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8과
인간이란 무엇인가?
김태정 목사시편 8:5약 16분 분량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4절상)
이 시의 표면적 주제는 무엇입니까? 시인은 일견 자연과 인간을 노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시의 이면적 주제 즉 실질적 주제를 결코 간과할 수 없습니다.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이 시의 수미상관을 이루는 두 절(1, 9절)의 선언을 통해서 익히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1, 9절). 그리고 이 시에는 또한 지혜문학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역설적 상황에 대한 깨달음이 그것입니다. 인간의 역설적 상황이란 무엇이며, 이 시에서 시인은 그것을 어떻게 발견하고 있습니까?
위에서 다룬 내용은 이 시의 여러 특징들 중에서 “내용적 특징”만을 다룬 것에 불과합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형식적 특징, 회화적 특징, 그리고 음악적 특징까지 골고루 갖추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를 발견하고 맛보는 것이 이 시에 대한 올바른 감상법이 될 것입니다. 각 특징을 하나씩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문학과 역사
장르와 양식. 이 시의 장르와 관련해서 가장 독창적인 면은 이 시에는 여러 가지 양식들이 혼재해 있어 한 가지로 분류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찬양의 노래”로 볼 수 있습니다만, 보다 정확하게는 “창조의 시”로 분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찬미가적인 요소들 외에도 지혜문학적인 요소와 “애가”와 유사한 부분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처럼 이 시를 어떤 틀에 맞추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은 <시편> 기자의 문학적 재능과 상상력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의 내용이 너무 일반적이라 그 기원은 불확실하지만 내용이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적어도 예배 등과 같은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되기에 적합한 요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만일 이 시가 처음부터 제의에 사용되었다면 “초막절”과 같은 축제 행사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예로써, 복수형과 단수형의 표현이 번갈아 등장하고 있는 것이 예배라는 맥락에서 아주 잘 어울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여”(1절); “내가 보오니”(3절). 그리고 이 시의 제목을 통해서도 이 시가 성전예배에서 정기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 <신약>에서 이 시를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에 근거해서 기독교회에서는 이 시를 “예수 승천일”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자료와 편집. 이 시의 저작 연대나 저자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시의 내용은 저작 연대를 아는데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인간과 관련한 시의 내용이 <창세기> 1장과 일종의 유사성을 지니고 있기는 합니다만, 시의 연대 추정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이 시는 또한 <욥기>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시 8:5; 욥 7:17), 이 역시 시의 연대를 측정하는 일에는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가령 “창조”의 주제는 “포로기” 이후에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을 것이라는 가설에 근거해서, 이 시에 드러나고 있는 “창조”의 주제 역시 비슷한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큰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것이, 이미 고대 근동 지방 전역에 “창조 사상”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으며, 매우 이른 시기부터 ‘이스라엘’ 사상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락과 구조. 이 시는 완전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는 한 편의 시로서, 처음과 끝을 유사평행의 수미상관(首尾相關)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네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1-2절)
(2) 인간의 무가치함(3-4절)
(3) 인간의 위대함(5-8절)
(4) 끝맺는 찬양(9절)
처음과 마지막 단락이 수미상관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하면, 세 번째 단락과 네 번째 단락은 내용상 대조 반복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각 행(行) 내에서도 유사평행 또는 대조평행을 읽을 수 있습니다.
비유와 상징. 시의 회화적(繪畵的) 특징을 잘 보여주는 요소로서 비유와 상징 및 이미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이 시에서 드러나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2절), 그리고 원수들과 보복자들(2절)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주의 손가락”(3절)이나 “주의 손”(6절) 등은 신인동형론적 표현의 전형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운율. 이 시의 음악적 특성은 그 제목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 여기서 ‘깃팃’(תיתג)의 의미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1) 악기의 일종인 ‘기티트 수금’을 지칭하는 것이거나, (2) 악조 혹은 악곡을 지칭하는 것이거나, 또는 (3) 어떤 종류의 축제 혹은 의식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이를 통해서 이 시를 분명 노래로 불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1-2절)
1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첫 단락의 표면적 주제는 자연 또는 우주로 보입니다. 즉 시인은 이곳에서 마치 자연에 대한 송가(頌歌)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고 있는 바는 자연이 자연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그가 찬미하고 있는 대상은 자연이 아니라 “야훼”로 불리는 하나님입니다. 후기 유대교에서는 이 이름이 너무 거룩하여 “주”(ןודאָ, 아돈)라는 칭호가 그 이름을 대신하긴 했지만, 시인은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분명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강조를 위해서 두 번 하나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야훼, 우리 주여.” 시인의 기쁨이 실린 감정의 표현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부분입니다. 달리 번역하자면, “하나님, 우리 하나님”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이런 표현은 일종의 “구절 연속반복”(epixeuxis)입니다.
그를 감동하게 한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가 본 것이 무엇입니까? 그 대상은 3절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지만, 1절의 두 번째 시구(詩句)에서 이에 대한 암시를 읽을 수 있습니다: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그렇습니다. 그를 경탄하게 한 것은 대우주, 보다 구체적으로는 “하늘의 별과 달들”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으며, 따라서 누구도 핑계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롬 1:19-20).
그러나 안타깝게도 누구나 시인의 이런 고백에 동의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특히 계몽시대 이후 철학과 과학으로 무장한 인간의 이성은 시인의 이런 경탄을 순진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경멸하기까지 합니다. 시인은 지금 그를 경멸하고 있는 무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2절에서 그의 노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즉 자신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로, 그리고 자신을 경멸하는 무리들을 하나님의 “원수들과 보복자들”로 규정하면서 두 무리를 뚜렷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2절은 번역 상의 어려움 때문에 해석이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적어도 두 무리 사이에 분명한 대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이 두 무리 사이에는 하나님이 존재합니다.
이들 두 무리는 누구이며, 이들이 각기 상징하고 있는 바는 무엇입니까? 모두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해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이름이나 그분의 계시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지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만하게 늘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영광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이름과 능력을 드러냄에 있어서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을 사용하십니다. 이들은 연약하고 겸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 하나님의 원수들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즉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그 이름 속에 암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위엄과 계시를 인정하고 또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본성과 능력을 드러내는 일에 있어 세상의 연약한 것들과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이용하실 것입니다.
2. 인간의 무가치함(3-4절)
이처럼 자연에 대한 묵상은 시인으로 하여금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하였습니까? 밤하늘에 떠 있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면서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은 무엇일까요?
3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무신론자든 유신론자든 가릴 것 없이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인간의 왜소함과 무가치함입니다. 그리고 외로움과 절망감입니다. 따라서 4절의 질문, 즉 “인간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는 “인간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결같은 대답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이거나 “없습니다”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광대한 우주 속에서 인간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설령 어떤 신이 있다 해도 그 신이 인간들을 일일이 기억하거나 개인사에 깊이 개입해서 주의를 기울인다는 사실 또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시인이 4절을 통해서 의도하고 있는 바도 바로 이런 절망감에 이르도록 하자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지는 단락(5-8절)의 긍정적인 대답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라도 이런 절망감은 더욱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객관적인 시각에서 볼 때, 인간들은 거대한 우주에서 가장 작은 파편에 불과합니다. 그런 그들이 우주에서 어떤 의미나 중심적인 위치를 가진다는 것은 억지 주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3. 인간의 위대함(5-8절)
그러나 시인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 어디에도 절망과 허무를 느낄 공간이 없습니다. 비탄과 자기 연민에 빠질 틈이 없습니다. 외로움이나 고독감도 느낄 틈이 없습니다.
5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인간이 왜소하다는 주장은(4절) 인간이 하나님께서 존귀와 영화로 관을 씌운 존재라는 이 주장과 절묘한 대칭과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다”는 주장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 내의 만물과 인간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주 만물에 대한 지배권을 인간에게 위임하셨다는 점에서 그는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서 실로 위대한 존재입니다. 가장 초기의 번역본들, 예컨대 <칠십인 역>, <시리아 역본>, <탈굼>, <벌게이트> 등은 이 부분을 다르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5절상). 그러나 다른 역본들(예: <심마쿠스>나 <아퀼라> 등)은 “하나님”(םיל,엘로힘)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을 “천사들”로 번역한 것은 역자들의 겸손이 낳은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소 터무니없는 말로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번역이 옳다는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인데, 이곳에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창 1:26). “하나님의 형상”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대리자” 또는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피조 세계에 대한 지배권과 통치권을 상징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5절하).
인간의 지배권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5-6절). 그러나 이 선언은 7-8절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례들로 해서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지배가 미치는 범위는 전체 피조세계, 특별히 살아 있는 피조물들(가축들과 야생 동물)입니다. 물고기와 새들도 그의 지배 아래 있게 될 것입니다. “바닷가에 다니는 것들”(8절)은 바다에 사는 생물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바다에 사는 큰 짐승들이나 가공할 ‘리워야단’(시 104:25-26)과 같은 괴물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큰 짐승들조차 왜소한 인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끝맺는 찬양(9절)
이 시는 처음 시작할 때와 동일한 어조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이름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찬양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과 마지막에 느끼는 시인의 감정은 다소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처음 대우주를 바라보며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에 대한 경외심으로 그 이름을 찬양하였다면, 이 마지막 구절에서는 그처럼 광대무변한 우주에 비해 지극히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에게 그 모든 우주에 대한 지배권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대한 감사함으로 그 이름을 찬양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우주를 바라보면서 왜소함이나 무의미나 허무를 느낀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었고 인생의 의미와 목표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성경>의 시인과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C. Sagan)의 다른 점입니다.
교훈과 적용
자연과 하나님
‘바울’ 사도는 자연 즉 대우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19). 우리는 이것을 자연신학(自然神學)이라 부릅니다. 즉 자연에 대한 묵상이나 관찰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성(理性)을 가진 존재라면 자연에 대한 연구와 관찰을 통해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것이 하나님의 작품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의 시인들도 역시 같은 결론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시 19편, 104편).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들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히브리 세계관”으로 무장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신학은 비단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 역시 같은 주장을 펼칩니다. 이런 주장은 교회사 전체를 통해서 있어왔고 근자에는 소위 “창조과학”이나 “지적 설계론” 등의 이름으로 전통과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시 8편의 시인도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는 노래합니다. 이처럼 복잡하고, 조직적이며, 분명한 목적과 기능을 가진 이 우주가 결코 우연히 생겨났을 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적 설계의 결과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흥에 겨워서 거룩한 하나님의 실명까지 거명해가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하나님,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자연과 인간
과연 이 시인은 어디서 이런 지식과 결론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우주 전체를 깊이 연구하고 관찰한 결과입니까? 우주 밖을 나가보고 내린 결론입니까? 백번 양보해서 이 시인의 노래가 참이라고 하드라도, 다른 사람도 우주를 관찰하면서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우주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단언컨대, 그 반대일 확률이 훨씬 클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천체물리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모두가 이런 노래를 부르며 연구에 임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도 우주에 대해서 연구하고 생각할수록 깊은 감명과 감동을 받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정말 신비하고, 오묘한 이 우주에 대해서 지식을 더하면 더할수록 그 감동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감동은 감동으로 그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한 감동이 우주 가운데서 인간의 역할이나 의미에 관해서 그의 마음에 무엇인가 새겨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정직하게 우주를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자신이 얼마나 왜소하고, 무가치하며, 무의미한 존재인가를 더 크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장엄하고 광대한 자연을 바라보면서 인간의 위치와 의미에 대한 계시를 깨달을 사람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시인은 자연을 계시의 매개체 또는 통로로 제시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연은 그저 자연일 뿐입니다. 자연으로부터 신학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의미나 가치는 자연을 바라보면 볼수록 위축되고 소멸되어 마땅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에 대한 인식만 더해줄 뿐이며, 허무와 절망이 더 크게 다가올 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그러나 우리의 시인은 허무와 절망으로 그의 노래를 끝내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톤은 갑자기 정 반대의 절정에서 인간의 위대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5절상). 광대한 우주 속에서 인간의 위치는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일 뿐이라는 노래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을 지배하고 통치할 권리를 위임받고 있습니다.
이쯤해서 다시 이전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시인은 어떻게 해서 이런 지식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자연에 대한 묵상이나 관찰을 통해서입니까? 즉 일반계시를 통해서 입니까? 자연신학을 통해서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통해서 일반계시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은혜를 통해서 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식을 통해서 그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 시인처럼 말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4절). 그의 경험이 곧 우리 모두의 경험인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다시 물어봅시다. 이 대 우주에서 자신의 위치가 “하나님보다 조금만 못한 존재”라는 엄청난 사실을, 그리고 자신의 의미와 목적이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다고요? 그렇습니다. <토라> 즉 <성경>에 대한 묵상과 연구를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성경>과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인 줄을 알게 됩니다. 은혜는 지식을 낳고, 지식은 다시 그 은혜를 확증해 줍니다: “야훼,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바로 여기에 <성경> 묵상의 이유와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인자와 그리스도
<신약>에서는 이 시를 기막히게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하면서 본래의 의미를 확대 및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것에 대해서 어린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칭송하는 것을 허용하셨는데, 이를 두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비난을 하자 예수님은 이 시를 인용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15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16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마 21:15-16)
<신약> 기자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을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지만 실은 그 이름은 “메사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본 것이지요. 세상을 지배하고 높임을 받고 있는 인간의 역할을, 부활하고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지배로 그 의미를 ‘알레고리’화 한 것입니다: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고전 15:27)
또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 1:22)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저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히 2:6-8)
그러니까 <신약> 기자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시편>의 시인이 노래하며 그토록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인간의 완벽한 모델인 것입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궁극적인 답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이 시의 장르를 구분해 봅시다. 이 시를 19편이나 104편과 비교해 봅시다. 이 시의 제반 특징들(형식적, 회화적, 음악적)에 대해서 공부해 봅시다.
2. 첫 번째 행(1-2절)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3. 우주에 대한 묵상으로 시인이 내리게 된 결론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 행(3-4절)은 첫 번째 행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4. 시인의 이러한 결론은 초자연적인 계시의 결과입니까? 또는 자연적이고 당연한 결론입니까?
5. 세 번째 행(5-6절)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러한 결론은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초자연적인 계시의 결과입니까? 아니면 자연적이고 당연한 결론입니까?
6. 이 시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