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41과
병자를 위한 기도
김태정 목사시편 41:1약 13분 분량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41:1)
<신명기>의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사상과 종교 개혁가들의 이신득의(以信得義) 사상은 일견 서로 상충되거나 모순되는 개념입니까? 시인은 지금 병 중에 있으며 죽음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는 치료와 회복을 위하여 성전의 제의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제의를 통해서 제사장의 말과 병자의 말을 모두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말들이 오가고 있습니까? 즉 제사장이 선포하고 있는 신탁은 무엇이며, 병자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이 시는 또한 교회 공동체의 본질과 사역에 대해서도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교회란 무엇이며, 그 사명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일이 이 시를 감상하는 주요 관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장르와 양식. 시 41편의 장르와 관련해서 혹자는 “개인적인 감사의 시”로 분류하거나 또는 “개인적인 애가”로 보기도 합니다. 이처럼 견해가 차이가 있는 것은 이 시가 다른 여러 시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양식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의 내용을 양식에 따라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1-3절지혜 문학적 전승
(2) 4, 10절기도
(3) 5-9절애가
(4) 11-13절확신과 찬양
그런데 시 전체의 내용을 통해서 볼 때 이 시를 “질병의 시”로 인식하는 것이 가장 타당해 보입니다.
배경과 역사. 이처럼 이 시의 양식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상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시를 서술해 보는 것도 가능해 보입니다. 우선 이 시가 다양한 양식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는 이 시의 제의적인 배경 하에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이 시는 어느 병든 사람이 치료를 받기 위해서 성전에 들어와 예배를 드리는 중에 사용한 기도(또는 기도의 일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배는 성전의 제사장이 병든 자를 향하여 무엇인가 말함으로써 시작되고 있습니다(1-3절). 그 다음에 병자는 자신의 치료를 간구하면서 애가를 부릅니다(5-9절). 그 다음으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제사장의 신탁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땅히 10절과 11절 사이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신탁이 있은 후 예배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고쳐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찬양을 선포함으로써(12-13절), 제사를 끝내고 성전을 나서게 될 것입니다.
단락과 구조. 이런 제의적 배경을 바탕으로 시의 구조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제사장의 서론적인 말(1-3절)
2. 병자의 말(4-10절)
(1) 치료를 구하는 기도(4절)
(2) 위기에 대한 애가(5-9절)
(3) 치료를 구하는 기도(10절)
3. 제사장의 신탁(예상)
4. 병자의 선언(확신과 찬양)(11-12절)
이처럼 이 시가 병자를 위한 것이라면, 이와 유사한 다른 시 6편이나 38편과 당연히 유사성이나 관련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이 시의 경우 다른 두 시들보다 제의적인 배경이 훨씬 강하게 느껴진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입니다.
이 시의 마지막 절(13절)은 이 시에 속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시편> 제 1권 전체에 대한 송영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학과 신앙
1. 제사장의 말(1-3절)
시의 서두는 전형적인 지혜 전승의 어조(語調), 즉 교훈적인 어조를 띠고 있습니다(참고. 시 1:1):
1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
2여호와께서 그를 지키사 살게 하시리니
그가 이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그를 그 원수들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3여호와께서 그를 병상에서 붙드시고
그가 누워 있을 때마다 그의 병을 고쳐 주시나이다
일견 축복에 관한 일반적이고 인과응보적인 선언으로 볼 수도 있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이 시의 제의적인 배경 하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이 말은 제사장의 축복 내지는 축도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 병자가 치료를 간구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나 그가 무엇인가 말하기 전에, 제사장으로부터 축복과 치료를 받기 위한 기본적인 성품에 관해서 먼저 들어야 할 것입니다.
제사장은 먼저,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자는 먼저 약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적극적으로 배려하는 자라야만 한다고 선언합니다(1절상). 이웃을 도와준 적이 없는 사람은 위기에 때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런 자격을 왕과 연결시키기도 합니다(Eaton). 왕의 책임이란 것이 실은 연약한 백성들을 돌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책임을 가진 자가 어찌 왕 뿐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 이스라엘에게 부과된 책임이기도 합니다:
18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19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 10:18-19)
17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 18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 19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20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며, 21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22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령하노라(신 24:17-22)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7)
1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사 61:1-2/눅 4:17-19)
그러니까 제사장의 말에 담긴 일반적인 원리는, 약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는 자라야 자신이 약해졌을 때 하나님에게 정당하게 축복을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구하려거든 적어도 그 정도는 평소에 했어야지”라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제사장이 열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축복은 가장 일반적인 것들에서부터(보호, 장수, 풍요로운 삶, 등등) 지금 시인이 당면하고 있는 질병과 같은 구체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전 포괄적입니다. 제사장의 이러한 말이 곧 치료에 대한 보장은 아니지만, 병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2. 병자의 말(4-10절)
치료를 구하는 기도. 병자는 제사장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의 기도를 통해서 이를 암시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4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즉 기도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해 집니다. 즉 그의 기도는 이중적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이 병자의 관심사는 단순히 육체적 회복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치유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육체의 병이 죄의 결과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신명기적 세계관의 전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치료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죄의 용서를 위한 자비를 위해서도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병자에게 실은 죄와 질병은 전혀 상관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그러하다는 듯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과연 병자의 이런 인식은 온당한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치료는 몸과 영혼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위기에 대한 애가. 기본적인 기도를 드린 병자는 이제 탄식의 말들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5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그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의 이름이 언제나 없어질까 하며
6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의 중심에 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널리 선포하오며
7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하나같이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8이르기를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 하오며
9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이제 병자의 초점은 질병 그 자체가 아니라 그의 적들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주검 위를 맴도는 독수리들처럼 환자의 병상 주변에서 그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장면과 관련해서 이 시는 시 6편이나 38편과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시에는 사실 상 질병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적들에 대한 초점은 오히려 훨씬 더 잘 유지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애가의 본질도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적들이나(5절) 친구들이(9절) 어려움에 빠진 병자로부터 돌아설 경우에, 유일하게 남은 의지 대상은 하나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절망감이나 배신감은 역설적으로 영혼에게 유익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 병자의 애가는 그의 적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4, 10절):
4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나를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다만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얼마나 절박하고 실질적인 것인지, 또는 질병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피해망상적인 자기 연민인지 구별해 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시 38:12-21이나 69편 등을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이 6절에서 진술하고 있는 내용을 보면 후자의 경우일 수도 있어 보입니다. 즉 병문안을 하러 온 방문객들은 병자의 방에 와서는 일상적인 농담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병자는 그 모든 것들은 진담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 방을 떠날 때에 자신들의 생각을 공공연히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 병자는 심한 배신감으로 몸을 떨 것입니다. 지금 9절을 통해서 병자가 그려내고 있는 상황은 아주 친숙한 것입니다. 그토록 자주 식사를 함께 나누어왔던 친구들조차도 병자에 대해서 “그의 발꿈치를 들” 것입니다. “발꿈치”라는 적의에 찬 비유에 대해서는 <창세기>의 <에덴 이야기>에 이미 친숙한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시인은 적들 때문에 맞이한 위기에 대한 애가 이후에 다시 자비와 치료를 간구하는 기도로 방향을 돌리고 있습니다:
10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고
나를 일으키사 내가 그들에게 보응하게 하소서 이로써
3. 제사장의 신탁(예상)
적어도 예배의 상황에서 이 기도 후에 병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결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응답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응답은 제사장의 신탁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즉 제사장은 기도의 응답과 관련해서 가부간 하나님의 신탁을 들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과연 제사장의 신탁이 있었을까요?
4. 병자의 확신(11-12절)
과연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근거를 11-12절이 전해주는 분위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이 두 절과 앞 단락(5-9절)과는 그 분위가 너무나 판이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제사장의 긍정적인 답변이 그 해답이 될 것입니다:
11내 원수가 나를 이기지 못하오니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12주께서 나를 온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
특히 11절은 바로 직전에 하나님의 신탁이 제사장을 통해서 선포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강력하게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치료와 구원의 행위가 미래의 것으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병자는 그분의 약속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확신의 정도는 12절에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는 미래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성전을 방문할 것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보다 일반적으로는 바로 목전에 다가왔던 죽음의 위협이 사라지고, 다시 살아나게 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13절의 기능과 관련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즉 이 절은 <시편> 제 1권의 송영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13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교훈과 적용
‘존 스토트’(J. Stott) 목사님은 그의 책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에서 현대 사회가 당면한 세 가지 문제를 (1) 세속화, (2) 상대화, 및 (3) 다원화로 꼽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정신이 배태시킨 것은 인간성의 상실과 소외, 허무와 절망, 그리고 의미와 목적의 상실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역설적이게도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오래 전에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치부하며 폐기처분했던 가치들 즉 초월적인 존재, 인생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사랑의 공동체를 간절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과연 이러한 인간의 문제들에 대한 궁극적이고도 유일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교회를 흔히 언약 공동체라 부릅니다. 여기서 언약이라 함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믿는 자들과 맺은 일방적이고도 수직적인 관계를 지칭하는 것이지만, 수평적인 관계 또한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공동체 회원 상호간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세상을 향한 관계 또한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역을 관계 맺는 사역으로 규정할 때, 수직적인 사역은 하나님을 향한 사역이 될 것이며, 이중 가장 중요한 사역이 곧 예배일 것입니다. 교회는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예배 중 기도와 간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또한 요청하고 기대합니다. 한편 수평적인 사역은 성도 상호간이나 세상을 향한 사역 즉 관계 맺음이 될 것인데, 교제와 교육, 선교의 사역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역들의 동기는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두 가지 명령, 즉 “지상명령”(至上命令)(눅 10:27; 막 12:29-31; 마 22:37-39)과 “지상위임령”(至上委任令)(창 1:28; 마 28:19-20)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전자(前者)를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한다면 후자(後者)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내지는 방법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다양한 교회의 모델을 상정할 수 있겠습니다만, 21세기의 대안으로 꼽고 있는 모델이 바로 “셀 교회” 또는 “메타 교회”라고들 합니다. <갈라디아서>는 교회의 수평적 사역과 관련해서 의미 있는 보충을 더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형제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갈 6:10). “셀 교회”가 지향하는 바는 “책임지는 사랑”일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 중 하나가 자신을 배반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시편의 9절을 인용하십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9절). 원래 이 말은 병자가 죽음에 직면하면서 기도의 일부로 사용했던 것입니다만,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배신을 예고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십자가 위에서도 시 22편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시 22: 1). 이처럼 <신약>의 화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시편>에서 죽어가는 자의 기도를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본문의 시인처럼 병든 자를 세상의 친구들은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찾아와 병상에서 일상적인 농담이나 하다가 돌아가면서는 온갖 악담이나 유언비어를 퍼뜨립니다. 그래서 시인이 가장 신뢰하며 떡을 나누어 먹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오히려 원수가 되어 발꿈치를 드는 짓을 자행하며 돌아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배신과 허무와 외로움에 빠져 있는 이 성도를 누가 회복하고 고쳐줄 수 있는 것일까요? 언약의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 공동체라면 이 병자는 지체들과 함께 예배와 교제에 참석하여 단순히 육체적 회복뿐만 아니라, 그 영혼까지 소생하는 역사를 체험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시인이 선포하고 있는 확신의 말과 찬양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연습과 토의
1. 이 시의 장르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2. 이 시의 단락을 연구하고, 시의 제의적 배경에 대한 통찰력을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 논의해 봅시다.
3. 이 시의 교훈과 관련해서 토의해 봅시다. 특히 공동체의 사역에 대해서 어떤 빛을 조명해 주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