 첫 번째 목록은 “육체의 일”이 빚어낸 결과로서, 자유를 기회로 삼아 방종으로 흘렀을 때(13절) 어떻게 되는지 부정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2) 두 번째 목록은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했을 때(16절) 어떻게 되는지를 긍정적으로 그리고자 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구조를 통해서 사도가 강조하고자 하는 결론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24절), 따라서 방종의 삶을 살 수 없다; (2) 성령으로 산다면 성령에 따라 행해야 하며(25절), 그의 삶에서 마땅히 성령의 열매를 드러내게 된다. 이 결론에 이어, “서로 노엽게 하거나 투기하지 말지니라”(26절)는 권면으로 이 단락은 끝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본문의 단락을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열거(19-23절)
(2) 결론(24-25절)
(3) 권면(26절)
형식과 구조. 사도가 이처럼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와 관련하여 열거하고 있는 악행(惡行)과 선행(善行)의 목록들은 현대 독자들에게 있어서뿐만 아니라 당시 독자들에게도 아주 친숙한 것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이분법적인 대조 병행의 형식을 통해서 보여주는 방식 또한 고대 ‘그리스’ 문헌에서 접할 수 있기도 합니다. 참고: R. N. Longenecker, 249-250쪽.
그렇다면 사도는 이들 목록을 기존의 ‘그리스’ 전승들에서 참고한 것일까?
흥미롭게도 <구약>에서는 선과 악에 관해서 본문에서처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는 곳은 없습니다. 다만 <구약>에서도 이처럼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여러 곳에서 다소 느슨한 형태로 선과 악에 관해서 이분법적인 구분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 물론 <구약>에서도 이처럼 체계적이지는 않지만 선과 악에 관한 일련의 목록이 느슨하게나마 있는 것은 사실이며(시 15:1-5; 잠 6:16-19; 8:13-14; 렘 7:5-9; 겔 18:5-17; 호 4:1-2), 두 행위에 관해서 철저하게 이분법적인 입장을 보여주고 있기는 합니다.
이런 경향은 포로기 이후 제 2 성전 시대에서 ‘유대주의’ 작가들이 ‘그리스’ 사상의 특징 즉 사물을 조직화 하고 체계화 하는 방법론의 영향을 받은 이후에 비로소 나타난 결과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가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유대’ 작가로서, 그는 물경 150여 가지에 달하는 선과 악에 관한 목록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일단의 유대 문학 작품들 속에 선과 악에 관한 목록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참고: R. N. Longenecker, 250-251쪽.
<신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외에도 <바울 서신>은 물론이고(롬 1:29-31; 13:13; 고전 5:9-11; 6:9-10; 고후 12:20-21; 엡 4:31-32; 5:3-5; 골 3:5-8; 딤전 1:9-10; 딤후 3:2-5; 디 3:3) <복음서>에도 이들 목록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막 7:21-22). 이들 목록이 초대교회에 이어 교부 시대에 이르기까지(2-3세기)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대화와 저서의 한 부분으로 이들을 다루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 목록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기독교인의 윤리∙도덕적 책임과 관련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회자되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침례 등과 같은 종교 의식을 행할 때에도 교육 내용으로도 포함시켰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가 이들 목록과 관련해서 21절에서 “이전에 그가 가르쳤던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선과 악에 관한 일련의 목록들이 그 기원을 멀리는 고대 ‘그리스’ 문헌에서 비롯하여 가깝게는 ‘헬레니즘’적 윤리 교육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만, 더 가깝게는 철저하게 이분법적 사고를 보여주고 있는 ‘유대’ 전승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상세한 논의는 R. N. Longenecker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251-252쪽.
아무튼 본문의 전승이 무엇이든 사도는 본문에서 “육체의 행위(일)”와 “성령의 열매” 사이에서 철저한 이분법적 사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두 목록(19-23절)
사도는 이전 단락에서(16-18절) “육체”와 “성령”은 상호 적대적인 관계에 있음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제 그는 이곳에서 “육체의 행위(일)”와 “성령의 열매”의 구체적인 예들을 제시해 보임으로써, 이 주제를 보다 심화 및 확대해 가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육체의 행위(일)”를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19절상)
과연 무엇이 분명하다는 말입니까? 연이어 등장하게 될 첫 번째 목록 속에 포함되는 일련의 행위들이 악한 것임을 굳이 “모세의 율법”을 들먹일 필요가 없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곳에서 “육체의 행위(ἔρϒον, 에르곤)”는 사도가 앞에서 “유대주의”의 위협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사용했던 표현 “율법의 행위”(2:16; 3:2, 5)를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추측컨대, 사도는 그가 이전에 “율법의 행위”를 비난했던 만큼이나 “육체의 행위” 또한 같은 강도로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호의를 입으려 하는 태도나, 자신의 자유로 방종의 기회로 삼으려 하는 태도나 하등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겠지요. 둘 다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어서 열다섯 가지에 달하는 악한 행위들을 열거하게 될 텐데, 이들 목록조차도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권면(13절하)을 보다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장치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19하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19하-21절상)
사도가 열거하는 악행의 종류는 구체적으로는 열다섯에 달하지만,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단지 일부에 불과할 뿐입니다. 일부 사본에서는 “우상 숭배”와 “살인”을 목록의 처음과 마지막에 더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과 조화를 이루려 시도하기도 합니다(막 7:21-22). 여러 학자들이 이 목록에 등장하고 있는 행위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해보려 시도했지만, 무슨 특별한 순서가 있거나 체계가 있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목록 속에 포함된 이들 행위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해 보려는 시도 가운데서, Lightfoot나 Burton의 방법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1) 성적 타락과 관련된 죄악(음행, 더러운 것, 호색); (2) 이방종교와 관련 된 죄악(우상 숭배, 주술); (3)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들(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분당, 분열, 이단, 투기); (4) 술 취함과 결과(술 취함, 방탕).
“음행”(πορνεία, 포르네이아)이 “육체의 행위”의 목록 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랑”(ἀϒάπη, 아가페)이 “성령의 열매”의 목록 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고 있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흥미롭습니다. “음행”은 말 그대로 비윤리적이거나 불법적인 성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서, 원래는 “매음 행위”를 의미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창녀”를 뜻하는 단어 ‘πόρνη’(포르네)는 “하녀를 팔다”는 단어 ‘πέρνημι’(페르네미)와 연관되어 있는데, 당시 창녀는 주로 하녀들을 매매해서 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매음행위는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원체 광범위 하게 행해지던 것으로서 과도하지만 않다면 크게 문제 삼지 않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도가 바로 이 행위를 목록에서 가장 먼저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사롭지 않게 보아야 할 이유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그런 사회에서 순결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 될 정도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ἀκαθαρσία, 아카다르시아)이 의미하는 바는 다소 광범위합니다. 단순히 육체적 더러움을 의미할 수도 있고, 의학적인 관점에서 청결하지 못하다거나, 종교∙의식적으로 불결하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으며, 도덕적으로 순결하지 못하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칠십인 역>의 <레위기>에서는 이 단어가 20여 회 정도 등장하고 있는데 모두 세 번째 의미와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신약>의 다른 곳에서나 사도가 일반적으로 의도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성적 내지는 도덕적인 더러움입니다. 사도가 이 단어를 성적인 타락과 연관시켜 사용하고 있는 용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롬 1:24; 6:19; 고후 12:21; 엡 4:19; 5:3; 골 3:5; 살전 4:7.
이러한 행위는 <구약>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호색”(ἀσέλϒεια, 아셀게이아)은 신학자 ‘바클레이’(W. Barclay)의 정의에 따르면, “무절제의 극치로서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나 다른 동료의 평가나 판단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고 죄에 탐닉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 단어는 <칠십인 역>의 정경 속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외경>의 여러 책에는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바울 서신>이나 <신약>의 다른 곳에서 이 단어를 성적인 죄와 연관해서 여러 차례 사용하고 있어 이곳에서도 같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벧전 4:3; 벧후 2:2, 7, 18; 롬 13:13; 고후 12:21; 엡 4:19).
“우상 숭배”(εἰδωλολατρία, 에이돌롤라트레이아)라는 단어는 <칠십인 역>이나 <요세푸스>를 비롯한 다른 작품들 속에는 등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같은 어원을 갖는 단어 ‘εἴδωλον’(에이돌론)은 <칠십인 역>이나 <신약>에서 “하나님의 형상”(행 7:41; 게 9:20)이나 또는 “형상화 한 신”(고전 8:4, 7; 10:19)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에게 있어 “우상 숭배”는 형상이나 또는 형상화 한 신에게 예배하는 행위 외에도, 보다 넓은 의미로 “탐심”이나 “탐욕”까지도 포함되고 있습니다(3:5).
“주술”(farmakeiva, 파르마케이아)은 “의약”을 뜻하는 영어의 ‘pharmacy’의 어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중립적으로는 단순히 의학적인 목적으로 약을 투여하는 행위입니다만,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약으로 사람을 오염시키는 행위를 뜻하기도 하고, 또는 약을 사용하여 주술이나 주문을 외는 행위를 말하기도 합니다. <칠십인 역>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하여, ‘바로’ 왕의 궁전의 마술사들과 연계해서 사용하고 있는가 하면(출 7:11, 22), ‘바벨론’의 주술사들을 지칭하는데 사용하기도 합니다(사 47:9, 12). <신약>에서 이곳 외에 이 단어를 유일하게 사용하고 있는 곳은 <계시록>에서입니다(계 9:21; 18:23).
“원수 맺는 것”(ἔχθραι, 에크드라이, 복수형)은 <신약> 외에도 <칠십인 역>이나 기타 ‘헬라’ 문헌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서 “적대감”, “증오심” 또는 “미움”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헤롯’과 ‘빌라도’ 사이의 적개심(눅 23:12), 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대적(롬 8:7; 엡 2:14; 약 4:4) 등을 의미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단어와 반대되는 의미의 단어는 ‘아가페’로 볼 수 있습니다.
“분쟁”(ἔρις, 에리스)은 고대 작가들 사이에서는 “다툼”, “불협화음”, “싸움” 등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신약>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아홉 번 모두 <바울 서신>에서만 등장하고 있습니다(롬 1:29; 13:13; 고전 1:11; 3:3; 고후 12:20; 빌 1:15; 딤전 6:4; 디 3:9).
“시기”(zh'lo", 젤로스)는 고전 ‘헬라어’에서 “거룩한 열정” 또는 “시기” 등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칠십인 역>이나 <신약>에서는 세 가지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이나 사람(들) 또한 어떤 사상에 대한 강렬한 헌신(민 25:11상; 왕상 19:10, 14; 시 69:10; 롬 10:2; 고후 7:7; 빌 3:6); (2)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헌신이나 열심 때문에 우러나오는 분노나 분개(민 25:11하; 겔 23:25; 행 5:17; 13:45; 히 10:27); (3) 타인의 행복이나 소유에 대해서 느끼는 질투나 투기심(롬 13:13; 고전 3:3; 약 3:14, 16). 본문에서의 용례는 이것이 “육체의 행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미루어 본다면 위 세 가지 용례 중에서 세 번째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분냄”(qumov“, 뒤모스) 역시 “시기”(zh'lo”, 젤로스)와 마찬가지로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두 가지로 다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칠십인 역>에서 약 70여회, 그리고 <요세푸스>에서 17회 등장하고 있는데, 좋은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용기” 또는 “기질” 등을 의미하며, 나쁜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분노”나 “분노의 발작” 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분노”나 “마귀의 분노”를 의미할 때 동시에 사용하고 있습니다(계 14:10, 19; 15:1, 7; 16:1, 19; 19:15; 12:12).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분노를 의미하는 용례로 사용되고 있으며(눅 4:28; 행 19:28; 히 11:27), 사도 또한 그러한 의미로 본문 외에도 여러 곳에서 사용하고 있기도 합니다(고후 12:20; 엡 4:31; 골 3:8). 그는 또한 한 곳에서 “하나님의 분노”를 말할 때 사용하고 있습니다(롬 2:8).
“당 짓는 것”(ejriqeiva, 에리데이아)은 “비열한 본성”이나 “이기주의” 등을 의미하는데 ‘헬라어’ 고전이나 <칠십인 역> 및 <요세푸스> 등에서는 그렇게 자주 나타나지는 않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이 단어는 원래 ‘에리듀오’(ejriqeu'w; 고용되어 일하다)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날품팔이의 일이나 성향과 관련이 있습니다(참고. 사 38:12 LXX). 그후 이 단어는 이익을 얻기 위하여 품위를 떨어뜨리는 이기주의자 또는 창녀 등의 의미로 변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에서 의미하는 바도 이런 것이며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로 2:8; 고후 12:20; 빌 1:17; 2:3; 약 3:14, 16). 사도에게 있어 “당 짓는 것”은 모든 덕목의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모든 죄악의 근원이 되는 사악한 악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분열함”(dicostasiva, 디코스타시아)은 ‘헬라어’ 고전에서 간혹 정치적인 의미의 “분당”이나 “분열” 등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요세푸스>에서는 이 단어는 나타나지 않으나, <칠십인 역>의 <마카비 상>에서는 ‘셀류시드’ 포고령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유대’인 사이에 있었던 분열을 의미할 때 한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이 단어가 이곳 외에 단 한 번 등장하고 있는 곳은 <로마서>(16:17)인데 사도는 여기서 교인들 사이에서 “분열”과 “분당”을 도모하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의 의미하는 바도 아마 이와 유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단”(ai{resi", 하이레시스)은 ‘헬라어’ 고전에서 다음 여러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붙잡기, 취함, 획득, 정복; (2) 선택, 선택의 기회; (3) 열망, ∼에 대한 욕구, 경향, 좋아함; (4) 목적이 있는 결정 또는 결심. <칠십인 역>에서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위 중에서 두 번째 것과 가장 가까우며, 후기 고전 작가들 특히 ‘헬레니즘’ 시대의 ‘헬라어’에 있어서 이 단어는 “철학적 경향”, “학파” 등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필로’(Philo)와 특히 ‘요세푸스’의 저서들은 이 명사들이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헬라’ 철학파에 기초를 둔 유대주의 내의 모든 종교 집단들, 곧 ‘에세네’파(Essenes), ‘사두개’파, ‘바리새’파들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유대주의”에서 ‘히브리’ 동의어는 ‘민’(min)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어떤 종파 그 자체를 나타내기보다는 “종파”의 구성원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이 단어의 의미에는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상당히 일반적으로 ‘유대’교 내의 파벌들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나 점점 나쁜 의미로 이단 종파를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던 것 같습니다. 주후 100 년경에 있었던 이 변화로 인해 마침내 주후 2세기 말에는 ‘민’(min)은 더 이상 ‘유대’ 사회 내의 집단들을 구별하는 데에 사용되지 않고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이나 영지주의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 것입니다. <신약>에서 “이단”은 9회 등장하고 있는데,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를 지칭하는데 사용하고 있거나(행 5:17; 15:5; 26:5), 또는 ‘유대’인의 관점에서 기독교인들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를 따르는 무리로 보았습니다(행 24:5; 24:14; 28:22).
“투기”(fqovno“, 프도노스)는 “시기”나 “질투” 등을 의미하는데, 종종 젤로스(zh'lo”, 질투)와 함께 사용되지만 여러 고전 작가들은 이 분명한 두개의 동의어를 신중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젤로스’를 타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정의하는데, 반면 ‘프도노스’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빼앗는 것과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칠십인 역>에서 4회, 외경 <마카베오일서>와 <지혜서>에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세상에 사망이 오는 것을 악마의 ‘프도노스’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지혜서 2:24; 마카베오일서 8:16; 마카베오삼서 6:7). <신약>에서 이 단어는 9회 등장하고 있으며 대개 “시기”나 “질투” 등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마 27:18; 막 15:10; 롬 1:29; 빌 1:15; 딤전 6:4; 벧전 2:10).
“술 취함”(mevqh, 메데)은 ‘헬라어’에서 주로 취하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플로티누스’(Plotinus)의 저술에서 신주(神酒)를 먹고 취하는 것은 신과의 신비적인 결합 상태를 묘사하는 데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지주의”에서 ‘술 취함’은 종종 참된 ‘그노시스’(gnosis)와 반대되는 ‘아그노시아’(agnosia)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칠십인 역>에서 이 단어는 13회 나오며, “술 취함”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사 28:7; 겔 22:33; 잠 20:10 등). ‘필로’의 저술에서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논문 <페리 메데스(peri methes)>에 있습니다. ‘필로’는 ‘메데’를 ‘데미우르고스 카콘’(demiourgos kakon)으로 묘사하며 ‘술 취함’을 대개 물질 세계의 노예인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혜롭게 술을 마심은 가치가 있으니 곧 긴장을 풀어주고 유쾌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술의 효력은 마시는 자에게 달린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이 단어는 여러 번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대개 ‘술 취함’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눅 21:34; 고전 5:11; 6:10; 엡 5:18; 살전 5:7).
“방탕함”(kw'mo", 코모스)은 ‘헬라’ 문헌에서 원래, ‘바쿠스’(Bacchus-술의 신)나 기타 어떤 신을 기리는 뜻에서 만찬 후 횃불과 음악을 곁들여, 거리를 줄지어 돌아다니며, 남녀 친구들의 집 앞에서 노래하고 노는, 흥에 겨운 친구들끼리의 떠들썩한 야간 행렬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부터 일반적으로 “밤늦게까지 지체하며 취흥을 탐닉하는 연회와 술잔치”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신약>에서도 이와 유사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롬 13:13; 벧전 4:3).
“육체의 행위”에 속하는 열다섯 가지의 목록을 열거한 다음 사도는 이러한 행위에 대한 궁극적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엄중하게 경고함으로써 첫 목록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 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21절하)
이 경고는 또한 예언적인 성격이 강하게 암시되기도 합니다. 즉 그 결과를 미리 예단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이처럼 엄중한 경고는 정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에 대한 경고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이전에도 경고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언제 그가 이런 일들에 대해서 가르친 바 있는지 알 길은 없지만, 불행하게도 같은 일이 다시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엄중한 경고에 이어 사도는 이제 “성령의 열매”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전에도 이에 대해서 가르친 바 있는지는 알 길은 없습니다만, 이 두 목록은 뚜렷한 대비를 보임으로써, “육체의 행위”가 얼마나 사악한 것인지를 더욱 드러나게 하고 있습니다.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절)
사도는 이곳에서 “육체”와 “성령”을 대조시키면서 “일”과 “열매”라는 두 단어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 이러한 구분은 상당히 의도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두 “일”과 “열매”는 나름대로 상징성을 갖고 있기는 합니다. 즉 “일”(행위)은 스스로의 노력을 수반하고 있는 반면, “열매”는 그보다는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성장의 결실 내지는 선물을 연상시켜줍니다. 그래서 “일”이나 “행위”는 “율법의 행위”나 “육체의 행위” 등에서 보듯이 율법이나 육체 등과 더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고, “열매”는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에도 얻을 수 있는 선물 내지는 수확이라는 점에서 “성령의 활동”과 관련해서 더 잘 어울리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 때문에 사도가 두 단어를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심음”이나 “거둠”이나 “열매” 등의 단어들을 “육체의 행위”와 연관시킬 뿐만 아니라 “성령의 행위”와도 연관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갈 6:7-8; 롬 6:21-22; 7:4-5). 반대로, “행위”나 “일” 등의 단어들을 비단 “육체”나 “율법”과 연계해서 사용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행위”와 연계해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갈 5:6; 6:4; 고후 9:8; 빌 2:12; 살전 1:3). 따라서 우리는 “일”과 “열매”의 상징성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그 의미를 구분하거나 해석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앞에서도 강조하였듯이 “성령에 따라 산다”는 것은 단순히 수동적이며 소극적으로 “성령의 인도와 보호 아래 살아간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성령과 함께 걷는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25절). 이 구절의 전반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If we live in the Spirit, let us also walk in the Spirit(RSV). 따라서 우리는 사도가 이곳에서 “(육체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를 의도적으로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두 행위의 결과들일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와 관련하여 소개하고 있는 아홉 개의 덕목들 또한 무슨 순서나 체계가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혹자는 셋 씩 군을 이루어 세 개의 군으로 나누어 그 의미와 성격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이런 시도는 어디까지나 인위적일 뿐입니다.
“사랑”(ajgavph, 아가페)은 명사형으로 동사 ‘아가파오’(ajgapavw, 사랑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성경 외의 문헌에서는 단 한번 발견되는데, 여신 ‘이시스’(Isis)에게 ‘아가페’라는 칭호를 붙여주고 있습니다. 명사 아가페는 <칠십인 역>에서 19회 등장하며 ‘아하바’(사랑)에 대한 번역어로 사용되어 “연애”(삼하 13:5), “남녀의 사랑”(렘 2:2)을 의미하고 있으며, <아가서>에서 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아 2:4 이하; 3:5, 10; 5:8; 7:6; 8:4 이하). <칠십인 역>이 의미가 복잡한 ‘에로스’보다는 오히려 단순한 단어인 ‘아가페’를 사용하는 것도, 인간의 모든 사상, 감정, 행위 그리고 예배가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에 대한 하나의 반응으로 보기 때문인 듯합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116회 등장하면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 인간의 사랑; (2) 하나님을 향한 사랑; (3)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4) 하나님과 그리스도 간의 사랑; (5) 교회에서의 친교의 입맞춤. 우리가 알다시피 ‘헬라’어에서 이 단어 외에도 사랑을 뜻하는 다른 단어들이 세 가지 더 있습니다: (1) 필리아(φιλία): 우정; (2) 에로스(ἔρως); 이성 간의 사랑; (3) 스토르게(στορϒή); 가족 간의 사랑.
“희락”(cara, 카라)은 “기쁨” 또는 “즐거움” 등을 의미하는데, <칠십인 역>에서 50 여회 등장하고 있으며, 주로 히브리어 심한(기쁨, 즐거움)와 사손(기쁨, 즐거움)의 역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59회 등장하고 있으며, 그 의미하는 바는 대체적으로 위와 같습니다.
“화평”(eijrhvnh, 에이레네)은 본래 사람들 사이의 관계(relationship)나 태도(attitude)를 의미하지 않고 상태(state), 즉 “평화의 때”, 또는 “평화의 상태”를 의미하며, 처음에는 순전히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상태에서의 한 막간(a interlude)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 단어는 전쟁에 반대되는 것, 혹은 전쟁의 종식으로부터 결과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평화는 복된 번영을 가져오도록 법과 질서가 유지되는 상태입니다. ‘에이레네’는 평화의 상태이며, 평화의 상태에서 땅과 백성을 위한 복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필레몬(Philemon)은 이를 최고의 선(supreme good)으로 격찬하고 있습니다. ‘에이레네’는 또한 평화 조약이나 평화의 타결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란, 소요의 정반대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평화적인(온화한) 태도, 즉 적의가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에픽테투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스토아’ 철학자들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에이레네’는 영적 평안이나 마음의 평안이라는 의미를 띠고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단어는 이들의 저작에 그리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아우구스투’(Augustus)가 지중해 세계를 지배한 ‘에이레네’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서 “구속”(redemption)을 동경하는 강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이 평화의 상태는 로마 황제가 군대의 힘으로 성취한 법적 또는 정치적 안정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250회 이상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 ‘샬롬’의 역어로 사용된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샬롬’에 대한 의미는 실로 다양한데,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다른 곳에서 참조할 수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생략하기로 합니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92회 사용되고 있으며, <요한 1서>를 제외한 모든 책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25회(마 4회, 막 1회, 눅 14회, 요 6회): <사도행전> 7회; <바울 서신> 47회; <야고보서> 3회; <베드로 서> 5회; <유다서> 1회; <요한 서신> 및 <계시록> 4회. <신약>에서 이 단어의 변화 또는 발전된 의미를 모두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그 형태와 내용에 있어서 <칠십인 역>과 <구약>의 전통을 착실히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랍비’ 문헌의 ‘샬롬’과 같은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추가로 고전 ‘헬라’어 문헌에 나타난 의미들이 그 영향을 미치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오래 참음”(makroqumiva, 마크로디미아)은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체념, 감수, 강제적인 수락; (2) 자포자기적인 인내; (3) 지연, 지체, 행동을 연기하거나 미루는 것; (4) 인내, 확고부동, 목적에 도달할 때까지 참음. 그리고 <칠십인 역>에서는 5회 등장하면서 ‘오래 참음’(잠 25:15 렘 15:15), ‘견딤, 확고부동’ 등 특히 고난과 재난을 참는 것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사 57:15; 마카베오일서 8:4). 그리고 <신약>에서는 14회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울 서신> 10회; <히브리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각 1회. 모든 경우 예외 없이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합니다.
“자비”(crhstovth", 크레스토테스)는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정직, 존경할 만함, 훌륭함, 가치 있음; (2) 친절, 우호(우정), 온화함(온유); (3) 통치자들과 공적 인물들을 위한 영예로운 호칭. 또한 <칠십인 역>에서 약 18회 정도 등장하고 있으며, 그 의미하는 바는 ‘선’, ‘의’를 지칭하거나(시 14:1, 3; 53:3), 하나님의 자비 및 친절한 성품과 행위 등입니다(시 25:7이하; 시 31:19 시 65:11 등). <신약>에서는 <비울 서신>에서만 10회 등장하고 있으며,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할 때나(롬 2:4; 11:22; 디 3:4) 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하여 사용할 때(본문, 고후 6:6) 공히 “자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양선”(ajgaqwsuvnh, 아가도쉬네)은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선함”(goodness)을 의미합니다. <칠십인 역>에서 약 16회 정도 등장하고 있는데, “자비”(crhstovth")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비울 서신>에서만 나타나고 있는데(롬 15:14; 엡 5:9; 살후 1:11), 이 경우 역시 “자비”와 유사어 이긴 하지만 “선함”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충성”(pivsti", 피스티스)은 <갈라디아서> 서신 전체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대한 인간의 “믿음” 내지는 “믿음의 반응”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만(갈 2:20; 3:6이하; 5:6), 이곳에서는 보다 윤리적인 의미의 “충성스러움”이라는 뜻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 단어를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신실함”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롬 3:3; 고전 1:9; 10:13; 고후 1:18; 살전 5:24; 살후 3:3).
“온유”(prau?th", 프라위테스)는 고전 ‘헬라어’어 문헌에서 “온유”, “친절”, “겸손”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극단, “과도한 분노”와 “전혀 분노를 모르는 것” 사이의 중용 정도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칠십인 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온유”나 “친절” 등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이 단어의 의미는 보다 발전되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내지는 “순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그러나 또 다른 의미도 역시 발견할 수 있는데, 상대방에 대한 “배려” “젊잖음”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고전 4:21; 고후 10:1; 갈 6:1; 엡 4:2; 골 3:12; 딤후 2:25; 디 3:2; 약 3:13; 벧전 3:15). 본문에서 의미하는 바도 이와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절제”(ejgkravteia, 엥크라테이아)는 ‘헬라어’ 고전에서 오래전부터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모두 이 단어를 음식이나 성에 대하여 지나치게 추구하는 행위에 대한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이에 대해서 길게 설명을 하고 있으며, ‘바울’의 시대에 이르러 이 단어는 ‘헬레니즘’ 윤리의 핵심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단어는 명사형으로든 또는 형용사 형으로든 <칠십인 역>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2 성전 이후 “유대주의” 문학 작품들 속에서는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명사형으로 이곳 외에 세 번 등장하고 있고(행 24:25; 벧후 1:6), 형용사 형으로는 한 번 등장합니다(디 1:8). 이 단어와 관련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단어가 “성령의 열매”의 목록 끝에 등장하고 있으며, “육체의 행위”의 목록 끝에 “방탕함”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성령의 열매”와 관련해서 사도가 더 말하고 싶은 것은 없을까요? 그는 앞에서 “육체의 행위”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이제 이곳 두 번째 목록에서도 “성령의 열매”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형식적으로 유사한,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반대되는 언급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3절하)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사도는 앞에서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5:14)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만, 이곳에서 “성령의 열매”와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의도하는 바는,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율법을 이루는 하나의 조건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수사적 효과를 위해서 당시 회자되고 있던 금언(또는 잠언)을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령의 열매”의 목록 속에 들어 있는 아홉 가지의 덕목은 무슨 새로운 기독교 윤리∙도덕적 책임으로서 이들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도 “덕”을 가리켜 “그런 사람을 이길 법은 없다”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살펴보았듯이 “육체의 행위”(19-21절)와 “성령의 열매”(20-23절)에 관한 두 목록은 “육체”와 “성령”에 관한 앞의 주제(13-18절)를 보다 확대하고 심화시킨 것입니다. 즉 “육체의 일”은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았을 때 나타나는 참담하고 어두운 결과이며, 반대로 “성령의 열매”는 자유를 사랑으로 남을 섬기는 기회로 삼았을 때 드러나는 긍정적이고 밝은 결과라는 점을 소상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목록이 기능하는 바는 이전의 내용을 발전시키고 심화시키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결론 제시를 위한 배경 또한 마련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24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24-25절)
결론은 이중적입니다. 첫 번째 결론은 24절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과 같은 의미로서, 이것은 두 표현 “그리스도의”(3:29)가 “그리스도 안에서”(3:26, 28)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결론인 즉은 ‘그리스도’인들은 “육체”(단순히 신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까지)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므로 그 육체뿐만 아니라, 그 속에 품고 있던 모든 탐욕들마저 죽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 결론은 25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결론은 “성령”에 관한 것입니다. 따라서 25절은 “육체”에 관한 결론을 다루고 있는 24절과 함께 본문 전체의 결론으로서 적절한 대조와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즉 24절은 19-21절에서 다루고 있는 “육체의 행위”에 관한 요약 설명으로 볼 수 있고, 25절은 22-23절 사이의 “성령의 열매”에 관한 요약 설명입니다: 그러나 이런 단락 구분과 관련해서 다른 견해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즉 24절은 이유나 원인을 가리키는 후치사(後置詞) δέ(데, 따라서)를 수반하고 있어, 앞 구절들과 내용면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만, 25절에는 그러한 접속사가 없어 24절과 적절한 연결 고리가 없기 때문에 25-26절을 새로운 단락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19-21절목록 1: 육체의 일
22-23절목록 2: 성령의 열매
24절결론 1: 육체
25절결론 2: 성령
이처럼 주제나 그 내용에 있어 24절과 25절은 각기 19-21절과 22-23절에 대한 한 쌍의 결론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25절은 구문론적인 관점에서 가정법과 명령문이 혼합된 것입니다: (1)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25절상); (2)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25절하). 그리고 이 구절은 형식에 있어 교차대구이며, 내용적으로는 금언의 일종이며, 복음의 사실과 명령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살다”(25절상)는 표현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만, 이와 유사한 표현은 앞에서 한 두 차례 등장한 바 있기는 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다”(16절); “성령의 인도를 받다”(18절). 그리고 전혀 다른 표현이긴 하지만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는 표현과 맥을 같이 하고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바울 서신>에서 신자의 체험과 관련해서 볼 때, 성령이나 ‘그리스도’나 하등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참고. 롬 8:9-11).
“성령으로 산다”는 표현이 다소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면, 이어지는 “성령으로 행하다”(25절하)는 신자 편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을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구절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기독교 신앙생활의 근원과 동기에 관한 것으로서, “율법주의”나 “자유방임주의”가 아니라 “성령의 삶”이라는 것이지요. 즉 우리는 율법에 따라 살아서도 안 되고, 자신의 육체를 따라 살아서도 안 되며, 오직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체”와 “성령”에 관한 사도의 결론은 이제 다소 엉뚱한 권면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26절)
이 구절 자체만으로 추론해 보건대 당시 교회 안에서는 여러 분파들이 반목하고 갈등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정확히 어떤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자신은 지금 누구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이점 수신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오늘 우리가 이 구절을 통해서 받는 인상은, 이 구절이 단락의 결론으로서 기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권면(6:1-10)에 대한 배경 내지는 서론으로서 역할도 감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이 구절은 이어지는 일련의 세부 권면들에 대한 일반적이거나 총괄적인 선언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필자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음악 시간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그것은 필자가 노래하는 것을 싫어해서가 아닙니다. 노래라면 어릴 적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면서 불러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아주 좋아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노래는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가곡이나 명곡이 아니라, 소위 성인 가요 즉 유행가였습니다. 그러니 무슨 계명이나 박자 따위를 알았을 리가 없고, 악보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들어와 음악 시간에 이렇게 신나게 노래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계명으로 노래를 부르라고 하고, 악보 읽는 것에 대해서 필기시험을 치러야 하고, 악보를 읽다가 틀리기만 하면 어김없이 회초리로 손바닥을 맞다 보니 음악 시간은 아주 지겨운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필자의 불만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냥 좋아하는 노래 부르면 그만이지 계명은 왜 필요하며 악보는 왜 필요한가? 왜 우리 선생님은 이렇게 밖에 가르칠 수 없단 말인가?”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필자는 자유를 원했던 듯합니다.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 자유 말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그의 책 <자유>에서 “자유에는 무한한 창조적 상상력과 에너지가 내재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시라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우리 또한 창조자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창조적 상상력은 과학이나 문학이나 예술의 영역에만 필요한 것이 아닌 듯합니다. 신학이나 신앙의 영역에서도 이것은 어김없이, 아니 그 어떤 영역에서보다 더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자유가 갖는 양면성 내지는 이중성 때문입니다. 이중성이라 함은 자유가 가져다주는 기회와 위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민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유를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인가? 자유를 나 자신을 섬기는 일에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으로 타인을 섬기는 일에 사용할 것인가?” 사도는 이 둘을 각기 “육체의 일(행위)”와 “성령의 열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일”과 “열매”는 나름대로 상징성을 갖고 있기는 합니다. 즉 “일”(행위)은 스스로의 노력을 수반하고 있는 반면, “열매”는 그보다는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성장의 결실 내지는 선물을 연상시켜줍니다. 그래서 “일”이나 “행위”는 “율법의 행위”나 “육체의 행위” 등에서 보듯이 율법이나 육체 등과 더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고, “열매”는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음에도 얻을 수 있는 선물 내지는 수확이라는 점에서 “성령의 활동”과 관련해서 더 잘 어울리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 때문에 사도가 두 단어를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심음”이나 “거둠”이나 “열매” 등의 단어들을 “육체의 행위”와 연관시킬 뿐만 아니라 “성령의 행위”와도 연관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행위”나 “일” 등의 단어들을 비단 “육체”나 “율법”과 연계해서 사용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행위”와 연계해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강조하였듯이 “성령에 따라 산다”는 것은 단순히 수동적이며 소극적으로 “성령의 인도와 보호 아래 살아간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성령과 함께 걷는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25절). 이 구절의 전반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가 이곳에서 “(육체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를 의도적으로 대조적으로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두 행위의 결과들일 것입니다.
두 목록. 그는 우선 “육체의 행위(일)”가 만들어 내는 참담하고도 어두운 결과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열다섯 가지에 달하는 “악한 행위”의 목록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목록은 무슨 체계나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전체의 일부일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한 순서나 체계도 없이 그냥 나열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도는 이들 목록 끝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덧붙임으로써 이 목록 속에 더 많은 “사악한 행위”들이 포함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들 행위 중에는 단순히 행음이나 우상숭배와 같은 육체적 행위뿐만 아니라, 분쟁, 탐심 등과 같은 영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들도 다수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이든 한 가지 공통점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았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히려 멀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행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점에 있어 “율법의 행위”와 똑 같은 결말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율법의 행위”는 모든 창조적 상상력이 필요 없는 삶입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열심히만 하면 됩니다.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고, 책에서 시킨 대로 하면 됩니다. 이런 삶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모범생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실패할 염려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대로 불구하고 이런 삶의 결말은 “육체의 행위”만큼이나 비참하고 황당한 것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분당과 분리와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그러나 “성령의 행위(열매)”는 무엇입니까?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런 삶을 자신의 충동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상상력이 이끄는 대로 사는 삶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삶은 각본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가 대본을 읽고 리허설을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실제 연극에서 맡은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노련한 배우라면 정작 무대 위에서 각본대로 하지 않을 경우가 많습니다. 대본에도 없는 일종의 ‘카텐자’를 집어넣어 극적 요소를 더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런 것과 유사하다 할 것입니다. 그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하고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향해서 “하나님을 알라”하고 가르칠 필요도 없습니다. 모두가 창조적 상상력을 다 가지고 거듭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창조적 삶에는 재료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재료가 필요합니다. 마치 미술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물감이나 붓이나 캔버스가 필요한 것처럼, 그리도 지휘자가 악기나 악단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그 재료란 다름 아닌 “성령의 열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인재;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그런대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성령의 열매”를 결과로서 이해하게 되면, 우리가 기대하는바 열매는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부; 복음 전도; 사회봉사; 과부나 고아를 돌보기 등등.
우리는 이 아홉 가지 열매가 실생활에 있어 어떻게 구현되는지 소상히 알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들 목록에서 드러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 방향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아홉 가지 재료를 열매로 규정하고 있는 사도의 유비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노력으로 열매를 생산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구입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또한 공로 상패나 메달이나 훈장처럼 무슨 훌륭한 일을 한 대가로 주는 것도 아닙니다. 열매들은 그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때로는 나 자신에게서 그것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결과를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경외심과 찬미와 두려움 가운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재료들이 과일과 비슷한 점은 또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부패하기 쉽다는 점에서 과일과 비슷합니다. 그것들은 상합니다. 보기에 싱싱하고 아름답지만 오래 전시해 둘 수 없습니다. 그것은 먹어서 소화시켜야 합니다. 과일은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영양소를 담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역시 창조적 삶에 꼭 필요한 영양소들입니다.
결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입니다. 창조적이지 않은 삶은 정욕과 탐심의 삶이고, 내적인 충동에 사로잡힌 삶이며, 잘 세워 놓은 계획과 예측 가능한 삶을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 하며, 정형화 된 행동을 모방하며, ‘맥도널드’ 회사의 ‘햄버거’처럼 대량 생산이 가능한 문화 속에서 자신을 맞추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창조적인 삶은 이러한 “육체의 소리”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창조적인 삶은 처음에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것, 즉 스스로를 의지하지 않은 것으로 시작합니다. 자신의 내적 충동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성령의 재료” 즉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모험과 위기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사도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25절). 즉 앞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이 구절의 전반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성령에 의하여 이끌리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성령과 함께 걸어가는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지향하는 바가 있다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수동적인 체념에서나 윤리∙도덕적인 책임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재료로 빚어내는 창조적 삶의 결과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기능은 무엇입니까?
2. 본문의 형식과 구조를 요약할 수 있겠습니까?
3. “육체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논의해 봅시다. “성령의 열매”가 창조적 삶의 결과라기보다는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한 재료로 보아야 한다는 설명에 대한 당신의 입장은 어떤 것입니까?
제 21과: 모두에게 선을
21
모두에게 선을
(6:1-10)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10절상)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5:16, 25상)이나,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5:18)이나, “성령으로 사는 것”(5:25하)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사도는 이곳에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지침들을 권면의 형식으로 제시함으로써 이들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이들 권면의 대상이 다소 불분명해 보이기는 하지만 대략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 개인적인 책임; (2) 단체적인 책임. 그러나 이들 권면만으로 구체적인 상황을 예단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즉 이들 권면이 구체적으로 교회 내의 어떤 실질적인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지 분명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자료와 편집. 따라서 본 단락의 목적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이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자는 이 단락이 <갈라디아서>와는 무관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권면의 내용이 일반적이며,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과는 직접적으로 연관도 없는 일련의 전통적인 경구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기껏해야 제 삼자가 사도의 원래 서신에 덧붙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갈라디아서>가 그 스타일에 있어 전혀 '유대'적이지 않다고 주장하기까지 하는데, 그 이유는 서신 전체적으로 적어도 30여 군데에서 다른 작가들의 편집적 손길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중 가장 긴 편집에 해당하는 본문이 5:13-6:10의 권면이라는 것입니다.
형식과 구조. 열 개의 절로 이루어진 본문의 구조와 관련해서도 견해가 분분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본문을 이루고 있는 일련의 권면들이 상호 내적인 관련성이나 일관성이 없다는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베츠(Betz)는 5:25-6:10 사이의 본문을 열한 개의 단락으로 세분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권면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서 “형제들아”의 호칭이 시작될 때마다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1:11; 3:15; 4:12; 4:28, 31; 5:11, 13; 6:18), 이곳에서부터 역시 새로운 권면이 시작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권면의 내용은 앞서 언급한 바처럼, 교회 내에서 개인적인 책임 및 단체적인 책임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물론 이들 권면이 어떤 특정 사안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라기보다는 일반적이고 다소 추상적인 면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도 자신은 물론 당시 수신자들에게는 이들 권면이 어떤 상황을 염두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 중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권면은 6절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아마도 이 구절은 독특한 지시사항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별도 취급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마찬가지로 10절 역시 별도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단순히 이 단락(6:1-10)의 결론으로서 뿐만 아니라, 5:13에서 시작한 권면 전체에 대한 결론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거니와, 이 단락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련의 권면들은 그 성격에 있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주로 윤리∙도덕적 경구들로서, 사도는 당시의 관례를 따라 이들을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이 권면 속에 채택하여 도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그는 5:19-23 사이에서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에 대한 예를 제시하기 위하여 당시 회자되고 있던 "악한 행위"와 "선한 행위"를 대표하는 일련의 목록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들 목록은 당시 세속 작가들이 그들의 글 속에 윤리∙도덕에 관한 지침과 대비를 위해서 사용하던 것들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6:1-10) 사도는 당시 세속 작가들이 사용하던 윤리∙도덕에 관한 일반적인 경구들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단락 내에서 적어도 네 곳에서 그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헬라어 성경>에서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 종속절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ㅇ이 모두 그러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이기 때문임이라(3절)
(왜냐하면) 각각 자기의 짐을 져야 할 것이기 때문임이라(7절하)
(왜냐하면)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기 때문임이라(7절하)
(왜냐하면)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기 때문임이라(9절)
누구나 인지하듯이 본문의 형식이나 내용과 관련해서 여전히 확실치 않은 부분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을 5장 전체의 권면에 덧붙여진 일종의 색인(索引) 정도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현재의 본문이 있는 그 자체로 새로운 일련의 권면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과 신앙
1. 연합적 책임들(1-6절)
사례 1: 실제 생활에서 “성령의 열매”가 “육체의 행위”를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구체적인 사례는 무엇일까요? 그 첫 번째 사례가 1절의 권면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로를 향한 책임 사례 1로 보면 될 것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1절)
이 첫 번째 권면은 문장의 구성상 세 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조건절(1절상); (2) 주절(1절중); (3) 양보절(1절하). 이 문장의 조건절은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한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이 문장의 동사 "드러나다"(prolambavnw, 프롤람바노)는 고대 '헬라' 문헌이나, <칠십인 역>, 그리고 고대 '유대' 문헌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미리 취하다"입니다만, 이후 능동형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예기하다" 또는 "예견하다" 등을 의미했으며, 수동형으로 사용될 때에는 "갑자기 사로잡히다", "갇히다" 또는 "부지불식간에 붙잡히다" 등을 의미했습니다. <마가복음>이나 <고린도전서> 등에서는 능동형으로 나타나고 있으며(막 14:8; 고전 11:21), 본문에서는 수동형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암시하는 바도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갇히게" 된 경우입니다. 물론 이 문장의 주어 "사람"(a[nqrwpo", 안드로포스)은 단순히 남성 단수로서 교회 내의 한 지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 내의 누군가 피치 못할 범죄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대답은 두 번째 절의 명령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여기서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서 “신령한 너희”라고 부르는 것은 무슨 냉소나 비웃는 태도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교회 내에 특별히 영적으로 더 신령한 무리가 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사도는 서신 전체를 통해서 반복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3:2-5, 14; 4:6, 29; 5:5, 16-18, 22-23, 25; 6:8), 따라서 '갈라디아' 교인 전체를 향해서 그렇게 부르고 있다고 믿을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들 교인들이 “율법주의”나 “방종”의 유혹에 놓여 있긴 하지만, 여전히 “신령한 자”로 불릴 수 있는 것은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을 소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바로 이런 자들에게 그들의 신분과 지위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령한 자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이 단어 역시 고대 '헬라' 문헌에서나 <칠십인 역>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만, <신약>에서 의미하는 바는 대략 세 자기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일반적인 상황에서 “그물을 원래 상태로 고쳐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다”(마 4:21; 막 1:19); (2) 종교적 문맥에서 “믿음을 완성하다” 또는 “온전하게 하다”(소후 13:11; 살전 3:10; 히 13:21); (3) 윤리적 상황에서 “도덕적으로 회복시키다”(고전 1:10). 본문에서는 세 번째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사도는 이곳에서 그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성령에 따라 사는 삶”(5:25)의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고 있는데, 즉 '그리스도'인이 도덕적 해이나 타락에 빠진 동료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이곳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대상은 죄에 빠져 있는 자들이 아니라, “신령한 자들”입니다. 이들이 취해야 할 행동과 태도가 그의 관심사인 것입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유대주의” 외에도 “자유방임주의”에서 오는 교만이나, 오만, 그리고 무관심 등입니다(이런 태도는 오늘날 교회에서도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만). 사도는 앞에서 온갖 형태의 죄악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지만, 이러한 태도 또한 악한 것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공공연한 도덕적 해이보다 공동체에 대해서 더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도 있는 것들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그는 “성령의 열매”가 어떻게 “육체의 일”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1절의 마지막 구절은 범죄에 빠진 동료를 회복시켜주려는 자가 저지를 수 있는 오류에 대한 경고입니다: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그 오류란 스스로 의로운 자라고 믿는 태도입니다. 사도는 여기서 누구든 자신의 연약함도 인정하라는 경고입니다. 이 문장에서 주어가 갑자기 그동안의 불특정 다수에서 이인칭 단수로 바뀌고 있는 것도 그의 경고를 극대화하기 위한 수사적 장치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례 2: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과 관련해서 가장 핵심적인 사안은 소위 “상호관계성”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개념이 2절 문장의 첫머리에 등장하고 있는 “서로”(ajllhvlwn, 알렐론)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절)
이 문장 속의 명사 "짐"(bavro", 바로스)은 문자적으로는 "무게"를 뜻합니다만, <신약>에서는 상징적으로 "무거운 짐"을 의미합니다(마 20:12; 행 15:28; 살전 2:7; 레 2:24). 이 문장 속에서 이 단어가 일차적으로는 "유혹"과 관련된 부담 내지는 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보다 일반적인 형태의 부담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롬 15:1; 고전 12:26).
“그리스도의 법”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는 관건은 5:13-6:10의 목적과 초점이 무엇인지 파악하는데 있습니다. 만일 이 단락을 “유대주의”나 “명목론”에 대항해서 그동안 사도가 전개해 왔던 일련의 논쟁이나 권면의 연장으로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의 법”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5:13-6:10의 단락이 방종에 대한 경고 내지는 권면으로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의 법”은 사도 자신이 고안해 낸 방종과 관련된 새로운 기독교 윤리의 한 표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짧게 요약하자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것” 내지는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 등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왜 서로 짐을 져야 합니까? 3절이 기능하는 바는 2절에 대한 근거나 이유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문장이 종속접속사 “왜냐하면”(gavr, 가르)으로 시작하고 있는 점을 통해서 이를 알 수 있으며, 동시에 3절은 하나의 경구(警句)로서의 기능을 하게 합니다(이와 동일한 기능을 5, 7, 9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3절)
이 구절을 당시의 '그리스-로마'의 경구로 받아들일 때, 사도는 이를 자신이 2절에서 밝힌 바 있는 “너희가 서로 짐을 서로 지라”는 권고를 지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선언에 도입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인 즉은, 스스로 속이는 행위란 다름 아닌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이런 생각은 다른 사람의 짐을 나누어지려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례 3: 4절의 전반부는 1절이나 2절처럼 형식상 경구나 명령으로 간주할 있을 것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4절상)
이 구절은 구문론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나 3절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이 문장의 주어 “각각”(e{kasto“, 헤가스토스)은 오히려 같은 주어로 시작하고 있는 5절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야 함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5절 설명에서 볼 것입니다). 이 문장의 동사 ”살피다“(dokimavzw, 도키마조)는 고대 '헬라' 문헌이나 <칠십인 역>, 포로기 이후의 고대 '유대' 문헌 및 <신약>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바울 서신>에서는 대략 아래 세 가지 상보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시험을 치르다, “조사하다”(고전 3:13; 11:28; 고후 13:5; 살전 5:21; 딤전 3:10); (2) “증명하다”, “증거로 받아들이다”(롬 2:18; 14:22; 살전 2:4; 고후 8:22); (3) “최선으로 생각하다”, “선택하다”(고전 16:3). 이 문장 속에서는 첫 번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살펴야 할 이유는 어디 있습니까?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해야 합니까? 4절 후반이 그 대답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4절하)
바로 이점에서 이 구절은 4절 전반부의 명령이나 지시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로 기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장이 부자 “그리하면”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도 4절 전반과의 상관관계를 잘 드러내주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즉 이 부사가 의미하는 바인즉, “만일 사람이 자신의 행동을 예의 관찰할 때” 그 다음 구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4절하). 이 문장 속의 명사형 단어 “자랑”(kauvchma, 카우케마)은 “자랑 거리”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고대 '헬라' 문헌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 <바울 서신>에서도 10여 차례 등장하고 있습니다(롬 4:2; 고전 5:6; 9:15; 고후 1:14; 5:12; 9:3; 빌 1:26; 2:16). “자랑할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있지 않다”는 말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업적을 비교 우위에 두고 자만하거나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5절은 3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유나 설명을 제시하는 접속사 “왜냐하면”(gavr, 가르)으로 시작하면서 앞선 4절과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또 하나의 경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각자는)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5절)
이 문장 속에 등장하고 있는 "짐"(fortivon, 포르티온)은 고대 '헬라' 문헌이나 <칠십인 역> 및 포로기 이후 '유대' 문헌 등에서는 흔히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단어는 배에 실은 "화물"을 의미하며(행 27:10), <복음서>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정해놓은 "율법의 짐"을 의미하며(마 23:4; 눅 11:46), 예수님 역시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마 11:30). 사도는 2절에서도 "짐을 서로 지라"는 유사한 권면을 한 바 있는데, 이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 "짐"(bavro", 바로스)은 그 의미는 유사하나 전혀 다른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다른 문맥이긴 하나 왜 사도는 이처럼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만, 어원이 다른 두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가능한 한 가지 설명은 2절은 사도 자신의 권면으로 볼 수 있지만, 5절은 일종의 경구로서, 다른 곳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구가 원래 의미했던 바는, 아마 고대 철학자들이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던 "자존" 내지는 "자립적" 생할 방식에 대한 지지나 옹호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는 이 경구를 인용하면서 4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는 권면에 대한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4절은 5절과 연결되고 있으며, 5절에서 도입하고 있는 경구는 그 기원이 비록 문맥과는 동떨어지긴 하나, 4절에 대한 설명 내지는 근거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례 4: 이 단락의 권면 중에서 6절의 권면은 그 형식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 가장 까다로운 곳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6절)
이 구절은 그 형식에 있어 전후 구절들과 사호 연결이 부자연스럽습니다. 이 권면과 관련될 만 한 어떠한 교훈이나 경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느닷없이 중간에 끼어든 형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7절의 경고는 6절의 권면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느낌을 줍니다. 그리고 이 구절이 사도 자신의 선교 사역을 위한 경제적 지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내용 또한 차이가 있습니다. 즉 그가 다른 곳에서 자신의 선교 사역을 위하서 모금에 대해서 언급할 때는 분명하게 자신의 권리에 대해서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9:3-14; 딤전 5:18). 이곳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바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에게 물질적 지원을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권면마저도 자신에 대해서는 권리를 포기한다고 말할 바 있으며(고전 9:15-18; 살전 2:9; 행 20:33-35), 따라서 그런 지원을 받았을 때 당혹스러워 했던 것 같습니다(빌 4:10-19). 그런 그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행해서는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나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자신을 위해서 물질적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회에서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에 대한 지원을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권면은 그가 다른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재정적 지원과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입장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처럼 이 구절이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전체 문맥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상관없다고 단정지울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이 단락의 첫 두 절(1-2절)이나 마지막 두 절(9-10절)은 모두 상호 협력이나 도움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도나 당시 교인들 외는 정확하게 이 구절이 오해 필요했는지에 대해서 아무도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기도 합니다. 다만 몇 가지 확실한 점들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1) '갈라디아' 교회 내에서 적어도 공식적인 기독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2) 교회 내에서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로 불리는 두 계층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3) 교육 내용은 기독교 복음이었을 것이다; (4) 가르치는 일은 아마 전임 사역 내지는 그 정도의 시간을 요하는 일로서 재정적 지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5) 어떤 이유에서든 교회 내에서 가르치는 자들이 충분히 보상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6) 이러한 잘못을 바로잡아 배움을 받는 자들이 재정적 지원을 하는 일이 그들이 져야 할 책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재정적 지원에 관한 이 권면의 역사적 배경이 무엇이든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원리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2. 개인적 책임들(7-9절)
내용 상 주로 개인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이 세절은 경고와 설명에 이어 호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들 각각을 다시 수사적 특징과 더불어 세분해 보면 여러 작은 단위들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 서론적 권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7절상)
(2) 잠언 형식의 경고: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7절중)
(3) 경고를 지지해 줄 전형적인 경구: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7절하)
(4) 육과 영에 관한 사도 자신의 해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8절)
(5) 경고와 해설이 이은 호소: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9절상)
(6) 호소를 지지해 줄 또 하나의 전통적인 경구와 그 호소에 귀 기울였을 때 얻게 될 약속: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9절하)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수동태 형의 명령문은, 당시 '헬라' 문헌에서나 또는 <신약>에서(고전 6:9; 15:33; 약 1:16; 눅 21:8) 흔히 사용하는 관행적 표현으로서, 어떤 엄숙한 경고를 주기 전에 갑자기 발하는 일종의 서론적 감탄사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 등장하고 있는 경고는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 하신다”는 잠언 또는 격언 형태의 선언입니다. 이 문장의 동사 원형 “뮉테리조”(mukthrivzw)는 “비웃다” 또는 “조롱하다”는 의미로서, <칠십인 역>이나 포리기 이후의 '유대' 문헌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신약>에서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이 경구는 사도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이전의 문헌에서 그가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사도가 이런 경구를 이곳에서 도입하고 있는 목적은 8절에서 이 경구에 대한 덧붙이기 전까지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만, 7-8절 두 절을 통해서 요약해 보자면, “누구든 육체로 심고 영생을 기대한다면, 하나님의 공의를 조롱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은 결코 그런 식으로 조롱받을 분이 아니라”는 선언일 것입니다.
이어서 등장하고 있는 또 다른 경구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7절하)는 앞선 경고를 지지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은 이 문장을 접속사 “왜냐하면”(gavr, 가르)으로 시작하고 있어, 앞선 경고에 대한 이유나 설명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 문장이 다른 곳에서 인용해 온 경구임을 드러내 주는 기능 또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 5, 9절에서도 동일한 접속사를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경우는 모두에게 익히 알려진 농사에 관한 경구로서,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칠십인 역>이나 포로기 이후의 '유대' 문헌에서 광범위하게 등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울 서신>이나 <신약>의 여타 책에서도 볼 수 있기도 합니다(고전 9:11; 고후 9:6; 눅 19:21-22; 요 4:35-36). 사도가 이 격언을 통해서 강조하고자 바는 두 가지 정도일 것입니다: (1) 심음과 거둠에는 직접적인 인과 관계가 있으며, 이는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법칙이다; (2) 이처럼 하나님은 스스로 제정해 놓으신 법칙을 되돌리거나 또는 그러한 하나님을 속여 그 법칙을 거스려 작동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인생을 축복으로 끝낼 것인지 또는 저주로 끝낼 것인지는 각자의 책임 소관이다.
“심음과 거둠”에 관한 이 인과응보적인 법칙에 대해서 사도는 8절에서 자신의 신학으로 해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 법칙이란 “육체와 성령”에 관하여 그가 앞에서 전개한 이분법적 논리를 말합니다(팜고 5:16-25):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8절). 사도는 이 해설에서 농사에 관한 경구를 우화(알레고리)의 경지로 변모시키고 있습니다. 즉 농부가 시앗을 마치 두 가지 다른 토양에 심듯이, “육체”와 “성령”을 그 두 가지 토양에 대한 알레고리로 삼고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의 8절에 대한 정확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의 육체에 씨를 뿌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에 뿌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리고 두 가지 다른 토양으로부터 두 가지 다른 열매를 내듯이 육체와 성령은 각기 다른 열매 즉 “멸망”과 “영생”을 맺게 된다고 덧붙입니다. 성령과 영생을 연계시키고 있는 것은 “성령에 따라 사는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5;16, 18, 22-25). 반면 육체와 멸망의 관계는 사도가 앞에서 육체에 관하여 언급한 내용(5:16-22)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물론 “육체의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5:21하) 속에 이와 관련된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는 합니다.
육체의 토양에 심는 씨앗은 무엇입니까? 사도가 앞 단락에서 언급한 바 있는 일련의 육체의 행위 즉 방종의 행위들일 것입니다: “투기”; “다툼”; “술수”; “교만”; “상대를 돌아보지 아니함.” 이러한 행위는 단순히 자유를 잘못 사용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멸망을 자초하는 행위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경고와 해설에 이은 구체적인 적용 사례가 호소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9절상). 이 문장이 접속사 "그러므로"(de, 데)로 시작하면서, 이 호소가 앞선 경고와 해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달리 번역하자면 "따라서" 또는 "이에 따라" 등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선한 일)은 기독교인이 행해야 할 그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으로서, "성령의 열매"(5:22-23)나 "성령을 따르는 것"(5:25)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 문맥 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 6:1-6 사이에서 권하고 있는 일련의 명령들일 것입니다: (1) 범죄한 자를 바로 잡아주는 일"(1절); (2) "짐을 서로 지는 일"(2절); (3)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 재정적 후원을 하는 일"(6절).
이 문장의 동사 “낙심하다”(ejgkakevw, 엥카케오)는 고대 문헌이나 <칠십인 역>이나 고대 '유대' 문헌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신약>에서만 여섯 군데 정도 보이고 있습니다(눅 18:1; 고후 4:1, 16; 엡 3:13; 살후 3:13). 사도가 염려하고 있는 바는, '갈라디아' 교회가 처음에 잘 시작하였다가(3:2-5; 5:7), 점차 “성령에 따라 삶”에 대한 열의나 흥미를 잃어버리고, 그 대안으로 “유대주의”로 되돌아가거나 또는 방종으로 마감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방종의 첫 징조는 타인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유익에만 탐닉하는 일일 것입니다. 사도의 호소는 바로 이런 태도를 향한 것입니다.
그의 호소를 보다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사도는 다시 한 번 당시 잘 알려진 경구(격언)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되면 거두리라"(9절하). 이 문장 역시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3, 5, 7절), 이유를 뜻하는 "왜냐하면"의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구는 단순히 그의 호소를 지지해 줄 뿐만 아니라, 희망에 찬 약속을 보장해 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 알 수는 없으나, 언젠가는 분명히 올 것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문장의 동사 “거둔다”(qerivzw, 데리조) 역시 7-8절에서 사용한 농사의 이미지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 동사의 시제는 미래형으로서 약속이 이루어질 때가 미래의 불분명한 시점임을 시사해 줍니다. 그러나 사도의 관심사는 그 약속이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가 아닙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은 어김없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과 성령의 밭에서 거두어들일 필연적인 결과에 대한 것입니다. 이 문장의 또 다른 동사 “포기하다”(ejgkakevw, 엥카케오)는 고대 '헬라' 문헌에서는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이기는 합니다만, <신약>에서는 주로 수동형으로, “지치다”, “피곤하게 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마 15:32; 막 8:3; 히 12:3, 5). 사도에게 있어 영생의 열매는 단순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자의 대응하는 행위, 즉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행위에 올바르게 대응했을 때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인내라는 성령의 열매가 그 구체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3. 결론(10절)
이 모든 경고와 호소에 이은 마지막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10절)
이 문장은 두 접속사 “이제”(a[ra, 아라)와 “그러므로”(ou+'n, 운)를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결론으로서의 기능을 강화시키고 있습니다. 이들 접속사는 사도의 서신 여러 곳에서 동일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롬 5:18; 7:3, 25; 8:12; 9:16, 18; 14:12, 19; 엡 2:19; 살전 5:6; 살후 2:15). 그러나 <개역 성경>이나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에는 이 두 접속사를 구분하지 않고, 단순히 “그러므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6:1-10의 본문에 대한 결론이 될 뿐만 아니라, 방종에 관한 권면 전체 본문(5:13-6:10)의 결론이 되기도 합니다. 동시에 이 구절은 5:13과 함께 전체 권면의 “수미상관”의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5:13)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6:10)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서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단순 지시형으로 인식하여, “우리에게 기회가 있으니”로 해석하는 것이고, 둘째는 가정형으로 인식하여 “우리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떻게 해석하든 결과적으로 큰 차이는 없습니다. 다만 이 문장에서 “기회”로 번역하고 있는 명사 “카이로스”(kairov“)가 의미하는 바는, ”결정적인 순간“(때)”, “하나님이 주신 기회” 또는 “절호의 순간” 등입니다. 이로 미루어 사도에게 있어 성도들의 “선행”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차원이며, 기독교인이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는 듯합니다.
이 권면의 대상은 일차적으로 전 포괄적이며 보편적입니다: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10절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이 전 인류를 향한 것이라면, 기독교 공동체의 관심사 역시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 윤리의 보편성이 있습니다. 즉 기독교인은 민족적, 국가적, 문화적, 사회적, 성적, 신분적, 심지어 종교적 차이마저 뛰어넘는 보편적 사랑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본문 속의 “모두에게”가 의미하는 바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은 다소 역설적으로 들립니다: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10절하). 마치 앞선 선언을 제한하거나 유보하는 것처엄 들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은 정 반대일 것입니다. 인류를 향한 우리의 보편적 관심사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동료 교인들에게는 더욱 많은 관심과 배려를 쏟아야 한다는 권면인 것이지요. 영어 격언에도 “자비는 집에서부터 출발한다”(Charity begins at home)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사도에게 있어 동료 기독교인은 "믿음의 가정"(oivkei'o", 오이케이오스)입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믿음의 공동체 또는 교회에 대한 상징으로서 이처럼 건물의 이미지를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엡 2:19; 고전 3:9-17; 고후 6:14-16; 엡 2:19-22).
교훈과 적용
짐을 서로 나누어지라. ‘마르틴 루터’는 그의 논문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완벽하게 모든 만물의 자유로운 주인이며 그 어느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완벽하게 모든 만물의 충성스러운 종이며, 모든 것에 종속된다.” 자유에 관한 역설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말하는 이 자유와 구속은 결국 “성령의 삶”이 보여줄 수 있는 이중적인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든, “성령의 열매를 드러내는 삶”이든, “성령 충만의 삶”이든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 없다면 공허한 신학 용어에 불과하거나 또는 종교적 신비주의로 전락하고 말 것들입니다. 그 현장은 다름 아닌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대원칙은 “짐을 서로 나누어지라”는 것입니다. 이 대원칙을 적용할 구체적인 적용 사례 중에는 혹시 잘못에 빠진 동료 ‘그리스도’인에 대한 태도와 행동에 관한 것이라든지,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 대하여 재정적이고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라든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지 말라는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유와 독립은 모든 사람의 목표입니다. 경제적인 자유, 사상의 자유, 활동의 자유, 등등... 그러나 이 둘은 때로 뜻밖의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고립과 외로움이 그것입니다. 도움이 필요 없게 되니까 동료가 필요 없게 되어 버립니다. 부모가 필요 없고, 친구가 필요 없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필요 없게 되어 버리는 아주 외롭고 고독한 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독립이 낳는 또 다른 뜻밖의 결과는 자립과 자족을 넘어선 자만과 무관심입니다. 자만의 증세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남의 도움을 전혀 받으려 하지 않는 증세와 남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않으려 하는 증세가 그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자칭 의로운 자의 전형으로서 스스로 속이는 행위입니다. 스스로 속인다는 말 속에는 조롱과 해학의 의미도 함축되어 있습니다. 남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속이고 있으며,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그가 속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필자의 학과에 한 동료 교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늘 다른 교수들에게 학과의 화목을 강조합니다. 양보와 상생의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신임 교수를 채용하는 공개적인 발표회장에서까지 응시자들에게 이점을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즉 혹시 채용된다면 학과에서 그가 강조하고 있는 바대로 보조를 맞출 수 있겠느냐고 질문합니다. 그가 종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장 종교적인 메시지를 설파하고 다닌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더욱 기가 찬 아이러니는 바로 이자야말로 그가 속한 학과를 가장 소란하게 하며, 분열과 갈등의 최대의 원인 제공자라는 사실입니다. 주변의 모두가 그렇다고 말하고 있는데도 본인만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자신이 화평의 사도인양 생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가 말하는 화평은 결국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며, 여타 교수들의 양보와 침묵을 담보로 자기 뜻대로 학과를 이끌어갈 수 있는 그러한 강요된 화평을 말하는 것임을 그는 모르고 있다는 것이지요. 공동체의 화평이니 화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렇게 목을 걸고 있다면 스스로 잘하면 그만인 것이겠지요. 양식과 상식에 입각해서 내가 그렇게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혹시 다른 사람이 먼저 모자를 벗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 사람은 여전히 그것을 모릅니다. 그의 자유는 방종으로 흘러가 버렸는데, 아무도 그를 제어하거나 제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스승이나 선배 교수님들이 모두 그냥 오냐오냐 하며 넘어왔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근원적인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에게는 “성령”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 것도 되지도 못하면서 된 줄로 착각하며 스스로 속이는 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의 선물이긴 하지만, 동시에 “성령을 따라 삶”에는 인간의 자연적인 반복되는 훈련이라는 차원이 있기도 합니다. 영생의 열매도 단순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자의 대응하는 행위 즉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행위에 올바르게 대응했을 때 맺게 될 것이라고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인내라는 성령의 열매가 그 구체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계속적으로 행하는 일에는 인내와 끈기가 따릅니다. 당연히 피곤함과 실의와 초기에 가졌던 기대와 흥분이 쉽게 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의 목장 모임에서 우리는 이점을 너무 자주 경험하고 있습니다.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기다려도 별 반응이 없습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힘이 빠집니다. 그러나 사도는 우리에게 약속합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거두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자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 어떤 대가도 기대하지 않는 절대적인 자유 말입니다.
결론. 우리는 계속해서 선을 행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운 존재들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관심사는 모든 인류입니다. 단순히 유대인이나 교회만이 아닙니다. 그분의 관심사가 전 인류를 향한 것이라면, 기독교 공동체의 관심사 역시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즉 기독교인은 민족적, 국가적, 문화적, 사회적, 성적, 신분적, 심지어 종교적 차이마저 뛰어넘는 보편적 사랑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슬람’ 교인들이나 불교도를 사랑해야 하며 그들이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도와야 하는가 하고 물어볼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모든 이에게”라고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모두를 사랑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자유스러운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또한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말합니다. 마치 앞선 선언을 제한하거나 유보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이기적이지 않습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는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가게에서 복권도 함께 팔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은 늘 복권에 가 있습니다. 대박을 터뜨리면 이 지긋지긋한 구멍가게를 그만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도 이런 한 건 주의가 늘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선교하면 늘 해외 선교를 염두에 둡니다. 선행과 나누어주는 일도 아프리카에 있는 빈민들을 대상으로 하고 싶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 ‘아프카니스타니투스’(Afghabistanitus)라고 합니다. 그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도덕적인 질병으로 오염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선하고 관대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하지만 늘 좀 더 가치 있고 극적인 순간을 기다립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도덕 근육은 쇠퇴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은 축소되고 맙니다.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권면이자 모든 권면의 결론에 해당하는 이 구절이 이 질병에 대한 치유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6:10).
이 구절 때문에 때로 ‘그리스도’인들이 이기적이며 자기들 밖에는 모르는 족속들이라는 비난을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매일 친구나 가족을 돌보는 일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이방인들을 돕는 꿈을 꾸는 것입니다. 먼 곳에 있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은 우리 자신도 덜 필요하고, 덜 관여해도 되고, 덜 긍휼을 가져도 됩니다. 아주 말많고 귀찮은 이웃 사람의 짐을 나누어지는 일보다 아프리카의 난민에게 수표 한 장을 끊어주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수표 한 장을 끊어주는 일은 한 번에 끝나는 것이지만, 귀찮은 이웃과는 매일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도 자기 시간의 99%를 이방인이 아니라 동료 유대인을 위하여 사용했습니다. 해외 선교는 국내 선교의 연장인 것이지 국내 선교를 면제 받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교회에서 국내∙외 선교비를 보내면서도 정작 공동체 내의 어려운 가족이나 지체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 역시 본말이 전도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이 구절이 강조하는 바는, 인류나 먼 이웃을 향한 우리의 보편적 관심사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동료 교인들에게는 더욱 많은 관심과 배려를 쏟아야 한다는 권면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자신의 가족보다 교회 식구를 더 사랑하는 교인, 같은 교회의 식구들보다 다른 교회 식구들을 더 사랑하는 교인, 가까운 이웃보다 먼 이웃을 더 사랑하는 교인들을 향한 권면입니다.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기능은 무엇입니까?
2. 이 단락의 결론은 결국 5:13-6:10 전체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당신 자신의 말로 요약 및 정리해 봅시다.
제 22과: 추신
22
추신(追伸)
(6:11-18)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11절)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본문은 <갈라디아서>의 “추신”(追伸) 내지는 후기(後記)에 해당합니다. 다른 <바울 서신>의 경우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서신의 본체(本體)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대부분의 <바울 서신>에 대한 연구는 주로 서신의 “인사말”이나 본체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는 서신의 처음과 끝 부분은 주로 수신자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한 목적으로 쓰는 것이니만치 특별히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추신”에 대해서만큼은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는 달리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특히 <갈라디아서>에서 이 단락의 분량이 많고 길 뿐만 아니라, 담고 있는 내용 또한 단순히 인사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신의 본체의 내용과 직접적으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컨대, <갈라디아서> 연구의 대가로 알려져 있는 ‘라이트풋’(J. B. Lightfoot)은 이 단락의 기능과 관련해서, “다소 서툴고 서로 연결이 잘 안 되긴 하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일련의 문장들이 서신의 본체를 요약하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 외에도 여러 학자들이 그를 따라 이 부분에 대해서 비슷한 결론을 내린 바 있습니다. R. N. Longenecker, 286쪽.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베츠’(H. D. Betz)는 “추신”이 서신의 전체 내용을 요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를 해석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한 바 있기도 합니다. 이 단락이 서신 전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바울’의 주요 관심사와 그의 의도를 이해하고 파악함에 있어 주요 단서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단락에 대한 ‘베츠’의 극찬은 다소 과하다는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서신의 형식이나 구조를 통해서 볼 때 전혀 틀린 말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형식과 구조. 대부분의 <바울서신>에서 “인사말”과 마지막 “추신”은 그 기능하는 바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역순(逆順)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즉 서신의 벽두에 등장하는 “인사와 감사”는 앞으로 전개할 내용을 사전에 예고하고 지시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추신”에서는 앞에서 다룬 내용들을 다시 정리하고 요약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갈라디아서>는 <바울 서신> 중에서 “감사”가 없는 대표적인 서신이긴 합니다. 그러나 굳이 비교해 보자면, 전형적인 인사는 아니지만 서신의 “목적과 동기”(1:6-10)을 “추신”(6:11-18)과 나란히 놓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목적과 동기”에 대한 간략한 진술이 있은 다음 서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책망과 권면”이 뒤따르고 있으며, 다시 “추신”에서 이 내용을 요약 및 정리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바울서신>의 “추신”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일련의 특징들이 있습니다. 이중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은혜의 축도”로서 대부분의 그의 서신의 말미에서 이를 볼 수 있습니다: “은혜가...있을지어다”(롬 16:20절하; 고전 16:23; 고후 13:14; 갈 6:18; 엡 6:24; 빌 4:23; 골 4:18하; 살전 5:28; 살후 3:18; 딤전 6:21하; 딤후 4:22하; 디 3:15하; 몬 25). 이에 못지않게 자주 만나는 표현은 “인사말”로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및 <디모데전서>를 제외한 그의 모든 서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인사말에서 사용하는 상투적인 표현은 “문안하노라”(ajspavzomai, 아스파조마이)로서 그 주어는 일인칭 단수이거나(롬 16:22), 이인칭 복수(롬 16:3-16; 고전 16:20하; 고후 13:12상; 빌 4:21상; 골 4:15; 살전 5:26; 딤후 4:19; 디 3:15), 삼인칭 단수나 복수(롬 16:16하, 21, 23; 고전 16:19-20상; 고후 13:12하; 빌 4:22; 골 4:10-14; 딤후 4:21하; 디 3:15상; 몬 23), 또는 ‘바울’ 자신이 되기도 합니다(고전 16:21; 골 4:18; 살후 3:17).
그의 서신의 “추신”에서 세 번째로 볼 수 있는 특징은 소위 “화평의 축도”로서, 이 역시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평강이...있을지어다”(롬 15:33; 16:20상; 고후 13:11하; 갈 6:16; 엡 6:23; 빌 4:9하; 살전 5:23; 살후 3:16). 그리고 네 번째 특징은 ‘바울’ 자신의 “자필 서명” 내지는 “그가 직접 손으로 쓴 것”에 대한 언급을 들 수 있습니다. 이에 관한 언급은 모두 다섯 번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데, 모두 동일한 표현입니다: “내 손으로”(고전 16:21; 갈 6:11; 골 4:18상; 살후 3:17; 몬 19). 다섯 번째 특징은 “결론적인 권면”으로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서신의 본론에서 다룬 바 있는 내용을 요약한 것일 수도 있고(고전 16:13-19, 22; 고후 13:11상; 갈 6:12-17), 또는 수신자들의 공동체 내에서의 관계에 관한 부수적인 내용들일 수도 있습니다(롬 16:17-19; 빌 4:8-19; 골 4:16-17; 살전 5:27; 딤전 6:17-21상; 딤후 4:21상; 디 3:12-14). 이들 권면 중 세 번에 걸쳐 “기뻐하라”는 권면을 볼 수 있습니다(롬 16:19상; 고전 16:17-18; 빌 4:10-19). 그리고 기도에 대한 부탁(롬 15:30-32; 엡 6:18-20; 골 4:3-4; 살전 5:25; 살후 3:1-2)과 송영(送迎)을 볼 수 있습니다(롬 16:25-27; 빌 4:20; 딤전 6:16; 딤후 4:18). 다만 마지막 두 요소는 <바울 서신>에서 “추신”의 일부로 굳어진 형식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합니다. 물론 <갈라디아서>에서는 이 두 요소가 ““추신”에서는 빠져 있어, 이에 대한 논의는 불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에서 독특하게 볼 수 있는 “추신” 또는 “후기”(後記)의 특징들은 무엇입니까? 우선 “문안 인사”가 빠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본 연구의 서론에서 밝힌 바처럼 사도와 수신자들 간에 현존하는 긴장 때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뻐하라”라든지 기도 요청이라든지 송영도 모두 빠져 있습니다. 사도와 수신자들 사이에 친밀함이나 감사를 전혀 느낄 수 없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에서 <바울서신>의 “추신”이 갖는 전형적인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필 서명”에 관한 언급은 단골 요소라고 소개한 바 있습니다만(고전 16:21; 골 4:18상; 살후 3:17; 몬 19), 특히 이곳에서는 “큰 글자”로 서명했다는 점이 특이하게 보입니다(11절). 그리고 결론적 선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12-15절의 단락에서 앞에서 다룬 바 있는 주요 주제들을 다시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쁨과 감사와 같은 단골 메뉴가 아니라 오히려 경고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합니다. 이 선언의 절정은 축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만(16절), 이 역시 제한적이고 조건적인 것이, 곧바로 이어서 경고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7절).
본문은 다른 <바울 서신>에서 보여주고 있는 “추신”들에 비해서 더 직접적으로 서신의 주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 단락의 특징을 네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자필 서명(11절)
(2) 권면(12-15, 17절)
(3) 축도 1: 평강(16절)
(4) 축도 2: 은혜(18절)
이 네 가지 요소를 통해서 사도가 서신 전체, 특히 1:6-5:12 사이에서 다루고 있는 “유대주의”의 위협과 관련하여, 그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추신”은 서신의 본체(1:6-6:10)의 내용에 무엇인가 관례적으로 더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고대 ‘헬라’ 사회에서 편지의 말미에 “추신”의 형식으로 이런저런 내용들을 첨가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긴 했으나, 이곳에서처럼 특별히 발신자 자신의 주된 관심사나 가르침을 추가하고 있는 경우는 상당히 이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락은 서신의 이전 내용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프리즘 내지는 지침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Betz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이 단락은 ‘바울’ 사도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적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자필 서명(11절)
사도 당시 ‘헬라’ 사회에서 편지는 대개 두 가지 스타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것은 필경사나 비서가 대필을 한 것으로서 아주 정교하고 체계적이며 공식적인 스타일이며, 두 번째 것은 발신자 자신이 추신 또는 추서에 직접 손으로 써넣어 다소 조잡하고 비사무적인 스타일입니다. 대부분의 <바울 서신>들은 전자에 속하지만, 이 때 대필자는 사도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동료 신자들로서 교회 안에서 대필의 소양이나 능력을 갖춘 자들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11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11절)
이 명령문의 동사 “보라”(ei[dw, 에이도)는 특별히 “주목하라”는 의미입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할 이야기를 주목하라는 것이겠지요. 수신자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서 그는 이 마지막 단락만큼은 다른 대필자가 아니라, “내 손으로” 즉 사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썼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필체(筆體)가 바뀌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부터 서신의 “추신”(追伸) 또는 “추서”(追書)가 시작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런 구절은 고대 ‘헬라’ 사회의 편지에서는 지극히 이례적인 것으로서, 당연히 당시 수신자들의 주목을 끌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 그가 이런 구절을 집어넣을 필요가 있었을까? 추측컨대, 그의 편지를 받는 교회에서는(그것이 한 교회이든 또는 회람용이든 간에) 회중들 앞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낭독을 했을 것인바(예: 살전 5:27),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곳에서부터 “추신”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릴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교회 내의 모두가 그의 편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입장에 있지는 않았을 터이니 말입니다.
그가 강조하는 “큰 글자”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클레이’(W. Barclay)는 세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W. Barclay, 55-56쪽.
첫째는, 강조를 위해서 이 단락의 글씨체를 마치 인쇄체를 쓰듯 큰 글씨로 기록했다. 두 번째는, 사도 자신의 필체가 별로 좋지 못해서 이처럼 큰 글자로 쓸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는, 사도의 시력이 좋지 못하여 자신이 볼 수 있도록 쓰다 보니 이처럼 큰 글자가 되었다. 이중 첫 번째 설명이 가장 그럴 듯해 보입니다. 강조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지요.
2. 다시 본론으로(12-15, 17절)
그가 끝까지 강조하고 싶은 내용은 과연 무엇입니까? “유대주의”에 대한 반박입니다. 이 주제는 서신의 두 가지 핵심 권면 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12-17절 사이의 내용은 사도가 1:6-5:12 사이에서 사도가 전개해 왔던 그의 모든 “반유대주의”에 대한 변론과 관련된 권면을 요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권면의 나머지 축에 해당하는 “자유방임주의”를 경고하는 권면(5:13-6:10)과 관련해서는 일체의 언급이 없습니다. 전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음일까요?:
12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할례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12-13절)
“유대주의”에 대한 그의 공격은 먼저 “유대주의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두 절에서 이들이 누구인지 실명으로 부르는 대신에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 “할례를 받은 그들” 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육체의 모양”이나 “육체의 자랑”에서 사도가 의미하는바 “육체”(σάρξ, 사르크)는 분명 “율법주의”나 “명목주의”와 관련해서 그가 앞에서 사용하던 의미와 동일한 것이지(2:20; 4:13, 14, 23, 29; 3:3), “방종”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는 “육체의 일”(5:16, 17, 19, 24; 6:8)과는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 두 절에서 “유대주의자”들의 진정한 동기나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이들의 관심사는, 이방인 신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 ‘아브라함’ 언약의 수혜자가 되고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데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들의 진정한 의도는 다른데 있다고 말합니다. 즉 이들은 이방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하여 ‘유대’인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자랑하며, 그것을 통해서 박해로부터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박해를 말하는 것입니까? ‘바울’의 대적자들 즉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이 이방인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함으로써 피할 수 있는 박해란 무엇이며, 누구로부터의 박해를 말하는 것입니까? ‘로마’ 당국의 박해입니까? ‘바클레이’에 따르면, 당시 ‘로마’는 기독교가 아닌 ‘유대’교만을 공인 종교로 인정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박해와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 자신이 ‘유대’교인임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보다 타당한 설명은 동료 ‘유대’인들로부터의 박해를 말하는 것입니다(참고: 살전 2:14-16). 당시 로마 치하에서 “열심당”과 이에 동조하는 비기독교 유대인들의 폐쇄적 민족주의는 로마에 대해서는 물론 기독교로 개종한 이방인이나 동료 ‘유대’인들에 대해서까지 적개심을 품고 있었을 것이며, 처단의 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주의자”들이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하여 ‘유대’인이 되게 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사도는 13절에서도 “유대주의자”들의 진정한 의도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반복하면서, 이들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 한 가지를 더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실이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아니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의미하는 바는, 그들 자신도 율법 전체를 제대로 온전하게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참고: 5:3). 그러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진짜 이유는 이방인들을 ‘유대’인으로 개종시켰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이를 통해서 동료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피하기 위함입니다.
사도는 이들의 의도가 잘못된 것이며,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14절에서 극적인 대조와 반전을 통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절)
극적인 대조는 접속사 “그러나”와 “결코...없으니” 등의 표현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두 가지일 것입니다. 그 첫 번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인식과 관련 된 것으로서, 그가 특별히 강조를 위해서 문장의 첫 부분에 위치시키고 있는 표현 “내게는”입니다. 사도는 다른 서신에서 두어 번 정도 자신과 자신의 생애에 대하여 자전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대단한 자랑거리가 될 만한 것들입니다. 한번은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을 향한 것으로서, 그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의 영적 상태를 자랑하며 분열과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질책하면서, 그가 이룩한 영적 업적에 대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고후 11:21하-29). 그들이 무슨 큰 자랑거리라고 내어놓는 것들이 ‘바울’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에 비하면 지극히 미미하고 보잘 것 없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랑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그리고 또 한 번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것으로서, 이 경우에는 교회 안에서 자신들만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졌다고 자랑을 일삼는 “유대주의자”들의 잘못을 경고하는 가운데 나온 것입니다(빌 3:4-6). 이번에도 역시 그는 자신의 출신 배경과 업적 등에 대해서 일사천리로 자랑하고 있습니다만, 이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를 더 알고 싶다는 말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빌 3:7-14). 결국 이 두 곳에서 볼 수 있듯이, 사도의 관심사는 그가 세상에서 이룩한 업적들에 있지 않습니다. 즉 그가 선교사나 목회자로서 이룩한 성공적인 사역이나, 그가 개척한 교회의 수나 교인들의 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의 고백이 정말 정직한 것이라면, 사도의 유일한 관심사가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바로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14절의 두 번째 강조점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예수님 당시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이 “십자가”의 수치와 공포에 대해서 가졌던 것과 같은 정도의 느낌이나 감정을 가지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혹시 사형수를 위한 전기의자에 앉아 본다든지, 또는 교수형 용 밧줄을 목에 걸어본다든지 함으로써 유사한 기분 정도는 느껴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당시 십자가는 그야말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고전 1:23). 그러나 사도에게 있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죽음”에 대한 수사적 환유(換喩)로서, 사도가 기독교의 “케리그마”(κήρυγμα) 즉 복음 선포를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입니다(고전 1:17-18; 15:3; 빌 2:8; 3:18; 골 1:20; 2:14-15). 그가 앞에서도 이와 관련해서 언급하였듯이(3:1), “그리스도의 죽음”이야말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에도, 사람들이 또 다른 방법이나 길이 있다고 호도하는 사실에 대해서 사도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표현에 더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말함으로써,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비중을 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다”(καυχάομαι, 카우카오마이)는 말은 무엇입니까? 다른 곳에서 그가 이 단어를 사용하는 용례를 통해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참고. 롬 5:3하-5, 11; 고전 1:18-31). 모두 “하나님과의 화평”(또는 “칭의”), “하나님과의 화목”, “인내와 연단과 소망”, “구원” 등과 관련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신의 것으로 자랑한다는 말은, 나도 그 십자가 위에서 동일한 처벌과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14절의 나머지 구절이 이에 대한 설명이 될 것입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절하). 세상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힌두교나 불교 등의 동방 종교에서 말하는 “열반”(涅槃)이나 “해탈”(解脫)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세상이나 주변에 대한 무관심이나 소외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나 피조 세계에 대한 더 적극적인 애착과 관심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관심사입니다. “세상”과 “육체”가 지배하던 내 삶이 이제는 “성령”이 지배하는 삶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14절 후반의 언급은 다소 추상적으로 들리는 것 같지만, 다음 구절에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15절)
이 구절은 사도가 이 서신을 쓰게 된 목적이자 동시에 “추신”의 핵심 요점이기도 합니다. 그는 12-13절에서 “유대주의자”들의 동기에 대해서 언급하였고, 14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이들 세상적 유익을 위한 동기에 쐐기를 박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밝힌 바 있습니다. 이 모든 논의를 이제 ‘갈라디아’ 교회의 현 상황에 적용하면서, 경구 형식의 선언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16절에서 이 원리를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평화의 축도”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구 형식의 이 선언은 어디서 온 것일까? 초대 교회 공동체 내에서 회자되던 일련의 고백록이나 기타 자료집에서 인용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는 앞에서도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고 입증하기 위한 목적으로 교회 안에서나 또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유포되던 자료들을 이처럼 인용한 바 있습니다(1:4; 3:1, 13, 26, 27-28; 4:4-5; 5:5-6; 6:3, 5, 7, 9). 15절의 경구도 그런 점에서 ‘갈라디아’ 교인들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 경구가 모든 이들이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라면, 사도는 이 경구를 그동안 “유대주의”와 관련한 그의 모든 논쟁(1:6-5:12)에 대한 절정으로 삼으려는 것 같습니다. 이 구절 역시 예의 친숙한 종속 접속사 “왜냐하면”(ϒάρ, 가르)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이 이런 추측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이와 유사한 용례를 3:26, 27-28; 6:3, 5, 7, 9 등에서 익히 본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그 자체로서 5:5-6에서 사도가 이미 결론내린 바 있는 내용을 보강시켜주는 기능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5:6).
이 구절을 통해서 사도가 요약하고 싶은 바는 무엇인가? 즉 “유대주의자”들의 주장, 즉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가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상관없이 율법의 규례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그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이런 것입니다. 즉 기독교 신앙이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문화나 관습과 무관할 수만은 없겠지만, 신앙의 내적 상태와는 반드시 일치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중요한 것이 있다면 기독교인은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움에 걸 맞는 생활 방식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에 따라 드러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율법이 “유대주의자”들에게 신앙의 규범이자 규례라고 한다면, 15절의 경구는 새로운 피조물들에게는 새로운 규례이자 규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축도(16, 18절)
사도는 이점을 16절에서 선언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내에서 회자되고 있었을 그 전통적인 경구를 이곳에서 하나의 “규례” 내지는 “규범”으로까지 격상시키면서, 이 규례를 따르는 자들에게 축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16절)
이 축도의 일차적인 대상이 “이 규례를 행하는 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그 다음 대상으로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애매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문장의 복잡한 형식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에 대한 <헬라어 사본>을 구문에 비교적 충실하게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 그러한 자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 지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도.” 즉 이 문장은 우선 그 형식에 있어, 축도가 문장의 중간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며, 다소 특이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 애매모호한 점은 축도 뒤에 등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문장의 앞 구절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데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질문들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사도가 두 집단의 교인들을 향해서 “은혜”와 “평강”이라는 각기 다른 축도를 전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동일한 한 무리를 향해서 “은혜와 평강”의 축도를 전하고 있는 것인가? 만일 축도의 대상이 서로 다른 두 무리라면, “은혜의 축도”를 받을 대상은 누구이며, “평강의 축도”를 받을 대상은 누구인가? 이 모든 애매모호함의 핵심에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혹시 이방인 기독교인을 지칭하는 말일까?
“평강과 은혜”의 축도에서 이 두 단어가 나타나는 순서 또한 <신약>의 다른 곳에 등장하는 축도와는 다르며 다소 비논리적이기까지 합니다. 대개의 경우 “평강”은 “은혜”의 결과로써 따라오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참고. 딤전 1:2; 딤후 1:2; 요이 3; 유 2). 따라서 “은혜와 평강”이 더 옳은 순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왜 그 순서를 바꾸고 있으며, 두 대상을 거명하고 있는 것일까? 이방인 기독교인을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부를 의도였다면 왜 유독 이곳에서만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혹자는 16절을 문장 내의 구두점들을 달리해서 다음과 같이 이해하려 합니다: “이 규례를 행하는 모든 자에게는 평강이, 그리고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는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해석에 따르면, 평강은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그리고 긍휼은 아직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건한 ‘유대’인을 향한 것입니다.
이 축도에서 “은혜와 평강”의 순서가 바뀐 것은 적어도 <바울 서신>에서는 특히 비정상적이긴 하지만(롬 15:33; 16:20; 고전 16:23-24; 고후 13:11, 13; 엡 6:23-24; 빌 4:7, 9, 23; 골 4:18; 살전 5:23, 28; 살후 3:16, 18; 딤전 6:13; 딤후 4:22; 디 3:15; 몬 25),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이 축도가 두 집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을 듯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규례를 행하는 자들”이나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나 결국 동일한 교인들이라는 점입니다. 이점은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서 사도의 관심사는 “누가 과연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인가?”에 관한 것으로서, 이방인 기독교인들을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지칭하는 것이야말로 서신의 결론으로서 지극히 합당한 논리적 귀결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정통 기독교 신학의 입장도, 사도가 이방 기독교인을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지칭할 때 그가 의미하는 바는 기독교회가 ‘유대’ 국가와 민족을 대체하는 진정한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인 선언(15절)에 이은 축도(16절)로 “추신”은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사도는 다시 새로운 언급을 더하고 있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17절)
이 언급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서, 앞에서도 이와 비슷한 행태를 보인 적이 있기도 합니다. 그의 첫 번째 권면(4:12-5:12)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는 5:5-6 사이에서 신학적 결론에 이어 5:11에서 개인적인 결론으로 권면을 마무리하는 듯하다가, 곧바로 12절에서 엉뚱한 말로 결론을 다소 흐리게 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5:12).
이 발언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긴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이곳에서는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경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고대 사회에서 노예나 종교적 이유 등으로 몸에 문신 즉 “흔적”(στίγμα, 스티그마)을 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관습에 따라 초대 기독교인들이 ‘바울’ 역시 그들의 몸에 종교적 문신을 넣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다수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가 사도로서 겪어야 했던 온갖 종류의 고난이나 박해 등의 결과로 생긴 상처나 신체적 결함과 불구 등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참고. 고후 6:4-6; 11:23-30; 갈 4:13-14).
따라서 이 경고는 강력한 것으로서, 긍정적으로는 ‘바울’ 자신은 “예수님이 점지한 사람”이며 그분의 소유와 보호 하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부정적으로는 누구든 이러한 권위에 반발하거나 도전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심판이나 저주를 받게 될 수도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늘 그러하듯이(롬 16:20하; 고전 16:23; 고후 13:14; 엡 6:24; 빌 4:23; 골 4:18하; 살전 5:28; 살후 3:18; 딤전 6:21하; 딤후 4:22하; 디 3:15하; 몬 25), 서신의 마지막을 “은혜의 축도”로 끝맺는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18절)
이곳 <갈라디아서>에서 유독 다른 표현을 찾아보자면, 우선 “형제들아”의 호칭이 있습니다. 준엄한 경고를 주면서도 교인들을 향한 그의 변함없는 애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멘”을 추가하고 있는 점입니다. 이 또한 다른 서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그의 모든 서신에서 벽두의 인사말과 마지막 축도에서 “은혜”(χάρις, 카리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이곳 <갈라디아서>에서 이 단어는 각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곳에서 “은혜”는 “율법”과 대척점에 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 즉 “칭의”의 근거가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2:15;16, 21; 3:1-18), 정상적인 “기독교 신앙생활”의 근거 또한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2:17-21; 3:19-4:11). 특히 이 서신이 사도의 가장 오래 된 목회 서신이라고 할 때, 그가 목회의 출발부터 “율법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해 왔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훈과 적용
자필 서명. 얼마 전 본인은 세 번째 교회 개척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우리에게는 새로운 교회를 시작한다는 벅찬 희망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내려 누르는 두려움이 더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잘 안 되면 어쩌나?” “혹시 다른 사람들이 우리더러 무어라고 평가할까?” 이런 염려와 두려움을 처음부터 극복하지 않고서는 처음부터 교회 개척을 시작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서, 그리고 교회 개척과 관련해서 또 한 번의 실패를 할 수 없다는 각오로, 우리는 <갈라디아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서 무어라 생각하든,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무어라 변명하든,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사상이 아니라, “과연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해서 무어라 말씀하시는가?”에 대해서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 이 책입니까? 지금까지 도합 스물한 번에 걸쳐 이 책을 공부하는 동안 우리는 이미 그 해답을 얻었다고 확신합니다. ‘바울’을 가리켜 “자유의 사도”라고 합니다. <신약>의 저자들 중에서 ‘바울’은 “자유”에 관한 한 전문가입니다. <신약>의 다른 서신들에서 이 단어가 나타나는 회수(8회)와 비교해 볼 때, <바울 서신>에서 이 단어가 얼마나 자주 등장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28회). 그리고 이 단어는 특히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10회). 이제 왜 우리가 이 책을 개척 교회의 첫 공부의 대상으로 삼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책을 가리켜 “자유에 관한 분노의 서신”이라고까지 말한 바 있습니다. 우리 역시 ‘바울’ 사도나 우리의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느꼈을 자유에 관한 확신을 가지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책의 공부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당신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라면 필요한 무엇이 더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유는 선물이자 기술입니다. 자유는 누군가 주는 선물이며, 우리 각자가 주어진 한계 내에서 훈련을 통해서 쌓아가야 하는 기술입니다. 자유를 이해하려면 그것을 배워야 하고, 자유를 얻으려면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무엇이 더 있어야 한다면 바로 이 훈련일 것입니다.
아마 사도 역시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염려가 되었던지 당시의 관례를 따라 편지의 말미에 “추신” 또는 “추서”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것도 대필자로부터 펜을 빼앗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일부러 큰 글자로 써서 독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11절).
다시 처음으로. 그가 이 마지막 부분에서 기독교 복음에 대해서 새삼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12-17절 사이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는 지금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가장 먼저 그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에 대해서 큰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자랑하고 영광스러워 하는 것으로 마지막 권면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14절상).
십자가 어디에 자랑이 있고, 영광이 있으며, 자유가 있습니까? 그것은 죽음이고 자유로운 삶의 반대이며 수치입니다. 폭력과 무관심과 배신과 미움이 담긴 죽음입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온갖 종류의 행위가 다 용해된 결과입니다. 그 속에는 <복음서>에 나오는 온갖 종류의 인간의 행위들이 다 녹아 있습니다. 예컨대, 제자들의 배반이 녹아 있고, ‘가룟 유다’의 탐욕이 녹아 있고, 로마 병정들의 모독이 있고, ‘빌라도’나 ‘헤롯’의 권태와 무관심이 있고, 구경꾼들의 무관심이 있고,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겨운 헌신이 있고, ‘마르다’의 불평이 있으며, 여인들의 눈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는 그 이상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에 자신을 복종시켰다는 사실입니다.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이 선택한 복종입니다. ‘로빈슨’(T. A. Robinson)은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악이 승리를 얻는 유일한 방식은 사람이 악으로 그것을 보복하고, 반응하고, 되돌려주고, 그래서 그 악이 계속해서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악을 흡수하고 그것을 드러내기를 거부하면, 악은 힘을 잃게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악의 힘을 다룬 방식이 이러했다고 믿는다. 결국 그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칠 때까지 순종으로 그들의 공격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사도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의 기적을 찬양하고 자랑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십자가의 죽음을 자랑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늘에 계시면서, 우리의 온갖 추함과 부정함과 악독과 절망과 슬픔에는 무관심한 채로 남아계시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호함 속에 직접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셨고, 우리가 겪는 그 죽음을 겪으신 그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이처럼 자유의 삶을 마음껏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이를 수 있었을까요? 그의 간증은 이어집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절하).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유대’의 유산이나 학식이나 지혜를 축적함으로써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홀로 ‘아라비아’ 광야로 물러나 고독과 명상과 기도를 통해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선교지를 돌아다니면서 설교와 강연과 저술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고, 회심자들을 만들고, 주옥같은 <서신>들을 쓸 때 얻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믿음의 도전이나 모순에 사로 잡혔을 때, 파선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모욕당했을 때 자유를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역설인 것이, <닥터 지바고>에서 주인공은 공산주의 사회에서 자유는 강제 수용소 안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과 같은 역설입니다. 세상이 자기에게 최악을 행하고 있을 때,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 바로 그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발견하고 자유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피터슨’ 목사님도 말합니다: “죽을 자유는 자유의 절정이다.” ‘요한’ 사도도 그렇게 말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그가 누리는 자유에 관한 긴 자랑의 끝에, <갈라디아서> 전체의 핵심어를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15절).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유를 구속하고 억압하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적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헬라’적 방식입니다. 이 구절은 바로 이점을 잘 요약해 주고 있는 듯합니다. ‘유대’적 방식이란 무엇입니까? 할례로 대표되는 “유대주의” 즉 “율법주의”와 “명목론”이라고 했습니다. 이 방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즐겁게 살아보려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적인 의식과 규례를 제정하여 그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정작 본인은 그 속에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할례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13절상). 그러면서 자신은 그 안에서 들어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한편 ‘헬라’적 방식은 무엇입니까? 소위 무할례로 상징되는 “자유방임주의”를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인간은 원래 자유롭게 태어난 존재로서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을 실현하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 두 가지를 다 거부합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인 것 같습니다만, 실은 한 가지 점에서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둘 다 죽음을 다루기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삶을 붙듭니다. 무할례자들은 덧없는 세상에서 탈출하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입니다. 할례자들은 타락한 사회에서 의미를 보존하는데 필사적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배제하기 때문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쪽이 완고한 도덕주의자라면, 다른 한쪽은 쾌락주의자입니다.
그러나 자유는 선하게 되는 것이나, 즐기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안절부절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외모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얼마나 전도했으며 교회를 몇 개나 개척했다고 자랑할 필요도 없게 만듭니다. 숫자와 크기와 전혀 상관없습니다(12-13절).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규칙을 지키고, 깨고 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규례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고 이 규례를 행하는 자만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분의 형강과 긍휼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16절). 자유의 규례는 “성령에 좇아 사는 삶”을 말합니다. “성령의 열매”가 드러나는 삶을 말합니다.
축도. 누가 우리 교회의 이상과 정신에 대하여 물어본다면 “지식과 사랑”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지식이라 함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시작하여 동료 인간들에 대한 지식, <성경>에 관한 지식, 자연과 역사에 관한 지식, 그리고 동료 인간에 관한 지식 등 실로 다양하고 광범위합니다. 사랑이라 함은 동료 인간 특히 믿음의 공동체 식구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안으로 우리는 <교회 학교>와 <교회 목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지식을 습득할 것이고, 목장에서는 사랑을 나눌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심령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쳐나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아멘.
연습과 토의
1. 본문의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기능은 무엇입니까?
2. 사도는 이곳에서 단순히 이 단락뿐만 아니라 서신 전체의 신학적 주제를 경구의 형식을 빌어 선포하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