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 즉 <성경>의 처음 다섯 책은 <성경> 전체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임에 분명하다. <오경>은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의 기원(起源)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다. 죄(罪)와 그 결과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으며, 모든 인류에게 구속(救贖) 즉 구원(救援)의 통로가 될 한 민족의 선택에 관해서도 말하고 있다. 또한 율법(律法)을 통해서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보여주고 있으며, 십계명(十誡命)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윤리ㆍ도덕에 관한 범 우주(凡 宇宙)적인 원칙으로 우뚝 서 있다. 그런 점에서 ‘유대’교와 기독교가 <오경>을 <구약>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권위 있는 책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독자들에게 <오경>은 역사ㆍ과학적으로나, 윤리ㆍ도덕적으로나, 그리고 신학적으로 가장 문제점이 많은 책으로 인식되어있다. <오경>의 무대(舞臺)에서 보여주고 있는 관습이나 사상 등이 현대사회의 세계관에 비추어 볼 때, 충돌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리라! 그러나 이 같은 충돌이 오히려 <오경>을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촉매가 되어왔다는 역설 또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오경>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 문학적 특징은 무엇이며, 고대 근동문학(近東文學)과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둘 사이의 유사성은 무엇이며, 또 차이는 무엇인가? <오경>의 배경은 무엇이며, 저작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책의 핵심 신학 주제는 무엇일까?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성경> 속에 최종적으로 편입되었을까? 이 같은 질문들, <오경>의 문학과 역사와 신학과 관련된 질문들이 이곳 <서론>에서 다루게 될 주제들이 될 것이다.
명칭. <오경>(五經: Pentateuch)은 <구약>의 처음 다섯 책,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그리고 <신명기> 전체를 일컫는 용어다. 혹자는 <여호수아>까지를 포함해서 <육경>으로 칭하기도 한다.
이 명칭은 ‘그리스’어 “다섯 개의 두루마리”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주후 1세기 ‘알렉산드리아’의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에서 널리 통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 다섯 권의 책을 흔히 ‘토라’(Torah)로 부르는데, 이 명칭을 영어로 번역하면 <신약>에서 부르고 있는 바대로 ‘노모스’(nomos), 즉 “율법”(Law)으로 부를 수 있다. 이 책에 대한 또 다른 명칭으로, <모세의 율법>, <모세의 율법 책>, <모세의 책> 등이 알려져 있다.
<오경>은 기본적으로 하나의 긴 이야기(설화)로 볼 수 있으며, 대략 2700 년에 걸친 인류 역사를 다루고 있고, 책의 마지막을 ‘모세’의 죽음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 기간이 다섯 권의 책에서 균등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50장, 1534절)에서 거의 대부분의 기간(약 2300년)을 할애하고 있다. 이어서 <출애굽>에서 <민수기> 14장까지(도합 81장, 2617절) 다루고 있는 내용은 주로 ‘시내’ 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에피소드들로서, 그 기간은 일 년 정도에 불과하다. <민수기>의 나머지 부분(22장, 739절)은 40 년에 걸친 광야 생활을 다루고 있으며, 마지막 책 <신명기>(34장, 955절)는 주로 ‘모세’의 마지막 시기를 다루고 있다.
이처럼 <오경>의 각 책이 다루고 있는 이야기의 분량이나 연대(年代)의 길이가 균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통해서, 화자(話者)의 의도나 주요 관심사가 어디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즉 그의 핵심 관심사는 ‘시내’ 산에서의 율법 수여와 ‘모세’의 역할에 있다 하겠는데, 그런 점에서 ‘유대’인들이 <오경>을 ‘토라’로 명명하고 있다는 사실은 적절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토라’는 흔히 “율법”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창세기>를 율법을 태동(胎動)시킨 배경으로 본다면, <출애굽>에서 <민수기>까지는 율법의 선포를, 그리고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 ‘모세’가 행한 이들 율법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경>은 ‘유대’ 공동체가 최초로 경전화(經典化)시킨 문서들로서, <율법>, <예언서>, <성문서>로 이루어진 <히브리 정경> 중에서 으뜸가는 권위를 차지하고 있다. <오경>이 <구약> 내에서 누리는 권위와 신성함은 절대적인 것이다. 예컨대, <칠십인 역>이 <오경>을 번역한 것만 보아도, 다른 <예언서>나 <성문서>가 불완전한 의역(意譯)에 치우치고 있는 것에 반해,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져 있다.
<오경>의 각 책들은 각기 독립적이고,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춘 현대적 의미의 책이 아니다. 각 책은 나름대로의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져 있으며, 더욱 큰 단위의 한 부분으로서 기능을 하도록 의도되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오경>이라는 명칭은 편리하기도 하지만, 또한 실제로도 반드시 필요하다. 일단 하나의 큰 덩어리로서 <오경>을 받아들이게 되면, <오경>은 전체적으로 주제나 신학적 사상의 전개에 있어 통일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동시에 문학적으로 아주 다양한 장르들이 혼재해 있음도 인정할 수 있다.
통일성. 통일성이라 함은 신학적 주제의 통일성을 말한다. <오경>을 관통하는 큰 주제를 “하나님의 언약”으로 본다면, 이 같은 흐름 안에 일련의 작은 신학적 주제들이 등장하고 있는 바, 예컨대, “선택,” “구원”, “율법”, 그리고 “땅”과 “후손”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요소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등장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구분은 <오경>의 주제를 인식하는 방식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오경>의 신학적인 주제는 “오경의 신학”에서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제 1부: <창세기> 1-11장
제 2부: <창세기> 12장- <신명기> 34장
제 1부가 문제 제기(問題提起)라면, 제 2부는 이에 대한 해결책 제시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제 1부에서는 인간의 타락과 관련하여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훼파되었으며, 인간이나 국가 등이 당면한 제반 실존적 문제를 어떻게 맞이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문제가 “원인론적”(原因論的)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제 2부에서는 이와 같은 제반 문제들에 대해서, 비록 부분적이긴 하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해결책을 마련하셨는가에 대한 설명과 해석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 언약의 시작과 배경이 되는 <창세기> 12:1-3은 제 2부 전체의 초점이라 할 수 있다. <오경>은 단순히 이스라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여타 민족들에게도 중요한 것이 인류의 궁극적인 운명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맺은 언약에 달려있기 때문이다(<오경>의 신학적 주제에 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오경>의 신학”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다양성. <오경>의 다양성은 위에서 언급한 신학적 주제를 다루는 다양한 문학적 방식을 말한다. 즉 <오경>은 다양한 문학 장르와, 수사적(修辭的) 표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나 구원에 관한 주제를 드러내고 있다. 물론 다양한 문학 양식(genre)이나 수사들이 <오경> 내에 섞여 있어 이 책의 기원이나 역사에 관하여 끊임없는 논쟁이 있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오경>의 역사에서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
먼저 <오경>의 문학적 특징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오경>의 문학
어떤 문학작품이든 그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중추적(中樞的)인 역할을 하는 것은 문학적 형태(form)이다. ‘트렘퍼 롱맨’(Tremper Longman III)에 따르면, 문학적 형태는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1) ‘장르’(genre); (2) 구조(structure); (3) 문체(style). 트렘퍼 롱맨 3세. <어떻게 창세기를 읽을 것인가>. 전의우 역. IVP: 서울, 2006.
‘장르’란 어떤 책의 문학적 범주를 말한다. 독자가 책의 장르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책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 실제로 우리는 ‘픽션’과 ‘논픽션’을 다르게 읽으며, 과학과 신화(神話)를 다르게 읽는다. 장르를 오해하면 책의 ‘메시지’와 의미를 오해하게 된다. 한편 책의 “구조”는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 책의 개요(槪要)이다. 관점에 따라 한 권의 책이 여러 구조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책의 구조는 임의적(任意的)이지 않으며, 해석자들은 책의 구조를 나눌 때 합당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문체”란 저자가 글을 쓰는 특별한 방식을 말한다. 예컨대, “이야기”(narrative)의 경우, 문체는 이야기의 내용(story)과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서술 방식 즉 “담론”(談論, discourse) 모두를 포함할 수 있다. 참고로, “이야기” 속에는 “등장인물”과 “사건”과 “배경”과 이들 전체를 구성하는 ‘플롯’(plot)이 있으며, “담론”에는 일체의 “수사(修辭)적 방법들”과 “상징”, “오해”, “침묵”, ‘아이러니’ 등이 포함 된다(아래 내용 참고).
<오경> 내 각 책의 문학적 특성에 대해서는 추후 각 책에 대한 연구에서 별도로 다룰 것이지만, 이곳에서는 <오경>의 전체적인 틀 안에서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요소들을 살펴볼 것이다.
1. 양식 (장르)
<오경>의 문학적인 특징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이스라엘 국가의 “법전”(法典)인가? ‘모세’의 생애를 다룬 “전기”(傳記)인가? 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룬 “사기”(史記)인가? 이 같은 질문은 결국 <오경>의 문학 양식(樣式; genre)에 관한 것으로서, 이 책의 연구에 매우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양식에 대한 규명이 없이는 그 작품을 온전히 감상(感賞)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통로로서 양식을 활용한다. 먼저 <오경>이 전기나, 법전이나, 또는 사기로 불릴 수 있는 근거를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전기. 왜 전기인가? <오경>에서 <창세기>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 즉 <출애굽기>에서 <신명기>에 이르는 부분은 내용 상, ‘모세’의 전기(일대기)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독자들은 ‘모세’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그의 전 생애를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경>을 ‘모세’의 전기로 부를 수 있는 충분한 근거를 제공해주고 있다.
즉 그는 ‘레위’ 지파의 아들로 태어나서, ‘이집트’의 한 왕녀(王女)에게 입양되어 왕실 교육을 받으며 자란다. 하지만 그는 한 범죄에 연루되어 그곳을 떠나야 했으며, ‘미디안’ 광야의 목동으로 처지가 바뀐다. 어느 날 그곳에서 그는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고, 그로부터 동족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구출해 내라는 계시와 소명을 받는다. ‘이집트’로 돌아온 ‘모세’는 그의 요구를 완강하게 거절하는 ‘바로’ 왕과 대면하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 이야기의 극적 긴장감은 고조되기 시작한다. ‘바로’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하여 재앙을 동반한 아홉 번의 기적이 그 강도를 더하고, 그 때마다 ‘바로’의 마음은 더욱 강퍅해져 가는 장면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최후의 열 번째 기적에서 ‘바로’는 어쩔 수 없이 항복하고, ‘모세’는 의기양양(意氣揚揚)하게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와, 홍해를 거쳐 ‘시내’ 산에 이른다. 이전에 그가 하나님을 대면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율법”으로 자신을 계시하면서, 이스라엘과 “언약의 관계”를 맺으신다. 이번에도 ‘모세’가 언약의 두 당사자 사이에서 중심 역할, 즉 중재(仲裁)를 맡으며, “십계명”을 비롯한 부수 계명들을 받는다. 중재자로서의 ‘모세’의 역할은 이후에도 계속되는 바, 이스라엘이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언약을 깨뜨려 하나님의 진노를 샀을 때에도 ‘모세’는 중보의 기도로 이스라엘을 멸망 직전에서 구해낸다. 이스라엘의 반역은 ‘가나안’ 땅 정탐 시에 다시 한 번 드러난다. 정탐꾼이 가져 온 부정적인 보고로 이스라엘은 절망하고, ‘이집트’로 되돌아가기를 원한다. 진노한 하나님을 향하여 ‘모세’는 최소한 그들의 자녀들만이라도 그 땅에 들어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마침내 ‘모세’는 죽음을 앞에 두고, 그의 조상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온 백성을 불러 모아 세 번의 설교와 두 편의 시(詩)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위한 유언을 남기고, ‘요단’ 동편의 어느 알려지지 않은 곳에 안장(安葬)된다.
이처럼 <출애굽기>에서 <신명기>에 이르는 책 내용의 상당 부분을 ‘모세’의 전기로 보기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경> 전체를 과연 한 개인의 전기로 규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단정하기 어려운 점도 없지 않다. 특히 <창세기>를 ‘모세’의 전기 속에 포함시키기에는 ‘모세’의 생애와는 무관한 내용들이 너무 많이 등장하고 있다. 물론 일부 족장의 생애가 ‘모세’의 등장을 예고해주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하다. 예컨대, ‘아브라함’이 ‘이집트’를 빠져 나오는 이야기는 훗날 ‘모세’의 “출애굽”에 대한 그림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참고. 창 12:2013:1). 그리고 ‘모세’의 위대한 중보의 기도 또한 일찍이 ‘아브라함’의 중보의 기도에서 예고되고 있기도 하다(참고. 18:23-33; 20:7; 출 33:12-16; 민 14:13-19). 목동(牧童) ‘야곱’에게 일어났던 일련의 에피소드는 훗날 ‘모세’에게 일어났던 일들과 유사한 점이 많다. 예컨대, 우물가에서 미래의 아내를 만나는 이야기나 임종 유언 들이 그러하다(참고. 창 29; 49; 출 2:16-3:6; 신 33). 그러나 <창세기>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이 같은 내용들은 다소 주변적인 것들에 불과하다. 오히려 <창세기>의 주된 관심사는 이스라엘과 열두 지파의 기원이라든지 “그 땅”에 대한 약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기. <창세기>의 주된 관심사가 이스라엘과 열두 지파의 기원이라든지, “그 땅”에 대한 약속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오경>을 ‘모세’의 전기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 세터스’(van Seters)의 구분에 따르면, <오경>이 “이스라엘의 역사” 제 1부이고, <여호수아>에서 <열왕기 후>에 이르는 부분이 제 2부에 해당한다(그는 제 2부가 1부보다 먼저 기술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제 1부의 내용은 ‘아브라함’의 소명에서 ‘모세’의 죽음까지이고, 제 2부는 ‘가나안’의 정복에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까지를 다루고 있다.
‘반 세터스’가 <오경>을 “이스라엘의 역사”로 보는 것은 <오경>과 그리스 역사가 ‘헤르도투스’(Herodotus)의 작품과의 연계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흥미롭게도 ‘헤르도투스’와 같은 시대의 인물인 ‘헤카테우스’(Hecataeus)와 ‘헬라니쿠스’(Hellanicus)는 자신들의 역사 기록을 <창세기> 1-11장에 등장하는 <홍수 이야기> 등과 같은 태초의 이야기들과 연결시키고 있다. 이들 역사가 외에도 이후 근동(近東) 지역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역사 기술을 시도한 사가(史家)들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추측컨대, ‘그리스’ 역사서든 ‘히브리’ 역사서든 ‘메소포타미아’의 작품에서 상당 부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적어도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히브리’ 역사 기술은 고대 근동문학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점 <창세기> 1-11장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참고. 제 2장). <창조 이야기>(창 1-2)나 <대홍수 이야기>(창 9)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서, 이들 이야기는 분명 시기적으로 더 오래된 ‘메소포타미아’의 창조나 홍수 신화(神話)들의 아류(亞流)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사성은 형식상의 유사성일 뿐, 내용적인 측면에서 <창세기>는 아주 독특하며, 유일무이하다. 또한 <창세기>의 이야기 서술 방식은 ‘그리스’적 역사 기술 방식과도 사뭇 차이가 있다. 예컨대, ‘헤르도투스’의 역사 기술 태도가 아주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데 반해, <창세기>는 일반적이며 신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오경>을 단순히 역사서로 보는 것은 편협하고 지나친 단순화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마지막으로 <오경>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로 볼 수만은 없는 것은 이 책에서 등장하는 엄청난 분량의 율법이나 기타 윤리ㆍ도덕 관련 자료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점은 그리스 역사 문학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율법. <오경>을 단순히 ‘모세’의 “전기”나 또는 이스라엘의 “사기”로 규정할 수 없다면, “율법”(또는 법전)으로 인식하는 것은 어떨까? 사실 <신약>에서도 그렇게 부르고 있으며(예. 눅 24:44), 전통적으로 <히브리 성경>의 첫 다섯 권의 책을 같은 이름으로 불러 온 것도 사실이다. 적어도 표면상 <출애굽기> 20장에서 <신명기> 사이에서 “이야기” 부분을 빼고 나면, 나머지를 “율법”으로 불러도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율법의 형식이나 내용, 및 고대 근동 법전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다른 장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나 ‘모세’의 초기 생애와 출애굽 이야기를 다룬 부분을 율법으로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겠다. 그렇다면 <오경>을 “교훈”(즉 ‘토라’)으로 부르면 어떨까? ‘토라’는 ‘히브리’ 동사, “가르치다”(teach) 또는 “지시하다”(instruct)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율법”에 비해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창세기>만 하더라도 하나님의 속성이나,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한 교훈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따라야 할 교훈은 무엇이며, 본받지 말아야 할 실수나 실패는 무엇인가 등에 관한 교훈 말이다. 이점 <출애굽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즉 ‘바로’ 왕의 어리석음이나,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는 미래의 독자들에게 반면교사(反面敎師)교사로서의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
물론 모든 율법이나 계명들도 지시(指示)나 교훈임에는 틀림없다. 이들 율법은 인간이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하는 금기 사항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로운 충고이다. 그 충고를 제대로 받아들일 때 행복하고 번영하는 사회를 보장해 주는 열쇠인 것이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신 4:6).
이렇게 볼 때, <오경>을 “율법”으로 부르기 보다는 ‘토라’로 부르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물론 ‘토라’ 즉 교훈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만은 아니다. 단순히 역사적 사실이나, 율법에 대한 지식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교훈은 정보를 위해서가 아니라 변화를 위해서이다”(Instruction not for the sake of information, but for the sake of transformtation): “오늘 내가 네게 명령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 없이 오래 살리라”(신 4:40).
그러나 교훈은 <오경>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성문서>나 <선지자>도 그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다만 후자의 경우 교훈의 양식이 시나 노래로 되어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오경> 내에서 교훈은 산문(散文), 즉 “이야기”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는 <여호수아>에서 <에스더>에 이르는 책들, 즉 <구약>의 <역사서>들에게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들 <역사서>들 역시 교훈, 즉 ‘토라’로 불릴 만하다.
결론적으로 <오경>의 문학 양식을 규정하자면, 전기와 사기와 교훈이 혼재해 있으며, 이들이 “이야기”라는 또 다른 하나의 양식 속에 융합(融合)되어 있다 하겠다.
설화. “이야기”란 “설화”(說話) 또는 “서사”(敍事)의 다른 이름이다. 설화(또는 서사)는 역사를 기술하는 독특한 문학의 한 장르이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이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오경> 내의 설화는 단순하고도 아름다운 문체(文體), 생생한 “신인동형론적”(神人同型論的) 표현, “신 현현”(神 顯現)의 보고들, 자세한 묘사와 반복되는 줄거리 등의 요소들로 인해서 일부 학자들은 “신화”(神話), “전설”(傳說), 또는 “민담”(民譚) 등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용어들이 암시하는 비역사성 때문에, 보수 진영의 학자들은 이들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설화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바, 설화의 내용에 해당하는 “이야기”(story)와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서술방식 즉 “담론”(談論, discourse)으로 이루어져 있다(물론 학자에 따라 이 같은 구분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는 “등장인물”과 “사건”과 “배경”과 이들 전체를 구성하는 ‘플롯’(plot)이 있으며, “담론”에는 일체의 “수사(修辭)적 방법들”과 “상징”, “오해”, “침묵”, ‘아이러니’ 등이 포함 된다. 설화는 역사적 사실기록과 신학적 해석을 섬세하게 결합해 놓음으로써, <성경> 속의 여러 사건들이 단순한 역사기록이나 日誌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주며, 이야기를 보다 흥미진진하게 효과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예컨대, <성경> 속의 설화들로서 <창조설화>, <족장설화>, <바벨탑 설화>, <기적설화>, <부활설화> 등을 들 수 있다.
시와 노래. <오경> 내용의 대부분이 산문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시(詩)와 노래는 이 책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다. <오경> 속에는 <구약>의 가장 오래 된 시가(詩歌)들이 등장하고 있다:
(1) ‘모세’의 노래(출 15)
(2) ‘발람’의 신탁(민 23-24)
(3) ‘야곱’의 축복(창 49)
(4) ‘모세’의 노래와 축복(신 32-33)
(5) ‘아론’의 축복(민 6:22-27)
(6) ‘미리암’의 노래(출 15:2)
(7) 이스라엘의 노래(민 21:17-18)
(8) ‘리브가’의 축복”(창 24:60)
학자들은 이들 시들이 대략 주전 13-11세기경에 현재의 형태로 고정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예언. <오경> 속에는 설화를 구성하는 또 다른 양식이 존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데, 이른바 “예언”이다. <구약>의 예언 문서는 대개 “신탁”(神託)과 그에 대한 강해(講解) 내지는 담론(談論)로 이루어져 있다:
(1) ‘아브라함’에 대한 ‘야훼’의 예언(창 15:12-16)
(2) 이스라엘 중에 새 예언자가 출현할 것이라는 ‘모세’의 예언(신 18:15-20)
(3) <신명기>에서 흔히 역사적 서문(序文)으로 불리는 ‘모세’의 강해(신 1:4-).
(4) 율법의 축복과 저주에 관한 ‘모세’의 강론(신 4:1-10)
2. 구조
<오경>을 어떻게 읽든 <창세기>에서 <신명기>에 이르는 내용은 전체적으로 일관성을 지니는 하나의 이야기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왜 <오경>은 다섯 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언제 이 책이 다섯 권으로 나누어졌을까?
<성경>의 장(章)과 절(節)의 구분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장의 구분은 1200년 경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스테판 랭톤’(Stephen Langton)의 발명이며, 절에 숫자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16 세기경이다. 물론 절의 구분은 이보다 적어도 천년 이상 이른 시기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일찍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예배의 편의를 위해서, 자신들의 <히브리 성경>에서 긴 본문을 몇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누어서 읽는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오경>이 언제 다섯 권의 책으로 나누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적어도 신약 시대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분리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주후 1 세기에 <오경>을 다섯 권의 책으로 인정하고, 각 책의 이름을 현재의 이름 그대로 받아들였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두 번째 ‘모세’로 그리면서, 책을 전체적으로 다섯 단락으로 나누고 있다. 이와 같은 책의 구조는 ‘모세’의 <오경>의 구성을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다. 제 1 세기 ‘유대’인 학자 ‘요세푸스’나 ‘필로’ 등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주후 2-3 세기에 나온 다른 책들, 즉 <전도서>나 <아리스테아스의 서신>도 전체 다섯 권의 책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시편>이 다섯 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책의 최종 편집 단계에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시편> 중에서 율법에 관한 시가 유독 특별하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예컨대, <시편>은 제일 먼저 율법을 노래한 시로 시작하고 있으며(제 1편), 가장 긴 시로 알려진 119 편이 율법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 1편은 독자들로 하여금 인생의 성공을 위해서 율법을 주야로 묵상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단순히 <오경>의 율법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시편>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시편>은 그 자체로서 뿐만 아니라, 율법의 중차대함을 대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율법에 대한 이와 같은 대전제는 적어도 ‘모세’의 “다섯 권”의 책이 <시편>보다는 시기적으로 앞서고 있으며, “다섯 권”의 <시편>도 결국 “다섯 권”의 <오경>의 구조를 모방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시편>의 최종 편집 시기를 안다면, 역으로 <오경>이 언제 다섯 권의 책으로 나누어졌는지에 관한 최소한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시편> 내에서 이 책이 포로기 이후나, 최소한 초기 포로기의 작품이라는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다섯 권의 <시편>은 일러도 주전 5 세기 이후에나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반면, <시편>은 <히브리 성경>의 마지막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히브리 성경>의 최종 정경 화 작업이 주전 2 세기-주후 1 세기 사이에 이루어 진 것으로 볼 때, 다섯 권의 <시편>은 일러야 주후 5 세기경에 비로소 최종적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경>의 최종 분리 시기도 자연스럽게 미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경>의 분리 시점을 이보다 훨씬 이른 <구약> 시대로 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더 중요한 질문은 그 시점이 아니라, “왜?”일 것이다. 오늘날 ‘유대’ 회당에서 사용하고 있는 <오경>도 한 개의 두루마리로 되어있다. 그런데 왜 이 책이 다섯 권으로 나누어져 있었을까? 가능한 대답 중의 하나로 “필기도구”의 문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유대’인들이 짐승의 가죽을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포로기 이후였다. 그 이전까지는 ‘파피루스’ 종이 위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다(참고. 렘 36). ‘파피루스’ 종이가 짐승의 가죽에 비해 훨씬 약하고 찢어지기 쉬웠으니, 당연히 ‘파피루스’ 두루마리는 짧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창세기> 정도가 아마 ‘파피루스’에 쓸 수 있는 최대한의 분량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구약>에서 <창세기>보다 더 긴 분량의 책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활자로 된 <히브리 성경>에서 <창세기>가 85쪽, <출애굽기>가 72쪽, <레위기> 51쪽, <민수기> 74쪽, 그리고 <신명기>가 71쪽이다. 고대 ‘파피루스’ 두루마리에서 각 책의 분량도 상대적으로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이제는 서론으로서의 <창세기>가 왜 두 개의 두루마리로 분리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모세’의 고별 설교를 다루고 있는 <신명기> 역시 별도의 두루마리로 존재한다. 그러나 <출애굽기>에서 <민수기>는 중간에 여기저기 율법을 포함하고 있는 하나의 연속적인 이야기로서, 이 역시 적절한 크기의 분량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두루마리로 분리시켜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아무런 기준도 없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출애굽기>와 <민수기>는 거의 비슷한 길이를 보여주고 있으며, <레위기>가 그 사이에 마치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는 모습이다. 이처럼 <레위기>가 다섯 권의 책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구조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해 보인다. 즉 희생 제사와 정결에 관한 규례야 말로 <오경>이 전하고 있는 핵심 주제이기 때문이다.
3. 문체
<오경>의 문체에 대한 연구는 이곳에서 일괄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오경> 내의 각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이야기나 에피소드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더 유익할 것이다.
4. <오경>과 근동 문학
하나님의 계시가 진공(眞空)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의 문화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런 점에서 <오경> 내용의 많은 부분이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고대 근동(近東)의 세계관(世界觀)을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다. 예컨대, <창조 이야기>나 <대홍수 이야기> 등은 지금도 고대 근동문학의 아류(亞流)로 인식되고 있을 정도로 닮은 점이 많다. 또한 <오경> 속의 율법이나 규례 등도 여러 면에서 이보다 시대적으로 더 오래된 <함무라비 법전>이나 ‘히타이드’ 족의 <주종 계약서>를 닮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경>과 근동문학과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창세기> 편에서 상세하게 다룰 것이다(참고. 2장). ‘트렘퍼 롱맨’의 <어떻게 창세기를 읽을 것인가>도 유익한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오경>의 역사
<오경>이 언제, 어떻게, 현재의 본문(本文)으로 최종 확정되었을까? 누가 그 일에 관여했을까? 저자는 누구였을까? 그리고 처음 독자는 누구였으며, 책의 의도와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이상과 같은 질문들이 <오경>의 역사를 연구하고자 할 때, 필연적으로 당면하게 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들 질문에 대한 대답 여부에 따라, <오경>의 이해와 해석은 지대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이점은 비단 <오경>에만 국한되지 않고 <성경> 전체로 확대될 수 있다.
<성경>의 역사와 관련된 제반 연구를 넓은 의미에서 “역사비평”(歷史批評) 내지는 “통시비평”(通視批評)이라 칭하기도 한다. 그리고 역사비평의 전제나 관점은 <성경>이 최종적으로 완성되기 까지 일련의 정경화(正經化) 과정을 거쳐 왔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정경화 과정이라 함은 구전(口傳) ⇒ 문서 ⇒ 편집의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성경>이 완성되는 일련의 과정을 뜻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각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위 계몽시대(啓蒙時代)로 대변되는 17-18 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성경>은 신앙 공동체의 경건서적으로서의 기능에 머물렀을 뿐이었다. 당연히 <오경>의 저자 문제만 하더라도, 그것이 ‘모세’의 작품이라는 데에 아무런 이론이 있을 수 없었다. <오경>의 역사에 관한 연구와 논쟁은 19 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는데, 이후 지금까지 연구의 흐름을 대략적으로 두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1) 1800-1975년 사이: <오경>의 문서설의 태동과 확립
(2) 1975년 이후: 다양하고 급진적인 <오경>의 편집 가설들의 등장
1. 모세 저작설
‘모세’ 저작설의 핵심은 ‘모세’가 신적인 영감과 초자연적인 계시를 통해서 <오경>의 전부 또는 대부분을 기록했다는 데 있다. 이는 현대적 의미에서 단일저작설과 거의 상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주장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 되었으며, 가장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다.
교회의 전통. ‘유대’교회와 ‘사마리아’ 교회, 및 기독교회는 전통적으로 <오경>을 ‘모세’의 작품으로 강력하게 지지해 왔다. 또한 이와 같은 전통적인 교회의 주장을 지지하는 신학자들 또한 적지 않다.
<성경> 외적인 증거. ‘유대’교 전승, 초대 교회 교부(敎父)들, <탈무드>나 <미쉬나> 등과 같은 ‘유대’ 문헌들이 <오경>의 저자가 ‘모세’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요세푸스’(Josephus), ‘필로’(Philo), ‘파이퍼’(Piper) 등과 같은 ‘유대’인 학자들도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모세’의 죽음에 관한 기록조차도 ‘모세’와 같은 위대한 선지자라면 자신의 죽음에 관해서도 능히 기록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모세’의 단일 저작설을 지지하였다. 설령 ‘모세’가 <오경>의 모든 세부적인 사항을 일일이 기록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책을 그의 작품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근거가 있다. 예컨대, <함무라비 법전>은 ‘함부라비’ 왕이 직접 쓰지 않았지만, 저작권을 ‘함무라비’ 왕에게 돌리고 있으며, <실락원> 역시 ‘밀턴’의 비서가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과 같은 논리 때문이다. <산상수훈> 역시 예수님을 원저자로 인정하는 것과 같다.
<성경>의 내적 증거. 직접적이고 명시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오경>을 위시해서 <신ㆍ구약>은 여러 곳에서 ‘모세’가 <오경>의 일부 내지는 전체를 기록했음을 시사하거나 암시하고 있다:
(1) <오경>의 예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말씀하시되(참고. 출 12:1-28)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참고. 출 20-2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참고. 출 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참고. 출 17:1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에 단을 쌓고(참고. 출 24:4, 7)
이는 모세가 요단 저쪽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참고. 신 1-30)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참고. 신 5:30-신 31:9)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을 다 책에 써서 마친 후에(참고. 신 31:24)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들이 행진한 것을 기록하였으니(참고. 민 33:2)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 이 노래의 말씀을 끝까지 읽어 들리니라(참고. 모세의 노래: 신 31:30-32:1-52)
(2) <오경> 이외의 증거: <오경> 이외에 <구약>의 다른 여러 곳에서 <오경>을 “모세의 책”, “모세의 율법책” 등으로 지칭하며, ‘모세’의 저작설을 지지하거나 암시하고 있다(예. 수 1:7-8; 8:31; 23:6; 왕상 2:3; 왕하 14:6; 23:25; 대상 2:13; 대하 5:10; 23:18; 25:4; 30:16; 33:8; 34:14; 35:12; 스 3:2; 6:18; 7:6; 느 1:7; 8:1; 9:14; 14:29; 13:1; 단 9:11; 말 4:4).
(3) <신약>의 증거. <신약> 역시 여러 곳에서 ‘모세’의 저작을 암시하는 본문들이 여럿 등장하고 있다(예. 막 12:19; 요 1:17; 롬 10:5; 눅 2:22, 20:28; 요 1:4-5, 8:5, 9:27; 행 3:22, 6:14, 13:39; 고전 9:1; 고후 3:15; 히 9:19; 계 15:3)
(4) 예수님의 증거. 예수께서도 “모든 율법은 모세로부터 온 것”이라고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다(예. 막 10:3, 12:26; 눅 5:14, 16:28-31; 요 7:19).
(5) ‘모세’의 자격. <성경>에서 ‘모세’의 저작설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거나 암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모세’가 지닌 일련의 자격들이 그가 <오경>의 저자가 되기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설명이나 본문이 있다: (i) ‘모세’의 지적 수준(참고. 행 7:2); (ii) 시간적 여유(참고. 광야에서의 40년); (iii) 어머니의 양육으로 ‘히브리’ 역사에 정통함; (iv) ‘미디안’에서 보낸 40년의 경험으로 주변의 지리와 역사에 능통하게 됨; (v) 국가 건설자로서의 도덕적, 종교적인 자격을 갖춤.
이상에서 보듯이, <오경>에 대한 ‘모세’ 저작 설에 대한 증거는 <성경> 내ㆍ외적으로 뿐만 아니라, 교회의 전승이나, 역사적 전통 등을 통해서도 아주 풍부하고 압도적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모세’ 저작 설을 전적으로 부인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모세’의 단일 저작 설은 부인할 수 있을지언정, ‘모세’가 <오경>의 완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데에 대해서는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그의 역할을 최소화 한다 하더라도, 그가 기존의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등의 창조적 편집자 역할은 했을 것으로 보인다. <오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고대의 책들, 즉 <야훼의 전쟁기>(민 21:14)나 <야살의 책> 등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이처럼 제한된 ‘모세’의 역할론을 흔히 “단일 저자-후대 편집가설”이라 부른다. 이 가설은 이른 바 “문서 설”에 대한 반박으로 일련의 진보적 보수 진영 학자들이 제기한 이론이다.
2. 문서 설
전제. 그렇다면 문서설(文書設)은 과연 무엇인가? 문서설은 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르게 설명하고 있지만, 기본적인 전제는 동일하다. 보다 상세한 비교연구를 위해서 이 장 끝 부분에서 소개하고 있는 참고 도서가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문서설의 대 전제(前提)는 <오경>을 비롯한 <성경>의 각 책은 단일 저자가 단번에 기록한 작품이 아니라, 여러 시대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다양한 자료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편집자들의 창조적인 편집 작업, 예컨대, 수집(收集)이나 보완(補完), 그리고 수정(修正)과 재해석(再解釋) 등을 통해서 완성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초기 문서설은 더욱 발전하여 다양한 “역사비평”(歷史批評) 방법론의 배경과 전제가 되고 있다(다양한 역사비평적 방법론과 관심사에 대해서는 본 교재 제 1권에서 간략하게 다룬 바 있다).
역사비평 학자들에 따르면, 기독교나 유대교가 아무리 초자연적인 기원을 지녔다 해도, 역사적이며 발전적인 특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예컨대, 종교 의식이나 표상들은 어느 한 시대에 나타나서 한동안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다른 새로운 유형들과 결합하여 변화하고, 다시 다음 시대로 넘어가면서 쇠퇴하고, 소멸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이처럼 종교적 현상도 일종의 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일반 문학작품에 적용하는 일련의 역사비평방법들을 사용하여, <히브리 성경>의 기원과 발달 등에 관한 제반 역사적 사실들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배경. 하나의 학설로서 문서설이 확립된 시기는 19 세기 후반으로 볼 수 있지만, 그 태동(胎動)이나 기원은 15 세기의 “문예부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이어지는 “종교개혁”(16 세기)과 “계몽시대”(17-18 세기)의 지적ㆍ사상적 토양이 문서설의 배경으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
(1) 문예부흥(The Renaissance): 고전(古典)에 대한 이 시대 사람들의 관심은 단순히 고전 작품에만 머물지 않고, 고대의 사고와 문화 전반에 까지 확대되었다. 사람들은 고대 ‘라틴’어나 ‘히브리’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성경>을 포함한 다른 고전들의 내용을 단순히 읽는데 그치지 않고, 그 기원이나 문화적 배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까지 관심과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2) 종교개혁(The Reformation): 중세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은 당연히 가장 중요한 연구의 대상이 되었으며, 특히 <성경>의 신학적 메시지에 대한 논쟁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중차대한 문제로 부각되었다. 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의 대결에서 교회가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공격하면서,<성경>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권위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로마’ 교회는 <성경>의 권위와 원래의 의미를 초대교회 당시의 모습으로 되돌려놓아야 할 것이었다. 이와 같은 개혁 운동은 필연적으로 <성경>의 기원이나 의미에 대하여 학문적인 관심사를 심화시켰다.
한편, 개혁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 사이에 벌어진 논쟁과 분리는 일종의 완충지대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즉 자유사상가들의 출현을 말하는데, 이들은 두 종교 진영의 주장 어디에도 속하기를 거부했다. 이들 중 일부는 교회의 교리(개혁교회든 ‘로마’교회든)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理性)이야말로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3) 계몽사조(The Enlightenment):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이와 같은 움직임은 17-18 세기 동안의 소위 계몽시대에 이르러 만개(滿開) 하기에 이른다. 이전 세대까지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은 신앙과 도덕의 유일한 잣대이자 지침이었다. 그러나 계몽사조에 따르면, 만물의 척도는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모든 진실(종교에 관한 것이든 아니든)의 진위(眞僞) 여부는 인간 이성의 잣대로 검증되어야만 한다. 인간의 이성은 믿음이 아니라 증거를 요구하며, 그 증거는 역사적이고, 합리적이어야만 한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예언이나, 기타 신적인 개입 따위는 신뢰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성경>의 주장이나 설명은 철저한 검증을 필요로 한다. 이와 같은 초기 계몽 사조는 훗날 과학과 과학적 방법론의 발달, 이신론(理神論)과 진화론(進化論)의 등장 등으로 보다 정교하고 발전된 형태의 비판과 회의론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4) <성경>의 문학과 신학: <오경>에 대한 비평적 연구를 촉발시킨 또 다른 원인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성경> 자체의 신학적이고도 문학적인 비일관성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오경>에 대하여 이성적인 접근을 시도했을 때, 이 책이 한 저자의 작품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논리적인 의문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몇 가지 대표적인 의문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오경>은 ‘모세’가 직접 말할 때를 제외하고는 모두 3인칭으로 그를 지칭하고 있다. 따라서 극히 제한된 일부분들만이 ‘모세’가 기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예: 출 17:14; 24:4; 34:27,28; 민 33:2). 그러니까 <오경>의 기록자는 ‘모세’를 <오경> 전체의 저자라기보다는 책 속의 일부 내용들에 대해서만 저자로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둘째, “문학적 상수”(文學的 常數)의 문제. 즉 문체(文體)가 판이한 한 쌍의 본문이 서로 다른 한 쌍의 “문학적 상수”(文學的 常數)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예컨대, ‘야훼’/‘시내’ 산/‘가나안’/‘르우엘’ 또는 ‘호밥’(‘모세’의 장인) 이 하나의 상수 군(群)을 이루고 있고, ‘엘로힘’/‘호렙’ 산/‘이드로’(‘모세’의 장인)가 또 다른 하나의 상수 군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어휘의 변화는 다분히 규칙적이며 의도적인 것으로서, 문체나 개념이나 역사적 관점 상의 차이와 불가분 연결되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단일 기록자가 단순히 문학적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나, 또는 강조를 위해서 이 같은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셋째, 문학적 불연속성의 문제가 있다. <창세기>에서 <신명기>에 이르는 동안 “이야기”와 “율법”은 서로 부드럽게 연결되지 않음은 물론, 수많은 “반복”과 “모순”들로 가득 차 있어, 단일 저자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예컨대, 문학적 “반복”의 사례를 들자면, 두 번의 “창조 기사”(창 1:1-2:4)나, ‘브엘세바’ 지명의 기원에 관한 두 번의 언급(창 21:31; 26:33), ‘야훼 예배’의 기원에 관한 두 번의 설명(창 4:26; 출 6:2-3), 홍수 사건에 대한 두 번의 상이한 기록, 두 번씩이나 ‘시내’ 산(또는 ‘호렙’ 산)에 오르는 ‘모세’에 관한 기록,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두 번, 그리고 <이삭 이야기>에서 한 번 등장하는 아내를 누이로 속이는 이야기 등이 있다. 그리고 “모순”의 대표적인 사례로, ‘가인’의 아내에 관한 기사(記事)를 들 수 있을 것인 즉, “과연 누가 가인의 아내인가?” 하는 점이다.
넷째, 특정 문학적 상수 군(群)과 일대 일의 대응 관계에 있는 신학적 입장이 존재한다. 예컨대, 이를 도표화 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다섯째, <오경>의 본문 속에 시대착오적인 지명이나 제도가 등장하고 있다. 예: ‘블레셋’(창 21:34); 이스라엘의 군주제(창 36:31); 낙타의 사육; “오늘날까지”로 일컬어지는 개명된 성읍(창 23:32); “가나안 인들이 아직 그 땅에 있었을 때”(창 12:6). 이들은 ‘모세’ 이후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로서, 훗날 이스라엘이 경험한 역사ㆍ문화적인 상황에서 기록한 것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모세’의 단일 저작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대목이다.
선구자들. <오경>의 단일 저작설에 의문을 제기한 초기 연구자로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마스 홉스’(T. Hobbes)를 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리워야단>(1651)에서 몇 가지 근거를 들어 모세’ 저작설을 부인하고 있다. 예컨대, ‘모세’가 자신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다든지, 시대착오적인 표현들이 등장하는 것 등이 그렇다. 그는 <신명기> 11-27이나 선지자 ‘힐기야’가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책 정도를 ‘모세’가 직접 기록한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오경>의 최종 편집자로 ‘에스라’를 지목했다.
‘스피노자’(Benedict Spinoza)는 정통 ‘유대’인으로서, 그가 쓴 <신학정치론>(1670)은 출간되자말자 엄청난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그 역시 ‘토마스 홉스’가 제시한 것과 같은 이유들로 ‘모세’ 저작설을 부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요셉’과 ‘야곱’ 이야기들 속에 일관성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그 이유는 두 인물에 관한 여러 다른 이야기 자료를 섞어놓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도 <오경>의 편집에 ‘에스라’의 역할을 인정하긴 했으나, 그가 최종 편집인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홉스’와 입장을 달리한다. ‘에스라’가 최종 편집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오경> 속에 여전히 반복적인 표현이나 모순 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계몽시대의 산물인 이신론(理神論)의 지적ㆍ사상적(知的ㆍ思想的) 영향에 대해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신론의 하나님은 창조주이긴 하나, 더 이상 세상사에 간섭하거나 개입하지 않는 신이다. 이는 정통 기독교 신학에 중대한 도전으로서, 기적이나, 예언이나, 성육신 등을 통한 하나님의 일체의 섭리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기적 사역이나, <성경>의 저자에 관한 통념(通念)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예컨대, 이신론자 ‘사무엘 파르비쉬’(Samuel Parvish)는 <신명기>의 저자에 관하여 처음으로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이다. 그는 <열왕기(하)>(22-23장)을 근거로, <신명기>의 저작 시기를 ‘요시아’왕 시대로 보았으며, 당시 영적 각성 운동의 일환으로 이 책을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기록자는 당시의 제사장들로서, 이들은 자신들의 입지(立地)와 영향력 확대를 위하여 그렇게 했다고 주장하였다.
이신론의 신학 사상은 파괴적이긴 하지만, <오경>의 문서설에 끼친 영향력은 당시에는 찻잔 속의 태풍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오경>의 편집에 관한 새로운 합의(合意)가 19세기를 기점으로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었던 바, 합의를 구성하는 세 가지 핵심 기둥이 있었다: (1) <오경> 속에는 네 가지 문서(자료)가 존재한다; (2) <신명기>는 주전 7 세기 후반에 완성되었다; (3) <사제 문서>(예: <출애굽기> 25장-<민수기> 30장에 이르는 제사에 관한 규례)의 편집은 포로기 이후 주후 5 세기에 이루어졌다.
‘모세’ 저작설에 반기를 든 계몽시대 인물로 ‘장 아스트룩’(Jean Astruc)을 빼놓을 없다. 그는 ‘모세’ 저작설을 일컬어, “지난 세대의 고질병”이라 혹평했다. 그러면서 긴 제목을 가진 자신의 저서 <모세가 창세기를 저작한 것으로 보인다는 옛 기억에 대한 추측>에서, 그보다 앞선 선구자들이 발견했던 것과 유사한 일련의 “모순 내지는 반복”을 소개하고 있다: (1) 두 번의 창조 기사(창 1-2장); (2) 두 번의 <사라 이야기>(창 12:10-20; 창 20); (3) 두 개의 하나님의 이름(‘엘로힘’과 ‘야훼’)
‘아스트룩’은 자신의 발견을 근거로 새로운 가설(假說)을 내놓았다. 즉 하나님의 두 이름은 동의어(同義語)가 아니라, 원 저자가 다른 두 개의 상이한 자료에서 따온 이름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토대로 <창세기>를 네 개의 자료(資料)로 구분하였다(두 개의 긴 자료와 두 개의 짧은 자료). 그는 주장하기를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 마치 네 개의 <복음서> 기사처럼, 이를 네 개의 병행하는 기사(記事)로 작성하였다고 한다.
하나님의 두 이름을 근거로, <창세기> 1-11장을 네 개의 기사(A-D)로 구분해 보면 아래 도표와 같다. 모세’ 이후 누군가 이들 네 개의 기사를 현재의 본문으로 통합을 했는데, 이와 같은 통합 과정에서 이른 바 “반복과 모순”은 필연적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인정할 수 있는 바이다.
‘모세’가 네 개의 <창세기> 기사를 기록했다는 ‘아스트룩’의 주장을 오늘날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적어도 그가 상이한 자료를 구별함에 있어 채택한 “모순과 반복”의 두 원리는 훗날 문서설 확립에 중요한 논거(論據)가 된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가 주장한 바대로, <창세기>가 여러 시대에 걸쳐 상이한 자료들의 편집으로 완성된 작품이라는 점도 널리 인정받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원 자료들의 성격이나, 출처, 그리고 편집 과정 등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단편 가설(the fragmentary hypothesis). 이중 가장 간단한 견해가 소위 “단편 가설”이다. 단편가설의 핵심 전제는 <오경>을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일에 단 한 사람이 간여했다는 것이다. 그는 역할은 일종의 창조적 편집자로서, 이전에 존재하던 다양한 자료들에 대해서 그 내용을 가감(加減), 수정(修正), 재해석(再解釋) 등을 통해서 하나의 문서로 통합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다만 통합 과정에서 지나치게 자의적이거나 무리한 편집으로 원래의 각 자료의 특징을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했을 것이다.
19세기 초, 단편가설을 처음으로 제안한 대표적인 학자로 ‘스콧틀랜드’의 사제였던 ‘알렉산더 게데스’(Alexander Geddes)와 독일의 신학자 ‘바테르’(Johann Severin Vater)를 들 수 있다. ‘게데스’에 따르면, <오경>의 “단편들”(원 자료들)은 역사적으로 ‘모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솔로몬’ 시대(주전 10 세기)에 하나의 문서로 통합되었다. ‘바테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즉 그는 각 자료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시기적으로 ‘예루살렘’ 멸망(주전 587 년) 직전 ‘유다’ 왕국에서 최종적으로 통합된 것으로 보았다.
보충 가설(the supplementary hypothesis). “보충 가설”과 “단편 가설”의 근본적인 차이는 “원 자료”와 저자(또는 편집자)의 수(數)에 있다. 즉 “단편 가설”의 전제는 <오경>은 복수(複數)의 자료들을 단수(單數)의 편집자가 최종적으로 편집한 결과물이라는 것인 반면, “보충 가설”의 전제는 그 반대쪽에 자리하고 있다. 즉 <오경>은 단수(單數)의 원 자료가 여러 시대를 두고 복수(複數)의 손길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보충 가설”의 한 예로 <잠언서>를 들 수 있다. <잠언서>에 등장하는 일련의 소제목(小題目)들이 이 책이 어떻게 완성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참고. 1:1; 10:1; 25:1; 30:1; 31:1). 즉 잠언의 각 책을 쓴 작가마다 문체(文體)나 관심사가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보충 가설”에 따르면, 가칭(假稱) <원 오경>의 짧은 문학 작품은 여러 시대를 두고 수정과 확장을 거쳐 현재의 <오경>으로 완성되었다. 수정 작업은 원래의 자료를 제거하거나 변경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눈덩이가 커지듯, 원래의 특징은 그대로 유지시킨 가운데 이루어졌다.
“보충 가설”은 1830-1940년 사이 독일에서 인기를 누렸는데,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로 ‘에발트’(G. H. A. Ewald)와 ‘드베테’(W. M. L. de Settw) 등이 있다. 이들은 <오경>에서 일련의 “자료 층”(資料 層)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 중 가장 오래된 층은 “십계명”과 <출애굽기> 21-23장에서 보는 율법들로서, 그 위에 “엘로힘 층”(예.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지칭하는 모든 자료들)이 더해졌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그 위에 “야훼 층”(예. 하나님을 ‘야훼’로 칭하는 모든 자료들)을 쌓이고, 최종적으로 <신명기> 층이 더해졌다. 그리고 <신명기> 층 보충에 간여한 집단이 <오경>의 최종 편집에도 간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보충 가설”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간의 흥미를 잃어버렸지만, 19 세기 후반에 이르러, 문서설 논쟁은 결국 위에서 소개한 두 가지 경쟁 가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리고 20세기에 이르러 논쟁의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자료의 특징이나 성격을 규명(糾明)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각 자료의 연대(年代)를 결정하는 문제이다. 이들 자료와 관련된 일체의 연구는 “자료비평”의 주된 관심사이기도 하다(“성경 비평학”은 별도의 교재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자료의 규명. ‘아스트룩’은 일찍이 <오경>을 구성하는 상이한 자료의 존재를 하나님의 두 이름에서 착안한 바 있다. 후대의 “자료비평” 연구도 같은 원리를 적용하여 각 자료의 성격이나 특징을 규명하고 있다. 독일의 신학자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 1844-1918)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서, 그는 <오경>에서 네 자료를 처음으로 규명함으로써, 문서설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발견한 네 자료는 연대순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야훼 자료(J)>; (2) <엘로힘 자료(E)>; (3) <신명기 자료(D)>; (4) <사제 자료(P)>. 아래 도표는 각 자료를 포함하고 있는 본문의 분량과 문학 양식에 따라 개략적으로 요약해 놓은 것이다.
‘벨하우젠’의 자료비평적 연구는 영어권에서도 많은 호응을 얻게 되었는데, 대표적 인물로 ‘드라이버’(S. R. Driver; 1846-1914)를 들 수 있다. 그 역시 자료를 구별함에 있어 두 가지 원칙을 답습하였는데, (1) 하나님의 이름과 (2) 반복되는 내용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었다. 이 원칙에 따라 그가 제안한 <창세기> 1-25장에 대한 자료 분석 결과는 아래 도표에 요약한 바와 같다.
‘드라이버’의 분석에 따르면, <사제 자료(P)>의 언어는 역사가의 언어라기보다는 법률가의 언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즉 상황적(狀況的)이며, 공식적이고, 정확한 용어를 구사하고 있다. 그리고 주제를 전개하는 방식도 체계적이며, 반복을 감수하고서라도 세세한 내용에 이르기까지 완벽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반면, <야훼 자료(J)>는 그 문체가 유연하고, 다양하다. 하나님의 행동을 묘사함에 있어서도 아주 세세(細細)하고, 생생하다(예. 신인동형론적 표현). 그러나 <엘로힘 자료(E)>와 <야훼 자료(J)> 사이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제외하면 큰 문체(文體)의 차이는 없다. 대조적으로 <신명기 자료(D)>는 설교나 연설에 걸 맞는 수사적(修辭的) 문체를 보여주고 있다. 문장은 대체적으로 길고 유창(流暢)하다. 또한 시적인 기교나, 핵심 단어나, 상투적(常套的)인 표현들이 수시로 등장하고 있다.
자료의 연대. 자료비평과 관련한 두 번째 문제는 각 자료의 연대(年代)를 결정하는 문제라고 했다. 원래 이들은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것들이다. 그러나 특정 시기에 특정 저자/편집자가 하나의 문서로 통합한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나중 자료가 이전 자료에 순차적으로 통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경>이 완성되는 과정을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아스트룩’이 처음 문서설을 제안했을 당시에는 이들 네 자료가 ‘모세’가 <오경> 편집에 사용했을 것으로 믿었지만, ‘벨하우젠’이나 ‘드라이버’는 ‘모세’와는 전혀 상관도 없고, 그보다 훨씬 후대에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이 제안하는 자료의 연대는 다음 도표에 도시한 한 바와 같다.
3. 문서설 평가
그러나 이들 연대표는 <신명기> 자료만 제외하고는 사실상 근사치에 불과하며, 학자들마다 수십 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런저런 수많은 가정과 추측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 솔직히 지난 한 세기 동안 <오경>의 자료와 관련해서 실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역설적으로 모종(某種)의 일치된 견해가 아닌 차이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20 세기 후반이후 새로운 “성경비평 방법론”의 대두와 함께, 자료설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쇠락(衰落)하는 결과를 맞이한다. 참고 문헌: (i) Wenham, G. <Exploring the Old Testment: A Guide to the Pentateuch>. Vol 1. IVP: 2003. (ii) 이형원. <성경비평학>. 침례신학대학출판부: 1983.
여기서 새로운 사조(思潮)라 함은 <성경>을 완성된 한 권의 책으로 보고, 원(原) 자료가 아닌 최종 본문과 독자에 대한 관심을 말한다. 이를 통해서 <성경> 본문의 신학적 주제와 신앙적 교훈을 이끌어낼 뿐만 아니라, 본문이 주는 정서적 감동도 함께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하는 자세를 말한다. 이와 같은 새로운 사조를 “공시 비평”(共視批評)으로 통칭(通稱)할 수 있겠다.
결론적으로 이상적인 “성경 비평”은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접근을 필요로 하는 바, “공시비평”(共視批評)과 “통시비평”(通視批評)을 아우르는 자세를 말한다. 이를 “종합비평”(綜合批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은 본인의 <성경 비평학 개론> 교재에서 간략하게 소개한 바 있으나, 위 주석에서 소개한 두 저서를 통해서 보다 상세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므로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오경>의 신학
<오경>의 신학적 주제(主題)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문학작품에 관한 보다 일반적인 질문 몇 가지를 알아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1) 주제란 과연 무엇일까? 즉 어떻게 정의(定義)할 수 있을까?
(2) 주제(또는 주제들)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있는 것일까?
(3) 주제는 단 하나 뿐일까? 또는 여러 개의 주제가 공존할 수 있을까?
이들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무엇인가? 내가 어떤 전제(前提)를 가지고 문제에 접근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두 가지 가능한 전제를 상정(想定)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결국 문학 작품의 주제 파악을 위한 방법론의 차이로 귀결된다 할 수 있다.
1. 방법론
본문의 역사. 첫 번째 전제는 한 작품이 현재의 본문(本文)으로 최종 확정되기까지의 전 과정, 즉 “본문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 같은 입장을 “역사비평” 또는 “통시비평”이라 칭한다고 배운바 있다). 독일의 ‘마틴 놋’(Martin Noth, 1902-68)과 ‘폰 라드’(Gerhard Von Rad, 1901-71)가 본문의 역사를 중시하는 두 대표적인 학자로 알려져 있다.
이들에 따르면, <오경>의 모든 본문은 현재의 본문으로 완성되기까지 일련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가지고 있는데, <오경>의 신학적 주제 파악을 위해서는 이 전체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역사적 발전 과정이란 짧고, 단편적인 원(原) 자료에서 길고도 발전된 현재 형태의 <오경>으로 완성되는 과정을 말한다. 예컨대, <가나안 정복 이야기>는 원래 가정이나 공동체 예배 시에, 몇몇 사람이 입으로 들려주던 아주 짧고 조잡한 형태로 구전(口傳)이었다. 이것이 세대가 지나감에 따라 이야기의 분량이 늘어나고, 점차 더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갔으며, 나중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아는 민족의 영웅담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시간이 더 지남에 따라, 이 영웅담은 다른 지파에서 전해오던 다른 이야기들과 합쳐져서 기록(記錄)으로 남게 되고, 이들 문서들은 수 세기를 거치는 동안 계속 합쳐지고 더욱 확장되어 현재의 <오경>으로 최종 확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1) ‘마틴 놋’: ‘놋’의 주장에 따르면, <오경>은 다섯 개의 핵심 이야기가 골격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이 곧 <오경>의 “핵심 주제들”(core themes)이다. 다섯 개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 <출애굽>; (2) <가나안 정복>; (3) <족장들의 약속>; (4) <광야 이야기>; (5) <‘시내’ 산의 계시>. 이들 이야기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확대와 상호 결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오경>으로 최종 완성되었다.
‘놋’에 따르면, 이들 다섯 이야기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기본적인 주제는 단연 첫 번째 것이다. <구약> 전체를 통해서 ‘야훼’ 하나님을 일러, “너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신 주”로 지칭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출애굽 사건”이야말로 전체 <오경>의 핵(核)으로서, <창세기>에서 <신명기>에 이르는 모든 이야기에서 출애굽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있다. 비록 ‘놋’은 불과 몇 개 지파만이 출애굽에 참여했다고 생각했지만, “야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해 내었다”는 사실 자체는 모든 지파가 이스라엘로서 가장 우선적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온 나라가 예배를 위하여 모였을 때에는 언변(言辯)에 능통한 자가 출애굽의 신앙 고백을 반복해서 선포했을 것이다. 그의 고백 속에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과, 홍해에서의 이집트 군대의 궤멸에 관한 이야기도 당연히 포함되었을 것이다.
‘놋’이 제시하는 두 번째 주제는 <가나안 정복>이다. 즉 ‘가나안’ 정복과 정착에 관한 이야기다. 이 두 번째 주제는 이스라엘이 성소(聖所)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신 26:1-11), 첫 번째 주제와 결합시켜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는 처음 두 주제는 아무 연관이 없었으며, 지파마다 다른 내용의 ‘가나안’ 정복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에브라임’, ‘므낫세’, 및 ‘베냐민’ 등의 핵심 세 지파가 들려주는 정복 이야기가 여타 유사 이야기들을 대체하고, 첫 번째 주제 <출애굽>과 결합됨으로써,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에 관한 범(凡)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굳어졌을 것이다.
‘놋’이 제시하는 세 번째 주제는 <족장들의 약속>이다. 이 주제 역시 처음 두 주제와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는 것이 ‘놋’의 주장이다.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그 땅의 여러 곳에서 예배드리는 지파마다 다양한 내용으로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땅을 정복하면서 이들 이야기의 내용을 알게 되었고, 이들을 <출애굽>및 <가나안 정복>과 결합시켜 궁극적으로 현재 <오경> 이야기의 골격으로 발전시켰을 것이다. 이야기의 골격인 즉은 다음과 같다: 족장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시작하여, ‘가나안’ 정복과 정착에 관한 이야기를 끝으로, 약속의 성취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놋’은 족장에 대한 약속도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에 대한 약속과 ‘야곱’에 대한 약속은 서로 다르며,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이다. 각기 다르게 존재하던 두 이야기가 어느 시점에 누군가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시켜, 새로운 <족장 이야기>로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 속에는 ‘아브라함’을 ‘야곱’의 할아버지로, ‘이삭’을 ‘야곱’의 아버지로 만들어놓고 있는 것이다.
‘놋’의 네 번째 주제, <광야 이야기>는 어떠한가? 이 역시 별개의 독립적인 이야기로서, 나중에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사이의 틈을 채우기 위하여 추가된 것이다. <광야 이야기>는 남쪽 ‘유다’ 지파들의 체험담에서 유래한 것으로 상정할 수 있겠는데, 이들 지파는 ‘시내’ 광야 근처에 정착했던 관계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네 번째 주제를 더함으로써, <오경> 이야기는 <여호수아> 24장이나, <시편> 135-136장 등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형태, 즉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 관한 요약의 행태를 지니게 된 것이다.
여기에 하나 빠진 내용이 있다면, ‘시내’ 산에서의 “율법 계시”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놋’은 이 역시 나머지 주제들과 아무 상관도 없었다고 말한다. “율법 계시”에 관한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념하고 갱신할 때 필요했을 국가적 성지(聖地)와 연관된 것이다. 하지만 이 주제는 훗날 나머지 주제들과 결합하여 현재의 <오경>의 골격을 이루게 되었다고 본다.
지금까지 소개한 “다섯 주제”는 <오경>을 이루는 기본 골격에 불과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오경>의 기본 골격은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내용을 추가하고 확장을 거듭해갔다. 예컨대, ‘이집트’에 내린 재앙(災殃)에 관한 이야기를 첫 번째 주제인 <출애굽>에 보탰으며, <발람 이야기>는 두 번째 주제인 <가나안 정복>에 추가하였고, ‘세겜’에서 있었던 “야곱 에피소드”는 세 번째 주제인 <족장들의 약속>에 결합시켰다. 그렇다면 <오경>의 핵심 인물인 ‘모세’는 어떠한가? 그도 원래는 <오경>과는 아무 상관도 없었으나, 누군가 <광야 이야기>에서 그를 처음으로 언급하였으며, 이후 세 번째 주제 <족장들의 약속>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이야기에 편입 시켰다.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중요성은 증가하면서, 궁극적으로 <오경> 전체적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2) ‘폰 라드’: ‘폰 라드’의 견해도 기본적으로 ‘놋’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오경>의 범위에 관해서이다. 그는 <오경> 대신 <창세기>에서 <여호수아>까지를 포함시키는 <육경>을 선호하였다. 즉 <여호수아>는 <신명기>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오경> 이야기의 결론에 해당한다고 인식했다. 그러나 <오경>이든 <육경>이든 책의 신학적 주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던 것이, 두 사람 모두 본문의 역사에 대한 전제와 이해가 같았기 때문이다.
‘폰 라드’가 인식하고 있는 <오경> 이야기의 가장 오래된 형태는 <신명기> 26:5-9의 본문에 “역사적 신조”(historical creed)의 형태로 잘 요약되어있다:
5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6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7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8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9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26:5-9)
이 짧은 본문은 <오경> 이야기의 주요 사건들을 신조(信條)의 형태로 압축적으로 요약해놓고 있다. 즉 이 이야기 속에 족장들의 소명(召命), ‘이집트’의 노예 생활, 출애굽, ‘가나안’ 정복 이야기들이 다 포함되어있다. 이 본문은 이스라엘이 하나의 공동체로서 매년 성지(聖地) ‘길갈’에 모여 “칠칠절” 예배를 드릴 때, 그들의 핵심 신앙고백으로 낭송(朗誦)했던 것이다. 의미심장한 사실은 <신명기>의 가장 오래된 형태의 이 신앙고백이 <오경>의 최종 본문에 나타난 것과 대동소이하다는 것이다. 둘 사이에 분명한 연속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폰 라드’에 따르면, <오경>의 최종 본문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저자는 소위 ‘야훼’ 기자들이다. 이들은 주전 10 세기 ‘다윗’ 왕조 시대에 <오경> 이야기를 최초로 완성시켰는데, 위에 언급한 <신명기>의 신앙고백에 일련의 자료들을 추가시켰다. 추가된 자료들은 족장들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 ‘이집트’에 내린 재앙 이야기, 그리고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 관한 이야기 등이다. ‘야훼 기자는 이 외에도 “원 역사”(창 1-11) 부분을 “족장 이야기”에 대한 서문(序文)으로 첨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여기에 더하여 ‘시내’ 산의 율법 계시에 관한 이야기도 추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완성된 초기의 <오경>은 주로 “야훼 자료”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는데, 주 관심사는 두 가지 언약에 관한 것이었다. 즉 소위 “족장 언약”과 “시내 산 언약”을 말한다. 그리고 “족장 언약”의 핵심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을 위한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이다. ‘폰 라드’에 따르면, 족장들은 처음에 이 약속이 즉각적으로 실현될 줄로 믿고 있었다. 즉 그들이 ‘가나안’에 도착하자 말자 곧바로 그곳에서 정착하는 줄로 믿었다. 그러나 현재의 <오경>을 보면 이 약속은 여전히 미완(未完)의 약속으로 남아있다. 즉 <여호수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실현될 수 있었던 약속이었다. 처음에 ‘폰 라드’는 가정하기를, 이 약속은 원래 이스라엘의 몇몇 조상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으나 현재의 <오경>에서는 모든 이스라엘에게 해당되는 약속이 되었다는 것이다.
“족장 언약”은 기본적으로 땅에 대한 약속이며, 족장의 편에서 보자면 단순히 이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다른 특별한 요구 조건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시내 산 언약” 역시 그러했다. 이 역시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장해 줄 것이라는 일방적인 선언이다.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규정짓는 선언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시내 산 언약”은 어찌된 영문인지 이스라엘의 적극적인 반응, 즉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시내 산 언약”이 이처럼 “족장 언약”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족장 언약” 속에 이미 다른 자료들이 이전부터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폰 라드’의 견해이기도 하다. 여기서 다른 자료라 함은 율법과 관련된 것일 텐데, “족장 언약” 속에 은혜와 율법이 공존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야훼자료>로만 구성된 <오경>은 이후 어느 시점에서 <사제 자료>를 추가함으로써, 한 차례 개정 및 증보를 맞이하게 된다. 당연히 <오경>의 관점이나 관심사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경> 내에서 <사제자료>로 볼 수 있는 본문은 <출애굽기> 25장에서 <민수기> 36장에 이르는 부분인데, 이곳에서의 주된 관심사는 율법이나 예배 등과 관련된 것들이다. 율법이나 예배 등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는 ‘야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인데, 이미 “족장 언약”에서도 이미 포함되어 있던 이 부분이 새로운 <오경>에서 더욱 명시적으로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제자료>가 단순히 “시내 산 언약”만을 강조했던 것은 아니다. “족장 언약” 또한 암시하고 있었다. 즉 “아브라함 언약”은 이제 세 가지의 약속을 포함하게 된다. 첫째, ‘아브라함’이 한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고, 둘째,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될 것인 바,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셋째, ‘아브라함’은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물론 <야훼자료>에서도 ‘아브라함’이 큰 나라를 이룰 것이라는 암시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폰 라드’에 따르면, 한 나라에 대한 약속은 원래 ‘아브라함’ 언약 속에는 없었던 것이다. <사제자료>가 첨가된 두 번째 <오경>에서 ‘아브라함’ 언약의 새로운 요소를 찾는다면, 특별한 관계에 대한 약속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오경>을 곧 최종 완성 본으로 볼 수 있는 바, 이 최종본의 첫 몇 장에서 인류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노아’를 통한 새로운 시작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에서 삼중적(三重的) 약속으로 이루어진 이른 바 ‘아브라함’ 언약이 등장한다. 삼중의 약속이란 첫째, 무수히 많은 후손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 약속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그리고 세 번째는 땅에 대한 약속이다. 그리고 책의 나머지는 이들 세 약속이 점진적으로 성취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첫 번째 약속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집트’에서 큰 집단으로 성장하는 것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두 번째 약속은 ‘시내’ 산에서 이행되는데, 이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율법과 예배를 계시함으로써,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가 무엇을 뜻하는지 보여주셨다. <오경>의 나머지 부분과 <여호수아>는 세 번째 약속, 즉 “그 땅”에 대한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폰 라드’에게 있어, <오경>의 핵심 주제는 ‘아브라함’ 언약과 성취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본문의 문학. 그러나 과연 <오경>의 주제를 파악하는 일에 <오경> 본문의 역사, 즉 변천사(變遷史)를 아는 일은 정말 필수적일까? 그리고 그 역사를 엄밀하게 재구성(再構成)할 수 있을까? 예컨대, 위에서 소개한 ‘놋’이나 ‘폰 라드’의 연구는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신뢰할 만한 것일까? 즉 이들이 재구성한 본문의 역사는 진정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에 기반을 둔 것일까?
이들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모두 부정적이다. 20 세기 후반에 들어 본문의 역사 연구에 대한 비평과 함께 새로운 방법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본문의 역사에 대한 연구가 유의미(有意味)하고, 나름대로 학문적 업적을 이룩한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이라는 문헌에 대한 “역사비평적” 접근 방식은 아래 몇 가지 이유 때문에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
첫째, 지나치게 세부적인 것에 천착(穿鑿)하다, 전체를 보지 못하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愚)를 범하였다. 즉 <오경>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무시한 채, 세부적인 문제들을 놓고 장황한 논의를 거듭했다.
둘째, 본문의 역사는 기껏해야 가정(假定)이나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현재의 본문이 구전(口傳)에서 시작하여 일련의 역사적 발전을 거쳐 최종 완성되었다는 가정을 증명할 방법이나 수단이 없다. 추측이나 가정에 기초하여 세운 이론은 결코 신뢰할 수 없다.
셋째, 본문에 대한 연구는 현존하는 본문 그 자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현존하는 본문이야말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자료이자 문헌이다. 본문의 이전 형태나 의미도 이를 바탕으로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결국 <오경>의 신학적 주제에 관한 문제는 “본문의 역사”(변천사) 연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최종 “본문의 형태나 구조”(즉 “본문의 문학”)에 대한 연구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20 세기 후반 이후의 대세(大勢)로 굳어졌다. <성경>의 본문 연구에 대한 이와 같은 새로운 해석적 입장을 통칭(通稱)하여, “공시비평”(共視批評)으로 부른다고 했다. 그리고 공시비평의 제(諸) 방법에 대해서는 <성경 비평학>에서 다룬 바 있다(참고. <구약개론(1)>.
(1) ‘데이빗 클라인’(David Clines): 이와 같은 새로운 대세의 선구자로 호주 태생 신학자 ‘클라인’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클라인’은 우선 문학작품에 대한 정의부터 달리하였다. 그에 따르면, <오경>의 주제는 단 하나일 뿐이다. ‘놋’이나 ‘폰 라드’가 제안했던 바처럼, <오경>을 구성하는 핵심 주제들, 즉 복수(複數)의 주제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주제란 내용에 대한 요약도, 이야기의 “구성”(plot)도 아니다. 구성에서 중요한 요인은 인과율(因果律)이다. 즉 어떻게 한 사건이 다음 사건을 촉발시켰는지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클라인’에 따르면, 주제란 작품 속에서 저자가 드러내려고 하는 의제(議題)다. 즉 독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서 전달하고 싶은 주된 관점을 말한다. 예컨대, “권력이 어떻게 타락하는가?” 또는 “하나님과 인간의 계획” 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작품의 주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작품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자료(내용)들이 어떻게 상호 연관성을 갖는지 알 수 있으며, 따라서 작품에 대한 과도한 오해를 차단할 수 있을 것이다. 간혹 일부 작품은 처음부터 주제가 무엇인지 밝히고 시작하지만, 대개의 경우 조심스럽고 반복되는 독서를 통해서 파악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주제는 단순한 구성이 아니라, 뚜렷한 의미를 강조하는 구성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정의를 기초로, ‘클라인’이 제시하는 <오경>의 주제는 무엇일까? 그는 <신명기>의 마지막 부분을 주목한다. 즉 이스라엘은 여전히 “약속의 땅” 밖에서 머물러 있고, ‘모세’가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을 주목하면서 <신명기>가 비정상적으로 끝나고 있다고 본다. 이점 <창세기>도 마찬가지다. 즉 ‘요셉’이 이집트에서 임종을 맞이하면서, 자신의 유해를 훗날 ‘가나안’에 옮겨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중간에 끝이 난다는 점에 우선 착안하고 있다. <출애굽기>나, <레위기>나, 그리고 <민수기> 도 역시 하나 같이 ‘가나안’에 대한 기대로 끝나고 있다. ‘가나안’은 ‘아브라함’ 언약(창 12)이 처음으로 등장한 이후, <오경>의 목적지가 되어왔다. 그러나 <오경>의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이스라엘이 ‘가나안’ 근처까지는 가긴 했지만, 결코 이르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에 착안하여, ‘클라인’은 <오경>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족장 언약의 부분적인 성취(달리 말하자면 부분적인 미성취로도 볼 수 있지만)야 말로 <오경>의 주제다.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은 모두 이 세상을 향한 그분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의 표현이다. 하지만 인간은 항상 자신의 의지로 일을 그르치며, 그 때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처음 약속을 재확인하도록 했다.
‘폰 라드’가 제시했던 바와 마찬가지로, “족장 언약”은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1) 후손; (2) 특수한 관계; (3) 그 땅. 이 중에서 “후손”에 관한 이야기는 <족장 이야기>(창 12-50)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중심에는 두 번째 요소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특수한 관계”가 이야기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민수기>와 <신명기>는 세 번째 요소인 “그 땅”, 특히 ‘가나안’ 정복을 기대하고 있다. 물론 이 세 요소가 따로 따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요소 안에 다른 두 요소가 암시되면서 동시에 드러나고 있다. 땅에 대한 약속만 하더라도, 이 땅을 차지할 후손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리고 동시에 이들 후손은 그 땅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보호가 없다면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내가 너에게 보여줄 그 땅으로 가라”고 하셨다면, 이는 곧 그분께서 ‘아브라함’의 여정을 지키고 보호해 주실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창세기>와 <출애굽기> 처음 일부에서 이와 같은 언약의 세 요소가 가장 두드러지게 잘 드러나고 있지만, <오경>의 나머지 부분 특히 <신명기>에서도 마치 배경 음악처럼 스며들어있어,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주제가 이야기 속에 스며들어있는 약속들과 단순히 연관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그 자체와 연결되어있다. <오경>을 읽어 내려갈 때, 언약의 약속들이 점차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창세기>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후손”에 대한 약속이 일부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라’는 오랜 기다림 끝에 아들 하나를 얻는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결혼 생활 20 년 만에 쌍둥이 아들을 갖게 된다. ‘야곱’이 총애하는 아내 ‘라헬’은 두 아들을 낳고, 다른 아내들을 통해서는 10 명의 아들을 더 보게 된다. 그리하여 이 가족이 ‘이집트’로 이주해 갈 시점에는 도합 70 명에 이르게 된다(창 46:27). “땅”과 “관계”에 대한 약속은 어떨까? ‘클라인’은 <창세기> 안에는 이 두 요소에 대한 관심은 미미하다 말하지만, 이들 역시 일부 성취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예. 창 17:7). 그런데 <출애굽기>에서 <신명기>에 이르는 부분에서는 이들 세 약속은 점도 큰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책의 끝부분에 이르러서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그 땅”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긴 하지만. 바로 이와 같은 상황 때문에, ‘클라인’은 <오경>의 주제가 “약속의 부분 성취”(또는 미성취)를 다루고 있지, 그 반대의 상황 즉 “약속의 성취”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론 라드’는 정 반대의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클라인’에 따르면, <오경>의 주제가 처음 언급된 곳은 <창세기> 12장이다. 즉 “아브라함 언약”의 출발점이 되는 곳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1-11장은 이 주제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 이 부분은 “태초의 이야기” 즉 “원 역사”(原 歷史)를 다루고 있는 곳으로서, <족장 이야기>와는 일견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창세기> 1-11장의 주제와 관련한 일련의 견해들을 살펴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이 부분의 신학적 주제에 대해서 제 2장에서 다시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첫 번째 견해는 <창세기> 1-11장의 주제가 “죄-선고-감형-심판(판결)”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하나님의 정죄의 선고를 부르고(창 3:14-19), 뒤이어 하나님은 그들에게 옷을 지어 입힘으로써 일종의 선처(善處) 즉 감형(減刑) 조치를 취한 다음(3:21), 최종 선고를 내린다(3:22-24). 이 같은 패턴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와 <홍수 이야기>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이 견해가 일종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창세기 1장이 왜 있어야 하는지, 그리고 5, 10, 11장에 등장하는 긴 족보가 왜 있어야 하는지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두 번째 견해는 “죄의 확산-은혜의 확산”의 주제다. 즉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다”는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죄는 ‘아담’ 한 개인의 불순종(3장)으로 시작하여(3장), ‘가인’의 살인(4장)으로 나아가서, 궁극적으로 대홍수를 불러오게 한 전 인류의 규모로 확산해 간다(6장). 하지만 이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 또한 더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컨대, 하나님은 애초에 ‘아담’에게 예고했던 대로 반역한 두 사람에게 즉각적으로 죽음의 선고를 내리지는 않으셨고, ‘가인’에게도 그의 몸에 어떤 표를 새김으로써 그를 오히려 다른 사람으로부터 보호하셨고, 홍수를 통해서도 모든 인류를 멸하지 않고 ‘노아’와 그의 가족은 살려두셨다. 이 두 번째 견해가 첫 번째 것보다 나은 것은 <창세기> 1장이나 족보와 관련된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세 번째 견해가 있는 바, 창조-반 창조-재창조의 주제가 그것이다. 즉 1-2장이 창조를 기술하고 있다면, 이어지는 3-7장은 반 창조(反 創造)를 그리고 있다. 죄로 인하여 그 모든 관계에 분열과 분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짐승; 하나님과 인간. 이 모든 분리의 절정은 대 홍수(大洪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상은 태초의 창조 직후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즉 어둠과 공허와 혼돈이 그것이다(참고. 창 1:2). 그리고 그 이후 재창조는 홍수 이후 물이 빠지기 시작함으로써 재개(再開)된다. 육지와 바다가 구분되고, 땅에는 식물이 다시 자라고, 짐승들은 방주(方舟)에서 나와 “생육하고 번성함”으로써 땅에 퍼져나간다. 그리고 ‘노아’는 ‘아담’처럼 “생육하고 번성할” 것이었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1-11장의 신학적 주제에 대한 두 번째와 세 번째 견해는 분명 일단의 통찰력을 지닌 제안(提案)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과연 1-11장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비관적인지 아니면 낙관적인지를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응하든, 어떤 대안을 마련하든 인간은 항상 죄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인 측면을 강조하려는 것인지, 반대로 인간의 죄가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늘 새로운 출발을 가능하게 한다는 낙관적인 측면을 강조하려는 것인지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를 적절히 해결한다면, 1-11장과 12장 이후의 이야기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에덴’에서 “대홍수”까지, 그리고 “대홍수”에서 ‘바벨’탑 사건까지의 두 시대는 죄로 얼룩진 시기였다. 이어지는 족장 시대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류의 죄악을 이기고 “하나님의 승리”로 규정될 시대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 언약”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맺은 “아담 언약”을 새롭게 시작하거나 재확인하는 절차로 이해할 수 있다. 태초에 하나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생육하고 번성하며”, ‘에덴’ 동산을 “경작하고 다스리도록”하셨다. 이제 ‘아브라함’에게는 다른 경작지(耕作地) 즉 ‘가나안’을 주신다. ‘아담’과 ‘하와’는 그 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 그 하나님께서 이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축복하겠고 네 이름을 크게 하리라.” 바로 이 지점에서 <태초의 이야기>(1-11장)가 <족장 이야기>(12-50장)와 연결되는 방식이 있다. 두 이야기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들이 아니다. “아담 언약”을 보편적(普遍的)이고 우주적(宇宙的)인 것이라고 한다면, “아브라함 언약”은 구체적(具體的)이고 세부적(細部的)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2. 본문의 문학: 재평가
이와 같은 ‘클라인’의 입장은 <오경>의 주제와 관련해서 가장 충분하고도 만족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없지 않다. 이에 ‘고든 웬햄’(Gordon Wenham)은 아래 세 가지 질문을 통해서, <오경>의 주제 도출을 위한 문학적 연구에 새로운 차원을 더해주고 있다:
첫째, 과연 “아브라함 언약”을 “땅과 후손과 관계”의 세 요소로 정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여기서 간과(看過)하고 있는 대목은 언약의 절정에 해당하는 네 번째 요소인바, 다름 아닌 “열국(列國)이 축복을 누릴 것”이라는 약속을 말한다.
둘째, 또 하나 수정(修正)을 요하는 대목이 있는바, 언약의 성취 정도에 관한 인식이다. 즉 언약의 약속이 <오경> 안에서 얼마만큼 이루어졌는가에 관한 문제다. 약속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은 이들 세 요소를 두고 하는 말인가? “땅”의 경우에는 분명 그렇게 말할 수 있겠으나, 나머지 요소들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단언하기가 어렵다. 예컨대, 후손에 관한 약속만 하더라도 다음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모세’의 죽음 이전에 이미 충분히 성취되었다는 인상(印象)을 받게 된다: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하매”(민 23:10).
셋째, <오경>의 주제를 정의함에 있어 그토록 중요한 인물인 ‘모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다는 점이다. <오경>을 ‘토라’의 형식을 갖춘 ‘모세’의 일대기(一代記)로도 볼 수 있다고 하였은즉, 적어도 주제를 이끌어 냄에 있어 그와 관련된 언급 한 마디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가) 먼저 처음 두 질문을 다루도록 하자. <오경>의 주제를 파악함에 있어, <창세기> 12:1-3의 본문은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의 향방을 결정지어준다는 점에서 아주 의도적이며, 계획적이라 할 수 있다. 이후의 논의를 위해서 여기서 한 번 인용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1-3)
이 본문은 “아브라함 언약”을 이루는 약속들이 세 가지가 아니라,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는 “땅”에 대한 약속이다(1절). 두 번째는 “후손”에 대한 약속이다(2절). 세 번째는 “특수한 관계”에 대한 약속으로서, 축복과 저주에 관한 언급이다(3절). 네 번째는 “땅의 모든 족속에 대한 축복”의 약속이다. 결국 <오경>의 주제는 이들 네 약속을 중심으로 환원(還元)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세 번째와 네 번째 약속들에 대해서 고찰해보자. 여기서 핵심 단어는 “축복”이다. 축복은 실은 <창세기>의 핵심 ‘모티브’로서, 특별히 ‘아브라함’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우선 ‘히브리’어 단어 축복에 포함되어있는 세 자음(b, r, k) 중에서 두 개가 ‘아브라함’의 이름 속에 포함되어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축복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특수한 관계도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실 것”임을 뜻하는 바, 그를 큰 인물로 만들고 명성을 떨치게 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가 너무 유명한 나머지, 그의 이름이 곧 축복을 의미하게 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사람들은 자신의 축복을 기원하면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부를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브라함’처럼 성공하게 하소서.” 더 나아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그 자신도 축복을 보장받게 될 것이다(12:3상). 같은 원리로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는 그 자신도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12:3중).
다음으로 약속의 절정 네 번째 약속, “땅의 모든 족속에 대한 축복”(12:3하)을 살펴보자. 이 약속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바로 이 구절이야말로 <창세기> 1-11장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것이다. 모든 육체는 심히 타락하여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홍수로 멸망시켜야 했다. 홍수 이후 ‘노아’로 새로 시작한 세상 역시 이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또 한 번의 우주적인 심판이 필요했던 바, ‘바벨’탑의 반역으로 온 인류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지상에서 흩어버렸다. 이것으로 역사는 끝인가? 인류의 역사는 다시 “어두움과 공허와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아브라함’을 통한 “땅의 모든 족속에 대한 축복”(12:3하)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여기에 <태초의 이야기>(창 1-11)와 <족장 이야기>(창 12-50)가 연결되는 방식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땅의 모든 족속에 대한 축복”은 <창세기> 22장에서 다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다. 아들 ‘이삭’에 대한 믿음의 시험에서 인정을 받은 후,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축복의 약속을 그분의 맹세와 함께 가장 장엄하고도 극적인 형태로 듣게 된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 22:18상).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삭’과 ‘야곱’도 각기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같은 약속을 또 듣는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26: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28:14).
하지만 이 네 번째 약속은 <오경> 전체를 통해서 전혀 이루어진 것 같지가 않다. 오히려 약속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 것처럼 보인다. 즉 <오경>의 거의 끝 부분에 이르러서도,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에서 ‘아모리’ 족속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야기라든지, ‘가나안’ 정복에 대한 기대와 희망의 설교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 등은 “땅의 모든 족속이 축복”을 누리는 상황과는 거리가 한 참이나 먼 것이기 때문이다(참고. 민 21; 신 2-3). 이러고도 <오경>의 주제를 “약속의 성취”(아무리 부분적이라고 한들)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결국 약속의 성취 정도를 말하고자 할 때, 네 가지 요소 중에서 어떤 요소를 의중에 두고 있으며, <오경>의 어느 시점을 말하는가에 따라 달라져야 할 것이다.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약속의 내용이 간혹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범위가 달라지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땅”에 대한 첫 번째 약속만 하더라도, 그 땅의 범위가 <창세기> 12-50장에서 점차 확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 “내가 네게 보여줄 땅”(12:1) ⇒ “내가 이 땅을”(12:7상) ⇒ (3) “보이는 (모든) 땅” ⇒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17:8). 과연 어디다 기준을 두고 “땅”에 대한 약속의 성취를 논할 수 있겠는가!
약속의 성취 정도가 네 가지 약속마다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오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예컨대, 땅과 후손에 대한 처음 두 약속의 경우를 보면, <창세기> 안에서 이 둘은 아주 느리게 이루어지고 있다. <창세기>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도,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차지한 땅은 고작해야 매장지 한 곳(창 23)과, 몇 개의 우물(26:22, 32-33), 그리고 ‘세겜’ 지역의 조그만 땅덩이(33:19) 뿐이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가나안’이 아니라 ‘이집트’에 살고 있었다. <오경> 나머지 부분은 ‘가나안’을 향한 이스라엘의 여정을 그리고 있으며, 그나마도 그 땅의 반대편 ‘요단’ 동편에서 머물고 있는 모습이 최후의 장면이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그 땅에 대한 ‘모세’의 설교를 다시 한 번 듣는 것이 고작이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신 34:4). 하기야 땅에 대한 약속은 ‘아브라함’ 시대에 비하면, 훨씬 현실에 가깝게 다가온 것은 사실이겠지만, 여전히 장래의 문제로 남아있기는 ‘아브라함’ 시대와 다를 바가 없다 하겠다. 결국 ‘가나안’이 이스라엘의 영원한 소유가 될 것이라는 약속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이 그 땅에 살고 있을 때조차도 여전히 미완(未完)의 약속으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후손”의 약속은 한 나라를 이룰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시작하고 있다(창 12:2). 그러나 이 역시 <오경>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그 내용이나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이 처음 약속 이후, ‘아브라함’은 그의 후손이 “바다의 모래”만큼, “하늘의 별”만큼 많을 것이라는 약속을 추가로 듣게 된다(13:16; 15:5). 그리고 얼마 후에는 그가 “열국의 아버지”가 되며, 그로부터 많은 왕들이 나올 것이라는 약속을 듣는다(17:5-6).
<창세기>에서는 이 약속이 매우 느린 속도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출애굽기>가 시작되자 말자, 이스라엘의 자손의 수는 ‘이집트’에 충분히 위협이 될 정도로 늘어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숫자는 그들이 ‘가나안’을 공격하기에도 충분한 숫자이기는 하지만, 그 땅에 한꺼번에 정착해 살기에는 여전히 충분치 않는 숫자이다(참고. 출 23:29-30; 신 7:22). ‘아브라함’의 또 다른 후손, ‘에서’는 <오경>의 끝 부분에 이를 때까지 이미 ‘에돔’이라는 나라를 이룰 정도가 되었지만(참고. 민 20:14-21; 신 2:4-8), 이를 두고 “열국”(列國)을 이루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스라엘로부터 어떤 왕도 출현하지 않았다. 결국 후손에 대한 약속도 <오경>이 끝날 때까지 온전히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 부분적으로 성취가 되긴 했으나, 여전히 이 약속은 미래의 희망 사항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반면 세 번째 약속, “특수한 관계”, 즉 “축복”에 대한 약속은 어떠한가? 이 약속은 앞의 두 약속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특수한 관계는 ‘시내’ 산의 계시를 통해서 확정되고, 성막과 제사장과 희생 제사 등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시내’ 산의 계시가 있기 전에도 이미 하나님은 그분이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면서 보호해줄 것임을 보여준 바 있다. 즉 ‘아브라함’에게 보여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이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7). 그리고 “할례”는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영원한 언약의 보증이기도 했다. 그리고 <족장 이야기>는 족장들이 얼마나 이 특수한 관계의 수혜를 누리며 살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이들이 심각한 범죄를 저지를 때조차도, 그에 따른 어떤 대가를 치르지도 않고 무사히 넘어가고 있는 모습이 단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참고. 창 12; 20; 27; 34). <창세기>가 보여주고 있듯이,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계셨던 것이다(예. 28:15; 39:3, 21).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세 번째 약속은 ‘아브라함’의 생전에 이미 상당 부분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네 번째 약속, 즉 “아브라함 언약”의 절정으로 규정했던 “열국에 대한 축복”은 어떠한가? <창세기>는 부분적인 성취의 사례를 몇 가지 보여주고 있다. ‘아브라함’이 전투에 나가 ‘소돔’인들이 빼앗긴 재산을 되찾아 준 일이나(창 14:11-14), 그가 ‘소돔’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한 일(창 18)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이 경우에는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가 거절당했지만, ‘그랄’ 인을 위한 그의 기도는 응답을 받았다(창 20:17). 이 같은 사례는 열방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을 보여주는 아주 작은 사례들이다. 그리고 더 큰 사례는 <요셉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요셉’의 예견(豫見)으로 ‘이집트’는 다가오는 흉년에 대비하여 많은 곡식을 저장할 수 있었고, 흉년이 닥쳤을 때에 주변 모든 나라에서 곡식을 사려 ‘이집트’로 왔다: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창 41”57). ‘이집트’인들도 이점을 인정했던 바이다: “그들이 이르되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창 47:25). 이는 단순히 의례적(儀禮的)인 인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攝理)였다. ‘요셉’의 증언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이렇게 볼 때, 비록 <창세기> 10장에서 열거하고 있는 70 나라들 대부분은 이 축복 속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창세기> 안에서 “열국에 대한 축복”의 약속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오경> 나머지 책에서는 “열국을 향한 축복”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요셉’이 통치하는 기간 동안에는 그토록 많은 축복을 누렸던 ‘이집트’였건만, 이후 ‘모세’와 대적함으로써 엄청난 재앙(災殃)을 겪게 되고, 출애굽의 치욕을 맛보아야 했다. 왜 이런 일이? 이 같은 반전(反轉)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열국을 향한 축복”이 일종의 이중(二重)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축복의 전반부는 이렇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 12:3상). ‘요셉’ 당시의 ‘바로’ 왕은 전자(前者)의 경우에 속한다. 그는 ‘요셉’을 우대하였고, 그의 모든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인정하였다(창 41:39). 그러나 ‘모세’ 당시의 ‘바로’는 정 반대다. 그는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궤멸(潰滅)시키려 했다. 그와 ‘이집트’를 향한 하나님의 저주는 필연적이었다. 따라서 <출애굽기>에서 <신명기>에 이르는 동안 “열국을 향한 축복”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대면했던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배척했기 때문이다. 결국 <오경>은 첫 번째 약속, “땅의 축복”에서와 마찬가지로, “열국을 향한 축복” 역시 상당 부분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마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나) ‘모세’에 관한 질문. <오경>의 주제 파악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아브라함 언약”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이제 남은 질문은 ‘모세’와 관련된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모세’는 <창세기>를 제외한 <오경>의 핵심 인물이다. <오경>을 “토라의 형식을 갖춘 ‘모세’의 일대기”로 규정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주제 속에 포함되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주인공의 역할을 책의 주제로 선정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오경>의 주제가 “족장 언약”의 성취와 관련된 것이라면, 굳이 ‘모세’를 언급할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다만 책의 중심인물로서의 ‘모세’의 역할을 일정 부분 인정하는 방향으로 주제를 잡을 수는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웬햄’은 <오경>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오경>은 “족장 언약”의 성취에 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족장들을 향한 이 언약은 원래 모든 인류를 향한 우주적인 언약을 재확인한 것으로서,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루실 것이었다. 이들 약속은 ‘모세’가 죽기 이전에도 일부 성취가 되었으나, 완전하고 궁극적인 성취는 미래의 약속으로 남아있다.
<오경>의 신학적 주제와 관련하여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해보면, <오경>의 최종 본문에 대한 문학적이고도 언어학적인 연구야말로, 포괄적이고 일반적인 신학적 주제를 도출해 낼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임을 알게 되었다. 본문의 역사적 변천 과정이나, 그 배경, 그리고 이 과정에 관련된 일체의 인물들(개인이든 공동체든)의 의도 등은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부차적인 연구의 산물일 뿐이다.
<오경>의 배경
<오경>의 신학적 주제와 <오경>의 역사(또는 변천사)에 대한 이론을 바탕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경>의 배경을 찾아 나설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이 당면했을 제반 문제점들에 대해서, <오경>이 과연 어떤 대안이나 해결책을 마련해 주었는지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그 속에 이른 바 설화세계(說話世界)로 부르는 자체의 시공(時空)을 가지고 있지만, <성경> 자체의 시공 즉 배경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성경>의 각 책은 마치 양파처럼 여러 겹의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성경>은 어느 특정 시대에 특정 독자를 대상으로 그 역할을 감당하고 수명을 다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공(時空) 속에서 나름대로의 동기와 목적을 수행하면서, 그 기능을 수행해 왔다 하겠다. 그러므로 <성경>의 배경에 대한 질문을 요약해 보자면 이렇다: “이 본문의 독자(또는 공동체)는 누구였을까?”
그러나 여기서 “독자”는 어떤 특정 시대를 대변하는 제한된 독자(예컨대, 최초 독자나 실제 독자)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오경>이 언제 최종 완성되었는지에 대하여 단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를 보다 일반화 하고, 보편화 시킬 수 있는 다른 용어가 필요하다. 이를 “의도된 독자”(일명 내포독자 또는 암시 독자)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독자를 이처럼 일반화 시킬 수 있다면, 저자에 대한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즉 원저자(原著者)나 실제 저자 대신에 “의도된 저자” 또는 “내포 저자”(또는 암시 저자)로 일반화 시키는 것이 보다 유익할 것이다.
이렇게 저자와 독자를 일반화 할 때,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무엇인가? <성경>의 교훈이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인 교훈이나, 세계관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하여 예컨대, <오경>의 메시지를 고대 이스라엘 사회로부터 오늘날 현대 사회를 아우르는 제반 실존적 문제들에 대한 통찰력을 얻는 지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하나님은 존재의 속성이 내재적(內在的)이기도 하면서, 초월적(超越的)이 아닌가!
이렇게 볼 때, <오경>의 역사적 배경이나, 처음 독자나, 원저자 등에 대한질문은 무시해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어떤 진리나 메시지를 일반화하기 위해서는 그 원래의 역사적 정황을 아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이야기의 힘”을 과신(過信)하는 자라면, 어떤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중요한 것이지, 그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부분적으로만 옳을 뿐이다. 이야기의 사실성(史實性) 여부가 중요하지 않은 경우가 있기는 하다. 예수님의 많은 비유들이 그 예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이 치명적으로 중요한 영역이 있다. 특히 하나님의 구원 행위와 관련된 부분이 그렇다. “성육신(聖肉身) 사건”이 그렇고, “부활(復活) 이야기”가 그렇다. <오경>의 배경, 즉 “실제 저자”나 “실제 독자”에 대한 탐구도 이런 맥락에서 유익한 작업이 될 것이다.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오경>은 언제, 무슨 의도로, 누구를 위한 책으로 기능했을까?”
여호수아 공동체(주전 12 세기). 역사적으로 <오경>의 가장 오래된 배경으로 ‘여호수아’ 공동체를 상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호수아’ 공동체가 당면한 현실은 무엇이었으며, 바라는 바 이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오경>의 주제 연구에서 살펴본 바처럼, “족장 언약”의 약속들은 ‘모세’가 죽기 전에 이미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완전한 성취는 미래의 희망으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약속들은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 시대에 이르러서는 좀 더 큰 규모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특히 땅과 열방에 대한 약속이 그렇다. 즉 이스라엘은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마침내 그 땅을 정복했고, 이스라엘을 그토록 저주하고 대적하던 그 땅의 많은 족속들도 속속 패배를 당하고 저주를 받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그 땅을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그 땅을 지파 별로 나누고, 정착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땅의 분배와 관련해서 특히 ‘요셉’의 후손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가 받은 땅 지분이 눈에 띤다. 이 두 지파가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여호수아’가 속한 지파가 ‘에브라임’이다. 아무튼 전쟁은 끝났고, 하나님의 약속은 상당 부분 이루어졌으며,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의 나라로 그 땅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일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오경>은 이처럼 낙관론으로 가득 차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야기의 많은 부분이 이스라엘의 실패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실패는 대부분 성공의 문턱에서 경험한 것들이다. 예컨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은 곧바로 황금 송아지를 만들었고, ‘가나안’ 정탐 이야기는 곧바로 ‘가데스’의 좌절과 반역을 가져왔고, ‘가나안’ 정복은 이로써 연기되었으며, ‘바알 브올’에서의 배교(背敎) 사건에 이은 ‘발람’의 축복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다. 이 모든 사례들은 “성공의 위기”를 다루고 있다. <신명기>를 관통하는 ‘모세’의 설교도 결국 이에 관한 경고이다: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신 8:11-12).
<신명기>에서 ‘모세’의 설교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길 것이라는 두려움에 관한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배교는 상존(常存)하는 위험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전력을 다하여 자신의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해야 할 것이었다(참고. 신 6:4-5). ‘여호수아’도 그의 고별 설교에서 같은 호소를 뿜어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 24:14). 같은 맥락에서 <오경>의 저자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향하여, ‘여호수아’ 공동체가 당면했던 현실에 대한 경고와 교훈의 메시지를 전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만약 ‘여호수아’ 공동체가 이미 <오경>의 약속들이 상당 부분 성취된 것을 누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 같은 가정은 다소 억지나 무리가 아닐까? 만일 “족장 언약”의 절정이 네 번째 약속, 즉 “땅의 모든 족속을 향한 축복”이라고 한다면, ‘라합’이나 ‘기브온’ 족속이 받은 대우를 제외하면 <여호수아> 공동체는 여전히 온전한 약속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더 나아가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 아직 왕이 다스리고 있는 상황도 아니며(참고. 창 17:6; 민 24:7, 17),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출현한 것도 아니다(참고. 신 18:15; 34:10).
만약 <오경>의 배경이 이와 같은 상황이라면, 공동체를 향한 저자의 의도는 재 확신과 동시에 경고의 메시지일 것이다. 재 확신이라 함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루어놓으신 많은 약속들에 관한 것이며, 경고라 함은 불신과 배교로 지금 공동체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쉽게 잃어버릴 것이라는 것이다.
다윗 공동체(주전 10 세기). ‘다윗’-‘솔로몬’ 공동체는 어떤가? 이 공동체는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오경>의 배경으로 ‘다윗’-‘솔로몬‘ 시대를 제안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근거에는 이 시기가 이스라엘’의 황금기로서, 언약의 약속들이 거의 마지막 목표지점에 도달했다는 인식이 전 국가적으로 만연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이 시기에 정치, 군사, 경제, 모든 면에서 주변 국가들을 압도했고, ‘이집트’나 ‘아시리아’는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오경>에서 그리고 있는 “족장 언약”의 약속들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더 이상 남아있을 것 같지 않다. 땅과, 나라와, 축복과, 왕들에 대한 약속 그 모든 것들이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진 것 같은 느낌이다. 이스라엘의 “빅토리아 시대”가 도래 한 것 같은 모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대로가 좋은 것일까? 지금의 상황을 그대로 현상 유지함이 바람직할까? 국가적 번영과 성공에 따른 위험은 없을까? 나태와 게으름이 사회와 국가를 좀먹어가지는 않을까? 그리고 하나님의 권위 대신에 왕권이 지나치게 비대해져서 권력 남용과 배교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이 같은 공동체적 상황에서 <오경>의 메시지는 어떻게 전달되어야 할까?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충성을 끝까지 지켜가라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이 메시지는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었다.
요시아 공동체(주전 7 세기). <오경>의 배경으로 ‘요시아’ 왕 시대는 어떨까? 만일 <신명기>의 배경을 ‘유다’ 왕국의 ‘요시아’ 왕 시절에 있었던 국가적 “신앙 부흥 운동”에 둔다면 이와 같은 주장을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신명기>는 <오경>의 결론이다. 그래서 만일 이 마지막 책이 ‘요시아’ 시대에 편찬되었다면, <오경> 전체 책이 그 때에 완성을 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요시아’ 시절의 정치ㆍ사회적 상황은 어떠했을까?
이스라엘은 ‘솔로몬’ 이후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둘로 쪼개지면서, 쇠락일로(衰落一路)를 걷게 된다. 이중 더 컸던 북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아시리아’에 의해 정복당하고, ‘아시리아’의 한 주로 합병되어버린다. 그리고 남 ‘유다’ 왕국은 명목상으로는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실은 ‘아시리아’에 조공(租貢)을 바침으로써 겨우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었으며, ‘아시리아’의 종교를 국가적으로 장려함으로써, 이 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주전 640년 ‘요시아’가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때마침 아시리아’는 그 세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었으며, 급기야 주전 612년에 수도 ‘니느웨’가 멸망하게 된다. 이 시기를 이용하여 ‘요시아’는 주전 628년에 실지회복(失地回復) 캠페인을 벌여 그 영토를 ‘유다’ 왕국뿐만 아니라, 옛 북 이스라엘까지 확장시킨다. 역사가들은 ‘요시아’가 ‘다윗’ 왕조에 버금가는 국가적 부흥을 꾀했다고 전한다. 어쨌든 옛 북 이스라엘의 영토까지 회복한 그는 대대적인 종교개혁 운동을 펼친다. 이 중에는 예루살렘 예배를 정화(淨化)하고, 나라 곳곳에 퍼져있는 이방 신들을 위한 예배나 제사나 산당들을 훼파하는 등의 일도 포함되어있었다.
이와 같은 대대적인 개혁의 와중에 ‘예루살렘’ 성전의 서고(書庫)에서 한 율법 책이 발견된다. 왕은 선지자가 읽어주는 이 책의 내용에 크게 경악한다. 이유인 즉은 그 책에 담긴 경고, 즉 우상 숭배에 대한 위협 때문이었다. <신명기>에서 ‘가나안’ 신들을 섬기는 행위에 대해서 강력한 저주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자들은 이 책이 <신명기>(전체 또는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신명기>는 예배의 장소와 관련해서, “주께서 지정해 주는 한 장소”에서만 드려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한 장소”는 ‘예루살렘’을 지칭하는 암호이기도 하다. 실제로 <신명기> 법전의 핵심이 되는 12-28장의 본문이 당시 성전에서 발견한 율법책의 일부일 것이라고 대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즉 <열왕기하> 22-23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율법 책”은 결국 <오경> 전체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요시아 공동체”의 상황에서 <오경>은 어떤 기능을 했을까? 아마도 여러 면에서 “다윗 공동체”에서 기능했던 바와 대동소이(大同小異)했을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두 공동체 모두 “그 땅”에 대한 약속과 위대한 왕에 대한 약속 모두 성취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다윗’ 이후 두어 세기가 지난 지금의 상황을 돌아보면, 그 때와는 사뭇 형편이 다르다. ‘다윗’-‘솔로몬’ 시대만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황금기를 구가(謳歌)하고 있었고, 언약의 약속들은 더 이상 성취될 것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것이 상황은 다시 악화되어 현실은 많은 문제들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인다. 또한 ‘요시아’의 통치 하에서 “열국에 대한 축복”은 거의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국력(國力)은 위축되었고, “그 땅”에 대한 소유권도 위태롭기만 했다. 나라의 현실은 ‘야곱’과 ‘모세’가 임종 설교에서 들려주었던 축복의 유언(창 49; 신 33)을 즐길 수 있는 그런 편안한 상황이 아니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온 나라에 만연해 있는 우상숭배의 풍조는 ‘야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이나 순종을 요구하는 <오경>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언약의 축복은커녕 언약의 저주(참고. 레 26; 신 28)를 기대함이 더 나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오경>이 기능해야 할 몫이 있는 것이다.
<신명기>가 낭독되는 동안 ‘요시아’가 보인 반응은 무엇이었나? 그는 옷을 찢고, 통곡하며, 이렇게 외쳤다: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왕하 22:13). 결론적으로, 만일 누구든 ‘요시아’ 공동체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오경>을 읽는 자세가 그와 같아야 할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불행하게도 ‘요시아’의 개혁은 불과 한 세대를 넘기지 못했다. 그는 ‘이집트’의 ‘바로’ 왕과의 전투에서 전사(戰死)하고(주전 609년), 얼마 후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유대’인 지도자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으며, “약속의 땅”은 ‘고레스’ 대왕의 칙령(주전 538년)이 반포될 때까지, 내버려 진채로 남아있어야 했다. 이 칙령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었는데, 당시 식량 부족과 경제난 등으로 이들은 성전 건설보다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는 일에 더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 등은 백성들을 촉구하여 성전 재건에 착수하도록 이끌었고, 마침내 성전은 주전 516년에 재건된다.
에스라/느헤미야 공동체(주전 5 세기). 대체적으로 많은 학자들은 이 시기에 <오경>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을 것이라는 데에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주전 5 세기는 두 열렬한 ‘유대’인 지도자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지도하에 ‘예루살렘’ 귀환(歸還)이 이루어졌던 시기이다(주전 458년과 445년). 이 시기에 <오경>은 과연 어떤 기능을 했을까? ‘에스라’/‘느헤미야’ 공동체가 당면했던 현실과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만일 당시 공동체의 일원이라면, <오경>을 어떻게 읽고 받아들였을까?
‘에스라’와 ‘느헤미야’ 모두 당시 ‘페르샤’ 왕의 허락을 받아 ‘유대’인들로 하여금 성전을 재건하고, 제사를 회복하며, 율법을 배우고 익혀 이에 순종하도록 하는 과업을 맡았던 자들이다. 성전 재건과 제사는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지만, 율법과 관련된 일은 그렇게 간단치는 않았다. 특히 ‘에스라’가 당면했던 문제는 율법에서 금지하고 있던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통혼(通婚)으로서, 일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조차 이방인 아내들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이에 ‘에스라’는 회개운동을 통해서 이들이 이방인 아내들을 쫓아내겠는 다는 다짐을 받아낸다.
한편 ‘느헤미야’는 ‘페르샤’의 ‘아닥사스다’ 왕이 ‘유대’ 지역의 총독으로 보낸 자이다. 그가 했던 일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지역 일부 ‘유대’인들과 인접한 다른 주(州)들의 반대와 방해를 무릅쓰고, 백성들을 독려하여 52일 만에 성벽 재건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그가 당면했던 또 다른 문제는 위에서 언급했던 바처럼, 경제난으로 인한 극심한 빈부 격차로서, 부유한 ‘유대’인들은 가난한 동료 ‘유대’인들의 땅을 빼앗고, 그들을 노예로 삼고 있었다. 이에 ‘느헤미야’는 법으로 땅을 되돌려주고 노예를 풀어주도록 했다. 또한 ‘에스라’가 했던 것처럼, 이방인들을 성전에서 몰아내고, 안식일에 상거래(商去來)를 금지시켰으며, 이방인 간의 통혼(通婚)을 막는데 힘썼다.
이 모든 부흥과 개혁 운동에도 <오경>이 법적 근거를 마련해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의 현실은 <오경>이 약속하고 있는바 이상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비록 소수의 ‘유대’인들이 그 땅의 일부 지역에서 살고 있기는 했지만, 이전의 영광에 비하면 그 십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만 그들은 지금 자유인으로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을 다스리는 왕은 이방인이다. 과연 언약이 말하는 축복의 약속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공동체의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 시기에 <오경>이 최종 편집되고 발간되었다면,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 없이는 그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연히 당시 공동체를 향한 <오경>의 핵심 메시지는 이와 같은 믿음을 반영하는 것이었으리라!
현실이 어떻게 보이든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 이스라엘을 구속하시고, 자신의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보라! 그들도 ‘이삭’을 보기 위하여 25년을 기다려야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삭’과 ‘리브가’도 ‘에서’와 ‘야곱’을 보기 위하여 20년을 기다려야 하지 않았나? 우리의 조상들이 그들 생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보기 위하여 이처럼 기다려야 했다면, 이제 고토(故土)로 돌아온 우리 후손들 역시 기다림으로 인내해야 하지 않을까!
<오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자신의 약속을 더 빨리 이루신다. 반면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약속의 성취는 더디게 나타나며, 궁극적으로는 언약의 저주를 받는 것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그에게 후손은 없을 것이며,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이국으로 사로잡혀 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공동체가 포로 생활을 통해서 직접 체험했던 바나, 현재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은 바로 이와 같은 언약의 저주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리라. 그러나 <오경>의 약속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책은 그들로 하여금 지금의 곤경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 공동체는 순결과 예배와 제사에 관한 일체의 법들을 힘써 지켜야 한다. <오경>의 한 가운데 위치한 책, <레위기>가 이를 강조하고 있는 바이다. ‘에스라’의 개혁 운동도, 그리고 당시를 살았던 선지자들이 강조했던 예배와 제사에 관한 메시지들도 바로 이 책으로부터 비롯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과의 결혼을 금지시켰던 것도 그 근거를 <신명기>에서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경>은 ‘예루살렘’에서 주전 5세기 당시를 살아가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공동체의 부흥을 위한 격문(檄文)이자 호소였다. 호소의 핵심은 이방인을 멀리하고, 성전을 재건하여, 예배와 제사를 회복하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그 영광의 이상(理想)은 현실로 누리게 될 것이었다.
나오는 말
지금까지 <오경>에 대한 개론적 설명을 통해서 알게 된 바는, 이 책이 <히브리 성경>이나 <기독교 성경>을 가릴 것 없이 거의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경>에서 처음으로 등장하는 어휘나, 사상이나, 가르침이나, 메시지들은 <구약>의 나머지 책들, 즉 <역사서>나 <선지서>나 <성문서>에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어, 이들 책들의 신학적 근거나 기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비단 <구약>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약>은 수시로 <구약>을 빌어 하나님의 가르침이나 <구약>의 윤리를 상기시켜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천하가 없어지더라도 “율법”(즉 <오경>)의 일점일획(一點一劃)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의 각 책은 <오경>의 주제를 반복하고 발전시키고 있다 하겠다. 예컨대, <창세기> 12:1-3에 등장하고 있는 “아브라함 언약”은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에서 조금씩 표현을 달리한 채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으며, <오경>의 다른 책에서도 계속 발전해 가고 있다. 더 나아가 <구약> 전체적으로도 땅과, 후손과, 국가에 대한 “아브라함 언약”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서 어떻게 성취되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아브라함 언약”이 항상 상승곡선을 그리며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구약> 전체를 통해서 이 언약이 수시로 정체(停滯)와 후퇴를 거듭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민수기>에서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40 년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발단은 “그 땅”을 정탐하러 나갔던 정탐꾼의 불신(不信)에 찬 보고 때문이었다. <열왕기>는 ‘예루살렘’의 파괴와 ‘바벨론’ 유배를 전하고 있는데, 이 역시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신앙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용서하시며, 새로운 시작을 허용하셨다. 그리고 그 때마다 언약은 새롭게 갱신되고, 그 약속은 더 큰 성취를 이루어갔다.
그러나 <성경> 시대가 끝난 지 2천년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여전히 미완(未完)으로 남아있다. 만일 오늘날 ‘유대’인들이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을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요 자신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본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왜냐하면 <오경>에서 약속하고 있는 그 땅에서의 평화와 안식은 여전히 요원(遼遠)한 문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 이스라엘, 즉 신약교회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신약교회는 현재 “아브라함 언약”이 온전히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교회 역시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다. 즉 교회 역시 “아브라함 언약”이 미완(未完)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성취와 관련해서, 교회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경>은 지난 수천 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여전히 장차 이루어질 약속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중이라 하겠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신약교회도 <오경>을 읽어야 할 당위성이 있으며, 교회는 그가 당면하고 있는 제반 실존적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이 책을 통해서 마련해야 할 것이다.
연습과 토의
1. <오경>은 통일성과 다양성의 이중적인 특징을 지닌다고 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2. <오경>의 신학적 주제는 무엇일까? 책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되고 핵심적인 주제를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오경>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권의 책은 각기 이 주제와 관련하여 어떤 기능을 하고 있을까?
3. <오경>의 저자와 관련하여, 이른 바 “문서 설”(또는 “자료 설”)에 대하여 나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오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일에 이에 관한 지식은 과연 필수적일까?
4. <오경>의 배경이라 함은 무슨 뜻인가? 이 책이 단 하나의 배경을 가진 것이 아니라, 양파껍질처럼 다수의 배경을 지니고 있을 수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5. 현대 독자들은 <오경>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즉 현대교회에서 <오경>은 어떤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참고한 책들
1. G. J. Wenham, Exploring the Old Testment (vol. one).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3.
2. Temper Longman III and Raymond B. Dillard,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ment. Grand Rapids: Zondervan, 1994, pp 1-37.
3. William S. LaSor (박철현 옮김), 구약 개관.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pp 92-112.
제 2장: 창세기(1)
2
창세기 (I)
(1-11장)
기독교 독자들에게 친숙한 책의 이름 <창세기, Genesis>는 “자료”(資料) 또는 “기원”(起源)을 뜻하는 ‘그리스’어의 음역(音譯)이다. 이 책의 ‘히브리’ 식 제목은 ‘베레시트’(bereshith)(한글 번역: “태초에”)이다. 이는 ‘히브리’식 전통에 따라 책의 첫 번째 문장에서 따온 것이다.
흔히 “원 역사”로 불리고 있는 <창세기> 1-11장은 예수님의 “비유”(parable) 다음으로 <성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부분이다. ‘아담’과 ‘하와’ 이야기나, 대홍수 이야기, 그리고 ‘바벨’ 탑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들 이야기만큼 논쟁의 여지가 많은 이야기 또한 없다. 혹자는 이들 이야기를 신화나 전설로 치부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들을 정확한 역사적 기록 내지는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리고 적어도 <신약>이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이 부분은 기독교 교리 형성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이점이 <창세기> 1-11장이 처해있는 “위기적” 상황이다. 비교적 온건한 학자조차도 이 단락에 대한 다른 입장이나 견해에 대해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심지어 다른 해석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저주도 불사하겠다는 극단적인 태도마저 드러내게 하는 곳이 바로 이 부분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이 모든 논쟁의 핵심에는 <창세기> 1-11장에 대한 문학적 형태에 대한 문제가 있다. 제 1권 총론에서 언급한 바대로, <창세기>는 만물의 기원(起源)에 관한 과학책도 아니고, 민족이나 국가(이스라엘을 포함한)에 대한 역사책도 아니며, ‘히브리’ 족장들의 영웅담도 아니다. 이 책은 단순히 이야기일 뿐이다. 공동체가 당면한 제반 실존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원인론적(原因論的)으로 제공하기 위한 이야기다. 굳이 이 책의 성격을 규정하자면, “신학 화된 이야기”이거나 “이야기 화된 역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자세 또한 과학적이고 역사적이 되기보다는 신학적이고 문학적이 됨이 마땅할 것이다. 이는 제 1권 “총론”에서 제시한 바 있는 <성경> 해석의 대원칙으로서, “통합적 성경비평”을 수행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성경> 각 책의 “문학과 역사와 신학”에 대한 연구ㆍ분석 작업이 필수적일 것이다. 이점과 관련해서, ‘트렘퍼 롱맨(III)’의 <어떻게 창세기를 읽을 것인가>는 유익하고도 훌륭한 안내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트렘퍼 롱맨(III)’. <어떻게 창세기를 읽을 것인가>. 전의우 번역. IVP: 서울. 2006.
<창세기 I>의 문학
1. 고대 근동문학
<창세기(1)>의 창조나 대홍수 이야기는 고대 근동 문학에서도 유사한 내용의 문헌들이 다수 알려져 있다(도표 참고).
이들 문헌들이 <창세기>의 기록보다 시기적으로 더 오래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창세기> 이야기의 출처나 진위(眞僞) 여부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창세기>의 창조나 홍수 기록이 그 자체로서 독특하거나 독창적인 이야기라기보다는 기존의 이야기들을 모방 내지는 수정한 아류(亞流)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있어왔다. 따라서 <창세기>의 문학에 대한 연구는 이들 근동 문학에 대한 선 이해(先 理解)를 필요로 하고 있다.
다행히 이들 이야기들의 내용이 여러 곳에서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져 있어, 이들 문헌들과 <창세기>의 기록을 상호 비교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트렘퍼 롱맨(III)’. ibid.
따라서 이곳에서는 창조와 홍수에 관한 대표적인 두 근동 설화들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다. 이어지는 단락에서 <창세기> 기록과의 비교 연구를 통해서 둘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점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에뉴마엘리쉬>. (1) 기원: 주전 1792-1750년경 ‘함무라비’ 왕이 그의 군사적 위업을 기념하기 위하여 ‘바벨론’의 수호신 ‘마르둑’(Marduk)을 모든 신들의 최고신으로 정하고, 이에 <에뉴마엘리쉬>를 발간토록 했다.
(2) 내용: 신성한 물의 신 ‘압수’(Apsu)와 짠물의 신 ‘티아맛’(Tiamat)의 결합으로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아들 및 딸 신들이 탄생된다. 얼마 후 자식 신들이 서로 싸우며 소란스럽게 하자, 두 신은 자식들을 죽이려고 계획한다. 이를 사전에 알게 된 자식 신들은 아버지 신 ‘압수’를 죽이는데, ‘티아맛’은 이에 격분하여 자식 신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이에 자녀 신들은 그들의 대표로 ‘마르둑’(Mraduk)을 선출한다. ‘마르둑’은 자신이 승리하면 신들의 왕으로 섬김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동료 신들의 요청을 수락하고, ‘티아맛’과 싸워 승리를 거둔다. ‘마르둑’은 ‘티아맛’의 시체를 둘로 쪼개어 절반은 땅을 만들고, 나머지 절반으로 하늘을 삼는다.
그 후 ‘마르둑’은 ‘티아맛’으로 하여금 전쟁을 하도록 교사한 ‘킹우’(Quingu) 라는 신을 찾아 그 핏줄을 끊어 죽인 후, 그의 피로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들로 하여금 신들을 섬기는 노예로 삼는다. ‘마르둑’은 모든 신들의 주인이 되어 다른 신들에게 각기 일정 영역의 지배권을 허락한다.
<에뉴마엘리쉬> 토판의 일부(좌); ‘마르둑’이 ‘티아맛’을 둘로 짜르는 상상도(우)
(3) <창세기>와의 비교: 도표 참고.
<아트라하시스>. (1) 기원: 초기 ‘수메르’에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후에 ‘바벨론’과 ‘앗수르’ 언어로 번역 개작된 유사한 사본들이 존재한다. ‘바벨론’의 홍수 설화인 <길가메쉬> 서사시도 그 중의 하나이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아트라하시스> 서사시를 기초로 하여 개작한 것으로 보인다. 주전 1700년경에 처음 만들어져서 1200년경에 수정본이 나왔는데, 이것이 현재 가장 잘 알려진 표준 서사시이다.
(2) 내용: 주로 인간의 창조와 초기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태초에 신들만이 살고 있는 세계로 시작한다. 점차 신들의 숫자가 늘어가고, 젊고 별로 중요하지 않는 신들이 자신들에게 부과된 사역(신들 세계 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한)을 거부하면서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에아-엔키’(Ea-Enki)가 타협의 일환으로, 이들 신들과 협상을 벌여 인간을 창조하여 그 일들을 대신토록 한다. 늙은 신들의 회의에서 이 협상 안이 받아들여지게 되고, ‘닌투-마미’(Nintu-Mami)신이 이 일을 떠맡는다. 이 이야기는 또한 홍수이야기도 포함하고 있는데, 이와 유사한 ‘바벨론’의 홍수이야기 <길가메쉬> 서사시가 있다.
두 홍수 이야기의 차이는 홍수의 원인에 있다. 즉 <길가메쉬>에는 홍수의 원인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아트라하시스>는 그 원인을 땅의 인구증가로 말미암은 소요(騷擾)에 두고 있다. 즉 인간들이 신들을 괴롭히고 귀찮게 했다는 것이다. 신들은 역병이나 기근 등의 방법으로 이 소란을 완화시키려고 하다 여의치 않자, 결국 대홍수를 내려 ‘아트라하시스’와 그의 방주 속에 들어온 자들만 살아남도록 했다.
<수메르 홍수 설화>. ‘아트라하시스’와 거의 같은 시대에 속하는 또 다른 홍수 이야기 중의 하나로 <수메르 홍수 설화>를 들 수 있다. 불행히도 이야기의 대부분은 현재 남아있지 않지만, <창세기>의 대홍수 이야기와 비교해 볼 수는 있다(도표 참고, 다음 쪽).
<수메르 왕의 족보>. <창세기>와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고대 근동의 문헌 가운데 ‘수메르’ 왕의 족보를 들 수 있다. 이 족보는 대략 주전 1900년의 것으로, 홍수 이전까지 이 나라를 통치했던 8명에서 10명의 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 족보는 홍수와 그 이후 새로운 왕들의 통치와 연대에 관한 언급도 포함하고 있다. ‘수메르’ 왕의 연대기는 적어도 네 가지 점에서 <창세기> 5-11장의 기록과 닮은 데가 있다: 첫째, 이 연대기는 역사를 족보의 형식을 빌어서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창세기> 5장과 11장과 유사하다.
둘째, 이 연대기는 역사를 시대적으로 구분함에 있어, 홍수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누고 있다는 점이 <창세기>와 닮았다.
셋째, 왕의 통치 기간이 홍수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다르다는 점이다. 즉 홍수 이전의 왕들이 홍수 이후의 왕들에 비해 통치 기간이 훨씬 길다는 점인데, 이는 <창세기>에서 보는 바와 흡사하다. 주지하다시피, <창세기>에서도 홍수 이전의 인물들이 홍수 이후의 인물들보다 수명이 훨씬 더 길다(창 5장과 11장).
넷째, 홍수 이전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들의 숫자도 비슷하다. 즉 홍수 이전 ‘수메르’ 왕의 수가 8-10명인데,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족보는 10대에 걸쳐있다(창 5장).
2. <창세기>와 근동문학
2.1. 유사성(類似性)
위에서 살펴본 바처럼, 고대 근동 문헌들과 <창세기> 1-11장은 그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 유사한 점이 많다. 특별히 문학 양식(genre)이 그렇다. 과연 이들 문헌의 양식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창세기> 1-11장의 문학 양식과 관련해서 가장 보편적인 인식은 이 부분이 “신화”(myth)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등장인물. 사전적 의미의 신화(神話)란 허구(虛構)에 가까운 인물이나 사건을 두고 사용하는 용어다. <창세기>를 비롯한 고대 근동 문학의 창조와 홍수 이야기들이 현대인의 상식이나 상상을 초월하는 믿기 어려운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 이야기가 전적으로 허구가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예컨대, ‘길가메쉬’나 ‘아트라시스’는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전설적 인물인 ‘아더’ 왕이나 ‘로빈 훗’이 실제 인물인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수메르’ 왕의 족보가 지칭하고 있는 지역의 이름도 실제 이름일 뿐만 아니라, 족보에 등장하는 일부 왕들의 경우 비문(碑文)까지 남기고 있어, 이들이 실제 인물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기술 방식.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하나 있다. 즉 이들 근동 문헌들이 일련의 사건들을 기록함에 있어 인과(因果)의 연결고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화가 아닌 역사에 가깝다는 점이다. 예컨대, ‘슈메르’ 홍수 설화를 기술하는 방식이 그렇다:
여신(女神) ‘닌투’(Nintu)는 친절하게도 방랑생활을 하는 인간의 어려운 처지를 개선해 주기 위해서 이들로 하여금 왕국 도시를 건설하여 정착생활을 하도록 돕는다. 여신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도시의 인구는 증가해 갔다. 그러나 인구가 늘자 세상은 시끄럽게 변해갔고, 이에 신들은 자신들의 고요와 평화가 깨지는 것이 싫어 세상에 역병과 홍수를 내린다.
연대기. 연대기(年代記)에 대한 관심 또한 <성경>과 근동 문학은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다. 이들 기록 모두 인간의 수명(壽命)이나 왕들의 통치 기간 등에 대해서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물론 현대인의 관점에서 인간의 수명이나 왕들의 통치 기간이 황당할 정도로 길지만, 어쨌든 신화나 전설 등에서는 이나마도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다. 신화나 전설은 시간에 대한 관념이 전혀 없다. 이들은 대개, “옛날 옛적에”라는 말로 시작하여, “이후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더라”라는 식으로 끝을 맺는다.
등장인물과 무대. 이런 점에서 고대 근동 문학의 이야기들은 신화가 아니라, “신화화 한 역사 기록”(mytho-historical account)으로 불러주어야 할 것이다. 신화는 신들에 관한 이야기이며, 주 무대는 미래나 과거나 아닌 현실의 삶이다. 과연 <창세기>나 고대 근동 이야기들이 이 범주에 속할까? 그렇지 않다. 놀랍게도 학자들은 <길가메쉬>나 <아트라시스>를 신화로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사시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들 이야기나 <왕의 족보>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곳에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활동이 있긴 하지만, 그분의 활동은 항상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다른 신들과의 교제나 대화 등에 관한 어떠한 언급도 없다. 따라서 <창세기>를 신화로 부르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만일 <창세기> 1-11장 사이에 하나님이 등장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신화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성경> 전체를 신화로 불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을 신화로 부르는 사람은 사실상 아무도 없다.
기원론적 설명. 그렇다면 이들 설화가 기능했던 바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저자 자신이나 공동체가 당면한 현실적 상황에 대한 기원론적(起源論的) 답변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기원론적 답변이라 함은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하여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을 말한다. 예컨대, <아트라시스>의 경우, “왜 일부 여인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해 주고 있는가 하면, <길가메쉬>는 “왜 인간의 수명이 유한한가?”에 대한 답변을 제공해 주고 있다. <창세기> 1-11장도 유사한 기능을 보여주고 있다. 즉 안식일의 기원이나, 뱀이 기어 다니게 된 원인, 잡초가 자라게 된 원인 등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현실이나 현재의 상황에 대한 기원론적 설명이 어디 이들 이야기뿐이겠는가! 오늘날에도 비일비재하다. 예컨대, 현재 사람이나 짐승에게 나타나는 특정모습이나 행동 방식에 대해서 과학자들은 얼마나 자주 진화론에 기대고 있는가! 기린의 목은 왜 길까? 한 개인의 현재의 성공이나 실패의 원인, 또는 한 국가나 민족의 흥망성쇠의 원인을 어디서 찾는가? 과거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가? <창세기>와 고대 근동 문학이 제공하는 기원론적 설명의 유형이 오늘날의 그것과는 다르기는 하지만, 이 차이 때문에 전자를 신화로 후자를 과학으로 부른다면 불공정한 처사가 아닐까!
과연 신화와 과학의 차이는 무엇일까? 원인에 대한 설명이 얼마나 합리적이며 이성적으로 수긍할 만한가에 달렸다면, 이 설명이야말로 수긍하기 어렵다. <창세기>의 ‘메두셀라’가 960년을 살았다는 기록이 충격적이고 믿을 수 없다면, 우주의 생성에 관한 대폭발 이론(the Big Bang Theory)은 어떤가? 좁쌀의 몇 만 분의 일보다 더 작은 입자가 내부의 압력과 온도를 이기지 못하고 수백억 년 전에 갑자기 폭발했다는 설명은 얼마나 합리적으로 들리는가? 생명이나 눈(眼)의 기원은 어떤가? 단순히 우연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과연 정직하고 합리적인 태도일까? 진화는 과거의 우연과 미래의 희망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과연 우연과 희망을 과학이라 할 수 있을까? 사실이 이런대도 오늘날 진화론을 의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학계의 대부분의 과학자들 사이에 합의나 동의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를 거부하는 쪽이 소수이고 이단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화로 인식되고 있는 <창세기>나 고대 근동 이야기들은 어떠한가? 이들 설명 역시 당대에는 현실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으로 대부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이런 점에서 단순히 납득할 수 없기 때문에 신화로 규정하는 태도는 온당한 처사가 아님은 분명하다.
<창세기> 1-11장을 조심스럽게 읽어보면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에 관한 통찰력을 얻게 된다. <창세기> 이야기들은 연속적인 일련의 연대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첫 번째 중요한 연대기가 ‘아담’에서 시작하여 10대 후의 ‘노아’에서 끝나고 있다(창 5). 두 번째 연대기 역시 10대에 걸친 것으로서, ‘셈’에서 시작하여 ‘아브라함’까지를 포함하고 있다(창 11:10-26). 이 두 번째 연대기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이스라엘인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이 족보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바로 다름 아닌 자신들의 조상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보다 앞선 첫 번째 계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실존 인물들이 아닌 허구의 인물이라고 단정 지을 근거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들 두 개의 연대기를 순서를 바꾸어 뒤에서부터 읽어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역사의 출발지점에 이르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의 처음 세 장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다루고 있음을 분명하다.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창세기> 1장은 전체 책에 대한 일종의 서곡(序曲)에 해당한다. 이야기의 주 내용이 2:4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2장의 분위기는 3장에서 급격하게 달라진다. 그 분위기는 당시 이스라엘이 당면하고 있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바이다. 즉 땅과 인간과 뱀에 대한 저주가 현실로 드러난 세계를 말한다. 남자에게 경작은 힘든 노동이 되어버렸고, 여자에게 출산(出産)은 고통이 따르는 일이 되었으며, 뱀은 사람을 공격하는 혐오스러운 존재가 된 세계 말이다. 그러나 이 같은 현실은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창세기> 2장은 이 모든 저주가 없는 낙원(樂園)이었다. 그곳에는 먹을 것이 풍부했으며, 생명나무와 생명수가 있었고, 옷을 벗었으나 부끄러움이 없었고, 남녀 간의 갈등도, 사람과 짐승 간의 충돌도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창세기> 2장이 묘사하는 ‘에덴’ 공원은 인류의 역사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장소요 상태다. 이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가 그곳에서 쫓겨난 이후 그곳은 다시는 어느 누구도 되돌아갈 수 없는 곳, 즉 “실락원”(失樂園)이 되어버린 곳이다. <창세기> 3장이 그렇게 끝을 맺고 있다.
따라서 <창세기>의 처음 독자라면 <에덴 이야기>의 이와 같은 결말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체험할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예컨대, 이스라엘인 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아담’과 ‘하와’를 실제 인물로 믿기는 했겠지만, 누군가 나서 뱀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주장한다면 필경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창세기> 1-11장의 문학 양식을 규정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한 가지 가능한 선택은 “원 역사”(原 歷史; pre-hitory), 또는 “기원 이야기”(origin story)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는 ‘메소포타미아’ 판(版), ‘다윈’의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이나 ‘스티브 호킹’의 <시간의 역사>(A Brief History of Time)에 해당되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2.2. 차이점
우리는 지금까지 논의를 통해서, <창세기> 1-11장과 고대 근동 문학의 창조와 홍수 이야기 사이에는 많은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용상의 유사성도 있지만, 더 돋보이는 것은 문학 양식(장르)상의 유사성이다. 다름 아닌 “설화”(說話)(좁게는 “기원 설화”)라는 양식이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는 비슷한 것들보다 다른 점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이들 차이가 무엇인지 알아볼 차례이다.
내용상의 차이. 비록 미미하기는 하지만, 두 문헌 사이에는 내용상 많은 차이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길가메쉬 서사시>와 <대홍수 이야기>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대표적인 차이들은 다음과 같다:
이들 외에도 <창세기> 기록과 근동 문헌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많은 차이들이 있다. 이처럼 두 문헌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창세기> 저자는 창조나 홍수에 관한 다른 이야기들에 대해서 몰랐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오히려 이들 이야기들이 구전(口傳)으로든 문서기록으로든, 여러 가지 형태로 당시 근동 지역에서 회람(回覽)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비록 사람들은 <아트라시스>나 <길가메쉬> 등을 직접 읽거나 듣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들어서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이는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다윈’의 <진화론>을 직접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 책의 존재에 대해서는 들어 알고 있는 것과 같다 하겠다.
신학적 차이. 아마도 두 문헌 사이에서 가장 뚜렷한 차이가 있다면, 신학적 차이(세계관의 차이)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신(神)의 정체성(正體性)이나 속성(屬性)과 관련된 것이다. 즉 <창세기> 이야기는 기존의 전통적인 <기원 이야기들>에 대한 신학적 재해석으로 간주할 수 있다. 몇 가지 대표적인 신학적 차이를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신의 속성: <성경> 시대 당시 근동 지역의 신에 관한 보편적인 인식은 “다신론”(多神論)적 세계관이었다. 그러나 <창세기>는 “유일신론”(唯一神論)을 주장한다. <아트라시스>는 작은 신들이 큰 신들에 대항하여 반란을 도모하며, 큰 신들조차도 자기들끼리 생각이 달라 갈등하고 있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큰 신들이 홍수를 계획하고 있을 때, 그 중 하나인 ‘에아’(Ea)가 ‘아트라시스’에게 이 사실에 대해서 귀띔을 해주고 있는 것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 신들은 홍수가 일어났을 때에도, 서로 으르렁 거리며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창세기>는 홍수의 절정에서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고, 이에 물이 점차 물러나기 시작했다”고 쓰고 있다. ‘바벨론’의 신들은 홍수를 통제할 수 없었지만, <창세기>의 하나님은 홍수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이를 통제하고 있다. 특별히 <창세기> 1장은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즉 그분은 명령하시고, 모든 것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해와 달도 중요한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넷째 날에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하다.
(2) 인간의 목적: <창세기>가 근동 이야기들과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대목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태도이다. <아트라시스>에 따르면, 인간의 창조는 일종의 사후(事後) 땜질용이었다. 즉 작은 신들이 큰 신들에게 대항하여 일어나자, 이를 저지하고 자신들에게 음식을 제사로 바치도록 하기 위한 도구로 창조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은 신들의 필요에 의해 그들을 섬기기 위한 노예로 창조된 것이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에 의하면, 인간은 창조 이야기의 정점에 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땅에서 그분의 대변자이며 대리자 이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먹을 것을 마련하신다.
인간에 대한 고대 근동의 세계관이 지니는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는 인간의 생식(生殖) 능력과 관련된 것이다. <아트라시스>에 따르면, 땅에 인구가 늘어가자 신들은 귀찮아서 여러 차례에 걸쳐 역병이나 기근으로 인구 증가를 막으려 했으나, 제대로 되지 않자 결국 홍수를 일으킨다. 홍수 이후에도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하여 일부 여인들의 태(胎)를 막아 인구 증가를 막으려 했고, 아이들은 어려서 죽게 만들었으며, 나머지 여자들에 대해서는 독신을 강요했다. 그러나 <창세기>는 전혀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로 격려하신다(창 1:28). 그리고 홍수 이후에도 같은 말로 ‘노아’를 권면하신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닌 세 번에 걸쳐 그렇게 하신다(창 8:17; 9:1, 7).
(3) 윤리ㆍ도덕적 관점: 적어도 이점에 있어서는 ‘바벨론’ 신들은 결코 본받을 만한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 다투기도 하며, 서로에게 대해서나 인간을 속이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홍수를 내린 것도 <창세기>에서처럼 인간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땅에 인간이 너무 많아 소란스럽기 때문이었다. ‘아트라시스’가 홍수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홍수를 반대했던 여신 ‘에아’를 섬겼기 때문이었다(‘에아’가 사전에 홍수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그러나 ‘노아’가 홍수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당대에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으로 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창 6:9). 이로 미루어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을 아주 심각하게 다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창세기>가 당시 근동 지방에서 익히 알려져 있던 창조와 홍수 이야기들을 다시 들려주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신학적인 이유 때문이다. 즉 <창세기> 화자는 당대 사람들에게 친숙한 이야기를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4) 역사관: <창세기>가 이처럼 주변의 세계관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동시에 대안(代案)의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는 것 외에, 또 하나 대조를 보이고 있는 영역이 있다. 그것은 역사관의 차이다. 예컨대, ‘수메르’ 홍수 이야기에서 보여주고 있는 역사에 대한 관점은 낙관론적이고 발전론적이다. 그래서 창조 직후의 상황은 그 이후의 상황에 비해서 결코 낫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창세기>의 기록은 정 반대다. 즉 창조 직후의 모습은 모든 것이 완벽했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그러던 것이 타락 이후 인간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황은 악화 일로를 걷기 시작했으며, 대홍수의 심판 때까지 반 절정에 이른다. 결국 경건한 ‘노아’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인류는 멸망을 맞이하고, ‘노아’는 이제 두 번째 ‘아담’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홍수 이후에도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반 창조(反創造)의 행진은 멈추지 않았으며, ‘바벨론’의 근거 없는 낙관론은 ‘바벨’ 탑 사건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아카디아’ 언어로 ‘바벨’탑은 “신의 문(門)”이라는 의미다. ‘바벨론’ 인들에게 ‘바벨론’은 문명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지글랏’ 성전은 하나님의 나라로 연결시켜주는 통로다. 그러나 <창세기>는 ‘바벨’은 혼돈과 어리석음의 상징일 뿐이라고 비웃는다. 하늘에 닿을 것만 같았던 그 탑을 보기 위해서,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직접 내려와야 했을 정도로 지극히 미미한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3. <창세기 1>의 문학 양식
<창세기> 안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의 양식(장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 설화(즉 이야기); (2) 시와 노래; (3) 족보.
3.1. 설화
<창세기>의 설화는 다시 그 내용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기원설화(창조/타락/민족 등); (2) 영웅설화(‘아브라함’, ‘야곱’, ‘요셉’). 여기서 영웅 설화는 흔히 족장 설화로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 설화를 관통하는 세 가지 정도의 기법(技法)을 확인할 수 있는바, (1) 반복(recursion), (2) 현재화(contemporization), (3) 예시화(foreshadowing) 등이다.
반복. 한 설화의 전개에 필요한 일련의 요소들을 다른 설화에도 계속 반복해서 도입하는 기법을 말한다. 반복이 주는 효과는 그 이야기가 다루는 세계(설화세계)가 실제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낌을 주는 것이다. 아래의 두 경우에서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이처럼 두 설화 사이에 유사성을 둠으로써,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두 사건에서 그리고 있는 세계는 결국 같은 의미와 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의도한 것이 아닐까! 창조 당시의 세계와 홍수 이후의 세계는 다른 두 세계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은 일관된 계획과 섭리로 이 우주를 보존하고 운행하고 계신 것이다(참고. 히 1:3).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攝理)를 언약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인즉, 하나는 창조의 언약으로, 다른 하나는 섭리의 언약이 될 것이다.
하지만 화자는 두 이야기를 통해서 이를 명시적으로 교훈하거나 강조하지는 않는다. 다만 현명한 독자라면 두 기사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화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창조와 홍수 이후 각 주인공의 실패담에서도 다시 한 번 반복의 기법을 엿볼 수 있다.
현재화.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묘사하는 기법을 말한다. 예컨대, 첫 번째 살인 <가인과 아벨 이야기>(창 4:1-24)를 <도피성>에 관한 계명(민 35:9-34; 신 19:11-13)과 연결해서 서술하는 방식을 말한다. 두 경우 모두 하나님은 피의 복수에 대한 피난처를 제공하고 계심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써, ‘아브라함’과 동방 네 왕들 간의 전투(창 14)를 그보다 훨씬 뒤인 <신명기> 20장에 등장하고 있는 이방인과의 전투에 관한 규례를 염두에 두고 기록하고 있는 점이 그렇다. 화자는 현재화의 기법을 통해서, ‘아브라함’과 같은 생활 규범을 지니고 살아가고자 하는 당대의 독자들에게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동질성을 갖게 해주며, 더 나아가 위로나 평안을 갖게 해준다.
예시화. 이 기법은 먼저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후에 일어날 사건을 예시(豫示)하고 예증(例證)하는 효과를 지니게 해준다. 이를 통해서 중심주제는 발전되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목적론적인 역사관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 예컨대, 화자는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정착한 ‘세겜’(창 12:6)과 ‘베델’과 ‘아이’(창 12:8), 그리고 ‘네게브’(창 12:9)의 세 장소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은 훗날 ‘야곱’이 ‘하란’으로부터 돌아와서 방문한 곳이며(창 34-35), 더 나아가 ‘여호수아’ 군대가 점령한 곳이기도 하다. ‘야곱’과 ‘여호수아’는 이들 장소에 하나님의 제단(祭壇)을 세웠다. 이는 단순히 우연으로만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아브라함’이 ‘이집트’를 방문한 이야기(창 12:10-20)는 뒤이은 20장과 26장의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 뿐만 아니라, 이는 후에 ‘야곱’과 이스라엘의 순례에 대한 예시가 되는 것이다(참고. 창 41-출 12).
3.2. 시와 노래
설화만큼 빈번하지는 않지만, <창세기>에는 또 다른 양식이 있는바 시와 노래가 있다. 대표적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창조의 노래.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도다(1:27).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아담의 노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2:23).
라멕의 칼의 노래.
아다와 실라여 내 소리를 들어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어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4:23-24).
3.3. 계보
말할 것도 없이, <창세기> 여러 곳에서 “계보”에 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하고 있으며(예. 창 4:16-24), 족보에도 신학이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4. <창세기 1>의 구조
열 개의 톨레돗.
<창세기>의 구조를 장(章) 별로 구분한 게 된 것은 비교적 후대의 일이며, 때로 정확하지도 않다. <창세기>에는 ‘히브리’ 식 본래의 단락 구분 방식이 있는데, 각 단락마다 공통적으로 시작하는 특유의 제목이 있다: “그 계보(역사)가 이러 하니라”. <창세기> 전체적으로 열 개의 제목이 등장하고 있다(단 36:1, 9에서 두 번).
여기서 두 번째 제목만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모두 그 문체(style)가 동일하다. 즉 각 제목에 등장하는 사람은 이어지는 해당 본문에 등장하는 나머지 사람들에 비해 가장 연장자(年長者)이다. 즉 제목에 한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고, 이어서 그 사람의 후손들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해당 단락을 채우고 있다. ‘이삭’의 계보에서 이점을 가장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이삭’은 25-35장에 걸쳐 살아있으면서, 명목상으로 가정의 우두머리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그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이다. 마찬가지로, 37-50장에서도 가정의 우두머리는 ‘야곱’이지만, 이야기는 그의 아들 ‘요셉’과 나머지 형제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보다 적절한 제목은 다음과 같아야 할 것이다: “‘노아’와, ‘노아’의 아들들과, ‘셈’과, ‘데라’와, ‘이삭’과, ‘에서’와, ‘야곱’의 가족 이야기는 이러하니라.”
배열과 양식. 위 표에서 제목들이 배열된 양상을 보면 크게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 2:4-26
(2) 11:27-50:26
그리고 두 단락 모두 세 개의 이야기와 두 개의 족보(연대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양식은 번갈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배열은 우연이라기보다는 의도적이며, 아주 의미심장하다. 즉 첫 번째 단락은 두 번째 단락을 예고해주며, 처음 단락을 이해함이 없이는 두 번째 단락을 이해하기 힘들게 되어있다(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구조는 앞에서 1-11장의 역사성과 연속성과 관련해서 강조했던 내용을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즉 두 번째 단락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 있다면, 첫 번째 단락 내용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 역사적 인물이라면, 1-11장의 인물들 역시 그러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창세기> 1-11장의 역할이나 기능을 이해하자면, 이 부분은 고대 근동 세계관에 대한 반박과 교정의 기능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창세기>의 핵심 내용(12-50장)에 대한 서론의 기능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창세기> 1장. 또 한 가지, 위 구조분석 도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바는 <창세기> 제 1장이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정확하게는 1:1-2:3이 빠진 것이다). 이 부분의 내용은 주지하다시피 창조와 안식에 관한 것으로서, <창세기>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 내용에 대한 “장엄한” 서곡(序曲, overture)에 해당할 것이다. ‘오페라’의 서곡은 그야말로 곧 감상하게 될 작품에 대한 ‘모티브’(motifs)와 선율(tunes) 등을 소개하고, 예고해주는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성경>의 나머지 부분의 지배적인 사상이 되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두 인격체 간의 관계 등에 대해서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이들 사상은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때로 교정되기도 하고, 더욱 발전되기도 하면서 이어지는 열 장을 채우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 1부(2:4-11:26)는 이들 주제에 대한 두 번째 해설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세 번째 해설에 해당하는 <아브라함 이야기>(11:27-50:26)에서 이들 주제는 보다 구체적인 영역에서 새롭게 등장하게 될 것이다.
5. <창세기 1>의 내용
5.1. 서막
서막(序幕)(1:1-2:3)은 하나님에 관한 <창세기>의 핵심 주제에 대한 첫 번째 해설에 해당한다고 했다. 이곳에서 화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은 그야말로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의 창조주라는 선언이다. 그러나 창조 직후의 지구의 모습은 어둠과 물로 뒤덮인 혼돈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혼돈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순간 질서를 잡아간다. 첫날에 하나님께서는 “빛이 있어라”고 명령하시자, 빛이 존재하게 되었다. 셋째 날에는 “땅이 드러나라”하셨는데, 그대로 되었다. 나머지 삼일 동안의 창조 활동은 처음 삼일 동안의 창조활동에 대한 일종의 메아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처음 삼일과 나머지 삼일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마치 일대 일의 대응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도표 참고).
이와 같은 시적(詩的)인 대칭과 균형 외에도 순환과 반복의 패턴은 서막의 나머지 부분에서도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어, 서막의 시적인 분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다. 예컨대, “하나님이 가라사대”,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리고 “하나님이 복주시되” 등의 반복적인 표현이 그렇다. 그러나 단순히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라, 때로는 이들이 한 번만 나타났다가, 때로는 두 번 나타나기도 하며, 또 다른 곳에서는 아예 생략되기도 한다. 이 같은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 활동 중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대목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아래 도표를 통해서 이를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셋째 날과 여섯째 날이 상대적으로 중요한 날임을 알 수 있다.
이 도표에서 보여주는 바, 하나님은 능력과 질서의 하나님이다. 무엇인가 존재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분은 단지 말씀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는 근동의 다른 창조 이야기와 다르다. <에뉴마엘리쉬>의 신들은 서로 우위를 겨루거나 창조를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이다. 태양과 달과 별들마저도 단지 피조물에 불과했으며, 신적인 존재는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말씀한 것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오경>의 중심 주제가 되는 족장들과 언약을 맺으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기도 하다.
서막은 절대 주권자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창조의 중심에 인간이 있으며, 인간 창조 이야기는 그 모든 창조 이야기의 절정이자 정점에 있다. <아트라시스>에서처럼 신들의 배고픔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나중에 임시방편으로 생각해 낸 존재가 아니다. 육일 동안의 창조 활동이 마지막 여섯째 날을 향해서 상승곡선을 그리고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바다와 육지, 해와 달과 별들은 각기 셋째 날과 넷째 날에 창조되는데, 이들의 창조에 대한 서술은 상대적으로 길고 상세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오직 인간을 행해서만, “그가 보시기에 매우 좋았더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인간의 창조는 단순히 “있으라”는 명령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 창조를 시작하시기 전에 모든 영적 존재(예. 천사들(?))들과 하나님 자신을 향해서 일종의 초청의 말씀을 발하신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자.” 이 초청의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의 대표자(또는 대리자)가 될 것이라는 선언이다. 이는 고대 근동에서 왕에 대한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즉 왕들은 신의 대리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는 왕들이 아니라, 인간이 그렇다는 선언을 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그리고 이들 인간을 향해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축복하시는데, 이 또한 근동의 다른 서사시들과 구분되는 대목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1:28).
인간의 창조가 창조의 절정이긴 하지만, 창조의 목표는 아니다. 아직 일곱째 날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날에 하나님은 그 모든 창조 활동을 마치고 안식하셨다(2:3). 이 선언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안식(安息)하셨으므로, 그의 형상인 인간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구절은 안식일에 관한 십계명(출 20:11)의 규례에 대한 배경과 근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날은, 예수님께서도 설명하셨듯이,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만들어놓은 것이었다(막 2:27).
이처럼 <창세기> 1장은 화자의 기본 사상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곳이다. 화자는 이곳에서 <창세기> 나머지 부분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일련의 사상들, 즉 하나님의 속성과 능력,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사, 인생의 목적 등을 제시하고 있다. 이곳에서 그리고 있는 세상은 짐승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존(共存)하는 곳이며, 따라서 인간은 채식주의자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다(참고. 1:29-30). 하나님의 ‘아이콘’(icon)으로서의 인간은 이 땅을 보살피며 다스리기는 하나, 억압이나 무력으로서가 아니라, 모두의 유익을 위한 경영자로서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창세기> 2장에서 그리고 있는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3장에서 이 모든 조화로운 관계는 깨지고 부서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변화된 모습이 화자가 처해 있는 현실이고 실존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는 <창세기> 1-2장의 모습을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곳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장소이자, 동시에 이상(理想)으로 삼아야 할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5.2. 제 1막에서 5막까지: 개괄
서막(창 1:1-2:3)이 <창세기>의 첫 번째 해설에 해당한다고 했으니, 제 1막에서 5막(창 2:4-11:26)까지의 내용은 두 번째 해설에 해당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해설은 모두 다섯 개의 ‘톨레돗’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공통적인 제목, “그 계보는 이러 하니라”로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더 정확한 번역은 “그 가족사(家族史)는 이러 하니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족보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도 함께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도표 참고). 화자는 여기서 서막에서 제시한 바 있는 기본 사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다섯 개의 ‘톨레돗’ 중에서 가장 긴 것은 가운데에 위치한 제 3막으로서, 그 유명한 <노아의 홍수 이야기>이다(참고. 창 6:9-9:29). 가장 길다는 것은 그 내용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메소포타미아’ 설화에서도 인류의 역사를 구분하는 방식이 홍수를 기점으로 전과 후로 나누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창세기> 역시 그러하다. <창세기>에서 대홍수는 반(反)창조(decreation)의 절정이다. 홍수로 말미암아 세상은 태초의 모습, 즉 어둠과 공허와 혼돈(混沌)으로 되돌아가 버렸다(참고. 창 1:2).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 세상을 뒤덮은 물 뿐이다. <창세기> 1장에서 창조된 그 모든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다: 땅과 식물과 짐승과 인간. 유일한 생존자들은 배 안에 있는 여덟 명의 식구들뿐이다.
그러나 반(反) 창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재창조(re-creation)가 뒤따른다. 그 시작은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사”(창 8:1)부터이다. 곧바로 바람이 불어 모든 것들이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창 8:1). 흥미롭게도 이 문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 “바람”과 <창세기> 1:2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번역하고 있는 단어는 같은 ‘히브리’ 단어 ‘루아흐’(j"Wr)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처음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같은 장면이 연출된다. 어둠과 혼돈에서 빛과 질서로 거대한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땅이 나타나고, 식물들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며, 짐승들은 방주(方舟)를 나와 그 땅에 퍼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볼 때, ‘노아’는 두 번째 ‘아담’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담’처럼 온 인류의 조상으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아담’이 ‘에덴’ 동산을 경작하고 가꾸는 청지기의 소명을 받았던 것처럼, ‘노아’ 역시 새 땅에서 같은 소명을 받는다. ‘아담’에게 온갖 열매 맺는 과일 나무가 있었다면, ‘노아’에게는 포도나무가 있었다. 두 인류의 조상은 소명도 같았지만, 실패도 같은 운명이었다.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따먹었다면, ‘노아’는 너무 많은 포도주를 마신 것이 문제였다. 과음으로 그는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었으며, 자신의 아들에게도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이렇게 하여 인류는 다시 한 번 같은 역사를 반복하고 만다. 이제는 왜 <노아 이야기>가 다섯 개의 계보 중에서 한 가운데 들어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점이기도 하다.
5.3. 제 1막: 하늘과 땅의 계보
제 1막의 제목, “하늘과 땅의 계보”는 그 양식에 있어 계보라기보다는 이야기에 더 가깝다. 특히 두 개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는바, (1) <에덴 이야기>와 (2)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이 속에 포함되어있다.
이들 두 이야기는 단순히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신학적 주제에 의해서 연결되어있다. 신학적 주제라 함은 “죄”(罪)에 관한 것이다. ‘가인’은 ‘아담’의 아들이긴 하지만, 그 아버지보다 죄질(罪質)이 더 무겁고 악하다. 이것이 제 1막의 두 에피소드가 보여주려는 바다.
<에덴 이야기>. <에덴 이야기>의 구조와 구성에 대해서는 본인의 <창세기(1)>에서 상세하게 다룬 바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신학적 주제를 중심으로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할 것이다. 전체 일곱 개의 장면 중에서 처음 두 장면(2:4-25)은 타락(墮落) 이전의 동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 장면(3:1-24)은 타락과 그 결과를 그려주고 있다. 우선 제 2장은 1장에서 제시한 ‘모티브’를 보다 구체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제 1장이 창조의 전체적인 국면을 ‘파노라마’ 식으로 보여주고 있다면, 제 2장은 확대경으로 관찰하듯 남자와 여자의 창조를 중심으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관점에서 창조를 묘사하고 있다. 제 1장에서 창조의 절정은 남자와 여자의 창조로서, 하나님은 이들을 창조하신 후 “생육하고, 통치하며, 번성하라”는 소명을 주신다. 제 1장은 그렇게 끝이 난다. 이어지는 <에덴 이야기>(2-3장)에서도 이들 세 주제, 즉 “생육”과 “통치”와 “번성”에 관한 주제가 핵심 배경을 이루고 있긴 하지만, 다만 이들이 역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 “생육” 즉 먹고 사는 문제와 관련해서, 음식을 제공하는 쪽은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동산에 얼마나 많은 과일 나무들을 마련해 놓았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참고. 창 2:8-17). 이점이 ‘바벨론’ 신화와 다른 점이다. <에뉴마엘리쉬>는 신들이 인간을 창조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신들이 필요한 먹이를 제공해주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둘째, “통치자” 내지는 “지배자”로서의 인간의 소명은 제 2장에서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는데, 예컨대, ‘아담’이 짐승의 이름을 짓는 장면이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참고. 창 2:18-20).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들 짐승은 ‘아담’의 동반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그를 위협하거나 공격하는 적대적 존재도, 그리고 ‘아담’이 착취하고 마구 부릴 수 있는 대상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번성”의 주제와 관련해서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든 다음 ‘아담’에게 데리고 왔다는 언급은 오늘날 결혼에 관한 전형(典型)으로 꼽을 만하다(창 2:21-25). 이 장면은 이야기 형식을 빌려, 남자와 여자의 이성적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확신을 심어주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아담의 노래”에서 이미 암시되어있다(참고. 창 2:24-25).
하지만 ‘에덴’의 위치에 관한 문제는 하나의 숙제다. 이야기 속에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의 두 강이 등장하고 있어, ‘에덴’은 이 두 강의 발원지(發源地)인 북쪽 어디 쯤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담’ 부부가 쫓겨난 이후 천사가 화염검을 들고 그곳을 지키고 있어,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다(창 3:24). 이로 미루어 ‘에덴’은 실재(實在)하던 곳이었으나, 결코 근접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에덴’은 하나의 장소로서보다는, 상징으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하겠다. 즉 ‘에덴’은 장소이면서, 동시에 “삶의 방식”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에덴’이 “즐거움”을 뜻하는 ‘히브리’어 어근과 관계가 있다는 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에덴’에 대한 묘사를 보면, 이곳은 “생명”의 동산이다. 주변에 풍성한 물이 흐르고, 온갖 종류의 과일 나무가 자라며, 많은 금과 온갖 진기한 보석들로 가득 찬 ‘에덴’ 동산은 그야말로 지상 낙원이었다. 하나님마저도 이 정원 숲속을 즐겨 거니시곤 했을 정도다. 이와 같은 이미지는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聖幕)을 묘사할 때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곧바로 이어지는 3장에서, 그 모든 생명의 즐거움으로 가득 찬 ‘에덴’이 동산 지기 부부의 반역으로 어떻게 실낙원(失樂園)이 되어버렸는지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과 이들 부부 사이에 있었던 그토록 친밀했던 관계는 순식간에 깨어져버렸다. 죄책감으로 이 두 사람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부끄러운 나신(裸身)을 가리려 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았을 때, 두 사람은 서로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하나님은 단순히 그들이 어디 있는지를 물으셨지, 왜 그렇게 했는지, 누가 먼저 잘못을 했는지, 누가 더 큰 책임을 져야 하는지, 따진 것이 아니었다! 이제 두 사람은 하나님과 소원해 졌을 뿐만 아니라, 상호 간에도 불신과 원망이 쌓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죄의 결과는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다. 그 모든 친밀한 관계들 사이에서 분리와 균열이 일어났다: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짐승들; 인간과 피조세계; 짐승과 짐승!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여인의 특권은 남편과의 갈등과 출산의 고통으로 훼손을 받게 되었다(창 3:16). 한 편 동산의 관리자 및 운영자로서의 남자의 역할과 특권 역시 노동의 고통과 죽음으로 훼손을 입기는 마찬가지였다(창 3:17-19). <에뉴마엘리쉬>는 죽음이 홍수 이후에 비롯되었다고 말하지만, <창세기>는 태초의 인류의 조상에게 그 원인과 책임을 돌리고 있다. 결국 두 사람은 동산으로부터 추방을 당하는데, 이는 곧 하나님의 임재와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분리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약속, “이것을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는 약속은 이루어진 것이다(참고. 창 2:17).
‘아담’과 ‘하와’에게 내려진 처벌(<성경>은 이를 저주라 일컫지만)은 당시 이스라엘과 온 인류가 어떤 형태로든 겪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임을 밝히고 있다. <성경> 시대 당시 일반 농부들의 삶이란 늘 위험하고, 위태로운 것이었다. 수확은 힘들었고, 기근(饑饉)이라도 오면 실패할 확률도 놓았다. 설상가상으로 뱀 등과 같은 야생동물들은 인간의 목숨마저 위협하던 상황이었다. 죽음이나, 고통, 그리고 부부 간의 갈등과 같은 일상사(日常事)들은 원래 있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던 ‘아담’과 ‘하와’에게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당연히 ‘에덴’은 모두가 이상향으로 동경하는 장소이자 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삶의 질(質)이 되어버렸다. <구약>이 꿈꾸는 사회도 바로 이것이었다(참고. 암 9:13-15; 사 11:6-9).
<가인과 아벨 이야기>. 이 같은 소망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4장에서 보여주는 현실은 진보나 개선(改善)이 아니라, 퇴보(퇴보)와 악화일로(惡化一路)였다. 이곳에서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희생제사가 등장하고 있다. ‘아벨’은 자신이 가진 최상의 것, 즉 가축 중의 첫 새끼로 하나님께 드렸지만, ‘가인’은 단순히 그가 수확한 소출 중 일부를 드렸을 뿐이다. 희생제사의 대원칙이 가장 최선의 것을 드리는 것임을 ‘가인’은 알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무시했을 것이고, 당연히 하나님은 그의 제사를 받지 않았다. 이후에라도 이를 알고 고쳤으면 좋았을 텐데, ‘가인’은 질투심으로 동생을 죽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살인은 그 자체로서 이미 악한 것이지만, 동생을 죽인 일은 더 끔찍한 일이다. 형제란 서로 의지하고, 돕고, 보호해주어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후 ‘가인’은 동생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을 냉소로 일축해 버린다: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그렇다! ‘가인’은 무의식중에 진실을 말해버린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조롱의 대상이 아니며, 속임을 당하는 분도 아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에게 영원한 유배(流配)의 저주를 내리신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를 상징하는 것이다. 아무튼 ‘가인’은 그 모든 유목민(遊牧民)의 시조가 된 셈이다. 그러나 고대 근동 설화는 이점에서도 <창세기>와 갈린다. 즉 <길가메쉬>의 ‘닌투’ 신은 정 반대의 시도를 통해서 인간의 삶을 개선해 주려했다. 즉 유목 생활에서 정착 생활을 하도록 도와주려했다.
우리는 앞에서 도시 건설과 관련해서 <창세기> 기록과(4:17-18, 26) 고대 ‘수메르’ 설화와 비교한 바 있다(참고. 도표, 61쪽). 문명과 문화의 기원과 관련해서도 <창세기> 기록은 고대 근동 설화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건축이나, 음악이나, 과학 기술의 원조(元祖)가 ‘가인’의 후손들 중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창 4:20-22). 반면 <아트라시스>는 일곱 현자(賢者)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즉 ‘에아’(Ea) 신이 이들을 보내어 인간들에게 문명을 가르치도록 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 따르면 문명은 단지 폭력과 악행으로 얼룩진 ‘가인’의 후예들이 이룩한 업적에 불과한 것이다(참고. 창 4:18, 23-24).
5.4. 제 2막: ‘아담’의 계보
제 2막은 세 개의 작은 단락으로 구성되어있다:
(1) 5:1-32‘아담’에서 ‘노아’까지의 계보
(2) 6:1-4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3) 6:5-8대홍수의 예고편
아담에서 노아까지. 앞에서도 한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창세기> 5장의 족보는 홍수 이전의 ‘수메르’ 왕들의 족보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창세기>의 족보는 10대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 반면, ‘수메르’ 족보는 여덟 명에서 열 명의 왕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여기 ‘아담’-‘노아’의 족보가 4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아담’-‘라멕’의 족보를 변형시킨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두 족보에서 같은 이름들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도표):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는 근거가 없다. 우선 같거나 비슷한 이름이 나타나는 순서가 다르다. 그리고 한글이나 영어 발음이 비슷한 이름들은 ‘히브리’ 발음 체계에서는 완전히 다른 이름들이다. 또한 완전히 같은 이름들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혼돈을 피하기 위해서 별도의 설명을 덧붙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참고. ‘라멕’과 ‘에녹’). 나중에 족장의 계보에서 볼 수 있듯이, 화자는 계보를 기록함에 있어, 항상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계보를 선택받은 백성의 계보에 앞서 소개하고 있다. 예컨대, ‘이스마엘’의 계보(25:12-18)는 ‘이삭’이 계보(25:19-35:29)에 앞서 있고, ‘에서’의 계보(36:1-37:1)가 ‘야곱’의 계보(37:2-50:26)에 앞서 있다. 같은 원리가 이곳 4-5장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 ‘가인’의 계보가 4장에, 그리고 ‘셋’의 계보가 5장에 등장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는 이야기를 다룬 이 단락은 <창세기> 전체에서도 가장 문제가 많은 본문이다. 두 가지 큰 논란은 이들의 정체(正體)와 그리고 이들의 범죄 내용에 관한 것이다. 대략 네 가지 정도의 설명이 알려져 있다:
(1) 하나님의 아들들은 왕이며, 사람의 딸들은 왕실에 거주하는 여성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아들들은 거룩한 계열 ‘셋’의 후손들이며,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손들로서, 결혼은 이들 사이의 금지된 결혼을 일컫는 것이다.
(3) 두 번째 견해와는 정 반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가인’의 후손들이며, 사람의 딸들은 거룩한 ‘셋’의 후손들을 말한다.
(4) 하나님의 아들들은 영적 존재들로서 천사, 귀신, 잡신들을 일컫는 말로서, 이들이 여자들과 결혼한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들 설명 중에서 현대인들에게 가장 충격적이고 황당한 설명은 네 번째일 것이다. 그런데 고대 ‘가나안’ 문헌에서는 물론 오래된 ‘유대’ 문헌이나 심지어 <신약>에서조차도 영적 존재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칭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참고. 욥 1:6-12; 벧후 2:4; 유 6, 7). 이들의 정체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들과 사람 사이의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인가? <창세기>는 분명하게 말하기를 이 결혼은 하나님의 마지막 희망의 보루였다. 바로 이 사건 다음에 홍수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 같은 결혼이 가능하기라도 할까? 비록 유보적이긴 하지만, 이 같은 결혼의 가능성에 대해서 나름대로 그럴싸한 설명을 덧붙일 수는 있을 것이다. 고대인들은 신이나 영적 존재가 수시로 인간과 성(性) 관계를 맺어 ‘길가메쉬’와 같은 초인적 영웅이 탄생한다고 믿었다. ‘길가메쉬’의 아버지는 제사장이었고, 어머니는 ‘닌선’(Ninsun)으로 불리는 여신이었다. 아마도 이들 거인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네피림’(참고. 창 6:4)일 것이다. 그럴싸한 이야기는 또 있다. 즉 ‘가나안’이나 ‘바벨론’의 “풍요의 신”을 위한 종교 의식에서 성전 창녀들은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이들은 일종의 여신들로서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 이들과 성 관계를 가졌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다산(多産)과 풍년이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의식으로 어린 여자들이 창녀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창세기> 6:1-4의 기록, 즉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의 결혼”나님께서 진노하셨다는 기록은 이와 같은 잘못된 이방 종교 사상에 대한 교정 내지는 반박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교훈인 즉은 성전 창기(娼妓)들이 풍요와 풍년을 가져오기는커녕 홍수와 멸망을 가져왔다는 경고가 그것이다.
대홍수의 예고편. 이 단락(6:5-8)은 대홍수에 대한 예고편에 해당한다. 이 같은 형식은 <창세기>에서 큰 단락이 끝날 때마다 등장하는 전형적인 형식이기도 하다. 즉 앞선 내용을 요약하면서, 곧 이어지는 내용에 대한 예고를 하는 기능을 말한다.
이곳에서는 인간의 잘못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가장 큰 저주를 소개하고 있는바, 그것은 인간 모두를 전멸시키는 것이었다(창 6:7). 거듭 주목하거니와, <창세기>가 말하는 홍수의 원인이 근동 설화의 그것과 판이하다는 점이다. 대홍수는 인간의 사악함 때문이지,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란함 때문이 아니다. 인간의 사악한 행위가 이어지는 단락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참고. 창 6:11-13). 그리고 홍수 직전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은 ‘노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신다. ‘노아’가 홍수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웠기 때문이었지(창 6:9), 여타 홍수 설화에서처럼 신들의 변덕스러운 편애 때문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성경>의 하나님의 도덕성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5.5. 제 3막: ‘노아’의 계보
제 3막은 다섯 개의 ‘톨레돗’(1-5막) 중에서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분량에 있어 가장 길다. 그리고 우리는 앞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창세기>의 대홍수 이야기와 다른 홍수 설화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점 등에 대해서 상세하게 논의한 바 있다. <대홍수 이야기>는 문학적으로 아주 정교하게 만든 한 편의 드라마다. <대홍수 이야기>의 구조와 구성에 대해서는 본인의 <창세기: 문학과 역사와 신학>에서 충분히 다룬 바 있다. 본인의 <창세기(1)>에서 해당 부분을 반드시 참고할 것을 권하는 바이다.
구조와 구성. <홍수 이야기>를 신학적 주제에 따라 크게 구분하면 두 개의 큰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1) 의인 노아(6:9-9:17)
(2) 죄인 노아(9:18-29).
이에 따르면, 이야기의 주인공 ‘노아’는 두 단락에서 전혀 다른 인물로 부각되고 있다: 즉 이를 통해서 화자가 강조하고 있는 신학적 주제가 다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홍수 이야기>의 또 다른 구조적 특징은 아주 정교하고 예술적인 대칭(對稱) 내지는 교차대구적(交叉對句的) 구조이다(도표):
<홍수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반 창조”와 “재창조”이다. 홍수로 모든 것이 멸망하였으나, 홍수 이후 신천지가 시작된다. 두 장면 모두에서 <창세기> 서막의 모티브가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참고. 창조 설화와 홍수 설화 간의 비교 도표, 77쪽). ‘노아’는 두 번째 ‘아담’이며, 인류의 두 번째 조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홍수 이야기>의 극적 전환점은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셨다”(8:1)는 대목이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기억하실 때, 반드시 행동을 보이신다(참고. 창 30:22). 하나님은 이번에는 홍수의 절정에서 “바람”(‘루아흐’)을 보내어 물이 물러나게 하신 것이다(참고. 창 1:2). 홍수 이야기의 전체 구조가 아주 정교한 대칭 구조(또는 교차대구)로 이루어져 있어(ABCD...DCBA), 등장인물의 행동에 대한 묘사도 아주 대칭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예컨대, 이야기 벽두에 ‘노아’는 방주 안으로 들어갔으나, 이야기의 끝에 ‘노아’는 방주 밖으로 나오고 있다. 홍수가 진행되면서 산들은 물로 뒤덮이지만, 홍수가 끝나면서 산들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성경> 전체적으로 <홍수 이야기>만큼 정교한 교차대구 구조를 보이는 이야기도 드물 것이다. 본인의 <창세기(1)>에서 해당 부분을 반드시 참고할 것을 권하는 바이다.
의인 노아. <홍수 이야기>의 초점은 물론 구원에 있다. 그리고 ‘노아’는 그의 의로움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지만, 멸망의 규모나 정도는 가히 공포의 극치를 이룬다(창 7:17-24). 홍수는 전 세계적인 규모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으나(참고. 창 7:19), 그렇지 않다 해도 적어도 화자가 관찰할 수 있는 범위 즉 중동의 일부 지역이 모두 물로 뒤덮였던 것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아무튼 <창세기>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동기다. 즉 홍수는 <길가메쉬>에서처럼 신들이 인간들의 소요를 참지 못해서 일으킨 것이 아니라, ‘야훼’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죄악 때문이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창세기>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인간의 죄악이 온 세상에 가득하였기 때문이며(창 6:5), 인간의 포악함이 극에 달하였기 때문이었다(창 6:11-13). 그리고 세 번째 이유를 추가하자면, “신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는 종교적 타락에 관한 이야기로서, <홍수 이야기> 직전에 마치 서문처럼 이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홍수의 첫 번째 이유에 관한 <창세기>의 언급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이 구절은 인간의 죄악에 관한 <성경>의 언급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이다. 인간의 모든 의지와 생각과 뜻이 늘 악할 뿐이라는 진단이다. 창조의 절정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즉 “한탄하고 마음에 근심하셨다”(창 6:6)는 표현은 그래서 오히려 충분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구약>의 다른 곳에서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한 번은 ‘디나’가 강간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녀의 형제들이 보였던 반응이고, 다른 경우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경우와,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아내가 보이는 반응을 표현할 때이다(창 34:7; 삼하 19:2; 사 54:6).
인간의 사악한 생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온 세상을 폭력으로 가득 채웠다. 이것이 홍수의 두 번째 이유다. ‘아담’이 ‘에덴’으로부터 추방당하자말자 곧이어 ‘가인’은 질투심으로 동생 ‘아벨’을 살해한다. 그리고 얼마 안가 ‘라멕’은 자신을 해코지 하는 자에게는 무려 일흔일곱 배로 갚아주겠다고 호언장담(豪言壯談)하고 있다. <창세기>는 이렇게 인간의 폭력성을 태초의 인류에게까지 연결 짓고 있다. 폭력성은 인간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짐승들도 예외는 아니었다(참고. 창 6:11-13).
다시 요약하자면, 홍수의 원인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성적 타락을 포함한 종교적 타락; 인간의 철저한 죄악; 온 세상에 만연한 폭력. 그러나 오직 ‘노아’만이 예외였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홍수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반 창조”의 행위로 볼 수 있다. 모든 생명들은 전멸되었으며, 온 땅은 물로 뒤덮여 <창세기> 1:2의 혼돈과 흑암과 공허로 되돌아가버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반 창조의 절정으로 내려가는 대홍수의 일지(日誌)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치밀하다. 창조가 일요일에 시작하여 금요일에 끝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파괴적인 반창조도 40일에 걸쳐 진행되고 있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반창조의 가장 깊은 바닥에서 하나님은 ‘노아’를 기억하셨고, 그 때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다. 창조가 6일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재창조는 장장 일 년에 걸쳐 진행된다. 처음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성령의) 바람이 불자, 마른 땅이 나타나고, 식물이 자라기 시작하며, 땅은 다시 사람과 짐승들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소명을 주신다.
그러나 과연 재창조는 원 창조와 모든 점에 있어 똑 같을까? 홍수로 과연 지구는 원래의 모습으로 정화(淨化)되었으며, 인간의 죄성(罪性)과 폭력성의 문제가 해결되었을까? 홍수 이후의 서술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마련하고 있다. ‘노아’는 배에서 나와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으며, 하나님은 이에 이렇게 응답하신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창 8:21).
그런데 이 장면에서 다시는 홍수로 지구를 멸하지 않겠다는 이유가 충격적인 것이, 처음 홍수를 내린 그 이유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왜 마음을 바꾸셨을까?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가 참고로 삼을 만 한 본문은 바로 이 구절뿐이다: “야훼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이 장면에서 <창세기>는 다시 한 번 제사에 관하여 독자의 주목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참고. 창 4:3-6). 즉 이 구절은 의인(義人)의 제사가 어떻게 온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참고. 욥 42:8).
그러나 인간의 죄 문제는 그렇게 해결할 수 있다 치더라도, 온 땅에 만연해 있는 폭력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어지는 장면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창 9:1-7). 그 시작은 <창세기> 1:28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9:1). 이 구절은 재창조(창 8-9)와 원 창조(창 1)가 마치 시의 유사반복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후부터 두 창조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드러나고 있다. 무엇이 다른지 다음 도표가 잘 대조해 보여주고 있다.
이 도표는 크게 세 가지 정도의 차이를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첫째, 인간과 짐승 간의 관계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그동안 서로 친밀하게 교제하던 관계는 이제 옛날의 일이 되어버렸다. 서로 공격하고, 심지어 잡아 죽이는 사이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 같은 폭력의 확산을 금지시키기 위하여 제 9장에서는 중요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짐승들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통치에 관한 원칙은 이전과 동일하였으나 1:28에서 기대할 수 있는 바, 호의적이고 자비로운 통치는 이제 두려움과 공포가 대신하게 되었다.
둘째, 먹는 음식에 관해서는 1:29에서 암시되거나 기대할 수 있는 바는 채식(菜食)이었으나, 이제부터는 육식(肉食)도 허용되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육식을 하되 짐승의 피 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창 9:3-4).
셋째,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생명에 관한 특별한 원칙이 추가되고 있는데, 누구든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피의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다(창9:5-6). 이와 같은 규정은 이전에 ‘가인’을 해하는 자는 일곱 배의 복수를 당할 것이고, ‘라멕’을 해치는 자는 일흔일곱 배의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언급(4:24)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피의 보복에 관한 이 새로운 규정은 <구약>을 관통하는 공의(公義)에 관한 하나의 대 원칙이 되고 있는데, 즉 처벌은 반드시 범죄에 합당한 것이 되어야 하고, 동시에 과도한 피의 보복으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죄인 노아. <노아 이야기>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사뭇 충격적이다(창. 9:20-27). 이야기는 ‘노아’가 자신이 재배한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어 마시고 취하여 그 손자, 즉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하는 이야기다. 이 에피소드가 왜 이곳에 포함되어야 할까? 그리고 <창세기> 전체 구성에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가?
물론 이 에피소드가 이곳에 우연하게 잘못 삽입된 것으로 볼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리스 신화에서 포도 재배나 포도주 제조에 관한 이야기는 홍수 이전의 시대까지 아우르고 있다. 둘째,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대홍수의 심판 이후 등장하는 두 번째 대규모 심판과 한 가족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인데, 여기서도 이야기의 끝에 주인공이 술에 취하여 자기의 딸들과 성 관계를 맺는 장면이 등장하고 있다(창 19:30-38). 셋째, 이 에피소드는 다음에 등장하는 “노아의 아들들의 계보”(10장)를 예고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이와 유사한 패턴의 서술 방식을 본 바 있다. 즉, “족보” 다음에 “이야기”가 등장하고, “이야기”는 다시 “계보”의 등장을 예고하는 서술 방식을 말한다(예. 4:25-25; 6:5-8).
그렇다면 <창세기>에서 이 에피소드가 갖는 신학적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첫 번째 단서를 10장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우리는 10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노아’의 세 아들, 즉 ‘셈’과 ‘야벳’과 ‘햄’의 계보를 통해서 ‘노아’의 축복과 저주의 타당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고대 근동에서 자녀들은 아버지의 수치를 덮어주는 것이 도리였다. ‘셈’과 ‘야벳’은 마땅히 행할 도리를 취했으나, ‘햄’은 오히려 이를 들추어내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다. ‘햄’은 그의 행동으로 아비의 저주를 받았으며, 나머지 두 형제는 축복을 듣는다.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셈’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으며, 반면 ‘햄’은 이스라엘의 오랜 원수들 즉 ‘이집트’나 ‘아수르’, ‘바벨론’ 등의 조상이 된다. <창세기>의 관점에서 볼 때 최악의 저주는 ‘햄’의 후손 중의 하나인 ‘가나안’ 족속들에 대한 것으로서, ‘햄’에 대한 저주는 훗날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의 정당성을 예고해주고 있다: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창 9:26).
결국 ‘아담’이 두 명의 선한 아들(‘아벨’과 ‘셋’)과 한 명의 악한 아들(‘가인’)을 두었던 것처럼, ‘노아’ 역시 세 아들 중 두 명은 선한 아들, 한 명은 악한 아들을 두었다. 이 두 계보를 통해서 ‘아브라함’의 선조는 ‘셈’을 거쳐 ‘셋’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10장은 계보에도 신학이 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담’과 ‘노아’ 사이에는 또 다른 대비점이 있다. 즉 홍수로 전 인류가 전멸당한 시점에, ‘노아’는 ‘아담’처럼 전 인류의 새로운 조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홍수 이후 그는 ‘아담’이 받았던 “창조 명령”, 즉 “생육하고 번성하며, 온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홍수 이야기>의 벽두에 ‘노아’는 당대에 의인이라는 칭송을 듣는다. <구약>에서 “의인”의 호칭이 의미하는 바는 최고 수준의 성인(聖人)이다. 그리고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화자는 수시로 반복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준행하였다”는 것이다(창 6:22; 7:5, 9, 16; 8:18). 그러나 얼마 안가서 그는 ‘아담’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먹었던 것처럼, ‘노아’는 그가 포도주를 과음(過飮)해버렸다. 과연 ‘노아’의 행동을 두 번째 “타락”으로 볼 수 있을까? <구약>은 과음(過飮)에 관하여 어떻게 말하는지 알아보는 것도 ‘노아’의 행위를 판단함에 중요한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시 104:15; 신 14:26; 사 5:1-7; 민 6:3-4; 삼상 1:14; 잠 21:17; 23:20-21, 29-35; 사 5:22.
여러 견해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즉 ‘햄’의 잘못이 그의 애비보다 더 심각했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가인’의 범죄가 그의 아버지 ‘아담’보다 더 심각했던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두 경우 모두 범죄 이후의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갔다는 점이다. 즉 첫 번째 “타락”에 대한 심판은 대홍수로 그 정점을 맞이하였고, 두 번째 “타락”에 대한 심판은 ‘바벨탑’ 사건 이후 나라와 민족과 언어가 나누어지는 것이었다.
5.6. 제 4막: ‘노아’의 후손의 계보
제 4막은 또 하나의 긴 ‘톨레돗’으로서, 두 개의 전혀 다른 양식, 즉 계보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1) 나라와 민족의 계보(10:1-32); (2) <‘바벨’탑 이야기>(11:1-9). 그런데 이 두 부분은 다양한 민족과 언어의 기원에 대해서 상호 모순되는 설명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톨레돗’, 즉 “노아의 아들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라는 제목 안에 포함되어 있다.
첫 번째 단락 “나라와 민족의 계보”는 칠십 개 국가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들 모두는 이스라엘과 맺고 있었던 관계를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야벳’의 후손들(2-5절)은 이스라엘의 북방 민족으로서, ‘터키’, ‘그리스’, ‘키프루스’와 ‘그레데’ 지역에 살던 민족들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햄’의 후손(6-20절)들은 보다 많은 민족과 나라들을 포함하고 있다. ‘가나안’ 원주민(15-19절)을 포함하여 ‘아프리카’, ‘아라비아’,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주민들이 이에 속한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이스라엘은 이들 민족과는 좋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 반대로 ‘셈’의 후손들과는 그렇지 않았다. 우선 이스라엘 자신이 ‘셈’의 계보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11:10-26), ‘셈’과 연관이 있는 다수의 ‘아라비아’나 ‘아르메니아’ 족속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나라와 민족의 계보”에서 규칙적으로 반복해서 등장하는 표현이 있는바,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흩어졌다는 표현이 그것이다(5, 20, 31, 32절). 이 표현에 따르면, 이렇게 흩어진 종족들은 나름대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이렇게 된 데에는 무엇인가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아무런 암시도 없다.
그러나 두 번째 단락 <바벨탑 이야기>는 민족들이 흩어지고 다양한 언어가 생기게 된 원인에 대해서 전혀 다른 설명을 내놓고 있다. ‘바벨’은 ‘바벨론’으로서, “신의 문” 즉 “천국에 이르는 문”을 뜻한다. 실제, ‘바벨론’ 인들은 ‘피라밋’ 형의 ‘지구랏’(ziggurat) 탑(塔)이 아래로는 지하 세계에 닿아있고, 꼭대기에 있는 사원(寺院)은 하늘에 닿아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허세와 가식은 <바벨탑 이야기>를 통해서 여지없이 폭로되고 있다. 즉 탑의 꼭대기가 하늘에 닿기는커녕 너무 낮아서 하나님이 볼 수도 없을 정도였으며, 아래에서 인간들이 하는 짓을 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야 할 정도였다고 비꼬고 있다(11:5. 참고 사 40:22). ‘바벨’이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혼란”이며, 발음도 “바보”로 들린다. ‘수메르’ 설화에 따르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한 가지 언어, ‘수메르’어를 말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벨탑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고의로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각기 다른 언어를 말하도록 했으며, 그 결과 하늘에 오르겠다는 계획이 무산되도록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짓다 말고 버려진 ‘지구랏’(ziggurat) 탑이나 다양한 언어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하고 있다.
그동안 <창세기>는 ‘바벨론’적 세계관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곳에서는 ‘바벨로니아’적 허세와 교만에 대해서 보다 공개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바벨로니아’의 문명은 결코 위대하지도 않으며, 하나님과 가깝지도 않다. 오히려 이 문명이 보여주는 바는,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하늘에 오를 수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5.7. 제 5막: ‘셈’의 계보
다섯 번째 ‘톨레돗’의 ‘셈’의 계보는 <원 역사>(창 1-11)와 <족장 이야기>(창 12-50)를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계보는 앞선 ‘아담’의 계보(제 2막)가 10대에 걸친 이름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셈’에서 ‘아브라함’에 이르는 10대의 이름을 포함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수명이 이전보다 훨씬 짧아졌다는 점인데,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긴 수명이긴 하다. 이 다섯 번째 ‘톨레돗’을 끝으로 <창세기>의 두 번째 해설은 막을 내리고, 이어서 <창세기>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창세기 1>의 신학
1. 주제
<창세기> 1-11장의 신학적 주제와 관련해서 제 1장에서 언급한 내용을 약간 수정하여 여기서 다시 한 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참고. 제 1장):
<창세기> 전체를 언약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묶을 수 있을 것인 바, 제 1부의 <기원 이야기>(1-11장)는 언약의 배경 내지는 언약의 필요성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제 2부의 <족장 이야기>(12-50장)는 그 언약의 수립과 점진적인 성취(또는 미성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언약과 관련된 일련의 주제들, 즉 하나님, 인간, 죄, 은혜 등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죄-말씀(선언)-심판. <타락 이야기> ⇒ <가인과 아벨 이야기> ⇒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 ⇒ <대홍수 이야기> ⇒ <바벨탑 이야기>를 통해서, 죄와 말씀과 심판의 주제가 마치 신학적 윤회(輪回)처럼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다(Claus Westermann). 즉, 인간의 죄의 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는데, 그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결정에 대한 설명이 삽입된다.
죄-말씀-은혜-심판. 그러나 위 견해에서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가 있는바, 하나님의 은혜(또는 용서)이다(D. J. A. Clines).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의 말씀은 항상 선고와 심판 사이에 나타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도표).
각 이야기가 모두 같은 패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일반적인 공통점을 해치지는 않는다. 각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차이점을 지적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처음 두 범죄의 경우 범죄자는 개인인데 반해, 나머지 세 범죄의 경우는 단체(또는 공동체)이다. 그리고 처음 두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범죄자를 찾아 나서고 있지만, 나머지 세 이야기에서는 그냥 지켜보고 계시다. 둘째, 처벌의 대상과 내용이 매 이야기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직접 살펴볼 일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함. 이 견해는 ‘폰 라드’(von Rad)가 제시한 것으로서, <창세기> 1-11장의 구성을 순환적(循環的) 내지는 반복적인 것으로 보기 보다는 정점을 향해 나아가는 직선적인 것으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주제의 내용과 진행 방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인간의 죄악. ‘에덴’에서의 타락으로 시작된 ‘아담’의 범죄는 ‘가인’과 ‘아벨’, ‘라멕’, 하나님의 아들들, 그리고 대홍수에 이은 ‘바벨’탑의 반역을 통해서 점점 더 창궐하고 만연해 가고 있으며, 인간과 하나님의 분리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의 단순한 불순종에서 시작한 범죄는 ‘가인’에 이르러 충동적 살인으로 발전하게 되고, ‘라멕’의 시대에 가서는 무자비한 살인을 자랑하는 경지로 나아간다. 더 나아가 범죄는 이제 한 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인류 전체의 부패와 타락과 폭력으로 발전해 간다.
(2) 하나님의 반응.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역시 그 강도를 더해간다. 즉 ‘아담’과 ‘하와’는 단순히 자신들이 살던 동산과 경작지로부터 추방당하는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점차 인간의 수명이 짧아지다가 대부분의 인류가 멸절을 당하는 처벌로 확대된다. 종국에는 그나마 남은 인류마저 함께 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상호 간에 의사소통도 할 수 없는 지경까지 나아간다.
(3) 하나님의 은혜. 점증하는 인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도 그 도를 더해가고 있지만, 그럴수록 그분의 은혜 또한 더욱 크게 느껴진다. ‘아담’과 ‘하와’에 대한 보호를 약속하신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살인자 ‘가인’에 대해서도 아무도 그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조처하셨으며, 대홍수로 거의 멸절이 되다시피 한 인류의 보존을 위해서 ‘노아’의 가족을 남겨둔다. 다만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바벨탑 이야기>로서, 곳에서는 그분의 은혜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가 없다.
<기원 이야기>의 구성을 이처럼 진행적이며, 직선적으로 보는 데에는 일단의 이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첫째, 이를 통해서 <창세기> 1장과 나머지 장들(2-11) 사이의 관계가 보다 분명해 진다. 이 둘 사이는 일종의 정(正)과 반(反)의 관계에 있다. 서막에서 그리고 있는 바처럼, 인류의 창조를 절정으로 하는 하나님의 질서 있는 창조가 죄로 인하여 와해되고 소멸해 가다가, 대홍수(6장)와 ‘바벨’탑 사건(11장)에서 반 창조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제 1장이 순종에서 오는 축복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나머지 장들은 불순종의 저주를 보여주고 있다. 둘째, “족보에도 신학이 있다”는 선언이 가능해졌다. 예컨대, ‘아담’의 계보나 ‘셈’의 계보(4:17-26; 5; 11:10-26)는 죄와 은혜의 확산이라는 주제를 이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족보를 통해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생육하고 번성하라”가 계속 유효함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들 계보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통로의 기능을 하고 있는 셈이다(참고. 1:28; 4:1; 4:25; 5장에서 드러나는 반복되는 양식). 이와 동시에 계보는 하나님의 저주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예컨대, 세대를 거듭할수록 홍수 이후 인간의 수명이 점차 단축되고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예: 홍수 이전의 평균 수명 = 800-900세; ‘셈’의 수명 = 600세(11:10); ‘데라’의 수명 = 205세(11:32)). 홍수 이전에도 비슷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참고. 4장).
같은 맥락에서, 10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나라와 민족의 계보”에서도 신학적 의도를 찾을 수 있을까? 이 질문과 관련해서 관심을 끌고 있는 대목은 “나라와 민족의 계보”가 ‘바벨’탑 사건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논리적으로 다양한 종족과 언어가 온 땅에 퍼져갔다는 서술은 ‘바벨’탑 사건 이후에 위치해야하기 때문이다(참고. 10:5, 32, 18, 20, 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기록의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것은 어떤 다른 신학적 의도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참고, 1:28; 9:1).
창조-반 창조-재창조. 이 같은 입장 역시 선적인 구성으로 보고자 하는 견해를 반영하는 것이다(도표 참고):
<창세기 1>의 역사
<창세기(1)>의 역사라 함은 두 가지 영역에 대한 관심사를 말하는데, (1) 하나는 공동체와 저자의 역사적 배경에 관한 것이고, (2) 다른 하나는 이 책의 문학적 배경 즉 편집과 정경화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이 두 영역에 관해서는 <오경> 총론에서 충분하게 다루었다고 판단되어 이곳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참고. 14-29, 49-57 쪽).
나오는 말
<기원 이야기>는 처음 누구에게 필요한 것이었을까? 즉 의도된 독자는 누구였으며 의도된 저자는 누구일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서 <오경>의 배경에서 몇 가지 가능한 대답을 마련한 바 있다. <창세기(1)> 역시 <오경>의 한 부분으로 기능하고 있어, 특별히 다른 대답을 기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다만 현대 교회를 위한 교훈을 위하여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는 것으로 답변에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전 550년경의 유대 공동체를 위하여. ‘바벨론’ 포로 이후 ‘유대’ 공동체는 시대적 요청에 직면하게 된다. 즉 민족적 정체성의 확립과 ‘야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학적 정립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종교적인 생활을 강조하고 새롭고 질서 있는 ‘유대’ 공동체 창출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자는 메시지를 <기원 이야기>를 통해서 전하고 있다고 보인다. 새로운 ‘유대’ 공동체는 <에스라서>나 <느헤미야서>에도 볼 수 있듯이 배타적 민족주의, 율법이나 안식일과 예배 등을 극도로 강조하고 있다.
당시의 사제들이 보건대, 포로기 이스라엘은 마치 대홍수 때처럼 무질서와 혼돈과 방황의 시기였으며, 따라서 대홍수는 이스라엘이 반 창조의 절정에 놓여있던 시기였다. <창세기> 3장 이후 내려지는 일련의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은 왕조시대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민족적 죄악에 대한 의로운 심판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홍수 이후에도 살아남은 ‘노아’ 가족은 포로기 이후 살아남아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자들로서, 이제 하나님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조의 명령이 이들을 통해서 재창조의 명령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었다. 즉 그들은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해야 하는 소명을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주전 1000-900년의 공동체를 위하여. ‘다윗’ 이후 이스라엘은 정치, 문화, 및 경제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지만, 이에 따른 종교적 이완과 세속화 현상 역시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이에 화자는 현재 백성이 누리고 있는 제반 축복의 근원이 ‘야훼’ 하나님임을 밝히고, 그에 대한 충성과 책임을 강조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인간의 불성실로 하나님의 축복을 거의 상실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은 계속되고 성취될 것인즉, 국가적인 경각심과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메시지가 기원 이야기를 통해서 전달되었을 것이다.
신약 교회를 위하여. 현대 사회의 특징을 여러 가지로 언급할 수 있겠으나 세속화와 다원화 및 상대화를 빼놓을 수는 없다. 하나님의 실체와 속성, 우주와 생명과 인간의 기원과 그 의미 등에 관한 수많은 세계관들이 난무하며 대립하고 있는 세상 속에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고 있다. ‘이집트’와 ‘시내’ 산과 ‘가나안’과 ‘바벨론’을 두루 거치며 살아가야 했던 이스라엘이 겪었던 온갖 종류의 종교들, 미신, 거짓 철학들이 과학과 이성과 합리의 이름으로 그 모습과 형태를 달리한 채,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홍수의 혼란 속으로, ‘바벨’탑의 그 반역 속으로 동참시키지 못해 안달이다. <기원 이야기>는 이런 점에서 지극히 현대적이고 현실적인 내 자신의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연습과 토의
1. <창세기(1)>의 문학적 특징, 즉 장르(genre)와 구조(structure)와 문체(style)에 대하여 나는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을까?
2. <창세기(1)>과 고대 근동 문학 간의 유사점이나 차이는 무엇일까? 특히 창조와 홍수 이야기를 중심으로 논의해 보자.
3. <창세기(1)>의 신학적 기능은 무엇일까? <오경> 전체의 맥락 속에서 논의해 보자.
4. <창세기(1)>의 역사적 배경, 즉 저자와 공동체의 배경에 대해서 논의해 보자. 이를 위해서 <오경>의 역사적 배경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5. <오경>의 배경이라 함은 무슨 뜻인가? 이 책이 단 하나의 배경을 가진 것이 아니라, 양파껍질처럼 다수의 배경을 지니고 있을 수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6. 현대 독자들은 <창세기(1)>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즉 현대교회에서 <창세기(1)>은 어떤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참고한 책들
1. G. J. Wenham, Exploring the Old Testment (vol. one).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3.
2. Temper Longman III and Raymond B. Dillard,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ment. Grand Rapids: Zondervan, 1994, pp 1-37.
3. William S. LaSor (박철현 옮김), 구약 개관.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pp 92-112.
4. Temper Longman III, 어떻게 창세기를 읽을 것인가. 전의우 번역. IVP: 서울. 2006.
5. Temper Longman III, Old Testment Essentials:Creation, Conquest, Exile and Return.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14, pp 13-33.
6. Voctor P. Hamilton, Handbook on the Pentateuch (2nd ed.).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5, pp 19-80.
제 3장: 창세기(2)
3
창세기 (2)
(12-50장)
흔히 <족장 이야기>로 알려진 <창세기(2)>는 <창세기>의 핵심을 이루는 곳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소명(召命)을 받는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다(참고. 12:1-3). 문체(文體)도 <창세기(1)>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예컨대, <창세기(1)>이 긴 원역사의 기간을 개략적으로 비교적 빠른 속도로 진행했다면, 여기서부터 이야기의 진행 속도가 느려지면서, 다루는 내용도 다소 구체적이다. <창세기(1)>이 인류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을 다루었다면, 이곳에서는 한 가계 즉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 초점을 맞춘다. <창세기(2)>가 <창세기> 전체 분량의 80% 정도를 할애하면서까지 한 가계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화자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어렵잖게 파악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또한 ‘가나안’ 땅의 소유권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일련의 환상을 통해서 그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따라서, 화자에게 있어 <창세기> 12-50장은 <창세기>의 핵심을 이루는 지극히 중요한 곳이다.
<창세기(2)>의 주된 내용은 ‘이스라엘’의 조상(족장)들에 관한 “이야기”(narrative)로서, 세 개의 긴 이야기로 이루어져있다:
(1) 11:17-25:11<아브라함 이야기>
(2) 25:19-35:29<야곱 이야기>
(3) 37:1-50:26<요셉 이야기>
그리고 이들 이야기 사이에 두 개의 “계보”(genealogy)가 등장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다섯 개의 ‘톨레돗’(5막-9막)으로 이루어져 있다(도표 참고).
이 도표에서 알 수 있는 바처럼, <창세기(1)>과 <창세기(2)>는 그 형식에 있어 동일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 예컨대, 각 ‘톨레돗’의 표제(標題)에 등장하는 인물은 그 가계의 우두머리이며, 이야기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그의 후손들이다. 따라서 “이삭의 계보”(제 7막; 25-35장)에서 다루는 기간은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죽음에서부터(25:11) ‘이삭’의 죽음까지이다(35:29). 그러나 이 계보에서 정작 ‘이삭’ 본인의 활동에 대한 언급은 거의 전무하고(참고. 27장), 그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가 주요 활동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이 같은 양상은 ‘데라’의 계보(제 5막, 12-25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계보의 주인공은 ‘데라’가 아니라 그의 아들 ‘아브라함’이다(12-25장). 마지막 아홉 번째 ‘야곱’의 계보(37-50)는 ‘야곱’의 노년(老年)을 다루고 있지만, 주요 활동 인물은 그의 아들 ‘요셉’이다.
이들 세 이야기는 이처럼 그 형식에 있어서 유사할 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유사한 사건들이 매 이야기마다 등장하고 있어, 마치 시적 유사반복(類似反復)을 보는 느낌이다. 이뿐 아니라, 세 개의 이야기는 주제의 전개에 있어 직선적이며 진행적으로 나아가되 보다 심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도 하다(아래 내용 참고).
<창세기 2>의 문학
1. 양식
<창세기>의 다양한 문학 양식에 대해서는 제 2장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리고 <창세기(2)>의 주된 양식은 “이야기”(narrative)와 “계보”(genealogy)다. 이야기는 넓게는 <족장 이야기>로, 좁게는 “영웅설화”(英雄說話)로 분류함이 적절할 것이다. Ryken, L. 「문학에서 본 성경」. 유성덕 역.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3. 제 3장.
그러나 <성경>의 영웅설화는 기존의 고대 근동의 영웅설화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근동 설화. 고대 근동의 영웅설화는 주인공을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서 크게 세 가지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전기(傳記)나 자서전(自敍傳)의 형식을 빌려 다루는 방식이다. 이 속에는 등장인물에 대한 어떤 초자연적이거나 영웅적인 묘사가 없다. 이집트의 <Sinuhe>나 <Wenamun> 등과 같은 작품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둘째, <길가메쉬>와 같은 역사적 전설과 함께 다루는 방식이다. ‘길가메쉬’는 역사적으로 실존 인물이다. 그러나 이야기 자체는 그 인물의 사후(死後) 수 세기가 지난 시점에 기록되었고, 내용은 주로 저자의 상상에 의하여 주인공의 영웅적 행위로 가득 차있다.
셋째, 순전히 허구적 인물을 등장시키는 방식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Three Ox-Drivers of Adab>을 들 수 있다.
족장 설화. <족장 이야기>는 이중 어떤 범주에 속할까? 굳이 구분하자면, 처음과 두 번째 성격의 어딘 가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내용은 진지하며, 인물들은 삼인칭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기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족장 이야기>는 주인공들이 죽은 지 한 참 후에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이들 이야기가 전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물론 내용 속에는 기상천외한 전설적 요소들은 없다). <족장 이야기>를 전기로 보든, 자서전으로 보든, 분명한 사실은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모두 역사적 인물이지 가공의 인물들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점에서 영웅설화에 대한 ‘라이겐’(Ryken, L)의 정의가 도움이 될 것이다:
<영웅설화>는 주인공이나 영웅의 일생과 위업에 관한 이야기다. 흔히 문학적인 관점에서 영웅이라 함은 그가 속한 사회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사회적, 도덕적 규범이나 표준을 제시해 주는 그러한 인물을 말한다. 그래서 그는 대중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기도 하고, 선을 행할 능력을 갖춘 자이며, 그의 삶에 대한 뚜렷한 목적을 지닌 자라야 한다. 그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여러 가지 체험들은 통상 그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제반 갈등을 재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웅설화의 주된 구성(plot)은 그 영웅이 만나는 역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경에 대해서 그가 어떻게 반응하며, 무슨 동기로 그렇게 하며, 역경을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보여준다. 때로는 그 주인공과 정 반대 되는 인격을 지닌 조연을 등장시킴으로써 영웅의 자질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도 한다.
‘라이겐’(Ryken, L)에 따르면, 영웅설화는 등장인물들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주요 쟁점으로 부각시킨다:
(1) 인간에 대한 관점: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그의 목적과 의미는 무엇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2) 종교적 견해: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관점은 무엇인가?
(3) 사회에 대한 관점: 인간 공동체는 어떤 것인가? 사회에서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는 무엇이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4) 가치관에 대한 견해: 인생 최고의 가치는 무엇인가? 인격체(사람, 하나님, 자아, 한 개인)인가. 혹은 기관인가(국가, 교회, 가정), 혹은 추상적인 것인가(사랑, 진리, 이성, 질서, 규범 등등)?
<성경>의 영웅설화는 이러한 관점들에 대해서 그야말로 “성경적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설화 속의 영웅들을 결코 성경적 기준에 합당한 이상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들이 본질적으로 믿음의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외에는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을 지닌 우리와 꼭 같은 자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점에서 <성경>은 족장들에 대하여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족장 이야기>를 읽을 때 유념해야 할 사실이다.
2. 구조
구성의 원리. <창세기>의 전체적인 구조는 열 개의 ‘톨레돗’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창세기(2)>를 이루고 있는 구성상의 특징은 <창세기(1)>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즉 아래 세 가지 기본적인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Wenham, <창세기> 주석. 262-263쪽
(1) 직선적이고 진행적인 구성
(2)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구성
(3) 확장되고 심화되는 구성
첫 번째 특징은 전체적인 이야기의 전개가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의 순서로 연대기를 따라 진행되고 있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뒤이어 등장하는 인물의 아버지이며, 그 뒤에 등장하는 인물의 할아버지라는 점을 화자는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각 족장의 이야기마다 비슷한 사건이나 일화들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마치 시적(詩的) 반복과 같다 할 수 있다. 즉 각 족장은 그의 아버지가 경험했던 것과 흡사한 경험을 반복해서 겪고 있다. 그리고 이외 같은 족장 개개인의 체험은 훗날 ‘이스라엘’의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체험이 될 것임을 예고해주고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아브라함 이야기>의 이러한 반복적인 특성으로 <아브라함 순환>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1) 이 영웅들은 모두 자신의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12:1; 28:2; 37:28).
(2) 모두 자신의 친지나 형제들과 다투어야만 했다(13:7; 27:41; 37:4).
(3) 세 사람은 ‘이집트’로, 한 사람은 ‘그랄’(‘이집트’로 가는 길)로 내려가 살았다(12:10; 26:1; 37:28; 46:6).
(4) 두 족장의 아내는 ‘이집트’인의 유혹을 받았으며, ‘요셉’은 ‘이집트’인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다(12:14-16; 20:1-14; 26:1; 39:6-18).
(5) 두 아내 사이의 불화 때문에 갈등을 겪어야 했다(16:1-6; 29:31-30:8).
(6) 장자가 아닌 차남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된다(17:18-19; 25:23; 48:14; 49:8-12; 22-26).
(7) 신부를 우물가에서 만나게 된다(24:15; 29:9).
(8)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약속을 받는다-자녀와 땅과 축복(1:1-3, 26:2-5; 28:13-14).
(9)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을 이방인들이 인정한다(21:21-22; 26:28-29; 41:39-40).
그렇다면 족장들이 경험한 이러한 사건들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그렇지 않다. 특히 마지막 열 번째의 경우는 화자가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웬만한 가문에서는 소위 선산(先山)이라는 것이 있어 그곳에 선조들의 묘지를 만드는 것이 상례인데, 당시 가족 간의 연대가 강한 씨족사회의 경우 가족 구성원들을 한 장소에 묻는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매번 < 족장 이야기>마다 이 부분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것은 화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아브라함’이 동굴을 구입한 것은 자신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족 묘지를 구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반복적인 구성을 통해서 드러나는 신학적인 메시지는 무엇일까? 특히 인간이나 하나님에 대하여 강조하려는 바는 무엇일까?
세 번째 구성상의 특징은 두 번째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즉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새롭게 발전되고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새로운 내용이란 주요 등장인물들, 즉 하나님과 인간 및 이야기의 주제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창세기(1)>과 <창세기(2)>를 비교 분석해 봄으로써 분명해진다.
예컨대, 등장인물들의 내면세계(성격이나 인격 등)나 가족관계나 행동 등을 비교 분석해 볼 때, <창세기(1)>에서는 주인공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나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대홍수 이야기>의 경우에도 ‘노아’가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고, 의인으로 살았다는 기록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야기 전체의 연출자이자 동시에 출연자이기도 하다. 그는 등장인물들과 똑 같은 방식으로 보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창세기(2)>로 접어들면서 하나님은 점차 멀어져가는 느낌이다. 친밀하고 가깝게 느껴지던 존재가 소원하고 초월적인 존재로 느껴지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그가 멀어지는 방식은 이렇다. 즉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수시로 직접적이고 친밀한 대화를 나누지만, <야곱 이야기>에서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요셉 이야기>에 이르면 꿈속에서 간혹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인간들에 대한 묘사는 정반대이다.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야기의 순환이 거듭될수록 이들의 인간됨됨이나, 가족관계에 대한 묘사가 아주 상세하게 드러나고 있다. <아브라함 이야기>(12-25장)를 통해서 그가 어떤 유형의 인물인지 짐작케 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대할 수 있다. 물론 산발적인 몇 개의 일화만으로 ‘아브라함’의 인간성에 대해서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이야기가 ‘야곱’으로 나아가면(25-35), 그가 어떤 인물인지, 그리고 그의 가족관계, 결혼 후 그의 아내와 자녀와의 관계 등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요셉 이야기>에 이르면 이들 상호간의 관계에 대해서 보다 완전하고도 체계적인 정리를 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체 <족장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를 발견하게 된다. 다름 아닌 “하나님의 언약”(약속)이다. 각 <족장 이야기>는 이 주제가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그것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천편일률적이 아니라, 족장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칭송을 받기는 했지만, ‘이집트’에서 보여준 그의 행동은 실로 실망스러운 것이다.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피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아내를 양도했기 때문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치사하고 야비한 방법으로 형과 아버지를 속인다. 그러나 ‘요셉’은 이들 두 사람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견디기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의연하고 담대하게 대처해 나갔으며,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요셉 이야기>의 절정은 그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언약을 성취시킨다는 데 있다. <족장 이야기>를 읽을 때,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고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감상 포인트가 될 것이다.
3. 내용
3.1. 제 6막: <아브라함 이야기>
<아브라함 이야기>는 대략 20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것은 이어지는 다른 <족장 이야기>의 구성적 원리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하나의 순환적인 구성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 이야기>를 흔히 <아브라함 순환>으로 부르기도 한다:
1. 계보 소개(11:27-32)
2. ‘아브라함’의 소명과 첫 번째 여행(12:1-9)
3. ‘이집트’에서(12:10-20)
4. ‘아브라함’과 ‘롯’이 헤어지다(13:1-18)
5. ‘아브라함’이 ‘롯’을 구하다(14:1-24)
6. ‘아브라함’과의 언약(15:1-21)
7. ‘이스마엘’의 탄생(16:1-16)
8. 할례의 언약(17:1-27)
9. 천사의 방문(18:1-15)
10. ‘아브라함’과 ‘소돔’(18:16-33)
11. ‘소돔’과 ‘고모라’(19:1-29)
12. ‘롯’과 두 딸(19:30-38)
13. ‘아브라함’과 ‘아비멜렉’(20:1-18)
14. ‘이삭’의 탄생; ‘이스마엘’의 분리(21:1-21)
15. ‘아비멜렉’과의 언약(21:22-34)
16. ‘아브라함’의 시험(22:1-19)
17. ‘나홀’의 계보(22:20-24)
18. 매장지를 사다(23:1-20)
19. ‘리브가’의 결혼(24:1-67)
20. 결론(25:1-11)
‘히브리’식 이야기에서 독특한 구성상의 원리 중의 하나가 대칭구조(또는 교차대구)라고 소개한 바 있다(참고. <대홍수 이야기>). <아브라함 이야기>에서도 비록 느슨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이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는 처음과 마지막 두 장면은 마치 공명(共鳴)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2:2).
하지만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보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구조적 원리는 대칭구조보다는 앞에서 설명한 바 있는 세 가지 특징, 즉 (1) 직선적이고 진행적인 구성, (2)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구성, 및 (3) 확장되고 심화되는 구성이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나름대로 주제가 있지만, 동시에 이들 중 몇 개의 에피소드들은 보다 큰 하나의 단위를 이루고 있어, 원래는 이들 자료들이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이야기 단위라고 가정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전체를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나 구성상의 원리가 있다는 점이다. 이 원리를 모르면 각각의 에피소드는 ‘아브라함’ 생애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단순히 수집해 놓은 것에 불과할 뿐이다.
에피소드 1. <아브라함 이야기>는 그 서론에서 ‘데라’의 계보를 소개하면서 이야기 전체의 중요한 등장인물들인 ‘아브라함’과 ‘사라’와 ‘롯’을 소개하고 있다. ‘사라’의 가장 큰 문제는 얘기가 없다는 사실이며,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로서 ‘롯’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 양자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이러한 추측이나 가정을 안고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에피소드 2/3. 이어지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그가 살던 땅을 떠나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즉시 ‘아브라함’은 아내와 ‘롯’과 함께 그동안 살던 땅, ‘하란’을 버리고 ‘가나안’으로 향한다. 고대사회에서 나의 한 개인의 정체성(正體性)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가족과 족속과 고향이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이 받은 소명(召命)은 새로운 정체성을 향한 순례라 해야 할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 때 하나님으로부터 세 가지(또는 네 가지) 중요한 약속을 받는다. 바로 이들 약속이 <아브라함 이야기> 전체를 지배하는 구성의 원리이자, 핵심적인 주제가 된다. 따라서 간혹 이 약속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에피소드에서조차 핵심주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과연 그 약속은 무엇일까? 여기서 화자는 이 땅이 곧 약속의 땅이라고 말한다(12:7). 그러나 그의 여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땅에 가뭄이 와서 그를 ‘이집트’로 몰아내는데, 이것은 후에 그의 손자 ‘야곱’도 똑같이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낯선 곳으로 간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로 말미암아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급기야는 비겁한 행동을 보이게 된다. 그동안 보여 왔던 믿음과 순종의 행동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연약한 모습이다. 이 같은 모습을 앞으로도 한두 번 더 드러내 보일 것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그 때마다 독자들은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과연 ‘사라’는 이방인과 잠자리를 같이 할 것인가?” 이런 점에서 두 번째 에피소드는 이야기 전체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
에피소드 4. 땅과 재물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되어, 급기야는 두 사람은 갈라서게 된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는 이야기를 통해서 독자들은 또 한 번 중요한 질문을 만난다: “이제부터 과연 누가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될 것인가?” 그 동안 ‘롯’이 ‘아브라함’의 명실상부한 계승자요 상속자였기 때문에 이 질문은 한층 그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에 대한 궁금증 때문일 것이다.
에피소드 5.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곧바로 이어지는 왕들의 전투에서(14장) 드러난다. 우선 이 전투를 통해서 ‘아브라함’은 그 지역 정치, 외교 무대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서 일종의 군사행동을 취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알 수 있는 사실은 ‘롯’이 ‘아브라함’의 상속자의 대열에서 제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그가 삼촌을 떠날 때부터 이미 결정된 것이긴 하다(13장). 왕들의 전투는 ‘아브라함’이 속한 쪽의 승리로 끝난다. 그런데 이야기는 난데없이 제사장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 대목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12:3)과 과연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참고. 19절)?
에피소드 6. 일종의 막간(幕間)과도 같은 <멜기세덱 이야기>가 끝나면, ‘아브라함’의 상속자에 대한 문제가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이번에는 ‘아브라함’ 자신이 직접 그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이 15장의 핵심 내용이다. 그의 질문과 그가 들은 대답은 무엇일까?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의 분위기로 볼 때, 하나님의 대답은 약속의 수준을 넘어 언약의 수준으로 격상되고 있다. 후손에 관한 이 언약은 앞으로 중요한 이슈로 부각될 것이다.
에피소드 7. 불임(不姙)의 ‘사라’! 그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남편에게 나름대로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16장). 당시의 관습 상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그녀의 제안이 무엇인지 익히 알려져 있다. ‘아브라함’도 동의하였고, 결국 ‘사라’의 몸종 ‘하갈’이 대신 후손(?)을 낳게 된다. ‘이스마엘’이다. 그런데 ‘사라’의 제안은 해결책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뿌리 깊은 문제를 배태시킨 것이었다. 이 제안을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고 저주한 자가 다름 아닌 제안자 자신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에피소드 8/9. 하나님도 ‘이스마엘’은 약속의 후손이 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단언하신다. 그런 점에서 17-18장은 후손의 문제와 관련해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아브라함 언약”과 관련해서 이곳에서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확인해 볼 일이다. 그리고 18장은 ‘아브라함’을 방문하는 세 천사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새롭게 갱신된 언약을 재확인해주고 있다. 이 점이 17장과 18장이 연결되는 방식이다. 언약의 후손은 다른 사람 아닌 ‘사라’의 몸에서 난 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언제 태어날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후손에 관한 한, 이전보다 훨씬 구체적이 되었다. 그러나 ‘사라’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당연히 믿을 수 없다는 태도다. 하나님은 ‘사라’를 나무라시면서, 그녀가 아이를 생산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두 번에 걸쳐 확인시켜주고 있다.
‘아브라함’의 나이 이제 99세, 그 동안 ‘아브라함’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해 왔다. 그러나 이곳에 이르러 이야기는 흐름이 느려지고, 내용도 주제로부터 일탈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것이 오히려 독자들의 마음을 궁금하게 하고, 긴장하게 하는 효과를 지닌다: “과연 언제쯤 언약이 후손이 탄생할까?” “언제 하나님의 약속은 과연 언제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인가?”
에피소드 10/11/12. 하지만 천사들이 ‘아브라함’을 방문하는 또 다른 목적이 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예고해 주기 위함이다. ‘아브라함’이 과연 어떤 인물이기에 하나님은 그분의 계획을 그에게 알리고 싶은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아브라함’이 누리고 있는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이다. 누구나 비밀을 함부로 털어놓지 않는 법.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가 바로 그와 같은 특별하고도 친밀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노아’도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 즉 “대홍수”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대홍수 이야기>와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닮은 데가 많다. 하나님은 ‘노아’를 “의인”으로 대했던 것처럼, ‘아브라함’ 역시 동일하게 대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간청을 끝까지 경청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은, 그 도시에 ‘아브라함’과 같은 의인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의미이다. 그나마 ‘롯’과 그의 가족이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의 기도, 즉 의인의 간구 때문이었음을 화자는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구사일생 피신한 ‘롯’이 그의 두 딸과 함께 보여주는 행동은 그가 이제 더 이상 ‘아브라함’의 상속자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상실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가 갖는 예표적(豫表的) 기능을 말하자면, 이 땅이 사백 년 후에 ‘이스라엘’의 후손들에 의해 멸망당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에피소드 13. 무대는 다시 ‘아브라함’과 ‘사라’를 보여주고 있다(20장). ‘사라’에게는 여전히 아이가 없다. 오히려 언약은 위기를 맞고 있다. ‘사라’가 ‘그랄’의 왕 ‘아비멜렉’의 규방으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자는 누구도 ‘사라’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이방인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꾸짖고 훈계하는 장면은 참으로 해학적(諧謔的)이다. 왜냐하면 이 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이 다름 아닌 ‘아브라함’이기 때문이다. 의인이 죄인으로부터 훈계와 꾸지람을 듣는 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간구 하던 의인 ‘아브라함’은 어디 갔다는 말인가? 소금이 그 짠맛을 잃어버린 결과이리라.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그 결과 ‘아비멜렉’과 그 지역에 임신하지 못한 여인들이 자식을 낳을 수 있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사라’를 위하여 기도한다면 어떻게 될까?
에피소드 14/15. 오래 동안 질질 끌어왔던 후손에 관한 약속은 마침내 실현을 보게 된다(21장). 하나님께서 ‘사라’를 찾아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삭’의 출생은 또 다른 갈등의 시작을 의미했다. ‘이스마엘’ 때문입니다. 갈등과 분쟁은 극에 이르며, ‘하갈’과 ‘이스마엘’이 떠남으로써 진정된다. 그리고 ‘이삭’은 그 모든 약속의 정당한 계승자가 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선택과 분리”의 모티브가 등장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간의 언약에 에피소드는 짧기는 하나, <창세기>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를 담고 있다. 무엇일까?
에피소드 16/17/18. 이야기는 급진전하면서 절정으로 치닫고,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른다(22:1-19). 그 동안 ‘아브라함’이 누린 모든 축복의 공급자였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도리어 큰 재난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축복을 빼앗아 가겠다는 것이다. ‘이삭’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결말과 교훈에 대해서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이제 ‘이삭’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홀’의 계보(22:20-24)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즉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이 계보에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라’가 죽고, ‘아브라함’은 그녀의 매장지를 위해 ‘맥벨라’ 동굴을 구입한다(23장). 물론 이 동굴은 ‘사라’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은 물론 ‘이삭’과 ‘야곱’의 묘지도 될 것이다.
에피소드 19/20.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남은 한 가지 숙제가 있다면, ‘이삭’의 아내를 구해 주는 일이다(24장). 그런데 이야기가 필요 이상으로 길고 상세하다. 물론 <창세기>를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를 위함이기도 하다.
결론. 지금까지 <아브라함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주인공의 모습은 대체적으로 후손들의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 예컨대, 그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순종하고 따른다(참고. 12, 17, 22장). 그리고 가족 간의 분쟁이나 갈등도 원만하고 평화적으로 해결한다(13, 21장). 또한 ‘소돔’이나 ‘아비멜렉’과 그 가족을 위하여 간구하는 중보자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18, 20장). 더 나아가 타인의 불행을 통하여 금전적인 이득을 취하여 하지도 않고(14장), 아내의 매장지를 구하기 위하여 겸손하고 예의바르게 땅의 주인과 거래를 하는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아들의 신부 감을 구하기 위해서 보여주는 그의 태도 또한 후대의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23, 24장).
하지만 때때로 ‘아브라함’은 독자들을 충격에 빠뜨리기도 한다. 자기 아내 ‘사라’를 두 번씩이나 누이라고 거짓말을 하여, 이로 인해서 화(禍)를 자초하게 된다. 즉 그 지역 왕이 그녀를 데려 아내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12, 20장). 또 한 번은 대리모(代理母)를 통해서 후계자를 얻는 일에 동조하기도 했다(16장). 그의 손자 ‘야곱’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기 위하여 형과 아버지를 의도적으로 속여 빼앗았으며, 자신의 딸 ‘디나’가 지역 유력 인사로부터 강간을 당했을 때,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복수를 꾀하는 아들들을 오히려 꾸짖는다.
과연 <성경>의 화자들은 오늘날 독자들과 같은 윤리ㆍ도덕의식을 가지고 있기나 한 것일까? 사실 대부분의 <성경> 이야기에는 등장인물에 대한 윤리ㆍ도덕적 평가가 없어 이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을 하기가 쉽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일부 작가들은 고대의 독자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오히려 존경하였을 것이라고 가정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 화자의 입장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서가 있다. <창세기>의 <서막>이 그 증거다. 즉 이곳에서 보여주고 있는 세계는 조화롭고 풍요로운 세상이다. ‘아담’과 ‘화와’와 짐승들은 상호 완벽한 평화를 누리고 있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다. 그러나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그리고 있는 세상은 이와는 완전히 대조적이고 반대되는 상황에 놓여있다. 과연 이 둘 중 어떤 세상이 화자가 그리고자 하는 이상향인지는 불을 보듯 훤하다. 사실 ‘야곱’의 속임수는 이후 그의 인생에 씻을 수 없는 비극적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화자 자신의 평가가 무엇인지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하겠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야곱’이 겪었던 것과 같은 참담한 후유증은 경험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잘못된 행동으로 그의 유일한 희망 즉 ‘이삭’의 출생이 늦추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자신이 희망하던 대로 마무리되었다. ‘히위’족속과의 오랜 힘든 협상 끝에 아내 ‘사라’의 매장지를 법적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이 밭은 그가 약속의 땅에서 획득한 첫 번째 부동산이 되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충실한 종을 보내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해보도록 했다. 그리고 이 종은 맡은 일에 놀라울 정도의 성공을 거둔다. 그가 찾은 처녀는 주인 ‘아브라함’이 원하던 가문(家門) 소속이었고, 아름다우며, 활동적이고, 그리고 결혼을 위하여 기꺼이 그를 따라 나설 의사를 보였다. 이 종의 성공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의 안전을 담보해주는 쾌거였던 것이다.
3.2. 제 7막: <이스마엘 계보>
제 7막은 아주 짧아서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쉽게 무시해버릴 수도 있다. ‘이스마엘’도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며, 이들 지파는 ‘아라비아’ 지역에 흩어져 살았다. 물론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식은 아니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조상이 될 수는 없었지만,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만은 분명하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의 일부를 물려받을 자격은 있었던 것이다. <창세기>에서도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창 16:12)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21:18하)
‘이스마엘’의 계보(25:18)는 이 약속의 성취를 확인해주는 것이다. 화자가 ‘이스마엘’의 계보를 보여주는 또 다른 의도가 있다. 즉 이처럼 상대적으로 미미한 약속도 성취되었다면, ‘이삭’의 후손들에 대한 주된 약속들은 말할 것도 없이 분명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확인해 주고자 함이다. 곧바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큰 이야기, <야곱 이야기>(제 8막)가 이 약속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하지만 ‘이스마엘’의 계보가 ‘야곱의 계보’에 앞서고 있는 것은 <창세기>의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다. 즉 선택된 계보가 그렇지 않는 계보에 앞서고 있는 패턴이 그것이다: ‘가인’의 계보가 ‘셋’의 계보를 앞서도 있고(창 4-5장); ‘야벳’과 ‘함’의 계보가 ‘셈’의 계보에 앞서 있으며(창 10-11장); ‘에서’의 계보가 ‘야곱’의 계보에 앞서 있다(창 36-37장).
3.3. 제 8막: 이삭의 계보-<야곱 이야기>
<창세기>의 제 8막(幕) <이삭의 계보>는 그 범위를 다음 두 구절 사이에 포함된 이야기로 정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25:19)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36:1)
<이삭의 계보>에서 주인공은 ‘이삭’이 아니라 그의 아들 ‘야곱’이다. 이점은 <창세기> 화자가 다른 계보에서도 그대로 채택하고 있는 형식상의 원칙이기도 하다. 즉 제 6막 <데라의 계보>는 <아브라함 이야기>로 보아야 할 것이며, 제 10막 <야곱의 계보>는 <요셉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각 계보를 실제 주인공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시작하는 것은, 아버지가 한 가계의 실질적인 가족의 우두머리로서 이야기의 주인공과 함께 생존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야곱 이야기>에서도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 ‘이삭’이 살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35:29).
그렇다면 <야곱 이야기>와 <요셉 이야기>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야곱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야기>(11:27-25:11) 및 <요셉 이야기>(37:2-50:26)와 함께 <족장 이야기>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고 있다. 이들 세 이야기의 구성의 원리에 대해서는 이미 밝힌 바 있듯이, 일련의 유사한 공식을 따르고 있다(참고. 제 6막). 특히 처음 두 이야기에서 더 많은 공통점과 유사점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요셉 이야기>는 나름대로 독특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 이야기>는 별개의 독립된 이야기 단위가 아니라, <야곱 이야기>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요셉 이야기>는 <야곱 이야기>의 속편(續篇)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사실 두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야곱-요셉 이야기>로 본다면, <야곱 이야기>를 제 1부로, <요셉 이야기>를 제 2부로 볼 수 있다. 이야기의 제 1부는 ‘야곱’과 ‘에서’가 그 어미 자궁에서 다투는 이야기로 시작하였다가(25:19-22), 제 2부는 ‘야곱’의 유언과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47:29-50:17). 따라서 두 이야기는 한 편의 통일된 이야기로 보아 크게 틀림이 없다. 이렇게 볼 때 <창세기>는 전체 분량의 절반 이상을 ‘야곱’의 생애를 기술하는데 할애하고 있는 셈이다. 화자가 ‘야곱’의 생애를 이처럼 비중 있게 다루는 것은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유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야곱 이야기>와 <요셉 이야기>를 하나의 이야기 단위로 보는 데에는 또 다른 근거가 있다. 두 이야기의 등장인물 사이에 갈등과 분쟁을 다루는 방식이 일관된 흐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갈등하고 있는 두 진영은 다름 아닌 ‘레와’와 ‘라헬’ 본인과 두 사람의 자식들이다. 이들 사이의 갈등은 두 이야기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두 이야기에서 도입하고 있는 모티브 또한 동일한 “속임수”의 모티브이다. ‘야곱’이 염소 털을 이용해서 아버지 ‘이삭’을 속였으나(27:9-17), 나중에 그의 자식들의 염소 피를 이용하여 그를 속인다(37:31).
두 이야기가 이처럼 반복적이고 순환적인 구성을 보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직선적이고 진행적인 구성 또한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야곱 이야기>가 ‘야곱’과 그의 자식들 간의 갈등으로 끝나고 있는 반면에, <요셉 이야기>는 가족 간의 갈등이 치유되고 화해하는 모습으로 끝맺고 있다. <야곱-요셉 이야기>가 <창세기>의 나머지 이야기들에 비해서 탁월한 점은 등장인물들에 대한 성격이나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는 점이다. 이처럼 두 이야기는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측면에서 일관성과 유사성을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어, 하나의 이야기로 취급함에 있어 무리가 없다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이야기를 둘로 나누어 서술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둘 사이에 <에서의 계보>(36:1-37:1)를 삽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추측건대 <창세기> 전체의 구조나 형식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계보”와 “비 이스라엘의 계보”가 지그재그(zigzag) 형식으로 번갈아 나타나게 된다:
(1) 제 6막: <데라의 계보: 아브라함 이야기>(11:27-25:11)
(2) 제 7막: <이스마엘의 계보>(25:12-18)
(3) 제 8막: <이삭의 계보: 야곱 이야기>(25:19-35:29)
(4) 제 9막: <에서의 계보>(36:1-37:1)
(5) 제 10막: <야곱의 계보: 요셉 이야기>(37:2-50:26)
그리고 세 개의 주요 <족장 이야기>는 반복과 순환, 그리고 심화와 발전이라는 구성의 공식을 따라 <오경>의 주제를 강화해 가고 있다. 동시에 <야곱 이야기>와 <요셉 이야기>는 각 이야기 속에 작은 주제들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 주제들은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보듯(12:1-3), 하나님의 계시로 드러난다. <야곱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신탁은 쌍둥이의 탄생과 각자의 운명에 관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25:23)
<야곱 이야기>는 결국 두 아들의 갈등과 분쟁에 관한 이야기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쌍둥이는 어미의 뱃속에서부터 다투기 시작하여, 태어날 때에는 동생 ‘야곱’이 먼저 나오는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으며, 성장해서는 형을 속여 장자 권을 빼앗는다. ‘에서’의 복수심에 불타는 분노로 ‘야곱’은 ‘바단-아람’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20년을 살아야만 한다.
<요셉 이야기> 역시 그의 장래에 관한 계시로 시작하고 있다. 그 유명한 두 차례의 꿈을 말하며, 꿈의 요지인 즉은 ‘요셉’의 아버지와 형들이 그에게 머리를 숙일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 계시는 결국 46장에서 성취를 보게 되는데, 그가 ‘이집트’의 총리로 있을 때 가족들이 그를 만나러 ‘가나안’에서 내려왔을 때다.
이처럼 세 <족장 이야기>가 모두 서두에서 하나님의 계시로 시작하고 있는 것은 끊임없는 하나님의 선택과 섭리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이긴 하지만 여전히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시고 이루시는 하나님!
<아브라함 이야기>(제 6막)가 다소 느슨하기는 하지만,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음을 보았는데, 이곳 <야곱 이야기>(제 8막)는 보다 뚜렷하게 그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즉 13개의 장면이 아름다운 교차대구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대홍수 이야기>의 구조와 매우 유사하다:
대칭 구조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는 장면은 C, D, E, E1, D1, C1이다.. 우선 ‘야곱’이 ‘에서’를 만나 축복해 주고 있는 장면은(C1)(33:3), 20년 전 ‘에서’가 ‘야곱’을 축복해주던 장면과(C)(27:29) 대칭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D와 D1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를 만나고 있는데, 한번은 그가 ‘가나안’을 떠날 때였고, 또 한 번은 그곳으로 되돌아올 때였다. 또한 그가 삼촌 ‘라반’을 만나고 헤어지는 두 장면(E와 E1) 역시 뚜렷한 대칭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가 결혼하는 장면과 ‘라반’을 속이는 장면(F와 F1) 사이에는 어떤 뚜렷한 유사점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두 장면 모두에서 일종의 계략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기는 하다. 즉 ‘라반’은 속임수에 가까운 계략으로 ‘야곱’과 ‘레와’의 결혼을 성사시켰는가 하면, 후에 ‘야곱’은 역시 계략으로 ‘라반’이 그에게 임금에 해당하는 대가를 치르게 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리고 장면 B와 B1은 공통적으로 이스라엘과 ‘가나안’ 족속 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두 장면에서 뚜렷하게 대조를 보이고 있는 것은, ‘이삭’이 이들 족속과 평화스러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야곱’은 정반대로 적대적이며 갈등 관계에 있다. 처음과 마지막 두 장면은(A와 A1) 가장 느슨한 관계에 있지만, 처음과 마지막으로 두 형제가 나란히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유사성을 찾을 수는 있을 듯하다.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중심 무대에서(G) ‘야곱’의 자식들이 태어나는 이야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라헬’에게서 한 아들이 태어나는 장면은(30:22-24) 전체 <야곱 이야기>의 전환점을 이루는 곳이다. 이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야곱’은 삼촌에게 귀향을 뜻을 밝히며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한다(30:25). 물론 ‘라반’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이를 거부하지만, ‘야곱’은 이제야말로 (독립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일한 아내로 생각하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아들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장면이 이야기의 전환점을 이룬다는 사실은 <대홍수 이야기>의 전환점과 비교해 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두 장면 모두에서 역사와 인간의 대소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개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8:1상)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30:22상)
3.4. 제 9막: 에서의 계보
<창세기> 36장은 <창세기> 내에서 가장 긴 장(章) 중의 하나로서, 내용도 오직 ‘에서’의 족보만을 다루고 있다. ‘에서’의 후손, 즉 ‘에돔’족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주변적인 위치에 그칠 뿐인데, 화자가 이처럼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다. ‘에서’의 족보는 ‘이스마엘’의 족보(25:12-18)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더 길고 상세하다. 더 나아가 그 형식도 지극히 이례적이다. 즉 이곳에서 화자는 ‘에서’의 족보를 두 번에 걸쳐 반복 소개하고 있다: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36:1)
“세일 산에 있는 에돔 족속의 조상 에서는 이러하니라”(36:9)
‘에서’의 계보를 이처럼 상세하게, 그리고 두 번 반복해서 다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에돔’과 이스라엘 간의 각별한 관계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즉 ‘에돔’ 족속은 ‘에서’의 후예들로서, 주변의 여타 족속들보다 훨씬 더 밀접하게 이스라엘과 애증(愛憎)의 역사를 형성해 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하여 화자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성경>은 ‘에서’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어떤 진단을 내리고 있는가?
범위. ‘에서’의 계보는 열 번의 계보(톨레돗) 중 아홉 번째이다: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36:1). 본문의 시작은 예의 친숙한 ‘톨레돗’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특기할 만 한 점은 본문의 중간(9절)에 거의 동일한 표현이 또 한 번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참고. 9절). 마지막 ‘톨레돗’은 “야곱의 계보”로서 37:2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아홉 번째 ‘톨레돗’의 범위는 자연스럽게 36:1-37:1이 된다. 따라서 본문의 결론은 마지막 구절 속에 있다: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37:1). 이 구절은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36:8)와 상호 균형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구조. 본문의 구조는 열 개의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다:
1.제목(1절)
2.‘에서’의 결혼(2-5절)
3. ‘세일’로 간 ‘에서’(6-8절)
4. ‘에서’의 후손들(9-14절)
5.‘에서’의 후예: 족장들(15-19절)
6.‘호리’ 족속 ‘세일’의 후손(20-28절)
7.‘세일’의 후예: 족장들(29-30절)
8.‘에돔’의 왕들(31-39절)
9.족장들(40-43절)
10.‘야곱’의 행적(37:1)
내용과 형식. 본문 속에는 “다양한” 자료가 혼재해 있으며, 동시에 동일한 자료가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두 번째 단락(2-5절)은 ‘에서’의 세 아내와 다섯 아들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네 번째 단락(9-14절)은 이를 다시 반복해서 보여주면서 이번에는 ‘에서’의 첫 두 아들에게서 난 손자들의 이름을 더하고 있다. ‘에서’의 후손들에 관한 기록은 다섯 번째 단락(15-19절)에서 또 한 번 등장하고 있지만, 이번에는 ‘에서’의 자손 중 “족장”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에서’의 세 번째 아내의 자식들에게서 난 자손들이다. 이어서 여섯 번째 단락(20-28절)과 일곱 번째 단락(29-30절)은 모두 ‘세일’의 자손들에 관한 기록인데, 차이가 있다면 여섯 번째 단락이 ‘세일’의 일곱 아들과 스무 명의 손자들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에 비해, 일곱 번째 단락은 ‘세일’의 자손들 중 “족장”들만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덟 번째 단락(31-39절)과 아홉 번째 단락(40-43절)은 각각 ‘에돔’의 여덟 왕과 ‘에서’에게서 나온 열한 명의 족장들을 언급하고 있다.
화자는 왜 이처럼 ‘에서’ 곧 ‘에돔’ 족속에 관해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을까? 이들 족속이 혈연적으로 이스라엘과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으며, 한 때는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있기도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제외하고 나면 특별한 이유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창세기>의 구조적 틀 안에서 보자면, ‘에서’의 족보가 이곳에 있어야 할 당위성은 충분하다. <창세기>의 열 개의 계보 중에서 마지막 네 개가 어떻게 상호 연결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면, 그 당위성을 쉽게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네 개의 계보가 연결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즉 선택된 백성에 관한 긴 이야기가 선택받지 못한 백성에 관한 짧고 간단한 기록에 이어서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화자의 신학적 의도가 무엇이든 ‘에서’의 계보가 이곳에 있어야 할 문학적 당위성은 충분하다 할 것이다:
일곱 번째 계보: ‘이스마엘’의 계보(25:12-18)
여덟 번째 계보: ‘이삭’의 계보(25:19-35:29)
아홉 번째 계보: ‘에서’의 계보(36:1-37:1)
열 번째 계보: ‘야곱’의 계보(37:2-50:26).
자료와 편집. 본문의 또 다른 형식적 특징, 즉 유사(類似) 자료의 “반복”에 관해서는 자료설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과연 언제 여러 전승들이 하나의 본문으로 편집되었는지에 관해서 알 길이 없으며, 본문 속에 상충되어 보이는 기록들에 관해서도 과연 고대 편집자나 당시의 독자들이 오늘날의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인식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확인할 길은 없다. 본문 안에 내용적으로 상충되거나 모순되는 부분이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 혹자는 서로 다른 배경을 반영하거나 대변하는 일련의 “에돔 전승”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R. R. Wilson). G. Wenham, 335쪽(참고도서 1).
다른 배경이라 함은 다른 “삶의 자리” 즉 다른 “공동체”나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이 견해가 옳다면, 당연히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첫째, 이들 전승들이 각기 다른 시대에 존재하던 것들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들 자료들을 다루는 후대 편집자들은 각 자료가 실제 속해 있던 공동체 내에서는 정확 무오(無誤) 했을 것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상이한 자료 간의 모순이나 충돌에 대해서는 고려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둘째, 그리고 일견 상충되거나 모순되는 계보의 기록들이 서로 다른 자료나 구두(口頭) 전승에 속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들 자료 모두 동 시대에 속해 있던 것들로서, 같은 자료나 전승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는 본문에 대한 자료비평을 하고자 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관점이기도 하다. 대개 계보는 그 내용이나 형식에 근거해서 볼 때, <사제 전승>으로 구분하지만, 본문에서 보듯이 다양한 자료가 혼재해 있기 때문에, 본문 전체를 <사제 전승”>로 구분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예컨대, ‘에서’의 아내들의 이름을 담고 있는 아래 두 구절도 흔히 <사제 전승>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본문의 기록(36:2-3)과는 다소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36:2-3)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니(26:34)
이에 에서가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본처들 외에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딸이요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하였더라(28:9)
이 같은 차이나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특히 본문의 두 번째 계보(9-43절)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후자의 질문과 관련해서 학자들은 두 가지 정도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즉 이 본문을 “사제 기자”가 사용한 자료로 간주하거나, 또는 후대의 편집적 삽입으로 간주하거나이다. 그러나 두 선택 사이에서 어떤 쪽을 취할 것인가는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로 남아있다. 두 번째 계보(9-43절)의 자료나 편집과 관련해서 다양한 견해가 알려져 있다: G. Wenham, 335-336쪽(참고도서 1).
두 번째 계보에 대한 역사 비평의 연구 결과가 어떻든 이 단락은 그 자체로서 아주 정교한 하나의 단위임에 분명하다(도표 참고).
이 단락은 다시 세 개의 작은 단위로 나눌 수 있으며, 각 단위는 후손들(또는 왕들)의 목록과 뒤이어 족장들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1) 10-14절//15-18절; (2) 20-28절//29-30절; (3) 31-39절//41-43절. 그리고 이 단락의 큰 제목을 담고 있는 9절의 내용은 43절의 간기(刊記)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
3.5. 제 10막: <요셉 이야기>
단락과 범위. <창세기>의 열 번째이자, 마지막 계보의 시작과 끝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
야곱의 계보는 이러하니라(37:2)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50:26)
형식과 구조. 알다시피 전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야곱’이 아니라 ‘요셉’이다. 이야기의 내용만을 근거로 했을 때, 열 번째 계보의 적절한 제목은 <요셉 이야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이삭의 계보>가 그 내용에 있어 <야곱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점은 <창세기> 화자가 다른 계보에서도 채택하고 있는 이야기 구성상의 원칙이라는 점을 앞에서 수차례 설명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 이야기>는 별개의 독립된 이야기 단위가 아니라 <야곱 이야기>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더 정확하게는 <야곱 이야기>의 속편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즉 두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 <야곱-요셉 이야기>로 볼 때, <야곱 이야기>는 제 1부, 그리고 <요셉 이야기>는 제 2부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참고. 제 8막). 물론 <요셉 이야기>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듯이,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다른 <족장 이야기>들에 비해 가장 짜임새가 있고 일관성이 있어, 한 편의 단편 소설로 꼽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아홉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으며(도표), 이중 두 쌍으로 이루어진 여섯 개의 에피소드는 마치 두 개의 연(聯)이 시적 반복을 이루고 있는 형식이다: ABC 및 A’B’C’.
이야기의 구성상의 원리는 직선적이며 진행적이다. 이는 <오경>의 주제가 점진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제란 <창세기>를 관통하는 “아브라함 언약”이다(12:1-3). 이 언약의 핵심은 “땅”과 “후손”과 “축복”에 관한 것으로서, 특히 후손에 관한 부분이 이야기의 핵심을 이룬다. 예컨대, 이집트에서 총리가 된 ‘요셉’을 통해서 기근으로 멸절의 위기에 내몰린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보여준다. 이 일은 우연히 일어난 것도 아니고, ‘요셉’과 같은 인간의 지혜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 나중에 ‘요셉’ 스스로 고백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섭리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사실 ‘요셉’의 역할은 이야기의 벽두에 그의 꿈 이야기에서 이미 예고되고 있다. 꿈의 내용인 즉은 그의 형제들과 부모가 자기에게 절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이 꿈은 42-47장 사이(A’B’C’)에서 성취된다. 이점에서 47장을 <요셉 이야기>의 결론으로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유다와 다말 에피소드>(38장)와 <야곱과 요셉의 말년>(48-50장)에 관한 이야기는 원래 <요셉 이야기>에는 속하지 않았던 자료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입장은 화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이다.
예컨대, ‘요셉’의 꿈 이야기(37장)와 그의 꿈이 성취되는 것에 관한 본문(39-47장)(도표의 ABC/A’B’C’에 포함된 본문) 간의 상호 관계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처음 세 개의 에피소드(A/B/C)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요셉’과 함께 하셨는지를 보여준다. 첫 번째 에피소드(A)는 ‘요셉’이 ‘보디발’의 집사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보여준다(39:1-20). 두 번째 에피소드(B)는 그가 죄수의 신분이긴 하지만, 옥중의 사무 책임자의 자리를 맡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39:21-40:23).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에피소드(C)는 ‘이집트’의 국왕 다음으로 높은 총리 자리에 올라, 나라 안의 식량 배급을 포함한 모든 행정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음을 보여준다(41:1-57). 즉 이 세 개의 에피소드는 음악적 crescendo의 기법을 통해서 절정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나머지 세 개의 에피소드(A’B’C’)는 또 다른 절정을 향해 나아가는 일련의 봉우리들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A’)는 ‘요셉’의 형들이 ‘이집트’로 내려와 그에게 절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42:1-38), ‘요셉’의 꿈이 성취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두 번째 에피소드(B’)는 ‘요셉’ 형들이 이집트를 두 번째 방문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에는 형들이 ‘베냐민’을 대동하고 있으며, 이 장면에서 ‘요셉’은 그동안 숨겨왔던 감정을 폭발적으로 드러내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밝힌다. 마지막 세 번째 에피소드(C’)에서는 ‘야곱’을 포함한 ‘요셉’의 모든 가족이 이집트로 내려오고 있으며, ‘요셉’은 아버지와 극적 해후를 한다(46:1-47:31). 따라서 <요셉 이야기>의 주제를 ‘요셉’의 꿈의 성취로 국한시킨다면, 이 장면(47장)이 이야기의 결론으로 합당할 것이다. <유다와 다말 에피소드>(38장)나 <야곱과 요셉의 말년>(48-50장) 등은 후대의 편집적 삽입 정도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화자의 의도는 다른 데 있다. 그는 열 번째 ‘톨레돗’의 제목을 <요셉 이야기>가 아니라, <야곱의 계보>로 소개하고 있다(37:2). 즉 화자의 관심사는 ‘요셉’ 한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모든 자식들이다. <이삭 이야기>에서도 이와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즉 <이삭의 계보>(25:19)는 ‘이삭’의 두 아들(‘야곱’과 ‘에서’) 모두에게 관심을 보인다. ‘야곱’의 모든 자식들에 대한 화자의 관심사를 잘 읽을 수 있는 부분은 “야곱의 유언”이다(참고. 49장). ‘야곱’은 자신의 임종 시에 모든 자식들에게 축복을 전한다. 그리고 이 장면이야말로 <요셉 이야기> 뿐만 아니라 <창세기> 전체의 절정이다. 이 장면은 두 국가의 잉태에 관한 단서를 보여주고 있는데, ‘유다’와 ‘요셉’ 지파가 주축을 이룰 남쪽 ‘유다’ 왕국과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바로 그들이다.
이렇게 볼 때, ‘요셉’이 무대의 유일한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는 세 개의 에피소드(A/B/C)(39-41장)에 앞서서, <유다와 다말 이야기>(38장)가 등장한다 해서 특별히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세 개의 에피소드(A’B’C’)(42-46장)에서 ‘요셉’이 ‘유다’와 함께 주인공 역할을 맡고 있으며, ‘야곱’이나 ‘르우벤’, ‘시므온’, ‘베냐민’ 등이 조연(助演)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결론적으로, <요셉 이야기>는 ‘요셉’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야곱’의 모든 자식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열 번째 ‘톨레돗’을 단순히 <요셉 이야기>로 명명하는 것은 적절치 못할 것이다. <창세기> 25-50장 사이에서 36장을 제외하면 모든 이야기는 ‘야곱’의 생애에 관한 것이다. 전체 본문은 그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그의 죽음과 매장에 관한 이야기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25:21);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50:14)
수차례 밝혔듯이, 화자는 <야곱 이야기>를 제 1부와 제 2부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제 1부: ‘이삭’의 계보-<야곱 이야기(1)>(25:19-35:29)
제 2부: ‘야곱’의 계보-<야곱 이야기(2)>(37:2-50:26)
당연히 두 이야기를 하나로 통일성을 갖게 하는 일련의 문학적 장치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르우벤’에 관한 ‘야곱’의 유언(49:3-4)은 이전에 ‘르우벤’이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했던 사건(35:22)을 연상시켜주며, ‘시므온’과 ‘레위’에 관한 유언(49:5-7)은 앞에 있었던 ‘디나’의 사건(34:25-31)을 기억나게 한다. 후손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 앞에서 이들이 탄생할 당시 서술한 바 있는 이야기와 쌍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참고, 49장; 29:31-30:24). 즉 ‘야곱’의 아들 중 하나님과 연관된 이름을 가진 자들은 ‘르우벤’, ‘시므온’, ‘유다’ 그리고 ‘요셉’이었는데(29:32, 33, 35; 30:24), 이곳 <요셉 이야기>에서도 이들은 주요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야곱 이야기> 전반부에서 ‘레아’와 ‘라헬’의 갈등(29-31장)이 나중에 그 자식들과 ‘야곱’ 사이에 전쟁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34; 35:22), 후반부에 와서는 부모와 자식들 간의 갈등은 ‘요셉’과 그의 이복형들 사이로 확대되고(37장), 급기야 ‘요셉’이 ‘이집트’로 노예로 팔려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창세기>의 나머지는 화해와 용서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물론 화해의 이야기는 47:12에서 절정을 맞고 있기는 하지만, ‘요셉’의 형들 사이에 일말의 두려움이나 의구심이 깨끗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들은 ‘야곱’의 사후 ‘요셉’의 복수가 두려워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두려움에 대해서 ‘요셉’은 다시 한 번 달래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50:14-21). 그러므로 <야곱 이야기>(25:19-50:26)는 전체적으로 한 이스라엘과 열두 지파에 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요셉 이야기>의 또 다른 구조의 원리는 교차대구이다: 이형원. 「복음과 실천」(대전: 침례신학대학출판부, 1994), p. 378; Vincent L. Tollers; John Maier eds., Mappings of the Biblical Terain: The Bible as Text(London: Bucknell University Press, 1990), pp. 215-232.
이 구조에 따르면, <다말과 유다 이야기>가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그 당위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자료비평이나 편집비평에 따르면, 이 본문은 잘못 위치한 경우의 전형에 해당한다.
즉 두 번째 에피소드는 일종의 막간이긴 하나, 세 번째 에피소드와 불가분의 관계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두 에피소드에는 각기 ‘다말’과 ‘보디발’의 아내가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이들의 상대역으로 각기 ‘유다’와 ‘요셉’이 등장한다. 두 여인의 음란한 행위와 이를 상대하는 두 남자 주인공의 행위가 뚜렷한 대조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화자의 의도적인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창세기 2>의 역사
<창세기(2)>의 문학적 역사와 관련해서는 제 1장과 2장에서 각각 <오경>과 <창세기(1)>의 역사와 관련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한 바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족장 이야기>의 자료와 편집에 관해서만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다.
자료와 편집. 전통적인 자료비평 연구에 의하면, <야훼 전승>과 <엘로힘 전승>이 37-45장 사이에 대략 비슷한 분량으로 섞여 있다. 그 외 일부 <사제 전승>도 일부 포함되어있다. <야훼 전승>의 존재에 대해서는 일부 수정된 견해가 있기도 한데, 본문 중의 일부가 이른 바 <르우벤-엘로힘 자료>가 나중에 일부 보충되었다는 견해이다. 더욱 최근에는 <요셉 이야기>의 핵심 부분(37장과 39-45장)을 순수한 <야훼 전승>으로 보고, 나머지 이야기는 후대에 <사제 전승>과 <야곱 이야기>로 보충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자료와 편집에 관한 세부적인 논의는 해당 본문 연구에서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
<창세기 2>의 신학
제 1장과 2장에서 각각 <오경>과 <창세기(1)>의 신학을 다룬 바 있으므로, <창세기(2)>의 신학 역시 별도 추가할 내용은 없다. 앞 두 장에서 <오경>을 관통하는 주제가 하나인가, 아니면 주제가 여럿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다만 <창세기(2)>의 핵심 본문을 “아브라함의 소명(召命)”(창 12:1-3)으로 본다면, <창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주제는 “아브라함 언약”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 바 있다. 그리고 언약의 내용을 세 가지로 볼 것인가, 또는 네 가지로 볼 것인가에 따라 주제도 사뭇 달라질 수도 있음도 언급한 바 있다. 그것은 언약의 성취를 어떻게 보는가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제 2장 참고).
결론적으로, <창세기(2)>의 신학적 주제는 <창세기>의 신학적 주제가 될 것이며, 이는 “아브라함 언약”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창세기(1)> 즉 <기원 이야기>가 <창세기(2)> 즉 <족장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안다면, 보다 체계적인 이해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곳에서는 <신약>에서 <창세기(2)>를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신약>에 따르면, 교회의 역사는 곧 이스라엘의 역사의 연장선이다. 이스라엘이 “참 감람나무”라고 한다면, 교회는 여기에 접붙임을 받은 “돌 감람나무”다(롬 11:17-24). 그렇다면 <창세기>의 인물들은 교회의 가장 오래된 회원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 양식은 이후 세대의 교인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영감을 주는 존재들이다. 교사(敎師)로서든, 아니면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든 말이다. <신약>에서 가장 자주 인용하는 구절 중의 하나는 이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를 의로 여겼느니라”(창 15:6). 이 구절은 사도 ‘바울’이 “믿음에 의한 구원”의 핵심 본문으로 삼았던 본문이기도 하며, 사도 ‘야고보’는 이를 “올바른 믿음은 반드시 행동을 낳게 되어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본문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참고. 롬 4:9, 22; 갈 3:6; 약 2:23).
그러나 <신약>에서 <족장 이야기>의 가장 많은 분량을 인용하고 있는 사례는 ‘스데반’이 공회(公會)에서 행한 연설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연설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가나안’에서 죽음을 맞이하여 그 땅에 매장되는 ‘야곱’까지 다루고 있다(참고. 행 7:2-16). 또 다른 사례는 <히브리서> 11장에서 찾을 수 있다. 흔히 “믿음의 장”으로 불리는 이곳은 믿음의 영웅으로 ‘아벨’에서 시작하여 ‘가나안’에 자신의 뼈를 묻어달라는 임종 유언을 남기는 ‘요셉’까지 섭렵하고 있다(히 11:4-22). <히브리서> 화자에 따르면, 이들 인물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분투하며 살아갔던 믿음의 영웅으로서, <신약>의 성도들이 따라야 할 모델인 것이다.
연습과 토의
1. <창세기(2)>의 문학적 특징, 즉 장르(genre)와 구조(structure)와 문체(style)에 대하여 나는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가?
2. <족장 이야기>는 장르의 분류상 좁게는 “영웅설화”에 속한다고 했다. <성경>의 영웅과 고대 근동문학의 “영웅설화”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해 보자.
3. <창세기(1)>과 <창세기(2)>는 어떻게 연결되고 있을까? 즉 <창세기(1)>이 <창세기> 전체에서 담당하고 있는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기능은 무엇일까?
4. <창세기(2)>의 핵심 본문은 무엇이며, 신학적 주제는 무엇일까? 이를 <오경> 전체의 주제와 연결해서 논의해 보자.
5. <신약>은 <족장 이야기>를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 논의해 보자.
참고한 책들
1. G. J. Wenham, Exploring the Old Testment (vol. one).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03.
2. Temper Longman III and Raymond B. Dillard, 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ment. Grand Rapids: Zondervan, 1994, pp 1-37.
3. William S. LaSor (박철현 옮김), 구약 개관.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pp 92-112.
4. Temper Longman III, 어떻게 창세기를 읽을 것인가. 전의우 번역. IVP: 서울. 2006.
5. Temper Longman III, Old Testment Essentials:Creation, Conquest, Exile and Return.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2014, pp 13-33.
6. Voctor P. Hamilton, Handbook on the Pentateuch (2nd ed.).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5, pp 19-80.
제 4장: 출애굽기
4
출애굽기
<출애굽기>를 <성경>의 첫 번째 책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는 <창세기>보다 더 많은 “시작”(תיטאוב 베레쉬트: 태초에)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1) 이스라엘 국가; (2) 언약과 율법; (3) <성경>; (4) 예배와 제사장 직분; (5) 존재의 신학
이렇게 볼 때, “출애굽” 사건은 <구약>의 모든 사건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사건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역사(history)로서의 “출애굽” 사건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학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 근동지방의 문헌에서, “출애굽” 사건과 상대적인 비교 연구가 가능한 인물이나 사건 등을 전혀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적 상황(또는 설화세계)과 일치할 것으로 기대되는 증거들이 모두 간접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이 책의 문학이나 신학에 대해서 다루기 전에 역사적인 문제를 먼저 다루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출애굽기>의 역사
<출애굽기>의 역사라 함은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고려해 보아야 할 연구 대상을 말한다. 이 두 방향은 불가분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출애굽기> 책 자체에 대한 “역사비평적” 연구(예: 자료나 편집 등)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출애굽” 사건 자체의 역사성(예: 출애굽의 시기나 경로 등)과 관련된 연구를 말한다.
1. 자료와 편집
저자. <출애굽기>는 ‘모세’의 단일 저작물인가 또는 편집의 결과인가? 이 질문은 이제 더 이상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진부(陳腐)한 것이 되어버렸다. 편집설(編輯設)은 그 진실성 여부를 떠나, 극단적인 보수 진영을 제외하면 학계에서 대세(大勢)이자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오늘날 독자 중심 비평의 관점에서 보면, 책의 저자에 관한 논쟁은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주제가 되어버린 느낌이다(이에 대해서는 <오경> 총론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
자료와 편집. 다만 책의 최종 편집과 관련해서, <출애굽기>에 관련된 사항들만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전통적으로 <오경>을 구성하는 세 가지 기본 자료는 <야훼자료(J)>, <엘로힘 자료(E)>, <사제자료(P)>라고 <창세기> 개론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창세기>와는 달리 <출애굽기>에서 이들 세 자료를 따로 구분하는 일은 훨씬 복잡하고 까다롭다. 우선 <야훼자료>와 <엘로힘 자료>를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고, 이 책의 후반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사제자료>도 그것이 하나의 독립적인 자료인지, 또는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편집의 결과인지 확인하는 일 또한 쉽지 않다. 참고로 <출애굽기>가 <신명기>에 대한 편집 작업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출애굽기>와 관련해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문제는 책 속에 등장하는 두 문학 양식, 즉 “이야기”(narrative) 양식과 “율법”(law) 양식 간의 관계설정에 관한 것이다. <출애굽기>에는 <십계명>(20:1-17)과 <언약 집>(20:22-23:19)이 있다. 그런데 <십계명>의 출처가 <엘로힘 자료>일 것이라는 입장이 지지를 받던 시절도 있었다. 예컨대, <십계명>을 <야훼자료>로 알려져 있는 <신명기> 5장과 비교해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에서는 <십계명>을 포함한 율법은 별도의 독립적인 전승들로부터 유래하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참고. <야훼자료>에 속하는 34장은 예외로 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이들 별도의 전승들은 훗날 “이야기” 양식 안에 편집적 삽입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2. 출애굽의 역사
‘모세’의 두 번째 책으로 넘어오자 말자 갑자기 폭죽 터지듯 등장하는 엄청난 규모의 일련의 기적들은 차치(且置)하고라도, 이 책의 중심 사건인 출애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합리적인 의문들을 제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 (1) 출애굽은 역사적 사실이며, 그것을 따지는 일은 과연 중요할까?; (2) 그 시기는 언제였을까?; (3) 어떤 경로를 통해서 탈출했을까? (4) 탈출 당시 이스라엘의 인구는 얼마였을까? 이 단락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은 대부분 ‘트렘프 롱맨 3세’(Tremper Longman III)의 두 저서를 참고하였다: (1) <출애굽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2) <구약개론>.
역사적 증거. <구약> 전체적으로 단일 사건치고 가장 중요한 사건이자,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을 가능하게 해준 사건이 바로 출애굽이다. 따라서 이 사건의 역사적 증거를 찾는 일은 <성경>의 권위와 직결된 문제이기도 해서 치명적으로 중요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대단히 불행하게도, <성경> 기록 외의 직접적인 증거는 없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직접적인 증거라 함은 역사적인 문헌이나 고고학적인 증거를 말한다. 예컨대, ‘이집트’의 문헌에서 ‘모세’나 이스라엘에 대한 그 어떠한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물론 홍해 근처에서 ‘바로’ 왕의 마차 군단의 마차 바퀴 유적(遺跡)들을 찾았다는 학계의 발표가 있기는 했으나, 이는 거짓이 아니라면, 믿기 어려운 발표일 뿐이다.
‘이집트’의 문헌에서 ‘모세’나 이스라엘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이집트’ 역사가가 자국(自國)의 패배에 관한 기록을 후세에 남기려 했겠는가! 출애굽과 같은 사건은 적어도 ‘이집트’인이라면 무덤 벽이나 석판에 기념하여 남기고 싶지 않은 치욕적인 사건임에 분명할 것이니 말이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우리가 무덤이나 동굴 벽화 등에서 발견하는 조각이나 그림은 오히려 정 반대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즉 주전 이천년 경,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셈’ 족 사람들의 모습이 그것이다. 예컨대, ‘투트모스 3세’(Thutmosis III)가 통치하던 주전 1460 경에 이미 ‘테베’에 있는 ‘아문’ 성전의 벽돌을 만들고 있는 외국인들을 그린 벽화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출애굽의 간접적인 증거로 채택될 만하다. 이와 관련해서, <성경> 외적인 또 다른 증거가 있다. 주전 13 세기 말 경에 해당하는 ‘메르넵타’ 왕(Pharaoh Merneptah)의 승전비가 그것인데, 여기에 ‘이스라엘’을 정복했다는 언급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견과 <성경>의 기록을 상호 연계시키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사실 지난 한 세기 동안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 발견은 <출애굽기>나 <여호수아>의 기록과 잘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소가 하나 있는데, 연대(年代) 산출의 문제이다. 즉 출애굽이나 ‘가나안’ 정복 시기와 관련된 문제다. 예컨대, <성경>에서 접하는 연대에 관한 정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이며, 절대적인 연대가 아니다. 따라서 현재 인류가 채택하고 있는 연대기로 변환(變換)을 해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성경>에서 접하는 일부 연대는 문자적인 연대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연대일 경우가 많고, ‘이집트’의 ‘바로’ 왕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지 확인조차 해주지 않고 있다.
‘바로’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알려주기만 해도 문제는 훨씬 더 쉽게 풀릴 수 있을 텐데, <성경>은 ‘바로’ 왕이 ‘라암셋’(Ramese)인지, 또는 ‘투트모스’(Thutmosis)인지 전혀 언급이 없다. 혹자의 주장에 따르면, <성경> 기자(記者)가 ‘이집트’ 왕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는 것은 ‘이집트’의 관례를 따른 것이다. 즉 상대국 왕의 이름을 밝혀 거명하는 자체가 적국을 높이고, 영예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무명(無名)으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연대기에 관한 첫 번째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즉 어떻게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연대를 절대적인 연대, 다시 말하자면 오늘날의 주전(B.C.) 또는 주후(A.D.)로 변환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출애굽의 연대. 출애굽의 경우에도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즉 출애굽의 시기에 관해서 <성경>적 근거로 삼는 중요한 본문이 있는바, <열왕기상>의 기록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왕상 6:1).
이 본문에 따라, 만일 ‘솔로몬’ 왕의 즉위 연도를 알 수 있다면, 이론적으로 출애굽의 절대적인 연도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만일 <성경>의 모든 연대가 상대적인 것이라면, 무슨 수로 이 연대를 절대적인 연대로 변환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한 가지 방법은 당시 주변 국가들의 연대기를 참조하는 것이다. 이중 가장 중요한 참고 자료는 주전 910-612년 사이의 기간을 다루고 있는 ‘아시리아’의 연대표(AEC; Assyrian Eponym Canon)이다. 이 연대기도 절대 연대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연대 도출에 상당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 문헌은 한 해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이나 현상을 기록함에 있어 당해 연도 재위 중의 왕이나 주요 관리의 이름과 연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일식(日蝕)이나 월식(月蝕) 등은 규칙적인 천체 현상으로서, 고대 ‘아시리아’에서 그와 같은 현상이 언제 있었는지는 오늘날의 천문학적 지식으로 계산이 가능하다. 이를 기초로 당시 통치자의 재위 기간에 대한 절대 연대를 산정해 낼 수 있다.
이와 같은 계산 방식에 대해서 이곳에서 상세하게 소개할 수는 없지만, <열왕기상>(6:1)에서 언급하고 있는 ‘솔로몬’ 재위 4년은 주전 966년인 것으로 밝혀졌으며, 따라서 여기에 480년을 더하면 출애굽의 연대는 주전 15세기 중반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출애굽의 연대와 관련해서, <열왕기>의 기록보다는 다소 신뢰성이 떨어지지만, 또 다른 <성경>의 기록이 하나 더 있다: “이스라엘이 헤스본과 그 마을들과 아로엘과 그 마을들과 아르논 강가에 있는 모든 성읍에 거주한 지 삼백 년이거늘 그 동안에 너희가 어찌하여 도로 찾지 아니하였느냐”(삿 11:26). 사사 시대의 절대 연대를 정확하게 추정할 수는 없지만, 이 구절에서 사사(士師) ‘입다’가 말하는 삼백년은 정복 이후의 기간을 말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분명 이른 바 “이른 출애굽”(주전 15세기)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학계에는 “이른 출애굽” 외에도 “늦은 출애굽”(주전 13세기)을 지지하는 입장도 있다. 위에서 보듯이, <성경>은 분명히 전자(前者)를 가리키고 있지만, 고고학(考古學)의 증거들은 오히려 후자(後者)를 지지하고 있다. 고고학은 크게 두 가지 영역에서 <성경>의 기록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1) 지명과 위치; (2) 정복과 고고학적 증거.
(1) 지명과 위치: 문제의 이름과 장소는 <출애굽기> 1:11의 기록이다.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출 1:11)
여기서 ‘라암셋’이라는 지명(地名)은 제 18 왕조(王朝)의 이름 ‘라암셋’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왕조는 대략 주전 14세기 후반/13세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바로’ 중의 한 사람은 ‘라암셋 2세’(주전 1279-1213)이다. <성경>이 밝히고 있는 시기와는 분명 차이가 있다.
이에 덧붙여, ‘라암셋’의 위치 또한 문제가 된다. ‘라암셋’은 오늘날 ‘칸티르’(Tell el-Daba’a)인 것으로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받아들이고 있는데, 만일 그렇다면, 이 지역이 존재했던 시기는 주전 13세기가 됨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대대적인 도시 건설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당시의 주도적인 인물이 ‘라암셋 2세’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2) 고고학적 증거: “이른 출애굽”과 관련된 또 다른 문제는 정복과 관련된 고고학적 증거들이다. <여호수아서>를 꼼꼼히 읽어보면,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으로 파괴된 성읍은 서너 곳에 불과하며, ‘가나안’ 전 지역에 걸쳐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인상을 받는다. ‘여리고’와 ‘아이’와 ‘하솔’ 정도가 불탔고, 나머지 대부분의 전투는 평지(平地)에서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훗날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탐사에서 불탄 흔적을 보여주는 지층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오히려 <성경>에서 출애굽과 정복전쟁 당시 ‘팔레스타인’ 땅에 존재했었다고 전하고 있는 여러 성읍이나 지명들이 실은 청동기 후반(주전 1550-1200)까지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증거하고 있다.
‘여리고’ 성의 경우를 보자. <성경>에 따르면 이 성은 이스라엘이 ‘요단’ 강을 건넌 후 처음 정복한 곳으로서, 거대한 성벽을 가진 큰 도시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후 있었던 일련의 고고학적 탐사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도시가 주전 15세기를 전후해서 있기는 하였지만, 정복 당시에는 없었다.
‘아이’ 성 역시 “이른 출애굽” 견해에 또 다른 문젯거리다. ‘히브리’ 어로 이 단어는 “잔해”(殘骸) 또는 “쓰레기 더미”를 뜻하며, 오늘날 고고학에서 ‘기르벳 엣-텔’(Khirbet et-Tell)로 통한다. ‘아이’의 위치는 ‘베이텐’(Beiten) 근처로, 간혹 ‘벧엘’의 옛 이름으로 인식되기도 한다(<성경>에 의하면, ‘벧엘’은 ‘아이’ 근처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에서 발굴된 유적들을 연구한 고고학자들의 결론인 즉은 주전 2400-1200년 사이에 이 지역에 사람이 살았다는 아무런 단서가 없다는 것이다. 이 결론이 옳다면, <열왕기>의 기록이 틀렸거나 재해석을 요한다.
이상에서 본 것처럼, 출애굽의 연대 문제 하나를 놓고서도 고고학과 <성경>은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둘 사이의 불협화음이 어찌 이 문제 하나뿐이겠는가!). 결국 남은 문제는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이다. 이와 유사한 질문을 <창세기> 개론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 참고. 본 교재의 <창세기> 개론 부분.
여기서는 출애굽의 연대 문제와 관련해서 ‘트렘프 롱맨(III)의 결론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우선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대전제는 <성경>의 기록은 무슨 역사적이거나 과학적 질문에 대한 해답을 마련하기 위하여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성경> 속의 연대기도 이를 절대 연도로 환산하려 할 때, 논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출애굽 연대의 성경적 증거로 삼았던 <열왕기>(6:11)의 기록도 예외일 수는 없다. <성경>의 한 두 구절(예. 왕상 6:1; 삿 11:26) 만으로 출애굽의 연대를 확정 짓기에는 현대의 독자가 가진 정보는 너무나 미미하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출애굽기>의 목적은 신학적인 데 있지, 출애굽의 연대나 ‘바로’ 왕의 실명(實名)을 밝히는데 있지 않다.
한편 고고학적 증거들은 어떨까? 이들 역시 의심의 여지없는 어떤 객관적인 사실을 제공해준다고 볼 수는 없다. 여러 해석적 입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이나 ‘이집트’에 대한 현재의 고고학적 지식만으로 이들 증거들을 <성경>의 기록과 연계 시키는 과제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성경>의 기록조차 단 한 가지 해석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출애굽의 연대 문제와 관련해서 보다 유연(柔軟)한 입장은 없을까? <출애굽기>를 보다 구미(口味)가 당기도록 읽을 수는 없을까? 여기서 다시 한 번 본 교재의 <창세기> 개론 부분에서 제시 한 바 있는 해석적 입장을 상기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즉 <성경> 기록과 역사ㆍ과학적 사실 간의 일견 충돌이나 모순에 대한 세 가지 해석적 입장 중에서, 두 번째 입장을 선택하는 것이다(도표).
첫 번째 입장은 역사ㆍ과학적 발견이나 증거를 <성경>의 진술보다 우위에 두자는 입장이며, 세 번째 입장은 정반대로 <성경>의 진술을 우위에 두는 입장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해석적 입장은 두 번째로서, 양 극단에 대한 절충이나 타협이 아니라, <성경>에 대한 전혀 다른 것이다. 즉 <성경>의 주된 관심사는 영적(靈的)인 것, 즉 신학적인 데 있다. 설령 <성경>이 역사나 과학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을 때조차도, 궁극적인 관심사는 역사나 과학에 있지 않다. 그리고 영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문학을 사용한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은 신학의 내용물을 문학의 그릇에 담아내고 있다 하겠다. 이렇게 되면, 출애굽의 연대 문제는 자연스럽게 주변적인 것으로 물러나게 될 것이다. 아래에서 다루게 될 출애굽의 경로 또한 마찬가지이다.
출애굽의 경로. 위에서 밝혔듯이 출애굽의 경로 또한 치명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뿐더러, 직접적인 증거도 없다. 더구나 ‘시내’ 산을 포함한 일련의 지명들의 소재(所在)조차 분명하지 않는 상태에서, 경로를 파악하는 일자체가 난센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출애굽기>의 기록과 현재 알려져 있는 고고학적 정보를 토대로 가능한 경로 하나를 재구성해보면 아래 그림에 나타낸 바와 같다.
(1) 출발지점: ‘라암셋’은 오늘날 ‘타니스나 칸티르’로 보인다.
(2) 첫 기착지: ‘숙곳’은 ‘나일’강 유역에서 동쪽으로 가는 중요한 경로를 형성하고 있는 ‘와디 투밀라드’ 계곡에 위치한 ‘테쿠’(오늘날의 ‘텔 엘-마스쿠타흐’)일 것이다.
(3) 다음 세 장소: ‘에담’, ‘비-하히롯’, ‘믹돌’은 그 위치가 분명하지 않다.
(4) 홍해: 홍해는 ‘히브리’어로 “갈대바다”(‘스알야숩’)인데 <개역성경>은 <70인역>의 번역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러나 홍해에는 갈대가 없다. 아마도 ‘멘잘레’ 호수 주변과 남쪽의 ‘비터’ 호수 사이에 있던 늪지대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늪지대는 갈대가 많고, 단내가 나는 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현재의 ‘수에즈’ 운하를 따라 줄지어 있었다.
(5) 갈대바다를 건넌 지점: 두 장소가 물망에 오르고 있는데, 하나는 ‘비터’ 호수 남쪽 근처와 다른 하나는 ‘텔 테프네’이다.
(6) 여행 경로: 적어도 두 경로가 알려져 있는데, 하나는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출 13:17)과 다른 하나는 “광야 길”(18절)이다. 전자(前者)는 ‘이집트’ 군대가 사용하는 길로 알려져 있으며(17절 하반), 군데군데 요새와 병참기지들이 있어, 이스라엘이 이 경로는 사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갈대바다를 건넌 이후에는 “술 광야”(15:22; 민 33:8)로 들어갔는데, 이 광야는 ‘팀사스’ 호수와 ‘멘잘레’ 호수 사이에 있는 지역의 동편, ‘시나이’ 반도 서북부 지역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여기서부터 여러 곳을 지나 ‘시내’ 산으로 진행했을 것 같다.
(7) ‘시내’ 산의 위치와 ‘이스라엘’이 그곳에 있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결코 나타날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머물렀다 해도 그 기간은 아주 짧았으며, 아무런 정착민들을 그곳에 남기지도 않았다. 사실 ‘시나이’ 반도에는 역사가 시작되고 난 이후 정착민이 산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예벨 무사’(‘아랍’ 명: ‘모세’의 산)가 있는 자리와 성 캐더린 수도원 근처에 있는 거대한 화강석 산들이 가장 가능성 높은 장소로 보인다(위 그림). 이곳을 ‘시내’ 산으로 보는 기독교적인 전통은 최소한 주후 4세기에 ‘이집트’에 있던 수도사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은 ‘시내’ 산이 ‘가데스 바네아’보다 한참 남쪽으로부터 ‘시내’ 산까지 열하루 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엘리야’는 ‘브엘세바’에서 ‘시내’ 산까지 가는데 “사십 주 사십 야”(매우 긴 여행이라는 의미일 것임)가 걸렸다(참고. 왕상 19:8). 그러므로 이곳은 ‘시나이’ 반도의 남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의 강렬하고 인상적인 아름다움, 장엄하고 엄숙한 경관은 이스라엘이 ‘시내’ 산의 경험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보이게 한다.
숫자들. <출애굽기>의 기록에 따르면, 출애굽에 참여한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는 장정만 육십 만이다(참고. 12:37). 이 숫자에 부녀자를 다 포함시킨다면, 전체 숫자는 적어도 이삼백만은 족히 되었을 것이라는 계산이 가능하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 숫자가 지나치게 많으며, 비현실적이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예컨대, ‘라이트’(E. Wright)는 그 당시 인구도 많지 않았고, 음식물 준비도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을 들어 실제 출애굽에 참여했던 숫자는 기껏해야 오천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의 기록 외에는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의 총인구가 얼마나 되었을지, 아무런 역사적 기록이 없다. 그래서 일부 비평학자들은 육십만 이라는 숫자는 출애굽 당시의 숫자가 아니라, <오경>이 완성된 이후의 독자들의 숫자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문제 역시 다른 역사적 문제와 마찬가지로, <출애굽기>를 이해함에 있어 치명적으로 중요한 주제는 아닐 것이다.
<출애굽기>의 문학
1. 제목
그리스 식 이름. 기독교 독자들에게 친숙한 책의 이름 <출애굽기>는 이 책의 핵심사건, 즉 “출발”(내지는 “떠남”)을 뜻하는 ‘헬라’어 exodus에서 취한 것으로서, 이 책의 내용을 잘 전달하고 있다 하겠다.
히브리 식 이름. 이 책의 ‘히브리’ 식 제목, ‘웨엘레 쉐모트’(한글 번역: “그리고 이것들이 ...그 이름들이다”)는 알다시피 ‘히브리’식 전통에 따라 이 책의 첫 번째 문장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이 제목은 그 자체로서 책의 내용에 관한 무슨 특별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첫 문장이 접속사, “그리고”로 시작하고 있어 <창세기>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창세기>의 마지막 장면 이후 <출애굽기>의 처음 장면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알 수 있기는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으로 <모세의 두 번째 책>이 더 적절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모세’는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적인 인물이며, 모든 이야기에서 중심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 전체적으로 ‘모세’의 이름이 770 번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중 대략 삼분의 일이 <출애굽기>에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의 중심 역할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그의 역할과 관련해서 가장 충격적인 대목은 홍해의 기적 직후에 이스라엘이 ‘모세’에 대하여 보여주고 있는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14:31).
이처럼 <오경> 내에서 ‘모세’의 주도적이고 중심적인 역할로 인해서, <오경>을 ‘모세’의 전기(傳記) 내지는 일대기(一代記)의 문학 양식을 갖춘 “교훈집”(‘토라’)로 간주한다 해서 전혀 무리는 아닐 것이다.
2. 양식
이 책 속에는 <오경>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문학 양식들이 혼재해 있다: “이야기”; “율법”; “시”; “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전체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양식을 꼽자면, “이야기”(narrative)가 될 것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 세분하자면, “이야기 화 된 역사”(stroricized history)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화자의 신학적 의도와 관련해서 볼 때, 이 책은 “신학 화 된 이야기(역사)”(theological history)로 규정할 수 있으며, 의도인 즉은 당대의 독자들에게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에 대한 교훈을 주기 위함이다.
결국 <성경>의 화자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단순한 역사란 있을 수 없으며,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이야기일 뿐이다. <출애굽기>도 이점에서 예외일 수 없으며, 따라서 이 책에 등장하는 일련의 율법들은 그 자체로서나 또는 하나의 부속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의 이야기”의 중요한 요소(要素)로서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3. 구조
<출애굽기> 역시 <오경> 내의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구조 분석 방식이 한 가지 이상 있을 수 있다. 가장 흔한 구조 분석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인데, 하나는 지리적인 구분이고, 다른 하나는 내용, 즉 에피소드 별로 구분하는 것이다. 다만 어떤 방식을 취하든, 책의 전체적인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함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하겠다.
지리적인 구분. 지리적인 구분이라 함은 이스라엘이 머물렀던 중요한 세 장소에 따라 나누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다:
내용적 구분. 또 다른 구분 방식은 내용에 따른 것으로서, 다분히 신학적 의도도 담고 있는 구분 방식으로서 다음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다:
이 두 번째 단락 구분 방식은 다분히 신학적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 각 단락은 구원과, 율법과, 예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 내용 요약은 이 두 번째 도표에 따른 것이다.
4. 내용
4.1. 제 1부: 출애굽
제 1부는 다시 일곱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 노예생활과 집단 학살. 제 1장은 ‘모세’의 출생에 관한 배경을 기능을 하고 있다. 즉 책은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을 간략하게 상기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 내용인 즉은 ‘야곱’ 일가가 이집트에 이주하는 이야기(1:1-6; 참고. 창 46:8-27; 50:22-26)와 그의 후손에 관한 약속이 성취되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1:7; 참고. 창 17:2, 6). 그러나 ‘요셉’이 살아있을 당시에는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호의적이고 특별한 대우를 받지만, 왕조가 바뀌면서 완전히 달라진다. 즉 이 가족은 두려움과 억압 가운데서 살아가야 했다. 이 시기는 주전 1648-1540년 사이의 기간으로서 당시 이집트는 ‘힉소스’ 왕조 말기에 ‘셈’족 왕들이 통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힉소스’ 족속 역시 ‘히브리’ 족속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이었지만, 이후 이집트족의 왕조가 들어서면서 외국인들에 적대적이고 차별적인 정책이 펼쳐진다. ‘고센’ 지역에 건설한 ‘라암셋’이나 ‘비돔’ 등이 이들 외국인 노예들이 건설한 도시였다.
고된 노역을 통해서도 이스라엘의 인구는 오히려 늘어갔으며, 이에 이집트당국은 인구 증가를 저지할 목적으로 유아(幼兒) 학살 정책을 시도한다. 그러나 ‘히브리’ 산파들의 거부로 계획은 좌절되는데, 이에 ‘바로’ 왕은 모든 ‘히브리’ 남자 아이들을 강에 내버리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때문에 ‘모세’의 어머니는 그의 아들을 안전하게 숨겨두어야 했어야 했으며, 더 나아가 훗날 이집트에 내린 열 번째 재앙에서 모든 이집트의 장자(長子)를 죽인 것에 대한 나름의 타당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즉 이집트가 이스라엘에 가한 것과 같은 고통을 이집트 역시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모세의 탄생과 성장. ‘모세’의 탄생과 이집트 왕궁에서 성장하는 이야기에서부터 왕궁 탈출, 그리고 ‘미디안’에서의 결혼과, 첫 아들의 탄생에 이르는 동안의 이야기는 간락하게 서술하고 지나가 버린다. 이 단락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은 대부분 이집트에서 차용한 것들이다: 상자; 갈대; 역청; 나무진; ‘모세’의 이름. “어린 아이”라는 뜻의 ‘모세’라는 이름은 이집트 왕들의 이름에서 아주 친숙하게 발견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아멘모세’(Amenmose); ‘투트모세’(Thutmose). 그러나 <구약>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그 어원(語源)보다는 의미가 더 중요하다. ‘히브리’어로 ‘모세’는 “건져 올리는 자”를 의미하는데, 이는 장차 그의 소명을 예연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즉 그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구출해 낼 구원자로서의 그의 역할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백성의 구원자로서의 그의 소명은 일련의 에피소드를 통해서도 예견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건이 “우물가에서 장래 신부 감을 만나는” 장면이다(2:15-22). 같은 장면이 이전에 ‘이삭’이나 ‘야곱’의 경우에서 관찰한 바 있다(창 24; 29장). ‘모세’가 그의 장래 신부를 만나는 이야기에서 특기할 만 한 점은 그 신부 자매들이 우물가에서 물을 긷는 것을 방해하는 목동(牧童)들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그가 훗날 주도하게 될 출애굽 사건을 예고해주고 있는 것이다(2:17, 19; 참고. 3:8; 18:10). 백성의 구원자로서의 그의 역할은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예고해주고 있다. 즉 이집트 관리로부터 부당하게 억압받고 있던 동료 ‘히브리’인을 구출해 주었으나, 그 일로 그는 오히려 불평과 비난을 받게 된다. 불평의 내용인 즉은 누가 그를 왕이나 사사로 세웠느냐는 것이었다. 이처럼 그의 권위에 대한 불평은 출애굽 이후 일련의 사건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고 있다(예. 5:21; 17:3; 민 14:1-4; 16:1-11). 이처럼 ‘모세’의 초기 생애에서부터 그의 소명과 그가 백성들로부터 받게 될 대우를 예견할 수 있다. 즉 마음에 들어 하지도 않고, 감사할 줄도 모르는 백성의 지도자로서의 ‘모세’의 미래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3. 모세의 소명. 두 번째 단락(2:1-22)에서 ‘모세’의 소명과 관련한 일련의 예고를 보았다면, 세 번째 단락(2:23-4:31)에서는 그의 소명에 관한 구체적인 사역이 드러나고 있다. 처음에 서론적인 내용, 즉 고통 받는 이스라엘과 백성의 기도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셨다는 이야기를 간락하게 언급한 후, 이야기는 곧바로 ‘호렙’ 산, 즉 하나님의 산으로 그 무대를 옮겨간다.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은 불타는 떨기나무 사이에서 나타나신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에 대해서 처음으로 듣게 되는데, 이 속성은 율법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모세’는 신발을 벗고, 얼굴을 가림으로써, 이 사실을 인식하도록 요구받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알리신다. 즉 그분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출해내어 그의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계획이다. ‘모세’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왕을 설득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이곳 하나님의 산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바로’ 왕을 설득하는 것이다(3:12). ‘모세’는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그 일을 떠맡기를 거부하나, 하나님은 그의 항변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동시에 그의 소명을 분명하게 한다.
‘모세’가 걱정하는 첫 번째 문제는 무엇인가? 과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는지를 이스라엘이 믿을 것인가이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테스트해 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셨는지 물어볼 것이다. <오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훼’ 또는 “주님”을 사용하고 있지만, 불타는 떨기나무 사건 이전까지는 아무도 이 이름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모세’도 그날 처음으로 ‘아브라함’과 ‘이삮’과 ‘야곱’의 하나님,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이 ‘야훼’ 즉 “스스로 존재하는 자”임을 알았다. ‘야훼’가 뜻하는 바가 무엇이든, 이스라엘을 이집트로부터 구원해 낼 능력을 가진 절대자임을 시사하는 이름임은 분명하다.
‘모세’의 두 번째 걱정거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집트인들 역시 그를 믿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들의 의심을 풀어줄 세 가지 표지를 주신다. 하나는 그가 가진 막대기를 땅에 던졌을 때, 그것이 뱀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가 손을 품안에 넣었다가 끄집어낼 때, 피부가 눈처럼 희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물을 땅에 쏟았을 때, 물이 피로 변할 것이다(4:1-9).
‘모세’는 분명 확신을 가졌을 것 같은데, 다시 세 번째 문제를 제기한다. 즉 자신은 눌변가(訥辯家)라는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아론’을 그의 대변자로 임명하신다. 여기에 그의 장인 ‘이드로’가 이집트로 돌아가라고 격려한다. 하나님은 다시 한 번 ‘모세’로 하여금 돌아가도록 촉구하며, ‘바로’가 순순히 그의 말을 듣지는 않을 것임을 예고해 준다(4:10-23).
하나님은 이처럼 ‘모세’를 억지로 밀어내듯 이집트로 보내신다. 그렇다면 다음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다. 즉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서 이집트로 떠나는 ‘모세’를 길에서 죽이려 하신 것이다(4:24). 이와 비슷한 일이 <창세기>에도 등장한다(창 32:24-30). 즉 삼촌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야곱’에게 한 사람이 나타나 그와 씨름을 겨루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왜 그를 막으시는가? 비슷한 경우는 또 있다. 이번에는 <민수기>에 등장하는 이야기인데(민 22:22-35), 하나님의 천사가 손에 칼을 들고 이스라엘을 축복하러 가는 선지자 ‘발람’을 못 가게 막고 있는 장면이다. 이 같은 일견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에피소드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핵심 주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이다. 그러나 ‘모세’의 경우, 그는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주지 않았다. 할례는 출애굽 전에 이스라엘이 유월절 행사를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 하는 순종의 의식이다(12:48). 아들에게 할례 주는 일을 잊었거나, 또는 고의로 무시했다는 말은 그의 마음이 아직 온전히 헌신되어있지 않다는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온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과업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는 일이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아들은 여태 할례를 받지 못했다니! 일찍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지 않은 자는 즉각적으로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신 바 있다(창 17:14). ‘십보라’의 단호한 행동이 온 가족 뿐만 아니라, 출애굽의 사역 전체를 가능하게 했다.
4. 바로와의 대결. ‘아론’과 그의 백성을 만난 후, ‘모세’는 ‘바로’의 궁전으로 들어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삼일 동안 축제를 지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한다. 물론 이 요청은 이스라엘이 실제 원하는 것에 비해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바로’는 이 온건한 요청마저 가차 없이 무시해버린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이 같은 요구를 했다 하여 벽돌에 짚마저 넣어 만들도록 요구받는다. 이 일로 이스라엘은 ‘모세’와 ‘아론’에 대하여 이 두 사람이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고 불평한다.
이에 하나님은 가장 단호한 어조로 다시 한 번 그분의 약속을 재확인한다. 그분은 족장들에게 전능자 하나님으로 알려진 주님이시다. 그분은 이스라엘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아론’과 ‘모세’는 다시 ‘바로’에게 돌아가 막대기를 뱀으로 변화시켜 자신들에게 주어진 소명을 과시한다. 그러나 ‘바로’의 사제들도 같은 변화를 보여주었으나, ‘아론’의 뱀은 다른 뱀들을 잡아먹어버린다. 그런대도 ‘바로’는 굴복할 의사가 전혀 없으며, 출애굽은 결코 일어날 것 같지 않다.
5. 대재앙. ‘모세’와 ‘바로’ 사이의 결전은 정점을 향해 치닫는다. 실로 이 결전은 두 국가와 민족 간의 대결이 아니라, 이집트의 신들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간의 대결이다. ‘바로’는 신적인 존재이고, 이집트의 수호자이다. 그러나 이집트에 내린 대재앙은 ‘바로’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백성을 지켜 줄 수 없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예고하는 자는 ‘모세’와 ‘아론’이며, 그 일을 성사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바로’는 그가 겪은 일련의 재앙들로 인해서 처음의 잔혹함과 흉포함이 다소 누그러져서,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재앙을 겪은 후에는 이스라엘을 보내줄 것 같은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바꾼다. 그를 굴복시킨 것은 마지막 열 번째의 참혹한 대 재앙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지만, 그에게 찾아온 것은 자신과 군대가 홍해에 모두 수장(水葬)되는 것뿐이었다.
열 가지의 재앙은 세 개가 한 묶음을 이루어 세 번에 걸쳐 나타나고, 이어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전체 재앙을 완결 짓는다(도표 참고).
위 도표에 따르면, 첫 번째와 네 번째와 일곱 번째 재앙은 같은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즉 모두 아침에 ‘바로’에게 재앙에 대한 사전 경고를 하고 있고, ‘모세’는 ‘바로’ 앞에 맞서거나 또는 자신을 드러내 보이라는 명령을 받는다(‘히브리’어로 두 동사는 사실상 거의 같은 동사이다).
마찬가지로 두 번째와 다섯 번째와 여덟 번째 재앙 역시 비슷한 구조를 보여준다: 이들 역시 사전 경고는 있으나, 경고의 시점이나 ‘모세’를 향한 특별한 명령 같은 것이 없다. 셋째와 여섯 번째와 아홉 번째의 경우는 사전 경고 없이 이집트를 강타한다. 또한 처음 세 번의 재앙에서 대언자는 ‘아론’이다. 그리고 여섯 번째에서 아홉 번째까지의 재앙에는 ‘모세’가 대언자로, 그리고 네 번째와 다섯 번째와 열 번째 재앙은 하나님 자신이 직접 재앙을 내리신다.
이처럼 대재앙에서 반복되는 서술 패턴은 이야기 전체에 대한 통일성을 제공해주고 있으되, 한편으로 등장인물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재앙의 피해가 점차 더해갈수록 ‘바로’는 ‘모세’에게 더 강한 언조로 재앙을 사라지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그때마다 이스라엘을 내보내겠노라고 약속한다. 그러나 재앙이 일단 사라지고 나면 ‘바로’는 마음을 바꾸는데, 스스로 자신을 향한 비난을 자초하고 있다 하겠다. 기자(記者) ‘바로’의 마음의 변화와 관련해서, “그가 스스로 마음을 굳게 하였다”고 기록하기도 하고(7:13, 22; 8:19; 9:35), 또는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기도 한다(9:12; 10:20, 27; 11:10). 흥미롭게도 각각 네 번씩이다. 그리고 한 가지 주목할 만 사실은 초기 재앙의 경우에는 “바로가 스스로 마음을 굳게 하였다”고 되어있으나, 후반부에 이르면서 표현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다”로 바뀌고 있다. 이는 마치 ‘바로’가 스스로 마음을 강퍅하게 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징(膺懲)으로 볼 수 있다. 달리 설명하자면, 하나님은 스스로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것이다.
재앙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바로’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내보내도록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대언자 ‘모세’나 ‘아론’을 보내서 재앙에 대해서 사전 경고하는 것도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도하고 계시며 ‘바로’가 아니라는 점을 주지시키기 위함이다. 그러나 비록 이들 재앙이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개입하신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긴 해도, 전례(前例)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이집트’는 이전에도 때때로 우박이나 폭풍이나 메뚜기 떼의 습격과 같은 자연 재해로 피해를 입기도 했다. 그러나 혹자는 이들 재앙을 극심한 기후 조건 때문에 촉발되어 때로 수개월에 걸쳐 진행되는 재앙의 연쇄 사슬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하나의 재앙이 또 다른 재앙을 유발시키는 등의 연쇄 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설명이 그 전형에 해당한다: ‘나일’ 지역에서 심한 폭우는 매년 구월이면 연중행사처럼 대홍수를 가져온다. 첫 번째 재앙에서 물이 피로 변하며, 물고기 떼죽음을 당한다. 이는 편모충들이 홍수로 강 하구까지 떠 내려와 물이 핏빛으로 보이게 했고, 물고기를 죽였기 때문이다. 이 첫 번째 재앙으로 대규모의 개구리 떼가 강을 떠나게 되는데, 이것이 두 번째 재앙으로 이어진다. 강 하구의 습한 환경은 당연히 모기떼와 파리 떼가 창궐하게 만들 것인데, 세 번째와 네 번째 재앙은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물을 떠난 개구리 떼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어 썩게 된다. 개구리 시체에서 발생한 병균들을 파리 떼가 가축과 사람들에게 옮겨온 것일 것인데, 이것이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재앙의 원인이 된 것이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세 번의 재앙, 즉 우박과 메뚜기 떼, 그리고 어둠의 재앙들은 사막의 폭풍 바람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번 경우처럼 그 피해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그 규모가 큰 것이 사실이지만, 이집트에서 그 유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집트 왕궁 관리들이 이처럼 재앙 뒤에 작동하는 자연의 원리를 알았더라면, ‘바로’가 왜 이들 재앙들을 애써 외면하려 했는지를 쉽게 이해했을 것이다. 아마도 ‘바로’는 이듬해에는 상황이 호전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사건으로서, ‘바로’는 이에 굴복하고 만다. 물론 그것도 잠시 뿐이었지만 말이다.
6. 이집트 탈출. 하나님께서 제 11장에서 예고한 마지막 재앙을 즉각적으로 실행된 것은 아니었다. 대신에 ‘모세’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유월절을 준비하도록 함으로써, 그 재앙의 피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이집트’의 모든 장자(長子)들이 죽을 때, 이스라엘은 모두 ‘이집트’로부터 추방된다(12:29-42). 그러나 이야기는 다시 잠시 보류되는데, 이는 유월절에 관한 추가적인 지시사항을 주기 위함인데, 그 내용 중에는 첫 태생을 바치는 것에 관한 지시라든지 또 “무교절”에 관한 내용 등이 있다(12:43-13:16). 이야기는 13:17에서 다시 재개되는데, 이집트 탈출과 홍해를 건너는 사건에 이어 “미리암의 노래”(15장)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 단락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자료(문서)들이 신학자나 역사가들에게 많은 문제점을 안겨준 것은 사실이다. 아마 내용의 일관성에 관한 문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출애굽>의 성격을 규정하는 완벽한 특징이기도 하다. 즉 <출애굽>이 ‘토라’라는 점이다. ‘토라’는 종교적 교훈으로서, 후대의 독자들에게 과거를 깨우쳐 줄 뿐만 아니라,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유월절의 축제는 과거의 사건을 기념하지만, 매년 열리는 연례행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지속적으로 누리기 위해서 이 축제를 하나님께서 정해준 방식대로 지켜야 할 것이었다. 따라서 이야기도 이스라엘의 동선(動線)을 따라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시간대 별로 서술하면서도, 동시에 유월절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지킬 것인가에 대한 상세한 지시 사항 때문에 수시로 흐름에서 일탈(逸脫)하고 있기도 하다(12:14-27; 13:5-14). 집이나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야 한다는 지시 사항은 출애굽 당시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지시사항 중의 많은 부분은 ‘가나안’ 정착 이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참고. 12:19, 48-49; 13:5-14). <구약>에서 유월절에 관한 언급은 여러 곳에서 등장한다. 유월절 축제에 관한 전체적인 그림을 얻기 위하여 다음 본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과연 어떤 차이와 유사성이 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출 12-13; 34:18; 레 23:4-8; 민 9:1-14; 28:16-25; 신 16:1-8; 수 5:10-12; 왕하 23:21-23; 대하 35:1-19. 유월절은 <신약>에서도 몇 군데 등장하고 있다: 눅 2:41-43; 고전 5:6-8. 그리고 “최후의 만찬”은 실은 유월절 식사였던 것이다(마 26:17-30; 막 14:12-26; 눅 22:7-23). ‘유대’인들은 오늘날에도 유월절을 지키고 있다. 다만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유월절 양은 잡지 않지만, 여전히 <구약> 속의 유월절 모습과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의 ‘나블루스’(Nablus)에 거주하는 ‘사마리아’인들은 지금도 유월절에 양(洋)을 잡는다.
적어도 <구약>에 관한 한, 유월절은 가장 중요한 종교적 축제이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한 국가로서 출범하는 일종의 광복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시기도 한 해의 첫 달에 있으며(매년 1월 1일), 할례를 받은 모든 이스라엘 인은 이 축제를 기념해야 하며, 이를 어기는 자는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12:2, 15, 19).
‘가나안’ 땅에서 기념할 미래의 유월절에 관한 지침을 서술한 후(13:1-16), 이야기는 다시 이어진다. 이어지는 내용은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들고 나오는 장면과(13:19; 참고. 창 50:25) 탈출의 경로에 관한 간략한 언급이다. ‘가나안’에 이르는 지름길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가나안’의 동쪽으로 가는 길이다(이 길은 흔히 “블레셋의 길”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길은 ‘이집트’ 군대가 지키고 있어 이스라엘은 우회로(迂廻路)를 택한다(아래 그림 참고). 그들은 동북 방향 대신에 남동 방향을 선택하는데, 오늘날 ‘수에즈’ 운하에 연해 있는 ‘Great Bitter Lake’를 향했다. 오늘날 지질학자들의 가정에 따르면, 이 호수는 출애굽 당시에는 홍해의 서쪽 날개 끝에 위치한 ‘수에즈’ 운하와 연결되어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이스라엘이 왜 출애굽 당시 ‘이집트’ 군대와 홍해 사이에 갇혀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출애굽기>에서 ‘얌숩’으로 칭하는 이 바다는 홍해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갈대의 바다”란 뜻으로서 실제적으로 호수 즉 ‘Great Bitter Lake’를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다.
출애굽의 경로에 관해서는 여럿이 알려져 있으며, 위 지도는 가능한 출애굽의 여러 경로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출애굽의 경로가 아니라,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 유명한 “홍해의 기적”을 가능하게 했던 완벽한 타이밍, 즉 바다가 갈라진 시점과 갈라진 물이 다시 하나로 합쳐지는 그 시점은 하나님의 임재와 섭리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집트’의 신(神)들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음을 증명한 셈이다. 그럼에도 ‘이집트’의 ‘바로’는 자신의 완고함으로 그의 군대를 바다 속에 수장(水漿)시켜버렸다. 바다를 건넌 ‘모세’와 이스라엘은 대적을 물리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바다의 노래”를 합창한다(15:2-8).
노래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노래는 우선 홍해에서 이집트를 물리치신 하나님에 관한 회고로 시작한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15:1).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히 지엽적인 규모에 그칠 수 없다. 즉 ‘야훼’ 하나님은 단순히 지상의 권력자들 위에 군림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신들 위에 뛰어난 분이시다. ‘모세’는 이점을 수사적(修辭的) 질문으로 노래한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11절).
홍해에서의 승리는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사건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그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약속의 표현이기도 하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17절).
출애굽의 경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그분의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노래는 끝나고 있다: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였더라”(18절). 시의 문체나 어휘로 미루어 이 시는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시인 것 같다. 이 노래는 이스라엘의 핵심 신앙을 드러내고 있어, 오늘날에도 매일의 아침 예배에서나, 유월절의 마지막 날(일곱째 날)에 출애굽 당시의 감격을 되새기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7. 시내 산을 향한 여정. ‘홍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처럼 위대한 노래를 부르도록 했으며, 하나님은 물론 ‘모세’에 대한 믿음도 고무시켰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14:31). 그러나 <오경>을 통해서 자주 만나듯이, 위대한 체험이나 믿음의 행위는 불순종과 반역으로 이어진다(참고. 창 12:20; 출 32; 레 10; 민 13-14).
홍해를 건넌 후 드러나는 세 개의 에피소드는 ‘모세’를 향한 이스라엘의 불평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들의 불평은 실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불평의 내용인 즉은 왜 자신들을 아무 것도 없는 사막으로 이끌어내어 결국 죽게 만드느냐는 것이다. 출애굽 삼일 후, 이스라엘이 처음 도착한 곳은 ‘마라’였으며, 여기서 그들은 물이 쓰서 마실 수가 없다고 불평한다(15:22-27).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변화시키신다. 출애굽 한 달 뒤, 도착한 곳은 ‘신’ 광야였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빵과 고기가 없다고 불평한다. 곧바로 ‘메추라기’가 하늘에서 떨어진다(16:13). 이 새는 꿩 종류로서, 그 지역에 도래하는 일종의 철새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메추라기’는 고기 대용으로서, 이스라엘의 주식(主食)은 될 수 없다. ‘만나’가 그들의 주식으로 대체되었는데, 이것은 “작고 서리같이 가는 것”(출 16:14)으로서, “깟씨 같이 희고 꿀을 섞은 과자 맛”(출 16:31)을 내는 것이다. 한 학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만나’는 그 지역에서 자라는 위성류(渭城柳) 과(科)의 나무에서 추출한 진액으로부터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물론 그와 같은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출애굽> 본문은 이 식물이 메추라기의 경우와는 달리 자연적으로 얻어질 수 있다고 암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만나’는 그 양(量)도 비정상적일 정도로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출애굽기>는 다시 한 번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유월절에 대한 설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모든 역사 기록은 현재를 위한 기록이다. 이스라엘의 불평과 불순종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이 에피소드는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드러내 내고 있는바, 안식일에 대한 원칙과 그 중요성이다. 이스라엘은 아직 ‘시내’ 산에 도착하여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기 전에, 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금요일 즉 안식일 하루 전에는 하나님께서 평소의 두 배에 해당하는 ‘만나’를 공급해 주셨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안식일에 그것을 구하러 나가거나 요리할 필요를 없애준 처사였다(22-30절).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에 관한 세 개의 연속적인 에피소드 중에서 마지막 것은 가장 심각하여, <구약>의 다른 곳에서도 언급하고 있을 정도다(예. 신 6:16; 시 95:8). ‘마라’에서의 경험과 ‘만나’에 대한 경험을 하고서도, 이스라엘은 ‘르비딤’이라는 곳에 이르러 또 다시 ‘모세’를 향하여 먹을 물이 부족하다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사악하고 도가 지나친 것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불평한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17:3). 이 불평은 단순히 ‘모세’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 전체에 대한 반역이자 거부 행위나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바위를 쳐서 물이 나오게 하여 백성들에게 공급해준다.
이스라엘이 ‘르비딤’에서 겪은 문제는 단순히 마실 물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 도착하기도 전에 멸망당할 수도 있었을 맹렬하고도 무모한 ‘아말렉’의 공격이 그것이다(참고. 신 25:17-19). 그러나 이번에도 이집트의 경우에서처럼 하나님은 ‘모세’의 막대기를 통해서 거룩한 권능을 나타내 보이신다(17:8-14).
‘시내’ 산을 향한 여정의 마지막 길목에서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출애굽기> 본문(18장)과 <오경>의 다른 본문(예. 민 10:11, 29-32; 신 1:9-17)에 따르면, ‘이드로’가 와서 머물다 떠난 시기는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은 이후다. 그런데 이 에피소드가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은 없다. ‘이드로’의 경우처럼, ‘겐’ 족속(즉 ‘미디안’ 족속)은 이스라엘에 때로는 우호적이기도 했고, 또 적이 되기도 했다. 이와 비슷한 사례를 <사무엘 상>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15:6), 이곳에서도 ‘아말렉’ 족속에 앞서 ‘겐’ 족속을 언급하고 있다. ‘미디안’ 족속은 ‘아브라함’의 두 번째 아내인 ‘그두라’의 후손으로서(창 25:2), 이들도 율법 계시의 현장에 함께 있어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추측건대,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은 이후에도 그것이 제대로 실행에 옮겨지고 있는지 등과 관련해서 ‘모세’는 여전히 ‘이드로’의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4.2. 제 2부: 율법
1. 시내 산의 계시. 이야기로서 <출애굽기>의 첫 번째 절정의 봉우리가 홍해에 있었다면, 두 번째이자 보다 중요한 봉우리는 ‘시내’ 산이다. 이스라엘은 이 산에서 율법을 받는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이곳에서부터 <민수기> 9장에 이르기까지 전체 이야기를 지배하는 핵심 내용으로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전체 이야기는 산 하나의 봉우리가 아니라 긴 산맥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내’ 산에서의 첫 번째 계시에서 결코 놓칠 수 없는 극적 요소가 있다. 그것은 하나의 이야기가 거의 시(詩)가 되었다는 점이다.
‘시내’ 산의 계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에 ‘시내’ 산에 도착했다는 언급과 함께 갑자기 시작된다. ‘모세’는 즉시 산 정상으로 오라는 부름을 받고, 그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으려하는 언약의 핵심을 정리해서 말씀하신다:
4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19:4-6)
요점은 크게 네 가지다. 첫째, 언약은 하나님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분은 마치 거대한 독수리처럼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어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둘째, 이스라엘은 이제 자신들에게 주어질 언약을 충실히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셋째, 순종에 대한 보답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즉 그들은 왕관에 박힌 보석처럼 하나님의 귀한 소유가 될 것이다. 넷째, 이 특별한 관계는 땅의 다른 족속들에게도 유익이 될 것인바, 이스라엘이 모든 민족들에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사장의 역할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전하며,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참고. 창 12:3; 신 4:5-8).
언약의 서문(序文)을 소개받은 이스라엘은 이제 그들 자신이 하나님과 만날 준비를 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레위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듯이, 하나님은 거룩하신 존재로서 누구도 스스로를 완전히 깨끗하게 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그들에게 요구되는 청결의 전제는 예컨대, 의복을 청결하게 하고, 성(性) 관계를 자제하고, 그 산에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다. ‘시내’ 산은 이제 곧 거룩한 장소가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허락한 자만이 그 경내에 들어갈 수 있다. 성막과 마찬가지로(25-30장), ‘시내’ 산도 세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산의 정상(頂上)은 성막의 지성소(至聖所)에 해당한다. 이곳은 가장 거룩한 곳으로서, ‘모세’만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접근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산의 나머지 지역은 성소(聖所)에 해당한다. 이곳은 소수의 성별된 자들, 즉 제사장이나 장로들만이 접근할 수 있다(출 24장). 그리고 산 기슭은 성막 뜰에 해당한다. 이곳은 일반 백성에게 허용된 곳으로서, 희생 제사를 드릴 제단도 이곳에 있다.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도록 삼일의 준비 기간을 준 후, 하나님은 산의 정상에서 불과 구름을 동반한 천둥과 나팔 소리 가운데 나타나셨다. 일부 표현은 ‘시내’ 산에 화산이 폭발한 것과 같은 인상을 받게 한다: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19:18). 그러나 이와 같은 표현은 인간의 접근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상징적이고 수사적인 표현이다(참고. 19:21-24).
2. 십계명. 십계명은 ‘시내’ 산 언약의 핵심이며,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장 권위 있는 말씀으로 인식되고 있다. 다른 모든 율법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고 말하지만, 십계명에 대해서만큼은 하나님의 손가락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고 말하고 있다(출 31:18; 34:1, 28).
<출애굽기>의 신학
(1) ‘이집트’와 출애굽, (2) ‘시내’산과 율법, (3) 광야의 장막. 이들 세 쌍의 묶음은 <출애굽기>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장소와 사건을 요약해 주는 용어들의 조합이다. 우리는 이로부터 이 책의 일관되고 핵심적인 신학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출애굽기>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그리고 일관된 통일성은 신학적 통일성일 것이다.
1. 야훼
총론.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신 이름이다. <출애굽기>의 신학적 통일성의 핵심은 다름 아닌 “야훼 신학”이다. “야훼 신학”이라 함은 ‘야훼’ 하나님의 임재, 즉 그분께서 그 백성과 함께 하시며, 그들 가운데 계신다는 신학을 일컫는 용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도, 기적도, 교훈도, “야훼 신학”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이 주제는 이 책 전체 신학의 닻이자, 동시에 이 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일종의 나침반이다.
사실 <출애굽기>의 구조는 ‘야훼’의 강림에서부터 시작하여,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일련의 동심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1) ‘모세’에게(3-4장); (2) 모든 이스라엘에게(19, 20, 24장); (3)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모세’에게(32-34장). 즉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신학은 (1) ‘이집트’에서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2) ‘시내’ 산에서는 율법의 계시를 통해서, 그리고 (3) 광야에서는 성막을 통해서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참고. 구조 분석 도표).
이집트에서. ‘이집트’의 삼각주(三角洲)에서 ‘야곱’의 후손이 번성하고, 또 그 조상들과의 약속이 성취된 것은 ‘야훼’ 하나님께서 그 백성 가운데 계셨기 때문이었다(참고. 출 1:7, 20). 그리고 ‘이집트’에서 드러난 일련의 기적들, 즉 극적인 능력의 행위들은 ‘야훼’의 활동을 반복해서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 대상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이지만, ‘이집트’ 백성도 예외일 수 없었으며, 궁극적으로 ‘이집트’의 고관들과 ‘바로’ 왕 자신도 ‘야훼’의 권능을 확인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참고. 7:1-5, 14-17, 25; 8:1-4; 8:12-15; 8:21-24; 9:1-7, 12, 13-18, 23-26; 10:1-6, 12-15, 16-20, 11:4-7; 12:12-13, 23, 27, 29-30, 36).
‘야훼’, 즉 “하나님(‘엘로힘’)의 존재하심”이 그 백성을 ‘바로’ 왕으로부터 탈출시켜 적절한 길로 인도해 주셨으며(참고. 13:3, 17-18, 21-22), 이후 추격해 오는 ‘바로’의 군대와 탈출하는 이스라엘 사이에 보호막을 쳐주었고(참고. 14:19-20), 또한 바다 물을 갈라 이스라엘이 물에 젖지 아니한 채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지켜주는 한편, 뒤쫓아 오는 ‘바로’의 군대는 바닷물 속에 수장(水漿)시켜버렸다(참고. 14:21-31).
시내 산에서. ‘이집트’를 떠난 지 3 개월 후에, 이스라엘은 ‘시내’ 산에 도착한다. 이제 이스라엘은 이곳에서 거의 2년을 보내게 될 것이다! 놀랍게도 이 책의 나머지 부분과 <레위기>, 그리고 <민수기>의 첫 열 장에 기록된 모든 내용들은 이스라엘이 이곳에 있을 때 있었던 일들이다. 흔히 “시내 산 이야기”로 알려진 부분에서 가장 첫 번째 에피소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 즉 율법을 주신 일이다. 이 때 하나님은 자신을 천둥과 구름과 연기 가운데 드러내심으로써(참고. 19:16-19), 그분의 임재를 알리셨다. 즉 ‘야훼’는 거룩하시고 두려운 존재로서, 그 산 역시 거룩한 장소가 되었으며, 백성은 당연히 두려워 떨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율법의 거룩함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모세’는 산 정상으로 올라가 ‘야훼’로부터 십계명(20:1-17)과 소위 “언약의 책”(20:22-24:18)을 받는다. 율법과 언약에 관해서는 <출애굽기>의 신학에서 논하게 될 것이다.
광야에서. ‘야훼’의 존재를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와 제도가 성막(참고. 35-40장)과 성막 예배(참고. 25-31장)이다. 그리고 <출애굽기>의 상당 부분이 이 둘에 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책의 세 번째 단락에 해당된다(25:1-40:38). 이 단락은 주로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분의 명령은 길고도 상세하며, 많은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성막이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치명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성막은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가시적인 상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 번째 단락은 성막을 건설할 재료들을 준비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한다(25:1-9). 과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이들 값비싼 재료들을 갖출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금ㆍ은 보화 등을 탈취했다는 이야기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참고. 12:33-35). 일견 비윤리적인 도적질로 보일 수도 있는 이스라엘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 3부의 나머지 부분은 성막의 각 부분, 기구들, 그리고 제사장의 의복 등에 관한 지시사항으로 이루어져 있다(5:10-31:18). 그리고 이에 관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떻게 수행하였는지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뒤를 잇고 있다(35:1-40:38). ‘야훼’께서 장막 속으로 들어가 정착하신 것은(40:34-38), 그 일이 적절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마침내 그의 백성들 사이에서 항구적으로 거주하시게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예배나 제사는 원래 살아있는 자에게 드리는 것이다. ‘다윗’과 ‘솔로몬’은 ‘야훼’께서 ‘예루살렘’에 계시게 된 것을 경배하면서, 그것을 보다 정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이 모든 제도와 의식들이 살아계신 성막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모형(模型)에 불과했음을 드러내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2. 구속과 언약
“야훼 신학”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두 가지 주제가 바로 “구속”(救贖)과 “언약”(言約)이다.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구원의 필요성을 증거하는 것이며, 또 그것을 실현시켜 주는 것이다. 언약은 구속에 대한 당연한 반응일 뿐이다. 즉 그에 대한 감사와 계속되는 인식의 표출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구속과 반응을 한데 묶으면 존재가 된다. 즉 구속과 반응을 일으킨 원인이 곧 ‘야훼’의 존재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그의 백성들과 함께 하면서, 그분을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공급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며, 훈련시키시는 분이시라는 선언이다.
<출애굽기>가 만약 <성경>의 첫 번째 책이라면,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통해서 ‘야훼’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자이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창조주 하나님도 되심도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이 경험한 가장 중요한 신학적 출발점이 된다 하겠다. <구약>의 거의 모든 책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더 나아가 출애굽 사건은 이후의 역사에서 추가적인 의미도 덧입게 되었다. 예컨대, “바벨론 유수”로부터의 귀환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자들의 구원을 제 이, 제 삼의 출애굽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존재하시는 ‘야훼’ 하나님은 시공(時空)을 뛰어넘는 신실한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4:14전).
열 가지 재앙. 열 가지 재앙도 구속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며 방법일 뿐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구원은 동시에 이를 거부하는 ‘이집트’에 대한 심판이기도 하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참고. 5:2).
하나님의 힘과 권위, 그리고 ‘바로’의 고집스럽고 강퍅한 힘과 권위 사이의 극적이고도 고전적인 대립이 이어 등장한다. 이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힘과 권세는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 재앙들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바로’(7:5)는 여호와가 누군지를 알게 되었으며(참고. 6:7; 7:5), ‘바로’는 이스라엘을 마지못해 보내게 된다(참고. 7:8-13:16). 마지못해서 이스라엘을 내보낸 행동은 곧바로 후회로 나타나서 결국 ‘바로’ 자신의 종말로 이끌어 간다.
처음 아홉 가지의 재앙들은 상호 연결되어 있으나(참고. 7:8-10:29), 열 번째 재앙과는 분리되어 있다. 또한 처음 아홉 재앙은 각각 세 개 씩 묵음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인데, 각 각의 특징을 아래 도표에서 관찰할 수 있다(참고로 이 기록들이 오랜 기간의 구전 및 전승의 결과일 것이라는 점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들 각 재앙은 일견 인과(因果)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첫 번째 묶음의 경우, 재앙은 과도한 강우로 인해서 ‘나일’ 강이 비정상적으로 범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극도로 높은 수위의 물결은 ‘아비시니아’와 ‘에티오피아’ 고원(高原)의 붉은 빛의 토양과 함께 붉은 색의 편모충(鞭毛蟲)들도 씻겨 내린다. 그 결과 ‘나일’강은 붉고 탁하게 변하고, 고기들이 죽게 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재앙 1). 죽은 고기 떼는 개구리로 하여금 강변을 떠나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며(재앙 2), 이들 개구리는 ‘바칠루스 안트라치키스’(Bacillus anthracis)라는 병원균으로 감염될 수 있으며, 갑작스러운 죽음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재앙 3과 재앙 4는 모기와 ‘스토목시스 칼치트란스’(Stomoxys Calcitrans)일 가능성이 있다. 이들은 ‘나일’ 강의 홍수가 물러가고 난 뒤, 고인 물웅덩이 속에서 자유스럽게 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축들의 죽음(재앙 5)은 “탄저 열”(anthrax) 때문일 것이며, 죽은 개구리들로 인한 오염이 그 원인이 될 수 있다. 인간과 가축들의 독종(재앙 6)은 피부 탄저병으로서, 주로 네 번째 재앙의 파리 떼로부터 전염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때 쯤 해서 내린 우박과 뇌우는 삼과 보리를 망쳐 놓았을 것이다(재앙 7). 하지만 밀과 나맥은 메뚜기 떼를 위해서 남겨 놓았을 것이다(재앙 8). 엄청난 숫자의 메뚜기 떼는 최초의 홍수를 야기 시킨 ‘아비시니아’ 고원의 비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짙은 어둠(재앙 9)은 특별히 아주 심한 ‘밤신’ 때문인 것으로 보면 된다(참고. 2월 말 또는 3월 토에 남쪽으로부터 이집트를 강타하는 모래폭풍으로서 2~3일 정도 계속됨). 이 폭풍이 더욱 악화될 수 있었던 것은 범람으로 인한 진흙더미로부터 나온 두꺼운 층의 미세한 붉은 먼지들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기적이 아무리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라고 해도, 여전히 이들 사건들을 기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 “시기”(timing)에 있다. 즉 이들 모든 사건들이 ‘모세’가 ‘바로’와 대면하던 그 시기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자연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가공할 재난은 유월절 식사, 무교절, 그리고 처음 난 것들에 대한 대속의 규정을 다루고 있는 매우 복잡한 본문 속에 등장하고 있다(참고. 12:1-13:6).
유월절. 이스라엘은 출애굽 전날 ‘이집트’에서 가졌던 마지막 식사에서 각 가족대로 어린 양을 잡아,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은 채 나누어 먹었다(참고. 12:1-14). 이것이 유월절의 시작이었다. 이스라엘은 여행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그것을 먹었다. 이 때 도살한 양의 피는 문설주와 인방에 바름으로써 그 집이 이스라엘 사람의 것임을 알린 것이었고, 하나님은 그 피를 보고 그 집을 넘어갔다. 희생제물과 함께 먹었던 것은 무교병과 쓴 나물이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떠나면서 누룩이 섞이지 않은 밀가루를 가지고 떠났으며(34절), ‘숙곳’에 도달해서 그것을 구워 먹었다. 이와 같은 준비 과정 역시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서둘러 떠났음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훗날 무교절을 통해서 이 모든 절차를 재현하였다.
유월절은 ‘히브리’어 동사 ‘페사흐’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의미는 불분명하다. 동사 형태로 이 단어는 세 곳에서만 등장하고 있으며( 12:13, 23, 27), “지나치다, 또는 남겨두다”(pass over, spare)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학자들은 “유월절 양”을 잡는 행위가 당시 유목민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전해오던 관습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의 의미가 무엇이었든 간에, 출애굽 이후로 이 절기는 ‘이집트’로부터의 극적인 구원을 기념하는 것으로 재해석되었다. ‘가나안’ 입성 이후 이 절기는 가족의 명절로 지켜졌으며, 성전 건물이 세워진 이후는 순례절기 중의 하나로 굳어졌으며, 양을 도살하는 의식은 성전 내에서 행하여졌다(참고. 신 16장).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사적으로 공동으로 식사를 나누었으며,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후에는 희생제사는 사라져버린다. 그러나 제도 자체는 여전히 가족의 명절로 남게 되었다. 예수님이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념했던 최후의 만찬도 유월절 식사를 흉내 낸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이 때부터 그 의미는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기념하는 영원한 언약으로 재정립 되었다.
3. 율법
의의. ‘야훼’께서는 “출애굽”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와 임재를 드러내셨다. 그리고 그 후 홀연히 사라지신 것이 아니다. “그 땅”을 향한 여정 내내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과 함께 하시며, 인도하셨다. 이 여정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한 한 사건을 들자면, 출애굽 이후 3개월 되던 시점에 있었던 ‘시내’ 산 에피소드가 그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다시 한 번 그분의 권능과 위엄을 드러내셨는데,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시기 전에, 먼저 구름과 연기와 천둥소리 가운데 그 산에 임하셨다. 그와 동시에 백성의 죄를 상기시키셨다(출 19). 이 모두 율법의 거룩함과 지엄(至嚴)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제 그 산은 거룩한 산이 되었으며, 이 백성은 하나님을 대면할 준비를 했어야 했는데, ‘모세’와 ‘아론’ 만이 그 산에 가까이 갈 수 있었을 뿐이다.
율법은 한 마디로 글로 기록된 하나님의 뜻이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그분의 의지표명인 것이다. 하지만 율법은 그 자체로서 다루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때문이다. 이 책 19-24장은 다름 아닌 이 언약에 관한 내용이다. 이 본문의 서두(序頭)에 등장하는 역사적 서언(序言)(20:2)을 통해서 율법을 주신 이가 자신의 은혜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분이심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20-24장에 등장하는 율법은 <구약> 내에서조차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맺어주는 전제 조건이 아닌 것은 분명해진다. 오히려 율법은 그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하나의 지침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출애굽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돌아보게 하며, 동시에 약속의 땅에 대한 정복과 정착을 전망하게 해준다.
구분. 율법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십계명>; (2) <언약 집>. 이 중 <십계명>이 먼저 등장하고 있으며(20:3-17), 그 형식은 청중들을 향한 직접적인 연설이다. 내용적으로는 첫 네 계명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반면, 나머지 여섯 계명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한편 <언약 집>을 구성하고 있는 각종 다양한 계명들은 <십계명>에서 천명(闡明)한 기본 원리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언약 집>으로 불리는 책 이름은 본문 24:7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언약 집>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의 문화ㆍ사회적인 상황에서 <십계명>을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즉 <십계명>과 <언약 집>의 관계는 전자(前者)가 기본 원리에 대한 선언이라면, 후자(後者)는 이들 원리를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관한 규례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사람을 받아 죽인 소에 관한 규례(21:28-36)는 농경사회(農耕社會)에서 <십계명> 중 여섯 번째 계명을 어떻게 적용할 지를 규정해 주고 있다. 그리고 안식년과 안식일에 관한 법(23:10-13)은 안식에 관한 네 번째 계명을 보다 구제적으로 예시해주고 있다.
4. 성막
의의. 앞서 언급한 바처럼, 이 책의 세 번째 단락(25-40장)은 거의 대부분 성막(聖幕)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성막>의 신학에 대해서는 <레위기>와 <민수기>에서 반복해서 다루게 될 것이다.
성막은 ‘모세’ 이후 ‘다윗’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지상에 계신다는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즉 비가시적(非可視的)인 하나님께서 가시적(可視的)인 모습으로 지상에 거주하고 계시는 상징이 성막이라는 말이다. 당연히 “성막의 신학”은 <출애굽기>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이처럼 성막이 갖는 신학적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성막이 건설되기까지의 역사의 전(全) 과정을 고찰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변천사. 태초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원하기만 하면 언제나, ‘에덴’ 동산 내 어디서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가 일어났으며, 이제 하나님과는 더 이상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없게 되었다(‘에덴’으로부터 두 사람이 쫓겨나는 장면을 통해서 ‘에덴’은 성막을 예표(豫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타락 이후의 모든 인류에게 공통되는 현상으로서, 하나님은 그분께서 지정하시는 특별한 장소에서만 만날 수 있었다.
예컨대, 족장 시대에는 한 가족의 가장이 제단(祭壇)을 세워 그곳에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참고. 창 12:8; 13:18). 그런데 출애굽 시대에 이르러 하나님의 백성은 더 이상 한 가족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 내지는 민족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제단은 더 이상 유용한 예배 장소가 될 수가 없었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을 건설하도록 명했으며, 성막 예배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만나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성막은 한 곳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목민족의 특성 상 이동에 편리하도록 설계되었다. 짓고 헐기에 편리하도록 설계되었다는 말이다. 이 같은 성막의 유동성(流動性)은 이스라엘이 한 곳에 머물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성막이 고정된 건물, 즉 성전(聖殿)의 형태로 변천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 정착한 이후부터였다. 이제 하나님은 보다 영구적(永久的)인 주거의 형태를 갖추게 될 것인데, 구체적인 시기는 ‘솔로몬’ 시대, 즉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정복을 끝냈을 시점이었다(참고. 왕상 6-8).
‘시내’ 산에서 ‘솔로몬’에 이르기까지 성막은 “하나님의 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은 바로 이곳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므로 당연히 거룩한 장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성막의 위치나 구조, 구조물과 주변 기구들, 기타 접근과 관련된 제반 규정들이 하나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강조하고 있다.
설계와 배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진(陣)을 치고 있을 때는 성막은 진영(陣營)의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으며, 각 지파는 동서남북 중에 지정된 위치에서 성막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 같은 진영의 배치는 고대 근동의 군대 배치와 흡사한 것으로서, 하나님을 왕으로, 그리고 이스라엘을 군대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군대가 행군 시에는 왕이 가장 앞서 군대를 진두지휘하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행진 시에는 진영의 한 가운데 있던 성막 내 지성소(至聖所)의 언약궤가 가장 앞서 나와 이 백성을 인도하게 된다.
성막의 설계 또한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 도시한 성막 관련 천연색 그림들은 빠른 이해를 위하여 Lao Han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sbhanbr/22)와 Google 등에서 무단으로 인용하였다.
즉 성막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있었다: (1) 성막 뜰(출 27:9-19); (2) 성소; (3) 지성소(출 26:31-35). 그리고 성막 밖에서 성막 뜰, 그리고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갈수록 거룩의 정도는 심화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진영 밖은 이방인의 거주지로서 정결하지 못한 장소로 규정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도 제의적인 관점에서 오염되었을 경우에는 일정기간동안 진영 밖에서 머물러야만 했다. 또한 이스라엘 중에서도 ‘레위’지파 만이 성막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동서남북으로 둘러싸고 있을 수 있었다(<민수기>의 그림 참고). 단순히 사람뿐만 아니라, 성막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나 기구들도 당연히 그것들이 존재하는 위치에 따라 거룩함의 정도가 달라야 하기 때문에, 그 가치도 다른 것으로 구성되어있었다. 즉 지성소에 가까울수록 더 값비싼 재료들을 사용하였다.
예컨대, 성막의 가장 바깥 부분(“윗덮개”로 부름)은 “해달”(sea cow)의 가죽으로 만들었는데(26:14), 이 가죽은 기능적인 면에서 볼 때 내구성(耐久性)이나 방수성(防水性)이 가장 뛰어나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한두 층의 “내부 덮개”로 염소 털과(26:7)과 붉게 염색 처리된 숫양 가죽이 사용되었다(26:14). 그리고 성막의 가장 “안쪽 덮개”는 가장 비싸고 정교하다: “가늘게 꼰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26:1). 이 “안쪽 덮개”는 성막 안에서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늘의 청색과 천상의 존재인 ‘그룹’ 등은 지상에 존재하는 천국을 묘사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언약궤에 가까울수록 사용되는 재료는 더 값비싼 것이었다.
이 같은 원리는 성전 건물 구조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구리나 은이 성전 “바깥 뜰” 치장을 위한 것이라면(참고. 27:9-19), 금이나 순금 등은 성막 내 기구들을 위한 것이다: (1) 언약궤(25:10-22); (2) 테이블(25:23-30); (3) 등잔대(25:31-40). 이 같이 값비싼 재료들을 성막 구조물이나 기구들을 만드는데 사용했다는 사실 자체도 그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막에 접근할 수 있는 일련의 규칙들 또한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하고 있다. 즉 성막은 지성소를 중앙에 두고 일련의 “거룩한 동심원”으로 겹겹이 싸여있는 형태로서, 각 동심원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나 규정이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민수기>의 성막에 관한 도표를 참고할 수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성막 바깥뜰은 부정(不淨)한 이방인의 영역이다. 그리고 성막과 가장 가까운 곳은 특별히 성별된 ‘레위’인들의 몫이다. 이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가장 지근(至近)에서 진영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레위’ 지파는 성막과 다른 영역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레위’인이라 해서 무조건 이와 같은 성막 지기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레위’ 지파 중 ‘아론’의 후손들에게만 허용된 것이었다. 그러나 지성소의 경우는 현직에 있는 대제사장만, 그것도 일 년에 단 한 차례, 대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을 뿐이었다(참고. 레 16).
장막은 하나님의 집인 만큼, 여느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가구나 집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언약궤”(言約机)와 “황금촛대”를 꼽을 수 있을 것인즉, 이 둘 모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언약궤는 그냥 단순한 상자이며, 양쪽에 고리가 매달려 있어 막대기를 그곳에 끼워 운반하기에 용이하게 만들었다. 언약궤는 보기에 단순한 상자이지만, 값비싼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었으며, 상자 안팎으로 금박을 입혀놓았다. 그 외에도 상자의 덮개 양쪽에 두 ‘그룹’을 두었는데, 이 둘은 궤위에서 날개를 편 채 아래를 내려다보도록 만들었다. 장막 전체에서 언약궤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 볼 때, 이들은 언약궤를 보호하는 천상(天上)의 존재를 상징하고 있다 하겠다. <역대기>는 언약궤를 “하나님의 발판”으로 묘사하고 있는가하면(대상 28:2),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보좌” 그 자체로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렘 3:16-17). 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그분의 언약궤 위에 앉아 계시고, 그룹은 그분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광채(光彩)를 가리기라도 하듯 땅을 향해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황금촛대”(참고. 25:31-40)의 정확한 형태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은 있지만 위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가지와 ‘아몬드’ 꽃이 달린 나무 형태를 하고 있다. 이 나무가 ‘에덴’ 동산의 생명나무를 연상시킨다 하여, 이 역시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장막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그 땅을 향해 여행 하는 기간 내내 말이다.
5. <출애굽기>와 <신약>
출애굽. <시편>이나 <예언서>는 출애굽 사건을 회고하면서, 이를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행위로 찬양하고 있다(예. 시 105; 106; 114; 사 11:11; 겔 20; 호 11:1). 따라서 <신약>에서 이 동일한 사건을 “그리스도 복음”의 예표(豫表)로 이해하고, 해석한다 해서 전혀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예컨대, <마가복음>(1:2-3)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시작을 <이사야>와 <말라기> 예언의 성취로 이해하고 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말 3:1)
침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 길을 예비하는 자이며, 그리스도는 사역의 시작 단계에서 침례를 받으심으로써, 이를 출애굽에 대한 “유비”(類比)로 활용하시고자 한다. 즉 예수께서는 침례를 받으심으로써, 이스라엘의 홍해 사건을 체험하신 것이다(참고. 고전 10:1-6). 그리고 다음으로 기대되는 그분의 행동은 무엇일까? 광야의 체험일 것이다. 이스라엘 광야 40년을 연상시키듯 그분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유혹에 맞서 싸운다(마 4:1-11). 이곳에서 그분이 대적하여 싸운 세 가지 유혹은 모두 놀랍게도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직면했던 유혹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유혹을 이기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 ‘사탄’을 대적하며 사용하셨던 무기는 ‘모세’의 연설문에서 발췌한 것이다(신 8:3; 6:16; 6:13). 연설의 내용인 즉은 이스라엘이 만날 수 있는 실패에 대한 경고와 권면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님의 침례와 출애굽 사이의 유비가 더욱 확실해 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두 유비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스라엘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가셨던 그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배반과 불순종이 아닌 순종과 믿음의 길 말이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山上垂訓)은 또 다른 중요한 유비가 될 수 있을 것이다(참고. 마 5-7). <누가복음>의 산상수훈과 차이가 있다면, 장소의 차이이다. 즉 ‘마태’는 그 장소를 “산”(山)으로 소개하고 있는 반면, ‘누가’는 “평야”로 소개하고 있다(참고. 눅 6:17).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셔서 이 말씀을 하신 것과, ‘야훼’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신 것과는 흥미로운 연관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예수님의 지상 사역 간에 많은 유사점이 있지만, 무엇보다 극적인 사건은 예수님의 “수난”(Passion)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의 양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마 26:19; 막 14:16; 눅 22:13; 고전 5:7).
그리스도의 출애굽 경험은 그분의 제자들의 경험과 무관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 개개인도 침례를 통해서 홍해를 건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고전 10:1-2). 그리고 성도의 침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참고. 롬 6:3-5). 이제 우리에게 출애굽의 남은 경험이 있다면, 광야 생활과 약속의 땅에 대한 약속일 것이다. <히브리서>는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교훈 삼아 그들의 길을 따르지 말고, 그리스도의 경험을 좇아가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참고. 히 3:7-4:13; 히 11:23-28).
율법.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 한 이후 겪는 가장 큰 사건이 ‘시내’ 산에서 일어났다. 이 일은 이스라엘이 탈출한 지 3 개월 후에 일어났으며, ‘야훼’ 하나님께서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임재를 알리신 사건이기도 하다. 즉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한 그분의 “율법”을 통해서 드러내신 사건을 말한다.
그렇다면 <신약>에서 율법은 과연 무엇인가? 오늘날 교회는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서 여전히 필요한 것일까? 즉 하나님의 언약과 그에 따른 율법은 <구약> 시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효력을 지니며, 따라서 이 법을 어기는 자에게는 상응하는 처벌을 내려야 하는가?
이 같은 주장을 흔히 “신율주의”(神律主義; theonomy)라 부르는데, 1970-80년 대 사이에 개혁교회와 오순절 교회 진영에서 잠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최근 들어 그 영향력을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일부 기독교회의 지지를 받고 있다. 신율주의는 기독교재건주의(Christian Trconstructionism)의 한 요소인데, <성경>적 기준에 따라 사회를 재건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모세’의 율법이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이들도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율법이 구원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대한 과도한 주장은 오해를 불러오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세’의 율법이 <신약> 시대에 와서 쓸모없게 되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신약>의 성도들에게 윤리ㆍ도덕적 지침을 마련해주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현대 사회의 제반 문제들에 대한 “성경적 세계관”을 마련함에 있어 율법을 하나의 가이드라인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이혼이나 낙태의 문제에 대해서 <십계명>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동성애에 대한 율법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도적질이나 살인에 대해서는? 그리고 핵전쟁에 대해서는?
율법에 관한 <신약>의 가장 놀라운 선언은 예수께서 율법의 모든 요구들을 다 충족하셨고, 완성하셨으며, 그로 인해 그를 따르는 모두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시키셨다는 사실이다(참고. 롬 7). 예수님의 <산상수훈>만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예수님은 곧 하나님 자신임을 깨달을 수 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 외는 그 모든 율법의 요구들을 이루실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율법은 단 한 번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수단이 된 적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하나님의 지침이 될 뿐이다.
성막.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상징이라고 누누이 설명한 바 있다. <구약>에서 성막은 이스라엘의 삶과 신앙에서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능은 제한적이고 한시적(限時的)이었을 뿐이다.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성막은 보다 견고하고, 지속적인 성전으로 대체되긴 했지만, 이 역시 영원할 수는 없었다.
이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성막이나 성전의 역할이나 기능은 어디까지나 실체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원한 실체를 기대하고 바라보게 한다는 사실이다(참고. 히 9:1-28). 영원한 성막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다. 이 영원한 성막에 대해서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웅변적으로 선포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본문 중에 “거하다”는 동사는 직역하자면 “장막을 치다”는 뜻으로서, 주목해야 할 단어이다. <구약> 시대에 눈에 보이는 성막과 성전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시청각적 보조 자료였다면, <신약> 시대에 살과 피를 가지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시청각이 되셨으며, 영원한 예루살렘 성전이기도 하다(참고. 계 21-22). 그리고 그분께서 돌아가신 이후 성도 개개인은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연습과 토의
1. <출애굽기>는 어떤 종류의 책인가? <오경> 내에서 기능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책을 진정한 의미에서 “시작의 책”이라고 하는데,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2. 출애굽은 역사적 사실인가? 사실이라면 그 증거들은 어디에 있는가? 출애굽 사건과 관련하여, <성경>의 기록을 제외한 어떠한 역사적 증거도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믿음과 객관적 증거에 대한 나의 입장은 무엇인가?
3. 고고학(考古學)과 <성경>: 이 과를 읽고 난 후, 고고학에 대한 나의 인식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고고학은 <성경>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나 현상을 지지하고 있는가? 또는 반대하고 있는가?
4. 출애굽의 시기에 대한 논쟁을 알고 있는가? 이른 바 “이른 출애굽”(주전 15세기)과 “늦은 출애굽”(주전 13세기)의 두 입장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는 문제는 과연 신학적으로 중요한 문제일까?
5. 출애굽 사건과 관련하여 <성경>의 기록을 제외한 어떠한 역사적 증거도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나는 입장은 어떠한가? 믿음과 객관적 증거에 대한 나의 입장은 무엇인가?
6. <출애굽기>는 문학적으로 어떤 유형의 책인가? 이 책에서 가장 두드러진 문학 양식은 어떤 것인가?
7. <출애굽기>는 지리적으로나 또는 신학적으로 크게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구조 분석을 통해서 각 단락의 주제를 파악해 보자.
8. <출애굽기>를 관통하는 핵심 신학적 주제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임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세 단락에서 이 주제가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는지 파악해 보자. 사용하고 있는 상징이나 이미지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이름 ‘야훼’가 주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9. “존재의 신학”, 즉 “하나님의 임재”가 언약이나 율법에 어떤 빛을 제공해주고 있는가? 상호 관계는 무엇인가?
10. <출애굽기>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구속”(redepmtion) 행위를 단순히 정치ㆍ사회적으로 억눌린 자의 해방이라는 관점에서만 이해하려는 이른 바, 해방신학이라는 사고 체계가 있다. 해방신학에 대한 나의 입장은 어떠한가?
11. <출애굽기>의 핵심 주제인 “하나님의 임재”가 <구약> 전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계시되었으며, 시대를 따라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 왜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를 시대에 따라 다르게 계시하셨을까?
12. 그리고 <신약>에서는 이 주제를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 예수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계시하고 있는가? <신약>의 성도는 다음 단어들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 “성전”(聖殿); “성지 순례”(聖地 巡禮). 보수적 유대인이나 일부 기독교인들조차 새로운 성전이 세워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생각하나?
참고한 책들
1. <출애굽기>는 어떤 종류의 책인가? <오경> 내에서 기능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책을 진정한 의미에서 “시작의 책”이라고 하는데,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제 12장: 신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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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구약> 사건의 중심이 되는 “출애굽”은 ‘야훼’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행위로서, 이를 경험한 이스라엘은 이제 ‘시내’산 아래에 진(陳)을 쳤다. 이 백성은 이 산에서 천둥과 번개를 보고 들었으며(출 19:16-19), ‘야훼’ 하나님은 자신의 “계명”을 주셨다(20:1-17). 그리고 선언하셨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이 선언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황송하게도 스스로를 “언약”(言約)의 틀 속에 자신을 구속(拘束)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물론 이스라엘도(자발적이긴 하지만) 당연히 그 틀 속에 스스로를 묶어야만 할 것이었다. 언약이란 앞에서도 밝혔듯이 새로운 관계의 형성을 뜻한다.
그러나 이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스라엘은 영원히 이 산에 머물 수가 없다. 그들의 목적지는 이곳 황야가 아니라 바로 “그 땅”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 주변 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어야만 할 것이다. 구별된 삶, 즉 “거룩함”을 보여주어야만 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거룩한 삶”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즉 거룩한 삶의 가시적인 모습이 어떻게 드러나야 할 것인가? 이스라엘이 규칙적으로, 그리고 항시적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일련의 제의(祭儀)를 통해서이다. 이스라엘은 ‘야훼’ 하나님께서 제정(制定)해 주신 제의를 통해서 (1)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방식(the way to God)과 (2)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the walk with God)을 보여주어야만 할 것이었다.
<레위기>의 문학
<레위기>의 문학적 특징과 관련된 질문은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구조와 단락 분석에 관한 것으로서 전체 구조를 여섯 단락으로 볼 것인지 또는 두 개의 단락으로 단순화 시킬 것인지에 관한 문제이다.
1. 명칭
<오경>의 다른 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헬라’ 식 이름과 ‘히브리’ 식 이름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히브리’ 식 명칭은 책의 첫 문장에서 따온 “그리고 그가 부르셨다”(와이크라)(1:1)이며, 책의 ‘헬라’ 식 명칭 <레위기>는 <칠십인 역>의 제목, “레위 족속에 관한 책”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레위기>는 책의 이름으로 적절치 못한 것이, 책의 중심인물이 ‘아론’이지 ‘레위’ 족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아론’이 ‘레위’족속에 속하긴 하지만, “제사장”적 임무를 수행하는 자들은 ‘아론’과 그 후손이지 단순한 ‘레위’의 후손들을 망라한 것은 아니다.
책의 또 다른 이름으로 <모세의 세 번째 책>이 적절하다 할 수 있는데, <오경>을 ‘모세’의 일대기(一代記) 내지는 전기(傳記)라고 전제할 때, <레위기>는 <출애굽>에 이은 세 번째 책이 되기 때문이다. 내용적으로도 이 책은 <출애굽>의 이야기 순서를 잇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출애굽> 25-31장은 이스라엘의 제의(祭儀)에 관한 제반 사항들, 즉 성막(聖幕)과 기구들, 제사장의 의복과 임명에 관한 사항들을 다루고 있으며, 이어지는 35-40장은 성막과 기구들, 제사장의 복장들을 어떻게 만드는 지에 관한 규례를 담고 있다. 하지만 제사장들의 안수(按手) 즉 임명에 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다. 바로 이 부분에 관한 내용을 <레위기> 8-10장에서 다루고 있으며, 이곳에서 ‘모세’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레위기>가 단순히 제의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적 요소도 포함하고 있음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예: 10, 24장). 더 나아가 이 책의 매 장(章)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레위기>가 기본적으로 “이야기”(narrative) 형식의 문학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로 이 점이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모세’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있음을 놓치는 부분이기도 하다.
2. 양식과 문체
<레위기>는 문학 양식(樣式)에 있어 “이야기”인가 아니면 “율법”인가?
책 내용의 상당 부분이 “제의”와 “거룩”에 관한 계명(誡命)과 율법(律法)으로 이루어져 있어, 당연히 후자(後者)를 택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안에서 이야기적 요소를 간과(看過)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이야기는 책의 벽두에서부터 등장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첫 에피소드가 일어나고 있는 곳은 이스라엘의 성막(聖幕)으로서, 이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행동 규범에 대한 지침을 내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1:1).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비록 짧기는 하지만 8-10장 및 16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 역시 계명이나 율법이 아닌 이야기들이다. 이렇게 볼 때, <레위기> 역시 <출애굽>에 이어 <오경>의 기본적인 문학 양식을 이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들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율법의 배경을 이루는 이스라엘의 과거사(過去史)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현대의 독자들에게 교훈과 경계를 주기 위한 신학적인 목적을 지닌 과거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신학 화 된 역사” 내지는 “이야기 화 된 역사”이다. 신학자 Damroschk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그 이야기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 역사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율법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레위기>는 계명과 율법을 가장 명료하고 단순하게 제시하면서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과 일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과 대화하며, 그분의 뜻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애매모호한 문학적 수사(修辭)를 사용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레위기>는 <구약>의 모든 책 가운데 문학성이 가장 결여된 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책은 <구약>의 다른 책들에 비해, 독자들의 심미적인 상상력을 자극하여 정서적인 감동을 유발하는 일에는 다소 관심이 없는 듯하다. 오히려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3. 구조
<레위기>의 구조는 <오경> 내의 다른 책들에 비해 구조 분석이 비교적 용이한 편이다. 새로운 단락의 시작과 끝이 표제어(標題語)와 그에 상응하는 마무리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웬햄’(G. Wenham)의 구조 분석 방식을 따라 개략적으로 네 개의 단락으로 구분해 보면 아래 도표와 같다: 참고도서 2: ‘트렘퍼 롱맨’(Longman III, Tremper) 역시 기본적으로 유사한 구조 분석을 따르고 있다(참고도서 3,).
4. 이해와 해석
<레위기>는 ‘유대’인 자녀들이 그들의 회당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책으로 중요한 책이긴 하지만, 현대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멀리하고 싶은 책이다. 오늘날 교회의 주일 예배에서 <레위기>를 본문으로 설교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이는 참으로 딱하다 할 것인데, 이 책이야말로 <성경>과 신학에 대해서 가장 분명한 통찰력을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신약>에서 등장하는 “구속”(救贖; atonement)에 대한 이해가 그것이다. <레위기>가 없이는 이 개념을 결코 설명할 수가 없다.
현대 독자들이 <레위기>를 멀리하고, 기피하는 이유는 세 가지 정도가 있다 할 것이다. 첫째,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일련의 종교적 “제의”(祭儀)가 시청각적인 설명에 익숙해 있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가시적(可視的)으로 보여주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둘째, 이들 제의가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별로 중요하지 않거나, 전혀 불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셋째, 각종 제의나 의식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즉 과거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들 각종 제의나 행사들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레위기>의 내용 분석을 시도하기 전에 먼저 이 문제점들부터 파악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가시적 표현. 현대 독자들이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 의식에 참여하여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각종 제사 의식을 시각적으로 재현해 보기란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히브리 성경>이 큰 소리로 회중 가운데서 낭독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던 만큼, 이를 듣고 있는 회중은 각종 제사를 어떻게 드리는지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제사의 전체적인 과정은 물론, 특별히 각 제사에서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숙지하고 있어,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제사를 드릴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들 의식을 어떻게 가시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그대로 따라 해보거나, 아니면 그림을 그려보는 것일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한다 해도 여전히 고대 이스라엘이 이해하고 있던 것만큼은 따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예컨대, <레위기>에서는 희생제사에 바칠 짐승을 죽이기 전에 네 발을 묶어야 한다는 언급은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했고, <창세기>에서는 이스라엘도 같은 방식을 따랐음을 시사해주고 있다(참고. 창 22:9). 또 하나 <구약>에서 거의 전적으로 생략하고 있는 것은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무슨 말이 오갔으며,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왜, 그리고 무슨 제사를 드리는지, 제사장들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을 리가 없고, 제사장들 역시 제사가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 과연 그 제사를 받으셨는지 그 사람에게 아무런 확언을 해주지도 않고 돌려보냈을 리가 없다. 오늘날 우리가 <레위기>에서 볼 수 있는 바는 기껏해야 제의에 관한 일련의 규칙 정도이지, 이처럼 상세한 분위기나 절차 등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無知)하다 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상상해 볼 수 있는 것은 성전 예배에서는 <시편>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점인데, 이나마도 <레위기>에서는 아무런 힌트조차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레위기>에서 그리고 있는 각종 제의나 행사의 분위기나 절차를 제대로 맛보기 위해서는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의미와 의의. 현대인들은 <구약>에서 그리고 있는 각종 제사나 제의에 대해서 본능적인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온갖 도살(屠殺) 기구가 널려있고, 살아있는 짐승의 껍질을 벗기고, 피를 튀기며,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예배를 그려보라! 이는 오늘날 많은 <구약> 신학자들의 저서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바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들 책들은 “구약 신학”을 논함에 있어 <레위기>를 <오경>의 핵심에 두지 않고 있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의 인식은 사뭇 다르다. 즉 이들은 “종교적 제의”야말로 고대 사회의 핵심 가치를 이해하는 열쇠라고 주장한다.
사실 종교적 제의를 포함해서 제반 의식들은 사회적 관습의 산물이다. 식탁 예절만 하더라도 나라마다 다르다. 한 나라에서 받아들이는 식탁 매너가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세대 간의 차이도 있다. 젊은 세대의 행동 방식은 노인 세대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예배의 형태 또한 교단에 다라 많은 차이가 나기도 한다. 찬양의 형태도 그렇다. 한 교단에서 허용되는 박수치기나 율동 등이 다른 교단에서는 금기 시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의식(儀式)의 형태나 모습은 관습으로 굳어지고 전래(傳來)되는 것이다.
또한 이 같은 관습은 한 사회의 의무사항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예컨대, 복장(服裝)의 경우만 해도 장례식이나 결혼식에서 각기 달라야 한다. 평소 내가 혐오하던 사람이 죽었을 때, 내가 그의 죽음을 아무리 고소하게 여길지라도 적어도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한다면, 적절한 예복을 갖추고 가야 한다. 교회나 회당 예배 시간 중에는 모자나 선글라스를 벗어야 한다. 북미(北美)에서 크리스마스는 가족들이 만나 칠면조 고기를 함께 나누어먹는 시간이다. 내가 이를 원하든 않든 사회가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요구한다. 사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일종의 규범이나 요구사항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이들 관습들을 거부한다면 사회는 나를 무뢰한 취급을 할 것이다.
기념식도 그렇다. 각 나라는 지키고 기념해야 할 국가적 날들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3.1절, 4.19, 6.6 현충일, 8.15 광복절, 등등이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우리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 가치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각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조상의 기일(忌日)이 그것이다. 교회라면 부활절을 결코 생략할 수 없다. <레위기>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던 제사나, 정결 의식이나, 종교적 기념일, 절기 등을 다루고 있다. 현대 독자는 이들을 통해서 고대 이스라엘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기본적 가치가 무엇인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해와 해석. 고고학자들이 고대 이스라엘의 제의나 절기 등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이들에 대한 이해는 별개의 문제이다. 고대 이스라엘 인 중에서 지금도 살아남이 각종 제사의 의미나 차이와, 왜 그러한 차이가 있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 설명해주지 않는다면, <레위기>는 여전히 난해한 책이다. 특히 각 제의나 기념식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했으며,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으므로, 이 책은 오늘날 더욱 어려운 책으로 남아있다: 예컨대, 문둥병 환자가 병이 나았을 때,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레위기>에 있지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도 없다. 즉 당시 고대인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졌을 제의들이 오늘날에는 신비나 수수께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이나 다른 사회에 대한 세심한 연구를 통해서 일말의 통찰력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난 20여 년 동안 이 같은 노력의 결실로 <레위기> 등과 같은 <구약>에 대한 이해가 아주 깊어졌고, 학자들 사이에 상당 부분 공감대를 얻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5. 내용
5.1. 제 1부: 제사법
제사장의 임명에 관해서는 <출애굽>에서 이미 다룬 바 있지만, 실제 <레위기>(9-9장)에 이르러서야 임직식이 행해지고 있다. 제사장의 임직과 관련해서 다양한 제사가 필요한데,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 사항은 여태까지 없었다. <레위기>에서 이들 각종 제사들을 어떻게 드릴 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 설명의 편의를 위하여 책의 구조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책의 제 1부는 이 도표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의 희생제사 전반에 대한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제 1부는 다시 두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제사를 드리는 자(예배자)의 관점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일러주고 있다: 제물은 어떤 것을 드려야 하며, 예배자가 할 몫은 무엇이며, 제사장이 해야 할 몫은 어떤 것인지 등등이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제사장과 관련한 제사의 규정들을 담고 있다. 예컨대, 바쳐진 제물의 부위(部位) 중에서 어떤 부위가 제사장의 몫인지를 구분해주고 있다.
제 1부의 구조를 희생제사의 종류 별로 구분해 보면 아래 여섯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각 단락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라는 제목과 “누구든지 예물을 드리려거든”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다:
1. 번제. 번제(燔祭)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태운다는 의미에서 부쳐진 이름이다. 다른 희생 제사의 경우, 제물의 일부만 제단 위에서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으로 남기거나 때로는 예배자들과 나누어 가지기도 한다.
번제에 관한 규례는 제 1장의 처음 두 절에서 제사에 관한 일반적인 지침이 있은 후, 세 개의 단락에서 등장하고 있다: (1) 3-9절; (2) 10-13절; (3) 14-17절. 이와 같은 구분 방식은 <레위기>에서 자주 만나는 일반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이들 세 단락에서 번제에 합당한 짐승의 종류나 상태,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장의 역할 등을 규정하고 있다. 짐승의 종류는 집에서 기르는 가축에 한하며, 그 상태는 아무런 흠이 없는 최상의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야생 짐승이나 상처가 난 짐승은 드릴 수가 없다.
예배자는 짐승을 가져와서, 그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안수(按手)하고, 짐승을 도살하되, 그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 제사장(‘아론’의 아들들)은 짐승의 피를 모아, 제단 위에 뿌리고, 각을 뜬 짐승을 모두 제단 위에 올려놓고 태운다. 이때 예배자와 제사장의 역할 구분이 중요한데, 제사장만이 짐승의 피를 다룰 수 있으며, 제단에 접근할 수 있다.
번제의 핵심은 짐승을 죽여 제단 위에서 태우는데 있다. 이는 그 짐승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왜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일까? 단순히 드리는 자의 너그러움을 드러내는 행위일까? 그러나 그 이상이다. 드려지는 짐승은 드리는 자를 위한 “속죄”(贖罪, atonement)의 제물이 되는 것이다(4절). 즉 예배자는 짐승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짐승은 곧 나 자신이거나 나를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예배자는 하나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속죄란 일종의 몸값을 지불하는 것은 말하는데, 성경적 의미의 속죄는 인질을 붙들고 있는 납치범에게 지불하는 엄청난 액수의 몸값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피해를 입은 자에게 지불하는 일종의 보상(報償) 같은 것으로서, 보상액도 실제 입은 피해에 비하면 지극히 미미한 수준이다(참고. 출 21:30; 잠 6:35). 즉 <구약>의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의 기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제사를 드리는 자는 짐승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보상액으로 지불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비롭게도 짐승을 대신 받으신다는 것이다.
번제가 갖는 효력에 대해서 <창세기>에서 두 가지 핵심 제사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에 양을 받으신 경우다(22장). 하나님을 이를 통해서 “아브라함 언약”, 즉 “온 땅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재확인시켜주신 것이다(창 22:8). 또 하나 더욱 인상적인 사례는 대홍수 이후 ‘노아’가 드린 번제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제사를 받으시고, “다시는 세상을 물로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다. 비록 홍수 이후에도 여전히 인간의 죄는 상존할 것이지만(창 6:5; 8:2), 그렇다고 그로 인해서 인간을 다시 물로 심판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노아’의 번제가 올리는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셨기 때문이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이미 악한 속성을 드러낸 바 있어(출 16-17, 32장), 그 때마다 번제를 드렸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번제는 어떤 특별한 상황이나 경우에 해당한다기보다는 보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인간의 죄성(罪性)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번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준종이나 헌신의 의미도 담고 있기도 하다.
2. 소제. 소제(素祭, cereal offering)란 곡식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로서, 종종 가난한 자가 번제(燔祭) 대신에 드릴 수 있는 제사였다. 그러나 대개 짐승을 드리는 제사와 함께 드리는 것이 상례였다. 소제 역시 번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기쁘하시는 향기로운 제물이긴 하지만, 는 짐승을 란 말
<레위기>의 역사
<레위기>에 관한 역사적 질문은 <오경> 전체의 역사적 질문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저작이나 편집 및 역사적 배경과 관련한 것들이다. <오경>에 관한 역사비평적 연구 결과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한 차례 다룬 바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이 책의 저저와 저작 시기와 관련해서만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오경>의 역사비평적 연구에 대해서는 본 저서의 제 1부 <총론>에서 다룬 바 있다.
저자와 저작. <레위기>의 기록 연대와 저자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모세’ 저작 설; (2) 후기 편집 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다음 두 가지 이유로 후자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첫째, <레위기>에서 묘사하고 있는 예배의 규례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드릴 때의 예배의 모습과 아주 흡사하다는 점. 둘째, ‘모세’ 시대라고 가정할 때, 희생 제물은 이스라엘이 사막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레위기>는 양이나 염소 등의 가축, 즉 정착 생활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짐승들로 바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레위기>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직접 각종 규례들을 명령하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지만, 실은 이 책의 배경(처음 독자의 삶의 자리)은 광야가 아니라, 정착 왕국 이후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레위기>의 신학
이 책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관계에 관한 책이다. 즉 어떻게 그 관계를 맺으며, 그리고 어떻게 그 관계를 유지시킬 것인가에 관한 책이다. 이와 관련하여 적어도 다섯 가지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1) 거룩(하나님의 초월성); (2) 임재(하나님의 내재성); (3) 언약; (4) 희생제사; (5) <레위기>와 <신약>.
1. 거룩 (Holiness; Transcendence)
<레위기>의 가장 중심적인 주제어는 “거룩”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19:2). 하나님과 그분에게 속한 모든 것이 거룩하다는 것은 결국 그렇지 못한 영역이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레위기>는 전 우주에 걸쳐 “성과 속(聖과 俗”)의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담고 있다 하겠다.
거룩의 의미. “거룩”을 뜻하는 ‘히브리’어는 단순히 “구별되어 있음”( 카도쉬)을 뜻하는데, 특히 종교적이고도 제의적인 의미에서의 구별을 뜻한다: 성소; 성막; 제기; 땅; 등. 따라서 어원 상 윤리ㆍ도덕적인 요소는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참고로 <성경>은 ‘가나안’ ‘바알’ 종교의 성전 창기(娼妓)들에 대해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크데쉼”(제의적인 남창)(왕상 15:21); “크데쇼트”(제의적인 창녀)(호 4:1).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성은 하나님의 여러 속성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분의 본질적인 속성이다. 즉 “거룩”은 그분의 이름인 것이다: “거룩이라는 이름의 야훼”(참고.20:3; 22:32). 따라서 하나님이 다른 모든 피조물과 구분되는 근거도 그분의 이름에서 기인한다 할 것이다. 이 이름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구별되는 “초월적 존재”(transcendent being)가 되. “거룩”이 하나님의 본질적이고, 내재적인 본성이라면, “영광”은 그분의 거룩함이 외부로 드러나는 신비이자 “능력”이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거룩함이 드러내는 능력”인 것이다. 이 거룩함이 외부로 드러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내렸나이다.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산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도다(삿 4:4-5).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그 아래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미가 1:3-4)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실 때, 항상 구름과 흑암으로 스스로를 둘러싸신다(시 97:2-3).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타죽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계속 우길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야훼’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또한 “질투”하시는 분이다(신 4:24‘ 겔 36장). 그분의 투기심은 자신의 독특함에 대한 당연한 요구이며, <십계명>의 제 1계명이 이에 대한 당연한 요구다(출 20:3). 즉 그분은 이스라엘의 유일한 하나님이시기를 바라며, 다른 어떠한 신들도 그와 동등한 대우를 받거나, 심지어 대우의 일부라도 그와 나누는 것조차 싫어하신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종교 간의 화해라는 명분으로 오늘날 이 땅에서 행해지고 있는 ‘로마 카톨릭’의 행태는 과연 온당한 것이지 되돌아보게 한다. 예컨대, 신부와 승려가 상호 교환방문하여 설교나 설법을 한다거나, 수녀와 여승들이 함께 찬송가와 찬불가를 부른다든지, 석가탄신일과 부활절에 서로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등의 모습이 그것이다. 다른 종교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방식이 이 길 밖에는 없는지, 행여나 이 같은 모습이 이 책에서 경고하고 있는 혼합주의나 신성모독으로서, 저주나 멸망의 가증스러운 행위는 아닌지 진지하게 숙고해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24:10-23).
거룩한 백성과 거룩한 장소.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니 당연히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이나 장소 역시 구별된다. 이러한 구별에는 물론 그와 가까운 정도에 따라 거룩함의 정도 또한 달랐다(도표 및 그림).
거룩한 짐승. 짐승 역시 사람이나, 장소처럼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이분법적인 구분이 있다. 그리고 정결한 짐승 중에서 구별하여 제사에 드렸다(1:2; 22:19-29). 이스라엘은 이들 중에서 일부를 먹을 수 있었다. 육식을 하거나, 시체를 먹는 짐승들은 아주 더럽고 가증스러운 것으로 구별되었다.
지금까지 다룬 정결에 관한 규례와 대상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결 기간. 거룩한 ‘야훼’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부정(不淨)한 자는 일정 기간 정결 기간을 거쳐야 했는데, 부정의 정도에 따라 정결의 기간은 달랐다:
(1) 하루: 죽은 시체와의 접촉; 정상적인 성행위(11:27-28, 31; 15:16-18).
(2) 40일: 남아 출산 여인
(3) 80일: 여아 출산 여인
(4) 무제한(完治 時까지): 성병; 피부병, 등등.
이 기간 후에 해당자는 일련의 정결 예식, 즉 “성화”(聖化)의 과정을 거친 후에, 다시 거룩한 백성으로 편입되었다(참고. 27:14-27). 이스라엘이 이처럼 거룩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인접 국가들이 행하는 일체의 우상숭배나, 부도덕한 행위로부터 스스로를 구별시켜야 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들만의 종교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방 종교와의 혼합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거룩한 예배. 이스라엘의 예배 형식이나 내용 또한 마땅히 구별되어야 한다. 즉 (1) 모든 형태의 마술, 주문, 점등을 금지해야 하며(19:3, 26; 20:6, 27), (2) ‘몰렉’ 제사 등과 같은 가증스러운 행위를 삼가야 한다.
거룩한 신체. 육체적인 정결과 부정에 대한 규례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참석할 수 있는 신체적 조건에 관한 것으로서, 대표적인 정결의 규정은 다음과 같다.
(1) 시체는 불결한 것으로(11:24-28, 39-40) 예배에 참석할 수 없다.
(2) 제사장은 장례식 참석을 금한다. 그는 가장 가까운 친척 외는 죽은 자와 접촉하지 말아야 한다(21:1-4). 대제사장은 그나마도 금지한다(21:10-12).
거룩과 하나님의 율법. “정결”(淨潔)과 “부정”(不淨)은 윤리ㆍ도덕적인 구분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종교적인 영역에 속한 구분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실생활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며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윤리ㆍ도덕과 무관한 삶을 살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도 거룩한 삶에 관한 규례를 말씀하실 때마다, “나는 야훼라” 내지는 “나는 너희 하나님 야훼라”언 언급을 빠뜨리지 않기 때문이다(참고. 18-22장). <레위기>에서 드러나는 율법의 두 정신은 “공의”(예. 24:20)와 “사랑”(참고. 19:18)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인 즉, 결국 “정결”(淨潔)과 “부정”(不淨)은 단순히 종교적인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개념이라 할 것이다.
2. 임재 (Presence; Immanence)
본질적 두 속성-초월성과 내재성. <레위기>의 두 번째 주제는 <출애굽>의 핵심적인 주제인 ‘임마뉴엘’(immanuel), 즉 하나님의 “임재”이다. 이는 장막(帳幕) 건설과 관련한 하나님의 말씀에 잘 드러나 있다: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26:11상).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장막에서 이스라엘과 만나겠다고 말씀하셨다(1:1). 장막에 내려오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를 증명한다(9:23; 16:2).
지성소. 성막 중에서도 특별히 지성소(至聖所)가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이다. 당연히 아무나 그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를 어길 경우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제사장들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참고. 10:1-7). 다만 대 속죄일에 대제사장 ‘아론’만이 적절한 절차에 따라 접근할 수 있었다. 즉 그는 지성소에 들기 전에 향(香)을 피워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자신을 보호했다(16:12-13).
희생제사와 기념일. 희생 제사를 포함한 모든 행위는 “야훼 앞에서” 행해야만 했다. 또한 제사장들이 희생제물을 먹을 때도 항상 거룩한 장소(예: 하나님과 가까운 곳)에서 먹어야 했다. 안식일을 포함한 모든 축일(祝日)이나 기타 기념일 역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특별히 구별된 날들이다. 그리하여 이 날에는 이스라엘은 반드시 하나님의 성막으로 나아와야 한다(23장).
율법의 낭독. 대제사장은 회중 앞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낭독하고, 백성은 이를 듣는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
3. 언약 (תירב; Berith)
어원. 어원학적인 증거가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적어도 아래 세 가지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1) 먹다(barah): 계약의 두 당사자가 계약 체결 시에 식사를 함께 나누는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계약을 먹다”는 의미에 가장 가까운 예를 <신약>에서 언급하고 있는 성찬(聖餐)에서 찾을 수 있다.
(2) 자르다(birit): 이 단어를 사용할 경우, “계약을 자르다”(cut the covenant)는 의미가 된다. 이는 계약을 체결하는 다른 방식을 암시하는 것인데, 한 편으로는 동물을 절단하는 저주를 나타내고, 다른 한 편으로는 계약에 따르는 식사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참고. 창 17장).
(3) 묶다(baru): 이 단어의 명사형이 ‘비리투’(biritu)인데, 계약의 “구속” 내지는 “속박”(bond)의 의미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다.
정의. 이와 같은 어원론적인 접근을 통해서, ‘팔머 로벗슨’(P. Robertson)은 그의 저서「계약신학과 그리스도」에서 계약을 “주권적으로 사역되는 피로 맺는 약정”(bond in blood sovereignly administered)으로 정의하고 있다.
형식. 고대 근동지방에서 군주와 봉신 국가 사이에 맺었던 정치 및 군사적 “종주언약”(從主契約)의 형식과 흡사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총론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의미. 언약은 한 마디로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관계”를 의미한다. 이는 부자지간(父子之間)의 경우처럼 혈연관계가 아니라, 새로운 관계의 수립이므로, 그에 따른 의식(儀式)과 지속적인 교제(交際)가 필수적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편에서 볼 때,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臨齋) 속으로 초청을 받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죄로 오염된 인간은 그대로는 거룩한 교제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제사(祭祀)의 기능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거룩을 위한 사전 절차로서, 죄인은 이를 통해서만이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가 가능하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는 하나님께서 이를 통해서 무슨 유익을 얻고자 함이 아니라, 반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나아가기 위한 “대속”(代贖, atonement)을 치르는 제도이다.
내용. “율법”(the law)과 “땅”(the land)은 언약의 핵심 내용이다. 율법과 땅의 관계는 因果의 관계로 볼 수 있다(참고. <신명기>; <여호수아>). 즉 이스라엘은 “그 땅” 즉 언약의 땅에서 신정국가(神政國家)로서의 탄생을 맞이하였고, 그 땅에서 교회(즉 공동 운명체)를 이루어 서로 교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그 땅”은 은혜이자 축복이다. 동시에 위기(危機)와 저주(咀呪)의 통로일 수도 있다. 즉 율법을 준수하면 땅은 이스라엘의 것이고, 이를 어기면 땅이 그들을 버릴 것이다(참고. 레위 26). 이스라엘은 그 땅을 무제한적으로 소유할 수도 없었고, 쉼도 없이 경작해서도 안 된다. 땅도 안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예: 안식일; 안식년, 희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종국이 어떠했는지는 타락 이후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4. 희생제사: 형식과 내용
위에서 밝힌 바처럼, 언약과 제사는 필수적이며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제사는 이스라엘을 가장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제도라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를 위해서 필요한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제사; (2) 제사장; (3) 성막; (4) 성막 기구들; (5) 절기들(안식일; 유월절; 무교절; 칠칠절; 대 속죄일; 장막절; 안식년; 희년).
4-1. 제사법
일반적인 사항. 일부 예외적인 경우, 즉 이스라엘 모두를 위한 제사(속죄제)나, 가난한 자가 작은 새를 희생 제물로 드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단 위에 희생 제물을 몰려놓기까지의 의식은 모든 제사가 다 동일하다.
일반 백성. 첫째, 제물을 성막 문 앞으로 가져옴. 제물은 자신이 직접 기른 동물이나 곡식으로서, 바치는 자의 생명을 상징함. 제물의 가치는 극상품이라야 함(흠 없는 수컷, 또는 고운 가루, 최상의 첫 열매). 둘째, 희생 제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안수함. 이 때 죄에 대한 고백 여부는 불확실하나, 속죄일의 의식이 죄의 고백에 대해서 분명하게 지시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16:15), 죄에 대한 회개와 고백이 분명히 매일의 희생제사의 한 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셋째, 희생 제물이 가축일 경우 짐승을 도살하는데, 피를 받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 본인이 직접 이처럼 끔직한 도살 행위를 수행함으로써, 죄의 심각성과 그 결과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제사장. 제사장의 역할은 제단 위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보존함(1:7; 6:12, 13)과 동시에, 희생제물을 받아들이는 몫을 수행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제사 의식에 대한 교육이나 제의를 집전하는 것이다. 특별히 제의 집전과 관련해서는 본문 6:8-7:38에서 읽을 수 있다.
이 단락에서 보여주는 제사의 종류나 내용은 각 제사의 순서만 달리하고 있을 뿐, 앞선 단락(1-5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제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참고. 1-5장). 앞 단락에서는 제사의 목적에 따라 순서를 정해놓은 것 같다: (1)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냄새”로서의 제사(1-3장); (2) “죄의 용서”를 대변하는 제사(4:1-6:7). 그러나 이어지는 단락(6:8-7:38)에서는 각 제사의 빈도(頻度)가 순서를 결정하는 주요 요소인 듯하다. 번제와 소제가 속죄제와 속건제에 앞서 등장하고 있고, 그리고 선택 사항에 드는 화목제가 마지막으로 등장하고 있다.
다른 점은 또 있다. 즉 누구를 위한 제사인가의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 단락(1:1-6:7)은 일반 백성이 제사를 드릴 경우에 관한 것으로, 희생 제물의 종류나 선택 그리고 제사의 절차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두 번째 단락(6:8-7:38)은 제사장이 관심의 초점이다. 즉 대부분의 지침들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따라야 할 것들이고(예. 6:9, 14, 20, 25), 제사장에게 돌아갈 제물의 몫이 어떤 부위인지에 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4-2. 제사의 종류
크게는 다섯 가지, 작게는 일곱 가지로 구분할 수 있지만, 각 제사의 구체적인 방법이나 의미 등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구별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각 제사의 절차보다는 의미일 것이며, 다행스럽게도 이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 결과 상당 부분 알려져 있다. 일반 백성을 위한 다섯 가지의 제사는 이 책의 첫 번째 단락에서 등장하고 있다(참고. 1:1-6:7): (1) 번제; (2) 소제; (3) 화목제; (4) 속죄제; (5) 속건제
번제(燔祭; The burnt offering)(1:1-17). 희생 제물을 통째로 제단 위에서 태운다 하여 이렇게 부른다. 다른 제사의 경우 제물의 일부만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들)이나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누어 가진다. <레위기>는 제 1장에서 번제에 합당한 짐승의 종류와, 제사에 참여하는 자들의 역할을 세 단락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1:3-9, 10-13, 14-17).
첫째, 희생 제물은 가축 중에서 택해야 하며, 아무 흠이 없어야 한다. 따라서 야생 동물이나, 또는 가축 중 흠이 있는 것은 바칠 수가 없다. 둘째, 제사를 드리는 자는 짐승을 가져와서, 그 머리 위에 안수를 하고, 도살을 하되, 껍질을 벗기고, 각을 뜬다. 제사장은 짐승의 피를 받아, 제단 위에 뿌리고, 각을 뜬 부위들을 제단 위에 올려 태운다. 셋째, 일부 <번역본>(NIV, NRSV)에서 다소 모호하지만, 번제에서 제사장과 제사 드리는 자의 역할 구분이 분명하다. 즉 제사장만이 짐승의 피(생명을 상징하는 거룩한 대상)를 다룰 수 있고, 제단에 접근할 수 있다.
번제의 핵심은 짐승을 죽이고, 그 전부를 태우는데 있다. 이는 하나님께 그 짐승을 통째로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바치는 자를 위한 대속이 되기 때문이다(참고. 1:3, 4). 번제물 머리 위에 손을 얹는 행위도 역시 같은 의미이다. 즉 그는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하면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짐승은 나를 대신하고 있다.” 번제에서 희생제물의 효력이나 기능을 예시(例示)해주는 두 대표적인 사례를 <창세기>에서 찾을 수 있다(참고. 창 9, 22장).
소제(素祭; The cereal offering)(2:1-16). 이 제사는 가난한 자에게 번제 대신에 허용된 제사로서 곡식을 제물로 드릴 수 있으나, 주로 번제와 함께 드리는 제사였다. 이 경우 역시 번제 때와 마찬가지로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냄새”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다만 번제의 경우와 다른 점은 제물의 일부만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으로 돌렸다는 점이다. 따라서 소제물은 제사장의 수입원으로 기능하였으며, 곡식은 날 것이든 또는 구운 빵이든 모두 가능하였다.
화목제(和睦祭; The peace offering)(3:1-17). 이 제사는 짐승을 제물로 드리는 또 다른 형태의 제사로서, 개인적인 맹세(또는 서원)나 또는 축하할 만 한 일이 있을 경우 드렸다. 누구나 심각한 질병에 걸렸을 때, 회복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면서 대개 다음과 같은 서원(誓願)을 하기 마련이다: “오, 주님. 만일 저에게 ...을 해 주신다면, 저는 ...을 해드리겠습니다.” ‘한나’의 기도가 대표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참고. 삼상 1:11). ‘한나’는 성전에서 기도했으며, 이 때 가족이 제사를 드렸다. 하지만 그녀의 기도가 응답을 받았을 때, 처음에 드리던 것보다 더 풍성한 제물을 드렸다(삼상 1:24). 이 같은 제사가 바로 화목제에 해당한다.
그리고 화목제는 제사 드리는 자가 제물인 고기의 일부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경우다. 짐승의 일부는 태우고, 나머지 일부는 제사장의 몫이었으며,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제사 드리는 자와 그의 가족과 때로 그의 친구들도 함께 나누어 먹을 수 있었다(레 3:3-4; 7:31-35). 이 제사 역시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냄새”로 인정받을 수 있지만, 짐승을 태우는 주된 목적은 대속이 아니라 축하이다. 따라서 화목제는 즐거움의 자리이다.
속죄제(贖罪祭; The sin offering)(4:1-5:13). 다섯 가지 제사 중에서 가장 상세하게 다루고 있는 제사가 바로 이 제사다. 여러 경우에 속죄제를 드리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핵심 관심사는 비고의적인(非故意的)인 범죄나 또는 태만 죄(怠慢罪)에 대한 속죄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범죄와는 상관없는 경우도 있는데, 예컨대, 출산이나, 피부병이 발생했을 때나, 심지어 제사장 직을 위임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 제사는 절차 상 번제나 화목제와 근본적으로 다른데, 짐승의 피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피는 생명의 상징으로서, 이는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피를 뿌리는 행위는 그 피가 하나님에게로 돌아감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다른 모든 제사에서는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림으로써, 이를 보여주고 있는 반면, 속죄제의 경우 죄인의 사회적 신분(예: 제사장; 이스라엘 온 회중; 족장; 일반 평민)에 따라 피를 사용하는 방식이나 장소가 다르다. 예컨대, (1) 피의 일부를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리거나, (2) 성소 안 향단 뿔들에 바르거나, (3) 번제단 밑에 쏟거나, 또는 (4) 번제단 뿔에 바르거나 등이 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는 지성소 안 언약궤 위에 뿌리기도 했다.
이처럼 피를 뿌리거나 바르는 행위가 의도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겠다. 첫째, 정결이다. 즉 죄로 오염된 제단이나 언약궤를 청결하게 하려함이다. <레위기>에서 죄란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實在)하는 것으로서 성막을 더럽히며 하나님의 임재를 불가능하게 하는 요인이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없는 성막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며, 피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통로이자 수단이다. 둘째, 피는 정결 그 이상의 기능을 한다. 즉 죄의 용서이다. 이 제사와 관련해서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하나님의 언급이 이를 증거한다: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4:26, 31, 35; 5:10, 13). 하지만 제단에 피를 뿌리는 행위가 어떻게 죄 사함의 효력을 가져오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추측컨대, 제단이 마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인 제사장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볼 수 있을 것이다.
속건제(贖愆祭; The guilt offering)(5:14-6:7). 다섯 가지 제사 중에서 가장 간략하게 다루고 있는 제사가 바로 이 제사다. 아마 그 빈도가 가장 낮았거나, 또는 제사장의 위임과 관련해서 적절한 용도를 찾기 어려워 다른 제사 속에 포함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른 제사와 달리 짐승은 “숫양”(ram)만을 허용하였으며, 이는 하나님에 대한 “보상”(reparation)의 목적을 지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보상이나 배상을 해야 할 경우란,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저지른 신성모독의 행동이나, 서원을 행하지 않았다거나, 또는 거짓 맹세 등이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속건제를 드려야 하는 사람은 피부병으로부터 회복한 사람(14:12), 또는 ‘나실’인의 맹세를 어긴 사람(민 6:9) 등이 될 것이다.
요약. 지금까지 설명한 다섯 가지 제사의 특징과 차이들을 정리해 보면 아래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다.
4-3. 제사의 의미(목적)
모든 제사는 크게 세 가지 기능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1) 하나님에 대한 예물(선물)(gift); (2) 속량(대속)(expiation); (3) 하나님과의 교제(화목)(communion).
예물(선물). 제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주권”(lordship)을 인정하는 의식으로서, 제물은 그분에게 드리는 선물의 기능을 담당했다. 이것은 “제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ןברק)가 “바침”(presentation) 또는 “바쳐진 물건들”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입증된다. 예컨대, 본문은 “번제”가 “야훼께 드리는 화제(火祭)” 또는 “야훼께 드리는 선물”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참고. 1:9).
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고대 근동 지방에서 왕에게 나아가는 백성은 항상 예물을 준비하고 나아가야 했던 것이고, 왕이 신에게 나아갈 때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제” 역시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바치는 선물”(창 43:11) 내지는 “조공”(왕상 5:1)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선물은 당연히 일정 가치를 지니는 것이 마땅하며, 특히 드리는 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일정한 대가를 치렀다는 의미가 있다. 흠이 없고 점이 없는 짐승을 제물로 바쳐야 했던 이스라엘이 그들을 사기 위하여 지불했던 금액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속량(대속). 제사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이 기능이다. 즉 이스라엘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알게 모르게 저지른 범죄에 대하여, 처벌을 면제받기 위하여 대속의 제사를 드려야했는데, 대속 제물로 가축용 짐승을 사용했다. 이 같은 제도는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이다. 대속의 상징은 희생제물(양이나 소 등)의 머리 위에 범법자가 손을 얹는 행위가 그것이다.
대속과 관련하여 다양한 제사의 종류가 있다는 사실은 범죄에도 경중(輕重)이 있음을 알려준다(민 15:27-31). 예컨대, 율법은 고의적인 범죄와 우발적인 것을 엄격히 구별하고 있다. 때로는 죄가 너무 중하여 제사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에는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이나, 또는 죽음의 형벌을 부과했다.
대속의 또 다른 측면은 범법자의 신분에 따라 처벌 정도가 다르다는 점이다. 공동체 내에서의 영적 지위나 신분이 높을수록 당연히 처벌의 수위가 높았는데, 이는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인 듯하다(참고. 4:1-21). 그러나 정치ㆍ사회적인 신분은 크게 고려하지 않은 듯하다(참고. 4:22-35). 제사의 방식도 이러한 지위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 예컨대, 제사장이나 지도자의 대속을 위한 제사는 성막 안에서 행했으며(참고. 4:5-7a, 16-18a), 이 경우 희생 제물은 아무도 먹을 수 없었던 반면, 일반 회중을 위한 제사는 성막 문 앞에서 행했으며, 제물은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6:19, 22).
교제. 희생제사는 식사이기도 하다. 이는 제사에 짐승과 함께 곡식이나 소금, 기름, 포도주 등을 드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참고. 7:12-13).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오셔서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제사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견 이방제사에서나 보이는 사상으로서, 일견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시 50:13). 그러나 <구약>은 여러 곳에서 제사를 “하나님의 식물”로 묘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레 21:6, 8, 17, 21; 민 28:2; 겔 44:7). 그러나 하나님의 인격적인 측면을 주목한다면, 그분이 자신의 백성과 함께 먹고 마시며, 교제를 나눈다는 사실에 대해서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식사로서의 제사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겠다. <신약>에서 성찬(聖餐)의 의미도 이 같은 교제의 의미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5. <레위기>와 신약
<레위기>의 핵심 주제 중의 하나는 “거룩”이다: (1) 거룩한 하나님; (2) 거룩한 사람(제사장); (3) 거룩한 장소(성막); (4) 거룩한 행위(희생제사).
이 주제와 관련해서 <신약>이 말하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여전히 희생 제사나, 성막이 필요한가? <신약>의 성도 즉 교회는 어떤 존재인가? 이들 질문과 관련해서 <레위기>는 <신약>의 해석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특히 <히브리서>는 <레위기>에 대한 주해서로 불릴 만큼 <레위기>의 핵심 주제들에 대한 중요한 신학적 진리들을 선포하고 있다.
제사장. <구약>의 인물 중에서 ‘멜기세덱’만큼 신비스러운 인물도 없을 것이다. <창세기>는 그를 ‘살렘’(훗날의 ‘예루살렘’)의 왕이자 제사장으로 부르고 있다(창 14). ‘아브라함’이 동방 네 왕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멜기세댁’은 ‘아브라함’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며 축복해주며, ‘아브라함’은 그에게 전리품의 십일조를 바친다(창 14:17-20). ‘가나안’ 인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섬겼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성경>은 이 사람에 대해서 거의 알려주지 않지만, ‘다윗’의 시로 알려져 있는 <시편>(110편)에서 하나님께서 “내 주”(누군지 분명치 않지만)에게,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시 110:1, 4). 이스라엘의 전통에 따르면, 왕과 제사장 직분은 각기 다른 사람이 맡도록 구분되어있었으나, ‘멜기세덱’은 이 두 직책을 통합해서 맡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는 이 시편을 인용하면서, ‘다윗’이 말하는 “내 주”를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후손이자, 왕이며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므로 ‘아론’의 제사장 직보다 더 높고 우위에 있다고 말한다(참고. 히 7).
요약하자면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시다(히 3:1-2). 그리고 <레위기>레서 규정하고 있는 대제사장 직분의 기능과 역할이 그분 안에서 더욱 확장되고 확대된다. 그분의 과거 지상(地上) 사역뿐만 아니라, 현재 천상(天上)에서의 사역이 한 예가 될 것이다(히 3-5, 7-10).
그렇다면 교회 즉 <신약>의 성도는 어떤 존재인가? 우리에게 여전히 제사장이 필요한가? <베드로전서>는 우리가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의 서열을 잇는 왕이자 동시에 제사장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성막. 성막은 보이지 않으며, 어느 한 곳에 편재해 계실 수 없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체적 장소이다. 오직 이곳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나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구약>에서 이 거룩한 장소는 시대를 따라 변천해왔다. 족장 시대의 단순한 한 “제단”에서, ‘모세’에 이르러는 “성막”으로, 그리고 이스라엘에서는 “성전”으로, 그리고 마침내 <신약>시대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 예수님은 그 이름 즉 ‘임마누엘’이 의미하듯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요한복음>은 이를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고 말하고 있다(요 1:14).
이분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 성전은 필요 없다고 말씀하셨다. 왜 인가?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심으로써, 그분의 임재를 영원히 대신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참고. 요 16-17). 사도 ‘바울’도 우리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요, 성령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희생제사. 희생제사는 삼중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그 중 한 기능이 “대속”이다. 희생제사에서 드리는 짐승은 대속 제물로서, 죄인을 대신하여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히브리서>는 “양과 소의 피가 인간의 죄를 대속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히 10:4). 희생제사는 단지 장차 올 참되고 영원한 제사, 즉 그리스도가 드릴 제사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드릴 제사의 효력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 10:14).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의 제사는 필요 없게 되었다. <히브리서>에 따르면,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가 드린 희생제물은 그 자신으로서, 그는 제사장이자 동시에 희생제물이기도 하다(히 9:11-10:18). 모든 인류는 그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만 죄의 용서와 언약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롬 3:23-28; 요 6:47).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의 성도는 여전히 거룩을 위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있다. 희생 제사가 아닌 영적 제사를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우리가 제사장이자 동시에 제물이기도 하다는 <히브리서>의 말씀과 맥을 같이하는 선언이라 하겠다. 비록 <레위기>의 각종 의식법은 <신약>에서 더 이상 적용되지 않지만(마 15:10-20; 막 7:14-23), 성도의 거룩한 생활에 대해서는 오히려 강화되었음을 알려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성도로 하여금 이 같은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동기이자 근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연습과 토의
1. <레위기>의 문학 양식에 대해서 논의해보자. 이 책은 그 내용 중에 제사나 거룩에 관한 수 없이 많은 규율이나 계명에도 불구하고 “법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야기”(narrative) 양식에 가깝다고 한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 근거를 본문에서 찾을 수 있을까?
2. <레위기>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거룩”이다. 이를 드러내고, 구현하기 위한 특별한 제도와 장소와 사람과 그리고 절기와 날자가 있다. 이들 각각을 열거해 보고,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3. <레위기>에서 다루고 있는 각 제사의 의미나 목적은 무엇일까? 모든 제사가 공통적으로 지니는 삼중적인 의미는 무엇이며, 각각의 차이는 또 무엇인지 논의해 보자.
4. 교회, 즉 <신약>의 성도와 다음 각 항목들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 (1) 제사장; (2) 제단, 성막, 성전; (3)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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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영화 <이집트 왕자>(The Prince of Egypt)의 절정이자 압권은 역시 “홍해탈출”이었다. 이 장면은 “When you believe”라는 주제곡으로 절정의 감동을 더해주었는데, 이 노래를 불렀던 사람이 당시 미국에서 현존하는 최고 가수라는 칭송을 듣던 ‘머라이어 캐리’와 ‘휘트니 휴스턴’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휘트니 휴스턴’은 안타깝게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이미 타계하였음.
이 노래는 그 해 제 71회 ‘오스카’상 시상식에서 주제가상을 받아 더욱 유명해 진 바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출애굽> 제 15장에 해당되는 곳으로서, 주제곡의 가사는 영화뿐만 아니라 <출애굽>의 신학적 주제와도 잘 어울린다 할 수 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은 셋째 달 1일에 언약백성으로서의 필요한 모든 제도와 의식을 갖춘 한 국가로서 태어나서, 약속의 땅을 향해서 행진한다. 여행의 목적지는 약속의 땅이지, 광야(廣野)가 아니기 때문이다. <민수기>는 “그 땅”을 향해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여행을 다루고 있다. 지리적으로 볼 때 만일 지름길을 택한다면, ‘시내’ 산에서 “그 땅”까지 가는데 불과 며칠, 그리고 ‘에돔’과 ‘모압’ 길로 간다 해도 보름이 채 걸리지 않을 이 거리를 무려 38년이나 광야에서 방황하다 이스라엘 제 1 세대는 단 두 사람을 빼고 이 기간 동안 모두 죽어갔다.
왜 이처럼 자유를 향한 탈출이 ‘해피엔딩’이 아니라, 비극으로 끝이 났을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만일 <민수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그 주제가의 제목은 어떤 것으로 삼을 수 있을까? 아마도 “When you do not believe”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제목대로라면 <민수기>는 출애굽을 믿음으로 경험했던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믿지 않을 때는 어떻게 되는 가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민수기>는 불평과 반역에 관한 이야기이다. 불평과 반역의 대상은 다름 아닌 ‘야훼’ 하나님과 ‘모세’이다. 불평과 반역의 무리 중에 소위 지도층에 속한다는 ‘미리암’과 ‘아론’이 있는가 하면(12장), ‘고라’도 있고(16-17장), “그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일반 백성도 있으며(13-14장), 그리고 이제 곧 그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받은 이스라엘의 제 2세대조차도 ‘바알-브올’의 우상 숭배에 빠지고 있다(25장).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극적이고도 대표적인 반역은 출애굽 제 1세대의 반역을 꼽아야 할 것이다(참고. 13장). 이들은 “그 땅”,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 거인(巨人)들이 살고 있다는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스스로 메뚜기처럼 위축되어, 두려워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의 배역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원하던 바대로 광야에서 죽어갔고(단 두 사람만 빼고), 너무나 역설적이게도 이들이 광야에서 모두 죽게 될 것이라고 염려하던 그들의 자녀들이 “그 땅”의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의 이야기의 진행 상황을 관찰해 보면, ‘모세’의 언약은 성취를 향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뒷걸음질을 해버린 것이다.
과연 이야기의 요지는 무엇일까? <민수기>에 드러나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적어도 이 책만을 놓고 볼 때, 하나님은 끝까지 참으시는 분은 아니라는 인상을 강하게 던져주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민수기>의 독서 포인트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민수기>의 문학
1. 제목
그리스 식 이름. <민수기; Numbers>로 알려진 책의 제목은 <칠십인 역>이나 <벌게이트> 번역본에서 그대로 따 온 것이다. 책의 제목이 주는 이미지는 그야말로 숫자나 인구조사에 관한 무미건조(無味乾燥)한 산문적 형태로서, 현대 기독교인의 관심이나 흥미를 끌만 한 특별한 내용은 없을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아닌 게 아니라, 책의 여러 곳에서 인구조사나 숫자와 관련한 다른 목록들이 잔뜩 등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참고. 1; 3:15-31; 7:10-83; 26:5-51; 28-29; 31:32-52). 신학자 ‘웬햄’(G. Wenham)도 숫자로 가득한 이 책에서 무슨 유머나, 마술이나, 제사에 관한 계명 등과 같은 요소들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고 반문했을 정도이다.
물론 많은 학자들이 <민수기>라는 이름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책에서 등장하고 있는 두 번의 인구조사가 지니는 신학적 의미는 대단한 것이다(<민수기>의 신학에서 이점을 배우게 될 것이다).
히브리 식 이름. 이 책의 ‘히브리’ 식 제목, “광야에서”는 ‘헬라’ 식 제목보다는 더 적절한 것은 사실이지만, 역시 무슨 특별한 정보를 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제목으로 <모세의 네 번째 책>이 더 적절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이 책은 ‘시내’ 산에서 ‘느보’ 산에 이르는 ‘모세’의 마지막 40년의 여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그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고별 설교를 마친 다음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인데, 설교의 내용은 <오경>의 마지막 책, <신명기>에 등장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두 개의 상이한 제목, “광야에서”와 “민수기”는 실은 전혀 상관없는 제목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밀접하게 얽혀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2. 양식
<민수기>는 문학적 양식에 있어, “이야기”인가, “일지”(日誌)인가, 인구조사에 관한 보고서인가, 제사나 예배에 관한 율법인가? 이들 질문은 <민수기>의 양식을 판단함에 있어 제기하는 당연한 것으로서, 그만큼 이 책 처음부터 끝까지 이처럼 다양한 양식들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컨대, 신학자 ‘밀그롬’(Jacob Milgrom)은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은 다양한 양식을 구분해 내고 있다: (1) 이야기(4:1-3); (2) 시(21:17-18); (3) 예언(24:3-9); (4) 승전가(21:27-30); (5) 기도문(12:13); (6) 축도(6:24-26); (7) 풍자시(22:22-35); (8) 외교문서(21:14-19); (9) 민법(27:1-11); (10) 제의법(15:7-21); (11) 신탁(15:32-36); (12) 인구조사 목록(26:1-51); (13) 성전 기록물(7:10-88); (14) 광야에서의 여행 노정(33:1-49).
이처럼 다양한 양식은 현대 독자들에게 양식 구분은 고사하고, 본문을 이해하는 일에 큰 어려움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 짧은 본문 속에서 이 양식에서 저 양식으로 옮겨가고 있는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 고통을 상상해 보라! 따라서 우리가 주지해야 할 사실은 이들 다양한 양식들이 각기 그 자체로서 무슨 의미나 목적을 가진다기보다는 “신학 화 된 역사서”로서의 <오경>의 한 부분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민수기>의 문학 양식을 논함에 있어, 이 책과 <오경> 내의 다른 책과의 관계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위에서 만나는 다양한 양식들은 각기 그들이 나타나는 고립된 문학적 상황이 아니라, <오경> 전체의 문학적 우물 속에서 이해하자는 것이다. 예컨대, ‘밀그롬’이 <민수기> 21장에서 인용하고 있는 시(詩)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21장 전체의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이 같은 태도는 다른 양식을 대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민법(民法)이나 제의법(祭儀法) 역시 “율법”(律法)이라고 하는 한 양식의 부분으로 보아야 함이 당연하다. 결론적으로 <민수기>에서 우리는 아주 다양한 문학 양식들을 만날 수 있다.
3. 구조 분석
<민수기> 안에는 이처럼 다양한 양식이 혼재해 있기 때문에, 이 책은 <구약> 중에서 가장 구조 분석이 어려운 책으로 꼽힌다. 아마도 이 책만큼 다양하고, 파편적인 사건들로 구성된 책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문학적 양식도 아주 다양하다. 예를 들어, 책 전체적으로 볼 때 주로 이야기(narrative)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교훈과 율법, 신탁(信託) 등의 장르들이 혼재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자들 마다 나름대로의 다양한 구조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을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1) 문학 양식에 따른 구분; (2) 연대기적 구분; (3) 지리적 구분; (4) 신학적 구분.
문학양식에 따른 구분. ‘밀그롬’(Jacob Milgrom)은 <민수기>의 대표적인 두 양식인 이야기(N)와 율법(L)에 착안하여 아래와 같은 시적 대조반복의 구조를 제안한 바 있다:
이 같은 구조 분석은 통찰력 넘치는 발견임에 분명하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이야기로서 <민수기>의 진행적인 구성에 대한 특면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이 책에는 이야기와 계명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발람’의 시(22-24), ‘헤스본’의 노래(21:27-30), <여호와의 전쟁기>(21:14-18) 등과 같은 다양한 장르들이 얽혀 있어, ‘밀그롬’의 구조 분석은 지나치게 단순화 된 것이다.
연대기적 구분. <오경>의 전체적인 연대기(年代記)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보낸 기간이 38년 9개월이다. 이를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의 노정을 장소별로 정리해 보면 아래 세 곳으로 나눌 수 있다.
(1) ‘시내’ 산에서 20일간: 성막 완성에서 구름기둥 이동까지(1:1-10:11).
(2) ‘시내’ 산에서 ‘가데스’까지 38년: 불신과 반역에 대한 응징(10:12-20:13; 33:38).
(3) ‘가데스’에서 ‘모압’ 평원까지 6개월(20:14-36:13; 33:38 및 신 1:3).
하지만 이 도표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도표의 목록이 반드시 시간 순으로 되어있지 않고 들쭉날쭉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민수기>는 1장 1절에서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로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이어지는 9장 1절에서는 이보다 한 달 앞선, “애굽에서 나온 다음 해 정월”(“둘째 해 첫째 달”)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다가 10장 11절에서는 다시 “둘째 해 둘째 달 스무 날”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시간표를 되돌리고 있다. 이를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처럼 다른 두 날짜를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 단순한 실수일까 아니면 의도적인 것일까?
지리적 구분. 아마도 가장 뚜렷하고도 손쉬운 구조 분석 방식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도달하기까지 머문 세 장소에 따라 구분하는 방식일 것이다. 이들 세 장소는 (1) ‘시내’ 광야, (2) ‘바란’ 광야, 그리고 (3) ‘모압’ 평원이다(지도):
이들 세 장소를 기점으로 이스라엘의 여행기와 율법 수여에 관한 내용이 반복 등장하는 패턴을 볼 수 있다(도표 및 그림):
신학적 구분. 더욱 간단한 구조 분석 방식은 ‘올손’(Olson)이 제시한 것으로서, 책 전체를 전반과 후반의 두 단락으로 나누는 것이다. 책의 전반부(1-25장)는 광야에서 모두 죽어간 출애굽 제 1세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반면, 후반부(26-36장)는 “약속의 땅”에 들어간 제 2세대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같은 구분 방식을 굳이 신학적 구분이라 부르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반과 후반은 내용적으로 시적 유사병행의 패턴을 보여주면서, 이를 통해서 책 전체의 신학적 메시지를 이끌어내기에 용이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도표 참고):
<민수기>의 역사
저작과 편집. <민수기>는 ‘모세’의 단일 작품일까 또는 후대의 편집의 결과일까? <오경>의 네 번째 책으로서,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잇고 있는 <민수기> 역시 이 질문으로부터 무관할 수가 없다. 즉 이 책이 ‘모세’의 단일 저작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소위 일련의 편집의 산물인지에 관한 것이다. <오경>의 즉 “모세 저작 설”과 “편집 설”이 그것이다. 이 질문에 관해서는 앞선 총론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 이곳에서는 문제가 되고 있는 본문 중의 구절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답하는 것으로 대신할 것이다.
우선 “모세 저작 설”과 관련해서 볼 때, 이를지지(支持)할만한 내적인 증거는 단 한 곳밖에 없다: “모세와 아론의 인도로 대오를 갖추어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자손들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들이 행진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들이 행진한 대로의 노정은 이러하니라”(33: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수기> 전체를 통해서 볼 때, ‘모세’야말로 이 책 전체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유일한 수령자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모세’를 일인칭(一人稱)이 아닌 삼인칭(三人稱)으로 지칭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 저자를 삼인칭으로 지칭하는 것은 고대 문학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하나의 문학적 관습이라고 변론하고 있다. 따라서 ‘모세’를 삼인칭으로 지칭한다 해서 그가 이 책의 실질적인 저자가 아니라는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반면 후대의 “편집설”과 관련한 주장은 <민수기> 내에서 ‘모세’ 이후의 글로 인정되는 많은 자료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예컨대, <여호와의 전쟁기>에서 발췌한 짧은 시가 있는가 하면(21:14-15), ‘요단’ 동편에 정착하게 될 두 지파의 정착 활동에 관한 기사(32:34-42)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이 부분은 ‘가나안’ 정복 이후 후대에 삽입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모세’가 책의 직접적인 저자가 아니라는 본문의 근거는 또 있다. 아마도 가장 악명 높은 구절은 ‘모세’를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 중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으로 추켜세우고 있는 구절이다(참고. 12:3). 만일 ‘모세’ 자신이 이 책의 저자라면, 어떻게 자신이 스스로를 추켜세울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후대의 편집을 주장하는 근거는 또 있다. 즉 인구조사에 관한 1장과 26장의 기사는 분명 <민수기>와는 독립적으로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자료였음에 틀림없으며, ‘모세’는 다만 이들을 활용했을 뿐이라는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발람 이야기> 역시 후대의 편집적 삽입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해석적 입장. 하지만 <오경>의 역사와 관련해서 수차례 언급했던 바처럼, 우리의 입장은 “역사비평적”(歷史批評的) 연구 결과를 존중하되, <오경>에 대한 “공시비평적”(共視批評的) 입장과 더 나아가 독자중심 비평의 입장을 유지하면서, <민수기>의 해석에 임한다는 것이다.
<민수기>의 신학
<민수기>의 신학 역시 <오경> 내의 다른 책들과 불가분의 연장선상에서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무슨 새로운 신학이 아니라, <오경>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오경> 전체를 ‘모세’의 일대기(一代記), 즉 한편의 이야기로 바라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물론 <오경>이 기승전결(起承轉結)을 완벽하게 갖춘 한 편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완(未完)의 책으로 끝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민수기>가 <출애굽>이나 <레위기>에서처럼, “그리고”라는 접속사로 책의 시작을 알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 역시 <오경>의 한 부분임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이 접속사는 <오경> 내에서 각 책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단어이다. 특별히 <민수기>는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 <출애굽>의 속편으로 불러 마땅하다. 따라서 <민수기>에서도 <오경>의 공통적인 신학적 주제들이 당연히 반복해서 등장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즉 두 책 모두에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과 율법들이 뒤섞여 있으며, 이는 ‘모세’의 생애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는 요소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두 책 모두 국가의 미래가 걸린 큰 위기(危機)를 다루고 있다: <출애굽>이 소위 황금 송아지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는가 하면, <민수기>는 열두 정탐꾼들의 불신(不信)을 다루고 있다. 이 두 번의 위기 모두 ‘모세’의 빛나는 중재(仲裁)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하겠다는 자신의 마음을 바꾸신다. 그리고 두 책 모두 이야기의 결말은 낙관적이다: <출애굽>이 성막 건축과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야훼’ 하나님께서 자신의 임재(臨齋)를 보증해주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는가 하면, <민수기>는 ‘발람’의 예언을 통해서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안전을 예고해주고, 절기와 땅의 유업(遺業)에 관한 규례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장해주고 있다.
하지만 단 하나, 비극적인 소식이 있다. 구름 한 조각이 없는 쾌청한 하늘이 아니라, 한 조각 어두운 구름이 그 하늘에 떠있다. ‘모세’가 그 행운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비극은 곧 “출애굽” 제 1 세대의 비극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 세대는 하나님의 약속을 누려 보지도 못하고 그들의 탁월한 지도자 ‘모세’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세대는 어떠한가? 이 세대는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와 함께 ‘모압’ 평원에서 “그 땅”을 목전(目前)에 두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자동적으로 그들에게 다가올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여전히 아직은 성취되어야 할 미래의 영역에 속해 있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제 1세대는 왜 하나님의 약속을 누려보지 못하고 모두 죽어가야만 했을까? 그러면 새로운 이스라엘은 과연 그 약속을 누릴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질문들이 <민수기>의 신학적 주제들을 도출함에 있어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 이스라엘
<민수기>의 주 무대는 사막(沙漠)과 구릉(丘陵)으로 뒤덮인 광야(廣野)다. <성경>에서 광야는 하나님의 부재(不在)를 상징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장장 38년의 세월을 보낸다. 과연 이 여정(旅程)이 꼭 필요한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이스라엘은 왜 이처럼 중요한 인생의 황금기를 허송세월(虛送歲月) 했던 것일까? 행여나 하나님께서 이 모진 고해(苦海) 같은 인생을 사전에 예비해두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책임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은 이 기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더란 말인가? 이들 질문은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것이다.
거룩한 군대. 이스라엘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출애굽 이후 ‘시내’ 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에 대하여 이렇게 규정하셨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6). 즉 이스라엘은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을 드러내는 “제사장”이 되었다는 뜻이다. 제사장이란 “다리를 놓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일여 년을 ‘시내’ 산에서 머문 이유도 제사장 나라로서의 제반 준비를 갖추기 위함이었던 것이다(참고. 출 19-민 10). ‘시내’ 산은 그런 점에서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장소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시내’ 산에서 마냥 머물 수만은 없다. “그 땅”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여정은 며칠이나, 몇 달, 또는 몇 년이 아니라, 무려 40여 년이 걸릴 것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원했던 원하지 아니했던, 하나님께서 그렇게 계획하셨던 아니하셨던, 이스라엘은 그 긴 여정 동안 수없이 많은 난관과 적대자들을 만나 치열한 전투와 전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이 같은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오합지졸(烏合之卒)로 남아서는 “그 땅”의 약속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강한 “군대”(軍隊)로 거듭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출애굽기>의 이스라엘에 대한 정체성을 덧입힌다면, 이스라엘은 “거룩한 군대”가 되어야 할 것이었다.
이 “거룩한 군대”가 행군과 전투를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조직과 체계와 규모를 파악하고 정비하는 일일 것이다. <민수기>의 처음 10장이 바로 이에 관한 기록이다(이스라엘의 행군이 10:11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작되고 있음을 주목하자). 우선 두 번의 인구조사(1:1-46; 26:1-65)는 군대의 규모, 즉 실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군인의 숫자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첫 번째 조사는 제 1세대가 수행할 광야에서의 전투를 위해서, 그리고 두 번째 조사는 제 2 세대가 ‘가나안’에서 수행할 전투를 위한 것이리라. 광야에서의 행군도 언제든지 전쟁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조직과 대형(隊形)으로 준비되어 있어야만 한다. 본문 1:53-2:34의 내용이 이를 보여주고 있다(아래 그림 참고).
이와 같은 진영(陣營) 구조가 보여주는 바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이 진영 한 가운데에 있고, 바로 그 주변을 가장 가까이서 레위의 네 지파가 둘러싸 호위하고 있으며, 그리고 나머지 열 두 지파가 각 세 지파 씩 ‘레위’의 네 지파를 동서남북에서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고대 근동 문화에 친숙한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배치가 전쟁을 위한 진영 형태라는 점을 이내 알아차릴 것이다. 즉 전쟁의 총 사령관 하나님의 장막이 사방에 호위무사(이 경우 레위지파와 제사장들)와 나머지 12 부대의 호위를 받으며, 전체 진영의 한 가운데 위치해 있다.
행군 방향은 동쪽이며, 동쪽의 세 지파가 전위부대(前衛部隊)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중 ‘유다’ 지파가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행군(行軍) 시, 진영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아래 그림).
‘모세’도 이 모든 조직과 배치가 결국 적과의 전쟁을 위한 것이며, 전쟁의 최고 사령관은 하나님 자신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민 10:35).
이스라엘은 이처럼 하나님의 군대 즉 “거룩한 군대”이며, 하나님께서 최고 사령관으로서 약속의 땅에 이르기까지 직접 전쟁을 지휘할 것이므로, 이스라엘의 대명사는 연전연승(連戰連勝)이 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강한 군대의 특징은 상명하복(上命下服)과 사기(士氣)에 있다. 이것이 이스라엘 군대를 향한 이상(理想)이었다.
광야 세대.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 군대는 ‘시내’ 산에서 첫 출정(出征) 이후, 가는 곳마다 연전연패(連戰連敗)를 거듭했다. 승리가 아니라 패배가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렸다. 왜 그랬을까? 끊임없는 불평과, 반역과, 의심이 이 군대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극적이게도 다른 사람 아닌 ‘미리암’과 ‘아론’이 반역의 선봉장 역할을 맡았다. 이들이 누구인가? ‘모세’의 형제이자 군대의 또 다른 지도자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세’의 특별한 권위를 인정할 수 없었다(민 12장). ‘모세’에 대한 시기심(猜忌心)과 질투심이 직접적인 반역의 동기였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속내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우회로(迂廻路)를 선택했다. 즉 ‘모세’가 이방 족속 ‘구스’ 여인과 결혼한 문제를 들고 나와 그의 지도력에 훼손을 가하는 방식을 택했다. ‘모세’가 무슨 연유로 이 같은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이 두 사람의 행위는 온당치 못하며, 위선적이라 할 만하다. 왜냐하면 ‘모세’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6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8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12:6-8)
‘모세’에게 반기(反旗)를 든 사람은 이 둘 만은 아니었다. 역시 ‘레위’ 지파인 ‘고라’가 있고, ‘르우벤’ 지파의 ‘다단’과 ‘아비람’이 있다. 당연한 조치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과 동조자들 모두를 불에 태우고, 땅을 갈라 그 속에 쳐 넣어버리셨다(16장).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던 ‘아론’ 자신은 어떠했을까? 그 역시 다른 지파의 두령들로부터 대제사장 직분을 놓고 거센 저항과 반대를 받게 될 줄을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유명한 “싹 난 지팡이” 에피소드를 통해서 그의 권위를 지켜주신다(참고. 17장).
이스라엘 군대의 문제는 이들 지휘관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광야 생활 38년에 대한 직접적이고, 가장 큰 원인은 그 유명한 “스파이 에피소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참고. 13-14장). 알다시피,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열 명의 보고는 절망적이고, 비관적이며, 회의(懷疑)와 불신(不信)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분위기는 군대 전체로 번졌으며, 마침내 원망과 불평으로 돌변했다. “광야 세대” 즉 출애굽 당시 20세 이상으로 인구조사에 포함된 모든 장정들이 다 한 목소리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말리는 ‘갈렙’과 ‘여호수아’를 돌로 쳐 죽이려했다. 성막의 존재, 즉 하나님의 임재는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마침내 하나님은 이 군대를 버리시겠다고 공언하셨다. 광야 군대 중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어느 누구도 “그 땅”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모세’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일견 ‘모세’는 이 모든 실패로부터 자유로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민수기>는 왜 ‘모세’도 예외가 될 수 없는지 한 사건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참고. 20:1-13). ‘가데스’ 광야에서 백성이 물이 없다고 불평하자 그가 지팡이로 바위를 쳐서 물이 나게 했던 에피소드를 말한다. 우리가 보기에 별 것도 아닌, ‘모세’의 행동은 다음과 같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10-11절).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이 부분을 문제 삼아 ‘모세’를 거부하신 것이다. 이유는 이러하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12절). 하나님의 설명인 즉은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정말 이유치고는 지나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인지 ‘모세’는 <신명기>에서 그가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를 자신의 고별 설교에서 밝히고 있다(참고. 신 3:26).
새로운 세대. 이스라엘 군대는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가데스’ 광야를 떠나 ‘요단’ 동편 ‘모압’ 평원에 이른다. 하지만 이 군대는 이전의 군대가 아니다. 두 번째 인구조사를 통해서 구성된 완전히 새로운 군대다. 광야 군대를 이루던 제 1세대는 모두 사라졌고,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새로운 군대가 이전 군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더 이상의 불평이나 원성이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두 번째 인구조사를 언급하고 있는 <민수기> 26장은 이 책에서 이야기의 전환점을 이루는 곳이다.
이 새로운 군대는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그 땅, 즉 ‘가나안’을 정복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이 군대가 ‘모압’ 평원에 이르는 여정은 여전히 험난하기만 하다. 그들 앞에 ‘아모리’ 족속의 ‘시혼’ 왕국과 ‘바산’ 왕국 ‘옥’과의 전투가 기다리고 있으며, 더욱 위협적인 적 ‘모압’ 왕 ‘발락’이 있다. 특히 ‘발락’은 점쟁이 ‘발람’까지 동원하여, 이스라엘이 ‘모압’ 땅을 지나는 것을 집요하게 방해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는 기록은 없다.
그래서일까! 하나님은 ‘발람’의 당나귀를 통해서 저주가 아닌 축복의 메시지를 주신다(24:17-19). 그러나 새로운 군대라 해서 범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발람’을 통한 자신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발락’은 소위 미인계(美人計)로 이스라엘을 파괴하려 한다. 그의 음모는 성공하는 듯이 보였다. 많은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 여인의 유혹에 빠져 이방신을 섬기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 ‘비느하스’가 신속하게 개입하여 이들 범죄 한 이스라엘 인들과 그들의 ‘모압’ 여인들을 잡아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켜내었다(참고. 25:7-8).
두 번째 인구 조사는 이 사건 이후에 하나님의 명령으로 실시하였는데, 이는 ‘가나안’에서의 전쟁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인구조사는 이미 ‘가나안’ 정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겠다. 광야 제 1세대를 포기하신 하나님께서 새로운 이스라엘과는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의 표현이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먼 길을 돌아 ‘모압’ 평원에 도달하였고,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한 전쟁을 수행하게 될 참이었다(신 1:1-8). 여기서부터 <신명기>의 내용이 이어질 것인바, 이 책은 광야 생활에 대한 ‘모세’의 회고(回顧) 설교로 시작하여, 새로운 땅에 대한 전망으로 이어가고 있다.
2. 하나님
<민수기>는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이어 하나님의 두 속성, 즉 초월성(超越性)과 내재성(內在性)에 대한 주제들을 계속 발전시켜가고 있다. 예컨대, 3장과 4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스라엘 군대의 진영이라든지, 행군 시 성막과 ‘레위’ 지파와 제사장들의 위치에 대한 언급 등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책 곳곳에 등장하고 있는 각종 제사법이나, 절기, 기타 성막 기구(器具)들에 관한 설명들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민수기>에서 한 가지 특기할 만 발견이 있는바, 하나님의 본성이 이스라엘과의 대조(對照)나 대비(對比)를 통해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거룩.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일관(一貫)된 거부감은 <성경> 전체에 걸쳐 잘 드러나 있다. 예컨대, <디모데후서>는 이를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12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13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2-13)
여기서 13절은 사람들이 가장 잘못 이해하고 있는 구절 중의 하나인데, 이는 이 구절을 전후 문맥을 떠나서 읽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을 함께 읽어보면, 13절의 의미는 분명해진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악에 대해서 끝까지 인내하고 참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비록 일관성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매사에 일관되고 신실하시기 때문에(거룩한 그분의 속성에 관한 한에 있어서), 우리가 그분을 버리면 그분 역시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그런대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정 반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광야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가 이러했다. 즉 하나님께서는 광야 이스라엘 군대의 불신과 불평을 끝까지 참고 견디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태도에 상응하는 행동을 보여주셨다. 이스라엘이 자신을 버렸으므로, 하나님 또한 이스라엘을 버리셨던 것이다. 광야 제 1세대 중 단 두 사람(‘갈렙’과 ‘여호수아’)만 제외하고 그 땅을 밟은 사람은 없다(참고. 26:26-35). ‘모압’ 땅을 밟은 사람은 없다. 광야 제 1세대의 광야 여정은 그야말로 죄로 점철된 것이었고, 하나님은 끝까지 참지 않고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내리신 것이다.
임재. ‘올손’(Olson)이 제시한 바대로, <민수기>는 제 26장에서 중요한 신학적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책의 전반부(1-25장)는 광야에서 모두 죽어간 출애굽 제 1세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반면, 후반부(26-36장)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제 2세대에 관한 이야기이다. 전반부가 이스라엘의 과거 이야기, 즉 실패와 반역과 좌절을 다루고 있다면, 후반부는 미래 이야기, 즉 약속과 소망과 승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제 1세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이 파기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에 언급한 바처럼, ‘갈렙’과 ‘여호수아’가 살아남았고, 광야 제 2세대 중 단 한 사람도 죽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참고. 26장 이후). 이들 제 2세대 이스라엘은 ‘가데스’에서 ‘모압’에 이르는 동안 치른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였으며(참고. 28장), ‘모압’ 여인들로 인한 우상숭배로 국가적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참고. 32장).
하나님은 이전에 ‘시내’ 광야에서 구세대와 맺은 언약을 갱신하면서, 당시의 규례와 계명들을 재천명(再闡明) 하신다(참고. 34장). 하지만 강조점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 미래 ‘가나안’ 땅에 있다. 이는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재 헌신(再獻身)으로서, ‘가나안’ 정복에 대한 전제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약속이 있다 해서 미래의 위험이 자동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 2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읽을 수가 있다. 즉 그분이 달라지셨다는 사실이다. 마음을 바꾸셨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하다. 그분의 신실하심을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신 것일까? 자신의 이름에 치명타를 받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왜 마음을 바꾸신 것일까? 이전 세대에 대하여 했던 것처럼 언약을 그냥 폐기처분하지 않고, 왜 새롭게 갱신하려 하시는가? 왜 끊임없이 반항하고 반역하는 이 백성과 함께 하기를 고집하실까? 자기 백성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신약>은 이 주제를 절정(絶頂)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민수기>의 이야기는 <신약>의 전주곡에 불과할 뿐이다. 그 절정은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역사를 두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잡아 죽였으며, 종국에는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마저 십자가에 못 박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이 백성을 포기하지 않고, 그들 속에 희망을 남겨두셨다. 그 희망은 곧 이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3. 광야
이스라엘의 광야는 지리적으로 이집트와 ‘가나안’ 사이에 있다. 그리고 신학적으로는 “구원”과 “정복” 사이에 있다. <오경>의 다섯 책 중에서 <창세기>를 제외한 나머지 책에서 이 “광야”는 중요한 무대로 등장하고 있다. “광야”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무대이지만, 신학적으로도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무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주제는 비단 <오경> 내에서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에서 핵심 주제가 되기도 하다.
“출애굽”의 일차적인 결과이자 목적은 자유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노예에서 또 다른 노예가 되는 것이다.” 즉 ‘바로’ 왕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노예가 되기 위함이다. ‘바로’의 “구속”(拘束)이 강압적이고 타의적인 것이라면, 하나님의 “구속”(救贖)은 구원이며 자발적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섬길 새로운 왕은 ‘야훼’ 하나님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야훼’ 하나님을 섬길 때만이 단순한 자유와 해방이 아닌 광복(光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시내’ 산에서 ‘바로’ 왕의 노예는 ‘이스라엘’이 되고 국가가 된다. 단순한 독립국가가 아닌, “언약 국가” 또는 “신정 국가”가 된다. “십계명”과 부속 계명들은 “신정 국가”의 주권(主權)을 갖는다는 의미이며, 신앙적이고, 정치․경제적 인 자유를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장장 사백여 년을 노예로 살아왔던 자가 성숙한 시민이 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율법과 계명”, “인구조사”, “진영의 조직과 배치”, “성막과 기구들”, “제사장과 레위인들”, “불기둥과 구름 기둥”, “토지 분배” 등. 이 모든 것들은 이스라엘을 진정으로 이스라엘답게 해주는 것으로서, 철저한 사전 준비와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서 비로소 육화(肉化)될 수 있다.
광야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광야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 외는 아무 것도 없는 곳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이스라엘은 하나에서 열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고난을 통해서 성숙을 배워야 했다는 말이다. 그 광야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의도하셨던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의 잘못으로 비롯된 것인가에 관한 논쟁은 그런 점에서 문제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4. <민수기>와 신약
<신약>이 <민수기>를 언급하는 목적은 두 가지이다: (1) 후대의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선조가 광야에서 저질렀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2) 예수 그리스도가 두 번째 ‘모세’이자 그보다 더 나은 자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교훈을 위하여. 첫 번째 목적과 관련해서 <신약>에서 가장 길게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은 <고린도전서>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민수기>를 상기시키면서, 특별히 우상숭배와 성적(性的) 타락을 경고하고 있다:
3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3-11)
<히브리서>는 <민수기>의 다른 사례를 들어 그의 독자들에게 불순종과 반역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16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17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 18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19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 3:16-19)
그리고 <유다서>는 ‘발람’의 실수와 ‘고라’의 반역과 같은 일들이 <신약> 교회에서도 항상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화 있을 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유 1:11).
모세보다 더 나은 자. <신약>은 또한 <민수기>의 ‘모세’ 대한 예표론적(豫表論的) 해석을 가하여 그리스도를 두 번째 ‘모세’로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나은 자로 묘사하고 있다.
2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3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히 3:2-6)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그리스도는 ‘모세’처럼 백성들에게 ‘만나’를 먹였을 뿐만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영적(靈的) ‘만나’, 즉 영생을 주었다고 말한다(요 6:48-51). 광야에서 ‘모세’가 놋뱀을 들어 그것을 바라본 이스라엘이 살아난 것처럼, 그리스도가 놋뱀이 되어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이와 같이 광야의 제 1세대 이스라엘과 이후 모든 믿음의 세대 간에는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유사한 체험이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당대를 살아가는 모든 믿음의 백성들에게 자극과 교훈과 권면이 되고 있다. 오늘날 교회 역시 <민수기> 당시 제 2세대 이스라엘이 당면했던 것과 똑 같은 위기에 노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아직도 여전히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은 “가나안 정복”, 즉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광야 여정(旅程)을 걸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광야는 곧 고해(苦海)로 가득 찬 인생일 것이며, 동시에 소망을 이루게 하는 훈련의 장소와 시기가 될 것이다. 어떻게 이 인생을 풍성하게 누릴 것인가?
연습과 토의
1.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은 ‘시내’ 산에 도착하여 일여 년을 보낸다. 약속의 땅을 향한 본격적인 여정은 그 이후에 시작된다(참고. 민 1:1-10:10). 이곳에서 이스라엘은 무엇을 했으며, 이 기간과 장소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2. 첫 번째 인구조사도 이 기간 중에 있었다. 왜 이 조사가 필요했으며, 이것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3. <민수기>에서 독특하게 강조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는 인구조사를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동일한 정체성을 오늘날 교회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신약>에서 이를 지지하는 본문의 사례들을 열거해 보자.
4. <민수기>에는 세 개의 중요한 장소가 등장하고 있다. 각 장소는 이 책의 신학적 주제를 이끌어내는 데에도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이들 장소를 거명하고, 신학적 의미를 도출해 보자.
5. <민수기>의 주요 무대는 ‘시내’ 산에서 ‘모압’ 평원에 이르는 ‘가데스’ 광야다. 이곳은 이스라엘이 대부분의 광야 세월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왜 이곳에서 그처럼 긴 세월을 보냈을까? “광야”가 이들에게 무슨 유익을 주었을까?
6. 모세와 아론은 “그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너무 지나친 처사가 아닐까?
7. <민수기>는 두 번째 인구조사를 기점으로 신학적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첫 번째 조사에 비해 무엇이 달라졌으며, 강조점은 무엇일까? 두 번의 인구조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속성과 언약에 대해서도 논의해 보자. 두 번째 인구조사의 대상은 누구이며, 이 세대가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
8. <신약>은 <민수기>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신약>이 <민수기>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 논의해 보자.
12
신명기
‘유대’인들이 회당(會堂)에서 교재(敎材)로 사용하기 위하여 한 권의 책을 선택해야 한다면 <신명기; 申命記>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만큼 이 책은 비단 ‘유대’교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사상과 관습을 발전시키는 데에도 <구약>의 어느 책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할 수 있다.
<신명기>의 교리는 <구약>의 토대가 된다. 선지자들은 <신명기>의 가르침을 그들의 설교에서 상기시켰으며, <신명기>의 분명하고도 명료한 요구들을 가지고 동 시대의 사람들에게 도전했다. 왕들은 <신명기>의 높은 이상을 상기했으며, 요직의 관리들은 국가적 위기에 봉착했을 때 <신명기>의 진리들을 되풀이 강조했다. <시편>은 위대한 찬양과 경배와 고백과 중보의 노래들 속에 <신명기>의 메시지를 엮어 넣었다. 이스라엘의 지혜 교사들, 즉 짧고 함축적인 말로 백성을 교회했던 그 중개자들은 <신명기>의 주제들을 인간의 행동과 사회적 일상사의 실제적인 문제에 적용했다.
<신명기>는 또한 기독교인의 삶과 사고를 개발하는 데에도 대단히 중요하다. 예수님은 <신명기>의 독특한 메시지를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그의 공생애(公生涯)나 사적인 영역에서 사용하셨다. 예컨대, 유대 광야에서 가혹한 시험을 받으면서 ‘사탄’을 물리치는 도구로 <신명기>를 사용하셨으며, 부자 청년으로 가장 으뜸 되는 <구약>의 교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서는 <신명기>를 인용하셨다.
초대교회도 <신명기>의 교훈이 가장 핵심적인 것임을 똑같이 확신하고 있었다. <신명기>는 <신약>이 가장 자주 인용했던 <구약>의 책이다. <신명기> 인용문은 27권의 <신약> 가운데 무려 17권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신명기>를 참조한 본문은 80여 군데나 된다.
<신명기>가 선지자나, 왕이나, 예수님에게나, 그리고 초대교회에서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역시 그래야 할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신명기>의 중요한 메시지를 연구할 때, 우리는 ‘모세’가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운동력이 있으므로”, 이 말씀은 머나먼 이스라엘에서, “그 때 거기에서” 일어난 일에 관한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강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한 바 있다.
<신명기>의 문학
1. 제목
헬라어 제목. “두 번째 율법”(δεοτερονομιον)을 뜻하는 ‘그리스’어 제목은 <신명기> 본문, “이 율법 서를 등사하여”(17:18)에 근거하여 붙인 것이다. 영어 제목 Deutronomy는 이 단어를 음역(音譯)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제목이 책의 내용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명기>의 내용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오경>의 앞선 책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앞선 책들에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에게 계시한 것이지만, 이 책에서는 ‘모세’가 동일한 하나님의 계명들을 설교의 형태로 그의 백성들에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히브리어 제목. 이 제목 역시 본문의 첫 문장에서 따온 것으로서, “이것들이 그 말씀들이다”. 이는 ‘모세’에게 주신 교훈이라는 의미로서, <신명기>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풀어준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율법을 직접 설교하는 경우란 거의 없지만, 그들의 사역은 율법을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다. <신명기>에서 선지자의 원형(原型)으로 등장하고 있는 ‘모세’(18:15-22)가 그 백성에서 율법을 가르치고, 설교하면서, 율법의 요구에 순응하고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종종 ‘모세’는 먼 미래를 내다보며, 왕국의 건설(17:14-20), ‘가나안’ 정착(33:6-29), 추방, 그리고 고토(故土) 회복(28:64-68; 30:1-3) 등과 같은 주제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하지만 ‘모세’의 주된 관심사는 먼 미래가 아닌 당장의 현실에 있다. 즉 ‘모압’에서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의 영도 아래 ‘요단’을 건너, “그 땅”을 정복하고 나누는 일이 급선무이다. 그래서 그는 큰 열정과 함께 다급한 심정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야훼’ 하나님에게 절대적인 순종과 충성을 요청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결코 다시 쓰러져서는 안 될 것이며, 동일한 실수를 반복해서도 안 될 것이다.
2. 양식
<신명기>는 문학적 양식(樣式)에 있어 설교(說敎)인가? 이야기인가? 법전(法典)인가? 종주계약서(宗主契約書)인가? ‘모세’의 자서전(自敍傳)인가? 시와 노래인가? 이들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련하기 전에, 먼저 <신명기>에 등장하는 제반 양식부터 차례대로 고찰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설교. 일찍부터 학자들은 이 책이 선지자적 설교로서의 수사(修辭)와 문체(文體)로 가득 차 있음을 간파했다. 설교의 특징은 절박하고, 열정적이며, 반복적이다. 이 책 속에는 세 개의 설교가 등장하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이와 같은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다만 각 설교의 상대적인 분량이나 적절한 안배(按配)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
또한 수없이 많은 율법(律法)들이 설교 속에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율법을 어떤 원칙과 어떤 순서로 각 설교 안에 배치했는지, 알 길이 전혀 없다. ‘모세’가 설교 중에 율법을 언급하는 이유는 율법의 고상함이나 우아함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목적은 단 하나, 즉 청중들을 설득하여 그 율법을 지키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의 지난 과거를 회상할 때조차도 과거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조상들이 저질렀던 잘못들을 현재와 다가오는 미래에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신명기>의 양식(樣式)을 “예언적 설교”로 규정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듯싶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세’의 설교는 “고별설교”에 가깝다. 이는 이전 시대 ‘이삭’이나 ‘야곱’의 임종 시 침상 주변을 지키고 있던 자손들에게 행한 임종 축복 기도를 연상시켜주는가 하면(참고. 창 27:27-29, 39-40; 49:2-27), ‘모세’ 이후에는 ‘여호수아’나 ‘다윗’의 고별 설교(수 23:2-24:27; 왕상 2:2-9)와 연결시킬 수 있다. 이들 고별설교의 공통적인 특징은 우선 설교자 자신의 생전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행위를 회고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다가올 앞날에 대한 기대와 예언을 언급한 후에, 자녀들(또는 후대 세대)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충성을 촉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고별설교의 길이나 깊이에 있어 ‘모세’의 설교는 <성경> 속의 여타 고별설교를 압도한다. 그런 점에서 ‘모세’의 설교는 고별설교의 전형(典刑)으로 삼을 만하다.
설화. <신명기>의 많은 부분이 ‘모세’의 설교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의 설교는 ‘모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설화”(說話;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용해되어있는 것도 사실이다. 앞선 책 <민수기>는 이야기로서는 일종의 미완(未完)의 책이다.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관점에서 볼 때 <민수기>는 ‘모세’의 죽음으로 끝이 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수기>를 읽은 독자는 ‘모세’의 운명을 놓고 긴장감 내지는 불안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그가 언제 ‘느보’ 산에 올라가 최후의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를 놓고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어지는 책 <신명기>를 펴면, 이스라엘은 여전히 ‘모압’ 평원에 머물러 있고, 이들을 향한 ‘모세’의 고별설교가 시작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세’는 자신이 약속의 땅 밖에서 죽게 될 것임을 드러낸다(1:37). 임박한 그의 죽음은 책 전체를 통해서 흐르고 있는데, 당연히 그의 설교 속에도 이와 같은 분위기가 드러나고 있다. ‘모세’는 그의 청중들에게 그려주고 있는 아름다운 약속의 땅에는 자신은 들어갈 수가 없다. ‘모세’의 죽음에 관한 언급은 책의 끝부분에 가서야 비로소 등장하고 있다: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가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그의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신 32:49-50). 그리고 각 부족들에게 축복의 신탁을 전한 후,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34:5-6).
자서전. <신명기>는 책의 마지막을 ‘모세’에 관한 “묘비명”(墓碑銘)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이더라“(34:10-12).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명기>는 ‘모세’의 전기(傳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모세’의 생애 중 마지막 부분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오경>의 다른 책들은 ‘모세’의 초기 생애를 다루고 있는 자서전에 해당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창세기>에서 <민수기>까지의 내용을 ‘모세’의 일대기 정도로 이해한다 해서 무슨 특별한 장점이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신명기>의 경우에는 이 책을 ‘모세’의 전기로 취급함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은 불가피해 보인다.
주종계약. <신명기>는 또한 주전 2000년 당시 근동지방에서 친숙했던 주종계약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그 양식에 있어 법전과 계약서 사이를 오가고 있다.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신명기>는 그 분량에 있어 고대근동의 주종조약보다 훨씬 길다는 점이다. 아래 도표는 <신명기>와 고대 법전과 조약과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위 도표에서 보듯이, “역사적 서언”(historical preview)에서 다루는 내용은 계약 당사자 사이에 얽힌 최근의 역사적 사실들이다. 특히 큰 나라가 작은 나라(신하 국가)에 대하여 베푼 호의(好意)를 뽐내고 자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예컨대, 신하국가의 배반과 반역에도 불구하고 왕국으로서의 체제는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는 등의 호의를 말한다. <신명기> 역시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반역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야훼’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시내’ 산에서 약속의 땅까지 인도해 오셨는가를 상기시키고 있다.
<함무라비 법전>과 <신명기>는 그 형식이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신명기>는 조약으로서의 형식을 띄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조약에서 필수적인 의무사항은 신하국가의 절대적인 충성이다. 예컨대, 신하국가가 섬기는 국가에 대하여 조공(租貢)을 바친다든지, 도망 친 범죄자를 본국으로 송환해 준다든지, 새로운 왕위 계승자에게 충성을 약속하는 등의 의무사항을 말한다.
두 당사자 사이에 일단 계약이 맺어지면 계약 문서는 성소(聖所)에 보관을 하되, 정기적으로 공개 낭독을 해야 한다. 이는 봉신 국가의 책무를 주기적으로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신명기>에도 이와 같은 모티브가 내재되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참고. 신 27, 31장).
그리고 계약의 증인이 필요한데, 대개 그 나라가 섬기는 신들을 목록으로 만들어 증인으로 삼는다. 하지만 <신명기>에는 이들 신들의 목록이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 이스라엘은 오직 단 한 분의 신, 즉 ‘야훼’ 하나님만을 섬기기 때문이다(5:7; 6:4).
조약문서의 끝에는 축복과 저주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증인으로 열거한 신들이 이를 책임지고 행사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축복의 내용은 봉신국의 충성에 대한 보상(報償)으로 장수(長壽), 국가의 번성, 풍년 등을 담고 있고, 반면 불순종과 반역의 대가는 온갖 종류의 저주가 다 포함되어있다. 대개 법전의 경우라면 축복이 저주에 앞서 등장하지만, 조약의 경우에는 저주가 축복에 앞서 등장하며, 그 분량도 상대적으로 훨씬 많다. <신명기>의 경우에는 법전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축복이 앞서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조약의 경우처럼 상대적인 분량에 있어서는 저주가 축복을 앞서고 있다.
시와 노래. 마지막으로 <신명기>의 양식과 관련해서 “시와 노래”를 간과할 수 없다. <신명기>의 마지막 세 장에서 마치 색인(索引)처럼 등장하고 있는 “모세의 노래”(32장), “모세의 축복”(33장), 그리고 ‘모세’의 죽음과 장사(葬事)에 관한 내용이 그것이다(아래 도표 참고). <신명기>의 주된 내용이 율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도, 그것을 전달하는 문학적 형식 내지 방식은 “시와 노래”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2 세기 전 대주교(主敎) ‘로스’(R. Lowth)에 따르면, 고대 지중해 연안 세계에서 사람들은 법조문을 축제 때 시나 노래로 불렀다. 율법의 딱딱하지만 귀중한 내용을 시와 노래라는 형식으로 표현하는 유익을 우리는 우리의 일상 체험을 익히 통해서 알고 있다. 노래 가사에 멜로디를 붙이는 이유를 우리는 알고 있다. 즉 멜로디 없이 가사를 다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흔히 율법 책으로 알고 있는 <신명기>도 ‘모세’의 지시에 따라 ‘레위’ 사제들이 축제 시에 노래로 선포했을 것이다:
9또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10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매 칠 년 끝 해 곧 면제년의 초막절에 11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31:9-11)
21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 22그러므로 모세가 그 날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르쳤더라(31:21-22)
고대 근동 언어가 회화적(繪畵的)이고 청각적(聽覺的)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신명기>를 가리켜, <성경> 중에서 가장 예식적인 책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유월절” 등과 같은 거국적 축제를 준비하면서, 이 율법 책을 읽었다(예. 수 5). 한 마디로 <신명기>는 세 번의 “유월절 이야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1) 출애굽을 위한 유월절(출 12); (2) ‘신’ 광야에서의 유월절(민 9); (3) 약속의 땅에서의 유월절(수 5).
이들 유월절 이야기가 훗날 ‘유대’나 ‘사마리아’의 <유월절 시집>의 전승이 되었을 것이며, 이들이 아마도 가장 초기의 <신명기>의 문학적 형식이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신명기> 32장을 “모세의 노래”로 칭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시와 노래의 힘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아마도 수 세기를 두고 초기의 시와 노래는 ‘레위’ 인들을 통해서 전해져 갔을 것이며, 이스라엘의 종교 교육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요시야’의 개혁 운동 당시에 예루살렘에서 글로 기록이 되었을 것이며, 이중 <신명기>가 정경화(正經化) 작업의 중심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신명기>는 정경화가 이루어지고 난 이후에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 시에 음악적인 전통은 그대로 전수되어 오늘날까지 소위 <마소라 사본>에 반영되고 있다. 사실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신명기> 해설 책들은 <신명기>가 지닌 이 같은 음악적 요소(박자와 리듬)을 무시하고 있다(어디 <신명기> 뿐이겠는가!).
요약하자면, <신명기>의 문학적 형식은 “시”라 할 수 있다. 그것도 교육적 목적을 지닌 시이다. <신명기>의 구조가 전체적으로 매우 정교하고 잘 짜여 진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도 이를 증거하고 있다.
3. 구조와 단락
개요. <신명기>의 구조를 밝히려는 노력은 이 책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문학 장르-설교, 예언, 조약, 시와 노래, 이야기-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는다. 예컨대, 이 책을 ‘모세’의 설교 모음집으로 보게 되면 전체적으로 세 편의 설교가 각각 4, 24, 그리고 2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위 도표 참고).
각 설교는 양적인 면에서 전혀 안배가 되어 있지 않은 셈이다. 또 각 연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율법들을 어떤 원칙하에 어떤 순서로 배열했는지에 대해서도 파악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 많은 청중이 그렇게 길고도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연설에 처음부터 끝까지 귀 기울일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세 편의 설교. 약간의 가감(加減)을 하고 나면 <신명기>의 개요는 종주 계약(從主契約)의 양식을 따라 세 편의 설교와 세 개의 부록(appendices)으로 구분할 수 있다(위 도표 참조).
교차대구적 구조. <신명기>의 구조를 바라보는 또 다른 방식은 크고 작은 대칭(對稱) 내지는 교차대구(交叉對句的)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처음과 마지막 두 단락(A와 A’)은 하나의 문서로 다룰 수 있을 것인데, 두 단락은 동일 인물 ‘여호수아’로 연결되어있다(‘여호수아’는 <신명기> 내에서 이 부분에서만 등장하고 있다). 내부의 두 구조(B와 B’) 역시 하나의 문서로 읽을 수 있을 것인데, 두 단락을 잇는 공통 요소는 언약의 축복과 저주에 관한 내용이다. 축복과 저주는 이스라엘이 각각 ‘그리심’ 산과 ‘에발’ 산에서 행하는 독특한 의식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 내용 역시 <신명기> 내에서 이 부분에서만 등장하고 있다(참고. 11:26-32; 27:1-14). 마지막으로 대칭구조의 중심(C)에 <신명기>의 핵심 내용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 내용인 즉은 흔히 “신명기 법전(法典)”으로 알려져 있는 고대 이스라엘의 핵심 행동 양식을 다루고 있다.
이들 다섯 개의 단락은 각기 다섯 개의 작은 단락들이 대칭적 구조를 이루고 있어, 이 책은 전체적으로 놀라울 정도의 문학적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이에 관해서는 추후 상세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이처럼 아주 정교하게 균형 잡힌 <신명기> 구조가 시사하는 바는, 이 책의 양식과 기능을 설명함에 있어 다른 모델을 도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음악이나 서사시 등이 이처럼 정교한 예술적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고대 이스라엘에서 <신명기>를 처음 편집할 당시에 이 책의 양식 역시 시적인 형식을 띄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이와 같은 대칭적 구조와 크고 작은 대칭적 구조는 ‘유대’인들의 가지 달린 촛대를 연상하게 한다. 즉 다섯 단락의 각 가지는 다시 대칭구조를 이루며, 그 안에서 작은 가지는 또 다른 작은 대칭 구조를 계속 이루면서, 물결이 동심원을 이루며 퍼져나가듯이, 외연(外延)을 학대해 가고 있는 형국이다. 처음 두 단락을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첫 번째 단락(1-3장):
A 설교: 그 땅에 들어가라(1:6-8)
B 분배: 이스라엘 백성(1:9-18)
C 전쟁: 이스라엘의 전쟁(1:19-21)
D 정복을 위한 진군(2:2-25)
C’ 전쟁: ‘야훼’의 전쟁(2:26-3:31)
B’ 분배: ‘요단’ 동편의 땅(3:12-17)
A’ 설교: 그 땅을 취하라(3:18-22)
(2) 두 번째 단락(4-11장):
A 이스라엘아, ‘야훼’의 법을 준수하라(4:1-40)
B ‘모세’가 세 성읍을 구분함(4:41-43)
C 이것이 그 율법(십계명)이라(4:44-6:3)
D 이스라엘아 들으라(6:4-7:11)
E 순종하면 축복이(7:12-26)
E’ 불순종하면 멸망이(8:1-20)
D’ 이스라엘아 들으라(9:1-29)
C’ 이것이 그 율법(십계명)이라(10:1-7)
B’ ‘야훼’께서 ‘레위’ 지파를 구분하다(10:8-11)
A’ 이스라엘아, ‘야훼’의 법을 준행하라(10:12-11:25)
이처럼 아주 정교하게 균형 잡힌 구조는 시나 음악 등에서 보는 것과 같은 청각적이며, 시각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히브리’ 언어의 회화적(繪畫的)이고 음악적인 요소는 익히 알려져 있다). 이점은 <신명기>의 초기 양식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즉 고대 이스라엘에서 <신명기>를 처음 편집할 당시에 이 책의 양식 역시 시적인 형식을 띄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신명기>의 역사
1. 개요
<신명기>의 역사라 함은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언급했던 것처럼, 이 책의 자료와 편집에 관한 제반 과정과 연대기, 동기와 목적, 그리고 배경 등을 포함한다. 이 모든 과정에 대한 연구를 전문적인 용어로 “통시비평”(通.視批評)으로 부른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신명기>에 대한 “통시비평”적 연구 내용은 <오경> 전체에 대한 “통시비평”에서 한 차례 다룬 바 있기 때문에, 본인의 <구약개론> 참고.
별도의 소개는 필요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신명기>가 <오경>의 소위 “문서 가설”(Documentary Hypothesis)의 초석이 된다는 점에서, 이곳에서는 저작(또는 편집) 시기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고자 한다.
2. 기록자와 연대
‘모세’ 이후 <신명기>의 연대 문제는 저자 문제와 분리해서 다루기 어렵게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신명기> 최초의 저자(편저자로 부르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다)는 ‘모세’라는데 이의를 달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최초의 설교는 ‘모세’ 이후 여러 편집자들에 의해 수정이나 보완을 거쳤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이의를 달기 어려울 것이다.
고전적 문서설. ‘그라프’-‘벨하우젠’의 이론에 따르면, <오경>은 네 개의 문서로 이루어져 있다: (1) <야훼(J) 문서>; (2) <엘로힘(E) 문서>; (3) <신명기(D) 문서>; (4) <사제(P) 문서>. 이중 D 문서는 <신명기>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오경> 내에서 등장하는 위치는 대략 다음과 같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구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지난 한 세기 동안 고전적인 ‘벨하우젠’ 이론에 대한 수정과 보완이 수없이 이루어져, 심하게 말하자면 문서 가설은 이제 누더기 신세로 전락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즉 더 이상 일치된 견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서 가설을 완전히 폐기처분할 수 없는 것은 “통시 비평”이 지난 한 세기 동안 <성경> 해석과 관련해서 이룩해 놓은 학문적 업적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에도 “통시 비평”은 <성경> 해석과 관련해서 많은 난제(難題)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당연히 D 문서의 정확한 기원에 대해서도 멀리는 ‘모세’ 당대에 이미 존재했다는 견해에서부터, 가깝게는 왕정 시대에 왕성하게 활동했던 “신명기 학파”(Deuteronomist)의 작품이라는 견해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하다.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더 구체적으로 문서의 기원을 ‘요시아’ 18년(주전 621년)에 왕국 서고에서 있었던 한 사건으로 보고 있다. 즉 이 시기에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하던 일꾼들이 “율법 책”을 발견하고, 이 책을 왕 앞에서 낭독했을 때, 왕은 옷을 찢고 회개하였고, 그 결과 대부흥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왕하 22-23장). 일찍부터 학자들은 이 책이 다름 아닌 <신명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책의 기원을 J나 E보다 후대인 7세기로 추정하였다.
신명기 학파. 이들 학파의 존재 여부는 단언할 길은 없지만, <신명기>의 신학 사상이 <오경>의 다른 네 권의 책보다는 오히려 <열왕기>나 <예언서>에 더 가깝다는 이유로 학자들은 <신명기>의 저자(또는 편집자)를 “신명기 학파”로 부르기도 한다.
3. 목적과 내용
<신명기>의 배경이 무엇이든 책을 통해서 드러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쉐마’로 알려져 있는 6:4-9의 첫 단어, ‘쉐마’(들어라)가 그 메시지를 요약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신조가 되었으며, 기독교 교육학의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불리기도 한다. 더 간결하게는 본문 10:12-13의 내용도 인용하기도 한다.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4-9)
12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신 10:12-13)
<신명기>의 신학
<신명기>는 ‘유대’인은 물론 기독교인의 종교와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신학의 보물 상자와 같다. 일종의 이념 서적인 셈이다. 만일 이 책의 주된 사상이 소위 “신명기 역사관”으로서, <구약>의 <선지서>에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라면, <신명기>의 신학적인 개념들을 더욱 확실하게 이해하는 일은 지극히 중요하다 할 것이다.
1. 신조
이스라엘의 신조는 흔히 ‘쉐마’로 부르는 아래 구절의 첫 단어, “들어라”에서 따온 것이다:
4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이 신조는 <신약>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어 인간의 가장 근본되는 목적에 대한 대 헌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인간의 가장 첫째 되는 계명이 <신명기> 6:5라고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이 신조가 드러내고 있는 배타적인 특성은 하나님에 대한 유일 신 사상뿐만 아니라, 그분에 대한 전적인 사랑과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쉐마’에 뒤이어 등장하는 지침들은 ‘유대’인들의 생활의 일부가 되었으며, 오늘날 교회나 신학교에서도 기독교 교육의 대헌장이 되고 있다:
6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6:6-9)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서 추론적인 사색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경험으로부터 하나님을 인식했다. 그분은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출해내셨고, 그들의 완전한 헌신을 요구하셨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경험의 결과이지, 논리적인 결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나는 과연 그분을 알고 있는가?
2. 야훼 하나님
거룩. ‘브라운’(R. Brown)은 <신명기>에 관한 자신의 주해서에서 교회는 <신명기>의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단순하고 이분법적인 구분이긴 하지만, 교회가 인식하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두 축으로서 자비와 공의, 또는 사랑과 거룩, 등등이다. ‘브라운’에 따르면 <신명기>의 하나님은 장엄하고, 거룩하고, 위대하며, 영광스러운 한 분 하나님이시다. “십계명”의 첫 네 계명이 이 점에 대해서 불멸의 진리를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계명의 핵심은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관계”이다. 따라서 <신명기>에서 규정하는 “죄”는 이 관계를 끊고, 무시하려는 제반 시도를 말한다. 그것이 자연과 환경에 대한 범죄이든, 이웃에 대한 것이든, 성적인 타락이든, 하나님에 대한 범죄이든, 결국 공통적인 하나의 특징을 지닌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義)도 결국은 “올바른 관계”라는 사실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행동. ‘라솔’(W. S. Lasor)은 자신의 <구약개론>에서 <신명기>의 하나님을 “행동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이 같은 개념은 <신명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신명기>에서도 ‘모세’의 역사적인 회고를 통해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하나님의 행동은 미래 이스라엘의 행동 지침이 되기도 한다:
3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로 말미암아 행하신 바를 너희가 눈으로 보았거니와 바알브올을 따른 모든 사람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멸망시키셨으되, 4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5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가 들어가서 기업으로 차지할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6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7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4:3-7)
만일 이스라엘이 이 같은 지침을 망각한다면, 하나님은 분명 자기 백성을 멸하실 것이며, “그 땅”에서 추방시켜 열방 중에 흩으실 것이다. 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돌아와 그분의 목소리를 청종하면 그분은 자비로워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않으실 것이다:
32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냐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33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34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35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4:32-35)
3. 선택과 유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백성을 창조하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선택”에는 항상 두 가지 측면이 따른다.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이 그것이다. 즉 선택(選擇)과 유기(遺棄)가 그것이다. “선택”을 뜻하는 ‘히브리’어 ‘바하르’(rj'B)는 <신명기>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단어로서 30회 등장하고 있으며, 기타 <이사야>, <사무엘 상․하>, 그리고 <열왕기 상․하>에 각각 20번과 15번 등장하고 있다. 언약의 정의나 형식과 내용 등에 대해서는 수차례에 걸쳐 이미 다룬 바 있다.
배타적 측면: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는 새로운 백성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그분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따로 불러낸 것이다. ‘모세’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신 7:6).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하나의 국가적 실체로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수적으로 우세했기 때문도 아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신 7:7-8).
그리고 이와 같은 선택 때문에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그 땅의 민족들을 멸망시켜야 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어떤 언약도 하지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신 7:1-2).
이스라엘은 그들과 어떠한 언약을 맺어서도 안 되며, 자비를 베풀거나 결혼을 해서도 안 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결과는 이스라엘의 타락뿐이기 때문이다(신 7:3-4). 그리고 그 땅의 모든 종교적인 상징물조차도 다 파괴하도록 명령 받았다(5절).
이 같은 명령들은 일견 혹독한 과업처럼 보일 수도 있다. 만일 ‘야훼’ 하나님이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라면, 이와 같은 지침은 반대를 야기 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야훼’의 이와 같은 명령은 그 자체의 정황, 즉 선택이라는 배경 하에서 이해함이 마땅하다. ‘야훼’는 이스라엘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그분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는 것 외는 다른 어떠한 민족과도 언약을 맺은 일이 없고, 그들에게 헌신하지도 않았다. 바로 이점이 선택의 배타적인 측면인 것이다. 이는 마치 오늘날의 결혼처럼 결혼 당사자는 서로를 향해서 언약을 맺은 것 외는 다른 어떤 상대와도 언약을 맺지 않으며, 헌신해서도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는 <신약>의 가르침과도 일치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과 같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18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
보편적 측면: 모든 민족을 위하여.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결혼과는 다른 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선택의 궁극적 목적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궁극적 목적은 이렇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하). 이를 누구보다 잘 이해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었다. 그는 선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1-2).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질투심은 그분이 다른 민족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른 민족에게 진리를 전파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타협할 수 없는 관심사에서 비롯된다. 만일 이스라엘이 이 목적을 망각해 버린다면, 어느 민족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진리를 반대하고 공격해 오는 어떠한 세력과도 거룩한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
<신명기>의 또 다른 주제 중의 하나인 “단일 성소”(12:1-14)에 대한 계명도 바로 이 같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이 계명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쫒아낼 민족들이 그 신들을 섬기는 곳에서 예배를 드려서도 안 되며(참고. 12:2), 오직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으로 나아가야 함을 의미한다(참고. 12:5).
그 장소가 ‘에발’이든, ‘세겜’이든, 또는 ‘예루살렘’이든, 즉 그 장소가 어디이든 이스라엘에게는 배타적인 예배의 장소가 되어야만 했다. 오직 이와 같은 에배를 통해서만이 이스라엘의 신앙은 그 땅의 종교에 오염되지 않을 것이며, 오직 그렇게 해서만이 열방에게 분명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명기>는 이와 같은 선택의 보편적 측면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강조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모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선택에 관한 소극적인 측면을 더 강조하는 듯하다. 즉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갔을 때, 신앙을 오염시키거나 상실하게 만들 수 있는 제반 위험 요소들을 사전에 그들 앞에서 분명하게 밝혀주는 것이었다.
‘하렘’ 즉 성전(聖戰)도 선택의 소극적 측면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그 땅에 들어가면 그 땅의 모든 족속들을 씨도 남기지 말고 진멸해야 했다. 과연 ‘야훼’ 하나님은 이토록 잔인무도하신 분일까? 기독교회도 이 원리를 그대로 오늘날 타 종교와 타 종교인에 대하여 그대로 적용해야 할까? <시편>에서 종종 그런 태도를 보이고 있듯이, 우리의 기도 가운데서 이 같은 태도를 보여야 할까?
4. <신명기> 역사관
<신명기> 역사관(歷史觀)의 핵심도 선택이나 언약의 소극적인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역사관의 핵심은 소위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이다. 즉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면 축복을 받을 것이지만, 반대로 언약을 어기면 저주가 따른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는 율법과 언약의 준수 사항으로 구체화되어 있으며, 언약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에는 언약을 전면적으로 취소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약속된 축복은 무효가 될 수 있다. <예언서>들은 <신명기> 역사관의 바탕 위에 서있다(참고. <호세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언약의 차원에서만 바라보면, 인간의 역사에는 우연(偶然)이란 없다. 그리고 <성경>이 오직 <오경>으로만 이루어져있다면, 역사를 보는 이스라엘의 시각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인간의 모든 생사화복(生死禍福)은 하나님의 축복 아니면 저주의 결과일 뿐이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에 대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이 보였던 시각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될 수 있다(참고. 요 9:2). 즉 그가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것은 자신이나 또는 그 부모의 죄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도 전도 아니라면, 전생(前生)에 누군가 잘못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신명기> 역사관은 극단적인 이분법이고, 기계론적이며, 운명론적이다. 그리고 창조주 ‘야훼’ 하나님은 그 속에 제한된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신앙이 여러 단계의 발달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신명기> 역사관은 제한적으로 이해해야 함이 마땅하다. 교회나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는 갓 태어난 아이에서부터 장성한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구성원이 있다. 당연히 각자가 들어야 할 교훈이나 메시지도 성숙도에 따라 다른 것을 들어야 한다. <히브리 성경>, 즉 <구약>을 <오경>과 <예언서> 및 <지혜서>로 나누어 설교한다고 할 때, <오경>은 믿음의 초기 단계에 있는 백성이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읽어야 할 책이다. 당근과 채찍은 어린아이에게 잘 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언서>는 보다 장성한 신앙인들이 정의(正義)와 거룩과 자비로 사회를 바로잡아야 할 책무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때로 회의적이고 무신론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지혜서>는 세상의 불가사의(不可思議), 즉 악과 고통의 문제,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번창 등에 대하여 하나님의 신비한 주권(主權)과 섭리(攝理)를 고백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신학적으로 가장 고차원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욥’과 세 친구들의 대화를 통해서 볼 때, ‘욥’이 세 친구들의 신학 수준이 겨우 <오경>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욥’은 고난의 끝에 하나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배우게 된다. 그것이 무엇일까?
<성경>을 단편적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할 당위성이 여기에 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가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참고. 요 4). 여인의 지식은 <오경>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오늘날 교회에서 <성경>교육도 조직신학적 접근보다는 성서 신학적 접근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조직신학 속에 하나님을 제한시킬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읽은 이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요구하고 있다.
5. <신명기> 법정신
마지막으로 <신명기>의 신학과 관련해서 빠뜨릴 수 없는 주제는 이 책의 “법정신”(法精神)이다. 이 주제를 마지막으로 다루는 이유는 다른 주제에 비해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신명기>의 핵심은 이 책의 대칭적 구조에서 볼 수 있듯이, 언약의 규례를 담고 있는 12-26장의 내용이다. 보았듯이, 언약의 규례를 담고 있는 12-26장 사이이다. 이 부분은 윤리적으로 탁월할 뿐만 아니라, 사회 개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신명기 법전”(申命記法典) 또는 “원 신명기”(原申命記; Ur-Deuteronomy)라 칭하기도 한다. ‘요시야’ 왕은 이 법전에 기초하여 종교개혁 운동을 펼친 것으로 추측된다.
십계명과 판례법들. “원 신명기”의 법정신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십계명”을 포함해서 수 없이 등장하는 여타 계명들 사이의 관계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해밀턴’(V. Hamilton)의 구분 방식에 따르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1) 십계명(十誡命); (2) 판례법(判例法).
십계명이 원칙에 관한 선언적 계명이라면, 여타 모든 계명들은 이들 원칙을 일상(日常), 즉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 가에 관한 일종의 “사례 법”(case laws)에 해당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례 법에서 보듯이, “만일 ...하면”이라는 조건 절이 먼저 제시되고 있다. 오늘날 독자의 편에서 이들 판례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훈련은 각각의 사례법이 십계명 중 어떤 계명과 어떤 방식으로 연관을 맺을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필요한 훈련이 있다면, 각 사례법이 “신약시대”에서도 적용 되는지 여부를 알아보는 일이다.
신명기 법전. “신명기 법전”의 다양한 내용을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중앙집권적 예배에 대한 강조이다. 그리고 그 장소는 마땅히 ‘예루살렘’이 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처럼 한 장소만을 고집하는 이유는 ‘가나안’ 전역에 걸쳐 각 산당에서 지내는 예배와 우상숭배가 극에 달해 있었기, 이를 금지시키기 위해서는 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조치는 단순히 종교적인 영역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도 야기 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점에 대해서는 아래 두 번째 강조점에서 설명할 것이다). <시편>의 많은 노래가 “성전에 올라가자”는 내용의 노래가 이 당시에 불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둘째는 인도주의적 사회 건설에 대한 강조 때문이다. 특히 가난한 이웃에 대한 배려는 “신명기 법전”의 또 다른 특징이기도 하다. 중앙집권적 왕권이 강화될수록 “부익부 빈익빈”(富益富貧益貧) 현상이 두드러진다는 사실은 동서고금의 진리와 같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신명기>는 예배나, 십일조나, 추수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예컨대, 제사의 경우<레위기>나 <민수기>는 제물(祭物)을 태우고 나머지를 제사장에게 주도록 규정하고 있는가 하면, <신명기>는 제사를 드릴 때 ‘야훼’ 앞에서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예배의 축제적인 성격, 즉 성도 간의 교제를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토지소산의 십일조에 대해서도 제사장의 몫을 빼고 난 뒤에는 함께 먹고 즐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맥스웰’(S. Maxwell)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두세 명이 모이면 기도하고, 십여 명이 모이면 <성경> 공부를 하고, 이십 명 이상이 모이면, 축제를 벌이라.” 그리고 십일조의 경우도, 매 3년마다 십일조를 모아서 구제(救濟)를 펼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안식년과 희년(禧年)에 대한 강조도 가난한 자를 배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뇌물(賂物)에 대한 경고, 공의로운 재판, 등도 결국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신명기>의 사회 윤리는 기독교 윤리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신명기>의 법정신은 하나님의 선물인 땅을 소출을 골고루 나누어 극빈자의 양산(量産)을 최소화 하자는 것이었다.
세 가지 법정신. 이와 같은 <신명기>의 법정신을 세 차원에서 요약해 보면 (1) 양식(糧食), (2) 가족, 그리고 (3) 예배가 된다.
(1) 양식: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근본적으로 사회적 약자, 예컨대, 가난한 ‘레위’인들이나, 이민자나, 과부 및 고아들의 생존권에 관한 문제였다. 매 3년마다 십일조를 이들 약자를 위해 사용하도록 했다(참고. 14:28; 26:12-15). 그리고 양식과 관련된 몇 가지 규정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중앙 성소의 강화에 관한 것이다. <신명기> 개혁(622년?)은 ‘바알’을 숭배하던 지방 산당을 폐쇄하고, 모든 예배를 성전 중심으로 집중시킨 것이다. 지방에 흩어진 자들이 십일조의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예루살렘’ 성전은 14:28-29를 근거로 각 지방에 바치던 십일조만은 지방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활용할 것으로 규정한 것이다.
둘째, 추수에 관한 규정. 추수하고 남은 것은 가난한 자들의 몫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약자의 권리를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가난한 자라 할지라도 소유주가 힘써 거두어들인 소출을 깡그리 빼앗을 수는 없었다(23:25-26).
셋째, 고리대금의 금지(24:10-11).
넷째, 저당권에 관한 문제. 즉 채권자는 채무자의 재산을 강제로 압류해서는 안 된다(24:17)
다섯째, 이스라엘 상호 간에는 이자 수익 사업을 금지한다(15:7-11).
여섯째, 임금을 체불해서는 안 된다(24:14-15).
일곱째, 노예 석방령을 철저하게 준수하라(15:12-15).
여덟째, 안식일에 대한 준수. 특히 노예와 근로자에 대한 안식은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출애굽의 해방과 상관이 있기 때문이다(5:12-15)
아홉째, 이웃의 재산과 아내를 탐해서는 안 된다(5장).
(2) 가족: 자손을 번성시키는 일은 가문을 보장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온전하게 파괴하는 일체의 행위, 즉 동성연애 등과 같은 성의 혼란과 살인 행위에 대해서는 엄벌에 처한다.
(3) 예배: 모든 선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그 분께 모든 것이 되돌아가야 한다. 우상 파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으며, 왕 또한 다른 지체들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자로서, 군림하거나 재물을 축적하거나 교만해서는 안 된다(17:14-20).
연습과 토의
<신명기>의 ‘헬라’ 식 제목, 즉 Deutronomy(Deutro + Nomos)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 이름은 책의 제목으로 적절한가?
<신명기>는 누구를 위한 것이며, 그 목적은 무엇일까?
<신명기>의 구조를 기억할 수 있겠는가? 교차대구적 구조를 통해서 드러나는 책의 핵심 주제나 내용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계명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면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출애굽기>의 십계명(출 20:1-17)과 <신명기>의 십계명(5:6-21)은 서로 어떻게 다른가?
판례법의 예를 하나 들고, 그 적용 범위와 유용성에 대해서 토의해 보자.
“성전”(聖戰)의 예는 무엇이며, 오늘날 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의 “쉐마”는 무엇인가? 암송해 보자.
<신명기> 역사관의 핵심은 무엇이며, <구약>의 다른 책들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