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5과
예배와 준비
김태정 목사시편 15약 12분 분량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1절)
기독교나 유대교의 예배에서 예배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가 있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기도나 예배를 통해서 지존자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낄 정도로 하나님의 초월적인 거룩함 만을 강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내재적인 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하나님의 면전에 아무 때나 경솔하게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시는 이러한 두 가지 극단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오늘 우리는 예배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문학과 역사
장르와 양식. 많은 학자들은 이 시를 “입장 시의 기도문”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정(假定)에 근거해서 이 시의 양식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예배자들이 제사장에게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에 대해서 물어본다(1절)
(2) 제사장은 그런 자격을 구체적으로 열거함으로써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2-5절상)
(3) 제사장은 축복으로 끝마친다(5절하)
이런 식의 분석은 나름대로 타당하게 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는 이스라엘이 공적인 예배에서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순례자들이 이스라엘의 절기 중에 예배에 참석하기 위하여 성전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이 시가 예배를 위한 기도문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지만, 이 시에는 또 다른 양식이 혼재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름 아닌 지혜문학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특히 성전에 입장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또 다른 자격 즉 도덕적 자격(제의적이거나 의식적인 것과는 별도로)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점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이를 2-5절상 사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격 요건 속에는 도덕적 자격뿐만 아니라, 제의적인 자격까지 들어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는 결국 예배 입장을 위한 기도문의 양식에 근거해서 지혜 시의 양식을 지닌 것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에 참여하는 것의 의미가 단순히 의식을 치르는 것 이상의 윤리∙도덕적인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교훈적인 메시지를 주기 위함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축복이 아니라 의식적인 예배와 삶으로서의 예배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자에 대한 약속으로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5절하).
배경과 역사. 이 시의 저작 연대나 저자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산”에 대한 언급은(1절) '시온' 성전이 세워진 이후의 어떤 시기에 저작되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장막”이 반드시 구약의 성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장막은 때로 의인들의 거처나 피난처를 의미하는 성전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만일 <이사야> 33:14-15를 시 15편을 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면, 이 시는 '이사야' 시대 이전에 쓴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14시온의 죄인들이 두려워하며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이 떨며 이르기를 우리 중에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 우리 중에 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 15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사 33:14-15).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정확은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 시가 <다윗의 시편> 제 1집에 나온다는 것은 그 출처가 실제 지혜문학 전승에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스라엘의 정기적인 예배에 통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독교 예배의 역사에서 '예수 승천일'에 이 시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시의 의미와 완전히 부합된다 하겠습니다. 이 시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단락과 구조. 이 시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질문(1절)
(2) 대답(2-5절상)
(3) 약속(5절하)
신학과 신앙
1. 질문(1절)
시인은 질문으로 이 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1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비록 이 질문이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유사병행의 이중콜론으로서 질문은 한 가지입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의 성격이나 특성에 관한 것입니다. 이 질문을 단순히 일반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겠지만, 질문의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입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임재를 가장 친밀하게 상징해 주는 특별한 곳 “장막”(다시 말해서 성전)에 들어갈 수 있으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 질문은 실로 중요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배자가 예배에 참여할 준비를 하는데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질문하는 자가 이 질문을 진실로 진지하게 제기하였다면, 그 뒤에는 자신에 대한 점검과 예배에 참여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적절한 준비를 하게 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대답(2-5절상)
예배자가 듣는 대답은 무엇입니까? 대답은 일련의 적극적인 조건들과 소극적인 조건들로 이루어진 열 가지의 대답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 모든 조건들은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모두 중요하다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들어가려는 사람은 적극적인 선을 행하는 삶뿐만 아니라 악을 행하지 아니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의 인생 역정은 흠이 없고 악이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원리는 행위나 말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일반적인 원리를 진술한 것입니다: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1절). 즉 행동은 올발라야 하며 말은 진실해야만 합니다.
그 다음에는 어떤 의미에서 반복적인 세 가지 소극적인 조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3절). 이들이 소극적이라 함은 이들 조건들 속에는 앞에서 열거한 적극적인 조건들과 대조되는 행동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혀로 허물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실족하게 하는 말이나 이중적인 의도를 드러내는 거짓이나 “두 마음”이 없습니다.
나머지 조건들 속에는 “망령된 자(악을 지속적으로 행하는 자)를 멸시하는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4절). 이런 조건들은 동료 인간들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부정적인 태도 둘 다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망령된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과, 또 그로 인한 영향을 피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면서 그들과 교제를 나누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선한 영향을 받기를 원합니다. 여덟 번째 조건은 선을 행할 결심뿐만 아니라, 악행을 피하겠다는 엄숙한 맹세의 선언과 그 맹세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결코 흔들리지 않겠다는 결심을 가리키고 있습니다(4절하).
마지막 두 조건(5절상)은 어떤 면에서 열 가지 조건들 중에서 가장 구체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고리대금이나 뇌물을 피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뇌물에 대한 태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크게 다르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출 23:8; 신 16:19).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에서 고리대금업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이 원칙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혹시 채무자가 그 의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 받을 수 있는 착취와 폐해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히브리법은 동료 유대인들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금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외국인들과 사업상의 거래에서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허용하고 있습니다(신 23:19-20).
그렇다면 왜 동료 유대인들에게는 이자를 받는 행위를 금지시킨 것일까요? 그 이유는 돈을 꾸어야 할 처지에 있는 유대인들은 거의 틀림없이 곤경에 빠져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돈을 빌려주고, 과도한 이자를 요구한다는 것은 그의 곤경을 덜어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가중시켜주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료 유대인들에게 돈을 빌려 줄 경우에는 이자를 받지 않고 단지 담보를 통해서만 돈을 빌려줄 수 있도록 했습니다(신 24:6). 따라서 우리는 이 법을 율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법 정신 즉 하나님의 '헤세드'의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3. 약속(5절하)
질문과 대답에 이어 시는 약속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5절하)
그러나 이 약속은 무슨 만병통치약 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일련의 선한 행동을 함으로써 이전에 행한 모든 악행을 보상받을 수 있다든지, 이웃에게 선을 행함으로써 고통이나 억압에서 벗어나 만사형통할 수 있다는 등의 약속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의인들은 종종 그들의 적들이 기뻐 날뛸 정도로 흔들리고 요동되기도 합니다. 이 약속은 보다 근본적인 어떤 안전이나 안정에 관한 것입니다. 즉 이 질문은 이 시의 처음 질문,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입니까?”에서 암시되어 있는 것과 같은 본질적인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의인”이 될 것입니다. 즉 의인만이 주의 성소에 거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의인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그분의 거처로부터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대답은 따라서 많은 탄식들에 대해서 유익한 관점을 제공해 준다 할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압제나 인생의 영고성쇠(榮枯盛衰)는 항상 당하는 사람들을 그 뿌리부터 흔들리게 합니다. 탄식과 의심과 좌절이 그를 그렇게 흔들어 댑니다. 그들은 흔들렸고, 요동치게 되고, 탄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두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있다면, 결코 흔들리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데 대한 신뢰와 확신일 것입니다. 그 무엇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그것이 공적인 예배이든 사적인 묵상이든 말입니다.
교훈과 적용
예배의 두 극단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것은 예배라고 합니다. 예배가 만일 선교적인 목적이나 의도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면, 과연 이스라엘의 예배는 열방으로 하여금 하나님에게로 나아오게 하는 출입문의 기능을 할 수 있었을까요? <레위기> 10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비극적 에피소드, 즉 두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가 조그만 실수로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라면 이스라엘의 예배는 선교는커녕 장애물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굳이 이 사건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교회가 하루에도 세 번씩이나 짐승을 잡아 죽이고, 가죽을 벗겨 불에 태우고, 피를 제단 주변에 뿌려 피 냄새가 하루 종일 진동을 하는 곳이라면, 그 장소는 오늘로 치자면 혐오시설로서 아무도 근처에 살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교회가 있는 근처는 땅 값이 내려간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사실 제사와 관련하여 이런 일련의 행위가 보여주는 상징은 아무나, 마음대로, 수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초월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이 시가 내걸고 있는 예배자의 조건이라는 것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아무도 하나님의 성전에 예배를 위하여 들어갈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무려 열 가지에 달하는 윤리∙도덕적 조건들 중에서 어느 한 가지도 만만하거나 쉬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인생에서 지친 마음을 이끌고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와서 무슨 위로나 평강의 메시지라도 받을 심산으로 문을 두드리면서, “사제님, 제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고 싶은데 혹시 제게 그런 자격을 좀 일러주시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제가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어보았더니, 돌아오는 대답이라는 것이 청천벽력 같은 열 가지 조건을 만족시키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결국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모든 예배자들을 예배로부터 차단시키는 장애물의 전형이 되고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약>의 성도들은 예배를 그렇게 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한 준비고 뭐고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의 성도들이 예배에 대해서 이처럼 다소 자유분방한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은 그들이 <구약>의 성도들과 달리 하나님의 “초월성”(超越性)보다는 하나님의 “내재성”(內在性)에 방점(傍點)을 두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히브리서>가 이런 태도에 결정적인 자극을 준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히 10:19).
사실 예배나 기도를 통해서 거룩한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일이 예수님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무심코 행해서는 안 된고 주의 깊게, 적절한 준비와 경외심을 가지고 행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가 말해주는 바도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이 시를 장애물이 아니라 출입문으로 바꾸어 주고 있습니다. 즉 이시는 누구도 아무런 준비 없이 예배에 나올 수 없음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위한 준비
그렇다면 우리는 예배를 위해서 무엇을 준비할 수 있을까요? 이 시는 예배자의 이런 질문에 대해서 답변의 형식으로 일련의 윤리∙도덕적 조건들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조건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면, 결코 진정한 예배를 드리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열 가지 조건에 부합할 수는 없기에, 이 조건들은 예배의 출입문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아무도 이 조건들을 만족시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이런 까다로운 조건들이야말로 우리를 정상적인 예배로 이끌어주는 지침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까다로운 조건들은 아무도 만족시킬 수 없는 것들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반성하게 하고, 회개하기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 조건들을 도저히 만족시킬 수 없기에,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배하러 나아오는 자가 준비해야 할 태도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것은 헌금이나, 십일조나, 또는 무슨 작정이 아니라 마음의 헌신과 준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마 5:23-25)
우리가 그렇게 할 때만이 비로소 우리가 가진 예배의 특권이 결코 소홀하게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은 우리가 결코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이 시의 장르를 통해서, 그 배경에 대해서 토의해 봅시다.
2. 예배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3. 이 시가 예배자들을 예배로부터 차단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면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반면 이 시가 예배의 출입문이 될 수 있다면 어떤 점에서 그렇습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