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39과
인생 무상
김태정 목사시편 39:7약 15분 분량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39:7)
인생에 대한 참된 깨달음 중의 하나는 “인생이 무상(無常)하다”는 것일 것입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욥 5:7). 그러나 이런 깨달음은 젊은 날에는 대개 오지 않는 법입니다. 유한한 인생이 주는 항구적인 진리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을 갖는 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일일까요?
우리는 언제, 그리고 어떻게 우리 삶의 소란함과 일상적인 모든 억압들(탐욕, 성공, 자유, 분노, 억울함 등)로부터 자유스러워 질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매일 얻기 위해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합니까 아니면 버리기 위해서입니까? 이 시의 주제와 교훈과 관련된 질문들로서, 독서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장르와 양식. 시 39편은 슬픈 성찰과 기도가 혼합되어 있는 “개인적인 애가”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시의 제목 ‘마스길’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만, 8절에서 동일한 어근이 “가르치다”, 또는 “지도하다”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 시가 교훈시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시사해 주기도 합니다.
이 시는 단순히 일반적인 의미에서 “개인적인 시”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여러 애가들보다 더욱 개인적이고, 친밀하며, 각 부분들이 자서전적(自敍傳的)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물론 시인의 한탄과 기도의 배경이 분명한 것은 아닙니다. 혹자는 이 애가가 시 38편처럼 심각한 질병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질병은 다만 여러 요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일 수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마도 늙음에 대한 인식인지 모르겠습니다. 노인네가 가장 부러워하는 것이 있다면 젊음이라는 점을 상기해 볼 때 이런 추측은 상당히 설득력을 갖기도 합니다. 아마도 시인은 질병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고통을 겪어왔을 수 있겠습니다만, 궁극적으로 그의 기도와 한탄을 유발시키는 것은 죽음에 대한 그의 인식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제 죽음이 가까이 왔으며, 그것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에서 나타나고 있는 감정이나 분위기는 다소 복합적입니다. 어떤 부분은 이스라엘의 예배나 제사의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는 듯이 보이는가 하면, 또 다른 부분에서는 지혜 문학의 전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시가 이스라엘의 예배에 사용되었는지에 관해서는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지혜 문학적 전통 하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특히 처음 절들의 분위기는 ‘코헬렛’의 분위기를 느끼게 합니다:
1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2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또한 이 시의 마지막 두 절도 비록 상당히 관습적인 기도로 끝나고 있기는 하지만(12-13절), 내용 상 상당히 복합적이며 혼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2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13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만일 시인이 충분한 신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면, 그것은 ‘코헬렛’이 드린 기도와 같은 종류의 기도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소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이 시를 문학적이고 비제의적인 성격을 지닌 한 개인의 개인적인 노래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단락과 구조. 이 시는 시인의 정신 상태에 대한 진술로 시작하여(1-3절), 인간 존재의 무상함에 대한 성찰로 옮겨가서(4-6절), 시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기도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7-13절):
1. 시인의 정신 상태(1-3절)
2. 인생 무상(4-6절)
3. 시인의 기도(7-13절)
신학과 신앙
제목: 영장 여두둔으로 한 노래
<시편>의 제목으로 종종 등장하고 있는 ‘여두둔’은(참고, 시 62:1; 77:1) 한 개인의 이름이며, 특히 ‘아삽’이나 ‘헤만’과 함께 일한 ‘다윗’의 주요 악사(樂士)들 중의 한 사람의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대상 9:16; 16:38, 41). 그러나 Mowinckel은 이 용어가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일반 명사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히브리’ 단어 ‘야다’(ידה)에서 파생한 이 단어는 “고백”을 의미한다는 주장입니다(어근의 기원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감사”라는 의미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런 “고백”의 시편들은 제사나 예배에서 회개나 참회의 상황에서 사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완전히 수긍하기는 어려운 것이, ‘다윗’의 주요 악사들(‘아삽’이나 ‘헤만’)의 이름들도 역시 <시편>의 제목들 가운데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그 의미가 불확실한 한 개인의 이름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입니다. 그 제목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가대 지휘자 여두둔을 위하여”. 그리고 그 사람의 이름은 곡조의 이름 또는 음악적 배경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이 시를 그러한 이름이 의미하는 곡조나 배경에 따라 노래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근거로는, 이 이름을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는 다른 두 편의 시에서 “...에 따라” 또는 “...에 의하여”라는 전치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1. 시인의 정신 상태(1-3절)
시의 첫 세 절에서 시인이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2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3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시인은 먼저 자기에게 무슨 일이 닥치든지 침묵을 지키겠다고 결심하고 있습니다(1절). 한 개인이 겪기에 충분할 만큼의 번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새로운 어떤 말을 더함으로써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기의 이러한 결심을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는 비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침묵을 지키고 싶다는 결심은 역설적으로 말하고 싶다는 충동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말하고 싶은 충동은 자기 앞에 누군가 있을 때 더욱 강해지는 법입니다. 시인은 이들 무리를 “악인”으로 칭하고 있기 까지 합니다(1절하). 이들 악한 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시인으로 하여금 그것을 말하고 싶은 욕망을 자극시켰으며, 동시에 스스로 침묵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주기도 했습니다. 지금 시인이 겪고 있는 딜레마는 ‘욥’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와 그 뿌리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욥 21:7-16). 예컨대 악한 자가 번성하고 의인이 고난당하는 것과 같은 인생의 부조리나 모순 또는 불의에 관한 것이지요.
그러나 시인은 한 가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즉 만일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분노를 발하거나 성급하게 대처하는 가운데 죄를 짓게 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의 분노를 드러내는 가운데 그 모든 원망이나 불평은 결국 그 궁극적인 책임이 하나님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므로, 하나님을 불의한 자로 몰아세우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시인은 익히 인식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선한 말조차도 하지 않겠다”(2절)는 결심은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들이 그의 가슴 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으며, 억제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고 있습니다(2절하-3절상). 그의 “마음이 뜨거워졌다”(3절상)는 표현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척이 살해되었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정도의 분노를 나타내는 말입니다(신 19:6). 지금 그의 마음은 분노로 억제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와있는 것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도 바로 이런 문제로 괴로워 한 바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과연 시인은 이 분노를 어떻게 표출시키고 있습니까? 3절은 참으로 기묘하게 끝나고 있습니다: “나의 혀로 말하기를...” 어떻게 말했을까요? 기분 나는 대로 모두 내뱉었습니까? 아니면...
2. 인생 무상(4-6절)
그렇습니다. 시인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불평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을 성숙한 말로 바꾸어 놓고 있습니다. 그는 “악한 자들은 흥하는데, 나는 고난을 당하는구나”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기 말하면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그는 간접적으로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4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그는 그 문제에 대해서 진술하면서 대답의 일부를 지적하기 시작합니다(4절). 인생의 무상함에 대한 의문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이러한 능력 속에는 악한 자들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통찰력이 들어 있습니다. 악한 자들은 자신의 슬픔에 대한 원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시인은 이 질문을 야훼 하나님에게 했지만, 스스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5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셀라)
6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그의 날들은 단지 “손 한 뼘 길이”에 지나지 않습니다(5절상). 이 길이는 유대인들의 길이 척도에게 가장 짧은 단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시인은 이제 이 비유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인류 전체로 확장시키고 있습니다(5절하).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 앞에서는 실체가 없는, “안개에 불과할” 뿐입니다. 질문과 예비적인 대답은 6절에서 마련하고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과 그들이 누리고 있는 불의한 성공과 재물로 인해서 촉발된 시인의 분노는 실은 실체가 없는 어떤 것에 근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악한 자들 때문에 당황하고 분노하는 것은 그들이 실제 가지고 있지도 않은 “영구성”이나 “중요성”까지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공을 거둘 수도 있고 재물을 모을 수도 있지만, 죽을 때 그것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며, 누가 그것을 소유하게 될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6절하). 시인은 이처럼 인생의 무상함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시작함으로써, 인생의 고난이나 곤경을 해석할 수 있는 보다 넓은 시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삶의 가치와 삶에 대한 이해는 그것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한 연후에 폭넓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3. 시인의 기도(7-13절)
인생이 유한하다는 성찰로 인해서 미음이 가라앉은 시인은 이제 기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서두에서 그는 곧바로 아주 기본적인 원리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입니까, 성공입니까, 적들에 대한 승리입니까, 박해로부터 자유입니까? 그 어느 것도 아니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의 유일한 욕망은 오직 하나님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7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인생의 궁극적인 소망이 오직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시인은 이제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그 무엇이 아니라, 자신 내부로부터 나오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8나를 모든 죄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서 욕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즉 고통의 원인은 더 이상 그의 적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범죄에 대한 인식이었습니다. 인생이 그토록 무상한 것이라면, 그리고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의미라면, 자신의 죄가 자기 존재의 의미를 말살시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만일 그가 이런 진리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또 다른 의미에서 그는 상처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신앙인임을 자처해 왔습니다. 그러나 적들의 압박과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의 올무들로 해서 삶의 초점을 잃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우매한 자라도 그것을 알 수가 있으며, 그를 비웃게 될 것입니다(8절하). 즉 우매한 자들은 인생의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시인이 가진 이중적인 기준을 보고는 그를 비난하며 비웃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다시 침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그 침묵이 악한 말을 삼가기 위해서 스스로 부과한 자갈이 아니라, 깨달음에서 오는 성숙의 침묵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시는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9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시인은 이제 그가 그동안 겪은 고난이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일어난 것이며, 이로 인해서 통찰력과 이해력을 가지게 되었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긍휼과 자비를 위한 기도입니다:
10주의 징벌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11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셀라)
일반적으로 “징벌”(10절상)은 질병이나 재난을 가리킬 것입니다(참고. 시 38:12). 그러나 이곳에서는 아마 시인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단어로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시인은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역사의 일반적인 원리를 자신의 개인적인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11절). 인간들은 너무 쉽게 “욕망”의 포로가 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는 대개 사악함이나 또는 제 10계명의 위반일 것입니다. 이런 욕망은 인생의 의미나 목적을 상실하게 할 만큼, 그리고 인생의 무상함을 잊게 할 만큼 인생을 지배하게 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단련시키는 방법은 그러한 욕망들을 마치 “좀 먹음같이 소멸하시는 것”입니다(11절하). 이럴 경우 욕망이나 야망에 기초해서 인생을 설계한 자들에게는 크나큰 좌절이자 실망이며 심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자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한한 인생에서 영원한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해야 한다고 믿는 자들에게는 축큰 축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의 끝 부분에서 시인은 그가 시작한 지점으로부터 영적으로 긴 여정을 밟아 온 것이 분명해집니다:
12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13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그의 기도는 이미 8절에서도 보았듯이 눈물의 기도입니다(12절중). 그는 삶의 의미가 땅이나 또는 그 안에 속한 것들에 국한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단지 이 땅에서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그의 유일한 고향은 하나님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시인의 기도의 주제는 “땅의 기업”을 강조하고 있는 시 37편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시 37편이 젊은이들에게 한 이야기라면, 시 39편은 노인네들을 위한 것입니다(13절하). 노인의 지혜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나그네는 땅 주인의 허락을 받고 그 땅에서 살았으나, 거기서 영구적으로 정착할 수는 없습니다. 나그네는 그곳 백성들로부터 보호와 특권들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법적 지위를 얻지는 못합니다(신 24:17-22). “주는 나를 용서하사”(13절상)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는 “나에게 눈길을 돌리사”입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내가 평화롭게 살다가 죽을 수 있도록 “분노와 훈계의 얼굴을 돌리소서”(참고. 10절)입니다. 누구나 죽음이 임박해서는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표현 또한 노년기에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죽음을 평온하게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의 소리를 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 의미나 목적은 무엇인가? 이 시에서 시인의 핵심적인 관심사도 이런 질문과 관련된 것입니다. 각 사람이 부여받은 단 한 번의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이런 질문은 그 자체로서 중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특히 자기 존재의 의미나 성취를 발견하려고 하는 자라면 인생에 대한 나름대로의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이러한 본질적인 질문에서 벗어나, 인생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만나는 것들로부터 해답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생의 고난이나 억압, 성공과 성취, 땅과 수입, 욕망과 좌절, 친구와 적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나 관심이 인생 그 자체의 의미인양 우리에게 다가와서, 이들 문제와 씨름하며 인생의 바다에서 표류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마치 이들 문제들이 영원히 존재하며, 그래서 항구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의미는 그것이 유한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시인은 삶의 소란함과 일상적인 것들의 압력 가운데서 자신의 성찰과 기도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그의 통찰력을 어둡게 만들고, 그의 가치관을 혼란시키는 것들입니다. 특히 인생에서 만나는 온갖 부조리와 불의는 그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진정한 목적이나 의미에 대해서 의심을 갖게 되고, 암암리에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도 회의와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말하는 부조리와 불의란 악인이 번창하고 자신과 같은 의인이 수난 받는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시인의 의심과 불만은 정당한 판단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일까요? 그의 판단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가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불의한 자들, 즉 그의 적들이 누리고 있는 번성과 안녕과 성공 등입니다. 그의 눈앞에서 가장 크게 나타나고 있는 것들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그는 이런 것들을 아주 가치 있고, 의미 있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의심은 잘못된 기준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 정상에 올라서야 비로소 산의 지형에 대한 조망을 가질 수 있듯이, 인생에 대한 조망도 이런 유의 정상(頂上)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합니까? 인생은 지극히 짧다는 인식이야말로 인생에 대한 올바른 조망을 갖게 해주는 출발점이자 산의 정상이 될 것입니다. 시인은 이곳에서 비로소 제대로 된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인식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통찰력은 산 정상에서 얻은 시각으로 해서 더욱 넓어지며,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멀리서 삶의 소란함을 내려다보면서, 자신도 그 세계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보다 객관적인 조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그 세계 속에 사는 한 나그네일 뿐이라는 점도 알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그곳에서 살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인생의 한 중요한 과정이며 무대이긴 하지만, 보다 영속적이며 항구적인 심오한 인생은 하나님 안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약>은 시인의 이러한 관점을 보다 발전시키고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베드로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들”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벧전 2:11; 시 39:13). <히브리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자는 믿음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히 11:13). 이들 구절 모두 시 39편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시에서 인생에 대한 이런 관점은 “이생”을 살아가기 위한 지혜의 교훈입니다. <신약>에서는 이 관점이 더욱 발전되어 이생뿐만 아니라 내세의 삶과 통합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출발점을 이 시로 삼는 것이 인생에 대한 건강한 관점을 갖는 길이 될 것입니다. 즉 이생에서 우리의 영속성은 그러한 내세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미친 세상에서 한 순례자가 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이겠습니까? 허무와 지혜의 만남이 그 출발점이 아닐까요? 즉 인생무상에 대한 인식과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는 지혜의 결합 말입니다.
연습과 토의
1. 이 시의 장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이상의 양식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2. “철들자 환갑이라”는 우리네 금언은 이 시의 주제와 잘 일치하고 있습니다. 묵상해 봅시다.
3. 이 시의 교훈과 관련해서 토의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