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14과
어리석은 자
김태정 목사시편 3:10-18약 11분 분량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1절)
시 14편은 신학적 주제에 있어 시 9-10편과 대동소이합니다만,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이 시의 일부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더욱 유명하게 된 시이기도 합니다. 두 시가 다루는 주제는 실제적인 “무신론”에 관한 것입니다. 시인은 이들 무신론자들을 “어리석은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간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 “어리석은 자”는 결코 어리석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적∙정신적 능력이 뛰어나며, 부유하고, 성공적인 삶을 영위해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만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이 결여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헤세드’즉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따라서 시인이 이곳에서 대조시키고 있는 것은 “어리석음”과 “지혜”가 아니라, “어리석음”과 “인자함”인 것입니다. 즉 어리석은 자는 지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인자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시의 장르는 단순히 애가 이상의 지혜 시로 부를 만도 합니다. 시인은 또한 이곳에서 단순히 어리석음과 지혜에 대한 성찰로 끝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대와 찬양으로 시를 끝내고 있다는 점에서 예언 시 내지는 찬양 시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기도 합니다. 히브리 세계관에서 지혜(또는 어리석음)의 반대 개념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지혜와 언약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문학과 역사
장르와 양식. 이 시는 개인적인 애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오히려 지혜나 예언 및 찬양의 자료와 유사한 점들이 섞여 있는 혼합적인 형식을 띄고 있습니다. 이 시를 혼합적인 시라고 가정할 때, 주된 주제는 지혜에 관한 것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탄식과 찬양의 특성들은 지혜라는 보다 큰 범주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시 14편은 그 기원을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 전승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 시의 최초의 형태와 관련하여 그 정확한 배경을 가려낼 수는 없습니다. 이 시는 지혜를 각색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혜 전승을 보다 많이 반영하고 있는 다른 지혜 시들의 어조는 탄식과 구원에 대한 소망으로 바뀌는데(예: 시 1편), 그것은 초기의 명상적인 지혜에서 유래된 것입니다(1절).
시 15편은 <시편> 제 2권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습니다(시 53편). 두 시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비교해 보기 위해서 도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산 가장 뚜렷한 차이는 하나님의 이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시 14편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야훼'로서 네 번 등장하고 있는 반면에, 시 53편에서는 '엘로힘'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두 시는 첫 네 구절에서도 사소한 차이가 있습니다만, 보다 실질적인 차이는 14:5-7과 53:5-6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 시가 이처럼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두 시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수정 및 재편집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시 53편이 후대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 이처럼 유사한 두 시가 제 1권과 2권에서 공히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아마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난점들을 해결하려는 두 가지 상이한 시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Craigie). 두 시중 더 오래된 시 14편은 성가대 지휘자의 수집본과 다윗의 최초의 수집본에 포함되었습니다. 반면에 시 53편은 소위 “엘로힘 시편”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보다 후대의 단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시편>에서 유사한 시가 두 번 등장하고 있는 것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두 개의 시가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보다 빈번하게 사용되었고, 그것이 지혜학파에서 유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맛소라 사본>의 2-3절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삽입되어 있는데, 이들 구절은 <헬라어 구약 성경>의 소수 편집본이나, 일부 역본들, 그리고 소수의 <히브리어 사본> 등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혀를 속이는 데 사용한다.
그들의 혀 밑에는 독사의 독이 있으며,
그들의 입은 맹세와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발은 피흘리는 데 신속하다.
파멸과 멸망이 그들의 길 위에 있으며,
그들은 평안의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이 구절은 <로마서>(3:10-18)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들 구절은 본래부터 이 시의 일부였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 '바울'은 <로마서>에서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부패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가 아는 몇몇 시들로부터 친숙한 구절들을 취사선택한 것 같습니다. 혹자는 이 구절들은 <로마서> 3:10-18절에 대한 난외주를 통해서 일찍부터 <헬라어 구약성경>에 들어 있었으며, 결국 본문 속에 통합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이 구절들은 다시 ‘히브리’어로 번역되어 <히브리 성경>의 여러 사본들의 전승 속에 살아남게 되었을 것입니다.
배경과 역사. 이 시의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저작 연대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포로기 이후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는 데에는 한 두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이 시가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혼합된 양식 때문이고, 둘째는 7절 때문입니다. 즉 7절은 “주님께서 포로된 그의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실 때”로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 구절은 분명 ‘바벨론’ 포로를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시 안에 여러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해서 반드시 후대의 작품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포로기 이전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7절에 나타난 ‘히브리’어의 표현은 보다 일반적인 번역을 요구하고 있으며, 본문이 여러 단계의 변화를 거쳐 온 것으로 볼 때, 상당히 오랜 역사를 지닌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단락과 구조. 이 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지혜의 탄식(1-6절); (2) 구원에 대한 기대(7절).
신학과 신앙
1. 지혜의 탄식(1-6절)
이 시의 주제는 “어리석은 자”와 그의 어리석은 성격에 관한 것입니다(1절):
1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의인의 생명을 위협하며, 의인으로 하여금 탄식을 발하게 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자에게서 영향을 받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란 단순히 지적인 능력을 결여한 사람이 아닙니다. 실제로 어리석은 사람은 고도로 지적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지 않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인생을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어리석은 자와 어리석음의 반대말은 지혜로운 사람과 지혜가 아닙니다. 지혜 문학에 있어 어리석음의 반대말은 “인자함”(הסד, 헤세드)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리석은 자란 인자함을 결여한 자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자함은 언약 관계에서 으뜸가는 특징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언약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즉 그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합니다. 어리석음을 이렇게 정의할 때, 결국 그들에 대한 묘사는 윤리∙도덕적 영역에서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들은 “패역하며, 끔찍한 행위들”을 저지르게 됩니다. “끔찍한 행위”란 히브리 원문에 따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행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보다 상세한 내용은 시 9-10편을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세 절(2-4절)은 어리석음에 대한 신학적 관점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2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3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4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이곳에서 “어리석은 자”라는 칭호는 인간적인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오히려 세상에서 성공적인 삶을 영위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부와 능력과 권세를 지닌 자들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들을 부러워하며, 질시하기까지 합니다. “나도 그렇게 되었으면”하고 말입니다. 궁극적으로 누가 어리석은 자인지는 “하늘에서 내려다보시고” 인간들의 행위를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내려다보시고 그들의 행위를 살피신 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릅니다. 혹자는 4절 상반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만, 3-4절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이 무난할 듯싶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내려다보실 때 그분의 반응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타락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정신적인 결핍이나 지적인 결핍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깨달음”의 결핍입니다: “다 무지하냐?” 무슨 깨달음입니까?
인생의 기본적인 원리에 대한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 원리란 하나님께서 인생을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어리석음이 아니라 인자함을 지녀야 한다는 깨달음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결핍되어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악행”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악행”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4절).
시인은 지금 이 세상에 어리석은 자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성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어리석은 자들 때문에 의인들이 겪고 있는 억압이나 슬픔에 대해서 분노와 애통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인생에 있어서 우선 순위가 완전히 잘못되어 있을 정도로 깨달음이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떡을 먹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떡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떡을 먹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모세’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다”고 했는데(신 8:3), 이들에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고, 따라서 응답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어지는 두 절(5-6절)의 의미를 결정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시인이 악인들의 상태를 의인들의 그것과 대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5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6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이 구절을 쉽게 풀어보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악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공포 가운데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의인들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므로 마음의 평화를 가지고 있었다. 어리석은 자들은 의인들에게 악을 행하려고 하였으나, 의인들은 하나님께로 피신하였다.”
2. 구원에 대한 기대(7절)
이러한 대조와 명상을 통해서 시인은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결론적인 기도를 하게 됩니다:
7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명상에서 시작하여 비탄으로 변하다가, 이제 마지막으로 구원에 대한 기대와 찬양으로 시는 끝나고 있습니다. 시인은 어리석은 자들과 그들의 행위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온’ 산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곳입니다. 이제 바로 그곳에서 구원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지혜의 탄식
이 시는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애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 독자들은 이 시에서 고난 받고 있는 시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려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과의 비교나 상대적인 관점에서 “어리석음”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개인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이 시를 인용하고 있습니다(롬 3:10-18). 그에 따르면 “어리석은 자”란 소수의 특수한 무리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떠날 때에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피력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죄” 또는 “죄인”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신학적이거나 법적인 용어이지 윤리∙도덕적인 용어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법정에서 사용하는 절대적인 용어이지 상대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이 시의 보편성이 있는 것입니다.
<신약>의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의 궁극적인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3-25)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어리석은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구원에 대한 기대
본래 이 시에는 어리석은 자와 의인 간에서 간격이 있지만, <신약>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시는 영적인 순례로서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독자는 어리석은 자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를 읽어감에 따라 그는 어리석음과 그이 인한 재앙의 성격을 이해하게 되고, 또 그로 인해서 탄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시인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음으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연습과 토의
1. 이 시에는 다양한 장르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장르들이며, 또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2. 이 시에서 두드러진 이미지나 상징은 무엇입니까?
3. 이 시의 신학적 주제는 무엇입니까? 시인의 고통의 내용이 무엇이며, 왜 그가 그런 고통을 받고 있는지 알아봅시다.
원고에 실린 그림
원고 속 자리를 확인하지 못한 그림을 모았습니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