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9과
찬양과 애가
김태정 목사시편 9:1약 37분 분량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9: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10:1)
시 9편과 10편은 각기 다른 두 개의 시인가 아니면 한 편의 시인가? 이 질문은 이 두 시를 해석할 때 고려해야 하는 문제점입니다. 이 두 시는 각각의 견해를 지지해줄 만 한 근거를 나름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어느 한 쪽 입장을 채택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만, 이곳에서는 Craigie의 견해를 따라 한 편의 시로 간주할 것입니다. 이 두 시를 한 편의 간주할 때, 그 제목은 “찬양과 애가”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상반된 두 장르를 한 시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 다소 특이하긴 하지만, 그것은 이 시에서 두 개의 상반된 분위기가 드러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두 시를 일독하면서 각각의 주제에 해당되는 시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를 한 편의 시로 간주했을 때 드러나는 형식적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 두 시를 통해서 드러나는 신학적 주제는 무엇입니까? 이론적인 무신론자와 기능적(실질적) 무신론자의 차이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문학과 역사
장르와 양식. 서두에서 밝힌 바처럼 시 9편과 10편과 관련해서 주된 문제점은 이 두 시를 “답관체”로 된 한 편의 시로 볼 것인가, 아니면 전혀 상반되는 장르에 속하는 두 개의 다른 시로 볼 것인가 하는데 있습니다. 우선 개별적인 시임을 지지해 주는 근거들을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대부분의 오래 된 <히브리 사본>들이 이 두 시를 별도로 다루고 있다.
(2) 두 시가 그 장르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 뚜렷하게 구별된다. 시 9편은 “개인적인 찬송 시”로 간주할 수 있는 반면, 시 10편은 개인적인(혹은 공동체적인) 애가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반면 이 두 시가 원래부터 한 편의 시였음을 시사해주는 근거들도 있습니다:
(1) 이 두 시는 시 9편에서 시작하여 10편에서 끝나는 “답관체” 형식을 지니고 있다(부분적으로 분명하지 않은 곳도 일부 있기는 하지만).
(2) 일부 <히브리 사본>이나 <헬라어 역본> 및 <벌게이트> 등에서는 단일 시로 간주하고 있다.
(3) 시 10편에 제목이 없다. 이는 <시편 제 1권>에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로서, 시 10편이 원래 시 9편에 속해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4) 두 시를 통해서 공통적인 용어나 표현들이 등장하고 있다: “환난 때”(9:9// 10:18); “가난한 자”(9:12, 18//10:2, 9, 17); “인생”(9:19//10:18); “압제를 당하는 자”(9:9//10:18).
배경과 역사. 이처럼 이 두 시의 관계에 대해서 풀리지 않은 의문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배경과 관련하여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는 있을 것입니다. 즉 <시편>의 편집자는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편의 시를 둘로 분리시키고, 분리된 각각의 시를 약간 수정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원래 “답관체” 형식의 시가 부분적으로 애매모한 양상을 보이게 된 것도 이런 편집과 수정의 결과 때문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음악과 관련된 두 용어 “셀라”와 “힉가욘”(9:16, 20)이 한 시 안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수정 작업의 결과로 보인다는 것이 Craigie의 견해입니다(참고도서 1).
만일 원래의 시가 매우 오래된 것이었다면, 편집자가 가지고 있었던 본문은 불완전했거나 부분적으로 파손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편집자는 이 시를 두 개의 시로 나누어 복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의 시가 “감사”와 “탄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한 편의 시였는데, 나중에 이스라엘의 예배 시에 두 개의 주제로 나누어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시의 저작 연대와 저자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윗'의 시였다는 견해가 있기는 합니다만, 이 또한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이 시가 초기 단계에서는 “궁중 시”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해주는 내용이 일부 포함되어 있기는 합니다. 그리고 이 시가 아주 오래되었음을 시사해 주는 일부 용어나 표현이 등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혹자는 이 시가 “답관체” 형식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 시가 그렇게 오래 된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이 시가 반드시 후대의 작품임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기도 합니다. 이 두 시의 역사와 관련해서 어느 정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점은, 이들이 왕조 시대에 탄생하였을 것이며,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이 예배에서 사용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단락과 구조. 앞에서 언급한 바처럼 이 시의 가장 두드러진 형식적 특징은 “답관체”입니다. 따라서 시의 단락도 이 형식에 따라 자연스럽게 구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시편>의 많은 시들이 이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답관체” 형식의 일반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시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의 “연”들로 이루어져 있다.
(2) 각 “행”이나 “연”들이 거의 동일한 길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행”이나 “연”의 길이나 문학적 유형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그 길이<시편>에 등장하는 여덟 편의 “답관체” 시들의 형태와 특징을 아래 도표에 요약해놓았습니다. 이 여덟 편의 시들 중에서 다섯 편은 “다윗의 ㅅ”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범주에 있어 각 시의 장르를 구분해 보면, 일부는 “찬송 시”로, 또 일부는 “애가”로, 그리고 또 다른 일부 시는 “지혜 시”나 “교훈 시”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답관체” 시의 기능들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아래 세 방법 중에서 첫 번째 것이 가장 기본적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1) <시편> 기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틀을 제공해준 인위적인 방책이었다.
(2) 젊은이들이 시를 배우는 것을 도와주기 위하여 고안한 것으로서, 특히 지혜 시의 경우 기억을 돕는 유용한 교육적인 장치였을 것이다.
(3) 하나의 주제를 “A에서 Z까지”, 즉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철저하게 다루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답관체 형식은 비단 '히브리' 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알파벳' 언어를 사용하는 언어권, 특히 '헬라' 문학이나 '헬레니즘' 문학에서는 아주 빈번하고 일반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형식을 기원을 '헬라' 문학에서 찾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편> 속의 “답관체” 시들이 저작 연대와 관련해서 비교적 후기의 작품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근거가 희박한 것이, 오래된 '바벨론' 문학에서도 “답관체” 성격을 띠는 작품들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답관체”와 관련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Craigie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참고도서 1).
신학적 주제. 두 시를 개별적인 시로 간주한다고 해도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주제를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각 시에 등장하고 있는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리고 누가 중앙 무대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 9편에서는 “사악한 자들” 또는 “적들”이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무대의 중앙에 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한편 시 10편에서는 무대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무리는 “사악한 자들” 또는 “적들”입니다만, 궁극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10:12-18). 따라서 이 두 시가 문학적인 장르에 있어서는 찬양과 탄식으로 구분할 수 있을지라도, 종교적 체험의 상황과 배경에 있어서는 하나의 주제로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신학과 신앙
위에서 언급한 대로 시 9-10편의 “답관체” 형식은 시인의 생각이 어떻게 진행해 가는가를 보여주는 문학적 구저이자 장치입니다. 따라서 다른 시들을 해석할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시를 분석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즉 그 내용에 따라 단락을 구분하고, 단락에 따라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답관체” 형식에 따라 각 “연”의 내용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우선 시 9편은 '히브리' '알파벳'의 첫 11개의 자음들(א-כ)을 각 “연”의 첫 자음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오직 네 번째 자음인 “ד”(달렡)만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각 “연”은 일반적으로 네 개의 “행”(보통 두 개의 시구)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 길이는 일정치 않습니다.
1. 알렙(א): "감사하오며"(1-2절)
1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hd</a) 이 동사의 기본 어근은 “야다”(hd:y)이며, “던지다” 또는 “내던지다”입니다. 이 동사는 <구약>에서 144회 등장하고 있는데, '히필'형으로 사용될 때에는 “찬양하다” 또는 “경배하다” 등의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이 문장에서 이 동사는 '히필'형입니다.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2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이 시의 첫 번째 “연”은 시 전체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를 드러냄으로써, 시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시구(詩句)는 각기 두 개의 “유사병행”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각 행들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진술”과 “기쁨”과 “즐거움”과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인은 지금 “마음으로부터”(전심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데, 그가 찬양하는 두 대상은 실은 하나로서,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시는 일을 통해서나 자신의 이름을 통해서 그 백성들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십니다. <성경>의 첫 두 책,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창조와 구속의 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인격과 권능을 체험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을 자신의 개인적인 차원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두 번에 걸쳐 등장하고 있는 “내가”라는 주어가 이를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지금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 즉 과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해주신 일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상황에서도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기도 합니다.
2. 베트(ב): "물러갈 때"(3-4절)
과거에 하나님께서 해주신 일에 대한 기억과 현재의 상황에서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기대는 자연스럽게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3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AbWvB) 이 동사의 기번 어근은 '슈브'(bWv)로서, “돌아가(오)다” 또는 “회복하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여러 가지 형으로 약 천 회 이상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전치사-칼 부정사가 연계되어 “갈 때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주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4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여기서 시인이 확신하고 있는 바는, 그의 적들이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가리라는 점과, 또 그들이 물러갈 때 땅에 넘어져 망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적들이 맞이하게 될 파멸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입니다. 시인에게 있어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관이십니다. 그는 지금 아무 이유 없이 공격을 받고 있으며, 부당하게 대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로운 하나님께서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실 것이며, 불의한 자들을 완전히 궤멸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4절을 문법에 맞도록 재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심으로써,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즉 구절의 주(主) 동사 “변호하셨다”의 시제가 완료형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행위가 마치 이미 다 이루어진 과거의 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김멜(ב): "책하시고"(5-6절)
시인은 두 번째 연에서와 마찬가지로, 세 번째 연에서도 다시 하나님의 과거 행적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하실 일에 대한 기대를 함께 드러내고 있습니다:
5열방을 책하시고(T;r]['G, 가아르트) 이 동사의 기본 어근은 (r["G:, 가아르)이며, "책망하다", "꾸짖다" 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14회 나오며, '칼형'으로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강한 충고나 행동을 통해서 어떤 사람이나 사람들을 저지, 좌절 시키는 것을 나타냅니다.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6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과거에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자들뿐만 아니라 열병까지 파멸시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에도 분명히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적국들을 완전히 파멸시키셨으며, 그래서 그들의 이름이 도말되었으며, 그들의 도시들은 파괴되었고, 그들에 대한 기억조차 사라져 버렸습니다. 여기서 “이름” 즉 후손을 보존하는 일에 대한 관심은 고대 근동 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름”이 도말된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다는 뜻인데, 이방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도 공히 적용되던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출 17:14)
나를 막지 말라. 내가 그들을 멸하여 그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고 너로 그들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게 하려고 하시기로(신 9:14)
4. 헤(ה): "야훼"(7-8절)
네 번째 연에 이르러 엄격한 의미에서 “답관체” 형식은 다소 벗어나고 있는 것이, 네 번째 '알파벳'에 해당하는 자음이 '달렛'(ד)생략되고, 다섯 번째 자음(ה, 헤)이 대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연은 그 내용에 있어 세 번째 연에 대한 보다 상세한 반복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7여호와께서(hw:hyw) '야훼'(hwhy)는 하나님의 인격적 이름으로서, 창 2:4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래 <구약>에서 약 6,000여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은 <개역 성경>에서 “여호와”, <공동번역>에서 '야훼', <영역본>에 'Jehovah' 라고 음역하고 있지만 그 정확한 발음을 알 수가 없습니다. 중세 어느 때에 그 정확한 발음을 잃어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명칭은 본래 히브리어 4자음 문자 '요드', '헤', '와우', '헤'(YHWH)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신성 4문자에 대한 정확한 발음과 기원 및 의미는 상당한 논의의 주제가 되어왔습니다(Freedman. TDNT).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8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이 두 절은 하나님을 “의로운 재판관”으로 묘사하고 있는 4절의 설명을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를 5-6절에서 파멸과 멸망이라고 했습니다만, 여기서는 그 심판이 의롭고 공정하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7-8절).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최종적이고도 종말론적인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지금 여기서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지금 당장 구원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기대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보좌에 앉아계신다는 확신에 있습니다.
5. 와우(ו): "또"(9-10절)
9여호와는 또(yhiywI)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오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10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다섯 번째 연에서 다시 '알파벳'의 순서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yhiywI”는 '야훼'(hwhy)와 접속사 “그리고”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 '우'(ו)를 합성한 것입니다.
시인은 이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비유를 “재판관”에서 “피난처”로 이미지의 변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이 두 비유는 그러나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서, 사악한 자들을 심판하고 멸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자들의 이름을 도말하실 것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들은 확고한 신뢰의 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6. 자인(ז): "시온"(11-12절)
시인은 처음에 하나님을 찬양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나타냄으로써, 시를 시작하였는데, 이곳에 이르러 찬양의 주제를 더욱 크게 확대시키고 있습니다:
11너희는 시온에(@/Y=x) 이 단어는 '시온'(@/Yx, 치욘)과 장소를 뜻하는 전치사 “~에”를 합성한 것입니다.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찌어다
12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이가 저희를 기억하심이여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아니하시도다
시인의 확신은 모든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권고하고 명령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을 (1) “시온에 거하신 하나님”과 (2) “피 흘림을 심문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전자(前者)의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를 '예루살렘' 즉 '시온'의 성전에 있는 언약궤로 상징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임재하고 계신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계신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참고, 시 11:5). 시인의 적들은 하나님을 멀리 하늘에만 계신 분, 그래서 자신들이 마음대로 이 땅에서 행사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만, 시인은 소망으로 가득 찬 가운데 하나님을 “시온에 거하시는 하나님”으로 찬양함으로써 그분의 우주적인 임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자(後者)의 표현은 모든 생명의 수여자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취하고자 하는 모든 악인들의 심판자이시기도 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참고, 창 4:10; 9:5).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생명을 취하고자 하는 모든 악인들에게 보응자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여기서 “심문하다”는 “찾는다”는 뜻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자들은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지만(10절), 그들에게 고통과 아픔을 가져다주는 자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찾아내는” 분이십니다.
7. 헤트(ח): "야훼여"(13-14절)
시인의 찬양은 이곳에서 이제 기도로 바뀌고 있습니다. 물론 기도의 주제는 찬양에 대한 권고(11-12절)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13여호와여(hw:hy]) 기본 어근은 '야훼'입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미워하는 자에게 받는 나의 곤고를 보소서
14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는 말은 이 기도의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시인은 지금 적에게 끌려가며 “사망의 문”에서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일으키시는 주”와 “피흘림을 심문하시는 주”는 한 분이신 하나님의 두 가지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을 색출해 내시는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문에 가까이 서서 죽음의 위험에 직면해 있는 자들을 “지키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만일 시인의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그는 “딸같은 시온” 즉 “예루살렘의 문”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의 이 기도는 그리하여 “시온에 거하신 야훼”로 찬양하고 있는 11절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8. 테트(ט): "빠짐이여"(15-16절)
이 연의 주제는 사악한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입니다:
15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W[b]f) 동사의 기본 어근은 '타바'([b'f)입니다.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16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힉가욘, 셀라)
심판의 결과는 악인들의 파멸입니다. 그 파멸은 '부메랑'이 되어 그들에게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무죄한 자들을 위하여 준비해두었던 “웅덩이”와 “그물”은 오히려 그들 자신의 덫이 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미래에 대한 실제적인 확신은 17-18절에 가서야 나타나게 될 것이지만, 시인은 여기서 과거와 미래 사이의 긴장감을 다시 한 번 드러내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라는 표현은 한편으로는 과거의 일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재출현”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9. 요드(י): "돌아감이여"(17절)
이 짧은 연은 다음 연과 함께 관련해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17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WbWvy:) 동사의 기본 어근은 '슈브'(bWv)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 하리로다
“음부” 즉 “스올”에 관해서는 시 6편에서 이미 다룬 바 있습니다. 즉 그곳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곳,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곳 등으로 시인의 적득이 가야할 곳입니다. 하나님의 행적을 기억하는 것과 그것을 잊는 것에 대해서는 <신명기> 8장에서 상세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10. 카프(כ): "돌아감이여"(18-20절)
18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yK) '키'(yK)(불변화사)는 다양한 의미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마치~처럼”(as though); “~이므로”(as); “~라는 것 때문에”(because of that); “그러나”(but); “확실히”(certainly); “~을 제외하고”(except); “왜냐하면~이니까”(for); “~이므로”(since); “그러면”(then); “~할 때”(when). <구약>에서 이 단어는 약 448여회 나옵니다(참조: TWOT; BDB).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하리로다
19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하소서
20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 뿐인줄 알게 하소서 (셀라)
“궁핍한 자가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함이여”는 17절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나라들”에 진술과는 일종의 “대조반복”을 이루고 있습니다. “궁핍한 자”나 “가난한 자”는 본질적으로 같은 말입니다. 물론 물질적인 궁핍보다는 악인들 때문에 당하는 고초나 고난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야훼여 일어나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시 7:6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시인의 급박한 심정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앉아 계셔서 일어나야만 한다든지, 잠을 자고 계셔서 깨어나야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시인에 대한 거짓 고소가 계속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다면 하나님은 가만히 쉬고 계시고, 그의 대적들만이 날뛰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런 표현은 한편으로는 군사적인 뉘앙스를, 다른 한편으로는 사법적인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련한 군사적인 분위기는 전쟁 시 그분의 참여를 간구하면서 드리는 전투 구호내지는 기도와 비슷한 것입니다: “일어나소서”(민 10:35); “깨소서”(삿 5:12). 법정의 분위기와 관련해서 연상해 볼 수 있는 이미지는, 민족들이 하나님 주위에 모이고 하나님은 높은 심판석에 앉아계시는 장면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는” 이의 면전에서 자기의 “의”와 “성실”을 따라 심판 받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절대적인 의나 성실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직 자기에게 제기된 거짓 고소에 관해서만 무죄를 주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한편 본문에서 “인생”으로 번역하고 있는 '에노쉬'(v/na)(19, 20절)는 하나님과 대조되는 인간의 연약함이나 덧없음과 더불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참고. 시 10:18; 대하 14:11; 욥 4:17). 그러나 인간의 모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적들은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따라서 시인은 여기서 그들로 하여금 승리를 거두지 못하게 할 것과 그들을 심판해 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한편 “두려움”(20절)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두려운 사역, 즉 이스라엘이 출애굽 사건에서 본 것과 같은 사건을 연상시켜 주고 있습니다(출 15:14-16; 신 4:34).
시 10 편
시 10편에는 9편에서처럼 “답관체” 형식이 분명하게 보존되어 있지는 않다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형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전제하에 설명을 해 갈 수 있습니다. 시 10편은 1절의 '라멛'(ל)에서 시작하여 17절의 '타우'(ת)로 끝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간에 '멤'(מ)에 해당하는 연이 생략되어 있고, '눈'(נ)과 '싸멕'(ס) 연이 잠정적으로 복원되어 있으며, '페'(פ) 연과 '아인'(ע) 연의 순서가 뒤바뀌어져 있습니다.
11. 라멛(ל): "어찌하여"(10:1-3절)
1여호와여 어찌하여(hm;l) '라마'(hm;l)는 “어찌하여”라는 의미로서, 이 때 '마'(hm)는 “무엇”, “어떤 것” 등을 말합니다.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2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그들이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3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하나님의 임재나 계시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때에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분은 더욱 멀리만 느껴지게 마련입니다. 그런 점에서 환난은 적들의 출현이나 그들의 계략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재 때문에 오기도 합니다. 시인은 바로 지금 그 문제 때문에 “하나님 어찌하여”하며 절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사악한 적들을 심판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교만한 자”들인데(2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고서도 가련한 자들을 자기 마음대로 착취하고 억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이들이 자신들의 계책에 스스로 빠져들도록 하나님께서 간구 드리고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권능이 만천하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면, 사악한 자들은 은밀한 욕망을 함부로 드러내지 못할 것이며, 강탈자들도 감히 하나님을 멸시하거나 저주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당면한 문제는 바로 하나님의 부재였습니다. 사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부재를 인식하고 그들 자신의 은밀하고도 깊은 욕망과 정욕을 전혀 감추려 들지 않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보응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고서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멸시하거나 저주하고 있습니다.
12. 멤(מ): 생략됨.
13. 눈(נ): “멸시하나이다”(10:3하-5상)
3하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rE%B) 멸시하나이다($aenI) 3절의 “배반하다”의 기본 어근은 '바라크'(&r'B)로서 “무릎을 꿇다”, “축복하다” 등을 뜻하며, 다른 의미로는 주로 하나님에 대하여 “저주하다” 또는 “욕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4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5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그는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하며
3-4절을 번역함에 있어 어려운 점은 이 구절들의 행을 어떻게 구분하는가에 있습니다. Craigie에 따르면, 참고도서 1.
'눈'(נ) 연이 시작되는 곳은 3절후반의 “멸시하나이다”($aenI, 니에츠)이며, “배반하여”(&rE%Be, 베레크)와 사이에 '멤'(מ) 연이 생략되어 있다고 추측합니다.
아무튼 이 연과 다음 연들 가운데서 시인은 사악한 자들의 본성과 무죄한 자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성격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침울한 생각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어 그의 믿음과 확신은 잠시 동안 침체되었습니다. 아무튼 이 연들은 1절의 내용, 즉 하나님의 부재로 말미암아 사악한 자들이 활개를 치고 다닌다는 사실을 부연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악한 자들의 말은 그들로 하여금 그 마음의 상태와 신조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일을 “감찰하지 아니 하신다”라고 말하며 이로써 하나님이 “피의 보응자”이심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실제적인 무신론자로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행동에 대하여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고난당하는 자들을 압제하고 착취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참고. 2-4절). 외면적으로 볼 때 사악한 자들은 그들이 지니지 아니한 특성들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고난을 당하는 무죄한 자들이 위태하고 연약한 상태에 있는 것과는 반대로 그들은 항상 “견고하고” 안전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을 이처럼 괴롭힌 것은 바로 이러한 불의와 불공평, 그리고 가치의 전도에 관한 풀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14. 싸멕(ס): “높아서”(10:5하-6)
5하주의 심판은 높아서 “답관체”의 형식에 따라 이 연은 '싸멕'(ס) 연이 되어야 할 것이나, 위에서 밝힌 바대로 잠정적으로 복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즉 5절의 “높아서”(!/rm;, 마롬)는 '시루'(סרן)를 잘못 표기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전제 하에 그렇게 복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마지막 철자 !은 중복 오사에 의하여 첨부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 미치지 못하오니 그는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하며
6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이 연은 앞의 연의 주제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습니다. 즉 사악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이나 인간의 압제를 받지 않은 채, 그들 마음대로 자유롭게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완전히 “멸시하고” 그들의 위협을 무시할 수 있는 강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의로운 수난자들이 보기에 전적으로 불공평하고 부당한 두 가지 표어에 따라 그들의 삶을 영위해 가고 있습니다. 의로운 자들은 환난과 역경에 빠질 만한 일을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그런 경우에 빠지는 반면, 사악한 자들은 결코 그런 일을 당하지 않고 평안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않으리라”고 말하였습니다. 정말 문제는 이들이 분명 실족하고 넘어져야 하는데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그들의 표어는 참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또 다른 표어는 “나는 불행을 당하지 않고 행복하리라”입니다. 이것은 모든 의로운 수난자들에 관한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있습니다. 의로운 자들은 그처럼 자주 불행을 당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악인들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의로운 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 그 자체기 아니라, 가치가 전도된 이 세상입니다.
15. 페(פ): "그 입에는"(10:7-8하)
7그의 입에는(WhyP) 단어의 기본 어근은 “입”(hP,, 페)입니다.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8그가 마을 구석진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의 눈은 가련한 자를 엿보나이다
사악한 자들은 그들의 말과 행동 모두가 다른 사람들에게 환난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원천이 됩니다. 그들의 말은 거짓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의 혀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압제하고 곤고케 합니다. 그리고 이웃이나 무죄한 여행자들도 결코 안전하지 못하며, 항상 그들의 손에 사로잡히거나 살해당할 위험 가운데 처해 있었습니다. 시인은 여기서 “그들의 혀 밑에 있는 잔해와 죄악”이 그들 자신의 기쁨과 즐거움의 원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사악한 자들은 악한 말을 할뿐만 아니라,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16. 아인(ע): “그 입에는”(10:8하-9)
8하그의 눈은(wyn:y[) 기본 어근은 '아인'(@yI[)으로서 “눈”을 뜻합니다.
가련한 자를 엿보나이다
9사자가 자기의 굴에 엎드림 같이
그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당겨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시인은 여기서 두 개의 은유와 한 개의 직유를 사용하면서 사악한 자들의 본성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1) 그들은 은신처에 매복하여 무죄한 자들을 기다리는 도적이거나 강탈자들입니다(8절하); (2) 그들은 덤불에 숨어서 먹이를 덮칠 준비를 하고 있는 사자 같은 자들입니다; (3) 그들은 무죄한 자들을 사로잡기 위하여 그물을 설치한 사냥꾼들입니다.
이러한 시적 표현들은 사악한 자들의 본성을 생생하게 표현해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의로운 자들의 정신적 고통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악한 자들이 행한 모든 일과 그들이 지니고 있는 모든 생각들은 의로운 자들이 어린 시절부터 피해야 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지혜자들의 잠언을 생각해 볼 때, '히브리' 청년들은 가난한 자들과 무죄한 자들을 올무에 빠뜨림으로써, 개인적인 이익을 얻고자 하는 사악한 자들과 결코 사귀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잠 1:11-18). 여기서도 시인의 마음을 그처럼 무겁게 하는 것은 바로 그가 처해 있는 불공평하고도 불의한 상황 바로 그것입니다.
17. 차데(צ): "그(의로운 자)가"(10:10-11)
10그가(צדיק) 이 시편 전체의 문맥에서 볼 때, 이 구절의 첫 행은 유난히도 짧습니다. 그리고 이 절은 '차데'(צ) 연의 시작으로 간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따라서 첫 행의 주어로서 '차디크'(צדיק) 즉 “의로운 자”를 “그” 대신 삽입하면 “답관체” 형식을 이어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가설에 불과할 뿐입니다(참고, Craigie).
구푸려 엎드리니
그의 포악으로 말미암아 가련한 자들이 넘어지나이다
11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지금까지 사악한 자들을 악한 계책을 세우고 있었지만, 역서는 실제적인 재난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즉 여기서 그들은 불행하고도 의로운 희생자들을 큰 재난 가운데 몰아넣고 있습니다. 그런 행동을 하기에 충분히 악한 자들입니다. 이곳에서도 역시 이들이 하는 말은 그들의 생활 철학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사악한 행동을 보실지라도 그것을 곧 잊어버리시거나 또는 무관심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악한 자들에게 이런 확신을 심어준 하나님의 무관심은 이래저래 시인의 가슴을 찢어놓고 있는 것이지요.
17. 코프(ק): "일어나옵소서"(10:12-13)
12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hm;Wq) 이 동사의 기본 어근은 '쿰'(!Wq)으로서 “일어나다”, “세우다”, “일어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13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마침내 시인은 사악한 자들에 대한 음울하고도 침통한 생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 있습니다. 즉 그는 과거에 전쟁 중에 외치던 말, '야훼여 일어나옵소서"(민 10:35)라는 전쟁 구호를 그 자신의 입을 통해서 다시 외쳐봄으로써, 침통하고도 우울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두려운 참호 속에 오랫동안 앉아 있다가 이제 용감한 마음으로 일어나 그의 적들 앞에 나타나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일어나실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적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습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드시는 것은 그분의 힘을 상징할 뿐 아니라, 그의 적들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미하기도 합니다.(삼하 20:21). 시인이 이처럼 하나님을 향해서 간구하고 촉구할 수 있는 근거는 두 가지가 있음을 봅니다. 즉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으나 파멸의 위험 가운데 처해 있는 자들을 “잊지 마실 것과”(9:19), 또 하나님을 멸시하고 마치 하나님께서 사악한 자들의 악한 행위를 감찰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살고 있는 사악한 자들을 “기억하실 것”(13:3)을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18. 레쉬(ר): "주께서 보셨나이다"(10:14)
14주께서는 보셨나이다(ht;air) 이 동사의 어근은 '라아'(ha;r)로서 “보다”, “바라보다” 등을 의미합니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여기서 시인의 확신은 주변에 있는 경험적이거나 실제적인 증거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믿음”에 근거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감찰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감찰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입니다. 실제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계시거나 그 자신을 숨기고 계시지 않고(11절), 단지 때를 기다리고 계실 뿐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을 펴서 사악한 자들을 치시고 크신 권능으로 그들의 죄악을 남김없이 갚으실 것입니다(12절). 따라서 불행한 자들의 현재의 행위와 고아들이 겪은 과거의 경험들은(이들은 모두 “가난한 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19. 쉰(שׁ): "꺾으소서"(10:15-16)
15악인의 팔을 꺾으소서(rbov) 이 동사의 어근은 '샤바르'(rb'v)로서, “깨뜨리다”, “부수다” 등을 의미합니다.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
16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시인은 여기서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라고 말함으로써, 악한 행동을 하는 사악한 자들의 힘을 분쇄시키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손"은 외면상 강하게 보이는 악한 자들의 "팔"을 부러뜨릴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라고 말함으로써, 그처럼 오랫동안 하나님을 무시하던 자들의 생각이 그릇된 것이었음을 드러내 주실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호소나 간구는 결국 시인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 즉 "무소부재'하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라”고 말함으로써,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명맥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왕권이 사악한 나라와 그 통치자들을 이 땅에서 완전히 멸망시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19. 타우(ת): "소원을"(10:17-18)
17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tw"a}T) 이 단어의 어근은 '타아와'(hw:a}T)로서, "욕구", "갈망" 등을 의미합니다.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18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지고한 확신을 재천명함으로써, 그의 시를 끝맺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당하는 자들이 부르짖는 구원의 간절한 요청을 듣고 계시며, 따라서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계속적으로 간구에 귀를 기울이실 것입니다. 또한 의롭고 자비로운 심판을 요구하며,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즉 고아와 억압당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압박자들에게는 그들이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자들임을 상기시켜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드실 것입니다.
시인은 “어찌하여?”라는 절망적인 물음을 가지고 비탄에 가득 찬 기도를 시작하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은 영원토록 왕이시라는 확신을 천명함으로써 그의 기도를 끝맺고 있습니다.
교훈과 적용
실제적 무신론
“무신론”(無神論)은 단순히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무신론에도 두 가지 유형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소 어려운 용어로 표현하자면 “이론적 무신론”과 “실제적(기능적) 무신론”이 바로 그 둘입니다. 이 둘은 서로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우선 “이론적 무신론”은 그야말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 체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대 근동 세계에서 이런 부류의 신념을 가진 자들은 지극히 드물었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있다고 해도 “이론적인 무신론”을 고수하는 것은 “유신론”을 고수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신론”은 “유신론”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믿음 내지는 신념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유신론”을 고수하기가 더 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는 “유신론”이 그 근거를 초자연적인 “계시”에 두고 있지만, “이론적 무신론”은 “계시”가 아닌 다른 그 무엇에 이론적 근거를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론적 무신론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아주 강력한 무기는 세상의 악고(惡苦)와 불의, 불공평, 재난, 심지어는 인종 및 종교 간의 갈등이나 충돌 등등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게 하며, 설령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해도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아예 관심이 없거나, 관심이 있다 해도 결코 선한 존재는 아닐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줄 뿐이라는 것입니다.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고 '버트란트 러셀' 경이나, <만들어진 신>이나 <이기적 유전자> 등으로 잘 알려져 있는 '리차드 도킨스' 등이 20세기를 대표하는 “이론적 무신론자”들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도킨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서 “종교적 망상(delusion)”이라고까지 규정하고 있습니다. R. Dawkins. 「만들어진 신」. 이한음 역. 서울: 김영사, 2007.
그러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이들 “이론적 무신론자”들은 반드시 무시무시하고 위험한 존재는 아니라는 인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상 많은 무신론자들은 매우 도덕적이며, 합리적인 사람들입니다. 일부 위대한 종교들은 무신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심오하고도 숭고한 도덕율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도킨슨'은무신론은 오히려 건강하고 독립적인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이들은 뛰어난 지성을 소유하고 있기도 합니다. 다만 많은 무신론적 지성인들은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알면서도, 가족이나 자기 자신에게까지 그것을 밝힐 용기가 없을 뿐입니다. 이들은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세상에 전혀 해악을 끼치지 않습니다. 해악은커녕 오히려 인류의 복지와 평화에 엄청난 기여를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이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악한 무신론자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지극히 위험한 존재로 규정하고 있는 무리는 누구입니까?
우리가 위에서 규정한 바 있는 소위 “실제적 무신론자” 또는 “기능적 무신론자”가 그들입니다. 시인은 바로 이들이야말로 인간들 중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아닙니다. 어쩌면 이들은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당시 고대 근동 사회가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이고 있는 “윤리∙도덕율”이나 “정의”나 “교훈”등입니다. “기능적 무신론자”들을 위험하다고 하는 것은 이런 도덕성이나 윤리에 관한 개념이 그들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시인이 묘사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자기 자신을 의지하며, 권력이나 행복 같은 것만을 추구합니다: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10:6). 이들은 또한 재물이나 권력이나 행복을 얻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도덕을 무시하고, 정의에 따라 살지 않으며, 사람들의 판단이나 하나님의 심판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들은 연약한 자들을 착취하거나 압제하며,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강한 자들에게 아부합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자기 중심적입니다.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동료 인간을 압제하거나 착취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실제적 유신론
그러나 시 10편에서 그리고 있는 “실제적 무신론”의 모습은 단순히 사악한 자들이나 압박자들에게만 나타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적 유신론자”들, 즉 “의로운 수난자” 혹은 시인 그 자신이 당하는 유혹 가운데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가 당면하고 있는 일련의 억압이나 압제, 무고함이나 억울함 등을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 즉 그분의 정의와 윤리 및 도덕에 대해서 다소간 흔들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마치 침례 '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이 흔들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누구나 “이론적인 유신론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즉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분의 정의와 윤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그의 믿음과는 정 반대로 나타날 때, 지속적으로 그런 믿음을 견지시키는 일은 그렇게 간단치는 않습니다. 오히려 <전도서> 기자처럼 깊은 회의와 절망 가운데서 인생은 헛되며, 목적도 있을 수 없고, 윤리와 도덕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도킨슨'이나 '러셀'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믿음과 하나님의 법을 따르며 사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으며,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불의의 편에 서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요?
시인은 이런 고뇌에 찬 질문에 대해서 어떤 해답을 내놓고 있습니까? 단순히 “이론적 유신론자”가 아닌 “실제적 유신론자”가 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값싼 만병통치약을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즉 그는 지금 기독교인이나 후기 유대교인들과 같이 종말론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내세가 보장되어 있으니 그것을 믿고 끝까지 참고 견디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일 그가 그렇게 했다면 자신이 겪고 있는 딜레마의 지적인 측면은 해결할 수 있었을 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은 썩 지혜로운 방법은 아닙니다.
왜입니까? 부활이나 내세와 같은 종말론적 소망이나 기대는 많은 신자들에게는 큰 위로를 줄 수 있겠지만, 또 다른 많은 신자들에게는 전혀 위안이 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종말론은 압박을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즉각적인 도움을 전혀 제시해 주지 못합니다. 압박을 당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머리로 믿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불의와 불평등으로 특징 지워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믿기 보다는 하나님의 부재를 체험하기가 훨씬 더 쉬운 일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시인은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실제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 사이에서 큰 간격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단순히 죽음 이후의 세계나 최후의 심판에 기댈 수는 없습니다. 그가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현실적인 해결책, 즉 지금 현세로부터의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지금 하나님께서 결코 멀리 계시지 않고(1절) 바로 곁에 계신다는 사실과, 의로운 자들이 이 불의한 세상에 그냥 내던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증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과연 그는 이 현실에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아쉽게도 다른 <시편>에서 종종 그러하듯이, 그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유일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시인은 단지 그가 역경으로부터 구출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는 것과, 그러한 확신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보다 용감하게 개척해 갈 수 있었다는 사실 뿐입니다. 이를 통해서 이 시가 우리에게 주는 경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과 윤리∙도덕이 행복하고 안전한 삶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유리하거나 유익한 도구도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서 족한 것이며, 안전과 평안한 삶과는 오히려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이런 삶은 사악한 자들이 누리는 몫입니다. 불의와 압제의 대가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나 윤리∙도덕적인 삶은 사악한 자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안전하고도 행복한 삶 이상의 것을 가져다줍니다. 그것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 즉 하나님과의 지속적이고도 올바른 관계를 가능케 해주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의 시 마지막에서 노래하고 있는 바로 그 상태를 말합니다.
연습과 토의
1. 시 9편과 10편을 한 편의 시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며, 이중 가장 독특한 형식적 특징은 무엇입니까?
2. 두 시를 한 편의 시로 간주했을 때, 이 시의 장르는 무엇입니까?
3. 이 시의 내용적 특징은 무엇입니까?
4. “이론적 무신론”과 “실제적 무신론”은 서로 어떻게 다릅니까? “실제적 무신론”과 “이론적 유신론”은 어떤 경우에 일맥상통할 수 있습니까?
5. 세상의 악고나 불의에 대한 단순하고도 손쉬운 처방이란 어떤 것이며, 보다 성숙한 처방은 무엇입니까?
6. 이 시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