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제20과
실로의 선택
김태정 목사여호수아 18:2-19:51약 30분 분량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 너희는 매 지파에 삼인씩 선정하라.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 기업에 상당하게 그려가지고 내게로 올 것이라(18:3-4)
본문의 특징은 한 마디로 무미건조함입니다. 수없이 등장하는 지명들이 그렇고, 그 형식과 내용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일곱 번에 걸쳐 거의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오히려 본문의 교훈, 즉 신학적 메시지가 분명치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15-17장과 나란히 보게 될 때, 화자의 의도는 분명해집니다. 형식적으로 볼 때, 15-17장과 본문(18-19장)은 시의 유사반복 또는 대조반복과도 같습니다. 각각의 본문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공히 ‘요단’ 서편 땅의 분배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동일한 내용을 최종 화자는 인위적으로 전반(15-17장)과 후반(18-19장)으로 나누어 전반부에서는 ‘유다’와 ‘요셉’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후반에서는 나머지 일곱 지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각 본문의 내용만 볼 때, 서로 다른 전승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중요한 사실은 최종 본문이 전하려고 하는 전체적인 신학적 주제일 것입니다. 특히 책 전체의 주제와 관련해서,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신학적인 질문에 대답을 하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바벨론’ 유수 이후의 이스라엘 독자들에게는 어떻게 그 땅에 다시 들어갈 수 있을까에 관한 실존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마련해 주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본문의 독서 관점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문학과 역사
단락과 범위. 본문 이야기는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본문을 새로운 별개의 단락으로 취급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이야기의 무대가 ‘길갈’이 아니라 14-17장의 이야기의 주 무대(설화세계)는 길갈로 보입니다(참고 14:1).
‘실로’로 옮겨왔으며(18:1), 이야기의 주된 관심사도 ‘유다’와 ‘요셉’을 뺀 나머지 일곱 지파에 관한 것입니다(18:2). 본문의 전체적인 구성을 보면 크게 세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서론: 배경과 주제 도입(18:1-10)
2. 일곱 지파의 기업(18:11-19:48)
3. 결론(19:49-51)
첫 두 단락은 다시 여러 개의 작은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서론의 전체적인 기능은 이야기의 배경과 주제를 도입하는 것인데, 다섯 개의 작은 단락을 통해서 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1) 일반적인 배경(18:1)
(2) 남아있는 과업(18:2)
(3) 과업 성취를 위한 독려와 지시(18:3-7)
(4) 반복되는 지시(18:8)
(5) 지시에 따른 순종(18:9-10)
이어서 두 번째 단락은 일곱 지파들이 차지한 땅의 경계와 지역 내 성읍들에 관한 내용으로서, 각 지파 별로 일곱 개의 작은 단위로 세분할 수 있습니다:
1) 베냐민의 땅(18:11-28)
(1) 북쪽 경계(12-13)
(2) 서쪽 경계(14)
(3) 남쪽 경계(15-19)
(4) 지역 내 성읍들(21-28)
2) 시므온의 땅(19:1-9)
(1) 지역 내 성읍들(2-7)
(2) 경계의 확장과 요약(8)
(3) 추가 설명(9)
3) 스불론의 땅(19:10-16)
(1) 남서쪽 경계(10하-11)
(2) 남동쪽 경계(12)
(3) 동쪽 경계(13)
(4) 북쪽 경계(14)
(5) 지역 내 성읍들 (15)
4) 잇사갈의 땅(19:17-23)
(1) 지역 내 성읍들(18-21)
(2) 복쪽 경계(22상)
(3) 요약(23)
5) 앗셀의 땅(19:24-31)
(1) 지역 내 성읍들(25-26상)
(2) 서쪽 경계(26하)
(3) 남쪽 경계(27상)
(4) 동쪽 경계(27하)
(5) 지역 내 성읍들(28상)
(6) 북쪽 경계(28하)
(7) 북서쪽 경계(29)
(8) 지역 내 성읍들(30)
(9) 요약(31)
6) 납달리의 땅(19:32-39)
(1) 남동쪽 경계(33)
(2) 남서쪽 경계(34상)
(3) 지역 내 성읍들(35-38)
(4) 요약(39)
7) 단의 땅(19:40-48)
(1) 지역 내 성읍들(41-45)
(2) 역사적 회고(46-47)
(3) 요약(48)
본문의 세 번째 단락은 결론으로서, 이스라엘의 신실한 지도자 ‘여호수아’에 관한 것입니다. 즉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19:49-50), 그의 기업도 잊지 않고 배려해주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은(19:51) 책의 제 2부를 요약하는 선언으로서, 이미 앞에서 두 번에 걸쳐(14:1; 18:1) 언급한 바 있는 내용입니다: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 있는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을 마쳤더라(19:51)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서 받은 기업 곧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니라(14: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18:1)
자료와 편집. 우리가 이 본문을 대하면서 갖게 되는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본문의 배경에 관한 것입니다. 즉 ‘요단’ 서편 땅의 분배에 관한 이야기의 일관성에 관한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왜 일곱 지파에 관한 이야기를 별도로 다루고 있는가 하는 것이고, 두 번째 질문은 왜 ‘실로’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화자 자신이 독자들에게 주고자하는 신학적 메시지와 관련하여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들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 볼 수 있겠지만, 자료비평적인 접근도 그 중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즉 본문에 대한 자료비평의 기본적인 가정은 본문 속에 후대의 <오경 전승>과, 그보다 다소 오래된 여러 전승들이 혼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본문이 후대 <신명기> 학파에서 발전시킨 원인론적인 내용으로서, ‘페르샤’ 왕국의 후대에 ‘사마리아’에 계속 남아있던 이스라엘의 후손과 이곳에 정착하기 위하여 돌아오는 부유한 ‘유대 디아스포라’ 계층 사이에 그 땅의 소유를 놓고 중재안을 마련하기 위한 의도로 기록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때 ‘실로’를 선택한 것은 이곳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 견해도 만만치 않은 것이, <신명기> 학파의 입장에서 볼 때 제사장 ‘엘르아살’이 ‘여호수아’와 각 지파의 족장들과 함께 그 땅을 분배하는 일에 참여했다는 점은 <신명기 전승>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명기 전승>보다는 훨씬 오래된 전승들이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그 땅을 분배하기 위하여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사역과 관련한 본문들을 말합니다. 즉 지파별로 대표자를 선정하고, 이들이 그 땅을 돌아보고, 그 결과 합의에 따라 공정하게 그 땅을 나누었다는 본문의 기록들은 보다 오래된 전승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혹자는 땅의 분배와 관련한 보다 오래된, 제 2의 전승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전승이 본문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유다’와 ‘요셉’을 위한 땅의 분배를 다루고 있는 본문(14-17장)은 분명 일곱 지파를 위한 본문(18-19장)과 별개의 독립적인 전승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두 전승에서 땅의 분배와 관련한 이스라엘의 입장이나 태도가 분명 다르게 보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유다’와 ‘요셉’은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매우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반면,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일 처리 방식은 사뭇 상업적인 거래를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두 본문(14-17장과 18-19장)이 각기 나름대로의 양식과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최종 본문에서도 그러한 차이가 흘러나오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일 14-19장의 기록이 모두 하나의 전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면, 전체 이야기의 문학적인 모순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예를 들어, 두 이야기의 무대의 중심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길갈’에서 ‘실로’로 바뀌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실로는 10절에 걸쳐 무려 네 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와 ‘요셉’이 그 땅의 남쪽과 북쪽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본문의 기록(18:5) 역시 이스라엘 역사에서 훨씬 후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보다 오래된 전승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실로’를 포함하고 있는 본문과도 서로 연대기상의 모순을 보이고 있는 것도 한 예가 될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난제들을 해결하는 한 방법으로 본문 속에 두 개의 전승, 즉 후기의 <신명기 전승>과 그보다 오랜 역사를 지니는 땅의 분배와 관련한 전승이 혼재해 있다는 견해를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최종 본문의 형식과 내용일 것입니다. 본문의 서론과, 이어지는 각 지파별 이야기에서 전승의 배경과 관련한 문제를 보다 상세하게 다룰 것입니다. 보다 상세한 설명은 참고도서 1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201-203 쪽).
신학과 신앙
1. 서론과 배경(18:1-10)
첫 번째 단락의 첫 구절은 본문의 자료와 관련해서 일단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에 회막을 세웠으며 그 땅은 그들 앞에서 돌아와 정복되었더라(1절)
여기서 “회중”(hd:[, 에다)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는 것은 후기 “신명기적 편집”의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만, 최근의 연구 결과는 이런 입장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밀러’(J. Miller)는 “회중”을 이스라엘 전체적으로 지파 간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각 지파의 족장들이 소집한 일종의 비상 기구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왕국이 들어선 이후에는 이 단어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사라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아마 “회중”은 여자와 어린 아이를 포함하는 전 국가적인 기구였거나, 성인 남자만으로 구성되었거나, 또는 범국가적인 대표 기구였을 수도 있습니다. ‘밀그롬’(J. Milgrom)은 이 단어가 후기 이스라엘 문헌에서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은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이 단어는 분명 아주 오래된 이스라엘의 한 기구였을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또 다른 단어는 “회막”입니다. 이 단어는 <여호수아>에서는 단지 이곳과 19:51에서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신명기 자료>보다 더 오래된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대체적으로 일치된 견해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믿을 만 한 근거는 찾을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에 따르면 “회막”은 백성의 진영 밖에서 ‘모세’의 명에 따라 세워졌으며, ‘여호수아’가 이를 지키고 있는 것을 봅니다(출 33:7-11; 민 11:16-29). 그리고 이곳에서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하나님의 명령을 전한 곳이기도 합니다(신 31:14).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스라엘의 오래 된 전승에서는 “회막”과 ‘실로’ 뿐만 아니라 “회막”과 ‘여호수아’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삼상 2:22; 시 78:60).
“회막”은 원래 <야훼 전승>에서는 하나님의 예언이나 신탁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텅 빈 장소였으나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대화를 위해서 임재하시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묻기 위해서 나아오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회막”의 배경이 어떠했던 이곳에서 화자가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의도는 분명 신학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회막”과 관련한 이전의 전승만으로도 화자가 왜 “회막”를 ‘실로’와 연계시키고 있는 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의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회막에 모였다”는 것은 이 백성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였으며, 일곱 지파에게 땅을 나누는 일도 하나님의 임재 하에 이루어진 것임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스라엘이 그 땅에 전쟁이 모두 끝난 후에 회막으로 나아왔다”는 언급입니다. “회막”과 관련한 또 다른 화자의 의도를 느낄 수 있는 대목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땅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인가 말씀하실 수 있도록 여유(시공?)를 드려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전시(戰時)가 아니라 평화 시에나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더 이상의 정복이나 전쟁은 필요치 않으며, 그 땅에 평화와 안식을 가져준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하겠습니다.
이점을 새삼 강조라도 하려는 듯, 화자는 여전히 그 땅을 얻지 못하고 남아 있는 일곱 지파를 ‘유다’와 ‘요셉’의 두 지파와 대별시키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 기업의 분배를 받지 못한 자가 아직도 일곱 지파라(2절)
이스라엘의 대부분의 지파들이 그 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 이스라엘은 그들의 과업을 완수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함께 모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자는 3절에서도 단지 일곱 지파가 아닌 전체 이스라엘의 순종의 주제를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점령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3절)
‘여호수아’의 질책은 전혀 예상 밖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게으름과 두려움에 대한 질책으로서, 본문의 핵심 주제와 배경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단순히 일곱 지파만이 아니라)은 분명하게 들었습니다. 즉 그 땅을 차지하고 말고는 그들의 행동과 용기에 달린 것이라고 말입니다(1장). 따라서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원망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 땅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준 그 땅을 차지할 믿음과 용기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이곳에 이르러 주제는 다시 1-12장의 <정복 이야기>의 그것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일컬어 “너희 조상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일 일입니다. 화자는 분명 <창세기>의 족장들과 족장들의 하나님을, 당대의 불순종한 이스라엘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호통과 질책이 하나님의 마지막 단어는 아닙니다. 연약하고, 게으르며, 불순종하기까지 한 이 백성을 향해서 다시 한 번 새로운 소명을 주십니다:
4너희는 각 지파에 세 사람씩 선정하라 내가 그들을 보내리니 그들은 일어나서 그 땅에 두루 다니며 그들의 기업에 따라 그 땅을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올 것이라. 5그들이 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나누되 유다는 남쪽 자기 지역에 있고 요셉의 족속은 북쪽에 있는 그들의 지역에 있으니, 6그 땅을 일곱 부분으로 그려서 이 곳 내게로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으리라(4-6절)
이스라엘이 받은 소명은 “그 땅을 두루 다니며, 발견한 바를 책에 기록하고, 그 땅 전체를 일곱 지역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이곳에 천명해 놓은 하나님의 소명은 비단 ‘여호수아’ 당대뿐만 아니라, 뒤이은 세대에서 정치•사회적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계속해서 따라야 할 대원칙과도 같은 것이며, 이스라엘을 위한 영원한 보장이자 약속이기도 합니다. 즉 책에 기록한 이 말씀이야말로 훗날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운명이 어떻게 변하든, 즉 그들이 분열과 갈등 가운데 살아가든, 때로는 그 땅에서 내쫓겨 지내든,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그 땅의 영원한 주인은 이스라엘이라는 합법적 근거가 될 것입니다.
각 지파를 대표하는 세 사람의 대표자들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즉각적으로 순종하여 과업을 완수하러 나아갑니다. ‘유다’와 ‘요셉’에 관한 언급을 통해서(5절) 15-17장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면서 동시에 왜 그 땅이 열두 지파가 아니라 일곱 지파에게 돌아가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번 일에 ‘여호수아’의 역할은 이전보다 줄어든 것입니다. 그 땅을 나누는 일과 관련해서 ‘여호수아’가 아니라 각 지파의 족장들에게 더 큰 책임이 돌아가고 있음을 봅니다. ‘여호수아’의 역할은 지파의 대표자들이 일곱으로 나눈 그 땅의 주인을 제비뽑기로 정해주는 정도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이 모든 일을 주도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일곱 지파의 대표자들이 모여 상호 합의 하에 공정하게 그 땅을 나누었다는 의미가 강하게 묻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할도 어떤 땅이 어느 지파에게 돌아갈지 보여주는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화자는 이곳에서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지시를 따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 때,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6절하).
이와 함께 ‘레위’ 지파와 ‘요단’ 동편 두 지파 반에 대한 언급이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참고. 13:14, 33; 14:3-4):
레위 사람은 너희 중에 분깃이 없나니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이 그들의 기업이 됨이며 갓과 르우벤과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저편 동쪽에서 이미 기업을 받았나니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그들에게 준 것이니라 하더라(7절)
‘레위’ 지파에 관한 주제는 이전에 등장한 바 있고(13:14, 33; 14:3-4), 21장에서 다시 이어갈 것이지만, 이곳에서도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한 곳에서는 “화제물”(火祭物)이 ‘레위’의 분깃이라고 하고 있는가 하면(13:14),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분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13:33). 그런데 이곳에서는 “제사장 직분”이 그 기업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제사장 직분을 ‘레위’와 연관시켜 언급하고 있기는 합니다(출 29:9; 40:15; 민 25:13; 민 18:1-7). 이렇게 볼 때 ‘여호수아’는 ‘레위’ 지파를 제사장으로 별고 구분함으로써 “모세의 규례”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화자 역시 ‘요단’ 동편의 지파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참고. 13장). 이처럼 ‘레위’ 지파의 분깃에 관한 언급이나, ‘요단’ 동편의 지파들에 관한 언급이나 공히 쓸데없는 반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화자의 의도는 분명해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결속성에 관한 화자 자신의 관심입니다. 즉 어느 한 지파도 자신의 분깃을 차지하는 일에 있어 소외되거나 배제될 수 없으며, 동일한 관심과 배려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각 지파의 대표들은 그 땅을 두루 다니며, ‘여호수아’가 지시한대로 일을 수행하고 돌아옵니다:
그 사람들이 가서 그 땅으로 두루 다니며 성읍들을 따라서 일곱 부분으로 책에 그려서 실로 진영에 돌아와 여호수아에게 나아오니(9절)
이 구절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들 대표들이 그 땅을 성읍에 따라 일곱 부분으로 나누었다는 언급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각 지파의 경계를 지역별로 구분하고 있는 전승을 이 새로운 기록과 결합시키고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3-19장을 통틀어 이곳에서 처음으로 “진영”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5-10장 사이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진영은 이곳이 아니라, ‘길갈’에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학자들은 이 본문을 <길갈 전승>과 연계시키려고 시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진영이 한 곳에만 있었던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1:11; 3:2; 8:13; 10:21). <오경> 이야기의 상당 부분이 광야에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 유목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진영이 여럿 있었다는 사실은 크게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화자는 ‘실로’를 이스라엘의 마지막 진영으로 언급함으로써, ‘실로’에서의 예배를 합법화하고 정당화 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는 듯합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을 위하여 실로의 여호와 앞에서 제비를 뽑고 그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의 분파대로 그 땅을 분배하였더라(10절)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실로의 회막” 즉 “실로의 여호와” 앞에서 땅을 나누는 그 모든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이 표현은 본문의 첫 번째 단락을 수미상관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의도인 즉은, 이스라엘은 인간의 탐욕이나 자만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공평하게 그 땅을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2. 일곱 지파의 기업(18:11-19:48)
벤야민의 기업(18:11-28). ‘베냐민’은 족보상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의 막내로서, 땅의 분배와 관련해서 가장 나중에 등장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만, 일곱 지파 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고 있습니다. 15-17장에서도 ‘베냐민’의 기업은 ‘유다’와 ‘요셉’ 지파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지파의 경계나 도시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참고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참고 도서 2, 277-279 쪽).
이런 사실을 통해서 볼 때, ‘베냐민’은 본문의 전승을 확립함에 있어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훗날 북 왕국 ‘이스라엘’이나 남 왕국 ‘유다’에게 모두 종교적으로 중요한 두 지역 ‘베델’과 ‘예루살렘’이 ‘베냐민’의 기업으로 할당되고 있다는 것입니다(11-28절).
시므온의 기업(19:1-9). ‘시므온’은 ‘레아’가 낳은 ‘야곱’의 아들 중 두 번째 자식입니다(창 29:33). ‘시므온’은 결코 작은 지파는 아니었습니다만, 민수기 1:23에 의하면 첫 인구조사에서 59,300 명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들만을 위한 땅을 별도로 받지 못하고 ‘유다’ 지파 안에 있는 땅을 기업으로 얻고 있습니다. ‘유다’의 땅이 너무 넓기 때문에 그 중 일부를 얻었다고 본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시므온 자손의 이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취하였으니 이는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시므온 자손이 자기의 기업을 그들의 기업 중에서 받음이었더라(19:9)
왜 ‘시므온’ 지파가 이러한 대우를 받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혹자는 “야곱의 유언”을 그 근거로 제시하기도 합니다(창 49:7). 저주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서부터 지파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해 버린 듯합니다. 실제 <민수기>에서 두 번의 인구조사에서 보듯이 그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습니다(민 1, 26장). ‘시므온’ 지파가 상대적으로 작고 미약하다는 언급은 <역대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대상 4:24-43).
이 지파에게 할당된 도시들은 크게 두 무리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모두 남방‘네게브’에 산재해 있는 13개 성읍(또는 14개 성읍)이고, 두 번째는 네 개의 도시로서 그 중 둘은 ‘네게브’에, 그리고 나머지 둘은 평지(‘세벨라’)에 있는 것입니다. 이들 성읍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참고도서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참고 도서 2, 280-282쪽).
그러나 거듭 강조하거니와, 다른 지파의 경우에서 보듯이 이 지파를 위해서는 명확하게 땅의 경계를 언급하지도 않으며, 그마나 언급하고 있는 성읍들은 모두 ‘유다’의 기업 내에 있는 것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스불론의 기업(19:10-16). ‘레아’가 낳은 여섯 아들 중 막내가 ‘스불론’입니다(창 30:20). <창세기>에서와 마찬가지로(창 49:13-14) 여기서도 ‘스불론’이 ‘잇사갈’의 동생인데도 먼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경우나 ‘야곱’과 ‘에서’의 경우에서처럼 구속과 관련한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광야 시절에는 ‘스불론’은 ‘잇사갈’과 더불어 장막의 동편에서 ‘유다’와 인접해 있었습니다만, 그들이 받은 땅은 ‘유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북쪽 편에 있는 ‘이스르엘’(Jezreel) 골짜기 북쪽으로 펼쳐진 지역이 그들의 기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쪽과 북서쪽으로는 ‘아셀’과 경계를 두고 있으며, 북쪽 및 북서편으로는 ‘납달리’와, 남동쪽으로는 ‘잇사갈’과 경계를 두고 있습니다만 지중해나 ‘요단’ 강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시 이 지파가 차지한 땅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참고 도서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참고 도서 2, 282-285 쪽).
잇사갈의 기업(19:17-23). ‘잇사갈’은 ‘레아’의 다섯 번째 아들로서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동생보다 나중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관한 기록도 간단하고 짧아 이 지파의 상대적인 역할이나 중요성을 추측케 하는 대목입니다. 이들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지파들은, 북으로는 ‘납달리’, 남으로는 ‘므낫세’, 서쪽으로는 ‘아셀’, 그리고 서북쪽으로 ‘스불론’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차지한 땅은 ‘이스르엘’ 평원의 가장 비옥한 요지로서 ‘스불론’ 지파도 이 중 일부를 받았던 곳입니다.
앗셀의 기업(19:24-31). ‘앗셀’은 레아의 여종 ‘빌하’가 낳은 두 번째 아들입니다(창 30:13). ‘야곱’은 이 지파가 후에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창 49:20). 이들이 차지한 땅은 주로 ‘두로’와 ‘시돈’을 포함하는 지중해 연안 지역으로서 동쪽으로는 ‘납달리’, 남으로는 ‘스불론’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참고도서 2, 287-290 쪽.
납달리의 기업(19:32-39). ‘납달리’는 라헬의 몸종 ‘빌하’가 낳은 막내아들입니다(창 30:8). 이 지파의 영토는 동서로는 각각 ‘아셀’과 ‘단’ 지파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남으로는 ‘스불론’ 및 ‘잇사갈’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으로는 ‘가나안’ 땅 그 자체의 한계를 이루고 있었으니 이 지파는 그 땅의 최북단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단의 기업(19:40-48). ‘단’은 ‘라헬’의 몸종 ‘빌하’에게서 난 ‘야곱’의 두 아들 중 첫 째 입니다(창 30:1-6). 이 지파의 지역은 ‘베냐민’ 지파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남북으로 볼 때 역시 ‘유다’와 ‘에브라임’의 중간 지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서쪽으로는 지중해 연안을 끼고 있으며, 남북으로는 ‘소렉’ 강으로부터 ‘욥바’ 맞은편의 ‘야르곤’까지를 포함하는 지역을 말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 지파가 차지한 지역에 대해서도 사방 경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고 다만 지역 내 일련의 도시들만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고 맙니다. 그리고 이 도시들 중 일부는 다른 지파들로부터 취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기도 합니다(참고: 41절 및 15:33).
그동안 다른 여섯 지파에 대한 무미건조한 기술과는 달리, ‘단’ 지파에 이르러 특별한 언급을 읽을 수 있습니다. 화자는 이들이 북쪽으로 그 영토를 확장하여 ‘레센’을 취하였으며, 이 승리 후에 이곳의 지명을 ‘단’으로 바꾸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19:47). 이러한 정보는 <사사기>에서 보다 상세하게 얻을 수 있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이곳에서는 그 강조점이 다릅니다. 즉 이 지파는 늘 ‘아모리’ 족속으로부터 끊임없이 괴로움을 당해왔으며, 한 때 이들의 위세에 밀려 산지로 쫓겨나 살기도 했습니다(삿 1:34-35). 그러나 본문에서 강조하고자 바는 그 뒤의 이야기, 즉 <사사기> 18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내용으로서 이들이 실지(失地)를 회복하였다는 내용입니다. 비록 이들이 한 때 두려움과 게으름 때문에 하나님의 선물을 제대로 누리지고 못하고 ‘가나안’의 이방 족속에게 눌려 살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그들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화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3. 결론
화자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지도자 ‘여호수아’를 잊지 않고 그의 몫을 나누어 주었다는 언급으로 본문의 결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땅을 나누는 일과 관련해서 그동안 의 주도권이 역전된 셈입니다. 즉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주도권을 쥐고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화자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성품, 즉 이타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일까요? 아니면 ‘여호수아’의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함일까요? 그 해답은 50 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백성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렇게 행했을 뿐입니다. 순종의 축복을 다시 한 번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즉 하나님은 개인이건 국가이건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축복을 내린다는 <신명기> 특유의 신학을 결론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51절은 제 2부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결론의 결론으로서, 14:1에서 언급했던 대원칙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요단’ 서편 땅을 나눔에 있어 그 모든 사역을 그 땅의 주인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정확하게 수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교훈과 적용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하나니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 이니라”(잠 12:2). 서구 사회에서도 일찍부터 이와 유사한 금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생기지 않는다.” 이 모두 성공이나 부귀의 비결에 대해서 인간의 오랜 지혜를 담은 교훈이자 충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충고는 동서고금을 불문하는 지극히 보편타당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만, 당장 이 충고에 가장 귀 기울여야 할 사람들은 ‘유다’나 ‘요셉’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지파들입니다. ‘여호수아’가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충고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들 지파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유다’나 ‘요셉’ 지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분열왕국 시대에 이르러 이들은 각기 남과 북의 두 왕조에 흡수된 이후 더 이상 역사의 무대에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는 처음부터 동일한 하나님의 약속을 바탕으로 출발했습니다. 땅도 각 지파의 대표들과 제사장과 ‘여호수아’의 참관 하에 제비뽑기를 통해서 공정하고 공평하게 나누어가졌습니다. 어느 누구도 불평하거나 원망할 소지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유다’와 ‘요셉’은 강성하게 되었고, 나머지 일곱 지파들은 그렇게 되지 못했을까? 그 유명한 소위 ‘야곱’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으로 ‘유다’와 ‘요셉’의 전형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앞 단락을 회고해보면, 이 두 지파는 상대적으로 강했고 용맹스러웠습니다.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17:14). 그래서인지 그들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분깃에 만족하지 못하고 ‘여호수아’에게 더 많은 땅을 달라고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이러한 요구에 대한 ‘여호수아’가 해준 충고는 “스스로 개척하고 싸워서 뺏으라”는 것이었습니다(17:14-18).
이 충고는 게으르고 유약한 이들 일곱 지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 일곱 지파가 이스라엘의 역사의 무대에서 크게 이름도 날리지도 못하고, 별 중요한 역할도 하지 못한 채 사라지게 된 것이 결국은 자신들의 게으름과 유약함 때문이었지 무슨 운명이나, 섭리나, 외부 환경 탓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입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이룸에 있어 ‘유다’와 ‘요셉’의 두 지파에 비해서 더디고, 소극적이었습니다. 본문의 핵심 주제도 여기에 있습니다.
화자는 도입부에서부터 일찌감치 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들 일곱 지파는 아직도 땅의 분배를 얻지도 못했다고 소개하고 있고(18:2), ‘여호수아’가 이들을 향해서 야단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18:3)
일곱 지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며, 그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이 단락에서도 여전히 동일한 모티브가 흐르고 있습니다. ‘유다’와 ‘요셉’ 지파가 당면했던 바로 그 문제이며, 따라서 그 해결책도 마찬가지 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비책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단’ 지파 이야기를 읽으면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단 자손의 지경이 더욱 확장되었으니(19:47상).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이어지는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센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음이라(19:47하)
‘여호수아’가 ‘유다’와 ‘요셉’에게 요구했던 바로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었습니다. <사사기>에 의하면, 이 지파 역시 게으르고 적들을 두려워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자기 경내에 살던 ‘블레셋’ 족속들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힘에 눌러 지내기도 했습니다만, 결국에는 그들과 싸워 이겨 그 땅을 다시 빼앗을 수 있었습니다. 동일한 메시지입니다. 즉 하나님의 선물은 그가 약속한 것이니까 인간의 편에서 가만히 있기만 해도 자동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담대한 개척 정신과 노력과 분투,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1:9)
계속해서 흐르고 있는 책의 모티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에는 반드시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지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1:8-9).
그러나 말씀에 대한 순종은 구체적인 적용을 함에 있어, 시대나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측면을 지니면서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 말씀에 대한 순종은 ‘회막’과 관련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이 백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말씀을 듣기 위하여, 그가 그 백성을 만나 주기로 지정해 준 장소에 나아오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회막은 ‘실로’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그 땅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실로에 있는 회막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왜 난데없이 ‘실로’이며, “회막”입니까? “회막”이라는 단어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회막”은 하나님과 그 백성이 만나는 곳이자,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리고 “회막”이 다른 곳이 아닌 ‘실로’, 즉 그 땅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언급은 본문의 화자 자신의 삶의 자리와 결코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화자가 처한 삶의 자리는 과연 어떠했을까? 이스라엘은 지금 국가적으로 큰 위기 즉 “분열과 와해”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국론은 분열되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하나의 공동체가 아니라, 열두 개의 공동체가 되어 지파별로 자신의 땅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차지하려고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고 있습니다. 왜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두려움과 게으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두려움과 게으름 때문에 대항해서 싸워야 할 외부의 적은 이웃에 방치해 둔 채, 공동체의 내적인 문제에 집착하면서, 급기야는 하나님의 땅을 놓고 갈등과 분쟁으로 치닫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론을 하나로 모으고 결속을 다지게 할 방안은 없을까?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의 공동체라는 자각을 갖게 할 방안은 없을까? 하나님이 계신 성전, 즉 “회막”으로 나아와 함께 예배를 드린다면 어떨까? 이것이 화자가 생각해 낸 해결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배 공동체입니다. 한 장소에 모여, 한 분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의 언어로, 하나의 노래로, 함께 예배를 드릴 때 그들은 진정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은 예수님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 온 것이기도 합니다. 일 년에 세 차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 예배드리기 위해서 세계 각 지역에서 흩어져 살던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행렬을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공동체를 위한 화자의 의도는 본문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이미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는 동일한 모티브들을 다시 한 번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예컨대, ‘레위’ 지파에 관한 언급이라든지, 대한 언급이라든지,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에 대한 언급들이 이에 속합니다(18:7). 일견 불필요한 반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이스라엘의 결속성을 강조할 때 더없이 좋은 소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 회막을 세웠다”(1절)는 이 한 마디가 모든 것을 말해주고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먼저 듣게 되는 말씀은 각 지파를 위한 약속의 말씀이 아니라, ‘여호수아’를 통한 질책의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 있으므로 더 이상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습니다만, 질책과 함께 주어지는 일련의 지시사항을 새롭게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이들은 각 지파마다 세 사람씩 선정하여 그 땅을 두루 다니면서 자신들이 살게 될 땅의 경계를 (책에) “그려오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이러한 지시가 율법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주제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이 단어는 여기서 무려 다섯 번이나 등장하고 있으며, 적어도 두 가지 점에 있어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첫째, 앞에서 다룬 바 있는 ‘이스라엘의 책임’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들 일곱 지파가 얻게 될 땅의 경계는 처음부터 자신들이 하기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 점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해두신 바 있습니다: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1:3). 그 땅은 분명 하나님의 선물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을 얼마만큼 넓고도 크게 차지하느냐는 순전히 자신들의 손에 달렸습니다. 이 점에 있어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의 결정자다”는 말이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도, 지도자 ‘여호수아’도, 각 지파의 족장들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미리 결정해 놓지 않았으며, 따라서 훗날 그 땅과 관련하여 무슨 책임을 질 일이나 비난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땅의 경계나 구획을 “제비뽑기”를 통해서 처음부터 공정하게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문서 기록은 말보다 더 구속력이 있고 오래 갑니다. 훗날 정치•사회적 상황이 변하여 지파 간 땅의 경계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을 때, 책의 기록은 그 모든 분쟁이나 애매모호함을 잠재울 수 있는 완벽한 중재자의 기능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 기록해 놓은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시대나 상황이 바뀔 때마다 지파 간 이기주의가 발동하여 땅의 경계를 놓고 싸우게 될 때 이러한 원칙이나 규정이 없으면 힘의 논리가 지배하게 마련입니다. 그 땅과 관련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할 때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본문에서 거듭 반복해서 등장하고 있는 단어, “그리다”와 관련한 두 번째 측면이기도 합니다.
다시 한 번 요약하자면, 성공의 비결은 실패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두려워하지 않고, 더욱 담대하게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의 인생을 개척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는 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말씀에 쫓아 살아가려는 각오와 헌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토의와 연습
1. 본문은 이전의 단락(15-17장)과 신학적으로 어떻게 연결되고 있습니까?
2. “땅의 경계를 책에 그려오라”는 여호수아의 지시가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 관점에서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 본문의 서론과 결론을 찾아보고, 이를 통해서 신학적 주제와 화자가 속한 정치•사회적 상황을 연상해 봅시다.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